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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이후의 이야기를 제 멋대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고로 날조가 있을 수 있으니 너그러히 이해해주시길. 

※ 스압주의. 정말정말 깁니다. 스크롤 주의해주세요!

※ 1, 2부로 나뉘어지며, 1부만 웹상에 공개됩니다.

2부는 투림으로, 1,2부 통틀어서 12월 배포전에 회지로 나올 예정입니다.




Pro memoria : http://eclilps.tistory.com/entry/pro-memoria





Mo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WRITTEN BY. RINE








- 5년 전, 명계

















“여긴, 어디지?”



옅은 물결이 찰랑거리며 작은 몸뚱아리에 달라붙었다가, 스쳐간다. 멍하니 있던 아이가 몸을 일으켰다. 몸에 묻은 물방울들을 탁탁 털어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연한 분홍과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은 자신이 알던 노을빛과는 조금 달랐다.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조형물들은 언뜻 보기에도 날카로운 무기질의, 쓰레기장에나 있을 법한 고철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제 주변에도 비슷한 고철 덩어리들이 많이 꽂혀 있었으니까. 무척 아름다운 하늘과 강, 그러나 그 가운데 솟아 있는 기계적인 건물. 괴리감을 느끼게 하지만 묘하게 잘 어울리기도 했다.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던 아이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내가 어쩌다가 여기로 오게 된 거야? 무슨 이유로? 분명히 결계를 통과했고, 깨어나보니 여기였다. 아마 그가 말한 대로라면 여기가 바로 죽은 자들의 세계겠지. …죽은 사람? 잠깐만. 



“할아버지!”



아이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 곳으로 오게 된 이유. 그리고 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비오는 날, 열려 있던 문, 어지럽혀진 가게 안, 깨진 부황기, 그리고… 인사도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자신의 할아버지.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할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여기로 왔으니 이제 자신도 죽은 몸이라는 걸 안다. 너무나 잘 안다. 언제나 죽음과 멀면서도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아이에게 두려워할 부분이 아니었다. 아이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혼자 남겨지는 것. 이미 찌들 대로 찌들어버린 외로움이었으니까.



‘우리 강림이, 울지 말아….’



할아버지가 바랬으니까. 그러니까 살아내려고 노력했던 건데, 할아버지의 생각만큼 아이는 강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유지를 버리고 결국 이런 선택을 한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자신은 여기로 왔고 돌이킬 수 없다. 손을 들어 제 두 뺨을 탁탁 내리쳤다.



“좋아.”



일단 할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찾아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 * *



“저 꼬만 뭐야?”



바람에 흩날리는 연두색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소녀의 눈동자에 비친 건, 언뜻 봐도 굉장히 어려 보이는 소년이 강 주변을 걸어다니는 모습이었다. 나룻배에 걸터앉아 하품을 하다가, 그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는데.


원천강을 헤맨다는 건 필연 죽은 영혼이겠지.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명계로 오는 영혼은 대개 차사들이 인도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소년은 혼자였다. 차사를 놓친 건가? 의아한 마음에 소년을 바라보고 있던 중, 눈이 마주쳤다. 어? 깜짝 놀랄 틈도 없이 갑자기 소년이 그녀 쪽으로 뛰어왔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금방 앞으로 다가온 소년이 그녀를 올려다본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작구나. 갑작스럽게 제 앞으로 다가온 아이에게 그녀는 언제나와 같이 웃으며, 만약 돌이었다면 이미 닳고 닳아 먼지가 되어 사라졌을 만큼 수없이 반복했던 멘트를 입에 담았다.



“안녕하세요, 여기서부터 삼도천입니다.”

“삼…도천?”



삼도천이라는 말에, 아이의 뇌리에 스쳐간 것은 바로 자신이 만났던 저승사자에 관한 종이였다. [삼도천 여행사, 대표 강림도령] 이라고 적혀 있던 전단지. 삼도천이라면 죽은 사람들이 건너는 강이라고들 했다. 진짜 자신이 죽은 자의 세계로 온 건가? 긴가민가했는데, 다른 이의 입으로 들으니까 갑자기 마음에 확 와 닿았다. 아이의 눈가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반면 원천강이는 아이의 놀란 얼굴을 보고 그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싶어서. 얼굴은 무척 앳되었지만, 살짝 치켜뜬 눈초리가 조금 건방져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놀라긴 놀랐나 보다. 저런 표정이야 셀 수 없이 봐 왔으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여기에 오면 그래요. 처음엔 다들 놀라는걸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되요.”

“나, 역시 죽은 건가?”



원천강이는 조금 난처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묻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린 아이가 물어올 때면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지 지금도 모르겠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벌써 죽었다고 말해주기는 마음에 상처가 될 거 같고.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물살이 첨벙 치솟았다. 동시에, 아이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다급한 표정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

“그들은 이 강을 건너서, 다음 삶을 준비하게 되요.”

“거긴 어떻게 가는데?”

“이 배를 타고 가지요.”



들고 있던 노잣대기를 강으로 참방, 소리나게 내리꽂았다. 헤에-. 신기해하던 아이가 그녀에게 말한다.



“그럼, 나 태워줘!”

“노잣돈은 있어요?”

“에, 그러니까….”



깜짝 놀라 제 주머니를 뒤지는 아이의 모습을 보던 그녀가 풋 웃었다.



“농담이에요. 요새 장례 때 노잣돈을 챙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풍습은 이미 오래 전의 유물이 되어버렸으니까. 하긴 이곳에서 굳이 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고 생각한 관습이었기에 조금 아쉽기도 했다. 사실 지금도 변한 명계의 모습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원천강이는 배에 올라서서 노를 쥐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타세요.”




* * *



“우와-.”



소년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투명하게 하늘을 비추는 삼도천의 모습이 영롱하니 아름다웠다. 아무 것도 없이 물길만이 주욱 펼쳐진 강 위를 작은 나룻배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원천강이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아름답죠?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명계에는 어떤 것들이 있어?”



잔잔히 노를 저어가면서, 그녀는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가 반가운지 선선히 답해주었다. 시원한 강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이것저것.”

“정확히 뭐가 있는데?”

“너무 많아서 설명하려고 하면 3일 밤낮을 새야할걸요!”



즐거운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그녀를 보던 소년도 따라서 같이 웃고 말았다. 다시 앞을 바라보는 표정은 사뭇 비장했지만. 조그만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담겨 있는지는 신과 아이밖에는 모르리라.


나룻배는 어느 새 반대편 강기슭에 도착했다. 원천강이는 바로 앞에 난 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팻말에는 한자로 ‘世城便殿(세성편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을 거예요.”



읏차! 소리와 함께 아이는 기슭에 발을 디뎠다. 주위는 온통 꽃밭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여기서부터 진짜 저승이구나.


12년. 그렇게 길었던 삶은 아니었지만, 살아오면서 지긋지긋하게 얽혔던 곳. 그 때는 정말 싫었고 벗어나고 싶어했던 곳에 결국 제 스스로 발을 담그게 되었다니. 자조어린 한숨을 내쉬던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존댓말이 어색한지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아이에게 그녀는 마주 웃어주었다. 천만에요. 손을 흔들어주는 원천강이를 뒤로 한 채 아이는 드디어, 사후 세계에 도착했다.


아이의 인생과 가치관을 통째로 바꾸어놓게 될 모험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아이는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죽은 자의 세계라고 해서 굉장히 으스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평범했다. 무서운 괴물이나 도깨비 같은 게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도 없었고, 그냥 숲 속을 걷는 느낌이랄까. 길가에 있는 것이라고는 아름답게 피어 있는 색색깔의 꽃들뿐이었다. 꽃들은 다들 색깔도 다르고 모양도 달랐다. 구경하면서 천천히 길을 걸어가던 중 드디어 이 길의 끝자락이 보였다. 그 앞으로 달려나간 아이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드넓은 평야였다.


낮은 언덕들이 솟아나 있는 평야에는 역시나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오는 길에 보이는 것들도 죄다 꽃뿐이었는데 여기도 다를 게 없다. 아무래도 여기 주인은 꽃을 정말 좋아하나 보네.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 사이를 누비던 아이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한복을 입고, 짧은 청록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가 꽃밭 한가운데 서서 어딘가를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에는 자그마한 족두리를 쓰고 얼굴에는 붉은 연지를 찍어 바른 소녀의 행색은 마치 시집가는 아녀자를 연상하게 했다.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손을 크게 흔들면서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어이-. 저기!”



소녀는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무감각하던 눈동자에 달려오는 아이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 * *



한편, 삼도천 외곽에서는 거의 승부가 끝나 있었다.



“아야, 이거 놔!”



바리는 반항하는 강림도령의 귓볼을 세게 잡아당겼다. 얼마나 싸워댔길래 삼도천 외곽이 이리 많이 부서졌냐고 묻자 둘 다 아무 말 없이 딴청을 피우고만 있다. 그 모습에 바리의 이마에 빠직 마크가 새겨졌다. 불퉁한 눈초리로 강림도령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사라지는 걸로도 모자라 난데없이 나타나고, 그것도 삼도천 외곽에서 감찰관과 싸운다는 소식으로 등장해 제 뒤통수를 때릴 줄이야. 참으로 못 말릴 일이었다. 낭자군이 출격해서 간신히 뜯어말리지 않았더라면 어디까지 갔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탄식했다. 정말 사고를 친다, 사고를 쳐. 가뜩이나 서천화랑부랑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강림도령과 싸웠다는 차사라는 남자도 꽤나 특이했다. 감찰 기관이라 그런지 몰라도 서천화랑부는 명계 내에서도 유달리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그런 단체의 일원이라 보기에는 행동이나 차림새가 상당히 경박했다. 애초에 유니폼부터가 리폼을 좀 한 거 같은데다 말투도 살짝 맛이 간 녀석처럼 보이고.

사라도령이라고 했던가? 강림도령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난데없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나.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하는 강림도령을 쳐다보던 바리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사라도령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저 남자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게 더 머리를 아프게 했다. 5주나 말없이 사라졌던 행동부터가 우선 직무 태만이었으니까. 한숨을 쉬며 답했다.



“아무튼, 이 자의 처분은 제가 맡겠습니다. 이만 물러가주시죠.”

“잠깐만.”



사라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사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납득이 안 가겠지. 사실 그녀의 입장이었어도 아마 그와 똑같이 나왔을 테니까.



“저승사자의 직무에 대한 감찰은 서천화랑부에서 담당하고 있는 거 아닌가? 여기서부터는 이쪽 관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자는 감찰 예외 대상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제 직속 부하이고, 제 지휘만 받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 자에게서 몽달귀를 봤는데도? 검사를 해 봐야 하는 거 아….”

“사라도령.”



바리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녀와 꽤 오래 같이 지냈던 강림도령조차 움찔할 정도로.



“상관은 저입니다.”



더 이상 참견 말라는 듯이 냉랭하게 한 마디를 던지고, 그녀는 뒷일을 부탁한다는 한 마디와 함께 강림도령을 끌고 나갔다.



“바리, 어디 가는…. 야, 아파! 아프다고!”

“시끄럽고 빨리 따라오기나 해요!”



어느 새, 그의 귓불을 잡아당기며 잔소리하는 얼굴에서는 방금 전의 싸늘한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사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뭐라뭐라 말하는 동기의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조금 만만하게 본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저래 보여도 저보다 상관이라 이건가. 그나저나.



“대체 저 둘은 무슨 사이인 거지?”


수상한걸.




* * *



“안녕?”



소년이 인사를 건넸다. 그의 앞에는 이제 갓 10살이 되었을 법한 소녀가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자신보다도 더 작다. 소녀가 조용히 그를 올려다본다. 소년은 웃으면서 마저 말을 건넸다.



