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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은 비밀


 

 

아침이었다.


안녕, 마리네뜨?”


살갑게 인사하며 제게 팔짱을 끼는 알리야를 향해 마리네뜨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안녕!”

오늘따라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오늘 들어 있는 수업이 좀.”


가기 싫어서. 작게 중얼거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알리야는 지긋이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마리네뜨 네 오늘 시간표상 수업은. 어라, 너 그 교수님 꽤 좋아하지 않았어?”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 알리야에게 마리네뜨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 ……작품은 여전히 마음에 드는데.”

드는데?”

가브리엘 씨를 너무 좋아하셔.”

아하.”


이해했는지 알리야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 친구의 눈치빠름에 감사하며 다시 걸으려던 찰나, 알리야가 다시금 마리네뜨를 꼭 붙잡았다. 이번엔 무슨 일인데? 힐끔 돌아보자 씨익 웃고 있는 알리야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불길하다.


그나저나 어제는 무슨 일이야~?”

어제?”


갑자기 이건 뭔 소린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알리야는 재미난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신난 얼굴로 마리네뜨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너희 학과 애가 그러던데? 어제 네가 어떤 꽃미남이랑 웃으면서 대화하는 걸 봤다고~”

꽃미남?”


얘는 언제 그런 얘기를 들은 거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아~, 라는 탄성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혹시, 나타니엘 얘기해?”

뭐야, 진짜였어?!”


언제 나 모르는 새에. 마치 제 엄마처럼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알리야를 보고 마리네뜨는 한숨을 쉬었다. 어서 정정해주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오해가 퍼질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야. 너 나타니엘 기억 안 나? 나타니엘 커츠버그.”

나타니엘?”


잠깐 고민하던 알리야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 그게 누군데?”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애.”

아아, 그랬던 것 같기도?”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 알리야를 보고 마리네뜨는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긴 자신도 좀 생각하다가 겨우 떠올렸을 정도였으니.


저기.”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마리네뜨와 알리야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훤칠한 키에 느슨하게 묶은 길고 붉은 머리칼을 가진 청년의 손에는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나타니엘이 멋쩍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안녕?”

안녕, 나타니엘!”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나타니엘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나타니엘이 설핏 미소지었다.


일찍 나왔네. 수업이야?”

그렇지 뭐. 클로드 교수님 수업 들으러 가는데, 너는?”

, 같은 수업이구나.”

너도 이 수업 들어?”


나타니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리네뜨가 왜냐고 묻기도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시간이 맞는 게 이 수업뿐이라서.”

, 혹시 같이 앉는 사람 없으면 나랑 같이 들을래?”

그래도 돼?”

물론이지.”


밝게 웃는 마리네뜨를 한참 쳐다보던 나타니엘이 엷게 미소지었다.


그래, 그럼.”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리야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마치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반짝였다.


그으럼, 난 이쯤에서 먼저 교실로 가 볼게?”

, 알리야?”

동창끼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붓하게 얘기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

저기, ! 너도 같은 동.”


창이라고. 내뱉지 못한 단어들이 입술을 떠나기도 전에 알리야는 두 사람 곁을 지나 학교 건물로 뛰어가고 있었다. 방금 알리야의 얼굴이 웃고 있었던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 띠리링 소리가 울렸다. 생각 없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알림을 확인하자, 알리야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중에 얘기 들려줘~]

무슨 일이야?”


불쑥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다시 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나타니엘을 쳐다보았다. 제법 훤칠해진 그를 살짝 올려다보며 마리네뜨는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곤란해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을 뭘로 해석했는지 나타니엘은 더는 묻지 않고 손가락으로 건물 입구를 가리켰다.


그나저나 갈까?”

, 그래!”


밝게 미소지으며 자신을 앞장서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뒤통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타니엘은 말없이 성큼성큼 그의 뒤를 따랐다.

