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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 아니에요.

※ 전력 60분. 주제는 [동화]





[캣마리] 미녀와 야수





“안녕, 공주님.”



씨익 웃으며 제 앞에 나타난 검은 고양이에 마리네뜨의 미간이 살짝,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또 나타났다. 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상냥하게 제 손에 입맞추는 그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그녀는 블랙캣의 시선에 재빨리 다시 표정을 바꿨다.



“아, 하하하. 또…, 오셨네요?”

“공주님이 날 보고 싶어하는 거 같아서 말이지~?”



그런 적 없거든.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그저 하하 웃으며 두 팔을 등 뒤로 감췄다. 오늘은 무슨 일이시냐고 묻기도 전에 블랙캣이 말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언제나와 똑같은 대답. 이젠 일상이 되어버려서 그렇게 놀랍지도 않지만, 그 진의를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마리네뜨는 속으로 몰래 한숨지었다. 대체 얘는 무슨 생각인 걸까. 변하지 않는 일상처럼 실랑이하는 그들의 모습도 여전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과는 달리 블랙캣의 눈빛은 꽤 진지했지만, 역시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처럼.



“저기요. 뭐 하나 물어봐도 되요?”

“응?”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물론 좋아하지.”

“그럼 저한테 그런 멘트 막 쓰는 건 실례라고 생각 안해요?”

“어라? 무슨 소리야. 난 보고 싶다고 했지, 좋아한다고는 안 했는데~?”



짓궂게 묻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마리네뜨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살짝 붉어졌다. 그럼 그렇지. 괜히 반응해줬다 싶어 후회가 살짝 밀려왔지만 마리네뜨는 아직 꿋꿋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마리네뜨는 살짝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럼 대체 왜 찾아오는 거예요?”

“말했잖아. 보고 싶어서라니까.”

“보통 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외간 여자를 찾아오는 남자는 드물거든요.”

“의외네. 날 남자로 취급해주고는 있었구나.”



그럼 남자지 여자냐. 어이가 없어진 마리네뜨의 눈초리가 가늘게 좁혀지려는 순간, 블랙캣이 다시금 손을 내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손을 빼려 들지는 않았지만, 불편해 보이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블랙캣은 조심스레 잡은 마리네뜨의 손 위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이거 받아.”

“에?”

“그럼 나는 할 일이 많아서 말이지. 이만!”



그 말과 함께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블랙캣의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제 손에 쥐어진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자주빛의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영롱한 푸른빛이 도는 심플하니 예쁜 귀걸이가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의 품 안에서 티키가 튀어나와 말했다.



“우와, 아주 예쁜 귀걸이네!”

“그, 그러게.”

“마리네뜨 너 주려고 가져온 거 같은데, 엄청 고민했을 거 같은 느낌이야.”



그 말대로였다. 예쁜 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동그란 귀걸이는 마리네뜨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고, 마리네뜨도 그 사실은 잘 알았다. 무엇보다 값이 꽤 나가 보였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받으라고 줬을리는 없다. 하지만 이걸 받아도 괜찮은 걸까. 쓰지도 못할 텐데. 마리네뜨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살짝 제 귀에 걸린 미라클스톤을 쓰다듬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을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대답해줄 수 없었다.





* * *



“어떻게 생각할까, 그거.”



변신이 풀리는 감각에 블랙캣은 절로 눈을 감았다. 몸 전체에서 거둬지는 마법의 기운과 함께 장난스러운 히어로는 사라지고, 차분하고 부드러운 얼굴의 금발 소년의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소년에게 플랙은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지, 그것보다 치즈는 어디 있어?”



기대만발한 얼굴로 공중을 휙휙 돌며 치즈를 찾는 플랙의 모습에 그럼 그렇지, 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아드리앙은 보관해두었던 치즈가 담긴 통을 꺼내 뚜껑을 열어주었다. 고약한 냄새에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익숙해지니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행복한 얼굴로 치즈를 입에 우겨넣던 플랙이 뭔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왜 하필 귀걸이야? 그 여잔 쓰지도 않을 거라는 거 알잖아?”

