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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삼님의 리퀘스트입니다 ㅇㅅㅇ)/

※ 마기 251화 이후...? 감금소재가 좀 있습니다. 17금적인 수위가 좀 있으니 피하실 분들 피해주세요;ㅅ;




빛과 빛이 맞부딪혀 자욱한 먼지구름을 만들어낸다.



"물러서지 마라!"



함성보다도 더 크게 울려퍼지는 목소리는, 이제 갓 약관을 지났을 법한 작은 소년에게서 들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서서 빛나는 마장을 둘러치고 있는 소년이 또 다시 제 금속기를 들어 거대한 빛의 파동을 만들어냈다. 거무죽죽하게 물든 '알 사멘'의 수족들이 거대한 방어벽을 소환하고 있었다. 그에 더 흥분했는지, 즐거워 미치겠다는 미소를 머금는 얼굴은 확실히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는 이를 오싹하게 만든다. 씨익 웃으면서 들고 있던 낫을 휘두르려는 찰나에, 뒤에서 들리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그의 흥분을 깨뜨리지만 않았더라면.



"뭐야, 제법이네?"

"…?!"



그 목소리를 끝으로, 시꺼먼 어둠이 저를 찾아왔다. 





[쥬다홍패]

Dream


Written by. 리네





"어이."



계속해서 부르는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한다. 눈조차 마주칠 생각이 없는지, 연한 붉은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입을 꾹 다물고 벽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그가 마지막으로 입었을 당시와 똑같았지만,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의 오른쪽 발목에 금빛으로 빛나는 족쇄가 채워져 있다는 것 정도일까. 가지고 있던 금속기도 어디로 갔는지 그 낌새를 느낄 수조차 없었다.



"뭐야, 화났냐?"



여전히 묵묵부답. 제 앞에 서 있는 흑색 머리카락의 소년을 외면하면서, 눈동자를 조심스레 굴리며 방 안을 훑어보았다. 기껏해야 제 방의 절반쯤 될 법한 작은 방에는 탁자며 침대며, 갖추어질 것들은 다 갖추어져 있었다. 오른쪽에는 닫힌 창문이 있었고 제 왼쪽 대각선 앞에는 출입문이 보인다. 제가 앉아있는 침대는 푹신하니 감촉이 좋았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짜증이 난다.



"정말 아무 말도 안 할 건가?"

"…."

"순순히 대답하는 게 좋을 텐데."



정겨울 정도로 자주 왔던 곳인데도 지금 이 순간 여기가 끔찍한 것은 어째서일까. 자신은 이 곳을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의 방. 모를 리가 없었다. 그와 친구였다 생각했을 당시 자주 놀러왔었으니까. 더 좋은 방들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넓은 건 싫다며 부득이하게 이 방을 고른 녀석이었다. 위치도 상당히 폐쇄적이라 별로 좋은 곳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막무가내였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게 좋아.


분명 그 때 그렇게 말했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강한 힘이 제 턱을 잡아당기는 통에 홍패는 난데없이 고개를 위로 젖혀야 했다. 열받은 듯한 표정과 형형한 눈동자가 저를 내리깐다. 타전으로 검게 물든 머리카락에서 파지직 전기가 올라올 것만 같다. 그의 불편한 심경처럼.



"봐주니까 내가 만만해 보여? 알잖아? 내 성질머리."

"…."

"난 기다리는 거 싫어해. 빨리 대답하랬지."

"…뭐가 그렇게 알고 싶은건데? 지금 내 심정?"



꽤나 힘이 세졌군. 턱 끝에서 올라오는 미미한 아픔을 무시하며 맞잡아 그를 노려보았다. 붉은끼가 도는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검은 머리칼의 소년은 픽 웃으며 손을 풀었다. 예상 외로 순순히 놓아주는 모습에 놀라는 홍패를 뒤로 한 채, 그는 침대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뭐야, 너무 놀라서 벙어리라도 된 줄 알았잖아."



한 손을 휙휙 내저으며 그는 언제나와 같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방금 전의 사이코같던 얼굴과는 영 딴판이다. 홍패는 그런 그가 아까보다도 더 불편했다. 진심을 숨길 때 그는 언제나 저런 표정을 하니까. 다시 말을 걸어보았다.



"그럼 이 상황에, 쥬다르 널 만나서 반갑다고 기뻐 춤출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뭐, 그건 그런가."

"날 왜 데려왔어? 인질로라도 쓰게? 미안하지만 염형은 나 하나 때문에 진군을 멈출 사람은 아니야. 죽일 거면 지금 죽이던가."

"오호, 꽤나 빨리 목숨을 포기하네."

"…어차피 너한테 잡힌 이상 둘 중 하나일 테니까. 내 편이 되라, 아니면 죽어라. 전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니 자연히 선택권은 없는 거 아닌가?"



