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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드리앙이 호크모스에게 잡혀온 상황 / 반지 뺏겼는데 플랙은 안 뺐겼어요 ㅇㅁㅇ(레벅이랑 같이 있음

※ ‘진실 저 너머에’에서 원래 다루고 싶어했던 내용인데 개연성 문제가 컸습니다^p^

※ 레이디버그가 구하러 왔을 때의 시점 간단히






[아드마리] 그 자리에 서서





“아드리앙!”



의자에 앉아, 푹 숙이고 있던 소년의 고개가 쾅 소리와 함께 열려진 문을 향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빛이 소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그녀가 누군지를 알아본 아드리앙은 순간 환하게 미소지었다. 다행히도 꽤나 멀쩡해 보이는 소년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레이디버그!”

“다행이야. 무사했구나.”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레이디버그를 보는 소년의 초록빛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상냥했다. 그에 안심하며 소년에게로 다가선 레이디버그의 팔을 붙잡은 소년이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다행이라는 듯이 눈을 감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아드리앙의 손이 그제서야 떨리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눈치챈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드리앙…?”

“응?”

“너 진짜 괜찮아?”

“…물론 괜찮지.”



거짓말.


웃는 얼굴과는 달리 손의 떨림이 멎질 않는다. 그의 손을 붙잡고 노려보는 레이디버그의 시선에 아드리앙은 흠칫하더니, 쓰게 웃었다. 역시 너한테는 뭐든 숨길 수가 없다. 감정을 버릴 수가 없으면 그 위에 더 강한 감정을 덧바르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원래 느꼈던 감정은 조금이나마 퇴색되니까. 그런 식으로 이제껏 어렵고 힘든 일들을 잊어버리고 덮어나갔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그런데.



“맞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이야기는 나가서 해도 늦지 않아.”

“플랙은?”

“플랙이야, 안전한 곳에 잘 있어.”



걱정하지 마. 상냥하게 웃어주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아드리앙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드리앙!!”

“난 갈 수 없어.”



아직은 이 곳을 떠날 수 없었다. 알아야만 할 것도 물어봐야만 할 것도 많았다. 게다가 반지가 아직 이 곳에 있다. 몸만 빠져나간다고 해도 반드시 너의 짐이 되겠지. 그건 제 자신이 참을 수가 없었다. 계속 자신을 여기에 가둬두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그래도 그가….



“너도 알잖아. 호크모스의 정체를.”

“…그건!”

“지금 나간다고 해도, 지금의 나는 호크모스를 벨 수 없을 거야.”



진지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아드리앙의 눈빛에 레이디버그는 말을 잃었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체를 알고 충격을 받았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고개를 끄덕이기엔 이 곳은 너무 위험했다. 그가 아드리앙을 언제까지고 가만 내버려두리라는 보장은 없었고, 자신은 이런 위험한 곳에 그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불안함에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녀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호크모스를 베지 않아도 좋아. 내가, 내가 혼자 싸울게. 네가 나설 일은 없을 테니까….”

“좋아하는 여자가 홀로 싸우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남자로 보여?”



아드리앙의 반문에 레이디버그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그럴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나를 구하고 반지를 뺏겨 정체를 들키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렇게 잡혀오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야.



“그럼, 나보고 너를 이 위험한 곳에 두고 가라는 거야?!”

“…위험하지 않을 거야.”

“그걸 어떻게 장담해!!”



호크모스가 노리는 것은 미라클 스톤. 이제껏 악당들을 만들어 자신들을 노렸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이제껏 봐왔던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주변 사람들을 악당으로 만들어 파리를 위협해왔다. 그를 붙잡아놓은 것도 자신을 협박하기 위한 인질이겠지. 수틀리면 언제든 그를 죽여버리겠다 말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는 나에게 짐이 되느니 차라리 자신을 희생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같이 가.”

“내 마음은 변함없어.”

“왜?! 내가 혼자 싸우겠다고 하잖아!! 근데 왜!!”

“…여기를 나간다고 해도, 내가 갈 곳은 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

“내가 어떻게든 알아봐줄게. 너라면 재워주겠다고 하는 사람들 쎄고 쎘을걸? 여차하면 내 방에서라도….”

“미안해.”



조용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서야 레이디버그는 아드리앙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초록빛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 떨어뜨릴 것처럼 슬픔에 젖어 있었다. 말없이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맑고 푸른 눈동자에 고집스런 제 표정이 가득 담겼다. 나도 참 어지간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드리앙은 낮게 웃었다. 그 모습은 언제나와 같이 부드럽고 온화했다.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그래서 더 슬프게 들렸다.



“우리 아버지니까.”



이 한 마디를 아무렇지 않게 꺼낼 수 있게 얼마나 연습했는지 너는 알고 있을까. 속으로 중얼거리던 아드리앙이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디버그를 다시 꽉 껴안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안겨 있지만, 사실 그녀가 얼마나 많은 갈등을 하고 있을지 아드리앙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기에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가 무척 혼란스러울 거라는 사실도 이해한다. 당장 나부터 그러니까. 이제껏 싸우던 적이 제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지금도 이렇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야. 변하지 않을.


너처럼 단순하게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드리앙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이리 미련이 남을까. 지금 그녀를 따라나설 수 없는 건, 단순히 그녀에게 짐이 되고 싶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다치는 걸, 도무지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자신이 없어.


레이디버그는 손을 뻗어 그를 살짝 밀어내었다.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는 아드리앙을 보며 그녀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어 말을 건넸다.



“꼭…, 무사해야 해?”

“응.”

“무슨 일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끝나고 나면 꼭 내 곁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알았어, 마이 레이디.”



장난스레 윙크하는 그 모습이 꼭 블랙캣과 똑같아서, 조금은 안심이 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한참을 뒤돌아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레이디버그와 마찬가지로 아드리앙도 쉽사리 가라고 하지를 못하겠는지 괜히 손만 꼼지락거렸다. 당당하던 그녀가 제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니 익숙한 누군가의 환영이 그 위로 겹쳐졌다. 아직도 이 모습의 자신을 볼 때는 조금쯤은 서툴고 어색하지만 그만큼이나 사랑스러운. 그래서.


아드리앙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지더니,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서 가, 마…. 아니, 레이디버그.”



상냥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며 손을 내밀었다. 홀린 듯이 레이디버그가 손을 내밀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마리네뜨를 데리고 창문을 열었다. 방이 꽤 높은 위치에 있어서 그런지 유리창을 열자마자 강한 바람이 훅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보름이라 그런지 달이 밝았다. 조심해서 돌아가라고 그녀를 배웅한 뒤,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아드리앙은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거기 있죠?”

“눈치챘나.”



그의 등 뒤,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탁하고 음산한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목소리만 듣고 있으니 익숙한 느낌에 괜히 숨이 막혀온다. 다행이다. 그가 들어온 걸 눈치채서. 그녀를 마리네뜨라고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야. 붙잡히는 건, 위험해지는 건 자신만으로 족하다. 그녀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자신있게 말했지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지켜야지, 반드시.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태연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뒤를 돌아본 아드리앙의 앞에 가면을 쓴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어둠을 둘러쓰고 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그가 씨익 웃어주었다. 변신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지금 블랙캣이야. 블랙캣이 아닌 아드리앙으로 이 사람을 마주하기엔 아직은 너무나도 약한 자신이 참으로 분하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어서.



“좋아. 오랜만에, 서로 이야기나 좀 해볼까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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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 젠장 어제 2D 트레일러를 보는 게 아니었어!!





“블랙캣!!”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검은 환영이 아주 천천히,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펠릭마리] 너는 과연 어디에





“어디 있는 거지.”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음산한 기운이 내리깔렸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금발의 소년이 학교 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무뚝뚝한 표정, 얼핏 차가워 보이는 청록색 눈동자가 고민에 빠진 것처럼 조금 멍했다. 사실 펠릭스는 지금 상당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찾고 있는 상대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내를 다 둘러보았지만 삐죽 솟은 더듬이조차 보기 힘들었다.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펠릭스는 가만히 며칠 전 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제 진짜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린 듯한 눈동자, 일그러지는 표정. 말을 걸기도 전에 뒤돌아서서 달아나버리는 그 뒷모습을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자신도 몹시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던 상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레이디버그의 정체가, 하필 그 여자라니.


당당하고 강인하고, 매정할 정도로 언제나 단호하게 제 고백을 뿌리치던 그녀가 하루종일 자신을 따라오던 찐드기였다는 사실은 매사 침착하던 그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니, 어딘지 느낌이 좀 닮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바보같은 생각이라 여기고 넘겼던 것이 실수였을까.


그 후로 이상할 정도로 소식이 없다. 하루 정도는 무슨 일이 있겠거니 하고 그러려니 했지만, 이게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니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껌딱지처럼 매번 달라붙으려고 할 땐 언제고 이럴 때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니. 어차피 이렇게 피해다녀봤자 악당이 나타나면 다시 만나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요 며칠 간 악당조차 감감무소식이었다.


괜한 불안감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런 제 자신에 당황하다, 펠릭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애써 상념을 떨쳐냈다. 그는 다시금 중얼거렸다.


잡히기만 해봐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펠릭스는 마리네뜨가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어디 있을까. 그러다가 그는 문득 떠오르는 사실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뭐가 있지?


언제나 제 주변을 맴돌았던 여자였다. 별로 관심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는 자신에게 진득할 정도로 달라붙어 바보처럼 웃던 여자였다. 시간이 없다 매번 거절하는데도 쫓아오고 또 쫓아오고. 거절의 대답을 들으면 늘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도, 다음 날 또 다시 웃으며 제게 다가오는 녀석의 모습이 황당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게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까지 싫던 건 아니었다. 아니, 물론 귀찮았지만, 저렇게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쫓아와주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은 기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여자가 제 주변에서 사라질 거라고는. 어차피 늘 주위에 있었으니까, 찾기도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우습다. 도시는 넓고, 당장 이 학교만도 크기가 상당한데.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면 얼마든지 피해다닐 수 있다. 아니, 그 전에 그 여자가 이 학교에 다니긴 했던가?


엉키는 머릿속을 애써 정리했다. 관심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데, 막상 찾으려니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력감에 속이 쓰렸다. 좋아하는 여자의 정체를 알았으면 기뻐야 할 텐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까. 왜 이렇게 괴로운 거지? 설마 내가 블랙캣이기 때문에, 너 같은 남자는 질색이라고 했던 남자라서?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나를 쫓고 싶지 않은 걸까.


그 생각을 하자마자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에 펠릭스의 얼굴이 싸하게 굳어갔다. 동요를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는, 펠릭스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고작 여자 하나 아니야!


이해할 수가 없는 감정에 펠릭스는 가만히 제 눈가를 찡그렸다.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부터가 웃기지도 않은 일 아닌가. 애초에 자신은 녀석에게 뭐 하나 기대할만한 행동 하나 해준 적이 없다. 그런 제게 질려서 떠나가 버린다면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차피 사람은 무언가를 바라고 상대에게 감정을 쏟아붓는 존재다. 돌아오는 것이 없다면 포기하는 것이 여러 모로 이로운 일이다.


나는, 녀석이 정말 계속해서 자신을 쫓아와주길 바라고 있었던 걸까?


우스운 결론에 펠릭스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말려 올라갔다. 참으로 어이없는 생각이지만 우습게도 감정은 그걸 온전히 부정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만에 너무나 약해져버린 자신에 조소했다. 이루어지지 못할 환상 따위는 품지 않는다고 자부했었는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계속 그러리라는 자만을 했던 걸까.


좋아한다는 마음같은 건 다 찰나의 것일 뿐인데. 겉모습만 보고 다가오는 사람은 지긋지긋하다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중, 펠릭스의 눈길이 교정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 푸른색 양갈래 머리에,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며 천천히 교정을 걷고 있는 소녀의 움직임이 오늘따라 별로 힘이 없어 보였다. 답지 않게 시무룩한 얼굴이 신경쓰여, 펠릭스는 일단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말을 걸었다.



“야, 거기, 너….”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걷고 있던 소녀는 화들짝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삐걱삐걱, 고개를 돌린 소녀의 시선이 그와 맞닿았다. 펠릭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대답도 없이 홱 고개를 돌리고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손쓸 틈도 없이 내달리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는 황당해하다가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그가 소리질렀다.



“야, 거기 서!!”



서란다고 섰다면 애초에 도망도 안 갔겠지만.


냅다 달리는 마리네뜨의 뒤를 쫓아가는 펠릭스의 이마 위로 빠직 힘줄이 돋아났다. 몇 번 거의 다 잡을 뻔했다가도, 무슨 여자애가 저리 발이 빠른지 요리조리 잘도 피해나간다. 저런 점을 보니 레이디버그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솔직히 그는 지금 상황에 꽤나 신경질이 난 상태였다. 여자애 하나 잡자고 교내를 내달리는 미친 짓을 하고 있다니. 누가 보기라도 하면 대체 무슨 소문이 돌겠는가.


그러니 그 전에 잡아야지.


마리네뜨가 쉽게 잡혀주지 않자 그는 살짝 머리를 굴렸다. 으윽, 일부러 크게 비명을 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지가 좀 더러워지겠지만 세탁하면 되겠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을 태평하게 중얼거리며 그는 아픈 척 신음을 흘리는 것에 열중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제 앞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다 싶더니, 그의 머리 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괜찮…?!”



깜짝 놀라는 마리네뜨의 팔을 왼손으로 세게 움켜쥐고, 펠릭스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놀랐는지 말도 못하고 굳어버린 마리네뜨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는 왠지 모를 허탈감이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이렇게 예상대로 움직일 줄이야. 얘가 정말 그 똑부러지고 자신감 넘치는 마이 레이디가 맞는 걸까. 그녀도 상당히 허당끼가 있긴 했지만.



“잡았다.”



무감각하게 중얼거리며 펠릭스는 툭툭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아픈지 살짝 눈가를 찡그리는 소녀의 얼굴에 순간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조금씩 이 상황이 현실로 와닿기 시작했다.



“이, 이거 놔줘.”

“안 돼.”



제게서 시선을 피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펠릭스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니 긴장으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냥 말하지 말까,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가 그는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말해두지 않으면 아마 영영 말할 수 없을 거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겁쟁이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레이디버그.”



레이디버그.


그 호칭 하나에 정신이 번쩍 든 마리네뜨의 고개가 펠릭스를 향해 돌아갔다. 침착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의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할 말을 잃었다. 농담할 생각은 없다는 듯한 진지한 시선이 제 몸을 옭아매는 것 같다. 덮쳐오는 현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답하고 싶었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뭐, 뭔데.”



불퉁하게 말하면서도 마리네뜨는 애써 그를 마주보았다. 어차피 그가 쉽게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은 자명했다. 묻고 싶은 것도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펠릭스는 몇 번이고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차분하고 단정한 입매가 살짝 일그러지다 제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 반지에 대해서.”



흠칫, 몸을 떠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는 살짝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에게도 별로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 주제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기.”



어떻게든 입을 열려던 펠릭스의 말을 다급히 가로막은 건 뜻밖에도 마리네뜨였다.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우물거리던 그녀는 잠깐 침묵하더니,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넸다.



“네가 블랙캣이라고 했잖아.”

“그래.”

“티키가 나한테 했던 말이 있어.”

“…?”

“나랑 달리 너의 변신은 저주에 가깝다고.”



펠릭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며 조금씩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내가 키스해주지 않으면 결코 풀리지 않을 저주 말이야. 불운의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그러더라. 그러니까, 분명 날 이용하려고 나한테 접근하는 거일 테니까, 그러니까….”



너한테 절대 마음을 주지 말라고.


굳어버린 입매를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어서, 마리네뜨는 살짝 제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은 척 환하게 웃으며 마리네뜨는 다시금 펠릭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아니지? 티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지?”



그럴 리가 없잖아. 헤헤 웃으며 미소짓는 그녀와는 달리 펠릭스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싸해진 분위기에 흠칫 놀라는 마리네뜨의 입가에서 웃음이 점차 엷어져갔다. 그가 무겁게 다물렸던 입술을 열어 말을 덜어냈다.



“그래, 그랬지.”



처음에는.


그 한 마디가 그녀에게는 마치 사형선고처럼 강하게 내리꽂혔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후려맞은 듯한 충격에 그녀는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애써 정신을 추스르려고 했지만 머리가 빙빙 돌았다.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허해져버린 가슴 속을 갖가지 감정들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혀를 낼름거리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온갖 불길한 가정들이 머릿속을 빼곡히 채워갔다. 그가 블랙캣이었어. 하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나를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야?


그럼 저주를 풀면, 나는 더 이상 네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는 걸까.


마리네뜨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 하, 하하하. 하하하하. 메마른 웃음소리가 마리네뜨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담담해 보이던 펠릭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은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거 놔.”

 


탁-.


