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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프귀능 스푼오르카



[귀능다나/오르메두]

Change


<03>




5.


꺄르르 뱉어내는 웃음소리, 하이얀 웃음. 살며시 눈꼬리를 접으며 악동처럼 웃는 얼굴은 어려 보였다. 아니, 어렸다. 작은 몸집을 한 어린 시절의 녀석이 저 멀리서 뒷짐을 지고 멀뚱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막 웃어대며 내게 손을 흔들어대는 모습에 직감했다. 꿈이구나.


저 시절에는 그래도 꽤 귀여웠는데.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은 저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어린애의 재롱이라 생각하면 뭐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나이먹고도 저러니까 문제지. 일하라고 잔소리를 퍼부을 때는 애늙은이가 따로 없었지만, 저럴 땐 딱 그 또래 남자아이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혼혈 중에서도 유독 인간과 닮은 녀석이었다. 흑백으로 얼룩덜룩한 독특한 머리카락과 대나무를 주워먹는 괴상한 식성 정도가 녀석이 팬더 혼혈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자신을 훌쩍 넘어버릴 정도로 키가 컸지만, 싱글싱글 웃는 얼굴은 여전히 소년처럼 해맑았다.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영악한 눈빛으로 개구지게 웃으며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 녀석은 저렇게 웃지 않는다. 어느샌가 훌쩍 커버린 녀석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제 앞에 다시 나타났다. 더없이 최악의 형태로.


일어나십시오.


그 말과 함께 시끄럽게 울려대는 자명종 소리가 뇌리를 잠식했다. 반사적으로 팔이 귓가에 들이밀어진 자명종을 세차게 밀쳐냈다. 탁,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바닥을 세차게 구르는 소리와 함께 눈꺼풀에 가려져 있던 붉은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수분이 부족해 뻑뻑한 눈꺼풀이 따가웠는지 몇 번 눈을 깜빡거린다.


역시 이쪽이 현실인가.


잠에서 깼다 생각하자마자 무겁게 제 몸을 짓누르기 시작하는 피로에 다나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시계를 보니 잠든지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다나는 겨우내 들었던 선잠을 망쳐놓은 장본인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파일을 들고 다나 앞에 서 있는 남자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일입니다, 라고 깍듯이 대답하는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저 멀리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자명종을 흘낏 쳐다보다가 다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북북 긁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다나의 눈동자가 오르카를 흘낏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당황하는 척이라도 하더니 이젠 익숙해졌는지 그런 기색은 없다. 공손한 말씨에 점잖은 얼굴을 한 주제에 이 놈도 사람 깨우는 매너는 영 아니었다. 


그 생각과 함께 떠오른 얼굴을 북북 지웠다. 핫, 짧게 탄성을 뱉어내며 웃었다. 현실에서도 골치 아프게 하면서 이젠 꿈에서까지 나타나다니, 일부러 이러나 싶어 괜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다시 오늘이 시작되고 있었다.





6.


타닥타닥, 조금은 거칠게 발을 구르며 다나는 바람처럼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평소와 같은 뚱한 얼굴이어서 별로 티나지는 않았지만 다나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늘 매서웠던 눈매가 오늘따라 더욱 흉흉했다. 다나의 주변에 가득 피어오르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복도를 걸어가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녀를 이렇게 짜증나게 만든 원흉은 하나였다. 방금 전 들었던 보고 때문이었다.


나이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녀석 때문이지만.


요즘 잠잠하다 싶었는데 또 깔짝거리나. 평소에도 짜증났지만 이번은 유독 더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아무래도 보통 범죄자들과는 스케일이 다르기도 하고, 귀찮은 놈들도 더럿 있고. 괜히 신경질이 나서 뭐라도 후드려패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기에 애써 성질을 참아냈다. 가뜩이나 많이 부서지는데 굳이 거기에 보탤 이유는 없지. 남들보다 특출난 제 완력이 새삼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쯤이면 임무를 끝내고 돌아왔을 텐데. 빠르게 걸어가면서도 주위를 휙휙 돌아보며 집중하던 다나는 곧 자신이 원하는 인물들을 찾아냈다. 휴게실 쪽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한 명은 새까만 날개를 달고 있는 흑발의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분홍색 단발머리를 한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큼큼, 헛기침을 하면서 다나는 휴게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돌아왔냐."