빠져나가고 싶어도, 이 안에서는 마법이나 금속기를 사용할 수 없다. 알라딘이 전에 그렇게 말했으니까. 발목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이 족쇄 또한 힘을 억제하는 마법도구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닿은 부분부터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연홍염이 좋아? 목숨이 달려 있는데도?"

"형님을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보다, 난 너희들이 추구하는 그 사상 자체가 맘에 들지 않거든."



알 사멘의 위협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 제국을 둘로 쪼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그 가치관을 환영하지 않는 건 당연지사다. 전쟁이 나면 고통받는 건 백성들 뿐이고, 타국을 침략할지언정 자국 내에서 피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싸움도 좋고 피튀기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밖에서의 일일 뿐,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는 안 될 문제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추하게 발버둥치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죽는 게 나으려나. 굳이 목숨을 구걸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을 테지.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가만히 눈을 떴다. 칼을 들고 당장이라도 절 베어버릴 줄 알았던 쥬다르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다. 웃음기는 싹 걷힌지 오래였다.



"뭐, 말로 해서 들어먹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는데…."

"뭐?"

"생각보다 더 까다롭기 짝이 없군."



알 수 없는 소리만 중얼거리던 쥬다르가 홍패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일렁이는 감정들이 설핏 그의 눈빛을 타고 스쳐갔다. 너무 순식간이라 차마 무언지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일그러진 눈동자를 환한 미소로 덮어버리며 쥬다르가 다시 운을 떼었다.



"죽일 생각은 없어. '지금 당장은.'"

"그거 참 고맙네."

"도망가려고는 하지 마. 이 안에서는 마법이나 금속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쯤은 너도 잘 알고 있지?"

"…내 검은 어디 있어?"

"설마 그걸 알려줄 거라 기대하는 건 아니지?"



킥킥 웃던 쥬다르가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완전히 나가기까지 기다리다, 홍패는 제 몸을 뒤로 털썩 넘어뜨렸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실상 홍패의 마음속은 꽤나 심란했다. 그가 사라지고 나니 이제야 다른 사람들 생각이 난다.


형님들은 무사할까? 이렇게 붙잡혀 온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전쟁이 일어날 거 같은데 무사히 진행하고 있는 거겠지? 그나저나 나를 잡아온 이유가 뭐지? 내 검은? 레라쥬가 어디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될 텐데. 사실 굳이 마장이 없더라도 검술로 누군가에게 쉽게 질 생각은 없었지만 금속기를 두고 갈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 와중에도 발 쪽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감촉에 홍패가 가만히 인상을 썼다. 제 발을 살짝 들어올리자 짤랑거리는 금속의 울림이 귀를 어지럽힌다. 반짝거리는 족쇄는 얼핏 보기에도 꽤 튼튼해 보인다. 일단 이 족쇄는 어떻게 하나. 부수기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 마고이를 흡수하는 건지 몸에 자꾸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정말 완벽하게 무력해진 느낌에 홍패는 저도 모르게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간만이네."



이런 더러운 기분은.




*



"진짜 심심하네."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홍패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 묻어났다. 이 방에 갇혀 지낸지도 벌써 어언 3일이 넘어간다. 그 동안 자신이 한 거라고는 가만히 방에 뒹굴거리거나, 자거나,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태생부터 활동적이고 한 곳에 못박히기 싫어하는 제 성격에, 지금 상황이 심심하지 않다면 더 이상한 일이겠지. 진짜 방에만 갇혀있으니 애완동물이라도 된 기분이다.


아무것도 모르니 더 답답했다. 지금도 밖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알 수 있는게 없었다. 결계를 쳐둔 것인지 창문은 열리지도 않았고 밖의 소리들도 완벽히 차단당했다. 오는 사람은 쥬다르 혼자 뿐이고 대화량도 꽤 적었다. 그마저도 중요한 부분은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지금이 전시라는 것도 문득문득 까먹을 정도로 평화롭고 조용한 공간, 물론 이런 상황에 세뇌될 만큼 제가 그리 무른 것도 아니었지만.


물론 자신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은 바로 쥬다르다. 왜 자신을 잡아왔는지도 이해를 못하겠거니와 이렇게 잡아두기만 하는 건 대체 어째서인지. 이 방에 생각 이상의 마고이가 사용되고 있다는 걸 안다. 아마 녀석은 제 존재를 다른 이들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결계를 치는 것만도 성가실텐데 어째서 이런 귀찮은 짓까지 해서 저를 붙잡아 놓는 것일까?


사실 지금의 행보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어째서 택한 녀석이 하필이면 연백룡이냐.


