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c="https://code.jquery.com/jquery-1.12.4.min.js" integrity="sha256-ZosEbRLbNQzLpnKIkEdrPv7lOy9C27hHQ+Xp8a4MxAQ=" crossorigin="anonymous">

※ 시드사운드의 [조각나비] 라는 곡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이 곡 좋아요^~^

※ 꼬강이 위주 독백입니다.




[투림] 조각나비


WRITTEN BY. 리네







살랑 부는 바람이 눈가에 스치운다.


비가 개인 직후라, 유난히 맑은 하늘 위에는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살포시 걸려 있었다. 조물주가 붓으로 그려놓은 듯이 푸르고 넓은 들판의 흙은 축축하게 젖어서 질척거렸고, 잎사귀 끝에 매달려 있던 작은 물방울들이 바닥을 향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사방이 적막했다. 숲에선 흔하다던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들판을 지배했다. 들리는 거라곤 오직 바람이 잎사귀를 세차게 훑고 지나가는 그 소리 하나뿐.


아무도 없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는 누군가 서 있었다. 이제 막 중학생쯤 되었을까, 어린 티를 벗어가는 작은 소년이 하늘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저 위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데도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길을 천천히 되짚어보는 듯한 시선이 못내 처연하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소년이 이내 다시 입을 다문다.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구나.’




아득히 먼 날도 어젯밤 꿈처럼

추억의 물결을 따라 흘러와




아니, 사실 그렇게 오래 지난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1년 남짓 지났을까.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떠오르는 수많은 기억들이 저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른거리는 장면들이 제 머릿속을 채우고 그 날의 감정들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잊겠다고 결심했고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인데. 




아른거리는 그 날의 풍경은

모든 걸 주고 그린 그리움




이 곳에는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 맹세했었다. 마지막을 기억하게 만드는 장소 따위에 오고 싶지 않았으니까. 미친 듯이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을 수 없는 존재의 흔적을 되짚어 보는 건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좋은 추억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울 뿐이어서, 행복한 꿈을 꾸다가도 깨어났을 때 남는 건 고통뿐이어서. 그래서 모든 걸 잊고 싶었고 잊어가고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 다시 여기에 오게 된 걸까. 그냥 평소와 같이 집으로 가려고 학교를 나섰을 뿐이었는데. 마침 비가 왔을 뿐이었는데.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쓰고 있던 우산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제 손에 없었다. 도착하기 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정신없이 달렸을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개어 있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온통 푸른빛.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 풀밭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한참을 걸어 어느 한 지점에 섰을 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아- 여기다.


내가 당신을 떠나보낸 자리가.




비 개인 하늘로 비단결 날개가

돌아보지 않고 떠나간 자리




엄밀히 말하면 떠나보낸 건 아니었다. 그저, 보지 못할 뿐. ‘그 날’ 이후로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귀찮게 따라붙던 영충들도 귀신도, 저승사자였던 당신의 모습조차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사무실에 찾아가 보았지만 이미 매각된 장소라는 문구만이 눈에 처절하게 박혔다. 당신의 흔적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타들어가는 이 아픔 끝에는

상처가 되어 남은 그리움




당신은 언젠가 나를 떠나겠다고 했었다. 저승사자와 인간은 함께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속한 세계가 다르다고. 그러면 나는 늘 볼을 부풀리며 화를 내곤 했었다. 내가 누구랑 같이 있는가를 정하는 건 내 마음이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얼굴이 떠오른다. 안개 속에 감춰진 것처럼 뿌옇기만 하던 당신의 얼굴이 왜 여기 와서는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기억하느니만 못하다. 차라리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이리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스러울 바에는.




버려진 마음 깨져버린 조각을 모아

소리 없이 노래 하는데




헤어짐이 올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다. 삶과 죽음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게 그렇게 급작스러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당신을 보내던 날에는, 비가 왔었다.


근래에 드물던 폭우였다. 축축하게 물드는 습기와 더불어 짙은 음기가 사방을 지배했던 날. 힘을 얻고 날뛰는 수많은 악령들을 제령하기 위해 당신은 목숨을 걸었고, 죽을 위험에 처했었다. 당신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았고,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내 영력을 모두 쏟아부어도 모자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이 정말로 살기를 바랬으니까.


비가 개이자마자 당신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때는 그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살아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왜 그리 무거웠는지. 무엇에도 쫓기지 않으면서 쫓기는 것처럼 발걸음이 점점 급해졌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만큼 순식간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던 저승의 존재들이 지우개로 싹 지워버린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공포를 느꼈다. 처절하게 깨달았다. 당신과의 교차점이 사라져 버렸구나.


이제 나랑 당신은, 정말 안녕이구나.




귀 먼 나비도 이제 떠나갔다고

눈가를 스치는 바람




나비는 영혼을 상징한다고 한다. 당신이 화려하고 강해 보이지만 비에 한없이 약한 나비는 정말이지 당신과 닮아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스스로 조각내버린 당신의 모습을, 추억을 하나하나 끼워맞춰가다 보니 문득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짊어지고 가던 상여꾼들이 노래를 불렀어.’

‘헤에, 내가 본 장례식에선 안 부르던데?’

‘지금이야 상여 대신 차를 사용하니까 그렇지. 그 때는 대부분 무덤까지 먼 길을 가야 했으니까. 지금이야 장의사에 영구차까지 다 있는데 한가롭게 노래 부를 틈이 어딨냐?’

‘그런가?’

‘가는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서기도 하고.’



평소와 달리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던 찰나의 추억. 당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여전히 저승사자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혹시 이 근처에 있을까.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도 내 곁에 머물러 있을까. 여전히 맑게 개인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눈이 아팠다.


심호흡을 했다.




가만히 쉬어 가던 나비를

가녀린 그를 위해 부르던 노래




올린 고개가 슬슬 아파왔지만 내릴 수가 없었다. 그 한 순간에 당신의 모습이 스쳐 지나갈까봐. 부질없는 희망이라고 해도 버릴 수가 없는 이 마음이 서글프다. 천천히 입을 열어 무언가를 내뱉으려 했지만 차가운 숨소리만이 고요히 허공을 범람할 뿐이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입술을 움직였다. 짜디짠 눈물이 혀끝으로 번져간다. 말 한 마디 내뱉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건 노래니까. 이미 떠나간 너를 위해 부르는 무언(無言)의 노래. 들리지 않을 것임에도 계속 부르는 이유는,


네가 그리워서라.


아마 나는 당신이 계속 그리울 거야.




듣지 못하는 이를 위해 들리지 않는 노래 부르네

아득히 먼 날 꿈보다 짧았던 그 날….




인생에서 극히 짧을 그 순간들이 나는 너무나 그리울 것이라서.


설령 듣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이렇게 아파하는 나를 몰라도 돼. 하지만,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부디 당신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그리운 존재로 남아 있기를. 나를 쉽게 잊어버리지는 말아줘. 울컥 쏟아지는 마음이 계속해서 눈물을 뿌렸다. 갑자기 한심해졌다. 당신을 본 마지막 장소라는 이유만으로 이리도 미련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다가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에, 눈을 크게 떴다.


하늘을 물들인 고운 무지개 너머로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푸른 무언가를 본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금세 맑아진 시야에는 여전히 세간에서 말할 법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여전히 태양과 구름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하늘. 헛것을 본 것일까.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방 사라진 그 순간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고.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기다린다.








===


간단히 설명을 들어가겠습니다. 간만에 본진으로 돌아왔네요!


꼬강이가 화자고 강림이가 나비. 사실 조각나비의 가사가 많이 몽환적인데 저는 나비란 노래 부르는 사람이 기다리는 존재인 것과 동시에 그와의 추억이 아닌가 싶었거든요. 추억=그 의 개념이랄까? 그래서 쓰면서도 도입을 해 보았습니다 ㅇㅇ!


중간에 노래 가사를 좀 삽입했어요. 기울기가 되어 있는 대사들이 노래 가사입니다! 실제 가사에선 화자가 울지 않고 그냥 웃는데 꼬강이는 성격상 좀 울 거 같아서 그냥 울렸습니다^ㅁ^..


중간에 보시면 알겠지만 강림이랑 꼬강이는 물론 둘 다 살아 있습니다.(한놈은 저승사자지만) 다만 꼬강이가 영력이 없어져서 더 이상 강림이를 만나지 못하는 걸로 설정을...^^


고메느낌 나는 노래라고 해서 들어봤는데 오 좋더라구요! 여러분도 들어보세요 좋습니다>_<

노래를 영업해주신 리야님께 감사를+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I.R.E
,

※ 주의사항:

BL입니다. 별 거 없음 주의!

현대 AU인데, 살짝 원조교제 느낌이 나긴 합니다. 싫어하시는 분들께서는 조용히 뒤로가기를.

수위는 전혀 없습니다 ㅇㅇ 맹세할 수 있어요. 다만 꽤 다크한 분위기입니다.








[사라강림] 불청객





비가 내린다.


저는 비오는 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는 낭만이 있어 좋다지만 최소한 저에게는 그랬다. 칙칙하게 잿빛으로 물드는 하늘도, 길을 걸어갈 때마다 커다랗게 고여 있는 웅덩이들에 발을 멈칫하게 되는 상황도 달갑지 않았을 뿐더러, 눅눅하게 제 몸에 들러붙는 습기도, 우산을 쓰고 있어도 찬바람을 타고 제 옷을 습격하는 빗물도, 아무리 조심해도 축축하게 제 구두 위로 튀어오르는 탁한 물자락들도 정말이지 제 취향은 아니었다.


그 날은 하루종일 비가 왔던,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하루였다. 


퇴근 시간이 되도록 멎지 않는 빗줄기에 저절로 입가에 욕이 번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물론 아침처럼 쏟아지는 비에 제 옷을 버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쏟아지는 폼새를 보아 역시 우산을 쓰고 가야 할 것 같았다. 쯧, 귀찮게. 속으로 혀를 차며 적당히 하던 일을 마무리짓고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 손에는 서류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밝은 건물에서 어두운 거리로 발을 내딛었다.


제가 사는 곳은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였다. 걸어서 20분 정도면 그래도 꽤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 화려하게 불빛이 반짝이는 번화가를 지나가다 문득 모퉁이를 돌면, 불빛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한 10분 정도를 걸어가다보면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그 모습을 드러내겠지.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우산을 잡고 있는 제 손등에 자꾸만 달라붙는다. 계속해서 나오는 웅덩이를 피해가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기던 바로 그 때였다.



'저건…?'



이미 불빛이 꺼진 깜깜한 건물의 계단 쪽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뭐지? 저도 모르게 우뚝 발걸음을 멈춰섰다. 평소였다면 그러든 말든 그냥 무시하고 갔겠지만 무슨 변덕이 든 걸까. 발걸음을 천천히 그쪽으로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제가 발견한 녀석이 꽤 어리다는 것을 알아챘다. 명찰이 박힌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는 물론이요, 옆으로 맨 가방까지. 많이 봐준다 해도 고등학생 정도일까.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보이지 않는 얼굴 대신, 물기를 머금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소년은 생각보다 꽤 젖은 상태였다. 아무리 처마가 있다지만 비가 들이치지 않을 리도 없었고, 옷이 꽤나 푹 젖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이 퍽이나 기이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계단께에 미동 없이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괴담에 나오는 무슨 귀신마냥 흉흉해 보였다. 이 날씨에 우산도 없이, 왜 이런 곳에 죽은 듯 앉아 있는 걸까. 설마 진짜 죽은 건 아니겠지?



"꼬맹이는 벌써 집에 들어갔어야 하는 시간 아닌가?"



툭 말을 던지자 그제서야 소년이 고개를 든다. 예상대로 꽤 어린 얼굴. 선이 가늘지만 꽤 남자다운 얼굴은 소년이라 보긴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청년도 아니었다. 성장기라 그런 것일까. 그는 남자를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을 하더니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연다. 변성기가 오는지 조금 탁하게 가라앉은 미성이 빗줄기에 섞여 들려온다.



"가출 중."



표정이 없던 얼굴에 씨익 웃음이 들어찬다. 어른에게 하는 대답치고는 상당히 건방져 보이는 언사에도 남자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경계하는 검은색 눈동자가 남자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번드르르한 양복을 입고서 은발을 말끔히 빗어넘긴 얼굴은 딱 보기에도 굉장한 미형이었지만, 감정이 보이지 않는 보랏빛 눈동자는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하다.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길에 남자는 짜증스레 말을 뱉었다.



"그걸 자랑이라고 입 밖에 내뱉냐, 당장 집으로 꺼져."



정말 얼굴과 매치되지 않는 격한 목소리였다. 소년은 재미있다는 듯이 그를 마주했다. 



"우와, 아저씨. 성깔 있네."

"이런 곳에서 청승맞게 비나 맞으면서 헤헤 웃는 놈한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은데. 그리고 존대 써라."

