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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캣마리 배포전에서 냈던 회지의 일부입니다. (재고 2권 있으니 필요하시다면 문의로)

※ 동화 AU / 괴물 블랙캣과 소녀 마리네뜨




Once Upon a Time




옛날옛적에,

나라 하나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기후, 한쪽에는 넓은 바다가 푸르게 빛나며 제 존재감을 과시했고, 반대쪽에는 험준한 산자락이 마치 방어벽처럼 나라를 크게 둘러싸고 있어 나쁜 무리들이 함부로 이 땅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축복받았다고 불릴 만큼 비옥한 토양에서는 좋은 곡식과 과일, 채소들이 생산되었고, 덕분에 국민들은 아주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답니다. 아, 사소하고 작은 다툼들이 간혹 일어나고는 했었지만요.


화려한 왕궁이 있는 이 나라의 수도는 변두리에 사는 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왕궁에 대한 이야기는 간혹 외곽 지역으로 흘러 들어오는 여행자들에게는 최고의 소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묘사에 홀린 이들은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꾸고는 했지요.


그들은 마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신비한 힘을 가진 이들이 있고 그들이 얼마나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과 척을 지는 것은 그리 현명한 결정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물론 이야기를 들은 대부분이 코웃음을 치곤 했지만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이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잘 가, 마리네뜨!”

“응, 알리야 너도! 내일 보자!”


검은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소녀가 자신에게로 멀어지는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언제나처럼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원래라면 같이 돌아가는 것이 맞았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알리야와는 달리 마리네뜨는 다른 볼일이 있었다. 이미 저 멀리로 가버린 알리야의 뒷모습을 마냥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앞에 거대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푸른 나뭇잎들이 매달리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숲은 수북한 잎사귀들이 만들어낸 그늘 때문인지 햇빛이 밝게 떠 있는 낮임에도 무척 을씨년스러웠다. 몇 번 와봤었지만 괜스레 느껴지는 위압감에 마리네뜨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 음침해보이지….”


자신이 지금 저 숲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늘진 숲을 쳐다보고 있던 마리네뜨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두 팔을 꼭 끌어안은 소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깜빡거리며 그 자리에 망연하게 서 있다가, 곧 씩씩하게 외쳤다.


“괜찮아! 위험한 동물같은 건 없으니까!”


숲에 자주 들락거리는 사냥꾼 아저씨한테서 들은 이야기니 아마 확실하겠지.


“가, 가자!”


괜찮을 거야.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마리네뜨는 씩씩하게 숲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숲은 서늘했다. 햇빛이 쨍쨍한 낮이었음에도 무성한 나뭇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온 햇빛들이 쭉 뻗어 내려와 바닥에 궤적을 그려냈다.


“우와….”


어둑한 숲에 실금처럼 비스듬히 그어지는 빛의 선들이 무척 아름다웠다. 절로 탄성이 나오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빛들이 유독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주변이 어둡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숲에 감도는 기이한 분위기 때문일까.


주변은 무척 조용했다. 그 흔하다는 다람쥐 한 마리 보지 못했다. 보통 숲이 이렇게까지 조용한가? 싶다가도 마리네뜨는 기척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늑대라도 나타나면 큰일나니까.


“으악!”


주변을 둘러보며 지나가느라 하마터면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도 손바닥으로 제때 바닥을 짚어서 큰 상처는 없었다. 그늘져 있음에도 생각보다 바닥이 축축하지 않은 것에 마리네뜨는 조금 놀랐다.


더러워진 손바닥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나무들뿐이었다. 숲의 어둠에 검게 물든 나무들이 제 앞으로 한 발짝 다가온 것처럼 보여 소녀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다.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해보니 주변이 왠지 생각보다 더 어두운 것 같다. 그늘졌다지만 낮인데 보통 이렇게까지 어둡나? 싸한 기운에 마리네뜨는 살짝 몸을 떨었다. 으으, 정말.


“왜 그 꽃은 여기에만 피는 걸까나….”


골든 호르테. 마리네뜨가 굳이 이 숲으로 들어온 이유였다. 붓꽃과 닮은 모양을 하고 있는 금빛의 꽃. 나쁜 일을 내쫓고 행운을 불러오며, 사랑을 이루어준다고 알려져 있는 무척 희귀한 꽃. 골든 호르테에 얽힌 젊은 청년과 처녀의 사랑 이야기는 이 나라에서는 누구든 어릴 적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설화이기도 했다. 물론 실존하는 꽃이라고는 하지만 무척 희귀해서 발견한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른다고도 했다.


