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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9.

운수 좋은 날







꿈을 꾸고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말이지~ 내가 어제 밤에….”

“그 드라마 남주인공이 완전….”



여느 때와 같은 아침 등교 시간이었다. 하하호호 떠들고 있는 학생들 사이로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저번에 그건, 뭐였지?


사라졌다고 생각한 동굴이 다시 나타나고 그 동굴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 그건 아무리 봐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때 실수로 드론을 부수지만 않았더라도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일에 연연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없다.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는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자신들이 막을 수 없는 범주일지도 모른다. 치밀하게 계획된 판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우스웠다. 단순히 악당을 해치우면 평화가 찾아올 거라 생각했던 건가? 그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여기는 현실이다. 생각해보면 악당들은 자신들을 적당히 상대해주기는 했지만 결코 전력으로 덤빈 적은 없었다. 여차할 때는 후퇴했다가 다시 나타나고, 늘 그랬었다. 마치 놀아주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을 때마다 다른 곳에서 미심쩍은 사건들이 하나씩 터졌었지. 아마 자신이 파악한 것보다 더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히어로 놀이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답지 않게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영웅 따위가 있을 리가 없는데. 그게 자신일리는 더더욱.


뒤에 누군가가 있다. 아주 영리하고 머리 좋은 누군가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파리의 상징 중 하나라고 불리는 루브르까지도 거리낌없이 터트릴 수 있는 상대였다. 대체 누구지? 뭐라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단서가 없었다. 배후가 누군지도 모르고,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에 대한 목적도 파악하지 못했다.


꼭 블라인드 체스를 두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서로의 정체를 감춘 채 그저 손만 내밀어 체스를 두게 되는 두 사람.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표정조차도 보지 못하는 상대의 수를 읽고 저쪽의 킹을 잡아야 한다.


현재까지 나타난 악당은 총 다섯. 하지만 아마 정말로 뒤에 어떤 조직이 있다면 폰에 해당되는 조직원들은 수십이 넘을지도 모른다. 상황을 봐서 아마 그들이 전면에 나설 일은 없을 것 같고, 아마 계속 악당들을 이용해 이쪽을 견제하겠지.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리 자주 나타나지는 않는다. 사실 한꺼번에 나타나서 우리를 없애는 게 여러 모로 더 편할 것 같은데, 그동안의 패턴을 보면 희한할 정도로 나타나는 빈도수를 조절하고 있어. 우연일까? 아니면….


신중해야 해.


한 발자국만 나가도 잡아먹힐지 몰라. 어떤 함정을 파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나타날 때마다 미라큘러스를 내놓으라고, 마치 미라큘러스가 본인들의 최대 목적인 것처럼 말을 한다. 정말로? 그렇다면 왜 우리를 없애려 들지 않는 거지. 다섯 명이서 동시에 덤비면 우리를 상대하기가 더 수월할 텐데.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상대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다. 가상의 체스판 앞에 앉은 채로 펠릭스는 살짝 저 건너 어둠 속을 훑어보았다. 마치 베일같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상대의 표정은 과연 어떨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짐작이 전혀 가지 않는다구? 정말로?


머릿속에서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펠릭스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생각했다. 아직은 아니야, 확신할 수 없어. 직접 내 눈으로 본 게 아니기도 하고. 속단은 금물이니까.


웃기지 마. 넌 이미 근접한 답을 찾아냈을 텐데?


비웃음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펠릭스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인정하기 싫은 것뿐이잖아.


저번 사건 때 레이디버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레이디버그는 이 일의 배후에 있는 존재가 호크모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미라큘러스를 가진 자의 소행이라고 했다.


호크모스(Hawkmoth)

제가 아는 뜻이 맞다면 그 이름의 뜻은 분명 박각시나방.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그들의 상징대로 이름이 지어진 것을 보아 분명 이 히어로의 상징도 그 뜻대로겠지. 나방, 나방이라. 나방과 비슷한 종류의 무언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것.


그러고 보면 원래부터 징후들이 몇 개 있긴 했었다. 예를 들면 박물관의 뒤편에 있던 숲에 나타났던 사람들. 그 때 동굴에서 무언가를 옮기고 있던 이들은 모두 검은색의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드론이 부서지기 직전 얼핏 본 그 문양은 옅은 자주빛의….


