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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전력. 안나님과 2인 전력!





[아드마리]

Merry Christmas






“마리네뜨.”



티키가 조용히 그녀를 부르자,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원피스를 손에 들고 있던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눈가를 초승달처럼 곱게 휘고서 살짝 빨갛게 홍조를 띠고 있는 얼굴은 어딘지 들뜬 것처럼 몽롱했다. 히죽 웃고 있는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아, 눈빛은 왠지 초조한 것 같기도.


그런 마리네뜨의 앞에는, 마구 펼쳐진 채로 침대 위를 수놓고 있는 옷들이 있었다. 몇 시간 째 그 앞에서 계속 고민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언제까지 고르고 있을 거야?”

“그치만그치만, 아드리앙과의 데이트라구!!”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들고 있던 옷을 꼭 끌어안고, 황홀한 듯이 얼굴을 붉히는 마리네뜨의 머릿속에서는 다시 망상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아드리앙이 먼저 제안한 데이트였다. 말하면서도 쑥스러웠는지 머리를 긁적이는 아드리앙 진짜 귀여웠는데. 아드리앙이 깜짝 놀랄 만큼 예쁘게 입고 가야지. 그럼 아드리앙은 분명 오, 마리네뜨. 너 오늘 정말 예쁘다라고 말하며 엄청 근사하게 웃어줄 거야.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 오늘 네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워! 라고 말하면서 키, 키, 키스를……!!



“마리네뜨!!”



헉. 저도 모르게 입술을 내밀고 있던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열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망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마리네뜨의 주변을 빙빙 돌던 티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물론 데이트야 좋지만, 빨리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슬슬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있잖아?”

“앗, 벌써?!”



어두워진 창밖을 휙 쳐다보다가, 탁상시계로 시선을 돌린 마리네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침대에 널려 있는 옷들을 두루 훑어보던 마리네뜨는 결심한 듯이 옷들 몇 개를 집어들었다. 다 입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던 마리네뜨가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음, 역시 이걸로 해야겠다.”



검은색의 상의와 하얀 반바지, 모자가 달린 붉은빛의 산타 케이프를 몸에 걸친 마리네뜨의 모습은 딱 보기에도 발랄하고 예뻐 보였다. 살짝 푸른끼가 도는 흑발이나 하얀 얼굴이 빨간 케이프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좋아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은 곧 다가올 데이트에 대한 기대로 밝아졌다. 그럼에도, 마리네뜨를 쳐다보는 티키의 표정이 꼭 딸을 물가에 내놓은 어머니를 연상시켰다.



“그렇게 입고 나가면 춥지 않을까?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괜찮아. 이 케이프 생각보다 꽤 따뜻하다구.”



마리네뜨는 실실 웃었다. 사실 감기에 걸린다고 해도, 아드리앙 앞에서는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사실 그의 입에서 예쁘다는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좋아서 승천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너무 기뻐서 방방 뛰어다니느라 더워질지도.


슬슬 나가지 않으면 차가 막혀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거 같다. 재빨리 물건을 챙기고 가방을 옆에 매고서 마리네뜨는 웃었다. 



“그럼, 나가자. 티키.”




*


파리의 거리는 언제나보다 더 북적거렸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꽤나 분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는데, 약속 장소인 샹젤리제 거리 근처로 점점 다가갈수록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도로가를 꽉꽉 채운 자동차들의 클락션 소리마저도 묻어버릴 만큼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들이 참으로 활기찼다. 다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곳곳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서 산타 복장을 하고 어깨에 진 자루에서 선물을 나눠주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 보였다. 아이들이 오밀조밀하게 몰려서 선물 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은 꽤나 흐뭇한 장면이었다. 얼굴에 하얀 턱수염을 붙이고 장난치듯이 웃는 산타들을 가만히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곧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새까만 전선들이 얇게 휘감겨 있었다. 그 위에 매달린 불빛들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 조용하게 그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다가올 밤을 위해 맹렬하게 타오를 준비를 하는 것처럼.


길가에 세워진 노점상들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가게들 문 위에 걸려 있는 예쁜 크리스마스 화환들에 저도 모르게 눈길을 주다 보면, 곧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안쪽에도 시선이 가게 된다. 개중 어느 가게는 정말로 예쁘게 꾸며져 있어 홀린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 밖으로 나오는 마리네뜨의 손에는 향초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빨간색과 초록색. 사버렸다- 고 중얼거리면서도 마리네뜨는 피식 웃었다.


