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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2





Episode 3.

비둘기를 다루는 남자






파리의 어느 한 건물 안에 자리잡고 있는 사무실이 있었다.


창문에 설치된 블라인드가 모두 닫혀 있는 덕분인지 사무실 안은 상당히 어두웠다. 3인은 앉을 수 있을 법한 소파들이 테이블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소파들 바로 뒤에 문을 마주하는 자리에 놓여 있는 책상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전화를 하고 있는지 남자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뭐라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남자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웃고 있지만 왠지 싸해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그리던 남자는 이내 전화를 끊고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책상에는 파리의 주요 일간지들인 르 몽드, 르 피가로, 리베라시옹을 포함한 각종 신문들이 올려져 있었다. 성향이 각기 천차만별이고 특성도 죄다 다른 이 신문들이 이렇게나 의견일치를 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 파리 시내를 떠들썩하게 하는 이슈가 모든 신문들의 1면을 보란 듯이 장식하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파리에 등장한 수수께끼의 영웅?’


이거였다. 기사에 포함되어 있는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남자가 피식 조소를 흘렸다.


“재미있어지겠군.”





///



왜 꼭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를 않는 걸까.



“펠릭스, 안녕!”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소녀를 가볍게 무시하며 펠릭스는 제 갈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역시나 소녀는 포기하지 않고 펠릭스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상기된 눈동자, 뺨에 홍조를 띄고서 마리네뜨는 열심히 펠릭스를 훔쳐보았다. 며칠 동안 따라다녀 본 결과 펠릭스는 말을 걸든 안 걸든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하기는 하지만. 무시하는 것이 더 편한 모양인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신문을 읽고 있는 펠릭스의 옆얼굴에 마리네뜨는 시선을 집중했다. 진지한 표정이 참 멋지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헤실 웃었다. 에스미는 콩깍지라고 뭐라 그러지만 어떡해. 그래도 멋있는걸.


펠릭스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까지도 멍해 있던 마리네뜨는 그가 입을 열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저기.”

“으, 응?”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교실인데.”



어느 새 교실 앞까지 다 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정말 길다고 생각했던 복도가 왜 이렇게 짧은 걸까. 역시 사랑의 힘?


꺄악, 사랑이래! 자기가 생각하고도 좋은지 양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포옥 감싸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청회색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았다. 뭘 잘못 먹었냐고 말하는 듯한 그 시선에도 마리네뜨는 행복한 듯이 웃으며 펠릭스에게 대답을 건넸다.



“그그렇구나! 맞다, 이거. 주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허둥지둥 가방을 뒤져 커피 한 캔과 쿠키봉지를 꺼낸 마리네뜨가 펠릭스의 손을 잡고 그것들을 쥐어주었다. 놀랐는지 잠시 가만히 있던 펠릭스가 다음 순간 입을 열었다.



“받을 수 없….”

“그럼 이만 갈게. 나중에 봐!”



그것을 건네주자마자 마리네뜨는 등을 돌렸다. 크게 손을 흔들며 반대쪽에 있는 자신의 교실 방향으로 달려가는 마리네뜨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펠릭스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나중에…?”



또 오겠다는 뜻인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는 펠릭스의 손에 들린 가방 안쪽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오올, 인기 많은걸~?’

“조용히 해, 들키면 어쩌려고.”



펠릭스가 나직히 주의를 주었지만 플랙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것대로 재밌지 않을까나?’

“…까망베르 치즈 안 준다.”

‘헉, 그건 안 되지! 내 사랑 까망베르 치즈~!’

“알면 좀 조용히 좀 해. 가뜩이나 골치 아프니까.”



어쩌다 제 인생에 이렇게 귀찮은 녀석이 하나 더 끼어든 건지. 암담해지는 기분을 가눌 수가 없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재밌지 않아?’

“구경하는 너야 재밌겠지.”

‘에이, 왜? 원래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야~ 덕분에 삶이 꽤 재미있어지지 않았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런 녀석은 하나로도 벅차.”

‘솔직하지 못하구만.’



그저 재미있는지 계속 웃고만 있는 플랙의 목소리에 펠릭스는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했다. 그가 소곤거렸다.



“이제 교실에 들어가야 하니까 정말 조용히 좀 해줘. 안 그러면 다음에는 안 데려올 거니까.”



 절레 고개를 내젓다가도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펠릭스가 교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소란스럽던 교실이 한 순간 조용해졌다. 책상 주변에 모여서 떠들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잠깐 펠릭스에게로 머물렀다가 금방 다시 사라졌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 조용해서 좋다고 생각하며 교실 안으로 들어서는 펠릭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녕!”



무시했다. 휙 고개를 돌리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펠릭스의 뒤를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앉아 책을 꺼내는 펠릭스의 앞에 다가온 상대가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죽삐죽 솟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갈색빛 피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장난기가 많을 것 같아 보이는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플랙과도 좀 닮아 있었다.


무시하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소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펠릭스에게 말을 걸었다.



“인사를 했으면 대답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좋은 아침.”



그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금 책에 눈을 돌리는 펠릭스를 보며 소년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인사해준 건 무척 고마운데 말이야…. 왠지 지금 인사가 꼭 ‘시끄러우니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같은 느낌인데?”



정곡을 찌르는 소년의 질문에도 펠릭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꿋꿋하게 제 할 일에 충실하는 펠릭스에게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거는 소년은 확실히 강적이었다.



“대화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너무하네. 책만 보고 살면 안 심심해?”

“….”

“오늘 수학 들었지? 으악, 난 수학 진짜 싫던데 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문제를 푸는 거야?”

“….”

“오늘 점심은 뭐 먹을래? 혹시 예정 없으면 같이 먹어도 되냐?”

“…이러는 목적이 뭐야, 너.”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재잘재잘 떠드는 소년의 모습에 결국 펠릭스는 독서를 포기하고 조용히 책 표지를 덮었다. 매일매일, 벌써 일주일이 넘게 자신에게 다가와 꼬박꼬박 인사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무리 무시하고 냉랭하게 굴어도 질리지도 않고 달라붙는 게 꼭 진드기같다. 자신을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일까? 아니면 떨어질 콩고물을 노리고 달라붙는 걸까. 하지만 눈앞의 소년이 그런 생각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는 사실을 펠릭스라고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소년은 개구지게 웃으며 펠릭스의 말을 정정했다.



“너가 아니라 앨빈이야. 앨빈 에반워프.”

“그래서.”

“응? 별 거 없어. 그냥 너랑 친구가 되고 싶을 뿐.”

“거절한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딱 잘라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런 펠릭스에 앨빈은 깜짝 놀란 듯하다가도 이내 싱글싱글 웃었다.



“우와, 무서워라. 냉랭하기 짝이 없네.”



과장된 몸짓으로 양 팔로 제 몸을 감싼 앨빈이 바들바들 떠는 척 열연을 펼쳤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지 가만히 한쪽 눈가를 찡그리는 펠릭스에게 앨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다지 나쁜 녀석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너.”

“뭐?”



펠릭스가 되묻는 순간, 딩동댕동 소리가 교내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앨빈이 중얼거렸다.



“아, 종 쳤다. 그럼 지금은 이만 돌아갈게.”



선선히 의자에서 일어나 본인 자리로 돌아가는 앨빈을 바라보다가 펠릭스는 짧게 탄식을 지르더니 책상에 털썩 엎드려 팔로 머리를 감쌌다. 미치겠군. 지금은, 이라고 말하는 건 다음에 또 오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잖아.


머리가 아팠다. 다가오지 말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음에도 끈질기기 짝이 없다. 요즘 들어 왜 이런 녀석들만 꼬이는 걸까. 가방 안쪽에 고이 잠들어 있는 플랙 녀석만도 이미 충분히 골치가 아프건만.


가만히 중얼거렸다.



“피곤해.”





“으음….”



나무에 기댄 자세로 마리네뜨는 살짝 옆을 내다보았다. 오늘도 역시 똑같은 벤치에 앉아 독서에 빠져 있는 펠릭스의 모습을 흘깃흘깃 살피는 마리네뜨의 손에는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이번에 극장에서 열리는 클래식 음악회 티켓으로, 그쪽 분야에서 일하는 이모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펠릭스를 보려다가도,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급하게 다시 나무 뒤로 숨기를 반복하는 마리네뜨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 말을 걸 때는 그래도 나름 괜찮았는데, 데이트를 신청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긴장이 된다.


손에 든 티켓들을 꼬옥 쥐고 마리네뜨는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무 뒤에서 나와 펠릭스가 있는 벤치로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펠릭스가 책에서 눈을 떼고 마리네뜨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흠칫, 몸을 움츠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마리네뜨를 보고 한숨을 쉬던 펠릭스가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안 되는데!


떠나려는 듯이 움직이는 펠릭스에 마리네뜨는 후다닥 뛰어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런 마리네뜨를 돌아보더니 펠릭스는 걸어가던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펠릭스의 모습이 마치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만 같아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더듬이가 예쁜 하트를 그려냈다.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펠릭스를 바라보는 마리네뜨의 눈이 반짝거렸다. 말은 꽤나 더듬거렸지만.



“저, 저기, 펠릭스. 혹시 오늘 시간 있니? 이번에 클래식 음악회 티켓을 구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우물쭈물하면서도 끝까지 질문을 마치고 마리네뜨는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가 무색하게 펠릭스는 살짝 눈을 감은 채로 관심없다는 듯이 홱 고개를 돌렸다. 거절의 대답이라는 걸 짐작한 마리네뜨의 어깨가 축 처졌다.


마리네뜨에게서 돌아선 상태로 펠릭스가 툭 말을 꺼냈다.



“선약이 있어.”

“그, 그럼. 다음에 시간이 나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돌려 사라지는 펠릭스의 등을 향해 마리네뜨는 ‘같이…, 가….’를 중얼거리다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좋은지 더 이상 쫓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그저 하염없이 펠릭스가 사라진 방향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 입을 우물거리다가 쓸쓸하게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손에 들려 있던 티켓의 가장자리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살짝 구겨졌다.




그런 마리네뜨를 뒤로 한 채 펠릭스는 약속장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공원을 벗어난 뒤 한참을 걷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골라 타고는, 몇 분 후에 내려서 다시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보통 이 시간대의 파리 거리들은 대체로 사람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펠릭스가 걷고 있는 길의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비싸보이는 차가 몇 대 지나다니는 것 말고는 상당히 한적했다.


주택가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방문할 만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변의 집들이 커서 그런지 거리에는 넓은 그늘이 져 있어 햇빛이 거의 들이치지 않았다. 싸할 정도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그늘길을 한참을 걷던 펠릭스는 어느 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옅은 베이지색의 벽 위에 금빛 지붕이 둘러진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이 근방의 집들이 모두 훌륭한 대저택들이긴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생김새였다. 창문들은 모두 아름다운 나비 문양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져 있었고,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벽들에도 각각 곡선의 문양들이 얇게 그려져 있었다. 그 위풍당당한 자태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전을 연상시켰다.


파리에 사는 시민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유피테르’ 가의 대저택 앞에서, 펠릭스는 가만히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소리와 함께 초인종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는 화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닫혀 있던 철창문이 열리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펠릭스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금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익숙하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저택 안으로 들어온 펠릭스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 바탕에 검은색 방울무늬가 그려져 있는 정장을 차려입은 금발의 여자였다.


엘렌 생쿼(Hélène Sancoeur). 이 저택 주인의 비서이자 저택의 관리까지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파일을 손에 들고, 단정하게 틀어올린 머리에 펠릭스만큼이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엘렌이 펠릭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숙부님은?”

“예정에 좀 차질이 생기셔서, 응접실에서 일단 기다리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엘렌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말없이 엘렌의 뒤를 따라가는 펠릭스의 주변으로 나비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확히는 살아있는 나비가 아니라, 그려진 나비들이었지만.


이 저택의 가장 큰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 반짝거리는 신전같은 외관도 아니며, 파리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는 오랜 역사도 아니다.


건축학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이 저택의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건 바로 나비였다. 나비가 그려지지 않은 장소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비들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진 창문은 물론이고 복도와 기둥, 심지어는 바닥에까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나비 문양들은 거의 천 년 전쯤에 세공된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상황인지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건물을 소유한 유피테르 가의 상징물이 나비가 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이 저택을 ‘나비 저택’ 이라고 불렀다.


응접실로 안내받아 소파에 털썩 앉은 펠릭스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군더더기 없는 배치와 깔끔한 응접실 안을 말없이 살펴보고 있는 펠릭스의 앞에 엘렌은 차와 쿠키가 든 쟁반을 내려놓았다. 금빛 나비가 새겨진 하얀 찻잔에 엘렌이 차를 따라주자 펠릭스는 천천히 왼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슬핏 웃으면서 찻잔을 내려놓고 펠릭스는 입을 열었다.



“여전히 깔끔하군.”

“아닙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엘렌이 다시 질문했다.



“학교 생활은 어떠십니까?”

“별로. 그냥저냥 지내고 있지.”

“….”

“걱정할 필요 없어. 성적은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정중하지만 걱정이 묻어나는 엘렌의 말투에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너는 날 보면 늘 그런 걸 묻는군.”



꽤나 즐거운지 무표정을 거두고 작게나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파리에 히어로라는 자들이 나타났었죠.”



찻잔을 들던 펠릭스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며 다시 차를 마시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담담하게 고하듯 말했다.



“의원님께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숙부님이?”

“네.”

“나한테 그런 걸 말해도 되는 건가?”

“도련님이 의원님께 해가 되는 일을 하실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침착하게 맞받아치는 엘렌의 대답에 펠릭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금 차를 호록 마시는 펠릭스의 옆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서서 엘렌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도련님.”

“….”

“의원님을 너무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답이 없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재차 말을 꺼냈다.



“도련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려고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늘 혼자 지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꺼내는 건조한 대답에 펠릭스는 어이가 없었는지 하, 기가 찬 듯한 메마른 웃음을 내뱉었다.



“내 뒷조사를 한 건가?”

“…어느 정도의 보고는 받고 있습니다. 설마 의원님께서 도련님의 후견인이라는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펠릭스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에도 또박또박 대답을 내놓는 엘렌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엘렌은 계속 말을 꺼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눌러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 커서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도련님은 좀 더 자유로워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너의 의지인가?”

“네, 저의 의지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는 엘렌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펠릭스는 결국 나직이 한숨을 쉬며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그럼 그게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도 알겠군.”

“알고 있습니다.”



꿋꿋하게 대답을 마치는 엘렌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는 딱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펠릭스는 엘렌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고 직감했다. 매사에 더없이 합리적이고 필요 이상으로 말하기를 삼가는 성격의 비서는 지금 자신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괜찮냐고 매번 물을 때마다 언젠가 이런 말이 나오지는 않을까 막연히 짐작하기는 했었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니 조금은 놀라웠다.



“나는….”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에펠탑 근처에 있는 샹 드 마르스(Champ de Mars) 공원.


많은 가족들과 관광객들이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두르고 있는 공원에 모여 하하호호 떠들고 있었다.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먹는 무리들과 벤치에 앉아 있는 커플들, 사진기를 들고 공원 안을 기웃거리는 이들도 있었으며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의 경우 부모님과 같이 온 경우가 많았지만 보통은 친구들끼리 놀러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공원 한 구석에 모여 있는 네 명의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애를 세 명의 아이가 둘러싸고 있었다.



“정말 레이디버그랑 아는 사이야?”



곱슬거리는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콧등에 주근깨가 살짝 나 있는 여자아이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렇다니까?”



갈색 단발머리를 한 여자애는 자신 있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정말 친해. 얼마 전에도 서로 안부인사 주고받았거든.”

“근데 왜 요즘은 안 보이는 건데? 저번 정전 사건 이후로 소식이 안 들리는걸.”



곱슬거리는 짧은 금발머리의 남자애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걸 본 갈색 단발머리 여자애는 키득 웃었다.



“너 레이디버그 좋아해? 루크.”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멋있잖아!”

“그게 좋아하는 거지.”



말문이 막힌 루크를 뒤로 한 채 검은색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갈색 피부의 남자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그럼, 릴리. 나 번호만 좀 알려주면 안 될까? 목소리만이라도 들어보고 싶은데.”

“그건 곤란해 테오. 영웅의 사생활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어?”

“그런가….”



어리긴. 쯧쯧 혀를 차는 릴리의 앞에서 테오는 실망한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분위기를 개선하려는 건지 금발의 여자아이가 발랄하게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전해줘! 무지무지 기대하고 있다고 말이야.”

“그래.”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릴리의 모습에 세 아이는 그저 좋은지 즐거운 얼굴로 수군수군 대화를 주고받았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도 이미 화제 만발이었지만, 파리에서 벌어졌던 정전 사태에 도움을 준 사람이 두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자마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단 두 번 나타났을 뿐인 히어로들에 대해 파리의 언론들은 제대로 특종이다 싶었는지 그들의 활약상은 신문의 앞면에 대서특필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인기를 견인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히어로들의 등장에 파리 시내가 들썩이고 있었다. 그들의 인기는 특히나 어린 층으로 갈수록 더욱 높아졌다. 그러니, 그런 히어로와 아는 사이라는 릴리의 말에 세 아이가 크게 관심을 두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금발의 여자아이, 로즈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예쁘게 반짝거렸다.



“아, 저기 아이스크림 트럭이 있다!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좋지~! 루크랑 릴리도 먹을 거지?”

“콜. 나는 바닐라. 릴리 너는?”

“난 초코로 부탁해.”

“알았어~”



릴리만을 남겨두고 세 명이 아이스크림 트럭 쪽으로 뛰어가자, 그제서야 릴리는 긴장을 풀고 참고 있던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어쩌지?


사실 릴리는 레이디버그와 친하기는커녕 만난 적도 없었다. 신문기사에 떠 있던 사진으로 얼핏 보기는 했지만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시작은 간단했다. 그냥 미아 저 계집애가 예쁜 옷을 입고 와서 자랑하는 게 얄미워서 충동적으로 내뱉었던 거짓말일 뿐인데, 문제는 다들 그 말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순순히 믿고 있다는 거다.


처음부터 농담이었다고 해야 했다. 문제는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애들의 관심어린 시선이 좋아서 나중에 말하자고 계속 해명을 미루다 보니 어느 샌가 일이 너무 커져 있었다. 계속 얼버무리는 것에도 슬슬 한계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러다가 정말로 다시는 안 나타나면 어쩌지? 그러면 애들도 언젠가는 수상하게 생각할 텐데. 다시 나타나도 문제기는 했다. 레이디버그와 마주쳤을 때 나를 모르는 것처럼 보이면 모든 게 끝이었다. 어떻게든 해결하자. 의외로 사정을 설명하면 도와줄지도 모르고.


태평한 생각을 하며 벤치에 등을 기대는 릴리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레이디버그랑 친하다고?”



높은 톤이지만 굵기를 봐서는 남자 목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릴리는 짜증이 났다. 이젠 쟤들도 모자라서 상관없는 다른 사람한테까지 레이디버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다니. 저 멀리 트럭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애들의 모습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쟤네는 하여간 너무 목소리가 커서 탈이라니까.



“아, 그래요, 그래. 저 레이디버그랑 친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는 마세요. 가급적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무렇게나 내뱉는 릴리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뒤에 서 있던 남자의 입꼬리가 한 쪽으로 크게 올라갔다.



“그럼, 네가 위험해지면 레이디버그가 나타나려나?”

“네네, 당연…. 네?”



싸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마자, 제 위로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의 주인을 본 릴리의 입술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꺄아아아악!”





///



“하아, 역시 쉽지 않구나.”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마리네뜨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데이트 신청에 실패해서인지 평소보다 더 기운이 없는 마리네뜨의 손에 티켓 두 장이 꼭 쥐어져 있었다.



“마리네뜨, 너무 슬퍼하지 마.”



가방 속에 들어가 있던 티키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작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울해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티키는 재차 한 마디를 더 던졌다.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

“오늘은 정말 바빠서 거절했던 건지도 몰라. 선약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나중에 한가해질 때 다시 같이 가자고 해보자. 응?”



상냥하게 달래는 티키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일순 눈을 깜빡거렸다가, 다시 활짝 웃었다.



“그래 맞아!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구!”



조금은 기운을 차렸는지 다시 밝게 웃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티키는 흐뭇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아직 많이 얘기해보지 않은 사이라 어색해서 거절한 건지도 몰라. 응, 그럴 거야. 솔직히 몇 번 얘기해보지 않은 여자애가 난데없이 같이 공연보러 가자고 하면 좀 난감하잖아. 그래,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조금 더 친해지고 나서 다시 말해볼까. 괜찮아, 시간이야 아직 많으니까.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뭐!”



이 정도에 포기할 만큼 난 약하지 않다고! 계속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리다가 두 손을 주먹쥐고 힘차게 하늘로 뻗는 마리네뜨의 눈동자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티켓을 들고 있던 손을 펴자, 꾸깃꾸깃한 모양새로 손바닥 위에 올려진 티켓이 눈에 들어왔다. 우울해진 마음을 눌려펴듯 티켓을 다시금 반듯하게 펴면서 마리네뜨는 힘차게 중얼거렸다.



“아직 기회는 많으니까! 내일은 분명…!”



아니, 중얼거리려고 했다.



[긴급 속보입니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전광판에 띄워진 광고가 갑자기 뚝 꺼지더니 다른 화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면에 나온 앵커는 최대한 침착하고 빠르게 속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악당이 에펠탑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현재 이 악당은 어린아이 하나를 붙잡아 에펠탑 꼭대기에 인질로 잡아놓고 농성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뭐라고? 놀란 얼굴로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옆에서 티키가 다급히 마리네뜨를 불렀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경찰에서 헬리콥터를 동원했지만, 비둘기 떼에 막혀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마리네뜨. 느껴져!’

“느껴진다니, 뭐가?”



가방 쪽을 내려다보며 작게 소곤거리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재빨리 다음 말을 꺼냈다.



“저번에 말했던 이상한 기운!”

“정말?”



그 때, 전광판에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괴상한 차림새로 비둘기 떼를 타고 에펠탑 주변을 날아다니는 남자에 마리네뜨는 물론 시민들도 모두 경악했다. 하늘을 날고 있어?! 게다가 옷도 이상해!



<내 이름은 미스터 피죤. 레이디버그, 네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순순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을 거다!>


[보시다시피, 이 악당은 레이디버그의 친구를 붙잡고 있다며,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에펠탑으로 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엥? 내 친구?”



설마 에스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마리네뜨는 다시금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비둘기들은 사람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막고 있지만 드론 카메라에는 관심이 없는지, 언론에서 취재를 위해 보내놓은 드론 카메라가 전송한 장면이 뉴스 화면 위로 떠올랐다.


이제 11-12살 정도 될 법한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를 본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보는 아인데?”


[정말 이 소녀는 레이디버그의 친구일까요? 만약 친구라면, 레이디버그는 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음, 어떻게 된 거지….”



에스미가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문제네. 턱에 손을 올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마리네뜨를 티키가 재촉했다.



“마리네뜨. 어쨌든 일단 저기 있는 장소로 가보자!”

“하긴, 악당이 나타났는데 히어로가 가만 있을 수는 없겠지.”



하아, 한숨을 쉬던 마리네뜨가 재빨리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번쩍, 빛이 새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붉은 인영이 건물들 사이에서 휙 뛰어올라 하늘로 솟았다. 모두 전광판에 정신이 팔려 있던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에펠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펠릭스는 엘렌을 쳐다보았다. 엘렌이 조용히 말했다.



“제 전화군요.”



한 치의 동요도 없는 얼굴로 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들었지만, 그 전화의 발신인이 누군지를 확인하자마자 엘렌의 얼굴에 짤막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의원님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엘렌은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펠릭스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전화를 해준 숙부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나저나 방금 그 소리는 핸드폰 벨소리인가? 요즘은 벨소리로 최신 가요를 쓰는 사람들이 많던데, 기본형으로 되어 있는 전화벨 소리조차 참으로 엘렌답다 생각하며 펠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우선 본인부터 돌보는 게 더 좋을 텐데.


혼자인데다 할 일이 없기도 해서 가만히 다 마신 찻잔을 노려보고 있을 찰나였다.



“파트너!”



갑자기 가방 속에서 튀어나와 제 앞으로 다가온 플랙에 펠릭스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깜빡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놀란 게 분명한 펠릭스를 보며 낄낄 웃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불퉁한 목소리라 말했다.



“플랙, 갑자기 나오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지금 아무도 없잖아~ 그것보다, 이상한 게 느껴지는데?”

“이상한 거라고?”

“아마 저쪽도 같은 걸 느꼈을 거야~”



플랙이 말하는 저쪽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들었다. 펠릭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열심히 쿠키를 주워먹고 있는 플랙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후, 응접실 문이 열렸다. 통화를 다 끝냈는지 엘렌의 목소리가 살짝 난처한 기색을 띄었다. 



“도련님, 아무래도 오늘은 사정상 만나뵙지 못할 거 같으시다고…. 도련님?”



응접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펠탑 근처까지 도착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껑충껑충 건물들을 뛰어 에펠탑 바로 앞까지 도착한 레이디버그는 곧이어 낯익은 뒤통수를 발견하고 동작을 멈췄다.



“여, 레이디?”



블랙캣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너도 소식 듣고 왔어?”

“아아, 대충.”

“말해두겠는데, 난 그 여자애 잘 몰라.”



단호하게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잠깐 멍하게 쳐다보던 블랙캣은 곧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기냐는 듯이 자신을 흘겨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겨우 웃음을 그치고 대답했다.



“알고 있어. 애초에 지금 나나 레이디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파리에 있을 리가 없잖아.”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는 듯 능글맞게 웃고 있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괜히 민망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제 어떡하지?”

“레이디는 어쩌고 싶은데?”

“어쩌긴. 저 애도 구출하고, 그 악당이라는 사람도 물리쳐야겠지.”

“계획 있어? 지금 에펠탑 쪽으로 접근하는 건 거의 무리라고 보는데.”

“계획이라면 있지.”



이번엔 레이디버그가 반격할 차례였다.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블랙캣, 미끼 작전이라고 알아?”

“응?”



의미심장하게 웃는 레이디버그의 미소에 불안해졌는지 뒤로 물러서려는 블랙캣의 어깨를 꽉 잡고, 레이디버그는 웃으며 말했다.



“미끼 좀 되어줄래?”





“어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펠탑 바로 옆을 날아다니는 비둘기들 위에 타고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꼭 비둘기와 닮은 모습의 슈트를 입고 있던 남자는 한참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발견하고 만면에 가득 화색을 띄웠다. 에펠탑에서 좀 떨어진 건물의 지붕 위에 선 블랙캣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블랙캣의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남자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혼자 온 건가?”

“우리 레이디까지 출동할 필요는 없거든~ 너는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도발하듯이 말한 블랙캣이 들고 있던 봉을 남자에게로 뻗었다. 순식간에 늘어난 봉이 남자의 턱을 정확히 가격했고, 그 충격으로 남자는 하마터면 공중에서 떨어질 뻔했다. 주변에서 날아다니던 비둘기들이 재빨리 받쳐주지 않았다면 가벼운 상처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쉽다는 듯이 쳇, 혀를 차는 블랙캣에 제대로 약이 올랐는지 남자는 물론이고 남자가 부리는 비둘기들이 모두 블랙캣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비둘기들과 악당이 블랙캣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시각, 에펠탑 꼭대기에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붉은 색 바탕에 검은 점박이가 점점이 박힌 행글라이더는 에펠탑 꼭대기를 한 바퀴 돌다가 전망대 위로 부드럽게 착지했다. 번쩍, 빛이 나는 것과 함께 행글라이더가 사라진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은, 붉은색 바탕에 검은 점들이 그려진 타이즈를 입은 소녀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레이디버그는 꼭대기 근처에 묶여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역시 레이디버그를 발견했는지 깜짝 놀라는 소녀에게로 달려간 레이디버그가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이제 괜찮아.”

“어, 정말 레이디버그…?”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잔뜩 지쳐 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본 레이디버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소녀를 번쩍 안아올렸다. 소녀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꺄악!”

“눈을 감고 나를 꽉 잡아요. 절대로 눈을 뜨지 말고.”

“네?”

“순식간일 테니까.”



당당하게 미소짓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올려다보던 소녀가 이내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뭐라 말하고 싶은지 뻐끔뻐끔 입을 벌리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는 소녀에게 레이디버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우리, 초면이죠?”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레이디버그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지만, 일단은 물어보았다.



“악당은 당신이 내 친구라고 말하고 있던데. 어떻게 된 건지 물을 수 있을까요?”

“…죄,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일이 커질 거라고는….”



정말로 미안한지 새빨개진 얼굴로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를 보며 레이디버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네?”

“나랑 아는 사이라고 해봐야, 이런 일만 겪게 되잖아요.”



영화만 봐도 그렇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상냥하게 웃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릴리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레이디버그는 그런 릴리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레이디버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일단 빨리 가야겠네요. 눈 감아요!”



소녀가 눈을 감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순식간에 요요를 사용해 에펠탑 아래로 내려온 레이디버그가 소녀를 에펠탑 근처에 있던 공원에 내려주었다. 살며시 눈을 뜬 소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세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테오, 루크, 로즈….”

“릴리! 너 괜찮아?!”



헐레벌떡 뛰어온 아이들이 릴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재잘거렸다. 이름이 릴리였구나.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럼, 친구 잘 챙겨줘요.”



그 말과 함께 요요를 던져 비둘기 떼가 몰려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레이디버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세 아이는 릴리를 돌아보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너 짱이다! 진짜 레이디버그랑 아는 사이였어?”

“진짜 멋있더라! 에펠탑 꼭대기에서 부웅 날아오는데, 완전 영화 속에 들어온 거 같았어!”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흥분해서 떠드는 아이들을 말없이 쳐다보던 릴리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아니야.”

“응?”

“거짓말해서 미안해. 나, 레이디버그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전에 만난 적 한 번도 없어.”



고개를 돌려 제 친구들을 똑바로 응시하는 릴리의 얼굴이 매우 단호했다. 할 말을 잃었는지 그저 황망히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릴리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도 구하러 와줬어. 화내지도 않고.”



자신을 보며 웃어주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지금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역시 악당을 상대하러 갔을까. 그 무시무시한 남자를?


그 남자에게 붙들려가던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나 릴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살다살다 악당에게 붙잡혀 에펠탑 꼭대기에 묶이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애초에 지금 상황이 전부 다 꿈만 같았다. 이런 게 현실에서 정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레이디버그가 떠나버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릴리는 중얼거렸다.



“무서운 거구나….”



영웅이란.






한편, 블랙캣과 미스터 피죤은 나름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나 잡아봐라~”



지붕 위를 요리조리 뛰어다니며 비둘기 떼들을 피해다니면서도 블랙캣은 속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왜 아직이지? 그러던 중 블랙캣은 미스터 피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 설마 눈치챘나?


의아해할 틈도 없이 미스터 피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춤을 추듯 엉덩이를 몇 번 씰룩거리던 미스터 피죤이 두 팔을 똑바로 블랙캣이 있는 방향으로 내뻗자, 비둘기 떼들이 한데 뭉쳐 그에게로 덤벼들었다.



“으악!”



삽시간에 덤벼든 비둘기 떼가 블랙캣을 감싸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원을 그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비둘기들이 사납게 구구거리는 소리가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소름끼쳤다.


하지만 잠시 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피죤은 재빨리 비둘기들을 모아 공격을 막아냈다. 피죤의 지시가 사라지자 블랙캣을 감싸고 있던 비둘기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재빨리 지붕 위로 착지하는 블랙캣의 옆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요요였다. 그리고 그 요요에 매달려있는 누군가.



“블랙캣!”

“오, 레이디. 이제야 오면 어떡해~?”



기다리다 몸에 사리가 나올 지경이었다구. 능청스레 대꾸하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눈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미스터 피존을 향해 소리쳤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목적이 뭐야! 죄 없는 어린아이를 붙잡고 사람들을 협박하다니….”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에게 피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뭐?”

“사람 한 둘 정도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당신….”

“인간은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생명을 죽이는데.”



그 한 마디에 요요를 던지려던 레이디버그의 동작이 일순 멈추었다. 블랙캣은 그런 레이디버그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피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피죤은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 드넓은 자연을 파괴하고, 늘상 이용하고 오염시키는 게 누구지? 바로 인간들이잖아. 그런데 본인들은 죽기 싫다고? 그거야말로 이기적인 거 아닌가?”

“….”

“자연과 어울려 지내려고 하기보다는 독차지하고 파괴하기만 하려고 하지. 난 그런 인간들이 너무나도 싫거든.”



히죽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미스터 피죤의 말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악당이지만 그가 하는 말은 별반 틀린 것이 없었다. 인간이라고 해도 결국 동물의 한 종일 뿐인데, 어째서 인간들만이 특별하게 취급되어야 하냐는 그의 의문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 토론해온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입을 딱 다물고 있는 두 히어로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지 미스터 피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모두 없애고….”



다만 그 다음 말이 너무 황당한 게 문제였지만.



“우리 비둘기들의 세상을 만드는 거야!”



홀홀홀 웃으며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미스터 피존의 모습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산통 다 깼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한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냥 후려쳐버려! 저건 또라이가 분명하다구, 레이디!”



옳은 말씀.


그 말에 백 번 공감하며 레이디버그는 힘차게 요요를 던져 미스터 피죤의 이마를 가격했다. 악!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부여잡고 뒹굴거리던 미스터 피죤은 다시금 날아오는 요요에 히익,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다. 그런 미스터 피죤의 주변으로 비둘기들이 몰려들더니 그를 감싸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늘에서 두 히어로를 내려다보면서 미스터 피죤은 크게 웃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주지! 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너희들을 해치워주겠다!”



그 말과 함께 하늘로 날아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보면서 블랙캣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악당의 전형적인 대사 아냐?”

“누가 아니래.”

“그나저나, 레이디. 우리 어서 도망가야 할 거 같은데.”

“? 왜?”

“하늘을 봐.”



블랙캣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본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방송국 로고가 그려진 헬리콥터 몇 대가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지붕 아래에도 시민들이 많이 몰려와서 핸드폰을 들이대고 있었다. 레이디버그는 헛숨을 들이켰다.



“헉.”

“이야~ 많이도 몰려왔는데?”

“지금 감탄할 때야?! 어서 도망가자!”