며칠 전 부모님과 친하게 지내시던 사냥꾼 아저씨가 모자에 그 꽃을 꽂고 오지 않았더라면, 마리네뜨는 지금까지도 그 꽃은 그저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물건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깜짝 놀라 이것저것 물어서 겨우 대답을 얻어냈다. 숲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꽃밭에서 꺾어왔다고 했다. 꽃을 주실 수 없냐고도 물어봤지만 그건 단칼에 거절당했다.


‘이건 안 돼. 마누라한테 줄 거거든.’


난감한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는 아저씨에게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어 소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리네뜨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난감해하던 사냥꾼은 결국 꽃이 어디에 피어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쳐주었고,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조금만 더 가면 있겠지.


고요하고 어두웠다. 발밑에서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어두워지고 추워지는 것 같다. 어둠 속에서 초록빛의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소녀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기분 탓일까?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


소녀의 옆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히이익!!”


비명을 내지르며 소녀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소녀의 몸을 억누르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검은색의 오오라로 이루어진 그것은 제대로 된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어려웠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으르르르- 낮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마리네뜨는 겁에 질렸다.


이게 뭐야?!


두려움에 가득 차서 다시금 버둥거리려고 했지만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금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소녀는 뻣뻣하게 굳었다. 잡아먹히는 건가? 이렇게? 겁먹은 눈동자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을 바라보던 마리네뜨는 제 얼굴로 떨어지는 무언가를 알아채고 멈칫했다. 자신을 짓누른 차갑고 서늘한 촉감과는 다르게,


“…우는 거야?”


따뜻한 무언가가 계속 제 얼굴 위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어디서 떨어지는 거지?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마리네뜨는 곧 그 검은 오오라 사이에서 초록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깜빡거리는 초록빛 눈동자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똑바로 그 눈동자를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울음소리는 분명 짐승의 것인데, 방금 전처럼 무섭지만은 않았다. 어떤 감정으로 울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물을 떨구는 저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저어….”


입을 열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마리네뜨를 바라보던 초록색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깜빡거리더니 눈물을 그쳤다. 곧바로 제 몸을 누르던 힘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마리네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뒤를 돌아 사라지려던 녀석이 그 자리에 멈춰서는 모습을 보고 마리네뜨는 속으로 놀랐다. 내 말을 알아듣나? 물기가 가득한 얼굴을 소매로 슥슥 문지르며 소녀는 다시금 말을 걸었다.


“해, 해치지 않을 거야?”


‘그것’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천천히 넘실거렸다. 불길할 정도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어 마치 주변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괜히 말을 걸었나 싶다가도 마리네뜨는 다시금 용기를 내었다.


“소, 손.”


한쪽 무릎을 바닥에 굽히고 살며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경계하듯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소녀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워낙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필사적으로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면서도 불안한지 소녀는 눈가를 살짝 떨었다.


동물한테는 눈을 맞추는 거랬나? 아니었나? 이러다가 물리면 어떡하지? 그래서 숲 속에 버려져 있다가 지나가던 사냥꾼 아저씨한테 구조되고…. 아니, 근데 아저씨도 여기 자주 안 온다고 했잖아! 나 죽는 건가?! 그런 거야?!


저벅, 발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초록빛 눈동자에 소녀는 몸이 싸하게 굳었다. 굳어버린 마리네뜨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온 눈동자가 눈을 깜빡거렸다.


곧이어 손 위로 단단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어?


깜짝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는 마리네뜨를 초록색의 눈동자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녀는 방금 제가 내민 손바닥 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손 위에 검은색의 손 같은 것이 올려져 있었다. 아니, 발인가?


그러고 보면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인다니, 왠지 고양이 같기도. 소녀가 중얼거렸다.


“…고양이 같네.”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작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만 제외하면 ‘그것’은 그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움직이면 소녀가 겁을 먹을 거라는 걸 아는 것처럼.


햇빛이 위에서부터 뻗어와 잘게 부스러졌다. 빛이 닿아서 그런가? 방금 전보다는 형태가 제대로 보였다. 가루처럼 공중에서 나풀거리는 검은색의 오오라 너머로 새까만 몸체가 드러났다. 그래, 온통 새까맸다. 얼굴 위에 쫑긋 솟아있는 귀를 보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검은 고양이.

소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블랙캣, 이려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마리네뜨, 그 꽃은 뭐야?”


마리네뜨의 모자에 꽂혀 있는 금빛의 꽃을 보고 알리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알리야의 반응에 만족스러웠는지 마리네뜨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 


“예쁘지?”

