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c="https://code.jquery.com/jquery-1.12.4.min.js" integrity="sha256-ZosEbRLbNQzLpnKIkEdrPv7lOy9C27hHQ+Xp8a4MxAQ=" crossorigin="anonymous">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7.

흑백의 남자





“나는 말이지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 한 가운데서,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마리네뜨는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시이허엄이이 제일 싫어!!”



자, 여기서 문제. 마리네뜨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잠시 여기서 마리네뜨의 성격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마리네뜨는 기본적으로 성적에 크게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모종의 이유로 그랬던 적도 있었지만 커가면서 자신이 그쪽 머리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깔끔히 그만두었다. 아직 명확한 꿈은 없지만 엄마랑 아빠 닮아서 손재주는 있다고 칭찬 많이 들으니까 그쪽으로 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말고사가 이주 남았을 당시에도, 공부한다고 슬슬 바빠지기 시작하는 다른 애들과 달리 마리네뜨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다. 늘 망쳤으니 이번에도 망치겠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마리네뜨에게 날아든 부모님의 통보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저번 중간고사처럼 시험 망치면 앞으로 외출 금지다.


외출 금지라니! 이제 곧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이 무슨 기겁하실 소리란 말인가. 잘못했다고 빌어 봐도 부모님은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하긴 중간고사 성적 보시고 많이 충격받은 표정이시긴 했지만. 사실 그 점수는 나도 좀 놀랍긴 했다. 공부를 안 하면 이 정도까지 곤두박질칠 수 있구나! 싶어서.

물론 히어로 일을 하느라 공부에 좀 소홀했던 건 인정한다. 사실 너무 피곤해서 수업시간에 많이 졸기도 했고, 그 여파가 어떻게든 이런 식으로 나온 거겠지.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마음도 있었다. 저번 중간고사 성적을 처음으로 보셨던 부모님의 표정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하지만 그래도, 막상 하려니까 손에 안 잡히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집으로 돌아와서 책상에 앉아 있은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놀고 싶어지는 자신에 마리네뜨는 다시금 절규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과 공부에 대한 집중력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마리네뜨의 얼굴에 우울한 기색이 짙게 번졌다. 다른 과목도 문제였지만 특히 이번에 수학은 진짜 외계어를 설명하나 싶을 정도로 어려웠다. 막막하다. 예제를 몇 번이고 다시 풀어봤는데도 이해가 안 돼.



“아악, 어떡하지. 티키, 티키. 나 진짜 어쩌면 좋아?”

“마리네뜨….”



차마 이것까지 긍정해줄 수는 없는지 안쓰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티키에 마리네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내가 뿌린 씨앗이긴 한데. 그래도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하긴, 이번 기말까지 망치면 진짜 방학에 보충수업을 나가야 할 테니까 공부는 해야겠지….”



에스미한테 SOS를 쳐서 어느 정도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너무 집중이 안 돼서 미칠 것 같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마리네뜨는 제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다. 내가 이렇게 공부머리가 죽어있었나?



“그래, 이거까지는 다 좋은데….”



마리네뜨는 음산하게 웃었다. 살짝 맛간 듯한 표정으로 하하하 웃고만 있는 마리네뜨를 보며 티키는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마리네뜨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테러 예고까지 오는 건 뭐냐고!”



크게 소리질렀다. 안절부절못하는 티키를 내버려둔 채 열받은 얼굴로 씩씩거리던 마리네뜨는 곧바로 떠오른 생각에 절로 풀이 죽었다.



“그것도 시험 시작 이틀 전이야 날짜가….”



난 죽었다. 으아아 소리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는 마리네뜨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처량했다. 안쓰럽게 쳐다보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중얼중얼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왜, 왜 하필 지금이냐고오오…!”



일주일 전, 파리 경찰청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그것은 약간의 암호를 동반한 예고장으로, 경찰은 수사 끝에 암호문을 풀었지만 적혀 있는 건 장소와 날짜뿐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테러 날짜에 나타나는 범인을 체포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라고. 며칠 전, 악당과 싸우다가 돌아가려고 하기 직전에 경찰들에 붙잡혀서 이런저런 사정 설명을 들었다. 아무래도 보험을 들어두고 싶었는지, 테러 당일날 도와줄 수 있겠냐는 경찰의 부탁을 왜 내가 선선히 승낙했을까.


그 때 거절했어야 하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고.”



시험이 너무 싫다고 다시금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눈을 감고 책상에 콕 고개를 박았다.



“어떻게 악당들은 사람이 이렇게 바쁜 시기만 골라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사람이 한가해질 때 와주면 좀 좋아?”



투덜투덜 중얼거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안 하면 정말로 외출 금지를 당하게 될 텐데?”

“에에~!!”

“힘내, 마리네뜨. 넌 할 수 있어! 힘내자~!!”



옆에서 열심히 응원하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는 한숨과 함께 다시금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억지로라도 교과서에 눈을 붙이며 공부하기 시작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비장했다.






“우응~ 이게 다 뭐야? 파트너.”



책상 위에 쌓여져 있는 책들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묻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짧게 대답했다.



“책.”

“그건 알고~ 평소에 읽는 책들이랑 좀 다른데?”

“…교과서야.”



곧 시험이니까. 덤덤하게 말하며 펠릭스는 다시금 독서에 집중했다. 하지만 펠릭스가 읽고 있는 책은 책상 위에 있는 교과서가 아니라 다른 종류였다. 제목을 쭉 훑어보던 플랙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펠릭스의 뒤로 쪼르르 날아가 펠릭스가 읽고 있는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으앗!”



제게로 뻗어지는 손을 잽싸게 피하면서,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새빨개진 것을 본 플랙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꺄하하하! 아니, 왜 그런 걸 읽고 있는 거야~? 아, 저번에 그 가면 쓴 여자가 했던 말이 신경쓰여서?”

“야!”



바락바락 소리치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플랙은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깔깔 웃어댔다. 더 이상 말하면 죽여버릴 것처럼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펠릭스가 걱정되기는 했는지, 플랙은 펠릭스가 잡을 수 없는 높이까지 날아오르며 낄낄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재밌다니까~ 어젯밤 일은 말이야.”



