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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2





Episode 3.

비둘기를 다루는 남자






파리의 어느 한 건물 안에 자리잡고 있는 사무실이 있었다.


창문에 설치된 블라인드가 모두 닫혀 있는 덕분인지 사무실 안은 상당히 어두웠다. 3인은 앉을 수 있을 법한 소파들이 테이블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소파들 바로 뒤에 문을 마주하는 자리에 놓여 있는 책상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전화를 하고 있는지 남자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뭐라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남자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웃고 있지만 왠지 싸해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그리던 남자는 이내 전화를 끊고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책상에는 파리의 주요 일간지들인 르 몽드, 르 피가로, 리베라시옹을 포함한 각종 신문들이 올려져 있었다. 성향이 각기 천차만별이고 특성도 죄다 다른 이 신문들이 이렇게나 의견일치를 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 파리 시내를 떠들썩하게 하는 이슈가 모든 신문들의 1면을 보란 듯이 장식하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파리에 등장한 수수께끼의 영웅?’


이거였다. 기사에 포함되어 있는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남자가 피식 조소를 흘렸다.


“재미있어지겠군.”





///



왜 꼭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를 않는 걸까.



“펠릭스, 안녕!”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소녀를 가볍게 무시하며 펠릭스는 제 갈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역시나 소녀는 포기하지 않고 펠릭스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상기된 눈동자, 뺨에 홍조를 띄고서 마리네뜨는 열심히 펠릭스를 훔쳐보았다. 며칠 동안 따라다녀 본 결과 펠릭스는 말을 걸든 안 걸든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하기는 하지만. 무시하는 것이 더 편한 모양인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신문을 읽고 있는 펠릭스의 옆얼굴에 마리네뜨는 시선을 집중했다. 진지한 표정이 참 멋지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헤실 웃었다. 에스미는 콩깍지라고 뭐라 그러지만 어떡해. 그래도 멋있는걸.


펠릭스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까지도 멍해 있던 마리네뜨는 그가 입을 열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저기.”

“으, 응?”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교실인데.”



어느 새 교실 앞까지 다 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정말 길다고 생각했던 복도가 왜 이렇게 짧은 걸까. 역시 사랑의 힘?


꺄악, 사랑이래! 자기가 생각하고도 좋은지 양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포옥 감싸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청회색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았다. 뭘 잘못 먹었냐고 말하는 듯한 그 시선에도 마리네뜨는 행복한 듯이 웃으며 펠릭스에게 대답을 건넸다.



“그그렇구나! 맞다, 이거. 주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허둥지둥 가방을 뒤져 커피 한 캔과 쿠키봉지를 꺼낸 마리네뜨가 펠릭스의 손을 잡고 그것들을 쥐어주었다. 놀랐는지 잠시 가만히 있던 펠릭스가 다음 순간 입을 열었다.



“받을 수 없….”

“그럼 이만 갈게. 나중에 봐!”



그것을 건네주자마자 마리네뜨는 등을 돌렸다. 크게 손을 흔들며 반대쪽에 있는 자신의 교실 방향으로 달려가는 마리네뜨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펠릭스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나중에…?”



또 오겠다는 뜻인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는 펠릭스의 손에 들린 가방 안쪽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오올, 인기 많은걸~?’

“조용히 해, 들키면 어쩌려고.”



펠릭스가 나직히 주의를 주었지만 플랙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것대로 재밌지 않을까나?’

“…까망베르 치즈 안 준다.”

‘헉, 그건 안 되지! 내 사랑 까망베르 치즈~!’

“알면 좀 조용히 좀 해. 가뜩이나 골치 아프니까.”



어쩌다 제 인생에 이렇게 귀찮은 녀석이 하나 더 끼어든 건지. 암담해지는 기분을 가눌 수가 없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재밌지 않아?’

“구경하는 너야 재밌겠지.”

‘에이, 왜? 원래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야~ 덕분에 삶이 꽤 재미있어지지 않았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런 녀석은 하나로도 벅차.”

‘솔직하지 못하구만.’



그저 재미있는지 계속 웃고만 있는 플랙의 목소리에 펠릭스는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했다. 그가 소곤거렸다.



“이제 교실에 들어가야 하니까 정말 조용히 좀 해줘. 안 그러면 다음에는 안 데려올 거니까.”



 절레 고개를 내젓다가도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펠릭스가 교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소란스럽던 교실이 한 순간 조용해졌다. 책상 주변에 모여서 떠들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잠깐 펠릭스에게로 머물렀다가 금방 다시 사라졌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 조용해서 좋다고 생각하며 교실 안으로 들어서는 펠릭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녕!”



무시했다. 휙 고개를 돌리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펠릭스의 뒤를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앉아 책을 꺼내는 펠릭스의 앞에 다가온 상대가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죽삐죽 솟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갈색빛 피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장난기가 많을 것 같아 보이는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플랙과도 좀 닮아 있었다.


무시하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소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펠릭스에게 말을 걸었다.



“인사를 했으면 대답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좋은 아침.”



그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금 책에 눈을 돌리는 펠릭스를 보며 소년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인사해준 건 무척 고마운데 말이야…. 왠지 지금 인사가 꼭 ‘시끄러우니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같은 느낌인데?”