마리네뜨는 이제껏 중에 가장 진심을 담아 그의 팔을 세차게 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눈물이 가득 맺힌 푸른빛 눈동자가 단호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투명한 눈물이 공중에 흩뿌려졌다. 그 모습에 펠릭스는 흠칫, 그 자리에 멈춰서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늘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가 저렇게까지 동요를 내비치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리며 마리네뜨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꾸만 떠오르는 방금 전 그의 표정을 지워내려 애쓰던 마리네뜨가 조그맣게 말했다.



“미안해.”



그 말만을 남기고 마리네뜨는 말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푹푹 꺼지려는 발걸음을 꾸역꾸역 옮겨가며, 그녀는 뒤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펠릭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너무 많은 감정들이 범람하는 통에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들이 바닥에 납작 달라붙었다. 얼마 전 그의 정체를 알았을 때,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며칠 간 그를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도 그래서였고.


블랙캣이 싫은 건 아니었다. 제게 고백하는 것만 빼면 그는 정말이지 좋은 파트너였고 믿음직한 동료였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처음에는 질 나쁜 농담이리라 생각했다. 그가 블랙캣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더 그랬다.


물어본 것은 다름 아니었다. 그가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길 바래서. 아니, 정말 사실이더라도 그가 부정해주었다면 자신은 분명 믿었을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자신은 바보니까.


그런데,

왜 부정하지 않는 거야.


울컥 올라오는 뜨거움에 속이 너무 쓰렸다. 이러면, 정말 너를 원망해야 하잖아. 화를 내야 하잖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너를 좋아하는, 이런 내 마음은 어떡하란 말이야.


펠릭스가 블랙캣이라는 사실보다, 그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제 모습이 너무 서글펐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울컥 치미는 감정들이 뒤죽박죽 섞여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너무 아프다.


그가 자신을 거절해도, 그저 귀찮은 여자애로만 여겨도, 관심은커녕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아도 지금처럼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익숙한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잔인함에 상처입었다. 정말로 제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건가 싶어서 문득 서러워졌다. 그러다가 그녀는 피식 웃었다. 바보같다.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언젠가는 그래도 날 돌아봐줄지도 모른다는, 그렇게 멋대로 이기적인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걸까.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고 힘들어하는, 이런 연약한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먼저 시작한 건 나였으니까.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꾹 참아내고 앞으로 걸어나가는 마리네뜨를 청록빛 눈동자가 멍하니 쳐다보았다.


끝내 내밀지 못한 손끝에는 허공만이 휘감겼다.




*



“히얍-!!”



기합소리와 함께 그녀는 발을 휘둘렀다. 휘황찬란하던 보름달은 지금 검은 구름 사이로 가려진 상태였다. 칙칙한 어둠을 비춰주는 몇 개의 빛들을 배경삼아 레이디버그는 지금 악당과 살떨리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자비하게 팔을 휘두르며 자신을 공격하는 악당에게 다시금 발차기를 날리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빠르게 날아드는 주먹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꽤 버거웠다. 악당은 따로 무기도 없는 오로지 맨손이었지만 주먹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온 건 실수였을까.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결국 혼자서 일을 처리하러 나왔다. 그래도 이젠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고전하는 자신의 모습에 조소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너무 바보같아서. 그렇게 거절해놓고.


날아오는 주먹을 간신히 피한 레이디버그의 등 뒤에 있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휘날리는 먼지들 사이를 간신히 빠져나온 그녀의 등 뒤로 휙, 주먹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맞는다.

그렇게 생각했다.


시커먼 구름이 걷히고 보름달이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와 악당 사이를 가로막은 검은 형체에 레이디버그는 넋을 잃었다. 쿨럭, 소리와 함께 그의 입가를 따라 붉은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블랙캣!!”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검은 환영이 아주 천천히 그녀 위로 고꾸라졌다. 검은색 타이즈 위에 짙은 혈향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의 눈동자에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에 희희낙락 웃으며 다시 공격을 퍼부으려던 악당은 그녀의 혼신을 다한 발차기에 얻어맞고 멀리에 있는 벽들 사이로 날아가 파묻혔다. 우르르 무너지는 벽들 소리를 뒤로 한 채,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데리고 몸을 숨겼다. 그의 머리를 무릎 위에 누이고 레이디버그는 그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타이즈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아마 꽤 큰 상처일 것 같다. 이렇게 고약한 걸.


피 냄새가.


감겨 있던 블랙캣의 눈이 조용히 떠졌다. 잠깐 정신을 잃었었는지 멍하던 눈동자를 몇 번 깜빡거리던 블랙캣이 흐릿하게 웃었다. 평소처럼 기운 넘치고 장난스러운 미소가 아니어서, 정말로 큰일인가 싶어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이 꽤 놀라웠는지, 블랙캣은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괘, 괜찮아? 어떡해, 너, 너. 피가…!!”

“아, 이거…?”



됐어.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다, 등에 둔탁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블랙캣은 조용히 신음하다 다시 누웠다. 생각보다 무리했나. 어쩔 수 없다며 조용히 웃는 블랙캣의 모습에서 그녀는 순간 펠릭스의 모습을 읽었다. 잘 웃지 않지만, 책을 읽을 때 설핏 보여주던 그 다정한 웃음. 그 미소가 좋아서,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를 따라다니는 걸 멈추지 못했었다.


블랙캣이 한 손을 뻗어 레이디버그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흠칫 놀라는 레이디버그를 부드럽게 쳐다보던 그가 정말 괜찮다는 듯이 나지막히 웃었다.



“레이디가 무사하니까.”



그거면 됐어. 그거 하나면 되었다고 말하는 블랙캣의 미소에, 레이디버그는 심장 한 구석이 저릿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런 자신에 기겁하며 그녀는 그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레이디버그의 생각을 꿰뚫어봤는지 블랙캣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를 믿지 않아도 좋아.”



어쨌든 이용하려고 한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말하며 이챠,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블랙캣의 입매가 없을 리 없는 고통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그래도 견딜 만은 하군. 세뇌하듯 중얼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부리면서도, 블랙캣은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이디버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믿을 때까지 곁에 있어줄 테니까.”



선명한 달빛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어딘지 익숙하지 않아 보이면서도 묘하게 상냥한 눈빛은 마치 그가 책을 읽을 때의 그 모습과 조금 겹쳐보여서, 레이디버그는 그저 멍하게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잡아도 되는 걸까?


너를, 믿어도 돼?


그 순간,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두 사람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벽들 사이에서 빠져나온 악당이 그들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나오지 않는 것에 열받는지 악당은 짜증스레 주위 벽들을 모조리 부수기 시작했다. 그런 악당의 모습을 진지하게 쳐다보는 블랙캣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결심했는지 그녀는 조용히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손에 닿는 온기에 놀라서 돌아보는 블랙캣의 시선을 무시하며 그녀는 몸을 탁탁 털었다.


어쨌든 나를 구해줬으니까.

설령 당장 너를 온전히 믿지는 못하더라도, 지금은.


놀라는 블랙캣에게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며 웃어보였다.



“가자.”



파트너. 그 대답 하나에 블랙캣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검은 타이즈에 스며든 핏물과 등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도, 너무나 기쁘다는 듯이 블랙캣은 천진난만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쪽이 진짜 너일까.


무뚝뚝하고 서늘한 너와 지금의 발랄하다 못해 천진난만해 보이는 너. 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 거지?


그런 그녀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랙캣은 다시 악당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씨익 웃고는 있지만, 지금 그의 눈빛에 어린 감정이 과연 무엇이었을지는 모르겠어도.


그가 가만히 대답했다.



“그래.”






===


2D 레이디버그 PV를 본 제가 죄인이죠(묵념


와 진짜 트레일러만 보고 쓰려니까 애들 성격이 너무 짐작가지 않는 부분이 많아 힘들군요; 썰의 일부분을 잠깐 재현해 보았습니다. 얘네 분위기 다크해서 참 취향인데 쓰자니 머리 아프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2D도 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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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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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드마리 2세물! 백님 연성 이후 이야기 상상이에요~!!

※ 허락받고 원본 올립니다. 블로그 내에서만 읽어주세요~!!












[아드마리] 뜻하지 않은 선물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빵집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주인은 깜짝 놀랐다. 어린 여자아이를 공주님처럼 조심히 안고 들어오던 잘생긴 소년은 금세 그를 알아보고,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부드러운 저음이 상쾌한 미풍처럼 가게 안을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자아이는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입을 꾹 다물고 아드리앙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낯을 가리는 모양이었다.


알았다는 듯이 상냥하게 웃던 아드리앙은 뭔가가 생각났는지 멈칫하다가, 한쪽 손으로 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에 소년의 얼굴에 고뇌가 드리웠다. 집을 다녀와야 하나. 몸을 돌려 가게 밖으로 나가려던 아드리앙의 어깨를 두툼한 손이 살짝 붙잡았다. 뒤돌아보니 방금 전까지 카운터에 있던 주인이 바로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여자아이가 눈여겨보던 사탕을 고사리같은 손에 들려주며, 놀라는 아드리앙의 시선을 마주하던 주인이 가만히 눈가를 찡긋거렸다. 소녀가 와아, 탄성을 내뱉으며 사탕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지금 돈이 없어서.”



나중에 꼭 드릴게요. 진지하게 말하는 아드리앙의 얼굴에 이 빵집의 주인, 톰 뒤팽은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건 됐네. 미래의 사위에게 이런 거 하나 못 해줄까.”

“사, 사위라니….”



언뜻 듣기에는 부정하는 말이었지만 순식간에 새빨개지는 아드리앙의 얼굴을 본 톰 씨는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아무리 봐도 참 잘난 녀석이란 말이야. 처음에 소개받았을 적에는 조금 놀랐지만, 싹싹하고 밝고 제 딸을 잘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사위로 맞아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서로 죽고 못 사는 걸 보면.



“그런데 그 아이는 누구니? 친척?”

“아, 네. 뭐….”



저랑 마리네뜨의 미래의 딸이라고 하네요.


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는지라, 하하 웃으며 얼버무리려던 아드리앙의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한 마디가 있었다. 소녀가 웅얼웅얼 중얼거리며 해사하게 웃었다.



“할아버지 사탕 맛있어~!!”

“하, 할아버지?”

“아,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허둥지둥 가게 밖으로 나서는 아드리앙의 발걸음이 꽤나 급해보이는 탓에 톰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근처에 있던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늙진 않았는데.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나? 괜히 신경쓰이는 기분에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톰 씨는 방금 전 스쳐간 여자아이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잊어버리고 톰 씨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 다시 돈 계산을 시작했다.






한편, 헐레벌떡 밖으로 나온 아드리앙은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하긴 저기서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은 게 어딘가.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나오지도 못했을 텐데.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던 아드리앙이 제 품의 안긴 소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리네뜨의 아버지를 단번에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보면 관련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여야 받아들이지. 히어로로 오래 살아와서 별일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지만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길거리 한가운데 서서 고민에 빠진 아드리앙의 모습을 지나가던 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꽤 화사해 보이는 조합이었다. 귀여운 소녀와 잘생긴 소년. 아니, 청년이라고 해야 맞을까. 아드리앙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아이의 손에는 커다란 하트사탕이 하나 들려 있었다. 쪽쪽 사탕을 빨아먹는 여자아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꽃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루퉁하던 표정과는 정 딴판이네. 그 모습을 귀엽다 생각하며 싱긋 웃던 아드리앙이 손을 뻗어 소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이렇게 묻히고 먹으면 어떡해.”



자상하게 말하는 아드리앙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마리네뜨와 겹쳐보이는 통에 아드리앙은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말 딸일까?


그러다가 아드리앙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손밖에 안 잡은 사이인데 대체 어떻게 딸이 생긴단 말인가. 하지만 착각한 거라고 하기엔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말하는 여자애의 태도가 너무 확고했다. 조금씩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아드리앙은 다시금 사탕을 물고 있는 소녀에게 물었다.



“어, 그러니까. 작은 레이디?”

“웅?”

“어쩌다가 여기로 오게 된 거야?”



네가 정말 내 딸이냐고 물어보기엔 괜히 아이가 신경쓸까봐 걱정되어 아드리앙은 가급적 말을 돌렸다. 만약 정말 자신과 마리네뜨의 딸이라면 절대 이 시간대에 존재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된 걸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와 닮은 소녀의 얼굴을 보니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미래의 우리 아이도 이 아이처럼 예쁘게 자란다면 좋을 텐데. 자기가 한 상상에 부끄러워진 그의 볼이 화악 붉어졌다. 먹고 싶은 걸 먹어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떤 구멍에 떨어져서, 여기로 왔어!”

“구멍…? 어디에 있는데?”

“몰라. 엄마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계속 안 와서, 그래서 찾으려고 했는데….”



길을 잃었어.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아이의 모습에 아드리앙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달랬다.



“엄마도 작은 레이디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으윽….”

“자자, 울지 말고. 일단 우리, 엄마가 마지막으로 기다리는 장소로 갈까? 어디였는지 기억해?”

“…공원.”



아드리앙의 머릿속이 바삐 굴러갔다. 처음 만났던 거리에선 꽤 가깝지만 여기서 가면 좀 거리가 있는 곳. 뭐, 어린아이가 그리 멀리 나올 수 있었을 리는 없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일단 거기에 가면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 공원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드리앙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우뚝 몸이 굳었다.



“아드리앙?”



마리네뜨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서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는 아드리앙의 모습이 의아했는지, 마리네뜨가 얼굴에 물음표를 그리며 그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양 옆으로 묶고, 반짝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놀람을 표시했다.



“여기서 다 만나네! 어, 이 애는 누구야?”



귀엽다. 정말 순수하게 감탄하는 마리네뜨의 미소에 아드리앙은 순간 저도 모르게 외칠 뻔했다. 네가 더 귀여워. 겨우 입을 틀어막았지만. 역시 자신은 공처가가 될 운명이 분명하다고 속으로 한탄하면서 아드리앙은 둘러댈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어? 아니, 그게. 친….”

“엄마다! 안녕, 엄….”

“엄마?!”



아드리앙이 급하게 소녀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였다.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



“얘가 우리 미래의 딸이라고?”



택시 뒷칸에 앉아, 제 품에 안긴 소녀의 등을 가만히 도닥거리며 마리네뜨가 조용히 소곤거렸다. 엄마를 만나서 긴장이 풀렸는지 어쨌는지 잠들어버린 소녀의 입술에서 숨소리가 새근새근 흘러나왔다.



“아마도.”

“…와, 신기하다.”



내가 아드리앙이랑 결혼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아드리앙은 애꿎은 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삐죽 올라오는 심술에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왜, 나랑 결혼하는 건 싫어?”

“아니!! 아니야!!”



말도 안 돼!! 마구 부정하며 고개를 돌린 마리네뜨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속으로 헉 숨을 삼켰다. 즐거운 듯이 초승달처럼 접혀지는 녹빛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놀린 거구나. 빨갛게 달아오르는 뺨과 더불어 시선을 피하는 눈동자가 사랑스러워 그는 괜히 입 안이 말랐다. 아, 이거 안 되는데.


점점 더 놀리고 싶어지잖아.



“마리네뜨….”



커다란 손이 마리네뜨의 손가락을 살짝 붙잡았다. 움찔 떨리는 마리네뜨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그가 잔망스럽게 웃었다. 그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택시가 갑자기 급정거를 밟았다. 마리네뜨는 재빨리 아이를 꽉 끌어안았고 아드리앙은 그런 그녀를 붙잡았다. 다행히 튕겨나가진 않았지만, 아이가 다칠 뻔했지 않냐고 항의하려던 두 사람은 바로 앞에 보이는 어마무시한 교통체증에 깜짝 놀랐다. 느껴지는 불길함에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은 재빨리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마리네뜨에게서 아이를 받아든 아드리앙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뭔가 있는 모양이네.”

“악당인가?”

“근데 뭔가…, 이질적인 느낌인데. 이제껏 상대했던 녀석들이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아드리앙을 보던 마리네뜨가 싱긋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내가 먼저 상대하고 있을게. 다녀와.”

“괜찮겠어? 내가 가도….”

“아니야. 그 아이나 잘 데려다주고 와.”



우리 미래의 딸이잖아.


눈가를 찡긋하며 웃어주는 그녀의 모습에도 괜한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혼자 보낸다니.



“하지만, 공원에 가더라도 이 아이를 돌려보낼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지 않아?”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아드리앙을 가만히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설핏 웃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 미소를 보니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레이디버그.


최근 그녀는 가끔 변신하지 않아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당당하고 차분하고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이 넘치는, 제가 동경했던 바로 그 모습을. 뭐,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좋아서 죽을 지경이다. 덕분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지.



“그래도, 도둑고양이 씨보단 내가 더 나을 거 같은데요~?”



손가락을 흔들며 밝게 웃어보이는 마리네뜨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붉은 잔상에, 아드리앙은 말없이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째 이어지는 침묵에 뻘쭘해진 마리네뜨가, ‘난 이제 변신하러 갈게!’ 라고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아드리앙이 손을 뻗어 마리네뜨의 손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는 그녀의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추던 그가, 혀로 손등을 살짝 쓸었다. 고개를 숙이고 손등을 할짝거리던 아드리앙이 시선을 올려 마리네뜨를 쳐다보았다. 싱긋, 마치 고양이처럼 웃는 그의 눈짓에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우, 우, 우리…!!”