킬킬거리는 플랙을 올려다보며 펠릭스는 정말 요정이란 신비한 존재인가에 대한 고민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블랙캣이 되면 변신했을 때는 요정과 그 동안의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왜 자신의 요정이 이런 녀석인가에 대해 새삼 제 팔자를 한탄하는 펠릭스의 머릿속으로 지난 밤의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에펠탑. 그 에펠탑을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블랙캣은 어딘가에 있을 레이디버그를 찾았다. 바로 아래쪽에 작게 보이는 누군가를 찾아내자마자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철근 위에 앉아 발을 여유롭게 앞뒤로 굴러가며 앉아 기다리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레이디버그가 앉아 있는 철근 위로 내려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시선에 심장이 살짝 뛰었다.


‘무슨 일로 불렀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정말로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이상했다. 평소에는 웃을 일이 별로 없는데 블랙캣이 되면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풍부해진다. 이게 변신의 영향 때문인지, 플랙의 말대로 내면에 있었던 원래의 성격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잘은 모르겠다.


예전의 성격은 이미 8년 전에 버렸을 텐데.


웃고는 있는데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 아무튼 준비했던 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가져왔던 장미꽃을 레이디버그에게로 내밀었다. 하지만 깜짝 놀란 듯하다가도 꽃을 받기는커녕 망설임없이 흥, 고개를 돌리는 레이디버그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축 처졌다. 곧바로 일어나서 물었다.


‘대체 왜 안 받아주는 건데! 저번에 꽃이 받고 싶다고 그래서 특별히 장미꽃까지 가져왔다구!’


팔락거리던 검은색 고양이 귀가 블랙캣의 기분마냥 추욱 늘어졌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전에도 말했잖아. 넌 내 취향이 아니라니까!’

‘대체 레이디의 취향은 어떤데?! 나한테도 좀 말해달라고!’

‘적어도 넌 아니라구! 우린 파트너일 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


그렇게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원위치. 기분이 상했는지 집에 갈래, 한 마디만을 남기고 돌아서서 가버린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니 저절로 씁쓸한 기분밖에 남지 않는다. 좀 욱해서 투닥거리긴 했지만 어제 레이디버그는 정말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그걸 알면서도 내 감정만을 요구하다니.



“…최악이군.”

응? 뭐라고 말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눈을 초롱초롱 빛나는 플랙을 가볍게 무시하며 펠릭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시끄러운 것에도 적응이 되니까 전처럼 플랙이 귀찮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너무 입이 가벼운 녀석이라 말이지. 나중에 레이디버그랑 만나게 되면 쓸데없는 소리만 줄창 늘어놓는 거 아닐까. 상상만으로도 두려운지 펠릭스의 손이 책의 커버를 꽉 움켜쥐었다.


정말 레이디버그랑 잘 되더라도 플랙하고는 가급적 만나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펠릭스는 무심한 얼굴로 다시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 펠릭스를 지긋이 쳐다보던 플랙은 불만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이빨을 드러낼 정도로 씨익 웃으며 펠릭스의 뒤쪽에 있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뒤에서 와르르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에 펠릭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플랙…. 책장에는 손대지 말랬지.”



또 정리해야 하잖아. 하아,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펠릭스가 책장으로 다가가 쏟아진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떨어진 책들을 보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착착 순서를 정리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부지런히 꽂기 시작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이 궁금하다는 듯이 공중에서 뒹굴거리며 물었다.



“근데, 왜 저 책들은 안 봐도 돼~? 시험 아니었어?”

“어느 정도 복습만 꾸준히 하면 문제없으니까 괜찮아. 니가 이렇게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짓만 안 벌린다면 말이야.”



살짝 비꼬는 목소리에도 칭찬 고맙다며 킬킬 웃고 있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책에서 읽었던 대화가 안 통하니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알 것 같았다.

다 됐다. 어느 새 책들을 다 정리한 펠릭스는 아직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플랙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지금 더 책을 읽었다간 또 심심하다고 장난칠 거 같다. 어제 일 얘기까지 다시 꺼낼까도 걱정이고, 어차피 독서할 기분도 날아가긴 했으니까,



“플랙, 너, 밖에 나가면 정말 조용히 하고 있어야 해.”

“뭐야? 어디 나가게?”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짤막히 대답했다.



“산책.”





“여어, 펠릭스!”



자연사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 후에, 펠릭스는 경비실에 부탁해서 제가 만날 사람에게 연락을 넣었다. 잠시 뒤, 뒤에서 제 이름을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하얀 가운을 입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하하 웃고 있었다. 제게 손을 흔드는 남자에게 펠릭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이 박물관에서도 권위 있는 생물학 연구자 중 한 사람인 파비앙 듀퐁(Fabien Dupont)은 오랜만에 만난 펠릭스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가 여긴 어쩐 일이냐? 고등학교 들어가고는 통 안 오더니만.”



섭섭하게스리. 짧게 한 마디를 덧붙이며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방해하러 온 건 아닌데.”

“아니다. 일단 좀 올라갈까?”



곧바로 직원들만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탄 두 사람은 파비앙 교수가 사용하는 연구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낯익은 풍경들이 눈에 띄었다. 책장들에 꽂혀 있는 온갖 생물학 저서들과 가죽의 빛이 살짝 바랜 낡은 소파, 책장 유리문 안쪽에 들어 있는 다양한 표본들과 샘플들까지. 펠릭스는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정말 예전 그대로네요.”

“뭐야, 그 아쉽다는 듯한 말투는.”



툴툴거리는 파비앙의 목소리에 펠릭스는 그렇게 티가 나냐고 반문하며 피식 웃었다.



“그냥, 아저씨는 늘 한결같잖아요. 신기해서요.”

“고작 1,2년 사이에 사람이 변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니, 나이를 먹기는 했지만 아직 너도 어리구나, 어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파비앙이 곧 마실 것을 가져와 펠릭스에게로 내밀었다. 시원한 주스병을 말없이 바라보던 펠릭스가 주스의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런 펠릭스를 조카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던 파비앙이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냐?”

“….”

“니가 아무런 이유 없이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잖니. 곧 시험기간인 이 바쁜 시기에.”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나도 너만한 딸이 있는데 모를 리가.”

“…언제 저 모르게 결혼하셨습니까? 숨겨둔 가족이라도 있었어요?”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지. 조카야, 조카!”