 



마리네뜨와 다시 만난 지 2주가 지났다.


2주 동안 간간히 마리네뜨와 만나게 되면서 나타니엘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마리네뜨는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어쩐지. 나타니엘은 그제서야 같은 대학임에도 1년 동안이나 마리네뜨와 마주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같은 미대 소속이긴 하지만 아트 스페이스인 자신과 패션 디자인 소속인 그는 활동 범위가 매우 달랐다. 기본적인 전공의 차이가 크다 보니 어쩌다 교양이 겹치지 않으면 얼굴을 보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이번 학기에 마리네뜨와는 교양 두 개가 겹쳤다. 처음 만났던 미술학의 역사와 수요일 오전 수업. 수강신청 실패로 듣게 된 과목인데다 개인적으로 교수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마리네뜨를 만나게 되었으니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마리네뜨는 여전히 밝았다. 활발하고 솔직하고 자기 감정에 솔직했다. 짜증나는 레포트를 한참 붙들고 있다가 축 늘어지기도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눈을 반짝이면서 작업에 몰입한다. 한창 생각에 빠져 폭주하다가 나중에야 뻘쭘해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자신과는 달리 사교성이 좋은 것도 같다.


가끔 사람을 깜짝 놀래키는 면모도 여전했다. 저번에는 제 작업실에 찾아온 마리네뜨를 보고 얼마나 놀랬던지! 허둥지둥 후드를 쓰고 마리네뜨의 앞에 나섰지만 여러 의미에서 민망했다. 집에 가기가 귀찮아서 며칠간 작업실에 처박혀 있었으니 분명 꼴이 말이 아니었을 텐데. 어떤 반응을 해야할 지 몰라 눈만 데록데록 굴리고 있는 제게 마리네뜨가 웃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죽어있을 게 분명하니 지원 왔다면서 제게 건네는 하얀 봉투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안에 들어 있는 샌드위치에 박힌 마리네뜨네 빵집 로고를 보고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사실 나타니엘은 여전히 자신에게 부여된 지금의 시간이 얼떨떨했다. 마리네뜨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가 그랬다. 물론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심란하기도 했다.


좋은가? 마냥 좋다고만 생각하기엔 어딘지 찜찜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몇 가지 의문들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은 제 기억과 그리 달라진 점이 없었다.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마치 그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낄 때면 가슴 한 구석을 서늘하게 적시는 예감이 있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마리네뜨의 옆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누군가가.

하지만 그에 대해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아직은.



 


그래서, 요즘 그 애랑 같이 다니고 있다며?”


제법 짓궂은 목소리로 질문하는 알리야의 옆에서 마리네뜨는 이제 막 포장지를 깐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고개를 돌려 알리야를 돌아보던 마리네뜨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 왜 그런 표정이야?”

내 표정이 뭐?”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느낌인데?”

오올~ 근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너라면 재미가 없겠어? 지금 상황이.”

대체 무슨 상황인데요, 알리야 씨?”


역시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마리네뜨에게 알리야는 히죽 웃으며 안경을 고쳐썼다.


글쎄? 친구랑 잘생긴 남학생이 심상치 않은 관계가 되어가는 상황?”

잘생긴 남학생은 또 뭐야, 대체.”

으이그, 또 시작이구만. , 상당히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이잖아? 키도 크고.”


넌 너무 눈이 높아. 절레 고개를 내젓는 알리야의 앞에서 마리네뜨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할 말이 없었기도 했고, 더 이야기하면 싫은 주제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단정한 얼굴이잖아. 아트(Art) 과에 실력도 실력이지만 얼굴도 괜찮은 꽃미남이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설마 내 친구랑 걔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나타니엘에게도 실례라구.”

과연 그럴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알리야를 보고 마리네뜨는 앉은 채로 슬금 뒤로 물러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걔가 누군지 기억이 좀 나긴 나더라구? 프랑수와즈 뒤퐁Françoise Dupont 고등학교에 다닐 때.”