“쓰지 않아도 상관없어. 가지고만 있어 준다면.”



레이디버그인 그녀가 다른 귀걸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선물하고 싶었다. 사용하지 않아줘도 상관없다. 그냥 소중히 간직해만 준다면, 그걸 보고 자신을 떠올려 준다면 그걸로도 만족할 수 있다. 슬쩍 웃는 아드리앙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플랙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일편단심 납셨네. 그래서, 언제까지 숨길 거야? 네가 블랙캣이라는 걸.”

“글쎄. 언제까지일까.”



아드리앙의 표정이 쓰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알아차릴 때까지 스스로 정체를 밝히지 말자고는 결심했었지만, 역시 이건 이것대로 힘들다. 마음에 둔 여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좋아할 남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그녀가 좋아하는 아드리앙은 그저 껍데기일 뿐이어서.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이 떠오른다. 동화책에 나오는 야수는 미녀의 진실된 사랑이 있어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솔직히 지금 자신과 그녀의 처지가 딱 그 꼴이었다. 외면에 집착하는 그녀와 진짜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는 자신은 묘하게 엇갈린다. 가까이 있지만 닿을 수 없는 평행선 위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앞만 바라보는 그녀는 결코 뒤를 돌아봐주지 않는다. 돌아봐줄 때까지 기다리자고 생각했었지만 역시, 조금은 힘들다.


아드리앙이 작게 중얼거렸다.



“동화라면 분명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있을 텐데.”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까.



“딱 한 마디면 되는데. 그럼 마법이 풀리고, 진짜 모습으로 그녀 앞에 설 수 있는데 말이야.”



마법을 푸는 한 마디는 무척 간단했다. 하지만 그건 그 자신도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짐승의 모습을 뒤집어쓴 남자는 공주님의 한 마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는 왕자님이라는 사실은 모르지. 몰라야 했다. 사실 그런 왕자의 모습같은 건 다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래서, 진짜 자신을 찾아내주길 바라게 된다.


닭살 돋는다는 표정으로 몸을 비비꼬던 플랙이 다른 치즈조각을 집어들며 말했다.



“쓸데없이 오글거리는 건 여전하네~.”

“시끄러.”



그가 투덜거렸다.





* * *




“블랙캣!!”

“어서…, 도망쳐!”



보이지 않는 실로 꽁꽁 묶인 블랙캣이 맘대로 움직이려는 몸을 애써 멈추고 그녀를 향해 소리질렀다. 이번 악당은 인형을 좋아하던 소녀답게 주변의 사물을 조종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시내 한 복판에 나타나서 인형놀이를 한답시고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묶어 조종하던 악당은, 골목으로 도망쳐 변신하려던 마리네뜨를 발견하고 히죽 웃었다. 같이 있었던 블랙캣이 그녀를 감싸고 대신 맞아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저기 사람들처럼 의지도 없는 인형이 되어 싸우고 있었으리라.


괴로워보이는 블랙캣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점점 자아를 빼앗기는지 흐려지는 눈동자를 애써 부여잡고,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블랙캣이 피식 웃었다.


역시, 하지 않았구나. 


어차피 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음에도 왜 굳이 그걸 선물했을까. 심지어 처음에 자신이 반했던 사람은 레이디버그로 변신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마음이란 참으로 가증스러운 존재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아니 지금도 좋아하지만. 그녀가 레이디버그던 뭐던 이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니. 그리고 그녀도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라고 있다니 말이다.


그 귀걸이는 제 마음이었다. 레이디버그가 아닌 너라도 상관없다는, 제 나름대로의 고백이었다. 그녀가 알아챌 날은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설마 죽진 않겠지. 꽤나 태평하게 생각하면서 블랙캣은 끝내 닥쳐오는 수마를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의식을 잃기 전 그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직…,”



사랑한다는 말도 못 했는데.







“…좀 떠….”



멀리 메아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서리가 하얗게 끼어버린 창문처럼,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무엇인지 인지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어? 눈을 뜨라고!!”



