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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10.

예감







에에취!


요란스럽게 튀어나온 재채기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민망함을 애써 숨기며 코를 문지르는 마리네뜨에게 같이 길을 걸어가던 에스미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뭐야, 감기라도 걸렸어?”

“아,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의 볼이 살짝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시내에 나와 있었다. 상당히 더운 날씨라 둘 다 반팔에 짧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별로 더위를 타지 않는 마리네뜨와 달리 에스미는 더운지 연신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남은 손에는 차가운 커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직후라 그런지 꽤나 나른했다. 오랜만에 놀러 나와서일까, 근처에 있는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재잘거리는 두 소녀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앗, 죄송합니다.”



어깨가 툭 맞닿았다. 사과의 말을 건네며 저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마리네뜨는 흘깃 쳐다보았다. 벌써 몇 번째다. 이 거리가 번화가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검은색의 정장을 입고 바쁘게 길을 걸어가는 직장인들은 물론, 귀에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보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친구들, 나들이를 온 것처럼 화사하게 입고 돌아다니는 가족들,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지고 돌아다니거나 목에 사진기를 걸고 돌아다니는 관광객 비스무리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왜 이렇게 여기에 사람이 몰리게 되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지금 파리 최대의 번화가라 불리는 샹젤리제 거리가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다. 3일은 더 지나야 공사가 마무리되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기로 예정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몰려온 듯 했다. 사실 마리네뜨와 에스미도 오늘 그쪽으로 놀러가기로 했었는데 보수공사 안내판을 보고 포기했던 거니까. 그에 속으로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던 마리네뜨는 순간 흠칫했다. 낯빛이 어두워지는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리네뜨. 너 표정이 왜 그래?”

“응?! 응….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스미가 한 손으로 마리네뜨의 볼을 꽈악 꼬집었다.



“꺅! 아퍼!”



마리네뜨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엄살을 부렸다. 하지만 정작 꼬집은 당사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손을 놓고 말했다.



“너 열이 좀 있는 거 아니야? 좀 뜨뜻한데?”

“어,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오늘 날씨가 더워서 얼굴에 열이 오른 건지도 몰라. 일단 저 가게에라도 들어갈까?”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고 에스미는 바로 앞에 보이는 연분홍빛 간판이 붙은 가게로 들어섰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파는 깔끔한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훅 불어왔다. 이번에 새로 런칭한 가게인지 가게 안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깨끗한 하늘색 파스텔톤의 벽지를 배경으로 예쁘게 반짝거리는 유리공예품과 오르골, 각종 장신구와 귀여운 봉제인형들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무덤덤한 얼굴을 하면서도 꽤나 신기한지 코너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에스미와 달리 마리네뜨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돌아서던 마리네뜨는 바로 앞에 있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두려움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서다 뒤에 있던 나무 선반에 등을 부딪혔다. 아얏, 작은 비명과 함께 재빨리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히어로가 되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각오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영화의 끝에는 반드시 악당의 죽음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 그래서 전력을 다해 싸웠고 그에 후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무엇에 휘둘리고 있는 거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것도 아니면, 영웅이라는 이름의 무게?


누군가를 찌르는 감각은 예상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끔찍했다. 푸욱, 소리와 함께 고무를 뚫듯 간단하게 생살이 찢기고 붉은 피가 샘물처럼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분명 그 자리에 있던 악당과 자신, 그리고 블랙캣 뿐이겠지.


마리네뜨는 순순히 인정했다. 정말 어이없지만, 이러면 안 되겠지만 자신은 그 악당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비둘기 떼에 둘러싸여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 위로 쓰러져버린 자신의 잔상이 겹쳐졌다.


나도 그렇게 죽게 될까? 누구도 진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게 될까?


비둘기들과 함께할 때 즐거워보이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어쩌면 처음에 했던 그 모든 말들은 그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인간들이 싫어서 그런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그를 단죄할 자격이 있을까? 그가 저지른 짓들은 과연 그렇게 죽어야만 했던 일이었을까? 내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뺏어갈 권리가 있는 걸까.


회의감이 들었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자조했다.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결심하고 또 결심했었는데 지금 자신은 흔들리고 있었다. 무서워졌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레 너무 엄청난 일을 도맡게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리네뜨?”



에스미가 부르는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마리네뜨의 행동이 유별나다는 듯 에스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살 거 없어? 여기 니 취향의 예쁜 물건들이 많은데?”

“어, 그럼 난….”



헤헤 웃으며 근처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던 마리네뜨는 어떤 물건 앞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한참을 멍하게 그것만 바라보고 있던 마리네뜨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붉은 색깔에 까만 점들이 드문드문 그려져 있는 예쁜 시계였는데, 겉을 유리로 제작했는지 투명한 붉은색에 선명하게 박힌 까만 점들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말없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제 친구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에스미가 뭐라고 말을 걸려는 찰나 누가 선수를 쳤다.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손님. 그 시계가 마음에 드시나요?”

“예?”



어느 샌가 마리네뜨 옆으로 다가온 점원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레이디버그를 테마로 만든 시계인데 여성분들이 많이 사가시더라구요. 예쁘고 실용적인 상품이라 그런가.”

“레이디버그 테마요?”



깜짝 놀라는 마리네뜨에게 직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요즘 파리에서 인기 많은 히어로니까요. 저희 집만 아니라 다른 가게들에서도 상품이 많이 나오고 있죠. 아, 블랙캣 테마를 원하신다면 이쪽에 있어요. 요즘 특히나 히어로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죠. 이번 샹젤리제 거리에서 일어났던 사건도 그렇고, 다들 응원하는 분위기예요.”



의외였다. 마리네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 하지만 결국 뭐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잖아요. 다들 매번 도시만 부서진다고 싫어하거나…. 그러지는 않을까요?”

“? 전혀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마리네뜨는 말을 잃었다. 직원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부서진 거야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 사건 규모만 봐도 히어로들이 없었으면 피해가 엄청나게 커졌을 거예요.”



당시 사건을 멀리서나마 목격했는지 점원은 생각 외로 샹젤리제 거리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살면서 건물보다 더 높이 치솟는 물기둥은 생전 처음 봤다고 질려하던 점원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감사하고 있어요.”

