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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마리] 특별한 순간





짧은 낮이 지나가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남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이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차분히 가라앉았다. 점점 짙어져가는 푸른빛 사이로 새까만 어둠이 스며나와 번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두워진 하늘 아래에는 도시가 있었고, 수많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닥쳐올 차가운 밤을 준비했다. 무법자처럼 길거리를 누비는 싸늘한 바람들의 공격에 사람들은 황급히 거리를 떠나 따뜻하게 빛나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래, 보통이라면 분명 그러했겠지.


똑똑,


숙제를 하고 있던 중, 마리네뜨는 난데없이 들리는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창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겨울이라 그런지, 차가워진 밤공기가 하이얀 서리를 그려넣은 유리창 너머로 히죽 웃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검은 타이즈를 빼입은 소년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놀라서 재빨리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블랙캣!"

"여어, 공주님."



안녕?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는 눈가가 작게 일그러져 있었다. 유달리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나, 웃고는 있지만 유달리 경직되어 보이는 입매는 아무래도 추위 때문인 것 같았다. 봉에 매달린 채, 블랙캣은 정중한 말씨로 마리네뜨에게 요청했다.



"아니, 음. 일단 좀 들여보내 주지 않을래? 생각보다 추워서."

"아니, 어, 빨리 들어와요!"



허락이 떨어지는 것이 무섭게 그는 잇챠, 소리를 내며 매달려 있던 봉을 창문 쪽으로 턱 기울였다. 봉이 창문에 걸리고 블랙캣은 스르륵 소리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곳으로 들어오니 살겠는지 부르르 몸을 떠는 블랙캣의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태평했다.



"열어줘서 고마워."



추워 죽는 줄 알았네.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블랙캣의 모습이 어이없다는 듯이, 마리네뜨의 눈초리가 가늘게 접혀졌다. 당연한 거 아냐? 미쳤다고 이 날씨에 저런 차림으로 돌아다녀?



"이 날씨에 그렇게만 입고 있으니 당연히 춥죠!"

"오우, 아니. 뭐 그 정도는 아니었다구?"



퍽이나 그러겠다.


허세를 부리는 것도 참 여전했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마리네뜨는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너무 많이 말하다보면 제 정체를 눈치챌지도 모른다. 적당히 맞춰주다 보면 가겠지. 아니, 그것보다.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어, 아. 그게…."



말끝을 흐리는 블랙캣에 온갖 부정적인 상상들이 마리네뜨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악당이 또 설치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 그럼 얘가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 헉, 설마 저번 나타니엘 때처럼 날 노리기라도 하는 거야? 하여튼 이놈의 인기란. 아아니 이게 아닌데!!


저 모든 생각들이 폭풍처럼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뇌하고 있는 마리네뜨와 달리 그의 대답은 꽤나 싱거웠다.



"으음, 글쎄~!! 그냥 와야겠다 싶어서?"

"…그건 또 뭐예요."

"아, 혹시 숙제하고 있었어? 어디 좀 보자."

"악, 저저리 가요!!"



깜짝 놀라 말을 더듬던 마리네뜨가 블랙캣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마리네뜨의 공책을 집어든 뒤였다. 흐음, 작게 탄성을 흘리며 공책 위를 대강 눈으로 훑던 블랙캣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기, 이거 틀렸어."

"에?"

"이건 x가 아니라 y를 대입해야지. 그리고 이건 아예 공식을 다른 걸 써야 하잖아."



책상에 있던 볼펜을 집어들고, 그는 슥슥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내렸다. 한참 뒤 자, 라고 말하며 블랙캣은 마리네뜨에게 공책을 내밀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블랙캣의 얼굴에 마리네뜨는 반신반의하며 공책을 펴서 안을 확인했다.



"…진짜 맞았잖아."

"그치?"



식도 자신이 쓴 거에 비해 훨씬 간결하고 깔끔했다. 얘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나? 의심하는 눈초리로 블랙캣을 요모조모 살펴보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머리에 달린 귀를 쫑긋거리며 칭찬을 기다리는 듯 밝게 웃는 얼굴에 마리네뜨는 결국 픽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네요."

"그럼, 난 대단하다고."

"네, 네. 근데 보시다시피, 저 지금 숙제해야 하거든요?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주시지 않겠어요?"



뭣보다 여자애 방에 함부로 쳐들어오는 것부터가 좀 그렇지 않냐 이거다. 열어준 건 자신이라지만. 살짝 노려보는 마리네뜨의 시선에도 블랙캣은 여전히 꿋꿋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 곧 눈을 반짝거렸다.



