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c="https://code.jquery.com/jquery-1.12.4.min.js" integrity="sha256-ZosEbRLbNQzLpnKIkEdrPv7lOy9C27hHQ+Xp8a4MxAQ=" crossorigin="anonymous">

'레이디버그'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15.10.24 [아드마리/캣버그] 너는, 그리고 나는- 1
  2. 2015.10.24 [아드마리] 진실 저 너머에

※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의 팬픽입니다.

※ 본편물이에요.



[아드마리/캣버그너는, 그리고 나는-






“네가…, 좋아.”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겨우내 내뱉은 목소리의 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던가. 한참이 지나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소녀는 다시금 숨을 들이켰다. 오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꽤 어려웠지만, 어딘지 후련한 것은 사실이었다.


긴장한 탓일까, 주변의 공기가 온 몸을 죄여오는 것만 같았다. 두 손을 뒤로 숨기며 살며시 마주잡았다. 터질 것 같이 뛰어대는 심장과 지금 이 순간의 정적을 견디는 것은 그녀에게도 꽤 고역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익숙하지는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에 그녀는 소년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기에, 소녀는 당장이라도 뒤돌아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그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꽉 쥐어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미안.”



그 한 마디에 그녀는 퍼뜩 고개를 치켜들고 소년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곤란한지 표정을 살짝 일그리면서도,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조금은 서글프게 눈가를 일그렸다. 진심이구나.


저런 면이 좋았다.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누구에게나 진지하고 다정한 너의 그런 점이 좋았다. 밝고 상냥하지만 네가 보이는 것만큼이나 편안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너는 남의 진심을 함부로 무시한 적이 없었다. 이제껏 네게 고백했던 애들에게도 모두 그랬음을 안다. 그게 네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라는 것도 알고. 그런 너의 상냥함을 알기에, 너를 좋아하게 됐던 거니까.


하지만 지금은 너무 아프다.



“난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욕심이었는지도 몰라.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었는데, 처음에는 인사로 시작했다가 점점 대화를 주고받게 되면서 약간의 희망을 품었던 건지도 모른다. 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그런 희망.


한쪽 눈가를 찡그리면서, 아드리앙은 뻘쭘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 아니야.”



괜찮아. 마리네뜨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에게 부담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마음대로 좋아하게 된 건 자신이고, 그가 책임져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절당할 거라는 것도 막연하게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막상 앞에서 듣는 거절은 좀 아프네.


쓰게 웃으면서도 마리네뜨는 애써 태연한 척 아드리앙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감성 위에 차곡차곡 진심을 쌓아올렸다.


네가 알아줄 거라 믿으며.



“그냥 말하고 싶었어.”



담아두기만 해서는 언제까지고 이 감정에 끌려다닐 것만 같으니까. 차라리 뱉어내면 조금은 후련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후련하긴 하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힘들구나. 상상했던 것보다 더 단호하게 대답하는 네 눈동자에 서려 있는 건 명백한 애정이었다. 쓰려오는 마음 위로 작은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여자애일까.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아주 멋진 사람일 거야.



“그래도 난 정말로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다고 그를 포기했을 거라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감정이었다.


너를 그 사람에게서 빼앗겠다거나 그런 생각같은 건 별로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네 얼굴에 엿보이는 때묻지 않은 진심에 차마 상대가 누구냐고도 묻지 못했다. 알고 나면 더 괴로워질지도 몰라서.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진심이야.


설령, 내 마음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해도.


괴로울 정도로 들썩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환하게 웃어주었다.


울지 않아.



“네가 어떻든 간에, 나는 계속 너를 좋아할 테니까. 그것만은 기억해줘.”



적어도 네 앞에서는.


뒤로 돌아서자마자 뜨거워지는 눈가를 애써 무시하며, 마리네뜨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다가 곧장 앞으로 달려나가는 마리네뜨의 눈가로 투명한 눈물들이 조용히 스쳐갔다.




*



털어내지 못한 감정의 싹을 잘라냈어야 했다.



“위험해, 레이디버그!!”



방심했다.


블랙캣이 소리를 질렀을 때는, 이미 제 팔다리에 강력한 끈끈이가 붙어버린 후였다. 예상치 못한 실수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제 모습이 웃긴지 깔깔 웃어대는 악당의 모습에 어떻게든 끈끈이들을 끊어내려고 발버둥치는 레이디버그에게 악당은 손을 뻗었다. 저게 공격하려는 신호인 것은 알았지만, 몸에 붙어있는 끈끈이들 탓에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날아오는 광선들을 망연히 지켜보다 질끈 눈을 감았다.


…아프지 않아?



“브, 블랙캣!!”



눈을 뜨자마자 제 앞에 보이는 검은 뒷모습에 레이디버그의 입가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반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몸이 풀썩 뒤로 넘어졌다. 그녀는 자유로워진 팔다리로 쓰러지는 그를 받아들어 바닥에 뉘었다. 쏟아지는 광선을 온 몸으로 막아내면서도, 그는 그 와중에 고대의 재앙까지 써서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끈적이들까지 제거했던 것이다. 그 재치에 감탄하거나 지금 그의 상태를 살피고만 있기엔 아직 적이 남아 있어서, 그래서 그녀는 다시 악당에게로 달려들었다.


