※ 양반김님 그림 참고.
※ 13화 이후의 이야기 상상.
[아드버그] 운수 좋은 날
무슨 정신으로 공연을 봤는지 모르겠다.
나탈리에게 인사를 한 뒤, 아드리앙은 터덜터덜 걸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 앞에서 멈추더니, 침대 스프링이 풀썩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아드리앙의 몸이 그 위로 쓰러졌다.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는 아드리앙의 가슴 쪽에서 끄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꾸물꾸물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날 찌부러뜨릴 셈이었어?”
투덜거리는 플랙의 목소리에도 아드리앙은 말이 없었다.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엎어져 있는 아드리앙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플랙은 쯧쯧 혀를 찼다.
“또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네?”
하여간 이해할 수 없다니까. 그런 여자보단 치즈가 훨씬 좋은데. 옆에서 킬킬거리며 떠드는 플랙의 목소리가 거슬리는지 아드리앙은 살며시 제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한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말했다.
“시끄러, 플랙. 책상 위에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치즈 있으니까 그거나 먹고 있으라구.”
“오옷, 치즈~!!”
아드리앙이 말한 장소로 재빠르게 날아든 플랙이 상자를 열고 치즈 한 조각을 꺼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우물우물 치즈를 꿀꺽하는 플랙과 함께 다시금 방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무언가 고민하는지, 다시금 눈가를 찡그리던 아드리앙이 이내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하아, 긴 한숨소리가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나왔다. 어느새 치즈 한 통을 다 비우고,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던 플랙이 한 마디 했다.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오늘따라 유독 들떴잖아? 너. 변신 안하고 그 여자를 봤기 때문인가~?”
아드리앙은 아무 말도 없었다. 눈을 감고 작게 한숨쉬는 모습에서 정답을 읽었는지 플랙은 낄낄 웃으며 그가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 휘잉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아드리앙의 머리 위로 날아온 플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여간 신기하다니까. 블랙캣일 때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 그 모습일 때 만났다고 새삼 그렇게 충격받을 거 뭐 있어?”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란 말이지.”
블랙캣의 모습으로 그녀를 마주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곁에 있으면 심장이 떨렸고 눈짓 하나, 미소 한 자락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태연하게 굴 수 있었다. 아드리앙의 모습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더….
괜히 달아오르는 얼굴을 두 손을 들어 가렸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플랙의 비웃는 표정이 눈에 선히 그려지는 듯하다. 차가 멈추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그녀의 옆얼굴을 본 순간 모든 생각이 멎었다. 가녀려 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강인한 소녀,
나의 영웅.
백지장이 된 머리로 그저 멍하니 그녀를 내다보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꽤나 위급한 상황이었음에도 그 때는 그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 시간이 느릿하게 굴러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심장소리는 흐르는 물처럼 평안했다. 하지만 감정은 그렇지 못해서. 그녀와 서로 눈을 마주하는 순간 깨달았다.
세상에 운명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운명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역시, 운명이라니까.”
“또 그 운명 타령이야?”
“다시 한 번 만나고 깨달았어. 역시 난….”
벌떡 자리에 일어나 앉는 아드리앙을 보며 플랙이 넌지시 제안했다.
“그렇게 좋으면, 변신하지 않고 다가가도 좋지 않아?”
“…아냐. 그건 아닌 거 같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악당과 싸울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굳이 다가가는 민폐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혼자 싸우는 걸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고. 아니, 아니다. 이건 모두 변명일 뿐이야. 그냥, 두려웠다. 블랙캣으로서도 거절당하는데, 굳이 원래 모습으로까지 제게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사살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상냥했지만 그만큼 선이 확고했다. 블랙캣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 성격이 확연히 드러났다. 파트너로서 소중히 여겨준다는 것은 알지만 그 이상의 마음은 절대로 주지 않는다. 기대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퍽 잔인하다 싶다가도 희망고문이 아닌 것이 어딘가 싶기도 하지만,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포기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라.
“흐음, 모르지. 또 그 모습이면 꽤나 좋아할지도?”
“확실하지 않은 일에 굳이 모험하고 싶지 않아.”
한숨을 쉬며 두 팔을 옆으로 쫙 펼쳤다.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 새록새록 잔상처럼 떠오른다. 어쩌면 플랙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지금 괜한 걱정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었다.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그게 두렵다. 그저 블랙캣이라는 존재가 아닌, 진짜 ‘나’의 모습을 거절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블랙캣은 또 하나의 나 자신이었다. ‘아드리앙’으로서는 절대 보이지 못할 내 내면의 또 다른 모습. 블랙캣은 자유롭다.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장난스럽고, 매사에 솔직해질 수 있다.
