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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재판글 공지를 다시 복붙했습니다. 폼 링크는 달라요!

레이디버그 2D 소설 Un Autre 의 재판본 공지입니다. (블로그 서치로 오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설명을 올려요.)

+ 최소 수량이 채워지지 않을 경우 전액 환불해드립니다!

 


커플링은 펠릭마리이며, 2D 트레일러 내용을 토대로 2D에서 나올 법한 내용 전체를 재현하는 전개로 진행됩니다.

2D 트레일러의 유투브 주소는 여기>> https://www.youtube.com/watch?v=FlwV3scCgAM


2D 트레일러는 2012년에 나온 트레일러로, 현재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레이디버그의 초본쯤으로 생각하시면 편하실 거예요!

좀 어린 연령층을 타겟으로 제작된 3D와는 달리 2D의 분위기는 좀 어둡습니다. 원래는 성인층을 타겟으로 정치적 요소가 들어간 다크한 작품이었다고 하거든요.


일단 내용이 좀 많이 어둡고 현실적입니다.

애들의 내면 갈등은 물론이고, 이 세계관에선 '신비한 치유의 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건물도 많이 부서지고 인명 피해도 조금 발생하며, 살인도 벌어집니다. 주인공 애들도 좀 다쳐요. 물론 그렇게 많이 다치지는 않습니다. 히어로물이지만 정치적인 내용도 다수 나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두뇌싸움이 많이 나오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장면도 심심찮게 나옵니다. 히어로물인 만큼 꿈과 희망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분위기는 3D에 비해 훨씬 무겁고 어두워요. 2D 트레일러의 분위기에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했으니 분위기는 트레일러를 참고해주시면 됩니다!



<본편>

 

총 2권 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봄부터 겨울까지, 총 1년에 걸쳐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테마는 계절입니다.


1권에서 봄~여름(413p), 2권에서 가을~겨울(438p),

총 851p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계절 파트마다 6에피씩, 본편만 총 24에피입니다.


구성: 본편 24에피 + 외전 2개(책마다 하나씩) + 에필로그 + 축전 + 후기

 

가격은 두권 세트(set)에 70000원입니다.

초판의 오타와 비문들을 다 수정한 버전이며 소량 재판이라 인쇄비가 꽤 나갑니다.

세트 단위로 판매하는 이유는 저 두 책은 너무 페이지가 많아서 분권했을 뿐, 원래 한 권이기 때문입니다.


 

※ 주의사항

일단 2d가 정말 자료가 없는지라, 트레일러를 분석해서 스토리를 짰지만, 제 주관적인 해석과 창작적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레일러에 기반했지만 일단 제 취향이 많이 들어가 있는지라, 구매하실 때 그 점을 분명히 명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3D에서 준 설정을 일부 차용했으나 스토리 자체는 3D와 전혀 다릅니다. 어둡고 가치관 갈등에 대한 서사가 많이 드러납니다. 분위기가 안 맞을 수도 있으니 가급적 샘플을 읽고 구매를 결정해주세요.


회당 30-40페이지라는 제약이 걸려 있기 때문에 전개가 상당히 빠릅니다. 현실적인 방향을 지향했지만 조금 의아하다 싶으신 부분들도 있을 거 같아요. 특히 마리네뜨와 펠릭스의 과거사는 자그툰에서 이야기했던 떡밥을 배경으로 구성했지만, 제가 회지를 쓰던(16년도 여름) 당시에는 정보가 너무 없었기 때문에 캐해석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ㅅ; (아트북도 나오기 전인 시기였습니다)


 

만 15세 이상부터 구매가 가능합니다.

위에 적어드렸다시피 내용이 너무 어둡고 가치관이 단순하게 굴러가지 않기 때문에 만 15세 이상으로 제한을 두었습니다.

딱히 수위가 있어서는 아니고 다소 잔인한 묘사가 좀 들어갈 수 있다는 점과, 내용 일부에서 전연령이라 보기 힘든 몇몇 부분들이 있어서 15금으로 결정했습니다.


샘플은 이쪽을 ↓

01: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1

02: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2

03: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3

04: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4

05: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5

06: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6


07: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7

08: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8

09: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9

10: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10

11: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11

12: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12


6편까지가 봄 에피소드이며 7~12가 여름 에피소드입니다.

봄을 프롤로그로 봐주시면 되고, 여름부터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됩니다.


재판본 판매 폼: http://naver.me/GLYDvP3B

문의사항은 이 게시글의 댓글창이나 제 트위터 디엠, 멘션으로 주시면 됩니다.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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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공지

레이디버그 2019. 1. 13. 13:42

블로그를 방치해놓고 있다가 회지 관련 마무리가 되어가서 간단한 공지를 적어봅니다.


와주시는 분들이 레이디버그랑 고스트메신저 관련으로 오실 것 같다고 예상하고는 있는데요. (가장 연성이 많은 두 장르라서) 제가 지금 고스트메신저는 연성을 안 하고 있구요, 레이디버그는 옮긴 포스타입 블로그에서 깨작깨작 연성하고 있습니다. 써둔 글들을 여기로 좀 옮겨올까 했는데, 포스타입으로 옮긴 가장 큰 이유가 외부에서 글이 서치가 안 된다는 점이었기 때문에...(먼산 딱히 눈에 띄고 싶지 않거든요 덕질은 조용히 하는 게 최고라는 마인드라서(...) 방문해주시는 여러분 고로 연성에 대해서는 포스타입 블로그도 같이 참고해주세요 공지에도 있지만 주소는 여기 > https://rinelee.postype.com/


그리고 나타마리는 언제 다시 연재 재개하긴 하려고 하는데 여기서 시작한 이상 끝까지 여기서 마무리지을 것 같아요. 흐름만 짜놔서 손 가는대로 쓰는지라 에피소드 구성은 쓰는 저도 미래를 모르지만 말이죠.

다른 단편들은 포스타입에만 올릴 것 같습니다:) 이번 회지 끝나고 장르에 당분간 손 뗄 거라 예정해둔걸 제외하면 레벅 연성을 더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하니 오시는 분들이 혼란스러우실 것 같아 공지를 띄웁니다.


그리고 펠릭마리는 1권 분량은 그냥 블로그에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재판예정이 전혀 없다보니 비공을 할까 고민했는데, 솔직히 마이너란 연성이 없어 고달픈 세계인데 저까지 연성을 비공개하면 후발주자 분들이 정말로 고통받으실 것 같아서요..(애초에 이짓을 시작한 이유도 자급자족이었다)

언제나 말씀드리듯이 블로그 밖으로 무단 전재 및 복제, 도용은 일체 금지합니다. 관련 문제가 터질 시 글을 전부 비공개로 돌릴 수 있습니다:)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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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들 샘플

레이디버그 2018. 12. 24. 23:09


1. The cat who leapt through Time


미래의 블랙캣이 과거의 마리네뜨와 만나는 이야기

54p / 6000원



<표지>



2. Once upon a Time


괴물 블랙캣과 소녀 마리네뜨. 동화 AU

82p / 9000원

 


<표지>



뒷내용 샘플 : http://eclilps.tistory.com/entry/OUAT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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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은 비밀


 

 

아침이었다.


안녕, 마리네뜨?”


살갑게 인사하며 제게 팔짱을 끼는 알리야를 향해 마리네뜨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안녕!”

오늘따라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오늘 들어 있는 수업이 좀.”


가기 싫어서. 작게 중얼거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알리야는 지긋이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마리네뜨 네 오늘 시간표상 수업은. 어라, 너 그 교수님 꽤 좋아하지 않았어?”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 알리야에게 마리네뜨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 ……작품은 여전히 마음에 드는데.”

드는데?”

가브리엘 씨를 너무 좋아하셔.”

아하.”


이해했는지 알리야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 친구의 눈치빠름에 감사하며 다시 걸으려던 찰나, 알리야가 다시금 마리네뜨를 꼭 붙잡았다. 이번엔 무슨 일인데? 힐끔 돌아보자 씨익 웃고 있는 알리야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불길하다.


그나저나 어제는 무슨 일이야~?”

어제?”


갑자기 이건 뭔 소린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알리야는 재미난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신난 얼굴로 마리네뜨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너희 학과 애가 그러던데? 어제 네가 어떤 꽃미남이랑 웃으면서 대화하는 걸 봤다고~”

꽃미남?”


얘는 언제 그런 얘기를 들은 거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아~, 라는 탄성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혹시, 나타니엘 얘기해?”

뭐야, 진짜였어?!”


언제 나 모르는 새에. 마치 제 엄마처럼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알리야를 보고 마리네뜨는 한숨을 쉬었다. 어서 정정해주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오해가 퍼질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야. 너 나타니엘 기억 안 나? 나타니엘 커츠버그.”

나타니엘?”


잠깐 고민하던 알리야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 그게 누군데?”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애.”

아아, 그랬던 것 같기도?”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 알리야를 보고 마리네뜨는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긴 자신도 좀 생각하다가 겨우 떠올렸을 정도였으니.


저기.”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마리네뜨와 알리야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훤칠한 키에 느슨하게 묶은 길고 붉은 머리칼을 가진 청년의 손에는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나타니엘이 멋쩍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안녕?”

안녕, 나타니엘!”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나타니엘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나타니엘이 설핏 미소지었다.


일찍 나왔네. 수업이야?”

그렇지 뭐. 클로드 교수님 수업 들으러 가는데, 너는?”

, 같은 수업이구나.”

너도 이 수업 들어?”


나타니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리네뜨가 왜냐고 묻기도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시간이 맞는 게 이 수업뿐이라서.”

, 혹시 같이 앉는 사람 없으면 나랑 같이 들을래?”

그래도 돼?”

물론이지.”


밝게 웃는 마리네뜨를 한참 쳐다보던 나타니엘이 엷게 미소지었다.


그래, 그럼.”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리야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마치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반짝였다.


그으럼, 난 이쯤에서 먼저 교실로 가 볼게?”

, 알리야?”

동창끼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붓하게 얘기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

저기, ! 너도 같은 동.”


창이라고. 내뱉지 못한 단어들이 입술을 떠나기도 전에 알리야는 두 사람 곁을 지나 학교 건물로 뛰어가고 있었다. 방금 알리야의 얼굴이 웃고 있었던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 띠리링 소리가 울렸다. 생각 없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알림을 확인하자, 알리야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중에 얘기 들려줘~]

무슨 일이야?”


불쑥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다시 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나타니엘을 쳐다보았다. 제법 훤칠해진 그를 살짝 올려다보며 마리네뜨는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곤란해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을 뭘로 해석했는지 나타니엘은 더는 묻지 않고 손가락으로 건물 입구를 가리켰다.


그나저나 갈까?”

, 그래!”


밝게 미소지으며 자신을 앞장서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뒤통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타니엘은 말없이 성큼성큼 그의 뒤를 따랐다.

 



마리네뜨와 다시 만난 지 2주가 지났다.


2주 동안 간간히 마리네뜨와 만나게 되면서 나타니엘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마리네뜨는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어쩐지. 나타니엘은 그제서야 같은 대학임에도 1년 동안이나 마리네뜨와 마주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같은 미대 소속이긴 하지만 아트 스페이스인 자신과 패션 디자인 소속인 그는 활동 범위가 매우 달랐다. 기본적인 전공의 차이가 크다 보니 어쩌다 교양이 겹치지 않으면 얼굴을 보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이번 학기에 마리네뜨와는 교양 두 개가 겹쳤다. 처음 만났던 미술학의 역사와 수요일 오전 수업. 수강신청 실패로 듣게 된 과목인데다 개인적으로 교수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마리네뜨를 만나게 되었으니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마리네뜨는 여전히 밝았다. 활발하고 솔직하고 자기 감정에 솔직했다. 짜증나는 레포트를 한참 붙들고 있다가 축 늘어지기도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눈을 반짝이면서 작업에 몰입한다. 한창 생각에 빠져 폭주하다가 나중에야 뻘쭘해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자신과는 달리 사교성이 좋은 것도 같다.


가끔 사람을 깜짝 놀래키는 면모도 여전했다. 저번에는 제 작업실에 찾아온 마리네뜨를 보고 얼마나 놀랬던지! 허둥지둥 후드를 쓰고 마리네뜨의 앞에 나섰지만 여러 의미에서 민망했다. 집에 가기가 귀찮아서 며칠간 작업실에 처박혀 있었으니 분명 꼴이 말이 아니었을 텐데. 어떤 반응을 해야할 지 몰라 눈만 데록데록 굴리고 있는 제게 마리네뜨가 웃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죽어있을 게 분명하니 지원 왔다면서 제게 건네는 하얀 봉투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안에 들어 있는 샌드위치에 박힌 마리네뜨네 빵집 로고를 보고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사실 나타니엘은 여전히 자신에게 부여된 지금의 시간이 얼떨떨했다. 마리네뜨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가 그랬다. 물론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심란하기도 했다.


좋은가? 마냥 좋다고만 생각하기엔 어딘지 찜찜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몇 가지 의문들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은 제 기억과 그리 달라진 점이 없었다.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마치 그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낄 때면 가슴 한 구석을 서늘하게 적시는 예감이 있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마리네뜨의 옆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누군가가.

하지만 그에 대해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아직은.



 


그래서, 요즘 그 애랑 같이 다니고 있다며?”


제법 짓궂은 목소리로 질문하는 알리야의 옆에서 마리네뜨는 이제 막 포장지를 깐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고개를 돌려 알리야를 돌아보던 마리네뜨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 왜 그런 표정이야?”

내 표정이 뭐?”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느낌인데?”

오올~ 근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너라면 재미가 없겠어? 지금 상황이.”

대체 무슨 상황인데요, 알리야 씨?”


역시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마리네뜨에게 알리야는 히죽 웃으며 안경을 고쳐썼다.


글쎄? 친구랑 잘생긴 남학생이 심상치 않은 관계가 되어가는 상황?”

잘생긴 남학생은 또 뭐야, 대체.”

으이그, 또 시작이구만. , 상당히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이잖아? 키도 크고.”


넌 너무 눈이 높아. 절레 고개를 내젓는 알리야의 앞에서 마리네뜨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할 말이 없었기도 했고, 더 이야기하면 싫은 주제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단정한 얼굴이잖아. 아트(Art) 과에 실력도 실력이지만 얼굴도 괜찮은 꽃미남이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설마 내 친구랑 걔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나타니엘에게도 실례라구.”

과연 그럴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알리야를 보고 마리네뜨는 앉은 채로 슬금 뒤로 물러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걔가 누군지 기억이 좀 나긴 나더라구? 프랑수와즈 뒤퐁Françoise Dupont 고등학교에 다닐 때.”

됐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 얘기는 그만 하자.”


황급히 제 말을 끊는 마리네뜨를 알리야가 지긋이 바라보았다.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마리네뜨를 참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알리야가 툭 말을 내뱉었다.


애쓴다.”

…….”


거하게 한숨을 내쉬는 마리네뜨를 보고 알리야가 혀를 쯧쯧 찼다.


아직도 그래?”

그치만,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에 이제 알리야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언제나 똑부러지게 자신의 일을 결정했던 제 친구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도.


마리네뜨. 이 알리야 선생님이 진단해보자면, 넌 너무 일만 한 게 문제였던 것 같아.”

?”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눈으로 묻는 마리네뜨에게 알리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잘 된 거 아냐? 나름 괜찮은 조건인 것 같은데.”

대체 뭐라는 거야 너?”

진짜 잘 되어보면 어떠냐는 거야. 그 녀석이랑~”

됐거든.곰은 가죽을 내놓을 생각이 없는데 벌써 팔 생각을 하면 되겠어?

에이, 그래도~”


 Il ne faut pas vendre la peau de l'ours :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프랑스 속담)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눈을 반짝거리는 알리야의 시선이 좀, 아니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마리네뜨는 꿋꿋했다.


너 너무 재미있어 한다?”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인생이 재미있지. , 잠깐만~”


신난 얼굴로 스마트폰을 꺼내 열심히 뭔가를 적기 시작하는 알리야를 지켜보던 마리네뜨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에, 블로그가 그렇게 재밌어?”


가볍게 묻는 마리네뜨에게 알리야도 역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뭐 레이디블로그를 운영할 때만큼 구독자가 많지는 않지만, 재미있어.”


먹은 포장지를 정리하던 마리네뜨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화면에 열중하고 있던 알리야는 눈치채지 못했다. 태연한 목소리가 알리야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어떤 포스팅을 올리는데?”

, 이것저것? 제빵 결과물에 대해 올릴 때도 있고, 일상 얘기를 할 때도 있고. , 올렸다.”

뭘 썼는데?”


알리야의 스마트폰 화면을 힐끔 쳐다본 마리네뜨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

[요즘 친구가 괜찮은 남자랑 만나고 있는 것 같은데, 저한테는 얘기를 안해주네요~ 쑥스러워서 그런 거라면 하루빨리 속시원히 털어놔줬으면 좋겠는데~ 보아하니 이미 좀 생각이 없지는 않아 보이.]

! 이게 무슨 짓이야!”


재빨리 제 폰을 뺏으려고 날아드는 손을 가볍게 피하며 알리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헤헹, ? 틀린 말도 아니잖아~?”

아주 많은 문제가 있거든? 이리 안 내놔?”


춉춉 손을 뻗어 제 스마트폰을 가져가려는 마리네뜨의 손을 익숙한 몸놀림으로 피하면서 알리야는 깔깔 웃었다.


오늘도 즐거운 점심이 될 것 같다.



 

학교 교정에 깔린 풀밭 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화창한 날씨라 다들 피크닉 분위기를 내고 싶은 건지 샌드위치나 빵을 먹으며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물론 나타니엘은 그런 풍경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아,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채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청년의 제법 단정한 생김새가 지나가는 행인 몇의 눈길을 끌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비스듬한 햇빛을 맞으며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 미청년이라니, 제법 명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말없이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던 나타니엘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오더니, 아직 백지 상태인 스케치북으로 향했다. 멍하니 텅 빈 여백을 마주하고 있던 나타니엘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에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보다 꽤 소란스럽네.


연필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던 나타니엘의 손이 크림색 종이 위로 한 획을 그었다. 홀린 듯이 손을 움직이고 있는 나타니엘의 스케치북에 누군가의 인영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집중하다가, 어느 순간 나타니엘은 정신이 든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멈췄다. 자신이 그려낸 무언가를 내려다보며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뭐 하는 거지.”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은 아직 사람이라고 할 정도의 윤곽 뿐이었지만, 나타니엘은 자신이 누구를 그리고 있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갑자기 왜?


마리네뜨를 다시 만나고부터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무의식적으로 이런 짓을 한다. 본능대로 손을 움직이다가 나중에 정신이 들고서야 자신이 뭘 그리고 있었는지 깨닫는 것은 제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하고서부터 생긴 습관 중 하나였다. 물론 진짜로 중요한 작업물과 달리 가볍게 그릴 수 있는 그림에서만 그런다지만, 최근 들어 생긴 이러한 충동은 나타니엘로서도 퍽 당황스러웠다.


요 몇 년간 사람을 그려본 적이 없었는데.


이유는 알고 있다. 가만히 그림 속에 남겨진 제 무의식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어보이는 종이 위의 사람은 지금의 그일까, 아니면 예전의? 허락도 없이 초상화를 그려도 괜찮은 걸까? 어린 시절에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펜을 놀리곤 했었지만, 지금은 왠지 조심스럽다. 그 때보다 옆에 있는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가? 들키면 혹시 나를 꺼려하게 되지는 않을까, 오해하게 되지는 않을까. 어렸을 때는 떠올리지 못했던 갖가지 잡념들이 떠오른다.


어른이 되어서인가.


이만치 나이를 먹고 나서야, 짝사랑이란 무엇인지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이상하지, 분명 우리의 거리는 예전보다 지금이 더 가까울 텐데 어린 시절에는 네게 지금보다 더한 친밀감을 느꼈었다. 너는 나에 대해 모르지만, 나는 너에 대해 많이 알았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그건 지금까지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나의 자그마한 비밀이었다.