“에?”

“위험한 일이잖아요. 목숨을 걸고 악당이랑 싸워주는 사람들에게 그것밖에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시민이 된 것 같다며 웃는 점원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일 텐데도.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악당이랑 몇 년을 싸우는데 현실이라고 별반 다를까요. 부디 지지 않고 열심히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죠. 믿고 있어요.”



믿고 있어요. 그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그저 눈을 깜빡거렸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점원은 당황했는지 허둥거렸다.



“어머, 제가 너무 주절주절 떠들었나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에?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요! 설명 감사해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앞에 있던 시계를 집어들었다. 예쁘게 반짝거리는 시계를 손에 들고 빤히 들여다보던 마리네뜨가 헤실 웃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꼭 그거 사야 돼?”

“응?”

“넌…. 아니, 아니다.”



신경쓰지 마. 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앞장서는 에스미를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살펴보았다.


물건들을 계산하고 있는데 직원이 싱긋 웃으며 종이 두 장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직원은 친절하게 손으로 문 앞을 가리켰다.



“이번에 저희 가게에서 오픈 기념으로 추첨 이벤트를 열거든요. 상품이 꽤 호화스러우니까 한 번 뽑아보세요~”

“해볼까?”

“응!”



재밌겠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에스미의 뒤를 따라 나가던 마리네뜨의 눈 앞이 순간 흐릿해졌다. 몸이 기우뚱거렸다.


어?


살짝 어지러워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다시 선명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걸으면 넘어질 것만 같은 기시감에 선뜻 앞으로 발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 서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물었다.



“뭐해, 안 오고?”

“아, 응!”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었다. 다행히도 어지럼증은 한 순간의 문제였는지 다시 걸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출구로 나갈수록 점점 더워지는 느낌에 마리네뜨는 손을 들어 부채질을 했다. 아, 더워. 왜 이렇게 덥지?


가게 앞에 있는 추첨 부스에는 이미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맨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상품 목록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스미가 중얼거렸다.



“1등 상품이 자동차라고?!”

“우와.”



짧게 감탄사를 흘리며 웃는 마리네뜨를 에스미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평소였다면 더 방방 뛰면서 눈을 반짝거렸을 텐데 지금의 마리네뜨는 너무나 차분했다. 아니, 정확히는 오늘 하루 전반적으로 기운이 없어 보였지.



“마리네뜨, 너부터 할래?”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추첨함으로 손을 뻗었다. 머리가 아팠다. 자꾸 흐릿해지는 시야에 몇 번 눈을 깜빡이면서 간신히 종이 한 장을 꺼내들자 갑자기 짤랑짤랑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러지? 정신이 없어 허둥대는 마리네뜨에게 추첨함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3등을 뽑으셨어요.”

“예…?”

“이건 당첨 선물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남자가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몽롱한 정신에도 무사히 그것을 받아들고 마리네뜨는 추첨함 근처를 벗어나 한산해진 길가에 섰다. 이상할 정도로 공기가 무거웠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으려고 했지만 글자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받은 종이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마리네뜨의 등 뒤로 다가온 에스미가 깜짝 놀라서 중얼거렸다.



“와, 이거 이번에 공연한다던 유명한 오페라 티켓이잖아!”

“그래…?”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 없는 마리네뜨와 달리 에스미는 잘 됐다는 듯이 마리네뜨의 등을 툭툭 쳤다.



“그럼! 마침 잘 됐다. 그 바보 녀석한테 같이 가보자고 하지 그래? 이거 이번 분기 기대작이라 표가 나오면 전부 매진이라 구하기도 쉽지 않아. 심지어 VIP석이라고!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가 없을 걸?”



그런 걸로 같이 간다고 할 성격은 아닌데. 하지만 마리네뜨는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에스미의 텐션이 높은 이유는 아마 기운이 없어 보이는 자신을 달래주기 위한 나름의 배려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게 여실히 느껴져 마리네뜨는 그저 웃고 말았다.



“고마….”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다리에 살짝 힘이 풀렸다. 마리네뜨, 왜 그래? 너 얼굴이…. 흐릿하게 번지는 에스미의 목소리에 어라? 하던 순간 마리네뜨의 몸이 휘청이며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차가운 돌바닥으로 쓰러지려던 순간 무언가가 제 몸을 받쳐 안았다. 누구지? 열에 들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앞을 보기 위해 애써 눈을 떴지만 보이는 것은 암흑이었다.


마리네뜨는 그대로 기절했다.






“파트너.”

“왜.”



셔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여름인데도 긴 팔에 긴 바지, 심지어 단추까지 꼭 채워 입고 있는 소년을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전혀 개의치 않아 보이는 당사자와는 달리 불평은 의외의 곳에서 솟아나왔다. 펠릭스의 셔츠 속에 들어 있던 플랙이 작게 불평을 터트렸다.



“이런 더운 날씨에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을 오는 이유는 뭔데?”

“어쩔 수 없잖아. 서점에 괜찮은 책이 들어왔다고 하니까.”

“흐음, 나중에 사러 와도 되지 않나~? 왜 꼭 지금? 사람 많은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잠시 멈칫하더니 펠릭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하루빨리 읽고 싶으니까. 더 이유가 필요해?”

“그럼 옷이라도 좀 시원하게 입든지~? 보기만 해도 덥다구.”

“난 이게 편해.”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도 펠릭스는 제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힐끔 돌아보았다. 상당히 오래 전에 쓰여진 희귀본이라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책이 들어왔다는 말에 재빨리 집을 나서 시내로 나왔다. 확실히 날이 덥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책을 빨리 수령하는 게 더 중요했다. 티는 안 내려고 하지만 상당히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펠릭스를 플랙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빨리 집에 가서 책을 살펴볼 생각밖에 없는 펠릭스에게 플랙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좋은 소식 하나 알려줄까?”

“…정말 ‘나한테’ 좋은 소식이긴 한 거야?”



이제 장난에도 익숙해졌는지 대놓고 의심부터 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너무하네~’ 한 마디와 함께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이 근처에서.”

