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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이 링크 후속입니다 : http://eclilps.tistory.com/entry/RD01






[아드마리/캣버그] 경계 위에서






학교.



“안녕, 아드리앙?”



반갑게 자신을 맞아주는 친구, 니노를 향해 아드리앙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손은 흔들었다.



“안녕, 니노.”



니노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교과서를 꺼내려는 아드리앙을 잠깐 살펴보던 니노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그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무슨 일 있냐?”

“어?”

“안색이 별로인데.”



턱에 손을 얹고 흐음, 소리를 흘리면서 자신을 예리하게 훑어보는 니노의 눈동자에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떨떠름히 웃어보였다.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그렇게, 안 좋아 보여?”

“아니, 막 티날 정도는 아닌 거 같아. 뭐야?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없어. 그런 거.”



애써 얼버무리자 니노의 눈초리가 가늘게 좁혀졌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이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니노의 시선을 피해 아드리앙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모습에 니노는 한숨을 내쉬며 아드리앙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더 이상 묻지 않고 앞으로 몸을 돌려앉은 니노의 배려가 퍽 고마워진 아드리앙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금세, 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아득히 흐려졌지만.



“아, 마리네뜨!!”



초록빛 눈동자가 흠칫, 고개를 숙였다. 그와 함께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표정을 애써 수습하며 아드리앙은 살짝 고개를 들어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마리네뜨를 훔쳐보았다.



“안녕, 알리야.”



마리네뜨는 여전했다. 그저 평소보다 눈가가 붓고 조금 기운이 없어 보였을 뿐,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그에 저도 모르게 안심했지만 그는 이내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경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서 자기 책상으로 향하려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살며시 손을 들었다.



“아…,” 



그 목소리에 마리네뜨뿐 아니라 니노와 알리야까지 아드리앙을 돌아보았다. 괜히 뻘쭘해졌지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았다.


아, 어색하다.



“안녕? 마리네뜨.”



우와, 나 제대로 말한 거 맞지? 평소처럼 웃으려고 했는데 괜시리 입꼬리가 떨렸다. 아까 니노랑 인사할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아드리앙을 보며, 잠깐의 침묵 끝에 마리네뜨는 조용히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아드리앙.”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아주면서 제 뒷자리에 앉는 마리네뜨였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괜한 불안이 가중되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 마리네뜨의 반응이 너무 평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 같은 반 친구를 대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는 딱히 이상한 점도 없었고, 당황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어제 헤어졌을 때랑은 달리.



‘네가, 블랙캣…?’



그 말을 하던 순간의 마리네뜨의 표정을 아드리앙은 선명히도 기억하고 있었다. 비단 어제의 일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녀의 표정이, 이제껏 본 적 없었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는 그조차 대번에 알아챌 정도로. 최대한 웃으며 말하려고 애썼던 그와는 달리 마리네뜨는 감정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경악으로 물들었던 푸른빛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고스란히 담았다. 일그러진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이 비틀려져 보였다.


곧장 제 손을 뿌리치고 현장을 빠져나가던 그녀의 눈가에 가득 얼룩졌던 눈물자국이 신경쓰였다. 또 자신 때문에 울었나 싶어서. 그녀가 레이디버그라는 사실은 솔직히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다. 그렇게 찾고 찾았던 그녀가 바로 같은 반 친구였다는 사실은 그에게 묘한 허탈함과, 그 이상을 넘는 초조함을 심었다.


불쑥 뒤를 돌아본 아드리앙의 초록빛 눈동자가 뒤에 앉아있던 마리네뜨를 빤히 마주했다. 프린트를 탁탁 펴서 정리하던 마리네뜨의 손이 순간 멈췄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평소와 같았지만, 뭔가 다른 느낌에 아드리앙은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겹쳐보이는 누군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말을 걸려는 순간 좋은 아침을 외치며 선생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날 피하는 걸까.”



담벼락에 기대서 음료수를 따서 마시고 있던 아드리앙이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킬킬거리며 비웃는 플랙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좀 얄밉다.



“뭐야, 그럼 그냥 멀쩡할 거라 생각했어? 차인 상대한테 좋다고 인사할 것도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겠…, 지?”