“잘 하고 와. 마이 레이디.”

“아, 아, 하하. 으, 응! 그럼, 그럼. 잘 다녀올게.”



불타는 얼굴을 차마 감당하지 못하고 뻣뻣한 몸을 애써 움직여가며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서려던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아, 소리와 함께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맞다.”

“어, 응?!”

“다음엔 입술이 좋으려나.”



짓궂게 말하는 아드리앙의 목소리에 더욱 당황해선, 입만 벙긋거리며 꼼짝도 못하는 마리네뜨를 보다 못한 티키가 가방 안에서 튀어나와 그녀를 잡아끌었다. 겨우겨우 변신을 하고 문제의 근원지로 날아가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드리앙도 플랙의 도움을 받아 변신했다. 소녀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안아들고, 그는 빠르게 달려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안은 이상할 정도로 적막했다. 이 시간이 이렇게 사람이 없을 리가 없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멍을 찾는 블랙캣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던 여자아이가 조용히 눈을 떴다. 이런, 변신을 안 풀었는데. 난감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입매를 어색하게 올리는 블랙캣을 향해 소녀는 중얼거렸다.



“아빠? 아빠야?”

“어, 음. 엄밀히 말하면?”



하하 웃으며 뺨을 긁적거리는 블랙캣을 보며 소녀는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아빠, 그 옷 정말 이상하다. TV에 나오는 사람 같아!”

“응? 본 적 없어?”

“웅?”



뭐가? 그렇게 되묻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는 블랙캣의 마음은 절로 착잡해졌다. 아이한테도 정체를 알리지 않은 건가? 아니면 아예 히어로를 그만둔 거? 어느 쪽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솔직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정말 이 아이가 온 곳이 미래라면, 미래의 일을 미리 알아봤자 그다지 좋을 건 못 될 테니까.


아이를 안고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블랙캣에게 아이가 손가락을 내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응? 저쪽?”



끄덕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는 소녀를 보며, 블랙캣은 괜히 착잡해졌다. 성격상 아무래도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것 같은데 의사표현이 너무 없어서 묘하게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나 마리네뜨나 그리 조용한 성격은 아닌데 대체 어느 쪽을 닮은 걸까. 너무 조용하면 누가 막 괴롭힌다고 하던데 별 문제는 없겠지? 그럴 리 없겠지만.


어느 샌가 아빠의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블랙캣의 얼굴에 아이의 손이 닿았다. 그 말랑한 감촉에 퍼뜩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본 블랙캣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이야….”



거대한 구멍이 그들의 앞에서 낼름 혀를 들이밀고 있었다. 이게 맞냐고 물으니 소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딱 보기에도 꽤 위험해 보이는데, 여기 들여보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조심조심 안고 있던 아이를 땅에 내려주자 아이는 구멍을 빤히 쳐다보더니 툭 말을 던졌다.



“있지, 아빠.”

“왜?”

“아빠 싫어하지 않아….”



그 말을 남기며 홱 고개를 돌리는 아이의 모습에 잠깐 아드리앙은 이게 무슨 말인가 생각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 아이가 했던 투정을 떠올리고 그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한 것 같은데, 말끝이 살짝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신경쓰고 있었나 보다.


씨익 웃던 블랙캣이 장난스레 말했다.



“뭐, 괜찮아요. 작은 레이디.”

“아냐. 엄마가, 잘못하면 금방 사과하는 게 좋댔어!”

“마리네뜨다운 대답이네.”



그런 점은 여전하구나. 역시 내가 반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웃고 있는 블랙캣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소녀가, 무언가 결심했는지 블랙캣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빠가 나한테 괜찮다고 해줬으니까, 나도 아빠한테 비밀 하나 알려줄게!”

“에? 무슨 비밀?”

“이거 진짜진짜 비밀이야. 엄마가 절대 말하지 말랬거든.”



알았지? 약속이라고 말하면서 소녀는 대뜸 주먹을 쥐고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블랙캣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리자, 두 손으로 입가를 깔대처럼 감싼 뒤 소녀는 까치발을 들었다. 의아한 얼굴로도 무릎을 굽혀주는 블랙캣의 귓가에 소녀가 몇 마디를 속닥거렸다. 놀랐는지 초록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소녀는 싱긋 웃더니 새침하게 뒤돌아섰다.



“그럼, 아빠.”



잘 있어. 말릴 새도 없이 소녀는 훌쩍, 그 시커먼 구멍 안으로 발을 디뎠다. 까만 어둠이 소녀의 몸을 집어삼키며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샌가 구멍은 그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숲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남아 구멍이 사라진 자리만을 멍하니 쳐다보던 블랙캣은 가만히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이런, 너무 끈질기게 달라붙는 남자는 매력이 없는데 말이지.”

“블랙캣! 잘 다녀왔어?!”



혀를 쯧쯧 차면서 악당을 내려다보는 블랙캣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요요를 던져 악당의 발을 묶고 있던 레이디버그가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다리긴 했던 모양이네. 블랙캣이 능청스레 그녀의 말을 받았다.



“물론이죠, 마이 레이디?”



언제나처럼 싱긋 웃으며, 봉을 잡고 곧장 위에서 악당에게로 뛰어내리는 블랙캣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가득 피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무사히 악당을 퇴치하고 가볍게 주먹을 맞대던 중,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는 블랙캣의 모습이 영 이상했는지 레이디버그의 눈동자가 그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이 모습일 때는 과하게 즐거워 보였지만 오늘은 더 하네. 그녀가 입을 열어 물었다.



“너 무슨 좋은 일 있어? 얼굴에 꽃이 폈네.”

“아, 예상 외의 고백을 들어서 말이지.”

“고, 고, 고백?!”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곧장 심각해지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던 블랙캣의 입매가 잘게 일그러지더니,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레이디버그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긴 블랙캣이 그녀를 꽈악 끌어안았다. 레이디버그의 모습으로도 조금쯤은 당황했는지, 뭐냐고 물으려고 했던 그녀는 그가 속닥거리는 한 마디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고마워.’



늘, 언제나.


그 말과 함께 더욱 자신을 꼭 끌어안는 블랙캣의 모습에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갈등하다, 결국 한숨을 쉬면서도 허공을 배회하던 손가락들을 가만히 그의 등에 내려놓았다. 자신을 마주 끌어안아 주는 손길에 블랙캣은 기분 좋게 웃었다. 이미 가버린 아이가 남겨둔 그 한 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엄마는 아빠를 너무너무 좋아한댔어. 아빠랑 같이 있어서 행복하대.’



미래에서도 너는 그렇게 말해주는 걸까. 새삼 몰려오는 행복감에 가슴이 자꾸 벅찼다. 진정되지 않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싫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고백을 들은 기분에, 자꾸만 들뜨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리네뜨. 나도.



‘너와 같이 있어서 행복해.’



정말로.






렐님이 써주신 후속편: http://blog.naver.com/dmsthf21c/220535341407




밑은 제가 생각한 결말 추가분이에요!




어둠은 잠깐이었다.


소녀의 발이 검푸르게 물든 잔디밭 위로 살짝 내려앉았다. 이미 어둑해진 밤하늘 위에는 둥그런 달을 중심으로 하얀 별들이 가득 뿌려져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녀는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 천천히 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으니 나무들 사이로 넓은 공원의 부지가 드러났다. 원형의 광장을 감싸듯이 설치된 노란 가로등들이 광장을 가득 비추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밤이라 그런지 쌀쌀한 날씨에 소녀의 입술이 살짝 새파래졌다. 추운지 몸을 바르르 떠는 소녀의 고개가 어느 한 쪽으로 휙 돌아갔다. 아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엄마!”

“어디 갔었니?!”



얼마나 걱정했는데.


혼비백산한 얼굴을 하고서, 여인은 재빨리 달려와서는 제 딸을 꼬옥 껴안았다. 엄마의 품에 안기자 아이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말간 눈망울을 몇 번 깜빡이다가 눈물방울을 쏟아냈다. 막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지만, 울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지 엄마의 옷자락을 두 손으로 붙잡고 옷을 적시는 아이의 등을 고운 손이 상냥하게 토닥거렸다.



“그래, 그래. 너무 늦어서 미안해.”



기다리라고 해놓고 예정보다 늦게 온 내 잘못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푸른 머리칼의 여인은 제 딸을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 찾았다고 연락해야지, 안 그랬다간 진짜 일을 팽개치고 오늘 밤 안에 비행기를 타려고 할지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딸에게는 껌뻑 죽는 이이니 하려고만 든다면 그러고도 남는다. 안절부절 못하며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을 제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조금 웃었다. 조금 눈물을 쏟고 나니 잠이 오는지 아이의 몸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뱉으며 잠든 딸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던 마리네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 때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조금 걱정했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잘 다녀왔구나.”



내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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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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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캣 흑화. 아련 한 스푼.

※그냥 블캣 흑화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개연성을 좀 말아먹었어요!






[캣버그] 진심과 소망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검은 손끝을 따라 흐릿한 어둠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 기운은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온 도시를 차곡차곡 덮어가기 시작했다. 거리와 골목길, 건물들, 주변의 공기까지도. 마치 한 편의 흑백영화를 보는 것마냥 새까맣게 박제되어 갔다.


도시에는 싸한 정적과 함께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도 동물도, 심지어는 바람 한 줄기 불어오지도 않는 거리는 낮임에도 마치 밤처럼 어두웠다. 다같이 모여 즐거이 공원을 산책하던 가족들이나 뛰어다니다 넘어졌는지 주저앉아 엉엉 우는 아이, 즐겁게 귀가하며 떠들고 있던 친구들, 심지어는 팔짝팔짝 뛰어다니던 강아지나 푸드득 하늘로 날아오르던 새들까지 모두 사진마냥 그 자리에 박제되었다.


마치,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것처럼.


묵묵히 그 광경을 쳐다보던 그가 이내 손을 거둬들였다.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다소 쓸쓸해 보이는 눈빛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상념에 잠겨 있다. 늘상 개구지게 웃던 입술을 살짝 비틀고서, 남자는 그가 만들어낸 감옥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때였다.



“그만 멈춰. 도둑고양이 씨.”



새까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흑백의 배경 속에서 혼자만 색을 가지고,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분노에 차서 그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이. 무표정하던 얼굴에 감정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는 방금 전까지의 표정을 지우고 장난스레 웃었다.



“오랜만이네. 아니, 오랜만은 아닌가. 레이디버그.”



얼굴에 화색을 띄우며 그녀를 맞이하는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가 만든 광경에 기겁하며 그녀는 곧장 물었다.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글쎄~? 약간의 장난?”



건들거리며 두 손을 깍지껴 뒤통수를 짚는 블랙캣을 향해 붉은빛의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어이쿠.”



한 손으로 요요를 잡아채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블랙캣을 보던 레이디버그의 눈동자에 경악이 들이찼다. 최대한 빠르게 던졌는데 저걸 어떻게. 그러거나 말거나 요요를 잠시 이리저리 살펴보던 블랙캣은 이내 씨익 웃고서 요요를 꽉 쥐었다. 초록빛 눈동자가 묘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너무하네. 적어도 예고는 해주는 게 예의 아니야?”

“너…!!”

“뭐 난 신사니까. 자, 그럼.”



간다?


그 소리와 함께 블랙캣은 곧바로 확 요요를 잡아당겼다. 놀라서 대응할 새로 없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레이디버그를 향해 곧장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봉을 세게 휘둘렀다. 깜짝 놀란 그녀는 반사적으로 봉을 피해 옆으로 굴러 일어났지만, 쉴 틈도 없이 달려드는 블랙캣의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요요를 놓지 않고 당기는 힘을 조절해가며 봉을 휘둘러 레이디버그를 노려가는 블랙캣의 몸놀림은 평소보다도 더 절도 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간신히 피해가며 덤비는데도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는 그의 공격을 막아내며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이럴 때만 이렇게 강한 거야.


평소보다 몇 배는 강했고, 몇 배는 성가셨다. 최고의 아군은 최대의 적이 될 수도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몇 번 합을 마주하다가 그녀는 그를 세게 밀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조금 버거웠는지 헉헉 숨을 고르는 레이디버그를 지긋이 바라보며 블랙캣은 비아냥대듯 말을 걸었다.



“뭐야, 벌써 지쳤어?”

“누…, 가 할 소리!!”



끄떡없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 자신을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눈빛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블랙캣의 눈동자에 즐거운 기색이 완연했다. 그녀는 흘깃 눈을 돌려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보았다. 그의 미라클스톤이자, 나비가 깃든 물건. 저걸 부수지 않으면 그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다. 지금의 그는 계속 변신이 지속되는 상태니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그녀 쪽이었다. 하지만 반지를 부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반지를 부수면 그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정화를 한다고 해도, 강제로 풀어버린 변신이 몸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오기 전에 티키에게도 물어봤으나 티키도 마땅히 떠오르는 답이 없는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말하며 고민하는 티키의 대답을 더 들을 새도 없이 그녀는 레이디버그로 변신해 여기로 날아와야만 했다.



“왜 이런 짓을 해?”

“….”

“도시를 저렇게 만든 이유가 뭐야?”



애써 호흡을 골라가며 그녀는 최대한 느릿하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든 틈을 찾아내야 한다. 천천히, 조금씩 원을 그리며 그에게 접근해오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블랙캣은 픽 웃었다. 다 안다는 듯이.



“이럴 때가 아니면 레이디의 얼굴 하나 보기도 어려워서 말이죠.”

“…무슨 소리야. 나 하나 끌어들이자고 이런 일을 벌였다고?”

“노코멘트.”



어디 맞춰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빙그레 웃고 있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속이 탔다. 평소와 비슷하지만 그래서 더 방심할 수 없다. 사실 지금 이 상황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검은 나비에 홀린 걸까?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날 만났으니 됐잖아. 도시를, 당장 원래 모습으로 돌려놔!”

“그건 싫은데.”

“왜!”

“뭐든 그대로인 게 좋잖아.”



변하지 않고. 키득키득 웃는 블랙캣의 얼굴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어딘가 뒤틀려 있는 것처럼 비릿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블랙캣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레이디버그는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동결된 도시를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면 그를 설득하던가, 쓰러뜨려야 한다. 쓰러뜨린다. 그 한 단어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요요를 들고 있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려왔다. 역시 내 손으로 너를 쓰러뜨려야 하는 걸까, 블랙캣.


아니, 아드리앙.



“그만해. 대체 네가 바라는 게 뭐야?!”

“말했잖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라니까.”

“나한테 화가 난 거라면 차라리 나한테 화를 내! 그런 나비 하나에 조종당하는 거, 꼴사나워.”

“하하, 재밌네. 내가 지금 화났다고는 생각하고 있구나?”



음울하게 가라앉은 녹빛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흠칫, 몸을 떨던 레이디버그의 입매가 잘게 떨렸다. 그의 시선에서 쏟아지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차마 감당할 수가 없어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피부로 와닿았다. 그녀는, 깔깔하게 말라붙은 목구멍을 애써 열어 말을 뱉어냈다.



“정말로, 이게 네가 바라는 거라고?”

“하여간 속고만 살았나. 그렇다니까. 물론 대가로 너의 미라클스톤을 가져가야 한다고는 하지만 말이야. 레이디.”

“지금 나한테서, 미라클스톤을 뺏겠다고 했어?”

“뭐.”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하게 퍼져가는 예감을 지워내지 못했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똑같아 보였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블랙캣이 아니었다. 아드리앙이 아니야. 그의 껍데기를 둘러쓴 망령, 호크모스의 허수아비일 뿐이야. 그럼에도 쉽게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를 상처입히는 것이 두려웠다. 망설이는 자신을 조소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분해.


자꾸만 아파오는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기름칠을 못한 양철 로봇처럼 온 몸이 삐걱거렸다. 차라리 도망치고 싶었다. 내 손으로 너를 공격해야 한다는 현실에서.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 면!!”



말하는 것과 동시에 달려든 레이디버그의 손을 피한 뒤, 그녀의 팔을 붙잡으려던 블랙캣은 스쳐가는 그녀의 얼굴을 문득 쳐다보았다. 레이디버그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보자마자 블랙캣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고, 곧장 그의 발이 있던 자리로 날아드는 요요를 간신히 피했다. 깜짝 놀랐는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블랙캣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레이디버그는 곧바로 몸을 틀어 달려들었다. 그러나 몇 번 주고받다보니 냉정을 되찾았는지 침착하게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는 블랙캣에게 그녀가 결연하게 말했다.



“나는 너를 막겠어.”

“….”

“지금의 넌, 내가 좋아하던 아드리앙이 아니니까.”



나는 히어로니까.


그를 구하고 도시의 평화를 지켜야만 한다. 그게 설령 잠시간 그를 적대해야만 하는 일일지라도. 망설임을 지우지 않으면 지금의 블랙캣을 이길 수 없다. 지금은 모든 걸 잊어야 해. 너를 향한 내 마음까지도.