“되게 예쁘네. 화사한 느낌이라 네 모자랑 잘 어울려.”


그 말대로였다. 붉은색 바탕에 금빛 자수를 놓은 모자와 골든 호르테는 무척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솜씨 좋게 만들어진 모자는 마리네뜨가 직접 만든 수제품이었다. 시골에서는 꽤나 귀할 법한 붉은 원단은 마리네뜨의 부모님이 도시에 출장을 갔을 때 선물로 사온 것이었다. 그 때문에 마리네뜨는 이 모자를 꽤 아꼈다.


알리야는 의아했다. 마리네뜨가 학교에 이 모자를 쓰고 오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모자가 꽃이랑 잘 어울리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꽃을 장식하자고 모자를 꺼내온 게 아닌가 싶었다. 노랗다기보단 환한 금빛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꽃은 확실히 무척 화려하고 예뻤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근데 어디서 난 거야? 그 꽃은. 처음 보는데.”

“…음, 우연히?”


뭔가 얼버무리려는 듯이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알리야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꽃,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 알리야. 선생님 들어오셨어!”

“앗, 이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담임 선생님의 모습에 알리야는 재빨리 몸을 돌리고 교과서를 펴냈다. 별로 관심은 없었는지 금세 선생님에게로 열중하는 알리야를 힐끗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멍하게 칠판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머릿속으로 어제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숲 한복판에 한가득 피어 있던 금빛 꽃밭과, 검은 고양이를.


‘우와! 이게 다 골든 호르테야?’


마리네뜨는 제 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나는 꽃밭이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뻥 뚫린 하늘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밝은 햇빛이 꽃들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반짝거렸다.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금빛 꽃밭이 파르르 물결쳤다. 원래도 무척 아름답게 생긴 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한데 모여서 햇빛까지 받고 있으니 마치 황금더미를 눈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꽤나 넓은 공터라서 그런지 나무들이 그렇게 빽빽하지 않아 햇빛을 가리는 나뭇잎들이 거의 없었다. 어둡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숲에 이런 공간이 있었던가. 몇 번 와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나 깊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전설로나 알려져 있던 꽃들이 이렇게나 많이 피어있는 광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쉽사리 믿겨지지가 않았다.


‘진짜 예쁘다….’


꽃밭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은 마리네뜨의 눈이 반짝거렸다. 바로 앞에 있는 꽃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유연하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꽃의 줄기를 붙잡고 살짝 뒤로 꺾었다. 똑, 소리와 함께 하얀 손가락이 꽃 한 송이를 꺾어들었다. 활짝 웃으며 기뻐하던 마리네뜨가 살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빛에 서 있는 마리네뜨와는 달리 어두운 숲의 그늘 아래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제 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검은 물체를 돌아보며 소녀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데려와줘서 고마워.’


으르르, 짧은 울음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마치 알겠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에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울음소리만 들으면 분명 짐승의 그것인데 이상하게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왜일까?


이 이상 다가오지 않겠다는 듯 제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블랙캣’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리네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블랙캣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땅에 붙박힌 고목나무처럼 꼼짝도 않고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초록빛 눈동자를 보며 마리네뜨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제 손에 있던 꽃을 블랙캣의 귓가에 살짝 꽂아주었다. 새까만 어둠 사이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은은하게 빛나는 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마리네뜨는 방금 전보다도 훨씬 검은 기운이 옅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쫑긋 솟은 검은색의 귀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잠깐 망설이던 마리네뜨가 천천히 손을 뻗으려다가, 살짝 뒤로 거둬들였다. 넘실거리는 검은색의 기운을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블랙캣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두려워하는 제 마음을 아는지, 석상처럼 꼼짝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만 같았다. 마리네뜨는 결심했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블랙캣에게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하지 않을까 싶었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만져본 적이 없는 느낌이었다. 분명 부드럽기는 했지만 그것은 털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털이랄 것이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매끄러운 옷감을 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신기한 느낌에 몇 번 더 쓰다듬었다. 스르륵 눈을 감고 기분 좋다는 듯이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물었다.


에, 그러니까, 뭐라고 물었더라? 여, 여…,


“마리네뜨!”

“헉!!”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마리네뜨는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칠판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은 물론이고 온통 제게로 쏠려 있는 반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고 마리네뜨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네 차례란다. 다음 페이지를 읽어보렴.”

‘마리네뜨, 28페이지야.’


