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c="https://code.jquery.com/jquery-1.12.4.min.js" integrity="sha256-ZosEbRLbNQzLpnKIkEdrPv7lOy9C27hHQ+Xp8a4MxAQ=" crossorigin="anonymous">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 예전에 신카에서 썼던 짧은 독백입니다. 오랜만에 보다가 마음에 들어서 살짝 공개해봐요ㅇ.<

사망소재 있습니다. 글자 수는 3,683자.

 

 

 


 

 

 

 

너를 보내고


written by. 리네

 

 

 

 



 그 날은, 시리도록 춥고 추운 날이었다.


 한겨울인지라 쌩쌩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칼바람이 눈과 만나 휘몰아치고 있었다. 수많은 하얀 알갱이들이 나의 모자, 목도리, 코트, 신발에까지 계속해서 달라붙다가 떨어져 나갔다. 몸이 얼어붙을 듯이 싸늘하게 내 주위를 감싸는 바람 속에서 나의 손과 발은 손가락, 발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빨개지고 얼어붙었다. 호호 불어봐도 온기가 돌아오지 않는 나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근처에 있던 나무에 살짝 기댄 채로 눈을 돌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시험의 층에서 만나 아직까지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과 그 녀석의 동료 몇 명이 다였다. 모두들 가만히 서서 작은 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저 비석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비석 아래에 누군가를 담은 작은 나무관이 묻혀 있으리라. 모두들 그 납작하고 네모난 돌을 바라보면서 이 추운 날씨에도 누구도 불평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떤 녀석은 눈물을 흘리면서, 어떤 녀석은 그저 슬프다는 얼굴을 한 채로, 안타깝다는 얼굴을 한 이도 있었으며 대놓고 대성통곡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담담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는 이도 있었다.


 내가 그랬다.


 그가 사라지면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너무 괴로워서 숨이 막힐 거라고, 언제나 너를 떠올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네가 없는 삶은 매 순간순간 고통뿐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왜? 나에게 너란 존재는 결코 그렇게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너를 구해 내 곁에 두려고 했다. 설령 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 정도로 나에게 너란 존재는 무겁고, 평생을 옭아매는 사슬과도 같았다. 스스로 그것을 택했지만 그래서 더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너는 이제 없다. 지금 너의 자그맣고 연약한 육체는 이 에일 듯이 날카로운 눈바람이 불고 있는 곳에서 우리가 서 있는 이 단단하고 차가운 땅 속으로 들어가, 안식을 취하고 있다. 그 안은 여기보다는 좀 더 따뜻하려나. 편안하려나? 이제야 너에게 주어져있던 무거운 족쇄를 벗고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었는데,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 여기 위에 있는 나와 이 녀석들은 시리도록 추운 곳에서 삶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는 채로 너를 배웅한다. 편안하겠지만 조금 외롭고 고독한 길에서, 네게 행운이 있기를.


 바람이 조금씩 멎어가기 시작하였고 눈들이 하얀 가루처럼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이들도 그것을 느끼고 움츠렸던 몸을 조금은 폈다. 그렇게 바람이 멎어가자 나는 코트에 꽂고 있던 한 손을 꺼내어 밖으로 내밀었다. 금방 손이 새빨개졌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손을 뻗고 있었다. 그렇게 뻗은 내 손 안으로 하얀 눈송이들이 천천히, 다가와서 담겼다. 차갑다. 내 손도 차가웠는데도 눈송이들은 자신보다 따뜻한 것을 만나서인지 금방 녹아, 손에서 또르르 떨어졌다. 한참을 그러다가 나는 살짝 얼어붙은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고개를 살며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빛의 구름이 서서히 지나가고 맑은 하늘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자그마한 네가 너무나도 길고 외로운 길을 떠나게 된 날, 나는 그렇게 너를 보냈다.

 

 

 


 

◈ ▣ ◈

 

 

 



 그 이후로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저 늘 그랬듯이 하루하루를 보냈고 친구들은 그런 내게 언제나 물어왔다.


 괜찮냐고.


 솔직하게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 녀석들은 늘 내 눈치를 살피고 나를 걱정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 같았는데,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냥 평범하게 아침에 일어나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늘 그랬듯이 하던 일들을 하고 가끔 친구들을 만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늘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를 그렇게 보낸 후, 뒤통수까지 오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어졌다. 그렇게 시간이란 열차에 내 몸을 맡기면서 정처없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수가 말했다. 오랜만에 그를 보러 가자고. 물론 거절했다. 왜냐고 이유를 묻자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냥 가고 싶지 않았다. 굳이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자 그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가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약간 처진 어깨를 하고 성을 떠나갔고, 그런 친우의 뒷모습을 보던 나의 마음은 알싸한 시나몬 사탕을 먹은 듯이, 그렇게 씁쓸하면서도 후련했다. 왜 이러는 걸까, 왜 나는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너를 다시 만나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걸까?


 이상하게 마음에서는 시끄럽게 경고음이 울려퍼졌다. 가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깔끔히 무시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미 아무 감정도 없고, 시간도 상당히 지났으니 문제될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미 내가 그의 죽음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철저하고 이성적이고, 냉정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온 나였다. 물론 그와 있을 때는 조금쯤은 감정적인 면이 드러나기도 했었지만 그가 없으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것뿐이다. 별로 불편한 것은 없었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






◈ ▣ ◈






 오랜만에 온 그의 무덤은 그 때도 생각했었지만 작고 황량했다. 상당히 추워진 날씨에 나는 옷깃을 부여잡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벌써 1년이나 되었구나, 여기 온 것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무덤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저번에 왔을 때는 조금 떨어져서 슬퍼하는 이들을 바라보았었는데 지금은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 하늘에서는 그 때처럼 다시 회색빛의 구름이 하늘을 감싸고, 그 짙은 장막 속에서 눈꽃들이 나풀나풀 춤을 추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감돌기 시작하는 어둡고 탁한 분위기는 마치 그를 보내던 날과 비슷했다. 우중충한 하늘은 꼭 그의 죽음을 슬퍼하듯이 더욱 어두웠던 그 때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무덤 앞으로 가서 비석을 살펴보았다. 돌판에는 반듯한 글씨체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쥬 비올레 그레이스                 

                         - 스물다섯번째 밤'


 


 


 나는 그 글씨를 천천히 읽어가면서 뭐라 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진짜 이게 녀석의 무덤인건가, 녀석이 이곳에 잠들어 있는 건가, 너는 정말… 이제 없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손등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눈을 크게 뜨고 손을 바라보았다. 물방울이었다. 눈이 녹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곧, 그것이 나의 눈가에서 떨어지는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씩 떨어지던 눈물들은 점점 더 많이, 방울방울 내 얼굴을 타고 떨어졌다.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들은 내 발치에 떨어져 번져나갔다. 그렇게, 그렇게 계속 눈물 흘리던 나는 갑자기 현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제 그는 내 곁에 없다. 이제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다시는… 너를 만지고 너의 체온을 느낄 수도 없다.


너는 영원히 가 버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나도 서러워지고 가슴 속이 뜨거워졌다. 나는 정말로 울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들을 흘려가면서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너무나도 어리석었다는 것을. 나는 그의 죽음에 담담했던 게 아니었다. 깨닫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 깨달으면,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분명하게 인식하면 내가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어서. 네가 더 이상 내 곁에 없다는 걸 죽어도 실감하고 싶지 않았기에. 숨이 막혀오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겨울이고 추운 날씨인데도 전혀 춥지 않았다. 그저 죽을 것만 같은 이 고통을 견뎌내는 일에 급급했을 뿐이다. 너무 아파서, 너무 괴로워서, 당장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아파오는 목에서는 오열이 터져나왔다. 흐르는 눈물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굵은 눈물방울들을 흘려가면서 나는 꺽꺽 울어댔다.

 

 

"밤, 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이렇게 아파하는 나를 두고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니. 너는 거기서 행복하니, 조금은 내 생각을 하고 있니, 아니면 나를 깨끗하게 잊었니? 나는 지금 내가 너무나도 바보 같아. 어떻게 너를 잊고, 너의 죽음을 견디고 살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까. 지금 네가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찢겨나갈 것 같이 아프고 숨이 막혀오는데. 원망도 해보았다. 왜 나를 두고 그렇게 가버렸니, 왜 나를 버리고, 그렇게 내 곁을 영영 떠나가버린 거니. 나를 왜, 이런 외로운 길에 홀로 내버려두고 가 버렸니?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다. 늘 거짓말만 하던 나의 감정은 선명하게 나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물들을 손으로 훔쳐가면서 비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밤, 나는 말이야….

 

 

"보고, 싶다."

 

 

 그래. 사실은, 정말 지금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다시 한 번 너를 만나고 싶고 너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고 싶고 찬란하게 빛나던 호박색의 눈동자를 다시 보고 싶어. 네가 나에게 다가오면 손을 뻗어 너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네가 웃으면 널 꼭 껴안고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 너무 힘든 길만 걸어온 우리였기에, 이제는 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어. 근데 왜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은 이렇게 짧았을까. 신이 야속하다. 이렇게 괴로운 시간을 주실 거였다면 그래도 조금 더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대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나도 짧은 행복이 끝나고, 길고 긴 끝없는 고통과 절망이 나를 덮치고 있다. 신은 어째서 나에게, 우리에게 이렇게 잔인한 걸까.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 간절히,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네가 듣고 있는지는 모른다. 황량한 무덤가에 소복히 쌓이는 눈들과, 내 곁을 스쳐가는 바람만이 내 기도를 들었으리라.

 

 

"단, 한 번 만이라도…."

