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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일단 이 영상을 일단 봐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FlwV3scCgAM


보셨으면, 시작합니다!





<porte ouest - 서문>









Episode 1.

내 이름은 레이디버그!






“으앗!”



위험했다! 넘어질 것처럼 중심이 기울어졌지만, 소녀는 간신히 한 발로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소녀는 뒤로 홱 고개를 돌려 방금 발에 채였던 작은 돌멩이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필 하고많은 돌멩이 중에 제 발 밑으로 굴러오다니. 하마터면 바닥과 열정적인 키스를 하게 될 뻔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한참을 돌멩이를 쳐다보던 중, 소녀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힘없이 풋 웃었다.


됐어,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몇 번 깜빡였다.



“어서 가야지.”



다시 돌아서 한참을 걸어가자, 회색 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살짝 울퉁불퉁했던 길이 끝나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길이 나타났다. 갈라진 틈들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물이 고이지 않던 먼젓번 길과 달리 이제 막 보이기 시작한 길들 주변에는 커다란 물웅덩이들이 퍼져 있었다. 길가에 드문드문 자리한 웅덩이 위로 빠르게 걸어가는 소녀의 모습이 간간히 반사되어 보였다, 사라진다. 하얀 블라우스 위에 짙은 남색 자켓을 걸치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청바지를 입은 소녀의 손에 들린 붉은 우산이 특히 인상적이다. 하얀 구름이 옅게 번진 푸른빛 하늘이 소녀의 등 뒤로 눈부시게 반짝인다.


고즈넉한 파리의 저택과 건물들을 배경으로 소녀는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한참 골목길을 걸어가다보니 넓은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몇몇의 사람들만이 광장을 거슬러 지나가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소녀는 싱긋 웃으며 춤을 추듯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붉은 우산을 멋들어지게 움직이며 빙그르르 돌던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를 찰나,



“꺅!”



너무 빨리 돌은 걸까.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는 쪽으로 내려가던 중 발이 꼬였다. 재빨리 우산을 바닥에 짚은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소녀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늘 생각하지만 참 신기하면서 이해할 수가 없다. 천성적으로 운동신경이 없는 편은 절대 아닌데 왜 밖에만 나오면 꼭 뭔가에 발이 걸리거나 넘어질 위기에 처하는 걸까. 재수가 없어서? 아니면 덜렁대서? 그래도 이젠 익숙해져서인지 그렇게 자주 넘어지지는 않지만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손에 든 우산을 꼭 쥐었다. 어제 비가 많이 오긴 했지만 오늘은 말끔하게 개어 있는 좋은 날씨다. 그럼에도 굳이 커다란 우산을 손에 들고 다니는 소녀의 모습을 몇몇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흘깃 쳐다본다. 하지만 소녀는 역시 개의치 않았다.


광장을 지나, 다시 골목 쪽으로 접어들고,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하는 골목 끝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사거리였다. 넓은 횡단보도가 도로를 크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횡단보도 바로 앞에 서서 소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금방 초록불이 들어왔지만 길을 건너는 사람들과 달리 소녀는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힐끔거리는 소녀의 시야로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서둘러 여기까지 온 이유는 학교 때문은 아니었다. 등교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여유가 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시간에 이 횡단보도 앞으로 온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오늘은 있을까?’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지만 찾는 사람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역시 오늘도 나타나지 않는 건가, 실망할 찰나 갑자기 자동차 하나가 순식간에 소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으앗!”



촤악, 소리와 함께 바닥에 고여있던 웅덩이의 물이 크게 튀었다. 우산을 펴들 새도 없이 순식간에 소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을 가득 뒤집어쓴 생쥐 꼴이 되었다. 옷과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추욱 늘어져서 그런지 소녀는 방금 전보다 한층 더 작아 보였다. 보통이라면 짜증을 내며 욕이라도 할 텐데, 소녀는 아무 말도 없이 처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대충 옷의 물기를 짜낸 뒤, 소녀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횡단보도를 건너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소녀의 이름은 마리네뜨 뒤팽 쳉. 조금 재수가 없고, 많이 덜렁대며, 굳이 특출난 점을 찾기 어려운 보통의 여자아이다. 하지만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 선량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밝게 웃을 줄 알며, 소심하지만 한 번 정한 일에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평범한 소녀이기도 했다.


이날까지는.




///



“너 꼴이 그게 뭐야!”

“에스미.”



물에 젖은 채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리네뜨를 본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와 굽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살짝 올려 묶은 소녀의 검은색 눈동자가 총명하게 반짝거렸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반에는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성큼성큼 제게 다가오는 친구의 험악한 기세에 마리네뜨의 머리카락이 절로 쭈뼛 곤두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의 상태를 둘러보던 에스미는 한숨을 내쉬며 제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래, 오는 길에 물벼락이라도 맞았어?”