‘나비 같았지.’


멀리서 본지라 모양을 아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문양은 나비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펠릭스에게 나비라고 하면 가장 맨 처음 떠오르는 인물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은 건지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연관성이 짙은 사물이 있다고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단은 악당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무엇을 목적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저번 그림 도난 사건 때처럼 새로운 악당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플랙 녀석을 다그치니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아낼 수는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묻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았다는 기찬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게으르고 느릿한 성격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럼 앞으로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하겠다고 말하니 플랙 녀석은 아주 우거지상을 지었다.


다른 사람을 악당으로 만드는 능력이라. 그런 미라큘러스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데 대체 왜 우리의 미라큘러스를 노리는 거지? 그렇게 물었지만 플랙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않고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아직은 모르는 게 낫다고 대답하는 플랙에 진심으로 짜증날 뻔했지만 결국 추궁을 포기했다. 딱히 꼭 지금 알아야만 하는 사실도 아니었고 미라큘러스를 넘겨줄 일도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레이디버그에게는 뭐라고 해야 하지.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니까 제대로 확신할 만한 증거를 찾고 나서 말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놈들은 강하다. 우리가 낌새를 눈치챘다 싶으면 정말로 본격적으로 공격해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레이디는 그렇게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타입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손에 낀 반지가 너무도 갑갑했다. 벗어버리고 싶은데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뺄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는 건 알지만 그 방법을 지금 이 타이밍에 쓰고 싶지는 않았다. 두려웠다.


‘믿고 있는 게 당연하잖아.’


네가 다시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게 될까봐.

계속 이 상태로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영원히 감출 수 있는 진실같은 건 없으니까. 하지만….



“펠릭스?”



헉. 화들짝 놀라며 펠릭스는 마냥 눈을 깜빡거렸다.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누군지 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잠잠하던 푸른색 눈동자에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 걱정스러운 시선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낯빛이 어두워보이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헉, 세상에. 땀을 왜 이렇게 흘리고 있어? 괜찮아?”

“….”

“아, 잠깐만!”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낸 마리네뜨가 펠릭스의 얼굴에 손수건을 가져가려다 흠칫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제 얼굴의 땀을 닦아내는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펠릭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맙지만 이제 됐어.”

“어…?”

“먼저 갈게.”



평소와 달리 살짝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길을 마저 걸어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리네뜨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어디 아픈가?”






청명한 파리의 하늘 위.


에펠탑에서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무언가가 날고 있었다. 무수히 몰린 비둘기 떼들과 사람 하나는 충분히 올라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비눗방울 하나. 비둘기 위에 앉은뱅이 자세로 앉아 있던 미스터 피죤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커다란 비눗방울 위에 올라탄 채로 뒹굴거리며 묻는 버블맨에게 미스터 피죤이 다시금 말했다.



“히어로 녀석들을 죽여서라도 미라큘러스를 뺏어오라고 했던 거 말이야.”

“흐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버블맨의 태도에 미스터 피죤은 정말로 궁금한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요즘 그 녀석들이 우리 일을 많이 훼방놓았다는 건 인정해. 마임맨의 존재를 들켰고, 블랙캣을 도둑으로 몰아서 최소 신뢰를 잃게 하자는 작전도 실패로 돌아갔지. 시민들은 이제 전보다 더 그 녀석들을 믿고 신뢰하니까. 하지만 이 시점에서 굳이 그들을 죽여야만 할 필요가 있냐는 거야.”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아진 미스터 피죤을 가만히 바라보던 버블맨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봤자 아무 소용없잖아. 언제부터 우리한테 선택권이 있었다고. 우린 그냥 명령대로 하면 되는 거야. 깊게 생각하지 마, 아저씨.”

“으음….”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하는 미스터 피죤에게 버블맨은 설마, 하며 되물었다.



“녀석들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



찝찝하단 말이지. 미스터 피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운 날씨였다.


블라인드를 걷어내자 컴컴하던 사무실 안에 햇빛이 들이쳤다. 제레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걷어낸 블라인드 사이로 슬쩍 드러나는 창문 밖의 경치를 말없이 내다보았다.


