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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장 어제 2D 트레일러를 보는 게 아니었어!!





“블랙캣!!”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검은 환영이 아주 천천히,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펠릭마리] 너는 과연 어디에





“어디 있는 거지.”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음산한 기운이 내리깔렸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금발의 소년이 학교 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무뚝뚝한 표정, 얼핏 차가워 보이는 청록색 눈동자가 고민에 빠진 것처럼 조금 멍했다. 사실 펠릭스는 지금 상당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찾고 있는 상대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내를 다 둘러보았지만 삐죽 솟은 더듬이조차 보기 힘들었다.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펠릭스는 가만히 며칠 전 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제 진짜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린 듯한 눈동자, 일그러지는 표정. 말을 걸기도 전에 뒤돌아서서 달아나버리는 그 뒷모습을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자신도 몹시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던 상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레이디버그의 정체가, 하필 그 여자라니.


당당하고 강인하고, 매정할 정도로 언제나 단호하게 제 고백을 뿌리치던 그녀가 하루종일 자신을 따라오던 찐드기였다는 사실은 매사 침착하던 그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니, 어딘지 느낌이 좀 닮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바보같은 생각이라 여기고 넘겼던 것이 실수였을까.


그 후로 이상할 정도로 소식이 없다. 하루 정도는 무슨 일이 있겠거니 하고 그러려니 했지만, 이게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니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껌딱지처럼 매번 달라붙으려고 할 땐 언제고 이럴 때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니. 어차피 이렇게 피해다녀봤자 악당이 나타나면 다시 만나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요 며칠 간 악당조차 감감무소식이었다.


괜한 불안감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런 제 자신에 당황하다, 펠릭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애써 상념을 떨쳐냈다. 그는 다시금 중얼거렸다.


잡히기만 해봐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펠릭스는 마리네뜨가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어디 있을까. 그러다가 그는 문득 떠오르는 사실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뭐가 있지?


언제나 제 주변을 맴돌았던 여자였다. 별로 관심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는 자신에게 진득할 정도로 달라붙어 바보처럼 웃던 여자였다. 시간이 없다 매번 거절하는데도 쫓아오고 또 쫓아오고. 거절의 대답을 들으면 늘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도, 다음 날 또 다시 웃으며 제게 다가오는 녀석의 모습이 황당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게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까지 싫던 건 아니었다. 아니, 물론 귀찮았지만, 저렇게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쫓아와주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은 기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여자가 제 주변에서 사라질 거라고는. 어차피 늘 주위에 있었으니까, 찾기도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우습다. 도시는 넓고, 당장 이 학교만도 크기가 상당한데.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면 얼마든지 피해다닐 수 있다. 아니, 그 전에 그 여자가 이 학교에 다니긴 했던가?


엉키는 머릿속을 애써 정리했다. 관심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데, 막상 찾으려니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력감에 속이 쓰렸다. 좋아하는 여자의 정체를 알았으면 기뻐야 할 텐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까. 왜 이렇게 괴로운 거지? 설마 내가 블랙캣이기 때문에, 너 같은 남자는 질색이라고 했던 남자라서?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나를 쫓고 싶지 않은 걸까.


그 생각을 하자마자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에 펠릭스의 얼굴이 싸하게 굳어갔다. 동요를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는, 펠릭스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고작 여자 하나 아니야!


이해할 수가 없는 감정에 펠릭스는 가만히 제 눈가를 찡그렸다.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부터가 웃기지도 않은 일 아닌가. 애초에 자신은 녀석에게 뭐 하나 기대할만한 행동 하나 해준 적이 없다. 그런 제게 질려서 떠나가 버린다면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차피 사람은 무언가를 바라고 상대에게 감정을 쏟아붓는 존재다. 돌아오는 것이 없다면 포기하는 것이 여러 모로 이로운 일이다.


나는, 녀석이 정말 계속해서 자신을 쫓아와주길 바라고 있었던 걸까?


우스운 결론에 펠릭스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말려 올라갔다. 참으로 어이없는 생각이지만 우습게도 감정은 그걸 온전히 부정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만에 너무나 약해져버린 자신에 조소했다. 이루어지지 못할 환상 따위는 품지 않는다고 자부했었는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계속 그러리라는 자만을 했던 걸까.