“아냐아냐, 에, 어제 비가 왔잖아? 물이 많이 고여 있는데, 차가 엄청 빨리 달려와서….”

“알 만하다. 너 또 길가에서 멍때렸지?”

“아냐! …그런 거.”



손을 휙휙 내저으며 강하게 부정하는 마리네뜨를 잠깐 응시하던 에스미는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으니 어서 옷이나 갈아입어. 그 꼴로 어떻게 수업 들을래?”

“응! 화장실 다녀올게. 체육복이….”



라고 말하는 순간 마리네뜨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가방이 어디 있지?”

“처음부터 안 들고 왔어.”

“어, 그래? 아무래도 까먹고 안 가져온 모양이네, 에헤헤.”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쉬는 마리네뜨에 에스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니, 넌?”

“그런가?”

“으이구, 일단 내 체육복 빌려줄게. 일단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옷은 대충 빨아서 말려봐. 집에 갈 때까지는 마르겠지.”



[Esmeralda Sezer(에스메랄다 세자르)]라고 적혀 있는 사물함 문을 열고 수건과 체육복을 꺼낸 에스미가 마리네뜨에게 그것을 휙 던졌다. 허둥지둥 그것들을 받아 안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에스미가 절로 혀를 찼지만 그와 별개로 시선은 퍽 다정했다.


에스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좀 모자라지만 귀여운 딸내미를 보는 엄마의 심정이란 이런 걸까.



“고마워, 에스미!”

“오냐.”



어서 다녀오라는 듯이 손을 내젓는 에스미를 뒤로 한 채 마리네뜨는 옷을 갈아입고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가며 반으로 돌아왔다. 그 때쯤에는 슬슬 등교를 시작하는지 반에 사람이 몇 명 더 늘어나 있었다. 쪼르르 자리로 와서 앉아 두 팔에 턱을 괴고 엎드리는 모습은 딱 보기에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비단 물벼락을 맞아서 그런 것만은 아닌지, 그녀는 한숨과 함께 흘리듯 중얼거렸다.



“…오늘도 없었어.”



바로 옆 사람에게나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였다. 마리네뜨의 옆, 맨 뒤 창가자리에 앉아 있던 에스미는 그런 마리네뜨를 쳐다보더니 또 시작이냐는 듯이 심드렁하게 맞받아쳤다.



“뭐가? 아, 니가 찾고 있다던 그 남자애?”

“으응….”





일주일 전쯤이었나.


2학기가 시작하던 날 아침, 마리네뜨는 언제나처럼 졸린 눈을 비비며 등교를 하고 있었다. 파리의 중심부라 그런지 꽤 이른 시간에 나왔는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물론 등교시간에 딱 맞춰가면 더 많이 잘 수 있겠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그다지 좋았던 기억이 없는지라 마리네뜨는 최대한 일찍 일어나서 학교를 가곤 했다.


그 날도 그랬었다. 익숙하게 걸어다니던 길들을 지나 횡단보도 앞에 서서 건널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파리의 도로는 혼잡하기로 악명이 높다. 학교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기에 망정이지, 오죽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승용차보다 편할 정도였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자니 절로 피곤이 몰려왔다.



“하암….”



졸려. 계속 하품을 하는 마리네뜨의 눈에는 졸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개학 전날은 꼭 잠을 설치곤 했는데 그날따라 좀 많이 긴장했던 것 같다. 이번 학년에는 단짝친구가 생겨서 학교가는 게 조금은 더 즐거워지긴 했지만, 오랜 습관이란 쉽게 고쳐지지 않는 악우와도 같았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얌전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자니 더욱 졸렸다. 그래서인지 마리네뜨는 어느 새 제 뒤에 누군가 서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학교에 가서 자야겠다는 생각에 마리네뜨는 신호가 들어오자마자 도로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엇?”



그 순간, 뒤에서 강한 힘이 마리네뜨의 책가방을 붙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런 끌려감에 무슨 짓이냐고 말하려던 찰나,


빵빵-.


승용차가 클락션을 울리며 바로 눈앞을 스쳐갔다. 빠른 속도로 자신을 지나쳐 순식간에 저 멀리에 보이는 자동차에 마리네뜨의 눈이 번쩍 터졌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었다. 구해준 건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서 있던 것은 소년이었다. 금발에 무뚝뚝한 인상을 가진 남자애. 얼굴만 봐서는 제 또래처럼 보였지만 단정한 정장차림에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 때문인지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책가방 위쪽 끈을 잡고 있던 소년의 청회색 눈동자가 지긋이 마리네뜨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괜히 뻘쭘해진 마리네뜨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시선을 피했다. 이상하게 얼굴이 더웠다.


어라, 내가 왜 이러지?



“아, 감사합니다.”



