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c="https://code.jquery.com/jquery-1.12.4.min.js" integrity="sha256-ZosEbRLbNQzLpnKIkEdrPv7lOy9C27hHQ+Xp8a4MxAQ=" crossorigin="anonymous">

※ 예전에 썼던 거 옮겨 왔습니다.

※ 타임리프 3부작. 꼬강이 17세.





[투림] 시간을 넘어서-.


Written By. Rine








붓으로 먹을 칠하는 것처럼. 아직 초저녁인데도 어두컴컴하게 물든 하늘이 불길하였다. 차가운 무언가가 제 얼굴로 떨어졌다. 구름 사이로 하나둘씩 떨어지는 빗방울. 처음에는 그저 몇 초에 한 번 가끔씩 떨어지다, 점점 그 수가 많아지면서 양동이에 물을 들이붓듯 세차게 쏟아진다. 빗방울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고, 모여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재빨리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방이나 신문지를 올려쓰고 뛰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그저 머리를 손으로 가리고 죽어라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도 거세지는 빗줄기에 옷이 젖어가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재빠르게 발을 놀려 공원을 벗어났다. 그렇게 비를 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이에서도, 그저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나이는 중학생,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아이는 우산도 없이 그저 가만히, 빗줄기에 몸을 맡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옷이 흠뻑 젖어 뼛속까지 시려울 텐데도,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그저 멍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풀썩 고개를 꺾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무언가를 참아내던 아이가, 띄엄띄엄 말을 뱉어냈다.



"거짓말…."



아니야, 아니야! 방금 전까지 사라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던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가. 너무나도 큰 전투를 마치고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났지만 그는 이미 제 곁에 없었다. 많이 다쳤다는 말에 그러려니 하면서 넘겼다. 면회 사절이라는 말에 그렇게 아픈가 싶어, 다 나으면 약골이라고 놀려주리라 생각했는데. 계속 기다렸고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았다. 무소식은 희소식이라는 옛 속담과는 다르게 발끝까지 끼쳐오는 두려움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어디 있어요?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그와 사이가 안 좋던 사라조차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안타깝다는 듯이 저를 바라보는 바리 누나의 얼굴에 마음이 술렁거렸다. 왜 그런 표정을 하냐고, 하하 웃으면서 말해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일그러지는 제 표정을 눈치챘는지 사라가 입을 열더라. 꼬마, 잘 들어. 충격받지 말고. 그는….



"아니야…."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런 거였을까. 마음이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이제는 그보다 약간 높아진 키. 멱살을 잡혔음에도 가만히 눈을 감고만 있는 사라의 모습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만 같았다. 평소라면 제 몸에 손대지 말라고 떨쳐냈을 것인데.



"아니, 라고…!"



죽었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말단이고 바보라지만 무척이나 강하고 대단하고, 심지어는 팔이 없어져도 재생되잖아.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것처럼 굴었잖아. 언제나 저를 놀려먹으며 즐거워했으면서. 자신은 너보다는 훨씬 오래오래 살 거라면서 그렇게 웃으며 말했잖아. 지금 단체로 몰카라도 찍어? 그래, 이 정도면 많이 속아준 거니까 이제 슬슬 나와. 제발 나와줘. 허하게 중얼거리는 제 목소리를 듣던 누나가 제 앞으로 나서며 무언가를 건네주기 전까지는. 그래도 자신은 많이 이성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천 위에 올려져 있는 조각난 하얀색 나뭇조각.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게 그가 언제나 메고 다니던 장승 목걸이의 파편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도 잘 만지지 못하게 했었던, 그가 언제나 애지중지 차고 다니던 물건인데. 너에게 줘야만 할 것 같아서, 라는 누나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레 손으로 받아들었다. 천 위로 느껴지는 단단하고 가벼운 감촉에, 결국 저는 그 자리를 뛰쳐나오고만 말았다. 정처없이 터벅터벅 걷다가 이 공원까지 흘러들어왔다. 솔직히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그저, 마음이 허했다.



"왜, 왜…!"



나만 아니었더라도. 그러한 자책감이 추위마냥, 소년의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명계와 얽히고 그와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 그의 임무에도 같이 나가곤 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최근에 와서는 제법 영력을 조절할 수 있었기에, 이런 자신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들떴던 모양이다. 상급령 세 마리. 저가 하나를 맡고 그가 둘을 맡았다. 여러 마리를 해치우던 중 자신이 방심했고, 거대한 꼬리가 자신을 내리치려는 순간 그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간신히 다 없애기는 했지만, 마지막 녀석을 봉인하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그의 몰골은 꽤나 엉망이었다. 여러 군데를 뜯겨 있어, 보기만 해도 안 아플까 걱정될 정도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달랑달랑한 팔 하나를 들어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바보령. 흐릿한 의식 속에서 본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면.



"우욱…."