조금씩 정신이 들고 있었지만 욱신거리는 몸과 피곤한 정신에 그는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에 꽤나 기분이 좋아졌다. 신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없었지만. 악당에게 기를 다 빨린 느낌이다. 



“왜 눈을 뜨지 않는 거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어들고 있었다. 그에 아니라고, 깨어났다고 답해주고 싶었지만 정말 기운이 없었다.



“제발, 일어나란 말이야!!”



깜짝이야.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건 그녀도 잘 알지 않는가. 대체 정신을 잃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저리 불안해하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더 잘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제 얼굴 위로 닿는 따뜻한 감촉에 생각이 멎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려, 제 눈앞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미 변신이 풀린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리, 네뜨….”

“블랙캣! 괘, 괜찮아? 괜찮은 거야?”



왜 저 모습인 걸까. 변신이 풀린 것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레이디버그인 걸 설마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마리네뜨의 모습으로는 존대를 하면서, 굳이 지금 반말을 쓰는 것이 참 헷갈린다. 그래도 눈치채지 못한 척 해줘야 하는 걸까. 그 와중에도 실없는 생각이 드는 자신이 참 웃겼다. 이런 생각할 기운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죽을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그럭저럭….”



괜찮아.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몸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고통에 조용히 신음했다. 어지간히도 거칠게 다뤘나 보네. 애써 평소처럼 웃으며 말하려고 했지만 얼굴 표정을 바꿀 힘도 없었다. 그냥, 지쳤다. 손가락에 애써 힘을 주어 들어올렸다. 눈물이 가득한 마리네뜨의 눈가에 가만히 손가락을 댔다.



“왜, 울고 있냐.”



웃는 게 훨씬 예쁜데.



“이 와중에 농담이 나와요?”



아, 다시 존대다. 개인적으로는 반말이 친근해서 더 좋은데, 그렇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려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하하, 사실인걸.”

“정말, 괜찮은 거죠?”

“그런 걸로 죽는다면 이미 예전에 죽었겠지.”



농담을 던지는 자신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눈물이 맺힌 눈동자로 살짝 웃었다. 그 모습이 진짜 안도한 것처럼 보여서 심장 한 켠이 욱신거렸다. 한숨을 내쉬며 인정했다. 아, 역시 좋다.


네가 너무 좋아.



“…너는 언제쯤 눈치채줄까.”

“네?”

“아니, 아니야.”



동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어서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마법이 풀리면 그제서야 나는 나로서 너를 마주할 수 있다.


사랑해.


그 한 마디 주문이면 모든 나쁜 마법은 풀린다. 저주가 풀리는 날, 나는 너를 마주 끌어안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겠지. 분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어서. 하지만, 아직은 조금 뒤의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도.


그 날이 빨리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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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 양반김님 그림 참고.

※ 13화 이후의 이야기 상상.





[아드버그] 운수 좋은 날





무슨 정신으로 공연을 봤는지 모르겠다.


나탈리에게 인사를 한 뒤, 아드리앙은 터덜터덜 걸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 앞에서 멈추더니, 침대 스프링이 풀썩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아드리앙의 몸이 그 위로 쓰러졌다.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는 아드리앙의 가슴 쪽에서 끄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꾸물꾸물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날 찌부러뜨릴 셈이었어?”



투덜거리는 플랙의 목소리에도 아드리앙은 말이 없었다.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엎어져 있는 아드리앙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플랙은 쯧쯧 혀를 찼다.



“또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네?”



하여간 이해할 수 없다니까. 그런 여자보단 치즈가 훨씬 좋은데. 옆에서 킬킬거리며 떠드는 플랙의 목소리가 거슬리는지 아드리앙은 살며시 제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한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말했다.



“시끄러, 플랙. 책상 위에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치즈 있으니까 그거나 먹고 있으라구.”

“오옷, 치즈~!!”



