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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님과 한 2인합작!

AU예요 고서점 손녀 마리네뜨와 부잣집 도련님 아드리앙~!!

마리네뜨가 20살이고 아드리앙이 25살입니다 ㅇㅁㅇ






[아드마리]

Buchini|st





딸랑,


맑게 울려퍼지는 방울소리와 함께, 옅은 바람 한 줄기가 열린 문틈 사이로 살랑 몸을 들이밀었다. 낡은 고(古)서점 안은 낮인데도 꽤나 침침했다. 낡은 책들을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흔한 스탠드 하나 설치되지 않은 가게 내부는 소리 하나 없이 적막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양 옆으로 보이는 책장들에 책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바닥을 밟으니 끼익 울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발을 내닫자마자 시원한 나무 향기와 낡은 종이 냄새가 섞인 듯한 독특한 향내가 코끝에 훅 번져왔다.


서점 안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정갈했다. 연갈색의 책장들과 선반 사이사이로 빼곡히 채워진 책들은 낡았지만 꽤나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고, 보기에 딱히 거슬린다 싶은 물건들도 없었다. 사실 책들 말고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갈빛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그 책상에 앉아있는 건 검은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였다. 안이 상당히 어두웠음에도, 바로 등 뒤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소녀의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었다. 책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꽤나 숙녀티가 나는 소녀였다.


평상시처럼 손님이 왔나 싶어 인사를 건네는 소녀의 목소리가 명랑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대꾸하는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살짝 어려 있엇다. 고작 인사를 했을 뿐인데, 마치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것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단번에 소녀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듣기 좋은 목소리는 마치 햇살같았다. 햇살을 담아놓은 듯한 따스함이 깃든 목소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소녀의 푸른빛 눈동자가 저를 부른 상대를 마주했다. 어두운 책장 사이를 걸어 소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선 남자의 머리카락은 햇빛으로 물들인 것만 같은 찬란한 금빛이었다. 그 목소리만큼이나.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지는 녹색 눈동자에 소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혹시, 주인 안 계십니까?”

“할아버지라면, 어. 지금은 일이 있어서 안 계세요. 근데….”



누구세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물어버리고, 소녀는 낭패라는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소녀가 귀여웠는지 남자는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청량하게 울리는 웃음소리에 소녀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 미안해요. 그 한 마디와 함께 남자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소개를 건넸다.



“아드리앙. 아드리앙 아그레스트라고 해요. 그쪽은?”



싱긋 웃는 그 시선에 소녀는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마주 웃어주었다.



“마리네뜨. 마리네뜨 뒤팽 쳉이에요.”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



“안녕, 마리네뜨?”

“꺄악!”



책장에 책을 꽂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는 마리네뜨의 손가락 사이로 책이 우르르 떨어졌다. 낭패라는 얼굴로 제 발밑을 한 번, 제 앞에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아드리앙을 한 번 흘겨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아 떨어진 책을 주워담기 시작했다. 힐끔 눈치를 보던 아드리앙이 살금살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책을 다 주운 뒤 들고 일어서려는 마리네뜨의 품에서 아드리앙이 책을 한 다발 뺏어들고 멋쩍게 웃었다.



“미안,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 아니에요.”

“이거 여기다 꽂는 거지? 들고 있어줄게, 천천히 해.”



호의 가득한 미소에 마리네뜨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그녀는 예정해두었던 장소에 책들을 골라 꽂아넣기 시작했다. 어느 새 자신의 존재는 잊어버린 듯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아드리앙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그가 간간히 말을 걸었다.



“이번엔 어떤 책들이야?”

“오래된 고전 문학들이요. 꽤 괜찮은 것들이 들어와서요.”

“표정 보니까 신난 게 보이네. 나도 좀 봐봐도 돼?”

“잠시만요, 이거 좀 마저….”



책을 집어들려던 마리네뜨의 손가락이 아드리앙의 손끝에 살짝 닿았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내다가, 이내 어색한지 하하 웃으며 눈치를 보는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 아니요! 하하하. 아그레스트 씨가 좋아하실 만한 책은 이런 거려나요?”