녀석에 대해서는 저도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쥬다르가 녀석에 눈독들이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하지만 정말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은 존재였다. 그 녀석에게서는 축축한 어둠의 냄새가 난다. 딱 보기에는 예의바르고 건실한 모범생같아 보여도, 속을 파헤치면 몇 겹은 곪아 있을 것처럼 찝찝한 냄새를 풍기는 녀석. 몇 번이고 물어봤었다. 왜 하필 녀석을 골랐느냐고. 쥬다르의 대답도 언제나와 같았다. '맘에 드니까.'


왜?


너는 설마 그 때부터,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에 와서야, 시간이 많아진 지금에서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지금 내 앞에서 웃는 네 얼굴이 정말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서 가끔씩 서글퍼진다. 겉은 그대로인데 변한 우리를 알아서. 나도 이런데, 아마 너도 마찬가지겠지. 친한 친구로 계속 지낼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이렇게 변해버린 너와 나의 관계가 너무 낯설어서.


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언제까지…."



너를 견뎌야 할까, 쥬다르.




*



'조금만 더 가면…!!'



검을 힘차게 휘두르며 홍패는 출구 쪽으로 향했다. 과일칼로 간신히 족쇄를 따고, 몰래 보물창고로 들어가 레라쥬를 찾아낸 지금 저는 천하무적이다. 크기가 장난이 아니라 아무 곳에나 두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이 들어맞아 천만다행이었다. 일단 여기를 탈출하는 것은 둘째치고, 금속기가 없는 저는 쓸모없는 잔병일 뿐이니까. 쓸모없다, 라-. 그 생각에 욱신거리는 심장을 무시하며 재빠르게 발을 놀렸다. 출구까지 고작 100여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저기를 넘어서면 마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



"서."



드디어 궁을 벗어났다 싶었더니, 제 앞을 가로막는 건 예상 외의 복병이었다. 대응할 틈도 없이 쥬다르가 휘두른 지팡이에서 뻗어난 마법에, 홍패는 앞으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다. 다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속박 마법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공중에 동동 띄워졌다. 경악한 표정으로 굳어버린 홍패가 간신히 입을 떼어 말했다.



"너…. 이 자식…!!"

"그 와중에 족쇄까지 풀고 나오다니. 내가 방심하긴 했나봐?"

"이거…, 놔…!!"

"싫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쥬다르는 제 손을 휘둘러 홍패의 입마저도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공중에서 홍패를 받아들어 안았다. 떼록떼록 눈동자만 굴리며 쥬다르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홍패는, 문득 그의 눈빛이 굉장히 싸늘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동자에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걸 깨달은 순간, 홍패는 제 마음속에 스멀스멀 들어차기 시작한 감정을 알아차렸다.


두려움이었다.


어느 새 다시 제 방 안으로 돌아온 쥬다르가 문을 닫았다. 드르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치 단두대가 내리앉는 것 마냥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가만히 홍패를 눕히고 발에 다시 족쇄를 채운다. 썼던 칼은 이미 저 멀리로 던져버린지 오래였다.



"설마 칼로 족쇄를 따는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지."

"…."

"이번에 가져온 건 전보다 강력한 거니까, 쉽게 벗어나진 못할걸?"

"…."

"아, 미안. 입을 막아놨지."



손가락을 탁 튕기자 그제서야 홍패는 제 몸이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을 느꼈다. 몸을 일으킨 홍패가 손을 들어 쥬다르를 때리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가볍게 제압당했다. 이를 갈았다.



"이…!!"

"정말 탈출하려고 했을 줄은 몰랐어. 그 의지에는 감탄할 정도야."

"놔, 난 돌아가야 해!"

"그건 곤란한데."

"그럼 죽이던가."

"…."

"날 내버려두면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야. 그러니까 그냥 죽여!"



정말 화가 났는지 고래고래 소리치는 홍패의 모습에 쥬다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홍패의 멱살을 꽉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읍…?"



갑자기 닿아오는 입술에 홍패는 눈을 크게 떴다. 놀라서 반응할 틈도 없이 구강 안으로 밀려드는 부드러운 감각이 저를 더욱 기겁하게 만든다. 제 혀를 붙잡고 빨아올릴 때는 혀가 빠질 것만 같이 아팠다. 이건 또 다른 고문인가? 난폭하게 제 입을 휘젓는 체향이 마치 제 머릿속을 휘젓는 것마냥 정신을 빼놓으며 저를 유린한다.


안을 구석구석 헤집고 숨이 막힐 정도로 저를 몰아붙이는 키스는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 난폭하고 거칠고 전혀 물러서지 않는다. 사실 이런 상황에 충격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더 저를 아프게 만드는 건 이렇게 열렬히 키스하면서도, 정말 화가 난 것처럼 그저 무심하기 짝이 없는 쥬다르의 눈동자였다. 새까맣게 울렁이는 눈빛이 지독하게 냉막해서 쳐다보고 있자면 가슴 깊은 곳이 시리게 차가워진다.