아드리앙한테 주면 좋아할까?


걔야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겠지만, 그래도 모처럼 주는 선물인데 거절하지는 않겠지.


향초를 쳐다보다가,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던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몇 번 깜빡거렸다. 곧 다시 기분 좋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던 마리네뜨의 주변을 서늘한 바람들이 훑고 지나간다. 화륵 공중으로 휘날리는 붉은색 케이프가 마치 깃발처럼 바람을 따라 춤을 춘다.


약속 장소는 샹젤리제 거리 근처에 있는 커다란 광장이었다. 여기서 만난 뒤 같이 거리를 걷기로 예정했었다. 광장 안에 있는 커다란 가로수 아래에 살며시 기대어, 마리네뜨는 자꾸만 삐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려고 노력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아무렴 뭐 어떠랴. 티키와 대화하기에는 너무 보는 눈이 많았기에 심심해진 마리네뜨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런저런 망상을 떠올리다가, 꺄악 소리지르는 마리네뜨를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약속 시간이 되었다.


아드리앙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기다렸다. 약속 시간서 10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아드리앙에 이상함을 느낀 것도 잠시였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면서 마리네뜨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오지 않는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아드리앙에게선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봐도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소리만 반복해서 되돌아올 뿐이다. 겨울이라 벌써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바람이 점점 쌀쌀해지고 있었다. 서 있던 자리에서 작게 팔자를 그리며 돌아다니던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결국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마리네뜨의 뒷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터벅터벅 인파를 비집고 힘없이 거리를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표정은 나오기 전과 달리 조금은 풀이 죽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운함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게 정말 소박맞은 아낙네 같았다. 차라리 오지 못하겠으면 전화라도 해주지, 전화까지 꺼두고 이렇게 바람맞히는 건 또 뭐냔 말이다.


아드리앙 앞에서는 아닌 척했었지만 사실 되게 많이 기대했었다. 사귄 이래로 그에게서 이런 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하물며 크리스마스는 연인들의 날이라잖아. 기대했던 건 자신뿐이었던 걸까. 그는 바쁘니까,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하려 애써도 축 처지는 몸은 어쩔 수 없다.


지금쯤이면 설마 광장에 도착했을까? 어차피 자신은 이미 나와버렸지만. 핸드폰도 꺼버렸다. 지금 기분으론 도저히 다른 애들이 보내는 크리스마스 인사를 받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이기적이긴 했지만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더 우울해진다. 그러다가 심통이 났는지 마리네뜨는 문득 자리에 멈춰서 크게 발을 구르며 소리질렀다.



“아드리앙, 이 바보!”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마리네뜨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입술을 깨물면서 짜증을 쏟아내는 마리네뜨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솔직히 짜증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신기하지 않은가. 데이트를 신청한 건 그 쪽인데 이렇게 바람을 맞히다니!


마구 화를 내던 중,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자신을 흘끗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리네뜨는 뻘쭘하게 웃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화를 내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물 먹은 스펀지처럼 더더욱 우울해진다.


‘나’를 그렇게까진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가 반했던 건 레이디버그니까. 변신하고 있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날 좋아한다고 해줬는데. 결국 그런 식으로라도 서로 옆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역시 운명이라고 말하며 아드리앙이 제 손을 꼭 잡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솔직히 그 때는 이게 과연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었는데, 나는 정말로 꿈을 꾼 걸까.


유독 시린 바람에 케이프를 꼭 붙잡고 몸을 떨었다. 추워서 그런 걸까. 자꾸 시야가 흐릿해진다. 나 안경도 안 끼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손에 들린 봉지 소리가 바람에 바스락거린다. 그에 더 서러워졌다.


만약 네 말대로 우리가 운명이라면,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너는 나를 찾아낼 텐데.


그 때였다.


사람들 사이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커다란 손이 마리네뜨의 팔을 세게 붙잡자, 깜짝 놀라서 뒤로 돌아서는 마리네뜨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방울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푸른빛의 시선 끝에 맨 처음 보인 색깔은 녹색이었다. 초록색 눈동자. 들고 있던 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딸꾹, 숨을 넘기는 마리네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어떻게.


