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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10.

예감







에에취!


요란스럽게 튀어나온 재채기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민망함을 애써 숨기며 코를 문지르는 마리네뜨에게 같이 길을 걸어가던 에스미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뭐야, 감기라도 걸렸어?”

“아,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의 볼이 살짝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시내에 나와 있었다. 상당히 더운 날씨라 둘 다 반팔에 짧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별로 더위를 타지 않는 마리네뜨와 달리 에스미는 더운지 연신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남은 손에는 차가운 커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직후라 그런지 꽤나 나른했다. 오랜만에 놀러 나와서일까, 근처에 있는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재잘거리는 두 소녀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앗, 죄송합니다.”



어깨가 툭 맞닿았다. 사과의 말을 건네며 저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마리네뜨는 흘깃 쳐다보았다. 벌써 몇 번째다. 이 거리가 번화가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검은색의 정장을 입고 바쁘게 길을 걸어가는 직장인들은 물론, 귀에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보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친구들, 나들이를 온 것처럼 화사하게 입고 돌아다니는 가족들,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지고 돌아다니거나 목에 사진기를 걸고 돌아다니는 관광객 비스무리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왜 이렇게 여기에 사람이 몰리게 되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지금 파리 최대의 번화가라 불리는 샹젤리제 거리가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다. 3일은 더 지나야 공사가 마무리되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기로 예정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몰려온 듯 했다. 사실 마리네뜨와 에스미도 오늘 그쪽으로 놀러가기로 했었는데 보수공사 안내판을 보고 포기했던 거니까. 그에 속으로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던 마리네뜨는 순간 흠칫했다. 낯빛이 어두워지는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리네뜨. 너 표정이 왜 그래?”

“응?! 응….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스미가 한 손으로 마리네뜨의 볼을 꽈악 꼬집었다.



“꺅! 아퍼!”



마리네뜨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엄살을 부렸다. 하지만 정작 꼬집은 당사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손을 놓고 말했다.



“너 열이 좀 있는 거 아니야? 좀 뜨뜻한데?”

“어,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오늘 날씨가 더워서 얼굴에 열이 오른 건지도 몰라. 일단 저 가게에라도 들어갈까?”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고 에스미는 바로 앞에 보이는 연분홍빛 간판이 붙은 가게로 들어섰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파는 깔끔한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훅 불어왔다. 이번에 새로 런칭한 가게인지 가게 안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깨끗한 하늘색 파스텔톤의 벽지를 배경으로 예쁘게 반짝거리는 유리공예품과 오르골, 각종 장신구와 귀여운 봉제인형들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무덤덤한 얼굴을 하면서도 꽤나 신기한지 코너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에스미와 달리 마리네뜨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돌아서던 마리네뜨는 바로 앞에 있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두려움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서다 뒤에 있던 나무 선반에 등을 부딪혔다. 아얏, 작은 비명과 함께 재빨리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히어로가 되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각오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영화의 끝에는 반드시 악당의 죽음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 그래서 전력을 다해 싸웠고 그에 후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무엇에 휘둘리고 있는 거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것도 아니면, 영웅이라는 이름의 무게?


누군가를 찌르는 감각은 예상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끔찍했다. 푸욱, 소리와 함께 고무를 뚫듯 간단하게 생살이 찢기고 붉은 피가 샘물처럼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분명 그 자리에 있던 악당과 자신, 그리고 블랙캣 뿐이겠지.


마리네뜨는 순순히 인정했다. 정말 어이없지만, 이러면 안 되겠지만 자신은 그 악당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비둘기 떼에 둘러싸여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 위로 쓰러져버린 자신의 잔상이 겹쳐졌다.


나도 그렇게 죽게 될까? 누구도 진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게 될까?


비둘기들과 함께할 때 즐거워보이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어쩌면 처음에 했던 그 모든 말들은 그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인간들이 싫어서 그런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그를 단죄할 자격이 있을까? 그가 저지른 짓들은 과연 그렇게 죽어야만 했던 일이었을까? 내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뺏어갈 권리가 있는 걸까.


회의감이 들었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자조했다.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결심하고 또 결심했었는데 지금 자신은 흔들리고 있었다. 무서워졌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레 너무 엄청난 일을 도맡게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리네뜨?”



에스미가 부르는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마리네뜨의 행동이 유별나다는 듯 에스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살 거 없어? 여기 니 취향의 예쁜 물건들이 많은데?”

“어, 그럼 난….”



헤헤 웃으며 근처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던 마리네뜨는 어떤 물건 앞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한참을 멍하게 그것만 바라보고 있던 마리네뜨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붉은 색깔에 까만 점들이 드문드문 그려져 있는 예쁜 시계였는데, 겉을 유리로 제작했는지 투명한 붉은색에 선명하게 박힌 까만 점들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말없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제 친구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에스미가 뭐라고 말을 걸려는 찰나 누가 선수를 쳤다.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손님. 그 시계가 마음에 드시나요?”

“예?”



어느 샌가 마리네뜨 옆으로 다가온 점원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레이디버그를 테마로 만든 시계인데 여성분들이 많이 사가시더라구요. 예쁘고 실용적인 상품이라 그런가.”

“레이디버그 테마요?”



깜짝 놀라는 마리네뜨에게 직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요즘 파리에서 인기 많은 히어로니까요. 저희 집만 아니라 다른 가게들에서도 상품이 많이 나오고 있죠. 아, 블랙캣 테마를 원하신다면 이쪽에 있어요. 요즘 특히나 히어로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죠. 이번 샹젤리제 거리에서 일어났던 사건도 그렇고, 다들 응원하는 분위기예요.”



의외였다. 마리네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 하지만 결국 뭐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잖아요. 다들 매번 도시만 부서진다고 싫어하거나…. 그러지는 않을까요?”

“? 전혀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마리네뜨는 말을 잃었다. 직원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부서진 거야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 사건 규모만 봐도 히어로들이 없었으면 피해가 엄청나게 커졌을 거예요.”



당시 사건을 멀리서나마 목격했는지 점원은 생각 외로 샹젤리제 거리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살면서 건물보다 더 높이 치솟는 물기둥은 생전 처음 봤다고 질려하던 점원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감사하고 있어요.”

“에?”

“위험한 일이잖아요. 목숨을 걸고 악당이랑 싸워주는 사람들에게 그것밖에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시민이 된 것 같다며 웃는 점원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일 텐데도.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악당이랑 몇 년을 싸우는데 현실이라고 별반 다를까요. 부디 지지 않고 열심히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죠. 믿고 있어요.”



믿고 있어요. 그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그저 눈을 깜빡거렸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점원은 당황했는지 허둥거렸다.



“어머, 제가 너무 주절주절 떠들었나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에?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요! 설명 감사해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앞에 있던 시계를 집어들었다. 예쁘게 반짝거리는 시계를 손에 들고 빤히 들여다보던 마리네뜨가 헤실 웃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꼭 그거 사야 돼?”

“응?”

“넌…. 아니, 아니다.”



신경쓰지 마. 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앞장서는 에스미를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살펴보았다.


물건들을 계산하고 있는데 직원이 싱긋 웃으며 종이 두 장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직원은 친절하게 손으로 문 앞을 가리켰다.



“이번에 저희 가게에서 오픈 기념으로 추첨 이벤트를 열거든요. 상품이 꽤 호화스러우니까 한 번 뽑아보세요~”

“해볼까?”

“응!”



재밌겠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에스미의 뒤를 따라 나가던 마리네뜨의 눈 앞이 순간 흐릿해졌다. 몸이 기우뚱거렸다.


어?


살짝 어지러워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다시 선명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걸으면 넘어질 것만 같은 기시감에 선뜻 앞으로 발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 서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물었다.



“뭐해, 안 오고?”

“아, 응!”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었다. 다행히도 어지럼증은 한 순간의 문제였는지 다시 걸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출구로 나갈수록 점점 더워지는 느낌에 마리네뜨는 손을 들어 부채질을 했다. 아, 더워. 왜 이렇게 덥지?


가게 앞에 있는 추첨 부스에는 이미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맨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상품 목록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스미가 중얼거렸다.



“1등 상품이 자동차라고?!”

“우와.”



짧게 감탄사를 흘리며 웃는 마리네뜨를 에스미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평소였다면 더 방방 뛰면서 눈을 반짝거렸을 텐데 지금의 마리네뜨는 너무나 차분했다. 아니, 정확히는 오늘 하루 전반적으로 기운이 없어 보였지.



“마리네뜨, 너부터 할래?”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추첨함으로 손을 뻗었다. 머리가 아팠다. 자꾸 흐릿해지는 시야에 몇 번 눈을 깜빡이면서 간신히 종이 한 장을 꺼내들자 갑자기 짤랑짤랑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러지? 정신이 없어 허둥대는 마리네뜨에게 추첨함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3등을 뽑으셨어요.”

“예…?”

“이건 당첨 선물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남자가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몽롱한 정신에도 무사히 그것을 받아들고 마리네뜨는 추첨함 근처를 벗어나 한산해진 길가에 섰다. 이상할 정도로 공기가 무거웠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으려고 했지만 글자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받은 종이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마리네뜨의 등 뒤로 다가온 에스미가 깜짝 놀라서 중얼거렸다.



“와, 이거 이번에 공연한다던 유명한 오페라 티켓이잖아!”

“그래…?”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 없는 마리네뜨와 달리 에스미는 잘 됐다는 듯이 마리네뜨의 등을 툭툭 쳤다.



“그럼! 마침 잘 됐다. 그 바보 녀석한테 같이 가보자고 하지 그래? 이거 이번 분기 기대작이라 표가 나오면 전부 매진이라 구하기도 쉽지 않아. 심지어 VIP석이라고!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가 없을 걸?”



그런 걸로 같이 간다고 할 성격은 아닌데. 하지만 마리네뜨는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에스미의 텐션이 높은 이유는 아마 기운이 없어 보이는 자신을 달래주기 위한 나름의 배려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게 여실히 느껴져 마리네뜨는 그저 웃고 말았다.