밀어내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제게 걸린 마법의 부작용인지 팔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동으로 뒤로 툭, 하니 넘어가 침대에 눕혀졌다. 그제서야 키스를 멈추고 위에서 올려다보는 녀석이 저를 보며 픽 웃음짓는다.



"표정 보니까 힘이 다 풀렸나보네. 당연히 주먹이 날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헉, 헉…. 너…!!"

"내 생각이 짧았어. 그냥 아예 처음부터 몸을 길들일걸. 아예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말이야."

"…잠깐, 뭐…?"



숨을 고르던 붉디붉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쥬다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손을 뻗어 책상 옆에 있던 향로를 틀었다. 달콤하지만 어딘가 몽롱한 향기가 방을 서서히 메워가기 시작한다. 만족한 듯 씨익 웃던 쥬다르가 다시 홍패에게로 손을 뻗더니, 옷의 단추를 하나씩 풀러내고는 서서히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경악하며 쥬다르를 붙잡는 홍패의 입가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물론 분노로.



"뭐하는 짓이야!"

"왜? 모르지는 않을 거 아니야?"

"너 미쳤어?! 우린 둘 다 남자…."

"남자끼리도 충분히 즐길 수는 있어."

"이 미친놈…. 윽…!"



손 끝에 걸리는 돌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또 다시 깊게 키스했다. 한 손은 가슴 부근을 배회하고 다른 한 손은 바지 속으로 들어가 중요한 부분을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과는 다른 무척 부드러운 애무에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홍패의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간다. 방 안을 자욱하게 채운 이 정체모를 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슬슬 효과가 도는 걸까, 뜨거워지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홍패의 뺨을 두 손으로 잡은 쥬다르가 씨익 웃었다. 마치 악마처럼. 아니, 홍패의 눈에는 악마처럼 보였을지 모를 일이다.



"최음효과가 있는 향도 틀어뒀으니 별 문제는 없을 거야. 기왕 할 거 즐기자고."

"너, 죽일 거야. 죽여버린다…!!"

"그래, 그러든가. 얼마든지 증오하라고."

'날 좋아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쾌감이 지나친지 눈물을 주륵주륵 쏟으면서도, 붉은 눈동자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이 형형하게 빛난다. 피식 웃으면서 허벅지 사이를 어루만지는 그를 밀쳐내지 못하고, 홍패는 그저 눈을 질끈 내감았다.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라는 것처럼. 그걸 보고 쓰게 웃으면서도, 그는 홍패를 만지는 손길을 거두지는 않는다. 눈물범벅인 얼굴로 홍패는 그저 버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민망한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히고 저를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차마 눈을 뜰 용기는 나지 않아서. 그래서 보지 못했다.


그가 웃는 모습이, 평소보다 더 쓸쓸해 보인다는 것을.




*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홍패의 눈이 망연하게 천장을 응시했다. 이불을 덮고 침대 속에 폭 파묻혀 얼굴만 나와 있는 모습만 봐서는 꽤나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그는 이제서야 좀 정신이 돌아오는 판국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건 정말이지 새로운 경험이다. 너무 새로워서 이렇게 만든 녀석을 마구 패주고 싶을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꼼지락거릴 때마다 요추부터 올라오는 통증에 절로 민망해졌다.



"이 자식이…."



나른하게 쉬어버린 목소리의 끝이 살짝 갈라진다. 그마저도 창피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홍패가 이불을 살짝 들고 빼꼼 제 몸을 살폈다. 가슴, 허리, 허벅지와 다리에까지 고르게 퍼져 있는 민망할 정도로 돋은 울긋불긋한 자국들, 심지어는 잇자국도 상당했다. 하긴 그 난리를 쳤는데 멀쩡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허리가 삐걱거리는 느낌이야 여전했지만, 기분 자체는 몽롱하고 나른했다. 뜨뜻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부유감. 아직도 향이 남아 있는 걸까? 킁킁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지만 그 때의 달콤한 향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 다시 맡고 싶지 않은 녀석이니까.



'아파….'

'….'

'그만, 하라고. 쥬다르…!'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에 절로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새빨개졌다. 붕붕 고개를 돌려 생각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게 하지 않으려면 더 선명해진다 하지 않던가. 녀석 앞에서 부린 추태를 생각하면 정말 창피하다 못해 쥬다르 녀석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으윽….'

'기분 좋아 보이네.'

'흐으읍….'