부랴부랴 인사를 건네자 소년은 알겠다는 것처럼 가만히 책가방에서 손을 떼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휙 돌아서서 길을 건너는 소년의 뒷모습을 마리네뜨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두근, 두근, 조용히 박동치는 심장소리가 온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딱히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숨이 막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저, 저기…!!”



이미 멀어진 소년을 쫓아갔지만 소년은 이미 불어난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로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어서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가서 기다렸지만 모두 허탕을 친 상태였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일주일 내내 기다렸는데도 안 보여어어어어….”



팔을 쭉 뻗은 채로 책상에 고개를 콕 박고 바르작거리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에스미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게 이름이라도 물어보지 그랬어. 목소리도 모른다며?”

“그러게. 마리네뜨 이 멍청이! 난 정말 바보야!! 왜 그때 말을 안 하고 멍을 때려서!”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 그래봤자 다시 돌아가서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찾을 생각을 해야지.”



심드렁하게 대답을 던지는 친구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들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에 에스미는 풋 웃으며 마리네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예 이쪽으로 지나다니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날만 어쩌다보니 이쪽 횡단보도로 왔다던가….”



에스미가 하는 말을 듣자마자 마리네뜨는 벌떡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어떡해? 이대로 못 찾는 걸까?”

“아니, 이건 가능성일 뿐이니까. 의외로 우리 학교 학생일지도 몰라. 그 횡단보도에서 우리 학교까지 10분밖에 안 걸리니까. 게다가 개학식 날이었기도 하고. 생김새가 어땠는데?”

“어…. 일단 금발에, 검은색 조끼랑 회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더라. 넥타이도 맸던 거 같고….”



손가락을 접어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질문했다.



“켁, 완전 어른이나 입을 거 같은 드레스코드인데? 우리 또래이긴 한 거야?”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진 않았어. 표정은 무뚝뚝했지만….”



잘 웃지 않는 것 같았지.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보는 에스미의 눈동자에 걱정이 들어찼다. 반응에서 대충 짐작이 가긴 하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근데 걔는 왜 그렇게 찾아? 정말 반한 거야? 이런 참견은 좀 그런가 싶긴 하지만, 좋아할 상대는 신중하게 골라.”



넌 진짜 간이고 쓸개고 다 퍼줄 거 같아서 걱정이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게 걱정임을 모르지 않기에, 마리네뜨는 헤헤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글쎄, 반했나?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런 거겠지?”

“…일주일 내내 사람 찾겠다고 쇼하는 게 단순히 인사나 하자고 하는 짓은 아닐 거 아니냐.”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소년이 무뚝뚝한 건 사실이었다. 말을 하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는 것도 없었고, 얼굴에도 표정이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리네뜨는 소년이 분명 겉보기만큼 차가운 성격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애초에 자신을 도와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 애, 왠지 상냥할 거 같았거든.”



수줍게 웃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에스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오는 거야?”

“보이는 게 다는 아니잖아. 잠깐 본 사람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만…. 하긴 일단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꼭 다시 만날 거야! 내일도 일찍 나가야지.”

“계속 그러게?”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럼 일단은 계속 해봐야지.”



꼭 찾고야 말겠다고 다시 전의를 불태우는 마리네뜨의 모습은 또 묘하게 귀여워서, 에스미는 결국 피식 웃으며 마리네뜨의 머리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래, 그래. 힘내라.”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늘도 역시 허탕인가. 하교하면서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 찾지 못했다. 비슷한 외양의 사람은 몇 명 봤지만 다들 아니었다. 하긴, 금발은 꽤 흔하기도 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한참을 걷던 마리네뜨는 어느 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빵집인지라 문 너머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그냥 들어가려다 여느 때처럼 힐끗 눈을 돌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마리네뜨는 흠칫했다.


너무 우울해 보이나?


으음, 입을 우물거리며 난처하다는 듯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던 마리네뜨는 주변을 슥슥 둘러보다가 재빨리 표정을 점검했다. 검지손가락들로 입꼬리를 크게 밀어올리고 즐거운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집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빵 냄새라던가.

그렇게 몇 번 웃는 연습을 하다가, 괜찮다 싶어지자 마리네뜨는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우리 딸~”



카운터에 앉아서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어머니에게 마리네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응!! 엄마, 나 일단 빨래 좀 해도 될까? 옷이 좀 젖어서.”

“그래. 아, 마리네뜨. 미안한데 올라가는 김에 다락방에 가서 둘둘 말린 천 있지, 그것도 좀 같이 꺼내다 줄래?”

“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맨 처음 보인 물건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책가방이었다. 요즘 진짜 정신이 없긴 했나 보다.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은 들고 가고 가져가야 하는 책가방은 놓고 오다니. 그 전날 비가 와서 쫄딱 젖어야 했던지라 오늘도 혹시 그럴까봐 챙겼던 건데 결국 비는 오지 않았다. 한숨을 쉬었다.


난 왜 맨날 이 모양이지.