아드리앙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확히는 정장 위에 검은색 외투를 입고, 패션쇼라도 했는지 평소와는 머리스타일이 좀 달랐다. 하지만 꽤나 황급히 달려왔는지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었을 머리카락은 마구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은 아드리앙이 하하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 울어?”

“어….”

“미, 미안해. 촬영이 늦게…, 핸드폰이 망가져서….”



나중에 만나면 따지려고 했는데, 화내려고 했는데.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는 아드리앙의 표정이 정말로 미안해 보여서, 마리네뜨는 멍하니 그런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리저리 굴러가는 초록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정말 당황했는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정말 화났나 싶어 눈치만 보고 있는 아드리앙을 보던 마리네뜨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펑, 하는 굉음과 함께 광장 쪽에서 커다란 먼지구름이 일었다. 동시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그들의 귓가에 꽂혔다. 그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도 놀랐는지 그쪽 방향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뭐야? 뭐야?!”

“저기 무슨 일 났나?”



점점 커져가는 수군거림 사이를 벗어난 두 사람이 각기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골목 사이에서 반짝 빛이 빛나더니 변신한 두 사람이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이야, 저거 참. 난리도 아니네. 눈가에 손을 올리고 멀리 내다보던 블랙캣이 장난스레 대꾸하자, 레이디버그는 피식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게. 또 어떤 사람이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에 저리 날뛰고 있을까~?”

“뭐야, 왜 내쪽을 쳐다봐?”



지레 찔리는지 몸을 움츠리는 블랙캣을 향해 가만히 눈짓하던 레이디버그가 손에서 요요를 꺼내, 근처 가로등으로 던졌다. 실이 팽팽하게 묶였는지를 확인하자마자 뛰어내리는 레이디버그에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먼저 간다!”

“야아, 같이 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광장으로 날아가는 레이디버그의 뒤를 블랙캣이 황급히 쫓았다. 볼멘소리를 던지고는 있지만,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을 보던 블랙캣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악당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하는 사람은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꼭 같이 파티하자고 약속해놓고도 집을 비우는 부모님에 서운하지 않을 아이는 없을 것이다. 나만 불행한 건 불공평하다며 세상의 모든 행복한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겠다고 소리치던 빌런은,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을 빼앗긴 것에 땡깡부리는 작은 아이였을 뿐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제 부모님에게로 뛰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던 레이디버그는 작게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건 모두 마찬가지구나.


그러고 보니 부모님.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블랙캣을 돌아보았다. 부모님에게 안겨 밝게 웃는 아이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퍽 쓸쓸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흐뭇해 보이는 게, 부모님과 같이 있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이를 보면서 만족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잠시 후 변신이 풀리자, 아드리앙과 마리네뜨는 약속했던 대로 같이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파리 시민들이 자부하는 만큼이나, 크리스마스를 맞은 샹젤리제 거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자동차나 사람이 많아 혼잡하긴 했지만, 개선문을 사이에 두고 도로 양 옆으로 웅장하게 세워져 있는 나무들은 마치 이 거리를 지키는 기사같았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휘감겨 있는 색색의 불빛들이 밤의 파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지나갈 때마다 보이는 가로수들에 열매처럼 매달려 있는 불빛들이 참으로 어여쁘다. 노랗게 빛났다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붉게 변하는.


앞서 가는 아드리앙의 뒤를 말없이 따라가는 마리네뜨의 몸에는 검은색 외투가 걸쳐져 있었다. 변신이 풀리고 난 뒤 마리네뜨의 차림을 보더니, 아드리앙은 잠깐 아무 말이 없다가 곧장 자신이 입었던 외투를 벗어 건네줬었다. 왜냐고 물으니 예쁘긴 하지만 추워 보인다나. 쑥스럽다는 듯이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는 아드리앙의 행동은 마리네뜨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예쁘다는 말을 들었으니 좋아야할 텐데, 신기하게도 생각했던 만큼 막 들뜨지는 않았다. 그냥, 마음이 따뜻해졌다. 자신을 배려해주는 행동이 기뻤다. 이런 외투를 입지 않아도, 저 한 마디만으로도.


고민하는 얼굴로 마리네뜨는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아드리앙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드리앙의 손을 향해서. 살짝 내밀었다가 다시 주저하고, 조금 더 뻗었다치면 흔들거리는 아드리앙의 손에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손을 뻗었다 거두는 것에 따라 마리네뜨의 표정도 마구 구겨졌다. 용기 없는 자신을 타박하면서 마리네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보 마리네뜨, 왜 이렇게 망설여? 명색이 우린 사귀는 사이잖아! 꺅, 내가 아드리앙이랑 사귄대! 아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연인끼리 손 정도는 잡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 그래도….