"예, 예. 아, 그리고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야."

"…."

"돌아갈 수 있으면 진작 돌아갔지, 여기서 이렇게 청승떨고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눈빛을 보면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걸 알아챘는지 남자는 다시 침묵을 고수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년이었다. 장난스레 말하고는 있지만 그를 똑바로 마주하는 검은색 눈동자가 살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아저씨, 그런데."

"…?"

"혹시 혼자 살아?"

"그렇다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한쪽 눈가를 살며시 찡그렸다. 제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귀찮다는 듯이 우산을 들고서 저를 쳐다보는 남자를 쳐다보는 소년의 얼굴이 능청스레 웃고 있었다. 그럼,



"나 좀, 주워가주면 안 될까."




*  *  *



"우와…."



방 안을 둘러보면서 소년이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이미 방에 들어가 양복을 갈아입고 나온 남자가 소년에게 티셔츠와 반바지를 던져주었다. 소년은 그걸 주섬주섬 들고 그가 지정해준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고 나왔다. 이 날씨에 입기에는 조금 추운 옷차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지만 사실 소년은 남자보다 훨씬 키가 클 뿐만 아니라 팔다리도 긴 편이었다. 어지간한 옷은 맞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신기하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소년을 향해 남자가 물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하지?"

"응? 아니, 그냥. 놀라서."

"뭐가."



여전히 반말을 쓰는 소년의 모습에, 남자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딱히 제재하지는 않았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 탓이었다.



"내가 데려와달라고 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데려와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



아니, 애시당초 이런 애송이를 집에 들인 것부터가 제일 귀찮은 짓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싫으면 나가든지. 난 상관없어."

"아니, 누가 싫대? 그냥 신기하다고."



그냥, 믿겨지지 않을 뿐이야. 그 말만 하고서 맞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만 하던 소년에게 남자가 다시 물었다.



"너, 이름이 뭐지?"

"그건 왜 물어?"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집에 들이는 건 위험하지. 일단 그 정도는 알아둬야 하지 않겠어?"

"이미 들인 주제에 말은…."

"그래서, 이름은."

"…강림."



강림이라, 저승사자의 이름인가. 그 이상 감흥이 들지 않았는지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강림이 들어갔다 나온 방을 가리켰다.



"저 방을 써라. 거실을 돌아다니든 말든 상관없지만 정말 무슨 일이 없는 이상 내 방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마. 내가 있을 때는 더더욱. 난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니까. 음식은 적당히 냉장고에 있는 반찬이랑 밥솥에 밥이 있으니까 그걸 챙겨먹고, 나가든 여기 있든 상관은 안 하지만 나갈 거면 문을 잠그고 나가. 열쇠는 저 화분 밑에 있으니까 그걸로 잠그고 문틈 사이로 집어넣어 놔. 퇴근하자마자 도둑이 들어 난장판이 된 집이랑 마주하긴 싫으니까."

"열쇠까지 알려주네. 혹시 내가 도둑질을 하면 어쩌려고?"

"해봐."

"…?"

"하는 즉시 내 모든 인맥을 총 동원해서라도 네 놈을 찾아 지옥으로 보내줄 테니까."

"히익."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보랏빛 눈동자는 지극히 살벌했다. 분위기를 파악하고 합 입을 다문 소년을 쳐다보며,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알아서 있다가, 알아서 나가라."



그 이상은 귀찮다는 듯이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려는 남자를 강림이 불러세웠다. 저기, 잠깐만.



"그런데, 그쪽 이름은 뭐야?"

"사라."



그렇게만 답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라의 뒷모습을 강림은 한참 동안 서서 계속 쳐다보았다. 이름을 몇 번이고 입 속에서 굴려보았다. 사라, 사라라.



"이름은 예쁘네. 가진 사람 성질이 더러워서 문제지."



작게 투덜거리던 강림이 제 머리를 긁적거렸다. 뻘쭘하게 잠시 서 있던 그가 뒤를 돌아 사라가 지정해준, 그의 방에서 정확히 맞은 편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뚜벅뚜벅 울리던 발소리가 멈추고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찰나에, 다시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점점 깊어가는 밤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서로 다른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


사라는 디자인 회사 팀장이고 상당히 잘 나가는 엘리트. 강림이는 나온 대로 고등학생입니다. 아마 동거해도 사라가 강림이한테 손댈 리도 없고 강림이가 사라한테 그렇게까지 관심을 둘 리도 없을 겁니다 ㅇㅇ 근데 뒤를 쓴다면 그 동거의 감정선을 느릿느릿하고 감성 있게 다루지 않을까요 마치 화양연화처럼...ㅋㅋㅋㅋㅋ

Posted by I.R.E
,

※ 리라(J VINO)님의 회지 'Say goodbye goodday goodbye'를 보고 쓴 조각글이에요.

스포가 아주아주 많습니다. 회지를 읽지 않으셨다면 내용 이해가 안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라+강림] 한여름 밤의 꿈




'그래도 소중히 다뤄, 바보령.'



말 안 해도 그럴 거다.


사무실을 나오자 벌써 날이 깜깜해졌다. 가로등이 줄세워진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던 남자가 제 한쪽 손을 위로 쭉 뻗었다. 손에 꼭 쥐어져 있는 자그마한 유리병이 주홍색의 불빛을 받아 슬며시 속을 내보였다. 연분홍빛 꽃잎 한 자락. 무심한 얼굴로 병을 쳐다보는 얼굴과는 달리, 그는 깨질세라 살며시 병을 그러잡고 있었다.



"너, 여기 있냐."



살랑, 흔들어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잠잠하다. 그러다가 픽 웃고 말았다. 고작 꽃잎 하나가 무엇이라고. 제게 답을 줄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바라고 만다. 네가 조금이라도 남겨둔 것이 없을까 하고. 꼬마 녀석한테까지 찾아가 봤지만 결국 얻어낸 것은 없었다.



"내가 널 깨워낸 건가."



모든 영혼은 순환한다.

이전의 삶에 대한 미련, 원한, 부정한 것들은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삶을 받아 다시 또 살아간다.


처음으로 네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이미 모든 미련을 버렸다고 했다.

너의 영혼과 기억을 붙잡았던 미련이 나였다는 사실은 우습게도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서로의 마음이 같았다고는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이니까. 이미 새로운 삶을 시작한 너는 내 손에 닿을 존재가 아니다. 닿아서도 안된다.


덧그려진 미련은 여전히 제 안에 온연히 남아 있다. 그러나 지우지는 못한다. 깨닫고는 실소한다. 순리대로 사라졌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런 존재에 미련을 둔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결국 버리지를 못해서.



"역시 넌 나쁜 놈이야."



사라지지 못한 이유가 그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니, 이건 대체 무슨 악취미일까. 한숨을 쉬었다. 불만스레 제 손에 있는 병을 쳐다보았다. 이게 녀석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괜스레 원망스러워진다. 이 미련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언제쯤이면 너처럼, 나도 이 모든 것의 굴레를 벗어버리는 게 가능해질까?


문득 환생했던 너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외양은 같았지만 성격은 달라도 한참 다른 소년이었다. 처음에는 마냥 닮은 얼굴에 희망을 가지고 너를 붙잡았지만, 까칠스레 앳된 얼굴이 불평스레 저를 쳐다보는 순간 깨달았다. 입을 열어 제게 말을 걸었을 때 그것은 확신으로 다가왔다.


이 아이는 네가 아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다. 잔인할 정도의 현실이 해일처럼 내리덮친다.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 환생의 조건. 사라져버린 기억과 함께 너라는 존재는 이미 떠나버린 것이다.


나를 내버려두고.



"…한 때의 꿈인가." 



꿈이라도 다시 예전의 너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여전히 너를 잊지 못하는 나를 찾아, 너는 잠들기 위해 나를 찾아온 거냐. 영원한 안식을 취하기 위해서. 그 대가로 내게 덧없는 그리움을 선사한 건가.


가만히 손가락을 접어 병을 다시 움켜쥐었다.



"…사라."



네 바람대로,

나는 아직도 너를 기억한다.



*



꿈결 속에서 오랜만에 너를 보았다.

꽃밭 가운데서 가만히 웃고 있던 네가 입을 열어 무어라고 대답하더라.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가지 말라고 무심결에 손을 뻗었던 나의 모습은 기억이 난다.


일어나고 나서는 그저 멍했다. 먹먹해지는 가슴에 제 심장 부근에 손을 대었다.

꿈은 행복했다. 그래서 그리웠다.

절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너를 잊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앞으로도-.



머리맡에 놓아둔 유리병이 햇빛을 받아 조용히 반짝거렸다.




- fin.



===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하룻밤의 꿈처럼 흘러가버린 사라와 강림의 짧은 재회를 생각하고 지어봤어요:)

Posted by I.R.E
,

※ 고스트메신저 배포전 [강건너 림구경2]에서 낸 배포본입니다.

A5 용지로 26페이지 정도.



[고스트메신저x가디언즈]

[잭꼬강강림]

<눈꽃 내리는 날에>


Written by. 리네



1. Snowflake



누군가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뒷마당 쪽에서, 벽에 기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는 아이가. 쪼그려 앉아 무릎을 감싸 안고 있는 아이의 몸집은 작았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얼굴이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지 입속으로 끅끅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조용히 아무도 모를 제 아픔을 연신 게워내던 아이가, 갑작스레 얼굴에 달라붙은 차가운 기운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빼꼼히 눈만 들어 제 앞을 바라보는 적갈색 눈동자가 연신 깜빡거렸다.



“눈…?”



설탕가루처럼 보풀보풀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가 천천히 소년의 주변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고사리같은 손을 살짝 뻗어내자, 작은 하얀빛이 손끝에 닿았다가 금세 사라졌다. 잿빛 바탕에 하얀 점들이 하늘하늘 찍혀간다. 제법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올 날씨는 아닌데. 의아한 마음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던 아이는 놀라 숨이 멎었다.


공중에 떠서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있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에 파란색 눈동자, 저보다 조금은 나이가 많을 법한 소년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게 뻗은 나무 지팡이를 한 손에 들고 있는데, 눈은 지팡이 끝에서 내리고 있었다. 신기한 광경에 저절로 눈동자를 굴리는 아이를 보며, 그가 놀란 듯이 웃었다.



“너, 내가 보여?”

“누구…?”



이미 울음은 뚝 멎어 있었다. 그저 놀란 채, 눈물범벅인 얼굴로 아이는 간신히 입을 떼어 말을 걸었다.


소년이 빙그레 웃었다.



“내 이름은 잭 프로스트.”



날 볼 수 있는 아이가 있었다니. 그렇게 말하며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려고 한 순간, 그의 손바닥 위에서 피어나오는 커다란 눈결정에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가락 끝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꽃을 넋놓고 바라보던 아이가 소년에게 물었다.



“너, 귀신이야?”

“귀신? 그거랑은 좀 다른데. 난 가디언이야.”

“가디언? 그게 뭔데?”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이에게 소년이 씨익 웃어주었다.



“아이들을 수호하는 존재야.”





2. Resemblance



“대체, 어디에서 왔어?”



아이가 물었다. 질문과 동시에 날아오는 눈뭉치를 잭은 훌쩍 뛰어 가볍게 피했다. 그에 불만스러운지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아이가 다시 한 번 눈을 뭉친다. 그걸 본 잭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아이 쪽으로 뻗었다. 하얗게 빛나더니 한 무더기로 쏟아진 눈더미가 위에서 쏟아져 아이를 파묻었다. 몸집이 작아서일까, 눈 속에서 머리카락만 조금 드러난 아이를 보던 소년이 낄낄대며 웃었다. 낑낑 고개를 내밀고 입에 들어간 눈을 뱉어내며 아이가 불퉁스레 중얼거렸다. 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늘 생각하지만 그 능력 반칙이야. 눈싸움할 땐 공평해야지!”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이기면 장땡이지.”

“쳇, 그나저나 어디에서 왔냐니까.”



요 며칠 간 잭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를 찾아왔다. 와서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조금 위험할 정도로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하며 지금처럼 눈을 만들어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아이는 제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소년을 보며 픽 웃고 말았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즐겁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확실히 그는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이국적인 생김새도 그렇지만 공중에 떠다니거나 눈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세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아이의 눈에도 비정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기한 면이 있다면 저를 웃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귀찮은 녀석에게 우는 얼굴을 들켰다고 생각했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제가 웃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다. 귀찮긴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하루종일 놀다 보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실들도 잊을 수 있었으니까.


현실에서 도피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물어봤으나 늘 대답은 같았다. 처음에는 공중에 떠 있는데다 제 눈에 보이길래 귀신인 줄 알았지만 귀신은 아니라고 하고. 하긴 귀신이 눈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겠지. 아이가 짜증스레 눈살을 구겼다. 어느 쪽이야.