하지만, 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흥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늘 날씨가 맑아서 좋다던가,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하얗게 빛나는 햇살들이 살을 따갑게 태우고 있음에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청명하게 빛나는 여름 하늘의 푸른색조차도 그의 마음에는 아무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색은 무채색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아, 눈에 띄기는 하겠군. 이것저것.



“부르셨습니까.”



살짝 고개를 숙이는 비서에게 제레미는 등을 보인 채 중얼거렸다.



“상당히 시끄럽군.”



귀가 아플 정도로. 무심히 말하고 있지만 그 말 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지금 제레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엘렌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시방석같은 자리라도 그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는 자리를 뜰 수 없다. 그의 상사는 눈치가 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으니까.


한참 뒤, 생각을 마쳤는지 다시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보기를 보이는 것도 중요하겠지.”



제레미의 입가에 피식 조소가 걸렸다.






“방학이다!”



아아아아아…. 말꼬리를 흐리며 책상에 푹 엎어졌던 마리네뜨가 마구 팔다리를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순간에 축 늘어졌다.



“생각해보니 학교를 못 가면 펠릭스를 못 만나잖아….”



나는 바보야. 책상 위로 눈물을 흩뿌리며 그저 방학이 다가온다고 좋아했던 자신의 멍청함을 마구 탓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에이, 괜찮아. 가끔 공원 나와서 산책하기도 하고 그럴 텐데 뭐. 자주 가는 공원 쪽을 가보면 있을 거야. 학교에서만큼 만나기 쉽지는 않겠지만….”



벌떡, 고개를 들어 티키를 향하던 마리네뜨가 이내 울먹거렸다.



“티키이~!!”



역시 내겐 너뿐이야~!! 두 손으로 티키를 붙잡은 마리네뜨가 티키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작거렸다. 꺄르르 웃으며 그런 마리네뜨의 어리광을 받아주고 있던 티키가 다시금 말했다.



“오늘 느낌 어때?”

“음, 좋아!”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가보자! 분명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펠릭스가 눈매를 살짝 치켜떴다. 심기가 좋지 않을 때의 버릇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펠릭스는 바로 앞에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길래 공원에나 나와서 여유롭게 독서나 하고 들어갈까 했는데, 어째서 이 녀석이 제 앞에 있는 것일까.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가 툭 내뱉었다.



“…스토커야?”



정말로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손사래를 쳤다.



“말했잖아, 요즘 운이 좋다니까?”



그렇게 말해도 영 못 미더운지 한참을 바라보던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리네뜨가 놀라 소리쳤다.



“어디 가?!”

“집.”

“왜! 같이 있으면 뭐 어때서.”

“넌 시끄러워.”



딱 잘라 말하며 앞으로 걸어가는 펠릭스의 뒤를 쪼르르 쫓아오면서 마리네뜨가 말했다.



“그럼 조용히 할게! 응? 이렇게 만났는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안 될까나…?”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놀란 표정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펠릭스의 시선 끝에 마리네뜨가 보였다. 살짝 빨개진 얼굴로 두 손의 검지손가락 끝을 맞대고 헤실거리며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 위로 언젠가의 기억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에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이름 정도는 알아도 좋지 않아요?’


붉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살짝 홍조가 어린 얼굴, 자신을 향해 웃던 맑은 푸른색 눈동자까지.


‘안, 안 될까나….’


설마, 그럴 리가….



“그래도 안 돼.”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하며 펠릭스는 다시 뒤돌아섰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다. 뒤에서 추욱 늘어졌을 녀석의 얼굴이 상상되어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시간되면.”

“응?”



더 이상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지 빠르게 걸어 자신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펠릭스를 가만히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이윽고 환하게 웃었다. 나중이라고 기약을 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역시 오늘은 티키의 말대로 운이 좋은 날인가봐! 싱글벙글 웃으며 공원을 나가려던 마리네뜨가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굳은 채로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물었다.



‘마리네뜨, 왜 그래?’

“티키, 방금 그 소리 들었어?”

‘소리?’

“나, 이 소리 알아.”



새가 우는 듯한 소리. 멍하니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뒤를 돌아 공원 안쪽을 향해 달렸다. 헉헉거리며 한참을 달린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어떤 벤치가 보였다. 많은 수의 비둘기가 모여 있는 벤치에 앉아 있던 중년의 신사를 보며 마리네뜨는 중얼거렸다.



