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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5






Episode 6.

수상한 만남





“우와아아-!!”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지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반짝거리는 샹들리에와 깨끗하고 화사한 테이블, 예쁜 장식들까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넓은 실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빈 그릇에 음식을 채워넣는 요리사들과 칵테일 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돌아다니는 웨이터들도 있었다.


너무나도 화려한 주변에 마리네뜨는 그저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이런 곳을 처음 와봐서 그래, 응.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마리네뜨는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찬찬히 떠올렸다.







때는 바야흐로 며칠 전 학교에서였다.


‘초대권?’

‘그래. 우리 엄마가 받아오신 거야.’


에스미가 내미는 하얀 봉투와, 그 안에 담긴 카드를 보고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여기 샹그릴-라 호텔이잖아! 엄청 비싼데!’

‘맞아. 우리 엄마가 거기서 제과 쪽 총주방장을 맡게 되셨어서.’


에스미의 어머니는 파리에서도 유명한 파티쉐다. TV에도 몇 번 나왔을 정도로 유명한지라 마리네뜨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에스미네 집에 놀러갈 때마다 바빠서 뵙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나한테 한 번쯤 가 보라고 줬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날 일정이 있어.’

‘근데 그런 걸 나한테 줘도 돼?’

‘뭐 어때? 나야 엄마가 나중에 또 줄 텐데. 그리고 거기에….’

‘거기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스미는 정말 무관심한 어조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니가 좋아하는 그 녀석도 올지 몰라.’

‘에? 진짜?!’

‘어. 아무래도 파리 유명인사들은 모두 모인다고 들었거든. 그 녀석 정도 되는 집안이면 진작에 초대장이 날아갔겠지.’


그러니 잘 다녀와.


그 한 마디와 함께 초대권을 앞으로 쑥 내미는 에스미의 손이 왜 그렇게 고와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 손을 덥석 잡으며 넌 역시 내 친구라고 눈을 반짝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부담스러웠는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저번에 싸웠던 일 이후로 에스미가 과하게 상냥해진 느낌이 든다. 티는 잘 안 내지만 이런 것까지 가져다주는 걸 보니 그 때 일에 대해 많이 미안해하고 있는 걸까. 조금 나쁜 생각이지만, 그런 에스미의 친절이 싫지 않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헤실헤실 웃었다.


여기에 가면 펠릭스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오긴 왔는데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해서 그런지 절로 기가 죽었다. 나 오늘 이상하지는 않지? 마리네뜨는 가만히 제가 입고 있는 붉은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특별히 아끼던 붉은 색 원피스는 색깔이 색깔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이 연회장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일단 뭐라도 먹어야지.


기분 좋게 웃으며 마리네뜨는 테이블 위에 예쁘게 세팅된 음식 접시들로 다가가 음식 몇 가지를 집어들어 제 접시에 담았다. 수북히 음식을 담은 뒤 싱글벙글 웃으며 닭강정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마리네뜨의 시야에 누군가가 보였다.


몸매가 드러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긴 금발 머리를 늘어뜨린 예쁜 소녀였다. 귓가에는 하얀 깃털로 장식된 머리장식을 꽂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의 색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차림새는 성숙해 보였지만 얼굴을 보면 자신 또래인 것 같았다.


음식을 먹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하호호 웃고 있는 소녀는 손짓 하나하나에서부터 우아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마 분명 좋은 집 아이겠지.


저런 사람도 있구나.


제 또래임에도 왠지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가진 소녀를 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상념에 사로잡혔다. 펠릭스도 저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마리네뜨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

그러고 보니 닮았네.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누군가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몇 주 전에 만났던 악당, 러스트(lustre). 딱 한 번 만났음에도 이렇게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이유는 굉장히 강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하얀색의 복장만큼이나 정적이고 고요하며, 그만큼 강했던 사람. 나중에 만났을 때는 또 다시 위험해질 지도 몰랐다. 그 때와 같은 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테니까.



“헉. 왜 심각해지는 거야, 여기까지 와서!”



안 돼, 안 돼!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마리네뜨는 후다닥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가져온 크림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 안에 쏙 집어넣자 부드러운 크림 소스의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맛~있어!!”


역시 비싼 음식이라 맛도 다르구나. 이것저것 먹어보니 확실히 대체로 다 맛있었다. 특히 제일 맛있다고 생각되는 건 메인 디저트 중 하나인 딸기 무스였다. 상큼하고 별로 달지 않은데다 뒷맛이 몹시 깔끔한 게 단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음식을 에스미는 매일 먹고 사는구나. 집이 빵집을 하긴 하지만 마리네뜨의 집은 이런 전문적인 디저트보다는 실생활에서 먹기 편한 제과류를 다루는 쪽이었다. 그래도 언제 한 번 이런 걸 만들어 봐도 좋겠다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배실 웃었다.


티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곳에 오는 건 너무 위험했다. 똑같이 사람이 많아도 걷느라 바빠 자신을 신경쓰지 않는 등하교길과는 달리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 보통인 파티장은 경우가 달라도 매우 달랐다. 이쪽을 보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걸 신경쓰게 되다보면 자연스레 티키와 함께 오더라도 챙겨주기 어렵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티키에게는 무척 불편할 것 같아 그냥 집에 두고 왔지만, 늘 함께하던 상대가 오늘은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허전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펠릭스는 어디 있지? 안 왔나?