됐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 얘기는 그만 하자.”


황급히 제 말을 끊는 마리네뜨를 알리야가 지긋이 바라보았다.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마리네뜨를 참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알리야가 툭 말을 내뱉었다.


애쓴다.”

…….”


거하게 한숨을 내쉬는 마리네뜨를 보고 알리야가 혀를 쯧쯧 찼다.


아직도 그래?”

그치만,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에 이제 알리야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언제나 똑부러지게 자신의 일을 결정했던 제 친구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도.


마리네뜨. 이 알리야 선생님이 진단해보자면, 넌 너무 일만 한 게 문제였던 것 같아.”

?”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눈으로 묻는 마리네뜨에게 알리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잘 된 거 아냐? 나름 괜찮은 조건인 것 같은데.”

대체 뭐라는 거야 너?”

진짜 잘 되어보면 어떠냐는 거야. 그 녀석이랑~”

됐거든.곰은 가죽을 내놓을 생각이 없는데 벌써 팔 생각을 하면 되겠어?

에이, 그래도~”


 Il ne faut pas vendre la peau de l'ours :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프랑스 속담)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눈을 반짝거리는 알리야의 시선이 좀, 아니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마리네뜨는 꿋꿋했다.


너 너무 재미있어 한다?”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인생이 재미있지. , 잠깐만~”


신난 얼굴로 스마트폰을 꺼내 열심히 뭔가를 적기 시작하는 알리야를 지켜보던 마리네뜨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에, 블로그가 그렇게 재밌어?”


가볍게 묻는 마리네뜨에게 알리야도 역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뭐 레이디블로그를 운영할 때만큼 구독자가 많지는 않지만, 재미있어.”


먹은 포장지를 정리하던 마리네뜨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화면에 열중하고 있던 알리야는 눈치채지 못했다. 태연한 목소리가 알리야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어떤 포스팅을 올리는데?”

, 이것저것? 제빵 결과물에 대해 올릴 때도 있고, 일상 얘기를 할 때도 있고. , 올렸다.”

뭘 썼는데?”


알리야의 스마트폰 화면을 힐끔 쳐다본 마리네뜨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

[요즘 친구가 괜찮은 남자랑 만나고 있는 것 같은데, 저한테는 얘기를 안해주네요~ 쑥스러워서 그런 거라면 하루빨리 속시원히 털어놔줬으면 좋겠는데~ 보아하니 이미 좀 생각이 없지는 않아 보이.]

! 이게 무슨 짓이야!”


재빨리 제 폰을 뺏으려고 날아드는 손을 가볍게 피하며 알리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헤헹, ? 틀린 말도 아니잖아~?”

아주 많은 문제가 있거든? 이리 안 내놔?”


춉춉 손을 뻗어 제 스마트폰을 가져가려는 마리네뜨의 손을 익숙한 몸놀림으로 피하면서 알리야는 깔깔 웃었다.


오늘도 즐거운 점심이 될 것 같다.



 

학교 교정에 깔린 풀밭 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화창한 날씨라 다들 피크닉 분위기를 내고 싶은 건지 샌드위치나 빵을 먹으며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물론 나타니엘은 그런 풍경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아,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채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청년의 제법 단정한 생김새가 지나가는 행인 몇의 눈길을 끌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비스듬한 햇빛을 맞으며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 미청년이라니, 제법 명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말없이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던 나타니엘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오더니, 아직 백지 상태인 스케치북으로 향했다. 멍하니 텅 빈 여백을 마주하고 있던 나타니엘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에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보다 꽤 소란스럽네.


연필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던 나타니엘의 손이 크림색 종이 위로 한 획을 그었다. 홀린 듯이 손을 움직이고 있는 나타니엘의 스케치북에 누군가의 인영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집중하다가, 어느 순간 나타니엘은 정신이 든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멈췄다. 자신이 그려낸 무언가를 내려다보며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뭐 하는 거지.”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은 아직 사람이라고 할 정도의 윤곽 뿐이었지만, 나타니엘은 자신이 누구를 그리고 있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갑자기 왜?