흥분했던 탓인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탓인지, 다행히도 기억의 일부가 상당히 날아간 듯 싶었다. 드문드문 흐릿한 이미지들 속에서 들려오는 건 제 신음소리와 얄미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 치솟는 짜증에 발을 세차게 굴렀다. 짤랑거리는 금속에 또 한 번 이를 악물었다. 힘을 억제하는 족쇄와 그 망할 놈의 향만 아니었어도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탈주하려던 저를 잡아오고 나서 녀석은 향을 피웠고, 멋대로 옷을 벗기고 제 온 몸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멋대로 남의 중요한 부분에 손을 댔다. 절대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결국 당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정말 민망했다. 제 것으로 물든 녀석의 손을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사실 그거까지는 괜찮았다. 제 허벅지 사이로 기어들어오는 손에는 심히 기겁했지만.



'너, 너 뭐하는…!'

'혼자 즐기면 재미없지.'

'누가…. 즐기고, …싶댔냐?! 손 치…. 으윽.'

'아파?'



그럼 너라면 안 아프겠냐, 빌어먹을 새끼야.


원래 그렇게 사용하는 곳이 아닌지라 압박감과 이물감이 엄청나게 심했다. 토할 것 같이 역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순간 튕기듯 튀어오르는 허리에 제 자신이 더 경악했다.



'뭐, 뭐야…?!'

'아, 여긴가.'



그 후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없이 그저 녀석의 몸짓에 따라 흔들린 것 같다. 지치지도 않는지 녀석의 행위는 끝도 없었고, 제게는 날뛰는 녀석을 멈출 힘이 없었다. 제발 그만두라고, 너무 힘들다고, 그러다가도 다시 좋다거나 더 해달라거나 하는, 어느 쪽이든 정말 민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던 건 분명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그저 애원하던 제 모습이나 목소리가 제발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다. 나중에는 지쳐서 축 늘어지는 저를 붙잡고 한 번만 더 하자고 꼬득이던 악마같은 놈.


몸을 길들이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그냥 계속 닥치는 대로 당한 것 같다. 대체 얼마나 당한 건지 허리 아래로는 감각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행위가 뭔지 모를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다만 제가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날 그런 대상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제가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라는 건 인정한다. 형들과 달리, 어머니를 더 많이 닮은 저는 체격도 얼굴도 나이에 비해 여리고 유약했다. 이상한 놈들도 많이 꼬였지만 천만 다행히도 제게는 강한 힘과 지위가 있었고, 이제껏 저를 함부로 하려는 녀석들은 모조리 제 손에 처단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친구라 믿었던 놈한테 배신당하다니.


- 얼마든지 증오해.


죽여버리겠다고 말했을 때,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사실 되묻고 싶었다. 정말 내가 널 증오해도 상관 없어? 싫어해도 괜찮아? 물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서글펐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마음 한 구석에 날카로운 조각이 박힌 것처럼 따끔거린다. 너만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는데.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너는 더 이상 내 친우가 아니고, 너 또한 그걸 바라지는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건 어째서일까? 붙잡기에는 늦었다고 머리가 말하는데, 가슴은 쉬이 미련을 놓지 못한다.


사실 더 문제인 건 자신인지도 모른다.

이 지경까지 와서도, 결국 녀석을 완전히 뿌리치지 못하는 건 나니까.



'흐윽, 싫어….'

'에, 너 또 섰는걸.'

'이제, 이제 그만해. 힘들다고….'

'…정말 그만해?'



그 땐 무슨 정신이었는지,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눈동자가 묘하게 슬퍼보여서. 달뜬 기분에도 차마 그런 녀석을 마구 뿌리칠 수도 없었다. 손을 뻗어 녀석의 어깨를 마주 안아주자 녀석이 살짝 몸을 흠칫했던 건 기억난다.



'이 멍청아….'

'….'

'한, 번쯤은…. 더 어울려줄게. 그러니까….'



그런 슬픈 얼굴 하지 마.

속삭이듯 흘린 목소리를 녀석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옛날부터 그랬지만 저는 쥬다르에게 약했다. 싫다고 거부하다가도 녀석이 불안한 표정을 하면 저도 모르게 약해지는 부분이 있다. 저 행위가 민망하긴 하지만 아예 싫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도 녀석이 싫냐고 말하면, 단번에 그렇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이쯤되면 제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충분했다.


친한 친구일 뿐인데.



"어-이."



문이 열리고 쥬다르가 나타났다. 몸이 멀쩡했다면 펄쩍 뛰며 놀랐을지도 모를 일이나,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기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본능적으로 뻣뻣하게 경직되는 몸을 무시하며 애써 태연하게 미소지었다.



"흐음, 멀쩡한가 보네?"

"…니 눈엔 그렇게 보이나보지?"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도망가지는 못하겠네."

"대체 얼마나 지난 거야, 시간."

"3일."

"뭐?!"