“저 사람….”



자꾸만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마리네뜨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벤치가 점점 가까워지자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우뚝 멈춰선 마리네뜨가 두 손을 뒤로 가렸다. 마리네뜨가 다가온 것을 눈치챘는지 비둘기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활짝 웃음꽃을 피우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손에 들린 피리를 발견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뒤로 모았다. 손끝이 자꾸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마리네뜨는 마주 웃어주었다.



“아저씨.”

“응? 왜 그러니?”

“그, 손에 든 건 뭐예요?”

“아, 이거?”



허허, 웃던 남자는 선선히 답을 들려주었다.



“이건 호루라기란다.”

“아하.”

“평범한 호루라기랑은 조금 다르지. 이건 새를 부를 때 쓰는 녀석이니까.”

“그…, 래요?”

“그럼. 한 번 보겠니?”



남자가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힘껏 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같기도 하고 유리가 울리는 듯도 한 오묘한 소리가 나더니 비둘기들이 남자의 주변으로 날아올랐다. 남자의 팔, 어깨, 무릎과 머리 위로 올라온 비둘기들이 옹기종기 앉아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마리네뜨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둘기들을 보며 마리네뜨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재밌니? 재밌지!”



아이처럼 좋아하는 남자의 모습은 도저히 이 파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악당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속마음을 감추며 마리네뜨는 싱긋 웃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자비에. 자비에 라미에르. 그러는 아가씨는?”

“마리네뜨예요!”

“예쁜 이름이네~”



즐겁게 웃고 있는 남자를 상대로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탐색전에 들어갔다.



“여기에 자주 계시나요?”

“아니, 음…. 사정상 여러 공원들을 돌아다니고 있단다. 뭐 이 녀석들이 있는 곳이라면야 어디든 좋지만.”



애정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제 앞의 비둘기들을 내려다보는 자비에의 모습에서 마리네뜨는 확실하게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다시금 긴장하는 자신에게 괜찮다고 최면을 걸며 마리네뜨가 다시금 물었다.



“비둘기들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지. 마치 내 아이같다는 생각도 가끔 해요.”



사르르 풀어지는 얼굴로 찡긋 윙크하던 자비에의 시선이 비둘기들을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밑에 떨어져 있는 빵쪼가리만 열심히 주워먹고 있는 비둘기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자비에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뭐, 나나 이 녀석들이나 어딜 가든 문전박대를 당하긴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라며 피식 웃는 자비에의 얼굴이 퍽 쓸쓸해 보여서 마리네뜨는 순간 안타까워졌다. 탐색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순간,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비에 씨! 당신 또 여기서….”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다가오는 제복 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비에는 마리네뜨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런. 아가씨는 먼저 가 봐요. 좋은 일은 아닐 거 같으니까.”



즐거웠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자비에를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어 마리네뜨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계속 달려가다가 공원에서 한참 멀어졌을 때서야 멈춰선 마리네뜨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고개를 숙이고 헉헉거리며 들숨날숨을 열심히 반복하던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말을 걸었다.



“마리네뜨….”

“티, 티키. 맞지? 저 사람이지?”



기운이 느껴져? 마리네뜨의 질문에 티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호크모스를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 그의 수하라면, 변신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기운을 감지할 수가 없어.”

“그, 그렇구나….”



아직도 힘든지 마리네뜨의 숨소리가 살짝 거칠었다. 방학이 되어서 며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벌써 체력이 거지가 다 됐다며 웃고 있는 마리네뜨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여서 티키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아?”

“응? 응.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 모처럼 악당 한 명이 누군지 알았는걸.”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마리네뜨의 미소는 평소마냥 밝지는 못했다.





“흐음~”



마리네뜨와 헤어진 뒤, 묵묵히 길을 걸어가기만 하던 펠릭스의 셔츠 사이로 플랙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키득키득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조용히 타일렀다.



“플랙. 밖에 있을 때는 고개 내밀지 말랬지.”



대체 언제쯤에야 말을 들을 거냐고 짧게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 생각보다 쟤를 별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도끼눈을 뜨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뭘 그렇게 흥분하냐는 듯이 태평한 얼굴로 낄낄거렸다.