허둥지둥 책장을 뒤져 무언가를 꺼낸 뒤, 책을 두 손으로 들고 그에게로 확 내미는 마리네뜨의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그에 멀뚱멀뚱 눈만 깜빡거리다, 고맙다고 답하며 책을 받아드는 아드리앙의 목소리에 마리네뜨의 귓불이 새빨개졌다. 지금 고개를 들면 분명히 들킬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차마 움츠린 얼굴을 들지 못하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읽어볼까.”



그 말과 함께 아드리앙은 책상 바로 옆 바닥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깨끗이 관리하려고 노력하지만 빈말로라도 깨끗하다 보기 힘든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주저앉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입고 있는 옷부터가 꽤 비싸 보이는데.


아드리앙이 앉아 있는 자리를 돌아서 책상으로 다가간 마리네뜨가 가만히 의자에 걸터앉아, 제 바로 옆에 내려앉아 있는 아드리앙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언제 봐도 잘생겼다. 몇 번을 봤는데도 변하지 않는 감상평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몰래 한숨지었다.



“내가 와서 막 불편한 건 아니지?”

“…네?”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몇 초 뒤 마리네뜨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뇨, 단골손님을 싫어할 리가!! …늘 찾아와주셔서 감사히 여기고 있는 걸요.”



진심이었다. 애초에 거의 혼자 있는 장소였으니까. 그게 별로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자주 찾아와줘서 즐거운 건 사실이었다.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의 마음이 이런 걸까. 이러다가 어느 날 오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서운할 거 같은데.


마리네뜨의 대답에 아드리앙은 살짝 책상 옆쪽에 머리를 기대고서 웃었다. 들썩거리는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책상이 살짝 떨렸다.



“하하, 다행이네. 내가 죽치고 앉아있어서 민폐인 건 아닌가 했는데.”

“원래 손님은 잘 없는 걸요. 이런 허름한 고서점을 계속 찾으시는 건 아그레스트 씨 정도밖에 없어요.”

“뭐야, 그 말은 내가 괴짜란 건가?”

“그럴지도요.”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바로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웃음도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살짝 열어둔 창문 너머로 바람들이 불어와 커튼을 휘날렸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지 싸한 공기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지만, 곧 부드럽게 내리쬐는 햇살에 닿아 부서졌다. 상아색으로 옅게 내려앉은 햇빛이 말없이 책에 집중하는 두 사람의 주변으로 길게 늘어졌다. 햇빛의 그림자처럼 시간도 천천히 흘러가는 듯했다.


저 멀리서 흐릿하게 번지는 소리만이 간혹 들려오는 것을 제외하면 무척 조용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되어 군데군데 벗겨진 연갈빛의 나무 책장들이 조용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각사각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느릿느릿 지나가는 침묵을 조용히 깨부순 건 아드리앙의 목소리였다.



“역시 여긴 편하다니까.”

“…그래요?”

“응, 뭔가 안정되는 느낌이야.”



좋다. 그 말 한 마디와 함께 아드리앙은 살짝 고개를 들어 마리네뜨를 올려다보았다. 애써 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마리네뜨가 저도 모르게 아드리앙을 힐끗 돌아봤다가 후다닥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 마리네뜨를 보고 귀엽다는 듯이 작게 웃다가 아드리앙은 다시 종이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저도 그래요.”

“응?”

“여기를 좋아해요. 그냥, 여기의 분위기가 좋아요. 좀 밀폐되어 있긴 하지만 조용하고 아늑하고, 낡은 나무 냄새가 기분 좋기도 하고.”



처음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손에 자주 끌려왔었지만, 철없던 소녀는 사실 책들보다는 서점 내부에 맴도는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되었었다. 어린 소녀에게 높이 솟은 책장들은 몹시도 거대했고, 하나밖에 없는 창문 틈새로 내비치는 햇빛은 스포트라이트를 연상시켰다. 책장들 사이를 걸어서 그 쪽으로 향하는 걸음걸음이 그리 길게 느껴졌더란다.


그렇게 이곳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실 학기 중에는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반겨주는 할아버지의 미소를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할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야 여기로 돌아오게 되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피식 웃던 마리네뜨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 그녀는 무심결에 말을 꺼냈다.



“아그레스트 씨는, 어쩌다 여길 오게 된 거예요?”

“응? 나?”

“네.”



용기내어 묻자, 아드리앙은 잠시 고민하더니 싱긋 웃었다.



“나, 어릴 적에 큰 병을 앓았던 적이 있어.”

“네?”