정곡을 찌르는 소년의 질문에도 펠릭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꿋꿋하게 제 할 일에 충실하는 펠릭스에게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거는 소년은 확실히 강적이었다.



“대화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너무하네. 책만 보고 살면 안 심심해?”

“….”

“오늘 수학 들었지? 으악, 난 수학 진짜 싫던데 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문제를 푸는 거야?”

“….”

“오늘 점심은 뭐 먹을래? 혹시 예정 없으면 같이 먹어도 되냐?”

“…이러는 목적이 뭐야, 너.”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재잘재잘 떠드는 소년의 모습에 결국 펠릭스는 독서를 포기하고 조용히 책 표지를 덮었다. 매일매일, 벌써 일주일이 넘게 자신에게 다가와 꼬박꼬박 인사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무리 무시하고 냉랭하게 굴어도 질리지도 않고 달라붙는 게 꼭 진드기같다. 자신을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일까? 아니면 떨어질 콩고물을 노리고 달라붙는 걸까. 하지만 눈앞의 소년이 그런 생각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는 사실을 펠릭스라고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소년은 개구지게 웃으며 펠릭스의 말을 정정했다.



“너가 아니라 앨빈이야. 앨빈 에반워프.”

“그래서.”

“응? 별 거 없어. 그냥 너랑 친구가 되고 싶을 뿐.”

“거절한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딱 잘라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런 펠릭스에 앨빈은 깜짝 놀란 듯하다가도 이내 싱글싱글 웃었다.



“우와, 무서워라. 냉랭하기 짝이 없네.”



과장된 몸짓으로 양 팔로 제 몸을 감싼 앨빈이 바들바들 떠는 척 열연을 펼쳤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지 가만히 한쪽 눈가를 찡그리는 펠릭스에게 앨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다지 나쁜 녀석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너.”

“뭐?”



펠릭스가 되묻는 순간, 딩동댕동 소리가 교내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앨빈이 중얼거렸다.



“아, 종 쳤다. 그럼 지금은 이만 돌아갈게.”



선선히 의자에서 일어나 본인 자리로 돌아가는 앨빈을 바라보다가 펠릭스는 짧게 탄식을 지르더니 책상에 털썩 엎드려 팔로 머리를 감쌌다. 미치겠군. 지금은, 이라고 말하는 건 다음에 또 오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잖아.


머리가 아팠다. 다가오지 말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음에도 끈질기기 짝이 없다. 요즘 들어 왜 이런 녀석들만 꼬이는 걸까. 가방 안쪽에 고이 잠들어 있는 플랙 녀석만도 이미 충분히 골치가 아프건만.


가만히 중얼거렸다.



“피곤해.”





“으음….”



나무에 기댄 자세로 마리네뜨는 살짝 옆을 내다보았다. 오늘도 역시 똑같은 벤치에 앉아 독서에 빠져 있는 펠릭스의 모습을 흘깃흘깃 살피는 마리네뜨의 손에는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이번에 극장에서 열리는 클래식 음악회 티켓으로, 그쪽 분야에서 일하는 이모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펠릭스를 보려다가도,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급하게 다시 나무 뒤로 숨기를 반복하는 마리네뜨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 말을 걸 때는 그래도 나름 괜찮았는데, 데이트를 신청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긴장이 된다.


손에 든 티켓들을 꼬옥 쥐고 마리네뜨는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무 뒤에서 나와 펠릭스가 있는 벤치로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펠릭스가 책에서 눈을 떼고 마리네뜨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흠칫, 몸을 움츠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마리네뜨를 보고 한숨을 쉬던 펠릭스가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안 되는데!


떠나려는 듯이 움직이는 펠릭스에 마리네뜨는 후다닥 뛰어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런 마리네뜨를 돌아보더니 펠릭스는 걸어가던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펠릭스의 모습이 마치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만 같아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더듬이가 예쁜 하트를 그려냈다.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펠릭스를 바라보는 마리네뜨의 눈이 반짝거렸다. 말은 꽤나 더듬거렸지만.



“저, 저기, 펠릭스. 혹시 오늘 시간 있니? 이번에 클래식 음악회 티켓을 구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우물쭈물하면서도 끝까지 질문을 마치고 마리네뜨는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가 무색하게 펠릭스는 살짝 눈을 감은 채로 관심없다는 듯이 홱 고개를 돌렸다. 거절의 대답이라는 걸 짐작한 마리네뜨의 어깨가 축 처졌다.


마리네뜨에게서 돌아선 상태로 펠릭스가 툭 말을 꺼냈다.



“선약이 있어.”

“그, 그럼. 다음에 시간이 나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돌려 사라지는 펠릭스의 등을 향해 마리네뜨는 ‘같이…, 가….’를 중얼거리다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좋은지 더 이상 쫓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그저 하염없이 펠릭스가 사라진 방향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 입을 우물거리다가 쓸쓸하게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손에 들려 있던 티켓의 가장자리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살짝 구겨졌다.




그런 마리네뜨를 뒤로 한 채 펠릭스는 약속장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공원을 벗어난 뒤 한참을 걷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골라 타고는, 몇 분 후에 내려서 다시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보통 이 시간대의 파리 거리들은 대체로 사람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펠릭스가 걷고 있는 길의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비싸보이는 차가 몇 대 지나다니는 것 말고는 상당히 한적했다.