작게 속삭여주는 알리야에게 감사하며 마리네뜨는 재빨리 28페이지를 펴들었다.


“옛날 옛날에 무척 잘생긴 청년이 있었답니다….”



청년은 이 나라에서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어요. 청년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온 나라에 파다했고, 청년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답니다. 그 중에서는 청년에게 반해서 그 자리에서 청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아가씨는 저 하늘의 별보다 많은 재물을 약속했고, 어떤 여성은 나라에서도 제일 가는 귀족 집안의 후계자로 청년에게 고귀한 지위와 명예를 약속했습니다. 또 어떤 아가씨는 청년에 못지 않게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이 사랑하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옆집에서 자란 소꿉친구 아가씨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고 이미 결혼하기로 어렸을 적부터 약속했던 사이였어요.


예쁘게 사랑하던 두 사람에게도 시련은 찾아왔습니다. 동쪽 숲의 경계선에 살고 있던 마법사가 청년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마법사는 온갖 방법들을 동원해 청년에게 구애했지만, 청년은 이미 마음에 정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마법사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몇 번을 찾아와도 끊임없이 거절하는 청년에게 마법사는 체념했다는 듯이 웃으며 들고 있던 음료수를 내밀었습니다. 이별의 선물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청년은 받지 않았습니다. 마법사가 주는 것은 그 무엇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선물을 거절하는 청년을 보며 마법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악수를 청했습니다. 얼떨결에 내밀어진 손을 맞잡은 청년은 손가락에서 따끔거리는 감촉을 느꼈습니다.


그와 동시에 청년은 제 연인에 관한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법사와 같이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처녀는 사방을 헤맸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연인을 찾아 돌아다니던 처녀는 어느 한 호숫가를 발견했어요. 잠깐 쉬어가야지 하면서 호숫가에 앉아 있던 처녀의 시선 끝에 예쁜 꽃이 보였습니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꽃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처녀는 손을 뻗어 꽃을 꺾었는데, 처녀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저기 호수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 보이지? 저 사람이야.’

‘정말로 딱하게 됐네. 왜 하필이면 동쪽 숲의 마법사한테 걸려서.’


동쪽 숲의 마법사.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녀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처녀의 등 뒤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는 참새 두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법사가 그 남자를 무척 아낀다며? 밖에도 내보내지 않을 정도라던데.’

‘맞아. 정확히는 마법이 풀릴 것을 걱정해서겠지.’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는 마법은 그 효과가 길지 않아. 당사자를 보는 순간 바로 떠오를 테니 격리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수다스럽게 재잘거리는 소리에 처녀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새들이 수다를 마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까지요. 그 대화 속에서 처녀는 마법사가 자신의 연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마법사는 청년을 자신의 저택 옆에 세워진 동쪽 탑에 가두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산책 정도는 가능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새들의 대화 중에 처녀가 가지고 있는 꽃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새들은 그 꽃이 행운을 불러올 것이니 만약 처녀가 그 꽃을 가지고 간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처녀는 청년을 구하기 위해 동쪽 숲으로 향했습니다.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금색 꽃을 손에 꼭 쥐고서요.


며칠간 꾸준히 걸어 처녀는 마침내 동쪽 숲에 도착했습니다. 웅장해 보일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이 한데 모여 있는 숲의 모습에 압도되었지만, 처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숲 속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숲은 울창하고 그만큼 어두웠지만, 처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신기할 정도로요. 길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처녀의 손에 들려 있는 꽃이 은은하게 어둠 속에서 빛났습니다. 마치 처녀를 인도해주는 것처럼.


한참을 걷다 보니 마법사의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도 낮이라 그런지 저택 앞으로 산책을 나와 있는 청년을 보고 처녀는 목이 메었습니다. 앞뒤 생각하지도 않고 청년의 앞에 나선 처녀는 질문했습니다.


‘나를 기억해?’


처녀의 모습은 엉망이었습니다. 집을 나서 오랜 시간 여행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했으니까요. 아름답고 매끄럽던 갈색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게 뻗쳐 있었고 깨끗하던 옷은 온통 다 헤져 있었습니다. 청년은 물론이고 처녀의 부모님조차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꾀죄죄했습니다.


반면 청년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직접 마주하면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는 했지만, 과연 이런 지금의 자신을 보고도 청년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러한 생각에 창피해져서 고개를 숙인 처녀를 가만히 쳐다보던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당연히.’


그 말과 함께 처녀를 끌어안았습니다. 놀라는 처녀에게 청년은,


‘내가 너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라고 덧붙였습니다.