“…뭐?”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재빨리 주위를 스샥 둘러보았지만 잠잠했다. 플랙은 낄낄 웃었다.



“농담이지롱!”

“야, 너….”

“애초에 상대가 변신을 해야 기운이고 뭐고 느낄 수 있다구~?”

“…하아.”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했는지 가만히 침묵하다가, 펠릭스는 다시금 제 파트너의 이름을 불렀다.



“야, 플랙.”

“으응~?”

“…아니다.”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펠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플랙이 지적한 대로 책은 반쯤 핑계였다. 조용한 장소에서 산책을 하기엔 오히려 생각만 많아질 것 같아서 일부러 시끄러운 곳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덕분에 짜증은 치솟지만 뭔가 생각할 여유가 없는 점은 마음에 든다. 지금 혼자 있었다간 쓸데없는 생각들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자꾸 떠오르는 걱정이 있었다.


레이디버그는 괜찮을까.


눈물로 범벅이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먼젓번 샹젤리제 거리에서 드디어 악당 중 한 녀석을 해치웠다. 단서로 생각할 법한 것도 나왔다. 하지만 그 모든 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너졌다. 꽤나 덤덤한 자신과는 다르게, 많이 충격받은 건지 넋이 나간 얼굴로 미스터 피죤이 있는 자리만을 쳐다보던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심장 한 구석이 아릿해졌다.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멍해 있는 레이디버그를 데리고 재빨리 도망치기는 했지만, 얼굴에 묻은 핏자국도 닦아내지 않고 초점 없는 눈동자를 깜빡거리는 레이디버그가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레이디. 레이디. 한 손으로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꼭 끌어안고 작게 속삭이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레이디버그가 뭐라 중얼거렸지만 너무 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표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살짝 웃으며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흐릿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과대망상이라면 좋을 텐데.


미스터 피죤이 죽었든 말든 그건 솔직히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왔어야만 했고 레이디버그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생각하는 것과 현실의 감각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일에 나름 익숙해진 자신과는 다를 테니까.


이렇게 덤덤한 자신의 모습을 레이디버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냉정한 놈이라고 싫어하게 될까. 이 와중에도 당신만이 걱정되는 나를 이기적인 녀석이라 경멸하게 될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변신을 풀고 플랙에게 물었다.


‘그 악당, 정말 죽은 거야?’

‘직접 보고도 몰라?’


되려 질문하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짧게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어지간한 상처로는 죽지 않지만 불사신은 아니라구.’


이 와중까지도 플랙은 전혀 진지하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펠릭스는 별 감정의 동요 없이 대꾸했다.


‘…우리도 같은 꼴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아마도?’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것을 물었었다. 그 때도 플랙은 히어로는 거의 무적이라고 했었다. 약점이 없지는 않다는 소리냐고 물었을 때 플랙은 그랬었다.


욕심도 많다고.


그렇다는 건 저쪽에도 약점이 없지는 않다는 소리겠지. 같은 미라큘러스의 소유자니까. 그건 이번 사건에서 악당의 죽음으로 제대로 증명되었다. 물건이 망가지면 목숨을 잃게 되니까. 호크모스한테 써먹기는 어렵겠지만.

펠릭스가 다시금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그 호루라기에서 나온 나비.’

‘엉?’

‘그것도 호크모스와 관련된 건가?’


플랙은 꺄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그건 호크모스가 부리는 사령같은 거야.’

‘사령?’

‘물건에 깃들어 그 물건을 소유한 사람에게 힘을 주지만, 그들은 절대 호크모스를 거스를 수 없거든~ 일단 악당이 된 사람의 몸은 호크모스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혹시 자칫 잘못하다가 물건이 부숴지면 죽게 된다구. 힘을 거두는 것도 호크모스의 맘대로~ 그러니 누가 거역해? 물론 물건에 깃들어 있던 나비는 죽지 않지만.’

‘그럼 그 나비는 어떻게 되는데?’

‘뭘 어떻게 되겠어? 빌려준 사람이 사라졌으니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할 거 아니야~ 그나저나 왜 그렇게 나비에 대해 물어봐?’


낄낄 웃으면서도 날카롭게 핵심을 찔러오는 플랙의 질문에 펠릭스는 쓰게 웃었다.


‘…똑같이 생긴 나비를 봤으니까.’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때 박물관에서 아저씨의 손에 들려 있던 사진에 찍혀 있던 그 표본의 모양을. 그건 새까만 나비였다. 며칠 전에 봤던 나비에 비해 살짝 부식되어 있긴 했지만 모양만 따진다면 틀림없는 그 나비가 분명했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펠릭스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어떻게 그 나비가 화석처럼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거지? 주인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그리고 악당들은 왜 그 표본을 훔쳐간 걸까. 자신의 약점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아니, 이건 너무 단순한가.’

‘흐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비가 꼭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건 아닐걸? 호크모스보다 나비가 깃든 물건을 가진 사람이 늦게 죽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렇겠지. 그 사람이 죽어야 나비가 돌아올 테니 말이야….’


말끝을 흐리며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가상의 체스판 위로 다시 정렬되는 판의 모습을 펠릭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맨 앞쪽에 나열되어 있던 다섯 개의 말 중 하나가 아웃되었다. 현재 파악되는 악당의 수는 넷. 그리고 아마 뒤에 있을 무수한 졸개들. 이걸 소수의 집단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다.


정말 이들이 조직이라고 한다면….


펠릭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음모론 취급하지만 자신은 꽤나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이름이다. 카더라로만 알려져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간 파리에서 일어났었던 정치적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아주 없을 법한 소리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세워낸 가설대로라면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 파리의 상황을 조작해왔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자신만 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저번에 만났던 덥수룩한 갈색 머리의 기자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조직의 이름을 생각하자니 괜시리 심경이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건데.


지금 꽤나 그럴듯한 가설이 하나 떠오르긴 했지만 아직 몇 가지 정보가 부족했다. 일단 좀 더 정보를 모으고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전에 그 동굴이 있던 장소를 다시 둘러보는 정도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겠지.