시간과 함께 묻어둔 줄만 알았던.


연필을 들어 얼굴 위에 몇 개의 획을 더 그었다. 그림 속 누군가의 눈가 주변을 가면처럼 감싸고 있는 무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하늘빛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 나타니엘!”

히에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나타니엘은 하마터면 스케치북을 놓칠 뻔했다. 몇 번 손가락 위를 통통 튀어가던 스케치북을 허둥지둥 붙잡은 그가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길을 지나가던 마리네뜨와, 옆에 서 있는 알리야를 발견하고 나타니엘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림 그리고 있었어?”


친근하게 묻는 마리네뜨에 나타니엘은 더욱 당황했다. 스케치북으로 얼굴을 가리고픈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 너는?”

나는 알리야랑 같이 점심 먹고 다음 수업 준비하러 가려는 참이었어. , 이쪽은.”


알리야를 가리키며 마리네뜨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나타니엘이 차분히 대답했다.


알리야 세자르.”

, 알고 있었어?”


어리둥절해하는 마리네뜨와 달리 나타니엘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알리야가 히죽 미소지었다. 안경알 너머 눈동자가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이 반짝거리며 다시 말을 꺼내는 나타니엘을 관찰했다.


늘 붙어 다녔잖아. 뒤퐁교 때부터.”

하긴, 5년 전 일이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네. 나도 단번에 알아봤으니까!”

아니, .”


그렇지. 무언가를 얼버무리는 듯이 힐끔 시선을 피하는 나타니엘에게 마리네뜨가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예정이 어떻게 돼?”

오늘은 더 수업이 없어서, 과제를 마저.”

넌 언제나 과제를 하고 있는 것 같아. , 나도 그렇지만! 미술학도는 이래서 고달프다니까~”


쭈욱 기지개를 펴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마리네뜨를 지긋이 쳐다보던 나타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지가 나오게 다시 접은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끼고 천천히 마리네뜨에게로 다가온 나타니엘이 입을 열었다.


수업, 뭐 들으러 가는데?”

? 전공 관련인데 드로잉 쪽이야. 근데 그건 왜?”

……나도.”

?”

나도 같이 가도 될까? 청강.”

, 진짜? 너 드로잉에 관심 있었어?”

그림 계열은 다 좋아하거든.”


마음을 굳혔는지 제법 단호하게 대답하는 나타니엘에 마리네뜨는 어느 정도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알리야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억눌렀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어째 영 심상치 않은걸~


알리야는 가만히 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살펴보았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하나로 느슨하게 묶은 얼굴은 수수하긴 하지만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이다. 전형적인 예술계 미인. 제 귀에 들려온 이야기대로라면 아마 꽤 인기가 있겠지. 알리야는 눈 앞의 남자에 대해 들었던 소문들을 찬찬히 떠올렸다. 아트 과에서도 손꼽히는 천재 중 하나로, 협조성은 부족하지만 차분하고 조용한 타입의 미인이라고 하던데 확실히 그런 인상이긴 했다.


시간이라는 게 무섭긴 무섭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알리야는 새삼스레 자신들이 나이를 먹었다는 걸 자각했다. 기억을 탈탈 털어서 떠올린 옛날의 나타니엘은 상당히 흐릿했고 존재감이 없었다. 그렇던 녀석이 이만큼이나 달라지다니. 지금도 그리 눈에 띄고 싶어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열심히 마리네뜨에게 어프로치하는 걸 보면 좀 귀엽긴 하다.


결국 선택은 제 친구의 몫이겠지만.


둘이 사이 좋네~”


놀리듯이 말하는 알리야를 돌아보며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였다.


?”

나 슬슬 전공과목 시작할 시간이거든? 먼저 가볼테니 나머지는 알아서들 해봐~”

, 알리야!”


히죽이죽 웃으며 뛰어가는 알리야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마리네뜨가 나타니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그럼 이제 우리도 가볼까?”


읏고 있는 마리네뜨의 뒤쪽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한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중 누군가를 본 나타니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나타니엘?”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나타니엘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천천히 나타니엘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러 명의 학생들이 서로를 둘러싸고 이야기하며 걷고 있었는데, 무리의 중심에는 금발의 남자가 누군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태양을 닮은 금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따사로이 반짝였다. 마리네뜨는 조금 놀라는 듯하다가도, 곧 덤덤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얘기하던 중 얼핏 마리네뜨가 있는 쪽을 쳐다본 남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주변을 둘러싼 친구들이 뭐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저기, 아는 사람이 있어서.”


멈춰선 무리 속에서 남자는 혼자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겨우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멈춰서서 남자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색한 것 같으면서도 차분하게, 그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두 사람에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초록빛 시선은 온통 마리네뜨에게로 쏠려 있었다.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로 마리네뜨는 그저, 작게 웃었다.


안녕, 아드리앙.”


건조하고, 지극히 평범하게.





==


쨘 오늘이 만우절이라서 거짓말인줄 아셨죠? 놀랍게도 진짜였답니다! 만우절엔 진짜를 가져와야 낚시를 성공할 것 같아서^ㅁ^


업로드 날짜를 보니까 정말 제 게으름이 통탄스럽네요. 하지만 이미 연재주기가 불규칙할 거라고 말씀드렸으니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ㅇ.<


제가 숫자를 잘못 적었는데 전편이 프롤이고 이번 편부터 본격적인 본편입니다. 그래서 부제에 1을 붙였어요 2가 아니라.

일단 2편까지는 가야 과거사가 대충은 나올 거 같은데 2편 언제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손 정말 굳었네요 콘티를 즉석으로 짜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새삼 실감하고ㅠ

배경은 이미 다 짜둔 상태라 자세한 건 2편에서 보실 수 있을 듯합니다. 아드마리 사이가 어떻게 보이려나 모르겠네요 나름 지망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말이죠ㅠ 의도대로 잘 보였기를 바랍니다ㅇ▽ㅇ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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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어?


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주된다어조의 높낮이단어를 발음하는 장단이나 그 끝처리에 이르기까지얼굴 표정이나 눈빛에 따라서도 그 느낌이 달라진다누군가는 비웃듯이누군가는 호기심에또다른 누군가는 긍정으로도부정으로도 그 말을 입에 담았다.


같은 이름을 가진 수많은 물음 속에서 나의 대답은 너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어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었다소리내어 말하기에는 퍽 창피한 감상인지라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었지만덕분에 네게 제대로 인사하지조차 못했다제 얼굴을 흘깃 스쳐가는 총명한 눈동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심장이 조금 빠른 속도로 뛰었다중요한 무언가를 찾은 것처럼.


그것을 증명하듯 너는 매 순간 반짝거렸다당시 나에게는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만큼 너의 주변은 마냥 조용하지만은 못했고여러 가지 사건들도 터졌지만 그래도 너는 씩씩했다힘든 일이 있어도혹 야단을 맞거나 크게 문제가 터져서 풀이 죽어 있다가도 곧 다시 밝게 미소짓고는 했다.


네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늘 한참 떨어진 곳에서 너를 지켜보았다너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고 언제까지나 네가 웃어주기를 바랬다너와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주고받은 날은 유독 기분이 좋았다아니나를 돌아봐주지 않는 네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는 순간이 있을 정도로,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아 재잘거리는 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네가 스쳐가는 한 순간의 모습들을 기억되기 좋은 형태로 담아내는 것이 즐거웠다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들뿐이라나는 그저 뒷자리에 앉아 계속 너를 그리고 또 그렸다마치 너에 대한 내 마음을 쌓아가는 것처럼점점 다양한 너의 모습들이 담겨져가는 스케치북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속으로만 품었던 연정이 점점 그 크기를 키워나가는 것을 알았음에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


너에게 조금쯤 더 자연스럽게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가 되면그때는 괜찮지 않을까너한테 말해도 되지 않을까꾹꾹 눌러담았던 마음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순간이 오면그 때는 말하자너에게 제대로용기를 내어서.


나름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난 그냥 떼어내려고 한 거야!”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네 목소리와 같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당황했는지 살짝 더듬거렸지만 듣기에 나쁘지는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것은 자신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당시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어째서 네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까?


그 애를 쳐다보는 네 모습에 초조해졌다너를 발견하고시선을 따라가면 언제나 그 끝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태양처럼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과 선연한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소년누구든지 동경할 만한 존재를 바라보는 너의 얼굴은 내가 그간 보아왔던 모습들 중 최고로 반짝거렸고나는 그게 보기 좋으면서도 싫었다질척하게 올라오는 감정들이 당황스러웠다덮쳐오는 감정들을 겨우 피했다치면 그 다음으로는 후회가 몰려왔다후회를 물리치고 나면 자괴감이 들었고자괴감이 지나가고 나면 몰아치는 자각에 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 좀 더 빨리 네게 다가서지 못했을까.


그저 현재에 안주했던 방관자로서의 자신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너를 바라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즐겁지만은 않았다나는 매일 나도 모르는 새로운 나를 만났고그 녀석과 싸우는 것만도 힘에 버거웠다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들은 너를 향해 쌓아올린 애정만큼이나 무겁고 어두웠다따뜻해졌다가도 싸늘해졌다속이 끓어올랐다그런데도 너에게로 향하는 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그것이 답답했다.


너는 나의 가을이었다.

자각과 함께 말라버린 나뭇잎처럼 떨어지기 시작하는 희망은 이미 결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네가 아드리앙과 사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에는글쎄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렇게 놀랄 일이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쩔쩔매던 내게 너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당해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나는 대응보다는 체념을직면보다도 도피를 선택했다그도 그럴 게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내가 그 녀석보다 나은 상대라는 오만함 따위를 부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자신보다는 그가 더 좋은 연인이 되어줄 것이라고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래그렇게 이해하는 척 하려고 애썼다.


도망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못할 정도로 자신은 겁쟁이였다어느 날 변덕스럽게 작은 희망이 샘솟았다가도그 녀석의 곁에서 미소짓고 있는 너를 보면 다시 바스라졌다너는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내가 그 이상으로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미친 듯이 자신을 몰아세웠다몰아치는 일들에 지쳐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정도로그저 너를 떠올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아직 어리고한심하고비겁했던 당시의 내게는 방관만이 가장 나은 선택으로 보였다.


다른 소모적인 것들을 마음 속에 쌓아올리기 시작했다무엇이든너에 대한 것만 아니라면여유를 지워내고 이미 있던 감정들을 가려버릴 것들을 계속해서 쏟아부었다.


밀어내고 밀어내고 밀어내고네게 품은 연심(戀心)을 마음 깊숙하게 자리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꾸깃꾸깃 몰아넣었다마음 속은 복잡했고 정리되지 않아 어지러웠지만 그저 방관했다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게 있었던가라는 감상을 떠올리게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다른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나서는 그래도 좀 나아졌다눈앞에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슬픔은 점점 무뎌졌고 괴로움은 줄어들었다그래도 너를 보던 시절만큼 세상이 반짝거려 보이지는 않았다모든 것에 무덤덤했다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보아도 그 순간이 지나면 감정은 빠르게 식어갔다마치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잠깐의 햇살이 사라지면 다시 몸은 싸늘해진다찬란한 햇빛 아래에 서 있는 모두에게서 격리되어 어두운 그늘에 붙들려 있었다손을 뻗으면 잠시나마 따뜻했지만 그뿐이었다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적어도 더 이상 아프지는 않으니까.


하얀 캔버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커다란 캔버스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그림을 그릴 때만이 그나마 조금은 살아있는 것만 같아서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 작업실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주로 풍경 위주로 그렸지만 간혹 인물은 안 그리냐는 질문이 들어오기도 했다그 때마다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스스로가 듣기에도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난 사람은 안 그려.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겨울이라 그런지 하늘이 꽤 어두웠다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회색으로 덧칠해진 허공에 하얀 눈송이들이 점처럼 찍혀갔다회빛의 아스팔트 위로 하얀 눈이 죽어버린 감정의 잔해처럼 소복이 내려앉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손을 움직였다물감을 섞어 캔버스 위를 덧바르는 손길이 거침없었다그럼에도 심장 한 구석이 묘하게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너무 긴장을 놓았나방심해버린 자신을 조금 탓했다.


느슨해지는 순간 튀어나오고 마니까.

무엇이든.


몇 번의 겨울을 거치고 어느덧 성인이 되었다대학을 갈까 말까 고민했지만학교조차 안 가면 정말로 아무런 자극도 없는 매일이 될 것 같았다무엇보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다정확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 순간에.


그간 해놨던 것들이 헛수고는 아니었는지여러 대학에서 추천장이 들어왔다가장 조건이 좋은 곳을 골랐다다른 것에는 그리 큰 관심이 들지 않았지만 자신은 그림 한정으로는 꽤 욕심이 많았다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그래서.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순수 미술이라 그냥 그림만 그리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생각보다 시키는 것도 많고 그게 꼭 그림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대학까지 와서 관심도 없는 과목을 공부해야 하다니속으로 짜증을 뱉으면서도 일단 공부는 했다졸업은 해야하니까.


사람들에 이리저리 치이는 것도 고역이었다어린 시절만큼 낯을 가리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떠들썩한 분위기는 썩 익숙하지 않았다친구라 불릴 만한 관계가 여럿 생기면서 좀 즐거워진 건 사실이었다확실히 같은 과 소속인 만큼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자신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고평화로웠다혼자 있는 것은 여전히 조금 어려웠지만 예전보다는 견딜 만 했다혼자서 감정을 곱씹던 시절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구나.

조금 깨달음을 얻었다.


신학기가 되었다.


익숙하지 않았던 처음과는 달리 자신도 이젠 제법 적응기를 거친 건지 나름 여유로웠다.


따뜻한 햇볕이 겉도는 강의실 창가에 앉아 가만히 생각했다오늘 날씨가 좋은데간만에 밖에서 그림을 그려볼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새하얗게 책상 위로 스며드는 햇살이 경주하듯 강의실의 안쪽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귓가에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고 사락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바깥에서 간간히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시야를 간간히 흐트렸다.


머리가 너무 길었나슬슬 잘라야 할 텐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중 왁자지껄한 소리에 섞여 어떤 목소리가 귓가에 콕 박혔다목소리인가번뜩 고개를 돌려 제 앞을 바라보았다.


푸른 끼가 도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바로 제 앞에 있었다바로 아래쪽 의자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익숙했다눈을 깜빡거렸다메말라있던 심장이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흑백이던 세상이 멈추고색이 번져가기 시작했다무언가의 감정이 제 심장을 적셔갔다작동을 멈췄던 기계가 다시 움직이는 것처럼 확 밝아지는 시야에 놀라기보단 당황스러웠다.


분명 잊고 살았을 터인데.


심장소리가 온 몸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시끄럽게 귓가를 때려대는 소리에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충격을 받은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손끝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가머뭇거렸다살짝 움직이려다가 또 제자리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제 앞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다손 끝에 닿는 옷자락의 감촉보다도내 기억 속보다 훨씬 작아진 네 어깨가 신경쓰였다.


리네뜨?”


조심히 불러보았다느릿하게 제 쪽을 돌아보는 얼굴은 기억 속에 남았던 모습 그대로였다다른 학교를 간 후로 한 번도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떠올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아주 가끔씩제가 약해져 있는 순간에 불쑥 떠올라서 나를 건드리고 지나갔었다자꾸만 입 안에 침이 고였다긴장하는 자신을 들키지 않게 부던히 정신을 다잡았다.


어라?”


햇살 한 줄기가 너의 어깨를 붙잡은 내 팔을 슬그머니 건드렸다묘하게 올라오는 따스함에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아아맞다나타니엘이지?”


오랜 겨울의 끝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울고 싶었다.

 

 

 


===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은 오랜만이네요. 현재는 포스타입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다만 레이디버그 연성은 대개 이 블로그에 올리다보니 통일하는 게 편할 거 같아서 여기를 선택했습니다.


손가락 재활 겸 간단하게 쓰려고 시작한 건데 프롤만도 4천자가 되었군요. 음 그래도 시작은 좀 제대로 가야 할 거 같아서 나름 노력했습니다. 손가락 정말 안 굴러가네요 회지 이후로 글을 몇달이나 안 썼더니...

일단 표기 보시다시피 나타마리아드구요 메인은 나타마리입니다. 번호가 붙은 것을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다음 편도 나올 거 같네요. 아드리앙이랑 사귀다가 처참하게 깨진 마리가 몇 년 뒤에 나쓰랑 재회하는 내용입니다 써놓고 보니 스포같지만 뭐 담편에 나올텐데요(?

해피엔딩을 예정하고 있으나 셋다 좀 많이 구를 거 같습니다 후후. 페이지는 잘 모르겠는데 중편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길게 끌 내용은 아니라서.

정말 생각없이 쓰고 싶어서 기획한거니 스토리퀄을 크게 기대하지는 마셔요. 그냥 가볍게 가겠습니다 가볍게. 잔잔한 이야기로 갈 것 같습니다. 텀은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그냥 하루 두시간씩 써보고 편수를 채우면 올리지요 뭐. 지금 마감 좀 끝내고.. 콘티 정말 애들 현재 포지션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안 짜놔서 그냥 생각나는대로 굴려야 할 거 같습니다 와 이런 거 오랜만이라 좀 설레네요(?

한번쯤 토마토에게 해피엔딩을 줘보고 싶다는 충동 하에 쓰기 시작했습니다만 그렇게 순탄한 해피엔딩은 아닐 것 같네요. 이 정도가 아니면 나쓰가 사랑을 쟁취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서 이렇게 쓰긴 했지만... 필자의 최애컾은 아드마리입니다만 제 최애컾은 메이저이니 다른 분들 연성만으로도 충분해서(?)

웹에 쓰기 시작하면 묘사퀄을 너무 신경 안 써서 한글에 쓰기 시작했더니 묘사가 그나마 좀 봐줄만하군요. 스토리가 아니면 시간 들이기 귀찮아하는 성격 좀 고쳐야하는데..


재밌게 읽어주셨다면 기쁩니다. 다음 편은 언제 들고 올지 모르겠지만..

다들 나쓰와 마리와 아드리앙의 고통을 위하여 건배해주세요^ㅁ^(모두: 저기요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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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캣마리 배포전에서 냈던 회지의 일부입니다. (재고 2권 있으니 필요하시다면 문의로)

※ 동화 AU / 괴물 블랙캣과 소녀 마리네뜨




Once Upon a Time




옛날옛적에,

나라 하나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기후, 한쪽에는 넓은 바다가 푸르게 빛나며 제 존재감을 과시했고, 반대쪽에는 험준한 산자락이 마치 방어벽처럼 나라를 크게 둘러싸고 있어 나쁜 무리들이 함부로 이 땅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축복받았다고 불릴 만큼 비옥한 토양에서는 좋은 곡식과 과일, 채소들이 생산되었고, 덕분에 국민들은 아주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답니다. 아, 사소하고 작은 다툼들이 간혹 일어나고는 했었지만요.


화려한 왕궁이 있는 이 나라의 수도는 변두리에 사는 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왕궁에 대한 이야기는 간혹 외곽 지역으로 흘러 들어오는 여행자들에게는 최고의 소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묘사에 홀린 이들은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꾸고는 했지요.


그들은 마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신비한 힘을 가진 이들이 있고 그들이 얼마나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과 척을 지는 것은 그리 현명한 결정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물론 이야기를 들은 대부분이 코웃음을 치곤 했지만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이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잘 가, 마리네뜨!”

“응, 알리야 너도! 내일 보자!”


검은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소녀가 자신에게로 멀어지는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언제나처럼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원래라면 같이 돌아가는 것이 맞았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알리야와는 달리 마리네뜨는 다른 볼일이 있었다. 이미 저 멀리로 가버린 알리야의 뒷모습을 마냥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앞에 거대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푸른 나뭇잎들이 매달리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숲은 수북한 잎사귀들이 만들어낸 그늘 때문인지 햇빛이 밝게 떠 있는 낮임에도 무척 을씨년스러웠다. 몇 번 와봤었지만 괜스레 느껴지는 위압감에 마리네뜨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 음침해보이지….”