처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었는지는 청년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거죠.


재회를 기뻐하던 두 연인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은 아무리 자신이 숲을 빠져나가려고 해도 걷다 보면 늘 저택으로 돌아오게 된다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처녀는 괜찮을 거라며 청년의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앞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나무들이 들썩거리더니 가지들이 연인들의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습니다. 마법에 걸려 있는 나뭇가지들의 움직임을 보며 당황하는 청년과 달리 처녀는 가까이 다가가 꽃으로 나뭇가지를 건드렸습니다.


꽃잎이 닿자마자 뒤로 슬슬 물러나면서 길을 열기 시작하는 나뭇가지들에 두 연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계속해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꽃으로 건드리며 나아가던 연인들이 숲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찰나, 뒤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청년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마법사가 뒤를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연인들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소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희미하게 다가오던 공포심도 점점 커져갔지요.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처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공중을 날아서 바로 뒤에까지 쫓아온 마법사에게 처녀는 들고 있던 꽃을 던졌습니다. 꽃이 닿자마자 마법사의 몸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하며 가루가 되어버린 마법사의 몸과 바스라진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은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두 연인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놀라는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에게 처녀는 자신이 겪었던 무용담들을 전부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저기를 떠도는 음유시인들도 그 자리에서 두 연인이 겪었던 일들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가서 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녀는 말했습니다. ‘마법은 강합니다. 그렇기에 마법을 이기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에요. 저와 제 연인을 구해준 이 아름다운 꽃에 경의를 담아, 이 꽃을 골든 호르테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금색의 행운이라는 의미로.’”


중얼거리듯 말을 꺼내던 마리네뜨는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풀밭 위에 가만히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블랙캣에게 소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고 있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다시금 말을 꺼냈다.


“재미있었어?”


미동도 않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살짝 눈매를 찡그린 것 같기도.


“솔직하네, 너.”


가만히 앉아 있던 블랙캣의 꼬리가 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불평을 말하는 걸까? 애완동물을 키워보지 않아서 그런지 쉽사리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 동물이라고 할 수 있나? 정말로?


블랙캣과 만나고부터 벌써 1주일이 넘게 지났다. 그 후로 마리네뜨는 매일매일 학교가 끝나고 블랙캣을 만나러 오고 있었다. 접선 장소는 처음 만났던 숲과 붙어있지만 마을에서는 꽤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정했다. 집으로 데려갈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마을로 데려가기엔 블랙캣은 너무 눈에 띄었으니까. 블랙캣이 위험하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을 테고.


마리네뜨는 블랙캣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초록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평범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 한층 그 생각이 강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기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느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하기엔 블랙캣은 무서울 정도로 영리했다. 


말수가 적은 말동무를 두는 기분이 이런 걸까? 분명 외양을 보면 동물에 가까웠지만 반응만 보면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믿겠다 싶을 정도로 확실했다. 마치 자신이 하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비록 대답하지는 않지만 움직임과 더불어 미세하게 움직이는 표정을 보고 긍정과 부정의 의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길가를 쏘다니는 동물들이나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란 말이야. 그렇게 재미가 없었어?”


블랙캣이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다는 것 같아 마리네뜨는 피식 웃었다.


“낭만적이지 않아? 사랑하는 연인을 한 눈에 알아보다니 이 얼마나 로맨틱해?”


홱 고개를 돌리는 블랙캣의 반응에 마리네뜨가 볼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하여간 너나 알리야나 소녀의 감성을 너무 모른다니까. 그나저나 너 말이야.”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변했네.”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깜빡거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다시금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죽 웃고 있는 블랙캣을 바라보며 마리네뜨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처음에 봤을 때보다 좀 윤곽이 뚜렷해진 것 같달까…. 처음에는 늑대같은 무서운 짐승인가 싶었단 말야?”


뾰족 솟은 고양이 귀와 달리 몸의 형태는 아무리 봐도 동물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털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매끈하게 뻗은 팔다리라던가, 전체적인 윤곽은 마치.


“사람…?”

“므르르…….”

“꺄악!!”


블랙캣이 갑자기 입을 열어 울음소리를 내는 것에 깜짝 놀란 마리네뜨가 손을 거둬들였다. 마리네뜨의 반응에 블랙캣은 재빨리 입을 닫아버렸지만 눈은 마치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물기에 젖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 날처럼.


처음 꽃밭에서 블랙캣을 쓰다듬을 때 마리네뜨는 물었습니다.


‘여기서 살아?’


