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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1

댓글 다실거면 제발 후기 좀 읽으세요.




Episode 2.

블랙캣과의 만남







“저기!”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청회색 눈동자가 소년의 뒤에 서 있던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고, 위로 삐죽 솟은 더듬이같은 앞머리가 인상적인 동양계 소녀. 푸른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소녀는 딱 보기에도 꽤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소년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걸어가려는 순간 소녀가 소년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잔뜩 망설이는 얼굴을 하면서도 소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그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자신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소녀의 시선 앞에서도 소년은 무표정했다. 별로 달가워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딱히 소녀를 제지하지도 않았다.


한참 뒤, 소녀가 다시금 내뱉은 첫 마디는 매우 간단했다.



“나 기억해?”

“….”



아무런 말도 없는 소년에게 소녀는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개학식 날 기억해? 그 날 횡단보도에서 구해준 거, 고마워.”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 표정변화 없이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소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감사를 표시했다.



“정말 고마웠어. 나 그 날 좀 피곤했었거든. 너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차에 치였을지도 몰라. 아, 그 때 고맙다고 하려고 했는데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우리 학교 학생인 줄 알았으면 진작 인사했을 텐데, 너무 늦게 찾아왔다면 미안해. 그 때랑 같은 시간에 횡단보도에 나가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재잘재잘 떠들며 배시시 웃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년이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별로.”

“에?”

“그렇게까지 감사받을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침착하게 내려앉는 음성이 귀를 간지럽힌다. 역시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대답없이 눈을 깜빡거리는 소녀를 뒤로 한 채 소년은 그 자리를 떠났다. 조용히 자신을 무시하며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소녀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다른 학생들이 모두 복도에서 사라질 즈음에야 소녀의 긴 더듬이가 몇 번을 움직이더니 하트 모양을 그렸다. 얼굴에 홍조를 가뜩 띄우며 좋다는 듯이 웃고 있던 소녀는 마지막 수업종이 쳤을 때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꺅! 빨리 가야겠다!”



허겁지겁 교실로 달려가는 소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그래서, 만나보긴 했어?”



그 질문과 함께 에스미는 입에 물고 있던 빨대로 바나나 우유를 쪽 빨아마셨다. 무심한 얼굴의 제 친구와는 달리 마리네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 멋있어!”



좋아라 눈을 반짝거리는 친구의 모습을 못 봐주겠다는 듯이 에스미는 눈을 치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는 흥분한 얼굴로 눈을 반짝거리며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진짜 막, 딱 한 마디밖에 못 들은 게 너무 아쉬워. 아, 하지만 목소리 정말 좋더라. ‘그렇게까지 감사받을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라고 하는데……. 아, 진짜 나 어떡하지? 정말 사랑에 빠졌나봐!”



꺄악 비명을 지르며 책상에 털푸덕 엎어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서는 행복이 가득 묻어나왔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한 그 얼굴에 에스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젓다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의외인데? 니가 말한 상대가 그 녀석이라니.”

“뭐야, 에스미. 그 애에 대해 알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름 정도는 들어봤지. 아니, 그보다. 넌 우리 학교 전교 수석이 누군지도 몰라?”

“누군데?”



정말 모르는 듯한 마리네뜨의 질문에 에스미가 한숨을 쉬었다. 니가 그럼 그렇지.



“방금 네가 말한 걔. 펠릭스 아그레스트. 입학 때부터 한 번도 수석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괴물이잖아.”

“헉, 진짜? 머리 좋구나….”



멍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리네뜨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에스미의 표정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찝찝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에스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거 말고는 정보가 없어. 니 말마따라 무표정에 말수도 없는 타입이라 성격이 어떤지도 잘은 모르겠고. 같은 반 애들하고도 거의 대화를 안 한다고 하고. 매번 무표정한 모습이 어째 로봇같은 느낌이 나서 애들도 좀 꺼려한다더라. 듣자하니 어디 명문가 쪽 외동아들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여러 모로 수상쩍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알려진 정보가 없어서 괜한 편견을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에스미는 다시 마리네뜨를 힐끗 돌아보았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니 걱정부터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솔직하다 못해 속내를 아주 끄집어내놓고 사는 듯한 녀석이랑 아예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녀석의 조합이라니. 상상이 잘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고.


다 마신 우유의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에스미가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거라면 취미가 독서라는 것 정도? 늘 뭔가 책을 읽고 있다더라. 도서관에도 자주 나타나는 거 같고.”