자신이 지금 저 숲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늘진 숲을 쳐다보고 있던 마리네뜨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두 팔을 꼭 끌어안은 소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깜빡거리며 그 자리에 망연하게 서 있다가, 곧 씩씩하게 외쳤다.


“괜찮아! 위험한 동물같은 건 없으니까!”


숲에 자주 들락거리는 사냥꾼 아저씨한테서 들은 이야기니 아마 확실하겠지.


“가, 가자!”


괜찮을 거야.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마리네뜨는 씩씩하게 숲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숲은 서늘했다. 햇빛이 쨍쨍한 낮이었음에도 무성한 나뭇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온 햇빛들이 쭉 뻗어 내려와 바닥에 궤적을 그려냈다.


“우와….”


어둑한 숲에 실금처럼 비스듬히 그어지는 빛의 선들이 무척 아름다웠다. 절로 탄성이 나오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빛들이 유독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주변이 어둡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숲에 감도는 기이한 분위기 때문일까.


주변은 무척 조용했다. 그 흔하다는 다람쥐 한 마리 보지 못했다. 보통 숲이 이렇게까지 조용한가? 싶다가도 마리네뜨는 기척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늑대라도 나타나면 큰일나니까.


“으악!”


주변을 둘러보며 지나가느라 하마터면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도 손바닥으로 제때 바닥을 짚어서 큰 상처는 없었다. 그늘져 있음에도 생각보다 바닥이 축축하지 않은 것에 마리네뜨는 조금 놀랐다.


더러워진 손바닥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나무들뿐이었다. 숲의 어둠에 검게 물든 나무들이 제 앞으로 한 발짝 다가온 것처럼 보여 소녀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다.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해보니 주변이 왠지 생각보다 더 어두운 것 같다. 그늘졌다지만 낮인데 보통 이렇게까지 어둡나? 싸한 기운에 마리네뜨는 살짝 몸을 떨었다. 으으, 정말.


“왜 그 꽃은 여기에만 피는 걸까나….”


골든 호르테. 마리네뜨가 굳이 이 숲으로 들어온 이유였다. 붓꽃과 닮은 모양을 하고 있는 금빛의 꽃. 나쁜 일을 내쫓고 행운을 불러오며, 사랑을 이루어준다고 알려져 있는 무척 희귀한 꽃. 골든 호르테에 얽힌 젊은 청년과 처녀의 사랑 이야기는 이 나라에서는 누구든 어릴 적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설화이기도 했다. 물론 실존하는 꽃이라고는 하지만 무척 희귀해서 발견한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른다고도 했다.


며칠 전 부모님과 친하게 지내시던 사냥꾼 아저씨가 모자에 그 꽃을 꽂고 오지 않았더라면, 마리네뜨는 지금까지도 그 꽃은 그저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물건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깜짝 놀라 이것저것 물어서 겨우 대답을 얻어냈다. 숲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꽃밭에서 꺾어왔다고 했다. 꽃을 주실 수 없냐고도 물어봤지만 그건 단칼에 거절당했다.


‘이건 안 돼. 마누라한테 줄 거거든.’


난감한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는 아저씨에게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어 소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리네뜨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난감해하던 사냥꾼은 결국 꽃이 어디에 피어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쳐주었고,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조금만 더 가면 있겠지.


고요하고 어두웠다. 발밑에서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어두워지고 추워지는 것 같다. 어둠 속에서 초록빛의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소녀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기분 탓일까?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


소녀의 옆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히이익!!”


비명을 내지르며 소녀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소녀의 몸을 억누르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검은색의 오오라로 이루어진 그것은 제대로 된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어려웠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으르르르- 낮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마리네뜨는 겁에 질렸다.


이게 뭐야?!


두려움에 가득 차서 다시금 버둥거리려고 했지만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금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소녀는 뻣뻣하게 굳었다. 잡아먹히는 건가? 이렇게? 겁먹은 눈동자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을 바라보던 마리네뜨는 제 얼굴로 떨어지는 무언가를 알아채고 멈칫했다. 자신을 짓누른 차갑고 서늘한 촉감과는 다르게,


“…우는 거야?”


따뜻한 무언가가 계속 제 얼굴 위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어디서 떨어지는 거지?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마리네뜨는 곧 그 검은 오오라 사이에서 초록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깜빡거리는 초록빛 눈동자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똑바로 그 눈동자를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울음소리는 분명 짐승의 것인데, 방금 전처럼 무섭지만은 않았다. 어떤 감정으로 울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물을 떨구는 저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저어….”


입을 열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마리네뜨를 바라보던 초록색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깜빡거리더니 눈물을 그쳤다. 곧바로 제 몸을 누르던 힘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마리네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뒤를 돌아 사라지려던 녀석이 그 자리에 멈춰서는 모습을 보고 마리네뜨는 속으로 놀랐다. 내 말을 알아듣나? 물기가 가득한 얼굴을 소매로 슥슥 문지르며 소녀는 다시금 말을 걸었다.


“해, 해치지 않을 거야?”


‘그것’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천천히 넘실거렸다. 불길할 정도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어 마치 주변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괜히 말을 걸었나 싶다가도 마리네뜨는 다시금 용기를 내었다.


“소, 손.”


한쪽 무릎을 바닥에 굽히고 살며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경계하듯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소녀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워낙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필사적으로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면서도 불안한지 소녀는 눈가를 살짝 떨었다.


동물한테는 눈을 맞추는 거랬나? 아니었나? 이러다가 물리면 어떡하지? 그래서 숲 속에 버려져 있다가 지나가던 사냥꾼 아저씨한테 구조되고…. 아니, 근데 아저씨도 여기 자주 안 온다고 했잖아! 나 죽는 건가?! 그런 거야?!


저벅, 발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초록빛 눈동자에 소녀는 몸이 싸하게 굳었다. 굳어버린 마리네뜨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온 눈동자가 눈을 깜빡거렸다.


곧이어 손 위로 단단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어?


깜짝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는 마리네뜨를 초록색의 눈동자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녀는 방금 제가 내민 손바닥 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손 위에 검은색의 손 같은 것이 올려져 있었다. 아니, 발인가?


그러고 보면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인다니, 왠지 고양이 같기도. 소녀가 중얼거렸다.


“…고양이 같네.”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작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만 제외하면 ‘그것’은 그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움직이면 소녀가 겁을 먹을 거라는 걸 아는 것처럼.


햇빛이 위에서부터 뻗어와 잘게 부스러졌다. 빛이 닿아서 그런가? 방금 전보다는 형태가 제대로 보였다. 가루처럼 공중에서 나풀거리는 검은색의 오오라 너머로 새까만 몸체가 드러났다. 그래, 온통 새까맸다. 얼굴 위에 쫑긋 솟아있는 귀를 보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검은 고양이.

소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블랙캣, 이려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마리네뜨, 그 꽃은 뭐야?”


마리네뜨의 모자에 꽂혀 있는 금빛의 꽃을 보고 알리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알리야의 반응에 만족스러웠는지 마리네뜨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 


“예쁘지?”

“되게 예쁘네. 화사한 느낌이라 네 모자랑 잘 어울려.”


그 말대로였다. 붉은색 바탕에 금빛 자수를 놓은 모자와 골든 호르테는 무척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솜씨 좋게 만들어진 모자는 마리네뜨가 직접 만든 수제품이었다. 시골에서는 꽤나 귀할 법한 붉은 원단은 마리네뜨의 부모님이 도시에 출장을 갔을 때 선물로 사온 것이었다. 그 때문에 마리네뜨는 이 모자를 꽤 아꼈다.


알리야는 의아했다. 마리네뜨가 학교에 이 모자를 쓰고 오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모자가 꽃이랑 잘 어울리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꽃을 장식하자고 모자를 꺼내온 게 아닌가 싶었다. 노랗다기보단 환한 금빛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꽃은 확실히 무척 화려하고 예뻤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근데 어디서 난 거야? 그 꽃은. 처음 보는데.”

“…음, 우연히?”


뭔가 얼버무리려는 듯이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알리야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꽃,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 알리야. 선생님 들어오셨어!”

“앗, 이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담임 선생님의 모습에 알리야는 재빨리 몸을 돌리고 교과서를 펴냈다. 별로 관심은 없었는지 금세 선생님에게로 열중하는 알리야를 힐끗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멍하게 칠판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머릿속으로 어제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숲 한복판에 한가득 피어 있던 금빛 꽃밭과, 검은 고양이를.


‘우와! 이게 다 골든 호르테야?’


마리네뜨는 제 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나는 꽃밭이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뻥 뚫린 하늘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밝은 햇빛이 꽃들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반짝거렸다.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금빛 꽃밭이 파르르 물결쳤다. 원래도 무척 아름답게 생긴 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한데 모여서 햇빛까지 받고 있으니 마치 황금더미를 눈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꽤나 넓은 공터라서 그런지 나무들이 그렇게 빽빽하지 않아 햇빛을 가리는 나뭇잎들이 거의 없었다. 어둡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숲에 이런 공간이 있었던가. 몇 번 와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나 깊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전설로나 알려져 있던 꽃들이 이렇게나 많이 피어있는 광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쉽사리 믿겨지지가 않았다.


‘진짜 예쁘다….’


꽃밭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은 마리네뜨의 눈이 반짝거렸다. 바로 앞에 있는 꽃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유연하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꽃의 줄기를 붙잡고 살짝 뒤로 꺾었다. 똑, 소리와 함께 하얀 손가락이 꽃 한 송이를 꺾어들었다. 활짝 웃으며 기뻐하던 마리네뜨가 살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빛에 서 있는 마리네뜨와는 달리 어두운 숲의 그늘 아래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제 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검은 물체를 돌아보며 소녀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데려와줘서 고마워.’


으르르, 짧은 울음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마치 알겠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에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울음소리만 들으면 분명 짐승의 그것인데 이상하게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왜일까?


이 이상 다가오지 않겠다는 듯 제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블랙캣’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리네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블랙캣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땅에 붙박힌 고목나무처럼 꼼짝도 않고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초록빛 눈동자를 보며 마리네뜨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제 손에 있던 꽃을 블랙캣의 귓가에 살짝 꽂아주었다. 새까만 어둠 사이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은은하게 빛나는 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마리네뜨는 방금 전보다도 훨씬 검은 기운이 옅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쫑긋 솟은 검은색의 귀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잠깐 망설이던 마리네뜨가 천천히 손을 뻗으려다가, 살짝 뒤로 거둬들였다. 넘실거리는 검은색의 기운을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블랙캣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두려워하는 제 마음을 아는지, 석상처럼 꼼짝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만 같았다. 마리네뜨는 결심했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블랙캣에게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하지 않을까 싶었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만져본 적이 없는 느낌이었다. 분명 부드럽기는 했지만 그것은 털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털이랄 것이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매끄러운 옷감을 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신기한 느낌에 몇 번 더 쓰다듬었다. 스르륵 눈을 감고 기분 좋다는 듯이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물었다.


에, 그러니까, 뭐라고 물었더라? 여, 여…,


“마리네뜨!”

“헉!!”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마리네뜨는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칠판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은 물론이고 온통 제게로 쏠려 있는 반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고 마리네뜨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네 차례란다. 다음 페이지를 읽어보렴.”

‘마리네뜨, 28페이지야.’


작게 속삭여주는 알리야에게 감사하며 마리네뜨는 재빨리 28페이지를 펴들었다.


“옛날 옛날에 무척 잘생긴 청년이 있었답니다….”



청년은 이 나라에서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어요. 청년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온 나라에 파다했고, 청년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답니다. 그 중에서는 청년에게 반해서 그 자리에서 청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아가씨는 저 하늘의 별보다 많은 재물을 약속했고, 어떤 여성은 나라에서도 제일 가는 귀족 집안의 후계자로 청년에게 고귀한 지위와 명예를 약속했습니다. 또 어떤 아가씨는 청년에 못지 않게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이 사랑하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옆집에서 자란 소꿉친구 아가씨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고 이미 결혼하기로 어렸을 적부터 약속했던 사이였어요.


예쁘게 사랑하던 두 사람에게도 시련은 찾아왔습니다. 동쪽 숲의 경계선에 살고 있던 마법사가 청년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마법사는 온갖 방법들을 동원해 청년에게 구애했지만, 청년은 이미 마음에 정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마법사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몇 번을 찾아와도 끊임없이 거절하는 청년에게 마법사는 체념했다는 듯이 웃으며 들고 있던 음료수를 내밀었습니다. 이별의 선물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청년은 받지 않았습니다. 마법사가 주는 것은 그 무엇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선물을 거절하는 청년을 보며 마법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악수를 청했습니다. 얼떨결에 내밀어진 손을 맞잡은 청년은 손가락에서 따끔거리는 감촉을 느꼈습니다.


그와 동시에 청년은 제 연인에 관한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법사와 같이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처녀는 사방을 헤맸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연인을 찾아 돌아다니던 처녀는 어느 한 호숫가를 발견했어요. 잠깐 쉬어가야지 하면서 호숫가에 앉아 있던 처녀의 시선 끝에 예쁜 꽃이 보였습니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꽃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처녀는 손을 뻗어 꽃을 꺾었는데, 처녀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저기 호수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 보이지? 저 사람이야.’

‘정말로 딱하게 됐네. 왜 하필이면 동쪽 숲의 마법사한테 걸려서.’


동쪽 숲의 마법사.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녀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처녀의 등 뒤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는 참새 두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법사가 그 남자를 무척 아낀다며? 밖에도 내보내지 않을 정도라던데.’

‘맞아. 정확히는 마법이 풀릴 것을 걱정해서겠지.’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는 마법은 그 효과가 길지 않아. 당사자를 보는 순간 바로 떠오를 테니 격리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수다스럽게 재잘거리는 소리에 처녀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새들이 수다를 마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까지요. 그 대화 속에서 처녀는 마법사가 자신의 연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마법사는 청년을 자신의 저택 옆에 세워진 동쪽 탑에 가두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산책 정도는 가능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새들의 대화 중에 처녀가 가지고 있는 꽃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새들은 그 꽃이 행운을 불러올 것이니 만약 처녀가 그 꽃을 가지고 간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처녀는 청년을 구하기 위해 동쪽 숲으로 향했습니다.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금색 꽃을 손에 꼭 쥐고서요.


며칠간 꾸준히 걸어 처녀는 마침내 동쪽 숲에 도착했습니다. 웅장해 보일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이 한데 모여 있는 숲의 모습에 압도되었지만, 처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숲 속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숲은 울창하고 그만큼 어두웠지만, 처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신기할 정도로요. 길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처녀의 손에 들려 있는 꽃이 은은하게 어둠 속에서 빛났습니다. 마치 처녀를 인도해주는 것처럼.


한참을 걷다 보니 마법사의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도 낮이라 그런지 저택 앞으로 산책을 나와 있는 청년을 보고 처녀는 목이 메었습니다. 앞뒤 생각하지도 않고 청년의 앞에 나선 처녀는 질문했습니다.


‘나를 기억해?’


처녀의 모습은 엉망이었습니다. 집을 나서 오랜 시간 여행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했으니까요. 아름답고 매끄럽던 갈색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게 뻗쳐 있었고 깨끗하던 옷은 온통 다 헤져 있었습니다. 청년은 물론이고 처녀의 부모님조차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꾀죄죄했습니다.


반면 청년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직접 마주하면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는 했지만, 과연 이런 지금의 자신을 보고도 청년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러한 생각에 창피해져서 고개를 숙인 처녀를 가만히 쳐다보던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당연히.’


그 말과 함께 처녀를 끌어안았습니다. 놀라는 처녀에게 청년은,


‘내가 너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라고 덧붙였습니다.


처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었는지는 청년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거죠.


재회를 기뻐하던 두 연인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은 아무리 자신이 숲을 빠져나가려고 해도 걷다 보면 늘 저택으로 돌아오게 된다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처녀는 괜찮을 거라며 청년의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앞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나무들이 들썩거리더니 가지들이 연인들의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습니다. 마법에 걸려 있는 나뭇가지들의 움직임을 보며 당황하는 청년과 달리 처녀는 가까이 다가가 꽃으로 나뭇가지를 건드렸습니다.


꽃잎이 닿자마자 뒤로 슬슬 물러나면서 길을 열기 시작하는 나뭇가지들에 두 연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계속해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꽃으로 건드리며 나아가던 연인들이 숲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찰나, 뒤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청년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마법사가 뒤를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연인들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소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희미하게 다가오던 공포심도 점점 커져갔지요.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처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공중을 날아서 바로 뒤에까지 쫓아온 마법사에게 처녀는 들고 있던 꽃을 던졌습니다. 꽃이 닿자마자 마법사의 몸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하며 가루가 되어버린 마법사의 몸과 바스라진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은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두 연인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놀라는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에게 처녀는 자신이 겪었던 무용담들을 전부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저기를 떠도는 음유시인들도 그 자리에서 두 연인이 겪었던 일들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가서 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녀는 말했습니다. ‘마법은 강합니다. 그렇기에 마법을 이기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에요. 저와 제 연인을 구해준 이 아름다운 꽃에 경의를 담아, 이 꽃을 골든 호르테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금색의 행운이라는 의미로.’”


중얼거리듯 말을 꺼내던 마리네뜨는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풀밭 위에 가만히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블랙캣에게 소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고 있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다시금 말을 꺼냈다.


“재미있었어?”


미동도 않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살짝 눈매를 찡그린 것 같기도.


“솔직하네, 너.”


가만히 앉아 있던 블랙캣의 꼬리가 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불평을 말하는 걸까? 애완동물을 키워보지 않아서 그런지 쉽사리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 동물이라고 할 수 있나? 정말로?


블랙캣과 만나고부터 벌써 1주일이 넘게 지났다. 그 후로 마리네뜨는 매일매일 학교가 끝나고 블랙캣을 만나러 오고 있었다. 접선 장소는 처음 만났던 숲과 붙어있지만 마을에서는 꽤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정했다. 집으로 데려갈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마을로 데려가기엔 블랙캣은 너무 눈에 띄었으니까. 블랙캣이 위험하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을 테고.


마리네뜨는 블랙캣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초록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평범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 한층 그 생각이 강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기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느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하기엔 블랙캣은 무서울 정도로 영리했다. 


말수가 적은 말동무를 두는 기분이 이런 걸까? 분명 외양을 보면 동물에 가까웠지만 반응만 보면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믿겠다 싶을 정도로 확실했다. 마치 자신이 하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비록 대답하지는 않지만 움직임과 더불어 미세하게 움직이는 표정을 보고 긍정과 부정의 의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길가를 쏘다니는 동물들이나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란 말이야. 그렇게 재미가 없었어?”


블랙캣이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다는 것 같아 마리네뜨는 피식 웃었다.


“낭만적이지 않아? 사랑하는 연인을 한 눈에 알아보다니 이 얼마나 로맨틱해?”


홱 고개를 돌리는 블랙캣의 반응에 마리네뜨가 볼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하여간 너나 알리야나 소녀의 감성을 너무 모른다니까. 그나저나 너 말이야.”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변했네.”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깜빡거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다시금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죽 웃고 있는 블랙캣을 바라보며 마리네뜨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처음에 봤을 때보다 좀 윤곽이 뚜렷해진 것 같달까…. 처음에는 늑대같은 무서운 짐승인가 싶었단 말야?”


뾰족 솟은 고양이 귀와 달리 몸의 형태는 아무리 봐도 동물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털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매끈하게 뻗은 팔다리라던가, 전체적인 윤곽은 마치.


“사람…?”

“므르르…….”

“꺄악!!”


블랙캣이 갑자기 입을 열어 울음소리를 내는 것에 깜짝 놀란 마리네뜨가 손을 거둬들였다. 마리네뜨의 반응에 블랙캣은 재빨리 입을 닫아버렸지만 눈은 마치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물기에 젖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 날처럼.


처음 꽃밭에서 블랙캣을 쓰다듬을 때 마리네뜨는 물었습니다.


‘여기서 살아?’