그 말과 함께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잡아끌었다. 요요를 던져 그 줄을 타고 사라지는 블랙캣과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시민들은 우왕좌왕하며 그들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그들을 붙잡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산한 골목에 도착해서야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놓아주었다. 제 팔을 뿌리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일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시 가면을 벗을 시간이다. 왠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 기분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돌아서려는 블랙캣을 레이디버그가 불렀다.



“블랙캣.”

“응? 왜, 레이디?”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물론이지, 뭐든 물어봐.”



화색이 되어 대답하는 블랙캣의 얼굴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레이디버그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너, 정말로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이야? 히어로.”

“….”

“이런 일이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한 레이디버그의 표정에 뭔가를 짐작했는지 블랙캣의 입가에서 미소가 살짝 가셨다.



“레이디는 하기 싫은가봐?”



정곡을 찌르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질까봐? 이번에 붙잡혀 간 소녀처럼.”

“그것도 있고, 그냥 내키지 않아.”



투정부리듯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관찰하듯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결론을 내렸는지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거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아무렇지 않은 듯 날카롭게 속을 후벼파는 블랙캣의 대답을 레이디버그는 장난스럽게 맞받아쳤다.



“너 진짜 싫다.”

“우와, 너무해. 나 상처받는다구? 이래뵈도 연약한 아기 고양이란 말이지.”

“퍽도 연약하겠다.”



블랙캣이 던진 농담에 피식 웃으며 레이디버그는 뒤로 돌아섰다. 집에 가야겠다,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가던 레이디버그는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걸어간 거리만큼을 따라온 블랙캣을 쳐다보며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왜 계속 나를 쫓아와?”

“같이 있고 싶어서.”

“왜 같이 있고 싶다는 건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가?”

“말을 돌리네, 너.”



한숨을 쉬듯 말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살짝 미소지었다. 마냥 밝기만 한 미소가 아니라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듯한 쓸쓸한 미소.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면서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그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차 흐려졌다. 그런 레이디버그의 표정을 본 블랙캣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런 표정이라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억지로 웃는 듯한 표정.”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재차 말했다.



“웃기 싫으면 차라리 인상을 찡그리는 게 나아. 뭐, 레이디한테는 활짝 웃는 얼굴이 가장 잘 어울리긴 하지만.”

“가면으로 가렸는데 그게 보여?”

“보이지. 저번에도 말했잖아. 고양이는 눈이 밝다니까?”



능청스레 말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풋 웃었다. 정말 따라오지 말라고 강조하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돌아섰다. 그런 제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블랙캣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레이디버그는 잠시 멈칫했다.



“고마워.”



던지듯 그 한 마디를 던지고 레이디버그는 휘익 날아서 사라졌다. 레이디버그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블랙캣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난 망했어….”



곧장 집으로 돌아온 뒤 제 방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마리네뜨의 목소리에 우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사진도 사진인데, 분명 동영상 찍은 사람도 있을 거라고! 방송사를 피한 건 그나마 다행인데 진짜 어쩌지. 유투브에 영상이라도 올라오면….”

“유투브? 그게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티키에게 마리네뜨가 간단히 설명을 해주자 티키는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렸다.



“그런 게 있구나!”

“사진까지는 그래도 넘기겠는데, 제발 동영상 찍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머리를 쥐어뜯는 마리네뜨를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던 티키가 한참 고민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그것보다 마리네뜨. 지금 중요하게 해야 하는 말이 있어.”

“중요한 말?”



수척해진 얼굴을 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장 최악의 가능성이 실현된 것 같아.”

“최악이라니….”



여기서 뭐가 더 최악인데? 그렇게 묻는 듯한 마리네뜨의 얼굴을 마주하며 티키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우리가 오늘 만난 악당. 그 악당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은, 호크모스의 것이었어.”

“호크모스?”

“또 다른 미라큘러스, 나방 미라큘러스를 가진 히어로야.”

“미라큘러스가 더 있다고?”



깜짝 놀라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뇌리를 스치고 떠오르는 생각에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저번에 그 정전 사건!! 그럼 그 사건 때도, 그쪽에서 관련했을 수도 있다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미라큘러스는 히어로로 변신시켜 주는 물건이 아니었어?”

“미라큘러스는 선하다, 악하다로 나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칼로 빵을 자르면 괜찮지만 사람을 찌르면 흉기가 되잖아? 마찬가지야. 다만 되도록 선한 사람에게 넘어가도록 설계되어 있을 뿐이지.”



마리네뜨의 손이 제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미라큘러스의 직감 때문일까? 위험을 감지한 건지 파르르 떨리는 제 손을 베개에 묻으며 마리네뜨는 티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티키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마리네뜨. 아무래도 조금은 힘든 싸움이 될 거 같아. 특히 절대 정체를 들켜서는 안 돼. 그 누구한테도. 너는 물론이고 네 정체를 아는 사람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으응, 알았어.”



머뭇머뭇 대답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티키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마리네뜨.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응?”

“블랙캣을 너무 믿지 마.”



순간 티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말뜻을 이해한 마리네뜨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슨 말이야, 티키?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

“블랙캣과 협력하는 건 좋지만, 아주 믿어서는 안 돼. 블랙캣은 말이지, 어떻게든 너한테서 신뢰를 얻어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 신뢰?”



어째서. 그렇게 묻자 티키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블랙캣은 조금 특별해. 왜냐하면, 블랙캣이 가진 힘은 자칫 잘못하면 끝없이 위험해질 수 있거든. 마리네뜨, 왜 검은 고양이가 불행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것도 블랙캣에게서 비롯된 거라는 거야? 레이디버그처럼?”



티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마리네뜨,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왜 호크모스가 아니라 블랙캣이 너의 동료라고 말한 건지.”

“그건….”

“너와 블랙캣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네 상상보다 더.”



너무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들어서일까. 어지러운지 그저 눈만 깜빡거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티키는 다음에 마저 말해야겠다 생각했는지 적당히 말을 끝냈다.



“지금은 더 말할 상황이 아닌 거 같아. 나중에 제대로 다시 얘기할게. 아무튼, 조심했으면 좋겠어.”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티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이는 마리네뜨도 마찬가지였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부여잡고 마리네뜨는 베개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절규와 함께.



“이게 뭐냐구!”





===



P.S. 저는 펠릭스가 티키와 만나지 않은 것이 레이디버그 최고의 밸런스 패치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Posted by I.R.E
,

※ 1편: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1

댓글 다실거면 제발 후기 좀 읽으세요.




Episode 2.

블랙캣과의 만남







“저기!”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청회색 눈동자가 소년의 뒤에 서 있던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고, 위로 삐죽 솟은 더듬이같은 앞머리가 인상적인 동양계 소녀. 푸른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소녀는 딱 보기에도 꽤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소년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걸어가려는 순간 소녀가 소년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잔뜩 망설이는 얼굴을 하면서도 소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그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자신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소녀의 시선 앞에서도 소년은 무표정했다. 별로 달가워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딱히 소녀를 제지하지도 않았다.


한참 뒤, 소녀가 다시금 내뱉은 첫 마디는 매우 간단했다.



“나 기억해?”

“….”



아무런 말도 없는 소년에게 소녀는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개학식 날 기억해? 그 날 횡단보도에서 구해준 거, 고마워.”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 표정변화 없이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소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감사를 표시했다.



“정말 고마웠어. 나 그 날 좀 피곤했었거든. 너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차에 치였을지도 몰라. 아, 그 때 고맙다고 하려고 했는데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우리 학교 학생인 줄 알았으면 진작 인사했을 텐데, 너무 늦게 찾아왔다면 미안해. 그 때랑 같은 시간에 횡단보도에 나가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재잘재잘 떠들며 배시시 웃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년이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별로.”

“에?”

“그렇게까지 감사받을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침착하게 내려앉는 음성이 귀를 간지럽힌다. 역시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대답없이 눈을 깜빡거리는 소녀를 뒤로 한 채 소년은 그 자리를 떠났다. 조용히 자신을 무시하며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소녀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다른 학생들이 모두 복도에서 사라질 즈음에야 소녀의 긴 더듬이가 몇 번을 움직이더니 하트 모양을 그렸다. 얼굴에 홍조를 가뜩 띄우며 좋다는 듯이 웃고 있던 소녀는 마지막 수업종이 쳤을 때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꺅! 빨리 가야겠다!”



허겁지겁 교실로 달려가는 소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그래서, 만나보긴 했어?”



그 질문과 함께 에스미는 입에 물고 있던 빨대로 바나나 우유를 쪽 빨아마셨다. 무심한 얼굴의 제 친구와는 달리 마리네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 멋있어!”



좋아라 눈을 반짝거리는 친구의 모습을 못 봐주겠다는 듯이 에스미는 눈을 치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는 흥분한 얼굴로 눈을 반짝거리며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진짜 막, 딱 한 마디밖에 못 들은 게 너무 아쉬워. 아, 하지만 목소리 정말 좋더라. ‘그렇게까지 감사받을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라고 하는데……. 아, 진짜 나 어떡하지? 정말 사랑에 빠졌나봐!”



꺄악 비명을 지르며 책상에 털푸덕 엎어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서는 행복이 가득 묻어나왔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한 그 얼굴에 에스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젓다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의외인데? 니가 말한 상대가 그 녀석이라니.”

“뭐야, 에스미. 그 애에 대해 알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름 정도는 들어봤지. 아니, 그보다. 넌 우리 학교 전교 수석이 누군지도 몰라?”

“누군데?”



정말 모르는 듯한 마리네뜨의 질문에 에스미가 한숨을 쉬었다. 니가 그럼 그렇지.



“방금 네가 말한 걔. 펠릭스 아그레스트. 입학 때부터 한 번도 수석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괴물이잖아.”

“헉, 진짜? 머리 좋구나….”



멍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리네뜨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에스미의 표정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찝찝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에스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거 말고는 정보가 없어. 니 말마따라 무표정에 말수도 없는 타입이라 성격이 어떤지도 잘은 모르겠고. 같은 반 애들하고도 거의 대화를 안 한다고 하고. 매번 무표정한 모습이 어째 로봇같은 느낌이 나서 애들도 좀 꺼려한다더라. 듣자하니 어디 명문가 쪽 외동아들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여러 모로 수상쩍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알려진 정보가 없어서 괜한 편견을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에스미는 다시 마리네뜨를 힐끗 돌아보았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니 걱정부터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솔직하다 못해 속내를 아주 끄집어내놓고 사는 듯한 녀석이랑 아예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녀석의 조합이라니. 상상이 잘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고.


다 마신 우유의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에스미가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거라면 취미가 독서라는 것 정도? 늘 뭔가 책을 읽고 있다더라. 도서관에도 자주 나타나는 거 같고.”

“그래서 그렇게 똑똑하고 침착하구나. 진짜 멋있다….”

“세상에 콩깍지가 무섭다더니.”



뭘 어떻게 들으면 그런 결론이 나니?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왜? 멋있잖아.”



아무래도 상사병 중에서도 말기 증상인 것 같다. 뭘 어떻게 말해도 요지부동일 것만 같은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는 말려봐야 소용없겠다 싶어 가만히 한 마디를 던졌다.



“…뭐 네가 좋다면야.”

“좋아, 그럼 조사부터 시작해야지!”



책상에 한쪽 팔을 기대고 그 손 위에 턱을 괴고 있다가, 기운차게 소리치는 마리네뜨의 대답에 에스미의 얼굴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에스미가 불길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무슨 조사?”

※ 의지가 준비되어 있을 때, 발은 가볍다잖아?”



환하게 웃으며 투지를 불태우는 마리네뜨를 뒤로 한 채 에스미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저거 어째 불안한데….”




※ 프랑스의 노력 속담 중 하나. 원문은 : When the will is ready, the feet are light



///



펠릭스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펠릭스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한 타입에 속했다. 에스미의 말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본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성격도 아닌 듯했다. 말수가 적어서인지 대화를 해본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반나절 동안 학교 애들을 탐색하고 다녔지만 성과가 거의 없는 것에 마리네뜨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사람이 이렇게도 없다니!


그래도 다행인 건 펠릭스의 가문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꽤 된다는 점이었다. 알고 보니 펠릭스의 성인 아그레스트는 파리에서도 굉장히 오래된 명문가 중 하나였고, 때문에 선생님들에게서는 어느 정도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일단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부모를 일찍 타계했으며 유명한 정치가를 숙부로 두고 있다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알아낼 수 있었다. 현재는 7구 쪽에 있는 커다란 저택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다 미성년자의 신분임에도 숙부와 같이 살지 않는 이유는 아그레스트 가문을 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에 책이 많아서인지 밖으로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는 것 같고, 가끔 외출하는 경우에도 목적지는 학교거나 도서관인 경우가 90% 이상이었다.


취미는….



“책 읽는 걸 좋아한다라.”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리네뜨는 손에 들고 있는 수첩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책이라니. 몇 번을 봐도 참 골치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거하게 한숨지었다. 왜냐하면 마리네뜨의 인생에서 가장 인연이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책이었으니까. 공부는 그냥저냥 하지만.



“음악도 좋아하는 거 같다고 했던가….”



클래식한 음악을 좋아할 거 같아. 손끝부터 발끝까지 딱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다니던 펠릭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그래도 음악회 정도는 같이 가자고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일단 표를 한 번 구해봐야 할 것 같다.



“7구 쪽이라면 엄청 큰 집들일 텐데….”



지금은 5구나 8구가 부촌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부자 동네라고 하면 역시 7구를 빼놓을 수 없다. 에펠탑과 국회의사당 등 18세기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물들이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언제 한 번 7구를 지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도 길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우뚝 솟아있는 클래식하고 거대한 저택들에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딱 봐도 수십 명은 살 수 있을 것만 같이 커다랬었다. 그런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니.



“괜찮을까?”



자신이라면 분명 무척 무섭고 외로울 것이다. 지금도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조금 무서우니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안에 있다 보면, 처음에는 괜찮다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혼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침묵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 예전에는 늘 혼자였기에 그것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에스미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생각보다 많이 외로웠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직 어려서 이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펠릭스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마리네뜨.”



조그맣게 들리는 명랑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샤샥 주위를 둘러보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왼편으로는 센 강이 내다보이며 오른쪽에는 나무들이 빽빽한, 공원 가장자리를 가로지르는 이 길은 마리네뜨가 가장 애용하는 산책길 중 하나였다. 워낙 큰 공원이니만큼 다른 길들도 꽤 많지만, 그런 길들 쪽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산책은커녕 움직이기도 힘드니까.


오늘도 여지없이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리네뜨는 옆구리에 찬 가방을 향해 작게 소곤거렸다.



“티키, 쉿!”



마리네뜨의 말에 대답하듯 가방 속에서 꺄르르 웃음소리가 났다.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은 웃음소리는 듣기에 무척 좋았지만, 그걸 마냥 좋게만 받아들이기에 마리네뜨는 지금 심적으로 그리 태평하지 못했다. 특히 지금 도시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레이디버그의 등장으로 파리에는 일순 난리가 났다. 강도를 잡은 다음 날, 언론들은 하늘을 날아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사진 몇 장을 내걸고 짤막하지만 임팩트 있게 방송했고, 영화 속에나 나오는 히어로의 등장이라며 온갖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있는 신문들도 즐비했다. 파리에서 가장 명성 높은 일간지인 르 몽드와 르 피가로, 리베라시옹의 1면이 모두 레이디버그의 사진으로 가득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마리네뜨가 얼마나 기겁했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마리네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참 살고 볼 일이네. 살다살다 내가 신문 1면에 실릴 날이 오다니….”

“그만큼 모두 너를 환영한다는 소리라구, 마리네뜨!”



가방 안에서 뛰쳐나오며 발랄하게 웃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미소짓다가도 곧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글쎄. 정말 내가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어. 미라큘러스는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는 돌인걸. 마리네뜨, 넌 이 파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미라큘러스에 선택받은 사람이라구! 자신감을 가져 봐.”



회의적으로 말하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확신을 주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런 티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리네뜨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힘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시 변신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히어로가 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했다.



“애초에 네가 말한 세상에 위험이 닥쳤다는 말도 잘 모르겠구. 그게 굳이 이런 히어로가 필요할 정도의 일인가?”



마리네뜨의 질문에 티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절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미라큘러스가 깨어나는 순간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어.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

“마리네뜨. 너밖에 없어.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는 게 그렇게까지 싫은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레이디버그로서 변신했을 때의 감각은 여전히 마리네뜨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정말로 가벼워진 몸과 자유롭게 움직이는 팔다리,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자신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특히 하늘을 날아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정말로 즐거웠다. 맞부딪히는 바람이 상쾌했고,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파리 시내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잖아.


무엇보다 마리네뜨에게는 확신이 부족했다. 왜 하필 자신일까, 라는 의문은 아직도 마리네뜨의 안에 자리잡은 채로 속삭이고 있었다. 히어로라니, 왜 하필 나 같은 애한테? 그런 건 좀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임무 아니었어? 이리보고 저리봐도 자신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애일 뿐인데. 아니, 평범한 건 아닌가. 안 좋은 의미로는 자신도 특별하긴 했다.


마리네뜨는 쓰게 웃었다. 재수가 없는 걸로 파리 시내에서 자신만한 사람이 있긴 할까? 어릴 때부터 온갖 불행과 함께해온 터라 이젠 아무 일 없이 보내는 하루가 더 어색할 지경인데. 사람들을 구하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건수하지도 못하는 히어로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변신할 수 있다고 해도 나 혼자서 대체 뭘 할 수 있겠어? 당장 파리 시내만 해도 범죄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잖아. 그걸 일일이 다 막을 수도 없는걸. 내가 분신술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가 아니야.”

“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티키에 마리네뜨는 귀를 의심했다. 티키는 싱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다.



“동료가 있어.”

“동료?! 동료라니, 대체 누군데?”

“곧 만나게 될 거야.”



싱글싱글 웃는 티키의 모습을 보니 지금은 가르쳐주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다. 그에 마리네뜨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 자리에 멈춰섰다. 마리네뜨?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티키를 한참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티키.”

“응?”

“그런데 왜 꼭 내가 히어로가 되어야 해?”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는 난처한 기색이 가득 묻어났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다른 히어로가 있다면 굳이 내가 히어로가 될 필요는 없지 않아? 오히려 방해만 될 지도…. 모르는데.”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는 것이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영웅이 되야 한다고 하면 그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가 멋있다고는 생각했지만 한 번도 그 히어로에 자신을 대입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사고에 말려든 시민 1의 심정이 더 이해가 갔었으니까. 자신이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악당과 싸우게 된다고?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저번은 어찌어찌 해내기는 했지만 그건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분명 많은 비난을 받을 텐데.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나 같은 애가?


자신이 없었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마리네뜨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티키는 별로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티키가 이내 답을 내놓았다.



“마리네뜨 네가 아까 말한 것처럼,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

“그래서 동료가 필요한 거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놓는 대답은 어느 하나 틀린 것 없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우울해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티키는 다시 활짝 웃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리고 레이디버그가 되어서 좋은 점은 그것만이 아닌걸.”

“응? 그게 무슨….”



그 말을 내뱉자마자 마리네뜨는 뭔가의 예감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즉시 마리네뜨가 서 있던 자리에 무언가가 철퍽 떨어졌다. 하얀 새똥이었다.



“히익!”



급히 위를 올려다보자 제 머리 위를 빙빙 날아다니는 비둘기 한 마리가 보였다. 어떻게 피했지? 멍하게 앞쪽으로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미라큘러스가 단순히 변신만 도와주는 물건은 아니라구.”

“이건….”

“레이디버그의 능력 중 하나인 ‘직감’이야. 무당벌레는 행운을 상징한다잖아? 그건 바로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의 상징하는 능력에서부터 유래된 말이야.”

“행운을 상징한다고?”

“맞아. 변신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상시 발동하지.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레이디버그가 되어서도 위험을 직감하고 피해갈 수 있어.”

“와….”

“물론, 마리네뜨일 때도!”



생각지도 못한 능력에 마리네뜨는 그저 입을 헤 벌렸다. 무엇보다 자신의 불운한 체질과 정말이지 딱 들어맞는 능력이 아닌가. 저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게, 이렇게 스스로 위험을 피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는걸?


마리네뜨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새가 지저귀는 듯한 높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마리네뜨가 저도 모르게 자켓의 한쪽을 살짝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티키, 숨어!”



티키가 재빨리 그 안으로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마리네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들 사이를 살펴봐도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서야 마리네뜨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하하, 힘없이 웃다가 마리네뜨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솔길이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바로 공원 출구가 보일 것이다.


천천히 걸어 모퉁이를 돌자마자 탁 트인 커다란 원형의 공터가 보였다. 초록빛의 나무들 앞에는 나무 벤치들이 줄을 맞춰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마리네뜨 바로 가까이에 있는 벤치 앞에는 많은 수의 비둘기들이 모여 있었는데, 앉아 있던 남자가 마리네뜨를 보더니 살짝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갈색빛의 허름한 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있는 나이 지긋한 남자의 손에는 호루라기를 닮은 피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방금 전의 소리는 저 사람이 낸 걸까?


떨떠름하게 웃다가, 마리네뜨는 이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벤치 위 종이봉투 속에 들어있던 먹이를 비둘기들에게 뿌려주며 즐거워하는 남자를 스쳐 공원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리네뜨의 뒤로 화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저기요, 자비에 씨! 몇 번을 말해야 알겠습니까. 비둘기, 모이주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아니, 그래도….”

“계속 모이를 주면 아무데나 똥을 싸잖아요! 공원 관리인들한테서 항의가 들어오고 있단 말입니다! 당장 꺼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마리네뜨는 재빨리 뛰어서 공원을 빠져나갔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대화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뭐라고 하는지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방금 전 아저씨를 꾸짖는 남자의 목소리는 워낙 소리가 크다보니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소곤거렸다.



“진짜 목소리 크시네.”

“그러게, 기차 화통을 삶아 드신 걸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마리네뜨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면서 마리네뜨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저 아저씨 되게 안쓰럽다. 모이 하나 줬다고 저렇게 비난을 들어야 하다니.”

“그러게 말이야.”



가방을 열고 티키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마리네뜨는 그런 티키를 내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비록 힘없는 미소였지만.



“자신이 없어.”

“마리네뜨….”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티키? 아직은….”



뭐라 정하기가 어려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름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마주 웃어주었다.



“응, 알았어.”

“그래, 그럼 일단 집에나 가자!”



다시 환하게 웃으며 길을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도 없어 보였다. 속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마리네뜨의 주변으로 스산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알든 모르든, 이미 이 아름다운 도시에 깔리기 시작한 어두운 기운을 감지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리네뜨는 재빨리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수학숙제가 많은 거냐며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마리네뜨의 뒤에서 티키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그저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러갔다. 시침이 어느 덧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는 순간에서야 마리네뜨는 의자에 기대 쭈욱 기지개를 폈다.



“으아, 힘들어!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된다…!!”

“힘내, 마리네뜨!”

“고마워, 티키. 아, 진짜 이게 무슨 일….”



마리네뜨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방의 형광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갑자기 꺼져버렸다. 어라? 스탠드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해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전인가? 그런데 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까맣게 물든 시야는 바로 앞에 뭐가 있는지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자신의 경우 잘못 움직이다가는 뭘 밟고 넘어지든 뾰족한 것을 밟든 아무튼 다칠 가능성이 매우 높기도 했고. 창문 밖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걸 보니 파리 시내 전체가 정전이 된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네뜨, 방금 이상한 기운을 느꼈어!”

“기운?”

“적인지 아군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느낌이 좋지 않아.”



이렇게 다급해보이는 티키의 목소리는 또 처음이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양심이 너무나도 찔렸다.



“제발 가보면 안 될까?”



티키의 간곡한 부탁에 마리네뜨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새까맣게 변한 도시를 바라보고는 이내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계속 정전이 지속되면 나한테도 좋지 않을뿐더러,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면 그래도 좀 덜 다친다니까 괜찮겠지. 이렇게까지 어두우면 사람들이 알아보지도 못할 거고. 그렇게 애써 위안하며 조심스럽게 외쳤다.



“변신!”






“진짜 어둡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파리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혀를 내둘렀다.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된 상황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모든 소란들을 애써 무시하며 티키가 말해준 방향으로 조용히 계속 나아가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에는 적외선 안경이 끼워져 있었다. 손전등을 쓰면 분명 사람들 눈에 띌 것이 분명했으니까.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가자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목적한 장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빛이 하나도 없어 마치 어둠에 녹아든 것만 같은 커다란 건물을 올려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역시, 전력소인가.”

“어이, 그쪽도 지금 온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재빨리 등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쫄쫄이를 입은 남자의 얼굴에는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덥수룩한 금발의 머리 위로 쫑긋 솟은 귀가 마치….


고양이 같았다. 레이디버그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그쪽은?”

“어라? 그쪽 요정이 설명 안 해줬어?”



검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한 남자는 싱글싱글 웃더니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고 손등에 살짝 키스했다. 깜짝 놀라는 얼굴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남자는 자기소개를 건넸다.



“나는 블랙캣. 너랑 마찬가지로 요정의 부름을 받고 히어로가 된 사람이야. 레이디버그.”

“날 알아?”

“당연하지, 널 만나게 될 날을 얼마나 기다렸다구.”



찡긋 윙크하는 블랙캣의 모습에 온 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잡혔던 손을 빼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남자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어딘지 과장된 몸짓, 행동은 어딘지 조금 느끼하긴 하지만 나름 귀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단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러다가 레이디버그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블랙캣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질문을 던졌다.



“너, 내가 잘 보여?”

“응.”

“안경도 없이, 어떻게 이 어둠 속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데?”

“나는 고양이거든. 밤눈이 밝지.”

“호오.”



레이디버그가 흘린 감탄사에 블랙캣은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가만히 레이디버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시죠, 레이디.”

“어라, 왜?”

“가방에서 한 번에 물건 하나밖에 못 꺼내는 거 알지? 귀중한 재원을 적외선 안경 따위에 쓸 수는 없잖아. 이 전력소, 한 바퀴 돌아보고 왔었는데 아무래도 낌새가 좀 이상하거든.”

“그래서?”

“난 그런 거 없어도 앞을 잘 보니까. 내가 데려가줄게. 혹시 모르니까, 다른 무기를 꺼내서 위험에 대비하도록 해.”



진지하게 말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안경을 접어 가방에 넣은 뒤 요요를 꺼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생각보다 믿음직한 것 같기도.



“아, 잠깐만 기다려봐. 저쪽에 뭐가 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가던 블랙캣은 다음 순간 우당탕-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졌다. 저 멀리까지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볼멘소리가 터졌다.



“으악, 누구야! 이런 곳에다 상자를 갖다둔 사람이!”



…그것도 아닌가.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블랙캣은 천천히 어두운 전력소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런 블랙캣의 오른손을 꽉 붙들고 레이디버그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전력소 안은 적막했다. 깜깜하기도 깜깜했지만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탁탁- 발과 바닥이 짧게 마찰하는 소리만이 돌을 던진 수면처럼 서서히 퍼져나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곧바로 일대의 전기를 관리하는 메인 제어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부 지도에는 4층에 제어실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전기가 흐르지 않아 엘리베이터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라 두 사람은 비상계단을 통해 제어실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의 손을 꽉 잡고 비상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던 블랙캣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응?”

“이런 대형사태가 벌어졌는데도 건물 안이 너무 조용하지 않아? 당장 이 전력소에 배치된 사람이 몇인데.”

“그러고 보니….”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깜짝 놀라고 있는 레이디버그를 뒤로 한 채 블랙캣은 계속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파리 전역에 정전이 벌어졌는데 몇십 분째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

“게다가 더 이상한 건, 보통 이런 전력소는 전기가 나가더라도 예비 전력은 늘 상비하기 마련이야. 그런데 우리가 처음에 찾아왔을 때부터 전력소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잖아, 안 그래?”



이쯤 되니 블랙캣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레이디버그가 입을 열었다.



“누가 일부러 전기를 차단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바로 맞췄어, 레이디.”

“대체 왜?”

“그건, 이제 밝혀야겠지!”



순식간에 4층에 도착한 블랙캣이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철컥철컥, 잠겨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 문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부술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그랬다간 너무 소리가 클 것이 분명했다. 이 앞에 어떤 상대가 있는지 모르는데 쓸데없이 위치를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곧 결론을 내렸는지 블랙캣은 살짝 레이디버그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만 시선이 맞지 않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잠깐 고민하더니, 짐짓 능청스레 말했다.



“잠깐만, 레이디. 혹시 잠시만 내 손 놓아줄 수 있겠어?”

“응? 왜?!”

“아주 잠깐이면 돼. 버리고 가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구.”



능글맞게 대답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부루퉁한 얼굴을 한 레이디버그가 귀여웠는지 블랙캣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계속 나랑 손을 잡고 싶은 거야?”

“…!! 그런 거 아니거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뿌리치는 레이디버그에 블랙캣은 알겠다는 듯이 작게 웃더니 곧 잠잠해졌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지자, 마치 어둠 속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들고 있던 요요를 다시 적외선 안경으로 바꾸고 싶어지는 충동을 애써 이겨내면서 레이디버그는 작게 소곤거렸다.



“……블랙캣?”

“나 불렀어?”

“꺄악!”



다시 잡아오는 손과 더불어 장난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블랙캣이 키득거리며 레이디버그를 이끌었다.



“자, 어서 들어가자.”

“문 열었어?”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하하 웃으며 앞장서가는 블랙캣의 모습은 인정하기 싫지만 확실히 믿음직스러웠다. 블랙캣의 손을 꽉 잡으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그를 따라 4층으로 들어갔다.


4층으로 들어가자마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복도 끝에 보이는 메인 제어실로 달려갔다. 역시나 제어실의 문도 복도의 문과 마찬가지로 잠겨 있었고,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재빨리 발을 들어 문을 세게 걷어찼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들어간 레이디버그의 발에 뭔가가 걸렸다. 물컹한 감촉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엄마야!”

“으으윽….”



그것도 잠시, 밑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곧 그것이 사람의 다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아팠겠다, 세게 밟은 거 같은데. 저도 모르게 사과를 건넸다.



“괘, 괜찮아요?”

“레이디, 불을 켤 테니 잠깐 눈 감아!”



이미 이것저것 기계를 만지고 있었는지 다급히 소리치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눈을 꼭 감았고, 곧이어 블랙캣의 손이 전원을 올렸다.


전력소에 불이 켜지는 것과 동시에, 파리 시내에 다시 불빛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전력소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두웠던 밤의 바다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블랙캣이 툭 말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뒤를 돌아보자 동력실 근처에 쓰러져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직원들인지 다들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기 위해 몇 사람을 흔들어 깨웠지만, 아무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제어실 안에도 두 사람이 기절해 있었는데, 이들은 그래도 여파가 적었는지 금방 눈을 떴다. 그리고 그제서야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사정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전력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연기 때문에 모두들 정신을 잃고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 있던 두 사람도.


방금 전 파리 시내가 모두 정전사태에 빠졌다는 말을 꺼내자 두 직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됩니다. 분명 제어실 문을 잠가뒀는데, 어떻게….”

“확실해요?”

“물론입니다. 애초에 제어실 문을 아무렇게나 열어둘 리가 없잖습니까? 다들 쓰러지는 걸 보고 놀라서 재빨리 문을 잠갔는데 어째서 동력원이 내려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쇠는 저랑 이 친구 둘이서만 보관하고 있었는데요.”



옆에 있던 직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 두 히어로의 표정은 각각 달랐다. 레이디버그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인 반면에 블랙캣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칫 잘못했다간 더 큰 문제가 발생했을 거라 생각하니 정말로 오싹해지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 분은 누구시죠?”



직원들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블랙캣이 씨익 웃더니 레이디버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블랙캣이고, 여기 아리따운 아가씨는 레이디버그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예쁜 이름이죠?”

“오, 혹시 저번에 은행 강도를 잡아주셨다는 그…?”

“맞습니다. 다들 뉴스 좀 보시는 모양이네요.”



능청스레 대답하며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좀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하려다가, 블랙캣이 다음에 던진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는 입을 다물었다.



“더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저희는 이만 돌아가야 해서요.”



딱 좋게 빠질 타이밍을 만들어주는데 말을 잘못해서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으니까.



“하,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까봐 걱정하는 듯한 두 직원들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조금 더 남아서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블랙캣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화 좀 주시겠습니까?”



직원한테서 핸드폰을 건네받은 블랙캣이 번호 몇 개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수신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이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주고받다가 블랙캣은 핸드폰에서 귀를 떼고 손짓으로 레이디버그를 불렀다.



“경찰에 연락했어요. 전력소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뒀으니 아마 도움이 될 거예요. 레이디, 레이디도 한 마디 해줄래?”

“어, 나?”

“나보다는 레이디가 더 신뢰되지 않겠어?”



짓궂게 말하는 블랙캣을 살짝 흘기다가 레이디버그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받아들고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대하기가 어려운지 우물쭈물하면서도 열심히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가만히 지켜보는 블랙캣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불이 환하게 들어온 전력소 앞에서 작별인사를 건넸다.



“오늘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나야말로. 레이디를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아, 아니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운걸. 신경쓰지 마.”



밝게 웃으며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블랙캣.”



파트너로서.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레이디버그를 바라보는 블랙캣의 눈이 깜빡거렸다. 초록빛 눈동자가 커지더니 블랙캣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정말로 기뻐보이는 얼굴로 웃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얘가 왜 이러지?


블랙캣이 천천히 손을 뻗어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레이디버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방금 전에도 당했지만 더 정중한 태도에 당황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마이 레이디.”

“에? 마이 레이디라니….”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의 손을 놓고 뒤로 돌아섰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블랙캣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며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쟤 뭐야?”





한편, 남은 두 명의 직원들은,



“으악! 이거 손잡이가 왜 이렇게 된 거야?!”



4층 비상계단 쪽 문의 모습에 경악하고 있었다. 문 자체는 멀쩡한데 손잡이가 멀쩡하지 못했다. 다 녹아서 바닥에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문의 손잡이를 보고, 이건 대체 누구 짓이냐며 절규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두 영웅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도시로 향했다. 다시 활기차게 빛나는 파리 시내였지만 그들이 몸을 숨기면서 날아다닐 만한 어둠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흐음….”



그리고 그건 물론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도시의 하늘로 날아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골목 사이의 어둠 속에서 주시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눈물이 그려져 있는 무심한 눈동자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리네뜨는 곧장 변신을 해제했다. 후아, 한숨을 뱉으며 침대로 쓰러지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싱글싱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 마리네뜨! 역시 대단해~”

“아니야, 생각보다 잘 끝나서 되게 기분이 이상하던걸. 그나저나 블랙캣인가, 그 애가 티키 네가 말했던 동료야?”