 

 

 

널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TRPG] 컴백홈 도둑맞은 작품 플레이!  (0) 2018.03.12
[팬텀아리] 무도회  (1) 2016.06.13
[프리은월] nemo nisi mors  (0) 2016.01.24
[팬텀아리] 천국의 정의  (0) 2016.01.24
[귀능다나]「Per Ardua Ad Astra」회지 후기:  (0) 2016.01.12
Posted by I.R.E
,

[팬텀아리] 무도회

기타 2016. 6. 13. 22:52




[팬텀아리]

무도회





Written by. 리네






하얀 낮이 지나가고 어두운 밤의 장막이 온 하늘 위를 옅게 수놓을 시각, 새까맣게 물드는 하늘 아래서도 하얗게 빛나는 성의 안쪽에서는 화려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집 몇 채가 들어갈 법한 커다란 성의 창문들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문을 들여다보면 천장 위에서 제 몸을 화려하게 불태우는 샹들리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연회색 벽을 따라 사람 여럿이 서 있어도 좋을 만큼 넓고 커다란 창문들이 줄을 서고 있었는데, 테두리가 금빛으로 빛나는 붉은 커튼들이 그 사이사이로 휘장처럼 늘어져 있었다. 붉은 열매를 빻아 즙을 낸 것처럼 부드럽게 깔린 카펫 위로 사각사각, 조심스러운 발소리들이 살짝씩 들려온다.


눈부시도록 붉은 무도회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참가하고 있었다. 간간히 놓여 있는 하늘색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음식과 술들 사이사이를 아름다운 꽃들이 장식했다. 가장자리 쪽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악기를 들고 잔잔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고, 파트너를 찾아 돌아다니는 이들도 있었으며 사람들 틈을 벗어나 멀뚱히 창가 쪽에 서 있는 남자도 있었다. 정장과 화려한 장신구들로 치장하고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로 쟁반을 들고 있는 바텐더들이 바쁘게 발을 놀렸다.


그들 사이로 지나가는 한 여자가 있었다.


하얀 드레스 위로 반투명한 푸른 숄을 걸치고, 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의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가면 너머로 드러나는 푸른 눈동자는 총명하게 반짝거렸다. 제 머리색과 같은 나비가면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푹신한 카펫 위를 밟으며 천천히 회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여인은 신기하다는 듯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일까, 들뜬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여자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이 여인의 정체가 현 에레브의 여제, 아리아라는 걸 알면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지만.


- 진짜 화려하네.


지나가던 바텐더에게서 받아든 무알콜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아리아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수행원도 없이 온 걸 알면 나중에 신수한테 엄청 혼날 게 분명했지만, 이런 장소에까지 따라오면 자유롭게 활동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막상 와보니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혼자 오면 분명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는 통에 아리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누구랑 같이 오자고 했어야 했나.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떠오르는 생각에 아리아는 곧장 방금 했던 생각을 취소했다. 말했다간 분명 체통이 있다며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를 한 다발로 들었을 것이 뻔했으니까. 생각만 해도 두통인지라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면서 아리아는 들고 있던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그래, 사람이라면 여기도 잔뜩 있잖아! 아무나 말 걸어서 같이 놀면 되지 뭐! 뭐가 문제겠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웃고 있는 아리아에게로 여러 개의 시선들이 따갑게 꽂히고 있었다. 대부분 남자들이었는데, 얼굴이 보이지는 않아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건 짐작했는지 힐끔힐끔, 몇몇은 꽤나 노골적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아리아가 그 시선들을 눈치챌 수 있었을 리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런 그녀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시선 하나가 있었다. 잔 하나를 들고 창가 쪽 커다란 기둥에 기대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푸른색의 가면이 걸려 있었다. 건조하게 회장을 훑어내리던 자주빛 눈동자는 아리아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하다가, 차분히 살펴보더니 곧 이채로운 빛을 띠었다. 긴가민가한 건지 살짝 고개를 갸웃이던 남자는 무언가 재미난 생각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칵테일을 다 마신 뒤 빈 잔을 들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리아의 모습에 그녀가 혼자라는 걸 알았는지 남자들 몇 명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던 남자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그녀를 부른 건,



“실례합니다.”



속으로 뭐하고 놀지에 대해 열심히 궁리하고 있던 아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푸른 망토를 두르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모습이 흡사 귀족을 연상시키는 남자였다.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리아에게 남자는 싱긋 웃으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아, 감사하지만 지금은….”



진짜 누구 잡아서 놀겠다고는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정체가 탄로나면 엄청 귀찮아질 걸 아니까. 갑작스러운 춤 신청을 거절하려던 찰나, 남자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더니 아리아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꺅! 살짝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품에 안긴 아리아가 항의하려던 찰나,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야?”

“뭐? 누구…?”



끌어안긴 채로 고개를 들자 남자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놨지만, 저 웃음기 가득한 눈동자는….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리아는 그의 정체를 눈치채고 깜짝 놀라 작게 소곤거렸다.



“팬텀?!”

“이제 알았어? 둔하네, 너.”

“여긴 어떻게….”

“일하러 왔지.”



태연하게 말하며 제 허리를 끌어안는 팬텀의 행동에 아리아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뭘 훔치러 온 건가요?”

“음, 글쎄?”



더 이상은 안 알려준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는 팬텀에게 아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랑 얘기하고 있어도 되요? 잘못하다가 들키면 어떡하려구요.”

“이런 허접한 녀석들한테 들킨다면 괴도 팬텀의 이름이 아깝지.”



그렇게 속삭이며 팬텀은 망토를 살짝 들어올려 아리아를 감싸안았다. 갑작스럽게 어두워지는 시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금발의 소녀를 다정하게 내려다보던 팬텀은 곧 자신과 아리아를 주목하는 몇 명의 남자들에게 피식 조소를 날렸다. 꺼지라는 듯이 살벌한 시선에다 아무리 봐도 귀한 집 자제처럼 보이는 팬텀에게 굳이 시비를 걸러 오는 남자는 없었다. 아리아를 향한 시선이 거슬렸던 팬텀에게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팬텀?”



팬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는 걸 깨달은 아리아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아, 미안.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뒤로 물러난 팬텀의 얼굴은 비록 가면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눈빛은 평소와 같이 장난스러웠다. 어라, 착각했나? 아리아는 주변을 슥슥 둘러보았다. 다행히 자신들에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팬텀을 이끌고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향했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서야 그녀는 겨우 한숨을 토로하며 속닥였다.



“정말 뭐 훔치러 온 거예요?”

“궁금해?”

“궁금하죠, 당연히. 괴도 팬텀이 직접 나서게 할 정도의 보물은 흔하지 않잖아요?”

“뭐, 그렇지. 너도 스카이아로 사기를 쳤으니까 말이야.”

“신경쓰고 있었군요.”

“참내, 그 보석은 노카운트야. 전설대로의 물건이 아니었으니 흥미 없어졌어. 오히려….”

“오히려?”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는 아리아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던 팬텀이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손가락을 맞부딪혔다. 딱,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 사이로 나오는 붉은 장미에 아리아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니, 장미를 닮은 아름다운 머리핀이었다.



“자, 선물.”

“아, 고마워요!”



손수 아리아의 머리에 핀을 달아주는 손길이 묘하게 상냥하다는 생각에 아리아는 시선을 올려 팬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까이 붙어 있어서 그런가, 기분 좋게 뛰고 있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싫지 않아 아리아는 살짝 웃었다. 아리아의 머리에 꽂힌 핀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팬텀이 그런 그녀의 미소를 보고 피식 웃었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있어?”

“재미있어서요. 팬텀이랑 만나게 될 줄 상상도 못했거든요. 혼자 있기 심심했었는데.”

“뭐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렇게 웃을 생각이었어?”

“…팬텀이라서 더 즐거운지도 몰라요.”



솔직하게 말하는 아리아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팬텀은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같이 따라 웃으면서도 아리아는 정말 여유로워 보이는 팬텀에 걱정이 앞섰다. 이렇게 가면까지 착용하고 온 걸 보면 분명 뭔가 훔치러 온 모양인데, 자신은 재밌지만 이 사람에게는 소중한 시간을 뺏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팬텀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 끝에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라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너 날 뭘로 보는 거야? 나는 괴도 팬텀이라구. 내가 훔치지 못할 보물같은 건 없단 말이지.”



자신만만하게 이어지는 팬텀의 목소리에 아리아는 역시 당신답다고 생각하며 따라 웃기만 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팬텀의 말에는 깜짝 놀랐다.



“딱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가 자기 입으로 자신의 실패를, 그것도 저렇게 태연하게 거론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진짜요? 뭔데요?”

“음, 그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반짝거리는 아리아의 눈빛에도 팬텀은 잠깐 고민하는 척하더니, 아주 부드럽게 오른팔을 움직이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한 곡 춰주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싱긋 웃으며 손을 내미는 팬텀을 멀뚱히 보던 아리아가 풋 웃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살포시 웃는 아리아의 얼굴을 잠깐 뚫어져라 바라보던 팬텀이 곧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단단하게 자신을 붙잡는 팬텀의 손에 아리아는 살짝 당황했는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긴장하고 있는 아리아를 눈치챈 팬텀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이끌고 무도회장 가운데로 걸어나갔다.


마침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바뀌었다.


잔잔한 왈츠가 악기들이 연주하는 선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앞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해하는 아리아와 달리 팬텀은 느긋한 태도로 아리아의 허리를 살짝 감싸안았다. 순간 놀라서 팬텀을 쳐다보는 아리아에게 그는 괜찮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팬텀과 아리아는 천천히 원을 돌기 시작했다. 가볍게 몇 번 원을 돌다가도 팬텀은 곧 익숙한 솜씨로 아리아를 리드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템포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자니 긴장이 점점 풀리는지 아리아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돌아오고 있었다. 가면 너머로 그런 아리아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팬텀이 곧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리아에게로 더욱 몸을 바짝 붙였다.


강하지만 부드럽게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에 아리아는 저항 없이 끌려갔다.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아리아는 반사적으로 팬텀을 올려다봤다가 멈칫했다.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흩날리는 백금발의 머리카락,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자주빛 눈동자는 마치 자신을 꿰뚫어볼 것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더 이상한 건 그 시선이 싫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본다는 것처럼 집중하고 있는 팬텀의 눈빛에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팬텀이 그런 아리아를 보고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손으로 걷어내었다.


