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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롤주의. 약 22500자




맨디님 그림 보니 떠오르는 썰이 있다.


호크모스 해치우고 새로운 빌런수장이 된 레이디버그! 최후의 싸움 때 블랙캣은 목숨을 잃었고 그걸 보고 폭주해 호크모스까지 죽게 하고 새로운 나비 요정에게 선택받은..


진짜 그 최후의 싸움 때 싸우던 장소는 모조리 쑥대밭이 되었고, 호크모스는 사라져 버렸으나 남아 있던 나비 요정이 그 자리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마리네뜨에 들러붙어 버림. 이 때 폭주의 여파로 미라클스톤은 부서졌고 티키의 행방도 찾지 못함.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변신하고, 자기 의지와는 달리 다른 장소에 와버린 마리네뜨는 경악함. 순간 정신이 들었는데 갑자기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기겁하지. 그런데 요정이 굉장히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제안을 해.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아?"


살리고 싶은 사람.

그 한 마디를 마리네뜨는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음. 자신의 눈 앞에서 쓰러지던 블랙캣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지. 그 전투 이후로 아드리앙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어. 아파서 못 나온다는 사유를 내걸고. 병문안을 가도 돌아오는 대답은,


‘도련님은 집에 안 계십니다.’


라는 비서의 쌀쌀한 대답뿐이고 병원이 어디냐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아. 마지막 싸움을 한 장소에 가도 거의 폐허가 된 장소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음. 호크모스의 시체조차 남지 않았는걸.


그에 절망한 마리네뜨는 결국 요정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호크모스가 되어 빌런을 만들기 시작해. 요정의 제안은 자신이 힘을 얻는 방법은 여러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사람의 공포를 먹고 자란다는 거였어. 어느 정도 힘이 모이면 미라큘러스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지. 솔직히 좀 소름끼치잖아 사람의 공포를 먹고 산다니;; 마리네뜨도 물론 기겁했지만 그 요정이 제안한 이야기는 차마 마리네뜨의 입장에선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


게다가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에 대한 엄청난 죄책감과 그의 상실로 인한 공허함을 같이 갖고 있었음. 둘도 없는 파트너이자 연인을 잃어버린 마리네뜨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지. 자포자기한 그녀는 결국 요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호크모스가 되어 파리를 위협하기 시작해. 연보랏빛 옷을 입고 등에 커다란 날개같은 펄럭이는 천이 돋아나 있는 모습으로 변신했고, 검은 나비를 만들 수도 있지만 등에 달라붙어 있는 천을 무한대로 조절해 상대를 겁박할 수 있어. 거미줄처럼.


겉보기는 우아한 공주님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리네뜨는 변신하면 자기 의지대로 몸을 막 움직일 수 없어; 그러니까, 요정의 의도를 벗어나면 자동적으로 결합된 요정이 그녀의 움직임을 막는 거. 마치 인형을 조종하듯이; 당연히 마리네뜨는 티키때와 달리 그 요정을 싫어해. 자기를 조종해서 이익을 챙기는 것도 그렇거니와 결국 이 요정때문에 블랙캣이 죽은 거나 마찬가진데. 그런데도 그런 요정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는 자신의 이기심이 너무 밉고, 언제나 사랑받던 레이디버그에서 모두가 욕하고 비난하는 빌런이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굉장한 스트레스와 자책감을 주지. 사실 변신했을 때는 요정의 영향인지 악행에 전혀 자책감이 없음. 근데 변신 풀리고 나면 진짜 자기 자신에 회의감이 밀려오는 거야.


내가 진짜 이런 짓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학교를 다니니까 주로 아이들의 어둠에 접근해 그들을 빌런으로 만들었고, 사실 아이들은 성숙하는 과정이라 어른보다 더 멘탈이 약하기에 한층 수월했지.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마리네뜨는 사람들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돼. 심지어 알리야한테조차.


알리야는 점점 어둡고 말수가 적어져가는 마리네뜨를 걱정하지만 언제나 마리네뜨는 괜찮다고 말하며 웃어넘기니 더 답답한 거. 빌런네뜨가 주로 서 있는 장소는 바로 에펠탑 꼭대기. 도도하게 에펠탑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지만 그 눈빛은 악당답지 않게 자못 슬퍼보여.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큰 변수가 생겼지.


아드리앙이 돌아온 거야.



그녀가 빌런이 된지 어언 3개월이 지난 뒤였어.


빌런활동까지 하느라 너무 피곤한 마리네뜨는 학교에서 엎어져 자는 일이 잦았어. 그래서 제 앞에 누군가가 앉는 것도 모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데,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네.'


명랑하고 익숙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비몽사몽한 와중에 뭐지... 하고 생각하다가 다음 순간 인지하고 홱 고개를 들어. 근데 정말 아드리앙이 앉아 있어. 이건 꿈인가? 하고 마리네뜨는 자기 손등을 꼬집는데 꿈이 아니야. 정말 다 떠나서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고 마리네뜨는 그의 이름을 불러.


"아...드리앙?"


그가 뒤를 돌아봐.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반짝이는 녹빛의 눈동자. 자신이 기억하는 그가 확실해. 살아 있었던 건가? 정말 복잡하게 굴러가는 마리네뜨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든 건 아드리앙의 그 한 마디였어.


"...미안하지만, 넌 누구야?"



아드리앙에겐 지난 1년간의 기억이 하나도 없었어.


사실을 조금 풀어놓자면, 블랙캣이 죽은 줄 알고 마리네뜨가 폭주했던 그 시기에 사실 블랙캣은 죽지 않았고 플랙의 가호로 간신히 숨은 붙어 있었음. 그러나 폭주한 미라클스톤의 파장으로 거기에 공명한 블랙캣의 반지도 어느 정도의 폭주 증상을 보였고, 그 후유증으로 히어로가 되었던 이후의 기억을 모두 상실한 거야. 빌런으로 변신된 마리네뜨가 터벅터벅 사라진 후에 블랙캣은 정신을 차렸지만 사실 그건 아드리앙의 의지라기보단 플랙의 의지였을지도 모르지.


길거리를 배회하던 블랙캣은 어느 순간 털썩 쓰러졌고 그제서야 변신이 풀리면서 상처투성이인 아드리앙의 모습으로 발견되었거든. 깨어나고 나서는 자기가 어떻게 거기 있었는지도, 어떻게 그런 상처를 입었는지도 몰라.


사실 재미있는 건 이 시점에서 파리에 새로운 레이디버그가 나타났다는 점이지. 티키가 무사했던 건가?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빌런을 조종할 땐 밖으로 나설 수 없고, 레벅의 정체를 모르는데 레벅을 찾아다닐 수는 없었지.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자신처럼 다시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슈퍼히어로로 활약해. 그에 마리네뜨는 굉장히 허탈감을 느껴.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구나.


나를 필요로 한 게 아니야. 그냥 영웅이라는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 씁쓸하고, 마음이 무거워져.


그리고, '진짜 자신'을 필요로 해 줬었던 한 사람의 존재가 떠올라. 네가 레이디버그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나는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던 그 상냥한 녹색 눈동자가 떠오르니까 정말 울고 싶은 거야.


사실 빌런네뜨의 모습으로는 마리네뜨는 거의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아. 그냥 무표정으로 도도하게 모든 일을 관망할 뿐. 왜냐하면 빌런네뜨의 모습은 마리네뜨 안에 있는 허무함과 무기력함을 극대화하는 변신이었거든. 그리고 새로운 레이디버그가 나타나면서 그녀의 어둠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하고, 빌런들의 능력도 그에 따라 강해지기 시작함. 사실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빌런네뜨로 서는 일이 몇 배는 힘들어졌어.