다시 그릇에 음식을 수북히 담고 천천히 파티장을 돌아다니던 중 저 멀리에 익숙한 금발 머리가 보였다. 반가움에 이름을 부르려다가 마리네뜨는 살짝 웃고 있는 펠릭스의 얼굴에 순간 멈칫했다. 몇 명의 어른들 사이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펠릭스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고, 그래서인지 평소와는 무척 달라 보였다. 어딘지 꾸민 듯하지만 그럼에도 무척 부드러운 미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펠릭스와 더 잘 어울렸다.


뭐랄까, 어른이라는 느낌?


혹시 다가가면 방해가 될까봐 마리네뜨는 살짝 거리를 두고 먼 발치에서 펠릭스를 훔쳐보았다. 음식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차, 이야기가 끝났는지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펠릭스를 급하게 뒤쫓아갔다.



“펠릭스!”



그 한 마디에 펠릭스가 걸음을 멈췄다. 설마, 싶으면서도 돌아보자마자 보이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펠릭스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평소보다 너무 솔직한 반응에 마리네뜨가 더 놀랄 정도였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순간 펠릭스의 뒤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펠릭스.”



한 손에 칵테일을 들고 멋스럽게 차려입은 백발의 신사가 펠릭스의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저 목소리를 듣자마자 펠릭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보다도 훨씬 냉랭한 표정을 짓고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만 같이 차가운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가슴이 철렁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러지?



“어라, 손님이 있었니.”



백발의 신사가 펠릭스의 어깨에 턱하니 손을 얹었다. 굉장히 차분하고 울림이 있어 듣기 좋은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순간 넋을 잃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인상은 다소 엄해 보이지만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얼굴은 왠지 모를 친근감을 풍겼다.


관록이 느껴지는 백색 눈동자가 마리네뜨를 찬찬히 주시했다.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하고 있던 마리네뜨는 다음 순간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는 남자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파티에는 처음 오나 보군요, 아가씨.”

“네, 네!”



허둥지둥 대답하자 그런 마리네뜨가 귀엽다는 듯이 살짝 웃음을 터트리던 남자는 펠릭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펠릭스, 아는 사람이냐?”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봐서는 보통 사이가 아닌 듯했다. 그러고 보니 펠릭스에게 숙부가 있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유명한 정치가라던데 그게 이 사람인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치만 보고 있던 마리네뜨는 싸늘하게 식은 펠릭스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펠릭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니요.”



무감정한 목소리가 폐부를 찔러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너를 아는 것 같은데.”

“제가 절 아는 사람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숙부님.”

“그것도 그렇다만. 아가씨, 어떻게 펠릭스를 알고 있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동요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펠릭스의 얼굴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듯한 시선에 몸이 차갑게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엄청 지겹게 쫓아다녀도 그냥 무심하기만 했엇지,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 적은 없었는데.


비참해지는 기분에 마리네뜨는 제 옷자락을 꽉 쥐었다.



“페, 펠릭스랑 같은 학교 친구예요.”



활짝 웃으려고 노력했지만 지금 자신이 제대로 웃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먹혀들어갔는지 남자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

“같은 학교… 애가 보이길래, 반가워서 인사해봤어요!”

“오호, 용케 이 녀석을 알아봤군요.”

“공부를 워낙 잘 하니까….”



겉으로는 밝게 웃으면서도 마리네뜨는 덜덜 떨리는 손을 재빨리 뒤로 돌리고 깍지를 꼈다. 접시를 내려놓고 오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다 티났을 텐데. 차마 펠릭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마리네뜨는 그저 눈 앞의 신사에게로 시선을 맞추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자신을 배려해주는 남자의 태도에 마리네뜨는 점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이 욱신거리는 건 여전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은 많이 닮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펠릭스와는 성격이 다른지 신기할 정도였다. 남자에게서 왠지 모를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방금 전 받은 충격 때문인지 마리네뜨는 왜 그런 기시감이 느껴지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 오래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다. 가볍게 인사치레로 몇 마디 주고받다가 다른 곳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남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하더니 가봐야겠다고, 편히 즐기다 가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배려해준다지만 그래도 저렇게 어른인 사람 앞에서는 아무래도 긴장하게 된다. 새삼 자신의 소심함을 깨달으며 마리네뜨는 다시금 파티장 안을 유유자적 돌아다녔다. 지루한 느낌에 살짝 화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혼자 오니까 재미없네. 펠릭스는 혼자 왔을까?


어느 순간 사라진 펠릭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충격받긴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펠릭스의 입장도 다소 납득이 갔다. 아는 사이라고 했고 학교 친구라고 했으면 분명히 학교에서 뭐 하고 지내냐느니 시시콜콜한 질문들이 돌아왔을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얘기하다가 말실수를 안할 자신은 없었다. 분명 당황해서 이것저것 떠들다가 펠릭스가 곤란해 할 만한 화제를 꺼내들지도 몰랐다. 차라리 말하기 전에 차단하는 게 낫지.


물론 이것만으로는 왜 그가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거짓말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로는 좀 부족했다. 그렇게 상냥한 숙부님 앞에서 묘하게 더 말이 없는 것도 그렇고. 쑥스러움을 타나? 윽, 정말 안 어울리는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벽 쪽으로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옆에 나 있던 문이 열리더니 팔 하나가 불쑥 나타나 마리네뜨의 입을 막고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끌려들어간 마리네뜨의 뒤에서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자신을 잡아당긴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펠릭스?”

“쉿.”



