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명의 소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캣마리] 한 여름 밤의 꿈
저녁이 오고 있었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푸른색 하늘 사이로 어둠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밝게 빛나던 태양은 조금씩 자리를 옮기며 고된 하루를 끝낼 준비를 시작했다. 저 멀리서부터 탁한 어둠이 온 하늘 위를 덧칠하며 멀리로 사라지는 빛의 끝무리를 쫓아가고 있었다. 느릿하게 그 뒤를 따르는 하얀 구름이 다가오는 밤에 섞여 흩어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어둠이 싸한 바람과 함께 도시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밤이 찾아왔다.
웅장한 노트르담 성이 보이는, 곤한 단잠에 빠져 있는 소녀의 집 옥상에 새까만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림자는 답지 않게 심호흡을 하더니 조심스레 옥상의 문을 열었다.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서는 방 안을 훑어보았다. 어둠에 특화된 시야 덕분에 그는 문제없이 방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녀도.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검은 그림자는 소녀가 누운 침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씨익 웃더니 뒤돌아서선 톡톡거리며 벽을 두들긴다. 처음에는 미동도 없더니, 몇 번을 오가는 소음이 거슬렸는지 한참을 부스럭거리던 소녀의 눈동자가 살며시 떠졌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침대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녀는 결국 침대를 벗어나 방의 불을 켰다. 그리고,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 안녕? 레이디.”
“꺄악!!”
짧은 비명을 내지르던 소녀가 이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씨익 웃으며 제 앞에 서 있는 블랙캣의 존재에 놀란 것도 잠시, 소녀는 지금 제 꼴이 어떤가를 잠시 돌이켜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옷 차림인데다 머리는 산발이다. 괜히 창피해진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와 자신 사이에 자리한 책상 위에 놓여진 머리끈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 녀석이 내 방에 있단 말인가!
“너무 놀라네? 내가 귀신도 아니잖아.”
“뭐야, 무슨 일인데, 요?”
평소처럼 반말을 하려다가 겨우 존대로 바꿨다. 당황해서는 머리끈을 손에 꼭 쥐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면서 소녀는 눈을 찡그렸다. 짜증난다는 티를 팍팍 풍기면서 자신을 째려보는 마리네뜨를 향해 블랙캣은 난처하다는 듯이 뺨을 긁적였다.
“아, 미안. 너무 놀라게 했나.”
뺨을 긁적거리며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는 블랙캣의 모습에 소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오면 안 놀라겠니? 당연히 놀라지.
조금 진정되자 그제서야 의문이 들었다. 블랙캣이 왜 자신을 찾아왔을까? 설마 내 정체를 아는 건 아닐 텐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에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녀를 빤히 쳐다보던 블랙캣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곱게 접혔다. 천천히 다가가 소녀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은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이야호~!!”
밤의 도시, 달도 뜨지 않은 칙칙한 밤하늘을 밝게 밝히는 것은 온갖 조명들과 건물들 사이로 스며나오는 불빛들이었다. 빛을 피해, 어둠에 몸을 숨기며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아직도 잠들지 않은 사람들을 스쳐, 검은 그림자는 하하호호 웃고 있는 그들의 머리 위를 훌쩍 건너다녔다. 블랙캣이었다. 마리네뜨를 등에 업고서 블랙캣은 지붕 사이사이를 깡충깡충 잘도 건너다녔다. 그런 블랙캣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매달려 있던 마리네뜨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대체 뭐 하자는 거, 예요?”
“왜? 불편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우물거리던 마리네뜨의 입가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겉보기엔 거칠게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사실 블랙캣의 움직임은 굉장히 안정적이었고, 발걸음은 꽤나 부드러웠다. 어지간히 신경써서 달리고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불평을 하기엔 뭐한 상황이라 마리네뜨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경치를 쳐다보았다.
