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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딩님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 나타니엘이 히어로인 ‘레드독’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설정입니다. 4시님이 만들어주신 설정을 참고했습니다(...)








“네가 뭘 알아…!!”



분노로 인해 흥분한 목소리, 마디진 손이 과격하게 상대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멱살을 잡힌 블랙캣은 당황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그저 멍하게, 제 앞에 서 있는 레드독(Red Dog)을 쳐다보았다.


섬뜩하게 빛나는 안광이 감출 수 없는 절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타마리아드Say Nothing








“난 니 녀석이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레드독의 목소리가 살짝 부루퉁했다. 늘 침착하기만 하던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도. 벽에 기대서 있던 블랙캣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지금 두 사람은 악당이 활동하고 있는 지점 근처에 있는 작은 골목에 숨어, 아직도 소식이 없는 레이디버그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던 블랙캣이 하하 웃으며 입꼬리를 어색하게 말아올렸다.



“누군 네가 좋아서 이러고 있냐?”



장난스럽지만 제법 날카롭게 대답하는 블랙캣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적의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레드독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 레이디버그는 이런 녀석을.”



생략한 뒷말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블랙캣이 둔한 건 아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야, 내가 뭐?! 나야말로 너같은 샌님은 귀찮다고? 레이디가 원하지 않았으면 누가 너 같은 녀석이랑 같이 일하겠냐?”

“레이디라고 부르지 마.”



짜증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레드독과는 달리 블랙캣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씨익 웃었다.



“뭐야, 호칭 가지고 되게 쩨쩨하게 구네. 그렇게 자신이 없냐?”

“글쎄. 너야말로 나랑 그녀가 친한 게 질투나지?”

“헛소리.”



조금 뜨끔했지만 블랙캣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계속 깐족거렸다.



“애초에 너보다 내가 더 레이디랑 오래 같이 지냈다고.”

“사랑에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해?”



동요하지 않고 차갑게 맞받아치며, 레드독은 피식 입가에 비웃음을 올렸다.



“그리고, 너보다 내가 더 그녀에게 도움이 될 거 같은데?”

“퍽도 그러겠다.”

“맨날 늦게 오는 녀석보다는 낫지 않겠어.”

“고작 몇 분 가지고 정말 쩨쩨하게 구네. 엉? 그런 남자는~, 매력 없다고?”

“레이디버그는 이런 나를 더 좋아하던데.”

“동료로서겠지.”



한 마디도 안 지려는지 계속해서 으르렁거리는 그들의 위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언제 왔는지 지붕 위에서 웃고 있던 레이디버그가 그들 사이로 사뿐히 내려왔다.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두 손을 딱 맞잡고 사과하는 레이디버그를 향해 블랙캣이 허리에 손을 얹고 짐짓 말했다.



“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아니야, 우리도 방금 왔는걸.”



블랙캣의 말을 잘라 끊으며 레드독이 상냥하게 말했다. 방금 전의 험악한 공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차갑고 냉랭하던 표정은 그녀의 등장과 함께 봄이 오듯 사라지고 봄볕과 같은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애정어린 눈길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레드독의 모습에, 블랙캣은 가만히 얼굴을 찌푸리며 팔을 득득 긁었다. 언제 봐도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근데 너희 뭐했어?”

“아, 잠깐 얘기 좀 했어.”



금방 표정을 풀어버리고 헤실거리는 게 꼭 대형견 같았다.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은 뒤에서 목을 잡고 웩웩거리고 있었다. 토할 것 같다는 듯이. 그녀가 돌아보는 순간 곧장 표정을 바꾸고 웃어보이긴 했지만서도.


악당은 이미 다른 희생양을 찾아 장소를 옮긴 뒤였다. 간단히 악당에 대한 특징과 경로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레이디버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어서 가자.”



앞장서서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레이디버그의 뒤를 따르는 두 남자는 여전히 궁시렁거렸다. 셋은 벽을 타고 올라가 지붕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보폭으로 펄쩍펄쩍 뛰어가는 레드독이 저보다 살짝 뒤에서 달리고 있는 블랙캣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빨리 좀 움직여! 레이디버그가 기다리잖아.”