조용히 해. 차분하지만 박력있는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펠릭스의 표정이 전에 없이 초조해 보이는 것에 마리네뜨는 살짝 놀랐다. 딱히 이야기를 질질 끌 생각은 없는지 펠릭스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잘 들어.”

“으, 응?”



딱 잘라 말하는 목소리와 달리 말의 내용은 상당히 뜬금없었다.



“절대 숙부한테 접근하지 마. 인사도 하지 마.”

“…어?”

“니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스스로 위험 속으로 걸어들어가지 말라고, 이 멍청한 여자야!”

“뭐?”



펠릭스가 이렇게까지 제 앞에서 말을 많이 했던 적이 있었던가? 멍하니 제게 퍼부어지는 폭언을 듣고 있던 마리네뜨는 다음 순간 펠릭스가 던진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정말 더럽게 말 안 듣는 거 알지만, 이번 얘기는 제발 머릿속에 새기고 가슴에 새겨! 멍청한 거 티내지 말고.”

“머, 멍청이?”

“그럼 멍청하지 아니야? 대체 무슨 배짱으로…!!”



열받은 얼굴로 뭐라 더 말하려다가 펠릭스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 엮이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기에 당황했었지만 어떻게 잘 넘기기는 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너도 위험한 일은 싫겠지.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그만 나한테서 손 떼!”



여기까지가 선이야. 그러니 더 이상 넘어오지 마. 펠릭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세계는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야. 적어도, 너 같은 평범한 여자애가 감당할 만한 것들은 아니라고.”



뭐라 더 설명하려다가 펠릭스는 입을 다물고 한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쳐다보며 펠릭스는 재차 강조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그만 다가오라고. 선을 넘지 마.”

“….”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너까지 챙겨줄 여유도 없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어.”



이렇게 감정적이고, 또 인간적으로 보이는 펠릭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늘 침착하고 정적이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감정이 가득 드러나는 얼굴로 빠르게 다그치는 펠릭스의 모습은 마리네뜨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머리를 휘몰아치는 충격에 어안이 벙벙한 마리네뜨의 표정을 뭘로 해석했는지 펠릭스의 얼굴이 쓰게 일그러졌다.



“어차피 나는….”



숙부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니까.


차마 거기까지 말하지는 못하고 펠릭스는 입을 꾹 다물고 돌아섰다. 그런 펠릭스의 태도에 말하기 곤란한 내용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마리네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싫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은 펠릭스의 발걸음을 단호한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드물게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펠릭스의 등 뒤에서 마리네뜨가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러고 싶지 않아. 난 앞으로도 계속계속 너한테 참견할 거고 계속 쫓아갈 거야!”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마리네뜨에 펠릭스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돌아섰다. 침착한 얼굴로 돌아온 펠릭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말라는 듯이 반문했다.



“헛소리 좀 하지 마. 굳이 위험한 길로 올 필요가 어디 있어?”

“널 좋아하니까!”



펠릭스의 눈가가 일순 움찔거렸다. 마리네뜨가 씩씩거리며 마저 말을 꺼냈다.



“대체 네가 날 언제 챙겨줬었는데? 챙겨줄 필요 없어. 내가 그런 걸 바랬던 적이 있었어? 맨날 나 혼자 좋아하고 쫓아다니고, …셀프로 실연당한 기분 들고 그랬지.”

“….”

“왜 갑자기 나를 걱정하는 척 하는데?”

“그건….”



할 말이 없는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펠릭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마리네뜨가 살짝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주먹을 꼭 쥐면서 애써 발랄하게 말하는 마리네뜨의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난 말이야. 아무런 노력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싫어. 그런 건 질렸으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절망하고 힘들어하고 쉽게 포기하고,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때 왜 그렇게 쉽게 포기했을까, 그렇게 후회하게 되는 게 싫어서.



“내가 좋다는데, 대체 왜 내 마음을 멋대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건데? 난 진심이야. 이렇게 진심이던 적이 없었다구.”

“….”

“확실히 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떨리려는 말끝을 애써 가다듬으며 마리네뜨는 펠릭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시작조차 하지 않는 건 더 문제라고 생각해.”



청회색 눈동자가 그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덤덤한 시선이 오히려 감정을 더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마리네뜨는 한 마디를 덧붙이며 살짝 웃었다.



“혹시 모르잖아. 의외로 잘 해내갈지도.”



레이디버그 일도 그렇다. 처음에는 내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괜히 민폐만 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다가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정말 나에게 히어로 같은 건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생각보다 나름 제대로 해나가고 있는 걸 보면 너무 많이 걱정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펠릭스가 나를 끝내 돌아봐주지 않는다면 무척 슬프겠지만,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벌써부터 물러서고 싶지는 않아.


자신감을 되찾은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하는 마리네뜨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펠릭스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참으로 대책없는 대답이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조건 비관적으로만 봐서는 삶을 꿈꿀 수 없는 걸.”



그 대답에 펠릭스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 그런 펠릭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네가 지금, 날 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살짝 떨려나오는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허세를 부리고는 있지만 그래, 솔직히 말해 좀 무서웠다. 고개를 숙인 채 마리네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펠릭스가 말한 대로 난 정말 바보 멍청이인지도.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 무섭고 지금도 자꾸 손이 떨리는데, 그래도 포기하는 게 더 싫은 걸 보면.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잡고 마리네뜨는 애써 밝게 웃으며 고개를 들고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좋아하게 해줘. 그 정도는 내버려둬 줄 수 있잖아.”