다른 장소로 이동해, 겨우내 악당을 정화하자마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제가 방금 있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를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얼굴을 무릎에 눕힐 때까지도 녀석은 그 흔한 신음소리 하나도 들려주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이, 죽은 듯 가만히 있는 블랙캣의 모습에 불안함이 안개처럼 제 몸을 휘감아왔다. 이건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아무리 장난을 좋아한다 할지라도 분명 이쯤에서 눈을 뜨고 ‘나 불렀어, 레이디?’ 라고 말하면서 눈을 뜨는 녀석이잖아, 너.


일어나, 블랙캣. 일어나라고. 그를 천천히 흔들면서 계속해서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덜컥 심장이 조여들었다. 분명 죽은 게 아닌데, 숨을 쉬고 있는데.


왜, 일어나지 않는 거야.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을 피하지 못했던 건 제가 한눈을 팔았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이 자리에 쓰러져 있어야 하는 건 나여야만 했는데, 쓰러져 있는 블랙캣의 모습에 새삼 제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를 자각했다. 실연의 상처를 부둥켜안는 건 마리네뜨 혼자로 족해야만 했는데.


레이디버그가 되기로 했을 때 맹세하지 않았던가. 이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마리네뜨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자고. 누구든 의지할 수 있고, 의지가 될 수 있는 인물이 되자고. 그 경계를 허물어버린 대가가 이것이던가. 마리네뜨로서 가졌던 미련 한 가닥을 끊어내지 못하고, 내가 감당해야만 했던 것들까지 네게 빚지고. 쉽사리 눈을 뜨지 못하는 블랙캣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울컥 뜨거워지는 가슴에 절로 목이 메었다. 떨리는 주먹을 세차게 그러쥐었다.


한심해.


나 자신이. 그 생각과 함께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검은 가면 위로 투두둑 떨어졌다. 요즘 너무 자주 우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뼈저리게 와닿는 무력감을 견딜 수가 없어, 그저 조용히 눈물만을 쏟았다. 약한 자신이 그저 서러웠다. 히어로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만은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조차도 아니었나 보다.



“미안해.”



눈을 감고 있는 블랙캣에게 가만히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내 이런 나약함에 너를 끌어들여서. 결국 너까지 다치게 만들어서.


너는 늘 나를 강하다고 말하지.

하지만, 난 전혀 강하지 않아. 자기 마음 하나 다스리지도 못하는 바보일 뿐이야.


무언가 띠띠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마냥 울고 있는 그녀의 눈가에서 떨어진 눈물들이 블랙캣의 얼굴을 가득 적셨다.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눈물 몇 방울이 입술에 살며시 고이자, 그와 함께 블랙캣의 미간이 살짝 씰룩거렸다. 앓는 듯이 작게 신음소리를 흘리던 그가 살며시 눈을 떴다. 뿌옇게 흐릿하던 초록빛 눈동자는 몇 번을 깜빡거렸다.


가면 너머의 소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는 거야?”

“….”

“넌 볼 때마다 우는 구나….”



또 나 때문인가. 꿈결처럼 멍하니 중얼거리던 블랙캣의 눈동자가 어느덧 선연한 초록빛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미묘하게 바뀌는 표정과 함께 목소리에 경악이 물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대답이 그의 혀끝으로 굴러나왔다.



“마…, 리네뜨?”

“…어?”



무슨 소리지? 소녀의 손이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끝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마리네뜨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방금 전에 들렸던 소리는, 변신이 풀리기 전의 경고음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영웅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던.


누워있던 자리서 몸을 일으키며, 무언가 더 말하려는 블랙캣에게 그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말하지 마!!”

“어?”

“말하지, 말아줘.”



그렇게만 말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마리네뜨의 팔을 강한 손이 꽉 붙잡았다. 도망치지 말라는 듯이 꿈쩍하지 않는 블랙캣의 손을 뿌리치려 발버둥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네가 마리네뜨였어?”

“말하지 마. 말하면….”

“왜, 어째서. 왜 하필 너야?”

“…왜? 나라서 실망했어?”



울컥하는 마음에 절로 쏘아붙이자 블랙캣은 당황했는지 평소보다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야, 난….”



무언가 띠띠 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블랙캣의 시선이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향했다. 네 발가락이 전부 사라지고 초록빛으로 빛나는 몸통만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가, 블랙캣은 이내 과감히 반지를 제 손에서 빼어버렸다.


검은 가면과 타이즈가 점차 흐릿해지더니 곧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금빛 머리카락과 초록빛 눈동자, 자신을 거절할 때처럼 곤란하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서 제 앞의 소년은 웃어보였다.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푸른 시선을 애써 마주하면서 소년, 아드리앙은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붙잡았다. 다시금 움찔거리는 마리네뜨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미안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

중간에 한 번 다 날려먹어서 아예 새로 썼습니다.


미안해 마리네뜨 이번엔 네가 굴렀네...

다음 연성은 달달한 거 쓴다고 해놓고 왜 이리 아련한 걸 들고 왔을까요0_0? 앗 다음에는 꼭 진짜로 제대로 된 달달물을 들고올게요...(전력: ㅋ



저도 달달물 좋아합니다 여러분.. (메아리

'레이디버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캣마리] 한 여름 밤의 꿈  (2) 2015.10.29
[아드마리/캣버그] 경계 위에서  (3) 2015.10.28
[캣마리] resemblance  (0) 2015.10.26
[전력 60분][캣버그] 시공을 넘어  (1) 2015.10.24
[아드마리] 진실 저 너머에  (0) 2015.10.24
Posted by I.R.E
,

※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의 팬픽입니다.