“그래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하늘만 바라봤었어.”

“설마.”



지금 그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인다. 혈색도 좋고 어디로 보나 건장한 성인 남자의 몸이다. 놀라는 마리네뜨의 반응을 짐작했는지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야. 그래서 그 때는,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바라지 못했지. 동무라고는 비서가 가져다주는 책 한 권 정도. 모르긴 몰라도 우리집 서재에 있던 책들은 전부 다 읽었을걸?”

“그렇구나….”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의 표정이 꽤나 어둡다.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난처하다는 듯이 눈동자를 위로 굴리던 아드리앙이 가만히 입을 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여기는 정말 우연히 발견한 곳이야.”



찰나의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얼마 안 가서 잊어버렸을 법한, 아주 작은 호기심.



“구석에 있길래 뭐 별 거 있겠냐 싶었는데, 들어와보니 이거 참 신세계더라구. 재밌는 책도 많고 주인 할아버지도 좋은 분이고. 주인 어르신이랑 얘기를 나누다보니 고서에도 흥미를 가지게 됐고.”



그러던 게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간다. 마리네뜨와 만난 건 한 달 전쯤이다. 늘 반겨주던 할아버지가 아닌 웬 어린 소녀가 있는 걸 봤을 때는 솔직히 조금 놀랐지만, 그는 이건 이것대로 좋다고 생각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대를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니까. 특히 그에게는.



“그러다가 널 만난 거지.”



제 손을 가만히 그러잡는 따뜻한 온기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시선에 차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조용히 물었다.



“마리네뜨. 무슨 일 있어?”

“네? 무슨….”

“시치미 떼지 마. 무슨 일 있는 거지?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잖아.”



말해봐.


뒤돌아 앉은 아드리앙은 다른 한 손도 뻗어 마리네뜨의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커다란 손은 무척 따뜻했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는 꿀을 발라놓은 듯이 부드러웠다. 나른해진다 싶을 정도로 편안한 울림에 기분이 편안해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저를 향하는 시선이 무척이나 상냥해서 마리네뜨는 어느 샌가 더듬더듬 담아두었던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사실 할아버지가 좀 걱정돼요.”

“역시 그거였구나.”

“요즘 병세가 좋지 않으시대요. 조만간 다시 병문안을 가봐야 알 거 같긴 하지만….”

“그래.”



주인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 서점을 무척이나 아끼시는 어르신이 손녀라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맡길 정도니 심각하리라는 것도 예상했었고.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모습이 지적이고 멋진 분이셨는데, 언젠가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뼈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초췌해지신 모습에 놀란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저를 웃으며 반겨주시는 모습에 멍해졌었다. 무언가가 속에서 왈칵 치솟는 느낌이었다. 남인 저도 이런데 손녀인 그녀는 오죽하겠는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울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마리네뜨가 안타까워서, 아드리앙은 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런 아드리앙의 마음을 아는지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이다가, 기어코 말을 꺼냈다.



“아그레스트 씨.”

“응?”



왜? 그렇게 묻는 듯한 아드리앙의 녹색 눈동자를 보며, 마리네뜨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이 고서점이요. 할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어요.”

“응.”

“저는 방학중이라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만, 학기가 시작되면 대학으로 돌아가야 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마 여길 관리해줄 사람도 사라지겠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아드리앙의 표정이 조금, 아주 조금 변했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이 고서점이 사라져도, 나와 할아버지를 기억해 줄래요?”



아드리앙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청명하던 하늘 위로 비구름이 끼더니, 지면에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천천히 떨어지던 빗방울은 곧 세찬 빗줄기가 되어 맹렬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겨울이라 그런지 제법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쏟아지니 공기는 마치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거리, 낡은 고서점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우산을 쓰고 멍하니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OPEN]이라 쓰여져 있는 팻말을 가만히 쳐다보던 남자가 살짝 제 손을 문에 가져다댔다. 끼익, 소리가 오늘따라 음산하게 울리며 문이 열렸다. 재빨리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고, 우산을 접어 한쪽에 놓여져 있는 통에 담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가 와서 그런지 안은 한층 더 어두웠다. 내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리네뜨?”



있어? 가만히 부르는 목소리에 답하듯 저쪽 구석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왜 대답이 없지? 의아한 마음에 아드리앙은 천천히 걸어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갔다.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에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섬뜩해진다.