“천이 어디에 있더라…?”



석양이 지고 있는지라 다락방은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애초에 방에 전등이 없는지라, 곧 밤이 되면 손전등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빨리 물건을 찾아서 나가자는 생각에 방 안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마리네뜨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저 빛은…?”



창문 밑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뭐지? 의아한 마음에 빛이 있는 장소로 다가가자, 마리네뜨는 곧 그 빛이 작은 보석함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이하게 생긴 문양들이 잔뜩 그려져 있는 육각형의 상자였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함을 열어보았다. 



“귀걸이네.”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점이 다섯 개 찍혀 있는 귀걸이 한 쌍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대려는 순간,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공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여든 빛 한가운데서 나타난 것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무언가였다. 



“꺄아아아악!!”



뭔지도 모를 붉은색 생명체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은 마리네뜨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비명을 토해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기겁해서 손발을 바둥거리며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마리네뜨에게 ‘그것’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마, 말을 해!! 벌레? 쥐? 아니, 이상하게 생겼는데 아무튼 무, 무기! 파리채!!”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횡설수설하며 마리네뜨는 두 손을 마구 휘둘렀다. 패닉 상태에 빠진 마리네뜨를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괴상하게 생긴 - 최소한 마리네뜨는 그렇게 생각했다 - 작은 생명체는 입을 열었다.



“잠깐만! 내 말 좀 들어줘! 무서워하지 마. 난 네 친구야.”

“친구…?”



침착하고 낭랑한, 또래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정말로 친구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마리네뜨는 동작을 멈췄다. 그제서야 조금 여유가 돌아왔는지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느낌에 눈이 꽤 컸다. 자세히 살펴보니 붉기만 한 게 아니라 점점이 박혀 있는 검은 점들도 눈에 띄었다. 무언가가 연상되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이던 찰나 밑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네뜨, 무슨 일이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얼버무린 뒤 마리네뜨는 방금 뱉어낸 말에 경악해서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왜 그랬지? 그냥 엄마를 불러야 했는데! 저렇게 작아도 위험한 생물일지 어떻게 알아? 막 닿으면 치명적인 병에 걸리는 바이러스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분명 말을 했는데? 말하는 거 보니까 괜찮아 보이긴 했는데….


목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힐끔 돌아보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말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아니야. 근데 너는….”

“아, 내 소개를 안 했구나.”



마리네뜨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녀’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는 티키라고 해. 너는 이름이 뭐니?”

“아, 안녕? 나는 마리네뜨야. 마리네뜨 뒤팽 쳉.”

“마리네뜨라니, 예쁜 이름이구나.”

“고마워…, 는 넌 대체 누구야?”

“나는 티키(Tikky).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를 수호하는 요정이지.”

“요정…?”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상황들이 바로 눈앞에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마리네뜨는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아얏! 비명과 함께 얼얼한 뺨을 한 손으로 감싸쥐고 마리네뜨는 얼떨떨한 눈동자로 다시 한 번 티키를 돌아보았다. 사라지지 않는 티키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다시금 눈을 깜빡거렸다.


꿈이 아니네?



“마리네뜨. 내가 하는 말들이 믿기지 않겠지만, 부탁이 있어.”

“부탁?”

“세상에 곧 위기가 찾아올 거야. 레이디버그로 변신해서 세상을 지켜줬으면 해.”

“레이디버그? 그게 뭔데?”



제법 진정이 되었는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질문하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생긋 웃으며 공중을 한 바퀴 돌았다.



“네가 열었던 보석함 속에 들어있는 귀걸이! 그게 바로 레이디버그로 변신할 수 있는 기적의 돌, 미라큘러스야.”

“미라큘러스?”

“이걸 사용하면 히어로로 변신할 수 있어. 한 번 해볼래?”



티키는 재빨리 잡동사니들 사이에 들어 있던 보석함을 꺼내 마리네뜨 앞에 밀어놓았다. 붉게 반짝거리는 귀걸이를 머뭇거리며 집어든 마리네뜨가 천천히 그것들을 귀에 끼웠다. 여전히 망설이는 듯한 마리네뜨와는 달리 티키는 발랄한 목소리로 주문을 알려주었다.



“변신! 이라고 외치면 돼.”

“벼, 변신? 으아앗!”



귀걸이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마리네뜨의 온 몸을 덮었다. 빛이 사라지고 나자 바뀌어 있는 제 모습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전체적으로는 붉은 바탕에 검은색 점들이 알록달록하게 찍혀 있는 타이즈 차림에, 머리에는 바닥까지 끌릴 법한 긴 붉은색 끈들이 양갈래로 묶여 있었다. 눈가에 느껴지는 무언가의 감촉에 얼굴을 더듬어보니 가면이 만져졌다. 가면에 손을 대고 잡아당기자마자 다시 번쩍 빛이 일더니 마리네뜨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시 나타난 티키가 주의를 주었다.


