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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프귀능 스푼오르카





[귀능다나/오르메두]

Change


<04>




7.



"으윽…."


비틀린 신음소리와 함께 누워 있던 나가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부스스 눈을 뜨자, 진갈색의 나무로 된 천장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뭐지, 내가 왜 여기에…. 가늘게 뜬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나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제 얼굴을 더듬었다. 안경!! 놀라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상하게 목 뒤가 시큰거렸다. 왜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나가의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아, 일어났어요, 나가 군?"


헉.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고개를 애써 돌리자, 침대 바로 옆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사과를 깎던 손을 멈추고 싱긋 웃는 얼굴이 누구인가를 깨닫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던 나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가 허둥지둥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가 당황한 듯이 눈가를 일그렸다. 그런 나가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던 귀능은, 나가가 무엇 때문에 곤란해하는지 깨닫고 작게 웃었다.


"초능력이 안 나오죠?"
"어…."
"잠깐 수를 좀 썼거든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초능력을 쓰는 건 무리일 거예요."


무슨 수를 쓴 건데?!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한 거였어?! 경악하는 나가에게 귀능은 사실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몇 번을 사용하려고 시도했지만 초능력은 나올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고, 막막해지는 심정을 애써 달래기 위해 나가는 심호흡을 했다. 대답을 듣기가 무서웠지만 아무튼 물어보았다.


"…약이라도 먹인 건가요?"
"설마. 제가 그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너무하네요."


너라면 납치범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겠냐.

하마터면 튀어나갈 뻔한 마음의 소리를 간신히 눌러참고 나가는 슬금슬금 침대 가장자리로 옆걸음질쳤다. 최대한 자신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 듯한 나가의 모습에 귀능은 가만히 웃다가, 나가가 목이 아픈지 인상을 찡그리자 깜짝 놀라서 그를 제지했다.


"가만히 좀 있어요! …진짜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도 되요. 명령이라 데려오긴 했지만 나중에 빠져나갈 수 있게 손을 써줄테니까."
"그럼, 지금 보내주면 안 되요?"
"당연히 안 되죠. 일단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누군데요?"
"만나보면 알아요."


더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딱 잘라 대답하는 귀능의 미소에 나가는 결국 포기하고 다시 원래 누워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설령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초능력이 없는 자신은 대응하기도 어려우니까. 게다가 이 사람 싸움도 잘할 거 같은데, 자칫 잘못해서 성질 건드렸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건 더 싫었다. 인생은 안전빵으로 살자, 가 제 모토인데.


"아, 그 인간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으니, 그 동안 이야기나 좀 해볼까요?"
"무슨…, 얘기요?"
"별 거 없어요. 그냥…."


거기까지 말했다가 귀능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밝았던 그의 표정이 살짝 음울해졌다, 순식간에 다시 밝게 변했다. 싱글싱글 웃던 귀능이 이쑤시개로 사과를 찍은 뒤 그걸 나가에게 내밀었다.


"사과 먹을래요?"



*


"무슨 일이세요?"


오르카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서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이친 다나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험악했다. 넘쳐나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살벌하게 쳐다보는 눈빛에 오르카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조용히 있어야겠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던 오르카에게 다나가 불쑥 대답을 던졌다.


"구하러 가야 해."
"누구를요?"
"나가 녀석. 납치당했어."
"납치요? 나가 씨가요?"
"그래."
"대체 누가…."


오르카의 질문에 옷걸이서 외투를 집어들던 다나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금방 감정을 털어내고 말을 던졌다.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귀능이 녀석이 돌아왔다."
"예?!"


외투를 집어들어 몸 위에 걸치는 다나의 뒷모습을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던 오르카의 손에서 서류 한 장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보일세라 황급히 다시금 서류를 집어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오르카가 물었다.


"그 팬더새…, 흠흠. 그 녀석이 돌아왔다구요? 근데 왜 나가 씨를 납치하죠?"
"나이프에 들어간 모양이더군."


이번에는 오르카가 움찔거렸다. 뒤를 돌아보고 있어 다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담담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다나는 매우 골치가 아팠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런 사건까지 일으킨 이상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녀석을 숨겨주려고 했던 건가? 나는? 어이가 없어진 다나의 입가에서 피식,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참내, 키운 정도 정이라 이건가. 말없이 사라졌다가 돌아와서는 속만 징글맞게도 긁어대는 팬더새끼가 뭐 그리 예쁘다고.