정말 부드럽게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에 아리아는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순간 모든 게 어색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팬텀의 어깨에 올려둔 손을 내려야 할지 냅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색했다.


무엇보다 얼굴이 너무 더웠다. 팬텀이 싫은 게 아닌데 이상하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덜컹거리는 느낌에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소곤거렸다.



“팬텀, 너, 너무 가까운데….”

“뭐야. 긴장 돼?”

“…?! 그런 거 아니거든요?”



발끈해서 대꾸하는 아리아의 모습에 팬텀은 그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청량하지만 시원한 웃음소리가 음악소리와 함께 드문드문 아리아의 귓가로 살포시 파고들어왔다.


이 소리를 듣고 있는 건 자신뿐일까?


그렇다면 좋을 텐데. 순간 그렇게 생각한 자신에 아리아는 당황했지만 애써 의연하게 팬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을 본 팬텀의 눈동자가 놀란 듯 살짝 커졌지만, 그는 끝까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춤이 끝나고 많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팬텀과 아리아가 있는 쪽으로 시선들이 와르르 꽂히는 걸 보면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특유의 분위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 모양이었다. 따끔따끔할 정도의 시선들을 뒤로 한 채 팬텀과 아리아는 발코니로 나왔다. 다행히도 이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 채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발코니 쪽에 서 있던 아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줘야죠.”



당신이 훔치지 못했던 보물. 그렇게 입을 떼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잠깐 말이 없더니 이내 대답했다. 



“…역시 안 가르쳐줄래.”

“왜요?!”


춤추면 알려준댔잖아! 억울하다는 듯이 팬텀을 쏘아보는 아리아의 눈빛에도 팬텀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팬텀의 미소에 난감한 기색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리아가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팬텀은 곧 결론을 내렸는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아리아에게로 다가왔다. 탁하게 얼룩진 자주빛 눈동자에 아리아는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와는 다른 팬텀의 분위기에 뒷걸음질치고 싶어졌지만 그녀는 애써 이겨냈다. 그런 아리아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팬텀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아리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도망칠 수 없다는 듯이.



“왜냐면….”



그 말과 함께 팬텀은 다른 한 손으로 아리아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가면들이 살짝 부딪혀 조금 삐뚤어졌지만 아리아는 그런 걸 신경쓸 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상황인지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게 꿈인 것만 같았다. 신분을 숨기고 무도회에 놀러 온 것도, 우연히 팬텀을 만나 춤을 춘 것도, 지금 그가 자신에게 키스하고 있는 이 상황까지도.


쪽, 소리와 함께 팬텀은 천천히 아리아의 얼굴에서 고개를 들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꼼짝도 못하는 아리아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훔칠 거거든.”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 꺼내는 아리아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팬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간만에 즐거워 미치겠다는 얼굴로.



“그럼 이만. 잔금은 나중에 받으러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발코니 바깥쪽으로 다가간 팬텀의 기척은 금세 사라졌다. 그런 그를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아리아는 그저 손을 올려 제 입술을 어루만졌다. 방금 전의 감촉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가, 그러니까, 팬텀이랑 키스를….


자각하자마자 아리아의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엄청나게 펌프질하는 상황에서 아리아는 새빨개진 볼에 두 손을 올렸다. 뜨거웠다. 아까는 살짝 더운 정도였지만, 지금은 차가운 밤바람으로도 속일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말도 안 돼.”



망연히 중얼거렸다.







====

지인 리퀘로 간단하게 쓰려던 팬텀아리 무도회! 근데 왜 이렇게 길어졌지 망할.


Posted by I.R.E
,

※ 뱀파이어 AU 썰 일부. 프리드가 뱀파이어, 은월은 인간.





[프리은월] nemo nisi mors








『To. 은월

안녕하세요, 은월?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인 거 같네요.


이렇게 편지를 받고 놀랐을 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그 때 너무 많은 신세를 져서 언제 꼭 감사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팬텀도 동의했구요.


결론부터 말하면 저희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국경을 넘으니 확실히 추격은 많이 줄어들더라구요. 물론 한 곳에 정착하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팬텀 성격에 그럴 리도 없고, 저도 새로운 세상을 더 많이많이 보고 싶으니까요.


지금 저는 비공정 안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빛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무척 예뻐요. 팬텀이 자기 비공정을 그렇게 자랑하던데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 거 같아요.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해요. 아, 오해하지 말아요. 성녀로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던 건 아니랍니다. 하지만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어디든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지금의 삶이 저에게는 더 잘 맞는 거 같아요. 


그 때 도와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당신이 저를 알아보고 숨겨주지 않았더라면, 전 지금쯤 다시 그 작은 방에 갇혀 눈물을 흘리고 있었겠죠? 팬텀도 말은 안 하지만 고마워하고 있어요. 쑥스러움을 타는 것뿐이에요.


맞다, 은월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아직도….』



“그건 뭐야?”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은월은 힐끗 옆을 돌아보았다. 언제 방 안으로 들어왔는지 프리드가 그를 향해 싱긋 웃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가려져 있던 달빛이 창문 너머로 흘러들어와 바닥에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원래라면 이렇게 일찍 들어올 리가 없는데 오늘은 볼일이 빨리 끝난 모양이다.


천천히 제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프리드에 은월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다섯, 셋, 둘, 하나.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리는 은월의 곁을 스쳐지나간 프리드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침대 앞에 다가섰다. 입고 있던 망토를 천천히 벗어내리는 프리드에게서 다시 시선을 거둬들인 은월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리아가 보낸 편지.”

“정말? 뭐라고 그러는데? 무사히 잘 도망갔어?”

“그렇다고 하는군.”



『아직도 솔직하지 못하고 있나요?』



“아아, 그거 다행이네.”



망토를 손에 들고 침대에 털썩 걸터앉은 프리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솔직히 팬텀 녀석은 무소식이 희소식인 타입이라 말이야. 어쩌다 연락이 오는 일도 드물어서. 이렇게라도 소식을 받으니 안심이야.”

“…그런 것치곤 여기에 꽤 많이 드나들지 않았던가?”

“그건 아리아랑 만나고 난 후였을 거야. 아리아를 만나기 전에 서로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던 게 언제였지? 10여 년 전이었나…. 뭐, 아리아 때문에 이 지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 가끔 오랜 친구가 떠올라서 날 찾아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하하 사람 좋게 웃는 프리드에게 은월은 말했다.



“꽤나 냉정하군.”

“뱀파이어의 특성이지. 우리 정도면 그래도 꽤 자주 연락하고 사는 편이었다고.”



뱀파이어, 그 말에 은월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에 프리드는 그저 웃으며 조용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황량할 정도로 넓은 침실에는 소파와 탁자, 침대 하나를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침실의 벽에는 온갖 신기한 문양들이 그려진 주술진이나 뱀파이어와 관련된 벽화의 일부를 재현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붉은색 카펫으로 가려져 있지만, 침실의 바닥에는 온갖 문양들이 빼곡히 적힌 거대한 주술진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이 집을 보호하기 위한 주술의 핵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섬뜩한 감각에 프리드는 한쪽 손을 들어 살펴보았다. 살짝 떨리고 있는 손가락을 보며 그는 쓰게 웃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여기 있어? 오늘은 일찍 자라고 했잖아.”



만월이라 그런지 감각이 한층 더 예민했다. 이래서 일찍 자라고 했던 건데.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라 생각하며 프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 프리드의 목소리에도 은월은 말이 없었다. 망토를 옆에 있는 의자에 걸쳐놓은 뒤 프리드는 몸을 돌려 은월을 상냥히 쳐다보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을 느끼고도 은월은 구태여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시선을 계속 편지에 붙박고서 그는 무언가를 망설이듯 몇 번 입을 우물거렸다. 그런 은월의 모습에 프리드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무슨 일이지? 물어보려는 찰나 은월이 입을 열었다.



“프리드.”

“왜?”

“…넌 날 어떻게 생각하나.”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무슨 말을 꺼내는 걸까.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프리드의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뭐가 어떻게야. 친한 친구로서….”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똑똑한 네가 모를 리 없어.”



프리드를 돌아보는 은월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일렁이는 눈빛이 그의 동요를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걸 본 프리드의 입가에서 웃음이 점차 엷어졌다.



“…무슨 대답을 바라는데?”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묻는 프리드에게 은월도 침착하게 말했다.



“네 진심.”



그 말을 끝으로 은월은 입을 꾹 다물고 프리드를 바라보았고, 프리드도 굳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탐색하는 것처럼 그저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나 눈빛은 매우 상이했다. 겉으로 보기엔 차가워 보였지만 감정적인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은월과 달리, 사람 좋게 웃고 있었지만 프리드의 눈빛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 건조함 뒤에 숨어있는 어둡고 깊은 고뇌가 프리드의 신경을 뒤흔들었다. 날이 날이라서 그런가. 은월의 눈동자를 한참 바라보던 프리드가 쓰게 웃었다.



“그 눈. 오랜만이네.”

“뭐?”

“나한테 네 피를 마셔도 좋다고 했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었지. 너.”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외양도 성격도 많이 변했는데, 왜 이런 점은 그대로인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잠깐 옛일을 회상하는 프리드에게 은월은 말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

“알아, 그래서 곤란해.”

“뭐가 곤란하지? 난 너에게라면…!”

“그게 곤란하다는 거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은월을 보며 프리드는 힘없이 웃었다. 쿨해 보이지만 사실 고집이 세고, 무엇에도 집착이 없어 보이지만 한 번 정한 일엔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는 너. 예전부터 나는 은연중에 그런 너를 무서워했던 것도 같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너에게 휩쓸려가는 내가 두려운 것일까.



“네게 나는 곤란한 존재인가? 그저 그 뿐?”



진지하게 묻는 은월에게 프리드는 잠깐 조용했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꼭 들어야겠어?”