현실에 꽁꽁 묶여 있는 나와는 다르게도.
낭만적인 시를 써서 사랑을 고백하고자 해도, 결국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건 어차피 전하지 못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멋진 미사여구를 떠올려도 그녀 앞에선 제대로 생각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사실 블랙캣의 모습으로도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이 심란해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원래 모습으로는 어떻겠는가.
블랙캣으로서만 그녀를 만나는 건 다름 아니다. 블랙캣의 모습을 하고서야, 나는 솔직하게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습다. 가면을 쓰고 있을 때만이, 그 어느 때보다 진실될 수 있다는 이런 모순이.
모르겠다. 아파지는 머리에 그는 조용히 생각을 거두었다. 그냥, 지금이 좋았다. 누구보다 가까이 그녀 옆에 있을 수 있는 이 순간이. 블랙캣일 때가 좋았다. 언젠가는 그녀 앞에서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는 걸 알지만, 아직은 묻어두고 싶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좋은걸.”
그저 눈을 마주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질 만큼.
* * *
이제 여름이 지나간 탓인지,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주홍빛으로 물든 구름들을 주변에 두고, 새빨갛게 물든 태양이 잠을 자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두워지려나.
아드리앙의 초록빛 눈동자에 져가는 노을이 가득 담겼다. 그는 지금 스케줄을 마치고, 자신을 데리러 올 차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촬영 장소는 공원이었다. 낮과 밤의 경계에 서 있는 공원 안에는 이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마저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나뒹구는 소리만 간간히 들려오는 공원의 분위기가 퍽 으스스했다.
왜 아직도 안 오나.
괜히 초조해지는 마음에 아드리앙은 가만히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다고, 불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방에 앉아서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플랙 녀석을 깨우기는 퍽 자존심이 상했다. 뻘쭘히 서 있다가 시간을 확인하게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시간이 꽤 늦어졌다는 것을 안 아드리앙의 눈썹이 살짝 까딱거렸다. 아무래도 전화를 해야….
응?
스치듯 지나가는 붉은빛을 잡아챈 녹빛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레이디버그?”
그저 한 순간의 중얼거림일 뿐이었다. 너무 소리가 컸던 걸까.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자신 쪽을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아드리앙은 그만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자꾸만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아드리앙은 하염없이 그녀를 두 눈에 담았다. 살짝 깜빡이면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동자로.
레이디버그도 말이 없었다. 엊그제 마주했을 때처럼, 놀랐는지 깜빡거리는 푸른빛 눈동자가 망연히 그를 쳐다보았다.
느릿하게 감아지는 테이프처럼 시간은 빠른 듯이 천천히 흘러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침묵 끝에 먼저 말을 건 것은 그녀 쪽이었다. 당황한 건 그쪽도 마찬가진지, 꽤나 당황한 목소리였다.
“어, 아. 그러니까. 아…, 드리앙인가?”
“…날 알아?”
“어? 아! 포스터, 붙은 거 봤거든! 그래서.”
웃으며 대꾸하는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그 때는 잔잔했던 심장이 요란하게 제 의사를 주장한다. 마치 나에게, 그녀가 어떤 의미인지를 각인시켜 주겠다는 것처럼.
이름을 기억해줬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결국 이 모습의 나는 그 정도의 존재인가 싶어 괜히 씁쓸해졌다. 평소랑 달리 말을 더듬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 싶기도 했지만, 이런 모습도 귀엽다는 생각이 드니 아무래도 중증인 듯 싶다.
말을 걸어볼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히어로 일…, 하러 가는 거야?”
“어? 으음, 아니. 막 끝났어. 이제 돌아가는 참이야.”
“그렇구나….”
내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 말하고 있으면서도 온통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까, 히어로 일을 끝냈다는 거지? 알았으면 나도 도우러 갔을 텐데. 혼자 처리하게 하면 안 되는데. 아,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말하자고 마음먹은 순간 꼬여버린 생각에 골머리를 앓았다. 자연스럽다는 게 뭐지? 나는 평소에 애들한테 어떤 식으로 말을 걸었더라?