으앗! 블랙캣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깜짝 놀랐던 마리네뜨가 반사적으로 손을 거뒀습니다. 괜히 미안해져서 다시금 조심조심 블랙캣의 머리에 손을 올렸습니다.


‘혼자?’


블랙캣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방금 놀란 소녀를 배려하듯이 아주 살짝,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소녀만이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요.


‘하지만 이 숲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끄덕끄덕도 절레절레도 아닌, 그저 소녀를 빤히 쳐다보는 블랙캣의 시선은 마치 알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외롭지 않아?’


이번에도 반응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는 블랙캣과 시선을 마주했습니다. 방금 전보다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소녀의 마음 한 구석이 쿡쿡 쑤셔왔습니다. 방금 전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울음소리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석고상처럼 앉아 있었음에도 소녀의 눈에는 왠지 블랙캣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갑자기 제 손에 머리를 부빗거리는 블랙캣의 행동에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깜빡거렸습니다. 이건 무슨 행동일까요? 애교라도 부리는 걸까요? 마치 가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보여서 얼떨떨해진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습니다.


‘으앗, 알았어. 그럼 나랑 친구하자! 내가 널 만나러 올게. 나랑 같이 놀자. 그러니까 울지 마! 아니, 우는 게 아닌가? 아무튼!’


왜 그 순간 친구하자는 말이 나왔는지는 모릅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정말 친구같은 관계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블랙캣을 마주보던 마리네뜨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질문했다.


“너 설마…, 사람이었어?”


블랙캣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들짝 놀라는 소녀의 얼굴이 살짝 빨갛게 물들었다.


“내가 하는 말 다 알아듣는 거야? 진짜?”


뭘 새삼스럽냐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과는 달리 소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떡해, 아, 진짜.”


뭔가 고민하는 것 같던 소녀가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이 블랙캣을 향해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


멀뚱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뭐랄까, 처음부터 사람인 줄 알았으면….”


좀 더 정중하게 친구가 되자고 했을 텐데. 차마 뒷말을 내뱉기가 창피해져서 마리네뜨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나름 예의있게 대한다고 대한 건데 사람한테 그랬다고 생각하니 다시 없을 무례한 짓이잖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구하자고 하다니! 아, 아니 그렇게 따지면 동물이랑 사람은 인사법 자체가 다르지 않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으악, 얘 입장에선 내가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마리네뜨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을 따라 일어서듯 네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선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말할게.”


나랑 친구가 되어줄래?


“으앗!”


갑자기 펄쩍 일어나 자신을 끌어안는 블랙캣의 행동에 마리네뜨가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검은색의 어깨가 눈 앞에 보였다. 생각보다 그가 키가 크다는 사실에 순간 마리네뜨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평소와 같은지, 조금은 다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몸은 무척 따뜻했고 소중한 것을 감싸안고 있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서,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블랙캣의 등에 닿지 못하는 두 손이 허공을 어색하게 배회했다.


새삼스레 블랙캣에 대해 생각하던 마리네뜨의 시선에 무언가가 언뜻 비쳤다. 소녀가 푸핫,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너 귀엽다.”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검은 꼬리가 마치 지금 블랙캣의 기분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여서, 절로 편안해지는 기분에 마리네뜨는 피식 웃으며 블랙캣의 등을 조심스럽게 껴안고 토닥토닥 두드렸다. 머리 위로 쫑긋거리는 귀가 귀여웠다. 옆에서 얼굴을 자세히 보니 금색에 가까운 머리카락들이 뻗쳐 있었다. 색이 좀 탁하긴 했지만.


“이름이 뭐야?”


한참 뒤 블랙캣을 놓아주고 다시 풀밭에 앉은 마리네뜨가 그렇게 질문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블랙캣의 모습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가 보다 싶어 마리네뜨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블랙캣은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


다시 고개를 내젓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감을 잡았다.


“이유를 모르는구나.”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이제까지 네 발로 움직였어? 그냥 두 발로도 걸을 수 있잖아.”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아차 싶었다. 긍정과 부정으로 대답하기 애매한 대답이잖아.


“네가 편하다면 그냥 두 발로 걸어도 돼. 말은 못하는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도리도리. 블랙캣의 반응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마리네뜨가 블랙캣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이 꽤 컸다. 자신보다 훨씬 더. 흠칫하더니 굳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듯한 블랙캣의 태도를 보며 마리네뜨는 블랙캣의 성격이 꽤나 신사일 거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럼 잘 부탁해.”


헤실 웃는 마리네뜨에게 대답하듯 블랙캣이 살짝 마리네뜨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블랙캣은 꽤나 재미있는 친구였다.


그 때로부터 2주가 훨씬 넘은 시점에서 마리네뜨가 내린 결론이었다. 비록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마리네뜨는 블랙캣만큼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고개를 돌리면 늘 자신을 바라보는 초록빛 눈동자가 있었다. 마치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올곧은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민망해져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먼저 고개를 돌리곤 했다.


블랙캣과 함께 지내면서 마리네뜨는 여러 가지를 경험했다. 들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고 가끔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산책 장소는 마을 외곽이나 블랙캣과 처음 만났던 숲으로 한정되었지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블랙캣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사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오면 그는 여지없이 최대한 마을과 가까운 지점까지 마리네뜨를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위험하니까 오면 안 된다고 얘기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블랙캣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것임을 알기에 마리네뜨는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지만 조심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마을을 한 번도 멀리 벗어나보지 못한 마리네뜨에게 마을 바깥이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블랙캣과 함께 다닐 때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어둡고 무섭다고만 생각했던 숲도 블랙캣과 함께 다니면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이것저것 떠들다가 들판 위에 나란히 누워 같이 하얀 은하수를 올려다보고 있자면 세상에 단 둘밖에 없는 기분이 들었다.


블랙캣이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들고 온 바구니를 떨어뜨릴 뻔했다. 블랙캣은 외양적으로는 아직 완전히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드문드문 인간처럼 보일 때가 간혹 있었는데, 얼굴에 표정을 드러냈을 때였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이 순간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여서,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가 떴을 때는 이미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미소는 마리네뜨의 마음 속에 꽤나 인상 깊게 기억되었다.


블랙캣을 만나러 가는 건 일주일에 세 번. 매일같이 오기엔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가끔 꽤 늦게까지 있을 때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 혼자 떠들다 보니 매일 오면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 그간의 반응을 보면 블랙캣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반응이 미묘하게 달랐다. 의아했다. 학교를 좋아하나? 뭐, 자신도 공부는 싫지만 친구들 만나는 것은 좋아하니 그런가 싶기도 하고.


요즘 들어 학교가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지는 마리네뜨를 이상하게 여긴 알리야의 추궁에도 마리네뜨는 그저 에헤헤 웃으며 넘겼다. 말해줘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알리야는 좋은 친구고 분명 비밀로 해달라면 비밀로 해주겠지. 하지만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속으로만 갈무리했다.


작은 비밀이 생겨난 것만 같았다.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비밀.


학교가 끝난 뒤 마리네뜨는 언제나처럼 블랙캣과 만나던 들판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들판으로 다가갈수록 저 멀리에 검은색 점처럼 찍혀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역시나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던 블랙캣의 손에 금빛의 꽃이 들려 있었다. 인사의 의미로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던지며 미소짓는 마리네뜨와 달리 블랙캣은 소녀를 보자마자 놀란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마리네뜨가 들고 온 바구니를 블랙캣에게 건넸다. 부모님이 하는 빵집에서 갓 구운 빵들이 수북히 들어 있었다. 바구니를 받아든 블랙캣이 옆에 그걸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마리네뜨에게로 몸을 숙였다. 손을 뻗어 가지고 온 골든 호르테를 제 머리카락에 조심스레 엮어주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아무런 반응도 없이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블랙캣의 태도에 마리네뜨의 입가에서 미소가 점점 걷혔다. 힘없이 피식 웃으면서 마리네뜨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아,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어. 들어줄래?”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에게 소녀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대회가 있었거든. 별 건 아니고, 예쁜 옷을 만드는 대회라고 해야 하나? 이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수도에 가서 공장을 견학할 수 있대, 굉장하지 않아? 그래서 열심히 준비했거든.”

“그르?”

“근데 졌어.”


깔끔하게 인정하는 마리네뜨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나름 자신이 있었단 말이야. 우승하고 나면 어떤 말을 할지도 생각해뒀었구. 근데 어…, 그래, 왜 나랑 똑같은 디자인의 의상을 그 애가 가지고 나온 걸까. 차례는 내가 훨씬 뒤였는데. 덕분에 제출도 못하고 그냥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어.”


웃기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이 퍽 쓸쓸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겠지~! ……근데 지금 왠지 털어놓고 싶어서.”


너라면 다른 곳에 떠들고 다니지도 않을 테니까. 피식 웃으며 블랙캣을 돌아보던 마리네뜨는 갑작스레 깜깜해지는 시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얼굴에 닿는 것이 자신을 끌어안은 블랙캣의 어깨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마리네뜨는 중얼거렸다.


“…위로해주는 거야?”


더듬더듬, 아주 어색하지만 천천히 제 등을 살며시 토닥거리는 블랙캣의 손길이 무척 다정했다. 피식 웃으며 소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블랙캣의 품에서는 숲의 향기가 났다. 마치 숲 그 자체인 것처럼 청량한 풀의 향기와 살짝은 텁텁한 흙의 냄새. 하루종일 숲에서 생활하니 그럴 만했다. 그래서 블랙캣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편안해지는 걸까? 알리야나 다른 누구보다, 너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고 여기게 된 내가 바보같은 걸까?


마음 속에 소용돌이치던 풍랑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마리네뜨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손을 뻗어 블랙캣을 끌어안는 소녀의 눈가에서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꺅?!”


갑자기 드는 부유감에 마리네뜨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을 안고 있던 블랙캣이 난데없이 팔을 뻗어 자신을 안아올린 것이다. 영락없는 공주님 안기에 순간 당황한 마리네뜨가 입을 벙긋거렸다.


“어, 아니. 지금 뭐해?”


블랙캣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연한 노을빛이 블랙캣의 얼굴 위로 물감이 번지듯 번져나갔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해 웃는 얼굴이 꼭 사람처럼 보여서 마리네뜨의 얼굴이 한 순간 확 새빨개졌다. 다행히도 노을빛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마리네뜨를 안아든 블랙캣이 제 목을 살짝 까딱거렸다. 잡으라는 듯한 움직임에 마리네뜨가 손을 뻗어 블랙캣의 목을 껴안자마자 그가 바닥을 세게 차올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숲 속을 빠르게 달려가는 블랙캣을 꼭 붙잡고서 마리네뜨는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블랙캣의 움직임이 멈추자 소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주변이 어두워서 순간 앞에 무엇이 있는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두려움에 마리네뜨는 블랙캣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뭐냐고 묻는 듯한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와앗?!”


작은 탄성이 마리네뜨의 입가에서 터져나왔다.


푸르게 빛나는 불빛들이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이곳이 자신이 블랙캣을 처음 만났었던 골든 호르테 꽃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금색으로 물든 꽃들이 반딧불이의 빛을 받아 은은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꽃들 주변에 가득한 둥근 불빛들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딧불이였다.

반딧불이의 숲.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우와, 엄청 예뻐!”


블랙캣의 품에서 내려온 마리네뜨의 입가에 한가득 웃음이 번졌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정신없이 꽃밭을 바라보는 마리네뜨를 지켜보던 블랙캣의 눈가가 예쁘게 휘어졌다.


마리네뜨는 꽃밭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자신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 반딧불이들의 모습을 조용히 구경하던 마리네뜨가 환하게 웃으며 블랙캣을 돌아보았다.


“여기, 정말 예쁘다!”


방금 전의 우울했던 일들은 까맣게 잊었는지 즐겁게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모습이 블랙캣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블랙캣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리네뜨는 이리 오라는 듯이 블랙캣에게 손짓했다. 천천히 걸어오는 블랙캣의 손을 붙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기는 마리네뜨의 손은 무척 하얗고 따뜻했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제 손을 빤히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그르….”


작게 울리는 울음소리,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살짝 숨을 집어삼켰다. 평소보다 훨씬 차분하게 저를 향하는 시선은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듯 보여서, 마리네뜨는 피식 웃으며 남은 한 손으로 블랙캣의 뺨을 쓰다듬었다.


“싫다. 왜 그런 얼굴하고 있어?”


네가 더 아파할 필요 없는데.


“예쁜 장면을 보여줘서 고마워. 덕분에 다음에는 더 좋은 옷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던 블랙캣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살짝 휘어졌다. 얘 오늘 자주 웃네? 당황하는 마리네뜨의 앞에 블랙캣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잡고 있던 마리네뜨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그가 마리네뜨를 올려다보았다. 소중한 것을 대하듯, 마치 기사와 같은 정중한 행동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뻣뻣해진 고개를 애써 꽃밭으로 돌리며 쑥스러움을 무마하는 마리네뜨를 블랙캣은 상냥하게 기다려주었다. 소녀가 이제 만족했다고 말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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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3p 포함 총 85p입니다.

본편이 55, 외전이 27p로 외전은 블랙캣 시점의 본편입니다. 좀 더 동화스러운 느낌이에요..


통판폼 >

표지는 나중에 업로드해서 올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I.R.E
,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12.

세 번째 요정






말도 안 돼.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방 안을 빙빙 돌았다. 몇 시간째 같은 행동을 번복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보며 티키가 걱정스레 말했다.



“마리네뜨, 괜찮아?”

“괜찮…, 지 않아.”



힘없이 웃으며 마리네뜨는 빙빙 돌던 것을 멈추고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몇 번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펠릭스가 블랙캣이라니.


분명 변신이 풀리는 것을 바로 눈 앞에서 봤는데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혹시 나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남자는 사실 팬터마임 능력자가 아니라 환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들 정도로 블랙캣의 정체는 마리네뜨에게 충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악! 그럼 난 본인한테 그렇게 절절한 고백을 했단 말이야?!”



손으로 미친 듯이 베개를 내리치는 마리네뜨의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전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니 정말이지 답이 없었다. 그야말로 창피하기 짝이 없는 말들만 주구장창 늘어놓았던 것 같은데! 그것도 본인 앞에서! 아니 이미 고백 비슷한 건 했지만!



“잠깐, 그러고 보니….”


‘나, 레이디한테 반한 것 같아.’



씨익 웃으며 고백하던 블랙캣의 표정이 떠오르자 마리네뜨의 기분은 더욱 암전되었다. 그 때는 취향이 아니라고 딱 잘라 거절했었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아악, 어떻게 해? 이제 어떻게 블랙캣 얼굴을 보냐고! 아니, 펠릭스인가? 아무튼!”



그렇게 마구 떠들다가 마리네뜨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힘을 빼고 침대에 축 늘어진 상태로 마리네뜨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걸까…?”



확신할 수가 없었다. 티키가 그랬었다. 블랙캣을 믿지 말라고. 믿으면 너만 상처받을 거라고. 블랙캣의 비밀을 알려주던 티키의 목소리가 무의식 너머에서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베개를 끌어안고 옆으로 누워 있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착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어쩌지?



‘마리네뜨~?’



밑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엄마? 무슨 일이야!”

‘누가 널 찾아왔는데?’

“날?”



설마.


불길한 마음에 마리네뜨는 재빨리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익숙한 금발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마리네뜨가 크게 소리질렀다.



“나 없다고 해줘!”

‘이미 있다고 해버렸어~!!’

“아, 엄마!”



울상이 된 얼굴로 소리쳤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버렸다.



‘만나기 곤란하다고 말해줄까?’



미안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엄마를 향해 마리네뜨는 한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아니, 됐어. 내가 나갈게.”



밖으로 나오자 역시나 펠릭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를 바꾸자는 듯이 눈짓하는 펠릭스를 따라 마리네뜨는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전에 블랙캣과 이야기했던 바로 그 공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침묵은 더한 무게를 가지고 마리네뜨를 내리눌렀다.


다시 펠릭스를 만나면 어떨까 생각했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어색했다. 전에는 딱히 대화가 오가지 않았음에도 늘 즐거웠는데. 공원에 도착해서도 마리네뜨는 펠릭스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살짝 시선을 내린 채로 제 앞에 선 마리네뜨의 모습이 펠릭스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딱 말할 거만 말하고 다시 들어가자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힘없이 말했다.



“언제부터 알았어?”



내가 레이디버그인 거. 뒷 문장은 생략되어 있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은 펠릭스가 짧게 대답했다.



“얼마 안 됐어.”

“….”

“내가 블랙캣이라서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펠릭스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벌떡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덤덤했지만 초조해 보이는 펠릭스의 눈빛에 마리네뜨는 당황했다. 심장을 칼에 찔린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괴로웠다. 처음으로 보는 너의 얼굴들이 너무나 신기한데, 동시에 너무나 낯설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 내 앞에서 이런 모습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잖아.


그건 역시 내가 레이디버그라서?



“너, 나 피하고 있지?”



여전히 말이 없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재차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두워지는 마리네뜨의 안색을 살펴보는 펠릭스의 심정도 같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내일 말하자 생각했었다. 제대로 이야기하고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매일 공원으로 나가서 기다렸지만 마리네뜨는 다시 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매번 지겨울 정도로 공원에 와서 재잘거리던 녀석이 없어지니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용한 독서 시간이 이토록 어색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속이 타들어가는 감각인지 펠릭스는 다시금 체감했다. 그래서 직접 찾아왔는데 정말 곤란하다는 얼굴로 시선도 마주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리네뜨를 보니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한참을 우물거리던 마리네뜨는 겨우 대답했다.



“하, 할 말 없어.”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려는 듯이 뒤돌아서는 마리네뜨를 본 펠릭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걷혔다. 펠릭스 본인도 왜 이러는지 몰랐다. 블랙캣으로서 레이디버그에게 계속 거절당했을 때는 그저 섭섭했던 정도였는데, 어째서? 매번 받아온 거절임에도 마리네뜨의 입으로 듣는 건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울컥해진 펠릭스는 돌아서는 마리네뜨에게로 다가가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고 돌려세웠다.



“잠깐만!”

“놔!”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마리네뜨의 눈동자에 펠릭스는 심장이 아릿했지만 더욱 세게 팔을 붙잡았다. 펠릭스의 손을 뿌리치고자 팔을 마구 흔들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손에 울컥 감정이 치밀었는지 마리네뜨가 크게 소리질렀다.



“이거 놓으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마리네뜨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네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지 내가 아니잖아!!”



순간, 펠릭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와 동시에 손을 뿌리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마리네뜨를 멍하게 쳐다보던 펠릭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펠릭스의 셔츠 속에서 고개를 내민 플랙이 중얼거렸다.



“파트너, 안 쫓아가?”

“…지금 가봤자 날 보지 않을 거야.”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뒤돌아서던 펠릭스는 불에 덴 듯 올라오는 통증에 신음했다.



“으윽….”

“그러게, 무리하면 안 된다니까?”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 펠릭스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파트너인 플랙이 모를 리가 없었다. 펠릭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괜찮아.”



이 정도는.






빠르게 달려 집으로 돌아온 마리네뜨가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풀썩 엎드렸다. 엎어진 채로 아무런 말도 없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리네뜨, 마리네뜨.”



아무런 말이 없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티키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는 네가 심했어, 알지?”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다시금 말했다.



“그 애, 상처받은 거 같았어.”



마리네뜨가 뒤돌아섰을 때 쓸쓸하게 일그러지던 펠릭스의 표정을 티키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마리네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티키를 마주보았다.



“뭐가 상처받았다는 거야? 다 알면서도, 내가 레이디버그인 걸 알면서도 아무 말도 없었던 녀석인데. 블랙캣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던것도 다 계획적으로….”

“그게 아니라는 거 마리네뜨 너도 잘 알잖아.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 하면 마음이 편해져?”



정곡을 찌르는 티키의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잠시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알아! …펠릭스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거.”



정말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다면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질 리도 없었다.


마리네뜨가 두 손으로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몇 번을 우물거리다, 간신히 입을 여는 마리네뜨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고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상처받는 내가 너무 싫어.”

“마리네뜨….”