“그래.”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그 말과 함께 프리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은월에게로 다가가는 프리드의 발걸음은 차분하고 여유로웠다. 그 속과는 다르게도. 은월의 앞에 선 프리드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시선을 피하지 않는 은월의 눈동자가 살짝 실룩였다.



“난 네 생각보다 훨씬 끈질기고 위험한 존재라구. 너에게 보이는 면만이 나의 전부는 아니야.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넌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어질지도 몰라.”

“…어떤?”

“뱀파이어는 언제나 갈증에 시달리거든. 네가 당장 피를 제공한다고 끝나지 않을 오래고 깊은, 그런 욕망 말이야.”

“….”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언젠가 이런 내가 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너 자신조차 집어삼키려 들지도 모를 일이야. 그런데도….”



넌 그걸로 괜찮은 거야?


싱긋 웃으며 말을 거는 목소리는 참으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럼에도 어딘지 오싹해지는 감각에 은월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 자신의 대답 하에 따라 무언가 달라지리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 제가 거절의 의사를 표한다면, 프리드는 더 이상 자신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남자니까.


하지만….


꿀꺽 침을 삼킨 뒤 은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아프고 힘든 건 싫지만, 너와 헤어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런 건 싫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보다는 네 입에서 떨어지는 거절의 한 마디가 더 무서운 걸.


결심했다는 듯이 굳은 표정을 짓는 은월을 바라보는 프리드의 눈동자가 무언가의 감정으로 번뜩였다.



“그럼, 후회하지 마.”



뭐라고 해도 이미 늦은 거니까.


그 말과 함께, 프리드의 손이 은월의 가슴을 툭 밀었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넘어진 은월의 눈동자가 천장을 보며 데록데록 굴러가다가, 그 위를 가리는 프리드의 얼굴에 뚝 정지했다. 검청색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퍼져 붉은 카펫 위를 가득 수놓았다. 마치 박제된 나비처럼.


프리드가 물었다.



“무서워?”

“…아니.”



어둡게 빛나는 프리드의 눈동자를 멍하니 응시하던 은월이 살짝 미소지었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네 것이라고.”

“…너는 물건이 아니잖아.”

“그런 너라서 내가 널 포기하지 못하는 거야.”

“….”



말이 없는 프리드에게 은월은 웃으며 말했다.



“내 피를 마셔.”

“….”

“걱정 마. 네 손에 죽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행복하겠지.”

“그런 소리는 관두지. 날 혼자 두고 떠나겠다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 그저 마지막까지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표현이 격한 건 아니었지만, 정말 기쁘다는 듯이 웃고 있는 은월의 얼굴을 본 프리드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프리드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하, 하하. 작게 실소하던 프리드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그는 곧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정말로 슬퍼 보이는 그의 표정에 은월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리드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누군가한테 집착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는데.”

“프리드…?”

“미안하다.”



그 말과 함께 프리드는 은월의 목을 물어뜯었다. 윽, 비명을 삼키면서도 가만히 있는 은월의 몸을 끌어안으며 프리드는 더욱 깊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프리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 놓아주지 못하는 건 오히려 나야.


바보같이 왜 계속 내 곁에 남아 있었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망갔으면 그래도 괜찮았을 지도 모르는데. 너를 욕심내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이젠 되돌릴 수 없어. 설령 먼 미래에 네가 나를 원망하게 된다고 해도, 도망가고 싶다고 말해도 물러서지 않아. 듣지 않을 거야.


프리드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



앞의 팬텀아리랑 같은 배경이에요! 프리은월은 좀 썰풀이를 해야겠네요.


일단 프리드는 뱀파이어고, 은월은 아주 어릴 때 프리드에게 주워져서 길러졌어요. 물론 은월은 인간입니다. 프리드가 은월을 주운 건 변덕이랄까. 나이를 먹고 자라면서 은월은 변하지 않는 프리드의 모습에 그가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요. 그가 뱀파이어라는 걸 깨달은 건 청소년 시기. 지금 은월은 20대 초반입니다 ㅇㅇ


프리드한테 은월이 왜 내 피는 안 마시냐고 물어본 적 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요. 그 때 프리드는 놀라서 마시던 커피를 뿜어버렸었죠. 물론 그 얘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피를 마시진 않았어요. 뱀파이어지만 프리드나 팬텀은 흡혈 자체에는 별 흥미가 없어요. 참고로 뱀파이어가 특정 누군가의 피에 집착한다는 건 그 상대에 집착한다는 말과도 똑같습니다.


프리드랑 팬텀은 오랜 친구 사이고요, 친구라고는 해도 수십 년에 한두 번 얼굴 보는 사이였어요. 팬텀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프리드는 한 곳에 붙박이는 걸 좋아하니까요. 성향이 다르지만 성격은 비슷해요. 참고로 프리드가 은월 주워온 거 알았을 때 팬텀은 엄청나게 반대를 했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늘리지 말라고요. 근데 얘가 아리아에게 치인 뒤로는 이제 프리드가 팬텀을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함정(...)


팬텀아리가 도망칠 때 프리드네 집에 들렀던 적이 있어요. 당시 아리아가 부상을 좀 입었어서 한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추격이 오기 전에 재빨리 떠났지만요. 둘은 팬텀이 가진 비공정으로 갔고 지금은 잘 살고 있습니다^p^ 비공정이 이 지역 밖에 있었기 때문에 아리아를 데리고 거기까지 가야 했거든요. 중간에 일이 생겨서 숲을 헤매던 아리아를 은월이 발견했었구요 ㅇㅇ


뱀파이어는 오랜 세월을 사는 종족이라 무언가에 쉽게 집착하지 않아요. 한 번 집착하면 곧 죽어도 놓지를 못해서. 그래서 프리드도 은월에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집착하게 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뭐 그런 내용...?


제목인 nemo nisi mors은 라틴어로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쿤밤/우정] 너를 보내고  (0) 2016.08.23
[팬텀아리] 무도회  (1) 2016.06.13
[팬텀아리] 천국의 정의  (0) 2016.01.24
[귀능다나]「Per Ardua Ad Astra」회지 후기:  (0) 2016.01.12
[귀능다나/오르메두] Change 04  (3) 2015.12.20
Posted by I.R.E
,

※ 뱀파이어 AU 썰 일부예요! 아리아가 성녀고 팬텀은 뱀파이어.




[팬텀아리] 천국의 정의






“팬텀.”



갑작스런 부름에 팬텀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런 팬텀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아는 그저 하늘 위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성당에서 가장 높은 곳,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정돈된 테라스의 난간을 잡고 있는 아리아의 손이 살짝 꿈틀했다. 선선한 바람이 밤의 밀회를 훔쳐보러 간간히 들른다. 달빛 아래서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이 아리아의 움직임을 따라 사락거렸다.


그 모습에 순간 넋을 잃었음에도, 팬텀은 언제나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왜?”



장난스레 말을 받아치는 팬텀의 목소리가 살짝 의아한 기색을 띄었다. 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임에도 평소와는 다르다 느껴지는 건 어째서인지.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여자로서.”



돌아오는 대답에 보랏빛 눈동자가 저도 모르게 깜빡였다. 가볍게 생각하기엔 어째 진지했고, 아주 진지하다고 보기엔 어딘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도 그런 자신이 우스워진 팬텀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나름 사람의 속내에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네 앞에서는 이따금 자신이 없어지는 건지 모르겠군.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까. 물론, 이유는 알고 있다. 내 마음은 명확하니까. 문제는 너.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아리아는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팬텀은 짧고도 긴 생각을 마치고 놀리듯이 말했다.



“뭐, 생긴 건 여자같긴 한데 말이야.”

“와, 너무하네요.”

“근데 그건 왜?”

“좋아하는 남자가 돌아봐주질 않아서 말이죠.”



태연한 그 한 마디에 팬텀의 어깨가 아주 살짝 흠칫거렸다. 갑자기 조용해진 팬텀에 아리아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팬텀이 선수를 쳤다.



“너,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어?”



그의 반응은 덤덤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딱히 흥분한 기색도 없었거니와, 그렇다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감정했다. 방금 전의 웃음기는 어디로 가져다 버린 건지 살짝 딱딱해진 팬텀의 목소리에도 아리아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뭐야. 있으면 안 돼요?”



치사하게. 그러면서 웃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툭 말을 던졌다.



“…넌 성녀잖아.”

“그 전에 인간인걸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덧붙이는 아리아의 목소리가 퍽 장난스러웠다. 명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깊어지는 밤과 함께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아리아는 살며시 옆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표정을 굳히고 있는 팬텀의 옆얼굴에 아리아가 놀라기도 잠시 팬텀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좋지 않아.”



살짝 눈가를 일그리며 싱긋 웃는 팬텀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어딘가 달랐다. 깊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동자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다 겨우 멈춰섰다.


이상하다. 분명 얼굴은 웃고 있는데, 왜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지지?



“어째서요?”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그 자리에 서서, 똑바로 자신을 직시하는 푸른빛 눈동자에 팬텀은 피식 웃더니 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을 한 줌 손에 쥐어 제 앞으로 가져온 팬텀이 그 위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에 놀라 그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아리아를 팬텀이 살짝 올려다보더니, 이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널 정말 원하는 누군가가, 널 훔치려들지 모른다구?”



여유가 넘치는 얼굴과 달리, 절대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는 팬텀의 손가락은 견고했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감정들이 입 밖으로 내뱉으니 더욱 선명해지고 명확해졌다.


나는 너를 원하는 걸까.


어째서? 바래서는 안 되는 존재라 더욱 탐이 나는 걸까.


괴도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 싶으면서도 그게 아니라는 대답이 곧장 떠올랐다. 괴도이니만큼 희귀한 보물에 수집욕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니다 싶은 물건에 손을 댄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사실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팬텀은 속으로 자조했다. 아무래도 내게 너는 정말 특별한 지도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꺼내면 네가 곤란해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내 이기심을 채우고 있는 걸 보면.