아드리앙이 말한 장소로 재빠르게 날아든 플랙이 상자를 열고 치즈 한 조각을 꺼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우물우물 치즈를 꿀꺽하는 플랙과 함께 다시금 방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무언가 고민하는지, 다시금 눈가를 찡그리던 아드리앙이 이내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하아, 긴 한숨소리가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나왔다. 어느새 치즈 한 통을 다 비우고,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던 플랙이 한 마디 했다.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오늘따라 유독 들떴잖아? 너. 변신 안하고 그 여자를 봤기 때문인가~?”



아드리앙은 아무 말도 없었다. 눈을 감고 작게 한숨쉬는 모습에서 정답을 읽었는지 플랙은 낄낄 웃으며 그가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 휘잉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아드리앙의 머리 위로 날아온 플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여간 신기하다니까. 블랙캣일 때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 그 모습일 때 만났다고 새삼 그렇게 충격받을 거 뭐 있어?”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란 말이지.”



블랙캣의 모습으로 그녀를 마주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곁에 있으면 심장이 떨렸고 눈짓 하나, 미소 한 자락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태연하게 굴 수 있었다. 아드리앙의 모습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더….


괜히 달아오르는 얼굴을 두 손을 들어 가렸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플랙의 비웃는 표정이 눈에 선히 그려지는 듯하다. 차가 멈추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그녀의 옆얼굴을 본 순간 모든 생각이 멎었다. 가녀려 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강인한 소녀,


나의 영웅.


백지장이 된 머리로 그저 멍하니 그녀를 내다보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꽤나 위급한 상황이었음에도 그 때는 그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 시간이 느릿하게 굴러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심장소리는 흐르는 물처럼 평안했다. 하지만 감정은 그렇지 못해서. 그녀와 서로 눈을 마주하는 순간 깨달았다.


세상에 운명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운명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역시, 운명이라니까.”

“또 그 운명 타령이야?”

“다시 한 번 만나고 깨달았어. 역시 난….”



벌떡 자리에 일어나 앉는 아드리앙을 보며 플랙이 넌지시 제안했다.



“그렇게 좋으면, 변신하지 않고 다가가도 좋지 않아?”

“…아냐. 그건 아닌 거 같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악당과 싸울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굳이 다가가는 민폐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혼자 싸우는 걸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고. 아니, 아니다. 이건 모두 변명일 뿐이야. 그냥, 두려웠다. 블랙캣으로서도 거절당하는데, 굳이 원래 모습으로까지 제게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사살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상냥했지만 그만큼 선이 확고했다. 블랙캣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 성격이 확연히 드러났다. 파트너로서 소중히 여겨준다는 것은 알지만 그 이상의 마음은 절대로 주지 않는다. 기대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퍽 잔인하다 싶다가도 희망고문이 아닌 것이 어딘가 싶기도 하지만,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포기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라.



“흐음, 모르지. 또 그 모습이면 꽤나 좋아할지도?”

“확실하지 않은 일에 굳이 모험하고 싶지 않아.”



한숨을 쉬며 두 팔을 옆으로 쫙 펼쳤다.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 새록새록 잔상처럼 떠오른다. 어쩌면 플랙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지금 괜한 걱정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었다.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그게 두렵다. 그저 블랙캣이라는 존재가 아닌, 진짜 ‘나’의 모습을 거절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블랙캣은 또 하나의 나 자신이었다. ‘아드리앙’으로서는 절대 보이지 못할 내 내면의 또 다른 모습. 블랙캣은 자유롭다.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장난스럽고, 매사에 솔직해질 수 있다.


현실에 꽁꽁 묶여 있는 나와는 다르게도.


낭만적인 시를 써서 사랑을 고백하고자 해도, 결국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건 어차피 전하지 못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멋진 미사여구를 떠올려도 그녀 앞에선 제대로 생각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사실 블랙캣의 모습으로도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이 심란해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원래 모습으로는 어떻겠는가.


블랙캣으로서만 그녀를 만나는 건 다름 아니다. 블랙캣의 모습을 하고서야, 나는 솔직하게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습다. 가면을 쓰고 있을 때만이, 그 어느 때보다 진실될 수 있다는 이런 모순이.


