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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11.

벗겨진 가면






“티키, 티키!”



마리네뜨가 다급한 표정으로 티키를 불렀다. 한 손에는 옅은 푸른색의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다른 쪽에는 흰색과 붉은색이 조화롭게 섞인 깜찍한 원피스를 들고서 마리네뜨가 질문했다. 



“이거랑, 이거. 어느 게 더 괜찮아?”



자기 몸에 옷을 대보며 진지하게 묻는 마리네뜨에 티키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붉은색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게 말하며 마리네뜨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런 마리네뜨의 주변에는 온갖 옷가지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도대체 몇 벌을 꺼낸 건지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이는 바닥 위에서 마리네뜨는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이제 며칠 후면 드디어 펠릭스와의 데이트 날이라구!”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행복해하는 마리네뜨를 티키는 못 말리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도 흐뭇하게 웃었다. 어쨌든 소원대로 데이트를 하게 되었으니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사실 메인은 오페라였지만, 지금 오페라가 얼마나 훌륭하고 말고는 마리네뜨에게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줄거리를 꼼꼼히 읽어보니 재밌을 것 같기는 했지만 당장 자신이 무대에 집중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헉, 펠릭스한테 이상한 애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계속 펠릭스만 쳐다보지 않게 조심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다시금 희희낙락 웃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리네뜨, 아직 3일이나 남았어.”

“‘3일밖에’ 안 남은 거겠지~”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 결국 티키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어휴, 못 말리겠다. 그런데 이거 정리는 언제….”



티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마리네뜨는 원피스를 들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몇 번을 꾸물꾸물거리다 마리네뜨는 이내 힘을 빼고 침대에 축 늘어졌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앞으로 티키가 다가왔다. 날아오는 티키를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붙잡고 마리네뜨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토요일이 왔으면 좋겠다~”



행복해.






“에에취!”



커다란 재채기 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처럼 서재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펠릭스에게 플랙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감기라도 걸렸어?”

“별로.”



누가 내 얘기라도 하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를 문지르며 중얼거리는 펠릭스에 플랙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누구라면, 그 여자애?”

“그럴지도 모르지.”



하아.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이내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낄낄거렸다.



“그나저나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걔랑 만나기로 한 거야?”



더욱 깊게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의 모습에 플랙은 더욱 싱글벙글 웃으며 펠릭스를 놀려먹었다.



“귀찮다고 죄다 거절하던 건 언제고~? 응? 나 몰래 너희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능글맞게 웃으며 질문폭탄을 던지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 녀석이 레이디버그일 지도 몰라.”

“걔가?”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는 플랙과 달리 펠릭스의 눈빛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닮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둘 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머리를 묶고 다니는 스타일도 말투도 전부 비슷했다. 왜 이걸 이제야 눈치챘나 싶을 정도로.



“확인해 볼 생각이야.”



진짜 레이디버그인지 아닌지.


다짐하듯 대답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흐음…. 뭐 그건 네 자유기는 하지만, 조심하라구.”

“알고 있어.”

“가뜩이나 레이디버그한테 붙은 녀석은 귀찮단 말이야.”

“…어떤 점에서?”

“잔소리가 심하거든~!”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하는 플랙에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플랙이 저렇게 말하는 상대라면 보통 끈기를 가진 게 아닐 것이다. 말만 들어도 왠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 같다.



“아, 너 또 이상한 생각했지?”

“아닌데.”



휙 고개를 돌리며 부정하는 펠릭스의 모습을 플랙이 수상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다시 낄낄 웃었다.



“이야, 아무튼 재밌어지겠네!”



공중에서 빙글빙글 서재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짜증스레 말했다.



“너 제발 거기 가서는 가만히 있어. 정체를 확인하러 갔다가 역으로 들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맨입으로?”

“치즈 한 판이면 되지?”

“콜!”



신났는지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하는 플랙의 몸에서 새까만 빛이 가루처럼 떨어졌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서재 안이 들썩거렸다. 펠릭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너 가만히 좀 있어!”

“냐하하하~!”



펠릭스가 뭐라든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돌아다니던 플랙이 어느 책장 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플랙을 보고 펠릭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파트너, 이 책은 뭐야?”

“야! 만지지 마!”



이미 늦었다. 우르르 쏟아지는 책 더미를 보며 펠릭스의 얼굴에는 또 다시 고뇌가 서렸다. 이미 떨어진 거 어쩌겠냐 싶어서 그저 한숨지으며 책을 줍기 시작하던 펠릭스는 떨어진 책 중 하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뭔데, 뭔데?”

“…아버지가 좋아했던 책이야.”



씁쓸한 표정으로 나직히 중얼거리며 펠릭스는 그 책을 고이 집어들어 탁탁 털었다. 먼지가 많이 묻어나는 걸 보면 확실히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르긴 했던 모양이다. 부모님의 사고 이후로 두 분의 물건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었으니까. 최근에서야 조금씩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상당히 독특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호탕하게 웃고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며 작은 어린아이와도 늘 진심으로 놀아줄 수 있는 사람. 사실 지금도 조금은 그리웠다. 아버지라면 분명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진심으로 이해해줄 텐데.



“…그러고 보면 옛날에 아버지가 그랬었지. 자기의 꿈은 요정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이야.”


‘우리 아들~ 아빠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오호, 꿈이 크시구만?”



낄낄거리며 웃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게. 너처럼 속 썩이는 녀석이라는 걸 아셨으면 진작에 환상을 버리셨을 텐데.”

“너무하네~ 내가 뭐 어때서?”


‘요정은 실존한단다. 분명히.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플랙과 투닥거리면서도 펠릭스는 점점 많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 묵혀 두어서 거의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고고학을 연구해서인지 아버지는 세계 곳곳의 나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우화들이나 전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야기처럼 자신에게 들려주곤 했다. 요정에 대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요정에 대해 말하면서, 아버지가 지겹도록 자주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붉은 동그라미에 검은 점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요정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네.’