용기를 내어 손을 잡으려던 찰나, 갑자기 뒤돌아선 아드리앙에 깜짝 놀란 마리네뜨는 절로 뒷짐을 졌다. 하하, 뻘쭘하게 웃으며 하얀 치아를 드러내는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왜, 무슨 일이야?”

“아, 맞다.”



그제서야 용건이 생각났는지 아드리앙은 부드럽게 한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손.”

“응?”

“어…, 손 잡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마이 레이디?”



제게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아드리앙을 쳐다보다가. 잠시 멍해졌던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가, 곧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렸다.



“응!”



제 손을 꼭 붙잡고 어린 아이처럼 미소짓는 마리네뜨를 지켜보다가, 아드리앙은 작게 웃으며 마리네뜨의 이마 위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드러난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 아드리앙의 행동에 마리네뜨는 순식간에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러니까, 지금, 지금…!!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개진 마리네뜨가 더듬더듬 소리쳤다.



“아, 아, 아드리앙?!”

“아, 미안. 싫었어?”

“그, 그런 건 아니고. 왜 갑자기?!”

“그냥…, 그러고 싶어서.”



웃으면서 폭탄선언을 던지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정신이 없었다.



“사실은 입에 할까도 고민했는데,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지만 그래도 갑자기 입술에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곤란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아드리앙의 얼굴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리네뜨의 손을 꼭 붙잡는 손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런 아드리앙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리네뜨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쳐갔다. 다른 한 손도 뻗어 아드리앙의 손을 꼭 붙잡은 그녀가 아드리앙에게로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들어 아드리앙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아드리앙이 놀랄 차례였다.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녹빛 눈동자가 키스를 끝내고 창피함에 살짝 시선을 피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본인이 해놓고도 좀 대담하다 싶었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시, 싫지 않아. 애초에 연인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 사실 손도 내가 먼저 잡으려고 했었는데, 해도 되나 걱정되서. 아니, 그러니까. 기쁘다구! 사실 네가 예쁘다고 해줬을 때도 너무 기뻤고, 그, 그리고….”

“….”

“메리 크리스마스, 아드리앙. 너랑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어서, 기뻐.”



평상시의 강한 모습과는 달리 수줍게 대답하는 마리네뜨를 보던 아드리앙의 손이 마리네뜨를 확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아까보다 더 당황하는 마리네뜨를 꼬옥 끌어안은 아드리앙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변신했을 때의 당당함도 좋지만, 제 앞에서만 보여주는 이런 모습도 정말이지 사랑스럽다. 그가 가만히 속삭였다.



“나도 기뻐.”



메리 크리스마스, 마이 레이디.









====

향초는 변신할 때 잃어버렸습니다. 정확히는 아드리앙 만나고요 하하하.

안나님의 마음에 드는 내용이길 바래요 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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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 나이프귀능 스푼오르카





[귀능다나/오르메두]

Change


<04>




7.



"으윽…."


비틀린 신음소리와 함께 누워 있던 나가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부스스 눈을 뜨자, 진갈색의 나무로 된 천장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뭐지, 내가 왜 여기에…. 가늘게 뜬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나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제 얼굴을 더듬었다. 안경!! 놀라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상하게 목 뒤가 시큰거렸다. 왜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나가의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아, 일어났어요, 나가 군?"


헉.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고개를 애써 돌리자, 침대 바로 옆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사과를 깎던 손을 멈추고 싱긋 웃는 얼굴이 누구인가를 깨닫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던 나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가 허둥지둥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가 당황한 듯이 눈가를 일그렸다. 그런 나가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던 귀능은, 나가가 무엇 때문에 곤란해하는지 깨닫고 작게 웃었다.


"초능력이 안 나오죠?"
"어…."
"잠깐 수를 좀 썼거든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초능력을 쓰는 건 무리일 거예요."


무슨 수를 쓴 건데?!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한 거였어?! 경악하는 나가에게 귀능은 사실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몇 번을 사용하려고 시도했지만 초능력은 나올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고, 막막해지는 심정을 애써 달래기 위해 나가는 심호흡을 했다. 대답을 듣기가 무서웠지만 아무튼 물어보았다.