단호하게 말하며 다시금 그에게 요요를 던지는 레이디버그를 보던 블랙캣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네가 좋아하는?”



요요가 그의 팔에 감기고, 레이디버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끈이 감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던 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텅 비어 버린 것처럼 공허한 눈동자.



“그게 뭔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진짜로 나야?”



그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요요의 끈을 잡고 세게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질질 끌려오기 시작하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이 쓰게 웃었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 아니라?”

“뭐…?”



깜짝 놀라 말을 잃어버린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크게 소리쳤다. 무척 빠르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마치, 넘치도록 가둬두었던 무언가가 터져버린 것처럼 거침없이 내달렸다.



“나는 나야! 이 모습도 나라고. 네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나는 어디에도 없어. 아무데도 없어!”



나는 어디에도 없다고, 마치 늑대가 울부짖는 것처럼 절규하는 블랙캣의 눈빛에는 이전에 없던 괴로움이 가득했다. 형형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에 서려 있는 감정들이 그녀의 마음을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지금의 그는 블랙캣이 아니었다. 그건 아는데, 아는데.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그러던 중 블랙캣이 작게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검은색으로 환하게 불타기 시작했는데, 그걸 보자마자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위험해, 저건.


고대의 재앙.


그녀와의 사이에 일정 거리를 확보하자마자 블랙캣은 손을 뻗었다. 자신에게로 내뻗는 블랙캣의 손을 그녀가 간신히 피해내자, 그의 손은 그녀의 바로 뒤에 있던 건물의 벽을 건드렸다. 와르르 무너지며 그녀의 머리 위를 덮쳐오는 벽들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깔린다.


…? 아프지 않아?

아니다, 너무 아파.


차가운 바닥에 등을 댄 채, 바닥에 넘어진 레이디버그의 눈동자가 위를 향해 깜빡거린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검은 고양이의 머리 위로 벽 부스러기가 사르르 떨어졌다. 벽이 쓰러지자마자 자신의 몸을 날려 그녀에게 쏟아지는 잔해들을 막아낸 남자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굵은 눈물이 그의 뺨을 따라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과 목 주변을 가득 적셨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했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소리없는 절규가 그녀의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절절하게 말하는 그 한 마디가 그녀의 심장에 박혀들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눈물만을 쏟던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더없이 비참하다는 얼굴로.



“왜 너마저도, 진짜 나를 봐주지 않는 거야?”



어째서.


무릎을 꿇은 채로, 그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만 있는 블랙캣을 말없이 바라보던 레이디버그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멍하니 제 뺨에 다가오는 손을 쳐다보고만 있던 블랙캣의 얼굴에 무늬가 나타나더니, 입가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크아악!!”

“블랙캣!!”



괴로운지 머리를 쥐어뜯는 블랙캣을 애처롭게 불렀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 그의 손목을 붙들고 어떻게든 반지를 빼내려고 했던 레이디버그의 뺨을 블랙캣이 다른 쪽 손을 이용해 쳐냈다. 거세게 올려치는 따귀에 몇 미터 뒤로 날아가, 잔해 속에 파묻혔던 그녀가 끙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숙녀한테 이렇게 냉정하게 굴어도 되는 거야?”



장난스럽게 말해도 더 이상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에 서글픔을 느끼며 그녀는 봉을 집어들고 제게로 다가오는 블랙캣을 향해 말했다. 꺼져가는 듯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미안해.”



그렇게 너를 혼자 둬서 미안해. 끝까지 나만은 네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내가 너를 여기까지 내몰았어. 네가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들었어.


아직도 눈물 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는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절로 목이 메었다. 허세 넘치고 까불거리긴 했지만 언제나 상냥하던 시선이 차갑게 굳어버려서, 그게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그 모든 것보다, 힘들어하는 네 모습을 보기가 너무 버거워서.


울지 마. 울지 마. 제발 울지 마, 바보 마리네뜨.


금방이라도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아내고, 블랙캣을 보던 그녀가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 말해봤자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너의 외로움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그 남자를 용서할 수가 없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요요를 들고 크게 외쳤다. 행운의 부적!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던 요요는 곧 무언가가 되어 그녀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디버그의 시선이 블랙캣을 향했다. 조금은 해사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살짝 걸렸다.



“그러니까 꼭 구해줄게. 반드시 말해줄게.”



감정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면서, 그녀는 읊조렸다.



“간다.”








===

아 흑화를 쓰려고 했지만 마지막은 꼭 이렇게 끝나네요 어후ㅇㅁㅇ


정말 이것저것 많이 설정했지만 나올 수가 없었기에 억울해서(?) 설정을 조금 첨부합니다. 레이디버그랑 블랙캣은 서로 정체를 알고 있고, 그 문제로 큰 갈등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이에 아드리앙은 검은 나비에 의해 세뇌되었습니다. 여기서 흑화된 블캣이 가진 능력은 특정 공간의 시간을 멈추는 능력입니다. 이건 블캣의 소원에서 비롯되었는데요.


아드리앙의 독백 일부예요.


'모두에게서 잊혀지고 싶지 않아. 혼자는 싫어. 하지만 그것보다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멀어지는 현실이 두려워. 감당할 수가 없어. 그러니 차라리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줘. 떠나지 말아줘.

 

 제발.'


이게 흑화 이유였습니다. 당시 아드리앙은 아버지와의 문제도 있었고, 당시 정체를 알았지만 아드리앙의 모습에서만 헤롱거리는 마리네뜨에 서운해져서 대판 싸웁니다. 그렇지만 얘는 쉽게 제 마음을 꺼내보이는 타입이 아니라 혼자서 삭히던 중 그 마음의 틈새를 파고든 호크모스에 의해 반지에 영혼을 저당잡히게 되죠. 그래서 흑화를 했다는 걸로. 도시 전체의 시간을 장악할 수 있었던 건 얘가 겁나게 쎈 애라 그렇습니다.


마리네뜨는 얘가 흑화된 게 자기랑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건 대강 짐작하고 있지만, 블캣이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아마 제대로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을 거라는 설정..으로?


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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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60분] Helloween







“뭐?!”



깜짝 놀란 것처럼 마리네뜨는 눈동자를 휘둥그레 떴다. 그런 마리네뜨의 모습에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알리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반응이 왜 이리 격하냐는 듯이 웃으면서.



“얘는 왜 이리 놀라. 레이디버그 의상을 입겠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아, 아니.”



하하 얼버무리면서도 마리네뜨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내일은 바로 10월 31일. 할로윈 데이다. 학교에서 매년 화려하게 주최하는 파티는 올해도 역시 시청 홀에서 개최될 예정이며, 올 때는 역시 할로윈이라는 컨셉에 맞춰 분장을 하고 와야 했다. 입고 갈 의상을 물색하던 중 알리야의 레이디버그 분장 제안은 그녀를 기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무래도 이런 자리에 파리를 수호하는 정의의 히어로 분장이~, 빠질 수 있겠어?”

“아, 하하. 그렇…, 겠지?”

“물론이지. 야, 마리네뜨. 너도 입을래? 빌릴 수 있는 곳이 있거든.”

“고맙지만 사양할게.”

“왜? 너 은근히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그래서 안 된다고! 집요하게 따라오는 알리야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마리네뜨는 곧장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드리앙도 파티에 올까? 어떤 옷을 입고 올까 몰라~.”



틀림없이 아주 멋지겠지. 두 손을 꽉 맞잡고서 행복하게 미소짓는 마리네뜨를 보며 알리야는 못살아, 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니 안중엔 아드리앙밖에 없지?”

“에헤헤.”



가벼운 타박에 마리네뜨는 개구지게 웃으며 혓바닥을 살짝 내밀었다. 아드리앙의 할로윈 의상이 기대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게 지금 떠올라줘서 다행이다. 위기를 모면했다는 생각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리야는 한 번 시작하면 집요하니까.





*



“아드리앙, 너 이번에 무슨 옷 입을 거야?”



단짝 친구의 질문에 아드리앙은 고민하는 듯 살짝 눈살을 찡그리더니 이내 미소지었다.



“글쎄.”



무난하게 입지 않을까? 요란스러운 건 싫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아드리앙을 보며 니노는 낄낄 웃었다. 자기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다며 자랑스레 브이를 그리는 니노에게 아드리앙은 적당히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다 아, 소리와 함께 물었다.



“할로윈 파티라는 거, 밤새 하는 거야?”

“에이, 그럴 리가. 집에 돌아가고 싶으면 적당히 놀다 빠지면 돼. 그나저나 너, 조심해라?”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드리앙을 보며 니노는 정말 모르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티 중간에 춤추는 타임 있잖아? 여자애들한테 깔려죽지 않도록 조심하라구~.”

“아, 그거? 그런가.”



예나 지금이나 자기 인기에 대해 잘 모르는 친구의 둔함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주워삼키며 니노는 아드리앙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그 나름의 격려를 건넸다. 이거이거, 내일 아무래도 전쟁이 날 것 같네.



“뭐, 따로 춤추고 싶은 사람은 없는데.”



적당히 한 사람 붙들고 추면 되지 않을까. 골치가 아프다는 듯 떨떠름하게 웃으면서도 무언가 서운함을 담은 녹빛 눈동자는 파티에 올 일이 없을 한 사람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 설령 파티에 온다고 해도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그럼에도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제 마음이 바보같아 아드리앙은 설핏 웃었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아드리앙의 어깨에 니노가 팔을 걸쳤다. 우앗, 소리와 함께 깜짝 놀라는 아드리앙에게 니노는 씨익 웃으며 발랄하게 말했다.



“뭐, 그런 것보다. 내일은 어쨌든 파티잖아? 즐겨야지~!”



언제나처럼 밝고 명랑한 니노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 준다. 그의 웃음이 전염된 것처럼 아드리앙도 그를 따라 웃었다.





*



“히야….”



와글와글 소란스러운 시청 홀의 내부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시청 안을 꽉꽉 사람으로 채워넣은 것처럼 바글거리는 사람들, 곳곳 보이는 테이블에는 음식과 음료수가 가득 놓여 있었으며 평범한 모습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직접 와본 적은 없고 소문으로만 들어봤지만 역시 엄청난 규모였다.


마리네뜨의 고등학교가 주최하는 할로윈 파티는 비단 학교의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인근 시민들 모두가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파티였다. 물론 만 15세 이상만 참여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긴 했지만서도. 사람이 너무 많이 오기 때문에 어린애들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오는 애들은 몰래몰래 오긴 하지만.


하얀 레이스가 달린 푸른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풀어내린 마리네뜨의 분장 컨셉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물론 본인은 어색하다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지만, 알리야는 잘 어울린다며 그녀를 추켜세웠다.



“아, 진짜. 나 이상해 보이진 않지? 알리야.”

“문제없어. 엄청 잘 어울리는 걸?”

“그거 칭찬이야?”

“칭찬이지.”



그래도 왠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마리네뜨를 보며 알리야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진짜 예쁘다니까. 아, 이거도 써봐.”

“뭔데?”



알리야가 꺼내든 것은 작은 유리병 속에 들어 있는 향수였다. 뚜껑을 열지도 않았는데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기에, 마리네뜨의 인상이 살짝 누그러졌다.



“근데, 이걸 나보고 뿌리라구?”

“뭐 어때. 꾸밀 땐 확실히 꾸며야지.”



웃으면서 마리네뜨의 목덜미에 향수를 뿌려주는 알리야의 손길이 알게 모르게 세심했다. 이제 가서 아드리앙이나 제대로 꼬셔보라는 짓궂은 농에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지긴 했지만.


그런 친구의 모습에 즐거운지 가면 너머의 눈동자에 웃음이 가득했다. 예고한 대로 레이디버그 의상을 입고 온 알리야의 모습은 생각보다 꽤 잘 어울렸고, 예뻤다. 다만 신기한 것은 알리야뿐만 아니라 파티장 군데군데 빨간 타이즈를 입고 온 사람들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뭐 이리 많이들 입고 오셨지. 이리저리 둘러보는 마리네뜨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알리야가 작게 웃었다.



“왜, 레이디버그 의상 나름 인기 있어? 할로윈 시즌에 이걸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게 뭐라고.”

“어, 블랙캣도 있다, 봐!”



마리네뜨는 황급히 알리야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옷과 고양이 귀를 단 가면의 남자가 레이디버그 분장을 한 여자와 하하호호 웃고 있었다. 저게 뭔 짓일까, 인상을 찌푸리는 마리네뜨에게 알리야는 친절히 설명을 던졌다.



“커플인가 보네.”

“뭐?!”

“왜, 블랙캣이랑 레이디버그가 파트너잖아. 뭔가 커플같아 보이기도 하고.”

“걔랑 내…!! 아, 아니. 걔랑 레이디버그가 어딜 봐서 커플같다는 거야?”



말도 안 돼. 픽 웃으며 어이가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찰나, 알리야가 던진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어, 저기 아드리앙이다.”

“뭐?!”



마리네뜨의 고개가 절로 알리야를 향했다가 그녀가 보고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자리에 서 있는 금발의 소년은 머리끝부터 말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둘러쓰고 있었다. 검은 박쥐 가면과 햇(Hat), 거의 발목에 닿을 만큼 긴 망토까지. 아무래도 그의 할로윈 컨셉은 드라큘라인 모양이었다.



“어이구, 벌써 여자애들이 붙었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여자애들의 모습에 알리야는 혀를 끌끌 찼다. 보나마나 이번 댄스타임을 노리는 모양이다. 난감해하는 얼굴을 보니 아드리앙은 저 상황이 꽤 내키지 않는 게 분명했지만, 막 거절하기도 애매한지 하하 웃으며 손만 내젓고 있었다.



“하여간 저것도 참 피곤하겠다. 싶어. 그치, 마리네…, 야?”

“와….”



하긴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는 그를 보며 멋있다고 꺅꺅대고 있었지만. 입을 벌리고 정신없이 그를 구경하는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마리네뜨는 알리야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꺄아, 역시 뭘 입어도 멋있어~!!”

“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나저나 안 가봐? 댄스 신청할 거 아니었어?”

“내, 내가?! 아, 어, 어떡하지. 아니, 그게 좀 귀찮아하지 않을까?”

“일단 시도라도 해봐야지. 자, 가봐.”



망설이는 마리네뜨를 애써 밀어내던 중 알리야는 아드리앙의 근처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알아차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레이디버그 의상을 입고 있는 금발머리는 딱 봐도 클로이였다. 대놓고 아드리앙에게 찰싹 달라붙는 클로이를 보던 마리네뜨의 표정이 와그작 구겨졌다. 반면 뭔가 생각하는지 아드리앙은 멍하게 클로이를 쳐다보았다.


그 때였다.



“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파티 한 가운데로 무언가가 툭 내려왔다. 낄낄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이는 딱 봐도 악당이었고, 그에 깜짝 놀란 마리네뜨는 넋 놓고 악당을 살펴보다 카메라를 꺼내는 알리야를 냅두고 몰래 빠져나와 변신했다. 레이디버그의 모습으로 홀로 돌아오니 사람들은 다들 악당에게 사로잡혔는지 검은 상자들만이 주위에 가득 덮혀 있었다.



“요호, 재밌는데.”

“블랙캣!”



어느샌가 나타났는지 능글맞게 웃으며 제 옆으로 온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반갑게 그를 불렀다. 커플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그녀에게 좋은 파트너임에는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으흐흐 웃어대는 악당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리던 그녀에게서 뭔가 느꼈는지 블랙캣이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제게 얼굴을 들이미는 블랙캣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뭐야?”



손으로 얼굴을 홱 밀어내며 불퉁하게 묻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 무슨 향수라도 뿌렸어? 달콤한 향이 나네.”

“음, 글쎄.”



조금 뜨끔했지만 레이디버그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알리야가 뿌려준 향수가 생각보다 효과가 오래 가는 모양이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그들에게로 뿌려지는 공격들을 재빨리 몸을 날려 피한 뒤 상자 뒤에 숨었다. 이번에 검은 나비가 깃든 대상은 아무래도 악당이 들고 있는 저 지팡이인 모양이다.



“좀 골치 아픈 녀석이네.”

“그러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어서 해치우자!”



상자 밖을 주시하며, 무언가 떠올랐는지 싱긋 웃던 레이디버그는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블랙캣을 잡아끌었다. 그런 레이디버그를 멍하니 쳐다보던 블랙캣의 입가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역시 가짜보단, 진짜가 낫지.”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가자구, 레이디?”



언제나처럼 악동같은 미소를 지으며, 블랙캣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악당을 해치우고 정화를 끝낸 뒤, 파티는 다시 재개되었다.


언제 악당이 나타났냐는 듯이 다시 활기차게 돌아가는 파티장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마리네뜨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레이디버그로 변신이 끝난 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을 때 알리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한 자리에 오래 있을 타입은 아니지. 한숨을 쉬며 그녀를 찾아다니던 중 마리네뜨는 제 앞을 우르르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 걸려 뒤로 떠밀렸다. 넘어지려는 찰나 따뜻하지만 단단한 무언가가 자신을 받쳐 주었다. 제 어깨를 붙잡고 받쳐주는 손에 마리네뜨는 감사인사를 하려 고개를 돌렸다.