펠릭스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잠깐만.


‘검은 고양이는 늘 외톨이. 하지만 그들은 고독하기에 오히려 더 영리하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깜짝 놀라는 펠릭스의 얼굴을 보고 플랙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뭔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기적을 담아.’

“잉?”

‘기회는 단 한 번뿐. 그렇기에 기적이란 아름다운 것이라네.’



가만히 중얼거리던 펠릭스가 그 순간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책장 쪽으로 다가갔다. 어딘지 나사 하나 빠진 얼굴로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는 펠릭스를 보며 플랙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너 뭐해?”

“이 노래가 적혀 있는 책이 있었어. 잠깐만.”



기억을 되짚어가며 책장을 찾는 펠릭스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대화가 필름을 감는 것처럼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빠, 그건 대체 무슨 노래야?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말하는 게 제대로 안 이어지잖아!’

‘하하, 아들. 언젠가 아들도 이 노래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야.’

‘지금 알려주면 안 돼?’

‘안 돼. 이걸 이해하기에 우리 아들은 아직 어리니까~’

‘쳇.’


그 때, 울상이던 자신을 보며 난처해하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으며 제게 말했었다.


‘그럼, 대신 이렇게 하면 어때?’


그 말과 함께 아버지는 맨 위쪽에 있던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보여주며 눈을 찡긋거렸다.


‘만약 우리 아들이 아버지가 알려주기 전에 이 노래를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이 책을 찾아보렴. 원하는 것을 모두 알 수 있을 테니까. 단, 그 전까지는 손대지 않기!’


금빛으로 빛나는 글씨가 박힌 자주색의 책이었다. 독특한 생김새라 어떻게 생겼는지도 어디에 꽂혀 있었는지도 대충 기억이 난다.


물론 이건 어린 시절부터 서재에서 살다시피 했던 펠릭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이 넓은 서재에서 9년이나 전에 꽂아두었던 책 한 권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찾았다.”



나직히 중얼거리며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자주빛 책등으로 손을 뻗어 책을 꺼내들었다. 사다리에 매달린 채로 책의 표지를 넘겨보던 펠릭스의 손이 멈칫했다.


책 안은 백지였다. 어떤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멍해 있는 펠릭스의 곁으로 휙 날아온 플랙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게 뭐야?”

“잘못 찾았나? 아니야, 분명 이거였는데….”



그렇게 말하기도 잠시,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는 책장에 펠릭스는 놀라서 사다리를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부드럽게 바닥을 구르며 90°로 벌어지던 책장이 펠릭스의 코끝에서 우뚝 멈춰섰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펠릭스는 책장이 서 있던 자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문이 있었다. 상당히 오래 사용하지 않았는지 꽤나 낡아있는 나무문은 손으로 밀기만 해도 끼익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조심조심 다가간 펠릭스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열리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펠릭스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가, 도약하면서 문을 세게 발로 찼다. 문이 부숴지면서 방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드러난 방 안을 보며 펠릭스는 깜짝 놀랐다.



“이건…!!”



한 10평 정도의, 사람 한 사람이 들어가서 작업하면 딱 좋을 듯한 작은 방이었다. 방 안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가운데에 놓여 있는 갈색의 나무 탁자와 의자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서려던 펠릭스는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방 안을 둘러보더니, 뒤로 돌아갔다가 제 필통에 있던 지우개를 가져와 방 안으로 던져보았다.


툭, 데구르르…. 별 문제 없이 방 안으로 굴러가는 지우개를 보며 펠릭스는 조용히 생각했다. 위험한 건 없나 보군.


조심스럽게 문설주를 넘어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던 펠릭스는 나무 책상 바로 뒤쪽에 놓여 있는 커다란 강철 상자를 발견했다. 아까는 책상에 가려져서 안 보였던 모양이다. 열쇠구멍 하나가 달려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특징도 없어 보이는 강철 상자는 옛날의 정취를 고스란히 가져왔다 평가될 만한 이 낡은 방과 대조되어서인지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풍겼다.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펠릭스는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뚜껑을 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것에 난감해졌다. 역시 열쇠가 있어야 하나. 하지만 열쇠 구멍을 살펴보니 딱 보기에도 모양이 상당히 독특했다. 집에 있는 열쇠들 중에 이런 모양의 열쇠가 있었던가. 일단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펠릭스의 옆으로 플랙이 날아왔다.



“뭐야, 왜 그래 파트너? 이거 안 열어봐?”

“…열쇠가 없는데 어떻게 열어. 잠깐만, 일단 열쇠를 가지고 와야.”

“흐흥~? 그런 게 왜 필요해?”

“뭐?”



씨익 웃던 플랙이 쏜살같이 상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펠릭스가 말릴 틈도 없이 플랙이 상자를 통과해 들어가고 한참 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상자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상자의 뚜껑이 툭 소리와 함께 열리면서 플랙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휘잉 돌아다니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 재주도 있었어?”

“그럼~ 예전에 많이 써먹었지!”



키득키득 웃고 있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에 썼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써먹었을 것 같아 묻기도 겁난다.


어쨌든 수고를 덜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펠릭스는 가만히 상자 속을 살펴보았다. 상자 안에는 두꺼운 몇 권의 노트와 더불어 다발로 묶인 종이뭉치 등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종이 자체는 꽤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끽해야 5~10년 정도? 노트와 종이들에는 하나같이 빽빽하게 무어라 적혀 있었는데, 프랑스어가 아닌 괴상한 문양의 글자들도 같이 적혀 있었다.