“그래서 그렇게 똑똑하고 침착하구나. 진짜 멋있다….”

“세상에 콩깍지가 무섭다더니.”



뭘 어떻게 들으면 그런 결론이 나니?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왜? 멋있잖아.”



아무래도 상사병 중에서도 말기 증상인 것 같다. 뭘 어떻게 말해도 요지부동일 것만 같은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는 말려봐야 소용없겠다 싶어 가만히 한 마디를 던졌다.



“…뭐 네가 좋다면야.”

“좋아, 그럼 조사부터 시작해야지!”



책상에 한쪽 팔을 기대고 그 손 위에 턱을 괴고 있다가, 기운차게 소리치는 마리네뜨의 대답에 에스미의 얼굴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에스미가 불길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무슨 조사?”

※ 의지가 준비되어 있을 때, 발은 가볍다잖아?”



환하게 웃으며 투지를 불태우는 마리네뜨를 뒤로 한 채 에스미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저거 어째 불안한데….”




※ 프랑스의 노력 속담 중 하나. 원문은 : When the will is ready, the feet are light



///



펠릭스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펠릭스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한 타입에 속했다. 에스미의 말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본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성격도 아닌 듯했다. 말수가 적어서인지 대화를 해본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반나절 동안 학교 애들을 탐색하고 다녔지만 성과가 거의 없는 것에 마리네뜨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사람이 이렇게도 없다니!


그래도 다행인 건 펠릭스의 가문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꽤 된다는 점이었다. 알고 보니 펠릭스의 성인 아그레스트는 파리에서도 굉장히 오래된 명문가 중 하나였고, 때문에 선생님들에게서는 어느 정도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일단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부모를 일찍 타계했으며 유명한 정치가를 숙부로 두고 있다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알아낼 수 있었다. 현재는 7구 쪽에 있는 커다란 저택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다 미성년자의 신분임에도 숙부와 같이 살지 않는 이유는 아그레스트 가문을 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에 책이 많아서인지 밖으로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는 것 같고, 가끔 외출하는 경우에도 목적지는 학교거나 도서관인 경우가 90% 이상이었다.


취미는….



“책 읽는 걸 좋아한다라.”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리네뜨는 손에 들고 있는 수첩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책이라니. 몇 번을 봐도 참 골치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거하게 한숨지었다. 왜냐하면 마리네뜨의 인생에서 가장 인연이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책이었으니까. 공부는 그냥저냥 하지만.



“음악도 좋아하는 거 같다고 했던가….”



클래식한 음악을 좋아할 거 같아. 손끝부터 발끝까지 딱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다니던 펠릭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그래도 음악회 정도는 같이 가자고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일단 표를 한 번 구해봐야 할 것 같다.



“7구 쪽이라면 엄청 큰 집들일 텐데….”



지금은 5구나 8구가 부촌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부자 동네라고 하면 역시 7구를 빼놓을 수 없다. 에펠탑과 국회의사당 등 18세기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물들이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언제 한 번 7구를 지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도 길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우뚝 솟아있는 클래식하고 거대한 저택들에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딱 봐도 수십 명은 살 수 있을 것만 같이 커다랬었다. 그런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니.



“괜찮을까?”



자신이라면 분명 무척 무섭고 외로울 것이다. 지금도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조금 무서우니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안에 있다 보면, 처음에는 괜찮다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혼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침묵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 예전에는 늘 혼자였기에 그것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에스미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생각보다 많이 외로웠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직 어려서 이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펠릭스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마리네뜨.”



조그맣게 들리는 명랑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샤샥 주위를 둘러보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왼편으로는 센 강이 내다보이며 오른쪽에는 나무들이 빽빽한, 공원 가장자리를 가로지르는 이 길은 마리네뜨가 가장 애용하는 산책길 중 하나였다. 워낙 큰 공원이니만큼 다른 길들도 꽤 많지만, 그런 길들 쪽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산책은커녕 움직이기도 힘드니까.


오늘도 여지없이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리네뜨는 옆구리에 찬 가방을 향해 작게 소곤거렸다.



“티키, 쉿!”