“레이디버그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 펠릭스도 분명 실망했겠지.”



힘없이 중얼거리던 마리네뜨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머물렀다.



“그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라는 강한 영웅이지, 마리네뜨라는 평범한 소녀가 아니니까.”






“하아….”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쓰러지는 펠릭스의 얼굴에 식은땀이 살짝 배어 있었다.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펠릭스는 피식 웃었다. 병원을 가서 치료를 받기에는 흔적이 남을 것 같아 집 안에서 치료하기는 했지만, 놀라서 헐레벌떡 달려온 집사를 납득시키는 것도 꽤나 고역이었다. 겨우 치료하긴 했지만 아마 당분간은 씻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문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거지만.


가상의 체스판을 들여다보는 펠릭스의 시선이 상대가 있는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가 다시 체스판으로 향했다. 킹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현재 그나마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말은 네 개. 하나는 크게 부상을 입었으니 당분간 활동을 자제하겠지.


뭐, 그건 자신도 그런가. 펠릭스는 쓰게 웃었다.


상대의 윤곽이 얼핏 보이는 것도 같았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패 중 하나가 실비아 에스프랑인 것을 안 이상, 뒤에 누가 있을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이미 전부터 눈치채고는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셰이드를 만났을 때부터 펠릭스는 셰이드가 실비아 에스프랑일 것이라 예상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실비아가 열렬하게 따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펠릭스는 순순히 인정했다.



“야, 좀 쉬라니까. 너 또 쓸데없는 생각하고 있지?”



또 시작이다. 자신이 다친 후로 이상할 정도로 잔소리가 많아진 플랙을 성가시다는 듯이 쳐다보던 펠릭스가 손으로 반지를 톡톡 쳤다. 으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플랙이 반지로 빨려들어가고 펠릭스는 곧 블랙캣의 모습으로 변했다. 읏차, 자리에서 일어나는 블랙캣은 제 몸을 휘휘 둘러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변신하면 확실히 고통이 줄어들긴 했다. 상처도 빨리 낫는 것 같고. 그래서 요즘은 평상시에도 집 안에서는 블랙캣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사는 허가하지 않으면 함부로 방문을 열지 않으니 목소리만으로도 지시하기는 꽤 쉬웠으니까.


가만히 있자니 자꾸 부정적인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블랙캣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책상 앞에 있는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노트북을 켜면서 그는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드론이었다.


상처 회복을 위해 블랙캣의 모습으로 자주 변신하게 된 지금, 블랙캣은 드론을 사용해 파리 시내를 자주 시찰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악당들의 움직임이 더 활발해진 느낌이 든다. 신문에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어려우니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드론은 참으로 편리한 물건이었다.


드론을 창문 밖으로 날려보내고 조종기의 선을 노트북과 연결했다. 도시를 한 바퀴 살펴본 후 언제나처럼 자연사 박물관 쪽으로 드론을 날렸다. 노트북에 떠 있는 화면을 감흥 없는 얼굴로 살펴보던 블랙캣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굴이 열려 있었다.


무슨 일이지? 놀라면서도 문득 걱정이 들었다. 저 동굴이 열려 있었을 때마다 무언가 꼭 일이 터졌으니까. 하지만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제발 자신이 갈 때까지 열려있기를 바라며 블랙캣은 재빨리 노트북을 끄고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바람처럼 달려 자연사 박물관 앞에 있는 동굴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동굴은 아직 열려 있었다.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동굴의 입구를 보며 블랙캣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파트너, 위험한 짓 하지 말라니까!’


플랙의 절규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런 플랙에게 미안했는지 블랙캣은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미룰 수 없어. 그러기엔 너무 예감이 좋지 않아.”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진실을 알아야겠어.


등의 상처가 다시금 욱신거리는 것도 같았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면서 블랙캣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괜찮아. 블랙캣 상태에서는 악당이 아닌 이상 쉽게 잡히진 않아.”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귀를 쫑긋 세웠다. 바람 소리에 섞여 들리는 작은 발소리들에 직감했다. 돌아오는구나. 블랙캣은 서둘러 서늘한 동굴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여유롭게 걸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소리없이 빠르게 발을 놀리며 블랙캣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동굴은 생각보다 굉장히 컸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졌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인공적으로 깎아낸 것만 같은 이질감이 풍겼다. 점점 밑으로 경사지는 동굴 안을 걷던 블랙캣은 곧 제 앞에 있는 문을 발견했다. 그냥 열었다가 사람이 바로 앞에 있으면 어쩌지? 순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블랙캣은 가방에서 물컵 하나를 꺼내들고 문 앞으로 다가가 컵을 문 위에 올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효과가 있었다. 간간히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에 블랙캣은 절로 초조해졌다. 몇 명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냥 확 들어가서 다 기절시켜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언제 나갔던 놈들이 돌아올지 모르는데.


하지만 제 존재를 노출시키는 건 너무 위험했다. 몸상태도 그렇고. 일단은 최대한 조용히 이 곳을 살펴보고 빠져나가는 것을 우위에 두어야 했다. 한숨을 내쉬며 블랙캣은 계속 기다렸다.


잠시 후, 정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즈음에서야 블랙캣은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세련되고 깔끔한 복도에 블랙캣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봐도 최신 연구 시설을 연상시키는 하얗고 깨끗한 복도의 바로 앞에는 철문이 하나 더 있었다. 굳이 엿듣지 않아도 분명 저 안에는 사람들이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블랙캣은 난감해졌다. 어떻게 저 안쪽으로 들어가지? 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


블랙캣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방에서 얇은 천을 하나 꺼냈다. 맨 처음 셰이드 플뢰르를 상대할 때 캠코더를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카멜레온 천. 덮어쓰면 주위와 동화되어 안에 들어간 사람이나 물건을 숨길 수 있다. 하여간 매직박스라는 건 언제 봐도 신기하다고 중얼거리며 반투명한 천을 머리에 뒤집어쓴 블랙캣이 살금살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기에 앞서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데 왜 이렇게 떨리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다행히도 문은 쉽게 열려주었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스르륵 문이 열리자마자 그 틈새로 낑겨들어간 블랙캣은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하얀 가운을 입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차트를 들고 두셋씩 붙어다니며 뭐라뭐라 떠들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복도는 시끌벅적했다. 이렇게 많은 연구원들을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펠릭스는 조금 놀랐다. 이 정도 인력을 모으자면 자금이 장난 아니게 필요했을 텐데.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큰 모양이었다.


사람들과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길을 돌아보고 있던 블랙캣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아들어 꽂혔다.



“아니, 아무리 봐도 보스가 갑자기 이상해지신 거 같지 않아? 갑자기 해외에 보냈던 연구팀까지 죄다 파리로 돌아오게 만들고.”



어떤 남자가 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인이 아닌지 남자의 목소리는 빠른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지만 알아듣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재빨리 남자의 뒤에 따라붙으며 블랙캣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두 사람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가 투덜거렸다.



“중요한 연구라고는 하는데 왜 갑자기 이런 연구를 시작하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은데 영….”

“어쩔 수 없지. 간부들만 아는 기밀 사항이라고 하니까.”

“바로 그게 문제야! 가뜩이나 이 연구 내용을 봐. 너무 수상쩍기 짝이 없다고.”

“쉿. 목소리 낮춰. 며칠 전에 숙청이 벌어졌던 거 잊었나?”



숙청?



“그래. 행방불명으로 처리되긴 했지만 개뿔. 분명히 위에서 처리한 거겠지. 이번 연구 때문에 간부진 사이에서도 대립이 심했다던 소문이 있던데.”

“그래봤자 별 수 있나. 조직에서 보스의 뜻은 절대적인데.”



하하 웃는 제 동료의 말에 남자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여간 나비, 나비. 이놈의 조직은 나비를 너무 좋아해. 이젠 살다살다….”

“쉿! 그 얘기는 금구일세.”



동료가 다시금 주의를 주자 그제서야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지 가만히 입을 다무는 두 사람을 블랙캣은 숨죽여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두 사람이 어느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목에 걸고 있던 카드를 리더기에 찍고 엄지손가락을 검사기 위에 올려 지문을 인식하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솔직히 이렇게 투덜대는 것 정도는 보스도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야? 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일했는데? 2월부터니까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가! 솔직히 지금도 이례적인 속도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위에서는 계속 빨리 성과를 내라 마라 잔소리를 하질 않나. 그렇게 말을 할 거면~ 자기들이 알아서 연구하든지!”



스트레스라며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남자에게 옆에 있던 동료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금방 끝나겠지. 좀만 더 힘내보세.”

“간만에 휴가를 낼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지. 이러다가 언제 이혼서류가 날아들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니까. 그렇다고 지금 여길 나가려고 들었다간 목숨이 위험할 테고. 뭐라 사정 설명을 하기도 애매하고.”

“하긴 우리도 이유를 모르니까.”

“누가 아니겠나.”



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지만, 블랙캣은 더 이상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더 이상 접근하다가는 위험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이 있었다. 저들의 대화에서 순간적으로 느꼈던 묘한 위화감.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블랙캣은 방금 전 대화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무언지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뭐지? 뭔가 이상했는데. 섬뜩한 감각이 전신을 후려치는 듯한 기분에 블랙캣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일했는데? 2월부터니까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가!’


체스판 위에 덮어져 있던 베일이 한 꺼풀 벗겨졌다. 상대가 들고 있는 건 바로 백색의 말.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시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미라큘러스를 깨웠던 것은 분명히 개학하고 사흘 뒤였다. 4일에 개학했으니까 정확히 3월 7일.


그런데 이 모든 게 2월부터 시작되었다고?


미라큘러스를 노린다는 말을 그다지 믿지는 않았었다. 악당들은 계속 파리에 나타났고, 꾸준히 미라큘러스를 노린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승부가 날라치면 발을 빼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미스터 피죤의 일례를 제외하고는 양쪽 다 위험할 정도로 승부가 치열하게 가지는 않았었다. 저번 오페라 하우스 사건 때는 자신이 작정하고 승부를 빨리 끝냈기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던 거였고.


저쪽이 먼저 수를 두기 시작했다는 건 이미 예전부터 무언가를 기획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적어도 2월부터는. 그렇다는 건 악당들도 자신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왜 우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파리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지?


만약 악당들이 파리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자신은 몰라도 마리네뜨는 더 이상 레이디버그로 변신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레이디버그는 몇 번이고 제게 이 모든 걸 그만두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었고, 자신은 그런 레이디버그의 마음을 이해했었다. 마리네뜨가 레이디버그로 변신했던 건 순전히 책임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인가? 우리를 계속 나타나게 하려고? 대체 왜?


자신들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뭐지? 언론의 관심?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이 영웅들에게 쏠려 있을 때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서?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블랙캣은 천천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정말로 미라큘러스를 노리는 게 아니었다면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


‘하여간 나비, 나비.’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려퍼진다.


‘이놈의 조직은 나비를 너무 좋아해. 이젠 살다살다….’

‘쉿! 그 얘기는 금구일세.’


나비를 좋아한다면, 역시.


블랙캣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실존했었나.


침착하게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간 블랙캣은 다시 끝없이 길게 늘어진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세히 둘러보니 연구원들은 목에 모두 목에 네모난 패스카드를 걸고 있었는데, 카드의 위쪽에는 작게 나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블랙캣은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아버지가 남겨두었던 책에 그려져 있던 호크모스의 브로치 모양과 거의 흡사했다. 그걸 알아본 블랙캣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난 대체 무얼 하고 하는 걸까.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블랙캣 자신도 쉽사리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다 파헤치고 나면, 그 뒤에는 진실이 남아 있을까?


하지만 그 다음에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잔혹한 진실의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만 같은 오싹한 기분에 블랙캣은 몸을 살짝 떨었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지만 호기심과 책임감으로 애써 내리눌렀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걷다보니 하얀 복도가 끝나고 또 다른 문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연구원들은 이쪽에서만 움직이는지 아무도 문의 근처로는 다가가려 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블랙캣의 눈앞에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시커먼 어둠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는 통로를 보며 블랙캣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밤눈이 밝은 블랙캣의 특성상 불을 켜지 않아도 통로를 걷는 것은 무척 수월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걸었을까, 블랙캣은 지금 자신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당한 거리를 걸어왔다는 건 분명했다. 지나오면서 여러 갈래로 나뉜 갈림길들도 몇 번 보았다. 되도록 중심부 쪽으로 방향을 잡으며 나아가니 더욱 길이 복잡하게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블랙캣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보아하니 지하에 온갖 통로를 뚫어놓은 모양이군.’


멀리 온 만큼이나 수많은 문들도 보았지만 블랙캣은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일일이 살펴볼 시간도 없을뿐더러 대체로 낡고 오래된 문들은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블랙캣은 다른 문을 찾고 있었다. 상당히 최근에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는, 그런 문.


중심부 쪽으로 올라오니 역시나 통로가 점점 더 밝아지기 시작했다. 통로를 흐릿하게 밝히고 있는 전등들을 보면서 블랙캣은 뒤집어쓰고 있는 천을 더욱 꼭 움켜쥐었다. 경사가 지고 있는 걸 봐서는 점점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불을 밝혀둔다는 건 자주 사용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리 전역에 이런 지하통로들이 거미줄처럼 존재하다니. 제대로 된 길을 모르면 영영 갇힐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블랙캣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누가 나타날지 모른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걷던 블랙캣의 바로 앞에 있던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가 나왔다.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러스트였다.


새하얀 복장이라 그런지 흐릿한 불빛 속에서도 러스트는 유독 눈에 띄었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창백한 얼굴과 무표정은 흡사 유령을 연상시켰다. 문을 닫은 러스트가 블랙캣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타박타박, 마치 풀밭 위를 밟는 것처럼 부드러운 발걸음 소리에 블랙캣의 얼굴은 긴장으로 바싹 조여들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들킨다.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바짝 굳은 블랙캣의 바로 옆으로 러스트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거침없이 걸어서 가까이로 오는 러스트의 모습에 블랙캣의 손이 구명줄을 잡듯이 천을 꼭 쥐었다. 그는 그저 커져가는 심장소리가 부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러스트가 블랙캣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블랙캣이 안심하려던 찰나, 동굴 안으로 갑자기 옅은 바람이 불어들었다. 러스트의 얼굴 쪽으로 불어온 바람 때문에 긴 금발이 살짝 흩날렸다.


문제는 블랙캣이 쓰고 있던 천까지도 바람에 쓸려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곧바로 뒤를 돌아보는 러스트에 블랙캣은 다시금 긴장의 끈을 붙잡았다. 아까 바람 때문에 살짝 발이 드러났던가? 아니야, 못 봤을 거야. 못 봤어야 해. 여기서 싸울 수는 없었다. 이곳이 러스트에게 굉장히 유리한 지형이기도 했지만, 전투를 하기에는 지금 제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여차하면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들키면 절대 자신을 살려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물끄러미 블랙캣이 있는 곳을 뚫어져라 살펴보던 러스트는 별다른 문제를 찾지 못했는지 곧 다시 몸을 돌렸다. 타박타박 울리는 발소리가 저 멀리로 사라졌을 즈음에야 블랙캣은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여간 스파이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블랙캣은 러스트가 나왔던 문 앞으로 다가섰다.


이 안에서 나왔다는 건 여기서 뭔가 있었다는 뜻이겠지?


조심스럽게 다가간 블랙캣이 살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절로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모습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지켜보던 푸른빛의 눈동자는, 살짝 눈을 감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안으로 들어간 블랙캣의 앞에 놓인 것은 위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이었다. 어둑한 주홍빛으로 빛나는 통로의 계단을 한참을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블랙캣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사람은 없었지만, 덩치 큰 한 사람이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좁은 통로라 누가 위에서 내려온다면 바로 들킬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왜 아예 몸을 투명하게 해주는 기능은 없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블랙캣은 문득, 이 통로 자체가 그리 낡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단 통로 자체가 상당히 깨끗했다. 특히 돌로 된 계단은 새로 지은 것만큼 반질반질했고 거의 때가 끼어있지도 않았다. 냄새도 살짝 새집에서 날 법한 느낌이고.


만든 지 얼마 안 됐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블랙캣의 앞에 문 하나가 나타났다. 나무문인데 생각보다 크기가 꽤 작았다. 제발 문이 열려있기를, 그리고 열 때 소리가 크지 않기를 바라며 블랙캣은 심호흡을 하고 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살짝 열고 그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자 나무로 된 작은 공간이 있었고, 또 문이 있었다. 가운데에 세로로 그어진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혹시 무슨 소리가 날까, 한참을 집중하던 블랙캣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판단 하에 앞에 있는 문을 두 손으로 천천히 밀었다.


화악 쏟아지는 빛과 함께 멀쩡하게 생긴 사무실이 나타났다. 그제서야 블랙캣은 자신이 연 문이 이 사무실의 옷장 뒤로 연결되어 있는 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천을 집어넣고 다시 가방에서 깨끗한 비닐신발을 꺼낸 블랙캣이 그걸 신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처음에는 꽤나 넓은 사무실이라 생각하기만 하다가 블랙캣은 바로 옆에 보이는 넓은 창문 쪽으로 다가섰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넓게 보이는 광장과 걸어다니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블랙캣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긴….’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그러면 여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리로 된 전시벽 안과 서랍들 위로 가지런히 세워진 트로피들과 그림들을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결론을 내렸다.


여기는 바로, 루브르 박물관의 관장이 머무는 관장실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중추라 불릴 수 있는 곳에 악당들이 나다닐 수 있는 통로가 있다니.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블랙캣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왜 러스트가 여기서 나왔을까?


관장도 저들과 한패라는 건가? 그러고 보면 그림 도난 사건때도 경찰에 비해 루브르의 대응이 상당히 소극적이긴 했었다. 어디까지나 경찰에 비해서라는 거지만.


그런데 왜 이런 통로를 만들었지? 잠깐만, 이번에 새로 만들어졌다면 전에는 없었다는 거잖아.


잠깐만, 관장이라고?


블랙캣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정보가 하나 있었다.


‘노아 바자르’


노아 바자르는 루브르 박물관의 전대 관장으로 차분하고 온화한 성격의 노신사였다. 루브르에 몇 번 가봤는지라 블랙캣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온화한 성격이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한 치의 타협도 없는 ‘루브르의 문지기’. 그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노아에겐 돈과 명예보다 예술 그 자체가 특히 중요했다. 몇십 년간 루브르에서 일해 온 만큼 그는 파리의 그 누구보다도 이 박물관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다. 아마 정전 사건 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아직까지도 관장직에 남아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렇게 박물관을 훼손하는 일에 절대 가담할 리가 없겠지.


관장이 정말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교체되었다는 소식은 블랙캣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곳이니만큼 빨리 후임자를 세우는 게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정전 사건은 이걸 위한 연막이었나.”



다른 피해자가 더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왜 루브르를 장악하기 위해 그런 번거로운 짓까지 한 건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쩔까, 생각한 순간 블랙캣이 귀를 쫑긋 세웠다.


발소리다.


후다닥 옷장 속으로 들어간 블랙캣은 최대한 소리없이 빠르게 옷장 문을 닫고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왔던 나무로 된 문으로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뒤, 블랙캣은 다시 가방에서 카멜레온 천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쓰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편,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지금 이 관장실의 주인인 맥스 베넌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관장실의 모습에 별 신경쓰지 않고 관장실로 들어오던 맥스의 책상 위에 있던 전화가 마구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기 위로 뜬 번호를 보자마자 맥스는 곧바로 자리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 정중히 대답했다.



“예, 제레미 님.”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온 블랙캣은 제 앞에 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이걸 열면 다시 통로로 나가게 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다시금 문을 열고 통로 쪽을 휙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고 안심하고 밖으로 나오던 순간 바로 뒤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문을 닫자마자 저쪽에서 블랙캣이 있는 쪽으로 몇 사람이 걸어왔다.


검은색 제복을 차려입고 있는 남자 세 명이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던 블랙캣은 남자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설치는 대충 마무리되고 있는 거 같지?”

“그래, 절반은 넘게 끝냈으니까 금방이야.”