마리네뜨를 다시 만나고부터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무의식적으로 이런 짓을 한다. 본능대로 손을 움직이다가 나중에 정신이 들고서야 자신이 뭘 그리고 있었는지 깨닫는 것은 제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하고서부터 생긴 습관 중 하나였다. 물론 진짜로 중요한 작업물과 달리 가볍게 그릴 수 있는 그림에서만 그런다지만, 최근 들어 생긴 이러한 충동은 나타니엘로서도 퍽 당황스러웠다.


요 몇 년간 사람을 그려본 적이 없었는데.


이유는 알고 있다. 가만히 그림 속에 남겨진 제 무의식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어보이는 종이 위의 사람은 지금의 그일까, 아니면 예전의? 허락도 없이 초상화를 그려도 괜찮은 걸까? 어린 시절에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펜을 놀리곤 했었지만, 지금은 왠지 조심스럽다. 그 때보다 옆에 있는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가? 들키면 혹시 나를 꺼려하게 되지는 않을까, 오해하게 되지는 않을까. 어렸을 때는 떠올리지 못했던 갖가지 잡념들이 떠오른다.


어른이 되어서인가.


이만치 나이를 먹고 나서야, 짝사랑이란 무엇인지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이상하지, 분명 우리의 거리는 예전보다 지금이 더 가까울 텐데 어린 시절에는 네게 지금보다 더한 친밀감을 느꼈었다. 너는 나에 대해 모르지만, 나는 너에 대해 많이 알았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그건 지금까지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나의 자그마한 비밀이었다.

시간과 함께 묻어둔 줄만 알았던.


연필을 들어 얼굴 위에 몇 개의 획을 더 그었다. 그림 속 누군가의 눈가 주변을 가면처럼 감싸고 있는 무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하늘빛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 나타니엘!”

히에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나타니엘은 하마터면 스케치북을 놓칠 뻔했다. 몇 번 손가락 위를 통통 튀어가던 스케치북을 허둥지둥 붙잡은 그가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길을 지나가던 마리네뜨와, 옆에 서 있는 알리야를 발견하고 나타니엘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림 그리고 있었어?”


친근하게 묻는 마리네뜨에 나타니엘은 더욱 당황했다. 스케치북으로 얼굴을 가리고픈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 너는?”

나는 알리야랑 같이 점심 먹고 다음 수업 준비하러 가려는 참이었어. , 이쪽은.”


알리야를 가리키며 마리네뜨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나타니엘이 차분히 대답했다.


알리야 세자르.”

, 알고 있었어?”


어리둥절해하는 마리네뜨와 달리 나타니엘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알리야가 히죽 미소지었다. 안경알 너머 눈동자가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이 반짝거리며 다시 말을 꺼내는 나타니엘을 관찰했다.


늘 붙어 다녔잖아. 뒤퐁교 때부터.”

하긴, 5년 전 일이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네. 나도 단번에 알아봤으니까!”

아니, .”


그렇지. 무언가를 얼버무리는 듯이 힐끔 시선을 피하는 나타니엘에게 마리네뜨가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예정이 어떻게 돼?”

오늘은 더 수업이 없어서, 과제를 마저.”

넌 언제나 과제를 하고 있는 것 같아. , 나도 그렇지만! 미술학도는 이래서 고달프다니까~”


쭈욱 기지개를 펴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마리네뜨를 지긋이 쳐다보던 나타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지가 나오게 다시 접은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끼고 천천히 마리네뜨에게로 다가온 나타니엘이 입을 열었다.


수업, 뭐 들으러 가는데?”

? 전공 관련인데 드로잉 쪽이야. 근데 그건 왜?”

