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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3





Episode 4.

비눗방울과 환상





“야, 저리 안 가?!”



휘휘 손을 흔들어 모여드는 비둘기들을 쫓아내는 블랙캣의 얼굴에 질렸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쫓아도 쫓아도 계속 달려드는 모양새가 아주 저 악당 녀석이랑 판박이라고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공중을 날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블랙캣에 비둘기들이 몰려 있는 틈을 타 레이디버그가 던진 요요를 가볍게 피하면서 히죽 웃고 있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은 참으로 얄밉기 짝이 없었다. 두 히어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홀홀홀홀~~”



듣기에 매우 거슬리는 이상한 웃음소리도 한 몫 했지만. 



“아, 저거 진짜 열받네!”

“거기 서!”



봉과 요요를 던졌지만 삽시간에 방패처럼 모여든 비둘기 떼에 튕겨져 나왔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려는지 뒤로 슬슬 물러나는 미스터 피죤을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던 블랙캣이 다시금 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이건 어떠냐!”



블랙캣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가방에서 꺼낸 것은 몇 사람은 간단히 가둘법한 커다란 철창이었다. 작은 가방에서 천천히 나오기 시작하는 거대한 철창에 레이디버그는 물론 미스터 피죤도 경악한 표정으로 블랙캣을 쳐다보았다. 힘들이지 않고 철창을 두 손으로 든 블랙캣이 미스터 피죤에게로 철창을 던졌다. 야구공을 던진 것마냥 빠르고 묵직하게 날아오는 철창에 기겁하며 우왕좌왕하던 미스터 피죤은 아주 간발의 차이로 방향을 바꿔 철창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다.



“야, 거기 서!”



더 이상 지체했다간 더 엄청난 게 나올 거라 생각했는지 재빨리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을 분한 듯이 쳐다보던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찰칵찰칵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수첩과 카메라, 방송국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레이디버그! 블랙캣! 렉스프레스 잡지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좀 해주세요!”

“라우토 저널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여지없이 악당과 싸워 물리치고 계시는데요, 소감 한 마디 좀 해주세요!”

“BBC에서 단독 인터뷰를 신청하고 싶은데요!”

“워싱턴포스트입니다. 파리를 위협하는 악당에 대한 논설지를 예정 중입니다만, 코멘트 한 마디만 해주세요!”



우르르 달려오는 사람들의 무리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난처하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곧 서로 짰다는 듯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아, 죄송해요! 지금 바빠서 이만!”

“다음에 보자구!”



살짝 손을 들고 거절의사를 표하며 잽싸게 사라지는 두 히어로를 잡을 수 있는 능력자는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하늘로 뛰어올라 모습을 감춘 히어로들을 망연히 바라보던 기자들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분통을 터트렸다.



“오늘도 또 놓쳤어!”

“하여간 진짜 끈질기다니까. 몇 번을 인터뷰 요청해도 죄다 퇴짜를 놓는 걸 보면.”

“아하하, 그렇게 따지면 우리야말로 제일 끈질긴 거 아닌가? 솔직히 이래놓고 다들 히어로들 관련 기사를 쓸 거면서.”

“눈치챘나?”



큭큭 웃던 한 여성 기자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물었다. 담배 끝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더니 한 모금 빨았다. 아지랑이처럼 공중으로 흐늘흐늘 날아오르는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며 기자는 살짝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 보니 유투브에 영상이 엄청 떠돌아다니던데? 화질은 별로 좋지 않지만.”

“아, 그건 나도 봤어. 다들 믿기지 않는지 댓글란에 합성 아니냐는 의혹이 한가득이던데?”

“하하, 직접 볼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다들 직접 보면 그런 소리 쏙 들어갈 텐데. 기자생활 하면서 이런저런 일들 많이 봤지만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라 조금 설렐 정도라고.”



어릴 적 사라졌던 동심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사람 좋게 웃기 시작하는 남자에 동조하듯 다들 웃기 시작했다. 서로 경쟁하는 관계기는 하지만,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들을 직접 쫓아다니는 동질감 때문인지 기자들은 이제 겨우 몇 번 마주친 사이임에도 마치 몇 년을 같이 일한 동료같다는 느낌을 서로에게서 받고 있었다.



“맞아, 그래서 더 쫓아다니는 건지도 모르지. 지금 저만한 특종감이 없기도 하고.”

“하긴, 악당을 인터뷰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맞장구를 치며 낄낄 웃는 기자들의 머리 위로 하이얀 햇빛이 반짝거렸다.

좋은 날씨였다.




///



“피곤하다….”



책가방을 메고 등굣길을 걸어 올라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중얼거리던 마리네뜨가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캬악! 그 인간은 왜 시간이 없을 때만 나타나는 거야!”



크게 소리를 질러대는 마리네뜨를 주변에서 이상하다는 듯이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에 민망해졌는지 살짝 볼을 붉히고 뺨을 긁적대던 마리네뜨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제는 일찍 끝나서 다행이다. 블랙캣이 열받은 얼굴로 철창을 집어던질 때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믿지 말라는 건 아니야.’



블랙캣을 떠올릴 때마다 벌써 2주도 더 전에 티키가 했던 이야기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솔직히 아직 어떻게 판단할 단계는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까 더 조심해주길 바라는 거야. 마리네뜨, 난 네가 상처받을까봐 걱정이 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티키를 보며 알았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조금 반신반의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만날 때마다 별로 문제는 없었으니까. 평범하게 파트너로서 같이 싸우고, 끝나면 바로 헤어지고.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티키의 말대로라면 그것도 다 계획된 행동이라는 걸까?