“아, 그러니까. 그쪽은 여기서 뭐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찰나, 그녀가 하하 웃으며 말을 걸었다. 배려해주는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긴 얼마나 바보같아 보일까. 모처럼의 기회를 잡았음에도, 제대로 이야기조차 나누지 못하는 제 자신이 너무도 답답했다. 블랙캣으로서 매번 만나고, 소소한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인데 왜 지금은 그게 안 될까.
“아, 나는…. 차를, 기다리고 있었달까, 하하하.”
“그래? 그 대형 리무진?”
“그걸 어떻게?”
“…아, 하하. 어쩌다 보니.”
뭔가 얼버무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착각인가? 착각이겠지. 그녀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학교에도 자주 나타났었으니 제가 하교하는 모습을 봤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 하나에 설레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아드리앙은 슬쩍 웃었다.
“지금쯤이면 와야 하는데, 아직 안 오네.”
“…같이 기다려줄까?”
“어?”
“어 아니. 왜, 시민을 지키는 게 히어로의 일이잖아? 이미 상황을 알았는데, 여기 너 혼자 두고 가기도 좀 그렇고…. 부, 부담스럽다면 그냥 갈게.”
“…고마워. 하지만 집에 가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응?”
“위험하잖아.”
띠띠 울리기 시작하는 귀걸이를 손으로 가리키자, 그제서야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눈을 깜빡거렸다. 그럼에도 힐끗 제 쪽을 바라보는 게 걱정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붙잡고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길 원하지 않았다. 본래의 그녀에게도 자신의 삶이 있을 것인데.
…사실은 그냥 곁에 있어달라고 하고 싶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답답하다. 블랙캣이었다면 분명 조금만 더 같이 있어달라고 떼를 썼을 텐데. 하긴, 그 모습이었다면 그녀는 제게 같이 기다려주겠단 소리조차 하지 않았겠지.
“그럼, 미안한데 이만 가볼게!”
“잠깐만!!”
뒤돌아서려는 그녀를 급하게 불렀다. 뭐냐는 듯이 뒤돌아보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노을빛을 받아 옅게 부서졌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기, 난….”
너를 좋아해.
그 말 한 마디가 설마 그렇게 힘들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딱딱해진 혓바닥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깊숙이 묻어두었던 제 마음은 결코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말하고 싶은데, 정말로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었다.
대답을 듣기가 무서워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다. 당장 얼마 전에도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의 모습을 한 악당이 되어 나타난 적도 있었고. 그 때도 그녀는 그의 마음을 감사히 여겼지만, 그저 그 뿐이었다. 그녀가 그를 거절한 것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게 자신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자신이 지금 고백하면 어떨까. 몇 번 마주치지도 않고, 대화도 해보지 않은 상대에게서 받는 고백이라니. 과연 진심이라고 받아들여줄까? 그냥 동경이라고만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아드리앙은 살며시 고개를 내저으며 힘없이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싫어. 그러니까, 말할 수 없어.
“…그냥, 고맙다고. 늘 우리를 지켜줘서 고마워. 레이디버그.”
“어, 응.”
“그런 네가…, 좋아.”
이 정도는 괜찮을까. 친구에게 말하듯,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애썼다. 말하고 보니 대담한 짓을 했나 싶어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어딘지 후련했다. 날이 지고 있어 다행이다. 노을빛에 제 얼굴을 가려주겠지. 시선을 떼는 것이 아까워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았다. 쿵쿵 울리는 심장소리가 온 몸으로 메아리친다. 그와는 별개로 쓰려오는 가슴에 세게 움켜쥔 손 안의 핸드폰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긴장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숨죽여 대답을 기다렸다.
“어?! 어. 그, 그렇지!”
화들짝 놀라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왠지 낯설다. 블랙캣일 때 봤던 그녀는 언제나 여유롭고 당당했는데. 어째서일까. 작은 의문이 싹틀 찰나에, 레이디버그는 자신을 보고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미소에 심장이 철렁했다.
“난 진짜 가볼게!”
안녕.
그 말과 함께, 레이디버그는 바람처럼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계속 지켜보다가 소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하, 하하하. 조금씩 소리내어 웃다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하늘로 향한 채 마음껏 웃던 소년의 웃음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다가 하-. 긴 한숨을 뱉어내던 소년의 얼굴이 푹 숙여진 고개와 같이 감춰졌다. 새빨개진 귓불이 그의 상태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떠나간 상대를 그리며, 소년은 살며시 입을 열어-,
“사랑해.”
-닿지 못한 한 마디를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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