모르겠다. 아파지는 머리에 그는 조용히 생각을 거두었다. 그냥, 지금이 좋았다. 누구보다 가까이 그녀 옆에 있을 수 있는 이 순간이. 블랙캣일 때가 좋았다. 언젠가는 그녀 앞에서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는 걸 알지만, 아직은 묻어두고 싶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좋은걸.”



그저 눈을 마주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질 만큼.





* * *



이제 여름이 지나간 탓인지,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주홍빛으로 물든 구름들을 주변에 두고, 새빨갛게 물든 태양이 잠을 자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두워지려나.


아드리앙의 초록빛 눈동자에 져가는 노을이 가득 담겼다. 그는 지금 스케줄을 마치고, 자신을 데리러 올 차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촬영 장소는 공원이었다. 낮과 밤의 경계에 서 있는 공원 안에는 이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마저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나뒹구는 소리만 간간히 들려오는 공원의 분위기가 퍽 으스스했다.


왜 아직도 안 오나.


괜히 초조해지는 마음에 아드리앙은 가만히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다고, 불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방에 앉아서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플랙 녀석을 깨우기는 퍽 자존심이 상했다. 뻘쭘히 서 있다가 시간을 확인하게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시간이 꽤 늦어졌다는 것을 안 아드리앙의 눈썹이 살짝 까딱거렸다. 아무래도 전화를 해야….


응?


스치듯 지나가는 붉은빛을 잡아챈 녹빛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레이디버그?”



그저 한 순간의 중얼거림일 뿐이었다. 너무 소리가 컸던 걸까.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자신 쪽을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아드리앙은 그만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자꾸만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아드리앙은 하염없이 그녀를 두 눈에 담았다. 살짝 깜빡이면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동자로.


레이디버그도 말이 없었다. 엊그제 마주했을 때처럼, 놀랐는지 깜빡거리는 푸른빛 눈동자가 망연히 그를 쳐다보았다.


느릿하게 감아지는 테이프처럼 시간은 빠른 듯이 천천히 흘러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침묵 끝에 먼저 말을 건 것은 그녀 쪽이었다. 당황한 건 그쪽도 마찬가진지, 꽤나 당황한 목소리였다.



“어, 아. 그러니까. 아…, 드리앙인가?”

“…날 알아?”

“어? 아! 포스터, 붙은 거 봤거든! 그래서.”



웃으며 대꾸하는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그 때는 잔잔했던 심장이 요란하게 제 의사를 주장한다. 마치 나에게, 그녀가 어떤 의미인지를 각인시켜 주겠다는 것처럼.


이름을 기억해줬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결국 이 모습의 나는 그 정도의 존재인가 싶어 괜히 씁쓸해졌다. 평소랑 달리 말을 더듬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 싶기도 했지만, 이런 모습도 귀엽다는 생각이 드니 아무래도 중증인 듯 싶다.


말을 걸어볼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히어로 일…, 하러 가는 거야?”

“어? 으음, 아니. 막 끝났어. 이제 돌아가는 참이야.”

“그렇구나….”



내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 말하고 있으면서도 온통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까, 히어로 일을 끝냈다는 거지? 알았으면 나도 도우러 갔을 텐데. 혼자 처리하게 하면 안 되는데. 아,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말하자고 마음먹은 순간 꼬여버린 생각에 골머리를 앓았다. 자연스럽다는 게 뭐지? 나는 평소에 애들한테 어떤 식으로 말을 걸었더라?



“아, 그러니까. 그쪽은 여기서 뭐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찰나, 그녀가 하하 웃으며 말을 걸었다. 배려해주는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긴 얼마나 바보같아 보일까. 모처럼의 기회를 잡았음에도, 제대로 이야기조차 나누지 못하는 제 자신이 너무도 답답했다. 블랙캣으로서 매번 만나고, 소소한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인데 왜 지금은 그게 안 될까.



“아, 나는…. 차를, 기다리고 있었달까, 하하하.”

“그래? 그 대형 리무진?”