"…약이라도 먹인 건가요?"
"설마. 제가 그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너무하네요."


너라면 납치범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겠냐.

하마터면 튀어나갈 뻔한 마음의 소리를 간신히 눌러참고 나가는 슬금슬금 침대 가장자리로 옆걸음질쳤다. 최대한 자신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 듯한 나가의 모습에 귀능은 가만히 웃다가, 나가가 목이 아픈지 인상을 찡그리자 깜짝 놀라서 그를 제지했다.


"가만히 좀 있어요! …진짜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도 되요. 명령이라 데려오긴 했지만 나중에 빠져나갈 수 있게 손을 써줄테니까."
"그럼, 지금 보내주면 안 되요?"
"당연히 안 되죠. 일단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누군데요?"
"만나보면 알아요."


더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딱 잘라 대답하는 귀능의 미소에 나가는 결국 포기하고 다시 원래 누워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설령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초능력이 없는 자신은 대응하기도 어려우니까. 게다가 이 사람 싸움도 잘할 거 같은데, 자칫 잘못해서 성질 건드렸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건 더 싫었다. 인생은 안전빵으로 살자, 가 제 모토인데.


"아, 그 인간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으니, 그 동안 이야기나 좀 해볼까요?"
"무슨…, 얘기요?"
"별 거 없어요. 그냥…."


거기까지 말했다가 귀능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밝았던 그의 표정이 살짝 음울해졌다, 순식간에 다시 밝게 변했다. 싱글싱글 웃던 귀능이 이쑤시개로 사과를 찍은 뒤 그걸 나가에게 내밀었다.


"사과 먹을래요?"



*


"무슨 일이세요?"


오르카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서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이친 다나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험악했다. 넘쳐나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살벌하게 쳐다보는 눈빛에 오르카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조용히 있어야겠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던 오르카에게 다나가 불쑥 대답을 던졌다.


"구하러 가야 해."
"누구를요?"
"나가 녀석. 납치당했어."
"납치요? 나가 씨가요?"
"그래."
"대체 누가…."


오르카의 질문에 옷걸이서 외투를 집어들던 다나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금방 감정을 털어내고 말을 던졌다.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귀능이 녀석이 돌아왔다."
"예?!"


외투를 집어들어 몸 위에 걸치는 다나의 뒷모습을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던 오르카의 손에서 서류 한 장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보일세라 황급히 다시금 서류를 집어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오르카가 물었다.


"그 팬더새…, 흠흠. 그 녀석이 돌아왔다구요? 근데 왜 나가 씨를 납치하죠?"
"나이프에 들어간 모양이더군."


이번에는 오르카가 움찔거렸다. 뒤를 돌아보고 있어 다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담담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다나는 매우 골치가 아팠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런 사건까지 일으킨 이상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녀석을 숨겨주려고 했던 건가? 나는? 어이가 없어진 다나의 입가에서 피식,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참내, 키운 정도 정이라 이건가. 말없이 사라졌다가 돌아와서는 속만 징글맞게도 긁어대는 팬더새끼가 뭐 그리 예쁘다고.

갔다 온다. 무슨 일 생기면 즉시 보고하고. 그 말만을 남기고, 터벅터벅 걸어 서장실 밖으로 나가는 다나의 모습을 조용히 배웅하던 오르카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2년 간 무슨 짓을 하고 다녔나 싶었는데 나이프에 들어가다니. 하긴 하는 짓이 악당 뺨치는데다 성격도 참 지랄맞긴 하지만, 서장님 말은 잘 듣지 않았나. 그렇게 계속 생각하던 중,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오르카는 눈가를 찡그렸다. 내가 왜 그런 팬더새끼에 대해 신경쓰고 있는 거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마 그 사람이 돌아온 것에 신경이 쓰이는 탓이라고,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오르카는 다시금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하지만 통 집중이 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차, 휴대폰이 울렸다. 서장님인가? 아무 생각없이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을 뿐인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르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안녕?]
"…어떻게 이 번호를."
[에이,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 그나저나 너 지금 혼자인가?]
"아니요, 사람들이랑 같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 못하는 건 여전하네.]