좋아한다는 마음같은 건 다 찰나의 것일 뿐인데. 겉모습만 보고 다가오는 사람은 지긋지긋하다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중, 펠릭스의 눈길이 교정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 푸른색 양갈래 머리에,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며 천천히 교정을 걷고 있는 소녀의 움직임이 오늘따라 별로 힘이 없어 보였다. 답지 않게 시무룩한 얼굴이 신경쓰여, 펠릭스는 일단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말을 걸었다.



“야, 거기, 너….”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걷고 있던 소녀는 화들짝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삐걱삐걱, 고개를 돌린 소녀의 시선이 그와 맞닿았다. 펠릭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대답도 없이 홱 고개를 돌리고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손쓸 틈도 없이 내달리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는 황당해하다가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그가 소리질렀다.



“야, 거기 서!!”



서란다고 섰다면 애초에 도망도 안 갔겠지만.


냅다 달리는 마리네뜨의 뒤를 쫓아가는 펠릭스의 이마 위로 빠직 힘줄이 돋아났다. 몇 번 거의 다 잡을 뻔했다가도, 무슨 여자애가 저리 발이 빠른지 요리조리 잘도 피해나간다. 저런 점을 보니 레이디버그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솔직히 그는 지금 상황에 꽤나 신경질이 난 상태였다. 여자애 하나 잡자고 교내를 내달리는 미친 짓을 하고 있다니. 누가 보기라도 하면 대체 무슨 소문이 돌겠는가.


그러니 그 전에 잡아야지.


마리네뜨가 쉽게 잡혀주지 않자 그는 살짝 머리를 굴렸다. 으윽, 일부러 크게 비명을 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지가 좀 더러워지겠지만 세탁하면 되겠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을 태평하게 중얼거리며 그는 아픈 척 신음을 흘리는 것에 열중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제 앞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다 싶더니, 그의 머리 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괜찮…?!”



깜짝 놀라는 마리네뜨의 팔을 왼손으로 세게 움켜쥐고, 펠릭스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놀랐는지 말도 못하고 굳어버린 마리네뜨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는 왠지 모를 허탈감이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이렇게 예상대로 움직일 줄이야. 얘가 정말 그 똑부러지고 자신감 넘치는 마이 레이디가 맞는 걸까. 그녀도 상당히 허당끼가 있긴 했지만.



“잡았다.”



무감각하게 중얼거리며 펠릭스는 툭툭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아픈지 살짝 눈가를 찡그리는 소녀의 얼굴에 순간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조금씩 이 상황이 현실로 와닿기 시작했다.



“이, 이거 놔줘.”

“안 돼.”



제게서 시선을 피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펠릭스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니 긴장으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냥 말하지 말까,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가 그는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말해두지 않으면 아마 영영 말할 수 없을 거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겁쟁이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레이디버그.”



레이디버그.


그 호칭 하나에 정신이 번쩍 든 마리네뜨의 고개가 펠릭스를 향해 돌아갔다. 침착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의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할 말을 잃었다. 농담할 생각은 없다는 듯한 진지한 시선이 제 몸을 옭아매는 것 같다. 덮쳐오는 현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답하고 싶었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뭐, 뭔데.”



불퉁하게 말하면서도 마리네뜨는 애써 그를 마주보았다. 어차피 그가 쉽게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은 자명했다. 묻고 싶은 것도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펠릭스는 몇 번이고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차분하고 단정한 입매가 살짝 일그러지다 제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 반지에 대해서.”



흠칫, 몸을 떠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는 살짝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에게도 별로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 주제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기.”



어떻게든 입을 열려던 펠릭스의 말을 다급히 가로막은 건 뜻밖에도 마리네뜨였다.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우물거리던 그녀는 잠깐 침묵하더니,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넸다.



“네가 블랙캣이라고 했잖아.”

“그래.”

“티키가 나한테 했던 말이 있어.”

“…?”

“나랑 달리 너의 변신은 저주에 가깝다고.”



펠릭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며 조금씩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내가 키스해주지 않으면 결코 풀리지 않을 저주 말이야. 불운의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그러더라. 그러니까, 분명 날 이용하려고 나한테 접근하는 거일 테니까, 그러니까….”



너한테 절대 마음을 주지 말라고.


굳어버린 입매를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어서, 마리네뜨는 살짝 제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은 척 환하게 웃으며 마리네뜨는 다시금 펠릭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아니지? 티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지?”



그럴 리가 없잖아. 헤헤 웃으며 미소짓는 그녀와는 달리 펠릭스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싸해진 분위기에 흠칫 놀라는 마리네뜨의 입가에서 웃음이 점차 엷어져갔다. 그가 무겁게 다물렸던 입술을 열어 말을 덜어냈다.