“그걸 어떻게?”

“…아, 하하. 어쩌다 보니.”



뭔가 얼버무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착각인가? 착각이겠지. 그녀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학교에도 자주 나타났었으니 제가 하교하는 모습을 봤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 하나에 설레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아드리앙은 슬쩍 웃었다.



“지금쯤이면 와야 하는데, 아직 안 오네.”

“…같이 기다려줄까?”

“어?”

“어 아니. 왜, 시민을 지키는 게 히어로의 일이잖아? 이미 상황을 알았는데, 여기 너 혼자 두고 가기도 좀 그렇고…. 부, 부담스럽다면 그냥 갈게.”

“…고마워. 하지만 집에 가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응?”

“위험하잖아.”



띠띠 울리기 시작하는 귀걸이를 손으로 가리키자, 그제서야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눈을 깜빡거렸다. 그럼에도 힐끗 제 쪽을 바라보는 게 걱정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붙잡고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길 원하지 않았다. 본래의 그녀에게도 자신의 삶이 있을 것인데.


…사실은 그냥 곁에 있어달라고 하고 싶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답답하다. 블랙캣이었다면 분명 조금만 더 같이 있어달라고 떼를 썼을 텐데. 하긴, 그 모습이었다면 그녀는 제게 같이 기다려주겠단 소리조차 하지 않았겠지.



“그럼, 미안한데 이만 가볼게!”

“잠깐만!!”



뒤돌아서려는 그녀를 급하게 불렀다. 뭐냐는 듯이 뒤돌아보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노을빛을 받아 옅게 부서졌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기, 난….”



너를 좋아해.


그 말 한 마디가 설마 그렇게 힘들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딱딱해진 혓바닥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깊숙이 묻어두었던 제 마음은 결코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말하고 싶은데, 정말로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었다.


대답을 듣기가 무서워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다. 당장 얼마 전에도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의 모습을 한 악당이 되어 나타난 적도 있었고. 그 때도 그녀는 그의 마음을 감사히 여겼지만, 그저 그 뿐이었다. 그녀가 그를 거절한 것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게 자신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자신이 지금 고백하면 어떨까. 몇 번 마주치지도 않고, 대화도 해보지 않은 상대에게서 받는 고백이라니. 과연 진심이라고 받아들여줄까? 그냥 동경이라고만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아드리앙은 살며시 고개를 내저으며 힘없이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싫어. 그러니까, 말할 수 없어.



“…그냥, 고맙다고. 늘 우리를 지켜줘서 고마워. 레이디버그.”

“어, 응.”

“그런 네가…, 좋아.”



이 정도는 괜찮을까. 친구에게 말하듯,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애썼다. 말하고 보니 대담한 짓을 했나 싶어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어딘지 후련했다. 날이 지고 있어 다행이다. 노을빛에 제 얼굴을 가려주겠지. 시선을 떼는 것이 아까워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았다. 쿵쿵 울리는 심장소리가 온 몸으로 메아리친다. 그와는 별개로 쓰려오는 가슴에 세게 움켜쥔 손 안의 핸드폰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긴장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숨죽여 대답을 기다렸다.



“어?! 어. 그, 그렇지!”



화들짝 놀라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왠지 낯설다. 블랙캣일 때 봤던 그녀는 언제나 여유롭고 당당했는데. 어째서일까. 작은 의문이 싹틀 찰나에, 레이디버그는 자신을 보고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미소에 심장이 철렁했다.



“난 진짜 가볼게!”



안녕.


그 말과 함께, 레이디버그는 바람처럼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계속 지켜보다가 소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하, 하하하. 조금씩 소리내어 웃다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하늘로 향한 채 마음껏 웃던 소년의 웃음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다가 하-. 긴 한숨을 뱉어내던 소년의 얼굴이 푹 숙여진 고개와 같이 감춰졌다. 새빨개진 귓불이 그의 상태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떠나간 상대를 그리며, 소년은 살며시 입을 열어-,



“사랑해.”



-닿지 못한 한 마디를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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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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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마리] 사랑의 정의





사랑이라.