“아, 감사합….”

“마리네뜨?”

“아, 아드리앙!”



검은 망토에 검은 모자, 박쥐 모양의 가면을 쓴 남자는 분명 아드리앙이었다. 살짝 삐져나온 금발 머리카락이 입고 있는 복장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드리앙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후다닥 일어섰다. 방금 전까지 아드리앙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사실에 마리네뜨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지금 고개를 들면 분명히 들킬 거야.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마리네뜨를 가만히 쳐다보던 아드리앙은 방금 전 느꼈던 기시감에 절로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도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이 향기는, 분명….



“향수….”

“어, 어?!”

“너, 향수 뿌렸어?”

“아, 알리야가 뿌려줬어!”



향기 좋지.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녹빛 눈동자가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딘지 멍한 느낌에 마리네뜨는 저기, 하면서 그를 불렀다.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아드리앙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자신의 행동이 꽤 무례라는 걸 깨달았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던 아드리앙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마리네뜨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Trick or Treat?"



할로윈 장난. 사탕을 주지 않으면 못된 장난을 칠 테야! 라고 말하듯 싱글싱글 웃는 아드리앙의 얼굴은 비록 가면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행동은 꽤 귀여웠다. 그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주머니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음에 속으로 머리를 쿵쿵 때리며 미안함을 표시했다.



"앗, 미안해. 나 지금 사탕이 없어서.“

“그래? 그럼, 장난친다?”

“어?”



정중히 뒤로 물러선 아드리앙이 살짝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Shell we dance, Mademoiselle? (한 곡 추실까요, 아가씨?)"



허리를 숙이며 조심스레 손을 내미는 아드리앙의 표정은 가면을 쓰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꽤나 짓궂었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녹빛 눈동자가 악동마냥 반짝거린다. 정말 장난을 치는 것처럼. 검은 가면을 얼굴 위로 올려쓰고 장난스레 웃는 아드리앙을 보면서 마리네뜨는 순간 그가 누군가와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고양이.


그럴 리 없다고 애써 머릿속에 떠오른 잔상을 지워내면서도, 마리네뜨는 살며시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얼굴이 가려져 있어서인지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운이 좋은 날이라는 생각과 함께 마리네뜨는 환하게 웃으며, 승낙의 대답을 입에 담았다.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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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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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딩님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 나타니엘이 히어로인 ‘레드독’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설정입니다. 4시님이 만들어주신 설정을 참고했습니다(...)








“네가 뭘 알아…!!”



분노로 인해 흥분한 목소리, 마디진 손이 과격하게 상대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멱살을 잡힌 블랙캣은 당황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그저 멍하게, 제 앞에 서 있는 레드독(Red Dog)을 쳐다보았다.


섬뜩하게 빛나는 안광이 감출 수 없는 절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타마리아드Say Nothing








“난 니 녀석이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레드독의 목소리가 살짝 부루퉁했다. 늘 침착하기만 하던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도. 벽에 기대서 있던 블랙캣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지금 두 사람은 악당이 활동하고 있는 지점 근처에 있는 작은 골목에 숨어, 아직도 소식이 없는 레이디버그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던 블랙캣이 하하 웃으며 입꼬리를 어색하게 말아올렸다.



“누군 네가 좋아서 이러고 있냐?”



장난스럽지만 제법 날카롭게 대답하는 블랙캣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적의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레드독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 레이디버그는 이런 녀석을.”



생략한 뒷말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블랙캣이 둔한 건 아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야, 내가 뭐?! 나야말로 너같은 샌님은 귀찮다고? 레이디가 원하지 않았으면 누가 너 같은 녀석이랑 같이 일하겠냐?”

“레이디라고 부르지 마.”



짜증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레드독과는 달리 블랙캣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씨익 웃었다.



“뭐야, 호칭 가지고 되게 쩨쩨하게 구네. 그렇게 자신이 없냐?”

“글쎄. 너야말로 나랑 그녀가 친한 게 질투나지?”

“헛소리.”



조금 뜨끔했지만 블랙캣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계속 깐족거렸다.



“애초에 너보다 내가 더 레이디랑 오래 같이 지냈다고.”

“사랑에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해?”



동요하지 않고 차갑게 맞받아치며, 레드독은 피식 입가에 비웃음을 올렸다.



“그리고, 너보다 내가 더 그녀에게 도움이 될 거 같은데?”

“퍽도 그러겠다.”

“맨날 늦게 오는 녀석보다는 낫지 않겠어.”

“고작 몇 분 가지고 정말 쩨쩨하게 구네. 엉? 그런 남자는~, 매력 없다고?”

“레이디버그는 이런 나를 더 좋아하던데.”

“동료로서겠지.”



한 마디도 안 지려는지 계속해서 으르렁거리는 그들의 위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언제 왔는지 지붕 위에서 웃고 있던 레이디버그가 그들 사이로 사뿐히 내려왔다.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두 손을 딱 맞잡고 사과하는 레이디버그를 향해 블랙캣이 허리에 손을 얹고 짐짓 말했다.



“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아니야, 우리도 방금 왔는걸.”



블랙캣의 말을 잘라 끊으며 레드독이 상냥하게 말했다. 방금 전의 험악한 공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차갑고 냉랭하던 표정은 그녀의 등장과 함께 봄이 오듯 사라지고 봄볕과 같은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애정어린 눈길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레드독의 모습에, 블랙캣은 가만히 얼굴을 찌푸리며 팔을 득득 긁었다. 언제 봐도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근데 너희 뭐했어?”

“아, 잠깐 얘기 좀 했어.”



금방 표정을 풀어버리고 헤실거리는 게 꼭 대형견 같았다.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은 뒤에서 목을 잡고 웩웩거리고 있었다. 토할 것 같다는 듯이. 그녀가 돌아보는 순간 곧장 표정을 바꾸고 웃어보이긴 했지만서도.


악당은 이미 다른 희생양을 찾아 장소를 옮긴 뒤였다. 간단히 악당에 대한 특징과 경로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레이디버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어서 가자.”



앞장서서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레이디버그의 뒤를 따르는 두 남자는 여전히 궁시렁거렸다. 셋은 벽을 타고 올라가 지붕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보폭으로 펄쩍펄쩍 뛰어가는 레드독이 저보다 살짝 뒤에서 달리고 있는 블랙캣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빨리 좀 움직여! 레이디버그가 기다리잖아.”

“알아서 따라가고 있거든? 너나 잘하시지 그래?”

“짐이나 되지 마라.”

“누가 할 소릴.”



고양이처럼 빠르고 자유롭게 지붕 사이를 뛰어다니는 블랙캣의 발자취는 그저 앞으로 뛰어가고만 있는 레드독과는 참으로 달랐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처럼 아무런 패턴이 보이지 않는 자유로움. 그를 놀리는 것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도 얄미울 정도로 잘만 쫓아오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드독의 눈가가 마구 구겨졌다.



“역시 좋아할만한 구석이라곤 없군.”

“아, 네네. 그러세요?”



꽤나 재미있단 말이야. 속으로 킬킬거리며 즐거워하는 블랙캣과 인상을 잘게 찌푸리고 있는 레드독, 두 사람에게 앞서가던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돌려 주의를 주었다.



“뭣들 하는 거야, 얼른 와!”

“지금 가!”



동시에 대답해버린 두 사람의 눈초리가 가늘게 좁혀졌다.





*



같이 악당을 상대하다보면 싫어도 깨닫게 되는 일이 있다.


고대의 재앙으로 근처의 벽을 죄다 무너뜨리던 블랙캣의 시선이 저쪽에 있는 두 사람에게서 멎었다. 무언가를 준비하는지 꾸물거리는 레이디버그의 앞에서 원반을 사용해 공격들을 방어하는 레드독의 눈초리가 꽤 매섭다. 기필코 지키겠다는 것처럼, 그녀의 주변으로 몰아치는 공격들을 침착하고 정확히 막아내는 그의 움직임에 블랙캣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작전회의를 하는지 뭐라고 속닥거리는 둘의 모습에 블랙캣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애써 웃어넘겼다. 짜증나는 녀석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능력은 있다. 그녀가 저 녀석을 신뢰하는 이유가 거기 있겠지. 물론 제 능력보다 상성이 맞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삐죽 싹을 틔우는 서운함을 애써 가라앉히며 블랙캣은 칫, 입술을 내밀었다. 초록빛 눈동자가 그를 날카롭게 훑었다. 힘들 텐데 뭐가 그리 좋은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뭐 저리 성취감에 가득 차 있는지. 너무 무른 거 아냐?


아니, 뭐. 기본적으로 머리회전도 잘하고 냉정한 녀석인 건 사실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여러 모로 도움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인지라 블랙캣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녀를 사이에 둔 연적만 아니었으면 꽤 마음이 맞았을지도 모르는데. 같은 남자기도 하고. 조금 아쉬움이 드는 마음을 접어두고 블랙캣은 시선을 다시금 악당에게로 돌렸다.




*



검은 나비를 정화하고 길거리를 회복시킨 후, 셋은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고 헤어졌다. 두 사람과 헤어진 레드독은 학교 근처, 사람이 없는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계속해서 들리던 띠띠거리는 경고음이 들리다가, 멎었다.


소리가 멎는 것과 동시에 변신이 풀리고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 변신했을 때만치 불꽃처럼 붉게 물든 머리카락, 녹빛 눈동자의 단정한 외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나타니엘은 근처에 놔두었던 가방을 챙겨들고 조심스레 밖으로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또 무슨 변명을 준비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다음 날, 학교로 등교하는 나타니엘의 발걸음은 꽤 가벼웠다. 비록 숙제를 하고 그림들을 그리느라 좀 늦게 잠들기는 했지만 학교에 오는 것은 꽤 즐거웠다. 일찍 등교한 탓인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스케치북을 펴들었다.


어제 보았던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몇 장 간단하게 그리고 있자니 반 친구들이 하나씩 들어왔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스케치북에 코를 박고 있던 나타니엘은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움찔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는 나타니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들이찼다.


마리네뜨였다. 피곤한지 눈에 살짝 어우러진 다크써클에 괜히 걱정되는 마음을 누르고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조금은 큰 목소리로.



“마, 마리네뜨. 아, 안녕?”



히어로일 때는 잘만 하는 인사인데 왜 평소에는 이렇게 힘들까. 어색함을 꾹 참고 손을 흔들어주자, 다행히도 알아들었는지 마리네뜨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싱긋 웃는다.



“안녕, 나타니엘.”



좋은 아침이야. 같은 반 친구에게 보이는 호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정말로 기쁜지 나타니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있던 예전에 비하면 대단한 진보다. 이 모든 게 그녀와 공유하고 있는 비밀 때문이지만.


새로운 페이지를 펼쳐들고, 나타니엘의 손은 부지런히 스케치를 시작했다.


평소에는 마리네뜨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정체는 레이디버그, 이 도시의 평화를 수호하는 히어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자신은 레드독. 그런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는 존재. 그녀가 레이디버그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깜짝 놀랐었고, 요정을 만났을 때는 더 깜짝 놀랐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악당을 상대하는 일은 조금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녀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히어로로 변신하면 소심한 자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하면서 그녀의 곁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몹시 들뜨게 했다. 요정에게 선택받은 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꽤 무리없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게 수다를 떨고 있는 마리네뜨를 흘깃 쳐다보면서 다시금 스케치에 눈을 돌렸다. 생각없이 손을 놀렸더니 그림은 이젠 제법 그녀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다. 괜히 즐거워지는 마음에 나타니엘은 설핏 웃었다.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참으로 우연이었지만 지금은 그 우연에 감사하고 있다.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법이니까.


하지만 이런 그의 상념은, 교실 안으로 들어선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깨졌다.



“아, 아드리앙! 안녕?”

“안녕.”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나타니엘은 흠칫 몸을 떨다가, 이내 인상을 쓰고 방금 들어온 상대를 쳐다보았다. 옅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받아주던 소년이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피곤한지 멍을 때리고 있는 소년을 정신없이 훔쳐보는 소녀의 얼굴에 나타니엘의 눈동자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스케치북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앉아 어딘가로 시선을 향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 시선 끝에 누가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따끔거리는 심장이 고통을 호소했다. 쓰디쓴 현실이 혀 끝에 가득 번진다.


소년의 이름은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그녀가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예전부터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좀 더 가까이서 지내게 되면서 그 확신은 더욱 굳어져갔다. 마리네뜨는 레이디버그일 때나 평소 모습이나 거의 똑같지만, 유독 저 녀석 앞에서만은 굉장히 소심한 모습을 보였다. 굉장히 말투가 빨라진다거나, 말이 헛돈다거나, 어딘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그녀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싫어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곁에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마음을 바랄 수는 없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검은 타이즈를 입은 고양이 같은 녀석. 분명 그 녀석은 레이디버그를 좋아한다. 그게 싫어서 처음부터 녀석을 좋아하지 않았던 거지만, 생각해보면 레드독이 돼서 그 고양이 녀석이랑 싸워봤자 뭐가 달라질까?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도 자신도 아닌 바로 저 녀석인데.


나타니엘의 시선이 마리네뜨에서 아드리앙으로 옮겨갔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얼굴은 분명 부드럽게 잘생긴 미형이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아들로 태어나, 이제껏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 인기가 많은 건 이해한다. 그는 분명히 상냥하고 배려심 넘치는 남자였고, 비슷한 입장인 클로이를 모두가 꺼려하는 것과는 달리 그를 꺼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게 그 증거 중 하나였다. 마리네뜨가 좋아하는 상대만 아니었더라도 분명 자신도 그를 좋게 생각했을 것이다.


답답해졌다. 나타니엘은 작게 한숨을 삼키며 스케치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말캉한 무언가가 손 끝에 닿았다. 지우개로 슥슥 방금 전까지 그렸던 그림을 지웠다.


너를 그린 적은 많았지만 한 번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늘 이렇게 그렸다가, 망설이다가, 또 다시 지울 뿐이다.


흐릿한 잔상만을 종이 위에 남겨두고서.








“꺄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업 중 악당의 난입으로 난장판이 된 교실을 몰래 빠져나온 나타니엘은 변신할 만한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가방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튀어나온 녀석을 데리고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보던 차,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플랙! 너 빨리 이리 안 와?”

“싫은데~? 그러니 치즈 한 조각만 주라니깐?”



모퉁이에 몸을 기대고 빼꼼 소리가 나는 쪽을 들여다보았다. 아드리앙이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 검은색의 무언가가 둥둥 떠다녔다. 꽤 먼 거리였지만 대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나타니엘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요정.



“알았어, 알았다구.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던 아드리앙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요정에게 내밀었다. 좋다고 달려드는 요정을 보고 씨익 웃던 아드리앙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요정이 손 쪽으로 빨려들어 사라지더니 그는 금세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고양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곧바로 모습을 감추는 그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나타니엘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스르륵 주저앉는 그를 부드럽게 채근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타니엘. 빨리 가야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제 파트너의 말을 듣고서야 나타니엘은 지금이 변신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겨우 자각했다. 직면하게 된 진실에 가만히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던 녹빛 눈동자가 물결치듯 요동쳤다.



“어….”



그래야지. 힘없이 대답하던 나타니엘의 웃음이 오래 삭은 과자처럼 망연히 부스러졌다.







힘들다.


녹색 눈동자를 부르르 떨면서 레드독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독 오늘따라 집중이 잘 안 됐다. 방금 전 악당을 막아낼 때 무리했던 왼쪽 손목이 저릿거렸다. 집에 가서 보호대를 차면 괜찮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눈빛에 상념이 둥둥 떠다녔다. 한심함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애써 그녀를 보호하고 악당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오래 끌었다면 공격을 허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오늘 그의 정신상태는 엉망이었다.


악당을 정화하고 있는 레이디버그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던 레드독에게 블랙캣이 다가왔다. 뭐라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 녀석의 시야 앞에서 손을 휘휘 흔들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그에게 블랙캣은 언제나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너 뭐해?”

“….”

“오늘따라 집중을 못하던데. 무슨 일 있냐?”

“….”



여전히 말이 없는 레드독이 이상했는지 블랙캣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야, 그나저나 오늘 나 정말 멋지지 않았냐? 대활약이라고~? 갑자기 주인 잃어버린 강아지마냥 소심해지던 녀석이랑은 다르게도 말이야. 안 그래?”



허세 가득한 말투로 하하하 웃으며 블랙캣은 레드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분히 놀리려는 의도가 강했을 뿐인데, 굳이 손을 쳐내지 않는 레드독의 모습에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진짜 화를 냈을 텐데. 놀라서 그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야, 진짜 왜 이래?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너무 순순하니까 무섭잖아. 가만히 중얼거리며 블랙캣의 눈동자가 그를 휙 훑었다. 정신을 정말 어디다 두고 왔는지 멍한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레드독의 모습에 블랙캣은 속으로 혀를 찼다. 원래도 그녀 앞이 아니면 그다지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오늘은 한층 더 심하다. 무표정하다 못해 감정 한 오라기 보이지 않는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창백했고, 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은 마치 인형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 거야. 이제 나랑은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거냐?”