“알아서 따라가고 있거든? 너나 잘하시지 그래?”

“짐이나 되지 마라.”

“누가 할 소릴.”



고양이처럼 빠르고 자유롭게 지붕 사이를 뛰어다니는 블랙캣의 발자취는 그저 앞으로 뛰어가고만 있는 레드독과는 참으로 달랐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처럼 아무런 패턴이 보이지 않는 자유로움. 그를 놀리는 것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도 얄미울 정도로 잘만 쫓아오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드독의 눈가가 마구 구겨졌다.



“역시 좋아할만한 구석이라곤 없군.”

“아, 네네. 그러세요?”



꽤나 재미있단 말이야. 속으로 킬킬거리며 즐거워하는 블랙캣과 인상을 잘게 찌푸리고 있는 레드독, 두 사람에게 앞서가던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돌려 주의를 주었다.



“뭣들 하는 거야, 얼른 와!”

“지금 가!”



동시에 대답해버린 두 사람의 눈초리가 가늘게 좁혀졌다.





*



같이 악당을 상대하다보면 싫어도 깨닫게 되는 일이 있다.


고대의 재앙으로 근처의 벽을 죄다 무너뜨리던 블랙캣의 시선이 저쪽에 있는 두 사람에게서 멎었다. 무언가를 준비하는지 꾸물거리는 레이디버그의 앞에서 원반을 사용해 공격들을 방어하는 레드독의 눈초리가 꽤 매섭다. 기필코 지키겠다는 것처럼, 그녀의 주변으로 몰아치는 공격들을 침착하고 정확히 막아내는 그의 움직임에 블랙캣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작전회의를 하는지 뭐라고 속닥거리는 둘의 모습에 블랙캣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애써 웃어넘겼다. 짜증나는 녀석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능력은 있다. 그녀가 저 녀석을 신뢰하는 이유가 거기 있겠지. 물론 제 능력보다 상성이 맞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삐죽 싹을 틔우는 서운함을 애써 가라앉히며 블랙캣은 칫, 입술을 내밀었다. 초록빛 눈동자가 그를 날카롭게 훑었다. 힘들 텐데 뭐가 그리 좋은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뭐 저리 성취감에 가득 차 있는지. 너무 무른 거 아냐?


아니, 뭐. 기본적으로 머리회전도 잘하고 냉정한 녀석인 건 사실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여러 모로 도움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인지라 블랙캣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녀를 사이에 둔 연적만 아니었으면 꽤 마음이 맞았을지도 모르는데. 같은 남자기도 하고. 조금 아쉬움이 드는 마음을 접어두고 블랙캣은 시선을 다시금 악당에게로 돌렸다.




*



검은 나비를 정화하고 길거리를 회복시킨 후, 셋은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고 헤어졌다. 두 사람과 헤어진 레드독은 학교 근처, 사람이 없는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계속해서 들리던 띠띠거리는 경고음이 들리다가, 멎었다.


소리가 멎는 것과 동시에 변신이 풀리고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 변신했을 때만치 불꽃처럼 붉게 물든 머리카락, 녹빛 눈동자의 단정한 외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나타니엘은 근처에 놔두었던 가방을 챙겨들고 조심스레 밖으로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또 무슨 변명을 준비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다음 날, 학교로 등교하는 나타니엘의 발걸음은 꽤 가벼웠다. 비록 숙제를 하고 그림들을 그리느라 좀 늦게 잠들기는 했지만 학교에 오는 것은 꽤 즐거웠다. 일찍 등교한 탓인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스케치북을 펴들었다.


어제 보았던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몇 장 간단하게 그리고 있자니 반 친구들이 하나씩 들어왔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스케치북에 코를 박고 있던 나타니엘은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움찔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는 나타니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들이찼다.


마리네뜨였다. 피곤한지 눈에 살짝 어우러진 다크써클에 괜히 걱정되는 마음을 누르고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조금은 큰 목소리로.



“마, 마리네뜨. 아, 안녕?”