"아, 그래. 이왕 이렇게 온 김에 그 숙제, 도와줄까?"

"됐거든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아까 문제 거의 다 틀렸던데, 정말 괜찮겠어?"

"윽."



확실히 수학은 자신없는 과목이긴 했다. 그러나 마냥 고맙다고 하면서 도움을 받기엔 여러모로 찜찜한 기분이 들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그저 눈동자를 데굴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마리네뜨를 지나 블랙캣은 바닥에 있는 작은 책상쪽에 앉았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깜빡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여서, 결국 마리네뜨는 백기를 들었다. 이 날씨에 곧바로 쫓아내기도 좀 그랬고.


그의 맞은편에 주저앉으며 공책을 펴자 시선이 따라붙었다. 싱글거리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워진 마리네뜨는 일단 쐐기를 박았다.



"이거 다 풀면 진짜 돌아가요."

"응? 너무 매정한 거 아냐?"

"…설마 저희 집에서 자고 가기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죠?"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고."



지금 본인이 상당히 뻔뻔하다는 건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절로 골이 땡기는 걸 느꼈지만, 마리네뜨는 한숨을 쉬며 다시 문제를 푸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런 마리네뜨를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던 블랙캣의 시선이 그녀의 방 안을 훑었다. 10대 소녀답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 안은 확실히 여러 가지 물건들로 가득했다. 침대나 컴퓨터, 책상, 서랍은 물론 구석에는 온갖 물건들이 담긴 박스들도 널려 있었다. 개중에는 그가 처음 보는 물건들도 수두룩했다. 여자들은 이런 방에서 사는구나,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블랙캣의 눈동자가 벽에 붙은 사진들을 보고 몇 번을 깜빡거렸다.


햇살같은 금발과 밝게 웃는 미소를 가진 소년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여러 장이 붙어있는 걸 봐서는 우연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저게 뭔지 물어보려고 하다가, 블랙캣은 곧 살짝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거둬들였다. 여전히 문제에 집중하고 있던 마리네뜨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마리네뜨를 지켜보는 블랙캣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당연스럽게도, 마리네뜨는 그런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막힌 문제가 있는지 한참을 끙끙대던 마리네뜨가 고개를 들어 블랙캣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들고 있던 펜으로 이것저것 적어주는 블랙캣의 모습이 새삼스러워,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한테 이런 면도 있었나. 뭐, 좀 멋있긴 하네. 생각하고도 놀라서 마리네뜨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무슨 멋있다야! 나한텐 아드리앙밖에 없다구!


그렇게 몇 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계속 숙제를 하다가,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블랙캣은 평소랑 달리 이상하게 말이 없었는데다, 의자가 아닌 따뜻한 바닥에 앉아서 못하는 과목숙제를 하고 있자니 졸음이 오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몇 번 고개를 까딱거리다, 언제 잠들었나 모를 정도로 마리네뜨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뭔가가 제 머리카락 위에 닿았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베시시 웃었을 뿐인데, 이마에 살짝 부드럽고 따뜻한 게 닿았….



"…헉!"



차가운 책상의 감촉에 마리네뜨의 눈이 퍼뜩 떠졌다. 푸른빛 눈동자가 당황으로 얼룩져 급하게 깜빡거렸다. 뭐지, 방금 뭐였지?! 이마에 뭔가 부드러운 게 닿았던 것 같은데? 그런 그녀의 모습에 블랙캣이 이상하다는 듯이 갸웃거렸다.



"깜짝이야. 잘 잤어?"



공주님. 웃고 있는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었다. 가볍게 던져진 그 한 마디에 괜히 창피해져서, 마리네뜨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가 요즘 외롭나? 이런 착각이나 하고. 그럴 리가 없지.


이 녀석이 나한테 키스따위를 할 리가 없잖아.


내가 이렇게 가벼웠었나? 아니, 나름 일편단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블랙캣이 날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레이디버그일 때의 일이고. 지금은 마리네뜨잖아! 아니, 마리네뜨. 생각해봐. 착각이야. 너한텐 아드리앙이 있잖아. 블랙캣은 그냥 파트너일 뿐이고, 그 이상의 감정은…. 뭐야 이거 뭔가 이상하잖아?! 으아아!!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온갖 자학을 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말없이 쳐다보던 블랙캣의 눈매가 작게 일그러졌다. 감추지 못한 동요를 마저 지워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던 블랙캣의 시선이 문득 창가를 향했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살짝 멍하게 일렁였다.