“고마….”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다리에 살짝 힘이 풀렸다. 마리네뜨, 왜 그래? 너 얼굴이…. 흐릿하게 번지는 에스미의 목소리에 어라? 하던 순간 마리네뜨의 몸이 휘청이며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차가운 돌바닥으로 쓰러지려던 순간 무언가가 제 몸을 받쳐 안았다. 누구지? 열에 들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앞을 보기 위해 애써 눈을 떴지만 보이는 것은 암흑이었다.


마리네뜨는 그대로 기절했다.






“파트너.”

“왜.”



셔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여름인데도 긴 팔에 긴 바지, 심지어 단추까지 꼭 채워 입고 있는 소년을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전혀 개의치 않아 보이는 당사자와는 달리 불평은 의외의 곳에서 솟아나왔다. 펠릭스의 셔츠 속에 들어 있던 플랙이 작게 불평을 터트렸다.



“이런 더운 날씨에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을 오는 이유는 뭔데?”

“어쩔 수 없잖아. 서점에 괜찮은 책이 들어왔다고 하니까.”

“흐음, 나중에 사러 와도 되지 않나~? 왜 꼭 지금? 사람 많은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잠시 멈칫하더니 펠릭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하루빨리 읽고 싶으니까. 더 이유가 필요해?”

“그럼 옷이라도 좀 시원하게 입든지~? 보기만 해도 덥다구.”

“난 이게 편해.”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도 펠릭스는 제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힐끔 돌아보았다. 상당히 오래 전에 쓰여진 희귀본이라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책이 들어왔다는 말에 재빨리 집을 나서 시내로 나왔다. 확실히 날이 덥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책을 빨리 수령하는 게 더 중요했다. 티는 안 내려고 하지만 상당히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펠릭스를 플랙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빨리 집에 가서 책을 살펴볼 생각밖에 없는 펠릭스에게 플랙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좋은 소식 하나 알려줄까?”

“…정말 ‘나한테’ 좋은 소식이긴 한 거야?”



이제 장난에도 익숙해졌는지 대놓고 의심부터 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너무하네~’ 한 마디와 함께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이 근처에서.”

“…뭐?”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재빨리 주위를 스샥 둘러보았지만 잠잠했다. 플랙은 낄낄 웃었다.



“농담이지롱!”

“야, 너….”

“애초에 상대가 변신을 해야 기운이고 뭐고 느낄 수 있다구~?”

“…하아.”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했는지 가만히 침묵하다가, 펠릭스는 다시금 제 파트너의 이름을 불렀다.



“야, 플랙.”

“으응~?”

“…아니다.”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펠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플랙이 지적한 대로 책은 반쯤 핑계였다. 조용한 장소에서 산책을 하기엔 오히려 생각만 많아질 것 같아서 일부러 시끄러운 곳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덕분에 짜증은 치솟지만 뭔가 생각할 여유가 없는 점은 마음에 든다. 지금 혼자 있었다간 쓸데없는 생각들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자꾸 떠오르는 걱정이 있었다.


레이디버그는 괜찮을까.


눈물로 범벅이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먼젓번 샹젤리제 거리에서 드디어 악당 중 한 녀석을 해치웠다. 단서로 생각할 법한 것도 나왔다. 하지만 그 모든 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너졌다. 꽤나 덤덤한 자신과는 다르게, 많이 충격받은 건지 넋이 나간 얼굴로 미스터 피죤이 있는 자리만을 쳐다보던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심장 한 구석이 아릿해졌다.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멍해 있는 레이디버그를 데리고 재빨리 도망치기는 했지만, 얼굴에 묻은 핏자국도 닦아내지 않고 초점 없는 눈동자를 깜빡거리는 레이디버그가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레이디. 레이디. 한 손으로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꼭 끌어안고 작게 속삭이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레이디버그가 뭐라 중얼거렸지만 너무 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표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살짝 웃으며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흐릿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과대망상이라면 좋을 텐데.


미스터 피죤이 죽었든 말든 그건 솔직히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왔어야만 했고 레이디버그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생각하는 것과 현실의 감각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일에 나름 익숙해진 자신과는 다를 테니까.


이렇게 덤덤한 자신의 모습을 레이디버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냉정한 놈이라고 싫어하게 될까. 이 와중에도 당신만이 걱정되는 나를 이기적인 녀석이라 경멸하게 될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변신을 풀고 플랙에게 물었다.


‘그 악당, 정말 죽은 거야?’

‘직접 보고도 몰라?’


되려 질문하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짧게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어지간한 상처로는 죽지 않지만 불사신은 아니라구.’


이 와중까지도 플랙은 전혀 진지하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펠릭스는 별 감정의 동요 없이 대꾸했다.


‘…우리도 같은 꼴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아마도?’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것을 물었었다. 그 때도 플랙은 히어로는 거의 무적이라고 했었다. 약점이 없지는 않다는 소리냐고 물었을 때 플랙은 그랬었다.


욕심도 많다고.


그렇다는 건 저쪽에도 약점이 없지는 않다는 소리겠지. 같은 미라큘러스의 소유자니까. 그건 이번 사건에서 악당의 죽음으로 제대로 증명되었다. 물건이 망가지면 목숨을 잃게 되니까. 호크모스한테 써먹기는 어렵겠지만.

펠릭스가 다시금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그 호루라기에서 나온 나비.’

‘엉?’

‘그것도 호크모스와 관련된 건가?’


플랙은 꺄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그건 호크모스가 부리는 사령같은 거야.’

‘사령?’

‘물건에 깃들어 그 물건을 소유한 사람에게 힘을 주지만, 그들은 절대 호크모스를 거스를 수 없거든~ 일단 악당이 된 사람의 몸은 호크모스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혹시 자칫 잘못하다가 물건이 부숴지면 죽게 된다구. 힘을 거두는 것도 호크모스의 맘대로~ 그러니 누가 거역해? 물론 물건에 깃들어 있던 나비는 죽지 않지만.’

‘그럼 그 나비는 어떻게 되는데?’

‘뭘 어떻게 되겠어? 빌려준 사람이 사라졌으니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할 거 아니야~ 그나저나 왜 그렇게 나비에 대해 물어봐?’


낄낄 웃으면서도 날카롭게 핵심을 찔러오는 플랙의 질문에 펠릭스는 쓰게 웃었다.


‘…똑같이 생긴 나비를 봤으니까.’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때 박물관에서 아저씨의 손에 들려 있던 사진에 찍혀 있던 그 표본의 모양을. 그건 새까만 나비였다. 며칠 전에 봤던 나비에 비해 살짝 부식되어 있긴 했지만 모양만 따진다면 틀림없는 그 나비가 분명했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펠릭스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어떻게 그 나비가 화석처럼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거지? 주인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그리고 악당들은 왜 그 표본을 훔쳐간 걸까. 자신의 약점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아니, 이건 너무 단순한가.’

‘흐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비가 꼭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건 아닐걸? 호크모스보다 나비가 깃든 물건을 가진 사람이 늦게 죽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렇겠지. 그 사람이 죽어야 나비가 돌아올 테니 말이야….’


말끝을 흐리며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가상의 체스판 위로 다시 정렬되는 판의 모습을 펠릭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맨 앞쪽에 나열되어 있던 다섯 개의 말 중 하나가 아웃되었다. 현재 파악되는 악당의 수는 넷. 그리고 아마 뒤에 있을 무수한 졸개들. 이걸 소수의 집단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다.


정말 이들이 조직이라고 한다면….


펠릭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음모론 취급하지만 자신은 꽤나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이름이다. 카더라로만 알려져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간 파리에서 일어났었던 정치적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아주 없을 법한 소리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세워낸 가설대로라면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 파리의 상황을 조작해왔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자신만 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저번에 만났던 덥수룩한 갈색 머리의 기자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조직의 이름을 생각하자니 괜시리 심경이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건데.


지금 꽤나 그럴듯한 가설이 하나 떠오르긴 했지만 아직 몇 가지 정보가 부족했다. 일단 좀 더 정보를 모으고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전에 그 동굴이 있던 장소를 다시 둘러보는 정도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겠지.


‘파트너~ 혹시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난 빨리 죽긴 싫다구. 능글맞게 웃으며 엄살을 부리는 플랙의 말을 펠릭스는 가볍게 무시했었다. 하지만 그도 이 일이 위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더 큰 일이 닥치기 전에.


회상에서 벗어난 펠릭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지금은 사실 그것보다 신경쓰이는 일이 있단 말이지.


마리네뜨의 얼굴을 떠올리자 펠릭스의 기분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상당히 큰 사건이 터져서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그 때 당시의 마리네뜨의 행동은 분명 레이디버그와 닮아 있었다. 물론 머리색과 눈색은 일치하지만 이 넓은 파리에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만도 수백은 될 테고, 그 중에서도 하필 자신과 같은 학교에다 같은 학년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는 우연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보다 레이디버그의 정체를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펠릭스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왜지? 좋아하는 상대라면 당연히 정체가 궁금해야 할 텐데. 어째서?



“도련님?”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퍼뜩 놀라 재빨리 제 가슴 쪽을 내려다보았다. 플랙은 이미 눈치껏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자신을 부른 상대가 누군지는 뻔했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옆을 돌아보았다.



“엘렌.”



두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들을 들고 있는 엘렌이 보였다. 언제나와 같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올리고 있긴 했지만, 오늘은 일이 없는지 엘렌의 옷차림은 평소에 입던 정장이 아니었다. 하얀 티셔츠 위에 카키색의 가디건을 걸친 채 긴 청바지를 입고 있는 엘렌의 모습은 편한 차림이라 그런지 특유의 딱딱한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알게 모르게 경계하는 펠릭스와 달리 엘렌은 거리낌없이 펠릭스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도련님은 어쩐 일로 여기에?”