사실 느껴지는 기운은 단순한 귀신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먼 것도 사실이었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척이나 청량하고 순수한 기운이 소년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으니까. 잭이 웃으면서 말했다.



“전에도 말해줬잖아. 난 아이들의 꿈과 희망으로 태어난 존재라니까?”



웃기시네.



“헛소리한다.”



기습적으로 던져진 눈뭉치에 얼굴을 맞은 잭이, 한참을 멍하니 있다 큭큭 웃음지었다. 얼굴에 묻은 눈을 손으로 거둬내며 그가 웃는다.



“정말이라니까. 난 가디언이라고. 나는, 너희한테서 태어난 존재야.”



농담같지 않은 진지한 말투는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그 말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믿을 만한 사실이어야 말이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쭉 자신을 가디언이라고 소개했다. 아이들의 소망에서 태어난 수호신 같은 존재, 그래서 자신을 믿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그런데 어째서 너한테는 그냥 보이는지 모르겠다니까.”



아이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 차마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존재라서 그렇다는, 제 입으로 그런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뭐, 간만에 날 알아보는 녀석이 있어서 재미있기는 하지만.”

“왜?”



잭이 다시 한 번 눈뭉치를 만들어 던졌지만, 아이는 몸을 돌려 가볍게 피했다. 마른 체형 덕분에 아이는 던지는 건 몰라도 피하기는 잘 했다. 물론 그와 눈싸움을 하면 7할 정도는 아이가 당하는 편이었지만.


아깝네. 중얼거리는 말과 달리 잭은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그냥 이런 상황 자체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나를, 아니 우리를 볼 줄 아는 아이는 드물거든. 일단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우리를 볼 수 있으니까.”

“거참 까다롭네.”

“뭐, 그렇지. 사실 너를 만나게 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

“왜?”

“혼자는 외롭거든.”



아무렇지 않게 웃는 잭에게 아이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목 안쪽이 꽉 막힌 듯한 감각. 아이가 저 말에 엄청나게 공감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두려움, 그건 언제나 아이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근본적인 감정 중 하나였으니.



“꼭 그렇지도 않아.”

“어?”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혼자인 사람은 혼자인걸.”



그래도, 가끔은 그 사실이 너무 버겁다.


아이는 뭉치고 있던 눈을 턱 내려놓고 벽 쪽으로 가서 앉았다. 벽 부근은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애초에 눈을 만들어낸 것은 잭이기에, 그들이 놀던 부근을 제외하고는 눈은 한 싸래기도 쌓여 있지 않았으니까.


잭이 다가와 아이의 옆에 앉았다. 지팡이를 제 무릎 사이에 세우고 털썩 주저앉은 소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침묵.


소년이 입을 열었을 때, 아이는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근데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뭔데?”

“그날 왜 울고 있었어?”



묵묵부답. 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맞을까. 그와 함께 지내면서 즐겁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가끔은 모든 걸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말할 상대가 없으니까. 어차피 제 눈에만 보이는 존재니까 괜찮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말하고 나면,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이 답답함도 해소되려나.



“기다리는 사람이 하도 안 오길래, 그냥.”

“기다리는 사람?”



고개를 갸웃거리는 잭을 보던 아이가 피식 웃었다. 힘없는 미소였다. 그걸 본 잭의 표정이 저절로 심각해졌다. 없는 용기를 쥐어짜내어, 아이가 간신히 말을 뱉어내려는 순간이었다.



“그게….”

“꼬마?”



들려오는 목소리에 숨이 멎었다. 삐걱삐걱 몸을 돌려 옆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가 있었다.




3. GangLim Dorung



요즘 들어 아이가 이상했다.


그걸 느낀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평소보다 자주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그랬고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그랬다. 무엇보다 이상하게 즐거워 보인다. 다만 여전히, 제 앞에서는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어디 다녀오냐?”



그렇게 물을 때마다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미소를 거두고 어두워지는 표정에 괜시리 울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래줄 생각도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아이를 지나쳤다.


명계에서 저를 아이의 감시역으로 붙인 것도 이제 곧 1년이 넘어간다. 수명을 다하지 않았기에 돌아올 수는 있었으나, 명계 상층부에서는 아이의 존재를 위험인자로 분류한 지 오래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간 벌였던 일들이 하나같이 만만한 것들이 아니니 오죽할까. 언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위험요소를 함부로 풀어줄 수는 없겠지. 곁에서 아이를 감시할 사람이 필요했고, 종로 쪽을 담당하는 제가 그 아이의 담당으로 발령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지시를 받았다. 곁에서 머물기만 하라고. 쓸데없이 깊게 접근하지도 말고, 그저 행동을 정기적으로 보고하라고만 했다.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정을 주지 말라는 뜻이겠지. 쓸데없는 사념은 차사에게는 독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바로 저 자신이었으니까.


거리를 두었다. 근처에 머물되 결코 그 이상은 아니도록. 아이와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늘 적정선을 지켰고, 그 선 안으로 발을 디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라면 아이의 눈치가 꽤 빨랐다는 점이겠지. 관계가 서먹해지기 시작한 건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돌아온 지 1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어느 새 저와 아이 사이에는 찬바람만 쌩쌩 불게 되었다. 말 한 마디 곱게 오가지도 않을 정도로.


언제부터였을까? 아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것이. 저를 볼 때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 저도 모르겠다. 어느 샌가 아이의 눈동자에는 제가 비치지 않았다. 제 앞에서 말수가 줄었고, 눈을 잘 마주치지도 않았다. 제게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는다. 할 말만을 하고 입을 다물어도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남았다.


꼭 누구 하나 죽은 것처럼 저를 쳐다보는 얼굴이 싫어서, 자꾸만 화를 내게 된다. 예전에는 비록 건방졌지만 그래도 그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는데. 저를 볼 때마다 굳어지는 얼굴이 묘하게 제 안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웃기지도 않은 감정에 실소가 나왔다.


그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자신이면서.


건방지게 굴던 철없는 꼬맹이, 시작부터 삐끗한 관계였다. 그렇게 생각하기만 하면 편할 텐데. 


요 근래 묘하게 실실 웃는 모습이 수상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평소와 조금 다르게 굴었을 뿐이다.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몰래 뒤를 밟았던 것도 그 때문. 다만 이렇게 놀라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녀석의 옆에 있는 저건 대체, 뭐지?



“아저씨가 여긴 어떻게?”

“그냥 따라왔을 뿐이야. 그런데, 그쪽은…?”

“어라? 그쪽은, 이라면 나?”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은발머리. 얼굴을 보아하니 꽤나 어려 보이는데, 뭔가가 달랐다. 느껴지는 기운이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저를 알아볼 리가 없지 않은가. 주머니에서 소울폰을 꺼내들었다. 검을 뽑아들려는 순간, 녀석이 저를 막아서지만 않았더라도.



“그만해!”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저를 노려본다. 어이가 없어져 다시 말하려는 순간 아이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아저씨, 돌아가.”

“뭐? 하지만 이 녀석은….”

“내 친구야. 그냥 친구일 뿐이라고. 아저씨가 걱정할 만한 사람 아니야.”

“어딜 봐도 수상한 놈이잖아. 당장 거기서 비켜!”

“나, 사고 안 쳐!”



크게 외치는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씩씩거리며 저를 쳐다보는 눈매가 꽤나 매섭다. 하지만 제가 놀란 건 간만에 제게 대드는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그 말의 내용이었다. 사고를 치지 않는다니, 설마.



“…그러니까,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



말을 흐리며 고개를 푹 떨구는 아이의 모습에, 칼날이 심장을 푹 찌르는 것만 같았다. 역시, 알고 있었던 건가. 제가 왜 자신 곁에 머무는지. 저를 멀리하는 건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나? 입맛이 썼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할 말이 정말 많았다. 왠지, 그냥 막연히 드는 불안한 예감에.


너를 빼앗기게 될 지도 모른다는.



“…아, 그래?”

“….”

“생각해보니 그렇군. 네 인간관계까지 내가 터치할 필요는 없지.”



나오는 대로 말을 뱉었다. 아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차갑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건 아닌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정작 그 말들은 제 목구멍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냥, 다만. 저를 쳐다보는 눈이 너무나도 예전과 닮아 있어서 저도 모르게 울컥했을 뿐이다. 나를 멀리하기 위해 일부러 내 앞에서 죽은 듯이 조용하게 살았을 네가, 다른 녀석을 위해 나를 가로막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싫어서.



“좋아, 네 마음대로 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왜 네가 그런 눈을 해? 왜 그렇게 나를 아프게 바라봐. 어째서.



“…알았어.”



힘없이 대답하는 목소리에 주먹이 꽉 쥐어졌다. 열받는 것을 넘어서서 이젠 좀 화가 난다.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거냐. 왜 더 물고 늘어지지 않아? 너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녀석이 아니잖아.


어째서.

수없이 쏟아지는 의문 속에서도, 남자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4. False & True



“넌 누구지?”



아이가 학교에 간 시각, 강림도령은 지붕 위에서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었다. 긴 나무지팡이 하나를 끼고 지붕에 앉아 있던 은발의 소년이 흘끗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서늘한 눈초리에도 잭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덤덤했다. 그 모습에 발끈했는지, 남자가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왜 계속 꼬마 녀석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관여라고?”



말없이 듣고 있던 잭이 지팡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그 못지않게 싸늘했다. 



“난 가디언이야. 아이들을 행복하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게 내 의무라고.”

“가디언?”



처음 들어보는 명칭에 남자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평범한 존재는 아니다. 보통의 인간과 귀신과는 다르게, 저 녀석에게서는 정말 맑고 깨끗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존재? 그런 것도 있단 말인가?


하긴 명계도 실제로 존재하고, 저승사자가 인간처럼 변신해 활동하기도 하는데 새삼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너지? 저 아이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게.”

“….”

“너야말로 대체 뭐야?”



남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잭이 계속 말을 이었다. 소년다운 순수한 얼굴에 분노가 덧입혀졌다.



“저 아이는 왜, 늘 슬픈 표정으로 널 기다려야 하지?”

“….”

“관여하지 말라고? 너야말로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저 아이를 늘 혼자 있게 내버려두는 주제에!”

“….”

“나마저도 없으면 더 움츠러들고 외로워할 텐데. 저 아이가 더 작아지게 만들고 싶느냔 말이야.”

“….”

“그렇지 않아?”



말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제 가슴을 파고든다. 이미 멈춰버렸다 생각한 심장이 덜컹거리고, 몸이 싸하게 굳어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 남자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멍해지는 정신을 애써 가다듬었다. 나답지 않아. 신경쓰지 마.


소중한 것만 지켜진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렇잖아?


차가운 눈동자가 똑바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곧고, 서늘한 눈빛.



“그 이기심이, 그 아이를 힘들게 한다는 거야!”



아이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말하면서, 결국 그 아이를 붙잡아 두는 것도 세상과 단절시키는 것도 바로 너니까.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잭은 그를 째려보았다. 긴장의 실이 더욱 팽팽해졌다.


그 실을 먼저 끊어낸 것은 바로 남자였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그래서?”

“뭐?”

“기다리든 말든 그건 녀석의 선택 아닌가?”

“헤에.”



기다려달라고 한 적은 없다. 녀석이 멋대로 기다렸을 뿐이다.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그렇게 말하는 저를 경멸하듯 쳐다보는 시선을 그는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


가장 비겁한 건 바로 제 자신이라는 것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잭이 헛웃음을 지었다.



“나쁜 인간이네, 그쪽.”

“인간은 아니다. 차사지.”

“알아. 그 옷. 아주 예전에 본 적이 있거든.”



소년조차 잊고 있었던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의식의 수면 위로 살풋 떠올랐다. 제가 죽었을 때 흐릿한 시야 너머로 존재했던 녀석들. 손을 뻗어 저를 데려가려고 했었다. ‘그분’ 이라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의 자신은 없었겠지. 가야 할 곳으로 갔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자가 어째서.



“죽음과 닿아있는 존재가, 어째서 살아있는 생명에 손을 대는 거지?”

“….”

“이래 봬도 눈치는 빠르단 말이지. 좀 이상한 면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아이는 인간이었어. 그런데 어째서.”



삶과 죽음. 너무나도 가까우면서 또한 먼 사이. 곁에 있어봤자 하등 서로에게 이롭지 않을 이질적인 존재. 그걸 모를 만큼 잭은 세상에 어둡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아이는 이 녀석을 그렇게 기다리는 걸까.


기다림의 과정은 고통스럽다. 얼음 속에 갇혀있을 때, 기억을 잃고 아무것도 몰랐을 때도 제가 느꼈던 건 숨이 막힐 듯한 외로움. 얼음을 깨고 나와 자유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때의 기억은 강렬했다.


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타까웠다.


- 어째서 이런 놈을 기다리는 거니, 꼬마야.