“혹시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아?”



묵묵부답. 붉은 입술을 꾹 다물고, 지그시 올려다보는 소녀는 꽤나 귀여운 얼굴이었다. 다만 첫인상이 그렇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웃음기 하나 없는 저 무표정 때문이리라.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한데도, 소년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릎을 굽혀 소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눈을 맞추었다. 소년의 얼굴에 아이 특유의 개구진 미소가 떠올랐다. 쓸쓸한 눈빛과는 대조되게도.



“너도 혼자야?”

“….”

“그럼 나랑 같이 놀래?”



한참 후 끄덕. 소녀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말이 없는 타입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소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소년이 놀라기도 전에 소녀가 그를 끌고 꽃밭 사이로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소년은 그저 그녀를 따라갔다. 나쁜 아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므로.


살짝 봉긋하게 솟아 있는 언덕 끝에 다다른 소녀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연히 소녀가 팔을 붙잡고 있는 소년도 같이 주저앉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따라가기만 하던 소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굉장하다.”



거대한 산과 넓은 꽃밭들, 그리고 그 사이를 관통하는 거대한 강줄기 하나가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강의 기슭은 저마다 전혀 다른 색으로 물들어 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에 소년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놀라는 소년의 얼굴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소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말이 없는 소녀에게 그가 물었다.



“이걸 보여주려고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끄덕끄덕. 조용조용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귀여워서 소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너도 죽은 거야?”



소녀가 우뚝 멈췄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그런가. 소년은 조용히 손을 거두고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무릎에 턱을 괴고 앞을 바라보는 얼굴이 사뭇 비장하다. 소녀는 그런 그를 흘끗거리다 소년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넓게 펼쳐진 세계를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던 와중,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소녀의 목소리는 소년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여리지만 중성적인 목소리로, 어린아이치곤 차분한 존댓말을 사용한다. 조금 더 높고 귀여운 목소리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소녀의 질문을 받은 소년이 한참을 침묵했다.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적갈색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아주, 소중한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까?”



그 사람을 찾으러 왔어. 굽혔던 무릎을 쭉 펴면서 소년은 팔을 뒤쪽 바닥에 뻗으면서 비스듬히 기댄다.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동공 너머로 반짝였다. 소녀는 아리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죠?”

“….”

“인간은 누구나 삶을 동경하잖아요.”



소녀가 봐온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랬다. 죽어서도 이승에 미련을 갖고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라는 말처럼 삶을 갈망하고 어떻게서든 다시 돌아가고자 애쓰는 모습도 수없이 봐왔다. 그건 인간의 시퀀스에 탑재된 본능이기에 어쩔 수 없다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게 끝이 아닌데. 다음이 있는데도. 지나간 과거에 붙잡혀 더 나은 길을 보지 못하고 예전의 삶을 갈망한다.


그래서 소녀는 소년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자기 목숨 하나 챙기기도 바쁜데, 어떤 이유로도 이렇게 스스로 죽음으로 굴러들어오는 인간은 흔하지 않으니까. 그녀도 요 100년간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한 사람 빼고.



“확실히…. 그렇게 보이나?”



아하하하. 실없는 웃음을 흘리던 소년이 뺨을 긁적거렸다. 몸을 일으켜 바로 앉고서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알고 있나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알아. 그래도 상관없어.”



단칼에 나오는 대답에, 소녀는 흥미가 생겼는지 끈질기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까지 그 사람을 찾으려는 거죠?”



역시나 이번에도, 소년의 대답은 빠르고 명료했다.



“외로우니까.”



단지 그것뿐이야. 웃으려고 애쓰는 소년의 눈가가 서글프게 휘어졌다. 미동 없는 눈동자로 소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버거웠는지,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당하기가 벅찬 모양이었다. 그늘진 얼굴 사이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그렇게 오래 쳐다보니까 쑤, 쑥스럽잖아.”



애써 태연한 척, 소년은 제 눈가를 손으로 훔쳤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찾고 있다던 그 사람을 떠올리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렇게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데,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소녀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갑자기 작은 주머니를 꺼내 무언가를 담기 시작했다. 뭐지? 저도 모르게 소녀를 올려다보던 소년에게 소녀가 말했다.



“주변에 죽은 사람이 그 사람만이 아닐 거예요.”



더 있겠죠. 소녀의 확답하는 목소리에 소년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그걸….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하는 소년에게 그녀가 말을 걸었다. 그 내용은 꽤나 생뚱맞았지만.



“이름이 뭐죠?”

“…강림.”

‘강림이라…. 그 이름에 액운이 낀 건지.’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내젓던 소녀가 한 손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어리둥절한지 그저 멀뚱멀뚱 바라보는 소년과는 달리, 가을처럼 서늘한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소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면 강림, 제 손을 잡으세요.”

“뭐?”

“그럼 당신이 만나고 싶었던 그 분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어서. 소녀의 재촉에, 소년은 얼떨결에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



빛이 번쩍하면서, 소년의 눈앞에 여러 색깔의 거대한 선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놀랄 틈도 없이, 강림은 순식간에 커다란 원형 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하얗고 매끄러운 벽으로 둘러쌓인 홀에는 여러 갈래의 통로가 나 있었고 소년의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심플한 정장차림에 모자를 쓰고 있는 대다수의 이들 중에서, 군데군데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이들도 간혹 보였다. 그 옷이, 자신이 알던 저승사자가 입고 다니던 옷이라는 걸 소년이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소년의 머리가 가속되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손을 잡았을 뿐인데.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자신이 만났던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잡혔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보라색 주머니였다. 무게가 꽤나 가벼운. 하지만 지금 거기에 신경쓸 정신이 아이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강림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여긴, 또 어디야?”




* * *



“강림, 정말 이러기예요?”



바리의 목소리가 편전 내로 울려 퍼진다. 오퍼레이터들이 포진되어 차사들을 받쳐주는 세성 편전의 중심, 그 사령관실 뒤쪽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한 쪽한테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겠지만.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강림도령은 겨우겨우 그녀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지금 그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하긴 5주나 사라졌는데 잔소리가 이 정도면 양호한 거지. 그 이상한 감찰관한테서 구해준 건 좋았지만, 보아하니 몇 주는 이 일로 시달리게 생겼다. 싫은 느낌에 그는 인상을 썼다.



“으유, 정말! 사람 걱정시키고.”

“왜 대답이 없어요? 적어도, 상관 대우는 해주세요!”



하지만 계속되는 잔소리 폭격에 결국 그는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으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바리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하나 더 그어졌지만.



“아, 잘못했다니까!”

“지금 이게, 잘못했다로 끝날 일이에요?”

“아니, 뭐. 그건….”



그래도 제 잘못은 아는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강림도령의 모습에 굳어있던 바리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화가 좀 풀린 것 같았다. 살짝 회색빛이 감도는 은발을 뒤로 넘기면서 그녀가 한숨지었다.



“후우, 됐어요. 그동안 대체 어디서 뭐 했는지나 좀 들어보죠.”

“에, 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

“길어도 들을게요. 어디서 대체 뭘 했길래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확인 안하고, 설마 반항심에 일 다 때려치고 잠수탔다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죠? 그렇죠?”

“윽….”



그렇다고 말하면 죽을 줄 알라는 표정을 하고 바리는 그를 노려보았다. 강림도령은 난처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듣는 귀가 많은 여기서, 사실대로 5주간 소울폰에 갇혀 있었다는 소리를 했다 퍼지기라도 하면 몇 십 년치 놀림감이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말은 해야겠는데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을 마냥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바리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마세요.”



살짝 붉어진 얼굴에 강림도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열이라도 있어?”

“으악!”



손을 뻗어 이마에 가져가려는 순간 바리가 놀라 그의 손을 쳐냈다. 단호하게 탁- 쳐내는 손길에 그보다 그녀가 더 놀랐다. 뻘쭘하게 서 있던 강림도령이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에, 그러니까.



“그냥…. 열이 있나 해서. 미안해.”

“아니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했는지 바리가 말을 더듬거렸다.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새파래지더니 그 다음에는 빨개졌다가, 다시 하얘졌다 싸악 굳었다. 참 표정 다양하게 변한다. 그가 딱 그 생각을 했을 즈음, 바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튼-! 왜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것도 5주나.”

‘제길.’



역시나 물고 늘어지는 그녀의 모습에 강림도령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지만 사실대로 말하기도 싫었다. 어떡하면 대충 잘 둘러댈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는데, 변명거리는 하나도 안 떠오르고 진짜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도중 바리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떨리는 눈동자, 심각한 표정. 갑자기 왜 저러지? 의아하다는 듯이 바리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그녀가 내뱉는 말들에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설마, 기한이 다가와서 그러는 건….”

“….”

“…아니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는 바리와는 달리, 강림도령은 다시 평소와 같이 태연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 마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그거 진심이에요?”

“이번에는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랬어. 내가 빠지고 싶어서 빠진 게 아니라니까?”

“….”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앞머리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강림도령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따뜻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제 머리 위로 얹어지는 느낌에 바리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손을 뻗어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새까만 눈동자가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당신은….”

“아, 나 이제 밀린 보고서 쓰러 가야겠다. 나중에 봐!”



그녀가 더 말하려는 순간 강림도령은 몸을 돌려 복도로 나가버렸다. 뒤에 남겨진 바리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꾸욱 다물었다.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말하지 못했네.”



난 바보야. 그렇게 자신을 자학하며 바리는 머리카락을 살짝 쥐어뜯었다. 말해줘야 하는데 늘 이런 식으로 계속 넘기고. 그의 인생이 걸린 선택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지만, 



“그게 당신한테 최선이 아닐 수도 있는데….”



이 한 마디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그나저나….


바리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보고서, 내가 이미 다 썼거든요?”




* * *



“겨우 빠져나왔네.”



강림도령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뚜벅뚜벅, 복도를 걸어가던 그의 시야에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주로 오퍼레이터들이나 연구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단단하고 매끄러운 벽으로 둘러싸인 세성 편전 안에는 여러 타입의 영혼들이 있다.


소울폰을 들고 다니며 영들을 소환하고, 떠나야 하는 영혼들을 명계로 보내는 저승사자(Ghost Messenger), 령들의 위치를 신속하게 파악하여 차사들을 돕는 오퍼레이터(Operator),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기계들을 만드는 각종 연구자(researcher)들까지. 언뜻 보면 거대한 회사와도 같다. 현상계보다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발전한 이곳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저쪽 세상에 알려진 저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방식부터, 그 결과까지.


무심한 표정으로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바리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 벌써 그렇게 됐나. 생각해보니 그쯤 된 것 같기도 하다. 소울폰에 뜨는 날짜를 보니 약 3주 정도가 남았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솔직히 말이지.”



자신의 마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그녀의 제안대로 이 일을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잘 맞았고, 가능하다면 계속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겨두고 온 것들에 미련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그립지도 않았다. 사실 굳이 선택이라는 게 필요할까 싶기도 했다. 어차피 대답은 똑같을 텐데.


그래도 막상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초조해진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짜증스레 머리를 헤집으며 걸어나가던 강림도령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스쳐갔다. 놀라서, 그는 순간 걸음을 딱 멈췄다.


작은 키에 빨간 후드티, 노란 바지. 무엇보다 저 동글동글한 뒤통수에 건방지게 치켜올린 눈초리는, 설마.



“저 꼬마가 왜 여기에?!”




* * *



“굉장하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강림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 묻어났다. 난데없이 보내진 이 거대한 건물은 제 생각보다도 훨씬 넓었고 훨씬 굉장했다. 방이 족히 백 개는 넘을 것 같았으며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걷기 시작한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새로운 것들이 계속 보인다.