‘파트너~ 혹시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난 빨리 죽긴 싫다구. 능글맞게 웃으며 엄살을 부리는 플랙의 말을 펠릭스는 가볍게 무시했었다. 하지만 그도 이 일이 위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더 큰 일이 닥치기 전에.


회상에서 벗어난 펠릭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지금은 사실 그것보다 신경쓰이는 일이 있단 말이지.


마리네뜨의 얼굴을 떠올리자 펠릭스의 기분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상당히 큰 사건이 터져서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그 때 당시의 마리네뜨의 행동은 분명 레이디버그와 닮아 있었다. 물론 머리색과 눈색은 일치하지만 이 넓은 파리에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만도 수백은 될 테고, 그 중에서도 하필 자신과 같은 학교에다 같은 학년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는 우연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보다 레이디버그의 정체를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펠릭스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왜지? 좋아하는 상대라면 당연히 정체가 궁금해야 할 텐데. 어째서?



“도련님?”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퍼뜩 놀라 재빨리 제 가슴 쪽을 내려다보았다. 플랙은 이미 눈치껏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자신을 부른 상대가 누군지는 뻔했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옆을 돌아보았다.



“엘렌.”



두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들을 들고 있는 엘렌이 보였다. 언제나와 같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올리고 있긴 했지만, 오늘은 일이 없는지 엘렌의 옷차림은 평소에 입던 정장이 아니었다. 하얀 티셔츠 위에 카키색의 가디건을 걸친 채 긴 청바지를 입고 있는 엘렌의 모습은 편한 차림이라 그런지 특유의 딱딱한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알게 모르게 경계하는 펠릭스와 달리 엘렌은 거리낌없이 펠릭스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도련님은 어쩐 일로 여기에?”



사람 많은 거 싫어하시잖습니까. 무덤덤하게 묻는 엘렌에게 펠릭스는 가볍게 대답했다.



“필요한 책이 들어왔다고 연락을 받아서. 그러는 당신은?”



엘렌이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봉지들을 가만히 들어올리자 펠릭스는 대번에 납득했다.



“아직도 거기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나 보지?”

“네.”



묵묵히 대답하는 엘렌의 얼굴에 살짝 씁쓸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에 놀랐지만 펠릭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고아원 출신이라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거기서 자랐죠.”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에도 마냥 무심하게 대답하는 엘렌에게 펠릭스는 조금 더 물었다.



“숙부님이 당신을 지원해줬다고 들었어. 학비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생활비까지 전부 다.”

“제가 쓸만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버려졌을 겁니다.”

“그래서 숙부님을 따르는 건가? 은혜를 갚으려고?”

“네.”



단호하게 대답하다가 엘렌은 답지 않게 잠깐 머뭇거리더니 딱 잘라 말했다.



“자기만족입니다.”

“….”

“제가 하는 일들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딱딱한 어조로 대답하는 엘렌의 목소리에 펠릭스의 손끝이 일순 차가워졌다. 동요하는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펠릭스는 재빨리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냈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리고 있었다.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꺼낸 걸까. 자신이 아는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펠릭스로서의? 그도 아니면 블랙캣으로서의?


어디까지 가늠해야 할지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이상 물어보는 건 너무 과한가? 아니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건가? 이건 기회인가,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역시,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펠릭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뭐하는 거냐고 짜증스레 돌아보던 펠릭스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말없이 어딘가를 쳐다보는 펠릭스를 의아하게 보던 엘렌의 고개가 펠릭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마리네뜨를 발견한 엘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저 아가씬….”

“…아는 얼굴이야?”

“도련님을 쫓아다니던 분이시라는 것 정도는.”



젠장. 속으로 낮게 욕지기를 뱉으면서 펠릭스는 가만히 질문했다.



“숙부님도 알아?”

“아니요.”

“어째서?”

“신경쓰실 만한 안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담담히 대답하던 엘렌이 펠릭스에게 되물었다.



“신경이 쓰이시나요?”

“별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대답하던 펠릭스의 시야에 마리네뜨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찍혔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펠릭스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여유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표정으로 제 옆을 스쳐가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엘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마리네뜨를 펠릭스는 간발의 차이로 받아냈다. 소녀를 받아내자마자 펠릭스의 얼굴 위로 확 달아올라 있었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침몰했다. 어느 새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고 이것저것을 지시하는 펠릭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렌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몽롱했다.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나른한 기분이었다.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에 이대로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아. 일어나면….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마리네뜨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자, 조금씩 선명해지더니 이윽고 옅은 분홍색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여기가 어딘지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방이었다.


살짝 시선을 내리니 따뜻한 이불이 자신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이마에 얹어져 있떤 시원한 무언가를 손으로 끌어내렸다. 수건이었다. 두통이 좀 가시니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억이 그러니까….

헉, 에스미!



“으아, 난 죽었다!”

“무슨 일이야, 공주님? 잠은 잘 잤어?”

“꺄악!”



갑작스레 들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워워, 진정하라구. 침대 바로 앞 의자에 앉아서 제 쪽을 응시하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블랙캣…?”



어떻게 여기에. 콜록거리며 자신을 마주하는 마리네뜨에게 가까이 다가간 블랙캣이 한 손을 들어 마리네뜨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음, 너 열이 심하던데, 지금은 좀 괜찮아졌네.”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무단침입으로 신고할 거야….”

“그래그래, 일단 몸이나 나은 후에 신고를 하든 때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하하 웃으면서 걱정스럽게 제 이마를 이리저리 짚어보는 블랙캣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뭔가가 보였다. 물이 가득 담긴 대야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수건.


간호해준 건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에 마리네뜨는 살며시 긴장을 풀고 블랙캣의 손에 이마를 톡 기댔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열에 들떠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응, 그래.



“좋네요. 블랙캣 손.”

“뭐?”

“차가워서…. 기분 좋아요.”



헤실헤실 웃으며 중얼거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급히 정신을 차렸다.


뭐지, 이 간질간질한 기분은?



“근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감기에 걸린 거야?”



이 날씨에. 민망한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애써 화제를 돌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별 생각 없이 멍하니 대답했다.