아, 모르겠다. 붕붕 고개를 돌리며 생각을 쫓아내려 애썼다. 가뜩이나 지금 히어로 일만도 골치가 아픈데.


결국 히어로를 하겠다고 결심하기는 했지만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스터 피죤은 생각보다 더 자주 나타났고 그만큼이나 끈질겼다. 한 번 상대하면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나타나 도발하듯 싸움을 거는 그를 보고 있자면 어떤 때는 그냥 자신에게 향하는 관심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홀홀홀 웃고 있는 미스터 피죤의 얼굴을 떠올리자 짜증으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니, 이 인간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왜 이렇게 자주 나타나냐고!

하긴,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라 말이지.


두 번째로 나타났던 미스터 피죤을 상대할 때 경찰에서 들어왔던 지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놀라웠다. 문제는 경찰차 수십 대에 무장까지 하고 나타났지만 비둘기 떼들 때문에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이지만. 오히려 부상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결국 자신들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엔간해서는 뒤로 피해 있으라고 당부를 해야 했다.


본인들이 무력하다는 것에 상당히 기분이 상했는지 경찰들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알겠다고 약속해줘서 다행이었다.



“호크모스라….”



자신과 같은 미라큘러스를 가진 사람. 자신이 가진 상징이 무당벌레라면 그쪽은 나방이라고 했다. 실제로 사진을 찾아보니 상당히 큰 크기의 나방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티키의 말로는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줘서 그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자라고 했다.


같이 미라큘러스에 선택받았는데, 그런 사람이 왜 파리에 혼란을 일으키는 걸까.


어째서?


터벅터벅 교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자신을 앞서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발견한 마리네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저렇게 곧게 뻗은 자세로 걸어가는 사람은 마리네뜨가 아는 한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럭키! 오늘은 그래도 재수가 좋네. 같이 등교하다니.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마리네뜨가 크게 소리쳤다.



“펠릭스!”



반응이 없었다. 뭐 이 정도는 늘상 그랬기 때문에 별 감각이 없었는지라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소리내어 그를 불렀다.



“펠릭스으으으!”



일부러 길게 소리를 뽑아내며 불렀음에도 전혀 돌아보는 기색도 없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에스미, 에스미.”

“왜 불러.”



잡지를 읽고 있는 에스미의 얼굴은 상당히 시큰둥했다. 그래도 듣지 않고 있는 건 아닌지 즉각 대답을 던져주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정말 완전 이상해! 하는 듯이 과장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펠릭스가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아?”

“직접 보지도 않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그냥 평소랑 똑같은데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



또 시작이냐는 듯이 무심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기는 에스미를 쳐다보며 마리네뜨가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아침에 펠릭스를 만나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이름을 불렀는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라구.”

“드디어 널 아예 무시하기로 결심했나 보네.”

“아냐, 그렇다고 보기엔 평소랑은 조금 느낌이 다른 거 같아서.”

“…하여간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지.”



묘하게 차가운 에스미의 목소리에는 다소 불만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물론 여전히 펠릭스에게 정신이 쏠려 있던 마리네뜨는 그런 에스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일일까? 조금 걱정돼.”

“어련히 잘하시겠지. 최소 너보다는 똑부러졌잖아.”

“헉, 내가 그렇게 물렁한 이미지야?”

“그간 너의 행동을 돌이켜보지 않을래?”



딱 잘라 말하는 에스미에게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헤실헤실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돌아보더니 에스미는 한숨을 쉬며 보고 있던 잡지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

“응?”

“너, 너무 펠릭스한테 정신 쏟는 거 아니야?”

“어….”

“첫사랑이라 네가 더 허둥댄다 싶기도 했어. 근데 너무 매달리는 거 아니야? 사랑이 밥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특히, 요즘 너 학교에서가 아니면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며칠 전에 약속한 것도 갑자기 펑크냈었잖아.”

“엇, 아 그게….”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데록데록 굴러갔다. 요즘 펠릭스를 쫓아다니느라 에스미와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었기에 마리네뜨는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 약속은 그런 게 아니라 미스터 피죤 때문이었는데….


약속을 나가기 직전, 마침 미스터 피죤이 나타났다는 걸 티키가 감지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약속을 취소하고 히어로로 변신해야 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기에 마리네뜨는 하하 웃으며 애써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그러고보니! 요즘 범죄가 좀 늘어난 거 같지 않아?”

“악당이라면 레이디버그랑 블랙캣이 알아서 해주겠지. 몇 주 전에 유투브에 동영상까지 떴잖아?”



무심히 중얼거리는 에스미의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우려했던 대로 동영상을 찍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에펠탑 사건 당시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미스터 피죤을 상대하던 동영상이 며칠 뒤 유투브에 올라왔다. 업로드가 되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몰고온 이 동영상은 조회수가 3일만에 몇백만을 찍었으며, 온갖 나라의 언어들이 댓글란에 가득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이게 말이 되냐고, 진짜가 아니라 합성인 거 아니냐고 묻는 댓글들도 간간히 보였다.


합성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에스미가 이런 분야에 별로 흥미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사실 에스미가 눈치를 채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악당도 악당인데, 여러 가지로 범죄 기사가 많이 뜨는 거 같아. 아침에 뉴스를 보면 누가 죽었다느니, 성폭행 사건이 터졌다느니 별 개 다 나오는걸.”

“세상이 그만큼 흉흉해졌다는 증거겠지. 이젠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악당까지 나오고, 드디어 이 거지같은 세상이 망하는 건가.”



냉랭한 말투에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에스미를 불렀다.



“에스미…? 화났어?”