사람 많은 거 싫어하시잖습니까. 무덤덤하게 묻는 엘렌에게 펠릭스는 가볍게 대답했다.



“필요한 책이 들어왔다고 연락을 받아서. 그러는 당신은?”



엘렌이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봉지들을 가만히 들어올리자 펠릭스는 대번에 납득했다.



“아직도 거기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나 보지?”

“네.”



묵묵히 대답하는 엘렌의 얼굴에 살짝 씁쓸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에 놀랐지만 펠릭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고아원 출신이라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거기서 자랐죠.”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에도 마냥 무심하게 대답하는 엘렌에게 펠릭스는 조금 더 물었다.



“숙부님이 당신을 지원해줬다고 들었어. 학비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생활비까지 전부 다.”

“제가 쓸만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버려졌을 겁니다.”

“그래서 숙부님을 따르는 건가? 은혜를 갚으려고?”

“네.”



단호하게 대답하다가 엘렌은 답지 않게 잠깐 머뭇거리더니 딱 잘라 말했다.



“자기만족입니다.”

“….”

“제가 하는 일들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딱딱한 어조로 대답하는 엘렌의 목소리에 펠릭스의 손끝이 일순 차가워졌다. 동요하는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펠릭스는 재빨리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냈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리고 있었다.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꺼낸 걸까. 자신이 아는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펠릭스로서의? 그도 아니면 블랙캣으로서의?


어디까지 가늠해야 할지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이상 물어보는 건 너무 과한가? 아니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건가? 이건 기회인가,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역시,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펠릭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뭐하는 거냐고 짜증스레 돌아보던 펠릭스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말없이 어딘가를 쳐다보는 펠릭스를 의아하게 보던 엘렌의 고개가 펠릭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마리네뜨를 발견한 엘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저 아가씬….”

“…아는 얼굴이야?”

“도련님을 쫓아다니던 분이시라는 것 정도는.”



젠장. 속으로 낮게 욕지기를 뱉으면서 펠릭스는 가만히 질문했다.



“숙부님도 알아?”

“아니요.”

“어째서?”

“신경쓰실 만한 안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담담히 대답하던 엘렌이 펠릭스에게 되물었다.



“신경이 쓰이시나요?”

“별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대답하던 펠릭스의 시야에 마리네뜨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찍혔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펠릭스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여유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표정으로 제 옆을 스쳐가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엘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마리네뜨를 펠릭스는 간발의 차이로 받아냈다. 소녀를 받아내자마자 펠릭스의 얼굴 위로 확 달아올라 있었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침몰했다. 어느 새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고 이것저것을 지시하는 펠릭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렌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몽롱했다.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나른한 기분이었다.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에 이대로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아. 일어나면….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마리네뜨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자, 조금씩 선명해지더니 이윽고 옅은 분홍색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여기가 어딘지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방이었다.


살짝 시선을 내리니 따뜻한 이불이 자신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이마에 얹어져 있떤 시원한 무언가를 손으로 끌어내렸다. 수건이었다. 두통이 좀 가시니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억이 그러니까….

헉, 에스미!



“으아, 난 죽었다!”

“무슨 일이야, 공주님? 잠은 잘 잤어?”

“꺄악!”



갑작스레 들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워워, 진정하라구. 침대 바로 앞 의자에 앉아서 제 쪽을 응시하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블랙캣…?”



어떻게 여기에. 콜록거리며 자신을 마주하는 마리네뜨에게 가까이 다가간 블랙캣이 한 손을 들어 마리네뜨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음, 너 열이 심하던데, 지금은 좀 괜찮아졌네.”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무단침입으로 신고할 거야….”

“그래그래, 일단 몸이나 나은 후에 신고를 하든 때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하하 웃으면서 걱정스럽게 제 이마를 이리저리 짚어보는 블랙캣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뭔가가 보였다. 물이 가득 담긴 대야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수건.


간호해준 건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에 마리네뜨는 살며시 긴장을 풀고 블랙캣의 손에 이마를 톡 기댔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열에 들떠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응, 그래.



“좋네요. 블랙캣 손.”

“뭐?”

“차가워서…. 기분 좋아요.”



헤실헤실 웃으며 중얼거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급히 정신을 차렸다.


뭐지, 이 간질간질한 기분은?



“근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감기에 걸린 거야?”



이 날씨에. 민망한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애써 화제를 돌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별 생각 없이 멍하니 대답했다.



“아, 최근에 물벼락을 맞을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물벼락?”



의뭉스럽다는 듯이 되묻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으악,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아, 네네. 제, 제가 좀 재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비가 갠 후에는 꼭 우산을 들고 다니기도 하고….”



제가 대답하고도 참으로 그럴듯한 이유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흐뭇해졌다가, 또 다시 씁쓸해졌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직감이 생겼다지만 여전히 불안한 탓에 비가 개인 날은 자연스럽게 우산을 들고 다니게 된다.


여전히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블랙캣의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마리네뜨는 머리를 쥐어짜냈다. 아, 맞다!



“근데 정말 우리 집에는 어떻게 왔어요? 혹시 집주소 관리하는 곳 뭐 그런 데서 일해요?”

“설마. 그리고 개인정보 멋대로 빼내는 건 불법이거든?”

“그럼요?”

“…지나가는 길에 니가 쓰러지는 걸 봤어. 따라와 봤다가,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말이야. 오늘 부모님 집에 안 계시다며?”



살짝 뜨끔했지만 블랙캣은 애써 적당히 둘러댔다. 솔직히 거짓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마리네뜨는 다른 부분에서 깜짝 놀랐는지 이불을 끌어당겨 제 목 아래까지 꽁꽁 감쌌다.



“헉.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스토커예요?”

“웃기시네. 니 친구가 말해주고 갔어. 애초에 네 옷도 그 녀석이 갈아입힌 거잖아.”

“어 그러고 보니….”



슬쩍 내려다보니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뻘쭘해졌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는 마리네뜨를 블랙캣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애초에 난 한참 뒤에 왔거든? 말해두겠는데 정말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길래 확인 차 온 거야. 잠깐 봤더니 이제 좀 괜찮은가 싶어서 가려고 했는데 니가 손을 뻗어서 날 붙잡았다고.”

“내가 그랬다구요?”

“그래. 그러니 그냥 가기도 뭐해서 열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말들 뿐이었지만 블랙캣의 눈빛이 더없이 진지해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면 신기했다. 변신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신경써주고 있는 걸 보면 그 때 공원에서 꽤 인상이 좋았던 건가? 하지만 그 때 별반 좋은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은데. 속으로 고민하다가 다시금 몰려오는 두통에 마리네뜨는 그냥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나저나,



“근데 진짜 대체 어떻게 들어왔어요? 문은 잠겨 있었을 텐데.”

“창문으로 들어왔지.”



자랑스레 대답하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역시 스토커로 신고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의심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블랙캣이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더니, 곧 체념했는지 한숨을 내쉬면서 진지하게 입을 열였다.



“혼자 누워 있는 건 생각보다 훨씬 외로우니까.”

“아….”

“그, 그래서 그냥 가기가 뭐했던 것뿐이야! 절대 니가 특별하다거나 뭐 그래서가 아니라고!”



되려 찔리는지 버럭 소리지르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 모습이 얄미웠는지 하여간 넌 애가 뭐 그렇게 몸이 약하냐고, 살다살다 여름에 열이 올라서 길거리에서 쓰러진 애는 처음 봤다고 냅다 잔소리를 퍼붓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질문을 툭 던졌다.



“블랙캣. 그럼, 혹시 나 쓰러질 때 누가 날 받아줬는지 알아요?”

“그, 글쎄? 잘 모르겠는데?”



뜨끔해서는 단번에 부정하는 블랙캣을 마주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내가 도끼병인 걸까요? 쓰러지기 직전에 절대 그 자리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을 본 것 같았거든요.”

“….”

“이번에까지 도움받으면 두 번째인데…. 에이, 아무래도 아니겠죠.”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야?”

“맞아요.”



생각만으로도 좋은지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가슴 한 켠이 답답해졌다. 동시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이 녀석이 레이디버그일까? 이렇게 여려만 보이는데.



“대체 어디가 좋은데? 그 녀석.”

“그냥 다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대답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사랑같은 감정에 휘둘리는 거 지겹지 않아?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 거 같고.”



마리네뜨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쏟는 시간이 아까울 리가 없잖아요.”



블랙캣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동의하는 건지, 아니면 이런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이상한 건 나려나. 마리네뜨는 살풋 웃었다. 지금 블랙캣의 얼굴을 보면 분명 굉장히 꺼려지고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렇게도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때의 일.



“블랙캣, 내 이야기도 잠깐 들어줄래요?”

“뭔데.”

“고민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아서요.”

“어떤 고민이야?”

“…말하기 좀 그런데. 아무튼 좀 힘든 일을 겪었거든요.”



헤헤 웃던 마리네뜨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조금 힘들었어서. 그렇다고 막 그만두고 싶은 건 아닌데 내가 계속 이 일을 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고….”



추욱 고개를 숙이는 마리네뜨의 손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는 죄수마냥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던 마리네뜨의 머리 위로 무덤덤한 말이 툭 던져졌다.



“네 마음에 달린 일이겠지.”



그 한 마디에 마리네뜨의 얼굴에 서서히 놀라움이 번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블랙캣의 표정이 눈에 보였다. 웃고 있지만 평소처럼 장난스럽지 않았다. 의문이라던가 망설임이라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곧고 선명한 진심을 눈동자에 내비치고 있었다.



“너의 정의에 따라 가면 돼. 만약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가도 상관없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도망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너한테 선택을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누구도.”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것처럼 가벼운 대답이었지만 초록빛 눈동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런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블랙캣도, 그럴 때가 있어요?”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마리네뜨의 의문에 블랙캣은 간단히 답했다.



“있지.”