그녀 입장에선 충분히 놀랄 만한 이야기임에도 차분하게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는 아리아에 팬텀은 답답해졌다. 움직이기 시작하는 아리아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팬텀의 눈동자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를 들면?”

“응?”

“예를 들면, 누가요?”



궁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리아의 모습에 팬텀은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진짜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건가? 재밌다는 듯이 미소짓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어느 쪽일까. 살짝 한숨을 내쉬며 팬텀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너….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묻냐.”

“짐작가는 건 있지만. 그건 제 짐작일 뿐이니까요.”



꼭 듣고 싶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다시 물었다.



“왜 그게 듣고 싶은데?”

“뻔하잖아요. 팬텀도 의외로 눈치가 없군요?”

“방금 한 이야기랑 관련 있어?”

“…글쎄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저 얼굴이 성녀가 아니라 악마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성녀. 그 한 단어에 팬텀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리고 새삼 아리아와 자신의 입장에 대해 떠올랐다. 싸해진 그의 얼굴에 고뇌가 떠올랐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녀석은 성녀다. 헌터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성당의 최고 무녀이자 성녀라고 불리는 존재. 자신은 그저 뱀파이어이고 일개 괴도일 뿐이지만, 아리아는 평생 성녀로서 자라온 몸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또 그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이름 하나에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삶. 그래서 그녀는 성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제껏 이 작은 성 안에서 외로이 살아왔다. 그런 아리아에게 자신이 이런 욕심을 부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렇게 얽히게 된 것만 해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더한 걸 바라도 되는 걸까.


팬텀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놓아준 팬텀이 망토를 뒤로 젖히고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에 깜짝 놀라서 그에게로 다가오려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한 손을 내밀고서 싱긋 웃었다.



“괴도는, 가지고 싶은 것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직업이라서요.”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단 하나.



“팬텀…?”



정중하게 내밀어진 손을 멀뚱히 바라보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고귀하신 성녀님.”

“….”

“저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 주시겠습니까?”



너는 성녀고 나는 뱀파이어. 서로가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다. 언제나 햇살이 쏟아지는 너의 세계와 달리 나의 세계는 칠흑같이 어둡고 조용한 음지의 공간이다. 세간에서 보면 내가 너를 타락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 빛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너를 끌어들인 내 존재는 모르는 이들에겐 두고두고 악마라 회자되겠지.


그럼에도 나는 네게 손을 내민다.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팬텀의 눈동자를 아리아는 똑바로 응시했다.



“전, 지옥에 갈 생각은 없어요.”



그 말에, 팬텀의 한쪽 눈가가 씰룩거렸다. 그럼에도 덤덤하게 자신을 향하는 팬텀의 얼굴을 본 아리아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살짝 한 걸음 다가온 아리아가 한 손을 내밀어 제 앞에 놓인 팬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변함없는 표정과 달리 살짝 동공이 커지는 팬텀의 눈동자를 보며 아리아는 싱긋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당신과 함께라면 그 어디든,”



내겐 천국일 테니까.






===


일삼님과 풀었던 뱀파이어 썰 일부를 간단히 적어봤습니다. 팬텀아리 고백 장면! 여기서 아리아는 헌터들의 중심에 있는 몇 개의 커다란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 중 가장 큰 곳에 머무는 성녀구요 그 자체로 신의 상징이라 불리는 존재예요. 그리고 팬텀은 뱀파이어이자 괴도입니다.


이 다음엔 둘이 탈주해요. 중간에 프리드네 집에 들르기도 할텐데 아마 무사히 탈주해서 나름 행복하게 잘 살 거예요 ㅇㅇ 이 때 아리아가 은월이랑 좀 친해져서 서로 편지 주고받는 사이가 되기도 하고요!


원래 이 썰이 팬텀아리랑 프리은월 둘 다 있는데 프리은월 마음 확인은 나중에 적을게요 지금은 자야겠다ㅠㅠㅠ



Posted by I.R.E
,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 나이프귀능 스푼오르카





[귀능다나/오르메두]

Change


<04>




7.



"으윽…."


비틀린 신음소리와 함께 누워 있던 나가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부스스 눈을 뜨자, 진갈색의 나무로 된 천장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뭐지, 내가 왜 여기에…. 가늘게 뜬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나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제 얼굴을 더듬었다. 안경!! 놀라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상하게 목 뒤가 시큰거렸다. 왜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나가의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아, 일어났어요, 나가 군?"


헉.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고개를 애써 돌리자, 침대 바로 옆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사과를 깎던 손을 멈추고 싱긋 웃는 얼굴이 누구인가를 깨닫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던 나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가 허둥지둥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가 당황한 듯이 눈가를 일그렸다. 그런 나가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던 귀능은, 나가가 무엇 때문에 곤란해하는지 깨닫고 작게 웃었다.


"초능력이 안 나오죠?"
"어…."
"잠깐 수를 좀 썼거든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초능력을 쓰는 건 무리일 거예요."


무슨 수를 쓴 건데?!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한 거였어?! 경악하는 나가에게 귀능은 사실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몇 번을 사용하려고 시도했지만 초능력은 나올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고, 막막해지는 심정을 애써 달래기 위해 나가는 심호흡을 했다. 대답을 듣기가 무서웠지만 아무튼 물어보았다.


"…약이라도 먹인 건가요?"
"설마. 제가 그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너무하네요."


너라면 납치범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겠냐.

하마터면 튀어나갈 뻔한 마음의 소리를 간신히 눌러참고 나가는 슬금슬금 침대 가장자리로 옆걸음질쳤다. 최대한 자신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 듯한 나가의 모습에 귀능은 가만히 웃다가, 나가가 목이 아픈지 인상을 찡그리자 깜짝 놀라서 그를 제지했다.


"가만히 좀 있어요! …진짜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도 되요. 명령이라 데려오긴 했지만 나중에 빠져나갈 수 있게 손을 써줄테니까."
"그럼, 지금 보내주면 안 되요?"
"당연히 안 되죠. 일단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누군데요?"
"만나보면 알아요."


더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딱 잘라 대답하는 귀능의 미소에 나가는 결국 포기하고 다시 원래 누워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설령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초능력이 없는 자신은 대응하기도 어려우니까. 게다가 이 사람 싸움도 잘할 거 같은데, 자칫 잘못해서 성질 건드렸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건 더 싫었다. 인생은 안전빵으로 살자, 가 제 모토인데.


"아, 그 인간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으니, 그 동안 이야기나 좀 해볼까요?"
"무슨…, 얘기요?"
"별 거 없어요. 그냥…."


거기까지 말했다가 귀능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밝았던 그의 표정이 살짝 음울해졌다, 순식간에 다시 밝게 변했다. 싱글싱글 웃던 귀능이 이쑤시개로 사과를 찍은 뒤 그걸 나가에게 내밀었다.


"사과 먹을래요?"



*


"무슨 일이세요?"


오르카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서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이친 다나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험악했다. 넘쳐나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살벌하게 쳐다보는 눈빛에 오르카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조용히 있어야겠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던 오르카에게 다나가 불쑥 대답을 던졌다.


"구하러 가야 해."
"누구를요?"
"나가 녀석. 납치당했어."
"납치요? 나가 씨가요?"
"그래."
"대체 누가…."


오르카의 질문에 옷걸이서 외투를 집어들던 다나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금방 감정을 털어내고 말을 던졌다.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귀능이 녀석이 돌아왔다."
"예?!"


외투를 집어들어 몸 위에 걸치는 다나의 뒷모습을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던 오르카의 손에서 서류 한 장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보일세라 황급히 다시금 서류를 집어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오르카가 물었다.


"그 팬더새…, 흠흠. 그 녀석이 돌아왔다구요? 근데 왜 나가 씨를 납치하죠?"
"나이프에 들어간 모양이더군."


이번에는 오르카가 움찔거렸다. 뒤를 돌아보고 있어 다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담담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다나는 매우 골치가 아팠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런 사건까지 일으킨 이상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녀석을 숨겨주려고 했던 건가? 나는? 어이가 없어진 다나의 입가에서 피식,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참내, 키운 정도 정이라 이건가. 말없이 사라졌다가 돌아와서는 속만 징글맞게도 긁어대는 팬더새끼가 뭐 그리 예쁘다고.

갔다 온다. 무슨 일 생기면 즉시 보고하고. 그 말만을 남기고, 터벅터벅 걸어 서장실 밖으로 나가는 다나의 모습을 조용히 배웅하던 오르카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2년 간 무슨 짓을 하고 다녔나 싶었는데 나이프에 들어가다니. 하긴 하는 짓이 악당 뺨치는데다 성격도 참 지랄맞긴 하지만, 서장님 말은 잘 듣지 않았나. 그렇게 계속 생각하던 중,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오르카는 눈가를 찡그렸다. 내가 왜 그런 팬더새끼에 대해 신경쓰고 있는 거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마 그 사람이 돌아온 것에 신경이 쓰이는 탓이라고,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오르카는 다시금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하지만 통 집중이 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차, 휴대폰이 울렸다. 서장님인가? 아무 생각없이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을 뿐인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르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안녕?]
"…어떻게 이 번호를."
[에이,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 그나저나 너 지금 혼자인가?]
"아니요, 사람들이랑 같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 못하는 건 여전하네.]


네 성격상 그랬으면 목소리를 더 낮췄겠지.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웃음소리에 오르카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였는지 메두사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묻는 메두사에게 맞춰줄 생각같은 건 전혀 없었기에 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대화를 했다간 휘말릴지도 모르니까. 저번처럼.

오르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침착해라, 긴장하지 마. 방심하면 언제고 당할지 모른다.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이며, 오르카는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긴장했는지 바짝 굳어버린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그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사람을 불러야 할까 고민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막연히 짐작하는 자신에 오르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눈 앞에 나타난다면 이번에야말로 체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저번과 같은 그런 막연한 감정이 자신의 발을 묶는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8.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둘 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오독오독 사과를 씹어먹는 나가를 내버려두고 귀능은 손에 들린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커다랗고 휑한 방 안에 남자 둘이서만 남아 있으려니 참으로 썰렁했다. 태클을 걸까 싶었지만 굳이 쓸데없는 모험을 하기엔 귀찮았기에 나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안경도 돌려받고 간식으로 사과까지 얻어먹고 있자니 풀어지려는 기분에, 나가는 나름 고민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먹이로 길들이는 건가?