지금은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그리고 내가 지금 파리를 위협하는 빌런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나를 경멸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마리네뜨는 당장이라도 빌런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나비 요정은 우리 계약은 끝나지 않았고 지금 그만두면 당장 그 남자애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함. 마리네뜨에게 최우선은 아드리앙이었기에 죄책감을 가지고서도 마리네뜨는 억지로라도 빌런 일을 수행해. 문제는 빌런 상태에서는 가뜩이나 있던 감정도 심화되는데 마리네뜨의 스트레스가 도를 넘어가고 있었던 거지. 빌런네뜨의 표정변화는 점점 없어지면서 눈빛은 점점 침잠하기 시작함. 그런데도 요정을 믿을 수 없어서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을 돕겠다는 핑계로 그의 곁을 맴돌아. 그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서 문제가 뭐냐면,

기억을 잃고도 아드리앙이 레이디버그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알아챈 계기는 별로 대단한 건 아냐. 언젠가는 빌런이 생성된 곳에 아드리앙이 있었고 그 때 그가 레이디버그랑 마주쳤거든. 레이디버그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아드리앙의 표정에서부터 빌런네뜨는 모든 걸 읽었어. 그리고 제발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랬지.


그런데 새로운 레벅을 처음 마주친 이후로 아드리앙이 그녀에 대해 조금씩 묻기 시작한 거야. 주변에 가장 친한 친구가 마리네뜨와 니노밖에 없었으니까 이 둘한테. 니노는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데 듣고 있던 마리네뜨는 점점 괴로워져.


뭔가 낯설지 않은 느낌이야. 보고 있으면 그리운 느낌이 들어. 예전에 관련이 있었던 사람일까? 등등을 말하는 아드리앙에게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는지 몰라.


아니, 아니야. 그 여자가 아니야! 보지 마. 그 여자를 생각하면서 그런 표정 짓지 마!

...결국 네가 좋아한 사람도 내가 아니라, 레이디버그였던 것 뿐이야?


이 생각 하나가, 마리네뜨를 엄청나게 절망하게 만들어. 진짜 어느 정도냐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마리네뜨를 마리네뜨로 만들어주던 끈조차 끊어진 느낌. 그 정도로 그녀의 안에서는 아드리앙의 존재가 컸던 거야. 근데 그게 끊어졌지.


그러니 어떻게 됐겠어?


여기서 잠깐 사담을 하자면 블랙캣의 미라클스톤은 부서지지 않았어. 근데 고양이반지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음. 플랙이 깨어나지도 못한 채로. 아드리앙은 깨어났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물건이라 보석함에 고이 담아두고 쉽사리 꺼내지 않았고, 그래서 플랙이 오랜 시간 깨어나지 못했던 거지. 아드리앙을 마지막까지 보호하느라 플랙도 자신의 에너지를 한계치까지 끌어다 썼거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아드리앙은 다시 보석함을 열어 반지를 만졌고 그 때 다시 플랙이 깨어나 그를 블랙캣으로 만들지.


그리고 그는 새로운 레이디버그와 다시 같이 활동하기 시작해. 곁에 있고 싶다는 이유로.


...참으로 우습지. 기억을 잃고도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니. 다시 나타난 블랙캣에 빌런네뜨는 기겁할 만큼 놀라고, 다른 사람인가 싶었지만 그의 움직임을 보고 절망스러운 확신을 하게 돼. 그는 아드리앙이라는 걸. 자신과 활동할 때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거야. 차이점이라면 그녀가 레이디버그가 아니고, 그와 적대시하는 입장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 혼자, 그와 함께했던 모든 추억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빌런네뜨로서 계속 악당을 보내야 하면서도 마리네뜨는 악당을 보낼 때마다 블랙캣과 레벅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봐야 했고 그걸 볼 때마다 밤에 굉장한 악몽에 시달리게 됨. 그런데 우습게도 그런 마리네뜨의 우울함이 빌런을 더 강화시켰고, 어느 날은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구하려다 크게 다치게 돼. 그 모습을 보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경악하고, 빌런네뜨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에 동공만 살짝 커져. 블랙캣을 붙들고 걱정하던 레벅이 정말 무지막지한 속도로 빌런을 해치우기 시작하고, 쓰러진 블랙캣을 멍하니 보던 빌런네뜨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해.


///


얼굴에 느껴지는 촉촉함에 그녀는 살며시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매만졌다. 눈동자에 묻어나는 미지근한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 아..."


의미 없는 탄식을 토해내던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스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매가 일그러지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그러나 이례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오래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탓인지, 얼굴의 근육들은 격한 감정에 비명을 질러댔다. 고개를 푹 떨구고 그저 뚝뚝 눈물을 쏟아내던 그녀의 얼굴이 비참함에 일그러지며, 비명과도 같은 울음을 토해냈다.


"아, 아, 아아...."


감정을 표현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가엾은 빌런은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괴로움을 토해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하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입 밖으로 천천히 말을 토해냈다.


"싫..., 어...."


제발 그만해.


그를 상처입히기 위해 빌런이 된 게 아니야. 이런 추한 모습이 되어가면서까지 내가 바랬던 건 오직 하나뿐인데, 어째서. 어째서 나에겐 그것조차... 이것이 벌인가. 내가 그동안 해왔던 짓들에 대한?


그녀는 결국 비명을 토해내. 누군가 들었다면 분명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날카롭고, 슬픈 목소리로.


"싫어, 싫어, 싫어!!!!!"


펑펑 눈물을 쏟으며 그저 싫다고 몇 번이고 소리질러. 몇 번이고. 속으로도 중얼거리지.


그만두고 싶어. 그만하고 싶어. 이제 됐잖아. 충분하잖아.


난 할 만큼 했어. 정말, 정말 열심히 했단 말이야. 그런데 왜!!! 왜 너는 날 알아봐주지 않아?

왜, 왜 그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 거야.


이 와중에도 그가 그녀를 감쌌다는 사실에 질투하는 자신에 마리네뜨는 픽 웃을 수밖에 없었어.


정말로 추해졌구나, 나.



///


한편, 블랙캣의 상처는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어 다행히도. 하지만 아드리앙은 어쩔 수 없이 병원에 한 3일은 입원하게 됐지. 기억을 잃었을 때도 그랬지만 아드리앙은 병원을 굉장히 싫어함. 원래 일주일인데 3일로 타협한 거기도 하고. 일단 학교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고, 회사 관계자들도 찾아와.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로 아드리앙이 실질적으로 회사 쪽에 손을 대고 있었거든. 1년간의 기억만 없지 다른 지식들은 모두 멀쩡하니까. 여전히 까망베르 치즈를 찾는 플랙에 아드리앙은 귀찮아하면서도 나탈리에게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음. 그 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려(아드리앙의 병실은 개인실). 들어오라고 하니까 과일 바구니와 봉투 하나를 든 마리네뜨가 안으로 들어와. 아드리앙은 그녀가 왠지 꽤 반가웠어.


일단 기억을 잃고 자주 같이 어울리기도 한 친구고, 사실 아드리앙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리네뜨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거든. 다만 기억은 나지 않아서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야. 다만 이상한게 니노랑 달리 마리네뜨에게선 어딘지 불편하고 꺼려지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어. 그 감각의 정체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친하게 지내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둠. 다만 마리네뜨가 가끔 살짝 웃을 때 괜히 신경이 쓰여.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듯 웃는 얼굴이 그녀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


좀 더 밝게 웃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라는 느낌이랄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근데 레벅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굉장히 그리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받아. 그래서 아드리앙은 그녀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거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리네뜨도 눈에 밟혔지.


솔직히 감정에 대해 아주 확신하지는 못했는데, 뭐 그래도 이 심심한 병실에 그나마 좀 얘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와준 게 어디야. 니노는 어젠가 왔었고. 과일바구니를 옆 책상에 내려놓은 마리네뜨가 가지고 온 작은 봉투를 아드리앙에게 건네.


아드리앙이 물어.


"이게 뭐야?"


마리네뜨가 담담히 대답해.


"필요할 거 같아서."


의아한 얼굴로 봉투 안을 열어봤는데 단번에 고약한 냄새가 풍겨. 뭔지 단번에 알았지. 까망베르 치즈. 아드리앙이 멍하게 물어.


"...어떻게 알았어?"

"뭐라고 했어?"

"아, 아니."