마리네뜨의 말에 대답하듯 가방 속에서 꺄르르 웃음소리가 났다.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은 웃음소리는 듣기에 무척 좋았지만, 그걸 마냥 좋게만 받아들이기에 마리네뜨는 지금 심적으로 그리 태평하지 못했다. 특히 지금 도시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레이디버그의 등장으로 파리에는 일순 난리가 났다. 강도를 잡은 다음 날, 언론들은 하늘을 날아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사진 몇 장을 내걸고 짤막하지만 임팩트 있게 방송했고, 영화 속에나 나오는 히어로의 등장이라며 온갖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있는 신문들도 즐비했다. 파리에서 가장 명성 높은 일간지인 르 몽드와 르 피가로, 리베라시옹의 1면이 모두 레이디버그의 사진으로 가득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마리네뜨가 얼마나 기겁했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마리네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참 살고 볼 일이네. 살다살다 내가 신문 1면에 실릴 날이 오다니….”

“그만큼 모두 너를 환영한다는 소리라구, 마리네뜨!”



가방 안에서 뛰쳐나오며 발랄하게 웃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미소짓다가도 곧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글쎄. 정말 내가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어. 미라큘러스는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는 돌인걸. 마리네뜨, 넌 이 파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미라큘러스에 선택받은 사람이라구! 자신감을 가져 봐.”



회의적으로 말하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확신을 주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런 티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리네뜨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힘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시 변신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히어로가 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했다.



“애초에 네가 말한 세상에 위험이 닥쳤다는 말도 잘 모르겠구. 그게 굳이 이런 히어로가 필요할 정도의 일인가?”



마리네뜨의 질문에 티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절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미라큘러스가 깨어나는 순간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어.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

“마리네뜨. 너밖에 없어.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는 게 그렇게까지 싫은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레이디버그로서 변신했을 때의 감각은 여전히 마리네뜨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정말로 가벼워진 몸과 자유롭게 움직이는 팔다리,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자신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특히 하늘을 날아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정말로 즐거웠다. 맞부딪히는 바람이 상쾌했고,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파리 시내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잖아.


무엇보다 마리네뜨에게는 확신이 부족했다. 왜 하필 자신일까, 라는 의문은 아직도 마리네뜨의 안에 자리잡은 채로 속삭이고 있었다. 히어로라니, 왜 하필 나 같은 애한테? 그런 건 좀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임무 아니었어? 이리보고 저리봐도 자신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애일 뿐인데. 아니, 평범한 건 아닌가. 안 좋은 의미로는 자신도 특별하긴 했다.


마리네뜨는 쓰게 웃었다. 재수가 없는 걸로 파리 시내에서 자신만한 사람이 있긴 할까? 어릴 때부터 온갖 불행과 함께해온 터라 이젠 아무 일 없이 보내는 하루가 더 어색할 지경인데. 사람들을 구하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건수하지도 못하는 히어로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변신할 수 있다고 해도 나 혼자서 대체 뭘 할 수 있겠어? 당장 파리 시내만 해도 범죄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잖아. 그걸 일일이 다 막을 수도 없는걸. 내가 분신술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가 아니야.”

“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티키에 마리네뜨는 귀를 의심했다. 티키는 싱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다.



“동료가 있어.”

“동료?! 동료라니, 대체 누군데?”

“곧 만나게 될 거야.”



싱글싱글 웃는 티키의 모습을 보니 지금은 가르쳐주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다. 그에 마리네뜨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 자리에 멈춰섰다. 마리네뜨?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티키를 한참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티키.”

“응?”

“그런데 왜 꼭 내가 히어로가 되어야 해?”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는 난처한 기색이 가득 묻어났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다른 히어로가 있다면 굳이 내가 히어로가 될 필요는 없지 않아? 오히려 방해만 될 지도…. 모르는데.”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는 것이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영웅이 되야 한다고 하면 그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가 멋있다고는 생각했지만 한 번도 그 히어로에 자신을 대입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사고에 말려든 시민 1의 심정이 더 이해가 갔었으니까. 자신이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악당과 싸우게 된다고?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저번은 어찌어찌 해내기는 했지만 그건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분명 많은 비난을 받을 텐데.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나 같은 애가?


자신이 없었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마리네뜨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티키는 별로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티키가 이내 답을 내놓았다.



“마리네뜨 네가 아까 말한 것처럼,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

“그래서 동료가 필요한 거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놓는 대답은 어느 하나 틀린 것 없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우울해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티키는 다시 활짝 웃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리고 레이디버그가 되어서 좋은 점은 그것만이 아닌걸.”

“응? 그게 무슨….”



그 말을 내뱉자마자 마리네뜨는 뭔가의 예감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즉시 마리네뜨가 서 있던 자리에 무언가가 철퍽 떨어졌다. 하얀 새똥이었다.



“히익!”