갔다 온다. 무슨 일 생기면 즉시 보고하고. 그 말만을 남기고, 터벅터벅 걸어 서장실 밖으로 나가는 다나의 모습을 조용히 배웅하던 오르카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2년 간 무슨 짓을 하고 다녔나 싶었는데 나이프에 들어가다니. 하긴 하는 짓이 악당 뺨치는데다 성격도 참 지랄맞긴 하지만, 서장님 말은 잘 듣지 않았나. 그렇게 계속 생각하던 중,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오르카는 눈가를 찡그렸다. 내가 왜 그런 팬더새끼에 대해 신경쓰고 있는 거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마 그 사람이 돌아온 것에 신경이 쓰이는 탓이라고,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오르카는 다시금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하지만 통 집중이 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차, 휴대폰이 울렸다. 서장님인가? 아무 생각없이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을 뿐인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르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안녕?]
"…어떻게 이 번호를."
[에이,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 그나저나 너 지금 혼자인가?]
"아니요, 사람들이랑 같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 못하는 건 여전하네.]


네 성격상 그랬으면 목소리를 더 낮췄겠지.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웃음소리에 오르카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였는지 메두사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묻는 메두사에게 맞춰줄 생각같은 건 전혀 없었기에 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대화를 했다간 휘말릴지도 모르니까. 저번처럼.

오르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침착해라, 긴장하지 마. 방심하면 언제고 당할지 모른다.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이며, 오르카는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긴장했는지 바짝 굳어버린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그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사람을 불러야 할까 고민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막연히 짐작하는 자신에 오르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눈 앞에 나타난다면 이번에야말로 체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저번과 같은 그런 막연한 감정이 자신의 발을 묶는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8.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둘 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오독오독 사과를 씹어먹는 나가를 내버려두고 귀능은 손에 들린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커다랗고 휑한 방 안에 남자 둘이서만 남아 있으려니 참으로 썰렁했다. 태클을 걸까 싶었지만 굳이 쓸데없는 모험을 하기엔 귀찮았기에 나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안경도 돌려받고 간식으로 사과까지 얻어먹고 있자니 풀어지려는 기분에, 나가는 나름 고민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먹이로 길들이는 건가?

에잇, 아니야.

도리도리 고개를 젓던 나가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하다, 제 옆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남자를 힐끔힐끔 관찰했다. 자신을 귀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나가가 그러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가만히 있어도 입꼬리가 쭉 올라가 있는 걸 보니 평소에도 잘 웃는 사람이 아닐까. 자신을 납치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가가 툭 말을 걸었다.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네?"
"아니, 뭐랄까, 그…."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나가를 멀뚱히 쳐다보던 귀능은, 이내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하 웃어대던 귀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나가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가 간신히 웃음을 삼키고 대답했다.


"나가 군은 정말로 사람이 좋네요~."
"에?"
"아니, 아까 제가 말해놓고도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보통 자기를 납치한 사람한테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잖아요?"


조목조목 짚어주는 귀능에게 나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지금 동조할 때가 아니잖아! 표정이 이랬다저랬다 바뀌는 나가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던 귀능이 조용히 물었다.


"나가 군은, 스푼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죠?"
"에? 네. 이제 한 3주 정도?"
"어쩌다가 거기 들어가게 된 거예요?"
"서장님한테 스카웃 당해서요."


그 한 마디에, 서류를 들고 있던 귀능의 손가락이 살짝 꿈틀거렸다. 나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귀능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동요하다니 나도 아직은 멀었네.


"…서장님은, 잘 지내나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질문하며, 귀능은 평상시와 같이 미소지었다.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나가는 무척 놀랐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서장님을 알아요?"
"알죠. 원래 저도 스푼에서 일했었으니까요."
"네? 진짜요?"
"그럼요. 고로 선배라는 말은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구요?"
"지금은 아니면서."
"뭐, 그건 그렇죠."


지금쯤 배신자 새끼라고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상상만으로도 편치 못한 기분에 귀능은 가만히 들고 있던 서류를 제 무릎 위에 내려두었다.


"나가 군. 잘 들어요."
"네?"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저-."


그 말과 함께 귀능은 손가락으로 바로 자신의 앞, 그러니까 나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붙어 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도망가세요."
"에?"
"제가 이 방에 주문을 걸어놨거든요. 초능력을 쓸 수 없는 마법의 주문을."


저건 또 뭔 소리야.

당최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가는 그의 말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잠깐만, 근데 저 말은….


"위험할 거라는 뜻이에요?"
"어차피 초능력이 없으면 나가 군 성격에 어딜 가든 위험하지 않나요? 맹하다는 소리 많이 듣죠?"
"아, 그렇죠."


고개를 끄덕거리던 나가는 다음 순간 팟 정신을 차렸다. 으악, 또 말려들었잖아! 다시 질문하려던 나가는 중얼거리는 귀능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변덕스러운 인간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참 힘든 일이죠. 어째 만나는 상사마다 다 이 모양인지 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귀능이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진심으로 질린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리는 귀능의 모습에, 나가는 뻘하게 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근데 대체 상사가 어떤 사람이기에 저렇게 얼굴이 우거지상일까. 서장님보다 더한 사람인가?