다행히도 제대로 듣지 않은 모양이야.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아드리앙은 감사히 치즈를 받아들어.(플랙은 이미 숨어들었음) 그리고 의자에 앉은 마리네뜨한테 그날 수업에 대한 소식과 통신문을 받아.


학부모 발표회 관련.


아드리앙의 표정이 단번에 쓸쓸하게 구겨짐. 그런 아드리앙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통신문을 건네주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왜 그런 표정을 하냐고 물어. 마리네뜨가 대답해.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그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아. 잠깐의 침묵 끝에 마리네뜨가 다시 입을 열어.


"상처는..."

"아, 괜찮아. 별 거 아니야."


금방 퇴원할 수 있어. 가볍게 대꾸하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가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어버림.


"그 상처가 사흘만에 낫는다고?"

"응?"


되묻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낭패라는 얼굴로 눈을 데록데록 굴림. 그에 아드리앙은 좀 이상하게 생각해. 마치 자신의 상처를 잘 알고 있다는 투잖아.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제 주치의랑, 또 한 명.


"...레이디버그?"


정말 아무 생각없이 말을 뱉어내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자기가 무슨 말을 인지했는지 떠올린 아드리앙은 제가 한 말에 경악해. 아니아니아니 잠깐. 나 지금 말실수한...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하게 마리네뜨를 쳐다보고 있는데, 조금 놀란 듯했던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의 표정에 그 속을 짐작했는지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


"갑자기 웬 레이디버그 얘기야? 실없게."


거짓말.


아드리앙은 본인이 그렇게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마리네뜨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보였어. 근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단순히 그녀가 레이디버그다, 라고 생각하기엔 제가 아는 레이디버그가 그녀와 너무 달랐으니까. 제가 아는 레이디버그는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똑부러지고 강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기서부터 갑자기 아드리앙은 뭔가 이상함을 느껴. 뭐지? 자기가 알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이미지가 어딘지 모르게 모순되는 점이 있는 거야. 어떨 때는 왠지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또 어떨 때는 굉장히 강인하고 자신의 앞에서 달려나가는, 어떨 때는 정말 순수하게 웃으며 제게 애교스럽게 달라붙었던 것 같은데... 뭔가 다가가려고 하면 막 떼어내고 밀어냈던 것 같기도 해. 불퉁한 표정이었던가? 내가 그녀에게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나?


자, 여기서 이제 기억에 혼란이 오기 시작함. 뭐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기억이 이렇게 꼬여 있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정말 다 같은 사람일까?


정말 딱 한 순간에 떠오른 사실에 아드리앙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려. 놀란 표정으로 주먹을 정말 꽉 쥔채로 경악한 표정을 짓고만 있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봐. 그리고 불러.


"아드리앙?"

"...어?"


아드리앙은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드는데, 그 부름이 익숙하다고 생각한 자신에 놀라. 그와 동시에 머리가 미친듯이 아파오기 시작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엄청나게 놀라서 다가가 손을 대려는 순간 아드리앙이 멋대로 휘두른 팔에 손이 탁 쳐짐. 마리네뜨는 그 순간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아드리앙은 그런 마리네뜨 표정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그 와중에도 두통이 너무 심해서 아드리앙이 간신히 입을 열어서 띄엄띄엄 말해.


"미안, 오늘은 이만 돌아가줘."

"너, 괜찮아? 의사 선생님은.."

"...안 불러줘도, 돼."


너무 아파서 겨우겨우 말을 잇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얼굴로 침대 옆에 있던 인터폰으로 주치의를 호출함. 그리고 말해.


"나 이만 갈게. 넌 이렇게 안 하면 또 혼자 아파하다 말 거 같으니까."


치료 잘 받고 빨리 나아.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바람처럼 병실을 나가고,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던 아드리앙의 표정도 황망해짐. 그런 와중에 두통이 어느 정도 가신 것을 알아채고 놀란 얼굴로 제 손바닥을 쳐다봄. 식은땀이 묻어 축축히 젖어있는 손바닥을 이불에 슥슥 문지르고, 아드리앙은 방금 전 마리네뜨의 태도에 대해 고민해. 왜 그렇게 말한 걸까.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친한 사이긴 했지만 뭔가, 좀 다른 느낌이었던 것 같았는데. 두통은 매우매우 아팠지만, 지나고 나니까 뭔가 머릿속에 쓰여 있던 안개가 살짝 걷힌 느낌이야. 생각이 좀 더 명확해졌어. 떠오르는 것들도 있고. 잠시 후 의사가 와서 이것저것 물어본 뒤에 결론을 말해줘.


"혹시,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잊었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어서 가벼운 기억 충돌이 발생한 거 같다고 의사는 허허 웃는데, 그 말에 아드리앙은 안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불안해져. 왜냐하면 방금 전의 두통은 레이디버그를 생각할 때 발생했었으니까. 그녀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때 머리가 아팠고, 그렇다는 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레이디버그가 있다는 건데, 그 때도 그녀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걸까.


그렇게 결론을 내고 싶지만 아드리앙은 뭔가 굉장히 찝찝해. 의사가 나가고 아드리앙 가방 속에 숨어 있던 플랙이 튀어나와. 까망베르 치즈~! 하면서 달려들려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은 치즈통을 들고 물어봄.


"플랙, 나 예전에도 레이디버그랑 같이 활동했었어?"


치즈를 들고 위협하는 아드리앙을 가만히 쳐다보던 플랙이 킬킬 웃기 시작하더니 아드리앙의 주변을 휘잉 돌아.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플랙이 정말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말해.


그걸 이제야 물어봐?


당연히 플랙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죠 암요 ㅇㅇ 플랙이 긍정의 대답을 해주자, 그 한 마디에 멍-해져서는 왜 근데 이때까지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이 장난스럽게 말함.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대답해줘야 할 이유는 없잖아?


사실은 아드리앙이 혼란스러워 할까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지만. 아무튼 그래서 아드리앙은 플랙한테 물어. 혹시, 내가..


"그녀를 좋아했었어?"

"그랬지."


아주 좋아죽겠다고 하면서 시도 쓰고 꽃다발도 갖다바쳤다니까? 투덜거리는 플랙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드리앙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해. 무엇보다 너무 찝찝해. 그래서 넌지시 물어봐.


- 니가 알던 레이디버그는... 어땠어?


그 말을 듣고, 플랙은 아드리앙이 건네준 치즈를 꿀꺽 삼키면서 킬킬거려.


- 그건 니가 판단할 문제 아니었어?


알아서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플랙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아드리앙은 얼굴을 찡그려. 사실 자신이 레이디버그를 좋아했었다는 것보다도 더 신경쓰이는 건 레이디버그를 보며 떠올리는 왠지 모를 위화감. 그런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는 다시 빌런을 상대하러 나갔을 때, 제 옆에 있는 레이디버그를 유심히 관찰해. 아,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당당하기도 한데 어딘지 가냘퍼 보이고 애교도 많은 성격이었음. 자신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는 레벅한테 블랙캣은 굉장한 위화감을 느껴. 늘 했던 행동인데 왜?


그래서 그녀의 손을 마주잡지 못하고, 그냥 레이디버그한테 넌지시 물어봐. 우리 예전에도 같이 활동한 적 있었냐고. 레이디버그는 살짝 놀란 눈치더니 밝게 웃으며 대답함.


- 무슨 소리야? 우리 아직 만난지 얼마 안 됐잖아?


진짜 그 순간 블랙캣은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저도 모르게 표정이 싹 굳어.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과 달리 엄청나게 심각한 얼굴이 되어버린 블캣에 레벅은 의아해하고, 빌런을 다 퇴치하고 나서도 블랙캣의 싱숭생숭한 기분은 여전해.


헤어진 뒤에, 블랙캣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 변신을 풀려고 했는데 그 순간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나.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여자는 보기에도 꽤나 차림새가 특이했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보랏빛에 등에는 커다란 천이 나비처럼 쫙 펴져 있고.