"…눈이다."

"어?"



그의 말이 맞았다. 블랙캣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곧바로 보이는 창 밖으로 하얀 눈송이들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마리네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내린 눈이니까, 첫눈인가? 내리는 기세를 보니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엄청 쌓일 것 같았다. 아마 바닥도 얼겠다. 내일 조심히 걸어다녀야지. 눈은 쌓이면 보기는 좋지만 막상 나다닐 때는 불편한 게 문제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마리네뜨는 힐끗 블랙캣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아무런 말도 없이, 두 사람은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새하얗게 흩날리는 눈꽃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중 몇은 나풀나풀 떨어지며 창가에 소복히 쌓여 점점 부피를 늘려나갔다. 매섭게 불어닥치는 바람도 지금은 좀 잠잠해졌는지 창문이 덜컹거리던 소리도 멎어 있었다. 정말 고요했다. 


그 침묵을 깨버린 건 블랙캣의 한 마디였다.



"아, 난 이만 가볼게."

"…가요? 이 날씨에?"

"뭐야, 걱정해주는 거야?"

"아니, 뭐. 솔직히 추울 거 같고…."



집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 날씨에 눈까지 맞고 들어가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눈이 그치고 나서 가는 게 좋지 않냐는 마리네뜨의 제안에도, 블랙캣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괜찮아. 문제도 거의 다 풀었고, 나머지는 공주님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을거야."

"아, 어, 그, 그럼…."



장난스레 미소짓는 얼굴로 블랙캣은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붙잡고 일어나라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오늘의 그는 왠지 이상했다. 막연한 예감에 마리네뜨는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어떻게 자신의 숙제 내용을 알고 있는지, 왜 마리네뜨인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구는 건지, 결국 그가 뭐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지,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그 어떤 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마리네뜨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시리게 얼어붙은 창문을 툭 건드려 열자, 베일 듯이 차가운 공기가 훅 얼굴에 번졌다. 그에 얼굴을 찌푸리는 마리네뜨와 달리 블랙캣은 개운하다는 얼굴로 짧게 기지개를 켰다. 마치 고양이처럼. 아니, 고양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첫눈이라.



"맞다. 블랙캣!"

"…?"

"첫눈이 올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던데. 뭐, 빌고 싶은 소원 있어요?"

"소원이라면 있지. 근데 됐어."

"왜요?"

"이미 이루어졌거든."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하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딘지 즐거워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니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캐묻는 것도 아니다 싶었으니까. 창틀에 발을 올리고 봉을 꺼내들던 블랙캣이 아, 탄성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맞다. 역시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아까 대답."

"?"

"보고 싶어서.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네."



고마워.


그 한 마디와 함께 블랙캣은 눈이 펑펑 내리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고,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 그의 대답에 살짝 멍해있다가, 다음 순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하앗?! 비명을 지르며 말을 더듬거렸다. 어색해진 기분을 달래려는 듯 막 중얼거리던 그녀가 제 옆으로 다가온 티키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창문 밖으로 드러났다. 떠드는 목소리들은 다시금 불기 시작하는 바람 소리에 잊혀지고, 지워진다. 창문 곁에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이유는 살갗을 에일 듯 차가운 겨울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새하얀 눈의 장막 안에서,

찰나의 기억은 무언가의 감정을 품고, 그렇게 스치듯 지나갔다.


마치 둘만의 비밀처럼.







===


그리고 블랙캣은 감기에 걸렸습니다~ㅇㅁㅇ~ 메데타시 메데타시!


<렐님의 캣마리 100제 24번. 맨디님 의견도 참고했습니다!>


후후 살며시 숟가락을 얹었습니다^_^)>

오랜만에(?) 캣마리가 쓰고 싶길래 간단히 써보았어요. 여기서 블랙캣은 마리네뜨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블랙캣에게 소원은 꽤 많지만, 그 중 하나라면 그녀와 같이 첫눈을 보는 거였던 걸로. 첫눈을 같이 본 연인들은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이미 사귄다는 설정으로 넣을까 했는데 글의 절반을 쓰고 나서야 저게 떠올라서...OTL...


참고로 도둑키스 한 거 맞아요 ㅇㅇ 이마에 했습니다 ㅎㅎ 이번 글은 좀 아련하고 어딘지 모르게 잔잔한? 느낌으로 적어보고 싶었는데 되었을까요 ㄷㄷㄷ 마무리에 10분을 넘게 고민했는데ㅠㅠㅠㅠㅠㅠ


끄읕>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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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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