솔직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가끔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었다. 책에서는 사랑이란 달콤하고 로맨틱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보며 심장이 뛰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곁에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싶어지는 상대를 만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너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무언가 간질간질 심장을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고, 손을 잡거나 그저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진다. 책에서 말했던 그대로의 감정에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사랑은 생각만큼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을 하고부터, 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짝사랑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몸소 체험해야만 했다. 상대가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을 때 사랑은 가끔씩 칼날이 되어 나를 찔러왔다. 나를 쳐다보는 무던한 시선 하나에 아플 정도로 뛰어대는 심장이 고통을 호소했다. 나를 거절하는 행동에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상처받고, 가끔은 손을 내밀기를 주저하기도 했다.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라는 속설을 그 순간 느꼈다.


내 마음은 너의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온통 휘둘리고 오락가락한다. 종잡을 수가 없는 너라는 파도에 계속 휩쓸린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가끔씩 아프기는 했어도, 너와 함께 있을 때가 너무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리 심장이 뛰는데.



“사랑해.”



그래서, 너한테서 그 말을 듣는다면 무척 행복할 거라 생각했다. 가끔 상상해보기도 했다. 너한테서 듣는 사랑고백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처음에는 분명 꿈이라 생각하겠지. 그러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를거야. 바보같이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나한테 그 말을 해준 당신을 꼭 끌어안고 사랑의 말을 속삭이겠지.


몇 번을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에 담은 너의 그 한 마디에 숨이 멎었다. 벅차오르던 가슴은 이내 휙 고개를 돌리는 네 모습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분명 기쁜데, 기쁘지 않아. 저 한 마디가 너무 좋아서 꿈만 같은데, 마지못해 대답하는 것만 같은 네 모습에 마음이 아파.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였던가? 사랑이 이렇게 아픈 거였던가. 가슴을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아프고, 이렇게 눈이 따가워지는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그저 가볍게 지나가는 장난이었을 뿐이다. 사랑한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도와줄 수도 있다는 언제나와 같은 가벼운 장난. 당연히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핀잔이 없어 의아해하던 찰나, 네게서 돌아온 그 말에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반짝 떠올랐던 기쁨을 차가운 분노가 덮어버리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나에게는 그리도 어렵고, 한 번 말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 그 말이 네게는 그렇게 가벼웠구나.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그저 그런 한 마디일 뿐이었구나.


사랑해라는 말은 역시나 달콤했다. 지독히도 달콤해서 입 안이 쓰렸다. 어째서일까. 분명 너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음은 왜 이렇게 점점 비참해지는 걸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잠깐만!!”



그 말을 남기고, 곧장 돌아서서 앞으로 걸어가려는 너를 다급히 불렀다. 너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그 돌아선 뒷모습이 마치 너와 나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 같아 심장이 저릿했다. 너는 언제나 그랬지. 아드리앙일 때는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하면서, 블랙캣인 나를 볼 때는 그저 차가워. 내가 아무리 쫓아가도 결코 돌아봐주지 않아. 싫어하는 건 아니면서도 그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아. 제발 나를 돌아봐달라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지르고 또 소리질러도, 네가 보는 건 내가 아니야. 진짜 내가 아니다.


닿지 않는 허상을 바라보는 너는, 결코 진실된 나를 돌아봐주지 않아.



“다시, 한 번만….”



늘 고민했어. 어떻게 표현해야 나의 이 마음을 좀 더 잘 전할 수 있을지. 늘 곁에 있어도, 네 앞에서 애써 강하게 행동해도, 좋아한다고 말하고 손을 붙잡아도 너에게 나는 언제나 파트너일 뿐이야. 조금 방법을 바꿔볼까 싶어 낭만적인 시를 써보기도 했지만 결국 전하지 못했다. 그 어느 것 하나,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네가 아직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를 돌아봐줄 날이 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나를 피해다니는 너를 쫓아다니며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또 추스렸다. 괜찮으리라 믿었다.


이 마음이 네게 닿을 것이라 믿었다.