3일이나 그 삐리리를 했다 이거냐, 어쩐지 몸에 힘이 없더라니.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지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번뜩이는 홍패의 안광에도 쥬다르는 태연했다. 오히려 그게 뭐? 라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통에 홍패는 몸에 절로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하긴 저 뻔뻔함이 녀석의 무기 중 하나이긴 했지만.


어이없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홍패에게 가까이 다가간 쥬다르가 쪽 입을 맞췄다. 살짝 내려앉는 정도의 가벼운 키스. 화르륵 타오르는 홍패의 얼굴이 재미있었는지 쥬다르가 피식 웃었다. 그도 사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더한 것도 했으면서 뭐 그리 새색시같이 굴어? 철판같은 뻔뻔함은 어디다 숨겼는지."

"…죽고 싶냐."

"딱히."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여 다시 입을 맞춘다. 이번에는 좀 깊어지는 키스에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싶을 즈음, 침대 위로 올라오는 쥬다르에 싸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설마.



"설마…. 또 하려고?"

"그럴 건데?"

"…도망 안갈게."

"내가 하고 싶은데."



더 말은 필요 없다는 듯이 다시 입을 맞추며 이불을 걷어내는 쥬다르를, 홍패는 속으로 저주했다.




*



"요 근래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렇게 말하는 백룡에게 쥬다르는 코웃음을 쳤다.



"난 1년 365일 내내 기분이 좋다구?"

"아니, 넌 지금 확실히 기분이 좋아."



단정짓듯 대답하는 말투가 심히 거슬렸지만, 이 이상 대답하면 말릴 것 같다는 기분에 쥬다르는 침묵으로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인정하기엔 제가 배알이 꼴린다. 눈치가 빠른 건 좋지만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는 놈은 이 쪽에서 사양이다.



"네가 데려온 3황자와 관련이 있는 건가?"

"남이사."

"뭐, 별 문제가 없다면야 상관없지만…."



제 불쾌감을 눈치챘는지 백룡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선은 확실히 지키는군. 쥬다르는 내심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면을 보면 역시 제가 사람 하나는 잘 골랐다는 걸 깨닫게 된다. 비록 지금 밖에서 소란을 피우는 잔챙이들 처리에 골치가 아프긴 하지만, 녀석은 나름 현명하게 잘 대처하고 있었다. 제국을 반으로 나누는 것도 성공했지만 수도를 장악했다는 점에서 일단 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쪽이 아무래도 더 명분이 설 테니까.



"뭐, 됐고. 부른 이유가 뭐야?"

"아, 맞다. '잔당들'이 이쪽에 편지를 보내왔던데."

"무슨 편지?"

"직접 읽어보는 게 빠를 거야."



던져주는 편지를 받아서 펴든 뒤 10초만에, 쥬다르는 종이를 손으로 구겼다.



"더 읽을 필요도 없네."

"3황자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어. 어쩔 거야?"

"돌려줄 생각 없는데."

"결계는 확실한 거겠지?"

"물론."



걱정 말라는 듯이 웃었다. 실제로도 걱정이 없었으니까. 같은 마기라지만 엄연히 그 급이 있기 마련이다. 알라딘이란 녀석은 저를 당해내기엔 아직 멀었고 뢰엠의 마기는 이제 새로 태어난 녀석인데다 나머지 한 녀석은 이런 일에 관여할 타입은 아니다. 밖에 있는 잔챙이들은 아무래도 홍패 녀석을 포기하지 않았나 보다.


어떻게 붙잡은 녀석인데. 쥬다르는 입술을 짓씹었다. 물론 돌려보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지금 보내면 두 번 다시, 살아서 녀석을 만나지 못할 게 자명하므로.


녀석을 데리고 온지 열흘이 다 되어간다.


처음부터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감히 제가 결계를 쳐둔 수도로 덤벼드는 연홍염 측의 선봉장이 누군가 심심해서 나가봤을 뿐인데, 거기에서 녀석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신나하며 제게 덤벼드는 이들을 베어내는 모습은 역시나 그 녀석답게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반짝거렸다.


조금, 욕심이 생겼을 뿐이다. 녀석을 납치해 제 방으로 데려온 것도 그래서였다. 그저 녀석이 제 공간에 머물러 있다는 게 좋았다. 이 순간만큼은 녀석이 제게 속해있는 존재 같아서. 연홍패라는 존재는 꽤나 독특했다. 딱 봐도 제왕의 피가 흐르는 연홍염과는 다르다. 양지에서 떠받들어질 타입은 절대 아니지만, 천대받는 이들에게 추앙받고 그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내는 음지의 제왕. 이 녀석에게는 그런 끼가 있었다. 그게 신기해서 녀석에게 접근했던 건지도.