히어로일 때는 잘만 하는 인사인데 왜 평소에는 이렇게 힘들까. 어색함을 꾹 참고 손을 흔들어주자, 다행히도 알아들었는지 마리네뜨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싱긋 웃는다.



“안녕, 나타니엘.”



좋은 아침이야. 같은 반 친구에게 보이는 호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정말로 기쁜지 나타니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있던 예전에 비하면 대단한 진보다. 이 모든 게 그녀와 공유하고 있는 비밀 때문이지만.


새로운 페이지를 펼쳐들고, 나타니엘의 손은 부지런히 스케치를 시작했다.


평소에는 마리네뜨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정체는 레이디버그, 이 도시의 평화를 수호하는 히어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자신은 레드독. 그런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는 존재. 그녀가 레이디버그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깜짝 놀랐었고, 요정을 만났을 때는 더 깜짝 놀랐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악당을 상대하는 일은 조금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녀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히어로로 변신하면 소심한 자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하면서 그녀의 곁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몹시 들뜨게 했다. 요정에게 선택받은 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꽤 무리없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게 수다를 떨고 있는 마리네뜨를 흘깃 쳐다보면서 다시금 스케치에 눈을 돌렸다. 생각없이 손을 놀렸더니 그림은 이젠 제법 그녀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다. 괜히 즐거워지는 마음에 나타니엘은 설핏 웃었다.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참으로 우연이었지만 지금은 그 우연에 감사하고 있다.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법이니까.


하지만 이런 그의 상념은, 교실 안으로 들어선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깨졌다.



“아, 아드리앙! 안녕?”

“안녕.”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나타니엘은 흠칫 몸을 떨다가, 이내 인상을 쓰고 방금 들어온 상대를 쳐다보았다. 옅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받아주던 소년이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피곤한지 멍을 때리고 있는 소년을 정신없이 훔쳐보는 소녀의 얼굴에 나타니엘의 눈동자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스케치북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앉아 어딘가로 시선을 향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 시선 끝에 누가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따끔거리는 심장이 고통을 호소했다. 쓰디쓴 현실이 혀 끝에 가득 번진다.


소년의 이름은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그녀가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예전부터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좀 더 가까이서 지내게 되면서 그 확신은 더욱 굳어져갔다. 마리네뜨는 레이디버그일 때나 평소 모습이나 거의 똑같지만, 유독 저 녀석 앞에서만은 굉장히 소심한 모습을 보였다. 굉장히 말투가 빨라진다거나, 말이 헛돈다거나, 어딘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그녀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싫어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곁에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마음을 바랄 수는 없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검은 타이즈를 입은 고양이 같은 녀석. 분명 그 녀석은 레이디버그를 좋아한다. 그게 싫어서 처음부터 녀석을 좋아하지 않았던 거지만, 생각해보면 레드독이 돼서 그 고양이 녀석이랑 싸워봤자 뭐가 달라질까?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도 자신도 아닌 바로 저 녀석인데.


나타니엘의 시선이 마리네뜨에서 아드리앙으로 옮겨갔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얼굴은 분명 부드럽게 잘생긴 미형이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아들로 태어나, 이제껏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 인기가 많은 건 이해한다. 그는 분명히 상냥하고 배려심 넘치는 남자였고, 비슷한 입장인 클로이를 모두가 꺼려하는 것과는 달리 그를 꺼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게 그 증거 중 하나였다. 마리네뜨가 좋아하는 상대만 아니었더라도 분명 자신도 그를 좋게 생각했을 것이다.


답답해졌다. 나타니엘은 작게 한숨을 삼키며 스케치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말캉한 무언가가 손 끝에 닿았다. 지우개로 슥슥 방금 전까지 그렸던 그림을 지웠다.


너를 그린 적은 많았지만 한 번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늘 이렇게 그렸다가, 망설이다가, 또 다시 지울 뿐이다.


흐릿한 잔상만을 종이 위에 남겨두고서.