넌 왜 이리 귀여운 맛이 없냐고 투덜거리는 파비앙을 향해 펠릭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확인? 그래, 뭘 말이냐?”



정말 중요한 기밀정보만 아니면 뭐든 말해줄 수 있다며 웃고 있는 파비앙과는 달리, 펠릭스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이 박물관 뒤쪽 절벽에 엄청나게 커다란 동굴이 있지 않아요?”

“동굴이라니?”



그게 뭔 소리냐고 묻는 듯한 파비앙의 표정에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10년이 넘게 이 박물관에서 터를 잡고 일한 파비앙조차 그 동굴에 대해 모른다는 말은 펠릭스에게 싸한 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지만 펠릭스의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것을 알아챘는지 소년을 살펴보는 파비앙의 표정도 걱정스럽게 변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순간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펠릭스와 파비앙은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죠?”



자주 와봤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조용한 곳이었다. 밖에서 박물관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달리 이 연구동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데다, 여기에 모여 있는 학자들은 하나같이 자기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연구하는 것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이라 굳이 소음이 나올 이유가 없다. 펠릭스도 꽤나 자주 방문했었지만, 이렇게 시끄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다시 말해서, 시끄러울 법한 이유가 있다는 거다.


무슨 일이 있나 보려고 밖으로 나가보려는 펠릭스를 파비앙이 한 팔을 들어 제지했다. 나가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파비앙을 보며 펠릭스는 다시금 소파에 앉았다. 파비앙이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상당히 재밌는 시기에 방문했구나.”

“예?”

“이번에 우리 쪽에 큰 일이 하나 생겨서 말이지.”

“무슨….”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묻는 펠릭스에게 파비앙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거 우리들끼리도 쉬쉬하는 기밀 사항인데, 그래도 듣고 싶니?”

“듣고 싶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펠릭스에 파비앙은 조금 놀랐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일이구나. 네가 이런 일에 관심을 다 가지고.”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지금은 뭐든 알아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펠릭스의 얼굴에 파비앙은 살짝 놀란 탄성을 내뱉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가 밖에 떠들고 다닐 성격도 아니고.”



결벽적이고 입이 무거운 펠릭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되는지, 파비앙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도난이라….”



박물관을 떠나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가는 펠릭스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2주 전, 자연사 박물관에서 중요한 표본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 전시하기 전의 연구 단계인 표본인데 그간 나타나지 않았던 특이한 유형의 생명체라고.


학자들만이 열람할 수 있는 고급 표본실에 보관하고 있었던 귀중한 표본을 도둑맞은 터라 박물관은 당시 한 차례 난리가 났었다. 즉시 내부수사에 착수했지만 이 표본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무척 적었고, 무엇보다 어떻게 훔쳐갔는지가 우선 난제였다. 경찰에 알리기에는 박물관의 이미지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도난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연구진 내에서도 무척 적었다. 현재는 박물관 경비팀 쪽에서 이 문제를 전담하고 있다고 했다.


범인의 수법은 정말이지 깔끔했다. 어떤 흔적도 없이 전시관 유리에 동그랗게 구멍을 뚫어서 안에 들어 있던 표본만을 들고 나갔다고. 마치 훔쳐간 게 아니라 그냥 문을 열고 들어와서 표본을 가져간 듯한 자연스러운 수법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연구동 안의 누군가가 범인인 건 아니냐는 얘기까지 돌았다고 했다. 물론 다들 각자의 연구동 안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으며 연구동 복도에 설치된 CCTV에는 사람이 나다닌 흔적이 전혀 없었다.


정말 비밀이야! 그렇게 몇 번을 다짐받고 열람한 표본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평범해 보이는데 이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렇게 되물으니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체 반응이 다른 녀석들과는 정말 달라. 특히 뭐랄까….’


아니다. 고개를 절레 내젓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뭐라고 더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목이 타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에 파비앙은 마치 기밀 정보라도 발설하는 것마냥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진짜 기밀이긴 했지만.


‘에너지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몇 가지 검사가 있는데, 에너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특정된 반응이 강하게 나타난단다. 그런데 이 생물에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의 양이 상당했거든.’

‘그런가요?’

‘그래. 심지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화석에서 말이야.’


이게 제일 놀랍지. 살짝 웃음을 터트리며 파비앙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뭐, 우리도 이걸 발견한 건 지극히 우연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작은 개체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에너지 반응이 나타나는지 다들 신기해했었지. 뭐랄까, 꼭 에너지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것 같은 이미지가 그려진다고 하면 이해가 되겠니? 살짝 흐릿한 모양이지만.’

‘네.’


고개를 끄덕이자 파비앙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영문을 모르겠구나. 입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말이야. 대체 어떻게 알고 훔쳐간 건지 궁금하기도 하네.’


중얼거리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사실을 물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얘기를 저한테 다 해주셔도 되는 건가요.’

‘뭐 어떠냐. 너희 아버지가 왕년에 우리 박물관에 기부했던 기부금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이자도 안 될 거 같은데.’


그래도 다른 데서는 말하지 말라고, 잘리는 건 무섭다고 말하며 너스레를 떠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묻자 결심하고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언제 훔쳐갔죠?’

‘음, 솔직히 워낙 특이한 표본이긴 해서 아직 제대로 연구에 착수하지는 못했었단다. 뭐 그래도 3일에 한 번씩은 그 표본실에 들렀었는데, 5월 26일에 확인했을 당시에는 분명히 있었거든. 29일에 확인해보니 없어서 놀랐지만 말이야.’

‘CCTV는 있었나요?’

‘표본실 안에는 없었지만 표본실 밖 복도에는 설치해놨었지. 3일간의 CCTV를 돌려보니, 27일 오후쯤에 수상해 보이는 누군가가 다녀간 기록이 남아있긴 했었다.’

‘…어떤 사람이었죠?’

‘이런, 아주 탈탈 터는구나! 직접 보여줄 수는 없다만, 굉장히 특이한 차림을 한 남자였단다. 상의는 검은색 셔츠를 하의는 하얀색 바지를 입고 있었어.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피부색이 정말 창백했다는 건 기억에 남아.’


정말 특이하게 생겼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파비앙의 말에 펠릭스는 곧바로 머릿속에 한 단어를 떠올렸다.


악당.