어렵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드리앙은 남은 음료수를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무언가 고민을 하는지 빈 캔을 손에 들고 흔드는 아드리앙의 눈가가 살며시 찡그려졌다.



“왜 하필 마리네뜨지.”



신경쓰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같은 반이고, 제 뒷자리에 앉은 여자애라는 인식 정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인사를 하고, 대화를 주고받게 되면서 그녀의 밝은 성격에 조금은 흥미를 느꼈다. 말을 좀 횡설수설하는 경향이 있지만 블랙캣으로 만나봤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도 신기했고. 네 앞이라 긴장하는 거야.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하는 니노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어렵사리 제게 꺼내놓은 진심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네가…, 좋아.’



나를 좋아한다고? 긴장하고 있는지 그녀의 몸이 조금씩 떨리는 모습을 그는 찬찬히 살펴보았다. 좋아한다는 말이 단순한 반 친구에게 던지는 우정의 표시라면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겠지. 조금은 고민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평소였다면 바로 거절했을 텐데, 이상한 기시감이 제 대답을 내놓지 못하게 끌어잡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기다리는 소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드리앙의 입술이 서서히 움직여, 모양을 그렸다.



‘미안. 난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거절의 대답을 이렇게까지 망설인 상대는 네가 처음일거야.


어째서인가에 대해 아드리앙은 잠깐 의문을 가졌다. 그녀의 감정이 단순한 동경이 아니리라는 사실에 괜한 동정심이 일었던 걸 수도 있다. 그게 어떤 심정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하며, 사랑스러운 자신의 하나뿐인 레이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져서 들뜨고 설렐 정도로. 비록 자신을 좋은 동료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지만 포기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래서 그녀의 고백을 허투루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망이 없다고 단념할 만큼 가벼운 감정이 아니라서.


괜찮다고 말하며, 그래도 나는 계속 너를 좋아하겠다 말하며 돌아서던 순간 네 눈가에 스치는 눈물을 보았다. 이유모를 감정들이 나를 덮쳐왔었다. 동요하는 자신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당황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지만 겨우 참아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바보인가, 나는.


어줍잖게 감정을 내어주는 건, 상대한테 더한 상처만 될 뿐이라는 걸 알면서.


그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거절하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때는 유독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며칠 동안 자신을 피해다니는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속에 밀려오는 위화감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었다.



“뭐야? 왜 그렇게 고민해? 잘된 거잖아~. 운명의 상대가 널 좋아한다는데, 그렇게 우울해할 필요가 어디 있어?”



사람 속도 모르게 태평하게 말하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은 짜증스레 대답했다.



“이미 차버렸잖아!”



차라리 고백을 듣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아드리앙의 손가락이 제 머리를 세게 헝크러뜨렸다. 겉으로 보기엔 분명 서로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그렇게 만만하게 풀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아드리앙인 자신이고 제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로서의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원래 모습으로 이미 제게 용기를 내어 고백했고 자신은 그녀의 마음을 거절했다.



“이 와중에 어떻게 사실 나도 널 좋아했었다고 고백을 하겠어?!”



정말 미치겠다는 얼굴로 팍팍 짜증을 부리며, 아드리앙은 오늘 하루종일 본 마리네뜨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렸다. 자신을 피하던 모습까지도.


며칠 동안 표정이 좋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마음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거리를 두는 모습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제가 투정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힘들 사람은 바로 그녀일 테니까.


마리네뜨가 레이디버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희미한 의식 사이로 떠오른 붉은 가면에서 떨어지는 것이 눈물이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가면이 사라지면서 드러난 얼굴을 보면서도 그저 멍했다. 그냥, 나 때문에 또 울고 있는 건가 싶었다. 정말로. 그녀가 마리네뜨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상당히 태평했던 것 같다.


애써 붙잡았지만 달아나버린 그녀를 쫓아가기엔 몸이 성치 않았고, 괴로운 얼굴을 하고 도망치는 마리네뜨를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는 피식 웃었다. 이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렇게 후회해 봤자 이미 버스는 떠났고 돌이킬 수 없다.


플랙이 쯧쯧거렸다.