뭐가 더 없을까 생각하며 상자 속을 뒤적거리던 펠릭스의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손에 닿는 맨들맨들한 촉감이 종이와는 확연히 달랐다. 조심스럽게 상자 속에서 빼낸 물건은 짙은 파란색으로 된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상자였다. 다행히도 열쇠는 없었고 작은 고리 하나가 달려 있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상자를 열어본 펠릭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책이었다. 엄청나게 낡은 책. 다른 종이뭉치나 노트들과는 달리 붉은 가죽으로 된 테두리에는 얼룩이 가득 져 있었고, 살짝 펴본 책의 종이는 굉장히 낡아 있었다. 게다가 사용된 종이는 적어도 몇 세기 전에 사용했을 법한 재질로 되어 있었다. 족히 몇백 년은 묵었을 법한 책이었지만, 낡았다는 점을 빼면 종이의 상태는 아직도 양호한 편이었으며 글씨들도 상당히 선명했다. 펠릭스는 다른 것보다 이 점이 가장 신기했다. 무슨 수를 쓴 거지?


첫 장을 폈지만 당최 무슨 말인지 읽을 수가 없는 글자들이 수두룩했다. 고대어인가? 생각하며 몇 장을 더 넘기다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책이 든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건…?!”



책에는 글자만이 아니라 그림들도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펠릭스가 펴든 페이지에 그려져 있는 건 붉은 바탕에 검은 점박이가 박힌 옷을 입고 있는 누군가의 그림이었다. 황급히 다음 장들을 넘기자 다양한 옷을 입은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블랙캣은 물론이고 전혀 모르겠는 몇몇의 사람들을 지나, 호크모스가 있는 페이지를 발견하고서 펠릭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왜 여기에….”

“파트너~ 이쪽에도 뭐가 있는데?”



플랙이 부르는 소리에 펠릭스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새 모두 열어젖혀져 있는 책상의 서랍들을 보며 펠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플랙, 아무거나 뒤지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뭐 종이같은 게 있는데에~? 어디, 누가 쓴 걸까나~”



언제나처럼 펠릭스의 말을 무시하고 종이 하나를 꺼내든 플랙이 쫙 펼친 종이를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친애하는 펠릭스에게? 우웩, 닭살 돋는구만. 파트너, 이거 너한테 쓴 거 같은데?”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플랙에게서 편지를 낚아챘다. 빠르게 편지를 읽어내리는 펠릭스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편지를 다 읽고 잠시간 말이 없던 펠릭스는 곧바로 플랙에게 물었다.



“편지가 이거 한 통 뿐이야?”

“으음, 아니~? 저기 가지런히 쌓여 있던데? 날짜까지 제대로 적혀 있더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서랍에 들어 있는 편지들을 닥치는 대로 꺼내기 시작했다. 묵묵히 종이를 훑어보면서 날짜 순서대로 분류하기 시작하는 펠릭스의 주변을 날아다니던 플랙은 그런 펠릭스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뭐야, 그거 누군데?”



편지들을 모두 정리한 펠릭스가 가장 처음에 쓰여진 편지라 추정되는 종이를 집어들었다. 천천히, 침착하게 편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펠릭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




『펠릭스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지금 너는 몇 살쯤 되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이 편지를 읽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만약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적어도 서재 안에 있는 비밀 방을 발견했다는 거겠지. 나와 너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모르면 절대 방을 발견할 수 없을 테니 그는 걱정하지 않는단다.


가급적 네가 어른이 된 뒤에 내 손으로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으니까 말이다.


언제 내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이 편지를 남긴다.


아직 어린 아이인 너를 보며 벌써부터 죽음을 생각하는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무슨 소리지? 펠릭스는 천천히 다음 구절을 읽어내렸다.



『지금 나는 네게 무척이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남기려고 한단다.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조차도 네 선택이니 존중해야겠지. 하지만 이 편지에 담긴 내용들은 하나부터 끝까지 모두 진실임을 맹세하겠다. 그러니 끝까지 읽어주기를 바란다.』



그 말과 함께 편지에는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오래 전의 쓰여진 편지에서도 더한 과거를 회상한다는 점에서 조금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는 놀라운 일이 한 가득이지. 개중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상식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한 일들도 많단다. 내가 고고학자를 꿈꾸게 된 것도 바로 그런 놀라운 일들에 대한 진실을 탐구해보고자 했던 열망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펠릭스. 사실 내가 고고학자를 꿈꾸게 된 근본적인 계기는 바로 이 집에 있었단다. 네가 발견했을 이 비밀 방은 내가 만든 게 아니야. 오래 전부터 이 집에 존재해왔던 거지.』



오래 전부터?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했다. 유지공사를 좀 하기는 했지만 이 저택이 만들어진 건 자신이 알기로도 대략 몇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럼 그 때부터 계속 이런 공간이 존재했었다는 말인가?



『옆에 있는 금고를 열어봤을지 모르겠구나. 안에 많은 종이뭉치들이 들어 있지? 그건 내가 아직 성인이 되기 전, 이 방을 발견했던 당시부터 계속해서 꾸준히 연구해왔던 모든 것이란다.』



성인이 되기 전이라면 지금 자신의 나이 또래인 걸까. 자신과 아버지가 비슷한 시기에 이 곳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니 기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낡은 책 한 권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



그 한 구절이 펠릭스의 마음 속에 쿡 박혀왔다. 한참을 그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펠릭스는 애써 밑의 문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책은 아주 오래 전, 매우 영리하고 똑똑한 학자의 손에 쓰여진 것이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져버린 여명 같은 사람이었지. 이 책에서는 그 학자가 알아낸, ‘미라큘러스’ 라는 신비한 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빠르게 편지의 마지막 구절로 시선을 돌렸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구나. 얘기해주마. 내가 최대한으로 알아낸, 우리 가문에 얽힌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를.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읽어내리던 펠릭스의 손이 힘없이 편지를 놓쳤다.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지는 편지에 적혀 있는 마지막 구절이 청회색 눈동자에 선명하게 찍혔다.