주택가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방문할 만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변의 집들이 커서 그런지 거리에는 넓은 그늘이 져 있어 햇빛이 거의 들이치지 않았다. 싸할 정도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그늘길을 한참을 걷던 펠릭스는 어느 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옅은 베이지색의 벽 위에 금빛 지붕이 둘러진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이 근방의 집들이 모두 훌륭한 대저택들이긴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생김새였다. 창문들은 모두 아름다운 나비 문양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져 있었고,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벽들에도 각각 곡선의 문양들이 얇게 그려져 있었다. 그 위풍당당한 자태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전을 연상시켰다.


파리에 사는 시민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유피테르’ 가의 대저택 앞에서, 펠릭스는 가만히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소리와 함께 초인종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는 화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닫혀 있던 철창문이 열리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펠릭스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금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익숙하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저택 안으로 들어온 펠릭스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 바탕에 검은색 방울무늬가 그려져 있는 정장을 차려입은 금발의 여자였다.


엘렌 생쿼(Hélène Sancoeur). 이 저택 주인의 비서이자 저택의 관리까지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파일을 손에 들고, 단정하게 틀어올린 머리에 펠릭스만큼이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엘렌이 펠릭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숙부님은?”

“예정에 좀 차질이 생기셔서, 응접실에서 일단 기다리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엘렌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말없이 엘렌의 뒤를 따라가는 펠릭스의 주변으로 나비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확히는 살아있는 나비가 아니라, 그려진 나비들이었지만.


이 저택의 가장 큰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 반짝거리는 신전같은 외관도 아니며, 파리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는 오랜 역사도 아니다.


건축학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이 저택의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건 바로 나비였다. 나비가 그려지지 않은 장소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비들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진 창문은 물론이고 복도와 기둥, 심지어는 바닥에까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나비 문양들은 거의 천 년 전쯤에 세공된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상황인지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건물을 소유한 유피테르 가의 상징물이 나비가 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이 저택을 ‘나비 저택’ 이라고 불렀다.


응접실로 안내받아 소파에 털썩 앉은 펠릭스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군더더기 없는 배치와 깔끔한 응접실 안을 말없이 살펴보고 있는 펠릭스의 앞에 엘렌은 차와 쿠키가 든 쟁반을 내려놓았다. 금빛 나비가 새겨진 하얀 찻잔에 엘렌이 차를 따라주자 펠릭스는 천천히 왼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슬핏 웃으면서 찻잔을 내려놓고 펠릭스는 입을 열었다.



“여전히 깔끔하군.”

“아닙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엘렌이 다시 질문했다.



“학교 생활은 어떠십니까?”

“별로. 그냥저냥 지내고 있지.”

“….”

“걱정할 필요 없어. 성적은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정중하지만 걱정이 묻어나는 엘렌의 말투에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너는 날 보면 늘 그런 걸 묻는군.”



꽤나 즐거운지 무표정을 거두고 작게나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파리에 히어로라는 자들이 나타났었죠.”



찻잔을 들던 펠릭스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며 다시 차를 마시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담담하게 고하듯 말했다.



“의원님께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숙부님이?”

“네.”

“나한테 그런 걸 말해도 되는 건가?”

“도련님이 의원님께 해가 되는 일을 하실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침착하게 맞받아치는 엘렌의 대답에 펠릭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금 차를 호록 마시는 펠릭스의 옆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서서 엘렌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도련님.”

“….”

“의원님을 너무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답이 없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재차 말을 꺼냈다.



“도련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려고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늘 혼자 지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꺼내는 건조한 대답에 펠릭스는 어이가 없었는지 하, 기가 찬 듯한 메마른 웃음을 내뱉었다.



“내 뒷조사를 한 건가?”

“…어느 정도의 보고는 받고 있습니다. 설마 의원님께서 도련님의 후견인이라는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펠릭스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에도 또박또박 대답을 내놓는 엘렌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엘렌은 계속 말을 꺼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눌러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 커서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도련님은 좀 더 자유로워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너의 의지인가?”

“네, 저의 의지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는 엘렌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펠릭스는 결국 나직이 한숨을 쉬며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그럼 그게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도 알겠군.”

“알고 있습니다.”



꿋꿋하게 대답을 마치는 엘렌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는 딱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펠릭스는 엘렌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고 직감했다. 매사에 더없이 합리적이고 필요 이상으로 말하기를 삼가는 성격의 비서는 지금 자신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괜찮냐고 매번 물을 때마다 언젠가 이런 말이 나오지는 않을까 막연히 짐작하기는 했었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니 조금은 놀라웠다.



“나는….”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에펠탑 근처에 있는 샹 드 마르스(Champ de Mars) 공원.


많은 가족들과 관광객들이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두르고 있는 공원에 모여 하하호호 떠들고 있었다.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먹는 무리들과 벤치에 앉아 있는 커플들, 사진기를 들고 공원 안을 기웃거리는 이들도 있었으며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의 경우 부모님과 같이 온 경우가 많았지만 보통은 친구들끼리 놀러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공원 한 구석에 모여 있는 네 명의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애를 세 명의 아이가 둘러싸고 있었다.