살짝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시선을 펠릭스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눈싸움하듯 서로를 응시하다가 먼저 물러난 쪽은 펠릭스였다.


더는 말하지 않고 펠릭스는 몸을 돌렸다. 미련 없이 돌아서서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다가, 펠릭스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가만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야, 너.”

“…응?”

“그럼 최소한 숙부님 앞에서만이라도 날 모르는 척해.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마.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나는 너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으니까.”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무뚝뚝하게 말을 건네는 펠릭스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살짝 놀랐다가, 곧 환하게 웃었다.



“응! 그럴게.”



한 손을 이마에 대고 경례 자세를 취하는 마리네뜨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펠릭스가 휙 뒤돌아섰다.



“이상한 녀석.”



넌 좀 나중에 나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다시 파티장으로 나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응시하던 마리네뜨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살짝 가셨다. 사람 좋게 웃고 있던 단정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방금 전 만났던 펠릭스의 숙부, 제레미를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고민에 빠졌다.



“뭘까?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너를 그렇게까지 말하게 만드는 거야?








조용히 문을 닫고 연회장으로 나온 뒤 펠릭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태연하게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려는 찰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왜 산 넘어 산이냐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친해 보이더라?”

“클로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소녀가 펠릭스에게로 걸어왔다. 살며시 미소짓는 얼굴은 여러 남자들을 홀릴 법한 미인이었지만, 펠릭스는 전혀 감흥 없다는 표정으로 제 소꿉친구의 모습을 무심히 훑어보았다.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에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러스트.


‘아니야.’


펠릭스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습만 생각해서는 충분히 의심을 할 법했지만 클로에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유명한 사업가이자 지금은 파리 시장인 마크 일레인의 딸로 태어나 외모, 두뇌, 집안까지,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녀석이 굳이 그런 모험을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일단 경계해서 나쁠 건 없겠지.



“너, 대체 그 여자애랑 무슨 관계야?”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펠릭스의 상념을 깨운 것은 싱글싱글 웃는 클로에의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펠릭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사이라고 할 것도 없어.”

“아무 사이도 아닌데, 천하의 펠릭스 아그레스트가 그렇게까지 신경쓴다고?”

“단어가 거슬리는군. 아니라고 했을 텐데.”

“하긴 그런가. 생각해보면 넌 은근히 사람한테 약한 타입이니까.”



혼자 묻고 납득하는 클로에를 보는 펠릭스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그가 나직히, 하지만 냉랭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만해.”

“…알았어.”



더 이상 말하면 화낼 거라는 걸 직감했는지 순순히 입을 다무는 클로에에게 펠릭스는 재차 못을 박았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뒀을 텐데. 지나친 참견은 불쾌하다고.”



냉정하게 선을 긋는 펠릭스의 목소리에 클로에는 일순 움찔했지만, 곧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 왜 그래? 당연히 알고 있지.”

“알면 됐고. 이야기는 끝난 거지?”

“어, 어…?”

“끝났으면 이만 가보겠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순 없으니까.”



망설임없이 돌아서 파티장 쪽으로 나가려는 펠릭스의 등을 보자마자 클로에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펠릭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살짝 돌아보는 펠릭스에게 클로에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지 마.”



지독히도 독점욕이 묻어나는 한 마디에 펠릭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급속도로 피곤해지는 기분에 펠릭스는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매번 질리도록 듣는 이야기. 지겹다.



“그런다고 너한테 가지는 않아.”



딱 잘라 내뱉는 펠릭스에게 클로에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렇게 말해도, 결국 넌 나를 택하게 될 거야.”



조용하지만 악에 받친 듯한 클로에의 목소리를 들은 펠릭스의 얼굴에 낮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정말로 질렸다는 듯이 공허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클로에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아주 살짝 떠오른 비릿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오싹해지게 만들 정도로 싸늘했다. 쉿쉿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클로에의 귓가에 서늘하게 꽂혔다.



“그거 참 기대되는군.”







“의원님.”



조용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제레미 유피테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비서의 무표정한 얼굴에 제레미는 웃으며 말했다.



“뭔가.”

“잠시.”



가까이 다가온 엘렌이 몇 마디를 소곤거리자 제레미의 눈이 일순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추진하도록 해주게.”

“네,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엘렌의 뒷모습에 제레미와 함께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



“자네 비서는 언제 봐도 미인이구만.”

“하하, 감사합니다.”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는 제레미에게 그 옆에 있던 사람도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웃을 줄 알면 좋겠건만, 저렇게 딱딱해서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잖은가.”

“그러게나 말일세. 무척 우수하다고는 들었네만, 거 여자가 나긋나긋한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하.”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던 제레미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쭉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제 곧 마크 시장님의 축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단상 위를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회장 안을 가로질렀다. 참석한 손님들이 모두 단상 위를 돌려다보자 금발 머리의 중년 남자가 단상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이 호텔의 주인이자 파리의 시장직을 맡고 있는 마크 일레인 시장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에, 친애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나와주셔서 감사합….]


“멈춰!”



거친 목소리가 시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허둥대기 시작하는 손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장이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대는 순간 불이 켜졌다.



“헉.”



검은 두건을 쓴 남자 다섯이 연회장의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각기 양 손에 들고 있던 기관총을 사람들에게 겨누자 다들 기겁한 얼굴로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어린애들 몇이 와앙 울기 시작하자 쩔쩔매며 달래는 부모들에게 선두에 선 남자가 소리질렀다.