으앗! 블랙캣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깜짝 놀랐던 마리네뜨가 반사적으로 손을 거뒀습니다. 괜히 미안해져서 다시금 조심조심 블랙캣의 머리에 손을 올렸습니다.


‘혼자?’


블랙캣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방금 놀란 소녀를 배려하듯이 아주 살짝,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소녀만이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요.


‘하지만 이 숲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끄덕끄덕도 절레절레도 아닌, 그저 소녀를 빤히 쳐다보는 블랙캣의 시선은 마치 알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외롭지 않아?’


이번에도 반응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는 블랙캣과 시선을 마주했습니다. 방금 전보다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소녀의 마음 한 구석이 쿡쿡 쑤셔왔습니다. 방금 전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울음소리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석고상처럼 앉아 있었음에도 소녀의 눈에는 왠지 블랙캣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갑자기 제 손에 머리를 부빗거리는 블랙캣의 행동에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깜빡거렸습니다. 이건 무슨 행동일까요? 애교라도 부리는 걸까요? 마치 가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보여서 얼떨떨해진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습니다.


‘으앗, 알았어. 그럼 나랑 친구하자! 내가 널 만나러 올게. 나랑 같이 놀자. 그러니까 울지 마! 아니, 우는 게 아닌가? 아무튼!’


왜 그 순간 친구하자는 말이 나왔는지는 모릅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정말 친구같은 관계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블랙캣을 마주보던 마리네뜨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질문했다.


“너 설마…, 사람이었어?”


블랙캣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들짝 놀라는 소녀의 얼굴이 살짝 빨갛게 물들었다.


“내가 하는 말 다 알아듣는 거야? 진짜?”


뭘 새삼스럽냐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과는 달리 소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떡해, 아, 진짜.”


뭔가 고민하는 것 같던 소녀가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이 블랙캣을 향해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


멀뚱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뭐랄까, 처음부터 사람인 줄 알았으면….”


좀 더 정중하게 친구가 되자고 했을 텐데. 차마 뒷말을 내뱉기가 창피해져서 마리네뜨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나름 예의있게 대한다고 대한 건데 사람한테 그랬다고 생각하니 다시 없을 무례한 짓이잖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구하자고 하다니! 아, 아니 그렇게 따지면 동물이랑 사람은 인사법 자체가 다르지 않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으악, 얘 입장에선 내가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마리네뜨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을 따라 일어서듯 네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선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말할게.”


나랑 친구가 되어줄래?


“으앗!”


갑자기 펄쩍 일어나 자신을 끌어안는 블랙캣의 행동에 마리네뜨가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검은색의 어깨가 눈 앞에 보였다. 생각보다 그가 키가 크다는 사실에 순간 마리네뜨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평소와 같은지, 조금은 다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몸은 무척 따뜻했고 소중한 것을 감싸안고 있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서,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블랙캣의 등에 닿지 못하는 두 손이 허공을 어색하게 배회했다.


새삼스레 블랙캣에 대해 생각하던 마리네뜨의 시선에 무언가가 언뜻 비쳤다. 소녀가 푸핫,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너 귀엽다.”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검은 꼬리가 마치 지금 블랙캣의 기분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여서, 절로 편안해지는 기분에 마리네뜨는 피식 웃으며 블랙캣의 등을 조심스럽게 껴안고 토닥토닥 두드렸다. 머리 위로 쫑긋거리는 귀가 귀여웠다. 옆에서 얼굴을 자세히 보니 금색에 가까운 머리카락들이 뻗쳐 있었다. 색이 좀 탁하긴 했지만.


“이름이 뭐야?”


한참 뒤 블랙캣을 놓아주고 다시 풀밭에 앉은 마리네뜨가 그렇게 질문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블랙캣의 모습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가 보다 싶어 마리네뜨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블랙캣은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


다시 고개를 내젓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감을 잡았다.


“이유를 모르는구나.”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이제까지 네 발로 움직였어? 그냥 두 발로도 걸을 수 있잖아.”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아차 싶었다. 긍정과 부정으로 대답하기 애매한 대답이잖아.


“네가 편하다면 그냥 두 발로 걸어도 돼. 말은 못하는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도리도리. 블랙캣의 반응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마리네뜨가 블랙캣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이 꽤 컸다. 자신보다 훨씬 더. 흠칫하더니 굳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듯한 블랙캣의 태도를 보며 마리네뜨는 블랙캣의 성격이 꽤나 신사일 거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럼 잘 부탁해.”