※ 아드리앙이랑 마리네뜨는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 본편을 배경삼아 꾸민 내용입니다.

※ 날조와 추측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나비들이 있는 곳이라던가.








어스름한 밤.


건물들 사이로 군데군데 보이는 불빛에 기대, 파리의 거리는 쥐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느지막히 흐르는 적막과 함께 어두운 밤의 장막이 도시 위로 두텁게 쌓여간다. 이상할 정도로 어둡고 적막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분명 오늘은 보름일진데, 달빛마저 새카만 구름 뒤편에 쏘옥 숨어버려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싸늘한 밤공기가 도시를 가득 내리덮었다.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는 하얀 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커다란 나무들과 부드러워 보이는 푸른 풀밭이 주변을 수놓고 있었다. 검푸른 정적에 뒤덮여 그 자리에 오롯이 서 있는 집은 외관은 깔끔하고 단정했지만, 그리 자주 사용하는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곳곳에 쌓여 있는 회빛 먼지들이 오랜 부재를 짐작하게 했다.


하얀 벽 근처로 다가가보면, 발밑으로 검고 우뚝한 작은 기둥들이 보인다. 창살이었다. 마치 감옥처럼 창문 사이를 옭아매는. 쇠로 된 창살 너머로 검게 일렁이는 어둠 속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멍하니 바깥을 응시했다. 초록빛 눈동자에 무수히 많은 상념들이 둥둥 떠다녔다. 평소라면 장난스러운 미소 뒤켠으로 애써 묻어버렸을 그 모든 감정들을 소년은 구태여 감추려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먹구름이 점점 걷혀간다. 노르스름하게 빛나는 둥근 달빛이 원을 그리듯 부드럽게 소년이 앉아 있는 방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던 소년의 머리 위로 쏟아지던 달빛이 무언가에 의해 가려지더니,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가 방 안에 모습을 새겼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퍼뜩 고개를 들고 창문 쪽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몇 번 꿈뻑거렸다. 언제나처럼 밝지만, 걱정했다는 듯이 한숨을 쉬는 발랄한 목소리에 작은 웃음이 스며들었다.



"여기 있었구나!!"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붉은색에 괜히 눈이 부셨다. 가면을 덧씌우고 있지만 그 너머로는 분명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겠지. 여려 보이지만 당당하고 강인한 제 아가씨는.


소년의 얼굴에 미소가 작게 번졌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는 한숨을 뱉어내듯 천천히 소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레이디버그…."






[아드마리] 진실 저 너머에


- C'est toujours par hasard qu'on accomplit son destin.





"다녀왔습니다-."



메아리조차 되돌아오지 않는다.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저택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다.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어두울 리가 없잖아. 켜켜이 내리묵은 차가운 침묵이 언제나처럼 무겁게 제 마음을 짓누른다. 소년, 아드리앙은 씁쓸하게 웃었다. 불이 꺼져 있으니 당연히 아무도 없겠지. 강도나 도둑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도, 문을 열기 전 자신은 언제나 일말의 기대를 품어버리고 만다. 이번에는 정말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바보같은 망상이다. 이 정도쯤 지났으면 슬슬 포기할 때도 됐는데, 질리지도 않고 기대하고 상처받는 제 모습이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미 찢겨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애써 꿰매가며,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품어가는 제 자신이.



"아드리앙, 무슨 생각해?"

"어? 아, 그냥."

"어서 들어가자구! 치즈- 치즈~!!"



신바람이 나서 저택 안으로 날아들어가는 플랙의 모습에 소년은 풋 하고 웃었다.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도무지 불운의 요정같지가 않다니까. 치즈 생각에 벌써부터 행복한지 콧노래를 부르며 공중을 날아다닌다. 사고도 많이 치지만, 저렇게 밝고 명랑한 녀석을 보고 있으면 괜히 웃음이 나온다. 확실히 플랙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우울해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플랙에게 까망베르 치즈를 꺼내주었다. 저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걸 뭐가 좋다고 저렇게 잘 먹는지. 쥐도 아니고 고양이면서. 행복하게 치즈를 먹고 있는 플랙을 내버려두고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푹신한 침대의 감촉에도 기분이 영 나아지질 않았다. 슬슬 잘 시간인데, 빨리 옷을 갈아입어야….


응?



"우앗?!"



팔랑거리는 하얀 실루엣이 눈 앞에 보였을 때,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얀 나비였다. 익숙하디 익숙해서 못 알아볼 리가 없는 바로 그. 아드리앙도 아드리앙이었지만, 팔랑팔랑 날개짓하며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나비의 모습에 플랙은 깜짝 놀랐는지 그만 먹던 치즈를 한번에 꿀꺽 삼켜버리고 켁켁거렸다. 이건 뭐야? 라고 볼멘스럽게 툴툴거리는 플랙의 목소리에 반응했는지, 나비는 그들 주위를 뱅글 돌더니 유유히 복도로 나가버렸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드리앙을 플랙이 다급히 불러세웠다.



"야, 너 설마 저거 따라갈 거야? 밤이 늦었는데 그냥 포기…, 우악!"