“이렇게 넓으면 찾기도 힘들겠지.”



그 여자애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기억난다. 자신이 찾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조금 의심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무작정 찾다가는 진짜 언제 찾게 될지 모르겠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으읍?!”



그렇게 생각하고 모퉁이를 넘어가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강림의 입을 틀어막고 세게 끌어당겼다. 놀라서 저항하려고 했지만 아이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꼼짝없이 주변의 어두운 방 안으로 끌려가던 아이가 계속 발버둥을 쳤다. 두려움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으으! 읍! 으읍!’

‘조용히 좀 해! 들키면 큰일난다고.’



작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강림의 몸부림이 멈췄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놀라서. 고개를 돌려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사람은 분명.


그가 한숨을 쉬며 아이를 놓아주자, 아이는 그 즉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큰 키와 하얀 얼굴, 새까만 눈동자와 화가 난 듯한 저 표정은.



“…아저씨?”



그 말과 동시에 아이의 머리에 꿀밤이 날아왔다. 악, 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여잡는 아이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강림도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 아저씨 아니랬지! 그나저나,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꼬마 너였냐?”

“….”

“왜 네가 명계에 있는 거지?”



진지하게 물어보는데 눈 앞의 아이는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강림도령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상황이 짐작은 가는데, 생각하기 싫어진다.



“저….”

“아니아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머리 아프니까.”

“아저씨!”



놀라서 입을 막으려던 그를 향해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풀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눈빛을 반짝거리며 빤히 그를 쳐다본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강림도령에게 아이가 말했다.



“잘됐다, 나 좀 도와줘!”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찾고 있어. 여기 오면 만날 수 있다는데, 너무 넓어서 찾기가 힘들었다구. 아저씨는 여기서 일하지? 잘 알 거 아냐?”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는지 말이 없던 강림도령이 소리를 질렀다. 아이가 움찔거렸다.



“까불지 마!”

“….”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이쪽 일은 다 잊어버리라고!”

“….”

“네가 개입하던 평소의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과는 차원이 달라! 장난이 아니라고. 두 번 다시 못 돌아가게 될 수도 있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상관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를 노려보는 아이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강림도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어보이려다 말을 잃었다. 아이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아주 서럽게, 그렇게 울면서 그를 노려본다.



“뭐?”

“어차피 돌아가지 않아도, 날 기억해줄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아껴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놀란 표정의 강림도령을 바라보는 아이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두 주먹을 꾹 쥐고 소리를 지른다. 마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뱉어내듯이 힘겨워 보였다.



“죽는 거? 하나도 안 무서워. 아저씨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

“그런 것보다, 그런 것보다는…!!”



감정에 복받쳤는지 아이가 하던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의 발 아래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힘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나 축 처진 어깨. 지금 아이는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쓸쓸하고 작아 보였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아저씨?”

“….”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어. 그냥 꿈인 거 같았어.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라. 장례식 끝나고 나서 언제나처럼 아침에 깨어나서, 나도 모르게 아침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안녕히 주무셨어요.’라고 가볍게 인사했는데, 당연히 아무 대답도 없었어.”



목이 메이는지 잠시 말을 멈춘 아이가 팔을 들어 소매로 제 얼굴을 쓱쓱 닦았다. 조금은 진정된 것 같았지만, 눈물샘이 고장난건지 멈추지 않는 눈물을 아이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앳된 얼굴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말을 잃은 강림도령을 똑바로 바라보는 적갈색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깨닫고 만 거야.”

“….”

“정말 난 혼자구나.”

“….”

“다…. 가버렸어. 엄마도, 할아버지도.”



소리내어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정말, 정말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텅 빈 집안을 보고 있으면 싫어도 생각나는 걸 어떡해!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걸. 그래서, 그래서 할아버지만이라도 붙잡아 두고 싶었어. 그게 그렇게 잘못이야?!”

“아무리 그랬어도, 그건 해서는 안 될 일이었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강림도령과 달리 아이는 말을 줄줄이 뱉어냈다. 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이 제 자신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사실 꼭 할아버지였어야 했던 건 아니었는지도 몰라. 그냥 누구든지 내 옆에 있어줬으면 했어. 외로우니까. 너무 외로우니까! 그래서….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해? 대체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다는 거야?! 아-. 역시 그냥 죽는 게 나았을까? 그 때 내가 할아버지를 붙잡기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되는 게 훨씬 나았을 지도 모르겠네. 아저씨 입장에선.”

“….”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논하는 말들에 화가 날 법도 한데, 강림도령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말리지도 않았고 저번처럼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가 하는 말을 계속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저, 그저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만나고 싶어…. 그러니까 날 도와줘. 할아버지한테 데려가줘. 제발….”



목이 메어 드문드문 말이 끊겼다. 호흡 부족일까. 보고 싶다고 작게 소곤거리는 숨소리가 크게 들린다.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아이는 다시 울음을 쏟아냈다.



“꼬마, 너….”



가만히 듣고 있던 강림도령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도로 다물었다. 난처한 얼굴로 우는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갖가지 감정이 서렸다. 단순히 아이를 걱정하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고민하던 강림도령이 아이에게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호오- 재미있군.”

“…?!”



뒤에서 빛이 새어나오면서 문이 열렸다. 강림도령이 재빨리 뒤를 돌아본 것과 동시에 두 개의 총구가 그들을 향해 겨누어졌다. 눈물을 눈꼬리에 매달고, 아이는 놀란 표정으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 가운데 서서 총을 겨누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백발의 남자는, 지금 상황에서는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등줄기로 서늘한 오한이 흘러내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강림도령.”




* * *



“하여간 이상하단 말이야….”



복도를 걸어가면서, 사라는 제 손에 들린 파일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번에 삼도천 외곽에서 벌인 사고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라는 상부의 명이 있었다.


귀찮게. 쯧 혀를 차면서도 사라는 파일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명계에서도 엘리트라고 불리는 집단, 서천화랑부 내에서도 그는 특히나 주목받고 있는 능력자였다. 일에 사감을 끌어들이지 않으며 실수 하나 없이 깔끔하고 공정하게 처리한다. 그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에 기반하고 있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나. 그래서 상부에서도 그의 기행적인 모습들을 조용히 눈감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오늘따라 일에 집중을 못 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방금 전에 일어난 문제가 상당히 찝찝하고 의문스럽게 끝나서인지도 모르겠다. 볼펜으로 톡톡 종이 맨 위쪽에 있는 사진을 두들겼다. 흑발에 서늘해 보이는 하얀 얼굴. 자신이 방금 전까지 싸운 그 남자였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뒷배라도 있는 건가?”



말단 주제에 자신과 대등하게 싸우던 솜씨도 솜씨였지만, 그를 이상하게 싸고도는 것 같은 사령관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그의 최근 상태였다. 단말마가 그렇게까지 진행되어 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멀쩡한 거지? 아니, 단말마를 아예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정도 진행되었으면 보통은 자기 자아를 먹혀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할 텐데.


그러다, 사라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어찌 되었든 간만에 흥미를 불러일으킨 상대다. 이제까지의 임무는 너무 쉬워서 시시할 정도였는데, 간만에 나타난 강림도령이라는 존재는 그에게 메말랐던 호기심을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한 번 더 싸워보고 싶었다. 그러면 무언가를 조금 더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사라는 잠시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어?”



보랏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흑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남자가 바로 몇 미터 앞에서 누군가를 데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비어 있는 방 하나로 재빨리 들어간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사라가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들고 있던 파일은 어느 새 구석에 쳐박혀 있었다. 소울폰을 꺼내 한 바퀴 돌린 후, 총으로 만들었다. 두 손에 총을 들고 그들이 들어간 문가로 다가가는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재미있어질 것 같군.




* * *



“갑자기 수상하게 행동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총을 정확히 강림도령의 심장에 겨누고, 사라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열려 있던 문이 닫히고 방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던 강림도령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런이런, 허튼 수작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의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사라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살짝 잡아당겼다. 멈칫하는 강림도령을 차분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아이가 보이지 않게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강림도령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이야말로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묻고 싶은데.”

“….”

“감찰관 나으리께서 일개 말단한테까지 그렇게 신경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우리 사이 문제는 이미 끝난 거 아니었나? 명령 불복종인가.”

“뒤에 숨기고 있는 건 누구지?”



제길. 강림도령은 이를 악물었다. 저 자는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세성편전 안으로 관계자 외의 사람을 들여보내는 것도 충분히 규칙 위반이지만, 들키면 정말 이 아이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 사실 저와 상관없는 일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마음이 따끔거렸다.


그 와중에 사라는 옆으로 몇 발자국 옮겨, 강림도령의 뒤에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너는 분명히 저번의 그 꼬마…. 아하하하하하!!”



저를 노려보는 아이의 매서운 눈초리에도, 사라는 계속 웃어댔다. 그 와중에 강림도령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소울폰을 움켜쥐는데 성공했다. 사라는 그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강림도령을 보며 비아냥거릴 뿐이었다.



“인간이랑 오래 지내더니, 이제는 규칙이 우습게 보이나?”

“….”

“그나저나 꼬맹이가 참 끈질기군. 설마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재미있어. 어이, 꼬마. 이렇게 한다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돌아올 것 같나?”

“…시….”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를 향해, 사라가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아이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시끄러-!!!”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아이는 갑자기 사라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사라가 방아쇠를 겨누려던 순간, 강림도령이 소울폰을 꺼내 검날로 사라의 총을 쳐냈다. 그와 동시에 아이가 사라의 허리를 꽉 껴안고 그를 넘어뜨렸다. 넘어진 사라의 위에 올라탄 아이가 그의 멱살을 잡고 소리질렀다.



“우리 할아버지 돌려내! 왜, 왜 데려갔어?”

“….”

“애초에 당신만 안 왔어도, 그랬어도 괜찮았을 거야. 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바래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냥 나한테 지금 있는 것만도 소중했다고. 그냥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서. 작별인사도 못했으니까. 단지 그것뿐인데, 그런데….”

“….”

“그것뿐인데…. 왜 그렇게 말해? 왜 이렇게까지 방해하는 거냐고!”



서러웠는지 아이는 계속 말을 뱉어냈다. 놀라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묵묵히 그 말을 듣던 사라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작은 손이 힘없이 떨어져나갔다.



“…멍청한 소리.”

“….”

“이래서 애들은 피곤해. 자기들 생각밖에 못하는 이기적인 동물이니까.”

“뭐라고…?”



옷을 툭툭 털어내고, 사라는 주변에 떨어져 있던 RNG(Rose N Guns, 사라의 소울폰)를 집어들었다. 입꼬리에 매달려 있던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사라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꼬마, 넌 죽은 사람을 저쪽에 붙잡아둔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나?”

“….”

“역시 모르는군. 마침 시간도 널널하니, 그렇게 원한다면 가르쳐주지.”

“어이, 무슨 꿍꿍이야?!”



강림도령이 으르렁대며 아이를 뒤에 숨겼다. 총을 다시 소울폰의 형태로 바꾼 후, 무언가를 검색하던 사라가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별 거 없어. 그냥 보여주려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사라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움츠러들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아이, 그런 그를 한참 쳐다보던 사라는 등을 돌려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는 그들에게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것처럼.


따라 와라, 보여주지.



“네가 한 짓의 실체를 말이야.”




* * *



“아아- 진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딸기 무스 케이크조차, 지금 바리의 우중충한 기분을 풀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많아지는 생각에, 그녀는 케이크를 먹다가도 포크를 들고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바리는 지금, 세성편전 내에 있는 카페 안에 있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단 걸 먹어서 기분을 푸는 편인데, 지금은 그것조차 손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원인은 그 녀석 때문이다. 강림도령.



