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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 시점입니다.





[학연화] 상념(想念)




"…좋아해!"



그 말 한 마디에, 몸이 우뚝 굳어버렸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몇 초의 정적 끝에, 나는 내가 고백 비슷한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니다, 공주님이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잖아. 아무렇지 않게 사람 심장 들었다 놓는 소리를 하는 데에는 아주 도사니까 말이야. 언제나와 같은 친애의 표현인가 싶어 하하 웃으며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



거기까지. 학은 뱉어내려던 웃음을 이내 도로 삼켰다. 연화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꽉 다물린 입술과 몇 번이고 초조하게 움직이는 손, 태연한 척 하지만 붉은 머리카락만치 빨갛게 물들어가는 볼과 자신을 향하는 반짝거리는 눈동자까지. 제법 단호하게 사물을 바라볼 줄 알게 되었던 보랏빛 눈동자는 조금 불안한 듯 가볍게 일렁였다. 학은 이런 연화의 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녀석'의 앞에서 늘상 보여주었던 그 시절의 당신. 누군가를 향한 연모의 감정으로 설레여하던 그 시선을 몇 번이고 옆에서 훔쳐봤었으니까.


그런데도 쉽게 실감나지 않았다. 짝사랑의 기간이 너무 길어서인가.


정말로?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걸까.


가슴 한 구석에서부터 점점 따뜻하게 번져가는 감정에 학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나, 지금 기뻐하고 있구나.


정말 기뻤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여인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데, 기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점점 실감하게 되는 현실에 자꾸만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입가에 번지려는 미소를 감추는 것이 고작이었을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쁘다는 감정은 금방 떠오른 또 한 사람의 얼굴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 저 가녀린 어깨를 붙잡고 거리낌없이 제 품에 안을 수 있다. 처음에는 당황하더라도 분명 지금의 그녀라면 자신을 마주 끌어 안아주겠지. 움찔, 자꾸만 감정대로 움직이려는 몸을 억누르며 손가락을 몇 번을 까딱거렸다. 마음 속으로는 몇 번이고 손을 뻗고, 몇 번이고 당신을 끌어안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공주님'."



그래선 안 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아주 살짝 웃음짓는 학의 눈동자는 깊고 탁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질척이는 새까만 눈동자가 제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거절도 아니었다. 회피였다. 정중하게 제 감정을 부정하는 학의 대답에 연화는 웃는 얼굴 그대로 딱 굳어버렸다. 뭔가 말하고 싶었는데, 말할 수 없었다.


곤란하다는 듯이 짓는 미소가 너무 아파보여서. 분명 웃고 있는데, 음울해지는 낯빛은 마치 안 된다고 선을 긋는 것만 같았다.



"그, 그래. 그런가? 미안해."



그렇겠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짓는 연화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학의 눈빛이 조용히 일렁였다. 거절당한 충격에 차마 그에게로 시선을 두지 못하던 연화는, 그의 그런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돌아가자며 등을 돌렸다.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등을 쫓아 천천히 걸었다. 많이 강해졌지만, 아직도 제 눈에는 마냥 연약해 보이는 연화의 뒷모습을 보던 학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이고 뻗어지려는 손을 애써 거둬들였다. 붙잡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몇 걸음만 더 다가가면 잡을 수 있는데.


학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보.


이 정도면 족하지 않은가.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는. 몇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너무 멀지도 않지만 아주 가깝지만도 않은. 닿을 수는 없지만 언제든지 당신의 옆에 서서 당신을 지키는 게 가능한 정도의 거리가. 뒤돌아봐주지 않아도 좋다. 당신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나는 끝까지 당신을 지켜보는 역할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이제껏 감정을 죽이고 또 죽여왔다. 그럼에도 지금, 너무나도 쉽게 술렁이는 감정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당신은 언제나 내게 공주님으로 남고 싶어했죠, 연화. 그렇기에 나는 당신에게 손대지 않을 수 있었던 건데. 당신을 공주님이라고 생각했기에 선을 그을 수 있었던 건데. 그 선을 넘어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대체 나는 어떡해야 좋은 겁니까.


정작 그 선을 원했던 건 당신이면서.