쳇바퀴처럼 굴러오는 삶의 무게가 가끔 너무 버거워서, 가끔 모든 것을 다 던지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한 때일 뿐. 누구보다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충동은 언제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바스라졌었다.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이 모습은 그런 내게 주어진 선물인 걸까.


속으로 피식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다시금 질문했다. 



“블랙캣은 어떻게 했어요?”

“나는 계속 버텼었지.”

“왜요?”

“이게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했거든. 그 길의 끝 정도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



선선히 대답하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조심스레 물었다.



“…힘들었나요?”

“조금은. 그래도 괜찮아. 그랬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잠깐 멈칫하더니, 픽 웃으며 손을 들어 마리네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무리할 필요는 없어.”



나와 너는 경우가 다르니까.



“그냥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듯이, 네게도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겠지. 그럼 그걸 하면 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마리네뜨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위로하듯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푸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그게 싫지 않다고 여기는 자신을, 블랙캣은 그제서야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생각보다 쟤를 별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네?’


플랙의 말을 떠올리며 블랙캣은 깔끔히 인정했다.


그래, 나는 네가 싫지 않아. 언젠가부터 싫지 않았어. 열심히 노력하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후회하지 않을 거라 말하며 나아가기를 망설이지 않는 네 모습을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나도 참 멍청하군.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설핏 웃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살며시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블랙캣.”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한 마디였지만, 마리네뜨가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살며시 웃고 있지만 어딘지 처연하게 느껴지는 마리네뜨의 미소를 보며 블랙캣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건….



“바보같은 줄만 알았는데 믿음직스러운 구석도 있네요.”



어느 새 기운을 차렸는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어이, 난 원래 똑똑…. ……?!”



블랙캣은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어라, 이 상황은…?


‘꽤 믿음직스럽네. 맨날 바보짓만 하는 줄만 알았는데….’

‘어이, 레이디. 나는 원래 똑똑하다고!’

‘네, 네. 알았으니 어서 저거나 처리하자구.’


막아두었던 둑이 터지듯,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기억들에 블랙캣은 말을 잃었다. 살짝 경악에 찬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가만히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블랙캣?”



설마?



“…나, 난 원래 똑똑하다고!”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는 너스레를 떠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별 일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금 웃으며 대답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가봐야 하지 않아요?”

“엉?”

“난 괜찮으니까.”



웃고 있는 마리네뜨와 달리 블랙캣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몸조리 잘 해.”

“네.”



그 말을 듣자마자 블랙캣은 창문께로 다가가더니 휙 날아서 사라졌다. 블랙캣이 모습을 감춘 걸 확인하자마자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티키, 거기 있어?”

“응.”



바닥에 던져져 있던 가방에서 뾰로롱 날아오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가 반가움을 표시했다. 환하게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로 달려든 티키가 뺨을 부볐다.



“쓰러졌을 때 깜짝 놀랐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해.”



사과하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나저나 배고프지 않아? 내려가서 뭐라도 먹을래?”

“그럴까? 헉, 그나저나 에스미는 어떡하지?”

“괜찮아. 그 애라면 엄청 걱정하는 눈치였는걸. 나중에 전화해주면 될 거야.”

“그렇겠지…?”



반신반의하며 마리네뜨는 조심스레 계단을 통해 부엌으로 내려갔다. 오늘 부모님은 두 분이서 나들이를 가셨으니 한동안은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식빵 몇 개에 잼을 발라 하나를 입에 물고, 나머지를 접시에 담았다. 총총거리며 소파로 다가간 마리네뜨가 근처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들고 TV를 켰다.


맨 처음 보이는 건 어떤 남자의 얼굴이었다.



[현재, 흉악한 범죄자 랄프 커티스는 인질 하나를 붙잡고 5구를 지나 14구 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TV를 켜자마자 쏟아지는 속보에 마리네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뉴스 앵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6월 30일에 발생되었던 감옥 붕괴 사건의 탈주범들은 대개 검거되었으나, 커티스는 경찰의 조사망을 피해 근처 모텔에 숙박하던 중 여관 주인의 신고로 인해 위치가 파악된 것에 앙심을 품고, 주인집의 아이를 붙잡아 인질극을 계획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잠깐만, 6월 30일이라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 도난 사건이 있었던 날이었다. 그 때 블랙캣이 분명 감옥을 부수고 탈출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점점 심각해지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티키가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마리네뜨…?”



티키를 마주보며 마리네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 14구 쪽에서는,



“가까이 오지 마!”



칼을 아이의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댄 채로 버럭 소리지르는 랄프에 경찰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건 그들의 앞에 서 있던 블랙캣도 마찬가지로, 비열한 악당을 노려보며 블랙캣은 생각에 잠겼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벌인 일의 파편이니 자신이 수습하는 게 맞다 생각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참으로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상대하는 악당 놈들보다는 편하기는 했지만 인질을 잡고 있다는 것이 조금 성가셨다.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빨리 차를 가져오라고 소리지르는 랄프를 보니 블랙캣은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여간 악당들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군. 이대로 냅두면 아이를 구하는 게 힘들어진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랬다간 말이 많아질 테고. 여차하면 조금 다치는 것을 감수할까도 고민하던 블랙캣은 제 옆으로 뛰어내리는 레이디버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레이디! 여긴 어떻게…?”

“어떻게라니. 악당이 있는 곳에 영웅이 있어야지~?”



블랙캣을 돌아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게 마냥 안타까워 슬프게 눈가를 일그리는 블랙캣을 모른 척 하면서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단 저 자를 붙잡는 것부터 생각하자.”

“방법이 있어?”

“음…. 블랙캣, 잠시 악당의 주의를 끌어줄 수 있겠어?”

“분부대로.”



눈을 찡긋거리며 앞으로 나서는 블랙캣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살짝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이후로는 처음으로 변신하는 거네.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것에 레이디버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편해진 걸까?



“거기, 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야?”



크게 소리지르는 블랙캣의 뒤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도 이런데 부모님은 오죽할까. 지금 구하지 않으면 분명 아이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아이를 구하려고 하면 저 남자가 아이의 목을 긋겠지. 틈을 낸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몇 초 정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무사히 구할 수 있지?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 방법을 떠올린 자신에게 레이디버그는 순간 혐오를 느꼈지만 애써 견뎌냈다. 그럼에도 한 번 떠올리니 자꾸만 잡생각이 뇌리를 둥둥 떠다녔다. 가령, 저런 남자 정도는 돌멩이 하나를 던져서도 죽일 수 있다는 거라던가.


안 돼. 이러면 저 남자랑 다를 게 없잖아.


애써 상념을 떨쳐버리고 레이디버그는 범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미 악당을 실컷 도발하고 있는 블랙캣을 흘낏 쳐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아주 잠깐이라도 아이의 목에서 칼날이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면.’



“이 새끼가!”



블랙캣의 도발이 먹혔는지 남자는 식칼을 들고 있던 손을 쭉 앞으로 뻗으며 뭐라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랄프가 다시 팔을 내리려던 순간 레이디버그는 있는 힘껏 그를 향해 뛰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앞으로 파고드는 레이디버그에 랄프는 기겁하며 들고 있던 식칼을 레이디버그에게로 내리쳤다. 슬로우 모션처럼 내려오는 칼날이 푸른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레이디버그의 손이 식칼의 날을 꽉 붙잡았다.



“레이디버그!!”



경악해서 소리지르는 블랙캣과 더불어 경찰들도 깜짝 놀랐는지 몇몇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식칼을 꽉 붙잡은 채로 레이디버그는 다른 손을 내밀어 남자의 복부를 주먹으로 세게 쳤다. 컥,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는 랄프에게서 아이를 뺏어들며 레이디버그는 천천히 식칼을 놓았다. 챙- 소리를 내며 식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쉬이, 이제 괜찮아.” 



눈물범벅인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며 레이디버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기절해버리는 아이를 안고서 살짝 한숨짓는 레이디버그 앞으로 블랙캣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레이디, 손은?! 손은 괜찮아?”

“아, 그거?”



레이디버그는 씨익 웃으며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블랙캣에게 식칼을 잡았던 손을 내밀었다. 손에 끼워져 있는 튼튼한 장갑을 보고 멍해진 블랙캣의 얼굴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강철 장갑이야. 손은 멀쩡하니 걱정하지 마.”

“….”

“그나저나 어서 도망가야겠다. 사람들이 오고 있어.”



아이를 경찰에게 넘겨주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잡아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따라오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작은 불안을 느꼈다. 역시 내 태도가 좀 이상했나? 최대한 태연하게 굴려고 애쓰기는 했는데 역시 어색해 보였는지도. 감정을 숨기는 데는 서투르니까.



“저, 블랙캣….”



주위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확인하고 레이디버그는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며 레이디버그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블랙캣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발버둥을 치려고 했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끌어안는 블랙캣의 손길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멈칫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놀랐는지 블랙캣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걱정 끼치지 마, 가뜩이나 넌…!!”



몸도 안 좋은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블랙캣은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블랙캣이 정말로 걱정했다는 것을 아는지 레이디버그는 살짝 웃으며 블랙캣의 등을 토닥거리다가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리고는 웃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본인은 밝게 웃는다고 웃는 것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지는 미소. 처연하게 웃는 얼굴은 방금 전에 만났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블랙캣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닮았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지금 레이디버그의 표정은 아까 본 마리네뜨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블랙캣이 다시금 물었다.



“아까 왜 그런 거야?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아이를 구할 방법이라면 있었잖아.”

“…그 사람을 죽이는 거?”

“동정할 가치도 없는 악당이야.”

“그래. 하지만 그걸 판단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잖아.”



입을 꾹 다무는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쓸쓸하게 읊조렸다.



“알아,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시 올 거라는 거. 방금처럼 그냥 붙잡아 경찰에 넘기는 방식으로는 끝낼 수 없는 상대들도 있으니까.”



푸른 눈동자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며칠 전에 상대했던 미스터 피죤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침묵하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블랙캣. 내가 말하지 않았지?”

“….”