"시끄럽고 조용히 해."



재빨리 플랙을 붙잡아 제 호주머니에 넣은 아드리앙의 발걸음이 다급히 복도로 나섰다. 훨훨 날아서 어딘가로 이동하는 나비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았다. 나비는 점점 위로 향하고 있었다. 나비를 쫓아 계단을 올라가는데 공간을 세차게 긁어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휭휭 불어오는 바람소리 같기도 했고, 무언가 비벼지는 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수많은 나비 떼들의 날갯짓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단의 끝자락에는 두꺼운 철문이 우뚝 솟아 그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 문에 대해서는 아드리앙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었던 바로 그 방이었다. 열쇠를 잃어버려서 열리지 않는 곳이라고 말했던 철문이 아주 살짝, 살짝 열려 있었다. 나비는 그 작은 틈새로 애써 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시끄러운 소리는, 나비의 모습이 사라진 저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뭔가 있다.


막연한 직감이었지만, 직감을 넘어서는 건 확신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불안함에 절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아드리앙은 심호흡을 했다. 긴장에 자꾸만 입 안에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뭐하려는 거냐고, 돌아가자고 소리치며 호주머니 속에서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플랫을 다시금 세게 구겨넣고 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눈은 크게 뜨이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쿵쿵쿵쿵 사납게 뛰어대는 심장소리가 제 온 몸을 짓이겼다. 아주 천천히 문을 잡아당겨 열자, 놀랄 만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멈췄다.


나비, 나비. 온통 나비였다. 하얀 나비떼들이 요란스레 날아다니고 있었다. 방 안은 생각보다 무지하게 컸는데, 나비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벽의 한 면이 거대한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창문 하나 크기의 구멍이 떡하니 뚫려 있었다. 아드리앙은 입을 딱 벌리고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돌아오기 시작한 이성 한 가닥을 애써 붙잡고 어떻게든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답은 딱 하나였다. 하지만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너무 당황한 탓에 그는 제 바로 뒤로 접근한 검은 그림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퍽, 소리와 함께 아드리앙의 몸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창살로 둘러쌓여 있는 어두운 지하실로 바람 한 줄기가 길을 잃고 스며들었다. 이제 곧 가을이고 한밤중이라 그런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냉기에 피부가 서늘했다. 지하실 안으로 들어서니 감옥처럼 창살로 둘러싸인 방들이 여러 개 존재했다. 그리고 그 중 어느 방에서는 미미하지만 작은 숨소리가 정적을 타고 흐릿하게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벽에 기대어 있는 소년은 정신을 잃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여간 불편해 보였다.



"으…."



짧은 신음소리가 소년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왔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소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리멍텅한 눈동자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순간 정신이 들었는지 당황한 얼굴의 소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머리를 강타하는 고통에 그는 절로 신음했다.



"아야야야…."

"아드리앙, 깨어났구나!"



반가워하는 목소리와 함께 검은 물체가 그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플랙이었다. 과하게 반가워하는 녀석을 얼굴에서 떼어내고 물었다. 



"너 갑자기 왜 이래?"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 주위를 둘러봐봐?"

"여기가 어딘…."



몇 번 눈을 깜빡거리고, 어둠에 좀 눈이 익자 그제서야 주위가 좀 보였다. 어스름히 보이는 건 방의 크기로, 꽤 작은 정육각형의 방이었다. 기대어 있던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에 절로 손을 등 뒤로 뻗었다. 벽돌로 된 벽이었다. 왼쪽에 작게 나 있는 창문에 박힌 쇠창틀 사이로 빛이 새어들었다. 오른쪽 면은 온통 시커먼 창살들로 이루어진 장소였다. 완전 감옥이군. 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년은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보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네."

"그치, 그치? 나도 미치는 줄 알았다고. 이런 괴상한 곳에 갇혀서는, 기절해 있는 널 지켜보고만 있는 게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태평스레 중얼거리는 플랙의 목소리에 어이가 없어진 아드리앙이 되물었다.



"빈말로라도 걱정했단 소리는 안 하냐?"

"에이~ 그건 당연한 거고!"



말은 잘하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아드리앙은 이내 떠오르는 사실에 절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왜 여기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제 확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그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차갑게 식어가는 손끝과 심장이 뜨겁게 조여드는 상반된 감각이 소년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화가 나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게도 분노가 일지 않는다. 울컥하는 감정과 달리 차갑게 식어가는 이성은 냉정하게 소년을 채근했다. 잠시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댔다. 너무 피곤했다. 목에 걸려버린 수십 가지의 말들이 우왕좌왕 소동을 피웠다. 한 마디라도 내어 말하기엔 지금 제게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피할 수만은 없어서. 느릿하게, 천천히 입을 열어낸 소년은 애써 목에 걸린 그 말들을 혀끝으로 굴려 뱉어냈다.



"아버지가…."



차마 그 다음 말을 내뱉지 못하고 망설이는 소년과는 달리, 플랙은 거침없었다.



"니네 아버지가 우릴 노리고 있었단 건가?"

"…아무래도."



주변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짙게 깔린 어둠 속에 제 감정을 숨겼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플랙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넘쳤다. 플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블랙캣으로 변신하면 탈출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쇠창살이 단단해 보이긴 했지만, 고대의 재앙을 사용하면 나가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다. 어서 나가자고 독촉하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그랬다간 내가 블랙캣인 걸 알게 될 거야."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야? 그럼,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을 생각인 거~?"