“안 돼, 마리네뜨! 가면을 벗으면 변신이 풀리고 말아.”

“변신이 풀리면 안 좋은 거야?”

“당연하지. 누구에게도 정체를 들켜서는 안 돼. 미라큘러스의 존재가 알려지면 분명 많은 악당들이 이걸 노리고 널 습격할 테니까.”

“이게 그렇게 대단해? 이런 쫄쫄이 하나 입혀주는 귀걸이가 대체 뭐가 좋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단순히 옷만 바꿔입은 게 아니야. 다시 변신해서, 허리에 차고 있는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봐.”

“물건?”

“그래, 아무거나 생각나는 걸 상상해서.”



티키의 말대로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변신을 외쳤다. 다시금 레이디버그의 모습으로 변한 뒤 무엇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차, 그녀는 다락방 구석에 굴러다니던 요요를 발견했다. 가방에 손을 넣자마자 손 안에 꽉 차게 들어오는 동그란 무언가를 느끼고 레이디버그는 손을 뺐다.


천천히 손을 펴자, 검은 점들이 박힌 붉은색 요요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기도 잠시 레이디버그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꺼내래서 꺼냈는데,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거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일단 포기하고 다시 변신을 풀자 티키가 질문을 던졌다.



“방금 꺼낸 물건은 뭐야?”

“요요를 모르니? 이건 이렇게 줄을 달아서 늘렸다, 줄였다 하는 물건이야.”



구석에 있던 요요를 가져와 시범을 보이니 티키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은 선택이야. 싸울 때 상대를 붙잡을 수 있고, 도시를 돌아다니기에도 좋을 거 같아.”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결국 항복했다는 듯이 마리네뜨는 한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



“저기, 일단 설명을 좀 해줄래…? 대체 이게 뭐야?”

“아, 내가 설명을 안 했구나. 마리네뜨. 변신한 뒤에 네가 차고 있는 가방은 마법 상자야. 거기에 손을 넣으면 네가 원하는 무언가를 그 안에서 꺼낼 수 있어.”

“진짜?!”

“응, 대신 한 번 물건을 꺼내면 그 물건을 다시 집어넣거나 부숴질 때까지 다른 물건을 꺼낼 수 없으니까, 그것만 주의해주면 돼.”



상냥하게 설명해주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다시금 질문했다.



“근데 아까 말한, 세상을 지켜달라는 게 무슨 말이야?”





“무리무리무리무리!”



손과 고개를 붕붕 내저으며 온 몸으로 거절 의사를 표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라큘러스(Miraculous). 신비한 힘을 가진 기적의 돌. 각 돌마다 상징하는 의미가 있으며 돌을 수호하는 요정이 곁에 붙어 있다. 세상에 위기가 닥칠 때, 즉 미라큘러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한 시기에 요정들은 주인을 찾아 깨어나게 된다. 미라큘러스의 주인으로 선택된 이들은 요정들과 미라큘러스의 힘으로 굉장한 능력을 지닌 능력자로 변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리네뜨가 발견한 레이디버그가 상징하는 능력은 ‘행운’. 놀라운 방어력과 더불어 입기만 해도 비약적으로 신체능력이 상승하는 수트, 온갖 필요한 물건들을 꺼낼 수 있는 마법 가방 등이 ‘레이디버그’가 가진 능력의 일부였다.


여기까지가 티키의 설명이었고,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네뜨는 그런 역할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발견한 건 그저 우연일 뿐이야. 난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평범한 소녀라구. 나 같은 애가 대체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겠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팔로 X자를 그리면서 중얼거리는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자조하듯이 흐리게 번졌다.



“난 솔직히 별로 잘 하는 것도 없고, 늘 실수투성이에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아. 이런 내가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악당이랑 싸우겠어? 애초에 네가 상징하는 능력이 행운이라며? 난 운이랑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구.”

“마리네뜨, 그렇지 않아. 넌 선택받은 아이야.”

“그러게. 요정을 만나는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 평생의 운을 너와의 만남에 다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야.”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씁쓸한 체념이 감돌았다.



“나를 선택했다고 해준 건 기쁘지만….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걸.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도….”

“너라면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내 눈은 정확하다구.”



어떻게든 마리네뜨를 달래려는 티키의 노력에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이는 듯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역시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나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찾는 거 도와줄게. 물론 대신할 사람을 찾은 후에는 너에 대한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고. 그걸로는 안 될까?”

“마리네뜨….”



간절하게 쳐다보는 티키의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커다란 눈이 안 된다고, 다시 생각해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애절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제 성격을 살짝 원망하면서 마리네뜨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일단 생각할 시간을 줄래? 당장 결정할 만한 문제는 아닌 거 같아.”




///



“하아….”