“정말 레이디버그랑 아는 사이야?”



곱슬거리는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콧등에 주근깨가 살짝 나 있는 여자아이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렇다니까?”



갈색 단발머리를 한 여자애는 자신 있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정말 친해. 얼마 전에도 서로 안부인사 주고받았거든.”

“근데 왜 요즘은 안 보이는 건데? 저번 정전 사건 이후로 소식이 안 들리는걸.”



곱슬거리는 짧은 금발머리의 남자애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걸 본 갈색 단발머리 여자애는 키득 웃었다.



“너 레이디버그 좋아해? 루크.”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멋있잖아!”

“그게 좋아하는 거지.”



말문이 막힌 루크를 뒤로 한 채 검은색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갈색 피부의 남자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그럼, 릴리. 나 번호만 좀 알려주면 안 될까? 목소리만이라도 들어보고 싶은데.”

“그건 곤란해 테오. 영웅의 사생활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어?”

“그런가….”



어리긴. 쯧쯧 혀를 차는 릴리의 앞에서 테오는 실망한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분위기를 개선하려는 건지 금발의 여자아이가 발랄하게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전해줘! 무지무지 기대하고 있다고 말이야.”

“그래.”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릴리의 모습에 세 아이는 그저 좋은지 즐거운 얼굴로 수군수군 대화를 주고받았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도 이미 화제 만발이었지만, 파리에서 벌어졌던 정전 사태에 도움을 준 사람이 두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자마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단 두 번 나타났을 뿐인 히어로들에 대해 파리의 언론들은 제대로 특종이다 싶었는지 그들의 활약상은 신문의 앞면에 대서특필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인기를 견인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히어로들의 등장에 파리 시내가 들썩이고 있었다. 그들의 인기는 특히나 어린 층으로 갈수록 더욱 높아졌다. 그러니, 그런 히어로와 아는 사이라는 릴리의 말에 세 아이가 크게 관심을 두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금발의 여자아이, 로즈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예쁘게 반짝거렸다.



“아, 저기 아이스크림 트럭이 있다!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좋지~! 루크랑 릴리도 먹을 거지?”

“콜. 나는 바닐라. 릴리 너는?”

“난 초코로 부탁해.”

“알았어~”



릴리만을 남겨두고 세 명이 아이스크림 트럭 쪽으로 뛰어가자, 그제서야 릴리는 긴장을 풀고 참고 있던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어쩌지?


사실 릴리는 레이디버그와 친하기는커녕 만난 적도 없었다. 신문기사에 떠 있던 사진으로 얼핏 보기는 했지만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시작은 간단했다. 그냥 미아 저 계집애가 예쁜 옷을 입고 와서 자랑하는 게 얄미워서 충동적으로 내뱉었던 거짓말일 뿐인데, 문제는 다들 그 말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순순히 믿고 있다는 거다.


처음부터 농담이었다고 해야 했다. 문제는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애들의 관심어린 시선이 좋아서 나중에 말하자고 계속 해명을 미루다 보니 어느 샌가 일이 너무 커져 있었다. 계속 얼버무리는 것에도 슬슬 한계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러다가 정말로 다시는 안 나타나면 어쩌지? 그러면 애들도 언젠가는 수상하게 생각할 텐데. 다시 나타나도 문제기는 했다. 레이디버그와 마주쳤을 때 나를 모르는 것처럼 보이면 모든 게 끝이었다. 어떻게든 해결하자. 의외로 사정을 설명하면 도와줄지도 모르고.


태평한 생각을 하며 벤치에 등을 기대는 릴리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레이디버그랑 친하다고?”



높은 톤이지만 굵기를 봐서는 남자 목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릴리는 짜증이 났다. 이젠 쟤들도 모자라서 상관없는 다른 사람한테까지 레이디버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다니. 저 멀리 트럭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애들의 모습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쟤네는 하여간 너무 목소리가 커서 탈이라니까.



“아, 그래요, 그래. 저 레이디버그랑 친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는 마세요. 가급적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무렇게나 내뱉는 릴리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뒤에 서 있던 남자의 입꼬리가 한 쪽으로 크게 올라갔다.



“그럼, 네가 위험해지면 레이디버그가 나타나려나?”

“네네, 당연…. 네?”



싸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마자, 제 위로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의 주인을 본 릴리의 입술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꺄아아아악!”





///



“하아, 역시 쉽지 않구나.”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마리네뜨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데이트 신청에 실패해서인지 평소보다 더 기운이 없는 마리네뜨의 손에 티켓 두 장이 꼭 쥐어져 있었다.



“마리네뜨, 너무 슬퍼하지 마.”



가방 속에 들어가 있던 티키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작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울해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티키는 재차 한 마디를 더 던졌다.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

“오늘은 정말 바빠서 거절했던 건지도 몰라. 선약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나중에 한가해질 때 다시 같이 가자고 해보자. 응?”



상냥하게 달래는 티키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일순 눈을 깜빡거렸다가, 다시 활짝 웃었다.



“그래 맞아!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구!”