너의 기다림을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치부하는 녀석이야. 네 옆에 있어봤자 하등 도움이 되지도 않아. 그런데도 왜 묵묵히 기다리고만 있니. 그런 곳에 숨어 아픔을 삭여가면서. 어쩌면 그렇게 울면서까지 기다려?


차라리 나였다면, 너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텐데. 울리지 않을 텐데.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소년을, 남자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어리는 감정들은 이리저리 섞이고 섞여서, 결국에는 짙고 까만 무언가가 되어 가라앉는다. 그러더니 툭 말을 내뱉는다.


“너, 그 녀석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했지.”

“….”

“그렇다면 맘대로 해봐. 녀석을 웃게 해주라고.”



잭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뭐라고? 황급히 옆을 바라보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냥 내뱉는 소리는 아닌 거 같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의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던 녀석이. 



“무슨 속셈이야?”

“뭐, 맘대로 해보라 이거지.”

“….”

“사실 네 말대로 가장 나쁜 놈은 나일지도 모르고.”



하핫, 자조어린 웃음을 내뱉던 남자가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멱살을 세차게 잡아 올렸다. 그럼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잭에게, 강림도령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잘 보살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



잭이 사라진 후, 남자는 태연했던 얼굴 위에 씁쓰레한 미소를 덮어씌웠다.


알고 있어.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를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건 허세일 뿐, 녀석이 저를 기다려야만 하는 이유같은 건 하나도 없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저를 끊어내는 건 일도 아니다. 감시라면 멀리서 해도 될 일이고, 아이 스스로가 거부한다면 굳이 옆에 있는 것도 안 될 말이다. 비록 녀석이 예외 케이스라고 해도 살아있는 인간과 깊이 관계되는 건 금지되는 사항이니까.


그런데도 굳이 곁에 머무는 건, 따뜻한 말 한 마디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녀석의 옆을 맴도는 건.


그래도 녀석이 저를 피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죽은 듯이 상처입은 듯한 눈으로 바라보아도 도망치지는 않으니까.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피하면 될 텐데, 눈앞에서 꺼지라고 하면 될 텐데. 아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적은 없었다. 제가 오는 걸 어찌 아는지, 어쩌다 여기 들를 때마다 녀석은 언제나 쪼르르 제게 달려온다.


아이가 싫은 건 아니었다. 보고 있으면 썩 나쁘지 않았고 가끔은 재미있기까지 했다. 감시역이기 이전에 인간 대 인간의 관계였으니. 가끔 싸우는 것도 당시엔 열이 뻗쳤지만 지나고 나면 그랬구나 하고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너무 자주 오게 되면 마음이 깊어질까 두려워 만나는 기간을 조절하긴 했지만 먼발치에서 늘 지켜보고는 있었다. 혹 사고라도 생길까 염려되어서.


하지만 최근의 아이는 보고 있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특히 눈동자. 생생하게 빛났던 그 눈동자에는 지금은 그저 공허함만이 들어차 있을 뿐이다. 그게 싫었다. 보고 있자면 저까지 답답해져 오니까.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는걸. 남자는 조소를 머금었다. 그 자신에게.


알고 있음에도 차마 아이를 떠나지 못하고, 그렇다고 다가가지도 못한다.


사실 가장 바보인 건 제 자신인지도.




5. Jack Frost



잭은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속에 무언가가 텁텁하게 눌러붙은 듯한 갑갑한 느낌. 그 남자와 말하고 난 이후로 계속 그랬다.


그래, 전부 그 사람 탓이다.



“왜 그렇게 녀석을 기다려?”



지팡이를 끼고, 불퉁스레 말하는 소년에게 아이는 웃어보였다.



“넌, 그 사람이 싫어?”

“당연하지.”



잭은 진저리를 쳤다. 그걸 보던 아이는 또 한 번 웃었다. 허탈한 듯이.



“진짜 싫은가보네.”

“….”

“너무 미워하지는 마. 그렇게 보여도,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나쁜 사람이 아니라니. 너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함부로 취급하는 녀석이 어딜 봐서 좋은 사람이라는 거야. 잭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렇게 잔인하게 말하는 주제에, 그자가 아이에게 꽤나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자기가 울리는 주제에, 웃게 해주라고 말하는 건 또 어째서. 왜 걱정하는 척 하는 거야? 저런 놈한테 아이를 맡기는 것도 싫지만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도 열 받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 수가 없다. 하여간 어른이란 족속은.


소년이 짜증스레 대꾸했다.



“이래서 난 어른이 싫다니까.”

“….”

“어른은 다 똑같아. 추악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지.”

“아니야!”



갑자기 아이가 크게 소리질렀다. 잭도 깜짝 놀랐지만 소리지른 당사자는 그보다 더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헛, 정신이 들었는지 아이는 당황하던 표정을 재빨리 추스르고는 힘없이 대답했다.



“화낸 거 아니야. 하지만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넌 오해하고 있어.”

“오해?”

“그래, 오해야. 차라리 그런 거면 후련했겠지.”



아이의 눈꼬리가 추욱 늘어졌다.



“그냥, 그 사람은….”

“….”

“나한테 정을 떼고 싶어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그 얼굴은 마치 농약 뿌린 식물마냥 시들시들했다. 그러는 아이를 잭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그냥 떨어지면 되잖아?”

“날 감시하러 오는 사람이라서, 아마 무리일 거야.”

“너도 이상한 녀석이야. 그런 놈을 대체 왜 기다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래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걸.”



아이는 정말로 기운이 없어보였다. 그런 녀석따위 신경써줄 가치도 없는데. 소년의 목소리가 절로 퉁명스러워진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 녀석, 나한테 널 웃게 해주라더군. 무슨 생각인지.”

“아저씨가?”

“갑자기 무슨 바람일까? 날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고는 말이야.”

“…드디어 날 포기한 걸까.”



그럴 리가.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소년은 아이의 얼굴에 가득 들어찬 상실감을 느끼고 멈칫했다. 덤덤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저토록 눈빛에 짙게 번진 고독이라니. 마치 예전의 저와 닮아 있어서 이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조금 특이한 꼬마다 싶었지만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는데.


단지 그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저런 눈을 하는 걸까.


묘한 유대감. 아이와 그 남자 사이에는 이상할 정도의 유대감이 자리했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잭은 그 술렁거림을 무시했다. 오히려 더 힘차게 아이를 잡아끌었다.



“자, 그런 녀석은 잊고 놀기나 하자고.”

“응.”



침울한 감정은 여전히 아이의 얼굴에 엉겨붙어 있다. 어떻게 수가 없을까 고민하던 잭의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간만에 재미있는 거 해볼까?”

“…에? 뭔데?”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이를 보며 잭은 씨익 웃었다. 간만에 악동같은 미소를 입가에 가득 머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년은 창고로 쏙 들어가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철제 접시 하나를 찾아냈다.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잭이 아이를 이끌어 접시 위에 태웠다. 그리고는 말한다.



“꽉 잡아.”

“뭐?”

“놓으면 큰일나니까. 좋아, 간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잭은 지팡이를 들어 접시를 겨냥했다. 밑에서 눈무더기가 팍 솟아오르더니, 아이를 태운 접시를 세차게 위쪽으로 튕겼다. 공중으로 던져져 천천히 울타리를 넘어가는 제 몸을 그제야 깨달았는지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려는 찰나, 잭의 손짓 한 번으로 다시 빙판길이 만들어지고 접시는 그 위에 무사히 안착했다. 그리고는 다시 얼음길을 따라 미끄러진다. 얼음이 끝도 없이 뻗어나가면서 접시도 그 길을 따라 점점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한 주행이었다. 골목길을 요리조리 지나 차도로 들어서고, 다행히 몇 대 없던 차들을 요리조리 잘 피한 접시는 다시 길가로 올라탔다. 놀라는 사람들의 발밑을 쏜살같이 헤쳐나가는 아이 옆에는 공중을 활개치며 날아다니는 잭이 있었다. 물론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를 태운 접시는 드디어 길가를 지나 공원 쪽으로 들어섰다.



“으아악!! 아, 아하하하!!”



처음에는 그냥 무서워하던 아이도 어느새 즐기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누운 자세로 날아가던 잭이 낄낄대며 웃었다.



“어때, 신나지!”

“이거 대체 뭐야?! 이야아아-!!”



용케 접시에 달린 손잡이를 꽉 잡고 아이는 살짝 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꺾이는 길에서 한쪽으로 몸을 낮춰 능숙하게 드리프트를 하는 아이의 모습에 소년이 휘파람을 불었다.



“제법인데?”

“이쯤이야.”



킥킥 웃으며 앞을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이 마냥 해맑았다. 기분이 좀 풀린 건지 밝게 웃으면서,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공원은 넓었고, 다행히 아침이라 그런지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방해되는 장애물도 딱히 없었다. 한 마디로 여기는 이 둘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신나게 놀고 있던 아이의 눈빛이 갑자기 돌변했다.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굳은 눈빛. 잭은 차마 그걸 보지 못했다.


슬슬 중앙광장 쪽으로 향하고 있던 중이라 잭은 앞서나가 얼음으로 크게 원을 그렸다. 광장 한가운데에 분수대가 있어, 크게 돌아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잭의 뒤를 따라가던 아이가 갑자기 손잡이를 꺾었다. 이상한 낌새에 잭이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다급히 소리질렀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서!!”



깨달았을 때, 아이는 이미 빙판길을 지나 분수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접시가 벽돌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부딪힐 터다. 잭은 급하게 지팡이를 치켜들었지만, 접시의 속도가 너무 빨라 얼음이 아이를 따라잡지를 못했다. 맹렬히 분수대 쪽으로 향하는 적갈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접시가 부딪히려는 찰나, 아이는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역시.”

“….”

“왜 이제 와.”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잭의 눈동자가 커졌다. 펄럭거리는 검은색의 옷자락, 푸른빛이 도는 흑발과 새까만 눈동자. 허공으로 던져졌던 접시가 딸그락, 요란스레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위를 유유히 날아다니며 아이를 안고 있는 건, 바로.



“하여간 너란 꼬맹이는.”

 



6. Fellowship



“하여간 너란 꼬맹이는.”



아이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강림도령은 성질껏 제 미간을 왕창 구겼다. 어쩌면 이렇게 사고만 칠까. 잭은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그들의 뒤를 따라왔던 것도, 접시가 분수대에 부딪혀 하늘로 튀어오르자 허공으로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낸 것도, 안고 있던 아이의 머리에 커다란 꿀밤을 먹이면서 화를 내는 것도.


모두, 그였다.



“정말 어쩌려고 이런 짓을 벌인 거냐?! 죽고 싶어?!!”

“아야! 아프다고 아저씨!”

“아파? 그대로 떨어졌으면 아픈 건 둘째치고, 정말 죽었을 거라고! 꼬맹이 주제에 쓸데없이 간만 커가지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야! 왜 손잡이를 그리로 꺾었어?!”

“…보고 있었어?”



아이의 물음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그는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돌렸다.



“눈만 떼면 이런 일이나 생기는데.”

“….”

“불안해서 놔둘 수가 있겠냐. 너같은 사고뭉치를.”



골치 아프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남자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게 얄미웠는지 남자는 한 차례 더 짜증을 냈다.



“죽을 뻔해서 정신이 이상해진 거냐. 왜 그렇게 웃어?!”

“아니, 아니.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와줬다 싶어서.”

“설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일부러 그랬는데?”



아이는 태연하게 말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한 말투. 건방지다면 건방지다고 할 법한데, 그가 차마 더 화를 내지 못했던 건 곧바로 이어진 아이의 대답 때문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아저씨는 날 만나러 와줄 테니까.”



할 말이 없었다. 고작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런, 목숨을 건 도박을 벌였다고 말하는 건가. 남자는 아파오는 제 머리를 한 손으로 감쌌다. 이 녀석은 여전했다. 이젠 좀 나아졌나 싶었더니 변한 게 없다. 1년 전 명계로 뛰어들었을 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애송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용감하다면 용감하지만, 무모할 정도의 기개를 부리는 녀석.


남자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머물렀다. 기껏 놓아주려고 했더니만.


자유로워지길 바랬는데. 다시 새장 안으로 들어오려고 제게 손을 내미는, 이 어리고 작은 파랑새같은 녀석을 어째야 좋을까.



“…저 녀석이랑 놀면 되잖아?”



간신히 입을 떼어 대답하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거야?”

“…그건.”

“아저씨, 생전에 공부 못했지?”

“뭐라고?!”

“하나에서 하나를 더하면 둘이잖아. 하나가 아니라. 잭은 잭이고 아저씨는 아저씨인걸.”



당연하다는 듯이 손가락을 세어가던 아이가 제 품에서 꼼지락거린다. 떨어질 세라,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는 아이를 다시 한 번 고쳐 안았다. 그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받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바로 방금 전까지도 그렇게 필사적이었던 제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날 나타나게 하기 위해 이런 쇼를 벌인 거냐?”