“나, 미스터 피죤의 원래 모습이 누군지 알아.”

“뭐?!”

“정확히는 알자마자 금방 그렇게 댔지만.”



덤덤하게 털어놓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설핏 고뇌가 어렸다.



“죽음이라는 거,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진짜로 보니까 충격적이더라. 내가 아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니….”



하하,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레이디버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해야 한다면 해야겠지. 알고 있어. 하지만 가급적 그러고 싶지 않아. 살릴 수 있다면 살리고 싶어. 살아서 죄값을 치르게 하고 싶어.”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절대로.



“우린 또 다른 악당들을 죽여야 하겠지. 어쩔 수 없게도.”



왜냐하면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니까.


레이디버그가 후련하게 미소지었다. 마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각오는 했어.”

“…무슨 각오?”



차분하게 되묻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라는 말로 도피하지 않을 각오.”



죽음의 무게는 평등하다. 그 누구도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내가 영웅이건 그들이 악당이건 그런 건 중요치 않아. 그저 서로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며 그 결과가 죽음일 뿐이라는 것 말고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자신이 죽게 되든, 그들이 죽게 되든. 상대가 어떤 흉악무도한 악당일지라도 그걸 심판한다는 마음을 가진 채로 그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그랬다간, 분명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상대들과 싸우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고 싶어. 설령 그 길을 걷기 위해 부딪히고 아파해야 하더라도,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거야.”



옆으로 돌아선 레이디버그가 양손을 등 뒤로 모아 깍지를 꼈다.



“…이게 나의 대답이야.”



미스터 피존 사건에 대한.


레이디버그는 굳이 그 다음 대답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짐작했기에 블랙캣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네가 싫다면 너를 붙잡을 수는 없다는 거 알아. 이런 나를 약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때에 이렇게 망설이는 내가 바보같아 보일지도 몰라.”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제 시선을 피하는 레이디버그의 옆얼굴에서 블랙캣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조금 망설이던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들어 블랙캣을 돌아보았다.



“나를, 믿어줄래?”



초록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제까지 중 제일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블랙캣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그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도 레이디버그는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왠지 그라면 자신을 믿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절의 말을 듣는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슬플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 레이디버그는 정말로 놀랐다. 언제부터 내가 너를 이렇게 신뢰하게 된 걸까.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시선에 블랙캣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가, 곧 피식 웃었다.



“…응, 믿어.”



선선히 대답하는 블랙캣의 어조는 장난스러웠지만, 눈빛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믿지 않을 리가 없잖아.”



확신을 주듯이 재차 말하며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똑바로 마주하며 제 진심을 입에 담았다.



“당신은 정말로 강한 여자야.”



그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고마워.”



그리고 그 말에서조차 블랙캣은 마리네뜨의 모습을 읽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좋아!”



룰루루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마리네뜨는 길을 걷고 있었다. 감기도 다 나았고 오늘 날씨도 지금 기분도 최고로 좋은 상태였다.


오늘도 그 공원에 있을까?


마리네뜨의 손에는 감기에 걸린 날 뽑아왔던 오페라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물론 쓰러졌던 것에 대해서는 에스미의 어마무시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긴 하지만 그래도 공짜 티켓이 생겼으니 다시 펠릭스에게 말을 걸 구실이 생겼다. 거절당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겠지.


저번에 갔던 공원으로 가자 예상대로 펠릭스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마리네뜨는 살짝 볼을 붉혔다. 아아, 오늘도 멋지구나.


무시할 거라는 건 알지만 마리네뜨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펠릭스, 안녕!”

“…안녕.”



책을 덮으며 펠릭스가 인사를 건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 긴장해서일까, 펠릭스가 순순히 인사를 받아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마리네뜨는 가만히 펠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잘 생각나지 않았다. 지긋이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나, 나랑 이번에 열릴 오페라 같이 가지 않을래!”



엉겁결에 말한 뒤에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헉, 아니 이게 아닌데! 난 좀 더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했다고!


망했다. 난 왜 이 모양이야아아…! 속으로 절규하고 있던 마리네뜨는 차분하게 돌아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오페라인데?”

“시, 십이야라고….”

“언제, 어디서?”

“이번 주 토요일 오페라하우스 저녁 7시쯤에….”



횡설수설 열심히 설명하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가 딱 잘라 말했다.



“갈게.”

“뭐?!”

“싫으면 말고.”

“아니아니아니! 싫을 리가 없잖아!”

“그럼 그 날 봐.”



펠릭스는 그 말만 남기고 휙 돌아섰다.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마리네뜨를 뒤에 남겨두고 떠나가는 펠릭스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명확하지 못한 건 질색이다. 의심이 생겼다면 뭐라도 해서 어떤 방향으로든 해소하는 것이 옳은 법이겠지. 결론이 어떻든 간에.


확인해 봐야겠어.

돌아서는 펠릭스의 눈빛이 비장하게 빛났다.




===


드디어 두자릿수 회로 들어섰습니다! 웹연성은 후기를 쓸 수 있어 편리하네요.

10화는 후루룩 지나갔죠.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예ㅇㅁㅇ)~


몇 가지 사담을 해보도록 하죠.

제가 암시를 하고 있지만 에스미는 마리네뜨의 정체를 얼핏 눈치채고 있습니다. 물론 에스미의 성격이라면 마리네뜨가 말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절대 직접적으로 묻지 않을 거고 마리네뜨가 입을 열 일은 아마 없겠지만요.


피죤 사건으로 애들이 충격을 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특히 일반인(?)인 마리네뜨의 입장에서는 충격이 컸을 테고요 얘 여고생입니다 여고생. 네, 이런 부분의 묘사를 굳이 순화할 생각은 없었어서 좀 자세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9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계속 뭔가가 터질 거 같아요 이야 기대되지 않아요ㅇㅁㅇ)?(다들: 님만 기대하는 거겠지


마리네뜨가 짐작한 대로 감옥 탈출 건은 블랙캣이 감옥 부수고 나왔던 그 사건입니다. 고대의 재앙으로 감옥을 부수고 나왔고, 그 소란 속에서 몇 명의 죄수들이 탈출을 했는데 경찰 쪽에서 거의 다 잡았지만 마지막 한 놈이 저놈이죠 ㅇㅇ 솔직히 그 사건 시작부터가 경찰 잘못이라 뭐 그쪽에서 영웅들한테 할 말은 없겠지만(...) 


엘렌과 펠릭스의 관계는 굉장히 즐겁게 짰답니다. 엘렌은 나탈리와 같은 포지션이지만 성격은 많이 다릅니다. 어찌 보면 펠릭스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포커페이스 능력은 펠릭스보다도 뛰어나긴 하지만요. 그리고 플랙이 펠릭스에게 하는 말은 제 마음의 소리입니다(...) 한여름에도 그렇게 입고 다닐 거 알아 펠릭스...하...



마리네뜨를 방까지 데려와준 건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펠릭스입니다.


과정이 정확하게,

쓰러지는 마리네뜨를 간발의 차로 받아낸 펠릭스가 에스미와 같이 택시를 불러서 마리네뜨를 데리고 집으로 가요. 그 후에 펠릭스는 에스미한테 맡겨두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도 있고 에스미도 급한 전화를 받고 집에 돌아가야 했는지라, 괜히 찜찜한 탓에 블랙캣으로 변신한 뒤에 창문으로 들어온 거랍니다. 이건 마리네뜨에 대한 관심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있지만, 본인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예요. 펠릭스의 부모님은 8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플 때 혼자 있는 게 누구보다 외로운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본인 모습으로 남아 있으면 분명히 마리네뜨에게서 달갑지 않은 오해(...)를 살 것이 분명하기에 블랙캣으로!


펠릭스의 삶이 좀 많이 골치 아픕니다(...) 마리네뜨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펠릭스의 삶도 나름 험난하기 짝이 없답니다. 아 이건 스포니 일단 패스. 펠릭스의 삶에 대한 언급이 맨 처음 등장하는 건 1권 외전이지만 그건 웹상에 올릴 생각이 없어서요 ㅇㅇ;


다음 에피소드는 모두가 예상하시겠지만 데이트입니다^ㅁ^ 하하 평온한 데이트가 되기를 바라네요 진심으로(...)


뭔가 더 많이 적고 싶지만 너무 시끄러울 것 같아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번 회에 담은 이야기가 많아서인지 자꾸 말이 많아지네요;


빨리 11편을 올릴까 했는데 그럼 기다리는 재미가 없을까봐 나중에... 재판 수요조사 기간이 13일이었지만 일주일 늘릴 계획인데 그 전까지는 12편 모두 확실하게 올려둘 것을 약속드립니다 ㄷㅅㄷ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상은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답니다ㅇ.<

Posted by I.R.E
,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9.

운수 좋은 날







꿈을 꾸고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말이지~ 내가 어제 밤에….”

“그 드라마 남주인공이 완전….”



여느 때와 같은 아침 등교 시간이었다. 하하호호 떠들고 있는 학생들 사이로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저번에 그건, 뭐였지?


사라졌다고 생각한 동굴이 다시 나타나고 그 동굴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 그건 아무리 봐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때 실수로 드론을 부수지만 않았더라도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일에 연연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없다.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는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자신들이 막을 수 없는 범주일지도 모른다. 치밀하게 계획된 판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우스웠다. 단순히 악당을 해치우면 평화가 찾아올 거라 생각했던 건가? 그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여기는 현실이다. 생각해보면 악당들은 자신들을 적당히 상대해주기는 했지만 결코 전력으로 덤빈 적은 없었다. 여차할 때는 후퇴했다가 다시 나타나고, 늘 그랬었다. 마치 놀아주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을 때마다 다른 곳에서 미심쩍은 사건들이 하나씩 터졌었지. 아마 자신이 파악한 것보다 더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히어로 놀이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답지 않게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영웅 따위가 있을 리가 없는데. 그게 자신일리는 더더욱.