"언니! 어서 와."



그녀가 있는 쪽을 돌아보자마자 반갑게 제 언니를 맞이하는 혜나와는 달리, 사사는 고개만 한 번 끄덕거렸다.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알고 있기에 다나는 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스푼 내에서도 손에 꼽히게 잘생긴 얼굴과 달리, 혀가 짧은지 어쩐지 하여간 거의 알아듣지도 못할 만큼 발음이 새는 녀석이니 어쩌겠는가.



"오늘은 그래도 무탈히 끝낸 모양이네."

"에이, 우리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살살 눈웃음치며 웃는 제 동생의 얼굴은 귀여웠지만 다나는 속지 않았다. 히어로라는 이름값을 하는 건지 몰라도 스푼에는 유독 개성이 넘치는 녀석들이 많았고 그만큼이나 트러블도 상당히 일어났다. 특히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녀석들이 꽤 있었는데 제 동생은 다행히도 똑부러진 편이었으나, 뭔가 괴이하게 자잘한 사고를 치는 부류였다.



"그나저나 언니, 일 많아? 오늘도 많이 피곤해 보이네."

"끄떡없어."



눈을 번뜩이며 단칼에 말하는 다나를 보며 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역시 일이 많은 모양이다. 그에 역시 스푼에선 승진하면 고생길일 뿐이니 절대 말단으로 남아야지, 라고 중얼거리는 혜나였다. 한편 다나는 어딘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요즘들어 밀리는 업무에 밤을 좀 새긴 했는데, 그렇게 티가 나나.


아, 그나저나.



"나가 녀석은 어딨어? 할 말이 있는데."

"오빠는 아까 전에 편의점에 음료수 사러 간다고 나갔는데. 생각보다 늦네."

"흠…."



붉은 눈빛이 살며시 번뜩였다.




*



"뭐, 뭐지?"


오싹하게 스쳐가는 한기에 나가는 몸을 살짝 떨었다. 혜나가 말한 대로, 나가는 방금 전 편의점에서 계산을 마치고 스푼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손에 음료수가 가득 든 봉투를 들고서 여유로이 길을 걸어가던 나가의 발걸음을 조용한 목소리가 불러세웠다. 저기요. 뒤를 돌아보자 어떤 남자가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흑백이 섞여 있는 독특한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로, 빛을 삼켜버린 듯한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가득 담고 있었다.



"혹시, 그쪽이 나가 군이에요?"

"? 네. 그러는 그쪽은 누구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가를 보며 남자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인상이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어려뵈지는 않았지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해맑은 미소는 마치 소년같았다.



"아, 제대로 찾아왔네요. 그쪽을 만나러 왔거든요."

"…저를요?"



잠깐 멍해있다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르키는 나가에게, 남자는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와 나가의 손을 꽉 잡더니 붕붕 흔들었다.



"이야~ 새로 들어온 히어로가 있다길래 어떤가 하고 와봤는데, 확실히 재능이 출중하긴 한가 보네요. 방금 전에 자동차 들어올린 거 보고 깜짝 놀랐다구요."

"아, 혹시 선배님이세요?"

"…뭐, 그렇죠."



통통 튀는 듯한 밝은 목소리가 조금은 부산스러울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그런 감정은 없었다. 정말로 자신을 반기는 듯한 얼굴에 대체 무슨 볼일이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남자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무슨 일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가는 뒤를 돌아보았다. 혜나와 사사를 뒤에 두고 앞장서서 걸어오는 다나를 보며 나가는 손을 흔들었다.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서…."