"아니, 그건 아니고."



후우, 한숨을 내쉬던 아드리앙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뭔가 생각난 모양인지, 그가 다정스레 물었다.



"플랙, 너 혼자면 저 창살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지?"

"문제없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플랙을 보던 아드리앙의 한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침착해 보이는 겉과는 달리 아드리앙은 지금 꽤 동요하고 있었고, 들끓는 생각들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럼, 여길 나가서 레이디버그한테 도움을 요청해줘. 아마 그녀라면 무리없이 날 구해줄 수 있겠지."

"널 여기에 혼자 두고?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아?"

"…어차피 그 사람이 노리는 건 너야. 나랑 같이 있어봤자 너만 위험해지고, 아, 그리고…."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던 소년이 짧게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부탁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말하지 말아 줘."

"으음~? 어째서?"

"…내가 직접 말할게. 아무튼. 무사히 돌아가면 또 치즈 한 통 사줄 테니까. 알았지?"

"오호, 치즈-!!"



입을 큼지막하게 벌리고 웃는 플랙의 모습에 아드리앙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걸치고서 소년은 장난스레 미소지었다.



"잘 다녀와.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알았어~~!!"



그 말과 함께 플랙은 공중을 날아 작은 창살 사이로 빠져나가, 곧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플랙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뒤, 소년은 걸치고 있던 팔에 제 얼굴을 묻었다. 침통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온연히 드러내고서 그는 작게 신음했다. 꽤 이것저것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유독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에 절로 목이 메었다. 아버지, 아버지.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진심은 금세 힘을 잃고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소년은, 정말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깜짝 놀라서는 플랙을 와락 붙잡은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마구잡이로 흔드는 마리네뜨의 손길에 플랙은 으아아아 비명을 질렀다. 어지러워! 빙글빙글 도는 눈동자와 함께 소리지르는 플랙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아, 미안. 이라는 소리와 함께 플랙을 놓아주었다. 멋쩍게 웃는 마리네뜨를 한 번 흘겨보고, 툴툴거리면서도 플랙은 마리네뜨가 사온 책상 위 치즈 조각을 집어들었다. 행복한 듯이 치즈를 우물거리는 플랙을 보며 웃다가, 마리네뜨는 그러고 보니, 라는 말로 운을 떼었다.



"근데 왜 구해달라고 했는데?"

"움?"

"어차피 블랙캣으로 변신하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지 않아? 왜 굳이 나한테…."

"몰라. 그건 아드리앙한테 물어봐."



그래도 의리는 있었는지 플랙은 그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나중에 돌아올 치즈 한 통을 생각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쨌든 구하러 가줄 거지?"

"물론이지. 그 빌런 녀석, 감히 우리 아드리앙을 납치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호, '우리' 아드리앙? 그럼 벌써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빠르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플랙의 짓궂은 질문에 당황했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변명하는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작아졌다. 아하하 웃으며 지금 당장 가야하지 않냐고 말을 돌리는 마리네뜨를 보는 플랙의 눈동자가 히죽 웃고 있었다. 그런 플랙의 모습에 더 창피해졌는지 삐걱삐걱 몸을 움직이던 마리네뜨가 결국 거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드리앙이 고생 좀 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알고 지내게 된지 꽤 됐지만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다니까.


심호흡을 내쉰 뒤 변신하려던 순간,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마리네뜨의 입에서 짧게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 근데, 중요한 문제가 남았잖아!!"

"에? 또 무슨?"

"걔네 아버지한테 뭐라고 설명하지? 아직 눈치 못 챘어?"

"글쎄~?"



대충 둘러대고 히죽거리며 입을 다무는 플랙과 달리 마리네뜨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제랑 오늘 아드리앙이 결석한 거 보고 나나 애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걔가 모델 일로 바빠도 학교에 무단결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구. 게다가 오늘은 스케줄도 없는데."

"헤에, 뭐."

"아들이 갑자기 사라졌잖아. 심지어 거의 하루 넘게 행방불명인데! 벌써 수배령이라도 내린 건 아니겠지? 나 졸지에 납치범으로 오해받는 거 아냐? 그랬다간 아버님은 날 좋게 보지 않으실 텐데. 아, 어떡해! 막 헤어지라고 하면? 그럼 아드리앙은 '미안, 너랑은 안 되겠어.' 라고 말하면서 뒤돌아서고, 그럼, 그럼…?"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오만 호들갑을 떠는 마리네뜨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플랙이 티키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얘 평소에도 이래?"




*



"플랙 이 녀석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나간 지가 언젠데. 방을 천천히 돌아다니던 아드리앙은 살며시 제 미간을 구겼다. 플랙이 중간에 길을 잃어 마리네뜨를 만나는 게 하루나 늦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시내를 헤매고 있을 플랙을 떠올리며 아드리앙은 차가운 한기처럼 스며드는 불안에 몸을 떨었다. 하루를 넘게 기다렸지만 아직도 오지 않는 걸 보니 영 불안했다. 설마 플랙이 마리네뜨를 찾지 못하고 붙잡힌 건 아니겠지? 후우, 한숨을 거하게 내쉬며 아드리앙은 풀썩 벽 근처에 주저앉았다.