헤실 웃는 마리네뜨에게 대답하듯 블랙캣이 살짝 마리네뜨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블랙캣은 꽤나 재미있는 친구였다.


그 때로부터 2주가 훨씬 넘은 시점에서 마리네뜨가 내린 결론이었다. 비록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마리네뜨는 블랙캣만큼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고개를 돌리면 늘 자신을 바라보는 초록빛 눈동자가 있었다. 마치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올곧은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민망해져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먼저 고개를 돌리곤 했다.


블랙캣과 함께 지내면서 마리네뜨는 여러 가지를 경험했다. 들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고 가끔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산책 장소는 마을 외곽이나 블랙캣과 처음 만났던 숲으로 한정되었지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블랙캣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사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오면 그는 여지없이 최대한 마을과 가까운 지점까지 마리네뜨를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위험하니까 오면 안 된다고 얘기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블랙캣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것임을 알기에 마리네뜨는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지만 조심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마을을 한 번도 멀리 벗어나보지 못한 마리네뜨에게 마을 바깥이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블랙캣과 함께 다닐 때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어둡고 무섭다고만 생각했던 숲도 블랙캣과 함께 다니면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이것저것 떠들다가 들판 위에 나란히 누워 같이 하얀 은하수를 올려다보고 있자면 세상에 단 둘밖에 없는 기분이 들었다.


블랙캣이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들고 온 바구니를 떨어뜨릴 뻔했다. 블랙캣은 외양적으로는 아직 완전히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드문드문 인간처럼 보일 때가 간혹 있었는데, 얼굴에 표정을 드러냈을 때였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이 순간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여서,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가 떴을 때는 이미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미소는 마리네뜨의 마음 속에 꽤나 인상 깊게 기억되었다.


블랙캣을 만나러 가는 건 일주일에 세 번. 매일같이 오기엔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가끔 꽤 늦게까지 있을 때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 혼자 떠들다 보니 매일 오면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 그간의 반응을 보면 블랙캣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반응이 미묘하게 달랐다. 의아했다. 학교를 좋아하나? 뭐, 자신도 공부는 싫지만 친구들 만나는 것은 좋아하니 그런가 싶기도 하고.


요즘 들어 학교가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지는 마리네뜨를 이상하게 여긴 알리야의 추궁에도 마리네뜨는 그저 에헤헤 웃으며 넘겼다. 말해줘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알리야는 좋은 친구고 분명 비밀로 해달라면 비밀로 해주겠지. 하지만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속으로만 갈무리했다.


작은 비밀이 생겨난 것만 같았다.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비밀.


학교가 끝난 뒤 마리네뜨는 언제나처럼 블랙캣과 만나던 들판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들판으로 다가갈수록 저 멀리에 검은색 점처럼 찍혀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역시나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던 블랙캣의 손에 금빛의 꽃이 들려 있었다. 인사의 의미로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던지며 미소짓는 마리네뜨와 달리 블랙캣은 소녀를 보자마자 놀란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마리네뜨가 들고 온 바구니를 블랙캣에게 건넸다. 부모님이 하는 빵집에서 갓 구운 빵들이 수북히 들어 있었다. 바구니를 받아든 블랙캣이 옆에 그걸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마리네뜨에게로 몸을 숙였다. 손을 뻗어 가지고 온 골든 호르테를 제 머리카락에 조심스레 엮어주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아무런 반응도 없이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블랙캣의 태도에 마리네뜨의 입가에서 미소가 점점 걷혔다. 힘없이 피식 웃으면서 마리네뜨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아,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어. 들어줄래?”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에게 소녀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대회가 있었거든. 별 건 아니고, 예쁜 옷을 만드는 대회라고 해야 하나? 이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수도에 가서 공장을 견학할 수 있대, 굉장하지 않아? 그래서 열심히 준비했거든.”

“그르?”

“근데 졌어.”


깔끔하게 인정하는 마리네뜨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나름 자신이 있었단 말이야. 우승하고 나면 어떤 말을 할지도 생각해뒀었구. 근데 어…, 그래, 왜 나랑 똑같은 디자인의 의상을 그 애가 가지고 나온 걸까. 차례는 내가 훨씬 뒤였는데. 덕분에 제출도 못하고 그냥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어.”


웃기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이 퍽 쓸쓸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겠지~! ……근데 지금 왠지 털어놓고 싶어서.”


너라면 다른 곳에 떠들고 다니지도 않을 테니까. 피식 웃으며 블랙캣을 돌아보던 마리네뜨는 갑작스레 깜깜해지는 시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얼굴에 닿는 것이 자신을 끌어안은 블랙캣의 어깨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마리네뜨는 중얼거렸다.