급히 위를 올려다보자 제 머리 위를 빙빙 날아다니는 비둘기 한 마리가 보였다. 어떻게 피했지? 멍하게 앞쪽으로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미라큘러스가 단순히 변신만 도와주는 물건은 아니라구.”

“이건….”

“레이디버그의 능력 중 하나인 ‘직감’이야. 무당벌레는 행운을 상징한다잖아? 그건 바로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의 상징하는 능력에서부터 유래된 말이야.”

“행운을 상징한다고?”

“맞아. 변신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상시 발동하지.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레이디버그가 되어서도 위험을 직감하고 피해갈 수 있어.”

“와….”

“물론, 마리네뜨일 때도!”



생각지도 못한 능력에 마리네뜨는 그저 입을 헤 벌렸다. 무엇보다 자신의 불운한 체질과 정말이지 딱 들어맞는 능력이 아닌가. 저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게, 이렇게 스스로 위험을 피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는걸?


마리네뜨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새가 지저귀는 듯한 높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마리네뜨가 저도 모르게 자켓의 한쪽을 살짝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티키, 숨어!”



티키가 재빨리 그 안으로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마리네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들 사이를 살펴봐도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서야 마리네뜨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하하, 힘없이 웃다가 마리네뜨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솔길이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바로 공원 출구가 보일 것이다.


천천히 걸어 모퉁이를 돌자마자 탁 트인 커다란 원형의 공터가 보였다. 초록빛의 나무들 앞에는 나무 벤치들이 줄을 맞춰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마리네뜨 바로 가까이에 있는 벤치 앞에는 많은 수의 비둘기들이 모여 있었는데, 앉아 있던 남자가 마리네뜨를 보더니 살짝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갈색빛의 허름한 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있는 나이 지긋한 남자의 손에는 호루라기를 닮은 피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방금 전의 소리는 저 사람이 낸 걸까?


떨떠름하게 웃다가, 마리네뜨는 이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벤치 위 종이봉투 속에 들어있던 먹이를 비둘기들에게 뿌려주며 즐거워하는 남자를 스쳐 공원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리네뜨의 뒤로 화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저기요, 자비에 씨! 몇 번을 말해야 알겠습니까. 비둘기, 모이주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아니, 그래도….”

“계속 모이를 주면 아무데나 똥을 싸잖아요! 공원 관리인들한테서 항의가 들어오고 있단 말입니다! 당장 꺼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마리네뜨는 재빨리 뛰어서 공원을 빠져나갔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대화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뭐라고 하는지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방금 전 아저씨를 꾸짖는 남자의 목소리는 워낙 소리가 크다보니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소곤거렸다.



“진짜 목소리 크시네.”

“그러게, 기차 화통을 삶아 드신 걸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마리네뜨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면서 마리네뜨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저 아저씨 되게 안쓰럽다. 모이 하나 줬다고 저렇게 비난을 들어야 하다니.”

“그러게 말이야.”



가방을 열고 티키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마리네뜨는 그런 티키를 내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비록 힘없는 미소였지만.



“자신이 없어.”

“마리네뜨….”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티키? 아직은….”



뭐라 정하기가 어려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름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마주 웃어주었다.



“응, 알았어.”

“그래, 그럼 일단 집에나 가자!”



다시 환하게 웃으며 길을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도 없어 보였다. 속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마리네뜨의 주변으로 스산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알든 모르든, 이미 이 아름다운 도시에 깔리기 시작한 어두운 기운을 감지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리네뜨는 재빨리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수학숙제가 많은 거냐며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마리네뜨의 뒤에서 티키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그저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러갔다. 시침이 어느 덧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는 순간에서야 마리네뜨는 의자에 기대 쭈욱 기지개를 폈다.



“으아, 힘들어!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된다…!!”

“힘내, 마리네뜨!”

“고마워, 티키. 아, 진짜 이게 무슨 일….”



마리네뜨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방의 형광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갑자기 꺼져버렸다. 어라? 스탠드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해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전인가? 그런데 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까맣게 물든 시야는 바로 앞에 뭐가 있는지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자신의 경우 잘못 움직이다가는 뭘 밟고 넘어지든 뾰족한 것을 밟든 아무튼 다칠 가능성이 매우 높기도 했고. 창문 밖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걸 보니 파리 시내 전체가 정전이 된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네뜨, 방금 이상한 기운을 느꼈어!”

“기운?”

“적인지 아군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느낌이 좋지 않아.”



이렇게 다급해보이는 티키의 목소리는 또 처음이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양심이 너무나도 찔렸다.