“그래, 그랬지.”



처음에는.


그 한 마디가 그녀에게는 마치 사형선고처럼 강하게 내리꽂혔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후려맞은 듯한 충격에 그녀는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애써 정신을 추스르려고 했지만 머리가 빙빙 돌았다.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허해져버린 가슴 속을 갖가지 감정들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혀를 낼름거리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온갖 불길한 가정들이 머릿속을 빼곡히 채워갔다. 그가 블랙캣이었어. 하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나를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야?


그럼 저주를 풀면, 나는 더 이상 네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는 걸까.


마리네뜨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 하, 하하하. 하하하하. 메마른 웃음소리가 마리네뜨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담담해 보이던 펠릭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은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거 놔.”

 


탁-.


마리네뜨는 이제껏 중에 가장 진심을 담아 그의 팔을 세차게 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눈물이 가득 맺힌 푸른빛 눈동자가 단호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투명한 눈물이 공중에 흩뿌려졌다. 그 모습에 펠릭스는 흠칫, 그 자리에 멈춰서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늘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가 저렇게까지 동요를 내비치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리며 마리네뜨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꾸만 떠오르는 방금 전 그의 표정을 지워내려 애쓰던 마리네뜨가 조그맣게 말했다.



“미안해.”



그 말만을 남기고 마리네뜨는 말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푹푹 꺼지려는 발걸음을 꾸역꾸역 옮겨가며, 그녀는 뒤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펠릭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너무 많은 감정들이 범람하는 통에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들이 바닥에 납작 달라붙었다. 얼마 전 그의 정체를 알았을 때,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며칠 간 그를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도 그래서였고.


블랙캣이 싫은 건 아니었다. 제게 고백하는 것만 빼면 그는 정말이지 좋은 파트너였고 믿음직한 동료였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처음에는 질 나쁜 농담이리라 생각했다. 그가 블랙캣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더 그랬다.


물어본 것은 다름 아니었다. 그가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길 바래서. 아니, 정말 사실이더라도 그가 부정해주었다면 자신은 분명 믿었을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자신은 바보니까.


그런데,

왜 부정하지 않는 거야.


울컥 올라오는 뜨거움에 속이 너무 쓰렸다. 이러면, 정말 너를 원망해야 하잖아. 화를 내야 하잖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너를 좋아하는, 이런 내 마음은 어떡하란 말이야.


펠릭스가 블랙캣이라는 사실보다, 그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제 모습이 너무 서글펐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울컥 치미는 감정들이 뒤죽박죽 섞여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너무 아프다.


그가 자신을 거절해도, 그저 귀찮은 여자애로만 여겨도, 관심은커녕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아도 지금처럼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익숙한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잔인함에 상처입었다. 정말로 제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건가 싶어서 문득 서러워졌다. 그러다가 그녀는 피식 웃었다. 바보같다.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언젠가는 그래도 날 돌아봐줄지도 모른다는, 그렇게 멋대로 이기적인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걸까.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고 힘들어하는, 이런 연약한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먼저 시작한 건 나였으니까.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꾹 참아내고 앞으로 걸어나가는 마리네뜨를 청록빛 눈동자가 멍하니 쳐다보았다.


끝내 내밀지 못한 손끝에는 허공만이 휘감겼다.




*



“히얍-!!”



기합소리와 함께 그녀는 발을 휘둘렀다. 휘황찬란하던 보름달은 지금 검은 구름 사이로 가려진 상태였다. 칙칙한 어둠을 비춰주는 몇 개의 빛들을 배경삼아 레이디버그는 지금 악당과 살떨리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자비하게 팔을 휘두르며 자신을 공격하는 악당에게 다시금 발차기를 날리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빠르게 날아드는 주먹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꽤 버거웠다. 악당은 따로 무기도 없는 오로지 맨손이었지만 주먹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온 건 실수였을까.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결국 혼자서 일을 처리하러 나왔다. 그래도 이젠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고전하는 자신의 모습에 조소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너무 바보같아서. 그렇게 거절해놓고.


날아오는 주먹을 간신히 피한 레이디버그의 등 뒤에 있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휘날리는 먼지들 사이를 간신히 빠져나온 그녀의 등 뒤로 휙, 주먹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맞는다.

그렇게 생각했다.