『네 어머니의 친가인, 유피테르 가문에 대해서도.』






“펠릭스?”

“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색 원피스를 차려입고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본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멍해졌다. 어딘지 얼이 빠진 듯한 얼굴에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짧은 대답과 함께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의 시선에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살짝 홍조가 피어났다. 쑥스러운지 눈을 데록데록 굴리던 마리네뜨가 밝게 소리쳤다.



“그래? 그럼 들어가자! 곧 시작이야~!”



그렇게 말하며 마리네뜨가 손을 펠릭스에게로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헤헤 웃으며 그냥 뒤돌아서 오페라하우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마리네뜨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펠릭스는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순간 레이디버그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이 정도면 중증이라고 생각하며 펠릭스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자신을 앞서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어가는 마리네뜨를 부지런히 쫓아가면서도 펠릭스는 제 머릿속을 잠식하는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우연한 기회로 발견한 비밀 방에서 그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자료들과 편지들을 발견했다. 밤새 편지들을 모두 꼼꼼하게 읽고 나서야 펠릭스는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금고 속에 담겨 있던 해석본들을 꾸준히 읽어보았지만 미처 다 읽지 못했다. 그만큼 많았고, 그걸 차치하고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종종 보였다. 전체를 해석한 해석본보다는 부분부분씩 해석해놓은 종이들이 더 많았는데, 그 이유는 책이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펠릭스의 아버지, 라파엘 아그레스트의 편지에 저술되어 있었다.


그래도 상당히 많은 양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단순히 책을 해설해놓은 것만이 아니라, 책에 쓰인 고대어를 어떻게 읽는지에 대한 방법까지 노트에 자세하게 남겨두고 간 아버지의 선견지명에 펠릭스는 혀를 내둘렀다. 사실 상자에는 책에 대한 해석본뿐만 아니라 연구 일지들, 과거에 나타났던 히어로들이 활동했던 당시의 이야기들에 관해서도 적혀 있었다. 이건 분명 아버지가 따로 조사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이것을 같이 보지 못해서 안타깝기도 했다.


그리고 편지에서 좀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신빙성 없는 소리를 적어놓으실 성격이 아니니 어느 정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펠릭스?”

“…어?”



어느 샌가 제 앞으로 다가온 마리네뜨의 얼굴에 펠릭스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놓고 놀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펠릭스를 보며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오늘 왠지 멍한 느낌이네?”

“…잠을 잘 못 자서.”



사실이었다. 자료들을 읽느라 밤을 거의 샌 건 사실이니까. 낮에 좀 자긴 했지만 아직도 조금은 피곤했고.



“빨리 가자. 곧 들어갈 시간이라잖아.”



별 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 마리네뜨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빠르게 걸어가는 마리네뜨를 바라보며 펠릭스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차리자.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 녀석이 레이디버그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은 여기에 왔고, 제대로 물어봐야만 했다. 그런데 자꾸 한눈을 팔면 어쩌자는 거야?


관객석으로 가는 문을 열자 웅장한 팔레 가르니에의 내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급스러운 붉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들이 금빛 난간과 기둥들 사이로 치아처럼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아직 극이 시작하지 않아 객석 안은 살짝 어두웠고 무대는 붉은 천으로 감추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샹들리에까지. 어마무시하게 화려한 풍경에 마리네뜨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반면 펠릭스는 익숙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마리네뜨가 가진 표는 앞에서 네 번째 줄의 정 가운데였다. 이곳에 앉으니 무대가 한 눈에 보였다. 괜히 VIP석이 아니구나 싶어 속으로 감탄하던 찰나, 제 옆에 와서 조용히 앉은 펠릭스의 움직임에 마리네뜨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펠릭스와 단 둘이 오페라를 보러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절로 긴장되는 손끝을 애써 우그리며 마리네뜨는 방금 전에 가지고 온 팜플렛에 얼굴을 묻고 생각을 딴 데로 돌리려고 애썼다.


팜플렛을 열자마자 바로 맨 앞에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자의 사진이 보였다. 고혹적인 눈매에 단정한 이목구비, 살짝 짓는 미소는 무척 매력적이었으며 왼쪽 눈가에 찍힌 눈물점조차도 사랑스러웠다. 미인(美人)이라는 말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한동안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자의 사진 밑으로 작게 뭐라고 적혀 있었다.


<비올라 역, 실비아 에스프랑>


오페라 <십이야>의 주연인 비올라의 이름을 본 마리네뜨는 며칠 전 읽어보았던 십이야의 시놉시스를 떠올렸다.


살아남기 위해 남장을 했지만 자신을 고용한 백작을 사랑하게 되어 고뇌하게 되는 여인.


정체를 숨기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마리네뜨는 살짝 궁금해졌다.


비올라의 정체를 끝내 몰랐다면, 백작은 결국 비올라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까?


한편, 마리네뜨와는 별개의 이유로 펠릭스도 팜플렛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물론 그는 배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마리네뜨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오페라가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제작되게 되었는지 그 세세한 과정까지도 펠릭스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투자자 중에 자신이 잘 아는 남자가 있었으니까.


펠릭스는 지금 오페라의 내용을 새삼 되새겨보고 있었다. 오페라에서 보여주는 상황은 재미있게도 지금 그들의 상황을 나름대로 정확히 그려내고 있었다. 변장을 하는 남장을 하고 백작에게 고용되는 비올라. 하지만 백작은 올리비아를 사랑하고 있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비올라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엇갈리다 맺어지는 이야기. 펠릭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한결같이 자신을 바라보는 비올라가 아닌 다른 여자만을 바라보던 백작. 비올라는 그런 백작을 원망했을까?