자꾸만 흔들리는 이성을 애써 바로잡았다. 세상에 거리낄 것, 무서울 것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오직 당신 하나가 두렵다. 움직임 하나, 눈짓 하나만으로 견고했던 내 이성을 찢어발기고 심장을 무너뜨리는 당신이.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손가락들을 조심스레 접어 주먹을 쥐었다. 픽 웃었다. 봐, 이래서 이 감정을 토해내기가 두려워. 너무 오랜 세월 죽여온 감정의 깊이가 어떤지를 감히 예상할 수 없다. 실수로라도 이성을 놓아버리는 순간, 이 감정이 어디까지 폭주할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어서.


그리고 그게 당신을 상처입히게 될까 두려워.


성을 도망쳐 나온 직후, 영혼 없는 인형처럼 그냥 숨만 쉬고 있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절로 심장이 따끔거렸다. 설핏 고개를 저었다.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그런 당신의 모습은.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이나. 재하는 내게 솔직하라고 말했지. 그 때는 그래도 괜찮은 걸까 고민했었지만 직접 겪어보니 알았다.


무리야.


피식 웃었다. 너무 소중해서, 그래서 더 손댈 수 없는 존재라니. 내 손에 잡히면 부서질까 두려워서, 차마 닿는 것조차 겁이 날 정도라. 속으로 중얼거리다 어처구니가 없어 조금 웃었다. 어떤 크고 강한 적을 상대할 때보다, 나보다도 한참 작은 소녀 앞에서 나는 이렇게까지 작아지고 두려워진다. 그래서 우스웠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두려워하고 결국엔 최악의 가정을 하고 마는 나 자신이.


그럼에도 변하지 못할 나를 알아서.


터벅터벅, 앞서가는 연화의 발걸음에 맞춰 걸어가던 학의 고개가 살짝 아래로 숙여졌다. 침착해 보이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의 안색 위로 어둡고 음울한 감정들이 피어올랐다. 다음 순간, 고개를 들어올리는 학의 눈빛에는 어떤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생각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들과 동시에 학의 입가에 픽 미소가 떠올랐다. 엉뚱할 때도 있지만 할 땐 하는 녀석들이니까, 그들이라면 분명히 공주님을 잘 지켜주겠지. 내가 없어도 괜찮을 만큼. 처음에는 그저 귀찮은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샌가 녀석들의 존재에 안심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런 감각이 결코 싫지 않았다. 그녀의 안전이 보장된 지금, 자신에게 남은 일은 딱 한 가지 뿐이었다.


…아직은 안심할 수 없으니까. '그 녀석'이 살아있는 한.


떠오르는 하나의 얼굴에 학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눈빛만으로 상대를 찢어죽일 수 있었다면 몇 번이고 찢어버렸을 법한 살기 가득한 눈동자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몰아치는 분노에 그의 손이 들고 있던 장도를 부러질 듯 세게 움켜쥐었다.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수원.







===


처음으로 써보는 새벽의 연화 연성! 음... 처음 연성은 역시 학연화나 학연화수원의 관계도에 관한 연성일 거라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었네요:) 개인적으로 학의 행동을 머릿속에 상상하는 건 쉬웠는데 그걸 동작으로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학은 진짜 말보다는 행동으로 많은 걸 표현하는 남자라, 동작을 더 세심하게 표현해주고 싶었는데 읽는 분들이 제대로 상상이 가셨을까 모르겠어요.


학은 연화를 너무 소중하고 신성히 여기기 때문에 정작 연화가 고백해도 저런 식으로 회피할 거 같아요. 정말 소중하니까, 오히려 손을 못 대는 거..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수원일 거 같지만요; 얘는 반드시 수원을 자기 손으로 죽일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원을 죽인 뒤 자신의 미래는 별반 생각하고 있을 거 같지 않아서요. 윤을 만나던 에피소드 때 익수가 그러지 않았던가요? 너에게선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그 말의 의미는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ㅠㅁ ㅠ


어쨌든 제 기준에 학은 연화한테 너무 진심이라 도리어 연화를 거절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화가 바랬기에 그녀를 꼬박꼬박 공주님이라 칭하는 거기도 하고. 자기 감정이 폭주할까 두려워할 거 같기도 하고... 연화를 상처입히는 사람에 학 본인이 들어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할 거 같거든요. 얘 너무 순정이라 제 마음이 찢어집니다(...)


연화를 거절할 때 학이 짓는 미소를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을까 모르겠네요. 모티브는 13권쯤인가 연화가 이런 장난 그만 하라고 했을 때 학이 머리 쓰다듬으면서, 네 그만하겠습니다. 할 때 지었던 웃음이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캐붕이 있을까 두렵지만 첫 연성이니 상냥하게 지켜봐주셔요^_^;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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