“그러게, 왜 변신을 풀어버려서 이렇게 고생해~. 아예 몰랐으면 성가신 녀석한테 정체를 들켰구나, 정도로만 끝났을 거잖아?”

“그런 짓을 어떻게 해.”



반지를 빼어버린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녀가 정체를 드러냈는데 모른 척 입을 씻어버렸다간 분명 나중에 크게 후회할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어서. 하지만 지금 그녀의 태도를 보면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나았지 않았나라는 후회가 들었다.


아드리앙의 손이 들고 있던 캔을 찌그러뜨렸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는 제법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질렀다.



“아, 어떡하란 말이야!”










“마리네뜨. 너 계속 이럴 거야?”



책상에 앉아 디자인을 그리고 있던 마리네뜨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곤조곤하게, 마치 엄마처럼 제게 말을 걸어오는 티키를 보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계속, 아드리앙을 피해다니기만 할 거냐구.”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리네뜨를 타이르듯 점잖게 말했다. 잠시 말이 없던 마리네뜨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펜을 놓고 쭈욱 기지개를 폈다. 두 팔을 쭉 내뻗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고, 의자에 기댄 자세로 마리네뜨는 투정부리듯 말했다.



“그럼 어떡해?”



이대로 계속 지내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모른 척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그럼에도 마리네뜨는 쉽사리 그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실연당했을 때도 며칠 간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는데, 지금은 다른 의미로 충격이었다.



“난 아직도 안 믿겨.”



아드리앙이 블랙캣이었다니.


블랙캣이 반지를 빼어버리고, 변신이 풀리는 순간까지도 결코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도 처음에는 눈물에 흐려져 잘못 본 줄만 알았다. 미안하다고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퍼즐이 맞춰지듯 많은 것들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정곡을 찌르는 티키의 말에 마리네뜨는 말문이 막혔다. 쓰게 웃으며 티키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응. 그런지도 몰라.”



블랙캣과 아드리앙은 정말 너무나도 다르다. 침착하고 다정한 성격인 아드리앙과 까불거리고 허세가 넘치는 블랙캣이 동일인물이라니. 변신한다고 그렇게 성격이 변하나? 애초에 옷 하나 바꿔입고 가면 하나 썼다고 그렇게까지 성격이 달라진다고?


모르겠다.


고민하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가 질문을 던졌다.



“마리네뜨.”

“왜?”

“아드리앙이 블랙캣이라서 싫어졌어?”



오늘따라 돌직구를 던지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잠깐의 침묵 끝에 솔직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것도 모르겠어.”



자신이 좋아한 사람은 블랙캣이 아니라, 아드리앙이다. 계속 좋아했고 그 마음이 식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블랙캣과 아드리앙의 모습이 쉽게 머릿속에서 일치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답답했다.


몰랐다면 몰라도, 그와 블랙캣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다만, 아드리앙을 좋아하는 마음 이전에 지금은 그를 보는 것이 껄끄러웠고, 사실은 블랙캣의 모습을 한 그조차 만나고 싶지 않았다. 싫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억누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악당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계속 만나야 하는데.


의외로 만나면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블랙캣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평소의 모습이랑은 정말로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이제껏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아, 너무 어렵다.



“으아! 진짜 미치겠네.”



복잡하게 꼬여가는 생각들을 애써 털어내고 다시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펜을 잡은 순간, 창문 밖으로 무언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변신해야 하는구나. 악당보다도 먼저 떠오른 인물에 흠칫거리며 푹 탄식을 내뱉는 마리네뜨와 달리 티키는 재빨리 소리쳤다.



“아, 왜 하필….”

“마리네뜨, 가자!”










“여, 마이 레이디~?”



그들은 악당이 설치고 있는 장소 근처에 있는 지붕에서 만났다. 능청스레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그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능글맞게 웃으며 제 앞으로 풀쩍 뛰어내리는 블랙캣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검은 가면과 고양이 귀, 허세 가득한 말투까지. 너무 평소랑 똑같아서 좀 무서울 정도다. 이 녀석이 아드리앙이라는 걸 알아서인지 더.


아니, 정말 그인가? 그 날, 역시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둘이 친한 사이라 대타를 세웠다던가….


…그럴 리가 없지. 그 날이라고 딱히 이상한 것도 없었는걸.