“그렇잖아~ 니 성격에 정말 싫었으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친절을 발휘하지도 않았을 거고 말이야~?”

“사람을 딱히 싫어하지는 않아. 귀찮을 뿐이지.”



딱 잘라 말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오~?”



일부러 길게 늘여 말하는 플랙이 얄미웠는지 펠릭스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플랙의 이마를 톡 튕겼다. 으앗! 비명을 지르며 펠릭스의 품에서 벗어난 플랙이 꺄하하 웃었다.



“나 잡아봐라~”

“야!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을…!!”



열받아서 소리치려던 순간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에 펠릭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무언가. 플랙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공중에 멈춰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펠릭스는 반지를 낀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플랙이 반지 속으로 빨려들더니 검은 오오라가 반지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반지에서 나오는 검은 빛들이 펠릭스의 몸을 감싸자마자 번쩍 빛이 폭발했다 사라졌다. 펠릭스가 서 있던 자리에 나타난 블랙캣이 펄쩍 뛰어올라 기운이 느껴진 장소로 향했다.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계속 달려가는 블랙캣의 눈앞에 파리의 번화가 중 하나인 샹젤리제 거리가 나타났다. 평소였다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활기찬 거리였어야 할 이곳에는 지금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물난리였다. 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소화전들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물이 한 가득 고여 있었고 물세례를 맞았는지 홀딱 젖은 사람들도 다수였다. 아무래도 이 거리에서 장난치고 있는 상대는 버블맨인 거 같다고 예상하며 블랙캣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난리가 아니네.”



바닥에 있는 물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블랙캣은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침 가고 있는 방향에서 크게 솟아오르는 분수에 블랙캣은 직감적으로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는 블랙캣의 옆으로 순식간에 다가온 레이디버그가 짜증스레 말했다.



“대체 이 물난리는 뭐야?”

“누가 아니래.”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 녀석밖에 없지.”



누가 파트너 아니랄까봐 호흡을 딱딱 맞추던 두 사람은 어느 새 샹젤리제 거리에서도 상당히 넓은 폭을 자랑하는 삼거리 쪽으로 들어섰다. 뭔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



“아니, 내가 왜 하필 네 녀석이랑 같이 싸워야 하는 거야? 난 물이 싫다고!”

“아, 불평 그만 하고 좀 거들어요. 그리고 저도 새는 싫어요. 냄새나는걸.”

“뭐얏?!”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미스터 피죤과 버블맨을 발견하고서 블랙캣은 쟤들 뭐하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레이디버그는 미스터 피죤을 발견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제 뺨을 두 손으로 탁탁 내리쳤다. 정신차려, 집중해야지!


두 히어로를 먼저 발견한 버블맨이 정답게 인사를 건넸다.



“여어, 왔어?”

“너희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이런, 이런. 그 대사 듣는 것도 슬슬 지겹네. 애초에 그만둘 거면 시작도 안 했겠지~ 알잖아?”



빙글빙글 웃는 그 얼굴이 어찌나 얄밉던지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표정이 왕창 구겨졌다. 열받은 얼굴로 공격에 들어가려던 블랙캣을 붙잡은 레이디버그가 작게 소곤거렸다.



“블랙캣, 미안한데 네가 미스터 피죤을 맡아줄 수 있어?”

“응? 그건 뭐 어렵지 않은데…, 왜 그래?”

“아, 아니. 그냥….”



우물쭈물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레이디가 원한다면야.”



그 말과 함께 블랙캣은 재빨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너클 한 쌍을 꺼낸 블랙캣이 그걸 각각 손에 끼고서 미스터 피죤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듯한 그 포즈에 미스터 피죤은 피리를 불며 블랙캣에게로 손짓했다. 비둘기들이 달려들었다.



“뭐야, 내 상대는 너인가?”



비눗방울 위에 올라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보는 버블맨을 노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방에서 날카로운 검을 하나 꺼내들었다. 방울을 다루는 녀석이니 방울을 터트리며 대응하면 된다.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버블맨은 히죽 웃으며 소리쳤다.



“제법 머리를 쓰네?”



대꾸 없이 달려들 준비를 하는 레이디버그에게 버블맨은 피식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이런.