‘그리고 방식도 매우 이상했어. 문의 손잡이를 잡고 뭔가를 하더니 갑자기 문이 철컹 열리는 거야. 보고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지.’


그리고 들어가서 표본이 들어 있던 갈색 나무상자를 가지고 나온 뒤로는 행방이 사라졌다고 했다. 혹시 경매시장에 나올까 싶어 유명한 옥션 쪽의 동향이나 소식들을 접하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다고. 정말 특이하게 입고 있었던 사람이니 분명 사복도 그럴 거라며, 혹시 나중에 찾아내면 꼭 연락 달라는 농담을 끝으로 이 이야기는 종료되었다.



“27일이라.”



펠릭스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 사건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날짜.



“분명히 5월 27일이었지.”



학교에서 현장실습을 갔던 날짜가. 게다가 그 날 마침 미스터 피죤이 나타났었고, 본격적으로 싸우려는 순간 갑자기 사정이 생겼다며 도망가 버렸다. 마치 시간을 끌고 있었다는 듯이.



“우연인가? 아니면….”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성급한 일반화는 좋지 않다. 연관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혹여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과 미스터 피죤이 서로 아는 사이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하지만 남자가 훔쳐갔다는 표본이 조금 신경쓰이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펠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어.

아직까지는.





“으아아, 으아아아….”



마치 좀비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 말이나 웅얼거리고 있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수척했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서 당장이라도 넘어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공부를 거의 안 하던 사람이 벌써 일주일 넘게 공부만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속된 말로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하긴 했는데 정말이지 정신이 쪽쪽 빨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오랜만에 많은 지식을 우겨담고 있어서인지 머리가 과부하를 호소하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에 레이디버그 일까지. 악당들도 평소에는 일을 하는지 요즘은 꼭 밤에만 나타나서 휘젓고 다니는데 그 덕분에 요즘은 잠까지 설치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는 자면 안 되니까 애써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니 긴장이 풀려서일까, 피곤해서 죽을 거 같다.


정말이지 딱 죽고 싶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무 힘들어.



‘마리네뜨….’



자켓 속에 숨어 있는 티키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들릴까. 피곤한지 거하게 하품하며 길을 걸어가던 마리네뜨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작은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 한산한 공원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공원 안으로 총총 들어섰다. 졸린 눈으로 휘적휘적 공원에 있는 벤치로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순간 비틀거렸다.



“어…?”



몸이 기우뚱하더니 넘어지려는 찰나, 단단한 무언가가 허리를 받치더니 마리네뜨를 꼭 붙잡았다. 깜짝 놀랐는지 눈만 껌뻑거리던 마리네뜨가 살며시 제 허리로 시선을 내렸다. 새까만 팔이 제 허리에 둘러져 있었다. 설마.


잠 다 깼다. 마리네뜨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조심해야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블랙캣과 달리 마리네뜨는 조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 전의 일을 떠올리자니 왠지 얼굴 보기가 거북한 것도 사실이라,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입을 우물거렸다.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떨어? 어디 아파, 공주님?”



상냥하게 묻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빙빙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요.”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블랙캣의 팔을 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벤치로 몸을 돌리려다가 다시금 바닥으로 넘어질 뻔한 마리네뜨가 공중에서 딱 멈춰섰다.



“호이차.”



마리네뜨의 가방을 양 손으로 붙잡고 블랙캣은 가볍게 마리네뜨를 일으켜 세웠다. 묘한 기시감에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떠오른 얼굴을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펠릭스가 훨씬 낫지.



“혹시 평소에 꽤 덜렁이는 타입?”



장난스럽게 묻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짜증스레 소리쳤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그냥?”

“…좀 쉬려고. 그나저나 블랙캣은요? 뭐 악당이라도 나타났어요?”



하지만 그런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악당이 없어도 변신할 수 있지 뭐~ 안 그래?”



사실은 다시 한 번 박물관 뒤편을 조사하기 위해 좀 더 안전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거지만 블랙캣은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는 얼굴이라 저도 모르게 구하긴 했는데 뭔가 좀 위태해 보이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블랙캣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벤치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는 마리네뜨를 쫓아간 블랙캣이 조금 거리를 두고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마리네뜨가 물었다.



“왜 따라와요?”

“심심해서.”



딱 잘라 말하는 블랙캣에 마리네뜨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마리네뜨가 그러든 말든 블랙캣은 즐거운지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블랙캣이 되면 평소보다 묘하게 들뜨는 것 같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랑 같이 있어도 재밌다는 생각밖에 안 드니까.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볼멘스레 중얼거렸다.



“그래서, 뭐 하고 놀아줘요? 쎄쎄쎄라도 할까요?”



툭 던지듯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질문하는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블랙캣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왜 웃는데?! 그렇게 묻는 듯한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웃음을 그치고 대답했다. 



“야, 너 생각보다 재미있다.”



언젠가의 누구와 똑같은 대답. 역시 블랙캣의 정체는 앨빈인 게 아닐까, 변신하면 머리카락이 염색되는 거 아니야? 의심스레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곧 생각을 접었다. 그럴 리가 없지.



“블랙캣은 생각보다 이상하네요.”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

“생면부지의 사람을 심심하다는 이유로 쫓아오는 것부터가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혹시 저 알아요?”

“아니? 그리고 생면부지라니, 인연이라면 아까 생겼잖아? 넘어질 뻔한 걸 구해줬는데 의외로 박정하네 공주님~”



날카로운 마리네뜨의 질문에 블랙캣은 조금 놀랐지만 곧 유연하게 되받아쳤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숙이고 블랙캣을 힐끔 돌아보았다.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블랙캣을 보면 딱히 자신에게 말을 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심심하대서 놀아달라고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마리네뜨는 그런 블랙캣의 태도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묘하게 상냥한 것 같은데. 레이디버그가 아닌 나한테도 이럴 수 있는 녀석이었나?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놀랐다. 기분이 나쁘다니, 어떤 점에서?


장난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평소보다는 차분한 블랙캣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었다.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고 많은 걸 묻지 않는다. 레이디버그인 자신한테는 늘 이것저것을 물어보거나 성가실 정도로 계속 말을 걸어대던 녀석이 갑자기 이러니 좀 당황스럽긴 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겠지만. 늘 방방 뛰고 지나치게 밝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탓일까.