일부러 투덜거리듯 말하며 도발해봐도, 여전한 레드독의 모습에 블랙캣은 이제 슬슬 걱정이 되었다. 음, 조금 손해보더라도 위로나 해볼까. 답지 않게 착한 결심을 한 블랙캣이 씨익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너보다 더 활약했다고 삐진 건 아니지? 뭐 어때. 맨날 너만 활약하는 것보다는 이게 그나마 밸런스가 맞지 않냐? 나도 가끔은 레이디 앞에서 매력어필을 해야지. 뭐 난 늘 매력이 넘치지만~?”



레이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초록빛 눈동자에 서서히 감정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초점이 돌아오는 눈동자에 블랙캣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이 녀석에게서 반응을 끌어내기엔 그녀만한 화제가 없는 것 같다.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블랙캣이 하하 웃었다.



“뭐, 그래도 걱정 마. 니가 좀 짜증나는 녀석이긴 하지만, 적어도 레이디는 아직도 나보다는 너를 더 좋아할….”



블랙캣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순식간에 레드독이 그의 멱살을 붙들더니,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급속도로 냉각되는 분위기에 그저 눈만을 깜빡거리며 레드독의 얼굴을 쳐다보는 블랙캣의 입매가 당황으로 얼룩졌다. 블랙캣의 멱살을 꽉 붙잡고서 레드독, 아니 나타니엘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며 짓씹듯 내뱉었다.



“네가 뭘 알아…!!”



매섭게 일렁이는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명백했다. 적의. 그럼에도 어딘가 슬퍼 보였다. 당황해서는 한 마디도 못하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는 블랙캣과는 달리, 그는 지금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추스르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왜 그러냐는 듯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그 정도로 분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것마저도 욕심이었단 말인가.


왜 하필 네가 그 녀석이야.



“다 끝났어! 뭐야,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명랑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드독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가볍게 걸어 그들에게 다가온 레이디버그는 꽤 심각한 듯한 두 사람의 분위기나 굳어 있는 레드독의 얼굴을 보고 절로 인상을 썼다. 뭔가를 예상했는지 그녀는 가만히 블랙캣을 흘겨보았다.



“뭐야, 블랙캣. 너 또 얘한테 시비 걸었어?”

“하, 참. 네네. 뭘 하면 꼭 내 탓이지? 근데 이번만큼은 아니거든?”

“하이고, 그러시겠죠.”

“진짜라니까! 이 녀석 오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봐. 갑자기 이러네.”

“레드독. 무슨 일 있어?”



다정스레 묻는 레이디버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레드독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먼저 가보겠다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뒤돌아섰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는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를 등진 채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마리네뜨가 그를 좋아한다지만,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으니까. 관심이 있었다면 마리네뜨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조금만 살펴보아도 다 티가 나는걸. 녀석은 누구에게나 상냥하지만 특정한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기지도 않는 타입이었다. 정말 종이 위에 그린 듯한, 동경하지만 결코 닿지는 못할 동화 속의 왕자님.


그가 마리네뜨를 그저 같은 반 친구로서만 대하는 모습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녀도 언젠가는 포기하게 되겠지. 그 땐 그랬었다고 설레여하던 동경을 오래 전 추억으로 여기는 날이 올지도 몰라. 그러면 그 때는 조금씩 주변을 살펴보고서, 이렇게 계속 기다리는 나를 눈치채주지 않을까.


아니었구나.

이미 나한텐 아무런 기회도 없는 거였나.


괜히 서러워지는 가슴에 눈시울이 뻑뻑해졌다. 흐려지는 시야에 살짝 눈을 한 번 깜빡거리자, 초록빛 눈동자 위로 엉겨붙었던 눈물 한 방울이 조용히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지만 묘하게 엇갈려있는 상태라니.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의 정체를 알게 되면 분명 마리네뜨는 그를 선택하겠지. 전혀 다른 모습에 방황하고 힘들어하더라도 결국 그녀의 선택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그를 이기고 그녀의 마음을 제게 돌릴 자신은 없었다. 


결국 나는 평범하니까.


울컥 치미는 괴로움을 조용히 달래었다. 그럼에도 미련을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에 이제는 오기가 생길 지경이다. 그래도 좋은걸. 물러날 수 없는걸. 결연한 눈빛으로 인적이 없는 골목길의 어둠 사이로 스며가는 레드독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아직은 괜찮을 거야. 저 두 사람은 아직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직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어.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고 해도.


그러니까….


촤륵 소리와 함께 변신이 풀리고, 다시금 평범한 소년의 모습으로 빛으로 걸어나오는 나타니엘의 입매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야.

나는 비겁하니까.









====


나타니엘 처음 쓰니까 겁나 어렵네요;; 감정선 너무 어려워;; 아 나타니엘 히어로썰 너무 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 4시님 푸딩님 감사합니다ㅠㅠㅠ 아 외모나 성격이나 너무 아까워요 진짜. 좀 더 비중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ㅂㄷㅂ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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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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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의 소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캣마리] 한 여름 밤의 꿈







저녁이 오고 있었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푸른색 하늘 사이로 어둠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밝게 빛나던 태양은 조금씩 자리를 옮기며 고된 하루를 끝낼 준비를 시작했다. 저 멀리서부터 탁한 어둠이 온 하늘 위를 덧칠하며 멀리로 사라지는 빛의 끝무리를 쫓아가고 있었다. 느릿하게 그 뒤를 따르는 하얀 구름이 다가오는 밤에 섞여 흩어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어둠이 싸한 바람과 함께 도시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밤이 찾아왔다.


웅장한 노트르담 성이 보이는, 곤한 단잠에 빠져 있는 소녀의 집 옥상에 새까만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림자는 답지 않게 심호흡을 하더니 조심스레 옥상의 문을 열었다.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서는 방 안을 훑어보았다. 어둠에 특화된 시야 덕분에 그는 문제없이 방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녀도.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검은 그림자는 소녀가 누운 침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씨익 웃더니 뒤돌아서선 톡톡거리며 벽을 두들긴다. 처음에는 미동도 없더니, 몇 번을 오가는 소음이 거슬렸는지 한참을 부스럭거리던 소녀의 눈동자가 살며시 떠졌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침대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녀는 결국 침대를 벗어나 방의 불을 켰다. 그리고,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 안녕? 레이디.”

“꺄악!!”



짧은 비명을 내지르던 소녀가 이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씨익 웃으며 제 앞에 서 있는 블랙캣의 존재에 놀란 것도 잠시, 소녀는 지금 제 꼴이 어떤가를 잠시 돌이켜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옷 차림인데다 머리는 산발이다. 괜히 창피해진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와 자신 사이에 자리한 책상 위에 놓여진 머리끈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 녀석이 내 방에 있단 말인가!



“너무 놀라네? 내가 귀신도 아니잖아.”

“뭐야, 무슨 일인데, 요?”



평소처럼 반말을 하려다가 겨우 존대로 바꿨다. 당황해서는 머리끈을 손에 꼭 쥐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면서 소녀는 눈을 찡그렸다. 짜증난다는 티를 팍팍 풍기면서 자신을 째려보는 마리네뜨를 향해 블랙캣은 난처하다는 듯이 뺨을 긁적였다.



“아, 미안. 너무 놀라게 했나.”



뺨을 긁적거리며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는 블랙캣의 모습에 소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오면 안 놀라겠니? 당연히 놀라지.


조금 진정되자 그제서야 의문이 들었다. 블랙캣이 왜 자신을 찾아왔을까? 설마 내 정체를 아는 건 아닐 텐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에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녀를 빤히 쳐다보던 블랙캣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곱게 접혔다. 천천히 다가가 소녀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은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이야호~!!”



밤의 도시, 달도 뜨지 않은 칙칙한 밤하늘을 밝게 밝히는 것은 온갖 조명들과 건물들 사이로 스며나오는 불빛들이었다. 빛을 피해, 어둠에 몸을 숨기며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아직도 잠들지 않은 사람들을 스쳐, 검은 그림자는 하하호호 웃고 있는 그들의 머리 위를 훌쩍 건너다녔다. 블랙캣이었다. 마리네뜨를 등에 업고서 블랙캣은 지붕 사이사이를 깡충깡충 잘도 건너다녔다. 그런 블랙캣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매달려 있던 마리네뜨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대체 뭐 하자는 거, 예요?”

“왜? 불편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우물거리던 마리네뜨의 입가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겉보기엔 거칠게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사실 블랙캣의 움직임은 굉장히 안정적이었고, 발걸음은 꽤나 부드러웠다. 어지간히 신경써서 달리고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불평을 하기엔 뭐한 상황이라 마리네뜨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경치를 쳐다보았다.


경치와 더불어,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가 설핏설핏 귀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모습이 한데 내려다보였다. 관광객인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도 보였고, 연인인지 다정스레 팔짱을 낀 사람들도 있었다. 좋을 때구나. 자신에게도 저런 날이 오면 좋으련만. 진전조차 없는 짝사랑을 떠올리고서 마리네뜨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라 바람이 제법 많이 불었지만, 여름밤이라 그런지 잠옷 차림이었는데도 춥지도 않고 꽤 시원했다. 머리는 몰라도, 옷은 갈아입고 나오면 안 되냐고 물으니까 그렇게 오래 안 걸린다고 말하며 막무가내로 자신을 끌고 나왔다. 꽤나 들떠 있는 모습이라 조금은 의아해졌다.


정말 어디를 가려는 거지?



“좀 위로 뛴다.”

“예? 으앗!!”



선전포고하듯이 말하고는 그는 깡충깡충 뛰어 점점 더 높은 건물들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더욱 거세지는 바람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블랙캣을 더욱 꽉 붙잡고 눈을 감았다. 레이디버그로 변신할 수 있으면 몰라도, 지금 잘못했다간 큰일나기 십상이었다. 그런 마리네뜨의 모습에 블랙캣은 속으로 설핏 웃고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뭐해, 다 왔는데?”

“네?”



벌써? 그렇게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우와!!”



거대한 도시의 전경이 고스란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밤인데도 점점이 박힌 듯한 수많은 불빛들이 도시의 야경을 수놓고 있었다. 정시마다 불빛을 깜빡거리는 에펠탑, 화려하게 빛나는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해 잠들지 못한 많은 건물들이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치 밤하늘의 별들을 지상으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이 곳이 파리에서 가장 높은, 몽파르나스 타워의 맨 꼭대기 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바람이 꽤 거친지라, 블랙캣이 조심스레 그녀를 내려준 뒤 그녀의 뒤에 서서 두 팔을 꽉 붙잡아 주었다. 홀린 듯이 경치를 구경하고 있던 마리네뜨의 뒤에서 블랙캣이 낮게 웃었다.



“예쁘지?”

“어, 에?”

“좋아할 거 같아서.”



하하 웃으며 자랑스레 대답하는 블랙캣의 대답에 마리네뜨는 순간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떨떠름하게 물어보았다.



“설마,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한 게 이거 보자는 거였어, …요?”

“? 당연하지.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는데?”



블랙캣이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마리네뜨는 그가 붙잡고 있던 손 중에 한쪽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풀어헤친 푸른 머리카락과 얇고 하늘하늘한 잠옷이 시원한 밤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크게 펄럭거렸다.



“무슨 생각…! 이에요?”

“에?”

“그쪽은, 레이디버그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양다리는 안 돼요. 진지하게 말하는 마리네뜨를 쳐다보는 초록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지더니, 몇 번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픽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너 왜 웃냐는 듯이 그를 흘겨보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웃음을 멈추고,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싫어?”



금세 꼬리를 말고 눈치를 보는 것처럼 괜히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래도 나한테 좋은 거 해주자고 이런 거 같은데. 너무 심했나?



“이런 거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망한 듯이 중얼거리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더욱 어쩔 줄 몰라했다. 사실 마리네뜨가 조금만 더 정신이 있었더라면, 기운없이 말하면서도 자신을 더욱 세게 붙잡는 그의 손길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꽤 당황한 상태였다. 호의에는 약한 그녀의 천성 탓도 있었다. 힐끔거리며 자신을 살피는 블랙캣의 눈동자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한참을 고민하던 마리네뜨는 우물거리며 말을 뱉어냈다.



“아니, 싫다기보다….”



그녀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버틸 힘이 부족해 순간 휘청거리는 마리네뜨의 허리를 붙잡은 블랙캣이 자신 쪽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가볍게 품에 안았다.



“여, 괜찮아요, 레이디?”



조심해야지. 씨익 웃으며 놀리듯 말하는 블랙캣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마리네뜨는 괜히 달아오르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살며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여과없이 혈관을 따라 머리까지 흘러 들어왔다. 미쳤어! 얘는 블랙캣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제게 똑바로 와닿는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레이디버그가 아닌 자신은 남자한테 면역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애써 자위하던 차, 마리네뜨는 능글맞게 웃는 블랙캣의 모습에서 중요한 사실을 간파해냈다.


그나저나,



“야, 너 아까는 연기였어?! 왜 이렇게 멀쩡해?”

“글쎄요~?”



건물 옥상만 아니었더라면, 바람만 많이 불지 않았더라면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피하는 블랙캣의 정강이를 진즉에 걷어차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를 갈고 있는 마리네뜨를 향한 블랙캣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어느 새 블랙캣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투덜거리고 있는 마리네뜨의 허리를 살며시 놓아준 뒤 다시 팔을 잡았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어쨌든 오늘의 목적은 이게 아니니까.



“그런 사소한 거 따지지 말고,”

“사소하지 않거든?”

“모처럼 분위기 좋았는데, 조금만 더 즐기지 않을래? 경치 같이 보는 것 정도야 뭐.”



괜찮잖아? 가볍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부드럽지만 강하게 제 팔을 붙잡는 손길에서 마리네뜨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상하다. 뭔가, 뭔가 익숙한데.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야경에 눈을 돌리는 마리네뜨의 뒤에서 블랙캣은 히죽 웃다가, 다시금 제 앞에 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평상시와 달리 길게 풀어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목덜미를 애써 외면하며 그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결코 제게 시선을 주지 않는 소녀를.








다음 날 아침, 학교.



“여, 마리네뜨. 좋은 아침.”

“안녕, 알리야.”



피곤한 눈초리로 인사를 건네며 제 옆에 앉는 마리네뜨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알리야가 질문을 던졌다.



“너 좀 피곤해 보인다. 잠을 잘 못 잤어?”

“아니, 그게 아니라…, 어, 어. 그래! 잠을 못 자서.”



조용히 얼버무리며 마리네뜨는 지금은 제 앞에 없는 고양이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분명 경치 구경은 재미있었지만 덕분에 잠을 많이 못 자서 좀 많이 졸렸다. 차라리 주말에 찾아오든가. 다음에도 이러면 진짜 쫓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편안한 잠을 위해서라도.


어느 샌가 다음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에 기겁하던 중, 마리네뜨의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네뜨?”

“어, 아, 아드리앙!!”



아드리앙이 그녀의 뒤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소년의 미소가 눈이 부신 나머지 마리네뜨는 침침한 눈동자를 몇 번 꿈뻑거렸다.



“아, 좋은, 좋은 아침!!”



말을 심하게 더듬는 마리네뜨가 재밌다는 듯이 하하 웃는 아드리앙의 모습에도 마리네뜨는 그저 헤롱거렸다. 쯧쯧거리며 고개를 내젓는 알리야를 옆에 두고도 그저 행복한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마리네뜨를 보던 아드리앙은 “아,” 라는 감탄사를 뱉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 맞다. 이거.”

“응?”

“떨어뜨렸던 거 같아서. 네 거 맞지?”



아드리앙의 손바닥 위에 빨간 머리끈이 올려져 있었다. 조금 더러워지긴 했지만 틀림없이 그녀의 머리끈이었다. 그러고보니 아침에 머리끈 하나가 없다 싶었는데, 떨어뜨렸었나?



“아, 고마워!”



아무 생각도 없이 그녀는 덥석 아드리앙이 건네주는 머리끈을 받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애써 태연하게 아드리앙의 손에서 머리끈을 받아드는 마리네뜨가 “아드리앙이 내 물건을 주워줬어! 절대 빨지 말고 고이 간직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드리앙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섰다. 앞으로 돌아앉으며 즐거운 듯이 웃는 아드리앙을 향해 니노가 물었다.



“이여, 좋은 일 했네?”

“뭐, 그렇지.”

“근데 저거 대체 어디서 주운 거야? 꽤 더러워져 있던데.”



니노의 질문에 아드리앙은 잠깐 말이 없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그가 팔을 탁자 위에 세우고 손바닥에 얼굴을 괴었다. 소년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마치 고양이를 닮은.



“글쎄.”







FIN.






===


네, 다들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하셨겠지만 아드리앙은 레벅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레벅은 몰라요~ㅇㅁ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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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이 링크 후속입니다 : http://eclilps.tistory.com/entry/RD01






[아드마리/캣버그] 경계 위에서






학교.