먼저 집착하게 된 것은 아마도 저였을 것이다. 백룡과 손을 잡고 이 거대한 계획에 시동을 걸면서도, 순간이나마 떠오른 건 그의 얼굴이었다. 멍청한 상념이라고 여기며 애써 떨쳐버렸지만. 분명 이 계획을 말해줬더라도, 녀석은 절대 제게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알고 있다. 아무리 비슷해 보인다고 해도, 녀석과 저는 다르다는 걸.


친하긴 했지만 언제나 저와 녀석의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일부러 거리를 둔 건 저였다. 선을 긋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알 사멘에 의해 부모님을 잃고 제 자아조차 잃어가며 철저하게 타전된, 비참할 정도로 썩어 문드러진 제 내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절대 빛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제 운명에,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제가 아무리 이기적이어도 그 정도 구분은 할 줄 알았으니까.


녀석이 탈출하려고 했을 때 이성이 뚝 끊겼다. 아마 녀석을 보냈더라면 두 번 다시 자신은 그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죽기 직전에나, 최후의 싸움에서나 가능하겠지. 이미 욕심이라는 녀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어나 있었고, 이기적인 저는 결국 그 유혹을 이기지는 못했다. 사실 이기고 싶지도 않았다.


원하는 걸 갖는 게, 뭐가 나빠?


3일 내내 녀석을 안았다. 아마 백룡이 저를 급하게 부르지 않았다면 더 이어졌을지도 모르지. 그 후로도 용무가 끝나면 부리나케 방으로 돌아온다. 또 탈출하려고 할까봐, 아무도 없는 빈 방만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봐. 홍패 녀석 앞에서는 철저히 무덤덤한 척 한다지만.


그리고 드디어, 연홍염 일당이 그 녀석을 요구한다. 쓸모없는 패는 즉각 버리는 녀석답지 않아서 사실 조금 놀랐다. 역시 핏줄이라 이건가? 아니면 녀석이 아직은 그 쪽에 쓸모있는 존재라는 걸까.


어느 쪽이든, 제게 그리 좋은 전개는 아니다.


쳇, 혀를 차는 쥬다르를 백룡이 호기심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쥬다르라는 이름은 여러 의미에서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손에 꼽히는 특징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가지고 노는 언변이다. 그런 녀석이 말 한 마디 못하고 머리를 북북 긁어대기만 하는 광경은 솔직히 백룡에게도 꽤 신선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한 동안 침묵이 내려앉는다 싶더니, 잠시간의 평화를 깬 것은 갑작스레 어전으로 뛰어들어온 병사의 외침이었다.



"적입니다, 적이 쳐들어 왔습니다!"

"뭐라고?!"

"역도의 무리들이 궁 바로 앞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평온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아무런 낌새도 없더니, 기습하려고 이런 거였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백룡이 차분하게 물었다.



"병사는 대략 얼마쯤 되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대략 몇 천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결계 상황은?"

"토템 몇 개를 부순 모양입니다. 복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알라딘이다.

본능적으로 그의 이름이 쥬다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저런 수를 생각해낼 법한 마기는 녀석밖에 없었으니까. 결국 연홍염과 협력하기로 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제 아무리 제게 대항할 마기를 손에 넣었다지만, 형왕이라는 남자는 이런 식으로 무작정 덤벼드는 인물이 아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굉장히 불길했다. 그래, 마치 잘 짜인 체스판을 보는 것만 같다. 체스에서 자주 쓰는 속임수. 일단 한 쪽에 정신을 쏠리게 해 두지만 사실 노리는 진짜가 따로 있는….


거기까지 생각하자마자 쥬다르는 어전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확실히 결계가 풀렸는지 제 주위를 맴도는 루프들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마고이를 발에 감고 바람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확실히 마법이 편하긴 편했다. 순식간에 방문 앞에 당도했으니까.


드르륵, 문을 세차게 젖히자 시원한 바람이 제 얼굴을 향해서 불어왔다. 밀폐된 공간에 어떻게 바람이 부는 걸까, 그런 의문을 떠올리기에 앞서 쥬다르의 눈동자가 제 바로 앞의 창문가를 향했다. 어느 새 열린 창문 너머로 금발의 소년이 깜짝 놀란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창틀에 발을 디디고 나가려고 하는 건, 익숙하디 익숙한 저 뒷모습은.



"쥬다르…?"



뒤돌아보는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



왜 하필, 지금 네가 여기에.


문이 열리는 소리에 등을 돌린 것이 화근이었을까. 새까만 눈동자가 저를 고요히 맞이했다. 경계심에 한 걸음 물러났으나, 쥬다르 녀석은 땅에 발이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도 않는다. 그 모습에 괜시리 울컥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렇게 보내주지 않겠다고 그러더니, 사람 덮쳐가면서까지 가지 못하게 막겠다고 그랬으면서 왜 그렇게 무덤덤해? 붙잡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녀석에게 이러면 안되지만 서운함이 몰려왔다. 놀라서 멈춰 있는 건가, 싶어도 한참이 지나도 움직이기는 커녕 말조차 한 마디 없다. 그저 멈춰서서 뚫어져라 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마치, 마지막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하게 굴던 너답지 않게도.