"아무튼, 나가 군."
"네?"
"방심하지 말아요."


싱긋 웃고는 있지만 새까맣게 탁해지는 귀능의 눈빛에 나가는 순간 움찔했다. 분명 웃는 얼굴임에도 이상하게 밀려드는 공포감에 살짝 몸을 떠는 나가를 쳐다보며, 귀능은 만족스럽게 웃더니 옆에 있던 접시를 다시 무릎에 올려놓고 남은 사과 하나를 마저 깎기 시작했다.


"예전엔 스푼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저는 배신자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런 실실거리는 태도로 너무 무방비하게 굴었다간-."


죽을 지도, 모른다구요? 


사각사각 껍질을 깎는 소리만이 방 안을 배회했다. 그 한 마디에,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굳어 있는 나가와는 달리 귀능은 이제 콧노래까지 부르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나가의 침묵에 귀능은 좀 도가 지나쳤나 싶어 속으로 난감한 듯이 웃었다.

너무 겁을 줬나? 능력으론 최강이긴 하지만 만나보니 아직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하지만 아직 원석에 지나지 않으니까. 갈고 닦으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거다. 그래서 그가 이 소년을 노리는 거겠지.

진짜 넘어올 리는 없겠지만.

소년은 능력과는 달리 성격 자체는 정말로 평범했다. 막 정의를 외치며 적극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본적인 도덕 관념이 없는 것도 아닌. 굳이 커다란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기보단 조용한 것을 가장 선호하는 타입이랄까. 별로 꿈이나 야망같은 것도 없어 보이고, 적당히 실리에 맞춰 살아간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상처입히기엔 너무 무른, 소위 '양심' 을 가진 상대인 것이다.

이미 그 양심을 버린 자신과는 다르게.


"스푼에서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도 않겠지만."


특히 그 사람이.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에 귀능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처음 자신을 봤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표정은 덤덤했지만 붉은 눈동자는 착잡하게 일그러졌었다. 자신을 기억하고 동요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기뻤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 한 구석에 착잡함을 남겼다. 그런 쓰레기 같은 곳에 들어갔냐고 고함을 치던 모습에 심장 한 구석이 따끔거렸다. 곧 다시 무뎌졌지만.

역시 이번에야말로 미움 받으려나.

미움받는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감정이란 제 뜻대로 되는 존재가 아닌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스푼을 나온 것도 아니고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사람을 대면하고 있자니 정말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죽어도 그럴 수는 없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 목적 하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배수진을 쳤다. 스푼을 버리고 나이프에 들어간 것도 그래서였다. 돌아갈 곳은 없으니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익숙해지니 아주 못할 짓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남아 있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 당신의 존재 때문인지도 몰라요.
서장님.


"뭐, 사실 배신자든 뭐든 상관없어요.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걸 위해 다 버린 거니까.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귀능은 다시금 침묵했고, 나가는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 눈 앞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사실 이쯤되니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는 말이 진심인가도 헷갈린다. 도망치라고 방법을 알려주면서도 지금은 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모순적이지 않나.

그 때였다.


"아, 오셨네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귀능에, 나가는 깜짝 놀라 귀능의 등 뒤를 쳐다보았다. 열려있는 문 앞에 하얀 옷차림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금세 그가 누군지를 알아본 나가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나이프. 다시 한 번 귀능을 돌아보았다. 룰루 콧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마저 다 깎아 올려놓는 귀능의 표정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사과 더 먹을래요? 그렇게 묻는 귀능에게 나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 먹었다간 체할 거 같다. 그런 나가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귀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해맑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오오, 진짜 데려왔잖아? 대단하네~!!"
"뭐 이 정도쯤이야."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나는 귀능의 모습에 나가는 심히 불안해졌다. 남아 있는 동앗줄을 붙잡듯 간절히 바라보는 시선에 귀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작게 입모양을 그렸다. 미안하다고. 그러더니 몰래 저를 향해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올리는 귀능을 보고 나가는 절로 고개를 갸웃했다. 비밀로 해달라는 건가? 지금 이야기를? 하지만 왜?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나가는 제 앞으로 뛰듯이 걸어오는 백모래에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헤실헤실 웃고 있지만 저쪽보다도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다. 저쪽도 좀 미친 사람같지만.

백모래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본론이었다.


"나이프에 들어오지 않을래?"


나가의 대답도 간결했다.


"싫어요."




-TO BE COUNTINUE


===


나가한테 쓴 건 듄이 쓴 거랑 마찬가지로 특기를 무효화하는 향입니다. 물론 빼돌린 건 송하겠죠 하하
오랜만에 쓰니 재밌네요 ㅌㅌ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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