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어?
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주된다. 어조의 높낮이, 단어를 발음하는 장단이나 그 끝처리에 이르기까지, 얼굴 표정이나 눈빛에 따라서도 그 느낌이 달라진다. 누군가는 비웃듯이, 누군가는 호기심에, 또다른 누군가는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그 말을 입에 담았다.
같은 이름을 가진 수많은 물음 속에서 나의 대답은 너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어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소리내어 말하기에는 퍽 창피한 감상인지라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덕분에 네게 제대로 인사하지조차 못했다. 제 얼굴을 흘깃 스쳐가는 총명한 눈동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조금 빠른 속도로 뛰었다. 중요한 무언가를 찾은 것처럼.
그것을 증명하듯 너는 매 순간 반짝거렸다. 당시 나에게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만큼 너의 주변은 마냥 조용하지만은 못했고, 여러 가지 사건들도 터졌지만 그래도 너는 씩씩했다. 힘든 일이 있어도, 혹 야단을 맞거나 크게 문제가 터져서 풀이 죽어 있다가도 곧 다시 밝게 미소짓고는 했다.
네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늘 한참 떨어진 곳에서 너를 지켜보았다. 너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고 언제까지나 네가 웃어주기를 바랬다. 너와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주고받은 날은 유독 기분이 좋았다. 아니, 나를 돌아봐주지 않는 네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는 순간이 있을 정도로,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아 재잘거리는 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네가 스쳐가는 한 순간의 모습들을 기억되기 좋은 형태로 담아내는 것이 즐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들뿐이라, 나는 그저 뒷자리에 앉아 계속 너를 그리고 또 그렸다. 마치 너에 대한 내 마음을 쌓아가는 것처럼, 점점 다양한 너의 모습들이 담겨져가는 스케치북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속으로만 품었던 연정이 점점 그 크기를 키워나가는 것을 알았음에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너에게 조금쯤 더 자연스럽게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때는 괜찮지 않을까. 너한테 말해도 되지 않을까. 꾹꾹 눌러담았던 마음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순간이 오면, 그 때는 말하자. 너에게 제대로, 용기를 내어서.
나름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난 그냥 떼어내려고 한 거야!”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네 목소리와 같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당황했는지 살짝 더듬거렸지만 듣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자신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어째서 네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까?
그 애를 쳐다보는 네 모습에 초조해졌다. 너를 발견하고, 시선을 따라가면 언제나 그 끝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과 선연한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소년. 누구든지 동경할 만한 존재를 바라보는 너의 얼굴은 내가 그간 보아왔던 모습들 중 최고로 반짝거렸고, 나는 그게 보기 좋으면서도 싫었다. 질척하게 올라오는 감정들이 당황스러웠다. 덮쳐오는 감정들을 겨우 피했다치면 그 다음으로는 후회가 몰려왔다. 후회를 물리치고 나면 자괴감이 들었고, 자괴감이 지나가고 나면 몰아치는 자각에 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 좀 더 빨리 네게 다가서지 못했을까.
그저 현재에 안주했던 방관자로서의 자신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를 바라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즐겁지만은 않았다. 나는 매일 나도 모르는 새로운 나를 만났고, 그 녀석과 싸우는 것만도 힘에 버거웠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들은 너를 향해 쌓아올린 애정만큼이나 무겁고 어두웠다. 따뜻해졌다가도 싸늘해졌다. 속이 끓어올랐다. 그런데도 너에게로 향하는 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그것이 답답했다.
너는 나의 가을이었다.
자각과 함께 말라버린 나뭇잎처럼 떨어지기 시작하는 희망은 이미 결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네가 아드리앙과 사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에는, 글쎄.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렇게 놀랄 일이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쩔쩔매던 내게 너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당해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는 대응보다는 체념을, 직면보다도 도피를 선택했다. 그도 그럴 게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내가 그 녀석보다 나은 상대라는 오만함 따위를 부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보다는 그가 더 좋은 연인이 되어줄 것이라고,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래, 그렇게 이해하는 척 하려고 애썼다.