“응.”

“….”

“아저씨는 좀 멍청하긴 하지만, 자기한테 주어진 일을 자기 감정대로 막 팽개치고 가는 타입은 아니잖아. 분명 내 곁에 있었겠지, 다만 나를 보러 나타나지 않았을 뿐.”



소름돋을 정도로 저를 꿰뚫어본 아이의 대답에 그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

“올 거라고 믿었어. 그래도, 와줄 거라고 믿었어.”

“….”

“와 줘서, 고마워.”



씨익 웃으며 아이는 그의 팔에 매달렸다. 남자는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해줘야 하는데. 너와 저는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며, 가까이하게 되면 서로가 불행해질 거라고. 그러니 너는 나와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런데 너는 왜 내게 다가오려 하냐고.


잊어버렸다. 해야할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고맙다고 하는 그 한 마디에. 이미 잊어버렸다 생각한 예전의 저를. 인간이었을 때의 그 감정들을.


가지 말라고 내미는 손을 전처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망설임 없이 너를 놓아버릴 수가 없다. 이미 잡아버렸으니, 어떻게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너를 껴안았다. 잠깐 놀라더니, 네가 작게 웃었다.


제 자신에 실소가 나왔다. 나는 왜 매번 너에게만 이리도 약한 건지.


네가, 아직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



밑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잭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


처음 남자가 나타났을 때는 놀랐다가 그 후에는 화가 났는지 씩씩거렸고, 다시 심각해졌다 싶었더니 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를 빤히 바라보던 푸른빛 눈동자가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살짝 커졌다. 그리고는 엷게 미소지었다.


눈꼬리를 부드럽게 반달로 휘어가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7. Say au revoir



“꼭 가야 돼?”



아이가 불만스레 볼을 부풀렸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소년의 집 뒷마당. 그들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장소다. 언제나와 같았더라면 모여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놀았을 테지만 오늘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잭은 이제 곧 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야 했고, 아이는 그에 작별인사를 하러 나온 것이다. 남자는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워낙 꺼려했기 때문에.



“슬슬 돌아가야 할 시기인걸. 게다가, 늦게 가면 토끼 녀석이 또 잔소리할게 분명하다구?”

“토끼?”

“있어. 되게 짜증스럽고 성격 나쁜 녀석이.”



그가 들었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질렀을 말이었다. 설마 네 녀석보다 더하겠냐고 말하면서.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녀석의 기분을 신경써줄 만큼 잭은 섬세하지 못했다.



“사실 그 녀석한테 널 맡겨두고 가기는 아직도 좀 불안하지만.”



생각만 해도 싫은지 잭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누구를 뜻하는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보나마나 아저씨에 대한 거겠지. 그렇게 싫은가, 싶어 아이는 그저 실없이 웃었다. 그런 아이를 쳐다보던 잭은 지팡이를 제 어깨에 얹은 채로 한숨지었다. 천천히 다가가서 아이의 어깨에 다른 손을 얹고, 소년이 느릿느릿 말을 내뱉었다. 고깝지 않다는 말투로. 하지만 그 대답에, 아이는 깜짝 놀랐다.



“왜 네가….”

“….”

“그 녀석을 좋아하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이해해.”



나도 잘 모르니까. 아이의 목소리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눈빛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이유조차 모를 감정을 쫓는 아이의 모습은 무모해 보이면서도, 신비하기도 했다. 이유를 붙일 필요조차 없다는 것 같아서.


소년이 대답했다.



“하지만 너의 행복은 분명, 그 녀석이 없으면 안 되는 거겠지.”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무언의 긍정이라는 것을 잭은 쉽사리 예측할 수 있었다.



“사실 가는 걸 좀 더 미룰까도 생각했었어. 너를 이렇게 내버려두고 가면 언젠가는….”

“….”

“죽을 것만 같았거든.”



처음 만났을 때 아이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고독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슬프디 슬픈 눈. 마치 닮아 있었다. 과거의 자신과.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생각했던 건 그 때문일 거야.



“우리가 썰매를 타고 놀았던 날 말이야. 녀석이 분수대에 부딪힌 널 구하러 왔었지. 놀랐어. 솔직히 그 녀석이 나타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

“…미안.”

“화내는 거 아냐. 그냥 궁금했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는데, 굳이 그런 위험한 짓을 한 건 어째서야?”

“아저씨가 날 보러오지 않으니까. 이러면 올 거라고 믿었거든.”

“안 왔으면 어쩌려고 했는데?”



도리도리. 아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왔을 거야.”



확신에 가득 찬 대답,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를 믿을 수 있을까. 잭에게는 여전히 아리송하고 어려운 난제였다. 물론 저 말대로 그가 아이를 구하러 왔으니 할 말 없다지만.



“전에, 마저 하지 못한 말이 있어.”

“…?”

“예전에 그 녀석이 나한테 말하더라. 널 잘 보살피라고. 그렇지 않으면 날 가만두지 않겠다고.”



우습지. 잭이 킬킬대며 웃었다. 상처는 있는 대로 다 줘놓고, 정작 남이 상처입히는 꼴은 못 본다니. 정말이지 모순된 감정이 아닌가. 그런 식으로밖에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가엾기도 했지만.



“그 때는 솔직히 반신반의했지. 저 말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거짓말일지. 근데 이젠 알겠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

“내가 없어도, 아마 그 자는 너를 떠나지 않고 계속 지켜주겠지.”



안심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잭은 고개를 숙여 아이에게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악동의 얼굴을 하고, 장난스런 미소를 흘리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밀쳐내도 뻔뻔스럽게 나가. 차갑게 나오더라도 절대 물러서지 말고. 그런 고지식한 녀석에게는 그런 방법이 먹혀. 많은 걸 알고 있어서 더 그러는 거겠지. 너를 밀어내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 같거든. 속한 세계가 달라서.”

“….”

“그렇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매달리는 인연이라면, 포기하지 마.”



어깨를 툭툭 쳐주는 손길은 틱틱대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상냥했다.


그 때, 잭의 시선이 무심코 하늘을 향했다. 무언가를 보았는지, 그가 한쪽 눈썹을 씰룩거렸다.



“어이쿠, 빨리 가지 않으면 늦겠네. 데리러 온 모양이야.”

“지금 가는 거야?”



이제 떠나는구나. 말은 안하고 있지만, 내심 섭섭했는지 아이의 표정이 자못 시무룩했다. 그걸 보던 잭이 픽 웃으며 다시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음을 다루는 녀석이 손은 왜 이리 따뜻한 거야. 울컥 올라오는 서운함을 애써 가라앉히려 아이는 심호흡을 했다. 잭이 장난스레 물었다.



“잠시 못 본다고 영원히 못 보는 걸까? 그렇게 생각해?”

“….”

“구름이 가렸다고 태양이 사라진 걸까? 아니잖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넌 나를 믿어? 내가 존재한다는 걸 믿냐구.”

“눈앞에 보이는데 어떻게 안 믿겠어?”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잭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거면 된 거야.”

“….”

“나는 아이들을 수호하는 존재고, 비록 모습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언제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

“다시 만날 수 있어.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언젠가 다시.”



그렇게 말하며 잭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이는 손을 뻗었지만, 어느 새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뉘엿뉘엿 져가는 노을이 아이의 머리 위를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히 올려다보던 아이의 눈가에 촉촉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꽃들이 아름다웠다. 마치 처음 만났던 날과 같이. 부드럽게 제 위로 내려앉는 눈송이들이 마치 그의 일부인 것만 같아서, 아이는 끝내 눈물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녹아내린 눈송이가 눈물에 섞여들었다.


계속 네 곁에 있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Fin.



      

  <제목의 의미>


1. Snowflake 눈송이, 눈꽃

2. Resemblance 닮음

3. GangLim Dorung 강림도령

4. False & True 거짓과 진실

5. Jack Frost 잭 프로스트

6. Fellowship 유대감

7. Say au revoir 재회를 기약하고 헤어지다




눈꽃 내리는 날에 – The End


===


고스트메신저 배포전에 냈던 배포본이에요! 원 썰의 저자는 노리야님입니다!

썰의 출처는 여기 http://letter-pic.tistory.com/28


크로스오버라 취향타시겠다 싶었는데 가져가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Posted by I.R.E
,

※ 시간을 넘어서-. 의 뒷 이야기.

※ 크롭이기 때문에 본편이 완성되면 삭제될 위험이 있습니다. 본편이 겁나 길거든요.




2. 언젠가 너와 만났을 그 거리에서.


WRITTEN BY. 리네




귀찮아.


강림도령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돋았다. 뒤를 흘끗 돌아보자, 아까부터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얼굴이 보인다. 꽤 어리다. 기껏해야 생전의 저와 비슷한 정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저를 놓치지도 않고 따라오는 걸 보니 꽤 질긴 녀석인 건 확실했다. 차사 상태의 저를 알아보는 것도 놀랍거늘, 갑자기 제게 달려들어 저를 알아보냐고 묻는 이상한 녀석. 귀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이런 녀석을 본 기억은 없었다.


이런 녀석을 만났었다면, 분명 기억이 났을 텐데.


그러더니 갑자기 또 말이 없다. 심각해 보이지만 그건 제가 알 바가 아니었기에 등을 돌렸다. 다시 일하러 인간 모습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던 중, 시선을 느꼈다. 뭐지 싶어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전 그 녀석이 있었다. 계속 따라오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대체 언제까지 쫓아올 셈이지?”

“뭐야, 신경쓰지 마.”

“신경이 쓰인다고!”



쫌생이 같으니. 투덜거리는 모양새가 꽤나 얄밉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들어올리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저랑 외양은 비슷하면서 하는 행동은 아직 어린애다, 어린애. 화를 내는 것도 우스울 정도로. 고개를 젓다가 남자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저러다가 지치면 제풀에 떨어져 나갈 터였다.


그런데 낮이 지나고 한밤중이 다 되도록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지만,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볼 때마다 늘 제 뒤에 있다. 사람이 많던 적던 꼭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심지어 일을 하러 차사 모습으로 날아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똑바로 쫓아온다. 저를 찾아서. 그리고는 다시 따라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위치를 아는 건지 이쯤되면 놀랄 지경이다.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아니, 귀신은 나인가.


그렇게 서너 번이 지나자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제 쪽이었다.



“어이, 너.”

“왜?”



태연스레 대답하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루종일 제 뒤를 따라다녔으니 피곤할 법도 하건만, 지친 기색도 없는지 쌩쌩한 얼굴이다.



“너, 평범한 인간이냐?”

“질문이 늦네.”



이제야 물어봐?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삐딱한 자세를 취한 소년이 영문 모를 소리만 내뱉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 설마 제가 차사라는 것도 알고 있을 걸까.



“귀신이라고 생각해?”

“….”

“인간이야. 귀신이 이렇게 멀쩡하게 바닥을 걸어다닐 리가 없잖아.”



그랬음 진작 날아서 쫓아갔지. 두 손을 들고 발로 바닥을 몇 번 차낸다. 흙먼지가 이는 걸 보니 확실히 인간은 인간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어떻게 날 볼 수 있지?”

“어렸을 때부터 볼 수 있었어. 딱히 원했던 건 아니었지만.”

“영력이 있는 건가?”

“자유자재로 사용도 가능해, 봐.”



들고 있던 손을 휘두르자 소년의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일었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은 마치 제 의지가 있는 것처럼 허공을 채우며 넘실거렸다. 손짓으로 바람을 제 맘대로 다루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 뿐일까, 느껴지는 영력이나 기운은 확실히 어지간한 무당들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범상치 않았다. 많아봐야 고등학생 정도밖에 안 될 법한 어린애가.



“내가 누군지….”

“알아. 차사잖아?”

“알면…!! 후우, 그래. 그거지. 그런데 그걸 알면서 나한테 다가오는 이유가 뭐냐? 인간이면서.”



척척 대답하던 소년의 입가가 일순 꽉 다물렸다. 그러더니 다시 웃는다.



“그냥, 심심해서?”

“가서 친구들이랑 놀기나 해라. 영혼 때려잡는걸 보는 게 뭐가 재밌다고.”

“왜, 나름 재밌어. 아저씨 구경하는 거.”

“아…! 야, 꼬맹아. 난 아저씨가 아니거든?”

“…아저씨한테 난 언제나 꼬마구나.”

“뭐라고 했지?”

“아니, 아무것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던 남자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순간 어두워진 낯빛, 살짝 떨리는 눈동자, 싱글거리던 얼굴에 처음으로 스치듯 보인 망설임까지. 하지만 곧 다시 사라졌기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잘못 봤겠지.



“그나저나 진짜 언제까지 따라다닐 거냐? 지금은 밤이라고, 착한 어린이는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꼬맹아.”

“나 갈 곳이 없는데.”

“뭐야, 가출했냐?”