그러던 중, 마리네뜨의 뇌리에 섬뜩한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가 물었다.



“왜 그래?”

“응? 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이상한?”

“근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뭔가 음, 느낌이 좋지 않…, 달까?”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말하고서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마리네뜨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이 바보야. 데이트하고 있는데 불길하다는 말이나 하고 있으면 어떡해! 마음 같아서는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지만 차마 펠릭스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일념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그런 마리네뜨를 내버려두고 펠릭스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시작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인지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들어온 상태였다. 그러던 중 펠릭스는 옆쪽에 붙은 객석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몇몇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멀어서 아주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신문이나 뉴스에서 자주 보던 얼굴들이었다. 몇몇 정치가들과 사업가들이 무리지어 앉아 뭐라고 소곤대거나, 위쪽에 달려 있는 객석에서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무대 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초연이라서 그런가. 이 오페라가 파리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그쪽에서도 관심을 가질 줄이야.


이런 유명인사들이 어쩌다 이렇게 많이 모이게 된 거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괜한 불길함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펠릭스가 마리네뜨에게 뭐라 더 물어보려던 순간, 불이 꺼지고 무대가 시작되었다.





오페라 <십이야>는 셰익스피어가 써낸 희곡 ‘십이야’ 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쌍둥이 남매 세바스찬과 비올라는 폭풍으로 인해 배가 침몰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어느 섬에 정박한 비올라는 백작이 고용인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장을 하고서 백작을 찾아간다. 백작의 곁에서 백작을 위해 일하는 동안 비올라는 백작을 사랑하게 되지만, 백작이 올리비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백작의 앞에서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입장에 괴로워하게 된다.


1막이 진행되는 와중 펠릭스는 힐끔 시선을 돌려 마리네뜨를 살펴보았다. 자신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때의 그 호기는 어디다 버려둔 건지 반짝거리는 눈으로 무대를 쳐다보고 있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정말 네가 레이디버그일까?


오늘 하루만도 몇 번씩 되새겼던 질문들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는 펠릭스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대체 뭘 확인하려고 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레이디버그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자신이 펠릭스는 무척 낯설었다. 생각해보면 그 전까지만 해도 레이디버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체를 그렇게 막 궁금해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걸까. 어째서?


오빠인 세바스찬을 그리워하며 노래부르는 비올라의 움직임을 멍하니 좇고 있던 마리네뜨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단번에 직감했다.


보고 있어.


왜 오페라가 아니라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까. 여기서 돌아봤다간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버릴 것만 같아서 마리네뜨는 다시 무대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긴장으로 손에 자꾸 땀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참 뒤에도 거두어질 기미가 없는 시선에 마리네뜨는 울고 싶어졌다.


돌아보고 싶어, 돌아보고 싶어, 돌아보고 싶어!!


괜찮을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마리네뜨에 펠릭스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마리네뜨를 마주보았다.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환한 불빛이 한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놀란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나던 순간, 마리네뜨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참지 못하고 마리네뜨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


객석의 불이 켜졌다.


1막이 끝났다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휴식 시간을 맞아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괜히 뻘쭘해져서 아무런 말도 못하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물.”

“어, 어?”

“사러 갈 건데. 마실 거야?”

“어, 응!! 고, 고마워.”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힐끗 돌아보다가 펠릭스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아, 긴장해서 죽는 줄 알았네.”



아직 주변에 사람들이 꽤 남아 있어 티키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가만히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마리네뜨는 문득 입구 쪽이 묘하게 소란스럽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지?”





물을 사고 곧바로 극장으로 돌아오다가, 방금 전보다 급격하게 늘어난 경비원들의 숫자를 본 펠릭스의 얼굴에 미미하게 경련이 일었다. 침착하게 최대한 경비원들 가까이 접근한 펠릭스는 지금 몇몇 사람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이야기를 주워듣자마자 다시 발길을 돌려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번쩍, 빛과 함께 변신한 블랙캣이 어스름한 복도를 재빨리 벗어나 창문 쪽으로 향했다.



“밖인가?”



가만히 중얼거리던 블랙캣이 창문에 발을 올려놓은 순간 건물 전체가 덜덜 요동쳤다. 그에 난리가 났는지 제가 지나온 통로 쪽이 웅성거리는 목소리들로 소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쳇, 혀를 차며 블랙캣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남겨두고 온 마리네뜨가 걱정되었지만 괜찮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벽을 타고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올라갔다. 건물 옥상에 올라서자마자 낯익은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묶여 있는 몇 명의 사람들과 그들 앞에 서 있는 셰이드 플뢰르와 마임맨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재빨리 구석으로 숨었다. 살금살금 다가간 블랙캣이 그들의 근처에 숨어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제, 제발. 살려 주시게.”



애원하는 남자에게 바로 앞에 서 있던 셰이드 플뢰르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럼 우리를 배신하지 말았어야지.”



배신? 이상한 단어에 블랙캣은 귀를 쫑긋거렸다. 셰이드가 이어서 말했다.



“조직을 배신하면 곧 죽음뿐. 여기서 오래 지내본 당신들이 그걸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

“그분께서는 당신들의 행동을 몰라서 내버려두신 게 아니야. 꼬리를 잡기 위해 기다린 거지. 접신 장소를 대범하게 이런 곳으로 잡은 건 칭찬해주지.”



잡기도 쉬웠으니까. 무심하게 대꾸하는 셰이드에게 남자들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 하지만…! 그 계획은 너무나 터무니없지 않소.”



항의하는 남자의 모습에 블랙캣은 점점 더 숨을 죽였다. 그런데 목소리를 죽였는지 그 다음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뭐라는 거지? 더 정확하게 듣기 위해 조금 더 살짝 고개를 숙이는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날아오는 느낌에 블랙캣은 간신히 얼굴을 숙여 그것을 피했다. 이미 들켰다는 생각에 순순히 앞으로 걸어나온 블랙캣의 모습에 셰이드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블랙캣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눈치챈 건 저 형씨 뿐이었던가.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보통 눈치가 아닌 건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같은 악당이 분명한데도 셰이드 플뢰르와 달리 저 자에게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지?