“안녕, 아드리앙?”



반갑게 자신을 맞아주는 친구, 니노를 향해 아드리앙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손은 흔들었다.



“안녕, 니노.”



니노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교과서를 꺼내려는 아드리앙을 잠깐 살펴보던 니노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그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무슨 일 있냐?”

“어?”

“안색이 별로인데.”



턱에 손을 얹고 흐음, 소리를 흘리면서 자신을 예리하게 훑어보는 니노의 눈동자에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떨떠름히 웃어보였다.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그렇게, 안 좋아 보여?”

“아니, 막 티날 정도는 아닌 거 같아. 뭐야?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없어. 그런 거.”



애써 얼버무리자 니노의 눈초리가 가늘게 좁혀졌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이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니노의 시선을 피해 아드리앙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모습에 니노는 한숨을 내쉬며 아드리앙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더 이상 묻지 않고 앞으로 몸을 돌려앉은 니노의 배려가 퍽 고마워진 아드리앙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금세, 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아득히 흐려졌지만.



“아, 마리네뜨!!”



초록빛 눈동자가 흠칫, 고개를 숙였다. 그와 함께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표정을 애써 수습하며 아드리앙은 살짝 고개를 들어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마리네뜨를 훔쳐보았다.



“안녕, 알리야.”



마리네뜨는 여전했다. 그저 평소보다 눈가가 붓고 조금 기운이 없어 보였을 뿐,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그에 저도 모르게 안심했지만 그는 이내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경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서 자기 책상으로 향하려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살며시 손을 들었다.



“아…,” 



그 목소리에 마리네뜨뿐 아니라 니노와 알리야까지 아드리앙을 돌아보았다. 괜히 뻘쭘해졌지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았다.


아, 어색하다.



“안녕? 마리네뜨.”



우와, 나 제대로 말한 거 맞지? 평소처럼 웃으려고 했는데 괜시리 입꼬리가 떨렸다. 아까 니노랑 인사할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아드리앙을 보며, 잠깐의 침묵 끝에 마리네뜨는 조용히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아드리앙.”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아주면서 제 뒷자리에 앉는 마리네뜨였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괜한 불안이 가중되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 마리네뜨의 반응이 너무 평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 같은 반 친구를 대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는 딱히 이상한 점도 없었고, 당황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어제 헤어졌을 때랑은 달리.



‘네가, 블랙캣…?’



그 말을 하던 순간의 마리네뜨의 표정을 아드리앙은 선명히도 기억하고 있었다. 비단 어제의 일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녀의 표정이, 이제껏 본 적 없었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는 그조차 대번에 알아챌 정도로. 최대한 웃으며 말하려고 애썼던 그와는 달리 마리네뜨는 감정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경악으로 물들었던 푸른빛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고스란히 담았다. 일그러진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이 비틀려져 보였다.


곧장 제 손을 뿌리치고 현장을 빠져나가던 그녀의 눈가에 가득 얼룩졌던 눈물자국이 신경쓰였다. 또 자신 때문에 울었나 싶어서. 그녀가 레이디버그라는 사실은 솔직히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다. 그렇게 찾고 찾았던 그녀가 바로 같은 반 친구였다는 사실은 그에게 묘한 허탈함과, 그 이상을 넘는 초조함을 심었다.


불쑥 뒤를 돌아본 아드리앙의 초록빛 눈동자가 뒤에 앉아있던 마리네뜨를 빤히 마주했다. 프린트를 탁탁 펴서 정리하던 마리네뜨의 손이 순간 멈췄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평소와 같았지만, 뭔가 다른 느낌에 아드리앙은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겹쳐보이는 누군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말을 걸려는 순간 좋은 아침을 외치며 선생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날 피하는 걸까.”



담벼락에 기대서 음료수를 따서 마시고 있던 아드리앙이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킬킬거리며 비웃는 플랙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좀 얄밉다.



“뭐야, 그럼 그냥 멀쩡할 거라 생각했어? 차인 상대한테 좋다고 인사할 것도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겠…, 지?”



어렵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드리앙은 남은 음료수를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무언가 고민을 하는지 빈 캔을 손에 들고 흔드는 아드리앙의 눈가가 살며시 찡그려졌다.



“왜 하필 마리네뜨지.”



신경쓰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같은 반이고, 제 뒷자리에 앉은 여자애라는 인식 정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인사를 하고, 대화를 주고받게 되면서 그녀의 밝은 성격에 조금은 흥미를 느꼈다. 말을 좀 횡설수설하는 경향이 있지만 블랙캣으로 만나봤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도 신기했고. 네 앞이라 긴장하는 거야.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하는 니노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어렵사리 제게 꺼내놓은 진심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네가…, 좋아.’



나를 좋아한다고? 긴장하고 있는지 그녀의 몸이 조금씩 떨리는 모습을 그는 찬찬히 살펴보았다. 좋아한다는 말이 단순한 반 친구에게 던지는 우정의 표시라면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겠지. 조금은 고민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평소였다면 바로 거절했을 텐데, 이상한 기시감이 제 대답을 내놓지 못하게 끌어잡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기다리는 소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드리앙의 입술이 서서히 움직여, 모양을 그렸다.



‘미안. 난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거절의 대답을 이렇게까지 망설인 상대는 네가 처음일거야.


어째서인가에 대해 아드리앙은 잠깐 의문을 가졌다. 그녀의 감정이 단순한 동경이 아니리라는 사실에 괜한 동정심이 일었던 걸 수도 있다. 그게 어떤 심정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하며, 사랑스러운 자신의 하나뿐인 레이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져서 들뜨고 설렐 정도로. 비록 자신을 좋은 동료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지만 포기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래서 그녀의 고백을 허투루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망이 없다고 단념할 만큼 가벼운 감정이 아니라서.


괜찮다고 말하며, 그래도 나는 계속 너를 좋아하겠다 말하며 돌아서던 순간 네 눈가에 스치는 눈물을 보았다. 이유모를 감정들이 나를 덮쳐왔었다. 동요하는 자신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당황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지만 겨우 참아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바보인가, 나는.


어줍잖게 감정을 내어주는 건, 상대한테 더한 상처만 될 뿐이라는 걸 알면서.


그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거절하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때는 유독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며칠 동안 자신을 피해다니는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속에 밀려오는 위화감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었다.



“뭐야? 왜 그렇게 고민해? 잘된 거잖아~. 운명의 상대가 널 좋아한다는데, 그렇게 우울해할 필요가 어디 있어?”



사람 속도 모르게 태평하게 말하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은 짜증스레 대답했다.



“이미 차버렸잖아!”



차라리 고백을 듣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아드리앙의 손가락이 제 머리를 세게 헝크러뜨렸다. 겉으로 보기엔 분명 서로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그렇게 만만하게 풀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아드리앙인 자신이고 제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로서의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원래 모습으로 이미 제게 용기를 내어 고백했고 자신은 그녀의 마음을 거절했다.



“이 와중에 어떻게 사실 나도 널 좋아했었다고 고백을 하겠어?!”



정말 미치겠다는 얼굴로 팍팍 짜증을 부리며, 아드리앙은 오늘 하루종일 본 마리네뜨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렸다. 자신을 피하던 모습까지도.


며칠 동안 표정이 좋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마음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거리를 두는 모습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제가 투정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힘들 사람은 바로 그녀일 테니까.


마리네뜨가 레이디버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희미한 의식 사이로 떠오른 붉은 가면에서 떨어지는 것이 눈물이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가면이 사라지면서 드러난 얼굴을 보면서도 그저 멍했다. 그냥, 나 때문에 또 울고 있는 건가 싶었다. 정말로. 그녀가 마리네뜨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상당히 태평했던 것 같다.


애써 붙잡았지만 달아나버린 그녀를 쫓아가기엔 몸이 성치 않았고, 괴로운 얼굴을 하고 도망치는 마리네뜨를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는 피식 웃었다. 이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렇게 후회해 봤자 이미 버스는 떠났고 돌이킬 수 없다.


플랙이 쯧쯧거렸다.



“그러게, 왜 변신을 풀어버려서 이렇게 고생해~. 아예 몰랐으면 성가신 녀석한테 정체를 들켰구나, 정도로만 끝났을 거잖아?”

“그런 짓을 어떻게 해.”



반지를 빼어버린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녀가 정체를 드러냈는데 모른 척 입을 씻어버렸다간 분명 나중에 크게 후회할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어서. 하지만 지금 그녀의 태도를 보면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나았지 않았나라는 후회가 들었다.


아드리앙의 손이 들고 있던 캔을 찌그러뜨렸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는 제법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질렀다.



“아, 어떡하란 말이야!”










“마리네뜨. 너 계속 이럴 거야?”



책상에 앉아 디자인을 그리고 있던 마리네뜨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곤조곤하게, 마치 엄마처럼 제게 말을 걸어오는 티키를 보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계속, 아드리앙을 피해다니기만 할 거냐구.”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리네뜨를 타이르듯 점잖게 말했다. 잠시 말이 없던 마리네뜨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펜을 놓고 쭈욱 기지개를 폈다. 두 팔을 쭉 내뻗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고, 의자에 기댄 자세로 마리네뜨는 투정부리듯 말했다.



“그럼 어떡해?”



이대로 계속 지내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모른 척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그럼에도 마리네뜨는 쉽사리 그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실연당했을 때도 며칠 간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는데, 지금은 다른 의미로 충격이었다.



“난 아직도 안 믿겨.”



아드리앙이 블랙캣이었다니.


블랙캣이 반지를 빼어버리고, 변신이 풀리는 순간까지도 결코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도 처음에는 눈물에 흐려져 잘못 본 줄만 알았다. 미안하다고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퍼즐이 맞춰지듯 많은 것들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정곡을 찌르는 티키의 말에 마리네뜨는 말문이 막혔다. 쓰게 웃으며 티키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응. 그런지도 몰라.”



블랙캣과 아드리앙은 정말 너무나도 다르다. 침착하고 다정한 성격인 아드리앙과 까불거리고 허세가 넘치는 블랙캣이 동일인물이라니. 변신한다고 그렇게 성격이 변하나? 애초에 옷 하나 바꿔입고 가면 하나 썼다고 그렇게까지 성격이 달라진다고?


모르겠다.


고민하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가 질문을 던졌다.



“마리네뜨.”

“왜?”

“아드리앙이 블랙캣이라서 싫어졌어?”



오늘따라 돌직구를 던지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잠깐의 침묵 끝에 솔직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것도 모르겠어.”



자신이 좋아한 사람은 블랙캣이 아니라, 아드리앙이다. 계속 좋아했고 그 마음이 식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블랙캣과 아드리앙의 모습이 쉽게 머릿속에서 일치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답답했다.


몰랐다면 몰라도, 그와 블랙캣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다만, 아드리앙을 좋아하는 마음 이전에 지금은 그를 보는 것이 껄끄러웠고, 사실은 블랙캣의 모습을 한 그조차 만나고 싶지 않았다. 싫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억누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악당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계속 만나야 하는데.


의외로 만나면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블랙캣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평소의 모습이랑은 정말로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이제껏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아, 너무 어렵다.



“으아! 진짜 미치겠네.”



복잡하게 꼬여가는 생각들을 애써 털어내고 다시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펜을 잡은 순간, 창문 밖으로 무언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변신해야 하는구나. 악당보다도 먼저 떠오른 인물에 흠칫거리며 푹 탄식을 내뱉는 마리네뜨와 달리 티키는 재빨리 소리쳤다.



“아, 왜 하필….”

“마리네뜨, 가자!”










“여, 마이 레이디~?”



그들은 악당이 설치고 있는 장소 근처에 있는 지붕에서 만났다. 능청스레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그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능글맞게 웃으며 제 앞으로 풀쩍 뛰어내리는 블랙캣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검은 가면과 고양이 귀, 허세 가득한 말투까지. 너무 평소랑 똑같아서 좀 무서울 정도다. 이 녀석이 아드리앙이라는 걸 알아서인지 더.


아니, 정말 그인가? 그 날, 역시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둘이 친한 사이라 대타를 세웠다던가….


…그럴 리가 없지. 그 날이라고 딱히 이상한 것도 없었는걸.


의심스럽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시선에도 그는 웃으며 광장을 눈짓했다.



“뭐해? 저거 빨리 안 잡아?”

“너, 무슨 생각이야?”

“왜? 뭐 문제라도 있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서 저거나 처리하자는 듯이 웃고 있던 블랙캣이 레이디버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손끝에 입을 맞추는 블랙캣의 손을 반사적으로 쳐내고서 당황하는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은 살짝 눈가를 찡그리다가도 곧 씨익 웃었다.



“여전하네.”



역시 만만하지 않다니까. 정말 즐거운 듯이 웃어버리는 블랙캣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레이디버그의 눈매가 살짝 누그러졌다. 다음 순간, 무얼 생각했는지 레이디버그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블랙캣이 뭐라 말하려는지 입을 열었지만, 그의 음성은 때마침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묻혀 버렸다. 블랙캣은 입을 다물었고 레이디버그는 그런 그의 모습을 알아채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광장으로 시선을 옮긴 두 사람이었다.



“어서 가자.”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블랙캣을 보고 살며시 웃어주던 레이디버그가 요요를 가로수에 던진 뒤 앞서 뛰어내려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블랙캣의 입가에 미소가 깃털처럼 살짝 내려앉았다가, 사라졌다.



악당을 상대할 때까지도 평소와 같았다. 서로 협조해서 능력을 사용하고 악당의 물건을 부순 뒤 정화까지 마쳤다. 물건들이 복구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블랙캣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주먹을 맞대는 하이파이브도 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서는 레이디버그를 블랙캣이 다급히 불러세웠다.



“잠깐만 기다려, 레이디!!”



잠깐 멈칫하더니, 아무런 대꾸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그녀를 향해 블랙캣은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멀어지려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마리네뜨!”



무시하고 가려던 레이디버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돌아선 상태로 굳어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이 어떤지 궁금했지만, 블랙캣은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그녀가 정말로 그냥 가 버릴 것 같아서.



“할 말이 있어.”



그들의 귓가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더욱 커져만 갔다.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숨조차 가벼이 쉬지 못했다. 가을이 다가온 탓인지, 바닥에 굴러다니던 낙엽들이 사그락거리며 주위를 흘러갔다.



“나는….”



초조한 듯한 음성과 묘하게 진지해진 분위기. 설마 싶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녀에게 그는 담담하게 하고 싶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레이디버그를 좋아해.”



역시 그랬구나.


그가 블랙캣이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짐작하긴 했었다. 블랙캣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차피 받아줄 생각도 없었기에 굳이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말하는 이름이 마리네뜨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렇게 가슴이 아파질 것이라는 사실도. 쓰게 웃는 그녀를 알지 못한 채 블랙캣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첫눈에 반한 건지 어떤지는 몰라. 그냥 좋은걸. 네가 누군지 정말로 알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몰라도 상관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나는 분명 너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널 만나게 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라고, 그렇게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저택 안에서 보는 하늘은 늘 푸르렀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저 밖으로 나설 날이 올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혼자가 익숙했던 소년에게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사실은 꽤나 생소하고 어색한 일이었다. 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도 믿기지 않아서, 정말 이게 꿈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처음으로 겪는 일들, 보이는 세상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활기찼다.


그 즈음이던가. 플랙을 만나고, 너를 만났던 게.



“계속 좋아했어.”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너에게 흥미를 느꼈다. 언제나 포기하고 제 할 말을 꾹꾹 눌러삼키기만 했던 나와는 달리 너는 발랄하고 자신감 넘치고, 할 말은 꼭 하는 타입이었다. 정말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라서, 그래서 네게 끌렸는지도 몰라.


블랙캣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정말로 다르기에 알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걸.


흠칫,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보고 있던 초록색 눈동자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되잖아.


어쩔 수 없다지만.



“네가 나를 피하는 건 나한테 질려서야? 아니면, 내가 블랙캣이라서?”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그는 점점 닳아가는 용기를 간신히 그러모았다.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상황이 퍽 답답했지만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그나마 꾸역꾸역 목구멍 너머로 흘러나와 주는 것에 감사했다. 말하면서도 긴장에 자꾸 혀끝이 굳어갔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말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영영 말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상황이 이렇게 될 거라곤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는데.”



원래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일 거라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지금의 너일 거라고도. 교차점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엇갈려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 걸까.


블랙캣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말해두고 싶었어.”



네가 그랬던 것처럼.



“알아. 우리가 이런 모습일 때는, 네가 날 사랑하지 못한다는 걸.”



그렇게 쉽게 해결될 마음이었다면 내가 누군지 알았을 때, 너는 진작에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띠띠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랙캣은 반사적으로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마지막 초록빛 발바닥 부분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묘하게 소리가 엇박을 타는 걸 보니 그녀의 변신 시간에도 한계가 온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 모습도 나인걸. 지어낸 게 아니야. 아니, 어쩌면 블랙캣의 모습이 내 본성이랑 가까울지 모르지.”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내 단면일 뿐이니까. 자신은 주변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냥 침착한 우등생이 아니다. 억눌러야만 했던 성격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블랙캣이었기에, 나는 이 모습이 되는 것을 좋아했던 거니까.