“아니, 그건 아닌데.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어.”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걱정할 텐데.”

“그런 거 없어.”



뭐?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놀라는 강림도령과 달리 소년은 시종일관 덤덤했다. 제게서 시선을 빗낀 얼굴은 웃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지극히 있는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잔잔했다. 그러더니 다시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방금 전까지 잔물결조차 없단 눈동자에 감정이 일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하고 가벼운 것들이 아닌, 그보다 더 짙고 복잡하면서 한없이 내려앉은. 악한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쁘거나 슬픈 것 같지도 않았다. 눈은 영혼을 비추는 창이니만큼 표정은 숨길 수 있어도 눈빛을 숨기지는 못한다.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그래.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녀석은 저를 보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록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근본적인 감정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래서?”



제 머리를 긁적거리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뭐라고 할지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지만, 혹시나 싶어서. 빙긋 미소짓던 소년이 제 용건을 꺼내자, 강림도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난처하게 웃었다. 저거, 얼굴에 철판을 몇 개나 깔았을까.



“신세 좀 질게.”




- TO BE CONTINUE



====


크롭입니다. 완성은 시간이 나면 마저 할 예정이에요.


시간을 넘어서를 보셨으면 알겠지만 꼬강이는 과거로 왔습니다. 여기는 5년 전, 강림이가 꼬강이를 처음 만나기도 훨씬 전의 시간이에요.


완성하면 묶어서 마저 올리겠습니다ㅠㅠ

Posted by I.R.E
,

※ 예전에 썼던 거 옮겨 왔습니다.

※ 타임리프 3부작. 꼬강이 17세.





[투림] 시간을 넘어서-.


Written By. Rine








붓으로 먹을 칠하는 것처럼. 아직 초저녁인데도 어두컴컴하게 물든 하늘이 불길하였다. 차가운 무언가가 제 얼굴로 떨어졌다. 구름 사이로 하나둘씩 떨어지는 빗방울. 처음에는 그저 몇 초에 한 번 가끔씩 떨어지다, 점점 그 수가 많아지면서 양동이에 물을 들이붓듯 세차게 쏟아진다. 빗방울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고, 모여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재빨리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방이나 신문지를 올려쓰고 뛰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그저 머리를 손으로 가리고 죽어라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도 거세지는 빗줄기에 옷이 젖어가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재빠르게 발을 놀려 공원을 벗어났다. 그렇게 비를 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이에서도, 그저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나이는 중학생,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아이는 우산도 없이 그저 가만히, 빗줄기에 몸을 맡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옷이 흠뻑 젖어 뼛속까지 시려울 텐데도,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그저 멍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풀썩 고개를 꺾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무언가를 참아내던 아이가, 띄엄띄엄 말을 뱉어냈다.



"거짓말…."



아니야, 아니야! 방금 전까지 사라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던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가. 너무나도 큰 전투를 마치고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났지만 그는 이미 제 곁에 없었다. 많이 다쳤다는 말에 그러려니 하면서 넘겼다. 면회 사절이라는 말에 그렇게 아픈가 싶어, 다 나으면 약골이라고 놀려주리라 생각했는데. 계속 기다렸고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았다. 무소식은 희소식이라는 옛 속담과는 다르게 발끝까지 끼쳐오는 두려움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어디 있어요?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그와 사이가 안 좋던 사라조차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안타깝다는 듯이 저를 바라보는 바리 누나의 얼굴에 마음이 술렁거렸다. 왜 그런 표정을 하냐고, 하하 웃으면서 말해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일그러지는 제 표정을 눈치챘는지 사라가 입을 열더라. 꼬마, 잘 들어. 충격받지 말고. 그는….



"아니야…."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런 거였을까. 마음이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이제는 그보다 약간 높아진 키. 멱살을 잡혔음에도 가만히 눈을 감고만 있는 사라의 모습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만 같았다. 평소라면 제 몸에 손대지 말라고 떨쳐냈을 것인데.



"아니, 라고…!"



죽었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말단이고 바보라지만 무척이나 강하고 대단하고, 심지어는 팔이 없어져도 재생되잖아.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것처럼 굴었잖아. 언제나 저를 놀려먹으며 즐거워했으면서. 자신은 너보다는 훨씬 오래오래 살 거라면서 그렇게 웃으며 말했잖아. 지금 단체로 몰카라도 찍어? 그래, 이 정도면 많이 속아준 거니까 이제 슬슬 나와. 제발 나와줘. 허하게 중얼거리는 제 목소리를 듣던 누나가 제 앞으로 나서며 무언가를 건네주기 전까지는. 그래도 자신은 많이 이성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천 위에 올려져 있는 조각난 하얀색 나뭇조각.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게 그가 언제나 메고 다니던 장승 목걸이의 파편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도 잘 만지지 못하게 했었던, 그가 언제나 애지중지 차고 다니던 물건인데. 너에게 줘야만 할 것 같아서, 라는 누나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레 손으로 받아들었다. 천 위로 느껴지는 단단하고 가벼운 감촉에, 결국 저는 그 자리를 뛰쳐나오고만 말았다. 정처없이 터벅터벅 걷다가 이 공원까지 흘러들어왔다. 솔직히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그저, 마음이 허했다.



"왜, 왜…!"



나만 아니었더라도. 그러한 자책감이 추위마냥, 소년의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명계와 얽히고 그와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 그의 임무에도 같이 나가곤 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최근에 와서는 제법 영력을 조절할 수 있었기에, 이런 자신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들떴던 모양이다. 상급령 세 마리. 저가 하나를 맡고 그가 둘을 맡았다. 여러 마리를 해치우던 중 자신이 방심했고, 거대한 꼬리가 자신을 내리치려는 순간 그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간신히 다 없애기는 했지만, 마지막 녀석을 봉인하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그의 몰골은 꽤나 엉망이었다. 여러 군데를 뜯겨 있어, 보기만 해도 안 아플까 걱정될 정도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달랑달랑한 팔 하나를 들어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바보령. 흐릿한 의식 속에서 본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면.



"우욱…."



빗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어떤 소리라도 다 묻어버릴 것처럼 타닥타닥 내려와, 제 귀와 이성을 마비시킨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저를 감싸고만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게, 보이지 않게. 차가운 빗줄기에 섞여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리게 얼어붙은 제 몸에 아직도 이런 온기가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입을 손으로 막았다. 빗물에 섞여들어 잘 보이지 않았고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든 울음을 삼켜내려는 듯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러다가 주저앉았다. 바닥에 손을 짚고 마음껏 슬픔을 토해냈다. 아무도 보지 않아. 여긴 나 혼자고, 설령 본다고 해도 이 소나기가 모든 것을 가려줄 거야.


다행이다. 지금 비가 와서.



"왜, 내가 아니야."



다쳤어야 하는 건 나인데. 죽었어야 했던 것도 나였고.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고, 당신은 내 곁에 없는 거지? 난 왜 이렇게까지 아파하며, 여기 주저앉아 괴로워해야 하는 걸까. 이래 봤자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잘 아는데, 당신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걸 잘 아는데. 머리로는 알지만 거부하는 심장이 쇼크가 올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몸은 시린데 가슴은 뜨겁게 끓어올라서 죽을 것만 같았다. 토해내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가 목에 걸려, 앓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와 자신에게 죽음이란, 그 무게가 다르다. 자신은 죽으면 명계로 가면 끝이지만, 그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인데. 왜 날 구하고 당신이, 어째서. 어째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과 함께 커다란 소리가 몸을 강타했고, 소년은 정신을 잃었다.




* * *



하늘이 푸르렀다.

비가 갠 후라 그런지 주변에 물 웅덩이들이 고여 있었고 흙바닥은 축축했다. 잎사귀 위에는 물방울들이 구슬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소년이었다. 창백한 얼굴색이 혹여 죽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웅덩이에 놓여 있던 소년의 손가락이 순간 움찔했다. 똑, 똑.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함께, 소년의 눈이 떠졌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눈을 깜빡이던 소년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던 눈동자가 다시 선명해졌다.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놀라던 얼굴이 침울해졌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에는 힘없이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죽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게 나갔으니 다들 걱정하고 있으리라. 솔직히 아직도 기분이 풀린 건 아니었다. 죄책감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저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억지로 자기위로를 하며 소년은 휘적휘적 거리를 걸어갔다. 이상할 만치 뽀송뽀송한 옷에 약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리라 여겼다. 공원 밖으로 나서서 시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제 눈에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 주변에서 엷은 빛이 비치는 것을 보아, 유령이구나. 평소라면 귀찮아서라도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오늘따라 눈길이 간다. 말이나 걸어볼까, 싶어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벤치로 다가가는 인영에 걸음을 멈췄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할머니, 여기 머물러 계시면 위험하다구요."



할머니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사람. 전투 모드와는 달리 검은 망토를 두르고 상냥하게 말을 거는 남자는, 소년이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멈췄다고 생각한 눈물들이 눈가에 고이는 것을 느꼈다. 눈물샘이 다시 터졌는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손으로 하염없이 닦아내던 아이가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할머니를 보낸 후, 뒤를 돌아보던 남자를 와락 껴안았다.



"바보령, 역시 살아 있었구나!"



죽지 않았어. 살아 있었어! 너무나도 반가워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기뻐서인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몇 주만에 만나는 걸까,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가 싶은 마음이었다. 갑작스레 저를 껴안는 아이에 당황했는지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소년을 밀어냈다. 뭐지?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너, 내가 보이나?"

"…뭐?"

"인간에게는 내 모습이 보일 리가 없는데…. 넌 누구지?"



이제야 다시 만났다 싶었는데,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 할 말이 없어졌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정말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설마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말한 건, 저에 대한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던가? 아니야,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성격들이 아니다. 어쨌든 살아 있다. 그런데 나를 알아보지 못해. 왜지? 심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쳤다.



"나 모르겠어?! 강림이라고, 강림!"

"…? 강림?"



그 말을 듣자마자 제 어깨를 거칠게 붙잡는 손이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다그치는 그 목소리가 노기를 띠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표정도 살짝,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정말 날 모르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버벅이던 소년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포착했다. 바람결에 날아가던 포스터, 그 위에 선명하게 찍히는 글자들에 다시 표정이 변했다. 눈동자가 커지며 동공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어서. 눈을 들어 바로 앞에서 저를 추궁하는 얼굴을 위 아래로 살펴보았다. 푸른 색이 감도는 흑발, 무심한 얼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기 증거가 버젓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간절히 바래서 꿈으로라도 보는 걸까. 아니면 이건 정말로, 진짜.


현실인 거야?


*


그들의 주변으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전단지 하나가 바람에 휘날려 두둥실 떠오른다. 하늘하늘 춤추며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전단지의 양면으로 커다랗게 숫자가 쓰여 있었다. 3일 후에 개봉될 뮤지컬을 홍보하는 이 포스터에 적힌 날짜는,


2009년 8월 15일.


5년 전, 강림도령과 아이가 만나기도 훨씬 전의. 바로 그 시간.




- To be continued?




※ 꼬강이가 비맞은 날짜는 2014년 9월경, 둘이 처음 만났던 1화 배경을 2009년 9월로 잡았습니다.

Posted by I.R.E
,





"자존심도 없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살짝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어느 샌가 다가온 백발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이게 무슨 무례냐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울고 있는 제 얼굴을 들키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남자는 떠나지 않았다. 조용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그녀는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어떻게 여기에."

"가는 곳이야 뻔하지."



아니, 그러니까 그쪽이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묻는 그녀에게 그는 쯧쯧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둔탱이가 그렇게 좋나? 이렇게 숨어서 울고 있을 만큼."

"…상관 마요."



제가 누굴 좋아하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가뜩이나 방금 전 일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데, 왜 자꾸 제 앞에서 얼쩡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헛웃음이 터졌다. 하긴 그 일도 이렇게 울고 있을 만큼 대단한 건 아니지. 정말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저 편전 안에서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 웃어주는 모습을 봤을 뿐이었다. 짓궂은 농이라도 당했는지, 당황하면서 쩔쩔매는 그의 얼굴이 꽤나 즐거운 듯이 웃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동작을 멈췄다. 자신을 발견했는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더 보기 싫어서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 보여주던 미소를 내게도 지어준다는 건 참으로 씁쓸하다.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니까.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어째서 이렇게, 구석에 몰래 숨어 울고 있는 걸까.



"대체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요."



지금 이 곳은 세성 편전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있는 잔잔한 호숫가였다. 편전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자신만의 장소. 가끔 제 위치가 버거울 때마다, 여러 가지 고민들로 힘들 때마다 언제나 여기로 쉬러 오고는 했다. 언제나 거의 몰래 빠져나왔기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제 피난처. 그런 곳을 어떻게 이 자가 아는 거지.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을까?