뒤에 누군가가 있다. 아주 영리하고 머리 좋은 누군가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파리의 상징 중 하나라고 불리는 루브르까지도 거리낌없이 터트릴 수 있는 상대였다. 대체 누구지? 뭐라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단서가 없었다. 배후가 누군지도 모르고,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에 대한 목적도 파악하지 못했다.


꼭 블라인드 체스를 두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서로의 정체를 감춘 채 그저 손만 내밀어 체스를 두게 되는 두 사람.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표정조차도 보지 못하는 상대의 수를 읽고 저쪽의 킹을 잡아야 한다.


현재까지 나타난 악당은 총 다섯. 하지만 아마 정말로 뒤에 어떤 조직이 있다면 폰에 해당되는 조직원들은 수십이 넘을지도 모른다. 상황을 봐서 아마 그들이 전면에 나설 일은 없을 것 같고, 아마 계속 악당들을 이용해 이쪽을 견제하겠지.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리 자주 나타나지는 않는다. 사실 한꺼번에 나타나서 우리를 없애는 게 여러 모로 더 편할 것 같은데, 그동안의 패턴을 보면 희한할 정도로 나타나는 빈도수를 조절하고 있어. 우연일까? 아니면….


신중해야 해.


한 발자국만 나가도 잡아먹힐지 몰라. 어떤 함정을 파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나타날 때마다 미라큘러스를 내놓으라고, 마치 미라큘러스가 본인들의 최대 목적인 것처럼 말을 한다. 정말로? 그렇다면 왜 우리를 없애려 들지 않는 거지. 다섯 명이서 동시에 덤비면 우리를 상대하기가 더 수월할 텐데.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상대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다. 가상의 체스판 앞에 앉은 채로 펠릭스는 살짝 저 건너 어둠 속을 훑어보았다. 마치 베일같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상대의 표정은 과연 어떨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짐작이 전혀 가지 않는다구? 정말로?


머릿속에서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펠릭스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생각했다. 아직은 아니야, 확신할 수 없어. 직접 내 눈으로 본 게 아니기도 하고. 속단은 금물이니까.


웃기지 마. 넌 이미 근접한 답을 찾아냈을 텐데?


비웃음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펠릭스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인정하기 싫은 것뿐이잖아.


저번 사건 때 레이디버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레이디버그는 이 일의 배후에 있는 존재가 호크모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미라큘러스를 가진 자의 소행이라고 했다.


호크모스(Hawkmoth)

제가 아는 뜻이 맞다면 그 이름의 뜻은 분명 박각시나방.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그들의 상징대로 이름이 지어진 것을 보아 분명 이 히어로의 상징도 그 뜻대로겠지. 나방, 나방이라. 나방과 비슷한 종류의 무언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것.


그러고 보면 원래부터 징후들이 몇 개 있긴 했었다. 예를 들면 박물관의 뒤편에 있던 숲에 나타났던 사람들. 그 때 동굴에서 무언가를 옮기고 있던 이들은 모두 검은색의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드론이 부서지기 직전 얼핏 본 그 문양은 옅은 자주빛의….


‘나비 같았지.’


멀리서 본지라 모양을 아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문양은 나비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펠릭스에게 나비라고 하면 가장 맨 처음 떠오르는 인물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은 건지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연관성이 짙은 사물이 있다고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단은 악당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무엇을 목적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저번 그림 도난 사건 때처럼 새로운 악당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플랙 녀석을 다그치니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아낼 수는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묻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았다는 기찬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게으르고 느릿한 성격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럼 앞으로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하겠다고 말하니 플랙 녀석은 아주 우거지상을 지었다.


다른 사람을 악당으로 만드는 능력이라. 그런 미라큘러스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데 대체 왜 우리의 미라큘러스를 노리는 거지? 그렇게 물었지만 플랙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않고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아직은 모르는 게 낫다고 대답하는 플랙에 진심으로 짜증날 뻔했지만 결국 추궁을 포기했다. 딱히 꼭 지금 알아야만 하는 사실도 아니었고 미라큘러스를 넘겨줄 일도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레이디버그에게는 뭐라고 해야 하지.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니까 제대로 확신할 만한 증거를 찾고 나서 말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놈들은 강하다. 우리가 낌새를 눈치챘다 싶으면 정말로 본격적으로 공격해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레이디는 그렇게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타입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손에 낀 반지가 너무도 갑갑했다. 벗어버리고 싶은데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뺄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는 건 알지만 그 방법을 지금 이 타이밍에 쓰고 싶지는 않았다. 두려웠다.


‘믿고 있는 게 당연하잖아.’


네가 다시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게 될까봐.

계속 이 상태로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영원히 감출 수 있는 진실같은 건 없으니까. 하지만….



“펠릭스?”



헉. 화들짝 놀라며 펠릭스는 마냥 눈을 깜빡거렸다.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누군지 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잠잠하던 푸른색 눈동자에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 걱정스러운 시선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낯빛이 어두워보이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헉, 세상에. 땀을 왜 이렇게 흘리고 있어? 괜찮아?”

“….”

“아, 잠깐만!”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낸 마리네뜨가 펠릭스의 얼굴에 손수건을 가져가려다 흠칫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제 얼굴의 땀을 닦아내는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펠릭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맙지만 이제 됐어.”

“어…?”

“먼저 갈게.”



평소와 달리 살짝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길을 마저 걸어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리네뜨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어디 아픈가?”






청명한 파리의 하늘 위.


에펠탑에서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무언가가 날고 있었다. 무수히 몰린 비둘기 떼들과 사람 하나는 충분히 올라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비눗방울 하나. 비둘기 위에 앉은뱅이 자세로 앉아 있던 미스터 피죤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커다란 비눗방울 위에 올라탄 채로 뒹굴거리며 묻는 버블맨에게 미스터 피죤이 다시금 말했다.



“히어로 녀석들을 죽여서라도 미라큘러스를 뺏어오라고 했던 거 말이야.”

“흐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버블맨의 태도에 미스터 피죤은 정말로 궁금한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요즘 그 녀석들이 우리 일을 많이 훼방놓았다는 건 인정해. 마임맨의 존재를 들켰고, 블랙캣을 도둑으로 몰아서 최소 신뢰를 잃게 하자는 작전도 실패로 돌아갔지. 시민들은 이제 전보다 더 그 녀석들을 믿고 신뢰하니까. 하지만 이 시점에서 굳이 그들을 죽여야만 할 필요가 있냐는 거야.”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아진 미스터 피죤을 가만히 바라보던 버블맨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봤자 아무 소용없잖아. 언제부터 우리한테 선택권이 있었다고. 우린 그냥 명령대로 하면 되는 거야. 깊게 생각하지 마, 아저씨.”

“으음….”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하는 미스터 피죤에게 버블맨은 설마, 하며 되물었다.



“녀석들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



찝찝하단 말이지. 미스터 피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운 날씨였다.


블라인드를 걷어내자 컴컴하던 사무실 안에 햇빛이 들이쳤다. 제레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걷어낸 블라인드 사이로 슬쩍 드러나는 창문 밖의 경치를 말없이 내다보았다.


하지만, 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흥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늘 날씨가 맑아서 좋다던가,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하얗게 빛나는 햇살들이 살을 따갑게 태우고 있음에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청명하게 빛나는 여름 하늘의 푸른색조차도 그의 마음에는 아무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색은 무채색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아, 눈에 띄기는 하겠군. 이것저것.



“부르셨습니까.”



살짝 고개를 숙이는 비서에게 제레미는 등을 보인 채 중얼거렸다.



“상당히 시끄럽군.”



귀가 아플 정도로. 무심히 말하고 있지만 그 말 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지금 제레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엘렌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시방석같은 자리라도 그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는 자리를 뜰 수 없다. 그의 상사는 눈치가 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으니까.


한참 뒤, 생각을 마쳤는지 다시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보기를 보이는 것도 중요하겠지.”



제레미의 입가에 피식 조소가 걸렸다.






“방학이다!”



아아아아아…. 말꼬리를 흐리며 책상에 푹 엎어졌던 마리네뜨가 마구 팔다리를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순간에 축 늘어졌다.



“생각해보니 학교를 못 가면 펠릭스를 못 만나잖아….”



나는 바보야. 책상 위로 눈물을 흩뿌리며 그저 방학이 다가온다고 좋아했던 자신의 멍청함을 마구 탓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에이, 괜찮아. 가끔 공원 나와서 산책하기도 하고 그럴 텐데 뭐. 자주 가는 공원 쪽을 가보면 있을 거야. 학교에서만큼 만나기 쉽지는 않겠지만….”



벌떡, 고개를 들어 티키를 향하던 마리네뜨가 이내 울먹거렸다.



“티키이~!!”



역시 내겐 너뿐이야~!! 두 손으로 티키를 붙잡은 마리네뜨가 티키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작거렸다. 꺄르르 웃으며 그런 마리네뜨의 어리광을 받아주고 있던 티키가 다시금 말했다.



“오늘 느낌 어때?”

“음, 좋아!”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가보자! 분명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펠릭스가 눈매를 살짝 치켜떴다. 심기가 좋지 않을 때의 버릇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펠릭스는 바로 앞에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길래 공원에나 나와서 여유롭게 독서나 하고 들어갈까 했는데, 어째서 이 녀석이 제 앞에 있는 것일까.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가 툭 내뱉었다.



“…스토커야?”



정말로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손사래를 쳤다.



“말했잖아, 요즘 운이 좋다니까?”



그렇게 말해도 영 못 미더운지 한참을 바라보던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리네뜨가 놀라 소리쳤다.



“어디 가?!”

“집.”

“왜! 같이 있으면 뭐 어때서.”

“넌 시끄러워.”



딱 잘라 말하며 앞으로 걸어가는 펠릭스의 뒤를 쪼르르 쫓아오면서 마리네뜨가 말했다.