“아, 최근에 물벼락을 맞을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물벼락?”



의뭉스럽다는 듯이 되묻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으악,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아, 네네. 제, 제가 좀 재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비가 갠 후에는 꼭 우산을 들고 다니기도 하고….”



제가 대답하고도 참으로 그럴듯한 이유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흐뭇해졌다가, 또 다시 씁쓸해졌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직감이 생겼다지만 여전히 불안한 탓에 비가 개인 날은 자연스럽게 우산을 들고 다니게 된다.


여전히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블랙캣의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마리네뜨는 머리를 쥐어짜냈다. 아, 맞다!



“근데 정말 우리 집에는 어떻게 왔어요? 혹시 집주소 관리하는 곳 뭐 그런 데서 일해요?”

“설마. 그리고 개인정보 멋대로 빼내는 건 불법이거든?”

“그럼요?”

“…지나가는 길에 니가 쓰러지는 걸 봤어. 따라와 봤다가,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말이야. 오늘 부모님 집에 안 계시다며?”



살짝 뜨끔했지만 블랙캣은 애써 적당히 둘러댔다. 솔직히 거짓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마리네뜨는 다른 부분에서 깜짝 놀랐는지 이불을 끌어당겨 제 목 아래까지 꽁꽁 감쌌다.



“헉.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스토커예요?”

“웃기시네. 니 친구가 말해주고 갔어. 애초에 네 옷도 그 녀석이 갈아입힌 거잖아.”

“어 그러고 보니….”



슬쩍 내려다보니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뻘쭘해졌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는 마리네뜨를 블랙캣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애초에 난 한참 뒤에 왔거든? 말해두겠는데 정말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길래 확인 차 온 거야. 잠깐 봤더니 이제 좀 괜찮은가 싶어서 가려고 했는데 니가 손을 뻗어서 날 붙잡았다고.”

“내가 그랬다구요?”

“그래. 그러니 그냥 가기도 뭐해서 열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말들 뿐이었지만 블랙캣의 눈빛이 더없이 진지해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면 신기했다. 변신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신경써주고 있는 걸 보면 그 때 공원에서 꽤 인상이 좋았던 건가? 하지만 그 때 별반 좋은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은데. 속으로 고민하다가 다시금 몰려오는 두통에 마리네뜨는 그냥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나저나,



“근데 진짜 대체 어떻게 들어왔어요? 문은 잠겨 있었을 텐데.”

“창문으로 들어왔지.”



자랑스레 대답하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역시 스토커로 신고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의심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블랙캣이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더니, 곧 체념했는지 한숨을 내쉬면서 진지하게 입을 열였다.



“혼자 누워 있는 건 생각보다 훨씬 외로우니까.”

“아….”

“그, 그래서 그냥 가기가 뭐했던 것뿐이야! 절대 니가 특별하다거나 뭐 그래서가 아니라고!”



되려 찔리는지 버럭 소리지르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 모습이 얄미웠는지 하여간 넌 애가 뭐 그렇게 몸이 약하냐고, 살다살다 여름에 열이 올라서 길거리에서 쓰러진 애는 처음 봤다고 냅다 잔소리를 퍼붓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질문을 툭 던졌다.



“블랙캣. 그럼, 혹시 나 쓰러질 때 누가 날 받아줬는지 알아요?”

“그, 글쎄? 잘 모르겠는데?”



뜨끔해서는 단번에 부정하는 블랙캣을 마주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내가 도끼병인 걸까요? 쓰러지기 직전에 절대 그 자리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을 본 것 같았거든요.”

“….”

“이번에까지 도움받으면 두 번째인데…. 에이, 아무래도 아니겠죠.”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야?”

“맞아요.”



생각만으로도 좋은지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가슴 한 켠이 답답해졌다. 동시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이 녀석이 레이디버그일까? 이렇게 여려만 보이는데.



“대체 어디가 좋은데? 그 녀석.”

“그냥 다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대답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사랑같은 감정에 휘둘리는 거 지겹지 않아?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 거 같고.”



마리네뜨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쏟는 시간이 아까울 리가 없잖아요.”



블랙캣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동의하는 건지, 아니면 이런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이상한 건 나려나. 마리네뜨는 살풋 웃었다. 지금 블랙캣의 얼굴을 보면 분명 굉장히 꺼려지고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렇게도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때의 일.



“블랙캣, 내 이야기도 잠깐 들어줄래요?”

“뭔데.”

“고민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아서요.”

“어떤 고민이야?”

“…말하기 좀 그런데. 아무튼 좀 힘든 일을 겪었거든요.”



헤헤 웃던 마리네뜨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조금 힘들었어서. 그렇다고 막 그만두고 싶은 건 아닌데 내가 계속 이 일을 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고….”



추욱 고개를 숙이는 마리네뜨의 손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는 죄수마냥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던 마리네뜨의 머리 위로 무덤덤한 말이 툭 던져졌다.



“네 마음에 달린 일이겠지.”



그 한 마디에 마리네뜨의 얼굴에 서서히 놀라움이 번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블랙캣의 표정이 눈에 보였다. 웃고 있지만 평소처럼 장난스럽지 않았다. 의문이라던가 망설임이라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곧고 선명한 진심을 눈동자에 내비치고 있었다.



“너의 정의에 따라 가면 돼. 만약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가도 상관없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도망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너한테 선택을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누구도.”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것처럼 가벼운 대답이었지만 초록빛 눈동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런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블랙캣도, 그럴 때가 있어요?”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마리네뜨의 의문에 블랙캣은 간단히 답했다.



“있지.”



쳇바퀴처럼 굴러오는 삶의 무게가 가끔 너무 버거워서, 가끔 모든 것을 다 던지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한 때일 뿐. 누구보다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충동은 언제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바스라졌었다.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이 모습은 그런 내게 주어진 선물인 걸까.


속으로 피식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다시금 질문했다. 



“블랙캣은 어떻게 했어요?”

“나는 계속 버텼었지.”

“왜요?”

“이게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했거든. 그 길의 끝 정도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



선선히 대답하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조심스레 물었다.



“…힘들었나요?”