“제발 가보면 안 될까?”



티키의 간곡한 부탁에 마리네뜨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새까맣게 변한 도시를 바라보고는 이내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계속 정전이 지속되면 나한테도 좋지 않을뿐더러,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면 그래도 좀 덜 다친다니까 괜찮겠지. 이렇게까지 어두우면 사람들이 알아보지도 못할 거고. 그렇게 애써 위안하며 조심스럽게 외쳤다.



“변신!”






“진짜 어둡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파리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혀를 내둘렀다.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된 상황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모든 소란들을 애써 무시하며 티키가 말해준 방향으로 조용히 계속 나아가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에는 적외선 안경이 끼워져 있었다. 손전등을 쓰면 분명 사람들 눈에 띌 것이 분명했으니까.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가자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목적한 장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빛이 하나도 없어 마치 어둠에 녹아든 것만 같은 커다란 건물을 올려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역시, 전력소인가.”

“어이, 그쪽도 지금 온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재빨리 등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쫄쫄이를 입은 남자의 얼굴에는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덥수룩한 금발의 머리 위로 쫑긋 솟은 귀가 마치….


고양이 같았다. 레이디버그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그쪽은?”

“어라? 그쪽 요정이 설명 안 해줬어?”



검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한 남자는 싱글싱글 웃더니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고 손등에 살짝 키스했다. 깜짝 놀라는 얼굴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남자는 자기소개를 건넸다.



“나는 블랙캣. 너랑 마찬가지로 요정의 부름을 받고 히어로가 된 사람이야. 레이디버그.”

“날 알아?”

“당연하지, 널 만나게 될 날을 얼마나 기다렸다구.”



찡긋 윙크하는 블랙캣의 모습에 온 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잡혔던 손을 빼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남자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어딘지 과장된 몸짓, 행동은 어딘지 조금 느끼하긴 하지만 나름 귀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단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러다가 레이디버그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블랙캣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질문을 던졌다.



“너, 내가 잘 보여?”

“응.”

“안경도 없이, 어떻게 이 어둠 속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데?”

“나는 고양이거든. 밤눈이 밝지.”

“호오.”



레이디버그가 흘린 감탄사에 블랙캣은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가만히 레이디버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시죠, 레이디.”

“어라, 왜?”

“가방에서 한 번에 물건 하나밖에 못 꺼내는 거 알지? 귀중한 재원을 적외선 안경 따위에 쓸 수는 없잖아. 이 전력소, 한 바퀴 돌아보고 왔었는데 아무래도 낌새가 좀 이상하거든.”

“그래서?”

“난 그런 거 없어도 앞을 잘 보니까. 내가 데려가줄게. 혹시 모르니까, 다른 무기를 꺼내서 위험에 대비하도록 해.”



진지하게 말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안경을 접어 가방에 넣은 뒤 요요를 꺼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생각보다 믿음직한 것 같기도.



“아, 잠깐만 기다려봐. 저쪽에 뭐가 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가던 블랙캣은 다음 순간 우당탕-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졌다. 저 멀리까지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볼멘소리가 터졌다.



“으악, 누구야! 이런 곳에다 상자를 갖다둔 사람이!”



…그것도 아닌가.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블랙캣은 천천히 어두운 전력소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런 블랙캣의 오른손을 꽉 붙들고 레이디버그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전력소 안은 적막했다. 깜깜하기도 깜깜했지만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탁탁- 발과 바닥이 짧게 마찰하는 소리만이 돌을 던진 수면처럼 서서히 퍼져나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곧바로 일대의 전기를 관리하는 메인 제어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부 지도에는 4층에 제어실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전기가 흐르지 않아 엘리베이터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라 두 사람은 비상계단을 통해 제어실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의 손을 꽉 잡고 비상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던 블랙캣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응?”

“이런 대형사태가 벌어졌는데도 건물 안이 너무 조용하지 않아? 당장 이 전력소에 배치된 사람이 몇인데.”

“그러고 보니….”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깜짝 놀라고 있는 레이디버그를 뒤로 한 채 블랙캣은 계속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파리 전역에 정전이 벌어졌는데 몇십 분째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

“게다가 더 이상한 건, 보통 이런 전력소는 전기가 나가더라도 예비 전력은 늘 상비하기 마련이야. 그런데 우리가 처음에 찾아왔을 때부터 전력소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잖아, 안 그래?”



이쯤 되니 블랙캣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레이디버그가 입을 열었다.