“별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그 속에 타오르는 검은 기운을 읽어낸 마리네뜨는 금방 꼬리를 말았다.



“미,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내가 뭐에 화났는지는 아는 거야?”

“그건….”



더듬이를 추욱 늘어뜨린 채로 답을 찾지 모해 쩔쩔매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대로 생각해봐. 내가 왜 이러는지 말이야.”




///



청회색 눈동자가 하얀 구름을 쫓고 있었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펠릭스의 모습을 몇 명의 여자아이들이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곧게 펴진 등이나 반듯한 자세는 역시 펠릭스다 싶을 정도로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남녀를 불구하고 이런저런 말이 돌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펠릭스는 몇몇 여자애들에게는 꽤 인기가 있었다. 말수가 적기는 했지만 딱히 지위를 내세워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고, 걸려오는 시비는 다 유연하게 쳐냈다. 그 쿨한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다가올 용기가 없어서 조용히 펠릭스를 지켜보기만 하는 여자애들도 많았다. 늘 전교 1등을 꿰차며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수재였지만 성적이 좋다고 상대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누구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무시했다.



“하아.”



요즘 들어 자꾸 멍하게 있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붉은 잔상에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그런 여자를 떠올리고 있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써 딴 데로 생각을 돌리려고 책을 펴들었지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은 소년을 다시금 잡아먹고 세력을 키웠다. 붉은 가면을 쓰고 밝게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는 듯한 미소에 주변에서 조용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조차 펠릭스에게는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이 가는 여자이긴 했지.


강도를 잡던 그 순간의 모습이 뇌리에 사진으로 찍힌 것처럼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벌써 한 달은 지나버린 순간이 이토록 마음 한 구석을 잡고 놓아주지 이유는 무엇일까.


살짝 빨개진 것 같았던 얼굴도, 평소라면 바보같다 생각될 정도로 더듬거리는 말투도, 자신을 관찰하듯 훑어보는 시선도 전혀 싫지 않았다. 블랙캣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요령이 없는 타입인지 사람과 대화할 때 쩔쩔매는 모습조차도 거슬리기보단 오히려 귀엽다고 느껴졌었다.


당당한 미소로 자신을 응시하는 푸른 시선이 좋았다. 에펠탑 사건 당시 레이디버그가 왜 따라오냐고 질문했을 때, 내버려둘 수 없어서라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진심이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이 든 적이 있었던가?


고맙다는 한 마디가 정말로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아온 자신으로서는 참으로 이례적이게도.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당초의 목적대로 어떻게든 신뢰만 얻어내면 될 것을. 이용하고 끝내면 될 일이 아니었던가?


살짝 오른손을 들었다.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고양이 모양의 반지를 가만히 살펴보는 펠릭스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반지는 생각보다 무척 성가셨다. 어느 정도 컨트롤은 물론 가능했지만, 너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면 지 멋대로 발동할 때가 있어서 늘 마음에 평정심을 가져야 했다. 다행히도 어릴 때부터 감정 컨트롤은 익숙했는지라 느긋하게 넘기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매번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제일 골치아픈 건 시끄러운 녀석이 따라왔다는 것이다. 외관은 고양이를 닮았지만 고양이는 차라리 혼자 조용히 놀기라도 하지. 시끄럽기만 하면 좋은데 장난치는 것까지 좋아하니 더 정신이 없었다. 그것도 익숙해지니 이제는 그저 체념하는 수준에 다다랐지만, 가끔씩 조용하던 일상이 그립고는 했다.


그래서 접근한 것일 뿐이었는데.


얼굴을 떠올리고 있으면 진정이 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고 싶었다. 언제나 웃었으면 좋겠고 세상의 더러움같은 건 전혀 몰랐으면 했다. 하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니 분명 여러 문제들이 터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혹여 상처받을까 걱정되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심장소리가 템포를 올리듯 조금씩 빨라진다. 밝게 웃으면서도 가끔 짓는 처연한 표정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자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의지와 상관없이 뻗어지는 손에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괜찮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더 가라앉기만 한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난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좋아해!’


해맑게 외치며 자신을 따라붙던 검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감정적으로 덤벼드는 인간은 피곤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취향이 아닌 상대이기도 했다.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지?


‘사랑이란 계산되는 감정이 아니야.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누군가의 옆에 있고 싶다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 사랑은 아닐지라도 사랑에 무척 가까운 감정일 거야.’


오래 전에 잊혀졌다 생각했던 그리운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만 같은 감각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펠릭스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내가 그 여자를?




///



“하아아…….”



학교가 끝나고 여느 때와 같이 시내를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지친 것처럼 상당히 수척했다. 기나긴 한숨소리에 티키가 살짝 자켓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마리네뜨?”

“아무것도 아냐. 그냥 왠지 좀 피곤해서.”



요 며칠 새 운동을 많이 해서인가? 운동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격하다 싶기는 했지만. 비둘기를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자마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제 나타났었으니 오늘은 제발 나타나지 말아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다가 마리네뜨는 순간 스쳐가는 불길함에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 큼직한 돌멩이가 마리네뜨의 발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갔으면 꼼짝없이 밟고 넘어졌겠지.


마리네뜨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감이 좋아지니 편하네.”

“그렇지?”

“응. 이러다가 이 힘에 너무 의존하게 될까봐 겁날 정도로.”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올려다보며 티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건 마리네뜨 네 안에 있는 가능성이야.”

“내 안의 가능성?”

“응. 미라큘러스는 그 사람 내면의 힘을 끌어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그게 좋은 면인지, 나쁜 면인지는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을 끌어내주지.”