“어째야 하나….”



지금 그녀가 가장 속 터지는 건, 자기 문제인데도 너무나도 태연한 그의 태도 때문이다.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강림도령은 아직 그 선택의 무게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오랜 경험과 직감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이었다. 정말 깊게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가벼이 말할 내용이 아니니까.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는 곧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겠지. 그가 선택한 것에 따라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사실 그 선택이 그녀에게도 더 좋은 일이라 말리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양심은 이건 아니라고 자꾸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적당히 먹고 다시 이야기해 볼까, 그렇게 생각하던 바리의 앞에 누군가가 앉았다. 눈치채지 못하고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어머, 여기서 다 보네?”



익숙한 목소리에 바리의 고개가 퍼뜩 돌아갔다.



“마, 마고님!”

“오랜만이야.”



흑백 계열의 옷을 차려입고 안경을 쓴, 단발머리의 아름다운 여성이 그녀의 앞에 앉아 있었다. 원숙미 넘치는 외모와는 달리 싱글싱글 웃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담고 있었다. 바리가 하하하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그냥, 갑자기 바리공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갑자기 왜요!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웃는 바리에게, 마고가 손을 내저으며 후훗 웃었다.



“는 농담이고. 그냥 단 게 먹고 싶어서.”

“그, 그러세요? 하하하….”

“무슨 고민 있지?”

“네, 넷?!”



방심하다가 난데없이 날아든 직격타에,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는 바리의 모습에 마고가 이때다 싶었는지 눈을 반짝거렸다. 테이블 쪽으로 몸을 더욱 기댄 마고가 바리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와서 속삭였다.



“언니한테 말해볼래? 나한텐 너도 한참 어린 아이란다.”

“아, 아무 일도 없어요. 정말이에요!”



시선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바리는 간신히 얼버무렸다. 고민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고민을 털어놓았다간 곤경에 처하는 사람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몇 명의 얼굴이 뇌리에 스쳐가면서, 바리는 필사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재미없었는지 마고는 뒤로 물러나 다시 의자에 앉았다.



“체, 재미없게 이러기야?”

“….”



쪼로록 음료수만 들이키는 바리를 바라보던 마고가 웃으면서 한 마디를 던졌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렇게 제 얼굴에 티가 나나요? 고민하는 거.”

“아주, 많-이.”



안경 너머로 보이는 잔잔한 눈동자는 무엇이든 다 꿰뚫어볼 것처럼 깊고 날카로웠다. 바리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에 놓아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마고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입을 꾹 닫고 있던 바리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제가 선택한 일이 틀릴 리 없어요.”



그를 믿기로 했으니, 끝까지 믿을 거예요.





* * *



사라가 그들을 데려간 곳은 세성 편전 아래쪽에 있는 한 연구실이었다. 전등 하나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은, 오직 그 안에 세워져 있는 유리관들의 푸르스름한 빛만이 안을 비춰주고 있었다. 맨 앞에서 거침없이 걸어가는 사라의 발소리, 조금은 두려운지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 아이의 발소리, 그리고 맨 뒤에서 주위를 경계하며 발을 내딛는 강림도령의 발소리까지. 탁탁, 발걸음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말없이 걸어가는 아이 대신에 강림도령이 입을 열었다.



“어이, 여긴 어디야?”

“죽어버린 영혼들을 연구하는 여러 개의 시스템실 중 하나다. 들어본 적 있을 텐데?”

“아아, 여기가 거기…. 어이, 잠깐. 잠깐만!”



그의 표정에 경악이 번졌다. 아이를 앞질러 나가 사라의 덜미를 잡아챈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너, 미쳤어?! 대체 뭘 보여주려는 거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게 해주려는 것뿐이잖아?’



이 자식. 이를 갈면서 강림도령은 그의 옷깃을 더욱 꽉 쥐었다. 아이는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이를 힐끗 쳐다보던 강림도령이 조용조용 내뱉었다. 



‘이건 아니야. 아직 어린애라고.’

‘죽은 영혼을 이승에 붙잡아둘 수 있는 영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지.’



대답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사라의 얼굴에 헛웃음이 떠올랐다.



‘…역시 저 꼬맹이가 그 영감님을 붙들어둔 장본인인가.’

‘그건….’

‘어쩐지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야. 어이, 강림도령.’

‘…?’

‘어떤 이유로든 이 꼬마가 저지른 행동 자체를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거, 잊지 마.’



잘 알 텐데. 그렇게 말하는 사라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강림도령의 손을 뿌리치고, 그는 몇 걸음을 더 걸어나가다 멈춰섰다. 그리고 뒤로 돌아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그의 앞에 있는 한 유리관을 가리켰다.



“자, 저걸 봐라. 꼬마.”



유리관 내에 담겨 있는 물약들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은 꽤나 처참했다. 여러 색깔이 드문드문 보이는 작은 덩어리. 형체를 이루고는 있는데, 그 형체를 이루는 입자들의 결속이 불안정했다. 흐릿하게 겨우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는 그 덩어리, 아니 물체를 바라보던 아이는 순간 불길함에 사로잡혔다. 눈을 돌리려던 아이에게 사라는 냉랭하게 말했다.



“가까이 가서 봐.”

“….”

“왜, 반갑지 않나 보지? 그렇게 찾아다녔잖아?”



듣고 싶지 않아.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덜덜 떨리는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와중에 사라의 말이 잔인하게 쐐기를 박았다.



“네가 그토록 아끼던, 그 영감님이신데 말이야.”



그 말과 동시에 아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니 유리관 속의 물체는 아이가 아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훼손된 데이터처럼 실물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는 것만 뺀다면. 울음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며 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던 아이가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왜, 왜….”

“오해하지 말라고. 내가 수거할 때부터 이미 이 상태였으니까.”

“뭐…?”

“뭐야, 꼬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

“-영혼은 신체 없이 현상계에 오래 머물 수 없어.”



사라의 말을 빼앗듯이 가로채며, 강림도령이 뒤를 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씁쓰레한 표정이었다.



“신체가 영적 에너지를 한 곳에 모아주기 때문에, 몸이 있을 때는 영혼은 건강하게 현상계에 머물 수 있어. 그러나 신체가 사라지면, 지지대가 없는 영혼은 서서히 부서져가게 되는 것이 보통이지. 그래서 육신을 잃어버린 영혼들은 영혼들의 안식터인 태초의 고향, 명계로 돌아와야만 해.”

“….”

“물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승을 갈구하는 영혼들이 있어. 그런 영혼들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에너지를 노리는 악령에게 위협받고, 버틴다 해도 나중에는 그 자신조차 악령이 되어버리고 말지. 그런 악령을 잡아들이고 영혼을 명계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 고스트메신저의 사명이야.”

“….”



강림도령의 뒤를 이어, 사라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모든 영혼은 명계에서 태어나 현상계로 향하고, 나중에 다시 명계로 돌아오지. 이건 벗어날 수 없는, 벗어나서는 안 되는 순리다. 꼬마, 너는 그 순리를 어겼어. 그리고 영감님의 영혼은 이런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지.”

‘…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는 없는 거야?”



힘들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사라가 잘라 말했다.



“결계를 쳐서 영적 에너지를 모아둔다는 발상은 쓸만했지만, 에너지의 손실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니 말이야. 데이터 손상이 심해서 성불조차 힘들 정도니.”

“할아버지는….”

“뭐?”

“할아버지는 데이터가 아니야. 사람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강…리….’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번쩍 든 아이가 사라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여전히 힘이 없어 보였음에도 아이의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빛이 돌아왔다. 그래도 할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에 기운이 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가 옷을 털었다. 눈가에 눈물 자국이 가득하지만 그 표정은 자못 씩씩하다. 사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오, 그래도 마냥 비리비리한 놈은 아닌 것 같군.”



입을 꾹 다물고 유리관을 마냥 올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에 그리움이 깃들었다. 보고 있는 것만도 좋은지 미동 하나 없이 시선을 고정시켰다. 두 명의 차사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사라가 툭 말을 던졌다.



“법이나 질서에는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꼬마.”

“….”

“죽음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 돼. 그건 다른 이들에게 무척이나 불공평한 일이니까. 꼬마 네가 죽은 영감님을 살려내고 싶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네가 한 짓이,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 과연 보기 좋은 일일까?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고 계속 보고 싶어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아이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 쪽을 바라보았다. 단호하게 말을 뱉는 사라의 표정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이 계속 침울해져 갔다. 사라가 계속 말을 이었다.



“또 하나. 죽어야 할 운명인 사람을 붙들어두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과연 그 사람들이 모두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그럼에도 행복해하는 머저리들은 있겠지. 하지만, 사람의 몸이란 연약해서 언젠가는 늙고 쇠약해져 바스라지기 마련이다. 아픔에 몸부림치는 이들도 많을 테고. 그 영감님도 그랬겠지. 그런 몸뚱아리를 이끌고, 그래도 살아 가는 것이 과연 축복일까 모르겠군.”

“그건….”

“죽음은 끝이 아니야. 꼬마.”

“…?”

“새로운 시작이지. 죽고 나서 깨끗한 몸으로 다시 새로이 태어날 수 있으니까. 인간들은 죽음을 싫어하지만, 죽음 덕택에 자신들이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하거든. 그런 순환구조를 통해 질서가 유지되고, 세상의 이치가 돌아가는 건데 말이지.”

“난 생각이 좀 다른데.”

“…?!”



갑자기 들려오는 강림도령의 목소리에 두 사람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한숨을 쉬던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천천히 아이의 앞으로 다가섰다. 고개만 돌려 사라를 바라보던 강림도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뭐 그리 거창하게 말하냐?”

“뭐라?”

“명계의 질서고 나발이고, 솔직히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고. 사실 난 나한테서 가장 소중한 것만 지켜진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강림도령.”

“-언젠간 모두 떠나는 것들이잖아. 동료들 대부분이 다들 그렇게 말하지. 그런 식으로 미련을 떨쳐버리려고 해. 하지만 내게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거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지금의 소중한 것들을 놓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사라가 하는 말을 자르며, 강림도령은 다시 말을 이었다.



“죽음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네 말에는 동의하지만, 남겨두고 온 것들에 아예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는 게 감정적으로는 좀 어렵잖아?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거지. 사실 이건 우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지만 말이야.”

“그건….”

“그래서 너희, 서천화랑부가 존재하는 거잖아.”

“….”

“야, 꼬마.”

“왜. 아니 잠깐. 자꾸 꼬마꼬마 하는데, 나 꼬마 아니라니까?!”



강림도령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무슨 짓이야! 소리지르는 아이에게 그는 씨익 웃어보였다.



“꼬맹이를 꼬맹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냐. 분하면 나보다 커지던가.”

“이익…!!”



아이를 내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에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비단 아이를 걱정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아이를 보고 있는데, 아이를 통해 마치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어. 살아서 다른 이들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갈지, 아니면 죽음을 받아들이고 편해지든지. 둘 중 하나지. 네가 영감님의 죽음에 좌절하고 여기 머물 수도 있고, 감당하고 살아갈 수도 있어. 하지만, 무엇을 택하든지 그것만은 오로지 너의 선택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선택해. 꼬마.”

“….”

“너는 대체 어쩌고 싶은 거냐?”




* * *



“너는 대체 어쩌고 싶은 거냐?”



어떻게 할래. 그렇게 말하는 듯한 강림도령의 시선에 아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 질문의 의도를 모를 정도로 어리지 않았으니까. 삶인지 죽음인지 선택하라 이거겠지. 하지만 아직 제 감정을 제대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어른도 아니었기에, 아이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남으면 더 이상 전처럼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영혼들의 안식처라고 하니까. 그렇지만…. 현실을 마냥 포기하기에는 걸리는 게 있었다. 제게 가장 소중하고 소중했던 가족들의 당부가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이 계속 살아있기를 바랬는데. 엄마도, 할아버지도.