경치와 더불어,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가 설핏설핏 귀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모습이 한데 내려다보였다. 관광객인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도 보였고, 연인인지 다정스레 팔짱을 낀 사람들도 있었다. 좋을 때구나. 자신에게도 저런 날이 오면 좋으련만. 진전조차 없는 짝사랑을 떠올리고서 마리네뜨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라 바람이 제법 많이 불었지만, 여름밤이라 그런지 잠옷 차림이었는데도 춥지도 않고 꽤 시원했다. 머리는 몰라도, 옷은 갈아입고 나오면 안 되냐고 물으니까 그렇게 오래 안 걸린다고 말하며 막무가내로 자신을 끌고 나왔다. 꽤나 들떠 있는 모습이라 조금은 의아해졌다.
정말 어디를 가려는 거지?
“좀 위로 뛴다.”
“예? 으앗!!”
선전포고하듯이 말하고는 그는 깡충깡충 뛰어 점점 더 높은 건물들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더욱 거세지는 바람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블랙캣을 더욱 꽉 붙잡고 눈을 감았다. 레이디버그로 변신할 수 있으면 몰라도, 지금 잘못했다간 큰일나기 십상이었다. 그런 마리네뜨의 모습에 블랙캣은 속으로 설핏 웃고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뭐해, 다 왔는데?”
“네?”
벌써? 그렇게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우와!!”
거대한 도시의 전경이 고스란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밤인데도 점점이 박힌 듯한 수많은 불빛들이 도시의 야경을 수놓고 있었다. 정시마다 불빛을 깜빡거리는 에펠탑, 화려하게 빛나는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해 잠들지 못한 많은 건물들이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치 밤하늘의 별들을 지상으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이 곳이 파리에서 가장 높은, 몽파르나스 타워의 맨 꼭대기 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바람이 꽤 거친지라, 블랙캣이 조심스레 그녀를 내려준 뒤 그녀의 뒤에 서서 두 팔을 꽉 붙잡아 주었다. 홀린 듯이 경치를 구경하고 있던 마리네뜨의 뒤에서 블랙캣이 낮게 웃었다.
“예쁘지?”
“어, 에?”
“좋아할 거 같아서.”
하하 웃으며 자랑스레 대답하는 블랙캣의 대답에 마리네뜨는 순간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떨떠름하게 물어보았다.
“설마,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한 게 이거 보자는 거였어, …요?”
“? 당연하지.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는데?”
블랙캣이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마리네뜨는 그가 붙잡고 있던 손 중에 한쪽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풀어헤친 푸른 머리카락과 얇고 하늘하늘한 잠옷이 시원한 밤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크게 펄럭거렸다.
“무슨 생각…! 이에요?”
“에?”
“그쪽은, 레이디버그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양다리는 안 돼요. 진지하게 말하는 마리네뜨를 쳐다보는 초록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지더니, 몇 번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픽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너 왜 웃냐는 듯이 그를 흘겨보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웃음을 멈추고,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싫어?”
금세 꼬리를 말고 눈치를 보는 것처럼 괜히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래도 나한테 좋은 거 해주자고 이런 거 같은데. 너무 심했나?
“이런 거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망한 듯이 중얼거리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더욱 어쩔 줄 몰라했다. 사실 마리네뜨가 조금만 더 정신이 있었더라면, 기운없이 말하면서도 자신을 더욱 세게 붙잡는 그의 손길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꽤 당황한 상태였다. 호의에는 약한 그녀의 천성 탓도 있었다. 힐끔거리며 자신을 살피는 블랙캣의 눈동자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한참을 고민하던 마리네뜨는 우물거리며 말을 뱉어냈다.
“아니, 싫다기보다….”
그녀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버틸 힘이 부족해 순간 휘청거리는 마리네뜨의 허리를 붙잡은 블랙캣이 자신 쪽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가볍게 품에 안았다.
“여, 괜찮아요, 레이디?”
조심해야지. 씨익 웃으며 놀리듯 말하는 블랙캣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마리네뜨는 괜히 달아오르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살며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여과없이 혈관을 따라 머리까지 흘러 들어왔다. 미쳤어! 얘는 블랙캣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제게 똑바로 와닿는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레이디버그가 아닌 자신은 남자한테 면역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애써 자위하던 차, 마리네뜨는 능글맞게 웃는 블랙캣의 모습에서 중요한 사실을 간파해냈다.