그냥 악당이라 간주하기엔 분위기가 좀 이상해. 막 공격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제게로 다가오는 걸음걸이는 우아하기 그지없었어. 무엇보다 시선. 부드럽게 웃는 푸른 시선에 블랙캣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제게로 걸어오는 걸 마냥 지켜봐.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타입이었달까. 딱 그의 앞에 서서는 여자가 살짝 웃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거야. 근데 익숙한 느낌이야 어쩐지. 눈동자도 그래. 분명 처음 보는데, 처음이 아닌 거 같은 느낌.


여자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어리고, 그와 동시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밑으로 살짝 끌어당겨. 블랙캣은 자신의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려앉는 걸 느끼고 눈을 크게 뜨지만, 밀어낼 생각같은 건 하지 못하지. 눈을 감은 여자랑 달리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짧지만 긴 입맞춤이 끝난 뒤에, 보랏빛의 여인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의 놀란 얼굴을 어딘지 슬프게 쳐다보는 것 같다가, 킥킥 웃으며 말해.


"빈틈이 많네. 도둑고양이 씨."


라고 말하며 그를 세게 골목 밖으로 밀쳐냄.


밀려난 블랙캣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골목에는 아무도 없어. 그리고 이 때부터 블랙캣은 그 여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돼. 레이디버그하고 있을 때는 편안하고 즐겁지만 단지 그 뿐인데, 그 여자를 보고 있을 때는 심장이 조여들었거든.


옷차림을 봐서는 히어로인가, 싶다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야. 그럼 빌런인가? 적이라고? 상황만 보면 그게 더 맞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서 적대감을 느끼지는 못했어. 정말 꼼짝도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그 여자를 마주하고 느꼈음. 그런데도 계속 떠오르는 거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는 자신에 기겁하며 아드리앙은 베개를 쾅쾅 내리쳐. 엎어져서는 웅얼거리는 아드리앙을 보며 그러든 말든 치즈나 꺼내먹고 있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이 물어.


"플랙."

"왜?"

"내가 미쳤다고 하면 어쩔래?"

"이미 지금도 정상이 아닌데~?"

"..니가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또 그러는구나~ 하겠지? 뭐야, 무슨 미친 생각이라도 한 거야?"

"아, 아니."


얼버무리며 아드리앙은 다시 얼굴을 침대에 묻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는 불길해서일까 설레서일까.


그 후로 아드리앙은 멍때리는 일이 더 잦아짐.


한편 마리네뜨는 그 병원 일 이후로 묘하게 아드리앙을 피해. 만나서 인사하고 이런 건 좋은데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아드리앙은 요즘 마리네뜨가 자주 안 보인다는 건 알고 있어. 그때 내가 너무 매정하게 말했나? 싶어서 괜히 안절부절 못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복도에서 마리네뜨를 딱 마주쳐. 아드리앙은 놀라는데 마리네뜨는 홱 시선을 피함.


사실 마리네뜨가 피하는 건 병원 일이 문제가 아니라 빌런네뜨가 되었을 때 키스했던 게 양심에 찔려서...


초반에도 말했지만 빌런으로 변신하면 그 동안은 감정이나 성향이 좀 격해지는 부분이 있음. 그리고 죄책감이 없지. 그 골목에서 키스했던 것도 거의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일이라 변신 풀리고 나서 밤에 이불킥 팡팡하고 아드리앙 얼굴 차마 못 보겠어서 마구 피한 건데 타이밍이 매우 안 맞았던 거죠.


대놓고 피하면서 후다닥 제 옆으로 지나가려는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자기 옆으로 지나가는 마리네뜨 팔 붙잡고 빈 교실로 끌고 들어가. 마리네뜨는 발버둥치지만 현실에선 아드리앙을 힘으로 이길 수 없지. 힘없이 끌려가면서 아드리앙을 다시 보는데 괜히 울컥해. 그가 돌아온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여전히 가슴에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야. 보고 있으면 아픈데 빼내면 죽을 거 같아서 빼낼 수가 없는.


교실에 끌려 들어와서 무슨 용건이냐고 묻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할 말이 없어. 왜 자기가 이런 행동을 했는지도 몰라.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 너 요새 왜 나 피하냐고. 마리네뜨는 대답 못함. 그냥 난 너 피한 적 없다고 하고 나가려는데 벽을 짚는 아드리앙 손바닥이 마리네뜨 바로 앞을 탁 가로막아. 그 때 병원에서 내가 네 손 쳐내서 그런 거냐고 물어보는데 마리네뜨는 그건 생각지도 않고 있었어서 어? 무슨 일? 하고 당황하는데 아드리앙은 그녀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음.


근데 그거랑 별개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자기가 손을 쳐냈을 때 마리네뜨의 상처받은 표정. 그 때, 자기가 느꼈던 감각이 떠오른 거야. 심장이 멈추는 듯한 순간의 충격은, 자신이 얼마 전에 만났던 그 여자의 미소를 봤을 때 느꼈던 감각이랑 매우 비슷함. 그거에 충격을 받은 아드리앙이 마리네뜨를 다시 한 번 훑어봐. 얘가? 설마. 설마. 설마. 그럴 리 없어. 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아드리앙의 이마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고, 그 감촉에 아드리앙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마리네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그의 이마에 짚고 있어. 열은 없는데. 라고 말하는 마리네뜨의 손이 너무 차가워서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마리네뜨의 손을 붙잡아.


"너 어디 아파?"

"응?"

"손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그 말과 함께 단호히 손을 뿌리치는 마리네뜨의 얼굴도 자세히 보니 꽤 안색이 안 좋아. 아드리앙은 당초의 목적을 잊고, 역시 병원가보는 게 어떠냐고 걱정하는데 마리네뜨가 그 순간 소리질러.


"내버려 둬!!"

"..."

"너랑은 상관없잖아!!"


깜짝 놀란 그를 홱 노려보고서 마리네뜨는 재빨리 교실에서 나가버림. 뒤에 남은 아드리앙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기가 잡은 손의 감촉을 떠올려. 말랑말랑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 성격이랑 달리 의외로 연약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느낌이..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얼굴이 더워지기 시작해. 어, 어? 하면서도 얼굴이 새빨개지는 거야. 허둥지둥 얼굴을 탁탁 때리는데 품속에서 나온 플랙이 깔깔거리면서 비웃음. 너 레이디버그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하고 약올리는데 아드리앙은 걍 패닉.


마리네뜨와 레이디버그, 그리고 그 의문의 여인.


뭔가 떠오를 듯 말듯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아. 그럼에도 이 상황 자체가 위화감이 쩔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날은 빌런을 처치하러 다시 나서는데, 빌런이 이번에는 두 명임. 남매였어.


각각 한 명씩 맡아서 상대하고 있는데 빌런들이 요즘 너무 강해서 혼자 상대하기가 버거움. 그런데 이상한게, 자기가 상대하는 빌런이 어딘가 이상한 거야. 막 공격하려다가도 자꾸 멈추고, 멈추고. 레벅 쪽을 힐끗 봤지만 그녀가 상대하는 빌런에는 그런 현상이 없었어. 그에 블랙캣은 누군가 이 빌런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주위를 둘러봄. 그 틈을 타서 악당이 그를 내리치려고 했는데 얼굴에 빌런마크가 뜨면서 몸이 딱 멈춰. 그리고 그 순간, 블랙캣은 무언가 빛이 반짝이는 걸 눈치채.


에펠탑 꼭대기.


그걸 보자마자 블랙캣은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레이디버그에게 신호함. 재빨리 달려들려는 빌런을 후려친 뒤에 레벅을 안고 봉을 늘려서 지붕 위로, 지붕 위에서 다시 봉을 늘린 뒤에 에펠탑으로 기울여. 꼭대기에 무사히 착지! 한 블랙캣은 고요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빌런네뜨를 보고 당황해. 그 때 자기한테 키스했던 여자!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에 빌런마크가 떠 있음. 블랙캣의 옆에 선 레이디버그가 그녀에게 물어.


넌 누구야?


빌런네뜨는 말이 없음. 그래서 블랙캣이 다시 묻지.


당신이 파리에 악당을 만들어내고 있는 녀석이야?