“하지만 말이야. 내 특기가 방울이긴 하지만, 딱히 그것만 할 줄 아는 건 아니거든?”

“뭐?”

“지금 이 물난리를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 말과 함께 버블맨은 들고 있던 비눗방울채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땅이 진동하더니, 주변에 있던 소화전들에서 세찬 물줄기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놀라 주위를 둘러보는 레이디버그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낄낄 웃는 버블맨의 주변으로 모여든 물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했다. 기겁하며 살짝 뒷걸음질치는 레이디버그를 향해 버블맨이 채를 휘두르자마자 수룡(水龍)은 빠르게 아래쪽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꺄아악!”



달려드는 용을 피해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수룡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방향을 비틀더니 그대로 레이디버그를 덮쳤다. 파격음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리꽂힌 수룡이 다시 하늘로 승천하듯이 위쪽으로 크게 솟아올랐다. 미스터 피죤과 싸우다 그 모습을 본 블랙캣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레이디!”



수룡이 사라진 자리에 레이디버그가 쓰러져 있었다. 물에 흠뻑 젖어 검게 물들어 있는 바닥 위에 죽은 듯 엎어져 있던 레이디버그가 쿨럭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블랙캣이 서둘러 레이디버그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미스터 피죤이 보낸 비둘기 떼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가시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블랙캣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비둘기들에게 던졌다. 쌔앵 날아간 그물이 촤악 펴지더니 새들을 바닥으로 깔아뭉갰다. 악! 내 사랑스러운 비둘기들이! 비명을 지르는 미스터 피죤을 뒤로 한 채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에게로 후다닥 달려갔다.



“레이디, 설 수 있겠어?”

“쿨럭, 응. 당연하지.”



흠뻑 젖은 몰골로 상당히 물을 많이 먹었는지 계속 기침해대는 레이디버그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블랙캣이 시선을 위로 돌려 버블맨을 노려보았다. 히죽히죽 웃으며 버블맨은 다시금 물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런 버블맨을 초조하게 지켜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지? 아까와 같은 공격이 또 들어오면….”

“들어오기 전에 막거나 피하면 되잖아.”

“무리야. 아까 피하려고 했는데 방향을 바꾸더라구. 그리고 충격이 엄청나. 나라서 망정이지 일반 사람이 맞았으면 즉사였을 거야.”



당당하게 서 있었지만 방금 전의 충격 때문인지 레이디버그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어느 새 미스터 피죤까지 버블맨의 옆으로 다가온 것에 블랙캣은 속으로 짜증을 냈다. 아, 하나도 성가신데 둘이라니.


잠깐, 둘?



“아까 저 녀석들이 처음에 하던 대화 기억나, 레이디?”



작게 소곤거리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응?”

“그대로 한 번 가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이 몇 마디 속닥거렸다. 살짝 정신이 없는지 넋나간 표정으로 말없이 듣고 있던 레이디버그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될까?”

“그럼, 내가 누군데. 내가 하잔대로 해서 문제 생긴 적 있었어?”

“…아니.”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 레이디버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치며 블랙캣은 다시금 버블맨을 쳐다보았다. 두 번째 공격을 위한 준비를 이미 마쳤는지 이번에 만들어진 녀석은 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절묘하다고 키득거리며 블랙캣은 입가에 가득 미소를 그려냈다. 블랙캣은 봉을, 레이디버그는 각각 검을 꺼내들고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을 가만히 응시했다.


버블맨이 다시금 채를 휘둘렀다. 푸드득 날아 덤벼드는 새를 가만히 지켜보며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새가 아주 근접할 때까지 날아들다가 양 옆으로 나뉘어 피했다. 예상대로 움직임이 둔해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새를 응시하며 레이디버그는 방금 헤어지기 전, 블랙캣이 들려준 봉을 꺼내 바닥에 꽂고 날아올랐다.


미스터 피죤이 있는 쪽으로. 히익, 기겁하며 도망치기 위해 미스터 피죤이 방향을 선회하기 직전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몸을 숙여 방향을 바꿨다. 빠르게 날아오는데다 몸집도 거대해 쉽게 방향을 틀지 못하고 물새는 그대로 미스터 피죤과 충돌했다. 봉에 매달려 있다가, 엄청난 충격과 받고 비둘기들과 함께 추락하는 미스터 피죤을 발견한 레이디버그가 그를 향해 뛰어내렸다.