“꺄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업 중 악당의 난입으로 난장판이 된 교실을 몰래 빠져나온 나타니엘은 변신할 만한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가방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튀어나온 녀석을 데리고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보던 차,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플랙! 너 빨리 이리 안 와?”

“싫은데~? 그러니 치즈 한 조각만 주라니깐?”



모퉁이에 몸을 기대고 빼꼼 소리가 나는 쪽을 들여다보았다. 아드리앙이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 검은색의 무언가가 둥둥 떠다녔다. 꽤 먼 거리였지만 대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나타니엘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요정.



“알았어, 알았다구.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던 아드리앙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요정에게 내밀었다. 좋다고 달려드는 요정을 보고 씨익 웃던 아드리앙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요정이 손 쪽으로 빨려들어 사라지더니 그는 금세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고양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곧바로 모습을 감추는 그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나타니엘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스르륵 주저앉는 그를 부드럽게 채근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타니엘. 빨리 가야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제 파트너의 말을 듣고서야 나타니엘은 지금이 변신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겨우 자각했다. 직면하게 된 진실에 가만히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던 녹빛 눈동자가 물결치듯 요동쳤다.



“어….”



그래야지. 힘없이 대답하던 나타니엘의 웃음이 오래 삭은 과자처럼 망연히 부스러졌다.







힘들다.


녹색 눈동자를 부르르 떨면서 레드독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독 오늘따라 집중이 잘 안 됐다. 방금 전 악당을 막아낼 때 무리했던 왼쪽 손목이 저릿거렸다. 집에 가서 보호대를 차면 괜찮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눈빛에 상념이 둥둥 떠다녔다. 한심함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애써 그녀를 보호하고 악당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오래 끌었다면 공격을 허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오늘 그의 정신상태는 엉망이었다.


악당을 정화하고 있는 레이디버그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던 레드독에게 블랙캣이 다가왔다. 뭐라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 녀석의 시야 앞에서 손을 휘휘 흔들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그에게 블랙캣은 언제나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너 뭐해?”

“….”

“오늘따라 집중을 못하던데. 무슨 일 있냐?”

“….”



여전히 말이 없는 레드독이 이상했는지 블랙캣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야, 그나저나 오늘 나 정말 멋지지 않았냐? 대활약이라고~? 갑자기 주인 잃어버린 강아지마냥 소심해지던 녀석이랑은 다르게도 말이야. 안 그래?”



허세 가득한 말투로 하하하 웃으며 블랙캣은 레드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분히 놀리려는 의도가 강했을 뿐인데, 굳이 손을 쳐내지 않는 레드독의 모습에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진짜 화를 냈을 텐데. 놀라서 그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야, 진짜 왜 이래?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너무 순순하니까 무섭잖아. 가만히 중얼거리며 블랙캣의 눈동자가 그를 휙 훑었다. 정신을 정말 어디다 두고 왔는지 멍한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레드독의 모습에 블랙캣은 속으로 혀를 찼다. 원래도 그녀 앞이 아니면 그다지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오늘은 한층 더 심하다. 무표정하다 못해 감정 한 오라기 보이지 않는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창백했고, 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은 마치 인형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 거야. 이제 나랑은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거냐?”



일부러 투덜거리듯 말하며 도발해봐도, 여전한 레드독의 모습에 블랙캣은 이제 슬슬 걱정이 되었다. 음, 조금 손해보더라도 위로나 해볼까. 답지 않게 착한 결심을 한 블랙캣이 씨익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너보다 더 활약했다고 삐진 건 아니지? 뭐 어때. 맨날 너만 활약하는 것보다는 이게 그나마 밸런스가 맞지 않냐? 나도 가끔은 레이디 앞에서 매력어필을 해야지. 뭐 난 늘 매력이 넘치지만~?”



레이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초록빛 눈동자에 서서히 감정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초점이 돌아오는 눈동자에 블랙캣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이 녀석에게서 반응을 끌어내기엔 그녀만한 화제가 없는 것 같다.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블랙캣이 하하 웃었다.



“뭐, 그래도 걱정 마. 니가 좀 짜증나는 녀석이긴 하지만, 적어도 레이디는 아직도 나보다는 너를 더 좋아할….”