“누가 일부러 전기를 차단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바로 맞췄어, 레이디.”

“대체 왜?”

“그건, 이제 밝혀야겠지!”



순식간에 4층에 도착한 블랙캣이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철컥철컥, 잠겨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 문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부술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그랬다간 너무 소리가 클 것이 분명했다. 이 앞에 어떤 상대가 있는지 모르는데 쓸데없이 위치를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곧 결론을 내렸는지 블랙캣은 살짝 레이디버그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만 시선이 맞지 않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잠깐 고민하더니, 짐짓 능청스레 말했다.



“잠깐만, 레이디. 혹시 잠시만 내 손 놓아줄 수 있겠어?”

“응? 왜?!”

“아주 잠깐이면 돼. 버리고 가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구.”



능글맞게 대답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부루퉁한 얼굴을 한 레이디버그가 귀여웠는지 블랙캣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계속 나랑 손을 잡고 싶은 거야?”

“…!! 그런 거 아니거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뿌리치는 레이디버그에 블랙캣은 알겠다는 듯이 작게 웃더니 곧 잠잠해졌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지자, 마치 어둠 속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들고 있던 요요를 다시 적외선 안경으로 바꾸고 싶어지는 충동을 애써 이겨내면서 레이디버그는 작게 소곤거렸다.



“……블랙캣?”

“나 불렀어?”

“꺄악!”



다시 잡아오는 손과 더불어 장난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블랙캣이 키득거리며 레이디버그를 이끌었다.



“자, 어서 들어가자.”

“문 열었어?”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하하 웃으며 앞장서가는 블랙캣의 모습은 인정하기 싫지만 확실히 믿음직스러웠다. 블랙캣의 손을 꽉 잡으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그를 따라 4층으로 들어갔다.


4층으로 들어가자마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복도 끝에 보이는 메인 제어실로 달려갔다. 역시나 제어실의 문도 복도의 문과 마찬가지로 잠겨 있었고,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재빨리 발을 들어 문을 세게 걷어찼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들어간 레이디버그의 발에 뭔가가 걸렸다. 물컹한 감촉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엄마야!”

“으으윽….”



그것도 잠시, 밑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곧 그것이 사람의 다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아팠겠다, 세게 밟은 거 같은데. 저도 모르게 사과를 건넸다.



“괘, 괜찮아요?”

“레이디, 불을 켤 테니 잠깐 눈 감아!”



이미 이것저것 기계를 만지고 있었는지 다급히 소리치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눈을 꼭 감았고, 곧이어 블랙캣의 손이 전원을 올렸다.


전력소에 불이 켜지는 것과 동시에, 파리 시내에 다시 불빛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전력소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두웠던 밤의 바다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블랙캣이 툭 말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뒤를 돌아보자 동력실 근처에 쓰러져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직원들인지 다들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기 위해 몇 사람을 흔들어 깨웠지만, 아무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제어실 안에도 두 사람이 기절해 있었는데, 이들은 그래도 여파가 적었는지 금방 눈을 떴다. 그리고 그제서야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사정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전력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연기 때문에 모두들 정신을 잃고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 있던 두 사람도.


방금 전 파리 시내가 모두 정전사태에 빠졌다는 말을 꺼내자 두 직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됩니다. 분명 제어실 문을 잠가뒀는데, 어떻게….”

“확실해요?”

“물론입니다. 애초에 제어실 문을 아무렇게나 열어둘 리가 없잖습니까? 다들 쓰러지는 걸 보고 놀라서 재빨리 문을 잠갔는데 어째서 동력원이 내려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쇠는 저랑 이 친구 둘이서만 보관하고 있었는데요.”



옆에 있던 직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 두 히어로의 표정은 각각 달랐다. 레이디버그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인 반면에 블랙캣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칫 잘못했다간 더 큰 문제가 발생했을 거라 생각하니 정말로 오싹해지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 분은 누구시죠?”



직원들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블랙캣이 씨익 웃더니 레이디버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블랙캣이고, 여기 아리따운 아가씨는 레이디버그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예쁜 이름이죠?”

“오, 혹시 저번에 은행 강도를 잡아주셨다는 그…?”

“맞습니다. 다들 뉴스 좀 보시는 모양이네요.”



능청스레 대답하며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좀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하려다가, 블랙캣이 다음에 던진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는 입을 다물었다.



“더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저희는 이만 돌아가야 해서요.”



딱 좋게 빠질 타이밍을 만들어주는데 말을 잘못해서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으니까.