네 성격상 그랬으면 목소리를 더 낮췄겠지.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웃음소리에 오르카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였는지 메두사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묻는 메두사에게 맞춰줄 생각같은 건 전혀 없었기에 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대화를 했다간 휘말릴지도 모르니까. 저번처럼.

오르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침착해라, 긴장하지 마. 방심하면 언제고 당할지 모른다.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이며, 오르카는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긴장했는지 바짝 굳어버린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그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사람을 불러야 할까 고민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막연히 짐작하는 자신에 오르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눈 앞에 나타난다면 이번에야말로 체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저번과 같은 그런 막연한 감정이 자신의 발을 묶는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8.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둘 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오독오독 사과를 씹어먹는 나가를 내버려두고 귀능은 손에 들린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커다랗고 휑한 방 안에 남자 둘이서만 남아 있으려니 참으로 썰렁했다. 태클을 걸까 싶었지만 굳이 쓸데없는 모험을 하기엔 귀찮았기에 나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안경도 돌려받고 간식으로 사과까지 얻어먹고 있자니 풀어지려는 기분에, 나가는 나름 고민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먹이로 길들이는 건가?

에잇, 아니야.

도리도리 고개를 젓던 나가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하다, 제 옆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남자를 힐끔힐끔 관찰했다. 자신을 귀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나가가 그러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가만히 있어도 입꼬리가 쭉 올라가 있는 걸 보니 평소에도 잘 웃는 사람이 아닐까. 자신을 납치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가가 툭 말을 걸었다.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네?"
"아니, 뭐랄까, 그…."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나가를 멀뚱히 쳐다보던 귀능은, 이내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하 웃어대던 귀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나가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가 간신히 웃음을 삼키고 대답했다.


"나가 군은 정말로 사람이 좋네요~."
"에?"
"아니, 아까 제가 말해놓고도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보통 자기를 납치한 사람한테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잖아요?"


조목조목 짚어주는 귀능에게 나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지금 동조할 때가 아니잖아! 표정이 이랬다저랬다 바뀌는 나가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던 귀능이 조용히 물었다.


"나가 군은, 스푼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죠?"
"에? 네. 이제 한 3주 정도?"
"어쩌다가 거기 들어가게 된 거예요?"
"서장님한테 스카웃 당해서요."


그 한 마디에, 서류를 들고 있던 귀능의 손가락이 살짝 꿈틀거렸다. 나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귀능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동요하다니 나도 아직은 멀었네.


"…서장님은, 잘 지내나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질문하며, 귀능은 평상시와 같이 미소지었다.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나가는 무척 놀랐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서장님을 알아요?"
"알죠. 원래 저도 스푼에서 일했었으니까요."
"네? 진짜요?"
"그럼요. 고로 선배라는 말은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구요?"
"지금은 아니면서."
"뭐, 그건 그렇죠."


지금쯤 배신자 새끼라고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상상만으로도 편치 못한 기분에 귀능은 가만히 들고 있던 서류를 제 무릎 위에 내려두었다.


"나가 군. 잘 들어요."
"네?"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저-."


그 말과 함께 귀능은 손가락으로 바로 자신의 앞, 그러니까 나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붙어 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도망가세요."
"에?"
"제가 이 방에 주문을 걸어놨거든요. 초능력을 쓸 수 없는 마법의 주문을."


저건 또 뭔 소리야.

당최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가는 그의 말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잠깐만, 근데 저 말은….


"위험할 거라는 뜻이에요?"
"어차피 초능력이 없으면 나가 군 성격에 어딜 가든 위험하지 않나요? 맹하다는 소리 많이 듣죠?"
"아, 그렇죠."


고개를 끄덕거리던 나가는 다음 순간 팟 정신을 차렸다. 으악, 또 말려들었잖아! 다시 질문하려던 나가는 중얼거리는 귀능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변덕스러운 인간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참 힘든 일이죠. 어째 만나는 상사마다 다 이 모양인지 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귀능이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진심으로 질린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리는 귀능의 모습에, 나가는 뻘하게 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근데 대체 상사가 어떤 사람이기에 저렇게 얼굴이 우거지상일까. 서장님보다 더한 사람인가?


"아무튼, 나가 군."
"네?"
"방심하지 말아요."


싱긋 웃고는 있지만 새까맣게 탁해지는 귀능의 눈빛에 나가는 순간 움찔했다. 분명 웃는 얼굴임에도 이상하게 밀려드는 공포감에 살짝 몸을 떠는 나가를 쳐다보며, 귀능은 만족스럽게 웃더니 옆에 있던 접시를 다시 무릎에 올려놓고 남은 사과 하나를 마저 깎기 시작했다.