“…위로해주는 거야?”


더듬더듬, 아주 어색하지만 천천히 제 등을 살며시 토닥거리는 블랙캣의 손길이 무척 다정했다. 피식 웃으며 소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블랙캣의 품에서는 숲의 향기가 났다. 마치 숲 그 자체인 것처럼 청량한 풀의 향기와 살짝은 텁텁한 흙의 냄새. 하루종일 숲에서 생활하니 그럴 만했다. 그래서 블랙캣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편안해지는 걸까? 알리야나 다른 누구보다, 너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고 여기게 된 내가 바보같은 걸까?


마음 속에 소용돌이치던 풍랑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마리네뜨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손을 뻗어 블랙캣을 끌어안는 소녀의 눈가에서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꺅?!”


갑자기 드는 부유감에 마리네뜨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을 안고 있던 블랙캣이 난데없이 팔을 뻗어 자신을 안아올린 것이다. 영락없는 공주님 안기에 순간 당황한 마리네뜨가 입을 벙긋거렸다.


“어, 아니. 지금 뭐해?”


블랙캣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연한 노을빛이 블랙캣의 얼굴 위로 물감이 번지듯 번져나갔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해 웃는 얼굴이 꼭 사람처럼 보여서 마리네뜨의 얼굴이 한 순간 확 새빨개졌다. 다행히도 노을빛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마리네뜨를 안아든 블랙캣이 제 목을 살짝 까딱거렸다. 잡으라는 듯한 움직임에 마리네뜨가 손을 뻗어 블랙캣의 목을 껴안자마자 그가 바닥을 세게 차올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숲 속을 빠르게 달려가는 블랙캣을 꼭 붙잡고서 마리네뜨는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블랙캣의 움직임이 멈추자 소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주변이 어두워서 순간 앞에 무엇이 있는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두려움에 마리네뜨는 블랙캣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뭐냐고 묻는 듯한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와앗?!”


작은 탄성이 마리네뜨의 입가에서 터져나왔다.


푸르게 빛나는 불빛들이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이곳이 자신이 블랙캣을 처음 만났었던 골든 호르테 꽃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금색으로 물든 꽃들이 반딧불이의 빛을 받아 은은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꽃들 주변에 가득한 둥근 불빛들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딧불이였다.

반딧불이의 숲.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우와, 엄청 예뻐!”


블랙캣의 품에서 내려온 마리네뜨의 입가에 한가득 웃음이 번졌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정신없이 꽃밭을 바라보는 마리네뜨를 지켜보던 블랙캣의 눈가가 예쁘게 휘어졌다.


마리네뜨는 꽃밭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자신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 반딧불이들의 모습을 조용히 구경하던 마리네뜨가 환하게 웃으며 블랙캣을 돌아보았다.


“여기, 정말 예쁘다!”


방금 전의 우울했던 일들은 까맣게 잊었는지 즐겁게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모습이 블랙캣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블랙캣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리네뜨는 이리 오라는 듯이 블랙캣에게 손짓했다. 천천히 걸어오는 블랙캣의 손을 붙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기는 마리네뜨의 손은 무척 하얗고 따뜻했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제 손을 빤히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그르….”


작게 울리는 울음소리,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살짝 숨을 집어삼켰다. 평소보다 훨씬 차분하게 저를 향하는 시선은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듯 보여서, 마리네뜨는 피식 웃으며 남은 한 손으로 블랙캣의 뺨을 쓰다듬었다.


“싫다. 왜 그런 얼굴하고 있어?”


네가 더 아파할 필요 없는데.


“예쁜 장면을 보여줘서 고마워. 덕분에 다음에는 더 좋은 옷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던 블랙캣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살짝 휘어졌다. 얘 오늘 자주 웃네? 당황하는 마리네뜨의 앞에 블랙캣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잡고 있던 마리네뜨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그가 마리네뜨를 올려다보았다. 소중한 것을 대하듯, 마치 기사와 같은 정중한 행동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뻣뻣해진 고개를 애써 꽃밭으로 돌리며 쑥스러움을 무마하는 마리네뜨를 블랙캣은 상냥하게 기다려주었다. 소녀가 이제 만족했다고 말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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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3p 포함 총 85p입니다.

본편이 55, 외전이 27p로 외전은 블랙캣 시점의 본편입니다. 좀 더 동화스러운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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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는 나중에 업로드해서 올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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