시커먼 구름이 걷히고 보름달이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와 악당 사이를 가로막은 검은 형체에 레이디버그는 넋을 잃었다. 쿨럭, 소리와 함께 그의 입가를 따라 붉은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블랙캣!!”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검은 환영이 아주 천천히 그녀 위로 고꾸라졌다. 검은색 타이즈 위에 짙은 혈향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의 눈동자에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에 희희낙락 웃으며 다시 공격을 퍼부으려던 악당은 그녀의 혼신을 다한 발차기에 얻어맞고 멀리에 있는 벽들 사이로 날아가 파묻혔다. 우르르 무너지는 벽들 소리를 뒤로 한 채,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데리고 몸을 숨겼다. 그의 머리를 무릎 위에 누이고 레이디버그는 그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타이즈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아마 꽤 큰 상처일 것 같다. 이렇게 고약한 걸.


피 냄새가.


감겨 있던 블랙캣의 눈이 조용히 떠졌다. 잠깐 정신을 잃었었는지 멍하던 눈동자를 몇 번 깜빡거리던 블랙캣이 흐릿하게 웃었다. 평소처럼 기운 넘치고 장난스러운 미소가 아니어서, 정말로 큰일인가 싶어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이 꽤 놀라웠는지, 블랙캣은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괘, 괜찮아? 어떡해, 너, 너. 피가…!!”

“아, 이거…?”



됐어.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다, 등에 둔탁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블랙캣은 조용히 신음하다 다시 누웠다. 생각보다 무리했나. 어쩔 수 없다며 조용히 웃는 블랙캣의 모습에서 그녀는 순간 펠릭스의 모습을 읽었다. 잘 웃지 않지만, 책을 읽을 때 설핏 보여주던 그 다정한 웃음. 그 미소가 좋아서,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를 따라다니는 걸 멈추지 못했었다.


블랙캣이 한 손을 뻗어 레이디버그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흠칫 놀라는 레이디버그를 부드럽게 쳐다보던 그가 정말 괜찮다는 듯이 나지막히 웃었다.



“레이디가 무사하니까.”



그거면 됐어. 그거 하나면 되었다고 말하는 블랙캣의 미소에, 레이디버그는 심장 한 구석이 저릿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런 자신에 기겁하며 그녀는 그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레이디버그의 생각을 꿰뚫어봤는지 블랙캣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를 믿지 않아도 좋아.”



어쨌든 이용하려고 한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말하며 이챠,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블랙캣의 입매가 없을 리 없는 고통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그래도 견딜 만은 하군. 세뇌하듯 중얼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부리면서도, 블랙캣은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이디버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믿을 때까지 곁에 있어줄 테니까.”



선명한 달빛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어딘지 익숙하지 않아 보이면서도 묘하게 상냥한 눈빛은 마치 그가 책을 읽을 때의 그 모습과 조금 겹쳐보여서, 레이디버그는 그저 멍하게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잡아도 되는 걸까?


너를, 믿어도 돼?


그 순간,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두 사람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벽들 사이에서 빠져나온 악당이 그들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나오지 않는 것에 열받는지 악당은 짜증스레 주위 벽들을 모조리 부수기 시작했다. 그런 악당의 모습을 진지하게 쳐다보는 블랙캣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결심했는지 그녀는 조용히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손에 닿는 온기에 놀라서 돌아보는 블랙캣의 시선을 무시하며 그녀는 몸을 탁탁 털었다.


어쨌든 나를 구해줬으니까.

설령 당장 너를 온전히 믿지는 못하더라도, 지금은.


놀라는 블랙캣에게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며 웃어보였다.



“가자.”



파트너. 그 대답 하나에 블랙캣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검은 타이즈에 스며든 핏물과 등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도, 너무나 기쁘다는 듯이 블랙캣은 천진난만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쪽이 진짜 너일까.


무뚝뚝하고 서늘한 너와 지금의 발랄하다 못해 천진난만해 보이는 너. 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 거지?


그런 그녀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랙캣은 다시 악당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씨익 웃고는 있지만, 지금 그의 눈빛에 어린 감정이 과연 무엇이었을지는 모르겠어도.


그가 가만히 대답했다.



“그래.”






===


2D 레이디버그 PV를 본 제가 죄인이죠(묵념


와 진짜 트레일러만 보고 쓰려니까 애들 성격이 너무 짐작가지 않는 부분이 많아 힘들군요; 썰의 일부분을 잠깐 재현해 보았습니다. 얘네 분위기 다크해서 참 취향인데 쓰자니 머리 아프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2D도 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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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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