가달라고 온 몸에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데, 전혀 그럴 생각은 없는지 남자가 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졌다.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바리였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그쪽이 일어날 때까지?"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이쪽도 농담하는 거 아닌데."



말이 안 통한다. 설득을 포기하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난 후, 이번에는 사라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렇게 서럽나?"

"에…?"

"자기가 좋아하는 녀석이, 자신만을 바라봐주지 않는다는 건."



갑자기 왠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바리는 그의 말에 대꾸해주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문질러 닦으면서 살짝 고개를 들었다.



"뭐, 그렇죠."

"그러면 그런 상대를 찾으면 되잖아?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나요."

"고백도 하지 못할 거면서 이렇게 질질 짜는 것보다는, 차라리 포기하는 게 더 편할 텐데."



아픈 곳을 찔러댄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끔은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에, 속에 담아두었던 이 감정들을 오롯이 토해내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지금의 이 관계도 끝날지 모르니까. 말하지 못하는 연심에 혼자 울면서 괴로워하는 것도 힘들지만, 영영 그의 곁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게 더 무서운걸.


사라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악스럽게 그녀의 턱을 붙잡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장난 아닌 악력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얏, 아파요!"

"몰골이 참 끔찍하군. 아름답지 않아."



못볼 걸 봤다는 것처럼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그가 너무 얄미웠다. 아니 울면 당연히 화장도 지워지고 눈도 퉁퉁 붓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막말로 그가 울어도 자신이랑 같은 꼴이 될 터였다. 특히 눈 주위에 발라진 저 보랏빛 눈화장은 번지면 꽤나 처치곤란할 것 같았다.



"내가 알아서 하거든요? 그러니까 저리 가…."



말을 멈춘 건 결단코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제 입에 살짝 붙었다 떨어진 입술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해주듯, 닿기만 하고 떨어지는 부드러운 베이비 키스였다. 순간 무슨 일인지 몰라 어벙벙하다, 다음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깨닫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지금, 지금, 그러니까…!!



"표정 참 다양하게도 변하는군."

"다, 당신, 지금, 이게, 무…!!"

"왜 그리 놀라? 키스 처음 해보나?"



대답 대신 그녀는 귓볼까지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움츠려야만 했다. 사라도 눈치껏 깨달았는지 낭패라는 얼굴이었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걱서걱 밟히는 풀잎 소리를 배경 삼아 그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금은 보기 좀 그렇지만 말이야."

"…."

"그쪽, 평소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

"자신감을 가지는 게 어때. 그리고 가끔은 주위도 좀 둘러보고."



의미심장한 마지막 대사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게 무슨 소리지? 고개를 들고 살며시 뒤를 돌아보자 사라는 이미 한참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제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안 걸까, 귀신같이 뒤를 돌아본 사라가 손을 흔들었다. 내던지듯 툭 뱉은 마지막 대사에 바리의 얼굴이 다시 빨개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반은 창피하고, 반은 열받아서.



"잘 먹었습니다."





===



난 이렇게 풋풋하고 아련한 사라바리를 쓰려고 한 게 아닌데...


퇴폐적으로 쓰려다가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닫고 걍 편하게 썼습니다 ㅋㅋㅋㅋ 능력이 부족하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요'A'


짧은 조각글만을 연성하게 되는 건 생각보다 그리 유쾌하지 않군요 제길 ㅋㅋㅋㅋㅋㅋㅋ



간단히 설정 풀자면,


바리는 여전히 강림바라기고 사라가 그런 바리를 지켜보다가 관심이 좀 생겼다는 컨셉입니다. 아직 사라는 그녀에 대한 호감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거구요. 즉, 저 키스는 무의식. 아이구 불쌍한 우리 바리언니...ㄷㄷㄷ 고생 좀 할 팔자입니다.


원래는 좀 더 말싸움하다가 욱한 사라가 찐한 딮키스를 한다는 설정으로 가려고 했으나(그게 더 성격상 맞구요) 한시간밖에 여유가 없었던지라 이것만 썼습니다. 헤헤헤헤...>_<


Posted by I.R.E
,

※ 리야님 생일 축하드려요^ㅁ^




[투림] 생일상


Written by. 리네






아이의 하루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대개 6시. 세수를 하고 후다닥 밥을 먹은 후 잘 다려둔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전날 준비해둔 책가방을 열어 빼먹은 것이 없나 확인한 후, 한쪽 어깨에 맨다. 액자 너머로 끼워진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선다. 출발 시간은 대략 7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올라가게 된 중학교는 집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지라 되도록 빨리 가는 것이 시간상으로는 무리가 없으니까.


학교가 끝나고 나서는 집으로 돌아와 일을 나간다. 유감스럽게도 아이에게는 가족이 없는지라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여러 가지를 하지만, 특히 아이는 주로 영혼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가끔 저승으로 가야 하는데 그 순리를 어기고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있다. 그러한 존재들을 찾아 그들이 올바른 목적지로 찾아갈 수 있게 인도해주는 자들에게 넘기는 것이 아이의 역할이기도 하였다.


가끔 일이 없어 한가할 때는 게임이나 숙제를 하거나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가족은 이미 오래 전에 전부 잃었고 친구라 부를 만한 이도 없었다. 혼자라는 것에 이미 익숙해진 아이인지라 그렇게까지 외로움을 타지는 않았지만. 다만 가끔은, 쥐죽은 듯 조용한 집 안은 노닐고 있노라면 자그마한 가시가 박힌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따끔거리고는 하였다.


딱히 정해놓은 것도 아니었지만 마치 스케줄이 짜여진 것처럼 하루하루가 변화 없이 일정하게 굴러갔다. 사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았으니 저 이상 변화가 생기기는 어려웠으리라.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하기 짝이 없을 법도 하건만, 그래도 아이는 자신의 삶에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런 하루가 계속 반복되리라 생각했었다.


"…이게 뭐야?"


아이는 언제나처럼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제 방으로 올라가려던 중 문득 눈가에 살짝 스쳐가듯 지나간 장면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거실에 무언가가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무언가가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살짝 천을 들춘 아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뭐지?


갈색의 작은 앉은뱅이상 위에 여러 가지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흰 쌀밥은 물론이고 각종 나물들과 불고기, 그리고 초록색 미역이 얹어진 미역국까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홉뜬 채로 아이는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온 흔적은 없었다. 누가 온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럼 이 상은 대체 뭐지? 아이의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상상이 스쳐갔다.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닌가? 혹시 누가 몰래 우리 집에 세들어서 사나? 아니면 책 속에서나 나온다는 우렁각시가 현신한 건지도. 밥그릇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숟가락 젓가락에 눈길이 간 그 순간,


"어라, 너 벌써 왔냐?"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그가 서 있었다. 푸른색이 살짝 감도는 흑발에 새까만 눈동자,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꽤나 바보인 사람. 아니, 딱 보면 사람같지만 저래 봬도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것뿐 아니라 죽은 영혼들을 저승으로 인도해가는 고스트 메신저라는 존재이기도 했다.


"이게 뭔 짓이야? 상은 왜 차렸어, 그쪽은 어차피 안 먹어도 상관없잖아." 

"…머리를 좀 굴려라. 저걸 보고 떠오르는 게 없냐?"

"음…. 담당하는 영혼이 숨기라도 했어? 그래서 제사라도 지내게? 설마 나 먹으라고 차린 건 아닐 거 아냐?"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


에? 아이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이걸 저보고 먹으라고 차린 거라고? 의심어린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설마…."

"설마?"

"독이라도 탄 건 아니겠지. 나 오늘 죽을 날인가?"

"이게 진짜! 하여간 곱게 넘어가질 않아요. 꼬맹이가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 애면 애답게 챙겨주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조용히 수저를 드는 게 어때?"

"어이구, 애가 아니라서 미안하네요. 갑자기 왜 이래? 바보령이 날 챙겨줄 이유가 없잖아. 오늘 무슨 날이야?"


지극히 당연한 것을 되묻자, 남자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질세라 쳐다보았더니 남자가 갑자기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제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둔탁하게 밀려오는 아픔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손 한 번 더럽게 맵네. 인상을 쓰고 노려보자 남자는 쯧쯧 혀를 차며 제게 반문했다.


"넌 니 생일도 까먹고 사냐?"


생일? 아이는 한참을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며칠인가 싶어 조용히 속으로 날짜를 곱씹어보았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또래들과 달리 아이는 유독 기념일에 관심이 없는 편인지라, 사실 그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물론 그건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라는 이유가 크기도 하겠지만.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아이의 시선에 남자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민망한지 살짝 빨개진 얼굴로 흠흠 기침하다가, 그는 마저 대답했다.


"자기 생일도 까먹는 멍청이가 여기 있을 줄이야."

"…뭐, 고마워."

"고마우면 빨리 먹기나 해라. 힘들게 만든거니까 남기면 죽을 줄 알아."

"이거 바보령이 다 한 거야?"

"참내, 그럼 누가 했겠냐? 우렁각시라도 불러왔겠어?"


나물은 집에 있던 걸 꺼낸 건 맞지만 나머지는 남자가 한 게 맞긴 했다. 인터넷 열심히 뒤져가며 레시피를 찾아보고 실패할까봐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친 후 내놓은 음식들이라는 걸 아이는 아마 모를 테지. 묵묵히 자리에 앉아 순가락을 든 아이가 밥을 한 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반찬과 같이 입 안에 넣은 아이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을 만 하네."

"헹, 순순히 맛있다고 하는 게 어떠냐."

"열심히 했다니까 특별히 먹어는 주지."

"…넌 정말 얄미운 꼬맹이야."


새삼. 그렇게 대꾸하며 아이는 계속 밥을 먹었다. 꺼낸 지 얼마 안 됐는지 밥은 무척 따뜻하고 야들야들했다. 그걸 씹고 있자니 아이는 마음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치받아 오르는 감정에 목이 턱 막혀왔다. 억지로 무시하고 반찬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아, 그리고."

"…?"

"생…. 흠흠. 생일 축하한다, 어쨌든."

"…."

"…어?! 야, 너 왜 울어?!"


쑥스러운지 그 뒷말을 잇지 못하던 남자는 갑자기 눈물을 울컥 터트리는 아이에 기겁했다. 그렇게 맛이 없었나? 분명히 이미 자신이 간을 다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괜시리 불길해졌다. 있는 거라곤 자존심밖에 없는 이 꼬맹이가 왜 갑자기 이러는가 이 말이다. 어지간한 일로는 눈물 한 방울 안 보이는 독종이.


"어, 어이. 맛없으면 억지로 안 먹어도…."

"…고마워."

"뭐? 뭐라고 했어? 야, 일단 뚝 그치고 좀…!!"


아이의 목소리는 아주 작아서, 차마 남자의 귀에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쩔쩔매며 아이를 달랬지만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속 밥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생일 같은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잊고 살았는데. 기억해봤자 어차피 챙겨줄 사람도 없을 테고, 그런 걸 기억하고 살기에는 제 앞가림 하기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도 기억 못한 생일을 기억해준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기쁜 걸까.


너무 오래 악을 쓰고 살아온 탓일까, 제가 아직 어리다는 것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나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실, 생일이라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이런 기념일을 챙겨줄 만한 누군가가 제게도 생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벅차오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혼자인 게 괜찮을 리 없으니까.


혼자라는 사실을 감당하기 힘들 때가 아예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가끔씩 정말 세상에 저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지독할 만치 몰려오는 외로움을 감당하기 힘들어, 절로 손끝이 차가워지곤 했다. 끊임없이 괜찮다고 세뇌하면서 제 마음을 부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으니까. 쭉 혼자였고 사람과 어울리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막연한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눈물 젖은 눈으로 아이는 제 눈 앞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저를 걱정하는지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무척 기뻐서, 슬며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남자 몰래 살짝 웃으며, 아이는 생각했다.


오늘은 그래도 평소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하루인 것 같다고.



===


리야님 생일 축하드려요~!!

오늘 다행이 시간이 나서 짤막글!! 다른 분들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받아주셔요(수줍수줍

투림빵을 받고 싶으시다기에 적어 보았...(과연 투림인지는 의문입니다만 ㅎㄷㄷ


헤헤 행복한 생일 되세요^ㅁ^

Posted by I.R.E
,

1. 잔향(殘香): 남아 있는 향기.


2. 잔향(殘響): 실내의 발음체에서 내는 소리가 울리다가 그친 후에도 남아서 들리는 소리. 실내 음향 효과를 내는 데 중요한 현상으로, 음악은 1.5~2.5초, 강연에서는 1~1.5초가 적당하다.


[비슷한 말] 뒤울림.




※ 잔향의 테러 기반으로 한 썰. 잔테를 보시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됨요 훠이훠이.






1.