그런데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일단은 죽은 건데. 그렇게 생각하던 아이의 귓가에 무언가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들려왔던 이명(異鳴).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



‘…강…림…ㅇ….’

“잠깐,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무슨 소리를 말하는 거지?”

“쉿, 조용히 해!”



세 사람의 눈앞에 있던, 강림의 할아버지가 담겨 있는 유리관의 물약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안에 있던 물체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소울폰을 꺼내들며 경계하는 두 차사와 달리 아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 광경을 계속 쳐다보면서 귀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 속에서 괴로운지, 고사리같은 손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리고, 관이 깨졌다.


담겨 있던 물약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무언가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사라가 쏜 총알을 이리저리 피한 후, 바닥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강림도령이 검을 휘둘렀다. 힘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지만, 너무 속도가 빨라서 대응이 힘들었다. 그런데,



‘강…림….’

“멈춰!”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에 강림도령이 멈칫했다. 동시에, 그 무언가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으로 돌진했다. 그 앞에는 바로 아이가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두 손을 내민 아이에게 그가 달려들었다. 강림도령이 소리질렀다.



“꼬마, 위험해!”



피하지 않고, 아이는 달려드는 물체를 있는 힘을 다해 받아냈다. 어찌나 세게 달려들었는지 받아내던 아이가 뒤로 벌렁 넘어졌을 정도였다. 차사 두 사람은 재빨리 아이에게로 달려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각성할 여력도 없었을 텐데.”

“어이, 그것보다 꼬마는?!”



그들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아이는 소중한 듯이 그를 품에 꼭 껴안고 있었다. 유리관 안에서는 그냥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몸의 형태가 불안정해 보이긴 해도 어느 정도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추욱 늘어져서 제 품에 안겨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아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아버지…?”

“강, 림…아-?”

“뭐야, 이 영감님. 왜 내 이름을 부르지?”

“…내 이름이야. 바보령.”



뭐?! 놀라는 그의 모습은 상관없는지, 아이는 할아버지를 꼬옥 껴안았다. 아이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아주 슬프고 애절한 목소리가. 할아버지를 받아냈을 때부터 들리는 이명. 처음에는 흐릿했지만 점점 선명해졌다. 다른 이들도 들리는지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우리 강림이, 잘 지내야 하는데. 안 아파야 하는데.’

‘밥은 잘 먹고 다니겠지? 많이 먹고 쑥쑥 자라서 할아버지보다 커야지.’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놀면 좋을 텐데.’



이건, 아이가 아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하나같이 자신을 걱정하는 말들밖에는 없었다. 이런 모습이 되어서도, 자기가 더 아플 텐데도 여전히 저를 걱정한다. 어떻게 자신이 여기 온 걸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분명히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너의 행복을 바란다고.


아이는 깨달았다. 이제야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고 아꼈으며, 또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굴었는지. 할아버지는 언제나 제가 행복하기를 바랬는데, 그런 할아버지에게 제가 몹쓸 짓을 했다는 것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펑펑 울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게 무서웠다.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웠다. 제발 가지 말아달라고, 날 혼자 두지 말아달라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신을 믿은 적도 없으면서, 기도하면 뭐든 이루어진다는 말에 할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계속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지만.


죽기 직전 자신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서럽게 일그러졌었다. 아마, 울고 있는 어린 손자를 홀로 남겨둔다는 것이 할아버지한테도 슬픈 일이었을지 모른다. 자신만큼이나 할아버지도 많이 아파했을 것이다.


사실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영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주술은 많이 할 줄 모른다. 어느 정도 얕은 지식은 있었지만 깊게 파고드는 것을 꺼려했으니까. 할아버지한테 사용했던 주술도 사실 성공률이 희박한 녀석이라고 책의 주의사항에 쓰여 있었다. 그런 주술을 무사히 성공했던 건 할아버지가 바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실은 제가 붙잡아둔 게 아니라, 붙잡혀줬던 것이 아니었을까. 저를 걱정해서.



‘강림이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이많이 나타나면 좋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할아버지의 속삭임에 너무 서러워졌다. 수백 개의 가시가 심장을 찔러대는 것 같이 아팠다. 눈물이 자꾸 앞을 가려서, 소매를 들어 눈가를 계속 닦아야만 했다. 대체 오늘 몇 번째 우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많이 운 적도 없었는데, 여기 와서는 너무 자주 울게 된다. 앞으로 10년 치를 다 울어버린 것 같았다.



“할아버지, 미안해….”



속삭이듯이 말하면서, 아이는 할아버지를 더 꼬옥 껴안았다.


내 이기심 때문에 이렇게 될 때까지 붙잡아둬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있지, 할아버지. 왜 우리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왜, 어째서. 나 그래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도둑질 한 번 안 하고 사람을 때린 적도 없는데.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야. 착하게 살아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는 걸.


할아버지, 많이 괴로워? 아파? 자기 걱정이나 하지 왜 자꾸 내 걱정을 해. 왜 떠나지를 못해. 바보같이. 할아버지. 나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정말이야. …이제 보내줄게. 편해져도 돼. 난 괜찮아. 보내줘야 한다는 걸 아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조금만 더 어른스러웠다면, 차라리 그 때 괜찮은 척 웃으면서 보내줬더라면 나았을까. 지금 웃어주면 괜찮을까? 할아버지가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씩씩하게 웃으면? 할아버지의 미련은 나니까, 내가 괜찮다면 할아버지도 편히 자기가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환하게 웃어주고 싶은데 웃기가 힘들었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주로 할아버지와 관련된 기억이라는 게 아이의 마음을 씁쓸하게 했지만.



“할아버지!”

“으, 응. 강림이…?”

“할아버지, 나 괜찮아.”

“괜찮아…?”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아이는 괜스레 웃음이 났다. 그래도 그냥 헤어지는 것보다는, 작별인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할아버지에게서 연한 노란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걸 본 차사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지만, 당연스럽게도 아이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대화에 집중했다.



“그럼, 물론이지. 나 봐, 웃고 있잖아?”

“웃어…?”

“그럼. 나 이제 많이 컸잖아? 할아버지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나 지금 잘 지내고 있어. 정말이야. 그러니까….”



히죽히죽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젓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찢어질 것처럼 아픈 가슴을 부둥켜안고 아이는 웃었다. 웃음과 함께 할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모든 슬픈 감정을 하나하나 흘려보내려 애썼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점점 번져가는 미소와 함께 몸에서 발하는 빛이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흐려지는 말끝을 겨우 다잡고, 아이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가도 돼.”



그 순간, 할아버지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반투명하게 변했다. 방금 전의 그 괴물같은 모습이 아닌, 생전에 아이와 찍었던 액자 속 모습 그대로의 할아버지였다.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던 할아버지가 아이를 꼭 껴안았다. 놀라는 아이를 뒤로 한 채, 그는 손을 흔들며 사라져갔다. 그 자리에는 빛의 파편만이 남아 있었다.



“뭐, 뭐야?!”

“…성불한 거다. 안심해도 돼. 가야할 곳으로 간 거야.”

“그래, 그렇구나.”



성불….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이는 할아버지가 사라진 장소를 마냥 바라보았다. 사라지기 전의 가루처럼 옅은 하얀빛 파편들이 남아 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아이는 그제서야 한 줄기 눈물을 흘려보내면서, 환하게 웃었다.



“안녕, 할아버지.”




* * *



“믿을 수가 없군.”

“….”

“어떻게 유리관을 깼으며, 아니, 그 이전에 데이터 손실량으로 봐서는 기억도 온전치 않았을 텐데. 저 영혼을 어떻게 성불시킨 거지? 꼬마 녀석.”



놀라워하며 아이를 바라보는 사라와는 달리, 강림도령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이를 담은 새까만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강림도령의 모습에, 사라가 이상했는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 무슨 생각이냐?”

“에? 아니, 아무것도.”

“그나저나 저 꼬마, 어쩔 셈이야. 일단 명계로 온 이상 저 녀석은 죽은 거야. 평범한 방법으로 죽은 것 같지는 않지만….”

“물어보면 되겠지. 어이!”



강림도령의 목소리를 듣고, 바닥에 앉아 있던 아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의 눈빛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방금 전의 망설이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결심한 듯이 아이가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나, 살고 싶어.”

“역시 그거냐?”

“할아버지한테 괜찮다고 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돌아가야지. 힘들 거 알아. 그래도 괜찮을 거야.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

“…그래.”



괜찮아질 거라고 계속, 반복적으로 말하는 아이의 표정이 아직 조금은 불안해 보였지만 그 이상으로 단호했다. 그런 아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강림도령과 달리 사라는 고민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턱에 붙이고 골똘히 생각하던 사라가 아이에게 물었다.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대체 어떻게 여기로 온 거지?”

“결계를 넘어왔어.”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대답에 강림도령이 주먹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프잖아!”

“제발 어른이 하시는 말씀 좀 들어라. 이쪽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지!”

“메롱메롱메롱! 바보령이 하는 말은 안 들을 거네요!”

“너 진짜!”

“유체이탈이라…. 그렇다면 돌아갈 가능성이 있긴 하지. 아직 몸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테니, 훼손되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가능해.”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사라의 모습에, 희망을 얻었는지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 살아날 수 있는 거야? 아저씨들.”

“아저씨…. 꼬마야. 난 아저씨가 아니라고!”

“나도 꼬마 아니네요?”



당돌하게 대드는 모습을 보니 아이는 완전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열은 받는데 한편으로는 이제야 꼬맹이답다 생각하면서, 강림도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따질 건 따져야지.



“후우. 타협하자. 일단….”

“거기 누구냐?!”



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칫, 혀를 차던 사라가 재빨리 달려나가 소리지른 남자를 기절시켰다. 그와 동시에 강림도령이 아이를 어깨에 들쳐메었다. 어어?! 소리와 함께 떠오른 아이가 놀랄 틈도 없이, 그들은 아이를 들쳐메고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소리질렀다. 



“뭐야, 갑자기!”

“유리관이 깨진 소리가 들린 모양이다. 가뜩이나 저기는 레벨 2 정도의 보호레벨이 적용되는 연구실이라 감시카메라에 걸린 모양이야.”

“뭐?! 그럼 어떡해!”

“꼬맹이는 자기 걱정이나 해! 어이, 전송 시스템이 어디 있었지?”

“2층.”

“뭐야, 3계단은 올라가야 하잖아!”



투덜거리며 달려나가는 그들 앞을 가로막는 이들이 있었다. 붉은 색과 검은 색의 전투복. 세성 편전의 고스트메신저들이었다. 역시나, 라는 표정을 짓던 사라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소울폰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얼굴은 씨익 웃고 있었다. 성가시군. 하지만,



“역시, 재미있어졌어.”




* * *



“제가 선택한 일이, 틀릴 리 없어요.”



단호하게 답하는 바리에게 마고는 가볍게 웃어주었다.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마치 안심했다는 것처럼 편안한 미소였다.



“그래, 그 자세야. 앞으로도 그러길 바래.”

“그게 무슨….”



[모든 고스트메신저에게 전합니다. 지금 즉시 염라의 집무실로 모여주세요.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모든 고스트메신저는 지금 즉시 염라의 집무실로 모여주세요.]

[….]



갑자기 들려오는 방송 소리에 바리는 깜짝 놀랐다. 그 뒤에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는 놀람은 경악으로 변했다. 반면 마고는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이었다. 기지개를 쭉 펴던 마고가 웃으면서 품 안에 있던 파이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대꾸했다.