얼마 전에 요란하게 장미꽃까지 가져와서 프로포즈하던 블랙캣을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생각했다. 레이디버그로 만났을 때도 딱 이 정도면 참 좋을 텐데. 아무리 좋아한다지만 좀 정도를 지켜줘야….


거기까지 떠올리고 마리네뜨는 흠칫했다.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내가 좋아서? 그래서 무엇도 계산하지 않고 그렇게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걸까. 그러고 보면 과장된 행동들이나 지나치게 텐션이 높은 듯한 모습들은 마치….



“블랙캣은, 평소에 사람들이랑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죠?”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마리네뜨 쪽이었다. 그 질문을 듣고 블랙캣은 조금 놀랐는지 마리네뜨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뭐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싱글싱글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옛날의 제가 떠올라서요.”



웃고는 있지만 분위기상 왠지 힘든 얘기를 꺼낼 것 같은 마리네뜨의 표정을 보고 블랙캣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앞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무언가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살짝 웃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말할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렇게 먼 과거는 아니지만.



“뭐, 그래서 사람들이랑 얘기를 하게 되면 너무 기뻐서 이것저것 막 말하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그래서 마구 떠들다 보면 오히려 사람들은 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구요.”


누군가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방법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어서. 어떻게든 사랑받고 싶어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재수없는 애’ 이상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싫어하기도 하고 애써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슬퍼하기도 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줄 사람은 없는 걸까? 라는 생각에 몰래 이불 속에서 울어보기도 했었다.



“그것에 상처받고 계속 고민하기를 반복하다가, 정말 저를 좋아해주는 친구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에스미를 만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걸.”



싱긋 웃으며 돌아보는 마리네뜨는 뜻밖에도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왜 저러지?



“아, 왕따 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니야, 날 뭘로 보고.”

“그럼 다행이구요.”



안심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리던 마리네뜨가 이내 기운차게 말을 꺼냈다.



“아무튼! 솔직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쪽은 말이죠, 쓸데없는 것들에는 정말 솔직하면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전혀 안 하려고 하는 타입 같단 말이에요.”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잘 웃고 매사에 익살스럽게 구는 점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무척 믿음직스러운 파트너. 매번 잘난 척을 하긴 하지만 같이 다니다 보면 그가 지키지 못할 말을 한 적은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가 자신의 마음 속을 오롯이 내보이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좋아한다고 마구 떠들지만 거기에 진심이 얼마나 담겨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건 내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레이디버그가 되고 나서 제 직감이 틀렸던 적은 거의 없었다.


블랙캣이 하하 웃으며 물었다.



“내가 그렇게 보였어?”

“그래요! 신중하게 말하는 건 좋지만, 뭐든 과하면 좋지 않아요.”

“…그런가.”

“그렇죠.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저도 아직 좀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정말로.”



블랙캣의 솔직함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변함없이 좋아한다 말하며 애정을 보내주는 그의 모습이 아주 싫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그렇게까지 사랑받는 ‘레이디버그’가 부럽기도 했다. 펠릭스를 이렇게나 좋아하게 된 건, 아마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상냥하게 대해줬던 사람이 거의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당신에게 흔들리는 건지도 몰라. 아주 조금이지만.


마리네뜨의 말을 계속 가만히 듣고 있던 블랙캣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구나.”



블랙캣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고였다. 잔잔하게 웃는 블랙캣의 얼굴을 보는 건 또 처음이라 마리네뜨는 힐끔 시선을 피했다. 왠지 창피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거 나중에 떠올리면서 막 쪽팔려하게 되는 거 아니야? 아악! 속으로 온갖 절규를 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옆에 두고서 블랙캣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말수가 많아봤자 미덕이 되지 않는다고 배워왔다. 말을 많이 하는 건 그만큼 틈을 많이 보인다는 뜻과도 같다. 그래서 계속 감추고 살았다. 사람들과 거의 떨어져서 마음을 죽이고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감정들을 모두 잘라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미숙한 자신이 틈을 보일까봐, 그 틈이 자신을 좀먹고 버려야 하는 감정들을 깨어나게 할까봐.


블랙캣이 되어서도 그랬다. 블랙캣의 모습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망설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든 멋있어 보이고 싶었으니까. 추한 모습같은 건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게 무엇이든 간에, 어떻게든 감추고 싶었다. 아니, 사실 마이 레이디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 내가 접근했던 건….


…그만두자.


더 이상 생각하기 꺼려졌던 탓에 블랙캣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말해야만 한다는 건 알지만, 적어도 아직은.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나랑은 생면부지인 사이 아니었어?”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블랙캣은 이미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본인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겠지. 잠깐 얘기한 사이인데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가 좀 신기하지만.


마리네뜨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왠지 친근감이 들어서요. 뭐 어디 가서 제 이야기 하고 다닐 건 아니잖아요.”

“오호, 신뢰를 받고 있는 건가?”

“파리의 영웅인데 그 정도 책임감은 있어야죠. 그리고 사실 그렇더라도 괜찮을 거 같아요.”

“왜?”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거든요.”



조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사람이 없는 공원 안에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블랙캣이야말로 괜찮아요? 히어로 일.”



블랙캣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말 그대로 정말 생면부지인 사이고, 지금 자신을 구해준 것도 단순히 운일지도 모른다. 미라큘러스를 지니고 다닌 후로 상당히 운이 좋아졌으니까. 이 참에 하고 싶은 말들은 다 해야겠다며 마리네뜨는 재차 물었다.



“안 힘들어요?”

“힘들지.”



망설이지도 않고 단언하며 블랙캣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시작한 거 끝을 봐야겠지. 그리고 아마 마이 레이디도 똑같이 생각할 거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신뢰를 읽은 마리네뜨의 심장이 차갑게 조여들었다. 기뻐야 하는 말인데 조금도 기쁘지 않은 나는 못된 아이인 걸까. 당신에게 나는 언제나 강한 사람인 건가 싶어서 불안하다.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당신도 강한 히어로로서의 내가 좋은 건지도 몰라. 아니야, 아닌데.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사실 지금도 너무 힘들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뭐?”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꼭 쥐면서 마리네뜨는 중얼거리듯 빠르게 내뱉었다.



“당신이 레이디버그의 뭘 아는데요?”