‘레이디, 지금 우리 힘만으로 저 둘을 다 상대하기는 좀 버거워. 하지만 말이지, 상대하는 놈이 둘이면 써먹을 수 있는 작전이 하나 있긴 하거든.’


가방 속에서 다시금 붉은 검을 꺼내든 레이디버그가 마치 검처럼 몸을 쭉 펴고 아래로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한 녀석을 이용해 다른 한 녀석을 잡자. 저 공격은 강하지만 아예 틈이 없는 것은 아니야. 아마 저 공격도 나보다는 레이디가 표적일 거야. 어떻게든 미스터 피죤에게로 저 공격을 유도해야 해. 내 봉을 빌려가.’


공기저항 때문인지 자꾸만 흔들리려는 중심을 애써 바로잡으며 레이디버그는 티키가 제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악당들은 악당으로 변신하게 해주는 촉매제가 있어. 마치 미라큘러스처럼.’


촉매제를 부수면 더 이상 악당으로 변하지 못하겠지. 그럼 문제를 일으키지도 못할 것이다. 촉매제가 뭔지는 뻔했다. 버블맨은 둘째치더라도 미스터 피죤의 촉매제는 분명….


미스터 피죤의 목에 매달려 있는 호루라기를 발견한 레이디버그의 눈이 매서워졌다.


한편, 미스터 피죤은 자신과 함께 추락하고 있는 비둘기들과 더불어 위쪽에서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내려오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후다닥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아직 저쪽에 남아 있는 새들이 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바로 그 순간, 사무실에 앉아 있던 제레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미스터 피죤의 몸에서 한 순간 힘이 빠졌다. 호루라기를 불어야 했던 타이밍을 아주 살짝 놓쳐버린 순간, 미처 궤도를 수정하지 못한 레이디버그의 검끝이 미스터 피죤의 배를 꿰뚫었다.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뜨거운 핏방울이 튀었다.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미스터 피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차가운 돌바닥 위로 추락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미스터 피죤의 주변으로 물에 젖은 새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파득파득, 애처롭게 날개를 움직이는 새들을 시선을 돌려 쳐다보던 미스터 피죤은 제 배를 뚫어버린 붉은 검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배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과 더불어 검의 주변으로 붉게 번지기 시작하는 자국들에 미스터 피죤은 직감했다.


여기까지인가.


죽음의 그림자가 제 눈가에 드리우고 있었다. 멍하니 제 주변에 있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비둘기들과 자신의 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멀쩡한 비둘기들을 바라보는 미스터 피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내겐 역시 마지막까지 너희들밖에 없구나.


우리가 대체 뭘 잘못한 걸까. 우리는 그저 쉴 장소가 필요했었을 뿐인데. 미스터 피죤이 입을 벙긋거렸다. 힘이 없어 희미한 신음 소리만이 입가로 새어나왔지만, 그는 분명히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 유유자적 이 녀석들과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걸까. 방해된다는 이유로 계속 쫓겨나기만 하고, 어떤 곳에 가더라도 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어디에도 우리가 쉴 수 있는 장소는 없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장소를 가지고 싶었어. 우리를 괴롭히는 인간들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그의 눈가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 까만 눈동자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천천히 손을 들었다. 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팔을 움직여 제 바로 가까이에 있는 비둘기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구구, 기분좋게 우는 비둘기를 보며 미스터 피죤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저, 자신 때문에 휘말려든 이 가여운 아이들이 불쌍할 뿐이었다.


미안하구나.



“이…. 저…. 나….”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가만히 중얼거리던 미스터 피죤의 몸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하얀 빛방울들이 천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구구?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둘기들을 쳐다보며 미스터 피죤은 활짝 웃었다. 새들과 같이 놀던 때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입가에 살며시 띄운 채로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감겼다.


그와 동시에 미스터 피죤의 얼굴 근처에 떨어져 있던 호루라기가 톡,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호루라기 사이에서 나타는 것은 다름 아닌 새까만 색의 나비였다. 검은 나비가 팔랑 날아오르더니 하늘로 날아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나비를 발견한 블랙캣의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공중으로 솟아오르던 빛방울들과 함께 미스터 피죤은 완전히 사라졌다. 시체조차 남지 않은 아름답지만 기괴한 광경에 블랙캣은 말을 잃었고, 버블맨은 이미 도망갔는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디버그는….