꼬르륵-


그러고보니 아무것도 못 먹었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내일이면 그래도 구조될 수 있으려나, 라고 생각하던 도중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였다.


깜짝 놀라서 긴장한 채로 그 자리에 굳어버린 아드리앙을 향해 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가왔다. 뚜벅, 뚜벅.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창살 쪽에 몸을 붙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등불을 든 시커먼 실루엣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숨을 죽였다. 계단을 다 내려왔나 싶었더니 천천히 걸어 남자는 소년의 앞에 섰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키 큰 남자. 노오랗고 흐릿한 불빛이 남자와 아드리앙 사이를 환하게 비췄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 분위기는 분명히. 창살을 붙잡은 손이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아, 버지…?"



조심스레 불러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소년은 그것을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두 손으로 창살을 붙잡고, 아드리앙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아버지였어요?"

"…."

"아버지가, 이 모든 일을 꾸민 거예요? 빌런을 만들어서 레이디버그를 위협하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하나씩 말을 꺼내기 시작하는 아드리앙의 목소리가 점점 절망으로 뒤덮여갔다.



"나비들을 봤어요."

"…."

"처음엔 믿기지 않았죠. 아니, 믿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그 때 기절하지만 않고 도로 방으로 들어갔더라도 그냥 꿈이었나 하고 잊으려고 했을지도 몰라요."

"…."

"근데 사실이었네요?"



하하하, 메마른 웃음소리가 소년의 입술 사이로 스며나왔다. 하루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서일까, 속이 쓰리게 말라붙었다. 괜찮아, 괜찮아. 소년은 속으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어서였다. 수많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저를 노린 인물이 제 아버지라는 진실을 견뎌내기에 소년은 너무 여렸고, 그만큼이나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말이 없는 남자를 원망하며, 아드리앙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뭐라고 말 좀 해요."

"…."

"변명이라도 하라고요!!"



제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아드리앙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감흥 없는 눈동자로 쳐다보던 남자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온 것은 다름 아니다."



진중하지만 어딘가 사악한 목소리다. 적어도 지금의 아드리앙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이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는 아드리앙에게 남자는 은근히, 느릿한 협박조로 말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좋을 거야."

"…."

"네 아비의 목숨이 걱정된다면 말이지."

"뭐…?"



마구 흔들리는 소년의 눈동자를 남자는 즐겁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아드리앙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남자는, 자신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걱정 마. 당장 너를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해두려고 했을 뿐이야."



입이 싼 놈은 곤란하거든. 큭큭 웃어대던 남자가 창살 너머의 아드리앙에게로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제 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남자의 광기어린 눈동자에 오롯이 비치는 제 모습에 괜히 소름이 돋았다. 꺾이려는 자신을 어떻게든 이겨내면서, 아드리앙은 물러서지 않고 침착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는 아드리앙의 모습이 퍽 재미있었는지 남자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애송아."




*



달빛 아래로 작은 그림자가 쉭쉭 움직였다. 붉은 무당벌레를 연상시키는 타이즈와 날랜 몸놀림의 소녀, 레이디버그였다. 옆에는 플랙이 함께였다. 달빛마저 가려진 어둠 속을 가르며, 그들은 파리 시내를 벗어나 외곽에 있는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의 다 왔다고 말하며 길을 안내하는 플랙을 쫓아가면서도,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이 쪽이야?"

"그런데, 왜?"

"어, 아니. 내 기억에 이쪽에는 분명, 아그레스트 가의 별장밖에 없을 텐데…."



그세 다른 집이라도 생겼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디버그를 플랙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기가 아드리앙의 별장이라니, 어쩐지 녀석이 너무 침착하다 싶었다. 근데 얘는 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마리네뜨의 기나긴 스토커 경력(?)을 알지 못하는 플랙의 입장에선 그녀의 상세한 지식이 퍽 신기한 것도 당연했다. 물론 아드리앙 한정이라지만.


한참을 달려 그들은 새하얀 순백색으로 빛나는 아그레스트 가의 별장에 도착했다. 먹구름에 감춰져 있던 휘황찬란하던 보름달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디냐고 묻자 플랙은 말없이 자신이 나왔던 쇠창틀 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 안에 있다는 말에 소녀는 무릎을 꿇고 창틀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바닥에 앉아 있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그녀는 반갑게 소리질렀다.


무사한 것 같아 다행이야.



"여기 있었구나!!"

"레이디버그…."



깜짝 놀랐는지 평소보다 멍하게 대답하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그녀는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웃는가 싶더니만 표정이 왜 저리 우울해 보이지? 조금은 의아했지만, 아마 오래 갇혀 있어서 그런 것이리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솔직히 이틀이나 저런 어두운 곳에 갇혀 있으면 답답하기도 답답했겠지.



"미안,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서."

"으응,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그나저나,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설마,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정말로 감격한 듯이 말하며 미소짓는 레이디버그에게 아드리앙은 마주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건 평소와 달리, 어딘지 사라져버릴 듯한 흐릿한 미소였다. 어딘지 위태로워 보이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레이디버그의 마음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이미었다. 애써 웃으며 그녀는 아드리앙에게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쩌다가 여기 갇히게 된 거야?"

"…."

"플랙은 네가 빌런에게 납치되었다는 소리밖에 안 해주지 뭐야. 너한테 직접 들으라면서."