일단 여기에는 자캐 여자애 한 명 등장하는 게 좋겠더라. 사실 상황을 보면 꼬강이가 리사하면 참 좋겠지만 그러면 나머지 배역이 곤란해지므로 일단 자캐 여자애 등장. 이름은 적당히 시아로 하자. 착하고 조곤조곤하니 말씨 곱고 머리카락은 긴 청순한 여자애. 공부는 꽤 하는 편인데 말주변은 별로 없고, 존재감이 굉장히 희박한 아이.


아무튼 시아는 어릴 적부터 부모로부터 온갖 학대를 받았던 아이? 로 설정. 애가 어릴 적부터 폭력을 당하다 보니 굉장히 소극적이고 음침하게 되어서 학교에서도 그리 주목을 받는 애는 아님. 그렇다고 왕따는 아니고 그냥 가까이 가기 꺼려지는 애? 뭐 그 정도랄까. 친구가 없어서 혼자 다니는 거 말고는 학교생활은 문제가 없어. 굉장히 존재감이 없어서 잊혀지기 쉬운 아이야. 사실 그게 독이었던 게, 이 여자애는 집에서 당하는 학대에 대해서 누구한테도 의지할 수가 없었어. 한 번 선생님한테 말했던 적이 있는데 그 선생이 처신을 잘못해서 시아는 집에서 죽도록 맞아야만 했어. 그 때문에 어른한테는 절대 마음을 열지 않아.


그리고 또 하나 비밀이 있는데. 시아는 사실 귀신을 볼 줄 알아. 외가 쪽이 그쪽 계통이라 어렸을 때부터 발현한 능력이지. 사실 이건 아이가 어두운 방과 인연이 깊어서이기도 해. 어두운 방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일 때가 많아서 빛보다는 어둠과 친했지. 사실 그 때 령충들같은 애들이랑 놀아서 얘는 사실 령충에는 거부감이 없는 아이야.


그러던 시아가 어느 날 꼬강이를 만난 거야. 여기서 꼬강이가 트웰브 역할을 하는 거지. 학원에 가야 해서 서두르고 있는데 앞을 잘못 보고 넘어져서 펜이랑 가방 내용물들이 다 굴러떨어짐. 그런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황급히 주워담고 있는데 앞에서 누가 같이 주워주는거야. 그래서 고개를 들었는데 굉장히 귀엽게 생긴 남자애였어. 나이는 자기 또래? 한 18살 정도 되어보이는.(여기서 꼬강이는 18살) 근데 입을 여니까 약간 말씨가 난폭하긴 한데 묵묵히 주워주는 걸로 봐선 나쁜 애는 아냐.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령충이 나타나서 시아 가방에 달라붙었거든. 무의식중에 시아가 그걸 털어내는데 꼬강이가 그걸 보고는 약간 놀란 눈초리로 보는거야. 빤히 바라보는 눈초리를 보니까 시아는 설마 이상해 보이나? 들킨 건가 싶어서 좀 무안했지만 꼬강이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그냥 이상한 애다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겼지.


아무튼 그런 꼬강이가 참 고마웠던 시아는 답례라고 하면서 자기가 먹으려고 가져온 초콜릿 상자를 건네. 내 이름은 시아인데 넌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까 갑자기 앞에서 누가 꼬강이를 불러. 그게 강림이인 건 시아는 나중에 알지. 어쨌든 그 목소리 듣고 꼬강이는 지금 가봐야겠다고 얼버무리며 초콜릿 잘 먹겠다고 웃으면서 무리 속으로 사라져버려.


그런데 며칠 후에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가게 된 거야. 장소는 63빌딩. 근데 다들 짝짜꿍 다니지만 시아는 친구가 없어 혼자니까 그냥 혼자 돌아다니면서 감상하고 자료 수집하고 그랬지. 그런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비상통로로 들어가게 되었어. 호기심이 생긴 시아는 비상계단을 내려가보는데 거기서 먼젓번 그 남자애를 또 만난 거야. 바로 꼬강이. 그런데 남자애가 이상한 인형을 들고 있어. 근데 그 인형이 자기랑 놀던 령충들이랑 너무 닮아 있는 거야. 놀라서 시아는 말을 더듬어.


"그... 인형은...?"

"아하, 너 역시."


보이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개구지게 웃는 얼굴에 시아는 약간 무서워졌어. 보이냐고 말하는 건 이 남자애도 자기랑 같은 걸 본다는 거잖아. 놀라는 시아에게 꼬강이는 자기가 품에 들고 있던 령충인형을 그녀에게로 던져. 그냥 받아드는 시아에게 꼬강이는 소중히 다루라고 말하면서 유유히 계단을 내려가. 그리고 시아는 그걸 보고만 있어. 인형을 손에 꼭 들고.


한편 꼬강이는 내려가면서 전화를 걸어. 상대는 강림이. 무슨 일이냐고 강림이가 묻는데 꼬강이가 웃으면서 말해.


"우리랑 같은 걸 보는 애가 있어."

"..."

"흥미롭지 않아?"

"퍽이나."


냉정하게 자르는 강림이에게 꼬강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근데 그 아이도 몸 상태는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고 말해. 교복 사이사이에 숨겨진 멍이랑 상처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알아본거야. 강림은 잡소리 그만하고 빨리 빠져나오라고, 곧 시작되니까. 라고 말해. 그리고 꼬강이는 건물 내부를 정전시켜. 다들 우왕좌왕하는 틈에 꼬강이는 령들의 도움을 받아 쉽게 밖으로 나오고, 강림이와 만나지. 그리고 강림이는 스위치를 눌러. 그러자 꼬강이가 군데군데 설치해둔 인형폭탄들이 터지기 시작해. 다만 비어있는 층들에 설치한데다가 사전에 정전소동을 일으켜서 대부분 대피했기 때문에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고, 빌딩도 무너지지 않아. 기둥을 죄다 피했거든. 이건 일단 테러의 프롤로그 격이니까.


그런데 다들 도망가는 중에서도 시아는 아직 건물 안에 있어. 그걸 눈치챈 강림이는 할 수 없이 약간 부적? 같은 걸 써서 영파를 연결하는 주술을 써.(둘 다 주술이 가능하지만 더 뛰어난 건 강림이.) 한 번 본 사람이면 대충 영파를 기억하고 감지해낼 수 있어.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놀라는 시아에게 딱 잘라 말해. 살고 싶냐고. 그리고는 말하지.


"살고 싶지? 그럼 선택해."

"..."

"공범자가 될 것인지, 그냥 그렇게 살다 죽을 건지."


애가 학대를 받고 사는 거 같다는 걸 들은 강림이도 생각이 좀 있었던 거야. 어쨌든 자신들을 본 것도 사실이지만 일단 자신들과 같은 걸 보고 산다는 것에 나름의 동질감이 들었던 거지. 물론 동료애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연민 정도. 그래서 선택하라고 하는데 시아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말해.


"살고 싶어!"


그 말을 들은 강림이는 지시를 내리기 시작해. 일단 4층까지 내려와서, 그 령충 인형을 창문 근처에 두라고. 그리고 숨으라고. 재빨리 지시대로 하자 폭탄이 또 터져. 그리고 밑에는 꼬강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해맑게 웃으면서 뛰어내리라고 말해. 무서워하던 시아는 결국 뛰어내리고 꼬강이에게 안겨.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강림이한테로 가. 그리고 강림이는 다가온 시아에게 말하지.



"이제 되돌릴 수 없어. 넌 공범자니까."






===


썰도 막 지어내려니까 쉬운 게 아니네요 ㅋㅋㅋ 헷갈려 ㅂㄷㅂㄷ 더 풀기엔 너무 늦었으니 자야겠다 ㄷㄷ


여기는 캐릭터를 정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ㅋㅋㅋ 근데 아마 시바사키는 바리가 될 거 같고 화이브는 사라가 될 거 같아요 ㄷㄷ;;


사실 시바사키랑 나인의 유대감이 좀 상당하길래 강림이랑 바리 콤비가 좋겠다 싶었거든요 ㅇㅇ 집착은 역시 사라로...ㅋㅋㅋㅋㅋㅋ 사라만한 캐릭터가 없어요..ㅠㅠ


사실 잔향의 뜻을 두 개 적어놨는데 일단 잔향의 테러는 2번째 뜻에서 나오는 그 잔향을 씁니다. 제 생각에는 세상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나인과 트웰브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ㅇㅇ 테러를 하면 그 기억은 굉장히 오래 남으니까요. 그렇게라도 기억되고 싶었던 거리라 생각합니다 ㄷㄷ;;



 



Posted by I.R.E
,

* 에나님의 이메레스를 보고 적었습니다.
* 샤크 의인화. 모델임.






"아이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
"엥?"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갔다. 이제 갓 5살이 되었을 법한 귀여운 여자아이가 배우들을 향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모처럼 추석이라 온 스태프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상황이었다. 누가 데려왔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꼬마강림은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소녀가 붙잡은 옷자락을 빤히 내려다보던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너 지금 그거 나한테 묻는거냐?"


대충 알긴 알지만 차마 제 입으로 뱉을 수가 없어, 꼬마강림은 옆에 서 있던 강림도령을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평소에는 눈치도 없더니 용케 신호를 알아들은 강림도령이 그들을 돌아보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툭 말을 던졌다.


"...? 모르겠는데. 바리한테 물어봐."


녀석이라면 알겠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받아친 강림도령이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그래도 궁금하긴 했는지 먹으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실상 자연스럽게 바톤을 넘겨받은 바리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소녀에게 어찌 대답해줘야 하나, 난감한 모양이었다.


"네? 아, 아기요? 하, 하하. 글쎄요. 그,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
"뭐야,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있구먼?"


기대되는지 헤헤 미소짓던 여자아이를 번쩍 들어올린 건, 마침 이제 막 스케줄을 끝내고 돌아온 궤네깃또였다. 사람 좋게 껄껄 웃는 그를 따라 소녀도 따라 꺄르르 웃었다. 주의를 돌렸다 싶어 다행이라 생각하던 바리가 안도하며 물을 마시는 순간, 궤네깃또가 던진 폭탄발언에 그녀는 장렬히 물을 뿜을 뻔했다.


"s*x지, 역시. s*x!"
"궤, 궤네깃또님?!!"
"콘돔 안 끼고 하면 생긴다."
"사라도령!!"


할 땐 끼고 해라. 아무렇지 않게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하던 사라가 무심히 대꾸했다.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꼬마강림은 재빨리 소녀를 받아들고 귀를 손으로 막아주었다. 여자아이는 다행히도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노려보던 바리와 꼬마강림의 눈초리에 더불어,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본 사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 재밌는 이야기를 하네."
"...샤크."


옆 세트장에서 화보를 찍던 샤크가 마고와 같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그녀와 촬영한다던 상대가 이 녀석이었나. 귀찮게 되었다고 짜증스레 인상을 구기는 사라와는 달리 샤크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안 끼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


짓궃은 농을 던지는 샤크에게 사라는 싸늘하게 웃으며 가운데손가락을 들어주었다.


"엿이나 먹고 떨어져."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씨를 아무데나 뿌리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에이, 어차피 아이가 생길 일도 없..."
"닥쳐."


그와 동시에 날아오는 포크를 샤크는 몸을 돌려 피했다. 언제나처럼. 더 말하기도 귀찮았는지 다시 몸을 돌려 떡을 집어먹는 사라에게 샤크가 달라붙는다. 그 와중에 전후 사정을 들은 마고가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싱글벙글 웃는 그녀의 모습에 불길해진 바리가 여자아이의 손을 잡았다.


"어머, 아기? 그건 이 언니가 전문이지~ 어디서부터 알려줄까?"
"안 돼요!"


머릿속에 빨간 경고등이 켜진 바리가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꼬마강림이 아이를 등 뒤에 감췄다. 섭섭하다는 듯한 마고의 표정에도 바리는 꿈쩍 않았다.


"어머, 왜?"
"...왠지 불길해요."
"에이, 치사하긴."


그 모든 소동을 마무리한 건 정말로 의외의 인물이었다.


"아, 저 알아요!"
"아이는 황새령이 물어다주는 거잖아요!"
"진짜?"
"제가 봤는걸요? 헤헤."


원천강이는 무릎을 굽힌 채 아이에게 해맑게 웃어준다. 그녀가 웃는 얼굴에 믿음이 갔는지 소녀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따라 웃었다. 그 모습에 동심을 지켰다는 생각에 대부분의 이들이 안도했으나, 그 가운데 표정이 우울해진 사람이 있었다. 바로,


"왜 나한텐 안 물어보는거지..."


배우들 중에서는 가장 어린 축인 염라의 한탄과 더불어 답을 찾아 기분좋게 웃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고스트메신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림] 생일상  (0) 2014.10.23
[고스트메신저] 잔향의 테러 1  (0) 2014.09.30
[고스트메신저][無커플링] Momento Mori  (0) 2014.08.30
[투림] 캠퍼스 로맨스 - 야작  (0) 2014.08.27
[투림] 이름  (0) 2014.08.24
Posted by I.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