“하지만 난 원래 운이 없는걸.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아마 파리 시내에서 나만큼 재수가 없는 애도 없을 거야.”



피곤해서일까. 기운이 없어 보이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신감을 가져, 마리네뜨. 미라큘러스는 네게 잠재되어 있는 힘을 끌어내주지만, 결국 그 힘의 본질은 너한테 속해 있어.”



티키가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만약 사과를 먹고 싶은데 칼이 없잖아? 미라큘러스는 말이지, 그 사과를 갈아서 주스로 만들어주는 것과 똑같아. 도구와 같다고 보면 돼. 먹기 편해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래 재료인 사과까지 미라큘러스가 만든 건 아니잖아. 사과를 가지고 있는 건 너니까.”

“….”

“설령 미라큘러스가 네게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 힘이 네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는걸. 열심히 다듬다 보면 미라큘러스라는 도구가 없더라도 사용이 가능해지는 날이 올 거야.”

“…그런 걸까나?”

“그럼!”



당연하다는 듯이 싱긋 웃는 티키의 미소를 보며 조금은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마리네뜨는 살며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하긴 있을 때 누려야겠지? 물론 의존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마리네뜨가 편한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해. 모든 건 너의 선택이니까.”

“그래.”



즐거운 듯이 푸흐흐 웃음을 터트리던 마리네뜨의 어깨를 무언가가 세게 치고 지나갔다.



“아얏!”



마리네뜨에게 부딪혔던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힐끗 눈을 돌리더니 사과도 없이 빠르게 마리네뜨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화를 내려다가 다시 뒤에서 다가오는 인파에 마리네뜨는 재빨리 인도 안쪽으로 물러나는 것에 성공했다.


아주 재수가 없지 않은 건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중 느껴지는 기시감에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나저나 요즘 이상하게 거리에 사람들이 늘어난 거 같은데. 내 착각인가?”



사람이야 늘 많았지만 평소보다 더 붐비는 듯한 느낌이 든다. 착각인가 싶다가도, 사람에 부딪힐까 걱정되서 이렇게 안쪽으로 붙어야만 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대충 주위를 둘러봐도 외국인이 좀 많았다. 요 며칠 사이 계속 이랬던 거 같은데, 어째서?


이유가 뭘까. 가볍게 고민하던 찰나 꺄르르 웃는 목소리가 귓가에 푹 꽂혔다.



“정말 여기에 오면 히어로를 만날 수 있는 거예요?”



히어로?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뚝 정지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자, 어른들 사이에서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들 여럿이 눈에 띄었다. 보아하니 관광객들인 모양이다. 파리에 관광객이 오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그건 뭐 그러려니 했지만, 방금 전 발언은 뭔가 싶어 마리네뜨는 재빨리 발을 놀려 그들의 말소리가 들릴 법한 거리까지 접근했다.


가이드를 둘러싸고 꺄아꺄아 떠드는 아이들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정말로 히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옆에 있던 다른 남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저 알아요! 인터넷에서 봤어요. 이상하게 생긴 아저씨랑 붉은 옷 입은 누나가 싸우는 거!”

“검은 고양이 잠옷을 입은 형도요!”



풉.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가 마리네뜨는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너무 웃겼다. 고양이 잠옷이라니! 블랙캣이 들었다면 무척 어이없어했을 게 분명했다. 울상을 지으며 너무한다 소리칠 블랙캣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같이 활동할 때마다 느끼지만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는 녀석이었다. 발상도 참 거침없었고. 아니, 물론 가방에서 뭐든 꺼낼 수 있다지만 설마 거대한 철창을 꺼내서 던진다는 미친 발상을 하는 또라이가 있다니. 심지어 모양도 새장이었어.


새장에 갇혀 있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상상하자 또 다시 웃음보가 터졌다. 너무 웃겨서 한참을 조용히 킥킥거리다가 낭랑한 어조로 질문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마리네뜨의 귀를 간질였다.



“그래서 히어로는 어디 있어요?”

“악당이 나타나지 않으면 볼 수 없단다~”

“에에-!! 히어로 보고 싶어요, 히어로!”



땡깡을 부리는 아이들을 애써 달래는 가이드를 가만히 지켜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웃었다. 저 아이들은 모르겠지.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히어로가 바로 몇 걸음 옆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어서 집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천천히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즐겁게 떠들고 있는 아이들을 스쳐 지나가던 푸드득, 요란하게 들리는 날개짓 소리에 마리네뜨는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와아….”



많은 수의 비눗방울들이 공중으로 와르르 날아오르고 있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비눗방울들에 태양빛이 닿아 잘게 부서지며 예쁜 색색깔의 빛으로 반짝거렸다. 이 많은 비눗방울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생각지도 못한 장관에 입을 헤 벌리고 망연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건 비단 마리네뜨 혼자만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서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비눗방울들을 경탄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히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비눗방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때였다.



“안녕~?”



위쪽에서 들려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위를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누군가가 떠 있었다.


푸른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딱 보기에도 체구가 무척 작은 게 눈에 띄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변성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차림새가 굉장히 특이했다. 팔다리에 쫙 달라붙은 짙은 하늘색의 쫄쫄이와는 달리, 상체와 하체를 동그랗고 커다란 에어슈트가 각각 감싸고 있었다. 동그랗고 반투명한 게 마치 비눗방울을 연상시키는 옅은 하늘색의 슈트였다. 등에는 커다란 통을 가방처럼 메고 있었다. 머리에는 팔다리의 색깔과 같은 하늘색의 베레모를 쓰고 있었는데, 옅은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특징할 점이라면, 그가 들고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비눗방울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올려다보던 마리네뜨는 티키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저 사람, 히어로야?”