에잇, 아니야.

도리도리 고개를 젓던 나가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하다, 제 옆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남자를 힐끔힐끔 관찰했다. 자신을 귀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나가가 그러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가만히 있어도 입꼬리가 쭉 올라가 있는 걸 보니 평소에도 잘 웃는 사람이 아닐까. 자신을 납치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가가 툭 말을 걸었다.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네?"
"아니, 뭐랄까, 그…."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나가를 멀뚱히 쳐다보던 귀능은, 이내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하 웃어대던 귀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나가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가 간신히 웃음을 삼키고 대답했다.


"나가 군은 정말로 사람이 좋네요~."
"에?"
"아니, 아까 제가 말해놓고도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보통 자기를 납치한 사람한테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잖아요?"


조목조목 짚어주는 귀능에게 나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지금 동조할 때가 아니잖아! 표정이 이랬다저랬다 바뀌는 나가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던 귀능이 조용히 물었다.


"나가 군은, 스푼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죠?"
"에? 네. 이제 한 3주 정도?"
"어쩌다가 거기 들어가게 된 거예요?"
"서장님한테 스카웃 당해서요."


그 한 마디에, 서류를 들고 있던 귀능의 손가락이 살짝 꿈틀거렸다. 나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귀능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동요하다니 나도 아직은 멀었네.


"…서장님은, 잘 지내나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질문하며, 귀능은 평상시와 같이 미소지었다.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나가는 무척 놀랐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서장님을 알아요?"
"알죠. 원래 저도 스푼에서 일했었으니까요."
"네? 진짜요?"
"그럼요. 고로 선배라는 말은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구요?"
"지금은 아니면서."
"뭐, 그건 그렇죠."


지금쯤 배신자 새끼라고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상상만으로도 편치 못한 기분에 귀능은 가만히 들고 있던 서류를 제 무릎 위에 내려두었다.


"나가 군. 잘 들어요."
"네?"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저-."


그 말과 함께 귀능은 손가락으로 바로 자신의 앞, 그러니까 나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붙어 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도망가세요."
"에?"
"제가 이 방에 주문을 걸어놨거든요. 초능력을 쓸 수 없는 마법의 주문을."


저건 또 뭔 소리야.

당최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가는 그의 말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잠깐만, 근데 저 말은….


"위험할 거라는 뜻이에요?"
"어차피 초능력이 없으면 나가 군 성격에 어딜 가든 위험하지 않나요? 맹하다는 소리 많이 듣죠?"
"아, 그렇죠."


고개를 끄덕거리던 나가는 다음 순간 팟 정신을 차렸다. 으악, 또 말려들었잖아! 다시 질문하려던 나가는 중얼거리는 귀능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변덕스러운 인간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참 힘든 일이죠. 어째 만나는 상사마다 다 이 모양인지 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귀능이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진심으로 질린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리는 귀능의 모습에, 나가는 뻘하게 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근데 대체 상사가 어떤 사람이기에 저렇게 얼굴이 우거지상일까. 서장님보다 더한 사람인가?


"아무튼, 나가 군."
"네?"
"방심하지 말아요."


싱긋 웃고는 있지만 새까맣게 탁해지는 귀능의 눈빛에 나가는 순간 움찔했다. 분명 웃는 얼굴임에도 이상하게 밀려드는 공포감에 살짝 몸을 떠는 나가를 쳐다보며, 귀능은 만족스럽게 웃더니 옆에 있던 접시를 다시 무릎에 올려놓고 남은 사과 하나를 마저 깎기 시작했다.


"예전엔 스푼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저는 배신자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런 실실거리는 태도로 너무 무방비하게 굴었다간-."


죽을 지도, 모른다구요? 


사각사각 껍질을 깎는 소리만이 방 안을 배회했다. 그 한 마디에,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굳어 있는 나가와는 달리 귀능은 이제 콧노래까지 부르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나가의 침묵에 귀능은 좀 도가 지나쳤나 싶어 속으로 난감한 듯이 웃었다.

너무 겁을 줬나? 능력으론 최강이긴 하지만 만나보니 아직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하지만 아직 원석에 지나지 않으니까. 갈고 닦으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거다. 그래서 그가 이 소년을 노리는 거겠지.

진짜 넘어올 리는 없겠지만.

소년은 능력과는 달리 성격 자체는 정말로 평범했다. 막 정의를 외치며 적극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본적인 도덕 관념이 없는 것도 아닌. 굳이 커다란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기보단 조용한 것을 가장 선호하는 타입이랄까. 별로 꿈이나 야망같은 것도 없어 보이고, 적당히 실리에 맞춰 살아간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상처입히기엔 너무 무른, 소위 '양심' 을 가진 상대인 것이다.

이미 그 양심을 버린 자신과는 다르게.


"스푼에서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도 않겠지만."


특히 그 사람이.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에 귀능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처음 자신을 봤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표정은 덤덤했지만 붉은 눈동자는 착잡하게 일그러졌었다. 자신을 기억하고 동요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기뻤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 한 구석에 착잡함을 남겼다. 그런 쓰레기 같은 곳에 들어갔냐고 고함을 치던 모습에 심장 한 구석이 따끔거렸다. 곧 다시 무뎌졌지만.

역시 이번에야말로 미움 받으려나.

미움받는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감정이란 제 뜻대로 되는 존재가 아닌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스푼을 나온 것도 아니고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사람을 대면하고 있자니 정말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죽어도 그럴 수는 없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 목적 하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배수진을 쳤다. 스푼을 버리고 나이프에 들어간 것도 그래서였다. 돌아갈 곳은 없으니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익숙해지니 아주 못할 짓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남아 있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 당신의 존재 때문인지도 몰라요.
서장님.


"뭐, 사실 배신자든 뭐든 상관없어요.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걸 위해 다 버린 거니까.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귀능은 다시금 침묵했고, 나가는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 눈 앞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사실 이쯤되니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는 말이 진심인가도 헷갈린다. 도망치라고 방법을 알려주면서도 지금은 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모순적이지 않나.

그 때였다.


"아, 오셨네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귀능에, 나가는 깜짝 놀라 귀능의 등 뒤를 쳐다보았다. 열려있는 문 앞에 하얀 옷차림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금세 그가 누군지를 알아본 나가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나이프. 다시 한 번 귀능을 돌아보았다. 룰루 콧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마저 다 깎아 올려놓는 귀능의 표정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사과 더 먹을래요? 그렇게 묻는 귀능에게 나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 먹었다간 체할 거 같다. 그런 나가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귀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해맑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오오, 진짜 데려왔잖아? 대단하네~!!"
"뭐 이 정도쯤이야."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나는 귀능의 모습에 나가는 심히 불안해졌다. 남아 있는 동앗줄을 붙잡듯 간절히 바라보는 시선에 귀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작게 입모양을 그렸다. 미안하다고. 그러더니 몰래 저를 향해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올리는 귀능을 보고 나가는 절로 고개를 갸웃했다. 비밀로 해달라는 건가? 지금 이야기를? 하지만 왜?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나가는 제 앞으로 뛰듯이 걸어오는 백모래에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헤실헤실 웃고 있지만 저쪽보다도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다. 저쪽도 좀 미친 사람같지만.

백모래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본론이었다.


"나이프에 들어오지 않을래?"


나가의 대답도 간결했다.


"싫어요."




-TO BE COUNTINUE


===


나가한테 쓴 건 듄이 쓴 거랑 마찬가지로 특기를 무효화하는 향입니다. 물론 빼돌린 건 송하겠죠 하하
오랜만에 쓰니 재밌네요 ㅌㅌ

Posted by I.R.E
,

※ 학 시점입니다.





[학연화] 상념(想念)




"…좋아해!"



그 말 한 마디에, 몸이 우뚝 굳어버렸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몇 초의 정적 끝에, 나는 내가 고백 비슷한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니다, 공주님이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잖아. 아무렇지 않게 사람 심장 들었다 놓는 소리를 하는 데에는 아주 도사니까 말이야. 언제나와 같은 친애의 표현인가 싶어 하하 웃으며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



거기까지. 학은 뱉어내려던 웃음을 이내 도로 삼켰다. 연화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꽉 다물린 입술과 몇 번이고 초조하게 움직이는 손, 태연한 척 하지만 붉은 머리카락만치 빨갛게 물들어가는 볼과 자신을 향하는 반짝거리는 눈동자까지. 제법 단호하게 사물을 바라볼 줄 알게 되었던 보랏빛 눈동자는 조금 불안한 듯 가볍게 일렁였다. 학은 이런 연화의 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녀석'의 앞에서 늘상 보여주었던 그 시절의 당신. 누군가를 향한 연모의 감정으로 설레여하던 그 시선을 몇 번이고 옆에서 훔쳐봤었으니까.


그런데도 쉽게 실감나지 않았다. 짝사랑의 기간이 너무 길어서인가.


정말로?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걸까.


가슴 한 구석에서부터 점점 따뜻하게 번져가는 감정에 학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나, 지금 기뻐하고 있구나.


정말 기뻤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여인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데, 기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점점 실감하게 되는 현실에 자꾸만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입가에 번지려는 미소를 감추는 것이 고작이었을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쁘다는 감정은 금방 떠오른 또 한 사람의 얼굴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 저 가녀린 어깨를 붙잡고 거리낌없이 제 품에 안을 수 있다. 처음에는 당황하더라도 분명 지금의 그녀라면 자신을 마주 끌어 안아주겠지. 움찔, 자꾸만 감정대로 움직이려는 몸을 억누르며 손가락을 몇 번을 까딱거렸다. 마음 속으로는 몇 번이고 손을 뻗고, 몇 번이고 당신을 끌어안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공주님'."