조금은 기운을 차렸는지 다시 밝게 웃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티키는 흐뭇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아직 많이 얘기해보지 않은 사이라 어색해서 거절한 건지도 몰라. 응, 그럴 거야. 솔직히 몇 번 얘기해보지 않은 여자애가 난데없이 같이 공연보러 가자고 하면 좀 난감하잖아. 그래,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조금 더 친해지고 나서 다시 말해볼까. 괜찮아, 시간이야 아직 많으니까.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뭐!”



이 정도에 포기할 만큼 난 약하지 않다고! 계속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리다가 두 손을 주먹쥐고 힘차게 하늘로 뻗는 마리네뜨의 눈동자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티켓을 들고 있던 손을 펴자, 꾸깃꾸깃한 모양새로 손바닥 위에 올려진 티켓이 눈에 들어왔다. 우울해진 마음을 눌려펴듯 티켓을 다시금 반듯하게 펴면서 마리네뜨는 힘차게 중얼거렸다.



“아직 기회는 많으니까! 내일은 분명…!”



아니, 중얼거리려고 했다.



[긴급 속보입니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전광판에 띄워진 광고가 갑자기 뚝 꺼지더니 다른 화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면에 나온 앵커는 최대한 침착하고 빠르게 속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악당이 에펠탑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현재 이 악당은 어린아이 하나를 붙잡아 에펠탑 꼭대기에 인질로 잡아놓고 농성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뭐라고? 놀란 얼굴로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옆에서 티키가 다급히 마리네뜨를 불렀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경찰에서 헬리콥터를 동원했지만, 비둘기 떼에 막혀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마리네뜨. 느껴져!’

“느껴진다니, 뭐가?”



가방 쪽을 내려다보며 작게 소곤거리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재빨리 다음 말을 꺼냈다.



“저번에 말했던 이상한 기운!”

“정말?”



그 때, 전광판에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괴상한 차림새로 비둘기 떼를 타고 에펠탑 주변을 날아다니는 남자에 마리네뜨는 물론 시민들도 모두 경악했다. 하늘을 날고 있어?! 게다가 옷도 이상해!



<내 이름은 미스터 피죤. 레이디버그, 네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순순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을 거다!>


[보시다시피, 이 악당은 레이디버그의 친구를 붙잡고 있다며,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에펠탑으로 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엥? 내 친구?”



설마 에스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마리네뜨는 다시금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비둘기들은 사람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막고 있지만 드론 카메라에는 관심이 없는지, 언론에서 취재를 위해 보내놓은 드론 카메라가 전송한 장면이 뉴스 화면 위로 떠올랐다.


이제 11-12살 정도 될 법한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를 본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보는 아인데?”


[정말 이 소녀는 레이디버그의 친구일까요? 만약 친구라면, 레이디버그는 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음, 어떻게 된 거지….”



에스미가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문제네. 턱에 손을 올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마리네뜨를 티키가 재촉했다.



“마리네뜨. 어쨌든 일단 저기 있는 장소로 가보자!”

“하긴, 악당이 나타났는데 히어로가 가만 있을 수는 없겠지.”



하아, 한숨을 쉬던 마리네뜨가 재빨리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번쩍, 빛이 새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붉은 인영이 건물들 사이에서 휙 뛰어올라 하늘로 솟았다. 모두 전광판에 정신이 팔려 있던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에펠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펠릭스는 엘렌을 쳐다보았다. 엘렌이 조용히 말했다.



“제 전화군요.”



한 치의 동요도 없는 얼굴로 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들었지만, 그 전화의 발신인이 누군지를 확인하자마자 엘렌의 얼굴에 짤막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의원님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엘렌은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펠릭스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전화를 해준 숙부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나저나 방금 그 소리는 핸드폰 벨소리인가? 요즘은 벨소리로 최신 가요를 쓰는 사람들이 많던데, 기본형으로 되어 있는 전화벨 소리조차 참으로 엘렌답다 생각하며 펠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우선 본인부터 돌보는 게 더 좋을 텐데.


혼자인데다 할 일이 없기도 해서 가만히 다 마신 찻잔을 노려보고 있을 찰나였다.



“파트너!”



갑자기 가방 속에서 튀어나와 제 앞으로 다가온 플랙에 펠릭스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깜빡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놀란 게 분명한 펠릭스를 보며 낄낄 웃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불퉁한 목소리라 말했다.



“플랙, 갑자기 나오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지금 아무도 없잖아~ 그것보다, 이상한 게 느껴지는데?”

“이상한 거라고?”

“아마 저쪽도 같은 걸 느꼈을 거야~”



플랙이 말하는 저쪽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들었다. 펠릭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열심히 쿠키를 주워먹고 있는 플랙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후, 응접실 문이 열렸다. 통화를 다 끝냈는지 엘렌의 목소리가 살짝 난처한 기색을 띄었다. 



“도련님, 아무래도 오늘은 사정상 만나뵙지 못할 거 같으시다고…. 도련님?”



응접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펠탑 근처까지 도착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껑충껑충 건물들을 뛰어 에펠탑 바로 앞까지 도착한 레이디버그는 곧이어 낯익은 뒤통수를 발견하고 동작을 멈췄다.



“여, 레이디?”



블랙캣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너도 소식 듣고 왔어?”

“아아, 대충.”

“말해두겠는데, 난 그 여자애 잘 몰라.”