“….”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레이디버그도 사실은 싸우기 싫을지도 몰라요. 사람은 언제나 강하지 않으니까요. 약한 모습도 있다구요. 평범한 여자아이일 수도 있는 거야!”



좋게 말하려고 했는데, 감정이 북받쳐서인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깔끔하게 응수했다.



“알아.”



그걸 어떻게 아냐고 마리네뜨가 반박하려는 찰나 블랙캣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이 레이디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걸.”



자신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순간 말하는 것을 잊었다. 입을 다물고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를 돌아보지 않은 채 블랙캣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불안해. 오히려 너야말로, 레이디버그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모를 거야. 긍정적인 면들은 모두 가감없이 드러내지만, 부정적인 것들은 모두 다 속에 끌어안고 사는 것만 같은 사람이거든. 그건 좋은 게 아닌데.”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뭐, 그냥 걱정이 될 뿐이야. 뒤에서 몰래 울고 있는 건 아닐지, 그게 아니라면 언젠가 견디지 못하고 가슴이 터져버리거나 아예 곪아서 가라앉는 건 아닌지.”



너는 언제나 웃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무리하게 웃는 건 싫어.



“하지만 그게 레이디버그의 뜻이라면 난 존중할 거야.”



나는 너의 그런 모습까지도 좋아하니까.



“그런 자신을 드러내지 않길 원한다면 끝까지 모르는 척할 자신도 있어. 내가 아직 그만큼 의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그게 내 사랑 방식이야.


덤덤하게 말을 끝맺는 블랙캣의 모습이 꽤나 낯설었다. 이제껏 봤던 모습들 중에 제일로. 마리네뜨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레이디버그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좋아하지.”



블랙캣이 두 손을 제 정수리에 올리면서 히죽 웃었다.



“뭐, 아직 내 짝사랑이지만.”



조금은 씁쓸한 듯한 그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괜히 미안해졌지만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마음 가져봤자 좋을 게 없다. 블랙캣에게든 자신에게든. 그럼에도 뭔가 말해주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 나랑 닮았어.’


“계속 까불거리지 말고 그런 모습 좀 보여주는 건 어때요? 그 사람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훨씬 더 좋아할 거 같은데.”

“그럴까?”

“그래요. 마냥 밝기만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나도 네게 그런 식으로 비춰졌던 것 같지만.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마리네뜨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고, 블랙캣도 딱히 할 얘기가 없는지 조용해졌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마리네뜨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저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으아앗!”



허둥지둥 일어나면서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들려다가 열려 있던 가방문 사이로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한숨을 쉬더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마리네뜨가 떨어뜨린 물건들을 같이 줍기 시작했다.



“하여간 칠칠치 못하네.”

“하, 하하. 네, 뭐….”



살다살다 블랙캣한테까지 이런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한다니. 속으로 괴로워하던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이 다시금 말을 건넸다. 야.



“이거 왜 틀렸어?”

“…네?”



블랙캣이 손에 들고 있는 노란 공책이 무엇인지 알아채자마자 마리네뜨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내 수학 노트! 하지만 재빠르게 마리네뜨의 손을 피한 블랙캣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가지가지로 틀렸네. 이게 어떻게 3이야?”

“도, 돌려줘요!”

“여기서는 이 z의 방정식 값을 치환해서 원의 방정식이랑 연립해서 풀어야지.”

“…네?”

“그리고 여기는 이렇게 x를 여기가 아니라 여기에 대입해야지. 아니,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이런 풀이가 나와? 이건 이것 나름대로 창의적이네.”



어느 새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들더니 블랙캣은 간단한 공식과 함께 풀이를 시작했다. 얼떨결에 귀를 기울이던 마리네뜨는 선생님보다도 더 명료하게 설명해주는 블랙캣의 설명에 깜짝 놀랐다. 이해도 훨씬 쉬웠다. 마리네뜨는 놀라서 물었다.



“당신, 머리 좋았어요?”

“멍청하단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어.”



의외였다. 오늘따라 이 녀석의 의외인 면을 많이 본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 웃긴 표정이라고 생각하며 블랙캣은 푸핫 웃었다.



“왜 그렇게 신기한 표정으로 봐?”

“그, 그냥. 좀 신기해하면 어때서요!”

“네, 네. 그럼, 조금 가르쳐주고 갈까?”

“그…, 됐어요! 그 정도로 심각하진….”

“…너 이거도 못 풀면 이번 시험 분명 낙제야. 보충학습이 받고 싶다면 편할 대로 하시죠~”

“헐, 안 돼!”



도와줘요! 저도 모르게 블랙캣을 붙잡은 마리네뜨의 얼굴이 살짝 새빨개졌다. 블랙캣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봤자 플랙 녀석 때문에 공부도 못할 게 분명한데. 심심하다고 또 집안을 어지럽혀둘 녀석을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제 앞에서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웃는 마리네뜨를 보는 건 예상 외로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쓸데없이 제게 감정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조금은 귀여워 보이는 것도 같고.


아, 좋다. 평소에도 딱 이 정도면 좋을 텐데.


서로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둘은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정말로 열심히, 선생님보다 더 쉽게 설명해주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새삼 블랙캣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왜 블랙캣이 자신의 시험 날짜를 자세하게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래서, 이번 테러가 예고된 장소가 여기라구요?”



레이디버그가 물었다.



바로 맞췄네.”



시장이 대답했다.



“하, 하하….



웃고는 있지만 레이디버그의 얼굴은 영 떨떠름했다. 깜깜해진 밤, 흐릿한 주홍빛의 불빛 몇 가닥만이 창문들 사이로 번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 장소는 바로,



“와 진짜. 하필 여기라니.”



질렸다는 얼굴로 블랙캣은 제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파리가 자랑하는 명소 중 하나이며 관광객들은 물론 파리의 시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바로 그곳은,



“이거 진짜 미친 놈들 아니야? 루브르 박물관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 블랙캣이 온갖 과장된 몸짓으로 분노를 표현했다. 제대로 열받은 얼굴을 한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덤덤하게 건물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폭탄이 터진다고? 진짜?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시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테러 예고를 받은 순간부터 쭈욱 루브르 박물관에 경찰 인력을 늘렸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박물관은 파리의 자랑거리 중 하나니까. 물론 단순한 장난일 수도 있겠고, 우리도 제발 그러기를 바라지만 요즘 여러 가지로 안 좋은 일들도 터지고 해서.”