그렇게 묻자 티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대지.”

“그럼, 아까 네가 느꼈다던 이상한 기운의 정체가 걔인가?”

“으음, 그건 잘 모르겠어. 비슷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게 뭐야.”



꽤 긴장이 풀렸는지 마리네뜨는 편안한 얼굴로 소리내어 웃었다.



“생각보다는 괜찮더라. 꽤 믿음직하고 말이야.”



좀 대하기 어려운 타입이기는 하지만. 웃으면서 기지개를 펴는 마리네뜨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티키가 한 마디를 꺼냈다. 



“하지만 마리네뜨.”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절레 고개를 내젓는 티키를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 행복하다는 듯이 뒹굴거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조금은 히어로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으음, 잘 모르겠어어어-.”



꼬르르륵-


갑자기 울리는 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티키가 배를 부여잡고서 난처한 듯이 헤헤 웃었다.



“그나저나 마리네뜨, 나 배가 좀 고파….”



변신을 하고 나면 기력이 다한다는 말이 사실이긴 사실인 모양이다. 마리네뜨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알았어, 지금 뭐라도 가지고 올게. 기다려봐!”



방에서 내려와 부엌 쪽으로 가니 마리네뜨의 어머니인 사빈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하고 냉장고에서 쿠키를 꺼낸 뒤 돌아가려던 찰나, 마리네뜨는 사빈의 다리에 크게 붙어 있는 반창고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엄마, 그 반창고는?”

“아, 이거? 아까 정전이 있었잖니. 촛불을 찾으러 가다가 좀 부딪쳤지 뭐야.”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는 사빈의 인자한 목소리와 달리 마리네뜨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그런 딸의 모습을 눈치챘는지 사빈은 달래듯이 마리네뜨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다행히도 손은 안 다쳤으니 내일도 문제없이 일할 수 있단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자기가 다친 것처럼 우울해하는 딸을 꼭 끌어안으며 사빈은 마리네뜨의 등을 토닥거렸다.



“우리 딸, 너무 걱정하지 말렴. 그런 표정 지으면 엄마가 더 가슴이 아프잖니.”


‘좀 더 빨리 정전이 해결되었다면, 엄마가 다치지 않았을 텐데.’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사빈의 품으로 파고드는 마리네뜨에게 사빈은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우리 공주님이 왜 갑자기 이렇게 어리광이 많아진 걸까~?”

“엄마. 나를 믿어?”

“믿지, 언제나.”

“그럼, 내가….”



다른 사람들을 구할 만한 사람이라고 믿어?


역시 말하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그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파리 시내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서는 간밤에 소동이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또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를 유유자적 걸어가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신문을 읽고 있지만 청회색 눈동자는 흥미로운 것을 찾았다는 것처럼 조용히 반짝거렸다.


펠릭스의 손에는 르 피가로(le Figaro)지 한 부가 들려 있었는데, 신문의 1면에는 간밤에 있었던 정전 사태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간략히 요약하면 정전이 발생했는데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수사를 촉구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기절했던 직원들을 검진했을 때 모두 강력한 수면 효과가 있는 성분이 발견된지라, 직원들에게 책임을 묻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현재 정전 사태의 원인을 찾기 위해 경찰에서 부단히 애쓰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펠릭스가 흥미롭게 보고 있는 기사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정전 사태에 관련된 기사 밑에 조그맣게 실려 있는 건, 간밤에 벌어진 또 하나의 대형 사건이었다. ‘노아 바자르’ 라는 이름의 70대 노인이 완벽한 밀실에서 살해당한 사건. 비록 정전 사태라는 큰 사태에 가려 살짝 묻히기는 했지만, 예술계에서 유명했던 노인의 부고에 이 기사를 쓴 기자도 안타까워하는 느낌의 논조를 사용하고 있었다.


천천히 길을 걸어가며 기사를 마저 읽고 있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누군가가 주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챘음에도 애써 무시하고 걸어가는 펠릭스의 곁으로 다가온 마리네뜨가 인사를 건넸다.



“펠릭스, 안녕!”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펠릭스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밝게 인사하는 마리네뜨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는 펠릭스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 마리네뜨가 고개를 들어 펠릭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저번처럼 아무런 답이 없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마리네뜨는 그저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내 이름은 마리네뜨야. 앞으로 잘 부탁해!”



뭐를 잘 부탁한다는 건지. 그렇게 묻기도 전에 마구 손을 흔들며 앞으로 뛰어가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왠지 앞으로 피곤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조용히 이맛살을 찌푸리자, 펠릭스가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재밌는 일이 생길 거 같은데~?”

“시끄러워, 플랙.”



조용히 하라고 중얼거리는 펠릭스의 손에는 검은색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난데없이 인사하더니 그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진 소녀를 떠올리며, 소년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상한 녀석.”





- 3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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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는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2편을 6월 말에 올리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여행 일정이 잡혀버려서 이제야 작업을 했네요.

일단 수량조사를 7월 7일에 먼저 올리고 선입금 폼은 7월 25일에 올리려고 예정을 잡고 있습니다. 제대로 마감을 다 마친다면요^_T...


하루에 한 편씩 7월 4일까지 6편 업로드를 마칠 예정입니다. 너무 빡센 스케줄이라 좀 골치가 아픈데 어찌어찌 하고는 있습니다 헤헤... 마감하고 나면 칭찬해주세요 흑흑 후기에 아주 영혼을 갈아넣고 있습니다ㅠ.ㅠ...


봄 에피소드를 모두 올리는 이유는 이 에피소드들이 프롤로그격인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사건은 여름부터 시작되며, 봄의 에피소드는 관계도에 대해 명시하면서 떡밥을 솔솔 뿌리는 정도거든요.


그리고 중요한 거.

영혼 없는 댓글 제발 좀 달지 마세요. 요즘들어 자꾸 이상한 댓글 다는 분이 느셨던데 안 다느니만 못합니다. 한 번만 더 이러시는 분들 나오면 그냥 티스토리 댓글을 닫거나 글을 아예 비밀글로 돌리겠습니다. 근데 이러고 싶지 않으니 제발 다들 매너를 지켜주세요. 댓글이면 다 기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의 무례한 생각이신거죠;


관심 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꼭 레이디버그 온리전에서 책을 들고 올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_T...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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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롤주의. 약 22500자




맨디님 그림 보니 떠오르는 썰이 있다.


호크모스 해치우고 새로운 빌런수장이 된 레이디버그! 최후의 싸움 때 블랙캣은 목숨을 잃었고 그걸 보고 폭주해 호크모스까지 죽게 하고 새로운 나비 요정에게 선택받은..


진짜 그 최후의 싸움 때 싸우던 장소는 모조리 쑥대밭이 되었고, 호크모스는 사라져 버렸으나 남아 있던 나비 요정이 그 자리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마리네뜨에 들러붙어 버림. 이 때 폭주의 여파로 미라클스톤은 부서졌고 티키의 행방도 찾지 못함.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변신하고, 자기 의지와는 달리 다른 장소에 와버린 마리네뜨는 경악함. 순간 정신이 들었는데 갑자기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기겁하지. 그런데 요정이 굉장히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제안을 해.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아?"


살리고 싶은 사람.

그 한 마디를 마리네뜨는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음. 자신의 눈 앞에서 쓰러지던 블랙캣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지. 그 전투 이후로 아드리앙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어. 아파서 못 나온다는 사유를 내걸고. 병문안을 가도 돌아오는 대답은,


‘도련님은 집에 안 계십니다.’


라는 비서의 쌀쌀한 대답뿐이고 병원이 어디냐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아. 마지막 싸움을 한 장소에 가도 거의 폐허가 된 장소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음. 호크모스의 시체조차 남지 않았는걸.


그에 절망한 마리네뜨는 결국 요정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호크모스가 되어 빌런을 만들기 시작해. 요정의 제안은 자신이 힘을 얻는 방법은 여러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사람의 공포를 먹고 자란다는 거였어. 어느 정도 힘이 모이면 미라큘러스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지. 솔직히 좀 소름끼치잖아 사람의 공포를 먹고 산다니;; 마리네뜨도 물론 기겁했지만 그 요정이 제안한 이야기는 차마 마리네뜨의 입장에선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


게다가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에 대한 엄청난 죄책감과 그의 상실로 인한 공허함을 같이 갖고 있었음. 둘도 없는 파트너이자 연인을 잃어버린 마리네뜨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지. 자포자기한 그녀는 결국 요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호크모스가 되어 파리를 위협하기 시작해. 연보랏빛 옷을 입고 등에 커다란 날개같은 펄럭이는 천이 돋아나 있는 모습으로 변신했고, 검은 나비를 만들 수도 있지만 등에 달라붙어 있는 천을 무한대로 조절해 상대를 겁박할 수 있어. 거미줄처럼.


겉보기는 우아한 공주님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리네뜨는 변신하면 자기 의지대로 몸을 막 움직일 수 없어; 그러니까, 요정의 의도를 벗어나면 자동적으로 결합된 요정이 그녀의 움직임을 막는 거. 마치 인형을 조종하듯이; 당연히 마리네뜨는 티키때와 달리 그 요정을 싫어해. 자기를 조종해서 이익을 챙기는 것도 그렇거니와 결국 이 요정때문에 블랙캣이 죽은 거나 마찬가진데. 그런데도 그런 요정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는 자신의 이기심이 너무 밉고, 언제나 사랑받던 레이디버그에서 모두가 욕하고 비난하는 빌런이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굉장한 스트레스와 자책감을 주지. 사실 변신했을 때는 요정의 영향인지 악행에 전혀 자책감이 없음. 근데 변신 풀리고 나면 진짜 자기 자신에 회의감이 밀려오는 거야.


내가 진짜 이런 짓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학교를 다니니까 주로 아이들의 어둠에 접근해 그들을 빌런으로 만들었고, 사실 아이들은 성숙하는 과정이라 어른보다 더 멘탈이 약하기에 한층 수월했지.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마리네뜨는 사람들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돼. 심지어 알리야한테조차.


알리야는 점점 어둡고 말수가 적어져가는 마리네뜨를 걱정하지만 언제나 마리네뜨는 괜찮다고 말하며 웃어넘기니 더 답답한 거. 빌런네뜨가 주로 서 있는 장소는 바로 에펠탑 꼭대기. 도도하게 에펠탑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지만 그 눈빛은 악당답지 않게 자못 슬퍼보여.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큰 변수가 생겼지.


아드리앙이 돌아온 거야.



그녀가 빌런이 된지 어언 3개월이 지난 뒤였어.


빌런활동까지 하느라 너무 피곤한 마리네뜨는 학교에서 엎어져 자는 일이 잦았어. 그래서 제 앞에 누군가가 앉는 것도 모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데,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네.'


명랑하고 익숙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비몽사몽한 와중에 뭐지... 하고 생각하다가 다음 순간 인지하고 홱 고개를 들어. 근데 정말 아드리앙이 앉아 있어. 이건 꿈인가? 하고 마리네뜨는 자기 손등을 꼬집는데 꿈이 아니야. 정말 다 떠나서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고 마리네뜨는 그의 이름을 불러.


"아...드리앙?"


그가 뒤를 돌아봐.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반짝이는 녹빛의 눈동자. 자신이 기억하는 그가 확실해. 살아 있었던 건가? 정말 복잡하게 굴러가는 마리네뜨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든 건 아드리앙의 그 한 마디였어.


"...미안하지만, 넌 누구야?"



아드리앙에겐 지난 1년간의 기억이 하나도 없었어.


사실을 조금 풀어놓자면, 블랙캣이 죽은 줄 알고 마리네뜨가 폭주했던 그 시기에 사실 블랙캣은 죽지 않았고 플랙의 가호로 간신히 숨은 붙어 있었음. 그러나 폭주한 미라클스톤의 파장으로 거기에 공명한 블랙캣의 반지도 어느 정도의 폭주 증상을 보였고, 그 후유증으로 히어로가 되었던 이후의 기억을 모두 상실한 거야. 빌런으로 변신된 마리네뜨가 터벅터벅 사라진 후에 블랙캣은 정신을 차렸지만 사실 그건 아드리앙의 의지라기보단 플랙의 의지였을지도 모르지.


길거리를 배회하던 블랙캣은 어느 순간 털썩 쓰러졌고 그제서야 변신이 풀리면서 상처투성이인 아드리앙의 모습으로 발견되었거든. 깨어나고 나서는 자기가 어떻게 거기 있었는지도, 어떻게 그런 상처를 입었는지도 몰라.


사실 재미있는 건 이 시점에서 파리에 새로운 레이디버그가 나타났다는 점이지. 티키가 무사했던 건가?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빌런을 조종할 땐 밖으로 나설 수 없고, 레벅의 정체를 모르는데 레벅을 찾아다닐 수는 없었지.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자신처럼 다시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슈퍼히어로로 활약해. 그에 마리네뜨는 굉장히 허탈감을 느껴.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구나.


나를 필요로 한 게 아니야. 그냥 영웅이라는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 씁쓸하고, 마음이 무거워져.


그리고, '진짜 자신'을 필요로 해 줬었던 한 사람의 존재가 떠올라. 네가 레이디버그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나는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던 그 상냥한 녹색 눈동자가 떠오르니까 정말 울고 싶은 거야.


사실 빌런네뜨의 모습으로는 마리네뜨는 거의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아. 그냥 무표정으로 도도하게 모든 일을 관망할 뿐. 왜냐하면 빌런네뜨의 모습은 마리네뜨 안에 있는 허무함과 무기력함을 극대화하는 변신이었거든. 그리고 새로운 레이디버그가 나타나면서 그녀의 어둠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하고, 빌런들의 능력도 그에 따라 강해지기 시작함. 사실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빌런네뜨로 서는 일이 몇 배는 힘들어졌어.


지금은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그리고 내가 지금 파리를 위협하는 빌런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나를 경멸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마리네뜨는 당장이라도 빌런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나비 요정은 우리 계약은 끝나지 않았고 지금 그만두면 당장 그 남자애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함. 마리네뜨에게 최우선은 아드리앙이었기에 죄책감을 가지고서도 마리네뜨는 억지로라도 빌런 일을 수행해. 문제는 빌런 상태에서는 가뜩이나 있던 감정도 심화되는데 마리네뜨의 스트레스가 도를 넘어가고 있었던 거지. 빌런네뜨의 표정변화는 점점 없어지면서 눈빛은 점점 침잠하기 시작함. 그런데도 요정을 믿을 수 없어서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을 돕겠다는 핑계로 그의 곁을 맴돌아. 그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서 문제가 뭐냐면,

기억을 잃고도 아드리앙이 레이디버그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알아챈 계기는 별로 대단한 건 아냐. 언젠가는 빌런이 생성된 곳에 아드리앙이 있었고 그 때 그가 레이디버그랑 마주쳤거든. 레이디버그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아드리앙의 표정에서부터 빌런네뜨는 모든 걸 읽었어. 그리고 제발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랬지.


그런데 새로운 레벅을 처음 마주친 이후로 아드리앙이 그녀에 대해 조금씩 묻기 시작한 거야. 주변에 가장 친한 친구가 마리네뜨와 니노밖에 없었으니까 이 둘한테. 니노는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데 듣고 있던 마리네뜨는 점점 괴로워져.


뭔가 낯설지 않은 느낌이야. 보고 있으면 그리운 느낌이 들어. 예전에 관련이 있었던 사람일까? 등등을 말하는 아드리앙에게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는지 몰라.


아니, 아니야. 그 여자가 아니야! 보지 마. 그 여자를 생각하면서 그런 표정 짓지 마!

...결국 네가 좋아한 사람도 내가 아니라, 레이디버그였던 것 뿐이야?


이 생각 하나가, 마리네뜨를 엄청나게 절망하게 만들어. 진짜 어느 정도냐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마리네뜨를 마리네뜨로 만들어주던 끈조차 끊어진 느낌. 그 정도로 그녀의 안에서는 아드리앙의 존재가 컸던 거야. 근데 그게 끊어졌지.


그러니 어떻게 됐겠어?


여기서 잠깐 사담을 하자면 블랙캣의 미라클스톤은 부서지지 않았어. 근데 고양이반지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음. 플랙이 깨어나지도 못한 채로. 아드리앙은 깨어났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물건이라 보석함에 고이 담아두고 쉽사리 꺼내지 않았고, 그래서 플랙이 오랜 시간 깨어나지 못했던 거지. 아드리앙을 마지막까지 보호하느라 플랙도 자신의 에너지를 한계치까지 끌어다 썼거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아드리앙은 다시 보석함을 열어 반지를 만졌고 그 때 다시 플랙이 깨어나 그를 블랙캣으로 만들지.


그리고 그는 새로운 레이디버그와 다시 같이 활동하기 시작해. 곁에 있고 싶다는 이유로.


...참으로 우습지. 기억을 잃고도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니. 다시 나타난 블랙캣에 빌런네뜨는 기겁할 만큼 놀라고, 다른 사람인가 싶었지만 그의 움직임을 보고 절망스러운 확신을 하게 돼. 그는 아드리앙이라는 걸. 자신과 활동할 때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거야. 차이점이라면 그녀가 레이디버그가 아니고, 그와 적대시하는 입장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 혼자, 그와 함께했던 모든 추억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빌런네뜨로서 계속 악당을 보내야 하면서도 마리네뜨는 악당을 보낼 때마다 블랙캣과 레벅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봐야 했고 그걸 볼 때마다 밤에 굉장한 악몽에 시달리게 됨. 그런데 우습게도 그런 마리네뜨의 우울함이 빌런을 더 강화시켰고, 어느 날은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구하려다 크게 다치게 돼. 그 모습을 보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경악하고, 빌런네뜨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에 동공만 살짝 커져. 블랙캣을 붙들고 걱정하던 레벅이 정말 무지막지한 속도로 빌런을 해치우기 시작하고, 쓰러진 블랙캣을 멍하니 보던 빌런네뜨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해.


///


얼굴에 느껴지는 촉촉함에 그녀는 살며시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매만졌다. 눈동자에 묻어나는 미지근한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 아..."


의미 없는 탄식을 토해내던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스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매가 일그러지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그러나 이례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오래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탓인지, 얼굴의 근육들은 격한 감정에 비명을 질러댔다. 고개를 푹 떨구고 그저 뚝뚝 눈물을 쏟아내던 그녀의 얼굴이 비참함에 일그러지며, 비명과도 같은 울음을 토해냈다.


"아, 아, 아아...."


감정을 표현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가엾은 빌런은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괴로움을 토해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하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입 밖으로 천천히 말을 토해냈다.


"싫..., 어...."


제발 그만해.


그를 상처입히기 위해 빌런이 된 게 아니야. 이런 추한 모습이 되어가면서까지 내가 바랬던 건 오직 하나뿐인데, 어째서. 어째서 나에겐 그것조차... 이것이 벌인가. 내가 그동안 해왔던 짓들에 대한?


그녀는 결국 비명을 토해내. 누군가 들었다면 분명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날카롭고, 슬픈 목소리로.


"싫어, 싫어, 싫어!!!!!"


펑펑 눈물을 쏟으며 그저 싫다고 몇 번이고 소리질러. 몇 번이고. 속으로도 중얼거리지.


그만두고 싶어. 그만하고 싶어. 이제 됐잖아. 충분하잖아.


난 할 만큼 했어. 정말, 정말 열심히 했단 말이야. 그런데 왜!!! 왜 너는 날 알아봐주지 않아?

왜, 왜 그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 거야.


이 와중에도 그가 그녀를 감쌌다는 사실에 질투하는 자신에 마리네뜨는 픽 웃을 수밖에 없었어.


정말로 추해졌구나, 나.



///


한편, 블랙캣의 상처는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어 다행히도. 하지만 아드리앙은 어쩔 수 없이 병원에 한 3일은 입원하게 됐지. 기억을 잃었을 때도 그랬지만 아드리앙은 병원을 굉장히 싫어함. 원래 일주일인데 3일로 타협한 거기도 하고. 일단 학교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고, 회사 관계자들도 찾아와.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로 아드리앙이 실질적으로 회사 쪽에 손을 대고 있었거든. 1년간의 기억만 없지 다른 지식들은 모두 멀쩡하니까. 여전히 까망베르 치즈를 찾는 플랙에 아드리앙은 귀찮아하면서도 나탈리에게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음. 그 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려(아드리앙의 병실은 개인실). 들어오라고 하니까 과일 바구니와 봉투 하나를 든 마리네뜨가 안으로 들어와. 아드리앙은 그녀가 왠지 꽤 반가웠어.


일단 기억을 잃고 자주 같이 어울리기도 한 친구고, 사실 아드리앙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리네뜨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거든. 다만 기억은 나지 않아서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야. 다만 이상한게 니노랑 달리 마리네뜨에게선 어딘지 불편하고 꺼려지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어. 그 감각의 정체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친하게 지내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둠. 다만 마리네뜨가 가끔 살짝 웃을 때 괜히 신경이 쓰여.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듯 웃는 얼굴이 그녀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


좀 더 밝게 웃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라는 느낌이랄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근데 레벅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굉장히 그리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받아. 그래서 아드리앙은 그녀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거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리네뜨도 눈에 밟혔지.


솔직히 감정에 대해 아주 확신하지는 못했는데, 뭐 그래도 이 심심한 병실에 그나마 좀 얘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와준 게 어디야. 니노는 어젠가 왔었고. 과일바구니를 옆 책상에 내려놓은 마리네뜨가 가지고 온 작은 봉투를 아드리앙에게 건네.


아드리앙이 물어.


"이게 뭐야?"


마리네뜨가 담담히 대답해.


"필요할 거 같아서."


의아한 얼굴로 봉투 안을 열어봤는데 단번에 고약한 냄새가 풍겨. 뭔지 단번에 알았지. 까망베르 치즈. 아드리앙이 멍하게 물어.


"...어떻게 알았어?"

"뭐라고 했어?"

"아, 아니."


다행히도 제대로 듣지 않은 모양이야.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아드리앙은 감사히 치즈를 받아들어.(플랙은 이미 숨어들었음) 그리고 의자에 앉은 마리네뜨한테 그날 수업에 대한 소식과 통신문을 받아.


학부모 발표회 관련.


아드리앙의 표정이 단번에 쓸쓸하게 구겨짐. 그런 아드리앙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통신문을 건네주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왜 그런 표정을 하냐고 물어. 마리네뜨가 대답해.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그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아. 잠깐의 침묵 끝에 마리네뜨가 다시 입을 열어.


"상처는..."

"아, 괜찮아. 별 거 아니야."


금방 퇴원할 수 있어. 가볍게 대꾸하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가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어버림.


"그 상처가 사흘만에 낫는다고?"

"응?"


되묻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낭패라는 얼굴로 눈을 데록데록 굴림. 그에 아드리앙은 좀 이상하게 생각해. 마치 자신의 상처를 잘 알고 있다는 투잖아.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제 주치의랑, 또 한 명.


"...레이디버그?"


정말 아무 생각없이 말을 뱉어내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자기가 무슨 말을 인지했는지 떠올린 아드리앙은 제가 한 말에 경악해. 아니아니아니 잠깐. 나 지금 말실수한...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하게 마리네뜨를 쳐다보고 있는데, 조금 놀란 듯했던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의 표정에 그 속을 짐작했는지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


"갑자기 웬 레이디버그 얘기야? 실없게."


거짓말.


아드리앙은 본인이 그렇게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마리네뜨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보였어. 근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단순히 그녀가 레이디버그다, 라고 생각하기엔 제가 아는 레이디버그가 그녀와 너무 달랐으니까. 제가 아는 레이디버그는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똑부러지고 강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기서부터 갑자기 아드리앙은 뭔가 이상함을 느껴. 뭐지? 자기가 알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이미지가 어딘지 모르게 모순되는 점이 있는 거야. 어떨 때는 왠지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또 어떨 때는 굉장히 강인하고 자신의 앞에서 달려나가는, 어떨 때는 정말 순수하게 웃으며 제게 애교스럽게 달라붙었던 것 같은데... 뭔가 다가가려고 하면 막 떼어내고 밀어냈던 것 같기도 해. 불퉁한 표정이었던가? 내가 그녀에게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나?


자, 여기서 이제 기억에 혼란이 오기 시작함. 뭐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기억이 이렇게 꼬여 있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정말 다 같은 사람일까?


정말 딱 한 순간에 떠오른 사실에 아드리앙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려. 놀란 표정으로 주먹을 정말 꽉 쥔채로 경악한 표정을 짓고만 있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봐. 그리고 불러.


"아드리앙?"

"...어?"


아드리앙은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드는데, 그 부름이 익숙하다고 생각한 자신에 놀라. 그와 동시에 머리가 미친듯이 아파오기 시작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엄청나게 놀라서 다가가 손을 대려는 순간 아드리앙이 멋대로 휘두른 팔에 손이 탁 쳐짐. 마리네뜨는 그 순간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아드리앙은 그런 마리네뜨 표정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그 와중에도 두통이 너무 심해서 아드리앙이 간신히 입을 열어서 띄엄띄엄 말해.


"미안, 오늘은 이만 돌아가줘."

"너, 괜찮아? 의사 선생님은.."

"...안 불러줘도, 돼."


너무 아파서 겨우겨우 말을 잇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얼굴로 침대 옆에 있던 인터폰으로 주치의를 호출함. 그리고 말해.


"나 이만 갈게. 넌 이렇게 안 하면 또 혼자 아파하다 말 거 같으니까."


치료 잘 받고 빨리 나아.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바람처럼 병실을 나가고,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던 아드리앙의 표정도 황망해짐. 그런 와중에 두통이 어느 정도 가신 것을 알아채고 놀란 얼굴로 제 손바닥을 쳐다봄. 식은땀이 묻어 축축히 젖어있는 손바닥을 이불에 슥슥 문지르고, 아드리앙은 방금 전 마리네뜨의 태도에 대해 고민해. 왜 그렇게 말한 걸까.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친한 사이긴 했지만 뭔가, 좀 다른 느낌이었던 것 같았는데. 두통은 매우매우 아팠지만, 지나고 나니까 뭔가 머릿속에 쓰여 있던 안개가 살짝 걷힌 느낌이야. 생각이 좀 더 명확해졌어. 떠오르는 것들도 있고. 잠시 후 의사가 와서 이것저것 물어본 뒤에 결론을 말해줘.


"혹시,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잊었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어서 가벼운 기억 충돌이 발생한 거 같다고 의사는 허허 웃는데, 그 말에 아드리앙은 안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불안해져. 왜냐하면 방금 전의 두통은 레이디버그를 생각할 때 발생했었으니까. 그녀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때 머리가 아팠고, 그렇다는 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레이디버그가 있다는 건데, 그 때도 그녀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걸까.


그렇게 결론을 내고 싶지만 아드리앙은 뭔가 굉장히 찝찝해. 의사가 나가고 아드리앙 가방 속에 숨어 있던 플랙이 튀어나와. 까망베르 치즈~! 하면서 달려들려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은 치즈통을 들고 물어봄.


"플랙, 나 예전에도 레이디버그랑 같이 활동했었어?"


치즈를 들고 위협하는 아드리앙을 가만히 쳐다보던 플랙이 킬킬 웃기 시작하더니 아드리앙의 주변을 휘잉 돌아.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플랙이 정말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말해.


그걸 이제야 물어봐?


당연히 플랙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죠 암요 ㅇㅇ 플랙이 긍정의 대답을 해주자, 그 한 마디에 멍-해져서는 왜 근데 이때까지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이 장난스럽게 말함.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대답해줘야 할 이유는 없잖아?


사실은 아드리앙이 혼란스러워 할까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지만. 아무튼 그래서 아드리앙은 플랙한테 물어. 혹시, 내가..


"그녀를 좋아했었어?"

"그랬지."


아주 좋아죽겠다고 하면서 시도 쓰고 꽃다발도 갖다바쳤다니까? 투덜거리는 플랙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드리앙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해. 무엇보다 너무 찝찝해. 그래서 넌지시 물어봐.


- 니가 알던 레이디버그는... 어땠어?


그 말을 듣고, 플랙은 아드리앙이 건네준 치즈를 꿀꺽 삼키면서 킬킬거려.


- 그건 니가 판단할 문제 아니었어?


알아서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플랙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아드리앙은 얼굴을 찡그려. 사실 자신이 레이디버그를 좋아했었다는 것보다도 더 신경쓰이는 건 레이디버그를 보며 떠올리는 왠지 모를 위화감. 그런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는 다시 빌런을 상대하러 나갔을 때, 제 옆에 있는 레이디버그를 유심히 관찰해. 아,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당당하기도 한데 어딘지 가냘퍼 보이고 애교도 많은 성격이었음. 자신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는 레벅한테 블랙캣은 굉장한 위화감을 느껴. 늘 했던 행동인데 왜?


그래서 그녀의 손을 마주잡지 못하고, 그냥 레이디버그한테 넌지시 물어봐. 우리 예전에도 같이 활동한 적 있었냐고. 레이디버그는 살짝 놀란 눈치더니 밝게 웃으며 대답함.


- 무슨 소리야? 우리 아직 만난지 얼마 안 됐잖아?


진짜 그 순간 블랙캣은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저도 모르게 표정이 싹 굳어.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과 달리 엄청나게 심각한 얼굴이 되어버린 블캣에 레벅은 의아해하고, 빌런을 다 퇴치하고 나서도 블랙캣의 싱숭생숭한 기분은 여전해.


헤어진 뒤에, 블랙캣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 변신을 풀려고 했는데 그 순간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나.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여자는 보기에도 꽤나 차림새가 특이했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보랏빛에 등에는 커다란 천이 나비처럼 쫙 펴져 있고.


그냥 악당이라 간주하기엔 분위기가 좀 이상해. 막 공격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제게로 다가오는 걸음걸이는 우아하기 그지없었어. 무엇보다 시선. 부드럽게 웃는 푸른 시선에 블랙캣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제게로 걸어오는 걸 마냥 지켜봐.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타입이었달까. 딱 그의 앞에 서서는 여자가 살짝 웃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거야. 근데 익숙한 느낌이야 어쩐지. 눈동자도 그래. 분명 처음 보는데, 처음이 아닌 거 같은 느낌.


여자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어리고, 그와 동시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밑으로 살짝 끌어당겨. 블랙캣은 자신의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려앉는 걸 느끼고 눈을 크게 뜨지만, 밀어낼 생각같은 건 하지 못하지. 눈을 감은 여자랑 달리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짧지만 긴 입맞춤이 끝난 뒤에, 보랏빛의 여인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의 놀란 얼굴을 어딘지 슬프게 쳐다보는 것 같다가, 킥킥 웃으며 말해.


"빈틈이 많네. 도둑고양이 씨."


라고 말하며 그를 세게 골목 밖으로 밀쳐냄.


밀려난 블랙캣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골목에는 아무도 없어. 그리고 이 때부터 블랙캣은 그 여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돼. 레이디버그하고 있을 때는 편안하고 즐겁지만 단지 그 뿐인데, 그 여자를 보고 있을 때는 심장이 조여들었거든.


옷차림을 봐서는 히어로인가, 싶다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야. 그럼 빌런인가? 적이라고? 상황만 보면 그게 더 맞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서 적대감을 느끼지는 못했어. 정말 꼼짝도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그 여자를 마주하고 느꼈음. 그런데도 계속 떠오르는 거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는 자신에 기겁하며 아드리앙은 베개를 쾅쾅 내리쳐. 엎어져서는 웅얼거리는 아드리앙을 보며 그러든 말든 치즈나 꺼내먹고 있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이 물어.


"플랙."

"왜?"

"내가 미쳤다고 하면 어쩔래?"

"이미 지금도 정상이 아닌데~?"

"..니가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또 그러는구나~ 하겠지? 뭐야, 무슨 미친 생각이라도 한 거야?"

"아, 아니."


얼버무리며 아드리앙은 다시 얼굴을 침대에 묻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는 불길해서일까 설레서일까.


그 후로 아드리앙은 멍때리는 일이 더 잦아짐.


한편 마리네뜨는 그 병원 일 이후로 묘하게 아드리앙을 피해. 만나서 인사하고 이런 건 좋은데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아드리앙은 요즘 마리네뜨가 자주 안 보인다는 건 알고 있어. 그때 내가 너무 매정하게 말했나? 싶어서 괜히 안절부절 못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복도에서 마리네뜨를 딱 마주쳐. 아드리앙은 놀라는데 마리네뜨는 홱 시선을 피함.


사실 마리네뜨가 피하는 건 병원 일이 문제가 아니라 빌런네뜨가 되었을 때 키스했던 게 양심에 찔려서...


초반에도 말했지만 빌런으로 변신하면 그 동안은 감정이나 성향이 좀 격해지는 부분이 있음. 그리고 죄책감이 없지. 그 골목에서 키스했던 것도 거의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일이라 변신 풀리고 나서 밤에 이불킥 팡팡하고 아드리앙 얼굴 차마 못 보겠어서 마구 피한 건데 타이밍이 매우 안 맞았던 거죠.


대놓고 피하면서 후다닥 제 옆으로 지나가려는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자기 옆으로 지나가는 마리네뜨 팔 붙잡고 빈 교실로 끌고 들어가. 마리네뜨는 발버둥치지만 현실에선 아드리앙을 힘으로 이길 수 없지. 힘없이 끌려가면서 아드리앙을 다시 보는데 괜히 울컥해. 그가 돌아온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여전히 가슴에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야. 보고 있으면 아픈데 빼내면 죽을 거 같아서 빼낼 수가 없는.


교실에 끌려 들어와서 무슨 용건이냐고 묻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할 말이 없어. 왜 자기가 이런 행동을 했는지도 몰라.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 너 요새 왜 나 피하냐고. 마리네뜨는 대답 못함. 그냥 난 너 피한 적 없다고 하고 나가려는데 벽을 짚는 아드리앙 손바닥이 마리네뜨 바로 앞을 탁 가로막아. 그 때 병원에서 내가 네 손 쳐내서 그런 거냐고 물어보는데 마리네뜨는 그건 생각지도 않고 있었어서 어? 무슨 일? 하고 당황하는데 아드리앙은 그녀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음.