단호하게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잠깐 멍하게 쳐다보던 블랙캣은 곧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기냐는 듯이 자신을 흘겨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겨우 웃음을 그치고 대답했다.



“알고 있어. 애초에 지금 나나 레이디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파리에 있을 리가 없잖아.”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는 듯 능글맞게 웃고 있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괜히 민망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제 어떡하지?”

“레이디는 어쩌고 싶은데?”

“어쩌긴. 저 애도 구출하고, 그 악당이라는 사람도 물리쳐야겠지.”

“계획 있어? 지금 에펠탑 쪽으로 접근하는 건 거의 무리라고 보는데.”

“계획이라면 있지.”



이번엔 레이디버그가 반격할 차례였다.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블랙캣, 미끼 작전이라고 알아?”

“응?”



의미심장하게 웃는 레이디버그의 미소에 불안해졌는지 뒤로 물러서려는 블랙캣의 어깨를 꽉 잡고, 레이디버그는 웃으며 말했다.



“미끼 좀 되어줄래?”





“어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펠탑 바로 옆을 날아다니는 비둘기들 위에 타고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꼭 비둘기와 닮은 모습의 슈트를 입고 있던 남자는 한참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발견하고 만면에 가득 화색을 띄웠다. 에펠탑에서 좀 떨어진 건물의 지붕 위에 선 블랙캣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블랙캣의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남자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혼자 온 건가?”

“우리 레이디까지 출동할 필요는 없거든~ 너는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도발하듯이 말한 블랙캣이 들고 있던 봉을 남자에게로 뻗었다. 순식간에 늘어난 봉이 남자의 턱을 정확히 가격했고, 그 충격으로 남자는 하마터면 공중에서 떨어질 뻔했다. 주변에서 날아다니던 비둘기들이 재빨리 받쳐주지 않았다면 가벼운 상처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쉽다는 듯이 쳇, 혀를 차는 블랙캣에 제대로 약이 올랐는지 남자는 물론이고 남자가 부리는 비둘기들이 모두 블랙캣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비둘기들과 악당이 블랙캣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시각, 에펠탑 꼭대기에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붉은 색 바탕에 검은 점박이가 점점이 박힌 행글라이더는 에펠탑 꼭대기를 한 바퀴 돌다가 전망대 위로 부드럽게 착지했다. 번쩍, 빛이 나는 것과 함께 행글라이더가 사라진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은, 붉은색 바탕에 검은 점들이 그려진 타이즈를 입은 소녀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레이디버그는 꼭대기 근처에 묶여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역시 레이디버그를 발견했는지 깜짝 놀라는 소녀에게로 달려간 레이디버그가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이제 괜찮아.”

“어, 정말 레이디버그…?”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잔뜩 지쳐 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본 레이디버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소녀를 번쩍 안아올렸다. 소녀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꺄악!”

“눈을 감고 나를 꽉 잡아요. 절대로 눈을 뜨지 말고.”

“네?”

“순식간일 테니까.”



당당하게 미소짓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올려다보던 소녀가 이내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뭐라 말하고 싶은지 뻐끔뻐끔 입을 벌리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는 소녀에게 레이디버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우리, 초면이죠?”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레이디버그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지만, 일단은 물어보았다.



“악당은 당신이 내 친구라고 말하고 있던데. 어떻게 된 건지 물을 수 있을까요?”

“…죄,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일이 커질 거라고는….”



정말로 미안한지 새빨개진 얼굴로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를 보며 레이디버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네?”

“나랑 아는 사이라고 해봐야, 이런 일만 겪게 되잖아요.”



영화만 봐도 그렇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상냥하게 웃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릴리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레이디버그는 그런 릴리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레이디버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일단 빨리 가야겠네요. 눈 감아요!”



소녀가 눈을 감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순식간에 요요를 사용해 에펠탑 아래로 내려온 레이디버그가 소녀를 에펠탑 근처에 있던 공원에 내려주었다. 살며시 눈을 뜬 소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세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테오, 루크, 로즈….”

“릴리! 너 괜찮아?!”



헐레벌떡 뛰어온 아이들이 릴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재잘거렸다. 이름이 릴리였구나.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럼, 친구 잘 챙겨줘요.”



그 말과 함께 요요를 던져 비둘기 떼가 몰려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레이디버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세 아이는 릴리를 돌아보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너 짱이다! 진짜 레이디버그랑 아는 사이였어?”

“진짜 멋있더라! 에펠탑 꼭대기에서 부웅 날아오는데, 완전 영화 속에 들어온 거 같았어!”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흥분해서 떠드는 아이들을 말없이 쳐다보던 릴리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아니야.”

“응?”

“거짓말해서 미안해. 나, 레이디버그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전에 만난 적 한 번도 없어.”



고개를 돌려 제 친구들을 똑바로 응시하는 릴리의 얼굴이 매우 단호했다. 할 말을 잃었는지 그저 황망히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릴리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도 구하러 와줬어. 화내지도 않고.”



자신을 보며 웃어주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지금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역시 악당을 상대하러 갔을까. 그 무시무시한 남자를?


그 남자에게 붙들려가던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나 릴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살다살다 악당에게 붙잡혀 에펠탑 꼭대기에 묶이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애초에 지금 상황이 전부 다 꿈만 같았다. 이런 게 현실에서 정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레이디버그가 떠나버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릴리는 중얼거렸다.