“하,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까봐 걱정하는 듯한 두 직원들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조금 더 남아서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블랙캣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화 좀 주시겠습니까?”



직원한테서 핸드폰을 건네받은 블랙캣이 번호 몇 개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수신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이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주고받다가 블랙캣은 핸드폰에서 귀를 떼고 손짓으로 레이디버그를 불렀다.



“경찰에 연락했어요. 전력소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뒀으니 아마 도움이 될 거예요. 레이디, 레이디도 한 마디 해줄래?”

“어, 나?”

“나보다는 레이디가 더 신뢰되지 않겠어?”



짓궂게 말하는 블랙캣을 살짝 흘기다가 레이디버그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받아들고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대하기가 어려운지 우물쭈물하면서도 열심히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가만히 지켜보는 블랙캣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불이 환하게 들어온 전력소 앞에서 작별인사를 건넸다.



“오늘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나야말로. 레이디를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아, 아니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운걸. 신경쓰지 마.”



밝게 웃으며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블랙캣.”



파트너로서.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레이디버그를 바라보는 블랙캣의 눈이 깜빡거렸다. 초록빛 눈동자가 커지더니 블랙캣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정말로 기뻐보이는 얼굴로 웃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얘가 왜 이러지?


블랙캣이 천천히 손을 뻗어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레이디버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방금 전에도 당했지만 더 정중한 태도에 당황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마이 레이디.”

“에? 마이 레이디라니….”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의 손을 놓고 뒤로 돌아섰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블랙캣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며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쟤 뭐야?”





한편, 남은 두 명의 직원들은,



“으악! 이거 손잡이가 왜 이렇게 된 거야?!”



4층 비상계단 쪽 문의 모습에 경악하고 있었다. 문 자체는 멀쩡한데 손잡이가 멀쩡하지 못했다. 다 녹아서 바닥에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문의 손잡이를 보고, 이건 대체 누구 짓이냐며 절규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두 영웅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도시로 향했다. 다시 활기차게 빛나는 파리 시내였지만 그들이 몸을 숨기면서 날아다닐 만한 어둠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흐음….”



그리고 그건 물론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도시의 하늘로 날아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골목 사이의 어둠 속에서 주시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눈물이 그려져 있는 무심한 눈동자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리네뜨는 곧장 변신을 해제했다. 후아, 한숨을 뱉으며 침대로 쓰러지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싱글싱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 마리네뜨! 역시 대단해~”

“아니야, 생각보다 잘 끝나서 되게 기분이 이상하던걸. 그나저나 블랙캣인가, 그 애가 티키 네가 말했던 동료야?”



그렇게 묻자 티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대지.”

“그럼, 아까 네가 느꼈다던 이상한 기운의 정체가 걔인가?”

“으음, 그건 잘 모르겠어. 비슷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게 뭐야.”



꽤 긴장이 풀렸는지 마리네뜨는 편안한 얼굴로 소리내어 웃었다.



“생각보다는 괜찮더라. 꽤 믿음직하고 말이야.”



좀 대하기 어려운 타입이기는 하지만. 웃으면서 기지개를 펴는 마리네뜨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티키가 한 마디를 꺼냈다. 



“하지만 마리네뜨.”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절레 고개를 내젓는 티키를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 행복하다는 듯이 뒹굴거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조금은 히어로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으음, 잘 모르겠어어어-.”



꼬르르륵-


갑자기 울리는 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티키가 배를 부여잡고서 난처한 듯이 헤헤 웃었다.



“그나저나 마리네뜨, 나 배가 좀 고파….”



변신을 하고 나면 기력이 다한다는 말이 사실이긴 사실인 모양이다. 마리네뜨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알았어, 지금 뭐라도 가지고 올게. 기다려봐!”



방에서 내려와 부엌 쪽으로 가니 마리네뜨의 어머니인 사빈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하고 냉장고에서 쿠키를 꺼낸 뒤 돌아가려던 찰나, 마리네뜨는 사빈의 다리에 크게 붙어 있는 반창고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엄마, 그 반창고는?”

“아, 이거? 아까 정전이 있었잖니. 촛불을 찾으러 가다가 좀 부딪쳤지 뭐야.”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는 사빈의 인자한 목소리와 달리 마리네뜨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그런 딸의 모습을 눈치챘는지 사빈은 달래듯이 마리네뜨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다행히도 손은 안 다쳤으니 내일도 문제없이 일할 수 있단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자기가 다친 것처럼 우울해하는 딸을 꼭 끌어안으며 사빈은 마리네뜨의 등을 토닥거렸다.