“그럼 조용히 할게! 응? 이렇게 만났는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안 될까나…?”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놀란 표정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펠릭스의 시선 끝에 마리네뜨가 보였다. 살짝 빨개진 얼굴로 두 손의 검지손가락 끝을 맞대고 헤실거리며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 위로 언젠가의 기억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에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이름 정도는 알아도 좋지 않아요?’


붉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살짝 홍조가 어린 얼굴, 자신을 향해 웃던 맑은 푸른색 눈동자까지.


‘안, 안 될까나….’


설마, 그럴 리가….



“그래도 안 돼.”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하며 펠릭스는 다시 뒤돌아섰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다. 뒤에서 추욱 늘어졌을 녀석의 얼굴이 상상되어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시간되면.”

“응?”



더 이상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지 빠르게 걸어 자신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펠릭스를 가만히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이윽고 환하게 웃었다. 나중이라고 기약을 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역시 오늘은 티키의 말대로 운이 좋은 날인가봐! 싱글벙글 웃으며 공원을 나가려던 마리네뜨가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굳은 채로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물었다.



‘마리네뜨, 왜 그래?’

“티키, 방금 그 소리 들었어?”

‘소리?’

“나, 이 소리 알아.”



새가 우는 듯한 소리. 멍하니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뒤를 돌아 공원 안쪽을 향해 달렸다. 헉헉거리며 한참을 달린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어떤 벤치가 보였다. 많은 수의 비둘기가 모여 있는 벤치에 앉아 있던 중년의 신사를 보며 마리네뜨는 중얼거렸다.



“저 사람….”



자꾸만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마리네뜨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벤치가 점점 가까워지자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우뚝 멈춰선 마리네뜨가 두 손을 뒤로 가렸다. 마리네뜨가 다가온 것을 눈치챘는지 비둘기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활짝 웃음꽃을 피우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손에 들린 피리를 발견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뒤로 모았다. 손끝이 자꾸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마리네뜨는 마주 웃어주었다.



“아저씨.”

“응? 왜 그러니?”

“그, 손에 든 건 뭐예요?”

“아, 이거?”



허허, 웃던 남자는 선선히 답을 들려주었다.



“이건 호루라기란다.”

“아하.”

“평범한 호루라기랑은 조금 다르지. 이건 새를 부를 때 쓰는 녀석이니까.”

“그…, 래요?”

“그럼. 한 번 보겠니?”



남자가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힘껏 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같기도 하고 유리가 울리는 듯도 한 오묘한 소리가 나더니 비둘기들이 남자의 주변으로 날아올랐다. 남자의 팔, 어깨, 무릎과 머리 위로 올라온 비둘기들이 옹기종기 앉아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마리네뜨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둘기들을 보며 마리네뜨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재밌니? 재밌지!”



아이처럼 좋아하는 남자의 모습은 도저히 이 파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악당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속마음을 감추며 마리네뜨는 싱긋 웃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자비에. 자비에 라미에르. 그러는 아가씨는?”

“마리네뜨예요!”

“예쁜 이름이네~”



즐겁게 웃고 있는 남자를 상대로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탐색전에 들어갔다.



“여기에 자주 계시나요?”

“아니, 음…. 사정상 여러 공원들을 돌아다니고 있단다. 뭐 이 녀석들이 있는 곳이라면야 어디든 좋지만.”



애정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제 앞의 비둘기들을 내려다보는 자비에의 모습에서 마리네뜨는 확실하게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다시금 긴장하는 자신에게 괜찮다고 최면을 걸며 마리네뜨가 다시금 물었다.



“비둘기들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지. 마치 내 아이같다는 생각도 가끔 해요.”



사르르 풀어지는 얼굴로 찡긋 윙크하던 자비에의 시선이 비둘기들을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밑에 떨어져 있는 빵쪼가리만 열심히 주워먹고 있는 비둘기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자비에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뭐, 나나 이 녀석들이나 어딜 가든 문전박대를 당하긴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라며 피식 웃는 자비에의 얼굴이 퍽 쓸쓸해 보여서 마리네뜨는 순간 안타까워졌다. 탐색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순간,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비에 씨! 당신 또 여기서….”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다가오는 제복 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비에는 마리네뜨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런. 아가씨는 먼저 가 봐요. 좋은 일은 아닐 거 같으니까.”



즐거웠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자비에를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어 마리네뜨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계속 달려가다가 공원에서 한참 멀어졌을 때서야 멈춰선 마리네뜨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고개를 숙이고 헉헉거리며 들숨날숨을 열심히 반복하던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말을 걸었다.



“마리네뜨….”

“티, 티키. 맞지? 저 사람이지?”



기운이 느껴져? 마리네뜨의 질문에 티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호크모스를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 그의 수하라면, 변신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기운을 감지할 수가 없어.”

“그, 그렇구나….”



아직도 힘든지 마리네뜨의 숨소리가 살짝 거칠었다. 방학이 되어서 며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벌써 체력이 거지가 다 됐다며 웃고 있는 마리네뜨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여서 티키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아?”

“응? 응.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 모처럼 악당 한 명이 누군지 알았는걸.”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마리네뜨의 미소는 평소마냥 밝지는 못했다.





“흐음~”



마리네뜨와 헤어진 뒤, 묵묵히 길을 걸어가기만 하던 펠릭스의 셔츠 사이로 플랙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키득키득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조용히 타일렀다.



“플랙. 밖에 있을 때는 고개 내밀지 말랬지.”



대체 언제쯤에야 말을 들을 거냐고 짧게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 생각보다 쟤를 별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도끼눈을 뜨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뭘 그렇게 흥분하냐는 듯이 태평한 얼굴로 낄낄거렸다.



“그렇잖아~ 니 성격에 정말 싫었으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친절을 발휘하지도 않았을 거고 말이야~?”

“사람을 딱히 싫어하지는 않아. 귀찮을 뿐이지.”



딱 잘라 말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오~?”



일부러 길게 늘여 말하는 플랙이 얄미웠는지 펠릭스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플랙의 이마를 톡 튕겼다. 으앗! 비명을 지르며 펠릭스의 품에서 벗어난 플랙이 꺄하하 웃었다.



“나 잡아봐라~”

“야!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을…!!”



열받아서 소리치려던 순간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에 펠릭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무언가. 플랙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공중에 멈춰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펠릭스는 반지를 낀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플랙이 반지 속으로 빨려들더니 검은 오오라가 반지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반지에서 나오는 검은 빛들이 펠릭스의 몸을 감싸자마자 번쩍 빛이 폭발했다 사라졌다. 펠릭스가 서 있던 자리에 나타난 블랙캣이 펄쩍 뛰어올라 기운이 느껴진 장소로 향했다.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계속 달려가는 블랙캣의 눈앞에 파리의 번화가 중 하나인 샹젤리제 거리가 나타났다. 평소였다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활기찬 거리였어야 할 이곳에는 지금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물난리였다. 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소화전들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물이 한 가득 고여 있었고 물세례를 맞았는지 홀딱 젖은 사람들도 다수였다. 아무래도 이 거리에서 장난치고 있는 상대는 버블맨인 거 같다고 예상하며 블랙캣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난리가 아니네.”



바닥에 있는 물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블랙캣은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침 가고 있는 방향에서 크게 솟아오르는 분수에 블랙캣은 직감적으로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는 블랙캣의 옆으로 순식간에 다가온 레이디버그가 짜증스레 말했다.



“대체 이 물난리는 뭐야?”

“누가 아니래.”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 녀석밖에 없지.”



누가 파트너 아니랄까봐 호흡을 딱딱 맞추던 두 사람은 어느 새 샹젤리제 거리에서도 상당히 넓은 폭을 자랑하는 삼거리 쪽으로 들어섰다. 뭔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



“아니, 내가 왜 하필 네 녀석이랑 같이 싸워야 하는 거야? 난 물이 싫다고!”

“아, 불평 그만 하고 좀 거들어요. 그리고 저도 새는 싫어요. 냄새나는걸.”

“뭐얏?!”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미스터 피죤과 버블맨을 발견하고서 블랙캣은 쟤들 뭐하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레이디버그는 미스터 피죤을 발견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제 뺨을 두 손으로 탁탁 내리쳤다. 정신차려, 집중해야지!


두 히어로를 먼저 발견한 버블맨이 정답게 인사를 건넸다.



“여어, 왔어?”

“너희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이런, 이런. 그 대사 듣는 것도 슬슬 지겹네. 애초에 그만둘 거면 시작도 안 했겠지~ 알잖아?”



빙글빙글 웃는 그 얼굴이 어찌나 얄밉던지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표정이 왕창 구겨졌다. 열받은 얼굴로 공격에 들어가려던 블랙캣을 붙잡은 레이디버그가 작게 소곤거렸다.



“블랙캣, 미안한데 네가 미스터 피죤을 맡아줄 수 있어?”

“응? 그건 뭐 어렵지 않은데…, 왜 그래?”

“아, 아니. 그냥….”



우물쭈물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레이디가 원한다면야.”



그 말과 함께 블랙캣은 재빨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너클 한 쌍을 꺼낸 블랙캣이 그걸 각각 손에 끼고서 미스터 피죤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듯한 그 포즈에 미스터 피죤은 피리를 불며 블랙캣에게로 손짓했다. 비둘기들이 달려들었다.



“뭐야, 내 상대는 너인가?”



비눗방울 위에 올라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보는 버블맨을 노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방에서 날카로운 검을 하나 꺼내들었다. 방울을 다루는 녀석이니 방울을 터트리며 대응하면 된다.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버블맨은 히죽 웃으며 소리쳤다.



“제법 머리를 쓰네?”



대꾸 없이 달려들 준비를 하는 레이디버그에게 버블맨은 피식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이런.



“하지만 말이야. 내 특기가 방울이긴 하지만, 딱히 그것만 할 줄 아는 건 아니거든?”

“뭐?”