가까이 다가가니 마리네뜨는 늘 앉아 있던 의자에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반갑게 부르려고 했지만, 어둠에 눈이 익자 아드리앙은 제 눈앞에 보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알아보고 흠칫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었다. 아니, 어두웠기에 더 눈에 띄었던 건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마리네뜨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착잡하게 내뱉어지는 한 마디에 아드리앙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마리네뜨는 피식 웃었다. 당장 본인이 죽을 것만치 초췌한 얼굴이면서, 그녀의 말투는 의외로 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감정이 메말랐다 싶을 정도였다.


덜컹, 소리를 내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 속에 얼마나 있었는지 마치 밝은 곳에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아, 맞다. 말씀하셨던 책이요, 어젠가 그제 들어왔더라구요. 지금 가져다 드릴게요.”

“….”

“되게 재밌을….”



왈칵 쏟아지려는 감정을 눌러가며 마리네뜨는 애써 밝게 웃었다. 이상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눈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뜨뜻한 무언가에 마리네뜨는 아무렇지 않은 척 눈물을 훔치며 씩씩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커다란 손이 마리네뜨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두 팔로 자신을 놓칠세라 조심스레 끌어안고 있는 아드리앙을 마리네뜨는 밀쳐낼 수도, 뭐라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입을 열면 무언가 터질 것 같은 예감에.



“괜찮아. 그런 것쯤은.”



상냥하게 등을 토닥거리는 아드리앙의 손길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안 돼. 아니야, 버텨, 버텨야 해. 지금은 안 돼. 적어도 이 사람이 떠나고 나서, 그 후에…. 아직은 괜찮아.


울지 마.



“힘들 때는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는 게 최고야. 내가 아팠을 때도 그랬거든.”



그런 마리네뜨의 생각을 읽었는지, 아드리앙은 담담히 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난 늘 아프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여 살았어. 그래서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었지. 그런데 어느 날은 너무 울고 싶은 거야. 서러워서.”



왜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걸까. 왜 여기에 이러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새장 속의 새처럼, 갇혀져 있어야만 하는 인생은 지긋지긋한데. 하지만 울면 내가 너무 불쌍해지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울 수 없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처음으로 아이처럼 막 울었는데, 웃긴 건 울고 나니까 오히려 속이 후련해지더라고.”



나를 가뒀던 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밖에, 내 아집밖에 없었던 작은 세계가 처음으로 부서졌던 순간. 똑똑히 기억한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처음으로 구원받았다 느꼈던 그 때의 감정을, 그 벅차던 순간을.



“마리네뜨, 자. 여긴 나랑 너뿐이잖아. 아무도 없어. 누구도 널 보지 못할 거야.”



물론 나도.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 셔츠를 적셔가는 무언가를 느낀 아드리앙이 작게 미소지었다. 조금씩 새어나오던 흐느낌이 어둠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더니,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와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 이따금 창문께서 번쩍이는 번개가 어스름한 서점 내부를 살짝 엿보았다. 계속해서 울고만 있는 마리네뜨를 토닥이는 아드리앙의 손길은 부드러웠고, 그에 그녀는 더욱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보지 않겠다는 말을 지키려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 쪽만을 바라보는 아드리앙의 눈매가 살짝 곤란하다는 듯이 찡그려졌다. 안절부절 못하는 거 같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실 지금 마리네뜨를 끌어안은 손이 자꾸 떨리려고 하는 걸 자제하는 것만도 좀 벅찼다. 폭주하면 안 된다. 안 돼. 몇 번이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진정하기 위해서.


한참을 울고 난 뒤 좀 진정이 되었는지 마리네뜨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저기, 저기요.”

“응.”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미친 걸까요?”

“….”

“여기가 사라지는 것도 싫은데….”



당신을 만나게 되지 못하는 게 더 슬퍼요.


차마 그 말까지는 꺼내지 못하고 꿀꺽 삼켜버린 마리네뜨의 입술이 꾹 닫혀 있었다. 아드리앙에게 꼭 안긴 상태로, 옷깃을 꽉 붙잡고 있던 마리네뜨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얼 그리도 두려워하는 걸까. 잠깐 무언가 고민을 하는 듯하던 아드리앙은 이내 결심한 듯이 말을 꺼냈다.