“조금은. 그래도 괜찮아. 그랬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잠깐 멈칫하더니, 픽 웃으며 손을 들어 마리네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무리할 필요는 없어.”



나와 너는 경우가 다르니까.



“그냥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듯이, 네게도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겠지. 그럼 그걸 하면 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마리네뜨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위로하듯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푸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그게 싫지 않다고 여기는 자신을, 블랙캣은 그제서야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생각보다 쟤를 별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네?’


플랙의 말을 떠올리며 블랙캣은 깔끔히 인정했다.


그래, 나는 네가 싫지 않아. 언젠가부터 싫지 않았어. 열심히 노력하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후회하지 않을 거라 말하며 나아가기를 망설이지 않는 네 모습을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나도 참 멍청하군.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설핏 웃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살며시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블랙캣.”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한 마디였지만, 마리네뜨가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살며시 웃고 있지만 어딘지 처연하게 느껴지는 마리네뜨의 미소를 보며 블랙캣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건….



“바보같은 줄만 알았는데 믿음직스러운 구석도 있네요.”



어느 새 기운을 차렸는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어이, 난 원래 똑똑…. ……?!”



블랙캣은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어라, 이 상황은…?


‘꽤 믿음직스럽네. 맨날 바보짓만 하는 줄만 알았는데….’

‘어이, 레이디. 나는 원래 똑똑하다고!’

‘네, 네. 알았으니 어서 저거나 처리하자구.’


막아두었던 둑이 터지듯,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기억들에 블랙캣은 말을 잃었다. 살짝 경악에 찬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가만히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블랙캣?”



설마?



“…나, 난 원래 똑똑하다고!”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는 너스레를 떠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별 일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금 웃으며 대답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가봐야 하지 않아요?”

“엉?”

“난 괜찮으니까.”



웃고 있는 마리네뜨와 달리 블랙캣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몸조리 잘 해.”

“네.”



그 말을 듣자마자 블랙캣은 창문께로 다가가더니 휙 날아서 사라졌다. 블랙캣이 모습을 감춘 걸 확인하자마자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티키, 거기 있어?”

“응.”



바닥에 던져져 있던 가방에서 뾰로롱 날아오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가 반가움을 표시했다. 환하게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로 달려든 티키가 뺨을 부볐다.



“쓰러졌을 때 깜짝 놀랐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해.”



사과하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나저나 배고프지 않아? 내려가서 뭐라도 먹을래?”

“그럴까? 헉, 그나저나 에스미는 어떡하지?”

“괜찮아. 그 애라면 엄청 걱정하는 눈치였는걸. 나중에 전화해주면 될 거야.”

“그렇겠지…?”



반신반의하며 마리네뜨는 조심스레 계단을 통해 부엌으로 내려갔다. 오늘 부모님은 두 분이서 나들이를 가셨으니 한동안은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식빵 몇 개에 잼을 발라 하나를 입에 물고, 나머지를 접시에 담았다. 총총거리며 소파로 다가간 마리네뜨가 근처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들고 TV를 켰다.


맨 처음 보이는 건 어떤 남자의 얼굴이었다.



[현재, 흉악한 범죄자 랄프 커티스는 인질 하나를 붙잡고 5구를 지나 14구 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TV를 켜자마자 쏟아지는 속보에 마리네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뉴스 앵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6월 30일에 발생되었던 감옥 붕괴 사건의 탈주범들은 대개 검거되었으나, 커티스는 경찰의 조사망을 피해 근처 모텔에 숙박하던 중 여관 주인의 신고로 인해 위치가 파악된 것에 앙심을 품고, 주인집의 아이를 붙잡아 인질극을 계획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잠깐만, 6월 30일이라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 도난 사건이 있었던 날이었다. 그 때 블랙캣이 분명 감옥을 부수고 탈출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점점 심각해지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티키가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마리네뜨…?”



티키를 마주보며 마리네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 14구 쪽에서는,



“가까이 오지 마!”



칼을 아이의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댄 채로 버럭 소리지르는 랄프에 경찰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건 그들의 앞에 서 있던 블랙캣도 마찬가지로, 비열한 악당을 노려보며 블랙캣은 생각에 잠겼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벌인 일의 파편이니 자신이 수습하는 게 맞다 생각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참으로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상대하는 악당 놈들보다는 편하기는 했지만 인질을 잡고 있다는 것이 조금 성가셨다.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빨리 차를 가져오라고 소리지르는 랄프를 보니 블랙캣은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여간 악당들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군. 이대로 냅두면 아이를 구하는 게 힘들어진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랬다간 말이 많아질 테고. 여차하면 조금 다치는 것을 감수할까도 고민하던 블랙캣은 제 옆으로 뛰어내리는 레이디버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레이디! 여긴 어떻게…?”

“어떻게라니. 악당이 있는 곳에 영웅이 있어야지~?”



블랙캣을 돌아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게 마냥 안타까워 슬프게 눈가를 일그리는 블랙캣을 모른 척 하면서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단 저 자를 붙잡는 것부터 생각하자.”

“방법이 있어?”

“음…. 블랙캣, 잠시 악당의 주의를 끌어줄 수 있겠어?”

“분부대로.”



눈을 찡긋거리며 앞으로 나서는 블랙캣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살짝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이후로는 처음으로 변신하는 거네.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것에 레이디버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편해진 걸까?



“거기, 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야?”



크게 소리지르는 블랙캣의 뒤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도 이런데 부모님은 오죽할까. 지금 구하지 않으면 분명 아이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아이를 구하려고 하면 저 남자가 아이의 목을 긋겠지. 틈을 낸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몇 초 정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무사히 구할 수 있지?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 방법을 떠올린 자신에게 레이디버그는 순간 혐오를 느꼈지만 애써 견뎌냈다. 그럼에도 한 번 떠올리니 자꾸만 잡생각이 뇌리를 둥둥 떠다녔다. 가령, 저런 남자 정도는 돌멩이 하나를 던져서도 죽일 수 있다는 거라던가.


안 돼. 이러면 저 남자랑 다를 게 없잖아.