미라큘러스의 힘으로 변신한 상대냐고 묻자 티키는 살짝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저 녀석도 만들어진 악당이라는 건가.


하지만 왜 갑자기 여기에?



“내 이름은 버블맨! 갑자기 나타나서 놀래킨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이지.”



입가에 사르르 미소를 걸고 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에 다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입을 벙긋하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버블맨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자주 나타난다는 히어로라고 부르는 녀석들 있잖아? 아, 레이디버그랑 블랙캣이랬나.”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리던 버블맨이 싱글싱글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위로 들었다.



“난 지금 무척 걔네를 만나고 싶거든. 하지만 그냥 기다리면 나오지 않을 게 뻔하잖아.”

“….”

“그러니 소동을 좀 피워야겠지?”



좌중이 침묵하는 사이에서 버블맨은 입가에 씨익 미소를 그렸다. 커다란 비눗방울채가 예고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누군가 크게 소리질렀다.



“도망쳐!!”



침묵이 깨졌다.


비눗방울채에서 나오는 무수히 많은 비눗방울들이 공중에서부터 아래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빠르게 만들어져서 달려드는 비눗방울들을 피해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개중에 도망치지 못한 몇 명은 비눗방울 사이에 갇혀서 하늘 위로 둥실 떠올랐다. 비눗방울 속에 갇히면 소리까지 모두 방음되는지 안쪽에서 뭐라 소리를 지르는데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갇힌 사람들의 가족과 친구, 연인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지노!”

“세레나!!”

“으아아아악!!”



비명소리와 절규가 시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 소동이 재밌는지 낄낄거리며 웃고 있던 버블맨의 머리로 붉은 무언가가 번쩍하며 날아왔다. 여유롭게 채를 들어 막아내는 버블맨의 바로 앞으로 붉은 인영이 날렵하게 착지했다.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를 발견한 버블맨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가 레이디버그구나?”

“너, 뭐야.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목적이 뭔데?”



비눗방울들을 피해 모두들 도망친 덕분에 시내에는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레이디버그는 손에 들고 있는 요요를 빙빙 흔들었다. 언제든지 던질 수 있게 준비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에게 버블맨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긴 왜야~ 너희의 미라큘러스를 가지러 왔지!”

“엥?”



생뚱맞은 대답에 맹렬히 흔들고 있던 요요를 바닥에 떨어뜨린 레이디버그와 달리 버블맨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걸 얻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며? 마음에 들어. 그러니 나한테 넘기라구!”



그 말과 함께 버블맨은 채를 마구 휘두르며 방울들을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요요를 휘둘러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비눗방울들을 모두 쳐내면서도, 레이디버그는 계속해서 방법을 궁리했지만 마땅히 파고들만한 틈이 없었다. 많은 방울들이 계속해서 몰려드는 통에 일단 상대가 어디 있는지부터가 파악이 어려웠고 순간의 틈을 찾기엔 방울들의 기세가 너무 매서웠다. 게다가 당장 요요를 다른 물건으로 바꿨다간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머리를 굴렸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언제 지칠 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던 찰나 갑자기 거짓말처럼 방울샤워가 멈췄다. 방울들이 사라진 너머로 보이는 것은 으악! 비명과 함께 이마를 손으로 감싸는 버블맨과, 휙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작은 부메랑이었다.


쏜살같이 날아온 부메랑을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언제 왔는지 제 옆에서 부메랑을 들고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이제야 와?”

“미안, 사람들을 좀 구하느라고.”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했는데?”

“커다란 잠자리채같은 거 하나 꺼내서 죄다 수거했어. 뭐, 일단 아래로 끌어내리기만 하면 터트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블랙캣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에 넘치는 표정을 보니 제대로 마무리짓고 온 것 같다. 블랙캣과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칭찬을 던졌다.



“그래, 잘됐네.”

“이제 늦게 온 거 용서해주는 거야?”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

“그래, 그럼 이제 어디 좀 제대로 해볼까?”



아직도 아픈지 공중에서 이마를 붙들고 버둥거리는 버블맨을 올려다보며,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각각 손에 들린 부메랑과 요요를 버블맨에게로 집어던졌다. 휘익- 소리를 내며 날아가던 물건들이 버블맨에게 닿을 찰나, 다른 쪽에서 날아온 무언가에 튕겨져 나갔다.


챙,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요요와 부메랑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히어로들이 재빨리 그것들이 떨어진 장소로 뛰어갔다. 요요와 부메랑 옆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막대가 떨어져 있었다. 재빨리 물건을 집어들고 두 히어로는 막대가 날아왔던 곳을 쳐다보았다.


지붕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버블맨이 작게 투덜거렸다.



“뭐야, 왜 이제야 와. 러스트?”



지붕 위에 있던 하얀 형체가 버블맨이 있는 쪽으로 휙 몸을 날렸다. 몇 번 공중에서 제비를 돌더니 버블맨이 만들어낸 비눗방울 위에 안착한, 러스트라고 불리는 악당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백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금발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얼굴에 역시 하얀 나비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은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를 연상케 했다.


비눗방울 위에 올라서 있던 러스트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저쪽은 말이 굉장히 많은데, 반면 이쪽은 묵묵부답이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관찰하듯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긴장태세를 갖췄다.



“그쪽도 악당인가? 저쪽이랑 느낌이 되게 다르긴 한데.”



가볍게 질문하는 블랙캣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러스트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손을 댔다. 뭐하는 짓인가 의아해하던 두 사람 앞으로 하얀 인영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윽!”