“자, 가볼까? 기왕이면 천천히.”

“네?! 자, 잠깐만요.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흐음…. 아마 가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살짝 윙크하며, 마고가 즐겁게 웃었다.



“무슨 일이건 간에 재미있어질 거 같거든.”




* * *



“끈질기다, 진짜!”



전송 시스템실로 향하는 복도에는 예상보다 사람이 많았다.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몰라도 그 많던 연구자들과 오퍼레이터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거의 대부분이 차사들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온갖 무술을 써서 달려드는 이들을 제압하느라 고생 중이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든 피해 없이 시스템실로 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정말 싸움이라도 벌어져서 인명…. 아니, 영혼 피해라도 나면 정말 과중한 문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가급적 상대에게 상처를 내지 않으면서 전진하려다 보니까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비례해서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끝도, 없네!”



자신에게 달려드는 차사 하나를 발을 걸어 넘어뜨리면서, 소울폰으로 목을 쳐서 기절시키던 강림도령이 투덜거렸다.



“꼬맹이를 버리면 해결될 일일 텐데?”



총을 휘둘러 상대를 마구 때려눕히던 사라가 달려드는 남자를 발견했다. 보자마자 그는 씨익 웃으면서 바닥에 손을 대고 발차기로 턱을 차 넘어뜨린 후, 손을 탁탁 털어내고 있었다. 사라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쯧, 손이 더러워졌잖아.”

“잡담할 시간에 좀 뛰어라, 응?”



조금만 더 가면 전송 시스템실이다. 여기를 넘어가야 현상계로 갈 수 있다. 세성 편전 내에서는 공간이동이 금지되어 있으니까. 아이의 몸은 예상대로라면 분명히 강림도령의 사무실에 있을 테고, 여기는 평소에도 손님이 거의 없으니 몸의 훼손여부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그 당시 비가 왔고 아이의 몸이 물에 많이 젖어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체온이 많이 떨어져 있을 테고, 최대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골치 아파질 지도 모른다.



“이제 이 코너만 돌면 끄…!!”



코너를 돌아나가려는 강림도령을 사라가 입을 막고 잡아당겼다. 그리고 코너 구석에 숨어 그 너머를 조용히 훔쳐보았다.


전송 시스템실 앞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죄다 붉은색의 옷을 입고 손에는 노란색 총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꽤나 우람한 덩치에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남자였다. 강림도령은 저건 누구지, 하는 얼굴이었지만 그가 누군지 알아본 사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얼굴선을 따라 식은땀 한 방울이 주륵 떨어졌다.



“우와, 크다?”

“쳇, 성가시게 됐군.”

“뭐야, 저 사람 알아?”

“어차피 정면돌파를 피할 수 없긴 했지만….”



왜 이런 성가신 일에 휘말린 건지. 투덜거리던 사라가 갑자기 그를 끌고 코너를 돌았다. 모퉁이 너머에서 나오는 두 사람을 알아본 무리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 와중에 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한 손을 올렸다. 그와 함께 뒤에 서 있던 붉은 부대가 수군거리면서 총을 내렸다. 사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편전 내에서 소란을 피운다던 애송이들이 너희들이구만!”

“이런 식으로 뵙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죠, 궤네깃또님.”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서서도 긴장을 풀지 않는 사라의 모습에 강림도령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군가에게 저리 긴장할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사라는 대놓고 저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어이, 저거 누구야?’

‘궤네깃또. 들어본 적 있을 텐데?’

‘궤네깃또…. 설마, 그 괴팍하다던 서천화랑부의 수장을 말하는 거야?’

‘….’



말없이 그들을 응시하던 사라가, 툭 말을 뱉었다.



“물러서 주십시오.”

“편전에 들어왔다던 인간은 어디 있나?”

“인간 같은 건 없습니다. 일하러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차사들을 때려눕히면서 필사적으로 전진할 만큼 일이 하고 싶었는지는 몰랐네만 말일세.”



궤네깃또는 의미심장한 어투로 그들에게 말했다. 칫, 소리를 내며 사라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총을 꺼내 그들에게로 겨누었다. 하하하 웃던 궤네깃또는 손에 들고 있던 소울폰의 버튼을 눌렀다. 한 바퀴 돌리자, 금방 거대한 도끼로 변해 그의 손에 주어졌다. 저런 소울폰도 있었어?! 놀라는 강림도령과 달리 사라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내가 나설 때가 왔군.”

“비켜 주시지요.”

“이 궤네깃또가 물러설 것 같은가. 아이는 어디 있지? 한 번 명계로 온 영혼이 현상계로 다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간만에 즐거운지 궤네깃또가 도끼를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그러나 사라는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일에 대해서는 제 상관이 얼마나 냉혹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남자는 지금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숨기는 것도 무의미하다 싶었는지 사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또렷한 보랏빛 눈동자가 제 상관을 바라보았다.



“설령 아이를 다시 현상계로 데려가 준다고 해도, 왜 그게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군요.”

“흐음?”

“이 아이는 절차를 밟아 죽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수명이 남아 있으니까. 순리대로라면, 다시 현상계로 돌아가도 문제될 건 없을 텐데요.”

“크, 하하하하하!!”



갑자기 크게 웃어대는 그의 모습에 총을 들고 있던 사라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언제든지 당길 수 있게 방아쇠에 손을 올려놓았다. 수장이 웃는 모습에 뒤에 서 있던 서천화랑부 일원들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호탕하게 웃던 궤네깃또가 미소지으며 감탄조로 말했다.



“내가 꼬맹이한테 한 방 먹었어. 제법이야.”

“….”

“하지만 말이지, 규칙이라는 건 지켜지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서천화랑부 소속이라면 잘 알 텐데.”

“…규칙 이전에 지켜져야 하는 건 순리라고도 배웠습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사라와 그의 사이에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걸 관전하는 강림도령은 상황이 몹시 난처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웃고는 있지만, 궤네깃또의 공기가 싸늘해지고 있다는 걸 모를 만큼 그가 둔하지는 않았으니까.


그가 자신의 무기인 도끼형의 소울폰, Power X를 손에서 계속 돌리면서 말을 걸었다. 위협적으로 돌아가는 도끼날에도 사라는 꿈쩍하지 않았다. 강림도령도 굳은 얼굴로 BS(Black Shark, 강림의 소울폰)을 꺼내들었다.



“나도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

“인간과 노닥거리더니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거다. 내가 한 수 가르쳐 주지.”



양 쪽 모두 무기를 꺼내들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긴장의 끈이 팽팽해지는 찰나, 갑자기 딩동댕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모두가 놀라는 사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모든 고스트메신저에게 전합니다. 지금 즉시 염라의 집무실로 모여주세요.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모든 고스트메신저는 지금 즉시 염라의 집무실로 모여주세요.]


평소처럼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아닌 앳되지만 냉랭한 말투. 염라대왕이 직접 그들 전부를 호출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 강림도령과 사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둘 다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명계로 흘러들어온 아이에 관한 청문회가 있을 예정이니 강림도령과 사라도령, 두 명의 차사도 반드시 와주시기 바랍니다.]




* * *



집무실이라고는 하지만, 세성 편전의 모든 것을 관할하고 움직이는 염라대왕의 처소답게 방은 엄청나게 컸다. 그 많은 고스트메신저를 다 수용하고도 넓어 보일 정도로. 방의 정중앙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고, 문의 바로 맞은편에는 계단과 함께 맨 위에 의자로 추정되는 물체가 하나 있었다. 뒤돌려져 있는 의자 너머에 아마 염라대왕이 있겠지.


카펫 양 옆으로 고스트메신저들이 쭈욱 정렬해 있었고, 강림도령과 사라는 그 카펫 위에 새겨진 거대한 원 문양 안에 서 있었다. 모여 있는 고스트메신저들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높게 솟은 천장을 올려다보는 사라와는 달리 강림도령은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눈을 돌려 자신의 소울폰을 내려다보았다. 휴대폰을 켜고 탁탁 타자를 두들기면서도 그는 자못 심각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처럼.



“그럼 지금부터 청문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끄럽던 소리들이 어느 새 잦아들면서, 오퍼레이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명계에 어떤 영혼 하나가 들어와 있습니다.”

“….”

“이 영혼은 누군가를 찾겠다는 명목으로 세성 편전 안으로 들어와 레벨 2의 연구소에 침입, 보관되어 있던 영혼의 소실 및 편전 내부에서 소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가담한 자들이 있었다는 보고도 들어왔구요. 이 청문회는 침입자는 물론이요, 그에 협력한 동조자들의 처분에 대한 의논을 하기 위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퍼레이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한 고스트메신저들을 제압한 건 바로 사라의 목소리였다.

“그 이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을 텐데요.”

“사라도령, 발언해주세요.”

“이 영혼은 아직 명계가 아닌 현상계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인 명계의 법을 적용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명계로 넘어왔다면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일세!”



그의 말을 끊어낸 건 다름 아닌 바로 궤네깃또였다. 웃으면서도 칼같이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살아있는 영혼이 명계에 왔다는 것만도 이미 순리에 크게 어긋나거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했다면 이미 끝난 것 아닌가? 무엇보다 여기는 명계고, 따라서 여기 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네만.”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 집단을 이끄는 수장답게 깔끔하고 단호하게 요점만 집어내는 그의 의견에, 많은 환호성이 들려왔다. 무엇보다 일단 높은 직위의 사람이 말하는 건 더 설득력 있게 들리기 마련이다.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던 두 사람의 귀에 놀라움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고개를 드니, 의외의 사람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생각이 좀 다른데-?”



파이프를 물고 유유히 들어오던 여인이 나른하게 미소지었다. 그 뒤를 따라 걸어오는 은빛 머리칼의 소녀는 두 사람을 보더니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마고할미와 바리공주. 원로 고스트메신저와 세성 편전의 총지휘관. 두 명의 거물이 들어오자 내부는 한층 더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고…?”

“오랜만이야, 당신.”

“꽤나 늦었군.”

“주인공은 원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잖아?”



궤네깃또에게 싱긋 웃어주던 마고는 발걸음을 옮겨 계단 맨 밑까지 다가갔다. 따라가던 바리는 강림도령과 사라에게로 다가가 소곤거렸다. 강림도령이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주는 동안, 마고는 뒤를 돌아 강림도령 쪽을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그나저나 그 꼬마는 어디 있니? 일단 그 아이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마고할미의 그 한 마디에 주위에서는 더욱 수군거림이 커져갔다. 정작 그녀는 굉장히 느긋한 표정으로 여유롭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궤네깃또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사건에 당신이 관심을 두는 게 이상하군. 순리에 어긋나는 건 굉장히 싫어하지 않았나?”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 이번 사건은 내 취향이 아니야. 그런데, 조금 흥미가 생겼어.”

“뭐…?”

“방금 전, 저는 굉장히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답니다. 여러분.”



그렇게 말하는 마고는 평소보다도 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 * *



“참 귀엽게 생긴 꼬맹이네.”



안경 너머로 감시카메라 화면이 가득 찍혔다. 세성 편전 내부를 비춰주는 카메라들이 모여 있는 한 시스템실 안에서, 마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는 사람 하나 없이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계속 영상을 지켜보는 그녀의 눈빛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연구실에 몰래 들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눈을 반짝거리며 지켜보던 그녀는 두 차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할아버지가 성불하는 장면에서는 깜짝 놀랐는지 호오, 감탄사를 흘리기도 했다. 조금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들이 방을 나가는 걸 지켜보고 나서도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뒤, 그녀의 입이 살짝 다물려졌다 벌어졌다.



“제법이네?”




* * *



“그렇게 된 거랍니다.”