"어서 그 녀석에게서 떨어져, 멍청아!!"

"예? 그게 무슨 소…."



나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목 뒤에 있는 급소를 맞고 풀썩 쓰러진 나가의 몸을 한 손으로 붙잡아 들쳐 안아올리는 귀능의 얼굴이 싱긋 웃고 있었다.



"빨리 오셨네요."

"…당장, 그 녀석 안 내려놔?"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으득 이를 가는 다나에게 귀능은 유감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랬다간 제가 혼나서 말이죠."

"맞고 내놓을래, 그냥 내놓을래?"

"딱히 해를 끼칠 생각은 없는데,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헛소리 집어쳐."



눈 앞에서 사람을 납치하려는 주제에 정말이지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함부로 주먹을 휘둘렀다간 녀석이 데리고 있는 나가에게도 타격이 갈 우려가 있었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며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는 다나와는 달리 정말로 놀라는 이들이 있었다.



"귀능 오빠?! 정말 귀능 오빠야?"

"끼능이…?!"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혜나와 사사, 두 사람에게 귀능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엊그제 만났던 친구처럼 친근하게, 정말로 반가운 듯이.



"아, 혜나 양이랑 사사 씨네요! 오랜만이에요~."

"오빠가 대체 왜 여기 있어? 돌아온 거야? 그나저나 나가 오빠는 왜…."



정말로 놀랐는지 마구 질문을 쏟아내는 혜나와 달리 사사는 바짝 얼어 있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어도 저런 표정은 나오지 않을 것처럼. 입매를 우물거리며 잠깐 고민하더니, 귀능은 이내 답을 내놓았다.



"그게, 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잠깐 나가 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에요."



그래서 데리러 왔죠. 하하 웃고는 있었지만, 사실 좀 많이 귀찮아요- 라고 얼굴에 큼지막히 써다 붙여놓은 것처럼 귀능의 눈매가 잘게 일그러졌다. 그러면서도 귀능은 다나 쪽을 힐끔힐끔 주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는 다나의 모습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살짝 눈을 깜빡거렸다. 한 발짝 내딛으려는 사사를 다나가 팔을 뻗어 막았다.



"물러서."

"네?"

"나이프다."

"…머라꼬여?"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가볍게 경련이 일었다. 바닥에 발이 딱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건 혜나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2년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에 갑작스레 적이라는 이름표가 붙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침착하게 그를 응시하는 다나의 눈동자가 덤덤히 귀능에게 말했다.



"녀석을 내놔."

"힘으로 뺏으려고는 하지 않으시네요. 저 없는 사이에 성격 많이 죽으셨어요?"

"틀려. 지금 많이 참아주고 있는 거니까 좋은 말 할 때 내놔라."



씹어뱉듯이 내뱉는 다나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귀능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아연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가 조금은 쓰게 웃었다.



"…하여간 그 인간은 진짜 재수없다니까요."



왜 자신을 보냈나 했더니, 이렇게 될 거라 눈치를 챘던 걸까. 분명 그 인간이나 다른 사람이 왔었다면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 메두사 씨는 조금 예외라 치더라도. 묵직하게 제 어깨를 짓누르는 한 사람의 무게에 귀능은 다시금 그를 고쳐메었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도 사실 꽤 착잡한 심정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같은 눈동자와, 충격을 받아 멍해져 있는 다른 두 사람의 얼굴을 흘깃 돌아보며 귀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직은 그래도 좀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운명이란 참 얄궂네요."

"…."

"죄송해요."



그럼 안녕히.


그 말과 동시에 귀능이 바닥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게 무언지 인식하기도 전에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빛이 기습적으로 그들의 시야를 덮쳤다. 섬광탄이었다. 빛이 사라진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귀능도 나가도, 그 누구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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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기약없는 4편 ㅎㅎㅎ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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