설마, 기척을 감출 수도 있는 건가? 가뜩이나 성가셔 보이는 상대한테 골치 아픈 능력까지 있군.


블랙캣이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말했다.



“어이쿠, 대단하네. 설마 그걸 눈치챌 줄이야.”



비아냥섞인 칭찬에도 마임맨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블랙캣은 다시금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형씨는 그 때 보고 오랜만에 보는 걸. 이름이 뭐야?”



여전히 침묵. 알려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왠지 펠릭스로서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상대라고 생각하며 블랙캣은 가방에서 봉을 꺼내 한 바퀴 휘두르다가 그들을 향해 겨누며 씨익 웃었다.



“선량한 시민들을 괴롭히다니, 그건 안 되지~!”

“쳇.”



블랙캣을 보자마자 셰이드는 묶여 있던 남자들에게로 한 손을 뻗었다. 그들 주변으로 꽃 모양의 그림자가 그려지고, 가장자리에서 스멀스멀 연기처럼 올라오기 시작하던 그림자들이 곧 날카로운 창이 되어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피와 비명을 흩뿌리며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블랙캣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신들 미쳤어?”

“지금 저 자들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셰이드가 손을 뻗자마자 블랙캣의 그림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곧바로 제 그림자 밑에서 날아드는 날카로운 가시들을 간신히 피한 블랙캣이 폴짝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셰이드는 재빨리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창을 꺼내 블랙캣에게로 던졌다. 날아오는 창에 깜짝 놀란 블랙캣은 가방에서 방패를 꺼내 창을 튕겨내고 간신히 옥상 바닥에 착지했다. 블랙캣의 얼굴에 살짝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나만도 벅찬데 둘이나 있다니.


전혀 흠집 하나 없는 방패를 내려다보며 블랙캣은 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다른 미라큘러스에 의해 만들어진 악당이라서 그런지 파워는 확실히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무시할 수 있는 위력은 또 아니었다. 지금이야 한 명을 상대하고 있으니 그럭저럭 버티는 거지만 옆에 있는 저 남자가 덤비기 시작하면 일이 귀찮아진다.


그러고 보면 방금 뭐였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는데, 마치 다트를 던지듯 손을 움직였다. 방금 제 얼굴 옆으로 무언가 스쳐 지나가던 감각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존재한 무언가.


잠깐, 그러고 보니 저 손동작은….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긴가민가하며 블랙캣은 중얼거렸다.



“…팬터마임?”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자가 살짝 눈을 치켜뜨더니 손을 들어 무언가를 던졌다.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하자 바닥으로 챙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또 다시 제게 날아오는 그림자로 된 검날에 블랙캣은 속으로 하핫 웃었다.


이거 진짜 살 떨리는데.


챙- 튕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블랙캣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붉은 머리끈을 휘날리며 제 앞에 서 있는 레이디버그를 올려다보며 블랙캣은 피식 웃었다.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건데.


이러면 정말 의심하게 되잖아.



“여, 레이디.”

“블랙캣, 너 괜찮아? 쟤넨 또 뭐야?!”



힐끔 블랙캣을 돌아보다가 다시 악당들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나지막히 속삭였다.



“레이디, 한 명씩 맡아야 할 거 같아. 미안한데, 저 하얀 녀석을 상대할 수 있겠어?”

“저 남자? 못할 건 없지.”



선선히 대답하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땡큐. 그럼 일단, 그림자가 질 만한 장소로 저 자식을 유인해 가도록 해. 안 그러면 좀 위험하니까.”

“그림자? 왜?”

“저 녀석의 능력이 뭔지 알 거 같아. 녀석은 팬터마임 능력자야.”

“팬터마임이라고?!”



깜짝 놀라서 자신을 돌아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끄덕였다. 툭툭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 손을 집어넣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말했다.



“근데 왜 굳이 네가 저쪽을 맡겠다는 건데?”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마 맞을 거 같긴 하지만.”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편한 대로 해.”

“오케이.”



그들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분위기를 살피던 블랙캣이 가방에서 거대한 창을 꺼내더니 정확히 셰이드와 마임맨이 서 있는 중앙을 향해 던졌다. 창을 피하기 위해 두 악당이 양 옆으로 갈라지자마자 레이디버그는 마임맨에게로 달려들어 발을 휘둘렀다. 그것을 가볍게 막아내며 뒤로 물러나는 마임맨을 향해 레이디버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마임맨을 조금씩 뒤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편 블랙캣은 셰이드 플뢰르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림자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셰이드 때문에 바닥에 발을 거의 디딜 수가 없었는지라 블랙캣은 공중을 뛰어다니며 탐색전을 펼쳤다.


‘그림자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건 한 가지씩뿐.’


두 개 이상을 꺼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제약은 자신들과 비슷한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가방에서 너클 한 쌍을 꺼내들어 손에 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약점은.


가까이 접근하는 블랙캣에 셰이드는 그림자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블랙캣이 한 발 더 빨랐다. 재빠르게 그림자를 피해 블랙캣이 주먹을 휘두르자 셰이드는 양 팔을 X자로 모아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림자에서 검을 꺼내드는 셰이드의 모습에 블랙캣이 픽 웃으며 조롱했다.



“역시, 반응속도가 느리군.”



그림자에서 무언가를 꺼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5초 정도. 물론 일반인이 대응하기에는 무척 짧은 시간이지만 히어로라면 경우가 달랐다.