길고 긴 하루가 끝나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마리네뜨의 발걸음은 평상시보다 느리고 무거웠다. 터벅터벅 시내의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얼굴에는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마리네뜨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은 평범한 소녀였을 뿐인데, 지금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자리를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니. 하룻밤 사이에 변한 자신의 처지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영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상황이 정말 현실에서 벌어지다니. 사실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을 반겨주는 티키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꿈으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건지가 궁금하다. 옛날부터 정말 운이라곤 없지 않았던가. 밖에 나가면 열에 아홉은 꼭 넘어지거나 문제가 생긴다. 사소하게 음료수를 엎지르는 것에서부터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으르렁거리는 개한테 쫓겨다니게 되거나 그도 아니면 시비가 걸리거나, 아무튼 무척 다양했다.


허리 옆에서 흔들리는 가방을 힐끔 내려보았다. 왼쪽 어깨에 달린 끈을 따라 오른쪽에 자리한 작은 하얀색 가방은 학교에 따라오겠다는 티키를 위해 일부러 가져온 것이다.


‘계속 같이 다녀야 필요할 때 변신할 수 있잖아.’


라고 말하는 티키의 말에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방 안을 뒤져서 티키가 들어갈 만한 작은 가방을 찾아냈다.


사실 마리네뜨는 티키를 꽤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생물인가 했지만, 티키는 정말로 상냥했고 목소리만 들으면 그냥 사람이랑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똑똑했다. 깨어난 게 최근은 아닌지 티키는 지금 세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스마트폰을 보고 신기해하는 티키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꺄르르 웃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꼭 친구 하나가 더 생긴 기분이었다.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것만 아니라면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하지만 너무 부담스럽다고!


그냥 확 수락할까도 싶었지만, 이런 큰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결정할 만큼 마리네뜨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TV에서 보면 영웅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특출난 면이 하나쯤은 있지 않던가. 대체 자신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 선택되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하염없이 걷던 중 마리네뜨의 귓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뭐지?”



고개를 들었지만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싶은 순간 다시금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결을 따라 간간히 들렸다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계속 고막을 간지럽혔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마리네뜨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려던 순간 마리네뜨는 헉 소리를 낼 뻔했다. 다행히도 목소리를 내기 전에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벽으로 붙었다. 그리고 살짝 얼굴을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강도다.


얼굴에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3인조가 은행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총을 들고 있는 건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인질로 잡은 듯한 어린 소년의 목에 팔을 두르고 소년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남은 한 명은 커다란 가방을 잔뜩 들고 있었는데 저 안에는 아마 은행에서 훔쳐낸 돈다발이 들어 있겠지.


볼일은 거의 다 끝났는지 강도들은 들고 있던 가방을 차에 싣고 있는 중이었다. 시민들이 그런 그들의 주변에 넓게 퍼져 있었지만,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어서인지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경찰은 왜 아직도 안 오지?”



혹시 몰라 귀를 기울여봤지만 사이렌 소리는커녕 클락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강도들은 짐을 다 싣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서로 눈짓하더니, 계속 인질로 삼으려는지 아이를 끌고 움직이는 강도들의 모습에 시민들 사이에서 분노하는 소리들이 쏟아졌다. 다시 아이에게 총을 겨누며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는 강도의 한 마디에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죽일 듯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이 엄마인 듯한 여자의 표정은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새하얘졌고, 아이는 공포에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떠나보내면 아이는 분명히 죽을 텐데. 어쩌면 좋지? 어떡해?



“변신하면, 저 애를 구할 수 있는 힘이 생길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마리네뜨는 헉 하고 놀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이야. 나는 히어로같은 거….



“잠깐. 그 손 놔.”



어?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마리네뜨의 귀를 잡아끌었다. 침착하지만 명확하게 꽂히는 목소리에 강도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놀란 얼굴을 한 시민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무덤덤한 시선을 한 금발의 소년.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가 애타게 찾고 있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무슨 수작이냐는 듯이 총을 겨누는 강도에게 소년은 태연한 얼굴로 폭탄선언을 던졌다.



“어린애는 냅두고 날 인질로 삼지 그래.”

“뭐?”



얼빠진 듯한 강도의 목소리와 함께 시민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앞에 나서서 인질을 자기로 바꾸라고 하는 소년의 행동은 그야말로 간이 크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미친 짓이었다. 아이를 구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따라가면 분명 목숨이 위험하게 될 텐데. 근처에 있던 중년 남자가 말리려는 듯이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소년은 간단히 어깨를 털어버리고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섰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리네뜨가 손을 들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두근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하는 심장에 마리네뜨의 손이 셔츠를 사정없이 비틀었다. 불안감이 심장을 점점 옥죄어가고 있었다.


한편 강도들은 당당하게 자신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하는 소년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는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에 시민들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소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강도 중 한 명이 소년에게 손가락질을 날리며 조소했다.



“하, 네가 뭐라고….”