하니까 빌런네뜨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어. 단 이건 빌런네뜨 입장에선 자기 자신을 위한 조소였지만 두 사람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지. 긴장한 얼굴을 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러자 빌런네뜨 등 뒤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천이 의지를 가진 듯 움직이면서 덤벼드는 두 사람을 가볍게 쳐냄. 뒤로 내동그라진 두 사람이 저 천은 대체 뭐냐고 기겁하는데, 천이 다시 매섭게 늘어나면서 두 사람에게 덤벼서 꽁꽁 묶어버림. 빌런네뜨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천이 매섭게 두 사람의 몸을 옥죄기 시작해. 점점 숨이 막혀가서 둘 다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하는데도 천은 꼼짝도 하지 않고 찢어지지도 않아. 끙끙거리며 천을 풀어내려는 레벅과 달리 블랙캣은 그 와중에도 빌런네뜨를 계속 쳐다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는데, 블랙캣은 이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저 녀석은 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함. 자신을 보는 눈동자에 적의가 없어. 뭔가 숨은 점점 막혀가는데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음.


그 순간, 그녀가 몇 번 망설이듯 눈동자를 깜빡여. 동시에 블랙캣을 조였던 천의 움직임이 아주, 아주 살짝 느슨해짐.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들고 있던 봉을 늘려서 자신의 움직임을 잡고 있는 빌런네뜨의 등 바로 뒤에 붙어있는 천을 눌러버림. 역시 거기가 축이었는지 천이 확 풀리고, 빌런네뜨가 행동할 틈도 없이 블랙캣은 재빨리 달려들어 그녀 앞으로 파고듬. 휙,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바로 앞까지 파고든 블랙캣이 빌런네뜨를 올려다보는데 무표정한 얼굴이 당황한 것처럼 시선을 피함.


그리고 그녀의 팔을 오른손으로 세게 붙잡아.


그런데 얄궂은 운명처럼, 그 팔을 잡자마자 블랙캣은 그 손의 감촉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너무 선명하게 깨달은 거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는 더 이상 행동하지 못하고 그녀를 마냥 올려다봄.


빌런네뜨도 덩달아 꼼짝하지 못해. 저번에는 기습적으로 당해서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녀의 모습이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겹쳐 보여. 자신을 두려워하는 듯한 푸른빛 눈동자를 가까이서 보았을 때야 블랙캣은, 어딘지 모르게 원망하는 듯한 그 시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정말 명확하게. 정말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는 경악한 눈빛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어.


"마...리네뜨?"



///



"마...리네뜨?"


순간의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빌런네뜨는 팔을 뻗어 그를 세게 밀어내. 마치 그 골목에서 키스한 뒤 자신을 세게 밀쳐냈던 것처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던 그녀가 에펠탑 아래로 떨어져. 깜짝 놀라서 후다닥 달려가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는 보이지 않아.


홀연히 사라져버린 빌런네뜨의 잔상을 쫓던 블랙캣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뒤로 돌아가 쓰러져있는 레이디버그를 일으켜.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저건 대체 무슨 괴물이냐고 말하는 레벅에게 블랙캣은 차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어서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해. 변신을 풀고 집에 와서 고민과 착잡함에 추욱 늘어지는 아드리앙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떠다녀.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그건 분명 마리네뜨가 확실하다는 어떠한 확신이 머릿속에 있어.


마리네뜨가 이제껏 빌런들을 만들어서 파리를 위협한 악당이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는 이유 모를 배신감에 화가 나. 절대 아닐 거 같다고 믿고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그 다음에 드는 건 의문이야.


도대체 왜?


그가 아는 마리네뜨는 상당히 조용하지만 의사 표현 확실한데다, 조금 감정이 격해질 때는 있지만 사람을 잘 배려해주는 좋은 아이- 라는 인상이었거든. 기억을 잃고 돌아온 자신을 여러 면에서 도와준 것도 그녀였고. 반에서도 평판이 매우 좋고.


그런 그녀가 왜 굳이 빌런이 되어서 파리를 위협하는 걸까. 굳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이득을 얻으려는 타입은 아니어 보였는데 다 연기인 걸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 그런데 자신한테 키스는 왜 한 거지? 뭔가 이유가 있나? 갑자기 그 때 기억이 떠오르니까 입술에 닿았던 감촉까지 떠올라서 아드리앙 얼굴도 좀 붉어짐. 아아아악 비명을 질러대는 아드리앙을 플랙이 안쓰럽다는 눈으로 쳐다봐. 드디어 미쳤냐는 듯이.


"쯧쯧, 그러게 말했잖아. 그런 가면 쓴 여자보단 치즈가 더 최고라니까~?"

"시끄러, 플랙. 몇 번을 말했지만 나한텐 그녀밖에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아드리앙은 하려던 말을 뚝 멈춰.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몇 번을 말했다고?


아드리앙은 이제껏 레이디버그에 대해 직접적인 연심을 표출한 건 아니었거든. 그녀를 좋아하긴 하지만 사랑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의문의 여자를 상대로도 그런 적 없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드리앙이 날아다니는 플랙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아. 으아아~!! 하고 비명을 지르는 플랙한테 아드리앙이 진지하게 말해.


"너, 뭔가 알고 있지?"


어서 말해!! 다그치면서 플랙을 마구 흔드는 아드리앙 때문에 플랙은 어지러워 죽을맛. 알았다고 소리치니까 그제서야 아드리앙이 플랙을 놓아줘. 플랙이 켁켁거리다가 장난스럽게 말해.


"예전에 네가 같이 다녔던 레이디버그가 그 여자야."

"...뭐?"


엄청난 사실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는 플랙에 아드리앙은 진짜 진심으로 패닉이 온ㅋㅋㅋㅋ 솔직히 아무 기억도 안 나는 상황에서 저런 말은 정말 폭탄선언이지. 짐작은 했었는데 그녀가 정말 제 잃어버린 기억 속의 레이디버그였단 말이야? 근데, 그럼.


대체 그녀가 왜 악당이 된 거지?


플랙에게 물어도 나는 거기까지는 모르겠으니 니가 직접 물어봐~ 라는 대답만 들음. 열은 받지만 맞는말이라 아드리앙은 내일 그녀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하고 잠이 들지.


하지만, 다음 날부터 마리네뜨가 결석하기 시작함.


처음에는 아파서 못 나온다는 말에 기다리자고 생각했지만 3일 넘게 안 나오는 마리네뜨에, 결국 아드리앙은 병문안을 목적으로 마리네뜨 집으로 찾아가. 아드리앙에게 다행인 건 이 때 마리네뜨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셨다는 거지. 일정이 있어서 밖에 나가계심.


누군가 싶어 나가봤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아드리앙을 본 마리네뜨의 안색이 좋지 못해. 얼굴이 핼쓱한 걸 보니 진짜 아팠나 싶어서 아드리앙은 걱정함. 마리네뜨가 곧장 문을 닫으려고 하니까 한 발을 문 사이에 들이밀고, 그대로 비집고 들어와.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서 문에서 손을 떼. 아드리앙이 다칠까봐.


진짜 아팠나 보네. 라고 말하면서 능청스레 대꾸하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가 물어.


"여기 왠일이야?"

"말했잖아, 병문안이라니까."


저번에 네가 와준 답례로. 라고 말하며 아드리앙은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선물상자를 딱 내밀어서 마리네뜨에게 건네줘.


뭐냐고 물으니까, 이럴 땐 뭐 사와야 하는지 몰라서 대충 괜찮다고 추천받은 거 사왔다고 머리를 긁적이는 아드리앙은 이 와중에도 잘생겼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아드리앙을 거실로 데려와.


뭐 마시겠냐고 묻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잠깐 고민하다가 곧 직구를 던짐.


"니가 그 '여자'야?"


냉장고를 열려던 마리네뜨의 손이 우뚝 멈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알잖아, 무슨 소리인지."

"정말 몰라."

"사흘 전쯤에 나랑 만났었지? 에펠탑 꼭대기에서."

"…글쎄."