두 손을 흔들며 블랙캣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검을 휘둘러 너클을 막아내는 셰이드의 얼굴에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블랙캣은 달랐다. 자신은 그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블랙캣의 눈에 찾고 있던 것이 스쳐 지나갔다.


왼쪽 얼굴 밑에 있을 눈물점.


긴 발톱들이 달린 너클로 셰이드의 검과 맞부딪히던 순간, 블랙캣이 조용히 속삭였다.



“…실비아 에스프랑?”



블랙캣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셰이드의 몸이 한 순간 싸악 굳었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않은 블랙캣의 주먹이 셰이드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혔다. 쿨럭,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셰이드를 보며 블랙캣은 큰일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의외로 순진하네. 악당이 그래서 쓰겠어?”



가면을 쓰고 있는데 눈가가 보일 리가 없잖아.


한심하다는 듯이 내뱉는 블랙캣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셰이드 플뢰르를 내버려두고 블랙캣은 서둘러 레이디버그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상당히 일방적으로 끝난 블랙캣과 셰이드의 대결과는 달리, 레이디버그와 마임맨은 꽤 아슬아슬한 승부를 보이고 있었다.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의 옥상에서 벗어나 근처 건물들의 지붕 위로 내려와 숨가쁘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임맨은 신체능력도 뛰어났지만 머리도 무척이나 좋은 악당이었다. 무엇보다 본인의 능력을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격투술도 뛰어났지만 중간중간 무기를 꺼내들고 움직이는 통에 레이디버그는 계속 마임맨의 그림자를 보며 그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는지를 신경써야 했다.


몇 번의 합을 주고받다가 세게 밀려난 레이디버그의 등 뒤에 차가운 촉감이 닿았다. 벽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레이디버그의 앞으로 빠르게 파고든 마임맨이 다시 무언가를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힐끗 그림자를 보고서 그가 망치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공격을 피했다.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귓가에 무섭도록 선명하게 꽂혔다.


피어나는 먼지들 사이에서 뛰어나온 레이디버그가 다시 마임맨에게 발을 휘둘렀다. 벽이 부서지는 반동에 잠깐 자세가 흐트러졌던 마임맨이 레이디버그의 발차기를 막으며 몇 발자국 뒷걸음질쳤다가, 있는 힘껏 자신을 걷어차는 레이디버그에 밀려 크게 뒤로 물러났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상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레이디버그가 살짝 빨랐는지, 아슬아슬하게 레이디버그의 주먹을 피한 마임맨이 레이디버그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공격을 막기 위해 두 손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피할 수 없어-!


그 순간, 새까만 무언가가 레이디버그를 꼭 끌어안았다. 곧이어 공기가 진동할 정도로 커다랗게 퍽, 소리가 났지만 레이디버그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신체적으로는 분명 그랬다. 자신을 막아서며 씨익 웃는 얼굴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뭐야, 왜 니가 여기 있는데?



“블…, 랙캣?”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자신을 끌어안은 채로 제 어깨 위로 추욱 늘어지는 블랙캣의 등을 끌어안자 끈적한 무언가가 손에 가득 묻어났다. 그게 곧 피라는 사실을 알아챈 레이디버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블랙캣!!”



블랙캣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레이디버그를 보고 마임맨은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짐작했다. 마저 해치울까라는 고민이 드는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경찰들이 도착하기 전에 뒤처리를 끝내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휙 날아 사라지는 마임맨을 뒤로 한 채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데리고 건물 밑에 있는 골목길로 내려섰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 봐도 전혀 미동조차 없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옥상으로 돌아온 마임맨이 재빨리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죽어버린 사람들의 뒤처리를 해놓은 뒤, 쓰러져 있는 셰이드 플뢰르를 발견한 그가 조용히 셰이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물러나지.”

“쿨럭….”

“임무는 끝났어. 더 이상 쓸데없이 힘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는 셰이드를 들쳐업은 마임맨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휘익 날아 사라지는 마임맨의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신 좀 차려봐, 블랙캣!”



움직이지 않는 블랙캣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레이디버그는 어떻게서든 블랙캣을 깨우기 위해 애썼다. 숨을 쉬고 있는 걸 보니 죽은 건 아니었지만 그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호흡은 거칠었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블랙캣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처럼 심각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레이디버그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어, 어떡하지? 진짜 어떡해?”



블랙캣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주려던 레이디버그가 일순 멈칫했다. 천천히 제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양손에 가득 묻어나는 피에서는 녹슨 쇠 냄새가 났다. 지독한 죽음의 냄새.


그 생각에 흠칫하며 레이디버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야, 안 죽어.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미스터 피죤의 마지막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싫어.



“싫어. 너까지 그렇게 되는 건 싫어.”



고개를 숙인 레이디버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크게 소리치는 레이디버그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나 대신에 네가 그렇게 되는 건 더 싫다고!”



그 때, 블랙캣의 몸에서 검은 오오라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흐릿하게 피어오르던 오오라와 함께 블랙캣의 몸에서 번쩍 빛이 나더니 곧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금발의 무뚝뚝한 얼굴. 상태가 좋지 않은지 얼굴색이 한층 더 창백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기절할 듯이 놀라던 레이디버그가 펠릭스를 내려놓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레이디버그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던 소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흐릿해진 초록빛 눈동자가 레이디버그를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왜…, 울고 있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표정이 지독히도 다정해서 레이디버그는 더 울고 싶어졌다.


너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구나. 전혀 몰랐어.



“왜 그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펠릭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펠릭스는 레이디버그의 눈가로 올린 제 손을 발견했다. 멍하던 머리가 선명하게 걷히자 그제서야 사태 파악이 되는지 펠릭스는 천천히 제 얼굴을 만져보았다.