“아니.”



망연히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얼굴에 묻은 핏자국조차 신경쓰지 않고, 미스터 피죤이 사라진 자리만을 멍하게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표정은 흡사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아니야, 난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을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이 흡사 피에 범벅되어 있는 것만 같아 레이디버그는 몸을 덜덜 떨었다. 무섭다. 두렵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제 몸을 양팔로 껴안고 몸을 웅크렸다. 춥다. 너무 추웠다. 방금 전 물을 맞았기 때문일까? 여름인데도 마치 겨울처럼 추웠다. 몸의 떨림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저 촉매제를 부수려고 했을 뿐인데. 더 이상 피해가 나지 않기를 바랬을 뿐인데. 이렇게….


살짝 고개를 들자 구구거리는 비둘기들만이 돌바닥 위에 모여 있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저기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다. 존재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붉은 검을 발견한 레이디버그의 몸이 흠칫 튀어올랐다. 내가 휘두른 악몽의 흔적. 스스로가 불러낸, 사라지지 않는 죄의 표상.


내가, 사람을 죽였어?


하하, 자조의 웃음을 토해내던 레이디버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이미 검게 물들어버린 바닥으로 스며들어갔다.


고장난 소화전들, 물로 흠뻑 젖어버린 주변, 방금 전 싸움의 여파로 살짝 무너져버린 건물들. 아수라장이 된 거리 한복판에 앉아 레이디버그는 그저 절규했다. 



“왜 이렇게 된 거냐고!!”






푸른 도화지 같은 하늘 위로 까만 점이 천천히 움직였다.


바람결을 타고 팔랑팔랑 날아가던 검은 나비는 어느 한 건물에 다다랐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안으로 휙 날아든 나비는 창문 바로 앞에 쭉 뻗어 있는 검지손가락 위로 올라앉았다. 살짝 날개를 파닥거리는 검은 나비를 말없이 바라보던 남자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즐거워 보이지만 그래서 더 오싹할 정도로 서늘한 미소와 함께 남자는 중얼거렸다.



“도둑을 잡기에는, 역시 같은 도둑만한 게 없겠지.”





※ Set a thief to catch a thief. - 프랑스 속담, 이이제이(以夷制夷)



- 10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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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책을 구입해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바꾼 대사가 있습니다.

제가 왜 대사를 바꿨냐면 원래 쓰려던 대사가 저거였는데 바꾸는 걸 까먹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뜻은 똑같아요. 재판본에는 저걸로 수정해서 낼 거 같네요...ㅠㅠㅠㅠ 저거 뜻 통하는 거 찾으려고 엄청 고생했었는데 뭐했죠 과거의 저(멍뎅)


운수 좋은 날! 제목 정말 언제 봐도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한국 문학의 모 소설이 떠오르신다면 아주 정확히 짚으신 겁니다 ㅇㅇ


다음 회 예고를 간략히 적어볼까 고민했지만 스포일러는 재미없으실 것 같아 제목도 생략하고 있죠! 머리쓰는 거 좋아합니다 후후 추론하면서 읽으셔도 재밌으시겠지만 굳이 안 하셔도 되요 우리의 해결사 펠릭스가 있으니까요!(펠릭스: 야


여름 에피에서 가장 즐겁게 작업한 화 중 하나입니다. 이 얘기 했더니 책을 읽으신 분들이 저를 악마보듯 보셔서 슬프네요 아니 어째서죠 이 정도 시련은 줘야 극이 재밌어지죠~ 안 그래요?^ㅁ^


다크한 성인용 정치극<<이라는 소재에 맞게 하기 위해 매우 많이 노력했습니다 ㅇㅇ 사실 수위가 너무 약한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읽으신 분들이 15금은 된다고 해서 안심한!(모두: 저건 진짜 악마다) 애들에게 시작되는 시련은 사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만 아이들은 아직 모르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죠?(모두: 저기요


최대한 현실적이고 희망찬 전개를 적기 위해 노력했사오니 즐겁게 지켜봐주셔요>ㅁ<!!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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