한 마디도 해주지 않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에 그는 조금 애가 탔다.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내어놓았다.



“역시, 실망했어?”



그제서야 그녀는 대답을 건네주었다.



“…모르겠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툭 던진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그녀는 찌르르 아파오는 가슴을 잡아뜯고 싶었다. 모르겠다는 대답밖에 줄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대답해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처음이었으니까.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블랙캣의 모습은. 동시에, 그녀는 그가 정말 아드리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고음이 끝나고 휘릭 변신이 풀리자, 그녀는 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어졌다. 그도 분명 변신이 풀렸을 텐데, 뒤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뒤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나는, 레이디버그가 아닌 너에 대해서는 잘 몰라.”



사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비겁했던 자신을 이제야 인정하며 소년은 쓰게 웃었다. 망설이는 듯하다가, 결연한 표정을 지은 소년이 천천히 말을 내어놓았다. 소년에게는 더 없이 큰 결심을.



“하지만, 알고 싶다고 생각해.”



너를 좋아한다고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깊게 좋아하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두려워.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가 두려워. 보답받지 못한 애정과 함께,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또 다른 상처를 바라지 않았다. 진심으로 손을 내밀면 확실히 거절당할까봐, 그런 네 대답에 잔인하게 찢겨질 내 마음이 너무 가엾어서 이제껏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겁하게도.



“그러니까 피하지 마.”



그래도 네가 나를 피한다는 게 더 싫으니까.


당장 네가 지금의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그런 식으로 쉽게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네가 너무 좋다.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진짜 너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잘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알아가면 되지 않을까. 실망했냐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하는 그녀에게서 가능성을 읽었다. 희망을 품어도 좋을 법한.


그럼에도 소년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처음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내딛고자 하는 한 발이라서 그런 걸까.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 정도도 못해줄 정도로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헛되었던 건 아니지 않아?”



장난스럽게 말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사실 소년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한 말에도 상처받는 자신이 우스워 그는 픽 웃고 말았다. 태연하게 말하려다가도 몇 번이고 떨리려는 목소리를 천천히 가다듬었다. 긴장으로 자꾸 숨이 막힌다. 힘이 빠지려는 손가락을 그러모아 주먹을 꽉 쥐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느릿하게 말하며 그는 한 걸음을 떼었다. 그 목소리는 꼭, 그가 블랙캣일 때와 닮아 있었다.



“우리는 어쨌든 함께 파리를 구하는 정의의 히어로잖아?”



천천히 제게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손이 제 쪽으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상냥하게 웃고 있는 소년의 얼굴에 마리네뜨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역시 다른 태도에 소년은 씁쓸해지는 속마음을 감추고 상냥하게 웃었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이 모습이 낫겠지?”



조금씩 변해가기를 바랄 거야.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잘 부탁해.”



네가 진짜 나라는 존재를 좋아해줄 날이 올 거라 믿으며.





fin.










===

미안 아드리앙 난 이 다음에 니가 흑화할 거라 예상 중인데ㅋㅋㅋㅋㅋㅋ

그니까 다음편은 절대 쓰지 않을게 너를 더 이상 굴리기는 좀 미안해진다 ㅇㅁ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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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에 대한 망상

※ 이랬으면 좋겠지만 이러지 않을 것을 알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곶통






[캣마리] resemblance





“어이, 거기.”



난데없는 난입이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밤의 공원으로 검은 실루엣이 훌쩍 내려섰다. 손에 봉을 들고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오는 그림자의 주인은, 블랙캣이었다. 데이트를 방해받은 이블 아티스트의 눈매가 매섭게 좁혀졌다. 한편,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미쳤어! 쟤가 지금 오면 어떻게 변신해!


도와주러 온 건 고마웠지만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괜히 일이 꼬일 것 같다는 생각에 마리네뜨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블랙캣은 능글맞게 웃으며 툭 내뱉듯 말했다.



“이거이거, 숙녀분을 데리고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실례잖아. 쯧쯧거리며 그를 도발하는 블랙캣과 달리, 할 수 있었다면 분명 마리네뜨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이야?!


이블 아티스트는 그런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그의 머릿속으로 호크모스의 지령이 들려왔다.



‘미라클스톤을 뺏어라. 이 자는 지금, 너와 그녀의 사이를 방해하려고 하고 있다.’



적이다. 그렇게 인식한 순간 그는 손에 붙은 타블렛에 재빠르게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와 마리네뜨를, 방해하지 마!!”



타블렛으로부터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공격들을 착착 피해가며, 블랙캣은 빠른 속도로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빙긋 웃었다.



“너무 무른 거 아냐?”



그가 어느 새 이블 아티스트의 타블렛에 손을 뻗고 있었다. 잡았다 싶었는데,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발휘해 뒤로 물러난 이블 아티스트를 보며 블랙캣은 휘파람을 불었다.



“우와, 꽤 빠른걸.”

“꺄악!!”



갑작스레 제 허리에 닿는 손길에 마리네뜨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블랙캣의 손이 마리네뜨의 허리를 감싸더니 이내 그녀를 번쩍 안아올렸고, 누가 봐도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겨진 마리네뜨의 얼굴에 당혹감이 배어들었다. 반사적으로 발버둥쳤다.



“야, 뭐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허물없이 말한 것을 깨닫고 마리네뜨는 즉시 입을 닫았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했는지, 블랙캣은 그녀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일단 설명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여길 벗어날까요? 존대를 쓰며 싱긋 웃던 블랙캣이 이야호~ 소리와 함께 하늘로 높게 솟아올랐다. 꺄아악, 비명을 지르며 마리네뜨는 두 손으로 블랙캣의 목을 꽉 붙들었다. 제게 안겨있는 마리네뜨를 보던 블랙캣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My Lady도 이렇게 안겨주면 좋을 텐데. 손을 대기도 전에 곧바로 얻어맞겠지만.


재빠르게 달려 공원을 빠져나가는 블랙캣의 품에 꼭 안겨서, 마리네뜨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녀는 이 상황에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 그래, 일단은 여길 벗어나서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면 되겠지. 도와주러 온 애한테 뭐라 하겠는가. 저 빌런이 노리는 것은 자신 혼자뿐이니 별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헉!”



공원을 달려 빠져나가던 중 그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무언가가 쿵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거대한 유리상자가 그들의 머리 위를 덮친 것이다. 나름 차분한 블랙캣과 달리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마리네뜨는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유리벽에 경악했다. 이러면 변신을 할 수 없잖아!



“가만히 있어봐요, 레이디.”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불안해하는지 안색이 좋지 못한 마리네뜨에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자신을 달래려는 듯,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블랙캣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놀란 듯 살짝 커졌다. 평소의 깨방정떠는 모습은 어디다 버려두고. 괜히 진지해뵈는 그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이러니까 그래도 좀 영웅같아 보이긴 하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러는 걸까. 이건 마치….


…미쳤어!!


순간적으로 떠올린 얼굴에 마리네뜨는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묘한 표정을 짓던 마리네뜨가 아무 말 없이 제게서 시선을 돌리는 모습에 블랙캣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레이디.”



레이디라는 칭호가 술술 나오는 것도 그렇고, 괜히 존대를 쓰게 되는 것도 그렇다. 자유로운 고양이인 자신이 이렇게 반응하는 존재는 오직 한 명밖에 없었는데도. 아는 사이라서, 같은 반 친구라서 그런 걸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블랙캣은 괜히 복잡해지는 마음에 마리네뜨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마리네뜨는 마리네뜨일 뿐이지. 당연한 결론을 내렸을 뿐인데 왜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들까. 그러다가 그는 픽 웃었다. 방금 전 말투가 그녀와 닮았던 탓인지도 모른다. 평소랑 달리 저를 향해 거침없이 뱉어내는 말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퍽 새로웠다. 그래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마리네뜨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무슨 생각이냐는 듯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블랙캣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거리며 뒤를 가리켰다. 그들의 앞으로 이블 아티스트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선 블랙캣이 한 손을 뻗어 그녀를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이거 없어지면, 재빨리 뒤쪽으로 뛰어요. 내가 시간을 벌어볼 테니까.”

“에?”

“음, 내가 말이죠.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레이디버그?”

“맞아요. 뭐 하느라, 아직도 안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금방 오겠죠. 투덜거리는 것처럼 굴지만, 걱정없다는 듯이 씨익 웃는 블랙캣을 보던 마리네뜨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뭐지, 이거.


왜 자꾸 그가 떠오르는 거지?



“고대의 재앙!!”



소리지르는 것과 동시에 블랙캣은 뒤로 돌아 마리네뜨가 있는 쪽의 벽에 손을 짚었다. 삭아서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유리를 멍하니 보고 있던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이 크게 소리질렀다.



“어서 가!!”



이블 아티스트의 분노에 찬 공격을 막아내며, 또 다른 자신을 기다리는 블랙캣을 등지고 마리네뜨는 뛰기 시작했다.


곧 달려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이 바보야.




===


9화 나오자마자 급삭할 삘이군요 허허허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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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력 주제는 『꽃』 이에요.





「오랜 시간을 넘어서,

나는 아직도 너를 기다려.





[캣버그] 시공을 넘어





- 5000 Ago,  Egypt





울부짖는 소리가 지천을 찢었다. 무더운 여름, 이집트의 어느 광장에서는 난데없는 소동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악당들에 군중 떼는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졌고, 광장은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려는 듯이 사람들을 짓밟는 악당들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공포에 떨며 광장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앞을 가로막은 이들이 낄낄 웃으며 그들을 조롱했다. 그리고 그 순간, 붉은 물체가 강한 힘으로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을 후려쳤다. 뒤로 나동그라지는 악당들과 달리, 그들 앞에 내려서는 이를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환호했다.



“레이디버그님!!”



붉은 빛깔이 도는 비단옷과 붉은 가면을 쓴 여성은 손가락을 올리며 쉿, 소리를 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는 어서 도망가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마자 사람들은 썰물처럼 광장을 빠져나갔고, 어느 새 이곳에는 악당들과 그녀밖에는 남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이들에게 그녀는 싱긋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붉은 물체를 휘둘렀다.


한 마디를 남기며.



“놀아보자고.”








“요즘 들어 일이 너무 많이 터지네.”



레이디버그는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악당들을 처리하고 문제를 다 수습하고 보니 해가 벌써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가득 머금은 몸을 조용히 식혀 주었다.


그래도 무리 없이 일을 마무리지은 건 다행이지만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악당이야 늘 있었지만, 이렇게 떼지어 나타나는 일은 매우 드문데. 일단 대충 마무리는 지었지만 앞으로도 이러면 곤란한데, 이유가 뭘까. 팔짱을 낀 채 입을 우물대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시 외곽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그녀는 제 앞으로 훌쩍 내려서는 남자를 보고 인상을 썼다.



“블랙캣?”

“안녕, 나의 아가씨.”



능글맞게 웃으며 제 앞에 나타난 검은 가면의 남자가 뒷짐을 지고서, 한쪽 손을 공손하게 내밀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살짝 입을 맞추었는데, 여인은 픽 웃으며 그런 그의 손을 쳐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안녕 좋아하시네. 왜 아까는 안 왔어? 혼자 처리하느라 얼마나 골치가 아팠는 줄 알아?”

“미안, 미안. 나도 저쪽에 나타난 놈들 좀 손봐줬거든.”

“뭐? 다른 구역에도 나타났어?”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블랙캣의 표정이 퍽 진지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뻘줌해졌다. 하긴 이런 일로 장난칠 성격은 아니지, 이 녀석이. 몇 명이나 상대했냐고 물으니까 둘이라고 답했다. 자신이랑 같은 숫자다. 이제껏 잘 해오긴 했지만, 계속 이런 페이스면 둘만으로는 버거울지도 모른다.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날씨에 왜 이리들 주책인지.”



쉬고 싶어도 참으로 도움 하나 안 되는 놈들이다. 그렇다고 남들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기에 퍽 답답했다. 좋은 수가 없을까, 손가락을 턱에 놓고 고민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새까만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알아챈 레이디버그가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렇게 뚫어져라 봐?”

“아니, 아니. 언제 봐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래, 그래. 고마워.”



건성으로 받아 넘기는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은 꽤 진심인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보고 봐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해도 아마 믿지 않겠지. 블랙캣은 쓰게 웃었다. 무언가 망설이고 있는 듯한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레이디버그는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일을 다 처리했으면 집에 가야지. 일부러 날 찾아온 이유는 또 뭐야?”

“그냥, 얼굴이 보고 싶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보잖아, 우리. 뭐가 그리 보고 싶다고.”



짧게 웃음을 터트리던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늦었다고 소리를 지른다. 일단 빨리 가봐야겠다 말하면서,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여인은 그를 스쳐 지나갔다. 얼떨결에 잘 가라고 대답하면서, 그녀가 제게서 꽤 멀어지자 그는 줄곧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고 그 손에 들려 있던 꽃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가져왔던 붉은 꽃송이.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꽃잎이나 줄기나 꽤나 시들해져 있었다. 중간에 악당을 만나지만 않았더라도 좋았으련만. 노을에 짙게 물들어 괜히 불길하게 느껴지는 꽃을 말없이 쳐다보던 블랙캣의 손이 꽃을 꽉 쥐었다. 꽃이 손 안에서 바스라졌다. 이런 걸 제 아가씨에게 줄 수는 없겠지. 길을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가, 픽 웃었다.


나중에 다시 주면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 현재,  Paris





“어디 있어?”



거대한 사람 모양의 과자들 사이를 누비는 붉은 인영이 있었다. 이 거대한 과자들은 놀랍게도 모두 사람이었으며, 지금 그녀는 파리를 한창 누비며 사람들을 과자로 만드는 악당을 쫓는 중이었다. 연락을 했는데 얘는 대체 왜 안 와. 답답하다는 듯이 이맛살을 구기던 그녀의 옆으로 검은 실루엣이 다가왔다.



“기다렸어, My Lady?”

“왜 이제 오니?”

“미안, 미안. 뭘 좀 하다가. 자자,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어서 가자구.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듯이 앞장서 나아가는 블랙캣의 뒤를 따르던 레이디버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번졌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는 것은 덤으로.


이번 악당은 그래도 간단히 제압되었다. 사실 이번처럼 특이한 악당도 꽤 오랜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주변의 모든 것들을 과자로 만드는 능력을 갖게 된 걸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이의 옆에서, 두 사람은 찡긋 웃으며 꼭 쥔 주먹을 가볍게 맞대고 임무 완수! 를 외쳤다. 그러던 중 갑자기 블랙캣이 흐냥, 이라는 감탄사를 뱉어냈다. 무언가 잊었던 게 떠올랐다는 듯이.



“잠깐만 기다려!”

“에?”

“1분만, 1분 안에 올 거야!!”

“잠깐만, 야!!”



대답도 듣지 않고 급하게 어디론가 가버리는 블랙캣의 모습이 좀 의아했지만, 아직 시간도 남았으니 1분만 기다려주기로 했다. 이제 돌아가서 뭘 해야 하나, 딴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제 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제 귀걸이에서 띠링, 소리가 울렸다.


정말 사라진 지 1분만에 나타났네.


무슨 일이었냐고 묻기도 전에 블랙캣은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능청스럽게 내밀었다.



“여기.”

“꽃? 이게 웬 거야?”



탐스럽게 피어나 있는 붉은 꽃이었다. 붉은 꽃 세 송이와 하얀 안개꽃들로 치장되어 있는 꽃다발은 딱 보기에도 무척 예쁘고 귀여웠다. 눈을 깜빡거리며 신기해하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이 말했다.



“주고 싶어서.”



말하면서도 좀 쑥스러웠던 모양인지 고개를 홱 돌리며 손을 휙 그녀 앞으로 내미는 얼굴은 살짝 빨개져 있었다. 가면 사이로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답을 기다리는지 꽃다발을 든 손을 살짝 위아래로 흔드는 블랙캣의 입매가 긴장으로 살짝 굳어 있었다. 멀뚱멀뚱, 블랙캣과 꽃을 계속 번갈아보던 그녀가 픽 웃으며 그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꽃을 그렇게 흔들면 어떡해? 이렇게 예쁜데.”



그제서야 블랙캣은 살짝 고개를 돌려 꽃다발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꽃향기를 맡으며 즐겁게 미소짓는 모습은 역시 상상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너무 오래 걸렸지만 이걸로 된 건가. 블랙캣의 입꼬리가 서서히 말려 올라갔다.


전하지 못한 마음을, 이제서야.



"고마워. 잘 받을게."



평소에는 보기 힘든,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쑥스럽기도 쑥스러웠지만 솔직히 레이디버그의 저런 모습은 여러 의미에서 심장에 나빴다. 무척이나. 정면으로 마주하면 얼굴이 불탈지도 몰라.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계속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던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서야, 네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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