근데 그거랑 별개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자기가 손을 쳐냈을 때 마리네뜨의 상처받은 표정. 그 때, 자기가 느꼈던 감각이 떠오른 거야. 심장이 멈추는 듯한 순간의 충격은, 자신이 얼마 전에 만났던 그 여자의 미소를 봤을 때 느꼈던 감각이랑 매우 비슷함. 그거에 충격을 받은 아드리앙이 마리네뜨를 다시 한 번 훑어봐. 얘가? 설마. 설마. 설마. 그럴 리 없어. 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아드리앙의 이마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고, 그 감촉에 아드리앙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마리네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그의 이마에 짚고 있어. 열은 없는데. 라고 말하는 마리네뜨의 손이 너무 차가워서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마리네뜨의 손을 붙잡아.


"너 어디 아파?"

"응?"

"손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그 말과 함께 단호히 손을 뿌리치는 마리네뜨의 얼굴도 자세히 보니 꽤 안색이 안 좋아. 아드리앙은 당초의 목적을 잊고, 역시 병원가보는 게 어떠냐고 걱정하는데 마리네뜨가 그 순간 소리질러.


"내버려 둬!!"

"..."

"너랑은 상관없잖아!!"


깜짝 놀란 그를 홱 노려보고서 마리네뜨는 재빨리 교실에서 나가버림. 뒤에 남은 아드리앙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기가 잡은 손의 감촉을 떠올려. 말랑말랑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 성격이랑 달리 의외로 연약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느낌이..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얼굴이 더워지기 시작해. 어, 어? 하면서도 얼굴이 새빨개지는 거야. 허둥지둥 얼굴을 탁탁 때리는데 품속에서 나온 플랙이 깔깔거리면서 비웃음. 너 레이디버그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하고 약올리는데 아드리앙은 걍 패닉.


마리네뜨와 레이디버그, 그리고 그 의문의 여인.


뭔가 떠오를 듯 말듯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아. 그럼에도 이 상황 자체가 위화감이 쩔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날은 빌런을 처치하러 다시 나서는데, 빌런이 이번에는 두 명임. 남매였어.


각각 한 명씩 맡아서 상대하고 있는데 빌런들이 요즘 너무 강해서 혼자 상대하기가 버거움. 그런데 이상한게, 자기가 상대하는 빌런이 어딘가 이상한 거야. 막 공격하려다가도 자꾸 멈추고, 멈추고. 레벅 쪽을 힐끗 봤지만 그녀가 상대하는 빌런에는 그런 현상이 없었어. 그에 블랙캣은 누군가 이 빌런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주위를 둘러봄. 그 틈을 타서 악당이 그를 내리치려고 했는데 얼굴에 빌런마크가 뜨면서 몸이 딱 멈춰. 그리고 그 순간, 블랙캣은 무언가 빛이 반짝이는 걸 눈치채.


에펠탑 꼭대기.


그걸 보자마자 블랙캣은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레이디버그에게 신호함. 재빨리 달려들려는 빌런을 후려친 뒤에 레벅을 안고 봉을 늘려서 지붕 위로, 지붕 위에서 다시 봉을 늘린 뒤에 에펠탑으로 기울여. 꼭대기에 무사히 착지! 한 블랙캣은 고요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빌런네뜨를 보고 당황해. 그 때 자기한테 키스했던 여자!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에 빌런마크가 떠 있음. 블랙캣의 옆에 선 레이디버그가 그녀에게 물어.


넌 누구야?


빌런네뜨는 말이 없음. 그래서 블랙캣이 다시 묻지.


당신이 파리에 악당을 만들어내고 있는 녀석이야?


하니까 빌런네뜨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어. 단 이건 빌런네뜨 입장에선 자기 자신을 위한 조소였지만 두 사람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지. 긴장한 얼굴을 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러자 빌런네뜨 등 뒤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천이 의지를 가진 듯 움직이면서 덤벼드는 두 사람을 가볍게 쳐냄. 뒤로 내동그라진 두 사람이 저 천은 대체 뭐냐고 기겁하는데, 천이 다시 매섭게 늘어나면서 두 사람에게 덤벼서 꽁꽁 묶어버림. 빌런네뜨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천이 매섭게 두 사람의 몸을 옥죄기 시작해. 점점 숨이 막혀가서 둘 다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하는데도 천은 꼼짝도 하지 않고 찢어지지도 않아. 끙끙거리며 천을 풀어내려는 레벅과 달리 블랙캣은 그 와중에도 빌런네뜨를 계속 쳐다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는데, 블랙캣은 이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저 녀석은 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함. 자신을 보는 눈동자에 적의가 없어. 뭔가 숨은 점점 막혀가는데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음.


그 순간, 그녀가 몇 번 망설이듯 눈동자를 깜빡여. 동시에 블랙캣을 조였던 천의 움직임이 아주, 아주 살짝 느슨해짐.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들고 있던 봉을 늘려서 자신의 움직임을 잡고 있는 빌런네뜨의 등 바로 뒤에 붙어있는 천을 눌러버림. 역시 거기가 축이었는지 천이 확 풀리고, 빌런네뜨가 행동할 틈도 없이 블랙캣은 재빨리 달려들어 그녀 앞으로 파고듬. 휙,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바로 앞까지 파고든 블랙캣이 빌런네뜨를 올려다보는데 무표정한 얼굴이 당황한 것처럼 시선을 피함.


그리고 그녀의 팔을 오른손으로 세게 붙잡아.


그런데 얄궂은 운명처럼, 그 팔을 잡자마자 블랙캣은 그 손의 감촉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너무 선명하게 깨달은 거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는 더 이상 행동하지 못하고 그녀를 마냥 올려다봄.


빌런네뜨도 덩달아 꼼짝하지 못해. 저번에는 기습적으로 당해서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녀의 모습이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겹쳐 보여. 자신을 두려워하는 듯한 푸른빛 눈동자를 가까이서 보았을 때야 블랙캣은, 어딘지 모르게 원망하는 듯한 그 시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정말 명확하게. 정말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는 경악한 눈빛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어.


"마...리네뜨?"



///



"마...리네뜨?"


순간의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빌런네뜨는 팔을 뻗어 그를 세게 밀어내. 마치 그 골목에서 키스한 뒤 자신을 세게 밀쳐냈던 것처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던 그녀가 에펠탑 아래로 떨어져. 깜짝 놀라서 후다닥 달려가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는 보이지 않아.


홀연히 사라져버린 빌런네뜨의 잔상을 쫓던 블랙캣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뒤로 돌아가 쓰러져있는 레이디버그를 일으켜.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저건 대체 무슨 괴물이냐고 말하는 레벅에게 블랙캣은 차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어서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해. 변신을 풀고 집에 와서 고민과 착잡함에 추욱 늘어지는 아드리앙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떠다녀.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그건 분명 마리네뜨가 확실하다는 어떠한 확신이 머릿속에 있어.


마리네뜨가 이제껏 빌런들을 만들어서 파리를 위협한 악당이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는 이유 모를 배신감에 화가 나. 절대 아닐 거 같다고 믿고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그 다음에 드는 건 의문이야.


도대체 왜?


그가 아는 마리네뜨는 상당히 조용하지만 의사 표현 확실한데다, 조금 감정이 격해질 때는 있지만 사람을 잘 배려해주는 좋은 아이- 라는 인상이었거든. 기억을 잃고 돌아온 자신을 여러 면에서 도와준 것도 그녀였고. 반에서도 평판이 매우 좋고.


그런 그녀가 왜 굳이 빌런이 되어서 파리를 위협하는 걸까. 굳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이득을 얻으려는 타입은 아니어 보였는데 다 연기인 걸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 그런데 자신한테 키스는 왜 한 거지? 뭔가 이유가 있나? 갑자기 그 때 기억이 떠오르니까 입술에 닿았던 감촉까지 떠올라서 아드리앙 얼굴도 좀 붉어짐. 아아아악 비명을 질러대는 아드리앙을 플랙이 안쓰럽다는 눈으로 쳐다봐. 드디어 미쳤냐는 듯이.


"쯧쯧, 그러게 말했잖아. 그런 가면 쓴 여자보단 치즈가 더 최고라니까~?"

"시끄러, 플랙. 몇 번을 말했지만 나한텐 그녀밖에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아드리앙은 하려던 말을 뚝 멈춰.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몇 번을 말했다고?


아드리앙은 이제껏 레이디버그에 대해 직접적인 연심을 표출한 건 아니었거든. 그녀를 좋아하긴 하지만 사랑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의문의 여자를 상대로도 그런 적 없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드리앙이 날아다니는 플랙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아. 으아아~!! 하고 비명을 지르는 플랙한테 아드리앙이 진지하게 말해.


"너, 뭔가 알고 있지?"


어서 말해!! 다그치면서 플랙을 마구 흔드는 아드리앙 때문에 플랙은 어지러워 죽을맛. 알았다고 소리치니까 그제서야 아드리앙이 플랙을 놓아줘. 플랙이 켁켁거리다가 장난스럽게 말해.


"예전에 네가 같이 다녔던 레이디버그가 그 여자야."

"...뭐?"


엄청난 사실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는 플랙에 아드리앙은 진짜 진심으로 패닉이 온ㅋㅋㅋㅋ 솔직히 아무 기억도 안 나는 상황에서 저런 말은 정말 폭탄선언이지. 짐작은 했었는데 그녀가 정말 제 잃어버린 기억 속의 레이디버그였단 말이야? 근데, 그럼.


대체 그녀가 왜 악당이 된 거지?


플랙에게 물어도 나는 거기까지는 모르겠으니 니가 직접 물어봐~ 라는 대답만 들음. 열은 받지만 맞는말이라 아드리앙은 내일 그녀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하고 잠이 들지.


하지만, 다음 날부터 마리네뜨가 결석하기 시작함.


처음에는 아파서 못 나온다는 말에 기다리자고 생각했지만 3일 넘게 안 나오는 마리네뜨에, 결국 아드리앙은 병문안을 목적으로 마리네뜨 집으로 찾아가. 아드리앙에게 다행인 건 이 때 마리네뜨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셨다는 거지. 일정이 있어서 밖에 나가계심.


누군가 싶어 나가봤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아드리앙을 본 마리네뜨의 안색이 좋지 못해. 얼굴이 핼쓱한 걸 보니 진짜 아팠나 싶어서 아드리앙은 걱정함. 마리네뜨가 곧장 문을 닫으려고 하니까 한 발을 문 사이에 들이밀고, 그대로 비집고 들어와.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서 문에서 손을 떼. 아드리앙이 다칠까봐.


진짜 아팠나 보네. 라고 말하면서 능청스레 대꾸하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가 물어.


"여기 왠일이야?"

"말했잖아, 병문안이라니까."


저번에 네가 와준 답례로. 라고 말하며 아드리앙은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선물상자를 딱 내밀어서 마리네뜨에게 건네줘.


뭐냐고 물으니까, 이럴 땐 뭐 사와야 하는지 몰라서 대충 괜찮다고 추천받은 거 사왔다고 머리를 긁적이는 아드리앙은 이 와중에도 잘생겼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아드리앙을 거실로 데려와.


뭐 마시겠냐고 묻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잠깐 고민하다가 곧 직구를 던짐.


"니가 그 '여자'야?"


냉장고를 열려던 마리네뜨의 손이 우뚝 멈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알잖아, 무슨 소리인지."

"정말 몰라."

"사흘 전쯤에 나랑 만났었지? 에펠탑 꼭대기에서."

"…글쎄."


여전히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마리네뜨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어. 들켰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마리네뜨는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을 뿐.


아드리앙이 한숨을 쉬면서 말해.


"…그럼 일단 질문을 바꿀게. 몸은 괜찮아?"

"괜찮아. 가벼운 감기니까."


진짜 아팠는지 마리네뜨는 잠옷 차림인데 얼굴도 살짝 붉었어. 아드리앙은 가만히 사과해.


"멋대로 찾아온 건 미안하게 생각해. 좀 초조했거든."

"…뭐가?"

"어?"

"뭐가…, 초조한데?"

"네가 거기서 떨어져서, 크게 다쳤을까봐."


마리네뜨는 입을 꾹 다물어. 다정한 그 한 마디에 자꾸 심장이 울컥하니까. 저 말들이 그저 친구로서 사소한 걱정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확신하고 있는 거 같지만. 끝까지 부인하려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다시 한 번 물어.


"왜… 그런 거야?"

"…"

"왜 악당들을 만드는 거야? 목적이 뭐야. 내가 아는 너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드리앙은 말꼬리를 흐려. 그에게서 뒤돌아서 있던 마리네뜨는 그 순간 냉장고 문을 쾅 닫고, 앞으로 홱 돌아서 아드리앙과 시선을 맞추고 그에게로 걸어와. 그와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문지방 위에 서서 아드리앙한테 말해.


"왜 그렇게 말하는데?"

"뭐?"

"네가 아는 나는 어떤데? 기억이 돌아오긴 했어?"

"아니, 그건 아직…"


확 기세가 변한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매우 당황해.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는 정말 화난 것 같은 얼굴로 또박또박 따져.


"내가 무슨 이유로 이러고 있냐고 물었지. 그걸 알면 뭔가 달라지기라도 해?"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드리앙에게 울컥했는지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함.


"왜 이러는 거야."

"…"

"내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마리네뜨?"

"난 네가 너무 미워."


밉다는 그 한 마디에 아드리앙의 어깨가 살짝 튕겨 올라갔다. 마리네뜨는 조소했다.


"그런 어중간한 상냥함이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생각해보긴 했어?"


차라리 미워하고 경멸하고 화를 내. 왜 이유를 묻는 거야. 왜 나한테 그런 식으로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거야? 왜 기대하게 해?


네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면서-.


마리네뜨가 허탈한 듯이 중얼거려. 지친 목소리로.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넌."


모든 추억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외롭고 슬픈 일이다.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역시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리네뜨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한 줄기에 아드리앙은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랐지만, 마리네뜨는 점점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와 별개로 입술은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이젠 지긋지긋해!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혼자 기억하는 건-!!"

"마리네뜨, 진정해. 저기, 잠깐만-."


다가와서 제 두 팔을 붙잡는 아드리앙의 손을 마리네뜨는 거세게 뿌리쳤지만 꼼짝도 안해.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진짜 발을 써서 아드리앙의 무릎을 세게 차니까, 윽 소리를 내며 아드리앙은 손을 놓아줌. 손자국이 날 정도로 제게 붙잡혔던 팔을 감싸고 뒤로 물러나면서, 마리네뜨가 말해.


"돌아가."

"잠깐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마리네뜨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어. 소름끼칠 정도로 억양 없는 목소리.


"너는 히어로, 나는 악당."

"…"

"우리 사이는 그것뿐이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등을 돌리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버려.


거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아드리앙의 표정은 그저 멍해. 폭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야. 위층에서 들리는 콜록콜록 기침소리에 번뜩 정신이 든 아드리앙은 마리네뜨가 올라간 계단 쪽을 망연히 쳐다봐. 한참 뒤에 마리네뜨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니까 식탁 위에 봉지가 놓여 있네. 뭔가 싶었더니 각종 감기약이랑 비타민이야. 휘갈겨진 메모가 하나 있어. 두 손으로 펼쳐서 읽어봐.


[잠시 휴전이야.]


제 딴에는 걱정되서 약을 사왔지만, 그냥 두고 가면 안 먹을까봐 저렇게 적어놓은 거지. 마리네뜨의 손에 들린 메모가 살짝 구겨져.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


“진짜 멋없네. 핑계도 이런 거나 대고 말이야….”


마리네뜨의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해. 차라리 그를 미워할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악당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 그리고 역시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아드리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리고 아드리앙은 정말 진지하게 기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해. 그녀가 빌런이 된 이유는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 속에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에.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지금 같이 활동하는 레이디버그는 절대 자신에게 정체를 밝히려고 들지 않아. 더 이상한 건 레벅이 제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챈 거 같다는 점이야. 이건 일단 접어두고, 아드리앙은 어떻게든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서 플랙을 추궁해. 단서를 가진 놈이 이놈밖에 없잖아. 플랙은 굳어 있는 아드리앙의 표정을 보고 이제야 좀 알고 싶어졌냐고 물으면서 과거의 일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해주기 시작해.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얘기 뿐이야. 예전에 자신이 마리네뜨랑 사귀는 사이였고, 예전에 싸우던 빌런 때문에 죽을 위기까지 갔었다니. 플랙은 그 빌런이 너희 아버지였다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설명을 들으니까 대충 마리네뜨의 태도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 하지만 빌런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감을 못 잡겠어. 끙끙거리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은 낄낄거리며 물어.


뭘 그리 고민해?


"그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조금쯤은 알 것 같기도 한데~?"

"마리네뜨 입장에서?"

"너라면 어떻겠어?"

"…"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3개월이 넘게 비밀에 부쳐졌었다고 했잖아?"

"그렇지."


순순히 인정하자 플랙이 다시 질문을 던져.


"만약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봐."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편한 상대인 마리네뜨를 떠올렸다. 그녀가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욱신거리는 심장에 속이 안 좋다. 토할 것 같았다.


아마 엄청 슬플 거야.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가, 나중에서야 베갯잇을 붙들고 조금이나마 울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아닐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 같은 느낌…


…?!


아드리앙의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생각이 있어. 소년의 얼굴이 쓸쓸하게 일그러지며 힘없는 어조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해.


"무척 마음이 아플 거야."

"그래?"

"펑펑 울지도 몰라."

"우와, 꼴불견이네~!"

"삶이라는 게 다 부질없게 느껴질지도."

"우웩, 그거 참 느끼하네."

"…빌런이 되었어도, 상관없었던 걸까."


자만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 말을 힘없이 덧붙이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은 니 알아서 생각하라고 말하며 다시 치즈를 집으러 치즈가 담긴 통으로 날아가. 아드리앙은 쓰게 웃어. 하지만 이건 모두 다 추측일 뿐이니까, 결국 다시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피할 걸 알지만. 그런데 마리네뜨는 의외로 다시 학교에 계속 나와. 그에 안심하면서도 그녀를 어째야 하나 아드리앙은 고민해. 어쨌든 빌런이고 자신이 물리쳐야 하는 상대잖아. 시간을 끌수록 희생자는 계속 나올텐데.


한편 레벅은 블캣한테 물어봐. 너 요즘 뭔가 숨기는 거 있냐고.


빌런 잡을 때도 설렁설렁이고 어딘가 정신이 딴 데로 가 있는 거 같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에게 필요 이상의 스킨십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었지만 레벅은 굳이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블캣에게 레벅은 웃으면서 말해.


"거짓말하지 마. 뭔가 켕기는 듯한 얼굴 하고는."

"에이, 난 언제나 솔직하다구?"

"…저번에 만났던 그 여자, 너 혹시 짐작가는 사람 있어?"

"? 없지. 그건 왜 물어봐?"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지만 블랙캣은 속으로는 매우 찔려해. 레벅이 말해. 짐작가는 거 있으면 말하라고. 더 이상 악당들이 설치게 놔둘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 박력에 눌려서 블랙캣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니까, 레벅이 웃으면서


"좋아, 그럼 됐고."


라고 말하며 팔을 잡았는데 블랙캣이 저도 모르게 움찔해. 평소랑 달리 당황하는 듯한 모습에 레벅은 쿡쿡 웃음을 터트려.


"너랑 더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서운하지만."

"…뭐?"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블캣이 눈을 동그랗게 뜨니까, 레벅은 너 진짜 둔하구나, 라는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하며 말해.


"널 좋아하니까 그러지."

"어… 에에에에에?!!"

"뭐야, 진짜 몰랐어?"


그렇게 대쉬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말하는 레벅의 목소리에도 블캣은 정신이 없어.


"미... 미안."


받아들일 수 없어. 허둥지둥 대답을 건네는 블랙캣에 레벅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


"…어차피 쉽지는 않을 거라는 거 예상했었으니까."

"응? 뭐라고?"


작아서 뭐라는지 잘 못들어서, 블캣이 고개를 갸우뚱하니 레벅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저 웃어. 그렇게 블랙캣에게는 고민 하나가 더 추가되었지 삼각관계 최고!


그리고 아드리앙은 다시 또 자신의 기억을 알 만한 인물을 찾아. 바로 니노. 그리고 알리야. 알리야는 마리네뜨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지.


둘에게 따로 찾아가서 맛난 거 사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주 가관이야. 사실 이 둘이 사귀는 건 니노랑 알리야만 알고 있었거든.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어보는데 알리야가 네가 돌아왔을 때 마리네뜨가 티는 안 냈어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데 아드리앙은 겁나게 죄책감이 듬. 좋아하던 사람한테서 하루아침에 나 너 잊어버렸다는 선고를 듣는 게 어떤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리네뜨가 지금처럼 말수가 적고 아프게 웃는 타입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 때 알아. 자기가 사라진 뒤부터였다고 말하는데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드리앙에게 알리야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않냐고 쿨하게 넘겨줌. 대신 앞으로 좀 잘하라고 사람 좋게 웃어주는데 아드리앙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야. 그리고 다음으로 찾은 장소는 자기가 길거리에 쓰러졌던 날,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최종결전 장소) 거기를 가보기로 하고 짐을 챙겨.


여기서 마리네뜨 시점. 마리네뜨는 사실 아드리앙이 온 날로부터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궁금한데 묻기가 두려운 거야; 자기가 빌런을 생성한다는 거 알면서도 계속 아무 움직임이나 제재가 없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그가 자신을 역시 싫어하게 될 거라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함. 애써 인사하고 말을 걸면서도 속이 자꾸만 메슥거려. 무엇보다 빌런의 힘이 레벅 때와 달리 마리네뜨에게 너무 부담이 심해서, 그때 감기도 사실 힘에 대한 부작용으로 걸린 거니까.


그러다가 폭발한 마리네뜨는 결국 요정한테 선언해. 나 더 이상 너한테 협력 안 하겠다고.


그러니까 요정이 웃으면서 말해.


"그렇게는 안 돼."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마리네뜨는 정신을 잃어. 순식간에 빌런화된 마리네뜨가 평소랑 다른 거라면 눈에 초점이 없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빌런네뜨는 무언가를 인지했다는 듯이 어느 곳으로 향해.


마리네뜨가 쉽게 요정한테 마음을 먹혔던 이유는 마리네뜨의 정신 상태가 너무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야. 그간은 이성으로 어떻게 버텼지만 아드리앙에게 들키고는 참아왔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터진 거지. 그녀는 지나가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빌런으로 만들고 그 빌런들이 도시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함. 건물이 터지고 자동차가 날아가는 도시를 유유히 빠져나오는 빌런네뜨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어.


한편, 아드리앙은 지금 산산히 부서진 폐허에 와 있어. 바위와 자갈들만이 간간히 바스라져 있는 공터에는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아. 가만히 주저앉아 바닥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보던 아드리앙은 이 공간에 남은 음울한 기운에 절로 인상을 찡그려. 플랙이 기분 나쁘니까 돌아가자고 징징대도 꿈쩍 않고 주변을 살펴보던 아드리앙은 어느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춰. 하얀 바닥에 검게 얼룩져 있는 이건,


분명 핏자국.


거기까지. 뒤에서 날아드는 살기에 아드리앙은 옆으로 몸을 날려서 피해. 돌아보고 깜짝 놀라.


"마리네뜨?"


불렀지만 대답 대신 날아오는 건 날카로운 천이었어. 또 그걸 피해서 근처에 있던 낡은 벽 뒤에 숨어버린 아드리앙이 플랙을 불러 변신해. 그리고 살짝 내다보는데 빌런네뜨의 모습이 좀 이상해. 전에 만났을 때랑 조금 달라. 게다가 방금 넘어졌을 때 다쳤는지 아드리앙은 다리에서 둔통을 느꼈어. 피냄새도 좀 나고.


근데, 피냄새를 맡으니까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해. 그와 함께 강렬한 두통이 머리를 쾅 때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요동치고,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고 터져나오는 비명을 눌러삼켜. 눈앞에 보이는 건 밤이야. 빠르게 달려드는 무기들, 날아오는 무언가, 날카로운 고통, 피냄새.


피냄새와 함께 몰려오는 욕지기에 토할 거 같아.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소리. 절규하는 듯이 기억 속에서 메아리치는 그 비명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워. 쿵, 쿵, 쿵,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서 고통스러워.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머리가 터질 듯 아파.


그런데도 떠오르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어. 고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그 이미지를 놓지 않은 블랙캣의 초록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어.


그리고 그 순간, 블랙캣은 몸을 날려 피해. 숨어 있던 벽이 천에 쓸려 산산조각나.


"…그렇게 된 거였군."


뭔가를 중얼거리던 블랙캣이 봉을 들고 진지하게 빌런네뜨와 싸우기 시작해. 그녀의 등 뒤에서 뻗어나오는 천들을 훌쩍훌쩍 피하고 쳐내면서 블랙캣은 크게 소리질러.


"마리네뜨!! 너 마리네뜨야?!"


움찔, 순간 멈추는 빌런네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곧바로 매서운 공격이 가해졌지만 블랙캣은 굴하지 않아. 가만히 서있는 빌런네뜨에게 블랙캣이 크게 소리쳐.


"내가 밉지?"

"…"

"내가 미우면 차라리 그렇다고 말해!"

"…"

"다 받아줄 테니까, 어떤 변명이든 할 테니까! 그렇게 인형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지는 말란 말이야!!"


마구 소리치면서 나아가려고 하지만 더 이상은 접근이 힘들어. 천들은 살아있는 촉수처럼 블랙캣을 압박했고, 그는 뒤로 조금씩 물러나지게 됨. 블랙캣을 공격하려는 듯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는 빌런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이를 갈듯이 소리쳐.


"내가 좋아하는 마이 레이디는 그런 나약한 여자가 아니라고!!"


그 순간, 빌런네뜨의 손이 움직이지 않아. 천들도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점점 찡그려지기 시작하는데 괴로워 보여.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몸을 일으켜 달려들기 시작해. 다시 그에게로 달려들지 시작하는 천들이 그래도 아까만큼 기세가 매섭지 않아. 얻어맞기도 하고 날카로운 천의 끝에 쓸려 옷이 찢어져 피가 나면서도 블랙캣은 그녀에게로 있는 힘껏 달려가. 그리고 그녀를 와락 껴안아. 빌런네뜨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블랙캣이 가만히 중얼거려.


"……………미안해."

"…"

"기다리게, 해서."


블랙캣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어. 그녀를 안고 있는 손은 경련을 일으키듯 계속 떨리고 있고.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블랙캣은 고백해.


"계속, 혼자 내버려둬서 미안해."

"…"

"이제 괜찮아. 난 여기 있으니까."


떠나지 않아.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빌런네뜨는 잠깐 움찔 몸을 떨어. 그녀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블랙캣의 어깨를 적시기 시작해. 자신을 안아주는 따뜻한 온기에 빌런네뜨의 입이 열리고, 천천히 말이 새어나와.


"아…드리…앙?"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가 몇 번을 깜빡거렸고, 눈물은 계속 쏟아져. 제 가슴께를 축축하게 적시는 눈물을 느끼고 블랙캣의 눈가도 빨갛게 변하지만, 그는 꾹 참고 상냥하게 대답해줘.


“그래, 나야.”

“정말 너야?”


정말 너냐는 듯이 계속해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블랙캣은 끊임없이 답해줘. 나라고, 나는 여기 있다고. 그에 빌런네뜨는 그를 마주 끌어안고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해. 아이처럼.


“아드리앙, 아드리앙…!!”

“그래, 응. 나야.”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빨리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

“나 기다렸어. 계속 기다렸어.”


제 품으로 더욱 파고들며 계속 울고 있는 빌런네뜨를 블랙캣은 더욱 꽉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정말 아드리앙이지? 이거 꿈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더 이상 꿈은 싫어…!!”

“꿈이 아니야.”


확인하려는 듯이 계속 중얼거리면서, 마치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블랙캣을 꽉 붙드는 빌런네뜨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 블랙캣은 반대로 자꾸만 떨리려는 손을 애써 조심하면서 다시금 빌런네뜨를 소중하게 껴안아.


그동안 쌓여왔던 것들을 모두 털어내려는 것처럼 솔직하고, 아주 서럽게 울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너무 미안해서 블랙캣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많이 불안하고 힘들었을 텐데, 계속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여자한테 관심두는 자신을 보고 있기 괴로웠을 텐데. 이렇게 돌아와준 것이 고맙고 너무 미안해서 블랙캣의 눈가에서도 천천히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어.


그렇게 서로 끌어안고 울고 있는데, 빌런네뜨의 변신이 풀리기 시작해.

그 때였어.


"위험해!!"


블랙캣이 빌런네뜨를 껴안고 옆으로 굴러.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휙 날아들었다 거둬지는 물건을 본 빌런네뜨의 눈동자가 크게 떠져.


붉은 요요.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새로운 레이디버그. 근데 상태가 좀 이상하네.


참고로 빌런네뜨의 변신은 다 풀린 게 아니야. 다만 아까보다 몸에 힘이 없고 손이 떨려. 그리고 새로 나타난 레이디버그 얼굴에 선명히 나타나 있는 건 빌런마크. 씨익 웃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블랙캣은 깜짝 놀라지만, 빌런네뜨는 뭔가를 깨달은 듯이 얼굴이 새파래져.


"…속았구나."


사태가 어떻게 된 거냐면, 이 요정은 처음부터 마리네뜨를 그렇게까지 믿지 않았어. 아드리앙이 살아 돌아왔을 때부터는 더더욱. 그래서 그가 나타난 뒤로 자신의 힘을 나눠서 새로운 빌런을 하나 더 만들었어.


물론 마리네뜨 모르게. 마리네뜨가 정신력이 강하긴 했지만, 그녀도 가끔 요정의 통제 하에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간간히 있었거든. 그 때 요정은 자신의 힘을 나누어서 새로운 빌런을 만들었지. 마리네뜨가 그 때 상당히 많은 힘을 거둬줘서 힘을 나누기는 어렵지 않았어 그게 바로 새로운 레이디버그. 진짜 미라큘러스로 변신한 게 아니었던 거야.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사실 아드리앙을 짝사랑하던 어떤 소녀였음. 그에 대한 마음을 빌미로 요정은 그녀를 이용하고 있을 뿐.


사실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본래 모습일 때는 자기가 레벅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것도 알지 못해. 블랙캣의 앞에서 변신을 풀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바로 그거임. 정말 요정 손에서 놀아난 거지. 재빨리 마리네뜨를 끌고 다른 바위 쪽으로 피신하는 블랙캣에게 빌런네뜨가 말해.


"아드리앙. 아니, 블랙캣."

"어, 왜?"


그러면서 빌런네뜨는 자기 가슴쪽에 달린 브로치를 가리켜.


"이거랑 똑같은 걸 가지고 있을 거야. 그걸 부숴."

"너는 어쩌게?"


걱정스레 묻는 블랙캣에게 빌런네뜨가 단호하게 말해.


"지금 이 브로치를 부수면 내게 있는 힘까지도 저 애한테 가게 될지도 몰라. 일단 도망다니고 있을 테니까, 서둘러줘."


칼같이 대답하는 빌런네뜨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나만 믿으라는 듯이 웃는 그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서, 블랙캣은 웃으면서 말해.


"알았다구요, 제 하나뿐인 공주님께서 부탁하니 이거 뭐."

"…어서 가기나 해."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퉁명스레 말하며 뒤돌자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 그에 블랙캣은 밖으로 나가서 그녀를 상대하기 시작하고, 빌런네뜨는 어떻게 그를 도울까 고민함.


지금 자신에게 레벅의 힘은 없지만, 분명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면서 빌런네뜨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지 확인해. 밖에서는 블랙캣이 고전하고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의 공격이 이쪽은 안 노리네.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가 빌런네뜨는 순간 그 이유를 깨달아. 도전해볼 만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바위 밖으로 나와서 레벅에게로 뛰어감. 깜짝 놀라서 피하라고 소리치는 블랙캣의 말도 무시하고 마구 달려나가는데 요요의 공격은 오지 않지.


왜냐하면 엄연히 아직 요정의 본체는 빌런네뜨 쪽에 있었거든. 함부로 공격이 불가능한 거지. 그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한 빌런네뜨는 최대한 그녀의 움직임을 막는 암시를 걸고 블랙캣에게 지시해. 잡으라고. 곧바로 봉을 날려서 레벅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빌런네뜨의 몸에서 땀이 비오듯 떨어지고 있어. 근데 브로치가 안 보여. 어디 있나 허둥지둥하는 블랙캣을 보고 있던 빌런네뜨의 시선이, 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물건으로 향해.


요요.


"블랙캣! 요요야!!!"


그 말을 듣자마자 블랙캣은 일어나서 요요 앞으로 간 뒤에 세게 발로 밟아. 요요가 깨지고 그 안에 있던 펜던트에 금이 가 있어. 검은 나비가 나오는 걸 보고서야 빌런네뜨는 싱긋 웃어.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브로치를 블랙캣에게 던져줘. 블랙캣이 고대의 재앙을 써서 그 브로치를 부수자마자 모든 것이 풀린다. 빌런이 되었던 사람들의 모습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빌런 모습을 한 마리네뜨의 변신도 풀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이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해.


"너 괜찮아?"

"응… 괜찮아."


헤헤 웃으며 대꾸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이 정말로 괜찮아 보여서 블랙캣은 안심해.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져. 하지만 피하지는 않지.


그나저나,


"지금… 도시가 난리가 났을 텐데, 어떡하지? 정화의 힘이 없는데."

"아, 그러게. 근데 잠깐만, 그 레이디버그는 정화의 힘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어, 그러네?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함에 레벅이었던 소녀가 쓰러진 자리로 가 보자 그녀의 귓가에서 붉은 바탕에 검은 점들이 박힌 귀걸이가 반짝여. 어라? 하면서 블랙캣에게서 내려선 마리네뜨가 그 귀걸이에 손을 대자, 그 순간 귀걸이에서 빛이 나더니 티키가 튀어나와.


"마리네뜨!!!"


소녀가 진짜 레이디버그의 힘을 쓴 건 사실이었어.


다만 폭주했을 당시 티키 쪽에도 타격이 커서, 티키는 당분간 깨어나지 못했고 마리네뜨가 정신을 잃었던 사이 요정이 따로 귀걸이를 감췄던 거지. 나중에 써먹었고. 변신한 레이디버그는 신비한 치유의 힘을 써서 도시를 정화함. 그리고 다시 마리네뜨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미 변신이 풀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드리앙이 레벅이었던 소녀를 등에 업고 있어. 그에 질투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피식 웃는데, 아드리앙이 그런 그녀를 보고 웃으면서 말해.