옆에서 알리바바가 외치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진다. 어쩔까 고민했다. 이렇게 헤어져도 되는 걸까? 고민했으나, 결국 답은 하나뿐이었다. 결심한 후에 어서 가야한다고 저를 끌어당기는 손을 살짝 뿌리쳤다. 사실 조금은 망설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저는 그에게로 손을 뻗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떨어졌다. 그 언젠가 그가 제게 그러했던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조용히 크게 열리고, 제 뒤에서는 경악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제게는 지금 중요한 건 눈 앞의 이 바보라서. 입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솔직히 지금도 널 이해하지 못하겠어."

"…너."



첫 마디가 너라니, 나쁘지는 않군. 홍패의 눈가가 가만히 초승달을 그렸다. 그 와중에도 쥬다르는 여전히 우뚝 솟은 나무처럼 굳어 있을 뿐이다. 잡았던 옷가지를 놓아주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짐짓 엄하게 말했다.



"네가 나한테 한 짓은 지금도 사실 용서가 안 돼."



동의도 없이 그런 짓을 한 것은 여전히 용서할 수 없다. 그의 표정이 굳어지든 말든 홍패는 여전히 제 멋대로 말을 잇는다. 평소의 그답게.



"하지만 웃기지 않아?"

"…."

"여전히 네가 싫지는 않다니."



그런 짓을 한 너를 끝까지 미워하지 못하겠다. 어째서일까, 그 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걸 곱게 말해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해주고 싶어서.



"사실, 알고 있어."

"…."

"우리 길이 달라졌다는 거."



네가 선택한 길과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은 다르다.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은 어느 샌가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마 나만큼이나 너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지금의 상황에 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를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던 것도, 처음 탈출시도 이후로 더 이상 탈출하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도. 염의 명령으로 저를 데리러 온 알리바바의 손을 선뜻 잡기 망설였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제 감정을 깨닫고 나서는 더더욱.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너를 버릴 수가 없다."

"…."

"그냥 과거의 인연이었다, 그렇게 떼어낼 수가 없단 말이야."

"…."

“똑똑한 척 하는 너 같은 바보를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잖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쥬다르에게 홍패는 씨익 웃어주었다. 여기로 들어오고 나서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천연 그대로의 미소를. 새장을 벗어나려는 새가 펼치는 마지막 날갯짓처럼.



"꿈은 끝났어."

"…."

"그러니까, 기다려."



데리러 올 테니까.


등을 돌려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홍패를, 쥬다르는 차마 붙잡지 못했다.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했던 새는 자유를 찾아 날아가버리고 빈 새장만이 주인을 맞이할 뿐이다. 이 방이 이렇게 넓었던가. 주변을 휘휘 돌아보던 쥬다르가 갑자기 크게 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광기 가득한 웃음소리로 시작해서 점점 사그라들다, 허탈한 듯이 낮은 웃음을 뱉어내며 그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역시 녀석은 예리하다. 제가 차마 인정하기 싫었던 것들을 날카롭게 집어내 제 심장을 후벼판다. 서로 다르다는 걸, 이미 더 이상 인연으로 엮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외면하고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명백히 적이겠지. 서로를 겨냥하고 대립하고, 어쩌면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손에 넣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버릴까. 너를 죽이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네 목숨을 거두는 게 나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짜릿하다가도, 싸늘하게 식어버린 네 주검을 생각하면 몸 속의 피가 식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모순된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춤추며 저를 괴롭혔다. 그걸 그렇게 간단히 인정하는 너는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너를, 나는 무척이나-.


다시 만날 기약을 남기고서 떠나는 네 뒷모습을 보는 건 서글프지만, 그 이상으로 제게 희열을 남긴다. 그 전까지 너는 죽지 않을 테니까. 다시 너를 볼 수 있을 테니까. 그 끝이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메마른 웃음을 게워내며 즐겁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지."



기다려줄게, 기꺼이.

언젠가, 다시 널 만나게 될 때까지.






FIN.




===


넘 길어질 거 같아서 스토리를 좀 잘랐습니다.

부가 설명을 좀 하자면 드러났기를 바라지만 사실 쥬다르는 홍패를 어느 정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설정. 그래서 잡아온 거죠. 홍패도 자각은 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마음이 있었다는...? 이 정도만 아시면 될 듯합니다 거의 망상 수준이라서 ㅋㅋㅋㅋㅋ;;;


제 친우 삼삼님께 드리는 백달 리퀘! 넘 늦어서 미안하요'A' 맘에 들어야 할텐데ㅠㅁ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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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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