가면이 없었다. 경악하는 얼굴로 펠릭스가 천천히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라 말하려는지 제 팔을 붙잡는 펠릭스의 손을 레이디버그는 냉정하게 뿌리치고 벌떡 일어섰다. 슬프게 일그러지는 초록빛 눈동자를 알아챌 여유조차 없었다.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생각이 정리되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펠릭스가 블랙캣이었다고? 펠릭스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두려웠던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펠릭스가 뭐라고 말할지도 무서웠지만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너무도 두려웠다. 잘 이어지던 실이 마구 꼬여버린 것만 같았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뒤로 돌아섰다. 기어코 떠나려는 레이디버그의 뒤에서 펠릭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가지 마!”



그래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려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초조해진 펠릭스가 다시금 크게 소리쳤다.



“기다려, 마리네뜨!”



세상이 멈춰버렸다.

그 순간, 레이디버그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췄다.


헉헉 숨을 몰아쉬던 펠릭스가 몸을 일으키려다 짧게 신음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무릎이 꺾일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으니 괜찮은가? 플랙이 했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움직일 수도 있는 걸 보니 치명상은 피한 것 같고.


레이디버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방금 들었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마리네뜨라고?


지금 나를 마리네뜨라고 불렀어?


삐걱삐걱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애써 돌렸다. 필사적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펠릭스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야, 난 저런 펠릭스는 몰라!


다시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펠릭스는 다시금 소리치려고 했다.



“기다리…. 쿨럭쿨럭.”



마치 등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펠릭스는 절로 신음했다. 그래도 계속 레이디버그를 쫓아가려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펠릭스에게 반지에서 빠져나온 플랙이 소리쳤다.



“파트너, 무리하면 안 돼!”

“플랙, 변신을….”

“지금 쫓아가봤자 소용없다고~!! 너랑 말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어 보이잖아!”

“말해야, 해.”



이를 악물고 대답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플랙을 신경쓰던 사이 레이디버그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레이디버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던 펠릭스의 얼굴에 절망이 스며들었다.


벽을 세게 내리치는 펠릭스의 주먹에서 살짝 피가 흘렀다. 낮게 절규하는 목소리가 어두운 골목에 울려퍼졌다.



“젠장!!”




- 12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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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를 적을 때가 참 재미있네요. 사실 2권 전개가 1권보다 더 그러합니다만ㅋㅋㅋㅋ 후기를 회마다 적지 못하는 게 회지의 가장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한답니다.(말많은 애


솔직히 회지를 많이 내본 건 아니지만 나름 두꺼운 애들을 여러 차례 낸 편인데, 이 회지는 그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손이 많이 간 회지입니다. 2차라지만 자료가 너무 부족해서 거의 1차기도 한데 설정들이 너무 빈곤하여 덧대고 뜯어고치고 별 짓을 다 했었죠 콘티 단계에서부터; 콘티를 짜면서 솔직히 예상으로는 페이지 40페이지 정도로 한 30에피쯤은 필요하겠다 싶었는데, 그걸 모두 구상하기엔 제 능력이 부족하고 페이지도 부족하여(...) 현실과 타협해서 가장 필요하다 싶은 핵심 에피소드들만 골라내서 극을 진행했습니다.(30페 안팎 24에피) 그래서 전개가 빠르게 몰아치죠. 봄에서 애들 관계선에 대해 이것저것 적어보고 싶었지만 지면이 부족했다는 게 아쉽네요 ㅎㅎ;


아참, 마지막 장면 적으면서 무척 즐거웠답니다. 저번 회에서 평온한 데이트가 되기를 바란다고 적어놓았지만 사실 그게 평온한 데이트로 만들어주겠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잖아요?^ㅁ^!


가급적 애들 상황과 들어맞는 오페라를 찾기 위해 오페라 백과사전에서 수백 개의 오페라를 살펴봤습니다만 오페라의 성향들이 다 희극, 아니면 비극 정도라 맞는 걸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선을 선회해서 연극 쪽에서 작품을 찾아왔어요 십이야!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죠. 저도 좋아하는 작품이고요 ㅇㅇ 물론 아직 오페라로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에요 영화화나 연극화는 되었지만요.


이번에도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가 나왔지만 가장 하이라이트는 역시 정체 들통이겠죠! 저는 펠릭마리가 정체를 알게 된다면 낌새는 펠릭스가 먼저 채는데, 먼저 정체를 알게 되는 건 마리네뜨일 것 같다고 쭉 생각했었어서.. 솔직히 펠릭마리 감정선에 엄청나게 신경썼는데 읽으시는 분들이 납득하실지 걱정했었어요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었지;ㅠㅠ


과연 그들의 운명은?! 다음화를 주목해주시라!>ㅁ<


펠릭스의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셔서 작중에 등장하지 않지만 작중에서 나름의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들을 꿰차고 계시답니다. 개인적으로 아버님의 첫 번째 편지를 적으면서 좀 슬펐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미래에 있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지...;ㅅ;


펠릭스 부모님의 이야기는 후일담을 적을 때 외전으로라도 짧게 적어보고 싶지만 너무 귀찮아서 고민 중입니다..


붉은 동그라미에 검은 점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요정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네.

검은 고양이는 늘 외톨이. 하지만 그들은 고독하기에 오히려 더 영리하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기적을 담아.

기회는 단 한 번뿐. 그렇기에 기적이란 아름다운 것이라네.


후후. 이 노랫말을 지어내면서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마음에 드는 내용이라 공개하고 싶었지만 중반부 스포일러라 꺼낼 수가 없었어요;ㅅ;

이 노랫말은 고대서부터 전해져오던 경구 중 하나입니다.(그런 설정) 미라큘러스의 전설에 대해 다루고 있죠. 이 또한 펠릭스의 아버지가 알아낸 것입니다. 펠릭스의 아버지 라파엘은 생전에 유명한 고고학자였거든요.


12화는 내일이나 모레 올릴게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상도 감사해요>ㅁ<)/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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