"마리네뜨."

"어?"


뒤를 돌아보자, 아드리앙이 한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고 있어. 잡으라는 듯이. 부드럽게 웃는 아드리앙의 미소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마리네뜨는 곧 환하게 웃으며 그 손을 잡아. 그리고 돌아가지.


그들이 살고 있는, 이제는 평화로울 도시로.




fin.

Posted by I.R.E
,

※ 주의!!! 일단 이 영상을 일단 봐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FlwV3scCgAM


보셨으면, 시작합니다!





<porte ouest - 서문>









Episode 1.

내 이름은 레이디버그!






“으앗!”



위험했다! 넘어질 것처럼 중심이 기울어졌지만, 소녀는 간신히 한 발로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소녀는 뒤로 홱 고개를 돌려 방금 발에 채였던 작은 돌멩이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필 하고많은 돌멩이 중에 제 발 밑으로 굴러오다니. 하마터면 바닥과 열정적인 키스를 하게 될 뻔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한참을 돌멩이를 쳐다보던 중, 소녀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힘없이 풋 웃었다.


됐어,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몇 번 깜빡였다.



“어서 가야지.”



다시 돌아서 한참을 걸어가자, 회색 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살짝 울퉁불퉁했던 길이 끝나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길이 나타났다. 갈라진 틈들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물이 고이지 않던 먼젓번 길과 달리 이제 막 보이기 시작한 길들 주변에는 커다란 물웅덩이들이 퍼져 있었다. 길가에 드문드문 자리한 웅덩이 위로 빠르게 걸어가는 소녀의 모습이 간간히 반사되어 보였다, 사라진다. 하얀 블라우스 위에 짙은 남색 자켓을 걸치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청바지를 입은 소녀의 손에 들린 붉은 우산이 특히 인상적이다. 하얀 구름이 옅게 번진 푸른빛 하늘이 소녀의 등 뒤로 눈부시게 반짝인다.


고즈넉한 파리의 저택과 건물들을 배경으로 소녀는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한참 골목길을 걸어가다보니 넓은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몇몇의 사람들만이 광장을 거슬러 지나가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소녀는 싱긋 웃으며 춤을 추듯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붉은 우산을 멋들어지게 움직이며 빙그르르 돌던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를 찰나,



“꺅!”



너무 빨리 돌은 걸까.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는 쪽으로 내려가던 중 발이 꼬였다. 재빨리 우산을 바닥에 짚은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소녀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늘 생각하지만 참 신기하면서 이해할 수가 없다. 천성적으로 운동신경이 없는 편은 절대 아닌데 왜 밖에만 나오면 꼭 뭔가에 발이 걸리거나 넘어질 위기에 처하는 걸까. 재수가 없어서? 아니면 덜렁대서? 그래도 이젠 익숙해져서인지 그렇게 자주 넘어지지는 않지만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손에 든 우산을 꼭 쥐었다. 어제 비가 많이 오긴 했지만 오늘은 말끔하게 개어 있는 좋은 날씨다. 그럼에도 굳이 커다란 우산을 손에 들고 다니는 소녀의 모습을 몇몇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흘깃 쳐다본다. 하지만 소녀는 역시 개의치 않았다.


광장을 지나, 다시 골목 쪽으로 접어들고,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하는 골목 끝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사거리였다. 넓은 횡단보도가 도로를 크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횡단보도 바로 앞에 서서 소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금방 초록불이 들어왔지만 길을 건너는 사람들과 달리 소녀는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힐끔거리는 소녀의 시야로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서둘러 여기까지 온 이유는 학교 때문은 아니었다. 등교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여유가 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시간에 이 횡단보도 앞으로 온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오늘은 있을까?’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지만 찾는 사람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역시 오늘도 나타나지 않는 건가, 실망할 찰나 갑자기 자동차 하나가 순식간에 소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으앗!”



촤악, 소리와 함께 바닥에 고여있던 웅덩이의 물이 크게 튀었다. 우산을 펴들 새도 없이 순식간에 소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을 가득 뒤집어쓴 생쥐 꼴이 되었다. 옷과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추욱 늘어져서 그런지 소녀는 방금 전보다 한층 더 작아 보였다. 보통이라면 짜증을 내며 욕이라도 할 텐데, 소녀는 아무 말도 없이 처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대충 옷의 물기를 짜낸 뒤, 소녀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횡단보도를 건너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소녀의 이름은 마리네뜨 뒤팽 쳉. 조금 재수가 없고, 많이 덜렁대며, 굳이 특출난 점을 찾기 어려운 보통의 여자아이다. 하지만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 선량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밝게 웃을 줄 알며, 소심하지만 한 번 정한 일에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평범한 소녀이기도 했다.


이날까지는.




///



“너 꼴이 그게 뭐야!”

“에스미.”



물에 젖은 채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리네뜨를 본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와 굽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살짝 올려 묶은 소녀의 검은색 눈동자가 총명하게 반짝거렸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반에는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성큼성큼 제게 다가오는 친구의 험악한 기세에 마리네뜨의 머리카락이 절로 쭈뼛 곤두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의 상태를 둘러보던 에스미는 한숨을 내쉬며 제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래, 오는 길에 물벼락이라도 맞았어?”

“아냐아냐, 에, 어제 비가 왔잖아? 물이 많이 고여 있는데, 차가 엄청 빨리 달려와서….”

“알 만하다. 너 또 길가에서 멍때렸지?”

“아냐! …그런 거.”



손을 휙휙 내저으며 강하게 부정하는 마리네뜨를 잠깐 응시하던 에스미는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으니 어서 옷이나 갈아입어. 그 꼴로 어떻게 수업 들을래?”

“응! 화장실 다녀올게. 체육복이….”



라고 말하는 순간 마리네뜨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가방이 어디 있지?”

“처음부터 안 들고 왔어.”

“어, 그래? 아무래도 까먹고 안 가져온 모양이네, 에헤헤.”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쉬는 마리네뜨에 에스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니, 넌?”

“그런가?”

“으이구, 일단 내 체육복 빌려줄게. 일단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옷은 대충 빨아서 말려봐. 집에 갈 때까지는 마르겠지.”



[Esmeralda Sezer(에스메랄다 세자르)]라고 적혀 있는 사물함 문을 열고 수건과 체육복을 꺼낸 에스미가 마리네뜨에게 그것을 휙 던졌다. 허둥지둥 그것들을 받아 안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에스미가 절로 혀를 찼지만 그와 별개로 시선은 퍽 다정했다.


에스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좀 모자라지만 귀여운 딸내미를 보는 엄마의 심정이란 이런 걸까.



“고마워, 에스미!”

“오냐.”



어서 다녀오라는 듯이 손을 내젓는 에스미를 뒤로 한 채 마리네뜨는 옷을 갈아입고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가며 반으로 돌아왔다. 그 때쯤에는 슬슬 등교를 시작하는지 반에 사람이 몇 명 더 늘어나 있었다. 쪼르르 자리로 와서 앉아 두 팔에 턱을 괴고 엎드리는 모습은 딱 보기에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비단 물벼락을 맞아서 그런 것만은 아닌지, 그녀는 한숨과 함께 흘리듯 중얼거렸다.



“…오늘도 없었어.”



바로 옆 사람에게나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였다. 마리네뜨의 옆, 맨 뒤 창가자리에 앉아 있던 에스미는 그런 마리네뜨를 쳐다보더니 또 시작이냐는 듯이 심드렁하게 맞받아쳤다.



“뭐가? 아, 니가 찾고 있다던 그 남자애?”

“으응….”





일주일 전쯤이었나.


2학기가 시작하던 날 아침, 마리네뜨는 언제나처럼 졸린 눈을 비비며 등교를 하고 있었다. 파리의 중심부라 그런지 꽤 이른 시간에 나왔는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물론 등교시간에 딱 맞춰가면 더 많이 잘 수 있겠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그다지 좋았던 기억이 없는지라 마리네뜨는 최대한 일찍 일어나서 학교를 가곤 했다.


그 날도 그랬었다. 익숙하게 걸어다니던 길들을 지나 횡단보도 앞에 서서 건널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파리의 도로는 혼잡하기로 악명이 높다. 학교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기에 망정이지, 오죽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승용차보다 편할 정도였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자니 절로 피곤이 몰려왔다.



“하암….”



졸려. 계속 하품을 하는 마리네뜨의 눈에는 졸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개학 전날은 꼭 잠을 설치곤 했는데 그날따라 좀 많이 긴장했던 것 같다. 이번 학년에는 단짝친구가 생겨서 학교가는 게 조금은 더 즐거워지긴 했지만, 오랜 습관이란 쉽게 고쳐지지 않는 악우와도 같았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얌전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자니 더욱 졸렸다. 그래서인지 마리네뜨는 어느 새 제 뒤에 누군가 서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학교에 가서 자야겠다는 생각에 마리네뜨는 신호가 들어오자마자 도로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엇?”



그 순간, 뒤에서 강한 힘이 마리네뜨의 책가방을 붙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런 끌려감에 무슨 짓이냐고 말하려던 찰나,


빵빵-.


승용차가 클락션을 울리며 바로 눈앞을 스쳐갔다. 빠른 속도로 자신을 지나쳐 순식간에 저 멀리에 보이는 자동차에 마리네뜨의 눈이 번쩍 터졌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었다. 구해준 건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서 있던 것은 소년이었다. 금발에 무뚝뚝한 인상을 가진 남자애. 얼굴만 봐서는 제 또래처럼 보였지만 단정한 정장차림에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 때문인지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책가방 위쪽 끈을 잡고 있던 소년의 청회색 눈동자가 지긋이 마리네뜨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괜히 뻘쭘해진 마리네뜨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시선을 피했다. 이상하게 얼굴이 더웠다.


어라, 내가 왜 이러지?



“아, 감사합니다.”



부랴부랴 인사를 건네자 소년은 알겠다는 것처럼 가만히 책가방에서 손을 떼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휙 돌아서서 길을 건너는 소년의 뒷모습을 마리네뜨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두근, 두근, 조용히 박동치는 심장소리가 온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딱히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숨이 막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저, 저기…!!”



이미 멀어진 소년을 쫓아갔지만 소년은 이미 불어난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로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어서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가서 기다렸지만 모두 허탕을 친 상태였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일주일 내내 기다렸는데도 안 보여어어어어….”



팔을 쭉 뻗은 채로 책상에 고개를 콕 박고 바르작거리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에스미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게 이름이라도 물어보지 그랬어. 목소리도 모른다며?”

“그러게. 마리네뜨 이 멍청이! 난 정말 바보야!! 왜 그때 말을 안 하고 멍을 때려서!”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 그래봤자 다시 돌아가서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찾을 생각을 해야지.”



심드렁하게 대답을 던지는 친구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들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에 에스미는 풋 웃으며 마리네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예 이쪽으로 지나다니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날만 어쩌다보니 이쪽 횡단보도로 왔다던가….”



에스미가 하는 말을 듣자마자 마리네뜨는 벌떡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어떡해? 이대로 못 찾는 걸까?”

“아니, 이건 가능성일 뿐이니까. 의외로 우리 학교 학생일지도 몰라. 그 횡단보도에서 우리 학교까지 10분밖에 안 걸리니까. 게다가 개학식 날이었기도 하고. 생김새가 어땠는데?”

“어…. 일단 금발에, 검은색 조끼랑 회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더라. 넥타이도 맸던 거 같고….”



손가락을 접어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질문했다.



“켁, 완전 어른이나 입을 거 같은 드레스코드인데? 우리 또래이긴 한 거야?”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진 않았어. 표정은 무뚝뚝했지만….”



잘 웃지 않는 것 같았지.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보는 에스미의 눈동자에 걱정이 들어찼다. 반응에서 대충 짐작이 가긴 하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근데 걔는 왜 그렇게 찾아? 정말 반한 거야? 이런 참견은 좀 그런가 싶긴 하지만, 좋아할 상대는 신중하게 골라.”



넌 진짜 간이고 쓸개고 다 퍼줄 거 같아서 걱정이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게 걱정임을 모르지 않기에, 마리네뜨는 헤헤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글쎄, 반했나?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런 거겠지?”

“…일주일 내내 사람 찾겠다고 쇼하는 게 단순히 인사나 하자고 하는 짓은 아닐 거 아니냐.”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소년이 무뚝뚝한 건 사실이었다. 말을 하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는 것도 없었고, 얼굴에도 표정이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리네뜨는 소년이 분명 겉보기만큼 차가운 성격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애초에 자신을 도와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 애, 왠지 상냥할 거 같았거든.”



수줍게 웃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에스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오는 거야?”

“보이는 게 다는 아니잖아. 잠깐 본 사람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만…. 하긴 일단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꼭 다시 만날 거야! 내일도 일찍 나가야지.”

“계속 그러게?”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럼 일단은 계속 해봐야지.”



꼭 찾고야 말겠다고 다시 전의를 불태우는 마리네뜨의 모습은 또 묘하게 귀여워서, 에스미는 결국 피식 웃으며 마리네뜨의 머리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래, 그래. 힘내라.”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늘도 역시 허탕인가. 하교하면서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 찾지 못했다. 비슷한 외양의 사람은 몇 명 봤지만 다들 아니었다. 하긴, 금발은 꽤 흔하기도 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한참을 걷던 마리네뜨는 어느 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빵집인지라 문 너머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그냥 들어가려다 여느 때처럼 힐끗 눈을 돌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마리네뜨는 흠칫했다.


너무 우울해 보이나?


으음, 입을 우물거리며 난처하다는 듯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던 마리네뜨는 주변을 슥슥 둘러보다가 재빨리 표정을 점검했다. 검지손가락들로 입꼬리를 크게 밀어올리고 즐거운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집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빵 냄새라던가.

그렇게 몇 번 웃는 연습을 하다가, 괜찮다 싶어지자 마리네뜨는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우리 딸~”



카운터에 앉아서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어머니에게 마리네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응!! 엄마, 나 일단 빨래 좀 해도 될까? 옷이 좀 젖어서.”

“그래. 아, 마리네뜨. 미안한데 올라가는 김에 다락방에 가서 둘둘 말린 천 있지, 그것도 좀 같이 꺼내다 줄래?”

“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맨 처음 보인 물건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책가방이었다. 요즘 진짜 정신이 없긴 했나 보다.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은 들고 가고 가져가야 하는 책가방은 놓고 오다니. 그 전날 비가 와서 쫄딱 젖어야 했던지라 오늘도 혹시 그럴까봐 챙겼던 건데 결국 비는 오지 않았다. 한숨을 쉬었다.


난 왜 맨날 이 모양이지.



“천이 어디에 있더라…?”



석양이 지고 있는지라 다락방은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애초에 방에 전등이 없는지라, 곧 밤이 되면 손전등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빨리 물건을 찾아서 나가자는 생각에 방 안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마리네뜨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저 빛은…?”



창문 밑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뭐지? 의아한 마음에 빛이 있는 장소로 다가가자, 마리네뜨는 곧 그 빛이 작은 보석함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이하게 생긴 문양들이 잔뜩 그려져 있는 육각형의 상자였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함을 열어보았다. 



“귀걸이네.”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점이 다섯 개 찍혀 있는 귀걸이 한 쌍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대려는 순간,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공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여든 빛 한가운데서 나타난 것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무언가였다. 



“꺄아아아악!!”



뭔지도 모를 붉은색 생명체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은 마리네뜨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비명을 토해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기겁해서 손발을 바둥거리며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마리네뜨에게 ‘그것’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마, 말을 해!! 벌레? 쥐? 아니, 이상하게 생겼는데 아무튼 무, 무기! 파리채!!”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횡설수설하며 마리네뜨는 두 손을 마구 휘둘렀다. 패닉 상태에 빠진 마리네뜨를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괴상하게 생긴 - 최소한 마리네뜨는 그렇게 생각했다 - 작은 생명체는 입을 열었다.



“잠깐만! 내 말 좀 들어줘! 무서워하지 마. 난 네 친구야.”

“친구…?”



침착하고 낭랑한, 또래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정말로 친구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마리네뜨는 동작을 멈췄다. 그제서야 조금 여유가 돌아왔는지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느낌에 눈이 꽤 컸다. 자세히 살펴보니 붉기만 한 게 아니라 점점이 박혀 있는 검은 점들도 눈에 띄었다. 무언가가 연상되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이던 찰나 밑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네뜨, 무슨 일이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얼버무린 뒤 마리네뜨는 방금 뱉어낸 말에 경악해서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왜 그랬지? 그냥 엄마를 불러야 했는데! 저렇게 작아도 위험한 생물일지 어떻게 알아? 막 닿으면 치명적인 병에 걸리는 바이러스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분명 말을 했는데? 말하는 거 보니까 괜찮아 보이긴 했는데….


목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힐끔 돌아보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말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아니야. 근데 너는….”

“아, 내 소개를 안 했구나.”



마리네뜨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녀’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는 티키라고 해. 너는 이름이 뭐니?”

“아, 안녕? 나는 마리네뜨야. 마리네뜨 뒤팽 쳉.”

“마리네뜨라니, 예쁜 이름이구나.”

“고마워…, 는 넌 대체 누구야?”

“나는 티키(Tikky).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를 수호하는 요정이지.”

“요정…?”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상황들이 바로 눈앞에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마리네뜨는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아얏! 비명과 함께 얼얼한 뺨을 한 손으로 감싸쥐고 마리네뜨는 얼떨떨한 눈동자로 다시 한 번 티키를 돌아보았다. 사라지지 않는 티키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다시금 눈을 깜빡거렸다.


꿈이 아니네?



“마리네뜨. 내가 하는 말들이 믿기지 않겠지만, 부탁이 있어.”

“부탁?”

“세상에 곧 위기가 찾아올 거야. 레이디버그로 변신해서 세상을 지켜줬으면 해.”

“레이디버그? 그게 뭔데?”



제법 진정이 되었는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질문하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생긋 웃으며 공중을 한 바퀴 돌았다.



“네가 열었던 보석함 속에 들어있는 귀걸이! 그게 바로 레이디버그로 변신할 수 있는 기적의 돌, 미라큘러스야.”

“미라큘러스?”

“이걸 사용하면 히어로로 변신할 수 있어. 한 번 해볼래?”



티키는 재빨리 잡동사니들 사이에 들어 있던 보석함을 꺼내 마리네뜨 앞에 밀어놓았다. 붉게 반짝거리는 귀걸이를 머뭇거리며 집어든 마리네뜨가 천천히 그것들을 귀에 끼웠다. 여전히 망설이는 듯한 마리네뜨와는 달리 티키는 발랄한 목소리로 주문을 알려주었다.



“변신! 이라고 외치면 돼.”

“벼, 변신? 으아앗!”



귀걸이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마리네뜨의 온 몸을 덮었다. 빛이 사라지고 나자 바뀌어 있는 제 모습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전체적으로는 붉은 바탕에 검은색 점들이 알록달록하게 찍혀 있는 타이즈 차림에, 머리에는 바닥까지 끌릴 법한 긴 붉은색 끈들이 양갈래로 묶여 있었다. 눈가에 느껴지는 무언가의 감촉에 얼굴을 더듬어보니 가면이 만져졌다. 가면에 손을 대고 잡아당기자마자 다시 번쩍 빛이 일더니 마리네뜨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시 나타난 티키가 주의를 주었다.


“안 돼, 마리네뜨! 가면을 벗으면 변신이 풀리고 말아.”

“변신이 풀리면 안 좋은 거야?”

“당연하지. 누구에게도 정체를 들켜서는 안 돼. 미라큘러스의 존재가 알려지면 분명 많은 악당들이 이걸 노리고 널 습격할 테니까.”

“이게 그렇게 대단해? 이런 쫄쫄이 하나 입혀주는 귀걸이가 대체 뭐가 좋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단순히 옷만 바꿔입은 게 아니야. 다시 변신해서, 허리에 차고 있는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봐.”

“물건?”

“그래, 아무거나 생각나는 걸 상상해서.”



티키의 말대로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변신을 외쳤다. 다시금 레이디버그의 모습으로 변한 뒤 무엇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차, 그녀는 다락방 구석에 굴러다니던 요요를 발견했다. 가방에 손을 넣자마자 손 안에 꽉 차게 들어오는 동그란 무언가를 느끼고 레이디버그는 손을 뺐다.


천천히 손을 펴자, 검은 점들이 박힌 붉은색 요요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기도 잠시 레이디버그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꺼내래서 꺼냈는데,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거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일단 포기하고 다시 변신을 풀자 티키가 질문을 던졌다.



“방금 꺼낸 물건은 뭐야?”

“요요를 모르니? 이건 이렇게 줄을 달아서 늘렸다, 줄였다 하는 물건이야.”



구석에 있던 요요를 가져와 시범을 보이니 티키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은 선택이야. 싸울 때 상대를 붙잡을 수 있고, 도시를 돌아다니기에도 좋을 거 같아.”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결국 항복했다는 듯이 마리네뜨는 한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



“저기, 일단 설명을 좀 해줄래…? 대체 이게 뭐야?”

“아, 내가 설명을 안 했구나. 마리네뜨. 변신한 뒤에 네가 차고 있는 가방은 마법 상자야. 거기에 손을 넣으면 네가 원하는 무언가를 그 안에서 꺼낼 수 있어.”

“진짜?!”

“응, 대신 한 번 물건을 꺼내면 그 물건을 다시 집어넣거나 부숴질 때까지 다른 물건을 꺼낼 수 없으니까, 그것만 주의해주면 돼.”



상냥하게 설명해주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다시금 질문했다.



“근데 아까 말한, 세상을 지켜달라는 게 무슨 말이야?”





“무리무리무리무리!”



손과 고개를 붕붕 내저으며 온 몸으로 거절 의사를 표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라큘러스(Miraculous). 신비한 힘을 가진 기적의 돌. 각 돌마다 상징하는 의미가 있으며 돌을 수호하는 요정이 곁에 붙어 있다. 세상에 위기가 닥칠 때, 즉 미라큘러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한 시기에 요정들은 주인을 찾아 깨어나게 된다. 미라큘러스의 주인으로 선택된 이들은 요정들과 미라큘러스의 힘으로 굉장한 능력을 지닌 능력자로 변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리네뜨가 발견한 레이디버그가 상징하는 능력은 ‘행운’. 놀라운 방어력과 더불어 입기만 해도 비약적으로 신체능력이 상승하는 수트, 온갖 필요한 물건들을 꺼낼 수 있는 마법 가방 등이 ‘레이디버그’가 가진 능력의 일부였다.


여기까지가 티키의 설명이었고,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네뜨는 그런 역할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발견한 건 그저 우연일 뿐이야. 난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평범한 소녀라구. 나 같은 애가 대체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겠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팔로 X자를 그리면서 중얼거리는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자조하듯이 흐리게 번졌다.



“난 솔직히 별로 잘 하는 것도 없고, 늘 실수투성이에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아. 이런 내가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악당이랑 싸우겠어? 애초에 네가 상징하는 능력이 행운이라며? 난 운이랑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구.”

“마리네뜨, 그렇지 않아. 넌 선택받은 아이야.”

“그러게. 요정을 만나는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 평생의 운을 너와의 만남에 다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야.”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씁쓸한 체념이 감돌았다.



“나를 선택했다고 해준 건 기쁘지만….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걸.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도….”

“너라면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내 눈은 정확하다구.”



어떻게든 마리네뜨를 달래려는 티키의 노력에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이는 듯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역시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나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찾는 거 도와줄게. 물론 대신할 사람을 찾은 후에는 너에 대한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고. 그걸로는 안 될까?”

“마리네뜨….”



간절하게 쳐다보는 티키의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커다란 눈이 안 된다고, 다시 생각해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애절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제 성격을 살짝 원망하면서 마리네뜨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일단 생각할 시간을 줄래? 당장 결정할 만한 문제는 아닌 거 같아.”




///



“하아….”



길고 긴 하루가 끝나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마리네뜨의 발걸음은 평상시보다 느리고 무거웠다. 터벅터벅 시내의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얼굴에는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마리네뜨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은 평범한 소녀였을 뿐인데, 지금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자리를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니. 하룻밤 사이에 변한 자신의 처지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영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상황이 정말 현실에서 벌어지다니. 사실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을 반겨주는 티키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꿈으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건지가 궁금하다. 옛날부터 정말 운이라곤 없지 않았던가. 밖에 나가면 열에 아홉은 꼭 넘어지거나 문제가 생긴다. 사소하게 음료수를 엎지르는 것에서부터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으르렁거리는 개한테 쫓겨다니게 되거나 그도 아니면 시비가 걸리거나, 아무튼 무척 다양했다.


허리 옆에서 흔들리는 가방을 힐끔 내려보았다. 왼쪽 어깨에 달린 끈을 따라 오른쪽에 자리한 작은 하얀색 가방은 학교에 따라오겠다는 티키를 위해 일부러 가져온 것이다.


‘계속 같이 다녀야 필요할 때 변신할 수 있잖아.’


라고 말하는 티키의 말에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방 안을 뒤져서 티키가 들어갈 만한 작은 가방을 찾아냈다.


사실 마리네뜨는 티키를 꽤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생물인가 했지만, 티키는 정말로 상냥했고 목소리만 들으면 그냥 사람이랑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똑똑했다. 깨어난 게 최근은 아닌지 티키는 지금 세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스마트폰을 보고 신기해하는 티키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꺄르르 웃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꼭 친구 하나가 더 생긴 기분이었다.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것만 아니라면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하지만 너무 부담스럽다고!


그냥 확 수락할까도 싶었지만, 이런 큰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결정할 만큼 마리네뜨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TV에서 보면 영웅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특출난 면이 하나쯤은 있지 않던가. 대체 자신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 선택되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하염없이 걷던 중 마리네뜨의 귓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뭐지?”



고개를 들었지만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싶은 순간 다시금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결을 따라 간간히 들렸다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계속 고막을 간지럽혔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마리네뜨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려던 순간 마리네뜨는 헉 소리를 낼 뻔했다. 다행히도 목소리를 내기 전에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벽으로 붙었다. 그리고 살짝 얼굴을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강도다.


얼굴에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3인조가 은행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총을 들고 있는 건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인질로 잡은 듯한 어린 소년의 목에 팔을 두르고 소년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남은 한 명은 커다란 가방을 잔뜩 들고 있었는데 저 안에는 아마 은행에서 훔쳐낸 돈다발이 들어 있겠지.


볼일은 거의 다 끝났는지 강도들은 들고 있던 가방을 차에 싣고 있는 중이었다. 시민들이 그런 그들의 주변에 넓게 퍼져 있었지만,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어서인지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경찰은 왜 아직도 안 오지?”



혹시 몰라 귀를 기울여봤지만 사이렌 소리는커녕 클락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강도들은 짐을 다 싣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서로 눈짓하더니, 계속 인질로 삼으려는지 아이를 끌고 움직이는 강도들의 모습에 시민들 사이에서 분노하는 소리들이 쏟아졌다. 다시 아이에게 총을 겨누며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는 강도의 한 마디에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죽일 듯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이 엄마인 듯한 여자의 표정은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새하얘졌고, 아이는 공포에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떠나보내면 아이는 분명히 죽을 텐데. 어쩌면 좋지? 어떡해?



“변신하면, 저 애를 구할 수 있는 힘이 생길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마리네뜨는 헉 하고 놀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이야. 나는 히어로같은 거….



“잠깐. 그 손 놔.”



어?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마리네뜨의 귀를 잡아끌었다. 침착하지만 명확하게 꽂히는 목소리에 강도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놀란 얼굴을 한 시민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무덤덤한 시선을 한 금발의 소년.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가 애타게 찾고 있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무슨 수작이냐는 듯이 총을 겨누는 강도에게 소년은 태연한 얼굴로 폭탄선언을 던졌다.



“어린애는 냅두고 날 인질로 삼지 그래.”

“뭐?”



얼빠진 듯한 강도의 목소리와 함께 시민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앞에 나서서 인질을 자기로 바꾸라고 하는 소년의 행동은 그야말로 간이 크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미친 짓이었다. 아이를 구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따라가면 분명 목숨이 위험하게 될 텐데. 근처에 있던 중년 남자가 말리려는 듯이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소년은 간단히 어깨를 털어버리고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섰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리네뜨가 손을 들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두근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하는 심장에 마리네뜨의 손이 셔츠를 사정없이 비틀었다. 불안감이 심장을 점점 옥죄어가고 있었다.


한편 강도들은 당당하게 자신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하는 소년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는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에 시민들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소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강도 중 한 명이 소년에게 손가락질을 날리며 조소했다.



“하, 네가 뭐라고….”

“인질이면 더 비싼 쪽이 낫지 않나? 그 꼬맹이보다는 값어치가 높을 거라 장담하는데.”

“건방진…!!”



목숨이 걸린 결정임에도 무심한 얼굴로 셈을 던지는 소년의 태연한 모습이 거슬렸는지 강도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붙잡고 있던 강도가 다른 총을 들고 있는 강도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 야, 저놈 잡아와!”

“아이를 먼저 놔.”

“…그 건방진 입이 언제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봐주지. 아이는 버리고 저 놈을 데려간다.”



다른 한 명이 소년에게 총을 겨눈 순간, 강도는 데리고 있던 아이를 풀어주었다. 울음을 터트리며 엄마에게로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을 흘깃 돌아보고, 소년은 느릿하게 양 손을 위로 올렸다.


천천히 강도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소년을 본 순간 마리네뜨는 다급히 소리쳤다.



“티키!”

“응?”



설명할 시간조차 없었다. 가방 속에서 훅 솟아나온 티키를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주문을 읊조렸다.



“변신, 레이디버그!”



강도 중 한 명이 소년에게 다가가 팔을 움켜쥐려는 찰나, 하늘로 날아오른 붉은 인영이 무언가를 세게 던졌다. 머리를 얻어맞고 순식간에 그 자리에 쓰러지는 강도의 모습에 시민들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남아있던 다른 강도 한 명의 얼굴에는 경악이 깃들었다.


바닥에 내려서서 요요를 흔들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시민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칫, 혀를 차며 총을 든 남자가 그녀에게 총신을 겨누려던 차에 레이디버그는 요요를 던져 남자의 손을 정통으로 맞췄다.



“으악!”



강렬한 아픔에 남자가 총을 떨어뜨리자마자 바로 앞에 서 있던 소년이 빠르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억,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꺾으면서 등을 밀어 바닥에 깔아뭉개고, 바둥거리는 남자의 목 뒤를 쳐서 기절시킨 뒤 소년은 천천히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소년의 모습에 레이디버그와 시민들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히익!”



운전석에서 그걸 지켜보던 나머지 강도 한 명이 재빨리 차를 출발시켰다.  앞으로 달려가는 차를 보며 레이디버그는 손에 들고 있던 요요를 다시 휙휙 돌렸다.



“놓칠 줄 알고?!”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길게 늘어난 요요가 차의 트렁크 위에 붙어 있던 장식을 돌돌 휘감았다. 감긴 걸 확인하고 세게 잡아당기자마자 차는 속수무책으로 끌려왔고. 더욱 패닉 상태가 된 강도가 열심히 엑셀을 밟았지만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질질 끌려오는 자동차를 보며 시민들은 물론이고 레이디버그 본인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그녀는 별로 힘들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힘이 세진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게다가 몸도 무척 가벼웠다. 바닥에 발을 딛을 때마다 몸에 풍선을 매단 것처럼 사뿐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몸무게가 거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자동차가 다시 원래 있던 자리까지 끌려오자마자 시민들이 달려들어서 차에 타고 있던 강도를 끌어내렸다. 기절한 두 강도를 묶고 전화기를 꺼내 경찰에 신고하는 시민들을 뒤로 한 채,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소년의 모습을 발견한 레이디버그가 그를 불렀다.



“저기요!”

“…?”



뒤돌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다행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불렀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이 말없이 서 있는 소년에게 레이디버그는 다급히 가장 먼저 떠오른 것부터 질문했다.



“이름, 이름이 뭐예요?!”

“음?”

“아, 저기, 그게…. 그, 그냥 궁금해서요! 에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이름 정도는 알아도 좋지 않아요?”



지긋이 자신을 살피는 듯한 눈동자에 절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생각해보면 굳이 이름을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수상하잖아!



“안, 안 될까나….”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검지손가락 끝을 맞부딪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면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물어본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그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소년의 시선에 레이디버그의 뇌리에 온갖 부정적인 가설이 떠올랐다. 아, 난 역시 운이 없나봐아아아아-. 그렇게 속으로 절규하고 있던 레이디버그에게 소년은 대답했다.



“…펠릭스.”

“네?”

“펠릭스 아그레스트.”

“어, 그게 이름…?”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 아니 펠릭스를 보며 레이디버그는 멍한 정신을 추스르고 황급히 방금 들었던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좋구나.



“네, 네. 고마워요!”

“그쪽은?”

“어, 저요?”



끄덕.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닌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펠릭스에게 레이디버그는 발랄하게 대답했다.



“마…, 레이디버그! 레이디버그예요.”



하마터면 진짜 이름을 뱉을 뻔했다. 티키가 비밀로 하랬는데! 그래도 실수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레이디버그와 달리, 그녀를 쳐다보는 펠릭스의 눈빛에는 묘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호의인지 적의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애매하기도 한. 다행인지 불운인지 그런 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는 다시 말을 걸었다.



“근데 어쩌다 이 근처를 지나고 있었어요?”

“학교가 이 근처라서.”

“어라, 혹시 솅 에트와르(Saint étoile) 학교?”

“……어떻게.”



그야 당신이랑 같은 학교니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는지라 떨떠름하게 미소지으며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아까 보니까 되게 잘 싸우던데, 뭐 운동 같은 거 하나 봐요?”

“사정상 호신술을 배웠어서.”

“그, 그렇구나!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렇게 총 들고 있는 사람한테 막 다가가는 거 아니에요. 위험하잖아요.”

“…주의하죠.”



그 말과 함께 처음으로 무표정을 거두고 피식 웃는 그의 모습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왠지 더웠다. 주변의 공기가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귀에 메아리치듯 크게 울리는데, 소리가 너무 커서 앞에 있는 사람에게 들릴까 겁날 정도였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펠릭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가 어려운 탓에 그녀는 살짝 시선을 옆으로 비꼈다. 똑바로 쳐다보면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걔는 왜 그렇게 찾아? 정말 반한 거야? 이런 참견은 좀 그런가 싶긴 하지만, 좋아할 상대는 신중하게 골라.’