“입 닥쳐!”

“이보시오, 이게 무슨….”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시장에게 남자는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 버튼 하나라도 눌렀다가는….”

“꺄악!”



그 말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와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꽉 잡아챘다. 강렬한 아픔에 클로에가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아니, 지금 무슨 짓이에요, 이…?!”



남자가 겨눈 딱딱한 총구가 클로에의 목에 닿았다. 경악해서는 입만 벙긋거리는 클로에나 그런 딸의 모습에 사색이 된 일레인 시장을 향해 남자는 짜증스레 소리쳤다.



“네 딸의 목숨을 대신 받아가겠다.”



소란스럽게 구는 사람들을 위협하듯 복면을 쓴 남자 중 한 명이 천장을 향해 총을 쐈다. 두두두두 울리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구멍이 뚫리고,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탄창 소리가 그렇게 소름끼칠 수가 없었다. 다들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피는 와중에 시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목적이오?”



사업가답게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레인 시장을 지긋이 바라보던 남자가 짧게 조소를 터트렸다. 자기가 먼저 시작했으면서 우리들 악당 취급하는 이런 언밸런스함이라니.



“뭐, 별 거 아니야. 이번에 당신이 추진하는 재개발 사업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만 쓰면 되니까.”



씹어뱉듯이 내뱉는 남자의 목소리에 주변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업? 무슨 사업? 아, 이번에 8구에서 추진되는 그거? 근데 그건 이미 승인까지 끝난 사항일 텐데? 그거 엎어보자고 지금 이러는 거야?


그런 주변의 소란과 상관없이 시장은 경악하는 얼굴로 말했다.



“웃기지 마시오! 이미 다 승인한 사업을 무슨 수로 뒤집는단 말입니까. 심지어 그건 시에서 주관하는 건데!”

“닥쳐!”



그 한 마디와 함께 남자는 시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린 그 재개발 사업 때문에 집에서 내쫓겨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알고 있소. 그래서 그 지역에 살던 세입자들에게는 제대로 보상을 했잖소. 왜 갑자기 이러는 거요?”

“본인 보기에 괜찮으면 다 제대로 된 보상인가 보지?”



복면 아래로 들려오는 비웃음에 시장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있었다. 곧 김도 나겠다 싶을 정도로.



“어, 어떡하지?”



한편 마리네뜨는 강도단과 상당히 떨어진 벽측에 서서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레이디버그로 변신해 해치우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티키가 곁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걸까?


시장이 쉽게 넘어오지 않자, 남자들은 일단 시장의 딸을 인질로 잡고 있을 생각인지 클로에를 데리고 파티장에서 철수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보냈다간 클로에가 멀쩡히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시장의 경호원들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인질이 더 위험해질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엇다.


기다려 달라고 다급히 소리치는 시장과 강도들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클로에의 모습을 보면서 마리네뜨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도 없다니.


속이 쓰렸다. 난 대체 얼마나 바보인 걸까. 뭐가 파리의 히어로야? 미라큘러스가 없는 나는 이렇게나 무력할 뿐인데. 들떠있었던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 같다. 티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잖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데.



‘어린애는 냅두고 날 인질로 잡지 그래.’



생각해보면 당시 펠릭스의 행동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물론 놀라울 만한 격투술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총신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다니. 난 이렇게 멀리 있어도 너무 무서운데.


생각해보면 악당들은 하나같이 패턴이 다 비슷한가 싶었다. 협박을 위해 인질을 붙잡는 것도 그렇고 그 당시 은행 강도들과 정말이지 똑같은 패턴에 절로 한숨만이 나왔다. 다른 점이라면 여기에는 레이디버그라는 영웅 대신 평범하고 무력한 여자아이밖에 없다는 것 정도일까.


그렇게 한창 자괴감에 빠져 있던 찰나 마리네뜨는 문득 제 눈앞에 있는 하얀 테이블보를 바라보았다. 이 파티장의 테이블들은 모두 바닥까지 오는 하얀 천으로 덮여 있어 테이블 아래쪽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테이블이 사방으로 많이 퍼져 있었다. 강도들 주변에도.


혹시, 저걸 이용하면….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마리네뜨는 곧 결심을 굳혔는지 테이블 쪽으로 슬슬 움직였다.


반면, 강도단과 거의 대치하는 자리에 서 있던 펠릭스는 지금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 강도들이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떨쳐내지 못한 위화감.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이게 무슨 생각인가 싶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저들은 대체 어떻게 이 파티장까지 올라왔지?


샹그릴-라 호텔은 파리에서도 알아주는 5성급 호텔이다. 에펠탑과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이 호텔은 전망도 전망이지만 특유의 엄격한 방비 시스템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총을 가지고 있어봤자 호텔의 모든 출입구는 철문 아니면 방탄유리였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제대로 출입을 허가받은 자가 아니라면 분명 한 번쯤은 경비 시스템이 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리셉션장까지 올라오기까지 소동은커녕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곰곰이 고민하던 펠릭스의 시야에 클로에가 남자가 세게 휘두른 총의 개다리판에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하는 장면이 클로즈업되어 찍혔다. 기절한 클로에가 남자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며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먼저 행동한 사람이 있었다.



“기다리시오.”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는 제레미를 보며 선두에 있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곧바로 겨누어지는 총구에 몇 사람이 안타까움의 비명을 질렀지만, 제레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이, 뭐 하는 짓이지?”