“우리 딸, 너무 걱정하지 말렴. 그런 표정 지으면 엄마가 더 가슴이 아프잖니.”


‘좀 더 빨리 정전이 해결되었다면, 엄마가 다치지 않았을 텐데.’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사빈의 품으로 파고드는 마리네뜨에게 사빈은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우리 공주님이 왜 갑자기 이렇게 어리광이 많아진 걸까~?”

“엄마. 나를 믿어?”

“믿지, 언제나.”

“그럼, 내가….”



다른 사람들을 구할 만한 사람이라고 믿어?


역시 말하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그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파리 시내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서는 간밤에 소동이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또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를 유유자적 걸어가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신문을 읽고 있지만 청회색 눈동자는 흥미로운 것을 찾았다는 것처럼 조용히 반짝거렸다.


펠릭스의 손에는 르 피가로(le Figaro)지 한 부가 들려 있었는데, 신문의 1면에는 간밤에 있었던 정전 사태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간략히 요약하면 정전이 발생했는데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수사를 촉구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기절했던 직원들을 검진했을 때 모두 강력한 수면 효과가 있는 성분이 발견된지라, 직원들에게 책임을 묻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현재 정전 사태의 원인을 찾기 위해 경찰에서 부단히 애쓰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펠릭스가 흥미롭게 보고 있는 기사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정전 사태에 관련된 기사 밑에 조그맣게 실려 있는 건, 간밤에 벌어진 또 하나의 대형 사건이었다. ‘노아 바자르’ 라는 이름의 70대 노인이 완벽한 밀실에서 살해당한 사건. 비록 정전 사태라는 큰 사태에 가려 살짝 묻히기는 했지만, 예술계에서 유명했던 노인의 부고에 이 기사를 쓴 기자도 안타까워하는 느낌의 논조를 사용하고 있었다.


천천히 길을 걸어가며 기사를 마저 읽고 있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누군가가 주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챘음에도 애써 무시하고 걸어가는 펠릭스의 곁으로 다가온 마리네뜨가 인사를 건넸다.



“펠릭스, 안녕!”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펠릭스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밝게 인사하는 마리네뜨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는 펠릭스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 마리네뜨가 고개를 들어 펠릭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저번처럼 아무런 답이 없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마리네뜨는 그저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내 이름은 마리네뜨야. 앞으로 잘 부탁해!”



뭐를 잘 부탁한다는 건지. 그렇게 묻기도 전에 마구 손을 흔들며 앞으로 뛰어가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왠지 앞으로 피곤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조용히 이맛살을 찌푸리자, 펠릭스가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재밌는 일이 생길 거 같은데~?”

“시끄러워, 플랙.”



조용히 하라고 중얼거리는 펠릭스의 손에는 검은색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난데없이 인사하더니 그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진 소녀를 떠올리며, 소년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상한 녀석.”





- 3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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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는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2편을 6월 말에 올리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여행 일정이 잡혀버려서 이제야 작업을 했네요.

일단 수량조사를 7월 7일에 먼저 올리고 선입금 폼은 7월 25일에 올리려고 예정을 잡고 있습니다. 제대로 마감을 다 마친다면요^_T...


하루에 한 편씩 7월 4일까지 6편 업로드를 마칠 예정입니다. 너무 빡센 스케줄이라 좀 골치가 아픈데 어찌어찌 하고는 있습니다 헤헤... 마감하고 나면 칭찬해주세요 흑흑 후기에 아주 영혼을 갈아넣고 있습니다ㅠ.ㅠ...


봄 에피소드를 모두 올리는 이유는 이 에피소드들이 프롤로그격인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사건은 여름부터 시작되며, 봄의 에피소드는 관계도에 대해 명시하면서 떡밥을 솔솔 뿌리는 정도거든요.


그리고 중요한 거.

영혼 없는 댓글 제발 좀 달지 마세요. 요즘들어 자꾸 이상한 댓글 다는 분이 느셨던데 안 다느니만 못합니다. 한 번만 더 이러시는 분들 나오면 그냥 티스토리 댓글을 닫거나 글을 아예 비밀글로 돌리겠습니다. 근데 이러고 싶지 않으니 제발 다들 매너를 지켜주세요. 댓글이면 다 기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의 무례한 생각이신거죠;


관심 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꼭 레이디버그 온리전에서 책을 들고 올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_T...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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