웃으면서 고개를 으쓱하는 레이디버그에게 소년은 뭐라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그녀가 오면 직접 말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까 차마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지하실은 어두웠지만, 아드리앙의 표정이 나빠지는 걸 눈치챘는지 레이디버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거기 계속 있을 거야? 지금 꺼내줄게. 빨리 돌아가야지."



지금도 충분히 늦었어. 장난스럽게 묻는 소녀의 의도와는 달리 아드리앙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꾹 다물어버렸다. 그리고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쓰게 웃었다.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는 순간적으로 겁이 났다. 그가 말했다.



"어디로?"

"응?"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난."



아련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서, 소년의 눈매가 쓸쓸하게 일그러졌다. 갈 길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이제껏 믿어왔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자주 들어오지 못하는 건 바빠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대단하고 대단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비록 자신을 보러 오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해도, 생일 한 번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도, 제게 관심을 보이는 건 오로지 제가 모델로서 서 있을 때 뿐이라고 해도, 또래 아이들의 부모님처럼 애정표현 하나 제대로 해준 적이 없다고 해도!! 언제나 칭찬 한 마디 없고, 엄격하고 쌀쌀맞게 구는 건 그만큼 제가 반듯하게 살기를 바래서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요? 어떻게.


돌아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곳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은…."



입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직접 말해버리면 그게 현실이 될 것 같아서였다.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나와 너를 위협하고 사람들을 이용하던 악당이 사실은 내 아버지였다고? 그리고 그 본거지가 바로 우리 집이었다고? 그는 아직도 너와 나를 노리고 있고, 그러니까 어떻게든 그를 막아야 한다고?


어젯밤 만났던 그 남자는 정말이지 제게 있어 최악의 악당이었다.


그 악당은 아버지를 자신의 숙주라고 했다. 아버지를 통해 자신은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될 뿐이라고 뻔뻔스레 말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보라는 듯이 말하고 돌아서는 남자에 분노했지만, 그조차 자신을 단지 이용해먹기 편한 도구나 거슬리는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자마자 핫, 헛웃음이 나왔다. 우스워 미칠 것만 같았다. 단순히 숙주라고 하기엔, 그 남자는 정말로 아버지를 닮았다.


애정 한 오라기 없는 그 차가운 눈동자조차.



"어디로 가다니. 집으로 가는 거잖아?"

"집? 집이라."



그런 곳이 있었던가. 자조하며 그저 쓸쓸하게 웃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표정을 보니 역시, 정말로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애초에 이상한 일 투성이였다. 납치되게 된 자세한 정황을 알려주지 않는 것도 그렇고, 혼자서 문제없이 탈출할 수 있는데도 굳이 제게 도움을 청한 것도 그렇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절부절 못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답답해진 건 플랙이었다.



"야, 언제까지 질질 끌 거야?! 변신 시간 다 풀리겠네."

"플랙."

"아드리앙이 말하지 않겠다니 내가 말해줄까? 아드리앙을 여기로 끌고 온 건 이 녀석 아빠야."

"…뭐?!"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깜짝 놀라서 기겁하던 레이디버그가 아드리앙을 홱 돌아보았다. 슬프게 일그러지는 초록색 눈동자를 보니 플랙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잠깐만, 널 데려온 건 이제껏 우리한테서 미라클 스톤을 빼앗으려는 악당이라고 했잖아. 그럼 가브리엘 씨? 정말? 그분이, 우리를 위협했던 악당의 정체였다고?"



말도 안 돼. 당황해서는 말을 더듬는 그녀의 모습에 아드리앙은 한숨을 내뱉으며 짧게 웃었다.



"그러게. 말도 안 되지."

"…."

"그런데 왜 말이 되는 걸까. 정말…."



당장이라도 이 모든 게 거짓말이길 바란다는 얼굴로, 소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런 그가 안타까우면서도, 레이디버그는 지금 당장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변신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는데다, 언제 악당이 돌아올 지도 모르고.



"아무튼 여기서 나가자. 그 후에 얘기해도 늦지 않아."

"…날 두고 가."

"무슨 소리야?!"

"구해주러 와달라고 해놓고 이런 소리 해서 미안해. 알아, 그 악당은 우리 아버지가 아니야. 하지만 내가 함부로 굴면 아버지가 위험해질 지도 몰라."

"…."

"난…, 그걸 견딜 수 없어."



바보같다고 말한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모질게 구는 아버지인데도 왜 이렇게 미련만 남는 건지는 소년 자신도 모른다. 그저, 자신이 아버지를 적대하게 된다는 건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이렇게까지 무너지고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놓지 못하는 자신은 역시 미련한 걸까.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를 느꼈는지 아드리앙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냐고 물으려는 찰나 아드리앙이 쉿,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입술에 올렸다. 안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걸 보니 누군가 오는 모양이었다. 재빨리 가져온 공구를 꺼내고 밧줄을 쇠창살에 묶는 레이디버그에게 아드리앙이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 도망가, 레이디버그!!"



난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웃는 아드리앙을 잠깐 말없이 쳐다보던 그녀는,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같이 갈 거야. 어떻게 널 두고 혼자 가? 네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넌, 내가 너한테 너 혼자 두고 가라고 하면 납득하겠어?"