이 순간 갑자기 왜 이 말이 떠오르는 걸까. 일단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 싶어서 레이디버그는 입을 열었다.



“아, 저기….”



뭐라고 하지? 고민하던 찰나 삐용삐용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레이디버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자신이 레이디버그가 아닌 마리네뜨의 입장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허둥지둥 작별인사를 건넸다.



“아, 경찰이 왔으니 저는 이만!”



펠릭스가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몸을 날려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펠릭스의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레이디버그.”






“다행이다, 안 들킨 거 같지?”



헤실거리는 미소를 가면 뒤로 감추고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힘차게 파리의 상공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가볍게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파리의 건물들 위를 날아다니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발견한 몇몇 사람들이 경악의 탄성을 내뱉었다. 아마 내일이면 레이디버그에 대한 기사들과 목격담으로 떠들썩해지겠지.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 것에 조금도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찾던 사람을 드디어 찾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같은 학교라니. 계속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펠릭스라….”



펠릭스(Felix). 행운이라는 뜻의 고대어에서 유래된 이름.



“좋은 이름이네.”



즐거이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 2편으로





===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일단 이 소설에 대해 설명을 해야겠죠. 이번 8월 6일에 열릴 레이디버그 온리전에 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2D 레이디버그 소설입니다.

트레일러를 전체적으로 해석해 아예 본편을 통째로 만들어낼 예정이죠. 제목은 [Un Autre].프랑스어로 '또 다른' 이라는 뜻입니다.


일단 주의사항을 말씀드려야겠죠.


간단하게 설정을 설명하자면 가장 큰 특징은 기적이라는 개념 거의 없습니다. 신비한 치유의 힘 없고요 안면인식장애도 없습니다. 그래서 건물 부서지면 복구 안 되구요 사람도 죽고 다칩니다. 물론 히어로 애들도 예외 없습니다. 굉장히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고, 그래서 등장 인물들이 굉장히 똑똑하고 눈치도 빠릅니다. 다크한 성인용 정치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얼마나 잘 써낼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만족용이니 너무 크게 기대하진 마세요OTL


참고로 책의 수위는 15금입니다. 수위 때문이 아니라 내용이 좀 잔인해서요. 전개에 자비가 별로 없습니다 하하하하하


일단 책의 챕터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로 나누어서 각 계절당 에피소드가 6개씩 들어갑니다. 그래서 본편만 에피소드 24개. 일단 봄 에피소드는 모두 공개할 예정이에요 6편까지. 2편은 6월 말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각 챕터마다 주제가 있고 전체적인 주제도 여럿 있습니다만, 대체로 두 사람의 애정라인과 성장, 메인 스토리적으로는 치열한 두뇌싸움이 주가 될 거 같습니다. 최대한 2D 트레일러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하면서 제 취향을 섞었지만 보시는 분들 눈엔 어떨지 모르겠네요.


자캐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트레일러에 나오는 인물들만으로는 스토리를 짜내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ㅅ; 전체적으로 인물 수는 많지 않습니다만 악당은 몇 명 더 추가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라인은 메인 캐릭터들 위주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묘사는 차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페이지는 600-800페이지 사이로 아마 두 권으로 나눌 거 같습니다. 2권 세트로 3.5-5만원 사이를 생각 중입니다. 페이지에 따라 가격조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행사일 2주 전쯤에 딱 일주일만 전권 선입금 받고 끝낼 생각입니다. 인쇄비가 너무 비싸서 현장판매분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ㅅ; 그러니 책을 사고 싶으시다면 이 시기에 제 계정을 찾아와주세요. 통판도 이 때 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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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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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장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더니 ㅎㅎㅎㅎ...

※ 아드마리는 사귀는 사이입니다! 정체도 알아요!
별거 없지만 시즌1 26화 신캐 네타가 있으니 안 보신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아드마리] 속보






여느 때와 같은 아침.

역시 어느 때처럼 학교에 등교하는 아드리앙에게 수많은 아이들의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졸린 것 같지는 않지만 평소보다는 조금 멍한 얼굴로 천천히 자신의 반으로 향하던 아드리앙의 팔에 누군가가 달라붙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녕~ 아드리앙?”
“아, 클로이.”


금발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묶은 소녀가 그의 팔을 붙잡고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아드리앙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반대쪽 팔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안녕, 아드리앙? 오늘 일찍 왔네?”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예쁘게 눈꼬리를 휘며 요염하게 미소짓는 소녀의 모습에 클로이가 대놓고 눈가를 찌푸렸다. 매서운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점차 술렁거렸다. 하지만 다들 자리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손꼽히는 두 미녀가 남자 하나를 두고 싸우고 있는 상황이다. 그것도 이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소년, 아드리앙 아그레스트를 사이에 두고. 이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의 신경전은 계속되었다. 클로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왜 여기 있어?”
“왜긴? 우리 아드리앙을 보러 왔지~”


그 말과 함께 라일라는 아드리앙의 팔을 껴안고 살짝 그를 올려다봤다. 매력적인 미소에 주변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지만 아드리앙은 겸연쩍게 웃으며 손을 빼냈다.


“저기, 너무 가까운데.”
“어머, 가까우면 어때. 앞으로 더 가까워질 텐데~”


후후 웃으며 다시 다가서려는 라일라를 막은 건 클로이의 목소리였다.


“어이, 이봐. 떨어지시지. 누구 맘대로 아드리앙한테 달라붙는 거야?”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부르는 클로이를 돌아보는 라일라의 얼굴에 어려 있던 미소가 조금 가셨다. 의아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빙긋 웃으며 중얼거리는 라일라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어머, 꼬리 말고 도망친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뭐가 있나 싶어서 말이지. 너, 지금 아드리앙이 네 남친이라도 된 것마냥 구는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아드리앙은 너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을 텐데 말이지~ 나처럼 예쁜 소꿉친구가 있으니까 말이야?”


느릿하게 말하며 여유로운 미소를 날리는 클로이의 모습에 라일라는 부득 이를 갈았다. 곧 다시 호호 웃으며 살짝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는 라일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미모라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는 않는데. 이래뵈도 할리웃에 데뷔하지 않겠냐는 제안도 많이 들었다구?”
“흥, 그래봤자 헐리웃에 진짜로 간 건 아니잖아?”


둘 사이에서 파직파직 불꽃이 튀었다. 클로이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을 톡톡거렸다.


“재밌네. 너 정도면 뭐, 상대할 맛은 나겠어.”
“무슨 소리야?”
“이래봬도 아드리앙이랑은 소꿉친구라서 말이야. 덕분에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스킨십도 많이 했던 사이거든?”


앞머리를 휙 뒤로 넘기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클로이에 라일라는 순간 움찔한 것 같았지만, 아드리앙의 표정을 잠깐 살피더니 곧 다시 피식 조소를 날렸다.


“그러게, 아드리앙은 참 착한 거 같아~ 소꿉친구라서 귀찮아도 다 받아주는 걸 보면 말이야.” 
“뭐라고?!”
“한 번 해볼래?!”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는 클로이와 라일라.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흥미에 가득 찬 눈빛을 거두지 못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드리앙은 난감하게 웃다가도 별 관심이 없는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방금 막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를 찾아낸 아드리앙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부드럽게 웃는 아드리앙의 시선을 붙잡은 건 검은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였다. 바로,


“어, 마리네뜨.”


자신을 두고 대립하고 있던 둘을 내버려두고 마리네뜨에게로 다가서는 아드리앙의 발걸음이 깃털 달린 것처럼 가벼웠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물론, 클로이와 라일라도 서로를 노려보던 것을 잠시 멈추고 그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색을 띄고 마리네뜨의 앞으로 다가선 아드리앙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지금 오는 거야?”
“어, 응. 아드리앙 너는 이제 와? 근데 오늘따라 애들이 많네. 무슨 일 있나?”
“글쎄, 그것보다, 같이 들어갈까?”
“그, 그래!!”


허둥지둥 말을 꺼내면서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아드리앙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져 갔다. 소중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상냥한 눈빛에 괜시리 얼굴이 더 빨개지는 것은 마리네뜨 쪽이었다. 그렇게, 한창 좋은 분위기를 깬 건 날카롭게 소리치는 클로이의 목소리였다.


“아드리앙!!”


깜짝 놀라 돌아보는 아드리앙과 마리네뜨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클로이의 표정이 심통이 난 것처럼 부루퉁했다. 그것은 라일라도 마찬가지였는지, 웃고는 있지만 눈빛에 의심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왜 쟤랑 붙어 있지? 그것도 저렇게 다정하게.

클로이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뭐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여유로운 얼굴로 빈정거렸다.


“뭐 하러 마리네뜨같은 애하고 어울려 다녀? 수준 떨어지게 말이야~”


가까이 다가와 다시 팔을 붙잡으려는 클로이였지만, 아드리앙은 방금 전과는 달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클로이의 손을 피했다. 그에 어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클로이에게 아드리앙은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보니 말해야 하는데 깜빡했네.”
“어, 꺄악!!”


부드럽게 웃는다 싶더니,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환하게 웃었다. 졸지에 아드리앙의 가슴에 등을 기대게 된 상태가 된 마리네뜨는 입만 뻐끔거렸다. 놀라서 굳어있는 마리네뜨를 대신해 아드리앙이 해맑게 말했다.


“마리네뜨랑, 나. 사귀기로 했어.”


마치 곧 소풍을 가게 돼서 신나하는 어린아이마냥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비록 그 내용은 정말이지 폭탄선언이 따로 없었지만. 아드리앙을 제외한 모두가 그 말 한 마디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마리네뜨까지도. 한참을 지나 겨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라일라였다.

 
“……뭐?”
“……오, 아드리앙, 그런 재미없는 농담은 관둘 때가 되지 않았어?”
“그, 그래.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굴었지? 빨리 얘기 끝냈어야 하는데 얘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농담 아닌데?”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한 두 사람에게 다시금 쐐기를 박는 아드리앙의 얼굴에는 악의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클로이와 라일라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황했는지 마리네뜨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돌려 아드리앙을 쳐다보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아드리앙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려던 말들을 다 잊어버리고 다시 백지가 되긴 했지만.


“아, 아드리….”
“나, 마리네뜨를 좋아해.”


간결하지만 분명히 말하는 아드리앙의 대답에 다들 아무런 말도 못하고 꽁꽁 굳어있기만 했다. 툰드라 벌판처럼 싸늘한 분위기 가운데서 아드리앙의 주변에만 봄꽃이 가득 피어있는 것처럼 화사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너무 달라붙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좋아하는 사람한테 오해받고 싶지 않으니까.”


다정하지만 명백하게 선을 긋는 목소리. 그렇게 말하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려 마리네뜨를 쳐다보는 시선은 여전히 부드럽지만, 그 이상으로 열렬했다. 정말로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래, 소년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갈까, 마리네뜨?”
“어…. 응!!”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잡고 깍지를 끼는 아드리앙의 행동에 마리네뜨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곤란한 것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결코 싫지는 않은지 마주잡은 손을 더욱 꽉 쥐는 마리네뜨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그렇게 모두를 뒤로 한 채 교실로 걸어가는 아드리앙과 마리네뜨의 뒷모습에 배경으로 깔린 건 짜고 친 것처럼 동시에 던지는 라일라와 클로이의 비명같은 한 마디였다.


“이건 말도 안 돼!!”




- To Be Continued
읽으시는 분들 마음속에서!(찡긋


Posted by I.R.E
,

※ 춘님과 한 2인합작!

AU예요 고서점 손녀 마리네뜨와 부잣집 도련님 아드리앙~!!

마리네뜨가 20살이고 아드리앙이 25살입니다 ㅇㅁㅇ






[아드마리]

Buchini|st





딸랑,


맑게 울려퍼지는 방울소리와 함께, 옅은 바람 한 줄기가 열린 문틈 사이로 살랑 몸을 들이밀었다. 낡은 고(古)서점 안은 낮인데도 꽤나 침침했다. 낡은 책들을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흔한 스탠드 하나 설치되지 않은 가게 내부는 소리 하나 없이 적막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양 옆으로 보이는 책장들에 책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바닥을 밟으니 끼익 울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발을 내닫자마자 시원한 나무 향기와 낡은 종이 냄새가 섞인 듯한 독특한 향내가 코끝에 훅 번져왔다.


서점 안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정갈했다. 연갈색의 책장들과 선반 사이사이로 빼곡히 채워진 책들은 낡았지만 꽤나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고, 보기에 딱히 거슬린다 싶은 물건들도 없었다. 사실 책들 말고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갈빛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그 책상에 앉아있는 건 검은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였다. 안이 상당히 어두웠음에도, 바로 등 뒤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소녀의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었다. 책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꽤나 숙녀티가 나는 소녀였다.


평상시처럼 손님이 왔나 싶어 인사를 건네는 소녀의 목소리가 명랑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대꾸하는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살짝 어려 있엇다. 고작 인사를 했을 뿐인데, 마치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것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단번에 소녀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듣기 좋은 목소리는 마치 햇살같았다. 햇살을 담아놓은 듯한 따스함이 깃든 목소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소녀의 푸른빛 눈동자가 저를 부른 상대를 마주했다. 어두운 책장 사이를 걸어 소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선 남자의 머리카락은 햇빛으로 물들인 것만 같은 찬란한 금빛이었다. 그 목소리만큼이나.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지는 녹색 눈동자에 소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혹시, 주인 안 계십니까?”

“할아버지라면, 어. 지금은 일이 있어서 안 계세요. 근데….”



누구세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물어버리고, 소녀는 낭패라는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소녀가 귀여웠는지 남자는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청량하게 울리는 웃음소리에 소녀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 미안해요. 그 한 마디와 함께 남자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소개를 건넸다.



“아드리앙. 아드리앙 아그레스트라고 해요. 그쪽은?”



싱긋 웃는 그 시선에 소녀는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마주 웃어주었다.



“마리네뜨. 마리네뜨 뒤팽 쳉이에요.”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



“안녕, 마리네뜨?”

“꺄악!”



책장에 책을 꽂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는 마리네뜨의 손가락 사이로 책이 우르르 떨어졌다. 낭패라는 얼굴로 제 발밑을 한 번, 제 앞에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아드리앙을 한 번 흘겨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아 떨어진 책을 주워담기 시작했다. 힐끔 눈치를 보던 아드리앙이 살금살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책을 다 주운 뒤 들고 일어서려는 마리네뜨의 품에서 아드리앙이 책을 한 다발 뺏어들고 멋쩍게 웃었다.



“미안,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 아니에요.”

“이거 여기다 꽂는 거지? 들고 있어줄게, 천천히 해.”



호의 가득한 미소에 마리네뜨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그녀는 예정해두었던 장소에 책들을 골라 꽂아넣기 시작했다. 어느 새 자신의 존재는 잊어버린 듯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아드리앙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그가 간간히 말을 걸었다.



“이번엔 어떤 책들이야?”

“오래된 고전 문학들이요. 꽤 괜찮은 것들이 들어와서요.”

“표정 보니까 신난 게 보이네. 나도 좀 봐봐도 돼?”

“잠시만요, 이거 좀 마저….”



책을 집어들려던 마리네뜨의 손가락이 아드리앙의 손끝에 살짝 닿았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내다가, 이내 어색한지 하하 웃으며 눈치를 보는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 아니요! 하하하. 아그레스트 씨가 좋아하실 만한 책은 이런 거려나요?”



허둥지둥 책장을 뒤져 무언가를 꺼낸 뒤, 책을 두 손으로 들고 그에게로 확 내미는 마리네뜨의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그에 멀뚱멀뚱 눈만 깜빡거리다, 고맙다고 답하며 책을 받아드는 아드리앙의 목소리에 마리네뜨의 귓불이 새빨개졌다. 지금 고개를 들면 분명히 들킬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차마 움츠린 얼굴을 들지 못하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읽어볼까.”



그 말과 함께 아드리앙은 책상 바로 옆 바닥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깨끗이 관리하려고 노력하지만 빈말로라도 깨끗하다 보기 힘든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주저앉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입고 있는 옷부터가 꽤 비싸 보이는데.


아드리앙이 앉아 있는 자리를 돌아서 책상으로 다가간 마리네뜨가 가만히 의자에 걸터앉아, 제 바로 옆에 내려앉아 있는 아드리앙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언제 봐도 잘생겼다. 몇 번을 봤는데도 변하지 않는 감상평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몰래 한숨지었다.



“내가 와서 막 불편한 건 아니지?”

“…네?”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몇 초 뒤 마리네뜨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뇨, 단골손님을 싫어할 리가!! …늘 찾아와주셔서 감사히 여기고 있는 걸요.”



진심이었다. 애초에 거의 혼자 있는 장소였으니까. 그게 별로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자주 찾아와줘서 즐거운 건 사실이었다.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의 마음이 이런 걸까. 이러다가 어느 날 오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서운할 거 같은데.


마리네뜨의 대답에 아드리앙은 살짝 책상 옆쪽에 머리를 기대고서 웃었다. 들썩거리는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책상이 살짝 떨렸다.



“하하, 다행이네. 내가 죽치고 앉아있어서 민폐인 건 아닌가 했는데.”

“원래 손님은 잘 없는 걸요. 이런 허름한 고서점을 계속 찾으시는 건 아그레스트 씨 정도밖에 없어요.”

“뭐야, 그 말은 내가 괴짜란 건가?”

“그럴지도요.”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바로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웃음도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살짝 열어둔 창문 너머로 바람들이 불어와 커튼을 휘날렸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지 싸한 공기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지만, 곧 부드럽게 내리쬐는 햇살에 닿아 부서졌다. 상아색으로 옅게 내려앉은 햇빛이 말없이 책에 집중하는 두 사람의 주변으로 길게 늘어졌다. 햇빛의 그림자처럼 시간도 천천히 흘러가는 듯했다.


저 멀리서 흐릿하게 번지는 소리만이 간혹 들려오는 것을 제외하면 무척 조용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되어 군데군데 벗겨진 연갈빛의 나무 책장들이 조용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각사각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느릿느릿 지나가는 침묵을 조용히 깨부순 건 아드리앙의 목소리였다.



“역시 여긴 편하다니까.”

“…그래요?”

“응, 뭔가 안정되는 느낌이야.”



좋다. 그 말 한 마디와 함께 아드리앙은 살짝 고개를 들어 마리네뜨를 올려다보았다. 애써 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마리네뜨가 저도 모르게 아드리앙을 힐끗 돌아봤다가 후다닥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 마리네뜨를 보고 귀엽다는 듯이 작게 웃다가 아드리앙은 다시 종이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저도 그래요.”

“응?”

“여기를 좋아해요. 그냥, 여기의 분위기가 좋아요. 좀 밀폐되어 있긴 하지만 조용하고 아늑하고, 낡은 나무 냄새가 기분 좋기도 하고.”



처음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손에 자주 끌려왔었지만, 철없던 소녀는 사실 책들보다는 서점 내부에 맴도는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되었었다. 어린 소녀에게 높이 솟은 책장들은 몹시도 거대했고, 하나밖에 없는 창문 틈새로 내비치는 햇빛은 스포트라이트를 연상시켰다. 책장들 사이를 걸어서 그 쪽으로 향하는 걸음걸음이 그리 길게 느껴졌더란다.


그렇게 이곳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실 학기 중에는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반겨주는 할아버지의 미소를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할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야 여기로 돌아오게 되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피식 웃던 마리네뜨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 그녀는 무심결에 말을 꺼냈다.



“아그레스트 씨는, 어쩌다 여길 오게 된 거예요?”

“응? 나?”

“네.”



용기내어 묻자, 아드리앙은 잠시 고민하더니 싱긋 웃었다.



“나, 어릴 적에 큰 병을 앓았던 적이 있어.”

“네?”

“그래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하늘만 바라봤었어.”

“설마.”



지금 그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인다. 혈색도 좋고 어디로 보나 건장한 성인 남자의 몸이다. 놀라는 마리네뜨의 반응을 짐작했는지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야. 그래서 그 때는,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바라지 못했지. 동무라고는 비서가 가져다주는 책 한 권 정도. 모르긴 몰라도 우리집 서재에 있던 책들은 전부 다 읽었을걸?”

“그렇구나….”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의 표정이 꽤나 어둡다.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난처하다는 듯이 눈동자를 위로 굴리던 아드리앙이 가만히 입을 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여기는 정말 우연히 발견한 곳이야.”



찰나의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얼마 안 가서 잊어버렸을 법한, 아주 작은 호기심.



“구석에 있길래 뭐 별 거 있겠냐 싶었는데, 들어와보니 이거 참 신세계더라구. 재밌는 책도 많고 주인 할아버지도 좋은 분이고. 주인 어르신이랑 얘기를 나누다보니 고서에도 흥미를 가지게 됐고.”



그러던 게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간다. 마리네뜨와 만난 건 한 달 전쯤이다. 늘 반겨주던 할아버지가 아닌 웬 어린 소녀가 있는 걸 봤을 때는 솔직히 조금 놀랐지만, 그는 이건 이것대로 좋다고 생각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대를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니까. 특히 그에게는.



“그러다가 널 만난 거지.”



제 손을 가만히 그러잡는 따뜻한 온기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시선에 차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조용히 물었다.



“마리네뜨. 무슨 일 있어?”

“네? 무슨….”

“시치미 떼지 마. 무슨 일 있는 거지?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잖아.”



말해봐.


뒤돌아 앉은 아드리앙은 다른 한 손도 뻗어 마리네뜨의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커다란 손은 무척 따뜻했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는 꿀을 발라놓은 듯이 부드러웠다. 나른해진다 싶을 정도로 편안한 울림에 기분이 편안해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저를 향하는 시선이 무척이나 상냥해서 마리네뜨는 어느 샌가 더듬더듬 담아두었던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사실 할아버지가 좀 걱정돼요.”

“역시 그거였구나.”

“요즘 병세가 좋지 않으시대요. 조만간 다시 병문안을 가봐야 알 거 같긴 하지만….”

“그래.”



주인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 서점을 무척이나 아끼시는 어르신이 손녀라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맡길 정도니 심각하리라는 것도 예상했었고.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모습이 지적이고 멋진 분이셨는데, 언젠가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뼈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초췌해지신 모습에 놀란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저를 웃으며 반겨주시는 모습에 멍해졌었다. 무언가가 속에서 왈칵 치솟는 느낌이었다. 남인 저도 이런데 손녀인 그녀는 오죽하겠는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울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마리네뜨가 안타까워서, 아드리앙은 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런 아드리앙의 마음을 아는지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이다가, 기어코 말을 꺼냈다.



“아그레스트 씨.”

“응?”



왜? 그렇게 묻는 듯한 아드리앙의 녹색 눈동자를 보며, 마리네뜨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이 고서점이요. 할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어요.”

“응.”

“저는 방학중이라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만, 학기가 시작되면 대학으로 돌아가야 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마 여길 관리해줄 사람도 사라지겠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아드리앙의 표정이 조금, 아주 조금 변했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이 고서점이 사라져도, 나와 할아버지를 기억해 줄래요?”



아드리앙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청명하던 하늘 위로 비구름이 끼더니, 지면에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천천히 떨어지던 빗방울은 곧 세찬 빗줄기가 되어 맹렬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겨울이라 그런지 제법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쏟아지니 공기는 마치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거리, 낡은 고서점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우산을 쓰고 멍하니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OPEN]이라 쓰여져 있는 팻말을 가만히 쳐다보던 남자가 살짝 제 손을 문에 가져다댔다. 끼익, 소리가 오늘따라 음산하게 울리며 문이 열렸다. 재빨리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고, 우산을 접어 한쪽에 놓여져 있는 통에 담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가 와서 그런지 안은 한층 더 어두웠다. 내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리네뜨?”



있어? 가만히 부르는 목소리에 답하듯 저쪽 구석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왜 대답이 없지? 의아한 마음에 아드리앙은 천천히 걸어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갔다.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에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섬뜩해진다.


가까이 다가가니 마리네뜨는 늘 앉아 있던 의자에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반갑게 부르려고 했지만, 어둠에 눈이 익자 아드리앙은 제 눈앞에 보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알아보고 흠칫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었다. 아니, 어두웠기에 더 눈에 띄었던 건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마리네뜨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착잡하게 내뱉어지는 한 마디에 아드리앙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마리네뜨는 피식 웃었다. 당장 본인이 죽을 것만치 초췌한 얼굴이면서, 그녀의 말투는 의외로 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감정이 메말랐다 싶을 정도였다.


덜컹, 소리를 내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 속에 얼마나 있었는지 마치 밝은 곳에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아, 맞다. 말씀하셨던 책이요, 어젠가 그제 들어왔더라구요. 지금 가져다 드릴게요.”

“….”

“되게 재밌을….”



왈칵 쏟아지려는 감정을 눌러가며 마리네뜨는 애써 밝게 웃었다. 이상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눈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뜨뜻한 무언가에 마리네뜨는 아무렇지 않은 척 눈물을 훔치며 씩씩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커다란 손이 마리네뜨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두 팔로 자신을 놓칠세라 조심스레 끌어안고 있는 아드리앙을 마리네뜨는 밀쳐낼 수도, 뭐라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입을 열면 무언가 터질 것 같은 예감에.



“괜찮아. 그런 것쯤은.”



상냥하게 등을 토닥거리는 아드리앙의 손길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안 돼. 아니야, 버텨, 버텨야 해. 지금은 안 돼. 적어도 이 사람이 떠나고 나서, 그 후에…. 아직은 괜찮아.


울지 마.



“힘들 때는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는 게 최고야. 내가 아팠을 때도 그랬거든.”



그런 마리네뜨의 생각을 읽었는지, 아드리앙은 담담히 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난 늘 아프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여 살았어. 그래서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었지. 그런데 어느 날은 너무 울고 싶은 거야. 서러워서.”



왜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걸까. 왜 여기에 이러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새장 속의 새처럼, 갇혀져 있어야만 하는 인생은 지긋지긋한데. 하지만 울면 내가 너무 불쌍해지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울 수 없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처음으로 아이처럼 막 울었는데, 웃긴 건 울고 나니까 오히려 속이 후련해지더라고.”



나를 가뒀던 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밖에, 내 아집밖에 없었던 작은 세계가 처음으로 부서졌던 순간. 똑똑히 기억한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처음으로 구원받았다 느꼈던 그 때의 감정을, 그 벅차던 순간을.



“마리네뜨, 자. 여긴 나랑 너뿐이잖아. 아무도 없어. 누구도 널 보지 못할 거야.”



물론 나도.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 셔츠를 적셔가는 무언가를 느낀 아드리앙이 작게 미소지었다. 조금씩 새어나오던 흐느낌이 어둠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더니,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와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 이따금 창문께서 번쩍이는 번개가 어스름한 서점 내부를 살짝 엿보았다. 계속해서 울고만 있는 마리네뜨를 토닥이는 아드리앙의 손길은 부드러웠고, 그에 그녀는 더욱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보지 않겠다는 말을 지키려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 쪽만을 바라보는 아드리앙의 눈매가 살짝 곤란하다는 듯이 찡그려졌다. 안절부절 못하는 거 같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실 지금 마리네뜨를 끌어안은 손이 자꾸 떨리려고 하는 걸 자제하는 것만도 좀 벅찼다. 폭주하면 안 된다. 안 돼. 몇 번이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진정하기 위해서.


한참을 울고 난 뒤 좀 진정이 되었는지 마리네뜨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저기, 저기요.”

“응.”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미친 걸까요?”

“….”

“여기가 사라지는 것도 싫은데….”



당신을 만나게 되지 못하는 게 더 슬퍼요.


차마 그 말까지는 꺼내지 못하고 꿀꺽 삼켜버린 마리네뜨의 입술이 꾹 닫혀 있었다. 아드리앙에게 꼭 안긴 상태로, 옷깃을 꽉 붙잡고 있던 마리네뜨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얼 그리도 두려워하는 걸까. 잠깐 무언가 고민을 하는 듯하던 아드리앙은 이내 결심한 듯이 말을 꺼냈다.



“마리네뜨, 나한테 올래?”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몰랐다가, 다음 순간 그 의미를 알아들은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마리네뜨의 시선이 아드리앙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눈동자가 퍽 진지했다.



“내가 여기를 살게. 그리고 너를 고용하는 거지. 나는 언제나처럼 가끔 여기를 찾아오고, 너는 여기서 일하다가 나랑 같이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때?”

“…네? 어…?”



혼란스러운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자신만 멀뚱히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표정에 아드리앙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예상했다는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며 그는 짐짓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이거 섭섭한데. 이래뵈도 나름 고백하는 건데 반응이 너무 싱거운 거 아니야?”

“고백이요…?!”

“…싫어?”

“아, 아니요.”



기뻐요.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 마리네뜨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전히 혼란스러운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마리네뜨에게 그는 굳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마리네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를 좋아하세요?”

“응.”

“…왜요?”

“좋아하니까.”



담백하게 이어지는 고백에는 어떠한 미사여구도 없었다. 그만큼이나 직접적이고 꾸밈없이 다가오는 진심에 마리네뜨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이런 전개가 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지만, 그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한다.


자신도, 이런 식으로 프로포즈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말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을 뿐.



“하지만…,”

“응?”

“하지만, 저로 괜찮으시겠어요? 아그레스트 씨 정도면 분명 더 좋은 여자가 많을 거고…, 저는 아직 어리고….”

“응, 그럴지도 모르지.”



역시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마리네뜨의 눈빛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침착하려고 애쓰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리네뜨는 씁쓸한 듯이 말을 꺼냈다.



“그렇죠, 역ㅅ….”

“하지만 나는 네가 좋은걸.”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 행복하다고 느꼈던 건.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원래 여기로 걸음할 때도 즐거웠지만 너를 만나고 나서 몇 배는 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나를 향해 웃어주는 네 미소가 좋았고,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설레기 시작했었다.


알게 된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빠져버린 걸까.



“세상에 여자가 많으면 뭐해. 내가 좋아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되잖아?”

“….”

“너는 어때?”

“네?”

“정말 나로 괜찮은 거야?”



진지하게 말하는 아드리앙의 얼굴을 마리네뜨는 넋나간 듯이 쳐다보았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한 상대가 아닐지도 몰라. 일단 봐. 지금 나, 제가 약해졌을 때를 파고들고 있는 거라고. 무지 비겁하잖아?”

“…아그레스트 씨.”

“이름.”

“네?”

“아드리앙이라고 불러줄래?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성은 너무 딱딱하니까. 살짝 볼멘소리로 말하는 아드리앙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진지해서 마리네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만을 벙긋거렸다. 그는 마리네뜨를 놓아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대답은?”



장난스레, 하지만 꽤 초조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아드리앙을 향해 마리네뜨는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요!”



그 한 마디를 던지는 것과 동시에 마리네뜨가 도전적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든 순간 그들의 등 뒤로 번쩍 번개가 떠올랐다. 아드리앙의 놀란 얼굴과 더불어, 환하게 보여진 마리네뜨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그걸 본인도 깨달았는지,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푸욱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뺨을 두드리는 마리네뜨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아드리앙이 갑자기 팔을 벌려 다시금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우앗! 짧게 비명을 내지르며 끌어안겨진 마리네뜨와 달리, 아드리앙은 작게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 안 되겠어.”

“어, 저기….”

“넌 너무 귀여워.”

“예에?!”



이게 웬 쌩뚱맞은 소리란 말인가. 맥락을 이해할 수 없어 그저 당황하고만 있는 마리네뜨와 달리 아드리앙은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내가 고생하는 모습이 보이는 거 같다. 후우.”

“그게 무슨?”

“뭐, 몰라도 돼. 일단 지금은 이러고 있자.”



비가 그칠 때까지는. 그렇게 말하며 토닥토닥 제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이더니, 몇 번을 멈칫거리다 조금씩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등을 살짝 끌어안자, 그에 좀 놀랐는지 순간 멍해졌던 아드리앙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더 이상의 대화가 오가는 일은 없었다. 그도, 마리네뜨도 눈을 감고 말없이 서로 끌어안고만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애잔하게.

내리는 비가 그칠 때까지.






- THE END







===

[buchini|st] 제목의 뜻은 루마니아어로 ‘고서점 점원’을 뜻합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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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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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전력으로 쓰려고 했던 글이에요! 아드리앙의 독백 느낌이랄까.



[아드버그] 마리오네뜨






나는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세계적인 디자이너 '가브리엘 아그레스트'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그의 브랜드 전속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는 15세의 소년이다.


아마 파리에서 어느 정도는 유명한 이름이지 않을까. 모델이라는 직업상 당장 거리에 나가면 나를 알아보고 힐끔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얼굴을 붉히며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무언가를 하면 대단하다고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고, 그럴 때마다 다들 내게 아버지를 닮았다고 찬사를 보내며 대단한 사람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자인데다 잘생기고 뭐든 이룰 수 있는, 겉으로 보이는 나는 무척 완벽한 사람이겠지. 나 자신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기대해주는 것에 감사하고 그만큼 노력하고는 있지만,그런 삶이 아예 답답하지 않느냐고 묻느냐면 서슴없이 NO를 외칠 수 없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뭐 하나 모자랄 것 없어뵈는 삶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거기에 내 의지라곤 거의 없었으니까. 눈에 띄는 건 물론 좋아하지만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안다. 주위의 시선들과 더불어 아드리앙 아그레스트라는 이름의 무게까지. 가끔 그 이름의 무게가 너무 벅차다.


사실 내 삶은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꽤나 어처구니 없을지도 모르는 이유로 가득하다. 모델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원하시니까. 스케줄에 쫓기고 가끔 힘들 때도 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는 건, 늘 완벽한 모습만을 보이려고 하는 건 그래야 아버지가 조금이나마 나를 돌아봐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들 나보고 특별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그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며 친구를 사귀고, 생일이 되면 친한 친구들을 불러모아 파티를 하고, 주에, 아니, 달에 한 번쯤은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며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일상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고 그저 '나'로서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대단하지 않아 보이지만 내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바란다고조차 말할 수 없다.


아버지가 원하지 않으시니까.