마고의 설명이 끝나고 나자, 홀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이번에는 다들 아예 말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기억조차 온전하지 않을 정도로 손실이 심한 영혼이 성불을 했다? 레벨2 정도면 원 상태 복구는 어렵다고 진단받은 영혼일 텐데. 온전한 영혼들한테도 어려운 일일진데, 어떻게?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마고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는 강림도령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꼬마를 어디에 숨겼는지가 궁금한데, 설명해줄 수 있겠어? 연구실을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옆에 있었는데 말이야.”

“아, 그게….”



잠시 망설이던 강림도령이 자신의 소울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서는 무언가를 찾더니 한 지점을 향해 버튼을 꾹 눌렀다. 작은 큐브같은 상자가 나오더니 분리되기 시작했다. 점점 입자가 구성되면서, 한 소년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고가 미소지었다.



“캡쳐 기능인가. 머리 좀 썼는데?”

“이, 이게 뭐야?!”



반면 아이는 정신이 없어보였다. 조용히 숨어 있으래서 소울폰에 들어가 있었다가 나왔더니 대체 이게 무슨 낭패란 말인가. 나오자마자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라니.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강림도령에게 묻기도 전에, 아이는 마고와 눈이 마주쳤다. 쉿.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면서 미소짓는 그녀를 보고, 아이는 튀어나오려던 질문들을 일단 눌러삼켰다. 마고가 계속 말을 이었다.



“령들의 디지털화가 가능해진 이후로, 우리 명계는 더욱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배를 타고 일일이 영혼들을 데려오는 대신 편하게 휴대전화 하나로 영혼들을 보내고 악령들을 없앨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죠?”

“….”

“하지만 그 때문에, 여기 있는 모두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밝지만 차분한 어조로 선포하듯이 얘기하던 그녀가, 방에 있는 이들을 빙 둘러보았다.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앞으로 척 내밀었다.



“우리의 역할은 모두가 알다시피, 현상계에서의 수명을 다한 영혼들이 미련을 깨끗이 버리고 명계로 올 수 있게 인도하는 거예요. 즉, 우리가 가장 먼저 그들에게 해줘야 하는 건 그들이 현상계에서의 미련을 온전히 버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죠. 악령 퇴치가 아닙니다. 악령은 미련에서 파생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부터 원혼 퇴치를 우선적으로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여러 강력한 무기들이 개발되기 시작했지요.”



숙연한 분위기가 방 안에 감돌았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그녀의 말 한 마디, 눈짓 하나에 주목하고 있었다.



“미련을 버리게 만드는 게 과연 단순한 무력만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우리는 물리적으로 그들을 억압해 어떻게서든 성불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년이 자기 할아버지의 영혼을 성불시킬 수 있었던 건,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아이가 이루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의 유대감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죠.”

“하, 하지만. 레벨 2라면 기억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을텐데….”



용기를 낸 누군가가 질문하자, 마고는 선선히 그에 대해 대답했다. 아니, 질문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이 아이가 보여준 건 대체 뭐였을까요?”

“….”

“발전한 문명 때문에, 우리 모두는 너무 오랫동안 중요한 것을 잊고 지내온 것 같아요. 삶을 삶답게 만들어주는 건 다른 이들과의 관계라고,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그건 명계나 현상계나 모두 똑같잖아요? 다른 이를 설득하고 인도할 수 있는 건 힘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진실된 마음이라는 걸 저희가 너무 오래 잊고 살았어요.”

“….”

“그걸 깨닫게 해준 것부터, 저는 이 아이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마고가 아이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얼떨결에 같이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아이는 그녀를 흘끗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편들어주는 거 같기도 하고.



“자, 이렇게 의견들이 나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염라님?”



마고의 웃음소리와 함께, 등돌려져 있던 의자가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본 순간 아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너!!”



아이가 꽃밭에서 만났던 그 때 그 소녀였다. 자신보다도 어려 보이는 얼굴에 한복을 입고, 청록색 단발머리를 한 냉막한 인상의 여자아이. 이게 대체 어쩐 일이냐고 소리치려다 멈칫했다. 염라, 설마 염라대왕? 저승의 왕이 이런 어린 소녀라고?! 놀라서 입만 뻐끔뻐끔거리는 아이, 아니 소년에게 염라가 말을 걸었다. 딱딱한 어조였다.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어…. 예?”

“당신의 의견이 듣고 싶습니다.”



차분한 눈동자로 소년을 바라보는 소녀는 한 톨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는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소년은 그녀에게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소녀는 자신을 좋게 보고 있다는 걸. 그러니 제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소년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소녀가 자신을 이 곳으로 데려와줬기에 결과적으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던 거니까. 이번에도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간다.


아무 말 없는 소년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걸까, 마고가 부드러운 어조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어떻게 하고 싶은지 솔직하게 말해주면 된….”

“돌아가고 싶어요.”



단칼에 대답하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살짝 감정이 섞여든 목소리를 보니 정말로 궁금한 것 같았다. 그런 염라에게 소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할아버지한테 괜찮다고 말해버려서. 너무 빨리 가면 혼날 거 같거든요.”

“….”



대답을 들은 염라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가, 스러졌다. 하지만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리고, 판결이 내려졌다.



“강림도령, 사라도령.”

“….”

“그대들이 데려왔으니, 책임지고 현상계로 보내주도록 해요.”



세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과 동시에, 막아놓았던 댐이 터지듯 집무실 내부는 왁자지껄하게 변했다. 주제가 이번 판결과 소년이 보여준 기적, 그리고 앞으로의 명계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웅성거리는 그들을 바라보던 마고가 염라에게로 뒤돌아서 물었다.



“자신 있으신가요? 지금 내린 결론에.”



고개를 끄덕이던 염라가 조용히 미소지으며, 밑에서 기뻐하는 소년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이 살짝 웃는 얼굴. 같이 오래 지냈지만, 마고는 저렇게 제 감정을 드러내는 군주를 본 적이 없었다.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도, 조금은 성장한 것 같네요. 당신도.’




* * *



“왜, 말 안 했어?”



청문회가 끝나고 모두들 빠져나간 집무실은 크고 한산했다. 지금 이 방 안에는 염라와 마고, 강림도령과 사라도령, 바리공주와 소년만이 남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염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계단이 꽤 높아서인지 고개를 상당히 숙여야 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 맞다. 인사해야 하는데. 도와준 거, 고마웠어.”

“만나고 싶은 분은 만나셨나요?”



응.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소년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보아하니 일이 잘 처리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소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본 다른 이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소년은 그저 마주 웃어줄 뿐이었다. 마음의 짐이 가셨는지, 개구지게 웃는 얼굴이 그저 해맑았다.



“제가 드렸던 그 주머니, 가지고 계십니까?”

“어, 이거?”



소년은 바지 주머니를 뒤져 보라색 주머니를 꺼냈다. 갑자기 이곳으로 떨어진 후 제 손에 남아 있던 물건이었다. 이게 뭐야? 그렇게 묻는 소년에게 소녀가 짧게 답했다.



“다섯 가지 꽃.”

“에?”

“뼈, 피, 혼, 숨, 살. 인간은 이 다섯 가지로 구성됩니다. 그 다섯 가지를 하나하나 품고 있는 꽃들이에요.”

“….”

“혹여 몸에 이상이 생겼다면 그걸 사용하세요.”

“…고마워!”



이제 정말 돌아가는구나. 소년의 마음속에 섭섭함이 몰려들었다. 이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후련하기도 한데, 몇 가지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 소녀였다. 염라대왕이고 자신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여동생 뻘의 소녀일 뿐이니까.


차가워 보이지만, 왠지 내버려둘 수가 없는 아이였다. 고독한 모습이 왠지 저랑 닮았다. 더 이야기해 보고 싶은데, 하지만 이젠 다신 볼 수 없겠지. 그런 그를 바라보던 염라가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로 던졌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의자 쪽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라 덥석 받고는, 무엇인가 확인하던 소년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어, 이거!”

“…문자랑 전화, 캡쳐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폴더형으로 된 작은 핸드폰이었다. 주변 차사들도 모두 놀랐다.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지만 인간한테 소울폰을 주다니! 정말이지 파격적인 대우에 대번에 항의가 들어왔다. 바리가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평범한 인간한테 소울폰이라뇨, 가뜩이나 물량이 부족한 거 아시잖아요!”

“염라넷에 접속하지 못하는 한 별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조용히 대꾸하는 염라에게 강림도령이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염라님, 속지 마세요. 이 꼬마가 제 소울폰을 가지고 얼마나 사고를 쳤는지 아십니까!”

“잠깐만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죠. 강림?! 인간이 소울폰을 사용했다고 했어요, 지금?!”

“아, 바리.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환하게 웃으며 소울폰을 흔들었다.



“자주 연락할게!”

“…네.”

“캡쳐도 함부로 안 할 거야! 정말 위급할 때만 할게.”

“그러시리라 믿겠습니다.”

“나, 열심히 할 거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염라는 웃으면서 다시 의자로 가서 앉았다. 의자가 다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곧 그녀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그게, 강림도령이 선택한 결론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비장하고 숙연했다. 어려운 결심이었는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염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뭐, 좋아.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강림도령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염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만족했는지, 그녀는 선선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 *



할아버지, 보고 있어? 나 살아 있어. 할아버지가 원했던 대로, 바로 여기에. 이제 많이 울지 않을게. 많이 웃고 많이 즐기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 거야. 할아버지를 위해서만이 아니야. 나 자신을 위해서야.


하지만 할아버지를 잊을 생각은 없어. 할아버지가 날 얼마나 아껴줬고 소중히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는걸. 그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해. 내 보물이랄까. 할아버지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그거도 다 감당하겠다고 결심했으니까. 할아버지는 죽지 않았어. 잊지 않아. 기억할 거야. 내가 기억하는 한, 할아버지는 내 안에 살아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줘.




- 1부. Momento Mori. The End





- 2부: Spero Spera -5년 후 - 로 이어집니다.




- 1,2부 다 모두 짧은 에필로그가 회지에 첨부될 예정. 배포전을 기대해주세요~!!


- 초고라 회지에는 표현이 좀 수정될 수 있습니다.(구멍이 많아서 많이 수정했습니다 ㄷㄷ)


- 2부는 프롤로그를 써서 올려볼까 고민 중이지만, 아무래도 일단 5년 후의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 2부에서는 커다란 사건축을 중심으로 꼬강이와 강림이, 사라의 과거가 다루어질 거 같습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세 사람의 마음을 다루어볼 예정이에요. 물론 커플노선은 명확합니다^^


- 책 페이지는 도합 397페이지 정도 됩니다.



Posted by I.R.E
,

※ m님 힘내세요~~ 빠샤빠샤!!>_<




[투림] 캠퍼스 로맨스


- 야작 끝나고.


WRITTEN BY. 리네







"하아-."



내쉬어진 한숨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남자의 적갈색 눈동자가 창문 너머 하늘을 향했다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향했다. 자신은 그저 과제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 샌가 시계는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4시가 아니라 새벽 4시. 분명 시작은 9시부터 했던 거 같은데 벌써 동틀 시간이라니. 학교에서 보는 밤하늘이 이제는 낯설지가 않다는 것이 여러 모로 씁쓸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일, 아니 오늘이 공강이라는 사실이었다.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남아 있는 전우들에게 손을 휘휘 흔들면서 강림은 컴퓨터실을 나섰다. 어깨를 조금 흔들자 뚜둑 소리가 난다. 제기랄.



"소프트학과가 이렇게 힘들 거라고 누가 상상했겠어."