그 말과 함께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장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레이디버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박물관 3층 쪽을 순찰하는 걸 거들어 드리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아무래도 자네들이 경찰 수십 명보다 더 믿음직하니까!”



하하 웃으며 제 어깨를 툭툭 치는 일레인 시장에 레이디버그가 좀 싫은 듯한 표정을 지을 찰나 블랙캣이 시장의 손을 잡아챘다. 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시장에게 블랙캣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저하고도 악수해 주셨으면 해서 말이죠!”

“아하, 얼마든지요.”



시장의 손을 잡고 좀 과할 정도로 붕붕 흔드는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와준 걸까?



“레이디, 갈까?”



생각을 하던 중 불쑥 질문하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대답했다.



“응? 응!”



시장과 경찰들을 등진 채로 박물관 안으로 돌입한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물관 안은 깜깜했다. 그림들 주위에 흐릿하게 켜놓은 불빛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매직박스에서 적외선 안경을 꺼내 착용하는 레이디버그는 곧 자신과 똑같은 안경을 꺼내 쓰는 블랙캣에 깜짝 놀랐다.



“너, 그거 써?”

“? 응? 당연하지. 이번은 그냥 앞을 보는 게 아니라 폭탄을 찾는 거잖아. 적외선 안경은 물건이 있으면 불빛으로 보여주니까.”

“그, 그렇지.”



홱 고개를 돌리며 레이디버그는 다급히 적외선 안경을 착용했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블랙캣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좀 민망했다. 자신이 마리네뜨라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다행이지만 왠지 좀 찔리는 기분이었다.


빠르게 걸어 3층 회랑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폭탄은커녕 폭탄 비슷한 물건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제 20분만 있으면 예고한 시간인 자정인데도 전혀 수확이 없자 레이디버그는 점점 초조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어떻게 하지?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레이디버그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응?”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차피 폭탄을 설치해놨다면 막기는 힘들어. 이 박물관은 너무 넓고 일일이 다 살펴볼 수도 없으니까. 그냥 걷기만 해도 꼬박 일주일이 걸릴 만큼 넓은 장소에 숨긴 폭탄을 무슨 수로 찾아?”



안 그래? 그렇게 되물으며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마주보았다. 그가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귀를 긁적거렸다.



“이건 그냥 쇼라고. 정말 루브르에서 폭탄이 터지더라도, 경찰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고 말하기 위한 쇼. 안 터지면 다행인 거고 터지면 회피할 구실이 필요하니까.”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마주하며 말했다.



“우리까지 끌어들인 것도 그래서일 거라고 생각해. 시민들에게 먹히기 좋은 게 영웅이지. 그렇잖아?”

“….”

“혹시 잘해서 폭탄을 막아내면 그건 당연한 거고 못한다면 경찰은 분명 우리가 있었는데도 폭탄을 막지 못했다며 죄송하다는 기사를 낼 거야. 그럼 사람들의 관심은 우리에게 쏠릴 테고 경찰이 먹을 욕은 우리가 다 먹겠지. 알고 있잖아?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저 이용해먹기 좋은 구실일 뿐이야.”

“그렇겠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블랙캣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본론을 꺼냈다.



“…라고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겠지.”

“뭐?”



블랙캣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근처에 있던 창문 하나를 열었다. 창문 쪽에 발을 걸치며 레이디버그에게 손짓하는 블랙캣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조용히.”



그러면서 벽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블랙캣을 따라가면서 레이디버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지붕으로 올라가?”

“…사실 약속시간보다 일부러 일찍 왔거든. 아무래도 걸리는 점이 있어서. 그래서 일부러 일찍 와서 경찰들이 뭐라고 하는지 엿들었지. 가관이던데.”

“응?”

“아무리 그래도 영웅들을 그런 사지로 몰아넣어도 되냐고, 뭐 그런 식으로 떠들더라?”

“뭐?”



레이디버그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블랙캣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지붕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레이디. 우리가 돌아다녔던 복도 좀 이상하지 않았어? 있어야 하는 것들이 없었잖아.”

“뭐가?”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레이디버그를 살짝 뒤돌아보며 블랙캣이 씨익 웃었다.



“그림 말이야. 그 복도에 그림이 하나도 없었잖아.”

“…!! 아, 그러고 보니…!!”



생각해보니 복도에 걸려 있던 액자들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보수공사를 한다고 팻말이 걸려 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깜짝 놀라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웃으며 말했다.



“마이 레이디는 이런 점에서 순진한 구석이 있다니까? 뭐 그게 매력이지만.”

“…놀리는 거야?”

“설마, 칭찬이야.”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난감해진 블랙캣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게다가, 경찰들의 행동도 좀 수상쩍었지. 그 층의 복도를 모조리 우리한테 맡겼어. 위쪽으로 올라오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다고. 이게 뭘 의미하는 거 같아?”

“…일부러 우리를 여기로 보냈다는 건가?”

“아마도.”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블랙캣은 짜증스레 말했다.



“이건 함정이야.”

“함정?”

“그래,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 경찰이 왜 저쪽에 협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이 테러 예고장을 보낸 놈들의 진짜 목적은 우리일걸.”



열받은 얼굴로 블랙캣이 다시금 질문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경찰이 너무 거리낌없이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했지 않았어? 악당을 상대할 때는 물러나달라고 했었을 당시에 그렇게 자존심 상해하던 인간들이 말이야.”

“확실히 좀 의아하긴 했지.”

“그래, 그리고 이 드넓은 박물관을 봐. 소리소문없이 사람 한둘쯤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 같은데.”



으스스한 소리를 지껄이는 블랙캣의 말을 듣던 레이디버그가 살짝 움찔거렸다. 블랙캣이 다시금 씹어뱉듯이 말을 꺼냈다.



“협력하지 않으면 박물관을 제대로 날려버리겠다는 협박이라도 했나 보더군. 어떻게 협박했길래 경찰이 이런 수까지 쓰나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따져보면 경찰한테는 별 거 아닌 거래잖아. 영웅이라고 불리지만 그래봤자 애송이 둘과 수백 년간 파리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박물관의 안위, 뭐가 더 중요하겠어? 대답은 안 봐도 뻔하지.”