빗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어떤 소리라도 다 묻어버릴 것처럼 타닥타닥 내려와, 제 귀와 이성을 마비시킨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저를 감싸고만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게, 보이지 않게. 차가운 빗줄기에 섞여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리게 얼어붙은 제 몸에 아직도 이런 온기가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입을 손으로 막았다. 빗물에 섞여들어 잘 보이지 않았고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든 울음을 삼켜내려는 듯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러다가 주저앉았다. 바닥에 손을 짚고 마음껏 슬픔을 토해냈다. 아무도 보지 않아. 여긴 나 혼자고, 설령 본다고 해도 이 소나기가 모든 것을 가려줄 거야.


다행이다. 지금 비가 와서.



"왜, 내가 아니야."



다쳤어야 하는 건 나인데. 죽었어야 했던 것도 나였고.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고, 당신은 내 곁에 없는 거지? 난 왜 이렇게까지 아파하며, 여기 주저앉아 괴로워해야 하는 걸까. 이래 봤자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잘 아는데, 당신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걸 잘 아는데. 머리로는 알지만 거부하는 심장이 쇼크가 올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몸은 시린데 가슴은 뜨겁게 끓어올라서 죽을 것만 같았다. 토해내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가 목에 걸려, 앓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와 자신에게 죽음이란, 그 무게가 다르다. 자신은 죽으면 명계로 가면 끝이지만, 그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인데. 왜 날 구하고 당신이, 어째서. 어째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과 함께 커다란 소리가 몸을 강타했고, 소년은 정신을 잃었다.




* * *



하늘이 푸르렀다.

비가 갠 후라 그런지 주변에 물 웅덩이들이 고여 있었고 흙바닥은 축축했다. 잎사귀 위에는 물방울들이 구슬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소년이었다. 창백한 얼굴색이 혹여 죽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웅덩이에 놓여 있던 소년의 손가락이 순간 움찔했다. 똑, 똑.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함께, 소년의 눈이 떠졌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눈을 깜빡이던 소년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던 눈동자가 다시 선명해졌다.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놀라던 얼굴이 침울해졌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에는 힘없이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죽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게 나갔으니 다들 걱정하고 있으리라. 솔직히 아직도 기분이 풀린 건 아니었다. 죄책감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저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억지로 자기위로를 하며 소년은 휘적휘적 거리를 걸어갔다. 이상할 만치 뽀송뽀송한 옷에 약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리라 여겼다. 공원 밖으로 나서서 시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제 눈에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 주변에서 엷은 빛이 비치는 것을 보아, 유령이구나. 평소라면 귀찮아서라도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오늘따라 눈길이 간다. 말이나 걸어볼까, 싶어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벤치로 다가가는 인영에 걸음을 멈췄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할머니, 여기 머물러 계시면 위험하다구요."



할머니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사람. 전투 모드와는 달리 검은 망토를 두르고 상냥하게 말을 거는 남자는, 소년이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멈췄다고 생각한 눈물들이 눈가에 고이는 것을 느꼈다. 눈물샘이 다시 터졌는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손으로 하염없이 닦아내던 아이가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할머니를 보낸 후, 뒤를 돌아보던 남자를 와락 껴안았다.



"바보령, 역시 살아 있었구나!"



죽지 않았어. 살아 있었어! 너무나도 반가워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기뻐서인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몇 주만에 만나는 걸까,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가 싶은 마음이었다. 갑작스레 저를 껴안는 아이에 당황했는지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소년을 밀어냈다. 뭐지?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너, 내가 보이나?"

"…뭐?"

"인간에게는 내 모습이 보일 리가 없는데…. 넌 누구지?"



이제야 다시 만났다 싶었는데,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 할 말이 없어졌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정말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설마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말한 건, 저에 대한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던가? 아니야,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성격들이 아니다. 어쨌든 살아 있다. 그런데 나를 알아보지 못해. 왜지? 심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쳤다.



"나 모르겠어?! 강림이라고, 강림!"

"…? 강림?"



그 말을 듣자마자 제 어깨를 거칠게 붙잡는 손이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다그치는 그 목소리가 노기를 띠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표정도 살짝,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정말 날 모르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버벅이던 소년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포착했다. 바람결에 날아가던 포스터, 그 위에 선명하게 찍히는 글자들에 다시 표정이 변했다. 눈동자가 커지며 동공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어서. 눈을 들어 바로 앞에서 저를 추궁하는 얼굴을 위 아래로 살펴보았다. 푸른 색이 감도는 흑발, 무심한 얼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기 증거가 버젓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간절히 바래서 꿈으로라도 보는 걸까. 아니면 이건 정말로, 진짜.


현실인 거야?


*


그들의 주변으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전단지 하나가 바람에 휘날려 두둥실 떠오른다. 하늘하늘 춤추며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전단지의 양면으로 커다랗게 숫자가 쓰여 있었다. 3일 후에 개봉될 뮤지컬을 홍보하는 이 포스터에 적힌 날짜는,


2009년 8월 15일.


5년 전, 강림도령과 아이가 만나기도 훨씬 전의. 바로 그 시간.




- To be continued?




※ 꼬강이가 비맞은 날짜는 2014년 9월경, 둘이 처음 만났던 1화 배경을 2009년 9월로 잡았습니다.

Posted by I.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