컴퓨터를 다루는 것이나 조립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이 과에 들어왔다. 물론 작업 자체는 즐겁게 하고 있다. 간혹 교수님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과제를 주는 것만 아니라면. 무심코 복도 옆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니 맞은편 건물들에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다. 저기가 어딜까, 멍한 머리로 궁리하던 중 답을 찾았다. 미대 쪽이구만.


자신들보다도 더 과제에 치여 산다고 들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단 오늘 저와 친구들이 한 과제는 홈페이지 개설과 더불어 각종 컨텐츠 제작. 프로나 할 법한 일을 왜 대학생한테 주냐고 항의하니까, 어차피 나중에 할 거 미리 해두면 좋지 않냐고 껄껄대는 교수님을 보던 학생 전원이 표정을 구겼다. 그건 좋은데 왜 하필 시험 2주 전에 이걸 몰아주냐고!


미대는 그나마 과제로만 때운다지, 저희 쪽은 시험도 만만치 않다. 가뜩이나 이번 학기는 전공 시간표가 거지같아서 시험과목이 3일로 몰려 있단 말이다. OMG를 외치면서, 저를 비롯한 소프트웨어과 3학년생들은 눈물을 흩뿌리며 과제를 시작했다. 그래도 자신은 좀 빨리 끝낸 편이다. 게다가 저 과제는 제출이 모레라 가장 먼저 끝냈을 뿐이고, 다른 과목 과제까지 있는 녀석들은 아직도 전쟁 중일 터이니.


불이 꺼진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다 보니 긴장이 풀리는지 몸이 축 처진다. 이제야 밀린 잠이 쏟아지는지 눈꺼풀이 자꾸 감긴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다간 진짜 길 걷다가 쓰러질지도. 억지로 눈을 뜨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멍한 정신 너머로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니, 녀석이다.


다정다감하게 저를 보며 웃는 얼굴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가 맞았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반반한 얼굴에….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이자, 제 애인. 이젠 하다하다 환상까지 보는 건가. 아니면 혹시 진짜 길가에서 잠든 거 아냐? 어째서 이 녀석이 여기 있지? 1학년은 아직 그렇게까지 과제에 시달리지는 않을 텐데.



"데리러 왔어, 형."

"뭐야, 꿈인가…?"

"형?"

"나도 꽤 중증인가 보네…."

"왜 이래?! 피곤한 거야?"



놀란 표정으로 제 앞으로 걸어온다. 몽롱한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고, 제게 뻗어지는 팔을 꽉 붙잡았다. 드디어 몸에 한계치가 왔는지, 강림은 그의 품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의식이 끊겼다.




*  *  *



"하여간 무리하는 건 여전하다니까."



가뜩이나 잠도 많으면서. 강림을 등에 업고 걸어가는 남자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늘 밤을 샌 것 같아서 마중을 나왔는데, 제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픽 쓰러졌다 이거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급하게 보건실에 데려가니 그냥 잠든 것 뿐이라나 뭐라나. 아니 그럼 왜 그렇게 극적으로 쓰러지냐구. 투덜거리면서도, 축 늘어진 그가 불편할새라 다시 그를 고쳐 업었다.


이 소동을 겪고도 세상 모르게 잠든 얼굴을 보니 진짜 피곤하긴 피곤했나 보다. 이제 2학년부터는 저도 이런 생활을 하게 되겠지. 가뜩이나 이 사람은 이제 곧 취업반이니 할 게 늘어나는 건 당연한지도. 그러고 보면 요새 이상하게 더 마른 것 같다. 왜 이리 가벼운지. 잘 챙겨 먹으라니까 또 밥을 거른 모양이다. 집에 가면 아무래도 뭐라도 좀 먹여야 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뒤에 있던 몸이 움찔거렸다. 으으음-. 소리를 내며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형.



"깼어?"

"…여긴 어디야?"

"형네 집으로 가는 길."



아직도 피곤한지 눈을 쉽사리 뜨지 못하는 것 같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잠이 덜 깬 것 같았다.



"더 자지 그래? 조금만 더 가면 집이니까 침대에 눕혀놓고 갈게. 형네 키, 아직도 거기 있지?"

"…응."

"정말, 눈 앞에서 갑자기 쓰러지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다음부터는 그래도 적당히 하라고. 안 그러면 나 삐진다?"



취업반 입장에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짐짓 화난 척을 했다. 그런 그가 귀여웠는지 강림은 피식 웃다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세게 껴안았다. 귓가에 가만히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해가 점점 떠오르면서 주위의 어둠을 걷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



보고 싶…. 그 말만을 던지고 다시 잠들어버린 제 야속한 애인에게, 그도 가만히 속삭였다. 



"나도."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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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림] 이름

고스트메신저 2014. 8. 24. 23:47

※ 비노님 용강림이 썰.



[투림] 이름






초록빛으로 물들었던 숲이, 밤의 장막 아래에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다. 저 높은 창공에 달린 작은 초승달과, 그 주변에 흩뿌려진 새하얀 별들이 은은히 빛을 내리비춘다. 그래도 여전히 어두운 숲의 사이를 어스름하게 비추는 건, 점점이 빛나는 작은 생명체들. 허공에 연두빛으로 점을 찍은 듯 반짝이는 반딧불이들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림자의 주인은 이제 갓 10살을 넘겼을 법한 작은 소년이었다. 풀뿌리와 나뭇가지들을 잘근잘근 밟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 사이로 퍼져나간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바람소리가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간다. 무서울 법도 하건만 정작 아이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자세히 보니 아이는 무언가를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달려가는 아이의 적갈색 눈동자에 비춰지는 것은, 새하얗게 타오르는 빛의 기둥이었다. 어두운 숲 한가운데서 선명하게 위로 뻗어진 빛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이렇게 흥분한 건 처음 봐.’


아이의 앞에서, 파르르 떨며 날아가는 나비들이 푸르게 빛난다. 행여 놓칠세라 바삐 움직이던 아이는 어느 새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수풀을 확 제끼자,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사람 같아 보였다. 빛의 중심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 폭이 넓은 겉옷을 입고 가볍게 서성이는 남자의 머리카락은 새까맣고, 눈동자는 짙푸르게 빛났다. 그가 팔을 뻗자 나비들은 조용히 그의 손끝이나 어깨,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살며시 미소짓고 있는 얼굴이 너무나도 편안해 보인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아이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았다.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나비들은 그에게서 떨어져 세차게 날아올랐다. 떠나지 않고, 그의 주변을 회오리처럼 휘감은 나비들에서 찬연히 쏟아져 나오는 빛에 눈이 부셨다. 숲의 빛기둥은 이 나비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이었던가. 마치 빛이 그를 낳은 것처럼 신비하고 오묘한 광경. 그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너는, 누구지?”



*


“아저씨!”


쪼르르 달려오는 아이의 얼굴이 밝다. 남자는 손을 뻗어 제 앞으로 달려오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숲에서는 조심히 뛰어다니라고 했건만, 언제나와 같이 있는 힘껏 뛰어오는 건 여전하다. 혼을 내려고 해도, 저를 빨리 보고 싶어서 달려왔다고 말하는 아이를 어찌 더 꾸짖겠는가. 저를 올려다보는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귀여워, 남자는 피식 웃었다.


아이와 만난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잠시 산책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나게 된 작은 생명. 인간의 나이로도 무척 어릴 터인데, 겁도 없이 이 밤에 숲으로 들어온 것도 그렇지만,


- 너는 누구지?

- 그러는 아저씨는 누구예요?


제가 무섭지도 않은지 당돌하게 이름을 묻는다.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저 변덕이었다. 인간과는 어지간해선 얽히지 않으려고 했고 얽혀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잘 알면서도, 저는 아이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이 정도쯤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이는 계속해서 남자를 찾아왔다. 심지어는 밤늦게까지 있었던 적도 많아서, 그럴 때는 아침까지 머물다 돌아가야만 했다. 낮의 숲도 위험하지만, 밤은 더 위험하니까. 이 숲은 울창하고 넓어서 자칫 길을 잃으면 다시 돌아가기도 힘들다. 아무렇지 않게 여기로 걸음하는 아이에게 남자가 위험하다 만류할 때, 아이는 길을 가르쳐주는 이들이 있어 괜찮다고 했다. 누구냐고 묻자, 주변에 날아다니는 영혼들을 손으로 가리킨다. 아이는 영혼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놀라는 남자에게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여기가 더 안전한걸.”


더 이상 남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찾아올 때마다 환하게 웃는 얼굴과 대조되게, 아이의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망토로 가린다고 가렸지만, 낡은 천들이 펄럭일 때마다 드러나는 가느다란 팔다리. 거기에 찍혀 있는 시퍼런 멍자국들과 까진 상처들이 아이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남들과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은, 그 능력 자체만으로도 배척받는 법. 인간과 얽히면 피곤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들과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하는 그 천성 때문이어라. 자신들이 그저 옳다고 믿는다. 그들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를 핍박한다. 상대가 누구든, 그게 설령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어린 아이일지라도.


“아이야.”

“왜?”


여기 그만 와야 해. 위험하니까.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말하고자 했지만, 끝내 하지 못했던 한 마디. ‘오지 말라.’ 는. 그냥 손을 뻗어 아이를 품에 안았다. 밤의 공기는 추웠다. 모닥불이 있지만 아이가 추워할까 걱정되었다. 저는 그런 거에 꿈쩍하지 않지만, 인간은 자신보다 연약한 존재니까.


“아저씨.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


제게 기댄 아이가 나지막히 읊조렸다. 무얼 물을까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이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이의 눈동자에 타오르는 모닥불이 가득 담겼다. 무덤덤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름이 뭐야?


“전에 물어봤지만 말해주지 않았잖아.”

“…이름 같은 건 없어.”


여기서 태어났을 때,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조차 그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알려주는 이도 없었고 알지도 못하였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아이가 보고 있는 모습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진짜 모습을 말하지 못하는 건, 아이가 알면 분명히 놀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크고 단단하고, 몸은 차가운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 있다고 말하면 무서워할까? 인간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두려워하니까. 아이가 그런 인간들과 다르고, 그렇게 그를 피하지 않을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다.


혹시나 무서워할까, 저를 피하게 될까 걱정이 돼서.


“이름이 없는 거야?”

“그래.”

“내 이름은 강림이야.”


아이가 태연하게 응수한다.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들어 불길 속으로 던져넣는다. 타닥타닥,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한층 더 밝아진다.


“아저씨.”

“왜.”

“그럼, 내 이름을 줄까?”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면서 저를 올려다본다. 말갛게 짓는 웃음이 아이답고 순수하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미동 없이 잔잔하고 깊어서, 그 너머가 짐작가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아이가 그에 대해 전부 눈치채고 있는 건 아닐까, 남자는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응.”

“그럼, 아저씨 이름도 지금부터 강림이네. 같은 이름이다!”


환하게 짓는 미소가 눈이 부시다. 그래서 눈이 아프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숲의 생활은 그렇게 지루하진 않았다. 오랜 시간 이 곳에서 지내왔지만, 제게 숲은 언제나 새로운 곳이었고 구경할 것들이 넘쳐났다. 풀잎 하나를 관찰하는 것만 해도 하루는 훌쩍 지나갔다. 인간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그들과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혼자라는 것에 딱히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혼자가 외로운 것이라는 걸 아이에게서 배웠다. 처음에는 그저 외로워하는 아이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이젠 아이가 오지 않는다면 제가 더 아플 것만 같았다. 전에도 나쁜 건 아니었지만 요새는 하루하루가 기다려졌다. 누군가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들뜨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릴 때도 많았다. 이제 아이가 없는 생활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툭, 아이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잠든 것 같았다. 제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작은 온기를 끌어안고, 남자는 눈을 감았다.



-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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