……나도.”

?”

나도 같이 가도 될까? 청강.”

, 진짜? 너 드로잉에 관심 있었어?”

그림 계열은 다 좋아하거든.”


마음을 굳혔는지 제법 단호하게 대답하는 나타니엘에 마리네뜨는 어느 정도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알리야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억눌렀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어째 영 심상치 않은걸~


알리야는 가만히 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살펴보았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하나로 느슨하게 묶은 얼굴은 수수하긴 하지만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이다. 전형적인 예술계 미인. 제 귀에 들려온 이야기대로라면 아마 꽤 인기가 있겠지. 알리야는 눈 앞의 남자에 대해 들었던 소문들을 찬찬히 떠올렸다. 아트 과에서도 손꼽히는 천재 중 하나로, 협조성은 부족하지만 차분하고 조용한 타입의 미인이라고 하던데 확실히 그런 인상이긴 했다.


시간이라는 게 무섭긴 무섭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알리야는 새삼스레 자신들이 나이를 먹었다는 걸 자각했다. 기억을 탈탈 털어서 떠올린 옛날의 나타니엘은 상당히 흐릿했고 존재감이 없었다. 그렇던 녀석이 이만큼이나 달라지다니. 지금도 그리 눈에 띄고 싶어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열심히 마리네뜨에게 어프로치하는 걸 보면 좀 귀엽긴 하다.


결국 선택은 제 친구의 몫이겠지만.


둘이 사이 좋네~”


놀리듯이 말하는 알리야를 돌아보며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였다.


?”

나 슬슬 전공과목 시작할 시간이거든? 먼저 가볼테니 나머지는 알아서들 해봐~”

, 알리야!”


히죽이죽 웃으며 뛰어가는 알리야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마리네뜨가 나타니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그럼 이제 우리도 가볼까?”


읏고 있는 마리네뜨의 뒤쪽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한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중 누군가를 본 나타니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나타니엘?”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나타니엘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천천히 나타니엘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러 명의 학생들이 서로를 둘러싸고 이야기하며 걷고 있었는데, 무리의 중심에는 금발의 남자가 누군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태양을 닮은 금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따사로이 반짝였다. 마리네뜨는 조금 놀라는 듯하다가도, 곧 덤덤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얘기하던 중 얼핏 마리네뜨가 있는 쪽을 쳐다본 남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주변을 둘러싼 친구들이 뭐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저기, 아는 사람이 있어서.”


멈춰선 무리 속에서 남자는 혼자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겨우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멈춰서서 남자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색한 것 같으면서도 차분하게, 그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두 사람에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초록빛 시선은 온통 마리네뜨에게로 쏠려 있었다.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로 마리네뜨는 그저, 작게 웃었다.


안녕, 아드리앙.”


건조하고, 지극히 평범하게.





==


쨘 오늘이 만우절이라서 거짓말인줄 아셨죠? 놀랍게도 진짜였답니다! 만우절엔 진짜를 가져와야 낚시를 성공할 것 같아서^ㅁ^


업로드 날짜를 보니까 정말 제 게으름이 통탄스럽네요. 하지만 이미 연재주기가 불규칙할 거라고 말씀드렸으니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ㅇ.<


제가 숫자를 잘못 적었는데 전편이 프롤이고 이번 편부터 본격적인 본편입니다. 그래서 부제에 1을 붙였어요 2가 아니라.

일단 2편까지는 가야 과거사가 대충은 나올 거 같은데 2편 언제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손 정말 굳었네요 콘티를 즉석으로 짜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새삼 실감하고ㅠ

배경은 이미 다 짜둔 상태라 자세한 건 2편에서 보실 수 있을 듯합니다. 아드마리 사이가 어떻게 보이려나 모르겠네요 나름 지망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말이죠ㅠ 의도대로 잘 보였기를 바랍니다ㅇ▽ㅇ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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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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