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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림] 이름

고스트메신저 2014. 8. 24. 23:47

※ 비노님 용강림이 썰.



[투림] 이름






초록빛으로 물들었던 숲이, 밤의 장막 아래에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다. 저 높은 창공에 달린 작은 초승달과, 그 주변에 흩뿌려진 새하얀 별들이 은은히 빛을 내리비춘다. 그래도 여전히 어두운 숲의 사이를 어스름하게 비추는 건, 점점이 빛나는 작은 생명체들. 허공에 연두빛으로 점을 찍은 듯 반짝이는 반딧불이들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림자의 주인은 이제 갓 10살을 넘겼을 법한 작은 소년이었다. 풀뿌리와 나뭇가지들을 잘근잘근 밟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 사이로 퍼져나간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바람소리가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간다. 무서울 법도 하건만 정작 아이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자세히 보니 아이는 무언가를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달려가는 아이의 적갈색 눈동자에 비춰지는 것은, 새하얗게 타오르는 빛의 기둥이었다. 어두운 숲 한가운데서 선명하게 위로 뻗어진 빛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이렇게 흥분한 건 처음 봐.’


아이의 앞에서, 파르르 떨며 날아가는 나비들이 푸르게 빛난다. 행여 놓칠세라 바삐 움직이던 아이는 어느 새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수풀을 확 제끼자,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사람 같아 보였다. 빛의 중심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 폭이 넓은 겉옷을 입고 가볍게 서성이는 남자의 머리카락은 새까맣고, 눈동자는 짙푸르게 빛났다. 그가 팔을 뻗자 나비들은 조용히 그의 손끝이나 어깨,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살며시 미소짓고 있는 얼굴이 너무나도 편안해 보인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아이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았다.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나비들은 그에게서 떨어져 세차게 날아올랐다. 떠나지 않고, 그의 주변을 회오리처럼 휘감은 나비들에서 찬연히 쏟아져 나오는 빛에 눈이 부셨다. 숲의 빛기둥은 이 나비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이었던가. 마치 빛이 그를 낳은 것처럼 신비하고 오묘한 광경. 그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너는, 누구지?”



*


“아저씨!”


쪼르르 달려오는 아이의 얼굴이 밝다. 남자는 손을 뻗어 제 앞으로 달려오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숲에서는 조심히 뛰어다니라고 했건만, 언제나와 같이 있는 힘껏 뛰어오는 건 여전하다. 혼을 내려고 해도, 저를 빨리 보고 싶어서 달려왔다고 말하는 아이를 어찌 더 꾸짖겠는가. 저를 올려다보는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귀여워, 남자는 피식 웃었다.


아이와 만난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잠시 산책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나게 된 작은 생명. 인간의 나이로도 무척 어릴 터인데, 겁도 없이 이 밤에 숲으로 들어온 것도 그렇지만,


- 너는 누구지?

- 그러는 아저씨는 누구예요?


제가 무섭지도 않은지 당돌하게 이름을 묻는다.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저 변덕이었다. 인간과는 어지간해선 얽히지 않으려고 했고 얽혀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잘 알면서도, 저는 아이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이 정도쯤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이는 계속해서 남자를 찾아왔다. 심지어는 밤늦게까지 있었던 적도 많아서, 그럴 때는 아침까지 머물다 돌아가야만 했다. 낮의 숲도 위험하지만, 밤은 더 위험하니까. 이 숲은 울창하고 넓어서 자칫 길을 잃으면 다시 돌아가기도 힘들다. 아무렇지 않게 여기로 걸음하는 아이에게 남자가 위험하다 만류할 때, 아이는 길을 가르쳐주는 이들이 있어 괜찮다고 했다. 누구냐고 묻자, 주변에 날아다니는 영혼들을 손으로 가리킨다. 아이는 영혼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놀라는 남자에게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여기가 더 안전한걸.”


더 이상 남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찾아올 때마다 환하게 웃는 얼굴과 대조되게, 아이의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망토로 가린다고 가렸지만, 낡은 천들이 펄럭일 때마다 드러나는 가느다란 팔다리. 거기에 찍혀 있는 시퍼런 멍자국들과 까진 상처들이 아이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남들과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은, 그 능력 자체만으로도 배척받는 법. 인간과 얽히면 피곤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들과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하는 그 천성 때문이어라. 자신들이 그저 옳다고 믿는다. 그들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를 핍박한다. 상대가 누구든, 그게 설령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어린 아이일지라도.


“아이야.”

“왜?”


여기 그만 와야 해. 위험하니까.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말하고자 했지만, 끝내 하지 못했던 한 마디. ‘오지 말라.’ 는. 그냥 손을 뻗어 아이를 품에 안았다. 밤의 공기는 추웠다. 모닥불이 있지만 아이가 추워할까 걱정되었다. 저는 그런 거에 꿈쩍하지 않지만, 인간은 자신보다 연약한 존재니까.


“아저씨.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


제게 기댄 아이가 나지막히 읊조렸다. 무얼 물을까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이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이의 눈동자에 타오르는 모닥불이 가득 담겼다. 무덤덤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름이 뭐야?


“전에 물어봤지만 말해주지 않았잖아.”

“…이름 같은 건 없어.”


여기서 태어났을 때,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조차 그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알려주는 이도 없었고 알지도 못하였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아이가 보고 있는 모습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진짜 모습을 말하지 못하는 건, 아이가 알면 분명히 놀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크고 단단하고, 몸은 차가운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 있다고 말하면 무서워할까? 인간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두려워하니까. 아이가 그런 인간들과 다르고, 그렇게 그를 피하지 않을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다.


혹시나 무서워할까, 저를 피하게 될까 걱정이 돼서.


“이름이 없는 거야?”

“그래.”

“내 이름은 강림이야.”


아이가 태연하게 응수한다.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들어 불길 속으로 던져넣는다. 타닥타닥,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한층 더 밝아진다.


“아저씨.”

“왜.”

“그럼, 내 이름을 줄까?”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면서 저를 올려다본다. 말갛게 짓는 웃음이 아이답고 순수하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미동 없이 잔잔하고 깊어서, 그 너머가 짐작가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아이가 그에 대해 전부 눈치채고 있는 건 아닐까, 남자는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응.”

“그럼, 아저씨 이름도 지금부터 강림이네. 같은 이름이다!”


환하게 짓는 미소가 눈이 부시다. 그래서 눈이 아프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숲의 생활은 그렇게 지루하진 않았다. 오랜 시간 이 곳에서 지내왔지만, 제게 숲은 언제나 새로운 곳이었고 구경할 것들이 넘쳐났다. 풀잎 하나를 관찰하는 것만 해도 하루는 훌쩍 지나갔다. 인간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그들과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혼자라는 것에 딱히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혼자가 외로운 것이라는 걸 아이에게서 배웠다. 처음에는 그저 외로워하는 아이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이젠 아이가 오지 않는다면 제가 더 아플 것만 같았다. 전에도 나쁜 건 아니었지만 요새는 하루하루가 기다려졌다. 누군가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들뜨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릴 때도 많았다. 이제 아이가 없는 생활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툭, 아이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잠든 것 같았다. 제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작은 온기를 끌어안고, 남자는 눈을 감았다.



-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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