그래선 안 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아주 살짝 웃음짓는 학의 눈동자는 깊고 탁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질척이는 새까만 눈동자가 제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거절도 아니었다. 회피였다. 정중하게 제 감정을 부정하는 학의 대답에 연화는 웃는 얼굴 그대로 딱 굳어버렸다. 뭔가 말하고 싶었는데, 말할 수 없었다.


곤란하다는 듯이 짓는 미소가 너무 아파보여서. 분명 웃고 있는데, 음울해지는 낯빛은 마치 안 된다고 선을 긋는 것만 같았다.



"그, 그래. 그런가? 미안해."



그렇겠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짓는 연화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학의 눈빛이 조용히 일렁였다. 거절당한 충격에 차마 그에게로 시선을 두지 못하던 연화는, 그의 그런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돌아가자며 등을 돌렸다.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등을 쫓아 천천히 걸었다. 많이 강해졌지만, 아직도 제 눈에는 마냥 연약해 보이는 연화의 뒷모습을 보던 학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이고 뻗어지려는 손을 애써 거둬들였다. 붙잡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몇 걸음만 더 다가가면 잡을 수 있는데.


학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보.


이 정도면 족하지 않은가.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는. 몇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너무 멀지도 않지만 아주 가깝지만도 않은. 닿을 수는 없지만 언제든지 당신의 옆에 서서 당신을 지키는 게 가능한 정도의 거리가. 뒤돌아봐주지 않아도 좋다. 당신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나는 끝까지 당신을 지켜보는 역할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이제껏 감정을 죽이고 또 죽여왔다. 그럼에도 지금, 너무나도 쉽게 술렁이는 감정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당신은 언제나 내게 공주님으로 남고 싶어했죠, 연화. 그렇기에 나는 당신에게 손대지 않을 수 있었던 건데. 당신을 공주님이라고 생각했기에 선을 그을 수 있었던 건데. 그 선을 넘어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대체 나는 어떡해야 좋은 겁니까.


정작 그 선을 원했던 건 당신이면서.


자꾸만 흔들리는 이성을 애써 바로잡았다. 세상에 거리낄 것, 무서울 것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오직 당신 하나가 두렵다. 움직임 하나, 눈짓 하나만으로 견고했던 내 이성을 찢어발기고 심장을 무너뜨리는 당신이.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손가락들을 조심스레 접어 주먹을 쥐었다. 픽 웃었다. 봐, 이래서 이 감정을 토해내기가 두려워. 너무 오랜 세월 죽여온 감정의 깊이가 어떤지를 감히 예상할 수 없다. 실수로라도 이성을 놓아버리는 순간, 이 감정이 어디까지 폭주할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어서.


그리고 그게 당신을 상처입히게 될까 두려워.


성을 도망쳐 나온 직후, 영혼 없는 인형처럼 그냥 숨만 쉬고 있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절로 심장이 따끔거렸다. 설핏 고개를 저었다.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그런 당신의 모습은.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이나. 재하는 내게 솔직하라고 말했지. 그 때는 그래도 괜찮은 걸까 고민했었지만 직접 겪어보니 알았다.


무리야.


피식 웃었다. 너무 소중해서, 그래서 더 손댈 수 없는 존재라니. 내 손에 잡히면 부서질까 두려워서, 차마 닿는 것조차 겁이 날 정도라. 속으로 중얼거리다 어처구니가 없어 조금 웃었다. 어떤 크고 강한 적을 상대할 때보다, 나보다도 한참 작은 소녀 앞에서 나는 이렇게까지 작아지고 두려워진다. 그래서 우스웠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두려워하고 결국엔 최악의 가정을 하고 마는 나 자신이.


그럼에도 변하지 못할 나를 알아서.


터벅터벅, 앞서가는 연화의 발걸음에 맞춰 걸어가던 학의 고개가 살짝 아래로 숙여졌다. 침착해 보이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의 안색 위로 어둡고 음울한 감정들이 피어올랐다. 다음 순간, 고개를 들어올리는 학의 눈빛에는 어떤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생각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들과 동시에 학의 입가에 픽 미소가 떠올랐다. 엉뚱할 때도 있지만 할 땐 하는 녀석들이니까, 그들이라면 분명히 공주님을 잘 지켜주겠지. 내가 없어도 괜찮을 만큼. 처음에는 그저 귀찮은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샌가 녀석들의 존재에 안심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런 감각이 결코 싫지 않았다. 그녀의 안전이 보장된 지금, 자신에게 남은 일은 딱 한 가지 뿐이었다.


…아직은 안심할 수 없으니까. '그 녀석'이 살아있는 한.


떠오르는 하나의 얼굴에 학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눈빛만으로 상대를 찢어죽일 수 있었다면 몇 번이고 찢어버렸을 법한 살기 가득한 눈동자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몰아치는 분노에 그의 손이 들고 있던 장도를 부러질 듯 세게 움켜쥐었다.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수원.







===


처음으로 써보는 새벽의 연화 연성! 음... 처음 연성은 역시 학연화나 학연화수원의 관계도에 관한 연성일 거라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었네요:) 개인적으로 학의 행동을 머릿속에 상상하는 건 쉬웠는데 그걸 동작으로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학은 진짜 말보다는 행동으로 많은 걸 표현하는 남자라, 동작을 더 세심하게 표현해주고 싶었는데 읽는 분들이 제대로 상상이 가셨을까 모르겠어요.


학은 연화를 너무 소중하고 신성히 여기기 때문에 정작 연화가 고백해도 저런 식으로 회피할 거 같아요. 정말 소중하니까, 오히려 손을 못 대는 거..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수원일 거 같지만요; 얘는 반드시 수원을 자기 손으로 죽일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원을 죽인 뒤 자신의 미래는 별반 생각하고 있을 거 같지 않아서요. 윤을 만나던 에피소드 때 익수가 그러지 않았던가요? 너에게선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그 말의 의미는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ㅠㅁ ㅠ


어쨌든 제 기준에 학은 연화한테 너무 진심이라 도리어 연화를 거절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화가 바랬기에 그녀를 꼬박꼬박 공주님이라 칭하는 거기도 하고. 자기 감정이 폭주할까 두려워할 거 같기도 하고... 연화를 상처입히는 사람에 학 본인이 들어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할 거 같거든요. 얘 너무 순정이라 제 마음이 찢어집니다(...)


연화를 거절할 때 학이 짓는 미소를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을까 모르겠네요. 모티브는 13권쯤인가 연화가 이런 장난 그만 하라고 했을 때 학이 머리 쓰다듬으면서, 네 그만하겠습니다. 할 때 지었던 웃음이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캐붕이 있을까 두렵지만 첫 연성이니 상냥하게 지켜봐주셔요^_^;

Posted by I.R.E
,

※ 나이프귀능 스푼오르카



[귀능다나/오르메두]

Change


<03>




5.


꺄르르 뱉어내는 웃음소리, 하이얀 웃음. 살며시 눈꼬리를 접으며 악동처럼 웃는 얼굴은 어려 보였다. 아니, 어렸다. 작은 몸집을 한 어린 시절의 녀석이 저 멀리서 뒷짐을 지고 멀뚱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막 웃어대며 내게 손을 흔들어대는 모습에 직감했다. 꿈이구나.


저 시절에는 그래도 꽤 귀여웠는데.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은 저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어린애의 재롱이라 생각하면 뭐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나이먹고도 저러니까 문제지. 일하라고 잔소리를 퍼부을 때는 애늙은이가 따로 없었지만, 저럴 땐 딱 그 또래 남자아이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혼혈 중에서도 유독 인간과 닮은 녀석이었다. 흑백으로 얼룩덜룩한 독특한 머리카락과 대나무를 주워먹는 괴상한 식성 정도가 녀석이 팬더 혼혈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자신을 훌쩍 넘어버릴 정도로 키가 컸지만, 싱글싱글 웃는 얼굴은 여전히 소년처럼 해맑았다.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영악한 눈빛으로 개구지게 웃으며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 녀석은 저렇게 웃지 않는다. 어느샌가 훌쩍 커버린 녀석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제 앞에 다시 나타났다. 더없이 최악의 형태로.


일어나십시오.


그 말과 함께 시끄럽게 울려대는 자명종 소리가 뇌리를 잠식했다. 반사적으로 팔이 귓가에 들이밀어진 자명종을 세차게 밀쳐냈다. 탁,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바닥을 세차게 구르는 소리와 함께 눈꺼풀에 가려져 있던 붉은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수분이 부족해 뻑뻑한 눈꺼풀이 따가웠는지 몇 번 눈을 깜빡거린다.


역시 이쪽이 현실인가.


잠에서 깼다 생각하자마자 무겁게 제 몸을 짓누르기 시작하는 피로에 다나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시계를 보니 잠든지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다나는 겨우내 들었던 선잠을 망쳐놓은 장본인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파일을 들고 다나 앞에 서 있는 남자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일입니다, 라고 깍듯이 대답하는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저 멀리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자명종을 흘낏 쳐다보다가 다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북북 긁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다나의 눈동자가 오르카를 흘낏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당황하는 척이라도 하더니 이젠 익숙해졌는지 그런 기색은 없다. 공손한 말씨에 점잖은 얼굴을 한 주제에 이 놈도 사람 깨우는 매너는 영 아니었다. 


그 생각과 함께 떠오른 얼굴을 북북 지웠다. 핫, 짧게 탄성을 뱉어내며 웃었다. 현실에서도 골치 아프게 하면서 이젠 꿈에서까지 나타나다니, 일부러 이러나 싶어 괜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다시 오늘이 시작되고 있었다.





6.


타닥타닥, 조금은 거칠게 발을 구르며 다나는 바람처럼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평소와 같은 뚱한 얼굴이어서 별로 티나지는 않았지만 다나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늘 매서웠던 눈매가 오늘따라 더욱 흉흉했다. 다나의 주변에 가득 피어오르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복도를 걸어가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녀를 이렇게 짜증나게 만든 원흉은 하나였다. 방금 전 들었던 보고 때문이었다.