놀란 가슴을 추스릴 새도 없이 블랙캣은 그들을 계속 따라가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방향을 계산했다. 여기가 루브르고 자신은 북쪽을 향해 걸어왔으니까, 아마 이 쪽은….



“보수를 많이 주는 건 좋은데 대체 우리가 왜 이걸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윗분들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투덜거리는 남자의 말에 다른 동료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옆에 있던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아마 비밀리에 불려간 녀석들도 제법 된다던데.”

“우와, 진짜? 살아 돌아오긴 하겠지?”

“쉿, 목소리가 커.”

“근데 사실이잖아. 위에서 불러서 갔다는 사람치고 멀쩡하게 돌아온 놈이 몇이나 있었냐고~”

“…그런 문제는 아닐 거야. 상당히 우수한 녀석들을 골라갔다고 들었거든.”

“그런 말 들어도 별로 안 부럽다, 야. 난 오래 살고 싶거든.”



많이 알면 그만큼 빨리 죽잖아? 웃으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블랙캣의 심장으로 날카롭게 날아와 꽂혔다. 그럼에도 담담한 자신에 블랙캣은 조금 놀랐다. 동시에 걱정도 들었다.


여기서 정말 뭐를 발견한다고 해도, 이걸 과연 레이디버그에게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자신과 똑같이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게?


블랙캣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모르는 것보다는 그래도 아는 게 낫다. 발을 빼기에 자신과 레이디버그는 이미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으니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것. 오직 그 뿐이다.


흔들리지 말자.



“그나저나 빨리 가야겠다. 시간 거의 다 됐어.”

“뭐가. 이대로 가면 나름 제 시간에 도착하겠는데.”

“너의 대충이란 개념에 목숨을 팔고 싶진 않아. 난 그 남자가 무서워 죽겠다고.”

“아, 그 하얀 얼굴의 덩치 큰 남자? 무섭지.”

“아무 말도 없는 게 더 무서워. 하긴 그 새까만 옷을 입은 여자보다는 나은 거 같지만.”

“켁, 그 여자 성격 장난 아닌 거 같던데. 게다가 능력도 진짜 괴물같다고. 악당이면 악당답게 히어로들이나 상대하고 있지 왜 우리까지 그 밑에서 일해야 하는 거야?”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블랙캣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이 녀석들과 악당들은 한 패거리였던 건가.



“야, 진짜 뛰어야겠다. 나 먼저 간다!”

“앗, 치사하게! 같이 가~!”

“너네 조용히 좀 해! 누구한테 들키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조용히 소리지르며 달려가는 남자들을 더 이상 쫓아가지 않고 블랙캣은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저번에 만났던 마임을 사용하는 남자가 있다면 이런 천쪼가리 하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장 성가시고 골치 아픈 상대를 마주하느니 차라리 다른 단서를 찾는 게 나을 것이다.


문득 블랙캣은 여기가 어디쯤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루브르에서 서남쪽으로 한참 걸어왔으니까, 아마 이곳은 1구 아니면 7구쯤이겠지.


7구라.


자신이 사는 동네다. 더불어 다른 누군가가 같이 떠올랐다.


한참을 고민하던 블랙캣은 결국 결정을 내리고 계속해서 걷기 시작했다. 위험하기는 했지만 천을 벗고 가방 속에서 나침반을 꺼내들었다. 나침반을 보고 서남쪽으로 걷기 시작하는 블랙캣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분명 이쯤 어디일 텐데.


문득 블랙캣은 자신이 별로 지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플랙의 말대로 블랙캣의 몸은 상당히 편했다. 쉽게 지치지도 않고, 상처 때문에 아직도 등이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이 상태로 있을 때는 특히나 치유력도 빨랐다.


하지만 이 힘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되었다. 블랙캣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익숙함은 더한 좌절을 부를 뿐이다.


머지않아 블랙캣은 곧 찾고 있던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커다란 돌로 막혀있는 입구는 딱 보기만 해도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커다랗고 두꺼운 돌문은 장정 여럿이서 덤벼야 겨우 조금 밀어낼 수 있을 만치 무거워 보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마 여기서 좌절하고 포기했겠지.


보통 사람이라면.


심호흡을 한 뒤에 블랙캣은 돌문을 꽉 잡았다. 별로 힘들이지 않았는데 돌문이 스윽 소리를 내며 옆으로 밀렸다. 딱 사람 하나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틈을 낸 다음에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을 닫았다. 낡은 돌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만큼 좁은 통로는 몇 세기는 거쳐온 것처럼 낡아 있었다. 계단의 돌들은 모양이 다 제각각 달랐고 천장과 계단의 가장자리에는 여기저기 이끼가 끼어 있었다. 불빛이 없어 사방이 매우 어두웠고 축축한 공기가 통로 전체를 둘러감고 있었다.


방금 전 지나왔던 루브르의 통로와는 다르게 일직선으로 높게 뻗어 있는 계단 위로 블랙캣은 발을 뻗었다. 어둠 속이라 그런 걸까, 위험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둘러쓴 천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주의하면서도 블랙캣은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모르겠다. 바로 앞에 희미한 빛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블랙캣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출구인가?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블랙캣은 그게 출구가 아닌, 계단 옆에 있는 공간에서 새어나오는 빛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공간은 이상했다. 반딧불이도 불빛도 아무것도 없는데도 안개처럼 희끄무레한 푸른빛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돌벽으로 감싸진 공간의 중앙에는 역시 돌로 된 둥근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작은 원형의 돌판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가까이서 보기 위해 공간에 발을 딛었다.


화악- 불어오는 바람에 블랙캣은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바람은 그만큼이나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바람이 잦아들자마자 블랙캣은 팔을 내리고 테이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둥근 테이블 위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정체불명들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외에 특징될 만한 점이라면 테이블에 나 있는 두 개의 홈이었는데, 테이블의 중앙에서 왼쪽으로 대각선 아래쪽에 육각형의 홈이 있었고 중앙에는 그보다는 두 배 정도 큰 직사각형의 홈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홈들의 가장자리를 정체 모를 글자들이 빼곡히 채웠다.


글자들을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이 글자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남겨두고 간 서적에 적힌 고대어들과 매우 닮아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지금 당장 읽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머릿속에 모양새를 기억한 다음 블랙캣은 미련없이 돌아섰다.


방에서 나와 다시금 위로 올라가던 블랙캣은 머지 않아 문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꽤나 평범하게 생긴 강철로 된 문이었다. 심호흡을 하고서 블랙캣은 다시금 카멜레온 천을 머리에 둘러썼다. 문의 손잡이를 잡고서 살짝 돌렸다. 끼익 소리가 날 때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상당히 세련되게 꾸며진 방이었지만 검푸른 보랏빛이 방 안을 가득 감싸고 있어서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지상인가, 지하인가. 문을 열기는 열었지만 쉽사리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블랙캣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던 중 블랙캣은 방 한 구석에 걸린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태피스트리 위로 거대한 나비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색깔은 어두워서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모양은 선명했다. 그리고 그에 블랙캣은 말을 잃었다.



“이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쩔까 망설이다가 블랙캣은 곧 결단을 내렸다. 천을 뒤집어쓴 채로 재빨리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와 근처 구석에 있는 옷장 뒤로 몸을 숨겼다.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체스판 앞에 걸려 있던 베일이 점점 벗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블랙캣은 보고 말았다. 하얀 양복을 입은 제레미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그리고 정확히는 제레미의 옆에서 날고 있는 세 번째 요정을.


자그마한 보라색 요정의 얼굴이 묘하게 슬퍼 보인다고, 블랙캣은 그렇게 느꼈다.


거리가 상당히 멀었고 거의 소곤거리듯 말해서 대화를 전부 다 엿듣지는 못했지만, 요정은 제레미에게 반항하고 있는 것 같았고 제레미는 시종일관 냉랭했다. 숙부의 입모양을 읽어내던 블랙캣은 순간 섬뜩해졌다.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라고?’



베일이 벗겨지고, 체스판 건너편에 앉아 있던 교활한 얼굴을 한 백발의 신사가 펠릭스를 조롱하듯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요정은 금세 풀이 죽었는지 살짝 꼬리를 내렸다.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하는 두 사람을 보고, 블랙캣은 이제 되었다 생각하며 두 사람의 곁을 지나 제레미가 들어온 문 밖으로 나갔다. 블랙캣이 스쳐 지나갈 때 요정이 살짝 그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것 같았지만 지금의 블랙캣에게는 그걸 신경쓸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이 곳에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밖으로 나오자 으리으리한 유피테르 가의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나비 저택.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저택을 뒤로 한 채 블랙캣은 빠르게 거리를 달려 제가 사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 변신을 풀자마자 펠릭스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계속 긴장하고 있던 게 풀려서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등의 상처가 터질세라 엎드려 누운 채로 펠릭스는 눈을 감았다. 플랙도 지쳤는지 바닥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었다.


그런 플랙을 내려다보며 펠릭스는 몇 번 입을 벙긋거리다 말았다. 너무 많은 정보를 알아서인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알게 된 건 있었다.


숙부의 정체를. 그리고 자신이 마주하게 된 운명을.


펠릭스의 입가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어떡하면 좋지?”



나는.





- 2권으로 이어집니다




===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벌써 12화를 다 업로드했다니 감회가 새롭군요. 일단 12화에 대한 설명만 좀 적고 사담을 적을게요.


제가 온리전 전에도 말했었지만 봄과 여름 에피소드는 여러 가지 떡밥을 뿌리는 장이었습니다. 가을과 겨울에 그 떡밥들을 전부 수거하게 되죠. 굳이 수거하지 않아도 되는 떡밥은 맥거핀으로 남기거나 설정집에 적어 두었습니다. 재판 때는 설정집을 배부하지 않지만 후일담에 내용 좀 더 추가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근데 별 거 없어요(...)


동굴 떡밥을 5화 때부터 뿌렸습니다만 여기서 이렇게 수거하게 되네요. 파리 전역에 거미줄처럼 그려진 비밀 통로. 지반에서 한참 밑에 있는 장소라 파리가 무너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파리는 도시계획상 고층 아파트가 정말 없는 동네라 지반에 별 압박이 가지도 않아요.


펠릭스는 정말로 똑똑한 아이입니다. 그건 아마 앞으로 차차 증명될거예요. 기획 단계에서 펠릭스와 마리네뜨의 비중과 활약을 고르게 잡기 위해 많이 노력했는데 잘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2권에서는 펠릭스가 좀 더 활약을 보여주겠지만 마리네뜨는 마리네뜨대로 중요한 축을 맡을 예정이랍니다.


아, 두 사람의 연애사는 어떻게 되냐고요? 하하 그건 스포니까 패스! 입이 근질거립니다만 뭐든 처음 볼 때의 즐거움은 소중한 법이니까요^ㅁ^ 재판은 1월쯤에 이루어질 예정이니 그 때 찾아와주세요~!


11화에 암시했던 비밀 방이나 12화의 떡밥들은 2권으로 넘어갑니다:) 저는 이 작품을 쓸 때 부제를 정하는 일이 가장 즐거웠는데 개인적으로 12화 부제 매우 좋아합니다. 세 번째 요정, 사실 12화의 내용은 이 마지막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죠. 마지막에 등장한 누루! 제레미! 그리고 호크모스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 펠릭스! 펠릭스가 블랙캣이라는 걸 알고 멘붕에 빠진 마리네뜨!


과연 그들의 앞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참, 여름의 부제는 소용돌이치는 진실, 이었답니다. 이제 가을: 선택의 기로 로 이어집니다.



재판수량조사 링크는 이쪽>> http://naver.me/x24EEI80




여기서부터는 사담입니다. 굳이 안 읽으셔도 되어요 제 잡담이니까요(...)


개인적으로 12화는 정말 의외롭게도 여름 에피소드 중 가장 편하게 작업한 화이기도 합니다. 거의 블랙캣 원맨쇼에 가까운 내용이라 묘사가 많아서 힘들 줄 알았는데 너무 작업이 잘 되서 쓴 저도 놀랐답니다(...) 아무래도 저는 한명만 다루는 걸 제일 편하게 생각하나봐요!ㅋㅋㅋㅋㅋ


12화 작업 당시에 정말 즐겁게 작업했고, 1권은 여기서 끝납니다! 사실 온리전 당시 작업할 때 너무 힘들어서 겨울 에피 작업할 때 그냥 1권만 낼까 했지만, 1권만 냈다가는 이 결말 보고 지인들이 이렇게 끝내놓고 다음권을 안내다니 미쳤냐고 제 목을 조르실 것이 자명하여(...) 그냥 2권까지 작업 끝냈습니다.


여름 에피가 어떠셨을지 모르겠어요. 일단 봄보다는 무겁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근데 사실 여름보다는 가을이, 가을보다는 겨울이 훨씬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뭐 이 정도는 주의사항 보신 분들이라면 이미 각오하셨겠죠?^ㅁ^


봄의 결말이 호크모스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었다면, 여름의 결말은 펠릭스가 숙부가 호크모스라는 걸 확인하는 것입니다. 파트별로 정해놓은 주제와 결말이 있는데 이번 회지에서 구상대로 잘 흘러간 거 같아서 기쁩니다.


개인적으로 1권도 재밌었지만 2권이 정말 재밌었습니다. 그만큼 힘들기도 했지만요. 왜냐하면 읽으시는 분들도 힘드시겠지만 작업할 때 제 멘탈도 같이 깨져갔기 때문이죠. 바스스스... 심지어 저는 모든 서사와 내용과 결말까지 다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에요. 이입해야 하니까.. 음 스포는 아니지만 펠릭마리는 정말 정신력이 캐짱쎈 아이들입니다bb


트레일러에 기반해 가급적 안정된 서사와 완벽한 결말을 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일단 제 최대 목표는 주의사항에도 적어놓았지만 트레일러의 재현이었거든요. 제가 보고 싶었으니까요 투디..ㅠㅠㅠ 실제로 1권 내용만 보셔도 트레일러에 나온 몇몇 장면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나머지는 2권에서 나올 예정입니다.


오랜만의 장편이라 그런지, 에피소드 구상과 배치에만도 정말 많이 시간을 잡아먹었는데 다들 재미있다고 감상을 주셔서 기쁩니다ㅠㅠㅠ 오랜만에 장편 작업하니 생각보다 너무 기력빠져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으윽... 2차에서 장편은 이걸 마지막으로 하고 싶네요 너무 힘들어요(mm 이게 다 펠릭마리가 예쁜 탓이고 감독님이 본편을 주지 않으시는 탓입니다(떠넘김(감독님: 야


너무 사담이 길었네요ㅇ0ㅇ 원체 후기적는 걸 좋아해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시어요(mm 


1월에 뵙겠습니다>< 감상 늘 감사드립니다>ㅁ<)/


Posted by I.R.E
,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11.

벗겨진 가면






“티키, 티키!”



마리네뜨가 다급한 표정으로 티키를 불렀다. 한 손에는 옅은 푸른색의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다른 쪽에는 흰색과 붉은색이 조화롭게 섞인 깜찍한 원피스를 들고서 마리네뜨가 질문했다. 



“이거랑, 이거. 어느 게 더 괜찮아?”



자기 몸에 옷을 대보며 진지하게 묻는 마리네뜨에 티키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붉은색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게 말하며 마리네뜨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런 마리네뜨의 주변에는 온갖 옷가지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도대체 몇 벌을 꺼낸 건지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이는 바닥 위에서 마리네뜨는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이제 며칠 후면 드디어 펠릭스와의 데이트 날이라구!”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행복해하는 마리네뜨를 티키는 못 말리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도 흐뭇하게 웃었다. 어쨌든 소원대로 데이트를 하게 되었으니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사실 메인은 오페라였지만, 지금 오페라가 얼마나 훌륭하고 말고는 마리네뜨에게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줄거리를 꼼꼼히 읽어보니 재밌을 것 같기는 했지만 당장 자신이 무대에 집중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헉, 펠릭스한테 이상한 애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계속 펠릭스만 쳐다보지 않게 조심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다시금 희희낙락 웃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리네뜨, 아직 3일이나 남았어.”

“‘3일밖에’ 안 남은 거겠지~”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 결국 티키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어휴, 못 말리겠다. 그런데 이거 정리는 언제….”



티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마리네뜨는 원피스를 들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몇 번을 꾸물꾸물거리다 마리네뜨는 이내 힘을 빼고 침대에 축 늘어졌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앞으로 티키가 다가왔다. 날아오는 티키를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붙잡고 마리네뜨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토요일이 왔으면 좋겠다~”



행복해.






“에에취!”



커다란 재채기 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처럼 서재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펠릭스에게 플랙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감기라도 걸렸어?”

“별로.”



누가 내 얘기라도 하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를 문지르며 중얼거리는 펠릭스에 플랙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누구라면, 그 여자애?”

“그럴지도 모르지.”



하아.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이내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낄낄거렸다.



“그나저나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걔랑 만나기로 한 거야?”



더욱 깊게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의 모습에 플랙은 더욱 싱글벙글 웃으며 펠릭스를 놀려먹었다.



“귀찮다고 죄다 거절하던 건 언제고~? 응? 나 몰래 너희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능글맞게 웃으며 질문폭탄을 던지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 녀석이 레이디버그일 지도 몰라.”

“걔가?”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는 플랙과 달리 펠릭스의 눈빛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닮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둘 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머리를 묶고 다니는 스타일도 말투도 전부 비슷했다. 왜 이걸 이제야 눈치챘나 싶을 정도로.



“확인해 볼 생각이야.”



진짜 레이디버그인지 아닌지.


다짐하듯 대답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흐음…. 뭐 그건 네 자유기는 하지만, 조심하라구.”

“알고 있어.”

“가뜩이나 레이디버그한테 붙은 녀석은 귀찮단 말이야.”

“…어떤 점에서?”

“잔소리가 심하거든~!”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하는 플랙에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플랙이 저렇게 말하는 상대라면 보통 끈기를 가진 게 아닐 것이다. 말만 들어도 왠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 같다.



“아, 너 또 이상한 생각했지?”

“아닌데.”



휙 고개를 돌리며 부정하는 펠릭스의 모습을 플랙이 수상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다시 낄낄 웃었다.



“이야, 아무튼 재밌어지겠네!”



공중에서 빙글빙글 서재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짜증스레 말했다.



“너 제발 거기 가서는 가만히 있어. 정체를 확인하러 갔다가 역으로 들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맨입으로?”

“치즈 한 판이면 되지?”

“콜!”



신났는지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하는 플랙의 몸에서 새까만 빛이 가루처럼 떨어졌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서재 안이 들썩거렸다. 펠릭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너 가만히 좀 있어!”

“냐하하하~!”



펠릭스가 뭐라든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돌아다니던 플랙이 어느 책장 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플랙을 보고 펠릭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파트너, 이 책은 뭐야?”

“야! 만지지 마!”



이미 늦었다. 우르르 쏟아지는 책 더미를 보며 펠릭스의 얼굴에는 또 다시 고뇌가 서렸다. 이미 떨어진 거 어쩌겠냐 싶어서 그저 한숨지으며 책을 줍기 시작하던 펠릭스는 떨어진 책 중 하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뭔데, 뭔데?”

“…아버지가 좋아했던 책이야.”



씁쓸한 표정으로 나직히 중얼거리며 펠릭스는 그 책을 고이 집어들어 탁탁 털었다. 먼지가 많이 묻어나는 걸 보면 확실히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르긴 했던 모양이다. 부모님의 사고 이후로 두 분의 물건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었으니까. 최근에서야 조금씩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상당히 독특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호탕하게 웃고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며 작은 어린아이와도 늘 진심으로 놀아줄 수 있는 사람. 사실 지금도 조금은 그리웠다. 아버지라면 분명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진심으로 이해해줄 텐데.



“…그러고 보면 옛날에 아버지가 그랬었지. 자기의 꿈은 요정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이야.”


‘우리 아들~ 아빠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오호, 꿈이 크시구만?”