의심스럽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시선에도 그는 웃으며 광장을 눈짓했다.



“뭐해? 저거 빨리 안 잡아?”

“너, 무슨 생각이야?”

“왜? 뭐 문제라도 있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서 저거나 처리하자는 듯이 웃고 있던 블랙캣이 레이디버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손끝에 입을 맞추는 블랙캣의 손을 반사적으로 쳐내고서 당황하는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은 살짝 눈가를 찡그리다가도 곧 씨익 웃었다.



“여전하네.”



역시 만만하지 않다니까. 정말 즐거운 듯이 웃어버리는 블랙캣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레이디버그의 눈매가 살짝 누그러졌다. 다음 순간, 무얼 생각했는지 레이디버그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블랙캣이 뭐라 말하려는지 입을 열었지만, 그의 음성은 때마침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묻혀 버렸다. 블랙캣은 입을 다물었고 레이디버그는 그런 그의 모습을 알아채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광장으로 시선을 옮긴 두 사람이었다.



“어서 가자.”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블랙캣을 보고 살며시 웃어주던 레이디버그가 요요를 가로수에 던진 뒤 앞서 뛰어내려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블랙캣의 입가에 미소가 깃털처럼 살짝 내려앉았다가, 사라졌다.



악당을 상대할 때까지도 평소와 같았다. 서로 협조해서 능력을 사용하고 악당의 물건을 부순 뒤 정화까지 마쳤다. 물건들이 복구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블랙캣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주먹을 맞대는 하이파이브도 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서는 레이디버그를 블랙캣이 다급히 불러세웠다.



“잠깐만 기다려, 레이디!!”



잠깐 멈칫하더니, 아무런 대꾸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그녀를 향해 블랙캣은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멀어지려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마리네뜨!”



무시하고 가려던 레이디버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돌아선 상태로 굳어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이 어떤지 궁금했지만, 블랙캣은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그녀가 정말로 그냥 가 버릴 것 같아서.



“할 말이 있어.”



그들의 귓가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더욱 커져만 갔다.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숨조차 가벼이 쉬지 못했다. 가을이 다가온 탓인지, 바닥에 굴러다니던 낙엽들이 사그락거리며 주위를 흘러갔다.



“나는….”



초조한 듯한 음성과 묘하게 진지해진 분위기. 설마 싶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녀에게 그는 담담하게 하고 싶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레이디버그를 좋아해.”



역시 그랬구나.


그가 블랙캣이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짐작하긴 했었다. 블랙캣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차피 받아줄 생각도 없었기에 굳이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말하는 이름이 마리네뜨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렇게 가슴이 아파질 것이라는 사실도. 쓰게 웃는 그녀를 알지 못한 채 블랙캣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첫눈에 반한 건지 어떤지는 몰라. 그냥 좋은걸. 네가 누군지 정말로 알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몰라도 상관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나는 분명 너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널 만나게 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라고, 그렇게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저택 안에서 보는 하늘은 늘 푸르렀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저 밖으로 나설 날이 올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혼자가 익숙했던 소년에게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사실은 꽤나 생소하고 어색한 일이었다. 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도 믿기지 않아서, 정말 이게 꿈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처음으로 겪는 일들, 보이는 세상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활기찼다.


그 즈음이던가. 플랙을 만나고, 너를 만났던 게.



“계속 좋아했어.”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너에게 흥미를 느꼈다. 언제나 포기하고 제 할 말을 꾹꾹 눌러삼키기만 했던 나와는 달리 너는 발랄하고 자신감 넘치고, 할 말은 꼭 하는 타입이었다. 정말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라서, 그래서 네게 끌렸는지도 몰라.


블랙캣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정말로 다르기에 알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걸.


흠칫,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보고 있던 초록색 눈동자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되잖아.


어쩔 수 없다지만.



“네가 나를 피하는 건 나한테 질려서야? 아니면, 내가 블랙캣이라서?”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그는 점점 닳아가는 용기를 간신히 그러모았다.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상황이 퍽 답답했지만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그나마 꾸역꾸역 목구멍 너머로 흘러나와 주는 것에 감사했다. 말하면서도 긴장에 자꾸 혀끝이 굳어갔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말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영영 말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상황이 이렇게 될 거라곤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는데.”