여전히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마리네뜨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어. 들켰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마리네뜨는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을 뿐.


아드리앙이 한숨을 쉬면서 말해.


"…그럼 일단 질문을 바꿀게. 몸은 괜찮아?"

"괜찮아. 가벼운 감기니까."


진짜 아팠는지 마리네뜨는 잠옷 차림인데 얼굴도 살짝 붉었어. 아드리앙은 가만히 사과해.


"멋대로 찾아온 건 미안하게 생각해. 좀 초조했거든."

"…뭐가?"

"어?"

"뭐가…, 초조한데?"

"네가 거기서 떨어져서, 크게 다쳤을까봐."


마리네뜨는 입을 꾹 다물어. 다정한 그 한 마디에 자꾸 심장이 울컥하니까. 저 말들이 그저 친구로서 사소한 걱정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확신하고 있는 거 같지만. 끝까지 부인하려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다시 한 번 물어.


"왜… 그런 거야?"

"…"

"왜 악당들을 만드는 거야? 목적이 뭐야. 내가 아는 너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드리앙은 말꼬리를 흐려. 그에게서 뒤돌아서 있던 마리네뜨는 그 순간 냉장고 문을 쾅 닫고, 앞으로 홱 돌아서 아드리앙과 시선을 맞추고 그에게로 걸어와. 그와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문지방 위에 서서 아드리앙한테 말해.


"왜 그렇게 말하는데?"

"뭐?"

"네가 아는 나는 어떤데? 기억이 돌아오긴 했어?"

"아니, 그건 아직…"


확 기세가 변한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매우 당황해.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는 정말 화난 것 같은 얼굴로 또박또박 따져.


"내가 무슨 이유로 이러고 있냐고 물었지. 그걸 알면 뭔가 달라지기라도 해?"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드리앙에게 울컥했는지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함.


"왜 이러는 거야."

"…"

"내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마리네뜨?"

"난 네가 너무 미워."


밉다는 그 한 마디에 아드리앙의 어깨가 살짝 튕겨 올라갔다. 마리네뜨는 조소했다.


"그런 어중간한 상냥함이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생각해보긴 했어?"


차라리 미워하고 경멸하고 화를 내. 왜 이유를 묻는 거야. 왜 나한테 그런 식으로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거야? 왜 기대하게 해?


네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면서-.


마리네뜨가 허탈한 듯이 중얼거려. 지친 목소리로.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넌."


모든 추억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외롭고 슬픈 일이다.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역시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리네뜨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한 줄기에 아드리앙은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랐지만, 마리네뜨는 점점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와 별개로 입술은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이젠 지긋지긋해!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혼자 기억하는 건-!!"

"마리네뜨, 진정해. 저기, 잠깐만-."


다가와서 제 두 팔을 붙잡는 아드리앙의 손을 마리네뜨는 거세게 뿌리쳤지만 꼼짝도 안해.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진짜 발을 써서 아드리앙의 무릎을 세게 차니까, 윽 소리를 내며 아드리앙은 손을 놓아줌. 손자국이 날 정도로 제게 붙잡혔던 팔을 감싸고 뒤로 물러나면서, 마리네뜨가 말해.


"돌아가."

"잠깐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마리네뜨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어. 소름끼칠 정도로 억양 없는 목소리.


"너는 히어로, 나는 악당."

"…"

"우리 사이는 그것뿐이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등을 돌리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버려.


거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아드리앙의 표정은 그저 멍해. 폭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야. 위층에서 들리는 콜록콜록 기침소리에 번뜩 정신이 든 아드리앙은 마리네뜨가 올라간 계단 쪽을 망연히 쳐다봐. 한참 뒤에 마리네뜨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니까 식탁 위에 봉지가 놓여 있네. 뭔가 싶었더니 각종 감기약이랑 비타민이야. 휘갈겨진 메모가 하나 있어. 두 손으로 펼쳐서 읽어봐.


[잠시 휴전이야.]


제 딴에는 걱정되서 약을 사왔지만, 그냥 두고 가면 안 먹을까봐 저렇게 적어놓은 거지. 마리네뜨의 손에 들린 메모가 살짝 구겨져.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


“진짜 멋없네. 핑계도 이런 거나 대고 말이야….”


마리네뜨의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해. 차라리 그를 미워할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악당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 그리고 역시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아드리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리고 아드리앙은 정말 진지하게 기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해. 그녀가 빌런이 된 이유는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 속에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에.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지금 같이 활동하는 레이디버그는 절대 자신에게 정체를 밝히려고 들지 않아. 더 이상한 건 레벅이 제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챈 거 같다는 점이야. 이건 일단 접어두고, 아드리앙은 어떻게든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서 플랙을 추궁해. 단서를 가진 놈이 이놈밖에 없잖아. 플랙은 굳어 있는 아드리앙의 표정을 보고 이제야 좀 알고 싶어졌냐고 물으면서 과거의 일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해주기 시작해.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얘기 뿐이야. 예전에 자신이 마리네뜨랑 사귀는 사이였고, 예전에 싸우던 빌런 때문에 죽을 위기까지 갔었다니. 플랙은 그 빌런이 너희 아버지였다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설명을 들으니까 대충 마리네뜨의 태도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 하지만 빌런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감을 못 잡겠어. 끙끙거리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은 낄낄거리며 물어.


뭘 그리 고민해?


"그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조금쯤은 알 것 같기도 한데~?"

"마리네뜨 입장에서?"

"너라면 어떻겠어?"

"…"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3개월이 넘게 비밀에 부쳐졌었다고 했잖아?"

"그렇지."


순순히 인정하자 플랙이 다시 질문을 던져.


"만약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봐."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편한 상대인 마리네뜨를 떠올렸다. 그녀가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욱신거리는 심장에 속이 안 좋다. 토할 것 같았다.


아마 엄청 슬플 거야.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가, 나중에서야 베갯잇을 붙들고 조금이나마 울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아닐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 같은 느낌…


…?!


아드리앙의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생각이 있어. 소년의 얼굴이 쓸쓸하게 일그러지며 힘없는 어조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해.


"무척 마음이 아플 거야."

"그래?"

"펑펑 울지도 몰라."

"우와, 꼴불견이네~!"

"삶이라는 게 다 부질없게 느껴질지도."

"우웩, 그거 참 느끼하네."

"…빌런이 되었어도, 상관없었던 걸까."


자만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 말을 힘없이 덧붙이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은 니 알아서 생각하라고 말하며 다시 치즈를 집으러 치즈가 담긴 통으로 날아가. 아드리앙은 쓰게 웃어. 하지만 이건 모두 다 추측일 뿐이니까, 결국 다시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피할 걸 알지만. 그런데 마리네뜨는 의외로 다시 학교에 계속 나와. 그에 안심하면서도 그녀를 어째야 하나 아드리앙은 고민해. 어쨌든 빌런이고 자신이 물리쳐야 하는 상대잖아. 시간을 끌수록 희생자는 계속 나올텐데.


한편 레벅은 블캣한테 물어봐. 너 요즘 뭔가 숨기는 거 있냐고.


빌런 잡을 때도 설렁설렁이고 어딘가 정신이 딴 데로 가 있는 거 같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에게 필요 이상의 스킨십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었지만 레벅은 굳이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블캣에게 레벅은 웃으면서 말해.


"거짓말하지 마. 뭔가 켕기는 듯한 얼굴 하고는."

"에이, 난 언제나 솔직하다구?"

"…저번에 만났던 그 여자, 너 혹시 짐작가는 사람 있어?"

"? 없지. 그건 왜 물어봐?"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지만 블랙캣은 속으로는 매우 찔려해. 레벅이 말해. 짐작가는 거 있으면 말하라고. 더 이상 악당들이 설치게 놔둘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 박력에 눌려서 블랙캣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니까, 레벅이 웃으면서


"좋아, 그럼 됐고."


라고 말하며 팔을 잡았는데 블랙캣이 저도 모르게 움찔해. 평소랑 달리 당황하는 듯한 모습에 레벅은 쿡쿡 웃음을 터트려.


"너랑 더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서운하지만."