맞는 말이었다. 주춤거리는 아드리앙을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레이디버그는 다급히 말을 꺼냈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지금은, 지금은 일단 같이 돌아가자. 아버지가 걱정되는 거면 같이 방법을 찾아보면 되잖아. 그리고 네가 머물 곳이 없긴 왜 없어? 널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끙끙거리며 밧줄과 고정쇠를 잡아당긴 그녀가 툭 소리와 함께 쇠창살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창문 안으로 손을 뻗었다. 달빛이 그녀의 팔을 타고 손끝까지 흘러내린다. 그 손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아드리앙에게, 소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걱정하지 마."



난 최고의 행운을 타고난 히어로니까.






잠시 후, 등불과 함께 나타난 호크모스의 발걸음이 감옥 앞에서 우뚝 멈춰섰다. 텅 비어버린 감옥과 붙어 있던 쇠창살이 사라져 뻥 뚫려버린 작은 창틀을 말없이 쳐다보던 남자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제법 섬뜩한 어조로.



"도망쳤군."




*



"데려다줘서 고마워."



가볍게 웃으며 감사인사를 건네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피어올랐다. 지금 두 사람은 마리네뜨의 빵집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소녀가 장난스레 말했다.



"원래는 내가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넌 지금 변신 시간이 다 됐잖아. 밤중에 여자애 혼자 돌아다니게 하는 건 매너가 아니지."



애써 평소처럼 말하고는 있지만, 소년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쉽게 가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것이 안타까워 차마 뒤돌아서지 못하는 마리네뜨와는 달리 아드리앙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나랑 헤어지는 게 섭섭해?"

"뭐? 어, 으으아, 어, 음. …응."



엄청 당황하다가도 결국 솔직하게 대답하는 마리네뜨를 보던 아드리앙의 입매가 살짝 씰룩거렸다. 끝내 웃지는 않았지만.



"…미안해."

"뭐가?"

"그냥, 말하고 싶었어."



어두워지는 낯빛 너머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차마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까는 소년에게 소녀는 손을 살짝 내뻗었다. 살금살금, 조금씩 천천히, 몇 번을 망설이면서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가, 그렇게 천천히 다가가던 소녀는 결국 소년에게 닿지 못한 손을 가만히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의 눈동자가 소녀를 쳐다보았다. 짙고 선명한 초록색의 눈동자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소년은 끝내 울지 않는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밝게 웃어보일 뿐이다.



"미안, 미안해. 금방 회복할 테니까 잠깐만…."



그리고 그 순간, 소녀는 소년에게로 다가가 그를 껴안았다. 제법 대담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마리네뜨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를 껴안은 손을 풀지는 않았다. 놀라는 아드리앙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리네뜨는 상냥하게 말했다.



"힘들지?"

"…."

"힘들지 않을리가 없잖아. 나라도 솔직히 충격을 받았을 거야."

"…."

"괜찮아. 힘들다고 말해도. 여긴 나밖에 없으니까, 참지 않아도 돼."



마리네뜨의 손이 살며시 아드리앙의 등을 토닥거렸다. 어떻게든 자신을 달래주려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아드리앙은 웃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보.

너라서, 네 앞이라서 더 참고 있는 거야. 좋아하는 여자한테 꼴불견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몸에 닿는 따스한 온기에 불길하게 두근거리던 심장 박동소리가 서서히 느려져갔다. 애써 가라앉혀 두었던 마음들이 조금씩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토해내지 못한 온갖 감정들에 자꾸만 목이 메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지금도 집으로 곧장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겁이 난다. 몰랐다면 몰라도 알아버린 이상 이제 더 이상 아버지를 예전처럼 볼 수 없을 것이 두려워서, 그런 자신에 실망하고 또 다시 괴로워하다, 그렇게 또 상처받을까 무섭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제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도 나를 안아주는 네 손은 이렇게 따뜻해.


아드리앙의 손이 몇 번을 허공을 그러쥐다, 결국 마리네뜨를 마주 끌어안았다. 응, 이라고 말하며 마리네뜨를 껴안고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주 섬세하고, 작디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낮고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이 약하고, 간신히 쥐어짜내어 내뱉은,



"…고마워."



진심이었다.






===


쓸데없이 길어졌네요(냉정


저는 사실 아드리앙이 호크모스가 자기 아빠란 걸 알면 얼마나 멘붕할지에 대해 굉장한 호기심이 있습니다^_^ 그래서 그런 류의 연성을 언젠가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본편이 나오면 겁나게 흑역사가 될 테니까 ㅂㄷㅂㄷ 사실 아드마리라고 써놓고 이건 아드마리가 아니라 호크아드라고 해야 할 거 같은 기분(...) 은 네, 이런 쪽으로는 사랑받고 자란 마리네뜨가 멘탈력이 더 강건할 거 같아서, 아드리앙을 잘 위로해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하.


이걸 썰로 풀지 않고 글로 쓴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무 무거워서 썰로 쓰면 아드리앙의 그 복잡한 감정선을 표현하기 어려워서 그냥 글이 낫겠다 싶었거든요 ㅎㅎ


첫 연성을 이걸로 한 건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좀 더 달달한 아드마리를 써보고 싶어요.


부제인 'C'est toujours par hasard qu'on accomplit son destin.' 는 불어로, 항상 우연처럼 운명은 시작된다. 라는 어구입니다. 아드리앙 상황에 딱 맞는 거 같아서 넣어봤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



Posted by I.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