“무서운 거구나….”



영웅이란.






한편, 블랙캣과 미스터 피죤은 나름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나 잡아봐라~”



지붕 위를 요리조리 뛰어다니며 비둘기 떼들을 피해다니면서도 블랙캣은 속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왜 아직이지? 그러던 중 블랙캣은 미스터 피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 설마 눈치챘나?


의아해할 틈도 없이 미스터 피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춤을 추듯 엉덩이를 몇 번 씰룩거리던 미스터 피죤이 두 팔을 똑바로 블랙캣이 있는 방향으로 내뻗자, 비둘기 떼들이 한데 뭉쳐 그에게로 덤벼들었다.



“으악!”



삽시간에 덤벼든 비둘기 떼가 블랙캣을 감싸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원을 그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비둘기들이 사납게 구구거리는 소리가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소름끼쳤다.


하지만 잠시 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피죤은 재빨리 비둘기들을 모아 공격을 막아냈다. 피죤의 지시가 사라지자 블랙캣을 감싸고 있던 비둘기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재빨리 지붕 위로 착지하는 블랙캣의 옆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요요였다. 그리고 그 요요에 매달려있는 누군가.



“블랙캣!”

“오, 레이디. 이제야 오면 어떡해~?”



기다리다 몸에 사리가 나올 지경이었다구. 능청스레 대꾸하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눈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미스터 피존을 향해 소리쳤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목적이 뭐야! 죄 없는 어린아이를 붙잡고 사람들을 협박하다니….”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에게 피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뭐?”

“사람 한 둘 정도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당신….”

“인간은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생명을 죽이는데.”



그 한 마디에 요요를 던지려던 레이디버그의 동작이 일순 멈추었다. 블랙캣은 그런 레이디버그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피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피죤은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 드넓은 자연을 파괴하고, 늘상 이용하고 오염시키는 게 누구지? 바로 인간들이잖아. 그런데 본인들은 죽기 싫다고? 그거야말로 이기적인 거 아닌가?”

“….”

“자연과 어울려 지내려고 하기보다는 독차지하고 파괴하기만 하려고 하지. 난 그런 인간들이 너무나도 싫거든.”



히죽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미스터 피죤의 말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악당이지만 그가 하는 말은 별반 틀린 것이 없었다. 인간이라고 해도 결국 동물의 한 종일 뿐인데, 어째서 인간들만이 특별하게 취급되어야 하냐는 그의 의문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 토론해온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입을 딱 다물고 있는 두 히어로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지 미스터 피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모두 없애고….”



다만 그 다음 말이 너무 황당한 게 문제였지만.



“우리 비둘기들의 세상을 만드는 거야!”



홀홀홀 웃으며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미스터 피존의 모습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산통 다 깼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한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냥 후려쳐버려! 저건 또라이가 분명하다구, 레이디!”



옳은 말씀.


그 말에 백 번 공감하며 레이디버그는 힘차게 요요를 던져 미스터 피죤의 이마를 가격했다. 악!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부여잡고 뒹굴거리던 미스터 피죤은 다시금 날아오는 요요에 히익,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다. 그런 미스터 피죤의 주변으로 비둘기들이 몰려들더니 그를 감싸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늘에서 두 히어로를 내려다보면서 미스터 피죤은 크게 웃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주지! 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너희들을 해치워주겠다!”



그 말과 함께 하늘로 날아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보면서 블랙캣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악당의 전형적인 대사 아냐?”

“누가 아니래.”

“그나저나, 레이디. 우리 어서 도망가야 할 거 같은데.”

“? 왜?”

“하늘을 봐.”



블랙캣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본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방송국 로고가 그려진 헬리콥터 몇 대가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지붕 아래에도 시민들이 많이 몰려와서 핸드폰을 들이대고 있었다. 레이디버그는 헛숨을 들이켰다.



“헉.”

“이야~ 많이도 몰려왔는데?”

“지금 감탄할 때야?! 어서 도망가자!”



그 말과 함께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잡아끌었다. 요요를 던져 그 줄을 타고 사라지는 블랙캣과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시민들은 우왕좌왕하며 그들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그들을 붙잡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산한 골목에 도착해서야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놓아주었다. 제 팔을 뿌리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일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시 가면을 벗을 시간이다. 왠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 기분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돌아서려는 블랙캣을 레이디버그가 불렀다.



“블랙캣.”

“응? 왜, 레이디?”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물론이지, 뭐든 물어봐.”



화색이 되어 대답하는 블랙캣의 얼굴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레이디버그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너, 정말로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이야? 히어로.”

“….”

“이런 일이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한 레이디버그의 표정에 뭔가를 짐작했는지 블랙캣의 입가에서 미소가 살짝 가셨다.



“레이디는 하기 싫은가봐?”



정곡을 찌르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질까봐? 이번에 붙잡혀 간 소녀처럼.”

“그것도 있고, 그냥 내키지 않아.”



투정부리듯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관찰하듯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결론을 내렸는지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거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아무렇지 않은 듯 날카롭게 속을 후벼파는 블랙캣의 대답을 레이디버그는 장난스럽게 맞받아쳤다.