낄낄거리며 웃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게. 너처럼 속 썩이는 녀석이라는 걸 아셨으면 진작에 환상을 버리셨을 텐데.”

“너무하네~ 내가 뭐 어때서?”


‘요정은 실존한단다. 분명히.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플랙과 투닥거리면서도 펠릭스는 점점 많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 묵혀 두어서 거의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고고학을 연구해서인지 아버지는 세계 곳곳의 나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우화들이나 전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야기처럼 자신에게 들려주곤 했다. 요정에 대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요정에 대해 말하면서, 아버지가 지겹도록 자주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붉은 동그라미에 검은 점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요정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네.’


펠릭스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잠깐만.


‘검은 고양이는 늘 외톨이. 하지만 그들은 고독하기에 오히려 더 영리하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깜짝 놀라는 펠릭스의 얼굴을 보고 플랙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뭔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기적을 담아.’

“잉?”

‘기회는 단 한 번뿐. 그렇기에 기적이란 아름다운 것이라네.’



가만히 중얼거리던 펠릭스가 그 순간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책장 쪽으로 다가갔다. 어딘지 나사 하나 빠진 얼굴로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는 펠릭스를 보며 플랙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너 뭐해?”

“이 노래가 적혀 있는 책이 있었어. 잠깐만.”



기억을 되짚어가며 책장을 찾는 펠릭스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대화가 필름을 감는 것처럼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빠, 그건 대체 무슨 노래야?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말하는 게 제대로 안 이어지잖아!’

‘하하, 아들. 언젠가 아들도 이 노래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야.’

‘지금 알려주면 안 돼?’

‘안 돼. 이걸 이해하기에 우리 아들은 아직 어리니까~’

‘쳇.’


그 때, 울상이던 자신을 보며 난처해하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으며 제게 말했었다.


‘그럼, 대신 이렇게 하면 어때?’


그 말과 함께 아버지는 맨 위쪽에 있던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보여주며 눈을 찡긋거렸다.


‘만약 우리 아들이 아버지가 알려주기 전에 이 노래를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이 책을 찾아보렴. 원하는 것을 모두 알 수 있을 테니까. 단, 그 전까지는 손대지 않기!’


금빛으로 빛나는 글씨가 박힌 자주색의 책이었다. 독특한 생김새라 어떻게 생겼는지도 어디에 꽂혀 있었는지도 대충 기억이 난다.


물론 이건 어린 시절부터 서재에서 살다시피 했던 펠릭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이 넓은 서재에서 9년이나 전에 꽂아두었던 책 한 권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찾았다.”



나직히 중얼거리며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자주빛 책등으로 손을 뻗어 책을 꺼내들었다. 사다리에 매달린 채로 책의 표지를 넘겨보던 펠릭스의 손이 멈칫했다.


책 안은 백지였다. 어떤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멍해 있는 펠릭스의 곁으로 휙 날아온 플랙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게 뭐야?”

“잘못 찾았나? 아니야, 분명 이거였는데….”



그렇게 말하기도 잠시,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는 책장에 펠릭스는 놀라서 사다리를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부드럽게 바닥을 구르며 90°로 벌어지던 책장이 펠릭스의 코끝에서 우뚝 멈춰섰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펠릭스는 책장이 서 있던 자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문이 있었다. 상당히 오래 사용하지 않았는지 꽤나 낡아있는 나무문은 손으로 밀기만 해도 끼익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조심조심 다가간 펠릭스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열리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펠릭스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가, 도약하면서 문을 세게 발로 찼다. 문이 부숴지면서 방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드러난 방 안을 보며 펠릭스는 깜짝 놀랐다.



“이건…!!”



한 10평 정도의, 사람 한 사람이 들어가서 작업하면 딱 좋을 듯한 작은 방이었다. 방 안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가운데에 놓여 있는 갈색의 나무 탁자와 의자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서려던 펠릭스는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방 안을 둘러보더니, 뒤로 돌아갔다가 제 필통에 있던 지우개를 가져와 방 안으로 던져보았다.


툭, 데구르르…. 별 문제 없이 방 안으로 굴러가는 지우개를 보며 펠릭스는 조용히 생각했다. 위험한 건 없나 보군.


조심스럽게 문설주를 넘어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던 펠릭스는 나무 책상 바로 뒤쪽에 놓여 있는 커다란 강철 상자를 발견했다. 아까는 책상에 가려져서 안 보였던 모양이다. 열쇠구멍 하나가 달려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특징도 없어 보이는 강철 상자는 옛날의 정취를 고스란히 가져왔다 평가될 만한 이 낡은 방과 대조되어서인지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풍겼다.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펠릭스는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뚜껑을 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것에 난감해졌다. 역시 열쇠가 있어야 하나. 하지만 열쇠 구멍을 살펴보니 딱 보기에도 모양이 상당히 독특했다. 집에 있는 열쇠들 중에 이런 모양의 열쇠가 있었던가. 일단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펠릭스의 옆으로 플랙이 날아왔다.



“뭐야, 왜 그래 파트너? 이거 안 열어봐?”

“…열쇠가 없는데 어떻게 열어. 잠깐만, 일단 열쇠를 가지고 와야.”

“흐흥~? 그런 게 왜 필요해?”

“뭐?”



씨익 웃던 플랙이 쏜살같이 상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펠릭스가 말릴 틈도 없이 플랙이 상자를 통과해 들어가고 한참 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상자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상자의 뚜껑이 툭 소리와 함께 열리면서 플랙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휘잉 돌아다니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 재주도 있었어?”

“그럼~ 예전에 많이 써먹었지!”



키득키득 웃고 있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에 썼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써먹었을 것 같아 묻기도 겁난다.


어쨌든 수고를 덜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펠릭스는 가만히 상자 속을 살펴보았다. 상자 안에는 두꺼운 몇 권의 노트와 더불어 다발로 묶인 종이뭉치 등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종이 자체는 꽤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끽해야 5~10년 정도? 노트와 종이들에는 하나같이 빽빽하게 무어라 적혀 있었는데, 프랑스어가 아닌 괴상한 문양의 글자들도 같이 적혀 있었다.


뭐가 더 없을까 생각하며 상자 속을 뒤적거리던 펠릭스의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손에 닿는 맨들맨들한 촉감이 종이와는 확연히 달랐다. 조심스럽게 상자 속에서 빼낸 물건은 짙은 파란색으로 된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상자였다. 다행히도 열쇠는 없었고 작은 고리 하나가 달려 있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상자를 열어본 펠릭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책이었다. 엄청나게 낡은 책. 다른 종이뭉치나 노트들과는 달리 붉은 가죽으로 된 테두리에는 얼룩이 가득 져 있었고, 살짝 펴본 책의 종이는 굉장히 낡아 있었다. 게다가 사용된 종이는 적어도 몇 세기 전에 사용했을 법한 재질로 되어 있었다. 족히 몇백 년은 묵었을 법한 책이었지만, 낡았다는 점을 빼면 종이의 상태는 아직도 양호한 편이었으며 글씨들도 상당히 선명했다. 펠릭스는 다른 것보다 이 점이 가장 신기했다. 무슨 수를 쓴 거지?


첫 장을 폈지만 당최 무슨 말인지 읽을 수가 없는 글자들이 수두룩했다. 고대어인가? 생각하며 몇 장을 더 넘기다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책이 든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건…?!”



책에는 글자만이 아니라 그림들도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펠릭스가 펴든 페이지에 그려져 있는 건 붉은 바탕에 검은 점박이가 박힌 옷을 입고 있는 누군가의 그림이었다. 황급히 다음 장들을 넘기자 다양한 옷을 입은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블랙캣은 물론이고 전혀 모르겠는 몇몇의 사람들을 지나, 호크모스가 있는 페이지를 발견하고서 펠릭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왜 여기에….”

“파트너~ 이쪽에도 뭐가 있는데?”



플랙이 부르는 소리에 펠릭스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새 모두 열어젖혀져 있는 책상의 서랍들을 보며 펠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플랙, 아무거나 뒤지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뭐 종이같은 게 있는데에~? 어디, 누가 쓴 걸까나~”



언제나처럼 펠릭스의 말을 무시하고 종이 하나를 꺼내든 플랙이 쫙 펼친 종이를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친애하는 펠릭스에게? 우웩, 닭살 돋는구만. 파트너, 이거 너한테 쓴 거 같은데?”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플랙에게서 편지를 낚아챘다. 빠르게 편지를 읽어내리는 펠릭스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편지를 다 읽고 잠시간 말이 없던 펠릭스는 곧바로 플랙에게 물었다.



“편지가 이거 한 통 뿐이야?”

“으음, 아니~? 저기 가지런히 쌓여 있던데? 날짜까지 제대로 적혀 있더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서랍에 들어 있는 편지들을 닥치는 대로 꺼내기 시작했다. 묵묵히 종이를 훑어보면서 날짜 순서대로 분류하기 시작하는 펠릭스의 주변을 날아다니던 플랙은 그런 펠릭스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뭐야, 그거 누군데?”



편지들을 모두 정리한 펠릭스가 가장 처음에 쓰여진 편지라 추정되는 종이를 집어들었다. 천천히, 침착하게 편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펠릭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




『펠릭스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지금 너는 몇 살쯤 되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이 편지를 읽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만약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적어도 서재 안에 있는 비밀 방을 발견했다는 거겠지. 나와 너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모르면 절대 방을 발견할 수 없을 테니 그는 걱정하지 않는단다.


가급적 네가 어른이 된 뒤에 내 손으로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으니까 말이다.


언제 내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이 편지를 남긴다.


아직 어린 아이인 너를 보며 벌써부터 죽음을 생각하는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무슨 소리지? 펠릭스는 천천히 다음 구절을 읽어내렸다.



『지금 나는 네게 무척이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남기려고 한단다.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조차도 네 선택이니 존중해야겠지. 하지만 이 편지에 담긴 내용들은 하나부터 끝까지 모두 진실임을 맹세하겠다. 그러니 끝까지 읽어주기를 바란다.』



그 말과 함께 편지에는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오래 전의 쓰여진 편지에서도 더한 과거를 회상한다는 점에서 조금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는 놀라운 일이 한 가득이지. 개중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상식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한 일들도 많단다. 내가 고고학자를 꿈꾸게 된 것도 바로 그런 놀라운 일들에 대한 진실을 탐구해보고자 했던 열망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펠릭스. 사실 내가 고고학자를 꿈꾸게 된 근본적인 계기는 바로 이 집에 있었단다. 네가 발견했을 이 비밀 방은 내가 만든 게 아니야. 오래 전부터 이 집에 존재해왔던 거지.』



오래 전부터?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했다. 유지공사를 좀 하기는 했지만 이 저택이 만들어진 건 자신이 알기로도 대략 몇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럼 그 때부터 계속 이런 공간이 존재했었다는 말인가?



『옆에 있는 금고를 열어봤을지 모르겠구나. 안에 많은 종이뭉치들이 들어 있지? 그건 내가 아직 성인이 되기 전, 이 방을 발견했던 당시부터 계속해서 꾸준히 연구해왔던 모든 것이란다.』



성인이 되기 전이라면 지금 자신의 나이 또래인 걸까. 자신과 아버지가 비슷한 시기에 이 곳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니 기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낡은 책 한 권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



그 한 구절이 펠릭스의 마음 속에 쿡 박혀왔다. 한참을 그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펠릭스는 애써 밑의 문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책은 아주 오래 전, 매우 영리하고 똑똑한 학자의 손에 쓰여진 것이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져버린 여명 같은 사람이었지. 이 책에서는 그 학자가 알아낸, ‘미라큘러스’ 라는 신비한 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빠르게 편지의 마지막 구절로 시선을 돌렸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구나. 얘기해주마. 내가 최대한으로 알아낸, 우리 가문에 얽힌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를.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읽어내리던 펠릭스의 손이 힘없이 편지를 놓쳤다.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지는 편지에 적혀 있는 마지막 구절이 청회색 눈동자에 선명하게 찍혔다.



『네 어머니의 친가인, 유피테르 가문에 대해서도.』






“펠릭스?”

“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색 원피스를 차려입고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본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멍해졌다. 어딘지 얼이 빠진 듯한 얼굴에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짧은 대답과 함께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의 시선에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살짝 홍조가 피어났다. 쑥스러운지 눈을 데록데록 굴리던 마리네뜨가 밝게 소리쳤다.



“그래? 그럼 들어가자! 곧 시작이야~!”



그렇게 말하며 마리네뜨가 손을 펠릭스에게로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헤헤 웃으며 그냥 뒤돌아서 오페라하우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마리네뜨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펠릭스는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순간 레이디버그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이 정도면 중증이라고 생각하며 펠릭스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자신을 앞서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어가는 마리네뜨를 부지런히 쫓아가면서도 펠릭스는 제 머릿속을 잠식하는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우연한 기회로 발견한 비밀 방에서 그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자료들과 편지들을 발견했다. 밤새 편지들을 모두 꼼꼼하게 읽고 나서야 펠릭스는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금고 속에 담겨 있던 해석본들을 꾸준히 읽어보았지만 미처 다 읽지 못했다. 그만큼 많았고, 그걸 차치하고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종종 보였다. 전체를 해석한 해석본보다는 부분부분씩 해석해놓은 종이들이 더 많았는데, 그 이유는 책이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펠릭스의 아버지, 라파엘 아그레스트의 편지에 저술되어 있었다.


그래도 상당히 많은 양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단순히 책을 해설해놓은 것만이 아니라, 책에 쓰인 고대어를 어떻게 읽는지에 대한 방법까지 노트에 자세하게 남겨두고 간 아버지의 선견지명에 펠릭스는 혀를 내둘렀다. 사실 상자에는 책에 대한 해석본뿐만 아니라 연구 일지들, 과거에 나타났던 히어로들이 활동했던 당시의 이야기들에 관해서도 적혀 있었다. 이건 분명 아버지가 따로 조사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이것을 같이 보지 못해서 안타깝기도 했다.


그리고 편지에서 좀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신빙성 없는 소리를 적어놓으실 성격이 아니니 어느 정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펠릭스?”

“…어?”



어느 샌가 제 앞으로 다가온 마리네뜨의 얼굴에 펠릭스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놓고 놀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펠릭스를 보며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오늘 왠지 멍한 느낌이네?”

“…잠을 잘 못 자서.”



사실이었다. 자료들을 읽느라 밤을 거의 샌 건 사실이니까. 낮에 좀 자긴 했지만 아직도 조금은 피곤했고.



“빨리 가자. 곧 들어갈 시간이라잖아.”



별 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 마리네뜨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빠르게 걸어가는 마리네뜨를 바라보며 펠릭스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차리자.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 녀석이 레이디버그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은 여기에 왔고, 제대로 물어봐야만 했다. 그런데 자꾸 한눈을 팔면 어쩌자는 거야?


관객석으로 가는 문을 열자 웅장한 팔레 가르니에의 내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급스러운 붉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들이 금빛 난간과 기둥들 사이로 치아처럼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아직 극이 시작하지 않아 객석 안은 살짝 어두웠고 무대는 붉은 천으로 감추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샹들리에까지. 어마무시하게 화려한 풍경에 마리네뜨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반면 펠릭스는 익숙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마리네뜨가 가진 표는 앞에서 네 번째 줄의 정 가운데였다. 이곳에 앉으니 무대가 한 눈에 보였다. 괜히 VIP석이 아니구나 싶어 속으로 감탄하던 찰나, 제 옆에 와서 조용히 앉은 펠릭스의 움직임에 마리네뜨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펠릭스와 단 둘이 오페라를 보러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절로 긴장되는 손끝을 애써 우그리며 마리네뜨는 방금 전에 가지고 온 팜플렛에 얼굴을 묻고 생각을 딴 데로 돌리려고 애썼다.


팜플렛을 열자마자 바로 맨 앞에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자의 사진이 보였다. 고혹적인 눈매에 단정한 이목구비, 살짝 짓는 미소는 무척 매력적이었으며 왼쪽 눈가에 찍힌 눈물점조차도 사랑스러웠다. 미인(美人)이라는 말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한동안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자의 사진 밑으로 작게 뭐라고 적혀 있었다.


<비올라 역, 실비아 에스프랑>


오페라 <십이야>의 주연인 비올라의 이름을 본 마리네뜨는 며칠 전 읽어보았던 십이야의 시놉시스를 떠올렸다.


살아남기 위해 남장을 했지만 자신을 고용한 백작을 사랑하게 되어 고뇌하게 되는 여인.


정체를 숨기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마리네뜨는 살짝 궁금해졌다.


비올라의 정체를 끝내 몰랐다면, 백작은 결국 비올라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까?


한편, 마리네뜨와는 별개의 이유로 펠릭스도 팜플렛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물론 그는 배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마리네뜨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오페라가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제작되게 되었는지 그 세세한 과정까지도 펠릭스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투자자 중에 자신이 잘 아는 남자가 있었으니까.


펠릭스는 지금 오페라의 내용을 새삼 되새겨보고 있었다. 오페라에서 보여주는 상황은 재미있게도 지금 그들의 상황을 나름대로 정확히 그려내고 있었다. 변장을 하는 남장을 하고 백작에게 고용되는 비올라. 하지만 백작은 올리비아를 사랑하고 있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비올라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엇갈리다 맺어지는 이야기. 펠릭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한결같이 자신을 바라보는 비올라가 아닌 다른 여자만을 바라보던 백작. 비올라는 그런 백작을 원망했을까?


그러던 중, 마리네뜨의 뇌리에 섬뜩한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가 물었다.



“왜 그래?”

“응? 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이상한?”

“근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뭔가 음, 느낌이 좋지 않…, 달까?”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말하고서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마리네뜨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이 바보야. 데이트하고 있는데 불길하다는 말이나 하고 있으면 어떡해! 마음 같아서는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지만 차마 펠릭스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일념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그런 마리네뜨를 내버려두고 펠릭스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시작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인지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들어온 상태였다. 그러던 중 펠릭스는 옆쪽에 붙은 객석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몇몇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멀어서 아주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신문이나 뉴스에서 자주 보던 얼굴들이었다. 몇몇 정치가들과 사업가들이 무리지어 앉아 뭐라고 소곤대거나, 위쪽에 달려 있는 객석에서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무대 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초연이라서 그런가. 이 오페라가 파리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그쪽에서도 관심을 가질 줄이야.


이런 유명인사들이 어쩌다 이렇게 많이 모이게 된 거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괜한 불길함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펠릭스가 마리네뜨에게 뭐라 더 물어보려던 순간, 불이 꺼지고 무대가 시작되었다.





오페라 <십이야>는 셰익스피어가 써낸 희곡 ‘십이야’ 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쌍둥이 남매 세바스찬과 비올라는 폭풍으로 인해 배가 침몰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어느 섬에 정박한 비올라는 백작이 고용인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장을 하고서 백작을 찾아간다. 백작의 곁에서 백작을 위해 일하는 동안 비올라는 백작을 사랑하게 되지만, 백작이 올리비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백작의 앞에서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입장에 괴로워하게 된다.


1막이 진행되는 와중 펠릭스는 힐끔 시선을 돌려 마리네뜨를 살펴보았다. 자신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때의 그 호기는 어디다 버려둔 건지 반짝거리는 눈으로 무대를 쳐다보고 있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정말 네가 레이디버그일까?


오늘 하루만도 몇 번씩 되새겼던 질문들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는 펠릭스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대체 뭘 확인하려고 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레이디버그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자신이 펠릭스는 무척 낯설었다. 생각해보면 그 전까지만 해도 레이디버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체를 그렇게 막 궁금해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걸까. 어째서?


오빠인 세바스찬을 그리워하며 노래부르는 비올라의 움직임을 멍하니 좇고 있던 마리네뜨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단번에 직감했다.


보고 있어.


왜 오페라가 아니라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까. 여기서 돌아봤다간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버릴 것만 같아서 마리네뜨는 다시 무대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긴장으로 손에 자꾸 땀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참 뒤에도 거두어질 기미가 없는 시선에 마리네뜨는 울고 싶어졌다.


돌아보고 싶어, 돌아보고 싶어, 돌아보고 싶어!!