날아오는 금빛 막대를 재빨리 쳐낸 레이디버그가 반격하려는 순간 블랙캣이 재빨리 몸을 날려 레이디버그를 밀어냈다. 넘어지기 직전 레이디버그가 직감적으로 날린 요요에 손을 맞은 러스트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탁탁 손을 털고 있는 러스트를 한 번, 러스트의 주변에 있는 길들을 한 번 살펴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매끄럽게 빛나는 러스트의 주변을 보며 블랙캣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런 거였군.”

“에?!”

“저 악당, 이름이 러스트(lustre)잖아. 러스트의 뜻이 뭔지 잊어버렸어, 레이디?”

“에, 러스트라면. 윤기라던가, 광택이라던가.”

“정답. 그럼 저 녀석의 능력은 뭘까?”

“…주변을 매끄럽게 하는 거?”

“마찰을 없앤다고 하는 게 더 맞겠지. 그리고 자기가 만든 구역에서는 돌아다니는 것도 자유로운 것 같아.”

“에에, 좀 성가시겠네.”

“성가시지. 저 버블맨인가 뭔가하는 놈보다 더 성가셔.”



칫, 혀를 차며 블랙캣은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다.



“일단 저 손에 닿지 마. 아무래도 손으로 만져서 마찰력을 없애는 거 같아. 근거리전은 불리…!!”



날아드는 금빛 막대들을 부메랑으로 쳐내면서 블랙캣은 재빨리 가방을 열어 봉을 꺼냈다. 막대들을 살짝씩 몸을 돌려 피해가며 블랙캣은 봉을 길게 늘렸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봉이 러스트의 배를 정확히 찌르려는 찰나 몸을 피하는 러스트에게로 요요가 날아왔다.



“잡았다!”



요요에 꽁꽁 묶인 러스트를 보며 쾌재를 부를 찰나, 순식간에 묶여 있던 줄에서 빠져나오는 러스트를 보면서 레이디버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옆에 서 있던 블랙캣이 작게 소곤거렸다.



“안 돼. 마찰력을 없앨 수 있다면, 그런 걸로 묶어봤자 계속 빠져나오기만 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묶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쓰면 되겠지.”

“응?”

“이렇게 하자.”



블랙캣이 가만히 목소리를 낮춰 몇 마디 속삭이자 레이디버그가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뭔가 상당히 무식한 방법이네….”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근데 너, 은근히 머리 쓰는 것 같으면서도 막가파식으로 움직인다?”

“필요하다면 딱히 수단을 가리지 않을 뿐이야.”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블랙캣과 하하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를 내려다보며 버블맨은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거렸다.



“우와, 러스트가 오니까 정말 재밌어지네.”

“야! 비겁하게 공중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



분노에 찬 레이디버그의 목소리에도 버블맨은 ‘내가 왜?’ 라고 말하면서 러스트에게 손짓했다.



“러스트, 그거 좀 해줘.”



그거? 의아해하는 두 사람과 달리 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곧 일대가 순식간에 반짝반짝 매끄럽게 변하는 것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긴장한 얼굴로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지켜볼 수는 없었다. 버블맨이 갑자기 다시 비눗방울채를 휘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닥으로 쏟아지는 비눗방울들은 방금 전과는 달랐다. 사람들을 공격했던 비눗방울들은 바닥에 닿은 적이 없었고, 지면 가까이서 사람을 낚아채고 다시 하늘로 둥실 날아올랐다면 지금의 비눗방울들은 바닥에 내려앉더니 맹렬한 기세로 굴러오기 시작했다. 마치 공처럼.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달리기 시작하는 두 히어로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아아아아!”

“망할 자식, 저런 게 가능했어?!”



빠르게 쫓아오는 비눗방울도 문제였지만 바닥이 너무 미끌거려서 달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뒤를 돌아보며 짜증을 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소리쳤다.



“야, 어떡해 블랙캣!”

“일단 작전대로 간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골목으로 흩어졌다. 갑자기 쥐죽은 듯이 잠잠해진 주변에 버블맨과 러스트는 가만히, 그렇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골목에서 빠르게 튀어나오는 요요를 보자마자 러스트는 금빛 막대를 던졌다. 요요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골목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레이디버그가 러스트에게로 덤벼들었다. 주먹 휘두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맹렬히 싸우기 시작하는 두 사람 사이로 불꽃이 튀었다.


유유자적한 태도로 밑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흥미롭다는 얼굴로 구경하는 버블맨은 덤으로.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전력을 다해 덤비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러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는건 러스트 쪽이었지만 러스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상태면 분명히 금방 체력이 바닥나고 말 것이다. 실제로 레이디버그의 행동이 조금씩, 그렇지만 분명하게 둔해지고 있었으니까.


결국 영웅이라는 이름에 취한 무모한 애송이던가. 그렇게 생각한 러스트의 망막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비쳤다. 본인이 본인 몸 상태를 더 잘 알 텐데, 전혀 불리하지 않다는 듯이 씨익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에 러스트는 싸한 예감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예감과 함께 강한 발차기가 러스트의 복부를 관통했다.


한편, 버블맨은 다시금 비눗방울을 날려서 러스트를 지원할지, 재미있는데 그냥 계속 지켜볼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 중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후자가 제일 좋았지만 계속 놀기만 하는 건 좀 미안한데. 레이디버그의 발차기에 러스트가 뒤로 확 밀리는 것을 본 버블맨이 역시 거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채를 움직이려던 순간,



“Yo.”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버블맨의 머리 바로 위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투명한 무언가가 버블맨을 덮치며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는 러스트가 있었다.