“상관없는 아이를 끌어들이다니, 너무 과한 행동 같소만.”

“죽고 싶은 건가?”

“하하하. 그쪽이야말로 배짱이 과한 것 같습니다.”

“어이, 이 영감탱이가 무슨….”

“그 총, 가짜 아닙니까?”



그 한 마디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고, 뒤에 있던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웃기지마, 무슨…!! 직접 두 눈으로 봤을 텐데? 천장이 아니라 당신 얼굴을 뚫어줘야 믿겠어?”

“그럼 그 총만 진짜겠지요.”



덤덤하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는 제레미는 도저히 목숨을 위협받은 사람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까지 느껴지는 제레미에 남자는 살짝 두려움까지 느꼈다.



“웃기지 마, 이런 건방진…!!”



바로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제레미를 노리기 위해 앞으로 한 걸음 나선 순간 남자의 몸이 비틀거렸다. 미끌거리는 것을 밟은 것처럼 발을 헛디딘 남자가 바닥으로 쾅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넘어졌다. 강도들도 놀랐지만 뒤에 서 있던 사람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쏴 보세요. 총은 한 자루가 아니지 않습니까?”



씨익 웃으며 계속 재촉하는 제레미에 강도들은 처음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소동 와중에 테이블 밑을 바쁘게 지나다니는 누군가가 있었다. 테이블에서 테이블로 조심스럽게 옮겨가며 강도들에게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테이블 아래쪽으로 옮겨간 마리네뜨는 천을 걷고 살짝 바깥을 내다보았다. 조금 두려운지 살짝 손을 떨다가, 테이블을 조금조금씩 강도들이 있는 쪽으로 밀어가기 시작했다.


서로 눈치만 보다가, 강도들 중 한 명이 재빨리 쓰러진 남자에게로 달려가 총을 집어들려고 했다.



“악!”



발에 뭔가 걸린 것처럼 바닥에 고개를 처박는 그를 보며 옆에 있던 동료가 소곤거렸다.



“야, 너 왜 그래?!”

“몰라, 갑자기 발이 미끄러졌다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클로에에 힘껏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한 마리네뜨는 생각하고 말고도 없이 있는 힘껏 클로에의 드레스를 잡고 제가 들어가 있는 테이블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빨리 총이나 집어들어!”



결국 다른 한 사람이 총을 집어들고 근처에 내려두었던 클로에를 끌어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어라?”



클로에가 사라진 것에 깜짝 놀라 주위를 휙휙 돌아보던 강도에게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퍽, 소리와 함께 커다란 접시를 등에 맞고 쓰러지는 강도를 마지막으로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강도들을 모두 붙잡았다. 그 광경을 뒤에서 마냥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제레미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돌아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아본 제레미가 웃으며 속삭였다.



“경찰에 연락했나, 엘렌?”

“네. 지금쯤이면 슬슬 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엘렌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제레미는 뭐라고 작게 속닥거렸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뒤로 돌아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지는 엘렌을 뒤로 한 채 제레미는 성큼성큼 걸어가 강도들 옆에 있던 테이블의 천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테이블 밑에는 클로에 혼자 기절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제레미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더니 곧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시장이 달려와서 쓰러져 있던 클로에를 끌어안는 장면을 마리네뜨는 한참 뒤에서 살펴보았다. 빨리 빠져나오길 잘했다. 들켰으면 왠지 민망했을 거 같은데.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돌아서는 마리네뜨의 앞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어, 펠릭스!”

“…역시 너였나.”



이런 대담한 짓을 한 사람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뺨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냥 보고 있기가 좀 뭐해서.”

“자칫하면 너까지 위험해졌을 수도 있는데?”

“음, 잘 되지 않을까 했었지. 내가 요즘 운이 좀 좋거든.”



헤실헤실 웃는 마리네뜨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펠릭스는 여느 때처럼 적당히 무시하고 넘기는 게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여간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는군. 방금 전 강도에게 접시를 던진 장본인이 할 생각은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신기하다, 어떻게 총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아셨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펠릭스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망설임을 접고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마, 저 인간들이 총을 너무 자유자재로 다뤄서겠지.”

“에?”



자신을 돌아보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다시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저 정도 크기의 기관총이면 굉장히 무거우니까. 장정 남자라도 저렇게 한 손으로 막 들고 다니지는 못하지. 실제로 아까 천장으로 총을 쏜 남자는 총을 두 손으로 붙잡고서 발사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사람 빼고는 다들 총을 대체로 가벼운 물건 다루듯 들고 있었어. 그런 점만 봐도 쉽게 추론이 가능하지. 아,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총만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구나.”

“그렇구나….”

“애초에 처음 그 사격만 해도 단순한 위협용이 아니라, 모든 총이 다 진짜일 거라는 암시를 하기 위한 장치였을 거고.”



감탄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펠릭스는 질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등을 돌렸다. 그런 펠릭스를 보며 살짝 웃음을 터트리다가 마리네뜨는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짓고 중얼거렸다.



“하긴, 그러고 보면 집 살 돈도 없어 내쫓긴 사람들이 무슨 돈이 있어 저런 비싼 총을 잔뜩 샀겠어.”

“그것도 있고.”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하는 펠릭스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져 있었다. 이쪽 벽에 불이 없어 어둡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표정이 좋지 않아서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아무튼, 다시 나 아는 척 하지 마.”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뒤돌아서 가버리는 펠릭스의 등 뒤에서 마리네뜨는 살짝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지가 먼저 아는 척해 놓곤.”