“마리네뜨, 나한테 올래?”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몰랐다가, 다음 순간 그 의미를 알아들은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마리네뜨의 시선이 아드리앙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눈동자가 퍽 진지했다.



“내가 여기를 살게. 그리고 너를 고용하는 거지. 나는 언제나처럼 가끔 여기를 찾아오고, 너는 여기서 일하다가 나랑 같이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때?”

“…네? 어…?”



혼란스러운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자신만 멀뚱히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표정에 아드리앙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예상했다는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며 그는 짐짓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이거 섭섭한데. 이래뵈도 나름 고백하는 건데 반응이 너무 싱거운 거 아니야?”

“고백이요…?!”

“…싫어?”

“아, 아니요.”



기뻐요.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 마리네뜨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전히 혼란스러운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마리네뜨에게 그는 굳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마리네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를 좋아하세요?”

“응.”

“…왜요?”

“좋아하니까.”



담백하게 이어지는 고백에는 어떠한 미사여구도 없었다. 그만큼이나 직접적이고 꾸밈없이 다가오는 진심에 마리네뜨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이런 전개가 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지만, 그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한다.


자신도, 이런 식으로 프로포즈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말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을 뿐.



“하지만…,”

“응?”

“하지만, 저로 괜찮으시겠어요? 아그레스트 씨 정도면 분명 더 좋은 여자가 많을 거고…, 저는 아직 어리고….”

“응, 그럴지도 모르지.”



역시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마리네뜨의 눈빛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침착하려고 애쓰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리네뜨는 씁쓸한 듯이 말을 꺼냈다.



“그렇죠, 역ㅅ….”

“하지만 나는 네가 좋은걸.”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 행복하다고 느꼈던 건.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원래 여기로 걸음할 때도 즐거웠지만 너를 만나고 나서 몇 배는 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나를 향해 웃어주는 네 미소가 좋았고,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설레기 시작했었다.


알게 된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빠져버린 걸까.



“세상에 여자가 많으면 뭐해. 내가 좋아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되잖아?”

“….”

“너는 어때?”

“네?”

“정말 나로 괜찮은 거야?”



진지하게 말하는 아드리앙의 얼굴을 마리네뜨는 넋나간 듯이 쳐다보았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한 상대가 아닐지도 몰라. 일단 봐. 지금 나, 제가 약해졌을 때를 파고들고 있는 거라고. 무지 비겁하잖아?”

“…아그레스트 씨.”

“이름.”

“네?”

“아드리앙이라고 불러줄래?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성은 너무 딱딱하니까. 살짝 볼멘소리로 말하는 아드리앙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진지해서 마리네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만을 벙긋거렸다. 그는 마리네뜨를 놓아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대답은?”



장난스레, 하지만 꽤 초조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아드리앙을 향해 마리네뜨는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요!”



그 한 마디를 던지는 것과 동시에 마리네뜨가 도전적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든 순간 그들의 등 뒤로 번쩍 번개가 떠올랐다. 아드리앙의 놀란 얼굴과 더불어, 환하게 보여진 마리네뜨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그걸 본인도 깨달았는지,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푸욱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뺨을 두드리는 마리네뜨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아드리앙이 갑자기 팔을 벌려 다시금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우앗! 짧게 비명을 내지르며 끌어안겨진 마리네뜨와 달리, 아드리앙은 작게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 안 되겠어.”

“어, 저기….”

“넌 너무 귀여워.”

“예에?!”



이게 웬 쌩뚱맞은 소리란 말인가. 맥락을 이해할 수 없어 그저 당황하고만 있는 마리네뜨와 달리 아드리앙은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내가 고생하는 모습이 보이는 거 같다. 후우.”

“그게 무슨?”

“뭐, 몰라도 돼. 일단 지금은 이러고 있자.”



비가 그칠 때까지는. 그렇게 말하며 토닥토닥 제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이더니, 몇 번을 멈칫거리다 조금씩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등을 살짝 끌어안자, 그에 좀 놀랐는지 순간 멍해졌던 아드리앙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더 이상의 대화가 오가는 일은 없었다. 그도, 마리네뜨도 눈을 감고 말없이 서로 끌어안고만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애잔하게.

내리는 비가 그칠 때까지.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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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hini|st] 제목의 뜻은 루마니아어로 ‘고서점 점원’을 뜻합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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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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