쾅!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버블맨은 곧 제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러스트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버블맨은 자신들이 커다랗고 네모난 유리상자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블랙캣이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 어떠셔. 블랙캣 특제 초대형 유리감옥에 갇힌 소감이?”



마음에 들어? 피식 웃고 있는 블랙캣의 곁으로 레이디버그가 다가왔다. 상당히 힘들었는지 레이디버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짜증스레 소리쳤다.



“너 대체 왜 이렇게 늦게 나온 거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미안. 타이밍 잡기가 그렇게 힘들지 뭐야.”



블랙캣이 두 손을 모으며 사과했지만, 이번은 정말 힘들었는지 레이디버그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레이디버그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블랙캣은 놀란 얼굴을 한 버블맨을 향해 친절하게 설명을 개시했다.



“유인 작전에 걸려줘서 고마워.”

‘유인 작전이라고?’

“아무래도 너희를 잡으려면 새장같은 걸로는 어림도 없겠더라고. 조금이라도 공간이 비어 있으면 그 틈으로 빠져나갈 거 같아서 말이지. 저 러스트인가 뭔가 하는 악당의 능력대로라면 말이야.”



버블맨과 달리 묵묵히 듣고 있는 러스트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물론 그러든 말든 블랙캣은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간단히 머리를 좀 굴려봤을 뿐이야. 틈으로 빠져나간다면 틈을 아예 안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어?”



역시 자신은 천재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블랙캣을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유리를 부수려는지 들고 있던 비눗방울채를 유리에 쾅쾅 두들기기 시작하는 버블맨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으쓱거렸다.

포기해.



“이 유리상자가 우리 매직박스에서 나온 녀석이거든. 우리가 부수지 않는 한 절대 부술 수 없는 재질로 되어 있으니 허튼 저항은 그만둬.”



몇 번을 꽝꽝댔지만 흠집조차 나지 않는 유리에 버블맨은 질렸다는 얼굴로 밖에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은 버블맨의 눈빛에 블랙캣은 속으로 감탄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싱긋 웃는 블랙캣의 입가에 어려 있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나머지는 경찰서에 가서 자백하도록 하시죠.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만한 대가는 받아야지 않겠어?”




//



근처 건물 지붕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던 남자는 거리를 힐끗 돌아보던 중 주변을 돌아다니는 작은 꼬마아이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엄마를 놓치고 실수로 이 위험한 곳으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울먹거리는 얼굴로 엄마를 부르며 돌아다니는 꼬마의 모습에 무감정하던 남자의 눈동자에 연민의 빛이 아주 살짝 떠올랐다. 그도 잠시, 곧바로 손에 무언가를 쥐는 듯한 동작을 취한 그가 그것을 세게 던졌다.


정확히는 꼬마가 걸어가는 방향에 있는 가로수 쪽으로.




//


“엄마아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갓 4살은 되었을까 싶은 작은 남자아이가 엉엉 울면서 저 멀리서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엄마를 잃어버렸나? 아니, 그것보다 이쪽으로 오는 건 너무 위험한데!


레이디버그가 뭐라고 외치기 직전, 아이가 걸어오는 쪽에 서 있는 가로수가 휘청거렸다. 방금 전 레이디버그와 러스트가 격렬하게 싸운 여파 때문인지 나무가 휘청이는 소리가 녹슨 시계태엽이 굴러가는 소리마냥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제 머리 위로 커다란 그늘이 지는 것에 놀랐는지 울음범벅인 얼굴이 천천히 나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나무가 아이의 머리 위를 덮쳤다.



“안 돼!!”



앞 뒤 보지 않고 레이디버그는 아이가 있는 쪽으로 온 힘을 다해 뛰어들었다. 무기를 꺼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아이를 두 손으로 껴안은 레이디버그의 눈동자에 쓰러지는 거대한 나무 몸통이 천천히 슬로우 모션처럼 찍혔다. 피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칫!”



레이디버그가 아이를 구하러 뛰어드는 것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본능적으로 제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꺼낸 물건을 레이디버그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순식간에 부풀어오른 커다란 에어쿠션이 레이디버그와 가로수 사이를 꽉 차게 가로막았다. 나무는 궤도를 바꿔 레이디버그와 아이를 스쳐 지나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디버그는 곧 다시 울먹거리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쉬, 괜찮아. 이제 괜찮아.”



상냥하게 아이를 달래주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다행이라는 듯이 흐뭇하게 지켜보던 블랙캣은 반투명하게 변하며 사라지는 에어쿠션을 보자마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눈을 깜빡거렸다.


매직박스에서는 한 번당 하나의 물건밖에 꺼낼 수 없으며, 물건을 꺼내면 기존에 있던 물건은….


헛웃음을 지으며 블랙캣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유리박스도 사라졌지만 갇혀 있던 두 악당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블랙캣이 중얼거렸다.



“아, 이런.”



그 말과 동시에 삐용삐용 울리는 사이렌 소리들이 뒤에서 마구 들려왔다. 


곧 경찰차 수십 대가 그들의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쌌고, 덜덜 떨고 있던 아이를 경찰에게 넘기고 난 후에야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러스트가 마찰력을 없앴던 부분들은 어느 새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비눗방울들도 모두 사라졌고.


마치 한 때의 꿈처럼.



“그럼, 슬슬 헤어질까?”



방금 전 소동이 있던 거리에서 한참을 달려나온 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법한 거리의 지붕 위까지 온 레이디버그가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레이디버그를 쳐다보는 블랙캣의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지워졌다.



“레이디.”

“응?”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궁금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아까 왜 그렇게 대책없이 달려들었어? 농담이 아니라, 정말 레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잖아.”