나이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녀석 때문이지만.


요즘 잠잠하다 싶었는데 또 깔짝거리나. 평소에도 짜증났지만 이번은 유독 더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아무래도 보통 범죄자들과는 스케일이 다르기도 하고, 귀찮은 놈들도 더럿 있고. 괜히 신경질이 나서 뭐라도 후드려패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기에 애써 성질을 참아냈다. 가뜩이나 많이 부서지는데 굳이 거기에 보탤 이유는 없지. 남들보다 특출난 제 완력이 새삼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쯤이면 임무를 끝내고 돌아왔을 텐데. 빠르게 걸어가면서도 주위를 휙휙 돌아보며 집중하던 다나는 곧 자신이 원하는 인물들을 찾아냈다. 휴게실 쪽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한 명은 새까만 날개를 달고 있는 흑발의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분홍색 단발머리를 한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큼큼, 헛기침을 하면서 다나는 휴게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돌아왔냐."

"언니! 어서 와."



그녀가 있는 쪽을 돌아보자마자 반갑게 제 언니를 맞이하는 혜나와는 달리, 사사는 고개만 한 번 끄덕거렸다.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알고 있기에 다나는 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스푼 내에서도 손에 꼽히게 잘생긴 얼굴과 달리, 혀가 짧은지 어쩐지 하여간 거의 알아듣지도 못할 만큼 발음이 새는 녀석이니 어쩌겠는가.



"오늘은 그래도 무탈히 끝낸 모양이네."

"에이, 우리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살살 눈웃음치며 웃는 제 동생의 얼굴은 귀여웠지만 다나는 속지 않았다. 히어로라는 이름값을 하는 건지 몰라도 스푼에는 유독 개성이 넘치는 녀석들이 많았고 그만큼이나 트러블도 상당히 일어났다. 특히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녀석들이 꽤 있었는데 제 동생은 다행히도 똑부러진 편이었으나, 뭔가 괴이하게 자잘한 사고를 치는 부류였다.



"그나저나 언니, 일 많아? 오늘도 많이 피곤해 보이네."

"끄떡없어."



눈을 번뜩이며 단칼에 말하는 다나를 보며 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역시 일이 많은 모양이다. 그에 역시 스푼에선 승진하면 고생길일 뿐이니 절대 말단으로 남아야지, 라고 중얼거리는 혜나였다. 한편 다나는 어딘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요즘들어 밀리는 업무에 밤을 좀 새긴 했는데, 그렇게 티가 나나.


아, 그나저나.



"나가 녀석은 어딨어? 할 말이 있는데."

"오빠는 아까 전에 편의점에 음료수 사러 간다고 나갔는데. 생각보다 늦네."

"흠…."



붉은 눈빛이 살며시 번뜩였다.




*



"뭐, 뭐지?"


오싹하게 스쳐가는 한기에 나가는 몸을 살짝 떨었다. 혜나가 말한 대로, 나가는 방금 전 편의점에서 계산을 마치고 스푼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손에 음료수가 가득 든 봉투를 들고서 여유로이 길을 걸어가던 나가의 발걸음을 조용한 목소리가 불러세웠다. 저기요. 뒤를 돌아보자 어떤 남자가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흑백이 섞여 있는 독특한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로, 빛을 삼켜버린 듯한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가득 담고 있었다.



"혹시, 그쪽이 나가 군이에요?"

"? 네. 그러는 그쪽은 누구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가를 보며 남자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인상이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어려뵈지는 않았지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해맑은 미소는 마치 소년같았다.



"아, 제대로 찾아왔네요. 그쪽을 만나러 왔거든요."

"…저를요?"



잠깐 멍해있다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르키는 나가에게, 남자는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와 나가의 손을 꽉 잡더니 붕붕 흔들었다.



"이야~ 새로 들어온 히어로가 있다길래 어떤가 하고 와봤는데, 확실히 재능이 출중하긴 한가 보네요. 방금 전에 자동차 들어올린 거 보고 깜짝 놀랐다구요."

"아, 혹시 선배님이세요?"

"…뭐, 그렇죠."



통통 튀는 듯한 밝은 목소리가 조금은 부산스러울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그런 감정은 없었다. 정말로 자신을 반기는 듯한 얼굴에 대체 무슨 볼일이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남자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무슨 일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가는 뒤를 돌아보았다. 혜나와 사사를 뒤에 두고 앞장서서 걸어오는 다나를 보며 나가는 손을 흔들었다.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서…."

"어서 그 녀석에게서 떨어져, 멍청아!!"

"예? 그게 무슨 소…."



나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목 뒤에 있는 급소를 맞고 풀썩 쓰러진 나가의 몸을 한 손으로 붙잡아 들쳐 안아올리는 귀능의 얼굴이 싱긋 웃고 있었다.



"빨리 오셨네요."

"…당장, 그 녀석 안 내려놔?"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으득 이를 가는 다나에게 귀능은 유감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랬다간 제가 혼나서 말이죠."

"맞고 내놓을래, 그냥 내놓을래?"

"딱히 해를 끼칠 생각은 없는데,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헛소리 집어쳐."



눈 앞에서 사람을 납치하려는 주제에 정말이지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함부로 주먹을 휘둘렀다간 녀석이 데리고 있는 나가에게도 타격이 갈 우려가 있었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며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는 다나와는 달리 정말로 놀라는 이들이 있었다.



"귀능 오빠?! 정말 귀능 오빠야?"

"끼능이…?!"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혜나와 사사, 두 사람에게 귀능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엊그제 만났던 친구처럼 친근하게, 정말로 반가운 듯이.



"아, 혜나 양이랑 사사 씨네요! 오랜만이에요~."

"오빠가 대체 왜 여기 있어? 돌아온 거야? 그나저나 나가 오빠는 왜…."



정말로 놀랐는지 마구 질문을 쏟아내는 혜나와 달리 사사는 바짝 얼어 있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어도 저런 표정은 나오지 않을 것처럼. 입매를 우물거리며 잠깐 고민하더니, 귀능은 이내 답을 내놓았다.



"그게, 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잠깐 나가 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에요."



그래서 데리러 왔죠. 하하 웃고는 있었지만, 사실 좀 많이 귀찮아요- 라고 얼굴에 큼지막히 써다 붙여놓은 것처럼 귀능의 눈매가 잘게 일그러졌다. 그러면서도 귀능은 다나 쪽을 힐끔힐끔 주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는 다나의 모습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살짝 눈을 깜빡거렸다. 한 발짝 내딛으려는 사사를 다나가 팔을 뻗어 막았다.



"물러서."

"네?"

"나이프다."

"…머라꼬여?"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가볍게 경련이 일었다. 바닥에 발이 딱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건 혜나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2년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에 갑작스레 적이라는 이름표가 붙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침착하게 그를 응시하는 다나의 눈동자가 덤덤히 귀능에게 말했다.



"녀석을 내놔."

"힘으로 뺏으려고는 하지 않으시네요. 저 없는 사이에 성격 많이 죽으셨어요?"

"틀려. 지금 많이 참아주고 있는 거니까 좋은 말 할 때 내놔라."



씹어뱉듯이 내뱉는 다나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귀능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아연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가 조금은 쓰게 웃었다.



"…하여간 그 인간은 진짜 재수없다니까요."



왜 자신을 보냈나 했더니, 이렇게 될 거라 눈치를 챘던 걸까. 분명 그 인간이나 다른 사람이 왔었다면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 메두사 씨는 조금 예외라 치더라도. 묵직하게 제 어깨를 짓누르는 한 사람의 무게에 귀능은 다시금 그를 고쳐메었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도 사실 꽤 착잡한 심정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같은 눈동자와, 충격을 받아 멍해져 있는 다른 두 사람의 얼굴을 흘깃 돌아보며 귀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직은 그래도 좀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운명이란 참 얄궂네요."

"…."

"죄송해요."



그럼 안녕히.


그 말과 동시에 귀능이 바닥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게 무언지 인식하기도 전에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빛이 기습적으로 그들의 시야를 덮쳤다. 섬광탄이었다. 빛이 사라진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귀능도 나가도, 그 누구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To Be Continued



===


역시 기약없는 4편 ㅎㅎㅎ


Posted by I.R.E
,

사실 리키나 나리는 희망과 빛을 상징하지만 그만큼 마음속에 어둠도 깊어서... 나리가 계속 어둠의 바다로 끌려가는 것도 그렇고, 리키가 어둠을 끔찍하게 혐오하는 것도 그렇고, 하여간 제대로 엮으면 분명히 골치아픈 전개를 써야 함..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나리는 특별히 어둠이라고 할 것은 없는 것 같은데, 필연적으로 어둠을 두려워하는 듯한 그런 건 있더라구요;; 사실 그래서 리키랑 엮으면 좀 머리가 아픈게, 리키는 정말 어둠을 지독하게 혐오하는 축인데 나리가 자꾸 어둠에 엮이다보니, 왜 하필 나리에게 이런 일들이 꼬이는 걸까 생각하고 이것저것 조사를 해보거나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나리는 나리대로 리키의 어둠을 힐링해준다기보단 자기 추스리는 것도 벅찰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게다가 나리의 안에서 태일이의 존재가 정말이지 커요; 그래서 리키랑은 서로 좋아한다기보단 처음에는 동료애 비슷하게 시작할 것 같구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리가 태일이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혼자 자립할 수 있게 성장하는 게 나름 타케히카만의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나리한테 어둠이 따라붙는 건 얘가 빛의 문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도 짙게 드리우기 마련이니까. 하여튼, 리키는 리키대로 어둠을 혐오하긴 하지만, 동시에 어둠이라는 것 자체가 빛에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그런 나리의 이면을 받아들일 수 있게 성장하는 게 일단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ㅇㅇ 둘은 그 후에야 비로소, 서로의 손을 온전히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ㅁ^

Posted by I.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