애써 상념을 떨쳐버리고 레이디버그는 범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미 악당을 실컷 도발하고 있는 블랙캣을 흘낏 쳐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아주 잠깐이라도 아이의 목에서 칼날이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면.’



“이 새끼가!”



블랙캣의 도발이 먹혔는지 남자는 식칼을 들고 있던 손을 쭉 앞으로 뻗으며 뭐라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랄프가 다시 팔을 내리려던 순간 레이디버그는 있는 힘껏 그를 향해 뛰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앞으로 파고드는 레이디버그에 랄프는 기겁하며 들고 있던 식칼을 레이디버그에게로 내리쳤다. 슬로우 모션처럼 내려오는 칼날이 푸른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레이디버그의 손이 식칼의 날을 꽉 붙잡았다.



“레이디버그!!”



경악해서 소리지르는 블랙캣과 더불어 경찰들도 깜짝 놀랐는지 몇몇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식칼을 꽉 붙잡은 채로 레이디버그는 다른 손을 내밀어 남자의 복부를 주먹으로 세게 쳤다. 컥,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는 랄프에게서 아이를 뺏어들며 레이디버그는 천천히 식칼을 놓았다. 챙- 소리를 내며 식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쉬이, 이제 괜찮아.” 



눈물범벅인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며 레이디버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기절해버리는 아이를 안고서 살짝 한숨짓는 레이디버그 앞으로 블랙캣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레이디, 손은?! 손은 괜찮아?”

“아, 그거?”



레이디버그는 씨익 웃으며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블랙캣에게 식칼을 잡았던 손을 내밀었다. 손에 끼워져 있는 튼튼한 장갑을 보고 멍해진 블랙캣의 얼굴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강철 장갑이야. 손은 멀쩡하니 걱정하지 마.”

“….”

“그나저나 어서 도망가야겠다. 사람들이 오고 있어.”



아이를 경찰에게 넘겨주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잡아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따라오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작은 불안을 느꼈다. 역시 내 태도가 좀 이상했나? 최대한 태연하게 굴려고 애쓰기는 했는데 역시 어색해 보였는지도. 감정을 숨기는 데는 서투르니까.



“저, 블랙캣….”



주위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확인하고 레이디버그는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며 레이디버그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블랙캣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발버둥을 치려고 했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끌어안는 블랙캣의 손길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멈칫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놀랐는지 블랙캣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걱정 끼치지 마, 가뜩이나 넌…!!”



몸도 안 좋은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블랙캣은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블랙캣이 정말로 걱정했다는 것을 아는지 레이디버그는 살짝 웃으며 블랙캣의 등을 토닥거리다가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리고는 웃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본인은 밝게 웃는다고 웃는 것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지는 미소. 처연하게 웃는 얼굴은 방금 전에 만났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블랙캣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닮았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지금 레이디버그의 표정은 아까 본 마리네뜨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블랙캣이 다시금 물었다.



“아까 왜 그런 거야?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아이를 구할 방법이라면 있었잖아.”

“…그 사람을 죽이는 거?”

“동정할 가치도 없는 악당이야.”

“그래. 하지만 그걸 판단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잖아.”



입을 꾹 다무는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쓸쓸하게 읊조렸다.



“알아,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시 올 거라는 거. 방금처럼 그냥 붙잡아 경찰에 넘기는 방식으로는 끝낼 수 없는 상대들도 있으니까.”



푸른 눈동자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며칠 전에 상대했던 미스터 피죤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침묵하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블랙캣. 내가 말하지 않았지?”

“….”

“나, 미스터 피죤의 원래 모습이 누군지 알아.”

“뭐?!”

“정확히는 알자마자 금방 그렇게 댔지만.”



덤덤하게 털어놓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설핏 고뇌가 어렸다.



“죽음이라는 거,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진짜로 보니까 충격적이더라. 내가 아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니….”



하하,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레이디버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해야 한다면 해야겠지. 알고 있어. 하지만 가급적 그러고 싶지 않아. 살릴 수 있다면 살리고 싶어. 살아서 죄값을 치르게 하고 싶어.”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절대로.



“우린 또 다른 악당들을 죽여야 하겠지. 어쩔 수 없게도.”



왜냐하면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니까.


레이디버그가 후련하게 미소지었다. 마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각오는 했어.”

“…무슨 각오?”



차분하게 되묻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라는 말로 도피하지 않을 각오.”



죽음의 무게는 평등하다. 그 누구도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내가 영웅이건 그들이 악당이건 그런 건 중요치 않아. 그저 서로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며 그 결과가 죽음일 뿐이라는 것 말고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자신이 죽게 되든, 그들이 죽게 되든. 상대가 어떤 흉악무도한 악당일지라도 그걸 심판한다는 마음을 가진 채로 그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그랬다간, 분명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상대들과 싸우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고 싶어. 설령 그 길을 걷기 위해 부딪히고 아파해야 하더라도,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거야.”



옆으로 돌아선 레이디버그가 양손을 등 뒤로 모아 깍지를 꼈다.



“…이게 나의 대답이야.”



미스터 피존 사건에 대한.


레이디버그는 굳이 그 다음 대답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짐작했기에 블랙캣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네가 싫다면 너를 붙잡을 수는 없다는 거 알아. 이런 나를 약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때에 이렇게 망설이는 내가 바보같아 보일지도 몰라.”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제 시선을 피하는 레이디버그의 옆얼굴에서 블랙캣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조금 망설이던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들어 블랙캣을 돌아보았다.



“나를, 믿어줄래?”



초록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제까지 중 제일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블랙캣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그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도 레이디버그는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왠지 그라면 자신을 믿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절의 말을 듣는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슬플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 레이디버그는 정말로 놀랐다. 언제부터 내가 너를 이렇게 신뢰하게 된 걸까.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시선에 블랙캣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가, 곧 피식 웃었다.



“…응, 믿어.”



선선히 대답하는 블랙캣의 어조는 장난스러웠지만, 눈빛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믿지 않을 리가 없잖아.”



확신을 주듯이 재차 말하며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똑바로 마주하며 제 진심을 입에 담았다.



“당신은 정말로 강한 여자야.”