원래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일 거라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지금의 너일 거라고도. 교차점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엇갈려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 걸까.


블랙캣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말해두고 싶었어.”



네가 그랬던 것처럼.



“알아. 우리가 이런 모습일 때는, 네가 날 사랑하지 못한다는 걸.”



그렇게 쉽게 해결될 마음이었다면 내가 누군지 알았을 때, 너는 진작에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띠띠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랙캣은 반사적으로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마지막 초록빛 발바닥 부분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묘하게 소리가 엇박을 타는 걸 보니 그녀의 변신 시간에도 한계가 온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 모습도 나인걸. 지어낸 게 아니야. 아니, 어쩌면 블랙캣의 모습이 내 본성이랑 가까울지 모르지.”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내 단면일 뿐이니까. 자신은 주변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냥 침착한 우등생이 아니다. 억눌러야만 했던 성격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블랙캣이었기에, 나는 이 모습이 되는 것을 좋아했던 거니까.


한 마디도 해주지 않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에 그는 조금 애가 탔다.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내어놓았다.



“역시, 실망했어?”



그제서야 그녀는 대답을 건네주었다.



“…모르겠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툭 던진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그녀는 찌르르 아파오는 가슴을 잡아뜯고 싶었다. 모르겠다는 대답밖에 줄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대답해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처음이었으니까.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블랙캣의 모습은. 동시에, 그녀는 그가 정말 아드리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고음이 끝나고 휘릭 변신이 풀리자, 그녀는 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어졌다. 그도 분명 변신이 풀렸을 텐데, 뒤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뒤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나는, 레이디버그가 아닌 너에 대해서는 잘 몰라.”



사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비겁했던 자신을 이제야 인정하며 소년은 쓰게 웃었다. 망설이는 듯하다가, 결연한 표정을 지은 소년이 천천히 말을 내어놓았다. 소년에게는 더 없이 큰 결심을.



“하지만, 알고 싶다고 생각해.”



너를 좋아한다고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깊게 좋아하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두려워.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가 두려워. 보답받지 못한 애정과 함께,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또 다른 상처를 바라지 않았다. 진심으로 손을 내밀면 확실히 거절당할까봐, 그런 네 대답에 잔인하게 찢겨질 내 마음이 너무 가엾어서 이제껏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겁하게도.



“그러니까 피하지 마.”



그래도 네가 나를 피한다는 게 더 싫으니까.


당장 네가 지금의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그런 식으로 쉽게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네가 너무 좋다.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진짜 너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잘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알아가면 되지 않을까. 실망했냐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하는 그녀에게서 가능성을 읽었다. 희망을 품어도 좋을 법한.


그럼에도 소년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처음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내딛고자 하는 한 발이라서 그런 걸까.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 정도도 못해줄 정도로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헛되었던 건 아니지 않아?”



장난스럽게 말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사실 소년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한 말에도 상처받는 자신이 우스워 그는 픽 웃고 말았다. 태연하게 말하려다가도 몇 번이고 떨리려는 목소리를 천천히 가다듬었다. 긴장으로 자꾸 숨이 막힌다. 힘이 빠지려는 손가락을 그러모아 주먹을 꽉 쥐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느릿하게 말하며 그는 한 걸음을 떼었다. 그 목소리는 꼭, 그가 블랙캣일 때와 닮아 있었다.



“우리는 어쨌든 함께 파리를 구하는 정의의 히어로잖아?”



천천히 제게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손이 제 쪽으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상냥하게 웃고 있는 소년의 얼굴에 마리네뜨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역시 다른 태도에 소년은 씁쓸해지는 속마음을 감추고 상냥하게 웃었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이 모습이 낫겠지?”



조금씩 변해가기를 바랄 거야.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잘 부탁해.”



네가 진짜 나라는 존재를 좋아해줄 날이 올 거라 믿으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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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아드리앙 난 이 다음에 니가 흑화할 거라 예상 중인데ㅋㅋㅋㅋㅋㅋ

그니까 다음편은 절대 쓰지 않을게 너를 더 이상 굴리기는 좀 미안해진다 ㅇㅁㅇ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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