“인질이면 더 비싼 쪽이 낫지 않나? 그 꼬맹이보다는 값어치가 높을 거라 장담하는데.”

“건방진…!!”



목숨이 걸린 결정임에도 무심한 얼굴로 셈을 던지는 소년의 태연한 모습이 거슬렸는지 강도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붙잡고 있던 강도가 다른 총을 들고 있는 강도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 야, 저놈 잡아와!”

“아이를 먼저 놔.”

“…그 건방진 입이 언제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봐주지. 아이는 버리고 저 놈을 데려간다.”



다른 한 명이 소년에게 총을 겨눈 순간, 강도는 데리고 있던 아이를 풀어주었다. 울음을 터트리며 엄마에게로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을 흘깃 돌아보고, 소년은 느릿하게 양 손을 위로 올렸다.


천천히 강도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소년을 본 순간 마리네뜨는 다급히 소리쳤다.



“티키!”

“응?”



설명할 시간조차 없었다. 가방 속에서 훅 솟아나온 티키를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주문을 읊조렸다.



“변신, 레이디버그!”



강도 중 한 명이 소년에게 다가가 팔을 움켜쥐려는 찰나, 하늘로 날아오른 붉은 인영이 무언가를 세게 던졌다. 머리를 얻어맞고 순식간에 그 자리에 쓰러지는 강도의 모습에 시민들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남아있던 다른 강도 한 명의 얼굴에는 경악이 깃들었다.


바닥에 내려서서 요요를 흔들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시민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칫, 혀를 차며 총을 든 남자가 그녀에게 총신을 겨누려던 차에 레이디버그는 요요를 던져 남자의 손을 정통으로 맞췄다.



“으악!”



강렬한 아픔에 남자가 총을 떨어뜨리자마자 바로 앞에 서 있던 소년이 빠르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억,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꺾으면서 등을 밀어 바닥에 깔아뭉개고, 바둥거리는 남자의 목 뒤를 쳐서 기절시킨 뒤 소년은 천천히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소년의 모습에 레이디버그와 시민들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히익!”



운전석에서 그걸 지켜보던 나머지 강도 한 명이 재빨리 차를 출발시켰다.  앞으로 달려가는 차를 보며 레이디버그는 손에 들고 있던 요요를 다시 휙휙 돌렸다.



“놓칠 줄 알고?!”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길게 늘어난 요요가 차의 트렁크 위에 붙어 있던 장식을 돌돌 휘감았다. 감긴 걸 확인하고 세게 잡아당기자마자 차는 속수무책으로 끌려왔고. 더욱 패닉 상태가 된 강도가 열심히 엑셀을 밟았지만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질질 끌려오는 자동차를 보며 시민들은 물론이고 레이디버그 본인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그녀는 별로 힘들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힘이 세진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게다가 몸도 무척 가벼웠다. 바닥에 발을 딛을 때마다 몸에 풍선을 매단 것처럼 사뿐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몸무게가 거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자동차가 다시 원래 있던 자리까지 끌려오자마자 시민들이 달려들어서 차에 타고 있던 강도를 끌어내렸다. 기절한 두 강도를 묶고 전화기를 꺼내 경찰에 신고하는 시민들을 뒤로 한 채,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소년의 모습을 발견한 레이디버그가 그를 불렀다.



“저기요!”

“…?”



뒤돌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다행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불렀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이 말없이 서 있는 소년에게 레이디버그는 다급히 가장 먼저 떠오른 것부터 질문했다.



“이름, 이름이 뭐예요?!”

“음?”

“아, 저기, 그게…. 그, 그냥 궁금해서요! 에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이름 정도는 알아도 좋지 않아요?”



지긋이 자신을 살피는 듯한 눈동자에 절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생각해보면 굳이 이름을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수상하잖아!



“안, 안 될까나….”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검지손가락 끝을 맞부딪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면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물어본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그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소년의 시선에 레이디버그의 뇌리에 온갖 부정적인 가설이 떠올랐다. 아, 난 역시 운이 없나봐아아아아-. 그렇게 속으로 절규하고 있던 레이디버그에게 소년은 대답했다.



“…펠릭스.”

“네?”

“펠릭스 아그레스트.”

“어, 그게 이름…?”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 아니 펠릭스를 보며 레이디버그는 멍한 정신을 추스르고 황급히 방금 들었던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좋구나.



“네, 네. 고마워요!”

“그쪽은?”

“어, 저요?”



끄덕.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닌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펠릭스에게 레이디버그는 발랄하게 대답했다.



“마…, 레이디버그! 레이디버그예요.”



하마터면 진짜 이름을 뱉을 뻔했다. 티키가 비밀로 하랬는데! 그래도 실수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레이디버그와 달리, 그녀를 쳐다보는 펠릭스의 눈빛에는 묘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호의인지 적의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애매하기도 한. 다행인지 불운인지 그런 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는 다시 말을 걸었다.