"…뭐?"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블캣이 눈을 동그랗게 뜨니까, 레벅은 너 진짜 둔하구나, 라는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하며 말해.


"널 좋아하니까 그러지."

"어… 에에에에에?!!"

"뭐야, 진짜 몰랐어?"


그렇게 대쉬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말하는 레벅의 목소리에도 블캣은 정신이 없어.


"미... 미안."


받아들일 수 없어. 허둥지둥 대답을 건네는 블랙캣에 레벅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


"…어차피 쉽지는 않을 거라는 거 예상했었으니까."

"응? 뭐라고?"


작아서 뭐라는지 잘 못들어서, 블캣이 고개를 갸우뚱하니 레벅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저 웃어. 그렇게 블랙캣에게는 고민 하나가 더 추가되었지 삼각관계 최고!


그리고 아드리앙은 다시 또 자신의 기억을 알 만한 인물을 찾아. 바로 니노. 그리고 알리야. 알리야는 마리네뜨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지.


둘에게 따로 찾아가서 맛난 거 사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주 가관이야. 사실 이 둘이 사귀는 건 니노랑 알리야만 알고 있었거든.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어보는데 알리야가 네가 돌아왔을 때 마리네뜨가 티는 안 냈어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데 아드리앙은 겁나게 죄책감이 듬. 좋아하던 사람한테서 하루아침에 나 너 잊어버렸다는 선고를 듣는 게 어떤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리네뜨가 지금처럼 말수가 적고 아프게 웃는 타입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 때 알아. 자기가 사라진 뒤부터였다고 말하는데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드리앙에게 알리야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않냐고 쿨하게 넘겨줌. 대신 앞으로 좀 잘하라고 사람 좋게 웃어주는데 아드리앙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야. 그리고 다음으로 찾은 장소는 자기가 길거리에 쓰러졌던 날,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최종결전 장소) 거기를 가보기로 하고 짐을 챙겨.


여기서 마리네뜨 시점. 마리네뜨는 사실 아드리앙이 온 날로부터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궁금한데 묻기가 두려운 거야; 자기가 빌런을 생성한다는 거 알면서도 계속 아무 움직임이나 제재가 없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그가 자신을 역시 싫어하게 될 거라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함. 애써 인사하고 말을 걸면서도 속이 자꾸만 메슥거려. 무엇보다 빌런의 힘이 레벅 때와 달리 마리네뜨에게 너무 부담이 심해서, 그때 감기도 사실 힘에 대한 부작용으로 걸린 거니까.


그러다가 폭발한 마리네뜨는 결국 요정한테 선언해. 나 더 이상 너한테 협력 안 하겠다고.


그러니까 요정이 웃으면서 말해.


"그렇게는 안 돼."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마리네뜨는 정신을 잃어. 순식간에 빌런화된 마리네뜨가 평소랑 다른 거라면 눈에 초점이 없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빌런네뜨는 무언가를 인지했다는 듯이 어느 곳으로 향해.


마리네뜨가 쉽게 요정한테 마음을 먹혔던 이유는 마리네뜨의 정신 상태가 너무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야. 그간은 이성으로 어떻게 버텼지만 아드리앙에게 들키고는 참아왔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터진 거지. 그녀는 지나가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빌런으로 만들고 그 빌런들이 도시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함. 건물이 터지고 자동차가 날아가는 도시를 유유히 빠져나오는 빌런네뜨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어.


한편, 아드리앙은 지금 산산히 부서진 폐허에 와 있어. 바위와 자갈들만이 간간히 바스라져 있는 공터에는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아. 가만히 주저앉아 바닥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보던 아드리앙은 이 공간에 남은 음울한 기운에 절로 인상을 찡그려. 플랙이 기분 나쁘니까 돌아가자고 징징대도 꿈쩍 않고 주변을 살펴보던 아드리앙은 어느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춰. 하얀 바닥에 검게 얼룩져 있는 이건,


분명 핏자국.


거기까지. 뒤에서 날아드는 살기에 아드리앙은 옆으로 몸을 날려서 피해. 돌아보고 깜짝 놀라.


"마리네뜨?"


불렀지만 대답 대신 날아오는 건 날카로운 천이었어. 또 그걸 피해서 근처에 있던 낡은 벽 뒤에 숨어버린 아드리앙이 플랙을 불러 변신해. 그리고 살짝 내다보는데 빌런네뜨의 모습이 좀 이상해. 전에 만났을 때랑 조금 달라. 게다가 방금 넘어졌을 때 다쳤는지 아드리앙은 다리에서 둔통을 느꼈어. 피냄새도 좀 나고.


근데, 피냄새를 맡으니까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해. 그와 함께 강렬한 두통이 머리를 쾅 때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요동치고,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고 터져나오는 비명을 눌러삼켜. 눈앞에 보이는 건 밤이야. 빠르게 달려드는 무기들, 날아오는 무언가, 날카로운 고통, 피냄새.


피냄새와 함께 몰려오는 욕지기에 토할 거 같아.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소리. 절규하는 듯이 기억 속에서 메아리치는 그 비명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워. 쿵, 쿵, 쿵,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서 고통스러워.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머리가 터질 듯 아파.


그런데도 떠오르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어. 고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그 이미지를 놓지 않은 블랙캣의 초록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어.


그리고 그 순간, 블랙캣은 몸을 날려 피해. 숨어 있던 벽이 천에 쓸려 산산조각나.


"…그렇게 된 거였군."


뭔가를 중얼거리던 블랙캣이 봉을 들고 진지하게 빌런네뜨와 싸우기 시작해. 그녀의 등 뒤에서 뻗어나오는 천들을 훌쩍훌쩍 피하고 쳐내면서 블랙캣은 크게 소리질러.


"마리네뜨!! 너 마리네뜨야?!"


움찔, 순간 멈추는 빌런네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곧바로 매서운 공격이 가해졌지만 블랙캣은 굴하지 않아. 가만히 서있는 빌런네뜨에게 블랙캣이 크게 소리쳐.


"내가 밉지?"

"…"

"내가 미우면 차라리 그렇다고 말해!"

"…"

"다 받아줄 테니까, 어떤 변명이든 할 테니까! 그렇게 인형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지는 말란 말이야!!"


마구 소리치면서 나아가려고 하지만 더 이상은 접근이 힘들어. 천들은 살아있는 촉수처럼 블랙캣을 압박했고, 그는 뒤로 조금씩 물러나지게 됨. 블랙캣을 공격하려는 듯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는 빌런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이를 갈듯이 소리쳐.


"내가 좋아하는 마이 레이디는 그런 나약한 여자가 아니라고!!"


그 순간, 빌런네뜨의 손이 움직이지 않아. 천들도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점점 찡그려지기 시작하는데 괴로워 보여.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몸을 일으켜 달려들기 시작해. 다시 그에게로 달려들지 시작하는 천들이 그래도 아까만큼 기세가 매섭지 않아. 얻어맞기도 하고 날카로운 천의 끝에 쓸려 옷이 찢어져 피가 나면서도 블랙캣은 그녀에게로 있는 힘껏 달려가. 그리고 그녀를 와락 껴안아. 빌런네뜨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블랙캣이 가만히 중얼거려.


"……………미안해."

"…"

"기다리게, 해서."


블랙캣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어. 그녀를 안고 있는 손은 경련을 일으키듯 계속 떨리고 있고.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블랙캣은 고백해.


"계속, 혼자 내버려둬서 미안해."

"…"

"이제 괜찮아. 난 여기 있으니까."


떠나지 않아.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빌런네뜨는 잠깐 움찔 몸을 떨어. 그녀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블랙캣의 어깨를 적시기 시작해. 자신을 안아주는 따뜻한 온기에 빌런네뜨의 입이 열리고, 천천히 말이 새어나와.


"아…드리…앙?"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가 몇 번을 깜빡거렸고, 눈물은 계속 쏟아져. 제 가슴께를 축축하게 적시는 눈물을 느끼고 블랙캣의 눈가도 빨갛게 변하지만, 그는 꾹 참고 상냥하게 대답해줘.