아버지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묵묵히 걸어나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버지는 변했다. 예전에도 바쁘고 엄하신 분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지금의 아버지에게서는 벽이 느껴진다. 서릿발같은 차가운 눈동자 앞에 서면 불길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게 된다. 조금씩 바닥으로 내려간 시선 끝에 보이는 아버지의 구두를 빤히 응시했다. 반질반질하고 윤택이 나는 새하얀 구두는 진열장 안에서 막 꺼내온 것처럼 깨끗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만 같은 구두에 새삼 거리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아주 원망하지만도 못하는 내 자신에 실소가 터진다.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련하다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사라지신 후로 아버지가 예전같지 않아진 건 사실이지만 나를 과할 정도로 싸고도는 것도 사실이니까.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같이 생활해온 나는 잘 알고 있다. 원체 엄하시니까 걱정을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거겠지. 그런 정황을 보면 뭔가 위험한 일이라도 있나? 싶으면서도 가슴 한 켠에 움트는 서운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불이 꺼져 있는 어두운 저택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그 앞으로 보이는 것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한 침묵 뿐이다. 어둠이 잔뜩 깔려 있는 것처럼 새까맣게 맨들거리는 바닥에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작게 갈린 뾰족한 어둠들이 내 발바닥에 박히는 것만 같았다. 날카로운 조각들은 천천히 내 발에 피멍을 새기고, 멍울진 상처들은 내 심장으로 타고 올라오며 따끔거리는 고통을 남긴다.


아픈가? 모르겠다. 이미 어느 정도가 아프고 덜 아픈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내 마음은 무감각해져 있었다. 지긋지긋했고, 그래, 외로웠다. 홀로 식당에 앉아 밥을 먹고, 말할 상대도 하나 없는 긴 하루를 보내고, 아무도 없는 저택으로 돌아와 애써 괜찮다고 자위하며 외로운 밤을 지내는 건.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도 못하는 것이 나의 모순이었다.


가끔, 나는 내 손과 발에 하얀 실이 묶여져 있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여기는 무대 위.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라는 인물의 삶을 배경으로 한 연극. 인형사의 의도에, 대본에 따라 무대 위로 걸어나와 춤추는 인형들.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건 실에 매달려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는 나. 그 모습을 상상하다보니 작게 실소가 터졌다. 그 말대로다. 누군가가 정해준 길만을 걸어가는 내가, 누군가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는 인형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 실의 끝을 쥐고 있는 건 아버지도, 나를 평가하는 무수히 많은 이들도 아니었다.


그 실을 잡고 있는 건 바로 나였다. 자유롭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과 반대되는 또 다른 자아, 애정에 목말라있는 어리고 어린 작은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부여한 이 이름에 책임을 느끼면서도, 이렇게라도 사랑받고 싶어 매달리는 내 안의 어린 부분이 지금의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더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이 실을 놓치면 어떻게 될까? 실이 끊어진 인형은 다시 제 발로 일어서서 걸어갈 수 있을까? 만약 그게 아니면? 이제껏 쌓아왔던 그 많은 것들이 모두 '아드리앙 아그레스트'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면?


그럼, 실을 끊은 뒤의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이름을 버린 후의 나라는 존재는 과연 누군가의 애정을 받을 만한 사람인 걸까. 실을 끊어버린 뒤에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정말로 인형일 뿐이었다면. 완벽한 외피 속에 감춰진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에 다들 실망하고 멀어진다면 어떡하지. 덜컥 몰아치려는 두려움을 애써 잠재웠다. 그럼에도 나를, 내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들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겁이 났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기에,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음 속에 피어나는 의문들을 애써 외면하며 그저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때,

나는 그녀를 만났다.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태양은 환했으며, 가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사실 날씨와는 별개로 마음은 꽤나 우울했다. 아버지와의 저녁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막 받았던 순간이니까. 기분 전환 겸 산책이나 나가야겠다 생각하고 밖으로 나왔다. 살짝 눈을 내리깔고 길을 걸어갔다. 먹구름처럼 마음을 가득 뒤덮은 실망감을 애써 털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만 잊어버리자 생각하고 그냥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을 뿐이었는데, 고개를 위로 올리자마자 무언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붉게 빛나던 한 소녀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가던 그 순간을, 아마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공중을 도약하며 날아오르는 붉은 가면을 쓴 소녀. 한 순간이었지만, 꽤나 독특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소녀에게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째서였을까? 제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소녀의 선명한 시선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감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날 파리에는 악당의 출현과 더불어 레이디버그라는 영웅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뉴스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게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걸고 악당들과 싸우는 그녀는 무척이나 자유롭고 그만큼 꾸밈이 없었다. 어디서 왔는지, 그 가면 뒤에 누가 숨어 있는지 모르는데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가슴 한 구석이 이상하게 술렁거리곤 했다. 그녀에겐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내가 정말로 손에 넣고 싶었지만 붙잡지 못했던 것들. 자유, 신념, 그 모든 것들보다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


언젠가 히어로 일이 힘들지 않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악당들을 상대하는 일은 솔직히 시간도 많이 들거니와 무척 번거롭다. 지겹지 않느냐고 물어봤을 때,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곧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지겹지. 넌 이게 안 지겨울 거 같애? 가끔 정말 나가기 싫을 때도 있고. 누군가 대타라도 뛰어줬으면 좋겠다니까."


정말 대놓고 말하는 모습에 솔직히 좀 놀랐다.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그녀의 눈빛은 무척 진지했고, 조금은 음울했다. 밝고 강하기만 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도. 하지만, 놀라는 내 얼굴에서 눈을 돌리며 앞을 쳐다보는 푸른빛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았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한 그녀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약속했으니까.”


이미 하기로 한 거,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해 보고 싶다고 웃으며 돌아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나는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내게 무엇이 부족했던 건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건 바로 용기였다. 자신의 선택에 긍지를 가지고, 힘들어도 어려워도 후회하고 돌아보기보단 앞을 내다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는 올곧은 정신. 나와는 전혀 달랐다. 선택할 수 없는 삶을 답답하게 여기면서도, 미래가 두려워 그런 불안조차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움츠리기만 하는 자신의 비겁함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창피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푹 고개를 숙였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겁쟁이는 나였다. 내딛으면 분명 길이 있음을 확신하면서도 절벽으로 떨어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아가지 못하는 나. 주어진 현실이 답답하면서도 사실 그런 현실조차 더 최악으로 치달을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당당하고 올곧으면서도, 힘들 때는 솔직하게 제 마음 한 켠을 내보일 줄 안다. 억지로 강한 척 하지 않아. 힘들고 어려워도 그 길로 나아가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다. 늘 망설이고 고뇌하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기만 하며 남의 손짓에 따라 흔들리기만 하는 나와는 천지차이다.


물론 이건 계기였을 뿐이다. 처음에는 그 강인한 성격에 반하고, 부드럽게 웃는 미소에 두근거렸으며 나를 향하는 무심한 시선까지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모든 모습이 좋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도 그 작은 온기 하나에 떨리는 내 심장을 과연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의 그런 강함이 부러웠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본 모습을 내보이기 두려운 건지도 몰라. 블랙캣으로 만날 때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그녀 앞에 설 수 있으니까. 가면 뒤의 완벽하지만 초라한 내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온갖 껍데기로 가득한 본래의 내 모습을 너에게만은 내비치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존심이었다. 좋아하는 네 앞에서는 최대한 멋진 사람이고 싶다는 나의 이기심.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는 폼을 잡고 싶은 법이잖아.


아마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변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네가 반할 정도로 아주 멋진 사람이 되어도 모자랄 판에 제 앞가림 하나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멍청이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너는 너무 눈이 부셨고, 그런 너를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마이 레이디, 나의 사랑스러운 무당벌레 아가씨. 나는 어떡해야 좋을까? 너의 곁에서 함께하고 있어도, 지금 네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라고 자부함에도 더욱 초조해지기만 하는 이 마음을 어째야 좋을까.


자유롭고 싶다. 진심으로. 나를 얽어맨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본연의 모습으로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조금만 힘을 주면 끊어버릴 수 있을 듯한 얇은 실들의 무게가 내 팔다리를 짓누른다. 손을 흔들어 가볍게 털어냈다. 하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실들은 책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시금 내 신체와 이성을 옭아맨다. 그럼에도 나는 천천히, 계속해서 몸을 흔든다. 이 실을 끊어낸 뒤, 적어도 더 이상 예전과 같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좀 더 희망찬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변하고 싶은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너에게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어서,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다.


마이 레이디. 내게 있어 너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명제와 같아.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열렬하게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배웠으니까. 나를 밀어내는 너의 손길조차 애틋할 정도로 네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는걸. 그러니까 노력할게. 기다려줘. 당당하게 네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그래서 언젠가,

인형이 아닌 사람으로서 네 앞에 설 수 있도록.











==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니까 정말 손이 안 움직이네요 흑흑ㅠㅁ ㅠ… 예~전에 레이디버그 전력 주제 중 [인형]이라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쓰고 싶었던 내용을 가볍게 끄적여보자! 라는 마음이었는데 어쩌다 이리 길어졌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내용은 간단히 말해서 '실을 끊은 마리오네뜨' 입니다. 제목을 저렇게 정하려다가 스포성이 짙어서 그냥 마리오네뜨라 명명했습니다! 인형=아드리앙 느낌인데, 아드리앙이 처음으로 제 팔다리의 실을 끊어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레이디버그라는 설정이에요. 아드리앙이 왜 레이디버그를 좋아하게 되었을까를 좀 고민하다가 제 마음대로 창작해 보았습니다. 솔직히 쓰면서도 이걸 어떻게 이해가 되게 적지…라는 고민을 무지 많이 했고, 다른 연출도 생각해봤지만 그걸 쓰려다간 이미 써둔 걸 다 엎어야 하는 실정이라(…) 그냥 이걸로 밀고 가기로 했습니다!^ㅁ^ 처음에 쓰기로 작정했을 때는 몰랐는데 이게 감정선을 풀기가 너무 어렵더라구요. 덕분에 문단 배치를 좀 고민했습니다.


아드리앙의 상황은 웹피소드에서 아드리앙 파트를 참고했습니다:)


아무래도 본편 기반을 주로 쓰려다보니 떡밥이 없으니까 쓰는 주제도 다 거기서 거기가 되어버려서ㅠㅠ 좀 색다른 게 적어보고 싶어져서 간단히 적어봤습니다. 아하하 늘 아드리앙을 굴리는 것에 매우 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음엔 좀 달달한 거 적어줘야겠어요 언제 칼들고 쫓아올 거 같아 무섭네요’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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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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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전력. 안나님과 2인 전력!





[아드마리]

Merry Christmas






“마리네뜨.”



티키가 조용히 그녀를 부르자,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원피스를 손에 들고 있던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눈가를 초승달처럼 곱게 휘고서 살짝 빨갛게 홍조를 띠고 있는 얼굴은 어딘지 들뜬 것처럼 몽롱했다. 히죽 웃고 있는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아, 눈빛은 왠지 초조한 것 같기도.


그런 마리네뜨의 앞에는, 마구 펼쳐진 채로 침대 위를 수놓고 있는 옷들이 있었다. 몇 시간 째 그 앞에서 계속 고민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언제까지 고르고 있을 거야?”

“그치만그치만, 아드리앙과의 데이트라구!!”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들고 있던 옷을 꼭 끌어안고, 황홀한 듯이 얼굴을 붉히는 마리네뜨의 머릿속에서는 다시 망상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아드리앙이 먼저 제안한 데이트였다. 말하면서도 쑥스러웠는지 머리를 긁적이는 아드리앙 진짜 귀여웠는데. 아드리앙이 깜짝 놀랄 만큼 예쁘게 입고 가야지. 그럼 아드리앙은 분명 오, 마리네뜨. 너 오늘 정말 예쁘다라고 말하며 엄청 근사하게 웃어줄 거야.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 오늘 네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워! 라고 말하면서 키, 키, 키스를……!!



“마리네뜨!!”



헉. 저도 모르게 입술을 내밀고 있던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열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망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마리네뜨의 주변을 빙빙 돌던 티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물론 데이트야 좋지만, 빨리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슬슬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있잖아?”

“앗, 벌써?!”



어두워진 창밖을 휙 쳐다보다가, 탁상시계로 시선을 돌린 마리네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침대에 널려 있는 옷들을 두루 훑어보던 마리네뜨는 결심한 듯이 옷들 몇 개를 집어들었다. 다 입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던 마리네뜨가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음, 역시 이걸로 해야겠다.”



검은색의 상의와 하얀 반바지, 모자가 달린 붉은빛의 산타 케이프를 몸에 걸친 마리네뜨의 모습은 딱 보기에도 발랄하고 예뻐 보였다. 살짝 푸른끼가 도는 흑발이나 하얀 얼굴이 빨간 케이프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좋아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은 곧 다가올 데이트에 대한 기대로 밝아졌다. 그럼에도, 마리네뜨를 쳐다보는 티키의 표정이 꼭 딸을 물가에 내놓은 어머니를 연상시켰다.



“그렇게 입고 나가면 춥지 않을까?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괜찮아. 이 케이프 생각보다 꽤 따뜻하다구.”



마리네뜨는 실실 웃었다. 사실 감기에 걸린다고 해도, 아드리앙 앞에서는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사실 그의 입에서 예쁘다는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좋아서 승천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너무 기뻐서 방방 뛰어다니느라 더워질지도.


슬슬 나가지 않으면 차가 막혀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거 같다. 재빨리 물건을 챙기고 가방을 옆에 매고서 마리네뜨는 웃었다. 



“그럼, 나가자. 티키.”




*


파리의 거리는 언제나보다 더 북적거렸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꽤나 분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는데, 약속 장소인 샹젤리제 거리 근처로 점점 다가갈수록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도로가를 꽉꽉 채운 자동차들의 클락션 소리마저도 묻어버릴 만큼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들이 참으로 활기찼다. 다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곳곳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서 산타 복장을 하고 어깨에 진 자루에서 선물을 나눠주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 보였다. 아이들이 오밀조밀하게 몰려서 선물 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은 꽤나 흐뭇한 장면이었다. 얼굴에 하얀 턱수염을 붙이고 장난치듯이 웃는 산타들을 가만히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곧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새까만 전선들이 얇게 휘감겨 있었다. 그 위에 매달린 불빛들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 조용하게 그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다가올 밤을 위해 맹렬하게 타오를 준비를 하는 것처럼.


길가에 세워진 노점상들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가게들 문 위에 걸려 있는 예쁜 크리스마스 화환들에 저도 모르게 눈길을 주다 보면, 곧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안쪽에도 시선이 가게 된다. 개중 어느 가게는 정말로 예쁘게 꾸며져 있어 홀린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 밖으로 나오는 마리네뜨의 손에는 향초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빨간색과 초록색. 사버렸다- 고 중얼거리면서도 마리네뜨는 피식 웃었다.


아드리앙한테 주면 좋아할까?


걔야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겠지만, 그래도 모처럼 주는 선물인데 거절하지는 않겠지.


향초를 쳐다보다가,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던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몇 번 깜빡거렸다. 곧 다시 기분 좋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던 마리네뜨의 주변을 서늘한 바람들이 훑고 지나간다. 화륵 공중으로 휘날리는 붉은색 케이프가 마치 깃발처럼 바람을 따라 춤을 춘다.


약속 장소는 샹젤리제 거리 근처에 있는 커다란 광장이었다. 여기서 만난 뒤 같이 거리를 걷기로 예정했었다. 광장 안에 있는 커다란 가로수 아래에 살며시 기대어, 마리네뜨는 자꾸만 삐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려고 노력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아무렴 뭐 어떠랴. 티키와 대화하기에는 너무 보는 눈이 많았기에 심심해진 마리네뜨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런저런 망상을 떠올리다가, 꺄악 소리지르는 마리네뜨를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약속 시간이 되었다.


아드리앙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기다렸다. 약속 시간서 10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아드리앙에 이상함을 느낀 것도 잠시였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면서 마리네뜨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오지 않는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아드리앙에게선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봐도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소리만 반복해서 되돌아올 뿐이다. 겨울이라 벌써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바람이 점점 쌀쌀해지고 있었다. 서 있던 자리에서 작게 팔자를 그리며 돌아다니던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결국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마리네뜨의 뒷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터벅터벅 인파를 비집고 힘없이 거리를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표정은 나오기 전과 달리 조금은 풀이 죽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운함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게 정말 소박맞은 아낙네 같았다. 차라리 오지 못하겠으면 전화라도 해주지, 전화까지 꺼두고 이렇게 바람맞히는 건 또 뭐냔 말이다.


아드리앙 앞에서는 아닌 척했었지만 사실 되게 많이 기대했었다. 사귄 이래로 그에게서 이런 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하물며 크리스마스는 연인들의 날이라잖아. 기대했던 건 자신뿐이었던 걸까. 그는 바쁘니까,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하려 애써도 축 처지는 몸은 어쩔 수 없다.


지금쯤이면 설마 광장에 도착했을까? 어차피 자신은 이미 나와버렸지만. 핸드폰도 꺼버렸다. 지금 기분으론 도저히 다른 애들이 보내는 크리스마스 인사를 받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이기적이긴 했지만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더 우울해진다. 그러다가 심통이 났는지 마리네뜨는 문득 자리에 멈춰서 크게 발을 구르며 소리질렀다.



“아드리앙, 이 바보!”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마리네뜨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입술을 깨물면서 짜증을 쏟아내는 마리네뜨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솔직히 짜증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신기하지 않은가. 데이트를 신청한 건 그 쪽인데 이렇게 바람을 맞히다니!


마구 화를 내던 중,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자신을 흘끗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리네뜨는 뻘쭘하게 웃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화를 내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물 먹은 스펀지처럼 더더욱 우울해진다.


‘나’를 그렇게까진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가 반했던 건 레이디버그니까. 변신하고 있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날 좋아한다고 해줬는데. 결국 그런 식으로라도 서로 옆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역시 운명이라고 말하며 아드리앙이 제 손을 꼭 잡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솔직히 그 때는 이게 과연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었는데, 나는 정말로 꿈을 꾼 걸까.


유독 시린 바람에 케이프를 꼭 붙잡고 몸을 떨었다. 추워서 그런 걸까. 자꾸 시야가 흐릿해진다. 나 안경도 안 끼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손에 들린 봉지 소리가 바람에 바스락거린다. 그에 더 서러워졌다.


만약 네 말대로 우리가 운명이라면,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너는 나를 찾아낼 텐데.


그 때였다.


사람들 사이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커다란 손이 마리네뜨의 팔을 세게 붙잡자, 깜짝 놀라서 뒤로 돌아서는 마리네뜨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방울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푸른빛의 시선 끝에 맨 처음 보인 색깔은 녹색이었다. 초록색 눈동자. 들고 있던 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딸꾹, 숨을 넘기는 마리네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어떻게.


아드리앙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확히는 정장 위에 검은색 외투를 입고, 패션쇼라도 했는지 평소와는 머리스타일이 좀 달랐다. 하지만 꽤나 황급히 달려왔는지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었을 머리카락은 마구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은 아드리앙이 하하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 울어?”

“어….”

“미, 미안해. 촬영이 늦게…, 핸드폰이 망가져서….”



나중에 만나면 따지려고 했는데, 화내려고 했는데.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는 아드리앙의 표정이 정말로 미안해 보여서, 마리네뜨는 멍하니 그런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리저리 굴러가는 초록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정말 당황했는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정말 화났나 싶어 눈치만 보고 있는 아드리앙을 보던 마리네뜨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펑, 하는 굉음과 함께 광장 쪽에서 커다란 먼지구름이 일었다. 동시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그들의 귓가에 꽂혔다. 그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도 놀랐는지 그쪽 방향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뭐야? 뭐야?!”

“저기 무슨 일 났나?”



점점 커져가는 수군거림 사이를 벗어난 두 사람이 각기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골목 사이에서 반짝 빛이 빛나더니 변신한 두 사람이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이야, 저거 참. 난리도 아니네. 눈가에 손을 올리고 멀리 내다보던 블랙캣이 장난스레 대꾸하자, 레이디버그는 피식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게. 또 어떤 사람이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에 저리 날뛰고 있을까~?”

“뭐야, 왜 내쪽을 쳐다봐?”



지레 찔리는지 몸을 움츠리는 블랙캣을 향해 가만히 눈짓하던 레이디버그가 손에서 요요를 꺼내, 근처 가로등으로 던졌다. 실이 팽팽하게 묶였는지를 확인하자마자 뛰어내리는 레이디버그에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먼저 간다!”

“야아, 같이 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광장으로 날아가는 레이디버그의 뒤를 블랙캣이 황급히 쫓았다. 볼멘소리를 던지고는 있지만,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을 보던 블랙캣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악당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하는 사람은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꼭 같이 파티하자고 약속해놓고도 집을 비우는 부모님에 서운하지 않을 아이는 없을 것이다. 나만 불행한 건 불공평하다며 세상의 모든 행복한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겠다고 소리치던 빌런은,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을 빼앗긴 것에 땡깡부리는 작은 아이였을 뿐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제 부모님에게로 뛰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던 레이디버그는 작게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건 모두 마찬가지구나.


그러고 보니 부모님.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블랙캣을 돌아보았다. 부모님에게 안겨 밝게 웃는 아이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퍽 쓸쓸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흐뭇해 보이는 게, 부모님과 같이 있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이를 보면서 만족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잠시 후 변신이 풀리자, 아드리앙과 마리네뜨는 약속했던 대로 같이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파리 시민들이 자부하는 만큼이나, 크리스마스를 맞은 샹젤리제 거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자동차나 사람이 많아 혼잡하긴 했지만, 개선문을 사이에 두고 도로 양 옆으로 웅장하게 세워져 있는 나무들은 마치 이 거리를 지키는 기사같았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휘감겨 있는 색색의 불빛들이 밤의 파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지나갈 때마다 보이는 가로수들에 열매처럼 매달려 있는 불빛들이 참으로 어여쁘다. 노랗게 빛났다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붉게 변하는.


앞서 가는 아드리앙의 뒤를 말없이 따라가는 마리네뜨의 몸에는 검은색 외투가 걸쳐져 있었다. 변신이 풀리고 난 뒤 마리네뜨의 차림을 보더니, 아드리앙은 잠깐 아무 말이 없다가 곧장 자신이 입었던 외투를 벗어 건네줬었다. 왜냐고 물으니 예쁘긴 하지만 추워 보인다나. 쑥스럽다는 듯이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는 아드리앙의 행동은 마리네뜨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예쁘다는 말을 들었으니 좋아야할 텐데, 신기하게도 생각했던 만큼 막 들뜨지는 않았다. 그냥, 마음이 따뜻해졌다. 자신을 배려해주는 행동이 기뻤다. 이런 외투를 입지 않아도, 저 한 마디만으로도.


고민하는 얼굴로 마리네뜨는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아드리앙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드리앙의 손을 향해서. 살짝 내밀었다가 다시 주저하고, 조금 더 뻗었다치면 흔들거리는 아드리앙의 손에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손을 뻗었다 거두는 것에 따라 마리네뜨의 표정도 마구 구겨졌다. 용기 없는 자신을 타박하면서 마리네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보 마리네뜨, 왜 이렇게 망설여? 명색이 우린 사귀는 사이잖아! 꺅, 내가 아드리앙이랑 사귄대! 아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연인끼리 손 정도는 잡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 그래도….


용기를 내어 손을 잡으려던 찰나, 갑자기 뒤돌아선 아드리앙에 깜짝 놀란 마리네뜨는 절로 뒷짐을 졌다. 하하, 뻘쭘하게 웃으며 하얀 치아를 드러내는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왜, 무슨 일이야?”

“아, 맞다.”



그제서야 용건이 생각났는지 아드리앙은 부드럽게 한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손.”

“응?”

“어…, 손 잡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마이 레이디?”



제게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아드리앙을 쳐다보다가. 잠시 멍해졌던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가, 곧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렸다.



“응!”



제 손을 꼭 붙잡고 어린 아이처럼 미소짓는 마리네뜨를 지켜보다가, 아드리앙은 작게 웃으며 마리네뜨의 이마 위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드러난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 아드리앙의 행동에 마리네뜨는 순식간에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러니까, 지금, 지금…!!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개진 마리네뜨가 더듬더듬 소리쳤다.



“아, 아, 아드리앙?!”

“아, 미안. 싫었어?”

“그, 그런 건 아니고. 왜 갑자기?!”

“그냥…, 그러고 싶어서.”



웃으면서 폭탄선언을 던지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정신이 없었다.



“사실은 입에 할까도 고민했는데,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지만 그래도 갑자기 입술에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곤란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아드리앙의 얼굴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리네뜨의 손을 꼭 붙잡는 손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런 아드리앙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리네뜨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쳐갔다. 다른 한 손도 뻗어 아드리앙의 손을 꼭 붙잡은 그녀가 아드리앙에게로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들어 아드리앙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아드리앙이 놀랄 차례였다.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녹빛 눈동자가 키스를 끝내고 창피함에 살짝 시선을 피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본인이 해놓고도 좀 대담하다 싶었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시, 싫지 않아. 애초에 연인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 사실 손도 내가 먼저 잡으려고 했었는데, 해도 되나 걱정되서. 아니, 그러니까. 기쁘다구! 사실 네가 예쁘다고 해줬을 때도 너무 기뻤고, 그, 그리고….”

“….”

“메리 크리스마스, 아드리앙. 너랑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어서, 기뻐.”



평상시의 강한 모습과는 달리 수줍게 대답하는 마리네뜨를 보던 아드리앙의 손이 마리네뜨를 확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아까보다 더 당황하는 마리네뜨를 꼬옥 끌어안은 아드리앙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변신했을 때의 당당함도 좋지만, 제 앞에서만 보여주는 이런 모습도 정말이지 사랑스럽다. 그가 가만히 속삭였다.



“나도 기뻐.”



메리 크리스마스, 마이 레이디.









====

향초는 변신할 때 잃어버렸습니다. 정확히는 아드리앙 만나고요 하하하.

안나님의 마음에 드는 내용이길 바래요 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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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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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마리] 특별한 순간





짧은 낮이 지나가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남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이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차분히 가라앉았다. 점점 짙어져가는 푸른빛 사이로 새까만 어둠이 스며나와 번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두워진 하늘 아래에는 도시가 있었고, 수많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닥쳐올 차가운 밤을 준비했다. 무법자처럼 길거리를 누비는 싸늘한 바람들의 공격에 사람들은 황급히 거리를 떠나 따뜻하게 빛나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래, 보통이라면 분명 그러했겠지.


똑똑,


숙제를 하고 있던 중, 마리네뜨는 난데없이 들리는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창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겨울이라 그런지, 차가워진 밤공기가 하이얀 서리를 그려넣은 유리창 너머로 히죽 웃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검은 타이즈를 빼입은 소년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놀라서 재빨리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블랙캣!"

"여어, 공주님."



안녕?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는 눈가가 작게 일그러져 있었다. 유달리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나, 웃고는 있지만 유달리 경직되어 보이는 입매는 아무래도 추위 때문인 것 같았다. 봉에 매달린 채, 블랙캣은 정중한 말씨로 마리네뜨에게 요청했다.



"아니, 음. 일단 좀 들여보내 주지 않을래? 생각보다 추워서."

"아니, 어, 빨리 들어와요!"



허락이 떨어지는 것이 무섭게 그는 잇챠, 소리를 내며 매달려 있던 봉을 창문 쪽으로 턱 기울였다. 봉이 창문에 걸리고 블랙캣은 스르륵 소리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곳으로 들어오니 살겠는지 부르르 몸을 떠는 블랙캣의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태평했다.



"열어줘서 고마워."



추워 죽는 줄 알았네.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블랙캣의 모습이 어이없다는 듯이, 마리네뜨의 눈초리가 가늘게 접혀졌다. 당연한 거 아냐? 미쳤다고 이 날씨에 저런 차림으로 돌아다녀?



"이 날씨에 그렇게만 입고 있으니 당연히 춥죠!"

"오우, 아니. 뭐 그 정도는 아니었다구?"



퍽이나 그러겠다.


허세를 부리는 것도 참 여전했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마리네뜨는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너무 많이 말하다보면 제 정체를 눈치챌지도 모른다. 적당히 맞춰주다 보면 가겠지. 아니, 그것보다.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어, 아. 그게…."



말끝을 흐리는 블랙캣에 온갖 부정적인 상상들이 마리네뜨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악당이 또 설치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 그럼 얘가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 헉, 설마 저번 나타니엘 때처럼 날 노리기라도 하는 거야? 하여튼 이놈의 인기란. 아아니 이게 아닌데!!


저 모든 생각들이 폭풍처럼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뇌하고 있는 마리네뜨와 달리 그의 대답은 꽤나 싱거웠다.



"으음, 글쎄~!! 그냥 와야겠다 싶어서?"

"…그건 또 뭐예요."

"아, 혹시 숙제하고 있었어? 어디 좀 보자."

"악, 저저리 가요!!"



깜짝 놀라 말을 더듬던 마리네뜨가 블랙캣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마리네뜨의 공책을 집어든 뒤였다. 흐음, 작게 탄성을 흘리며 공책 위를 대강 눈으로 훑던 블랙캣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기, 이거 틀렸어."

"에?"

"이건 x가 아니라 y를 대입해야지. 그리고 이건 아예 공식을 다른 걸 써야 하잖아."



책상에 있던 볼펜을 집어들고, 그는 슥슥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내렸다. 한참 뒤 자, 라고 말하며 블랙캣은 마리네뜨에게 공책을 내밀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블랙캣의 얼굴에 마리네뜨는 반신반의하며 공책을 펴서 안을 확인했다.



"…진짜 맞았잖아."

"그치?"



식도 자신이 쓴 거에 비해 훨씬 간결하고 깔끔했다. 얘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나? 의심하는 눈초리로 블랙캣을 요모조모 살펴보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머리에 달린 귀를 쫑긋거리며 칭찬을 기다리는 듯 밝게 웃는 얼굴에 마리네뜨는 결국 픽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네요."

"그럼, 난 대단하다고."

"네, 네. 근데 보시다시피, 저 지금 숙제해야 하거든요?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주시지 않겠어요?"



뭣보다 여자애 방에 함부로 쳐들어오는 것부터가 좀 그렇지 않냐 이거다. 열어준 건 자신이라지만. 살짝 노려보는 마리네뜨의 시선에도 블랙캣은 여전히 꿋꿋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 곧 눈을 반짝거렸다.



"아, 그래. 이왕 이렇게 온 김에 그 숙제, 도와줄까?"

"됐거든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아까 문제 거의 다 틀렸던데, 정말 괜찮겠어?"

"윽."



확실히 수학은 자신없는 과목이긴 했다. 그러나 마냥 고맙다고 하면서 도움을 받기엔 여러모로 찜찜한 기분이 들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그저 눈동자를 데굴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마리네뜨를 지나 블랙캣은 바닥에 있는 작은 책상쪽에 앉았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깜빡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여서, 결국 마리네뜨는 백기를 들었다. 이 날씨에 곧바로 쫓아내기도 좀 그랬고.


그의 맞은편에 주저앉으며 공책을 펴자 시선이 따라붙었다. 싱글거리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워진 마리네뜨는 일단 쐐기를 박았다.



"이거 다 풀면 진짜 돌아가요."

"응? 너무 매정한 거 아냐?"

"…설마 저희 집에서 자고 가기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죠?"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고."



지금 본인이 상당히 뻔뻔하다는 건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절로 골이 땡기는 걸 느꼈지만, 마리네뜨는 한숨을 쉬며 다시 문제를 푸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런 마리네뜨를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던 블랙캣의 시선이 그녀의 방 안을 훑었다. 10대 소녀답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 안은 확실히 여러 가지 물건들로 가득했다. 침대나 컴퓨터, 책상, 서랍은 물론 구석에는 온갖 물건들이 담긴 박스들도 널려 있었다. 개중에는 그가 처음 보는 물건들도 수두룩했다. 여자들은 이런 방에서 사는구나,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블랙캣의 눈동자가 벽에 붙은 사진들을 보고 몇 번을 깜빡거렸다.


햇살같은 금발과 밝게 웃는 미소를 가진 소년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여러 장이 붙어있는 걸 봐서는 우연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저게 뭔지 물어보려고 하다가, 블랙캣은 곧 살짝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거둬들였다. 여전히 문제에 집중하고 있던 마리네뜨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마리네뜨를 지켜보는 블랙캣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당연스럽게도, 마리네뜨는 그런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막힌 문제가 있는지 한참을 끙끙대던 마리네뜨가 고개를 들어 블랙캣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들고 있던 펜으로 이것저것 적어주는 블랙캣의 모습이 새삼스러워,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한테 이런 면도 있었나. 뭐, 좀 멋있긴 하네. 생각하고도 놀라서 마리네뜨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무슨 멋있다야! 나한텐 아드리앙밖에 없다구!


그렇게 몇 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계속 숙제를 하다가,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블랙캣은 평소랑 달리 이상하게 말이 없었는데다, 의자가 아닌 따뜻한 바닥에 앉아서 못하는 과목숙제를 하고 있자니 졸음이 오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몇 번 고개를 까딱거리다, 언제 잠들었나 모를 정도로 마리네뜨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뭔가가 제 머리카락 위에 닿았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베시시 웃었을 뿐인데, 이마에 살짝 부드럽고 따뜻한 게 닿았….



"…헉!"



차가운 책상의 감촉에 마리네뜨의 눈이 퍼뜩 떠졌다. 푸른빛 눈동자가 당황으로 얼룩져 급하게 깜빡거렸다. 뭐지, 방금 뭐였지?! 이마에 뭔가 부드러운 게 닿았던 것 같은데? 그런 그녀의 모습에 블랙캣이 이상하다는 듯이 갸웃거렸다.



"깜짝이야. 잘 잤어?"



공주님. 웃고 있는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었다. 가볍게 던져진 그 한 마디에 괜히 창피해져서, 마리네뜨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가 요즘 외롭나? 이런 착각이나 하고. 그럴 리가 없지.


이 녀석이 나한테 키스따위를 할 리가 없잖아.


내가 이렇게 가벼웠었나? 아니, 나름 일편단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블랙캣이 날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레이디버그일 때의 일이고. 지금은 마리네뜨잖아! 아니, 마리네뜨. 생각해봐. 착각이야. 너한텐 아드리앙이 있잖아. 블랙캣은 그냥 파트너일 뿐이고, 그 이상의 감정은…. 뭐야 이거 뭔가 이상하잖아?! 으아아!!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온갖 자학을 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말없이 쳐다보던 블랙캣의 눈매가 작게 일그러졌다. 감추지 못한 동요를 마저 지워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던 블랙캣의 시선이 문득 창가를 향했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살짝 멍하게 일렁였다.



"…눈이다."

"어?"