사건은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알고 보니 일레인 시장은 얼마 전부터 이 문제 관련으로 계속 협박장을 받고 있었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했는데 설마 파티장까지 숨어들어올 수 있을지는 몰랐다며, 앞으로 더욱 호텔의 보안을 철저히 할 것을 공약하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되었다.


시장의 상황 설명과 장황한 사과가 끝난 뒤, 다시 파티가 재개되었다. 아까 그런 소동이 있었음에도 전혀 문제없이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벽에 기대어 지켜보는 펠릭스의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서렸다.


그래, 여기는 이런 곳이지.

잊고 있었던 건 아닌데 새삼스레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걸까.


한 손에 주스잔을 들고 근처 벽에 기대어 생각 없이 연회장을 지켜보고 있던 펠릭스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기댔다. 시선을 살짝 돌려보자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냐고 물을 생각도 쫓아보낼 생각도 없었기에 펠릭스는 고개조차 돌리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자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펠릭스는 더 이상 연회장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참 그럴듯해. 정말로.”



펠릭스가 듣던 말던 남자는 그저 떠들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참으로 좋은 미담이 아닐 수 없지. 목숨을 걸고 맨몸으로 나서서 잡혀있던 시민을 구하려고 했던 정치인에 대한 기사가 내일 신문에 뜨겠지. 호텔 피습 사건? 재개발 사건의 진실은? 뭐 이런 기사 헤드라인이 곧 다음 날 신문 1면을 장식할 거야. 내 기자로서의 경력을 걸고 장담할 수 있어.”



자신을 기자라고 소개하는 남자가 마저 말을 이었다.



“이 일로 다시금 일레인 시장이 추진하던 8구 재개발 사업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질 거야. 그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추진되어 왔든 이런 일이 생겼으니 분명 의혹이 제기될 거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진행되든 결국 욕을 먹게 되겠지. 사업 추진도 늘어질 거고.”

“….”

“설령 그 지역 재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 나름 굉장히 합리적인 판단 하에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말이야.”



펠릭스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소년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남자는 더욱 한탄어린 어조로 말했다.



“시민들은 멍청하니까. 겉으로 보기에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앞 뒤 안 가리고 나서는 이들도 많지. 결국 살펴보면 모두에게 이득인 관계라도 마찬가지야. 인간은 그리 이성적이지 못해.”

“….”

“그리고 그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알력에서 이득을 챙기는 건 매우 영리하고, 또 자기밖에 모르는 지독한 놈들이지.”



들고 있던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면서 남자는 살짝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이 일로 유피테르 의원의 인기는 또 하늘처럼 치솟겠지. 히야, 손해는커녕 이득만 가능한 상황이구만 이거?”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윤곽이 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뭐라고 말할 만한 사항은 아니었으므로 펠릭스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더 말해볼까? 기자 생활 초반부터 유피테르 의원을 봐왔지만 나는 저 양반이 한 번이라도 삐끗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늘 사람 좋은 얼굴로 건실하고 좋은, 시민들에게는 더없이 좋아보이는 정책들을 들고 나와서 신뢰를 얻었지.”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란 없잖아? 정치판 같은 곳이면 더더욱이나. 승승장구하는 저 의원을 짓누르려고 하던 사람들이 없었을 거 같아?”



있었지. 그 한 마디를 덧붙이며 남자는 다시금 목이 타는지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두 하나씩은 지독한 일을 당했단 말야?”

“….”

“이번 일레인 시장도, 다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이번 재개발 건으로 유피테르 의원과 충돌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고.”

“….”

“아주 구린 냄새가 난단 말이야. 딱 보기엔 굉장히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하얗게 덮으려고 해봤자 얼룩진 본성은 사라지지 않아. 감출 수 있을 뿐이야.”



자신을 오래 감출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영리한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알지만 나는 그를 모르기에.



“뭐, 나쁜 말이 나오지 않게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도 능력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기자는 펠릭스를 살짝 돌아보았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펠릭스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기자가 장난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뭣 좀 아십니까? 아그레스트 가의 도련님.”



아까의 중얼거림과는 달리 온전한 존댓말. 정중하게 제 의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펠릭스는 차분히 응수했다.



“…별로.”



그 한 마디와 함께 펠릭스는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파티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펠릭스를 바라보며 기자는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녀석일세.”






“그런 일이 있었구나.”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있는 제 주변을 뱅뱅 맴돌며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티키를 마리네뜨가 두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꺄르르 웃어대는 티키를 보며 피식 웃던 마리네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완전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나중에는 막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그래도 마리네뜨 진짜 용감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되게 무서웠을 텐데.”

“에헤헤, 그냥, 뭐….”



사실 마리네뜨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조금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히어로가 되더니 정의감만 늘었는지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또 그걸 실천에 옮기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티키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티키, 다음부터는 불편하더라도 같이 와 줄래?”

“나는 상관없어. 그러니까 오늘 일 너무 신경쓰지 마, 마리네뜨.”



또 제가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걱정되는지 다정스레 말을 건네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미라큘러스가 없는 나는 지극히 평범한 소녀지만-.”



자신은 평범하다. 아마 계속 히어로가 되더라도 나는 이 사실에 계속 염려하고 불안에 떨게 되겠지. 레이디버그는 나지만 내가 아니니까. 진짜 내 삶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


결국 레이디버그로서의 삶은 내게 있어 꿈에 지나지 않으니까.