“그래, 나야.”

“정말 너야?”


정말 너냐는 듯이 계속해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블랙캣은 끊임없이 답해줘. 나라고, 나는 여기 있다고. 그에 빌런네뜨는 그를 마주 끌어안고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해. 아이처럼.


“아드리앙, 아드리앙…!!”

“그래, 응. 나야.”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빨리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

“나 기다렸어. 계속 기다렸어.”


제 품으로 더욱 파고들며 계속 울고 있는 빌런네뜨를 블랙캣은 더욱 꽉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정말 아드리앙이지? 이거 꿈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더 이상 꿈은 싫어…!!”

“꿈이 아니야.”


확인하려는 듯이 계속 중얼거리면서, 마치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블랙캣을 꽉 붙드는 빌런네뜨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 블랙캣은 반대로 자꾸만 떨리려는 손을 애써 조심하면서 다시금 빌런네뜨를 소중하게 껴안아.


그동안 쌓여왔던 것들을 모두 털어내려는 것처럼 솔직하고, 아주 서럽게 울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너무 미안해서 블랙캣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많이 불안하고 힘들었을 텐데, 계속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여자한테 관심두는 자신을 보고 있기 괴로웠을 텐데. 이렇게 돌아와준 것이 고맙고 너무 미안해서 블랙캣의 눈가에서도 천천히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어.


그렇게 서로 끌어안고 울고 있는데, 빌런네뜨의 변신이 풀리기 시작해.

그 때였어.


"위험해!!"


블랙캣이 빌런네뜨를 껴안고 옆으로 굴러.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휙 날아들었다 거둬지는 물건을 본 빌런네뜨의 눈동자가 크게 떠져.


붉은 요요.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새로운 레이디버그. 근데 상태가 좀 이상하네.


참고로 빌런네뜨의 변신은 다 풀린 게 아니야. 다만 아까보다 몸에 힘이 없고 손이 떨려. 그리고 새로 나타난 레이디버그 얼굴에 선명히 나타나 있는 건 빌런마크. 씨익 웃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블랙캣은 깜짝 놀라지만, 빌런네뜨는 뭔가를 깨달은 듯이 얼굴이 새파래져.


"…속았구나."


사태가 어떻게 된 거냐면, 이 요정은 처음부터 마리네뜨를 그렇게까지 믿지 않았어. 아드리앙이 살아 돌아왔을 때부터는 더더욱. 그래서 그가 나타난 뒤로 자신의 힘을 나눠서 새로운 빌런을 하나 더 만들었어.


물론 마리네뜨 모르게. 마리네뜨가 정신력이 강하긴 했지만, 그녀도 가끔 요정의 통제 하에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간간히 있었거든. 그 때 요정은 자신의 힘을 나누어서 새로운 빌런을 만들었지. 마리네뜨가 그 때 상당히 많은 힘을 거둬줘서 힘을 나누기는 어렵지 않았어 그게 바로 새로운 레이디버그. 진짜 미라큘러스로 변신한 게 아니었던 거야.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사실 아드리앙을 짝사랑하던 어떤 소녀였음. 그에 대한 마음을 빌미로 요정은 그녀를 이용하고 있을 뿐.


사실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본래 모습일 때는 자기가 레벅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것도 알지 못해. 블랙캣의 앞에서 변신을 풀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바로 그거임. 정말 요정 손에서 놀아난 거지. 재빨리 마리네뜨를 끌고 다른 바위 쪽으로 피신하는 블랙캣에게 빌런네뜨가 말해.


"아드리앙. 아니, 블랙캣."

"어, 왜?"


그러면서 빌런네뜨는 자기 가슴쪽에 달린 브로치를 가리켜.


"이거랑 똑같은 걸 가지고 있을 거야. 그걸 부숴."

"너는 어쩌게?"


걱정스레 묻는 블랙캣에게 빌런네뜨가 단호하게 말해.


"지금 이 브로치를 부수면 내게 있는 힘까지도 저 애한테 가게 될지도 몰라. 일단 도망다니고 있을 테니까, 서둘러줘."


칼같이 대답하는 빌런네뜨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나만 믿으라는 듯이 웃는 그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서, 블랙캣은 웃으면서 말해.


"알았다구요, 제 하나뿐인 공주님께서 부탁하니 이거 뭐."

"…어서 가기나 해."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퉁명스레 말하며 뒤돌자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 그에 블랙캣은 밖으로 나가서 그녀를 상대하기 시작하고, 빌런네뜨는 어떻게 그를 도울까 고민함.


지금 자신에게 레벅의 힘은 없지만, 분명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면서 빌런네뜨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지 확인해. 밖에서는 블랙캣이 고전하고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의 공격이 이쪽은 안 노리네.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가 빌런네뜨는 순간 그 이유를 깨달아. 도전해볼 만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바위 밖으로 나와서 레벅에게로 뛰어감. 깜짝 놀라서 피하라고 소리치는 블랙캣의 말도 무시하고 마구 달려나가는데 요요의 공격은 오지 않지.


왜냐하면 엄연히 아직 요정의 본체는 빌런네뜨 쪽에 있었거든. 함부로 공격이 불가능한 거지. 그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한 빌런네뜨는 최대한 그녀의 움직임을 막는 암시를 걸고 블랙캣에게 지시해. 잡으라고. 곧바로 봉을 날려서 레벅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빌런네뜨의 몸에서 땀이 비오듯 떨어지고 있어. 근데 브로치가 안 보여. 어디 있나 허둥지둥하는 블랙캣을 보고 있던 빌런네뜨의 시선이, 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물건으로 향해.


요요.


"블랙캣! 요요야!!!"


그 말을 듣자마자 블랙캣은 일어나서 요요 앞으로 간 뒤에 세게 발로 밟아. 요요가 깨지고 그 안에 있던 펜던트에 금이 가 있어. 검은 나비가 나오는 걸 보고서야 빌런네뜨는 싱긋 웃어.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브로치를 블랙캣에게 던져줘. 블랙캣이 고대의 재앙을 써서 그 브로치를 부수자마자 모든 것이 풀린다. 빌런이 되었던 사람들의 모습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빌런 모습을 한 마리네뜨의 변신도 풀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이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해.


"너 괜찮아?"

"응… 괜찮아."


헤헤 웃으며 대꾸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이 정말로 괜찮아 보여서 블랙캣은 안심해.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져. 하지만 피하지는 않지.


그나저나,


"지금… 도시가 난리가 났을 텐데, 어떡하지? 정화의 힘이 없는데."

"아, 그러게. 근데 잠깐만, 그 레이디버그는 정화의 힘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어, 그러네?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함에 레벅이었던 소녀가 쓰러진 자리로 가 보자 그녀의 귓가에서 붉은 바탕에 검은 점들이 박힌 귀걸이가 반짝여. 어라? 하면서 블랙캣에게서 내려선 마리네뜨가 그 귀걸이에 손을 대자, 그 순간 귀걸이에서 빛이 나더니 티키가 튀어나와.


"마리네뜨!!!"


소녀가 진짜 레이디버그의 힘을 쓴 건 사실이었어.


다만 폭주했을 당시 티키 쪽에도 타격이 커서, 티키는 당분간 깨어나지 못했고 마리네뜨가 정신을 잃었던 사이 요정이 따로 귀걸이를 감췄던 거지. 나중에 써먹었고. 변신한 레이디버그는 신비한 치유의 힘을 써서 도시를 정화함. 그리고 다시 마리네뜨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미 변신이 풀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드리앙이 레벅이었던 소녀를 등에 업고 있어. 그에 질투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피식 웃는데, 아드리앙이 그런 그녀를 보고 웃으면서 말해.


"마리네뜨."

"어?"


뒤를 돌아보자, 아드리앙이 한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고 있어. 잡으라는 듯이. 부드럽게 웃는 아드리앙의 미소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마리네뜨는 곧 환하게 웃으며 그 손을 잡아. 그리고 돌아가지.


그들이 살고 있는, 이제는 평화로울 도시로.




fin.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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