도망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못할 정도로 자신은 겁쟁이였다. 어느 날 변덕스럽게 작은 희망이 샘솟았다가도, 그 녀석의 곁에서 미소짓고 있는 너를 보면 다시 바스라졌다. 너는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 내가 그 이상으로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미친 듯이 자신을 몰아세웠다. 몰아치는 일들에 지쳐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정도로, 그저 너를 떠올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아직 어리고, 한심하고, 비겁했던 당시의 내게는 방관만이 가장 나은 선택으로 보였다.
다른 소모적인 것들을 마음 속에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너에 대한 것만 아니라면. 여유를 지워내고 이미 있던 감정들을 가려버릴 것들을 계속해서 쏟아부었다.
밀어내고 밀어내고 밀어내고, 네게 품은 연심(戀心)을 마음 깊숙하게 자리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꾸깃꾸깃 몰아넣었다. 마음 속은 복잡했고 정리되지 않아 어지러웠지만 그저 방관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게 있었던가, 라는 감상을 떠올리게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나서는 그래도 좀 나아졌다. 눈앞에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슬픔은 점점 무뎌졌고 괴로움은 줄어들었다. 그래도 너를 보던 시절만큼 세상이 반짝거려 보이지는 않았다. 모든 것에 무덤덤했다.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보아도 그 순간이 지나면 감정은 빠르게 식어갔다. 마치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잠깐의 햇살이 사라지면 다시 몸은 싸늘해진다. 찬란한 햇빛 아래에 서 있는 모두에게서 격리되어 어두운 그늘에 붙들려 있었다. 손을 뻗으면 잠시나마 따뜻했지만 그뿐이었다.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더 이상 아프지는 않으니까.
하얀 캔버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커다란 캔버스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림을 그릴 때만이 그나마 조금은 살아있는 것만 같아서,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 작업실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주로 풍경 위주로 그렸지만 간혹 인물은 안 그리냐는 질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응, 난 사람은 안 그려.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하늘이 꽤 어두웠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회색으로 덧칠해진 허공에 하얀 눈송이들이 점처럼 찍혀갔다. 회빛의 아스팔트 위로 하얀 눈이 죽어버린 감정의 잔해처럼 소복이 내려앉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손을 움직였다. 물감을 섞어 캔버스 위를 덧바르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그럼에도 심장 한 구석이 묘하게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긴장을 놓았나. 방심해버린 자신을 조금 탓했다.
느슨해지는 순간 튀어나오고 마니까.
무엇이든.
몇 번의 겨울을 거치고 어느덧 성인이 되었다. 대학을 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학교조차 안 가면 정말로 아무런 자극도 없는 매일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다. 정확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 순간에.
그간 해놨던 것들이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여러 대학에서 추천장이 들어왔다. 가장 조건이 좋은 곳을 골랐다. 다른 것에는 그리 큰 관심이 들지 않았지만 자신은 그림 한정으로는 꽤 욕심이 많았다.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순수 미술이라 그냥 그림만 그리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키는 것도 많고 그게 꼭 그림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까지 와서 관심도 없는 과목을 공부해야 하다니, 속으로 짜증을 뱉으면서도 일단 공부는 했다. 졸업은 해야하니까.
사람들에 이리저리 치이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린 시절만큼 낯을 가리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떠들썩한 분위기는 썩 익숙하지 않았다. 친구라 불릴 만한 관계가 여럿 생기면서 좀 즐거워진 건 사실이었다. 확실히 같은 과 소속인 만큼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 자신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고, 평화로웠다. 혼자 있는 것은 여전히 조금 어려웠지만 예전보다는 견딜 만 했다. 혼자서 감정을 곱씹던 시절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구나.
조금 깨달음을 얻었다.
신학기가 되었다.
익숙하지 않았던 처음과는 달리 자신도 이젠 제법 적응기를 거친 건지 나름 여유로웠다.
따뜻한 햇볕이 겉도는 강의실 창가에 앉아 가만히 생각했다. 오늘 날씨가 좋은데, 간만에 밖에서 그림을 그려볼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새하얗게 책상 위로 스며드는 햇살이 경주하듯 강의실의 안쪽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귓가에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고 사락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바깥에서 간간히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시야를 간간히 흐트렸다.