블랙캣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순식간에 레드독이 그의 멱살을 붙들더니,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급속도로 냉각되는 분위기에 그저 눈만을 깜빡거리며 레드독의 얼굴을 쳐다보는 블랙캣의 입매가 당황으로 얼룩졌다. 블랙캣의 멱살을 꽉 붙잡고서 레드독, 아니 나타니엘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며 짓씹듯 내뱉었다.



“네가 뭘 알아…!!”



매섭게 일렁이는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명백했다. 적의. 그럼에도 어딘가 슬퍼 보였다. 당황해서는 한 마디도 못하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는 블랙캣과는 달리, 그는 지금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추스르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왜 그러냐는 듯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그 정도로 분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것마저도 욕심이었단 말인가.


왜 하필 네가 그 녀석이야.



“다 끝났어! 뭐야,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명랑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드독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가볍게 걸어 그들에게 다가온 레이디버그는 꽤 심각한 듯한 두 사람의 분위기나 굳어 있는 레드독의 얼굴을 보고 절로 인상을 썼다. 뭔가를 예상했는지 그녀는 가만히 블랙캣을 흘겨보았다.



“뭐야, 블랙캣. 너 또 얘한테 시비 걸었어?”

“하, 참. 네네. 뭘 하면 꼭 내 탓이지? 근데 이번만큼은 아니거든?”

“하이고, 그러시겠죠.”

“진짜라니까! 이 녀석 오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봐. 갑자기 이러네.”

“레드독. 무슨 일 있어?”



다정스레 묻는 레이디버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레드독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먼저 가보겠다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뒤돌아섰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는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를 등진 채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마리네뜨가 그를 좋아한다지만,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으니까. 관심이 있었다면 마리네뜨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조금만 살펴보아도 다 티가 나는걸. 녀석은 누구에게나 상냥하지만 특정한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기지도 않는 타입이었다. 정말 종이 위에 그린 듯한, 동경하지만 결코 닿지는 못할 동화 속의 왕자님.


그가 마리네뜨를 그저 같은 반 친구로서만 대하는 모습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녀도 언젠가는 포기하게 되겠지. 그 땐 그랬었다고 설레여하던 동경을 오래 전 추억으로 여기는 날이 올지도 몰라. 그러면 그 때는 조금씩 주변을 살펴보고서, 이렇게 계속 기다리는 나를 눈치채주지 않을까.


아니었구나.

이미 나한텐 아무런 기회도 없는 거였나.


괜히 서러워지는 가슴에 눈시울이 뻑뻑해졌다. 흐려지는 시야에 살짝 눈을 한 번 깜빡거리자, 초록빛 눈동자 위로 엉겨붙었던 눈물 한 방울이 조용히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지만 묘하게 엇갈려있는 상태라니.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의 정체를 알게 되면 분명 마리네뜨는 그를 선택하겠지. 전혀 다른 모습에 방황하고 힘들어하더라도 결국 그녀의 선택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그를 이기고 그녀의 마음을 제게 돌릴 자신은 없었다. 


결국 나는 평범하니까.


울컥 치미는 괴로움을 조용히 달래었다. 그럼에도 미련을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에 이제는 오기가 생길 지경이다. 그래도 좋은걸. 물러날 수 없는걸. 결연한 눈빛으로 인적이 없는 골목길의 어둠 사이로 스며가는 레드독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아직은 괜찮을 거야. 저 두 사람은 아직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직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어.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고 해도.


그러니까….


촤륵 소리와 함께 변신이 풀리고, 다시금 평범한 소년의 모습으로 빛으로 걸어나오는 나타니엘의 입매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야.

나는 비겁하니까.









====


나타니엘 처음 쓰니까 겁나 어렵네요;; 감정선 너무 어려워;; 아 나타니엘 히어로썰 너무 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 4시님 푸딩님 감사합니다ㅠㅠㅠ 아 외모나 성격이나 너무 아까워요 진짜. 좀 더 비중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ㅂㄷㅂ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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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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