어리석게도.


말을 하는 것이 이렇게 무거웠던가. 이렇게 힘들었던가. 떨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네가 뒤돌아보고 있어 다행이다. 정면으로 마주하면 이 정도로 뻔뻔해지지도 못할 테니까.



“다시…, 한 번만 더, 사랑한다고 거짓말 해줘.”



제발.


맥없이 중얼거리듯 애원하는 목소리, 총기를 잃은 초록빛 눈동자는 몹시 지쳐 보였다. 흠칫, 몸을 떨면서도 그를 돌아보지 않고 침묵하는 마리네뜨의 주먹쥔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지는 절절한 애원에, 단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겠다는 무언의 타협에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블랙캣은 쓰게 웃었다.


이것조차 안 되는 건가.


기대하고 기대하고 또 기대하고, 그럼에도 그 끝은 언제나 좌절이었다. 돌아봐주지 않는 너에게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물이 없어 시들어가는 꽃처럼, 보답을 받지 못하는 사랑은 점점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도 너는 언제나 매정하게 내게서 등을 돌릴 뿐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상상하는 것조차 그만두었다. 결국 진짜 나로서는 네게 닿을 수 없다는 절망만을 느끼게 될 뿐이어서.


그럼에도, 네게서 듣는 그 말은 너무도 달콤했다. 마치 마약처럼. 중독되고 난 뒤에 따라오는 건 고통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달콤함 뒤에 남는 건 쓰라림 뿐일지라도 다시 한 번 더 듣고 싶었다. 거짓말이라도 좋아. 나를 동정하는 거짓말이라도, 그 말 하나가 내게 스며들어 결국 나를 망칠 거라는 걸 알아도,


뿌리칠 수 없어.


너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너한테는 그게 거짓말로 들렸어?”



한참이 지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는 얼굴을 보자마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꽤 태연한 목소리와 달리 슬프게 일그러진 푸른빛 눈동자는 울고 있었다. 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잠시 멍해졌다.



“…뭐?”



멍청하게 되묻는 나를 보고서 너는 그저 입술을 깨물며 눈물만을 쏟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묘하게 선명한 시선이 날카롭게 나를 훑었다. 원망하는 듯한 눈동자에 어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나를 제지하는 네 목소리의 끝이 살짝 갈라졌다.



“다가오지 마!!”



단호한 거절에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그런 내 모습에 너는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도, 괴롭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주체하지는 못했다. 다시금 말을 꺼내는 네 목소리에는 이번엔 확실히 울음기가 담겨 있었다.



“나는 네가 싫어.”



정말 싫어.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는 네 발자취 위에 울음소리가 조금씩 담겨간다. 쫓아가지 못하고 나는 그저 멍하니 네 뒤에 남아 있었다. 너는 뭐가 그리 서러워서 울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뺨에 닿는 촉촉한 무언가에 살짝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보았다. 투명한 무언가가 손가락 끝에 가득 묻어났다. 하, 탄식을 내뱉었다. 사랑이 대체 뭐라고, 이리도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걸까.


쫓아가도 되는 걸까.

쫓아가서 손을 뻗으면, 너는 이번에야말로 나를 돌아봐줄까. 방금처럼.


무겁다고 생각한 발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샌가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는 너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인 걸까. 다시금 뛰기 시작하는 이 심장소리는 그저 반사적인 육체의 움직임일 뿐일까, 아니면 너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니, 도망가지 말아줘. 나를 마주봐줘.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의 이런 한 마디에 다시금 흔들리는 나는 역시 바보인걸까. 멀리 가지 못한 너의 어깨를 붙잡자,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뒤돌아보는 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마저도 너무 예뻐서 심장은 진정할 줄 모른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식으로 도망가지 말라구.”



거짓말이 아니라면,

이번에는 다시 한 번 제대로 말해줘.


나를 사랑한다고.






===


연성키워드: 한 번만 더 사랑한다고 거짓말 해줘.

시뛰님이 뽑으신 연성키워드에 착안해서 써봤어요^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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