“너 진짜 싫다.”

“우와, 너무해. 나 상처받는다구? 이래뵈도 연약한 아기 고양이란 말이지.”

“퍽도 연약하겠다.”



블랙캣이 던진 농담에 피식 웃으며 레이디버그는 뒤로 돌아섰다. 집에 가야겠다,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가던 레이디버그는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걸어간 거리만큼을 따라온 블랙캣을 쳐다보며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왜 계속 나를 쫓아와?”

“같이 있고 싶어서.”

“왜 같이 있고 싶다는 건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가?”

“말을 돌리네, 너.”



한숨을 쉬듯 말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살짝 미소지었다. 마냥 밝기만 한 미소가 아니라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듯한 쓸쓸한 미소.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면서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그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차 흐려졌다. 그런 레이디버그의 표정을 본 블랙캣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런 표정이라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억지로 웃는 듯한 표정.”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재차 말했다.



“웃기 싫으면 차라리 인상을 찡그리는 게 나아. 뭐, 레이디한테는 활짝 웃는 얼굴이 가장 잘 어울리긴 하지만.”

“가면으로 가렸는데 그게 보여?”

“보이지. 저번에도 말했잖아. 고양이는 눈이 밝다니까?”



능청스레 말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풋 웃었다. 정말 따라오지 말라고 강조하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돌아섰다. 그런 제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블랙캣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레이디버그는 잠시 멈칫했다.



“고마워.”



던지듯 그 한 마디를 던지고 레이디버그는 휘익 날아서 사라졌다. 레이디버그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블랙캣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난 망했어….”



곧장 집으로 돌아온 뒤 제 방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마리네뜨의 목소리에 우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사진도 사진인데, 분명 동영상 찍은 사람도 있을 거라고! 방송사를 피한 건 그나마 다행인데 진짜 어쩌지. 유투브에 영상이라도 올라오면….”

“유투브? 그게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티키에게 마리네뜨가 간단히 설명을 해주자 티키는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렸다.



“그런 게 있구나!”

“사진까지는 그래도 넘기겠는데, 제발 동영상 찍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머리를 쥐어뜯는 마리네뜨를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던 티키가 한참 고민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그것보다 마리네뜨. 지금 중요하게 해야 하는 말이 있어.”

“중요한 말?”



수척해진 얼굴을 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장 최악의 가능성이 실현된 것 같아.”

“최악이라니….”



여기서 뭐가 더 최악인데? 그렇게 묻는 듯한 마리네뜨의 얼굴을 마주하며 티키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우리가 오늘 만난 악당. 그 악당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은, 호크모스의 것이었어.”

“호크모스?”

“또 다른 미라큘러스, 나방 미라큘러스를 가진 히어로야.”

“미라큘러스가 더 있다고?”



깜짝 놀라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뇌리를 스치고 떠오르는 생각에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저번에 그 정전 사건!! 그럼 그 사건 때도, 그쪽에서 관련했을 수도 있다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미라큘러스는 히어로로 변신시켜 주는 물건이 아니었어?”

“미라큘러스는 선하다, 악하다로 나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칼로 빵을 자르면 괜찮지만 사람을 찌르면 흉기가 되잖아? 마찬가지야. 다만 되도록 선한 사람에게 넘어가도록 설계되어 있을 뿐이지.”



마리네뜨의 손이 제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미라큘러스의 직감 때문일까? 위험을 감지한 건지 파르르 떨리는 제 손을 베개에 묻으며 마리네뜨는 티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티키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마리네뜨. 아무래도 조금은 힘든 싸움이 될 거 같아. 특히 절대 정체를 들켜서는 안 돼. 그 누구한테도. 너는 물론이고 네 정체를 아는 사람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으응, 알았어.”



머뭇머뭇 대답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티키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마리네뜨.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응?”

“블랙캣을 너무 믿지 마.”



순간 티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말뜻을 이해한 마리네뜨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슨 말이야, 티키?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

“블랙캣과 협력하는 건 좋지만, 아주 믿어서는 안 돼. 블랙캣은 말이지, 어떻게든 너한테서 신뢰를 얻어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 신뢰?”



어째서. 그렇게 묻자 티키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블랙캣은 조금 특별해. 왜냐하면, 블랙캣이 가진 힘은 자칫 잘못하면 끝없이 위험해질 수 있거든. 마리네뜨, 왜 검은 고양이가 불행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것도 블랙캣에게서 비롯된 거라는 거야? 레이디버그처럼?”



티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마리네뜨,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왜 호크모스가 아니라 블랙캣이 너의 동료라고 말한 건지.”

“그건….”

“너와 블랙캣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네 상상보다 더.”



너무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들어서일까. 어지러운지 그저 눈만 깜빡거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티키는 다음에 마저 말해야겠다 생각했는지 적당히 말을 끝냈다.



“지금은 더 말할 상황이 아닌 거 같아. 나중에 제대로 다시 얘기할게. 아무튼, 조심했으면 좋겠어.”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티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이는 마리네뜨도 마찬가지였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부여잡고 마리네뜨는 베개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절규와 함께.



“이게 뭐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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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저는 펠릭스가 티키와 만나지 않은 것이 레이디버그 최고의 밸런스 패치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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