꿈이란 잔인하다. 언제 끝나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에.



“아직은 미라큘러스가 내 손에 있으니까. 최소한 내가 레이디버그로 더 이상 변신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깜깜한 밤,


낮의 북적거림이 사라지고 고요한 밤이 식물원에 날아들었다. 관광객들과 시민들로 늘 사람이 넘쳤던 낮과는 달리 밤의 식물원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어두웠다. 곳곳에서 엷게 빛나는 백열등의 흐릿한 빛들이 식물원을 더욱 더 신비스럽게 연출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나무들 사이로 그림자가 하나 움직였다. 사람의 그림자였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건지 식물원 안을 유유히 거닐던 그림자는 곧 제 앞쪽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찾아냈다. 창백한 피부에 눈가에 찍힌 눈물점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마임맨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앞에 선 자신의 주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단정하게 정돈된 백발과 날카로운 백안을 빛내는 남자였다. 분명 젊었을 때 상당한 미남자였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정답게 그려주고 간 주름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남자의 눈빛은 냉랭했다. 낮에 보였던 온화한 얼굴 대신 냉혹한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웃음이라고는 모를 것처럼 무감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에게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탁한 백색의 눈동자가 흡사 뱀의 눈동자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마임맨에게 남자는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답에 만족했는지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시 터벅터벅 제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는 남자에게 마임맨은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시간이 걸릴 듯 싶습니다.”

“그렇군.”



마임맨의 바로 앞까지 왔다가,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마임맨의 옆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다루기 어려운 패는 필요없지.”



필요할 때까지만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간에.


그런 남자의 잔혹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마임맨은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의 앞에서는 말이 많아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이미 체득했기 때문이다.



“예정 날짜에 맞출 수 있도록 하지.”

“예.”



꾸벅 고개를 숙이는 마임맨을 뒤로 한 채,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투명한 유리 천장 너머로 별이 마냥 반짝거렸다.




- 봄: printemps : 인연의 시작 편 마침 / 여름: été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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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봄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네 길었죠? 달려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그리고 다들 대충 예감하셨겠지만 봄 에피는 진짜 프롤로그 격이라고 보시면 되구요... 여름부터 본격적인 애들의 사랑전선과 찌ㅋ통ㅋ이 시작됩니다 ㅎㅎㅎㅎ 여름 에피는 제가 봐도 정말 멘탈 후려치는 에피들이 대부분이라 애들이 좀 걱정되긴 하는데 뭐 잘들 해내겠죠 ㅇㅇ



6화를 작업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점은 히어로들을 출연시켜서 사건을 해결할지, 아니면 다른 루트를 사용할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다 정해놨지만 이걸 엄청 고민했었는데, 맥락상 안 넣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히어로들이 주인공인 건 맞지만, 꼭 매 에피마다 히어로들이 나와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나오는 화도 있고 쉬어주는 화도 있어야겠죠. 그리고 히어로들을 꼭 넣자고 생각하면 화마다 다룰 수 있는 주제가 매우 한정되어 버립니다. 뭐 이건 제 능력 탓일 수도 있지만요.


각설하고, 사실 6에피는 다 떠나서 저 아저씨를 등장시키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습니다ㅋㅋㅋㅋㅋ 6화의 제목이 왜 저럴까? 하신 분들이 계셨겠지만 6화의 제목은 맨 마지막을 위한 거였습니다 호호호. 다들 처음 나왔을 때부터 짐작하셨겠지만 당연히 저 아저씨가 호크모스입니다...


이중인격이 좀 쩌는 분인데 그냥 사회생활 잘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의외로 저런 정치인 현실에 꽤 많구요.. 현실을 열심히 반영해 보았습니다^ㅁ^


호크모스의 정체를 암시하는 것으로 봄 에피소드를 끝내고 싶었어요. 계절 파트마다 다루는 내용들이 딱 있고 마지막 부분은 그 다루는 주제에 종결을 찍는 식으로 구성했어요. 재미있으셔야 할텐데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다 부들...ㅠㅅㅠ


그리고 펠릭스는 당연히 숙부의 저런 성정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왜 펠릭스가 마리네뜨에게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며 화까지 내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기도 한데 이건 설명하자면 스포같아서 안 되겠습니다;ㅅ; 책에서 봐주세용^ㅁ^


봄 에피소드에서 제가 추구한 것이 일단 펠릭마리 두 사람이 히어로가 되는 계기와, 아이들 주변의 관계성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잘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성들을 알고 계셔야 전체적인 스토리 흐름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뭐 사실 좀 걱정되는 면들도 있습니다 5에피나 6에피의 경우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한 에피소드당 30페이지 내외로 끝내야 하기 때문에 필요 없는 부분들은 모두 컷하고 있습니다. 즉 제가 집어넣는 것들은 대체로 다 그 이유가 있다는 거죠. 하지만 표현하기 애매해서 그냥 상황적으로 판단하시게 냅두고 넘긴 부분들도 있습니다. 가령 6에피 사건 후반부가 좀 의아하신 분들이 계실 텐데 조금 머리를 굴려보시면 답이 나오실 겁니다 ㅎㅎ


여름 에피소드 재밌을 겁니다 최소 제 기준에는 봄보다 재밌더군요... 사실 쓰는 입장서는 봄이 제일 재미없었어서;ㅅ; 여름! 지금이 여름이니까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며 스퍼트를 올리면 되겠군요ㅇㅁㅇ!



이상입니다. 일단 온리전에서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_<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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