머리가 너무 길었나, 슬슬 잘라야 할 텐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중 왁자지껄한 소리에 섞여 어떤 목소리가 귓가에 콕 박혔다. 목소리인가? 번뜩 고개를 돌려 제 앞을 바라보았다.
푸른 끼가 도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바로 제 앞에 있었다. 바로 아래쪽 의자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익숙했다. 눈을 깜빡거렸다. 메말라있던 심장이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흑백이던 세상이 멈추고, 색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무언가의 감정이 제 심장을 적셔갔다. 작동을 멈췄던 기계가 다시 움직이는 것처럼 확 밝아지는 시야에 놀라기보단 당황스러웠다.
분명 잊고 살았을 터인데.
심장소리가 온 몸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시끄럽게 귓가를 때려대는 소리에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가, 머뭇거렸다. 살짝 움직이려다가 또 제자리.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제 앞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다. 손 끝에 닿는 옷자락의 감촉보다도, 내 기억 속보다 훨씬 작아진 네 어깨가 신경쓰였다.
“마…, 리네뜨?”
조심히 불러보았다. 느릿하게 제 쪽을 돌아보는 얼굴은 기억 속에 남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른 학교를 간 후로 한 번도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떠올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주 가끔씩, 제가 약해져 있는 순간에 불쑥 떠올라서 나를 건드리고 지나갔었다. 자꾸만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긴장하는 자신을 들키지 않게 부던히 정신을 다잡았다.
“어라, 넌…?”
햇살 한 줄기가 너의 어깨를 붙잡은 내 팔을 슬그머니 건드렸다. 묘하게 올라오는 따스함에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아아, 맞다. 나타니엘이지?”
오랜 겨울의 끝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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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은 오랜만이네요. 현재는 포스타입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다만 레이디버그 연성은 대개 이 블로그에 올리다보니 통일하는 게 편할 거 같아서 여기를 선택했습니다.
손가락 재활 겸 간단하게 쓰려고 시작한 건데 프롤만도 4천자가 되었군요. 음 그래도 시작은 좀 제대로 가야 할 거 같아서 나름 노력했습니다. 손가락 정말 안 굴러가네요 회지 이후로 글을 몇달이나 안 썼더니...
일단 표기 보시다시피 나타마리아드구요 메인은 나타마리입니다. 번호가 붙은 것을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다음 편도 나올 거 같네요. 아드리앙이랑 사귀다가 처참하게 깨진 마리가 몇 년 뒤에 나쓰랑 재회하는 내용입니다 써놓고 보니 스포같지만 뭐 담편에 나올텐데요(?
해피엔딩을 예정하고 있으나 셋다 좀 많이 구를 거 같습니다 후후. 페이지는 잘 모르겠는데 중편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길게 끌 내용은 아니라서.
정말 생각없이 쓰고 싶어서 기획한거니 스토리퀄을 크게 기대하지는 마셔요. 그냥 가볍게 가겠습니다 가볍게. 잔잔한 이야기로 갈 것 같습니다. 텀은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그냥 하루 두시간씩 써보고 편수를 채우면 올리지요 뭐. 지금 마감 좀 끝내고.. 콘티 정말 애들 현재 포지션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안 짜놔서 그냥 생각나는대로 굴려야 할 거 같습니다 와 이런 거 오랜만이라 좀 설레네요(?
한번쯤 토마토에게 해피엔딩을 줘보고 싶다는 충동 하에 쓰기 시작했습니다만 그렇게 순탄한 해피엔딩은 아닐 것 같네요. 이 정도가 아니면 나쓰가 사랑을 쟁취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서 이렇게 쓰긴 했지만... 필자의 최애컾은 아드마리입니다만 제 최애컾은 메이저이니 다른 분들 연성만으로도 충분해서(?)
웹에 쓰기 시작하면 묘사퀄을 너무 신경 안 써서 한글에 쓰기 시작했더니 묘사가 그나마 좀 봐줄만하군요. 스토리가 아니면 시간 들이기 귀찮아하는 성격 좀 고쳐야하는데..
재밌게 읽어주셨다면 기쁩니다. 다음 편은 언제 들고 올지 모르겠지만..
다들 나쓰와 마리와 아드리앙의 고통을 위하여 건배해주세요^ㅁ^(모두: 저기요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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