어느 새 회랑 복도를 감싸고 있는 지붕을 지나, 다른 곳보다 높게 솟은 지붕 쪽으로 다가간 블랙캣은 재빨리 지붕에 납작 엎드리더니 유리 피라미드가 있는 중앙의 공터 쪽을 내다보았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는 블랙캣의 옆에 붙어 빼꼼 고개를 내밀고 바깥쪽을 바라보던 레이디버그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전히 대기하고 있는 수십 대의 경찰차들 주변으로 경찰들이 모여서 뭐라뭐라 떠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부분 박물관에서 철수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듣자듣자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무작정 응하지 않았다간 분명 무슨 짓을 하려고 들 것 같아서 그냥 받아들인 거야. 경찰들 앞에서 대놓고 말할 수는 없잖아?”



블랙캣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괴물처럼 강하니까 폭탄을 맞든 뭘 맞든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그럴 수가….”



이번에는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살짝 창백해진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지 무심하게 대꾸했다.



“일단 예정 시각이 지날 때까지만 여기에 좀 숨어 있어야겠어.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잖아.”



지금 빠져나가기엔 경찰들이 저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좀 어려울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공권력이랑 대립하게 되는 구도는 사절이라며 블랙캣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경찰들이 부탁한 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니까 안전할 거야.”



걱정하지 말라는 듯 블랙캣은 씨익 웃었다.




한편, 루브르 근처에 있는 지하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으로 마치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처럼 지긋이 그걸 들여다보던 남자는 곧 지붕 쪽으로 올라가서 뭐라뭐라 대화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을 발견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는 중얼거렸다.



“목표는 저기 있나.”



그 시각, 레이디버그는 싸늘한 감각이 제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뭔가 터질 것처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경찰이 말한 폭탄 예고 시간은 자정이고 아직 시간이 몇 분쯤은 남았는데, 왜 벌써? 오감이 예민해져서인지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가 제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곧 직감이 시키는 대로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는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남자가 서 있는 자리 옆에 있던 손전등이 남자가 서 있는 벽을 환하게 비추었는데, 놀라운 점은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것 같았던 남자의 손에 물건의 그림자가 추가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펌프처럼 생긴 그것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남자는 한 번 힘을 주더니,


왜 그래? 그렇게 묻는 블랙캣의 질문에도 레이디버그는 대답 없이 그를 잡아끌더니 지붕을 세게 딛고 몸을 날렸다.


손잡이를 밑으로 세게 눌렀다.


쾅, 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건물의 지붕에서 화려한 주홍빛의 불꽃이 솟아올랐다. 지붕이 폭발하는 소리와 그 규모에 피라미드 앞에 있던 경찰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폭발의 규모가 커서인지 꽤나 멀리까지 반짝이는 주홍빛에 루브르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몇몇 사람들도 있었다. 그건 에펠탑 근처를 날아다니던 미스터 피죤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깜짝 놀란 그가 손을 이마에 대고 폭발이 일어난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헉! 저건 뭐다냐!”



폭발의 여파를 정통으로 맞았지만 두 히어로는 다행히도 무사했다. 으아악! 소리와 함께 추락하는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폭탄이 터지는 반동을 이용해 한 바퀴를 돌며 부드럽게 잔디밭에 착지했다. 머리부터 떨어져 끙끙거리는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어떤 불빛 하나를 발견했다.



“블랙캣, 저 쪽이야!”

“엉?”



블랙캣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레이디버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분명히 저 쪽이다.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걸 잡아야 한다고.


지하도 안에 있던 남자는 멀리서 터지는 폭탄을 보고도 별 감흥없다는 얼굴로 옆에 놓여 있던 손전등을 껐다. 언제나처럼 유유히 뒤로 돌아 사라지려던 남자를 붙잡은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거기 서!”






제 직감이 말하는 장소를 향해 순식간에 달려간 레이디버그의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잡혔다. 돌아서서 움직이려던 남자에게 레이디버그가 크게 소리쳤다.



“거기 서!”



그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의 기색이 떠올랐다. 설마 싶으면서도 천천히 레이디버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는 남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로 놀랐는지 살짝 눈을 크게 치켜뜨는 남자에게 레이디버그가 소리쳤다.



“당신, 누구야! 왜 이런 짓을 하지?”



그런 레이디버그의 뒤를 따라 도착한 블랙캣도 곧 남자를 발견했다. 초록빛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들어찼다.


‘상의는 검은색, 하의는 하얀색, 모자를 쓴 창백한 얼굴의 남자!’


뭐라 말을 못하고 마냥 남자를 바라보기만 하는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가방에서 요요를 꺼내 빙빙 돌리더니 남자에게로 던졌다. 남자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챙!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튕겨져 나가는 요요에 레이디버그는 물론이고 블랙캣도 깜짝 놀랐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남자는 손에 무언가를 쥐는 시늉을 하더니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에게로 팔을 휘둘렀다. 섬광탄이 터지는 것처럼 빛이 번쩍했다.


그리고 섬광탄이 터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레이디버그가 소리쳤다.



“어디 갔지?!”





타닥타닥,


발소리 하나가 어두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어둠 속을 한참을 달리던 남자의 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살짝 흐릿하게 비쳤다. 방금 전 레이디버그와 블랙캣과 대치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들을 문제없이 따돌리기는 했지만 사실 남자는 지금도 꽤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아챈 건가. 절대 눈치챌 수 없을 만한 거리였는데.


후우, 한숨과 함께 남자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간 남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한 40대 초반의 남자는 한숨을 쉬며 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몇 번 신호음이 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들켰습니다.”



망설임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흘러갔다.



“네, 그래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뭐라 하는 말들에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두려워하면 이쪽 일을 할 수 없다. 처음에는 애써 표정을 감추는 정도였지만 3개월이나 지나니 나름 익숙해졌다.


들킨 건 문제이긴 했으니 뭐라고 해도 일단 듣고 보자는 생각에 귀를 기울였지만, 다음에 들려온 대답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네, 곧 돌아온다구요? 그 녀석이?”



상대가 몇 마디를 더 말하자, 남자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8편으로




재판 수량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링크는 이쪽 >> http://naver.me/x24EEI80

Posted by I.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