그의 말이 맞았다. 블랙캣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곧바로 보이는 창 밖으로 하얀 눈송이들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마리네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내린 눈이니까, 첫눈인가? 내리는 기세를 보니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엄청 쌓일 것 같았다. 아마 바닥도 얼겠다. 내일 조심히 걸어다녀야지. 눈은 쌓이면 보기는 좋지만 막상 나다닐 때는 불편한 게 문제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마리네뜨는 힐끗 블랙캣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아무런 말도 없이, 두 사람은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새하얗게 흩날리는 눈꽃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중 몇은 나풀나풀 떨어지며 창가에 소복히 쌓여 점점 부피를 늘려나갔다. 매섭게 불어닥치는 바람도 지금은 좀 잠잠해졌는지 창문이 덜컹거리던 소리도 멎어 있었다. 정말 고요했다. 


그 침묵을 깨버린 건 블랙캣의 한 마디였다.



"아, 난 이만 가볼게."

"…가요? 이 날씨에?"

"뭐야, 걱정해주는 거야?"

"아니, 뭐. 솔직히 추울 거 같고…."



집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 날씨에 눈까지 맞고 들어가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눈이 그치고 나서 가는 게 좋지 않냐는 마리네뜨의 제안에도, 블랙캣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괜찮아. 문제도 거의 다 풀었고, 나머지는 공주님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을거야."

"아, 어, 그, 그럼…."



장난스레 미소짓는 얼굴로 블랙캣은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붙잡고 일어나라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오늘의 그는 왠지 이상했다. 막연한 예감에 마리네뜨는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어떻게 자신의 숙제 내용을 알고 있는지, 왜 마리네뜨인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구는 건지, 결국 그가 뭐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지,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그 어떤 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마리네뜨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시리게 얼어붙은 창문을 툭 건드려 열자, 베일 듯이 차가운 공기가 훅 얼굴에 번졌다. 그에 얼굴을 찌푸리는 마리네뜨와 달리 블랙캣은 개운하다는 얼굴로 짧게 기지개를 켰다. 마치 고양이처럼. 아니, 고양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첫눈이라.



"맞다. 블랙캣!"

"…?"

"첫눈이 올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던데. 뭐, 빌고 싶은 소원 있어요?"

"소원이라면 있지. 근데 됐어."

"왜요?"

"이미 이루어졌거든."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하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딘지 즐거워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니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캐묻는 것도 아니다 싶었으니까. 창틀에 발을 올리고 봉을 꺼내들던 블랙캣이 아, 탄성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맞다. 역시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아까 대답."

"?"

"보고 싶어서.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네."



고마워.


그 한 마디와 함께 블랙캣은 눈이 펑펑 내리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고,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 그의 대답에 살짝 멍해있다가, 다음 순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하앗?! 비명을 지르며 말을 더듬거렸다. 어색해진 기분을 달래려는 듯 막 중얼거리던 그녀가 제 옆으로 다가온 티키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창문 밖으로 드러났다. 떠드는 목소리들은 다시금 불기 시작하는 바람 소리에 잊혀지고, 지워진다. 창문 곁에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이유는 살갗을 에일 듯 차가운 겨울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새하얀 눈의 장막 안에서,

찰나의 기억은 무언가의 감정을 품고, 그렇게 스치듯 지나갔다.


마치 둘만의 비밀처럼.







===


그리고 블랙캣은 감기에 걸렸습니다~ㅇㅁㅇ~ 메데타시 메데타시!


<렐님의 캣마리 100제 24번. 맨디님 의견도 참고했습니다!>


후후 살며시 숟가락을 얹었습니다^_^)>

오랜만에(?) 캣마리가 쓰고 싶길래 간단히 써보았어요. 여기서 블랙캣은 마리네뜨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블랙캣에게 소원은 꽤 많지만, 그 중 하나라면 그녀와 같이 첫눈을 보는 거였던 걸로. 첫눈을 같이 본 연인들은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이미 사귄다는 설정으로 넣을까 했는데 글의 절반을 쓰고 나서야 저게 떠올라서...OTL...


참고로 도둑키스 한 거 맞아요 ㅇㅇ 이마에 했습니다 ㅎㅎ 이번 글은 좀 아련하고 어딘지 모르게 잔잔한? 느낌으로 적어보고 싶었는데 되었을까요 ㄷㄷㄷ 마무리에 10분을 넘게 고민했는데ㅠㅠㅠㅠㅠㅠ


끄읕>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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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 스크롤 주의. 대략 10000자.





본편 전제하에 조금 설정을 바꿔서 아드마리가 정략결혼했음 어땠을까를 생각해봤는데 얘네 삽질 쩔게 할 거 같다 ㄷㄷ;


정략결혼은 일단 성인 되고 나서. 가브리엘 씨가 마리네뜨 재능이나 성격 보고 자기 아내랑 닮았다 생각하고 이런 애를 며느리로 삼으면 괜찮겠다 싶어서 아들의 의사따윈 싸그리 무시하고 어느 날 갑자기 아드리앙을 불러서 말함.


"아드리앙."

"? 네. 아버지."

"너도 이제 슬슬 결혼할 나이가 된 거 같구나."

"무슨 말씀하세요 아버지?! 전 아직 스물 두살이라고요?!"

"? 사귀는 여자라도 있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우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아드리앙에게 가브리엘이 단호하게 말함.


"그럼 뭐가 문제지? 한 달 뒤에 이 예식장에서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어라."

"아니, 잠깐!! 아버지!!"


라고 말하고 재빨리 나가버리는 가브리엘. 아드리앙이 어떻게든 연락하려고 해도 다 씹고 작업실까지 찾아가도 늘 부재중.


아니 이게 웬 날벼락이야?! 하고 아드리앙은 플랙한테 아버지가 제멋대로인 건 알았지만 대체 이걸 어쩌면 좋냐고 한탄하는데, 플랙은 니네 아버지가 니 말 안 들어준게 어디 한두번이냐고 낄낄거리겠지. 아드리앙도 동의. 그건 그렇지만... 이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결혼까지 간섭하는 건 아니지 않냐고 막 신경질부리면서 머리 쥐뜯을 거 같다. 그래서 결국 그냥 예식장에서 직접 결혼을 파토내기로 마음먹음. 상대가 개쪽이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자기가 부담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게다가 얘는 아직 레벅을 좋아했기 때문에 ㅇㅇ


이 모든 건 설마 아버지가 자기 결혼식장에도 안 올까? 라는 전제하에 결정한 일이었지만 아드리앙은 자기 아버지의 철저함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음(...) 결혼식 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 아드리앙은 속이 터지고 딱 지인들만 모았는지 하객도 몇 없고 신부 이름도 없음. 이게 서프라이즈라고 준비한 거면 참 재미있다고 비웃던 아드리앙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신부 대기실에 들어가야만 했음. 대기실 앞에서도 신랑이 신부 얼굴 미리 보면 그건 그것대로 재수없다던 말을 아드리앙은 뻘하게 떠올렸지만, 애초에 결혼도 안 할 건데 뭐 어때?! 라는 생각으로 손잡이에 손을 댐.


딸깍-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괜히 긴장이 되는 건 어째서였을까. 눈부시도록 새하얀 신부 대기실의 문 때문이었는지도. 천천히 문을 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우뚝 몸이 굳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커다란 의자에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앉아 있었다. 살짝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올린 여인의 모습은 꽤 예뻤다. 시선이 마주하자, 푸른 눈동자가 동그랗게 열렸다. 아드리앙은 이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무척이나.


"아드리앙?!"


마리네뜨 뒤팽 챙.



[아드마리] 재회: http://eclilps.tistory.com/entry/RD14



여기서 마리네뜨 시점. 사실 마리네뜨는 학교 졸업하자마자 가브리엘 씨네 디자인 공방에 들어가 일하고 있었음. 큰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그런 그녀를 눈여겨본 가브리엘이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인 거지. 물론 열심히 일하면서도 마리네뜨는 틈틈히 레이디버그로 일함.


그래서 밤새 디자인 공부를 하고 틀을 떠야 하긴 하지만 나름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틈틈히 아드리앙을 떠올림. 결국 고백하지 못한 첫사랑을 아직도 접지 못해서 아드리앙이 나온 잡지는 꼭 사보고 가끔 촬영장에 가서 몰래 훔쳐보기도 하고. 하지만 학생 때처럼 말을 걸지는 못 하는게 이제 같은 반 친구라는 접점도 없어서 용기가 안 나는 거야. 그래서 일단 열심히 일해서 꼭 아드리앙에게 자신이 만든 옷을 입힐 정도로는 성공하자고 마음먹고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있었음.


그런데 어느 날 가브리엘이 마리네뜨를 불러서 말하는 거야. 그녀에게 가브리엘은 선생이기도 하지만 아드리앙의 아버지기도 해서, 무슨 일인가 하고 긴장했는데 이것저것 하고 있는 일이나 디자인들에 관해 물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물음.


"자네, 사귀는 사람 있나?"


가브리엘이 묻는 질문치고는 꽤 이상했지만 마리네뜨는 솔직하게 답함.


"아뇨,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만.


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꾹 입을 다물었는데 가브리엘이 말함. 한 달 뒤쯤에 특별한 스케줄이 있으니 그 때는 한 3일쯤 시간을 비우라고. 3일이라고 한 건 신혼여행 포함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마리네뜨는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 무슨 스케줄이냐고 물어도 그건 그때 가보면 안다고 말함. 참고로 가브리엘은 마리네뜨가 아드리앙을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음.


그래서 한 달 뒤쯤에 예정대로 스케줄 싹 비우고 온 마리네뜨는 난데없는 검은 옷의 사나이들에게(ㅋㅋㅋ) 끌려가 어떤 고급 샵으로 보내지고 이것저것 꾸며진 다음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을 가게 된 거지. 저기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물어봐도 경호원들은 묵묵부답이고 가브리엘에게 전화 걸어보려는 순간 문자가 와.


결혼식장은 마음에 드나? 가 첫 마딘데 순간 벙찜.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는데 다음 줄이 시선을 끌어.


[자네에게도 해가 될 일은 아닐 것이니, 잘 부탁하네.]


여기서 이제 의문이 듬. 아무리 봐도 이건 신부놀이가 아니라 진짜 결혼식장이고 자기는 신부라는 건데 그럼 신랑은 누구야? 근데 가브리엘이니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는데 설마라고 생각함.


말도 안 돼. 아드리앙이라면 결혼하고 싶다는 여자가 넘칠텐데 왜 자기를 굳이 이런 방법까지 써서 보내려고 하겠어? 설마 내가 아드리앙을 좋아하는 거 알고 걸리적거려서 이러는 거 아냐?! 하고 별 망상을 다 하는데 신부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정말 아드리앙이 들어오는거 보고 깜짝 놀람. 심지어 정장 차림에 머리는 뒤로 넘김. 겁나 멋있어서 막 황홀해하는데 상황이 그게 아니잖아.


아드리앙이 엄청나게 놀란 얼굴을 하는데 마리네뜨는 마리네뜨대로 당황함. 그쪽도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온 거 같아서. 아드리앙이 근데 한참을 지나도 말이 없어. 멍하게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아드리앙의 시선에 괜히 쑥스러워진 마리네뜨가 안녕? 하고 한 손을 들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넴. 너도 끌려왔어..? 하고 물으니까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드리앙이 말함. 어, 응.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이 모든 게 가브리엘의 주도 하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고 둘다 속으로 고민함. 지금 이 아저씨한테 연락이 안 되는데 찾아온 손님들이 죄다 생각 이상으로 고급이야. 파토 못 내게 하려고 수를 썼다는 걸 알고 곤란해하는 아드리앙이 마리네뜨에게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함. 마리네뜨는 아니아니아니 하고 고개를 젓는데 한편으로는 이게 진짜 아드리앙과의 결혼식이었음 얼마나 좋을까 하고 씁쓸해함. 잠깐 뭔가 고민하던 아드리앙이 마리네뜨를 쳐다보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도와주지 않을래?"


라고 말하고, 결혼식을 속행하자는 이야기였음. 일단 결혼은 하지만 아버지와 연락이 될 때까지만 같이 있어주면 된다고 함.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지만 결국 수락함. 그녀도 오면서 온 초대객들 보고 기겁했거든. 무엇보다 아드리앙이 곤란해지는 거 진짜 싫어서. 예상보다 순순히 허락해준 마리네뜨 덕분에 일단 결혼식을 올리긴 하는데 둘다 심란하지. 


막 맹세의 말을 읊조릴 때도 그렇고 반지 교환도(반지까지 철저히 준비한 아저씨) 그렇고 마지막에 맹세의 키스까지. 미안하다고 말한 아드리앙이 살짝 면사포를 걷어서 눈을 감은 마리네뜨한테 입을 살짝 맞췄는데, 그 때 아드리앙은 마리네뜨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챔.


떨어? 어째서.


의아해하는 마음을 마지막으로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 가는 리무진 안에서도 둘은 말이 없음. 마리네뜨는 면사포로 얼굴 가린 채 살짝 고개 숙여서 아드리앙을 보고 있고 아드리앙은 전화를 걸고 있음. 근데 여전히 안 받아. 심지어는 모르는 번호로


[즐거운 신혼여행 보내라.]


하는 겁나 무뚝뚝한 문자 하나 와 있어서 진심으로 빡침. 솔직히 안 빡치는 게 이상하짘ㅋㅋㅋㅋ 그리고 진짜 말려들게 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마리네뜨를 흘끗 살피는데 웨딩드레스 입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마리네뜨의 옆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당황함.


사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마리네뜨를 봤을 때도 그 생각 했거든.


자기는 레이디버그 일편단심인 줄 알았는데 그건 다 거짓이었냐고 아드리앙은 속으로 막 자학하는데 마리네뜨는 마리네뜨대로 지금 상황이 너무 꿈같애. 위장이라지만 아드리앙과 같이 결혼식을 올린뒤 웨딩카에 타고 있잖아. 그런데 문득 닿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까 아드리앙이 멀뚱히 또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거야.


의아해진 마리네뜨는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하고 차분하게 물음. 이제 나이를 좀 먹었다보니 자기 감정에 좀 성숙해졌거든. 아드리앙은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려. 매우 익숙한 누군가의 실루엣. 하지만 그녀와 마리네뜨가 동일인물이라는 생각보다는 내 취향이 그런 쪽인가(...) 라고 생각하고 넘김 아 쓰면서도 답답하다 이새키....


괜히 미안해진 아드리앙은,


"말려들게 해서 미안해. 마리네뜨. 이왕 이렇게 된 거 휴가 왔다고 생각하고 즐겨주면 안 될까? 뒷수습은 확실히 해줄 테니까."


잠깐 생각하던 마리네뜨가 말함.


"내 이름."

"어?"

"기억하고 있었네..?"

"뭐야, 잊을 리가 없잖아."

하는데 마리네뜨는 그거에 또 두근하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넴.


"난 괜찮아."

"뭐?"

"네 말대로 휴가 나왔다고 생각할 테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


따지고 보면 이건 너네 아버님 책임이고.


그러면서 두근두근 뜀박질하는 가슴과 달리 꽤 부드럽게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너무 예쁜 거야. 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조용하고 멍한 타입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눈길이 가는 애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앞에서 쳐다보고 있으니 새삼 느껴짐.


물론 신혼여행지에선 아무 일 없었습니다(...) 호텔은 스위트룸이고 방이 하나였지만 아드리앙은 꼭 마리네뜨가 잠든 뒤에 들어와서 자고 그 와중에도 아버지랑 연락을 시도했지만 먹통(...) 심지어 또 다른 문자로 반년간 출장간다고 말함 이쯤되면 독하지.


사실 신혼여행 끝나고는 집에 돌려보내 주려고 했지만, 문제는 아드리앙이랑 마리네뜨가 결혼한 거 거의 공표급으로 이미 시내에 알려져 있음. 당장 클로이가 전화해서 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는 거에서 알게 되지만.


결국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데 이 와중에도 마리네뜨는 업무를 나가고 아드리앙도 모델 일을 나가고 그 와중에도 히어로 일은 꼬박꼬박 함. 레벅이나 블캣이나 둘다 힘이 없음.


레벅은 레벅대로 심란하고 블캣은 차마 레벅 얼굴을 못 쳐다보겠어. 좋아한다고 막 들이대던 녀석이 힘이 없으니까 그건 그것대로 이상했는지 레벅이 무슨 일 있냐고 묻는데 블캣은 차마, '아버지한테 속아서 다른 여자랑 결혼했어' 라고 말할 수가 없는거야ㅋㅋㅋ 자기는 레이디 뿐이라고 말하기엔 이미 뭔가 순결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물론 아무 일 없는데, 레이디? 하면서 막 허세를 부리는 블랙캣을 보던 레이디버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가자고 말하는데 블랙캣은 그 미소를 보고 순간 우뚝 굳음. 웨딩카 안에서 자신을 향해 웃던 마리네뜨랑 느낌이 아주 똑같았거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 내가 결혼한 사람이 너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진심으로 레이디버그의 정체가 궁금해졌음. 그래서 툭 내뱉어.


"정말 넌 누굴까?"

"어?"

"우리, 파트너로 지낸지도 거의 6년 다 되어가잖아."

"그, 그랬나?"

"그런데 서로 정체도 모르다니, 이건 좀 불공평하지 않아?"

"서로 모르는 게.."

"..좋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알고 싶어."


고민하던 레벅이 말함.


"...말하고 싶지 않아."

"왜?!"

"알면, 넌 분명 실망할 테니까."


그렇게 웃으며 레벅은 휙 몸을 감춰. 그에 답답해진 블캣은 마구 화내면서도 자기가 초조했다는 걸 인정해. 진짜 고백도 못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생각하니까 새삼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운 거야. 왜 남의 연애전선에 초를 쳐 치긴.(사실 정반대였음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집에 돌아오던 아드리앙은 저택에 불이 켜져 있다는 거에 놀라. 저택에 들어오니까 뭔가 냄새가 나는데 식당 쪽이야. 이것저것 만들어놓고 스튜 냄비를 들고 있던 마리네뜨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던 아드리앙에 깜짝 놀라서 냄비를 떨어뜨릴 뻔하는데, 놀란 아드리앙이 다가가서 마리네뜨 손을 잡아줘. 막 시선이 닿는데 괜찮아? 라고 물으니까 마리네뜨가 얼굴 살짝 빨개져서 괘, 괜찮아. 하고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음. 뭐하고 있었냐고 물으니까,


"그냥 신세지긴 뭐해서. 뭐라도 만들어봤어."


라고 말하는 마리네뜨였는데, 아드리앙은 그 말에 순간 심장이 쿵, 두근거려. 이게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무시하고 마리네뜨랑 같이 밥을 먹음. 진짜 불이 켜져 있는 집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해준 요리를 먹는 건 처음이야.


그거에 괜히 울컥하다가 그는 자기가 다시 한 번 마리네뜨를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지만 그래도 이건 사랑이 아닐 거라 생각해. 자기 사랑은 이미 한 여자한테 전부 다 줘버려서.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이 자신을 보면서도 왠지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 거 같은 느낌에 아, 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듬. 역시 나는 불청객인 건가, 싶어서 괜히 시무룩해진 마리네뜨한테 아드리앙이 장난스럽게 이름을 불러.


"마리네뜨."

"어?"

"안 먹으면 내가 다 먹는다?"

"아, 아니. 지금 먹을게!"


이렇게 얘들의 기묘한 동거생활이 시작됨.


마리네뜨는 진짜, 아드리앙이랑 결혼한 거 소문난 이후로 여자들한테 굉장한 눈총을 받을 거 같다. 특히 클로이는 매일 마리네뜨 공방에 찾아와서 얘를 들들 볶을 거 같음. 약점 잡아서 아드리앙한테 보내려고 하고.


물건이 막 없어지기도 하고, 누가 자기 발 걸려고도 하고, 하여간 은근한 괴롭힘을 받는거야. 아드리앙은 진짜 만인의 연인 수준일 정도로 완벽한데다 아직 젋었으니까. 그리고 아드리앙은 아드리앙대로 좀 따가운 눈총을 받는데 막 티나지는 않았지만 마리네뜨가 꽤 인기가 많았거든. 예쁘장한 얼굴이기도 한데 당당하고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고 그래서. 자기랑 마리네뜨의 결혼에 대해 수군거림을 들은 아드리앙은 괜히 기분이 나쁘고. 자기나 마리네뜨나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닌데. 왜 저런 소리를 듣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은근히 마리네뜨가 상처입을까 걱정함.


아 근데 마리네뜨는 여자들 괴롭힘도 괴롭힘인데 클로이; 클로이랑 사브리나 너무 성가심 무엇보다 빌런이 나타나서 나가봐야 하는데 변신할 틈도 안 줘. 어떻게든 떼어내고 문을 잠그고 변신한 뒤에 밖으로 나가는데 그새 열쇠를 가져온 클로이가 문을 열어.


근데 아무도 없음.


가뜩이나 여긴 꽤 고층이었거든. 그를 이상하게 여긴 클로이가 나중에 마리네뜨한테 심문하듯이 물어봐. 너 대체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하고. 마리네뜨는 레벅으로 변해서 나갔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을 얼버무리는데 커다란 팔이 마리네뜨의 목을 껴안고 뒤로 살짝 끌어당겨. 클로이가 놀라서 소리지름.


"아드리앙!"


마리네뜨에 대한 이야기를 얼핏 듣고 걱정된 아드리앙이 얘를 찾아왔다가 상황을 발견한 거지. 반가워서 덤벼들려는 클로이에게 아드리앙이 웃으면서,


"미안, 난 이제 유부남이라서."


라고 단호박으로 말하는데 마리네뜨는 진짜 깜짝 놀라서 말이 안 나오고 클로이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옴. 클로이가 진짜 얘랑 결혼한 거냐, 약점 잡혀서 억지로 결혼생활 하는 거 아니었냐, 하고 따지니까 아드리앙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그런 일 없어. 우리 완전 잘 살고 있다구?"


하고 웃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 마리네뜨 허리 껴안고 관자놀이에 입맞춤. 그것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근데 마리네뜨는 놀라기도 놀랐는데, 이 뻔뻔함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아. 그것도 자신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녀석.


사실 아드리앙이 이렇게 대놓고 일을 벌인 이유는 반쯤 충동임(..) 뭔가 마리네뜨가 싫은 소리 듣고 있는 것도 싫은데 그 와중에 마리네뜨를 힐끔거리던 남자들이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보란 듯이 막 애정행각 벌이면서 마리네뜨 데리고 사라졌는데,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가서야 이거 좀 아니었나? 아버지를 찾으면 돌려보내줘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는데 말이 없던 마리네뜨가 자기 어깨 감싼 아드리앙 팔을 두 손으로 꼭 잡는 거야. 그리고 살며시 중얼거린다.


"꿈이면 제발 깨지 마라.."

"응?"

"그냥, 그냥 좋아서."


하고 마리네뜨가 작게 속삭이는데 아드리앙은 그제서야, 고개를 푹 숙인 마리네뜨 얼굴이 완전 새빨갛다는 걸 깨달음. 바보가 아닌 이상 슬슬 눈치를 채야지. 괜히 긴장한 아드리앙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데 마리네뜨가 용기를 내서 말함.


"이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어..?"


아드리앙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음. 알고는 있었지만 마리네뜨 입으로 사살받으니 기분이 되게 묘해.


"아마, 돌아가면 다시는 말하지 못할 테니까. 지금 말할게."

"..."

"좋아해. 사실 학생 때부터 좋아했었어."


얼굴을 보지 않아서 자연스레 말이 나와주는 게 다행이었음.(아직도 백허그 중) 대답이 두려워서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미안해."


라는 말밖에 못하고 마리네뜨는 애써 태연하게 말함.


"여, 역시 그렇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그렇게 묻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그렇게 티가 나?"

"그냥, 날 보면서도 다른 사람 보고 있는 거 같아서."


어쩔 수 없지 뭐. 라고 말하는 마리네뜨를 보는데 아드리앙은 왠지 화가 나. 나를 좋아한다면서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야? 라는 생각도 들고. 마리네뜨는 미안하다고 말함.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었을 텐데, 상대가 하필 나라서."


막 말하면서도 왠지 목소리에 울음기가 있는 거 같아서, 싸한 느낌에 아드리앙은 팔을 풀고 마리네뜨 몸을 돌려.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리네뜨 턱을 억지로 들어올리니까 울고 있지는 않았음. 근데 너무 슬퍼 보여서 아드리앙은 가슴이 철렁해.


내가 왜 이러지? 이러고 혼란스러워하는데 마리네뜨는 나, 나 먼저 나갈게! 하고 밖으로 나가고 아드리앙은 멍하니 자리에 서서 방금 전 자기가 느꼈던 충동을 돌이켜봐...는 그럴 시간 없겠지 빌런 한 번 더 나타납니다 ㅇㅇ


아주 정말 기막힌 타이밍에 나타난 빌런 덕택에 변신하긴 했지만 블캣은 몰라도 레벅은 정말 싸움에 집중을 못함. 티키의 영향에도 진짜 몇 번이고 실수하고 그래서 블랙캣이 너 오늘따라 왜 이러냐고 타박할 정도로 정신이 없음.


어쨌든 결국 다 쓰러뜨리고 임무 완수, 로 가볍게 주먹을 맞댄 뒤에 가려는 레벅 팔을 블랙캣이 꽉 붙잡아. 무슨 일이야? 하고 평소와는 달리 돌아보지 않는 레벅을 잡아당긴 블랙캣이 그녀를 돌려세움. 표정은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침잠되어 있는 눈동자에 블랙캣은 방금 전 봤던 누군가를 떠올려. 하지만 이내 생각을 털어내고 말하지.


"할 말이 있어, 레이디."

"뭔데?"

"난 말이야…."


고백을 하려니까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목이 타는 느낌이야. 몇 번이고 말을 망설이다가 간신히 말함.


"나, 너를 좋아해."


말했다.


말했는데 왠지 너무 슬퍼지는 감정에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일그림 왜인지 모르겠어. 이런 감정을 너도 느꼈을까. 또 마리네뜨를 떠올리는 자신이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에 집중함.


그런 그를 보던 레이디버그가 조용히 중얼거려.


"…너도 이런 감정이었을까."


작게 중얼거려서 잘 안 들림.


"응? 뭐라고?"

"블랙캣. 나도 네가 좋아. 좋은 동료이자 파트너라고 생각해. 하지만..."

"…."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힘없지만,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블랙캣은 다시 물어봐.


"그게 누군데?"

"…어?"

"누구냐고. 내가 알 만한 사람이야?"

"그걸 내가 너한테 대답해줄 이유는 없잖아."

"매정하긴."


쳇, 하고 투덜거리는 블랙캣의 표정은 평소와 같아. 그에 레벅은 웃으면서 손을 뿌리치려고 하지만 블캣 팔은 꿈쩍않음.


"그럼 질문을 바꿀게."

"또 뭔데."

"너 누구야?"


블캣의 목소리가 단박에 낮게 가라앉음. 깜짝 놀라서 레벅이 블캣 표정을 보는데 표정은 싱글싱글 웃고 있는데 목소리는 장난이 아니고 잡은 손에 힘이 더욱 세짐. 기필코 알아야겠다는 느낌.


레벅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쳐.

"싫다고 말했잖아. 알면.."

"실망할 거라고?"

"…."

"나야말로 두려운데."

네가 실망할까봐.

그 와중에 변신 해제소리는 제대로 들리기 시작하고 레벅은 진짜 놓으라는 듯이 팔을 세게 흔드는데 역시 꿈쩍 않지롱.


띠-

띠-

띠---


고대의 재앙이랑 행운의 부적 쓴 시간이 거의 겹치긴 하지만 먼저 변신이 풀린 건 블캣이야. 블캣 변신 풀리자마자 도망가려고 했는데, 촤라락 소리와 함께 변신이 풀리고 드러난 얼굴에 레벅은 놀라서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음.


그리고 잠시 뒤에 그녀도 변신이 풀림.


아드리앙은 붙잡은 마리네뜨 팔만 멀뚱히 쳐다본다. 마리네뜨는 너무 놀라서 딸꾹질까지 나옴. 아니, 대체. 이게 어떻게-. 낄낄거리는 플랙을 티키가 붙잡아 끌고 가고, 남아 있던 두 사람은 되게 뻘쭘해짐. 진짜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리네뜨 얼굴을 보고 아드리앙이 쓰게 웃음.


"역시, 실망했나?"

"어, 어?!"

"아, 혹시 이러면 좋겠다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 이럴 줄이야.


사실 아드리앙도 마리네뜨 못지 않게 당황스러워. 아니 이게 뭔 일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사실 마리네뜨였고 하지만 자기는 마리네뜨를 아까 전에 거절했는데 또 고백했고... 하여간 되게 어질어질한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으며, 마리네뜨가 신음을 흘리니까 그제서야 아드리앙은 마리네뜨 팔을 놓아줌.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자국이 남았어. 그거에 좀 미안해지면서도 아드리앙은 일단 원하는 걸 얻어내야겠다 싶어서 마리네뜨한테 다시 뻘쭘하게 말을 걸어.


"우리, 좀 상황이 이상해진 거 같은데?"


그러면서 아드리앙은 손을 뻗어서 마리네뜨 손을 덥석 잡아(아까는 팔이었지만 이제는 손) 그거에 흠칫하며 뒤로 물러서려는 마리네뜨를 부드럽게 끌어당겨서 품에 안음. 블캣으로 거절당했어도 마리네뜨는 자길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이 모습에선 자기가 강자니까.


막 얼굴 빨개져서 도망가려는 마리네뜨한테 아드리앙이 짓궃게 물음.


"왜 도망가?"

"어, 어, 그게…."


으아악 내가 아드리앙한테 안겨 있다니!! 게다가 백허그도 아니라 정면으로!


하고 막 속으로 패닉하는 마리네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드리앙은 진짜 그제서야 왜 자기가 마리네뜨를 보면서 자꾸 레벅을 떠올렸는지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야. 마리네뜨는 와 진짜 블랙캣이 아드리앙인건 둘째치고 방금 전에 고백했다 차였던 상대하고 이러고 있자니 정말 머리가 팽글팽글 돈다.


근데 생각해보면 자기가 레벅이기 때문에 이러는 건가 싶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괜히 슬퍼져서 아드리앙을 확 밀쳐내고 올려다보는데 그 와중에도 아드리앙이 너무 잘생겨서 순간 홀릴뻔한 자신을 타박함. 그리고 물어. 이건 중요한 문제니까.


"내가 레이디버그라서?"

"어?"

"내가 레이디버그라서, 이러는 거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자기가 질문하면서도 자기가 상처받지만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라.. 잠시 벙쪄있던 아드리앙은 잠깐의 고민 끝에 말해.


"아, 이거 말하기 좀 창피한데."

"?"

"그게…"


머리를 긁적거리던 아드리앙이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전부 털어놔. 레벅인 너를 언제부터 좋아했으며, 결혼식장에서 마리네뜨로서의 너를 봤을 때 황당했던 감정이랑, 묘하게 레벅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것도. 들으면서 괜히 참담해지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덧붙임.


"그런데, 네 대답을 거절할 땐 되게 괴롭더라."

"어…?"

"내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인데, 라고 생각했는데도. 사실 레벅인 너한테 고백한 건 그 이유도 있었던 것 같아."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상태보다는, 확실히 결판을 내고 싶었다고나 할까.


라고 말하며 웃는 아드리앙의 표정이 되게 후련해 보여. 그래서 마리네뜨는 더 이상 말을 못 함.


사실 마리네뜨도 아드리앙이랑 지내면서 그가 평소에 보여주던 완벽한 모습만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닫고는 있었거든. 의외로 아침에 약하고, 풀죽어 쓰러질 때도 많고, 막 어쩌다 회식해서 술에 취해 들어올 때는 애교를 부리는데 그게 퍽 귀엽기도 하고, 마냥 상냥한 성격만이 아니라는 것도.


아드리앙이 가진 모든 것들이 단순한 천재성에서 온 게 아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야. 그런 면을 알아서 더 좋아졌다고 생각했었지만 역시 아드리앙=블랙캣 공식은 좀 혼란이 오기 다분했음. 시간이 지나서인지 행동이 좀 순화되긴 했지만.


"마리네뜨."


부름과 동시에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의 손을 붙잡고 손등 위에 입맞춰. 그리고 눈을 찡긋하며 말함.


"마이 레이디."

"아드리앙…"

"네가 레이디버그라 다행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

"너를 마이 레이디라고 부를 수 있어서, 기뻐."


하고 웃는데 그 얼굴이 꽤 장난스러워. 정작 눈빛은 그리 태연하지 못했는데도. 그걸 보면서 마리네뜨는 자기는 결국 아드리앙이 이렇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 그가 블랙캣이든 어쨌든.


"당신을 사랑해요. 레이디."


손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말하는 아드리앙의 미소가 너무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눈부셔서 마리네뜨는 더 이상 말을 못해. 그리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감정을 깨달아.


행복.


아무 말도 못하고 감격해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살짝 불만스러운 얼굴로 묻습니다.


"그래서, 대답은?"

"아, 아까 들었잖아!"

"좋은 말은 많이 듣는 게 좋다잖아."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글쎄?"


어깨를 으쓱하는 아드리앙의 모습이 뭔가 얄밉지만,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반한 쪽이 진다는 공식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


"…좋아해!"


두 번은 못 말하겠다, 역시.


막 말하자마자 얼굴 빨개진 마리네뜨를 다시금 끌어안고 입맞추는 아드리앙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The End




+



그리고 아드리앙은 나중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한테 처음으로 몇시간을 바락바락 따졌다고 합니다. 가브리엘은 아드리앙이 이렇게 말이 많은 줄 처음 알았다고 하더군요.




++



결혼생활은 유지하되, 아드리앙은 나중에 마리네뜨한테 다시금 청혼해요. 워낙 급하게 이루어진 결혼이니까 이번에는 정식으로. 반지 새로 맞춰서 프로포즈 거하게 준비합니다. 이 녀석도 부자라 비행선에 I LOVE YOU를 달아서 반짝반짝 띄웁니다.


파리의 모든 여자들은 아주 부러워서 죽죠. 마리네뜨는 블랙캣때 성격은 제발 좀 자중해줬으면 좋겠다고 한숨쉬고, 그래도 좋다고 헤실거리고. 뭐, 그래도 히어로 일은 여전히 계속합니다.


이젠 정말 끝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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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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