"예전엔 스푼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저는 배신자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런 실실거리는 태도로 너무 무방비하게 굴었다간-."


죽을 지도, 모른다구요? 


사각사각 껍질을 깎는 소리만이 방 안을 배회했다. 그 한 마디에,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굳어 있는 나가와는 달리 귀능은 이제 콧노래까지 부르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나가의 침묵에 귀능은 좀 도가 지나쳤나 싶어 속으로 난감한 듯이 웃었다.

너무 겁을 줬나? 능력으론 최강이긴 하지만 만나보니 아직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하지만 아직 원석에 지나지 않으니까. 갈고 닦으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거다. 그래서 그가 이 소년을 노리는 거겠지.

진짜 넘어올 리는 없겠지만.

소년은 능력과는 달리 성격 자체는 정말로 평범했다. 막 정의를 외치며 적극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본적인 도덕 관념이 없는 것도 아닌. 굳이 커다란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기보단 조용한 것을 가장 선호하는 타입이랄까. 별로 꿈이나 야망같은 것도 없어 보이고, 적당히 실리에 맞춰 살아간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상처입히기엔 너무 무른, 소위 '양심' 을 가진 상대인 것이다.

이미 그 양심을 버린 자신과는 다르게.


"스푼에서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도 않겠지만."


특히 그 사람이.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에 귀능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처음 자신을 봤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표정은 덤덤했지만 붉은 눈동자는 착잡하게 일그러졌었다. 자신을 기억하고 동요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기뻤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 한 구석에 착잡함을 남겼다. 그런 쓰레기 같은 곳에 들어갔냐고 고함을 치던 모습에 심장 한 구석이 따끔거렸다. 곧 다시 무뎌졌지만.

역시 이번에야말로 미움 받으려나.

미움받는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감정이란 제 뜻대로 되는 존재가 아닌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스푼을 나온 것도 아니고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사람을 대면하고 있자니 정말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죽어도 그럴 수는 없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 목적 하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배수진을 쳤다. 스푼을 버리고 나이프에 들어간 것도 그래서였다. 돌아갈 곳은 없으니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익숙해지니 아주 못할 짓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남아 있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 당신의 존재 때문인지도 몰라요.
서장님.


"뭐, 사실 배신자든 뭐든 상관없어요.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걸 위해 다 버린 거니까.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귀능은 다시금 침묵했고, 나가는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 눈 앞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사실 이쯤되니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는 말이 진심인가도 헷갈린다. 도망치라고 방법을 알려주면서도 지금은 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모순적이지 않나.

그 때였다.


"아, 오셨네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귀능에, 나가는 깜짝 놀라 귀능의 등 뒤를 쳐다보았다. 열려있는 문 앞에 하얀 옷차림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금세 그가 누군지를 알아본 나가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나이프. 다시 한 번 귀능을 돌아보았다. 룰루 콧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마저 다 깎아 올려놓는 귀능의 표정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사과 더 먹을래요? 그렇게 묻는 귀능에게 나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 먹었다간 체할 거 같다. 그런 나가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귀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해맑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오오, 진짜 데려왔잖아? 대단하네~!!"
"뭐 이 정도쯤이야."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나는 귀능의 모습에 나가는 심히 불안해졌다. 남아 있는 동앗줄을 붙잡듯 간절히 바라보는 시선에 귀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작게 입모양을 그렸다. 미안하다고. 그러더니 몰래 저를 향해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올리는 귀능을 보고 나가는 절로 고개를 갸웃했다. 비밀로 해달라는 건가? 지금 이야기를? 하지만 왜?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나가는 제 앞으로 뛰듯이 걸어오는 백모래에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헤실헤실 웃고 있지만 저쪽보다도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다. 저쪽도 좀 미친 사람같지만.

백모래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본론이었다.


"나이프에 들어오지 않을래?"


나가의 대답도 간결했다.


"싫어요."




-TO BE COUNTINUE


===


나가한테 쓴 건 듄이 쓴 거랑 마찬가지로 특기를 무효화하는 향입니다. 물론 빼돌린 건 송하겠죠 하하
오랜만에 쓰니 재밌네요 ㅌㅌ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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