그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고마워.”



그리고 그 말에서조차 블랙캣은 마리네뜨의 모습을 읽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좋아!”



룰루루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마리네뜨는 길을 걷고 있었다. 감기도 다 나았고 오늘 날씨도 지금 기분도 최고로 좋은 상태였다.


오늘도 그 공원에 있을까?


마리네뜨의 손에는 감기에 걸린 날 뽑아왔던 오페라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물론 쓰러졌던 것에 대해서는 에스미의 어마무시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긴 하지만 그래도 공짜 티켓이 생겼으니 다시 펠릭스에게 말을 걸 구실이 생겼다. 거절당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겠지.


저번에 갔던 공원으로 가자 예상대로 펠릭스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마리네뜨는 살짝 볼을 붉혔다. 아아, 오늘도 멋지구나.


무시할 거라는 건 알지만 마리네뜨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펠릭스, 안녕!”

“…안녕.”



책을 덮으며 펠릭스가 인사를 건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 긴장해서일까, 펠릭스가 순순히 인사를 받아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마리네뜨는 가만히 펠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잘 생각나지 않았다. 지긋이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나, 나랑 이번에 열릴 오페라 같이 가지 않을래!”



엉겁결에 말한 뒤에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헉, 아니 이게 아닌데! 난 좀 더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했다고!


망했다. 난 왜 이 모양이야아아…! 속으로 절규하고 있던 마리네뜨는 차분하게 돌아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오페라인데?”

“시, 십이야라고….”

“언제, 어디서?”

“이번 주 토요일 오페라하우스 저녁 7시쯤에….”



횡설수설 열심히 설명하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가 딱 잘라 말했다.



“갈게.”

“뭐?!”

“싫으면 말고.”

“아니아니아니! 싫을 리가 없잖아!”

“그럼 그 날 봐.”



펠릭스는 그 말만 남기고 휙 돌아섰다.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마리네뜨를 뒤에 남겨두고 떠나가는 펠릭스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명확하지 못한 건 질색이다. 의심이 생겼다면 뭐라도 해서 어떤 방향으로든 해소하는 것이 옳은 법이겠지. 결론이 어떻든 간에.


확인해 봐야겠어.

돌아서는 펠릭스의 눈빛이 비장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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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두자릿수 회로 들어섰습니다! 웹연성은 후기를 쓸 수 있어 편리하네요.

10화는 후루룩 지나갔죠.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예ㅇㅁㅇ)~


몇 가지 사담을 해보도록 하죠.

제가 암시를 하고 있지만 에스미는 마리네뜨의 정체를 얼핏 눈치채고 있습니다. 물론 에스미의 성격이라면 마리네뜨가 말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절대 직접적으로 묻지 않을 거고 마리네뜨가 입을 열 일은 아마 없겠지만요.


피죤 사건으로 애들이 충격을 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특히 일반인(?)인 마리네뜨의 입장에서는 충격이 컸을 테고요 얘 여고생입니다 여고생. 네, 이런 부분의 묘사를 굳이 순화할 생각은 없었어서 좀 자세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9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계속 뭔가가 터질 거 같아요 이야 기대되지 않아요ㅇㅁㅇ)?(다들: 님만 기대하는 거겠지


마리네뜨가 짐작한 대로 감옥 탈출 건은 블랙캣이 감옥 부수고 나왔던 그 사건입니다. 고대의 재앙으로 감옥을 부수고 나왔고, 그 소란 속에서 몇 명의 죄수들이 탈출을 했는데 경찰 쪽에서 거의 다 잡았지만 마지막 한 놈이 저놈이죠 ㅇㅇ 솔직히 그 사건 시작부터가 경찰 잘못이라 뭐 그쪽에서 영웅들한테 할 말은 없겠지만(...) 


엘렌과 펠릭스의 관계는 굉장히 즐겁게 짰답니다. 엘렌은 나탈리와 같은 포지션이지만 성격은 많이 다릅니다. 어찌 보면 펠릭스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포커페이스 능력은 펠릭스보다도 뛰어나긴 하지만요. 그리고 플랙이 펠릭스에게 하는 말은 제 마음의 소리입니다(...) 한여름에도 그렇게 입고 다닐 거 알아 펠릭스...하...



마리네뜨를 방까지 데려와준 건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펠릭스입니다.


과정이 정확하게,

쓰러지는 마리네뜨를 간발의 차로 받아낸 펠릭스가 에스미와 같이 택시를 불러서 마리네뜨를 데리고 집으로 가요. 그 후에 펠릭스는 에스미한테 맡겨두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도 있고 에스미도 급한 전화를 받고 집에 돌아가야 했는지라, 괜히 찜찜한 탓에 블랙캣으로 변신한 뒤에 창문으로 들어온 거랍니다. 이건 마리네뜨에 대한 관심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있지만, 본인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예요. 펠릭스의 부모님은 8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플 때 혼자 있는 게 누구보다 외로운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본인 모습으로 남아 있으면 분명히 마리네뜨에게서 달갑지 않은 오해(...)를 살 것이 분명하기에 블랙캣으로!


펠릭스의 삶이 좀 많이 골치 아픕니다(...) 마리네뜨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펠릭스의 삶도 나름 험난하기 짝이 없답니다. 아 이건 스포니 일단 패스. 펠릭스의 삶에 대한 언급이 맨 처음 등장하는 건 1권 외전이지만 그건 웹상에 올릴 생각이 없어서요 ㅇㅇ;


다음 에피소드는 모두가 예상하시겠지만 데이트입니다^ㅁ^ 하하 평온한 데이트가 되기를 바라네요 진심으로(...)


뭔가 더 많이 적고 싶지만 너무 시끄러울 것 같아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번 회에 담은 이야기가 많아서인지 자꾸 말이 많아지네요;


빨리 11편을 올릴까 했는데 그럼 기다리는 재미가 없을까봐 나중에... 재판 수요조사 기간이 13일이었지만 일주일 늘릴 계획인데 그 전까지는 12편 모두 확실하게 올려둘 것을 약속드립니다 ㄷㅅㄷ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상은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답니다ㅇ.<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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