“근데 어쩌다 이 근처를 지나고 있었어요?”

“학교가 이 근처라서.”

“어라, 혹시 솅 에트와르(Saint étoile) 학교?”

“……어떻게.”



그야 당신이랑 같은 학교니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는지라 떨떠름하게 미소지으며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아까 보니까 되게 잘 싸우던데, 뭐 운동 같은 거 하나 봐요?”

“사정상 호신술을 배웠어서.”

“그, 그렇구나!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렇게 총 들고 있는 사람한테 막 다가가는 거 아니에요. 위험하잖아요.”

“…주의하죠.”



그 말과 함께 처음으로 무표정을 거두고 피식 웃는 그의 모습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왠지 더웠다. 주변의 공기가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귀에 메아리치듯 크게 울리는데, 소리가 너무 커서 앞에 있는 사람에게 들릴까 겁날 정도였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펠릭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가 어려운 탓에 그녀는 살짝 시선을 옆으로 비꼈다. 똑바로 쳐다보면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걔는 왜 그렇게 찾아? 정말 반한 거야? 이런 참견은 좀 그런가 싶긴 하지만, 좋아할 상대는 신중하게 골라.’


이 순간 갑자기 왜 이 말이 떠오르는 걸까. 일단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 싶어서 레이디버그는 입을 열었다.



“아, 저기….”



뭐라고 하지? 고민하던 찰나 삐용삐용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레이디버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자신이 레이디버그가 아닌 마리네뜨의 입장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허둥지둥 작별인사를 건넸다.



“아, 경찰이 왔으니 저는 이만!”



펠릭스가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몸을 날려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펠릭스의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레이디버그.”






“다행이다, 안 들킨 거 같지?”



헤실거리는 미소를 가면 뒤로 감추고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힘차게 파리의 상공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가볍게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파리의 건물들 위를 날아다니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발견한 몇몇 사람들이 경악의 탄성을 내뱉었다. 아마 내일이면 레이디버그에 대한 기사들과 목격담으로 떠들썩해지겠지.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 것에 조금도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찾던 사람을 드디어 찾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같은 학교라니. 계속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펠릭스라….”



펠릭스(Felix). 행운이라는 뜻의 고대어에서 유래된 이름.



“좋은 이름이네.”



즐거이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 2편으로





===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일단 이 소설에 대해 설명을 해야겠죠. 이번 8월 6일에 열릴 레이디버그 온리전에 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2D 레이디버그 소설입니다.

트레일러를 전체적으로 해석해 아예 본편을 통째로 만들어낼 예정이죠. 제목은 [Un Autre].프랑스어로 '또 다른' 이라는 뜻입니다.


일단 주의사항을 말씀드려야겠죠.


간단하게 설정을 설명하자면 가장 큰 특징은 기적이라는 개념 거의 없습니다. 신비한 치유의 힘 없고요 안면인식장애도 없습니다. 그래서 건물 부서지면 복구 안 되구요 사람도 죽고 다칩니다. 물론 히어로 애들도 예외 없습니다. 굉장히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고, 그래서 등장 인물들이 굉장히 똑똑하고 눈치도 빠릅니다. 다크한 성인용 정치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얼마나 잘 써낼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만족용이니 너무 크게 기대하진 마세요OTL


참고로 책의 수위는 15금입니다. 수위 때문이 아니라 내용이 좀 잔인해서요. 전개에 자비가 별로 없습니다 하하하하하


일단 책의 챕터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로 나누어서 각 계절당 에피소드가 6개씩 들어갑니다. 그래서 본편만 에피소드 24개. 일단 봄 에피소드는 모두 공개할 예정이에요 6편까지. 2편은 6월 말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각 챕터마다 주제가 있고 전체적인 주제도 여럿 있습니다만, 대체로 두 사람의 애정라인과 성장, 메인 스토리적으로는 치열한 두뇌싸움이 주가 될 거 같습니다. 최대한 2D 트레일러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하면서 제 취향을 섞었지만 보시는 분들 눈엔 어떨지 모르겠네요.


자캐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트레일러에 나오는 인물들만으로는 스토리를 짜내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ㅅ; 전체적으로 인물 수는 많지 않습니다만 악당은 몇 명 더 추가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라인은 메인 캐릭터들 위주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묘사는 차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페이지는 600-800페이지 사이로 아마 두 권으로 나눌 거 같습니다. 2권 세트로 3.5-5만원 사이를 생각 중입니다. 페이지에 따라 가격조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행사일 2주 전쯤에 딱 일주일만 전권 선입금 받고 끝낼 생각입니다. 인쇄비가 너무 비싸서 현장판매분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ㅅ; 그러니 책을 사고 싶으시다면 이 시기에 제 계정을 찾아와주세요. 통판도 이 때 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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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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