그나저나,
“야, 너 아까는 연기였어?! 왜 이렇게 멀쩡해?”
“글쎄요~?”
건물 옥상만 아니었더라면, 바람만 많이 불지 않았더라면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피하는 블랙캣의 정강이를 진즉에 걷어차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를 갈고 있는 마리네뜨를 향한 블랙캣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어느 새 블랙캣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투덜거리고 있는 마리네뜨의 허리를 살며시 놓아준 뒤 다시 팔을 잡았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어쨌든 오늘의 목적은 이게 아니니까.
“그런 사소한 거 따지지 말고,”
“사소하지 않거든?”
“모처럼 분위기 좋았는데, 조금만 더 즐기지 않을래? 경치 같이 보는 것 정도야 뭐.”
괜찮잖아? 가볍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부드럽지만 강하게 제 팔을 붙잡는 손길에서 마리네뜨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상하다. 뭔가, 뭔가 익숙한데.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야경에 눈을 돌리는 마리네뜨의 뒤에서 블랙캣은 히죽 웃다가, 다시금 제 앞에 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평상시와 달리 길게 풀어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목덜미를 애써 외면하며 그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결코 제게 시선을 주지 않는 소녀를.
다음 날 아침, 학교.
“여, 마리네뜨. 좋은 아침.”
“안녕, 알리야.”
피곤한 눈초리로 인사를 건네며 제 옆에 앉는 마리네뜨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알리야가 질문을 던졌다.
“너 좀 피곤해 보인다. 잠을 잘 못 잤어?”
“아니, 그게 아니라…, 어, 어. 그래! 잠을 못 자서.”
조용히 얼버무리며 마리네뜨는 지금은 제 앞에 없는 고양이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분명 경치 구경은 재미있었지만 덕분에 잠을 많이 못 자서 좀 많이 졸렸다. 차라리 주말에 찾아오든가. 다음에도 이러면 진짜 쫓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편안한 잠을 위해서라도.
어느 샌가 다음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에 기겁하던 중, 마리네뜨의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네뜨?”
“어, 아, 아드리앙!!”
아드리앙이 그녀의 뒤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소년의 미소가 눈이 부신 나머지 마리네뜨는 침침한 눈동자를 몇 번 꿈뻑거렸다.
“아, 좋은, 좋은 아침!!”
말을 심하게 더듬는 마리네뜨가 재밌다는 듯이 하하 웃는 아드리앙의 모습에도 마리네뜨는 그저 헤롱거렸다. 쯧쯧거리며 고개를 내젓는 알리야를 옆에 두고도 그저 행복한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마리네뜨를 보던 아드리앙은 “아,” 라는 감탄사를 뱉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 맞다. 이거.”
“응?”
“떨어뜨렸던 거 같아서. 네 거 맞지?”
아드리앙의 손바닥 위에 빨간 머리끈이 올려져 있었다. 조금 더러워지긴 했지만 틀림없이 그녀의 머리끈이었다. 그러고보니 아침에 머리끈 하나가 없다 싶었는데, 떨어뜨렸었나?
“아, 고마워!”
아무 생각도 없이 그녀는 덥석 아드리앙이 건네주는 머리끈을 받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애써 태연하게 아드리앙의 손에서 머리끈을 받아드는 마리네뜨가 “아드리앙이 내 물건을 주워줬어! 절대 빨지 말고 고이 간직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드리앙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섰다. 앞으로 돌아앉으며 즐거운 듯이 웃는 아드리앙을 향해 니노가 물었다.
“이여, 좋은 일 했네?”
“뭐, 그렇지.”
“근데 저거 대체 어디서 주운 거야? 꽤 더러워져 있던데.”
니노의 질문에 아드리앙은 잠깐 말이 없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그가 팔을 탁자 위에 세우고 손바닥에 얼굴을 괴었다. 소년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마치 고양이를 닮은.
“글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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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들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하셨겠지만 아드리앙은 레벅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레벅은 몰라요~ㅇㅁ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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