괜찮을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마리네뜨에 펠릭스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마리네뜨를 마주보았다.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환한 불빛이 한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놀란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나던 순간, 마리네뜨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참지 못하고 마리네뜨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


객석의 불이 켜졌다.


1막이 끝났다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휴식 시간을 맞아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괜히 뻘쭘해져서 아무런 말도 못하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물.”

“어, 어?”

“사러 갈 건데. 마실 거야?”

“어, 응!! 고, 고마워.”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힐끗 돌아보다가 펠릭스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아, 긴장해서 죽는 줄 알았네.”



아직 주변에 사람들이 꽤 남아 있어 티키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가만히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마리네뜨는 문득 입구 쪽이 묘하게 소란스럽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지?”





물을 사고 곧바로 극장으로 돌아오다가, 방금 전보다 급격하게 늘어난 경비원들의 숫자를 본 펠릭스의 얼굴에 미미하게 경련이 일었다. 침착하게 최대한 경비원들 가까이 접근한 펠릭스는 지금 몇몇 사람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이야기를 주워듣자마자 다시 발길을 돌려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번쩍, 빛과 함께 변신한 블랙캣이 어스름한 복도를 재빨리 벗어나 창문 쪽으로 향했다.



“밖인가?”



가만히 중얼거리던 블랙캣이 창문에 발을 올려놓은 순간 건물 전체가 덜덜 요동쳤다. 그에 난리가 났는지 제가 지나온 통로 쪽이 웅성거리는 목소리들로 소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쳇, 혀를 차며 블랙캣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남겨두고 온 마리네뜨가 걱정되었지만 괜찮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벽을 타고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올라갔다. 건물 옥상에 올라서자마자 낯익은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묶여 있는 몇 명의 사람들과 그들 앞에 서 있는 셰이드 플뢰르와 마임맨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재빨리 구석으로 숨었다. 살금살금 다가간 블랙캣이 그들의 근처에 숨어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제, 제발. 살려 주시게.”



애원하는 남자에게 바로 앞에 서 있던 셰이드 플뢰르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럼 우리를 배신하지 말았어야지.”



배신? 이상한 단어에 블랙캣은 귀를 쫑긋거렸다. 셰이드가 이어서 말했다.



“조직을 배신하면 곧 죽음뿐. 여기서 오래 지내본 당신들이 그걸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

“그분께서는 당신들의 행동을 몰라서 내버려두신 게 아니야. 꼬리를 잡기 위해 기다린 거지. 접신 장소를 대범하게 이런 곳으로 잡은 건 칭찬해주지.”



잡기도 쉬웠으니까. 무심하게 대꾸하는 셰이드에게 남자들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 하지만…! 그 계획은 너무나 터무니없지 않소.”



항의하는 남자의 모습에 블랙캣은 점점 더 숨을 죽였다. 그런데 목소리를 죽였는지 그 다음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뭐라는 거지? 더 정확하게 듣기 위해 조금 더 살짝 고개를 숙이는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날아오는 느낌에 블랙캣은 간신히 얼굴을 숙여 그것을 피했다. 이미 들켰다는 생각에 순순히 앞으로 걸어나온 블랙캣의 모습에 셰이드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블랙캣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눈치챈 건 저 형씨 뿐이었던가.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보통 눈치가 아닌 건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같은 악당이 분명한데도 셰이드 플뢰르와 달리 저 자에게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지?


설마, 기척을 감출 수도 있는 건가? 가뜩이나 성가셔 보이는 상대한테 골치 아픈 능력까지 있군.


블랙캣이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말했다.



“어이쿠, 대단하네. 설마 그걸 눈치챌 줄이야.”



비아냥섞인 칭찬에도 마임맨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블랙캣은 다시금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형씨는 그 때 보고 오랜만에 보는 걸. 이름이 뭐야?”



여전히 침묵. 알려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왠지 펠릭스로서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상대라고 생각하며 블랙캣은 가방에서 봉을 꺼내 한 바퀴 휘두르다가 그들을 향해 겨누며 씨익 웃었다.



“선량한 시민들을 괴롭히다니, 그건 안 되지~!”

“쳇.”



블랙캣을 보자마자 셰이드는 묶여 있던 남자들에게로 한 손을 뻗었다. 그들 주변으로 꽃 모양의 그림자가 그려지고, 가장자리에서 스멀스멀 연기처럼 올라오기 시작하던 그림자들이 곧 날카로운 창이 되어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피와 비명을 흩뿌리며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블랙캣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신들 미쳤어?”

“지금 저 자들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셰이드가 손을 뻗자마자 블랙캣의 그림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곧바로 제 그림자 밑에서 날아드는 날카로운 가시들을 간신히 피한 블랙캣이 폴짝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셰이드는 재빨리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창을 꺼내 블랙캣에게로 던졌다. 날아오는 창에 깜짝 놀란 블랙캣은 가방에서 방패를 꺼내 창을 튕겨내고 간신히 옥상 바닥에 착지했다. 블랙캣의 얼굴에 살짝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나만도 벅찬데 둘이나 있다니.


전혀 흠집 하나 없는 방패를 내려다보며 블랙캣은 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다른 미라큘러스에 의해 만들어진 악당이라서 그런지 파워는 확실히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무시할 수 있는 위력은 또 아니었다. 지금이야 한 명을 상대하고 있으니 그럭저럭 버티는 거지만 옆에 있는 저 남자가 덤비기 시작하면 일이 귀찮아진다.


그러고 보면 방금 뭐였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는데, 마치 다트를 던지듯 손을 움직였다. 방금 제 얼굴 옆으로 무언가 스쳐 지나가던 감각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존재한 무언가.


잠깐, 그러고 보니 저 손동작은….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긴가민가하며 블랙캣은 중얼거렸다.



“…팬터마임?”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자가 살짝 눈을 치켜뜨더니 손을 들어 무언가를 던졌다.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하자 바닥으로 챙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또 다시 제게 날아오는 그림자로 된 검날에 블랙캣은 속으로 하핫 웃었다.


이거 진짜 살 떨리는데.


챙- 튕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블랙캣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붉은 머리끈을 휘날리며 제 앞에 서 있는 레이디버그를 올려다보며 블랙캣은 피식 웃었다.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건데.


이러면 정말 의심하게 되잖아.



“여, 레이디.”

“블랙캣, 너 괜찮아? 쟤넨 또 뭐야?!”



힐끔 블랙캣을 돌아보다가 다시 악당들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나지막히 속삭였다.



“레이디, 한 명씩 맡아야 할 거 같아. 미안한데, 저 하얀 녀석을 상대할 수 있겠어?”

“저 남자? 못할 건 없지.”



선선히 대답하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땡큐. 그럼 일단, 그림자가 질 만한 장소로 저 자식을 유인해 가도록 해. 안 그러면 좀 위험하니까.”

“그림자? 왜?”

“저 녀석의 능력이 뭔지 알 거 같아. 녀석은 팬터마임 능력자야.”

“팬터마임이라고?!”



깜짝 놀라서 자신을 돌아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끄덕였다. 툭툭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 손을 집어넣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말했다.



“근데 왜 굳이 네가 저쪽을 맡겠다는 건데?”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마 맞을 거 같긴 하지만.”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편한 대로 해.”

“오케이.”



그들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분위기를 살피던 블랙캣이 가방에서 거대한 창을 꺼내더니 정확히 셰이드와 마임맨이 서 있는 중앙을 향해 던졌다. 창을 피하기 위해 두 악당이 양 옆으로 갈라지자마자 레이디버그는 마임맨에게로 달려들어 발을 휘둘렀다. 그것을 가볍게 막아내며 뒤로 물러나는 마임맨을 향해 레이디버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마임맨을 조금씩 뒤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편 블랙캣은 셰이드 플뢰르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림자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셰이드 때문에 바닥에 발을 거의 디딜 수가 없었는지라 블랙캣은 공중을 뛰어다니며 탐색전을 펼쳤다.


‘그림자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건 한 가지씩뿐.’


두 개 이상을 꺼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제약은 자신들과 비슷한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가방에서 너클 한 쌍을 꺼내들어 손에 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약점은.


가까이 접근하는 블랙캣에 셰이드는 그림자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블랙캣이 한 발 더 빨랐다. 재빠르게 그림자를 피해 블랙캣이 주먹을 휘두르자 셰이드는 양 팔을 X자로 모아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림자에서 검을 꺼내드는 셰이드의 모습에 블랙캣이 픽 웃으며 조롱했다.



“역시, 반응속도가 느리군.”



그림자에서 무언가를 꺼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5초 정도. 물론 일반인이 대응하기에는 무척 짧은 시간이지만 히어로라면 경우가 달랐다.

두 손을 흔들며 블랙캣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검을 휘둘러 너클을 막아내는 셰이드의 얼굴에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블랙캣은 달랐다. 자신은 그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블랙캣의 눈에 찾고 있던 것이 스쳐 지나갔다.


왼쪽 얼굴 밑에 있을 눈물점.


긴 발톱들이 달린 너클로 셰이드의 검과 맞부딪히던 순간, 블랙캣이 조용히 속삭였다.



“…실비아 에스프랑?”



블랙캣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셰이드의 몸이 한 순간 싸악 굳었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않은 블랙캣의 주먹이 셰이드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혔다. 쿨럭,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셰이드를 보며 블랙캣은 큰일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의외로 순진하네. 악당이 그래서 쓰겠어?”



가면을 쓰고 있는데 눈가가 보일 리가 없잖아.


한심하다는 듯이 내뱉는 블랙캣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셰이드 플뢰르를 내버려두고 블랙캣은 서둘러 레이디버그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상당히 일방적으로 끝난 블랙캣과 셰이드의 대결과는 달리, 레이디버그와 마임맨은 꽤 아슬아슬한 승부를 보이고 있었다.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의 옥상에서 벗어나 근처 건물들의 지붕 위로 내려와 숨가쁘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임맨은 신체능력도 뛰어났지만 머리도 무척이나 좋은 악당이었다. 무엇보다 본인의 능력을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격투술도 뛰어났지만 중간중간 무기를 꺼내들고 움직이는 통에 레이디버그는 계속 마임맨의 그림자를 보며 그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는지를 신경써야 했다.


몇 번의 합을 주고받다가 세게 밀려난 레이디버그의 등 뒤에 차가운 촉감이 닿았다. 벽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레이디버그의 앞으로 빠르게 파고든 마임맨이 다시 무언가를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힐끗 그림자를 보고서 그가 망치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공격을 피했다.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귓가에 무섭도록 선명하게 꽂혔다.


피어나는 먼지들 사이에서 뛰어나온 레이디버그가 다시 마임맨에게 발을 휘둘렀다. 벽이 부서지는 반동에 잠깐 자세가 흐트러졌던 마임맨이 레이디버그의 발차기를 막으며 몇 발자국 뒷걸음질쳤다가, 있는 힘껏 자신을 걷어차는 레이디버그에 밀려 크게 뒤로 물러났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상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레이디버그가 살짝 빨랐는지, 아슬아슬하게 레이디버그의 주먹을 피한 마임맨이 레이디버그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공격을 막기 위해 두 손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피할 수 없어-!


그 순간, 새까만 무언가가 레이디버그를 꼭 끌어안았다. 곧이어 공기가 진동할 정도로 커다랗게 퍽, 소리가 났지만 레이디버그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신체적으로는 분명 그랬다. 자신을 막아서며 씨익 웃는 얼굴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뭐야, 왜 니가 여기 있는데?



“블…, 랙캣?”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자신을 끌어안은 채로 제 어깨 위로 추욱 늘어지는 블랙캣의 등을 끌어안자 끈적한 무언가가 손에 가득 묻어났다. 그게 곧 피라는 사실을 알아챈 레이디버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블랙캣!!”



블랙캣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레이디버그를 보고 마임맨은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짐작했다. 마저 해치울까라는 고민이 드는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경찰들이 도착하기 전에 뒤처리를 끝내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휙 날아 사라지는 마임맨을 뒤로 한 채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데리고 건물 밑에 있는 골목길로 내려섰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 봐도 전혀 미동조차 없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옥상으로 돌아온 마임맨이 재빨리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죽어버린 사람들의 뒤처리를 해놓은 뒤, 쓰러져 있는 셰이드 플뢰르를 발견한 그가 조용히 셰이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물러나지.”

“쿨럭….”

“임무는 끝났어. 더 이상 쓸데없이 힘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는 셰이드를 들쳐업은 마임맨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휘익 날아 사라지는 마임맨의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신 좀 차려봐, 블랙캣!”



움직이지 않는 블랙캣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레이디버그는 어떻게서든 블랙캣을 깨우기 위해 애썼다. 숨을 쉬고 있는 걸 보니 죽은 건 아니었지만 그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호흡은 거칠었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블랙캣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처럼 심각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레이디버그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어, 어떡하지? 진짜 어떡해?”



블랙캣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주려던 레이디버그가 일순 멈칫했다. 천천히 제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양손에 가득 묻어나는 피에서는 녹슨 쇠 냄새가 났다. 지독한 죽음의 냄새.


그 생각에 흠칫하며 레이디버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야, 안 죽어.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미스터 피죤의 마지막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싫어.



“싫어. 너까지 그렇게 되는 건 싫어.”



고개를 숙인 레이디버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크게 소리치는 레이디버그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나 대신에 네가 그렇게 되는 건 더 싫다고!”



그 때, 블랙캣의 몸에서 검은 오오라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흐릿하게 피어오르던 오오라와 함께 블랙캣의 몸에서 번쩍 빛이 나더니 곧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금발의 무뚝뚝한 얼굴. 상태가 좋지 않은지 얼굴색이 한층 더 창백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기절할 듯이 놀라던 레이디버그가 펠릭스를 내려놓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레이디버그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던 소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흐릿해진 초록빛 눈동자가 레이디버그를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왜…, 울고 있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표정이 지독히도 다정해서 레이디버그는 더 울고 싶어졌다.


너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구나. 전혀 몰랐어.



“왜 그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펠릭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펠릭스는 레이디버그의 눈가로 올린 제 손을 발견했다. 멍하던 머리가 선명하게 걷히자 그제서야 사태 파악이 되는지 펠릭스는 천천히 제 얼굴을 만져보았다.


가면이 없었다. 경악하는 얼굴로 펠릭스가 천천히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라 말하려는지 제 팔을 붙잡는 펠릭스의 손을 레이디버그는 냉정하게 뿌리치고 벌떡 일어섰다. 슬프게 일그러지는 초록빛 눈동자를 알아챌 여유조차 없었다.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생각이 정리되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펠릭스가 블랙캣이었다고? 펠릭스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두려웠던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펠릭스가 뭐라고 말할지도 무서웠지만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너무도 두려웠다. 잘 이어지던 실이 마구 꼬여버린 것만 같았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뒤로 돌아섰다. 기어코 떠나려는 레이디버그의 뒤에서 펠릭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가지 마!”



그래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려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초조해진 펠릭스가 다시금 크게 소리쳤다.



“기다려, 마리네뜨!”



세상이 멈춰버렸다.

그 순간, 레이디버그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췄다.


헉헉 숨을 몰아쉬던 펠릭스가 몸을 일으키려다 짧게 신음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무릎이 꺾일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으니 괜찮은가? 플랙이 했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움직일 수도 있는 걸 보니 치명상은 피한 것 같고.


레이디버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방금 들었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마리네뜨라고?


지금 나를 마리네뜨라고 불렀어?


삐걱삐걱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애써 돌렸다. 필사적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펠릭스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야, 난 저런 펠릭스는 몰라!


다시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펠릭스는 다시금 소리치려고 했다.



“기다리…. 쿨럭쿨럭.”



마치 등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펠릭스는 절로 신음했다. 그래도 계속 레이디버그를 쫓아가려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펠릭스에게 반지에서 빠져나온 플랙이 소리쳤다.



“파트너, 무리하면 안 돼!”

“플랙, 변신을….”

“지금 쫓아가봤자 소용없다고~!! 너랑 말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어 보이잖아!”

“말해야, 해.”



이를 악물고 대답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플랙을 신경쓰던 사이 레이디버그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레이디버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던 펠릭스의 얼굴에 절망이 스며들었다.


벽을 세게 내리치는 펠릭스의 주먹에서 살짝 피가 흘렀다. 낮게 절규하는 목소리가 어두운 골목에 울려퍼졌다.



“젠장!!”




- 12편으로



===

후기를 적을 때가 참 재미있네요. 사실 2권 전개가 1권보다 더 그러합니다만ㅋㅋㅋㅋ 후기를 회마다 적지 못하는 게 회지의 가장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한답니다.(말많은 애


솔직히 회지를 많이 내본 건 아니지만 나름 두꺼운 애들을 여러 차례 낸 편인데, 이 회지는 그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손이 많이 간 회지입니다. 2차라지만 자료가 너무 부족해서 거의 1차기도 한데 설정들이 너무 빈곤하여 덧대고 뜯어고치고 별 짓을 다 했었죠 콘티 단계에서부터; 콘티를 짜면서 솔직히 예상으로는 페이지 40페이지 정도로 한 30에피쯤은 필요하겠다 싶었는데, 그걸 모두 구상하기엔 제 능력이 부족하고 페이지도 부족하여(...) 현실과 타협해서 가장 필요하다 싶은 핵심 에피소드들만 골라내서 극을 진행했습니다.(30페 안팎 24에피) 그래서 전개가 빠르게 몰아치죠. 봄에서 애들 관계선에 대해 이것저것 적어보고 싶었지만 지면이 부족했다는 게 아쉽네요 ㅎㅎ;


아참, 마지막 장면 적으면서 무척 즐거웠답니다. 저번 회에서 평온한 데이트가 되기를 바란다고 적어놓았지만 사실 그게 평온한 데이트로 만들어주겠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잖아요?^ㅁ^!


가급적 애들 상황과 들어맞는 오페라를 찾기 위해 오페라 백과사전에서 수백 개의 오페라를 살펴봤습니다만 오페라의 성향들이 다 희극, 아니면 비극 정도라 맞는 걸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선을 선회해서 연극 쪽에서 작품을 찾아왔어요 십이야!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죠. 저도 좋아하는 작품이고요 ㅇㅇ 물론 아직 오페라로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에요 영화화나 연극화는 되었지만요.


이번에도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가 나왔지만 가장 하이라이트는 역시 정체 들통이겠죠! 저는 펠릭마리가 정체를 알게 된다면 낌새는 펠릭스가 먼저 채는데, 먼저 정체를 알게 되는 건 마리네뜨일 것 같다고 쭉 생각했었어서.. 솔직히 펠릭마리 감정선에 엄청나게 신경썼는데 읽으시는 분들이 납득하실지 걱정했었어요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었지;ㅠㅠ


과연 그들의 운명은?! 다음화를 주목해주시라!>ㅁ<


펠릭스의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셔서 작중에 등장하지 않지만 작중에서 나름의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들을 꿰차고 계시답니다. 개인적으로 아버님의 첫 번째 편지를 적으면서 좀 슬펐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미래에 있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지...;ㅅ;


펠릭스 부모님의 이야기는 후일담을 적을 때 외전으로라도 짧게 적어보고 싶지만 너무 귀찮아서 고민 중입니다..


붉은 동그라미에 검은 점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요정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네.

검은 고양이는 늘 외톨이. 하지만 그들은 고독하기에 오히려 더 영리하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기적을 담아.

기회는 단 한 번뿐. 그렇기에 기적이란 아름다운 것이라네.


후후. 이 노랫말을 지어내면서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마음에 드는 내용이라 공개하고 싶었지만 중반부 스포일러라 꺼낼 수가 없었어요;ㅅ;

이 노랫말은 고대서부터 전해져오던 경구 중 하나입니다.(그런 설정) 미라큘러스의 전설에 대해 다루고 있죠. 이 또한 펠릭스의 아버지가 알아낸 것입니다. 펠릭스의 아버지 라파엘은 생전에 유명한 고고학자였거든요.


12화는 내일이나 모레 올릴게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상도 감사해요>ㅁ<)/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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