가뜩이나 아까의 레이디버그는 미끼 역할을 하느라 체력까지 모두 다 소진된 상태였다. 자신이 돕지 않았으면 정말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이건 대체 뭐지?



“그런 생각할 틈도 없었어.”



그 대답에 깜짝 놀랐는지 블랙캣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냥 구해야겠다 생각하니까 발이 멋대로 움직이더라고.”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레이디버그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살짝 치며 말했다.



“너도 그렇지 않았어? 방금.”

“….”

“그래도 좀 대책없기는 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는 블랙캣이 이상했는지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랙캣?”



그렇구나.



“레이디. 이제 알겠어.”

“응?”



번민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그 위를 장난스러운 미소가 덮었다. 확실히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로 블랙캣은 씩 웃었다.



“나, 레이디한테 반한 거 같아.”



이걸 어쩌지?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진지한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레이디버그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웃고 싶어서 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레이디버그는 딱 잘라 말했다. 



“미안해, 아기 고양이씨. 마음은 고맙지만, 유감스럽게도 넌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돌아서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블랙캣은 레이디버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으로 머리를 쥐뜯으며 중얼거렸다.



“아, 망했다.”



저런 모습까지도 멋지다고 생각하다니.



“뭐, 그런다고 순순히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블랙캣은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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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빛이 들이치는 어두운 통로 안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사실 빛이라고 해봤자 정말 간간히 틈새를 따라 새어나오는 정도라 간신히 얼굴을 알아볼 정도였지만. 터벅터벅 걷고 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앞쪽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멈춰 섰다.



“아저씨?”



조심스럽게 묻는 버블맨의 목소리가 작은 통로 안에 울려퍼졌다.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긍정의 표시라는 걸 아는 버블맨이 툴툴거렸다.



“하여간 아저씨는 너무 말을 안 한다니까.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있었던 거예요?”

“….”

“우리가 위험해졌던 것도 봤겠네. 그럼 좀 도와주지. 자칫했으면 큰일날 뻔했잖아!”



툴툴거리는 버블맨과 달리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마임맨에게 러스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거리에서 소동을 피워놨으니 한동안 파리에는 관광객들이 끊기게 되겠지. 뭐, 상관없다. 그만큼 경찰은 이쪽 사건 뒷수습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딱히 큰 피해가 나지 않은 이상 외신(외국 신문)들은 파리의 실태를 알리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테러와는 다른 성격의 문제니까. 그리고, 악당들과 히어로들의 싸움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상처럼 되어야만 했다.


그게 왜 문제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파리에는 이제 더 많은 경찰들이 악당들을 견제하기 위해 전담되겠지. 그건 그만큼이나 다른 쪽에서 활동하기 편하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무슨 소리야? 목적이 달성되다니? 우리 목적은 미라큘러스를 뺏어오는 거 아니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버블맨에게 러스트는 짧게 대답했다.



“예에, 맞습니다.”



우선하는 목적이 따로 있었을 뿐.



“행동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파리라는 도시가 이 이상 주목받기를 바라지는 않으시니까요.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리는 마임맨에 답례하듯이 러스트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버블맨에게 러스트는 주의를 주었다.



“버블맨, 당신도 마임맨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삼가도록 하세요. 아직 드러나야 되는 패는 아닙니다.”

“칫, 알았어.”



투덜거리면서도 러스트의 말에 동조하는 버블맨에 러스트는 살짝, 아주 살짝 미소를 지으며 버블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마임맨에 뒤이어 두 사람도 다시금 은밀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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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정말 힘든 하루였어….”



언제나처럼 등굣길을 걸으며 마리네뜨는 티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살짝 걱정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뉴스를 보니까, 관광객들이 아무래도 겁을 먹었나봐.”


[전날의 사건 이후, 경찰의 보호를 요청하는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경찰 당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조치를 다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오늘 아침의 뉴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힘없이 웃었다.



“무리도 아니지.”



영화에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아무래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니까.



“그나저나 마리네뜨. 어제의 그건….”



티키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마리네뜨는 전혀 걱정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뭐 별로 상관없잖아. 이미 거절했는걸.”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래도 어쩌겠어.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계속 거절하다보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본인도 그러지 못하는 주제에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누군가가 보였다. 익숙한 갈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마리네뜨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에스미!”



에스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반갑게 부르는 마리네뜨에게서 살짝 시선을 돌렸다가, 휙 고개를 돌려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에스미를 보며 마리네뜨는 민망해진 손을 살짝 내렸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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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는 차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러스트가 달려들던 씬은, 러스트가 자기 앞쪽의 길들에 마찰력을 없앤 뒤에 마치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듯이 순식간에 앞으로 확 달려나온 거라고 보시면 되요 ㅇㅇ


펠릭스는 생각보다 상당히 다혈질인 성격이라고 가정했습니다. 그 성격이 튀어나오는 게 블랙캣 버전이고요. 다혈질적인 성격을 이성으로 누르고 있는 타입이라 어찌 보면 대단하기도 한데 피곤하겠다 싶기도 하고...


마리네뜨는 사람을 좋아하고 밝은 성격이지만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매우 예민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봄 에피소드에서 나오지는 못할 거 같네요.


액션을 10페이지나 써야하니까 너무 힘드네요 읽는 분들이 재밌으셨을지도 모르겠고... 다음부턴 적당히 축약하자ㅠㅁ ㅠ 사실 액션 빼고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ㅎㅎ


착실히 작업 중입니다. 다른 마감을 그제 끝내고 4화는 어제 다 썼는데, 퇴고 때문에 오늘 올려요 ㅇㅇ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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