“지금 이 물난리를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 말과 함께 버블맨은 들고 있던 비눗방울채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땅이 진동하더니, 주변에 있던 소화전들에서 세찬 물줄기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놀라 주위를 둘러보는 레이디버그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낄낄 웃는 버블맨의 주변으로 모여든 물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했다. 기겁하며 살짝 뒷걸음질치는 레이디버그를 향해 버블맨이 채를 휘두르자마자 수룡(水龍)은 빠르게 아래쪽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꺄아악!”



달려드는 용을 피해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수룡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방향을 비틀더니 그대로 레이디버그를 덮쳤다. 파격음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리꽂힌 수룡이 다시 하늘로 승천하듯이 위쪽으로 크게 솟아올랐다. 미스터 피죤과 싸우다 그 모습을 본 블랙캣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레이디!”



수룡이 사라진 자리에 레이디버그가 쓰러져 있었다. 물에 흠뻑 젖어 검게 물들어 있는 바닥 위에 죽은 듯 엎어져 있던 레이디버그가 쿨럭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블랙캣이 서둘러 레이디버그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미스터 피죤이 보낸 비둘기 떼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가시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블랙캣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비둘기들에게 던졌다. 쌔앵 날아간 그물이 촤악 펴지더니 새들을 바닥으로 깔아뭉갰다. 악! 내 사랑스러운 비둘기들이! 비명을 지르는 미스터 피죤을 뒤로 한 채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에게로 후다닥 달려갔다.



“레이디, 설 수 있겠어?”

“쿨럭, 응. 당연하지.”



흠뻑 젖은 몰골로 상당히 물을 많이 먹었는지 계속 기침해대는 레이디버그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블랙캣이 시선을 위로 돌려 버블맨을 노려보았다. 히죽히죽 웃으며 버블맨은 다시금 물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런 버블맨을 초조하게 지켜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지? 아까와 같은 공격이 또 들어오면….”

“들어오기 전에 막거나 피하면 되잖아.”

“무리야. 아까 피하려고 했는데 방향을 바꾸더라구. 그리고 충격이 엄청나. 나라서 망정이지 일반 사람이 맞았으면 즉사였을 거야.”



당당하게 서 있었지만 방금 전의 충격 때문인지 레이디버그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어느 새 미스터 피죤까지 버블맨의 옆으로 다가온 것에 블랙캣은 속으로 짜증을 냈다. 아, 하나도 성가신데 둘이라니.


잠깐, 둘?



“아까 저 녀석들이 처음에 하던 대화 기억나, 레이디?”



작게 소곤거리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응?”

“그대로 한 번 가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이 몇 마디 속닥거렸다. 살짝 정신이 없는지 넋나간 표정으로 말없이 듣고 있던 레이디버그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될까?”

“그럼, 내가 누군데. 내가 하잔대로 해서 문제 생긴 적 있었어?”

“…아니.”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 레이디버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치며 블랙캣은 다시금 버블맨을 쳐다보았다. 두 번째 공격을 위한 준비를 이미 마쳤는지 이번에 만들어진 녀석은 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절묘하다고 키득거리며 블랙캣은 입가에 가득 미소를 그려냈다. 블랙캣은 봉을, 레이디버그는 각각 검을 꺼내들고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을 가만히 응시했다.


버블맨이 다시금 채를 휘둘렀다. 푸드득 날아 덤벼드는 새를 가만히 지켜보며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새가 아주 근접할 때까지 날아들다가 양 옆으로 나뉘어 피했다. 예상대로 움직임이 둔해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새를 응시하며 레이디버그는 방금 헤어지기 전, 블랙캣이 들려준 봉을 꺼내 바닥에 꽂고 날아올랐다.


미스터 피죤이 있는 쪽으로. 히익, 기겁하며 도망치기 위해 미스터 피죤이 방향을 선회하기 직전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몸을 숙여 방향을 바꿨다. 빠르게 날아오는데다 몸집도 거대해 쉽게 방향을 틀지 못하고 물새는 그대로 미스터 피죤과 충돌했다. 봉에 매달려 있다가, 엄청난 충격과 받고 비둘기들과 함께 추락하는 미스터 피죤을 발견한 레이디버그가 그를 향해 뛰어내렸다.


‘레이디, 지금 우리 힘만으로 저 둘을 다 상대하기는 좀 버거워. 하지만 말이지, 상대하는 놈이 둘이면 써먹을 수 있는 작전이 하나 있긴 하거든.’


가방 속에서 다시금 붉은 검을 꺼내든 레이디버그가 마치 검처럼 몸을 쭉 펴고 아래로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한 녀석을 이용해 다른 한 녀석을 잡자. 저 공격은 강하지만 아예 틈이 없는 것은 아니야. 아마 저 공격도 나보다는 레이디가 표적일 거야. 어떻게든 미스터 피죤에게로 저 공격을 유도해야 해. 내 봉을 빌려가.’


공기저항 때문인지 자꾸만 흔들리려는 중심을 애써 바로잡으며 레이디버그는 티키가 제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악당들은 악당으로 변신하게 해주는 촉매제가 있어. 마치 미라큘러스처럼.’


촉매제를 부수면 더 이상 악당으로 변하지 못하겠지. 그럼 문제를 일으키지도 못할 것이다. 촉매제가 뭔지는 뻔했다. 버블맨은 둘째치더라도 미스터 피죤의 촉매제는 분명….


미스터 피죤의 목에 매달려 있는 호루라기를 발견한 레이디버그의 눈이 매서워졌다.


한편, 미스터 피죤은 자신과 함께 추락하고 있는 비둘기들과 더불어 위쪽에서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내려오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후다닥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아직 저쪽에 남아 있는 새들이 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바로 그 순간, 사무실에 앉아 있던 제레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미스터 피죤의 몸에서 한 순간 힘이 빠졌다. 호루라기를 불어야 했던 타이밍을 아주 살짝 놓쳐버린 순간, 미처 궤도를 수정하지 못한 레이디버그의 검끝이 미스터 피죤의 배를 꿰뚫었다.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뜨거운 핏방울이 튀었다.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미스터 피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차가운 돌바닥 위로 추락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미스터 피죤의 주변으로 물에 젖은 새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파득파득, 애처롭게 날개를 움직이는 새들을 시선을 돌려 쳐다보던 미스터 피죤은 제 배를 뚫어버린 붉은 검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배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과 더불어 검의 주변으로 붉게 번지기 시작하는 자국들에 미스터 피죤은 직감했다.


여기까지인가.


죽음의 그림자가 제 눈가에 드리우고 있었다. 멍하니 제 주변에 있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비둘기들과 자신의 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멀쩡한 비둘기들을 바라보는 미스터 피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내겐 역시 마지막까지 너희들밖에 없구나.


우리가 대체 뭘 잘못한 걸까. 우리는 그저 쉴 장소가 필요했었을 뿐인데. 미스터 피죤이 입을 벙긋거렸다. 힘이 없어 희미한 신음 소리만이 입가로 새어나왔지만, 그는 분명히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 유유자적 이 녀석들과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걸까. 방해된다는 이유로 계속 쫓겨나기만 하고, 어떤 곳에 가더라도 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어디에도 우리가 쉴 수 있는 장소는 없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장소를 가지고 싶었어. 우리를 괴롭히는 인간들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그의 눈가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 까만 눈동자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천천히 손을 들었다. 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팔을 움직여 제 바로 가까이에 있는 비둘기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구구, 기분좋게 우는 비둘기를 보며 미스터 피죤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저, 자신 때문에 휘말려든 이 가여운 아이들이 불쌍할 뿐이었다.


미안하구나.



“이…. 저…. 나….”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가만히 중얼거리던 미스터 피죤의 몸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하얀 빛방울들이 천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구구?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둘기들을 쳐다보며 미스터 피죤은 활짝 웃었다. 새들과 같이 놀던 때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입가에 살며시 띄운 채로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감겼다.


그와 동시에 미스터 피죤의 얼굴 근처에 떨어져 있던 호루라기가 톡,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호루라기 사이에서 나타는 것은 다름 아닌 새까만 색의 나비였다. 검은 나비가 팔랑 날아오르더니 하늘로 날아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나비를 발견한 블랙캣의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공중으로 솟아오르던 빛방울들과 함께 미스터 피죤은 완전히 사라졌다. 시체조차 남지 않은 아름답지만 기괴한 광경에 블랙캣은 말을 잃었고, 버블맨은 이미 도망갔는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디버그는….



“아니.”



망연히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얼굴에 묻은 핏자국조차 신경쓰지 않고, 미스터 피죤이 사라진 자리만을 멍하게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표정은 흡사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아니야, 난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을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이 흡사 피에 범벅되어 있는 것만 같아 레이디버그는 몸을 덜덜 떨었다. 무섭다. 두렵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제 몸을 양팔로 껴안고 몸을 웅크렸다. 춥다. 너무 추웠다. 방금 전 물을 맞았기 때문일까? 여름인데도 마치 겨울처럼 추웠다. 몸의 떨림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저 촉매제를 부수려고 했을 뿐인데. 더 이상 피해가 나지 않기를 바랬을 뿐인데. 이렇게….


살짝 고개를 들자 구구거리는 비둘기들만이 돌바닥 위에 모여 있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저기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다. 존재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붉은 검을 발견한 레이디버그의 몸이 흠칫 튀어올랐다. 내가 휘두른 악몽의 흔적. 스스로가 불러낸, 사라지지 않는 죄의 표상.


내가, 사람을 죽였어?


하하, 자조의 웃음을 토해내던 레이디버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이미 검게 물들어버린 바닥으로 스며들어갔다.


고장난 소화전들, 물로 흠뻑 젖어버린 주변, 방금 전 싸움의 여파로 살짝 무너져버린 건물들. 아수라장이 된 거리 한복판에 앉아 레이디버그는 그저 절규했다. 



“왜 이렇게 된 거냐고!!”






푸른 도화지 같은 하늘 위로 까만 점이 천천히 움직였다.


바람결을 타고 팔랑팔랑 날아가던 검은 나비는 어느 한 건물에 다다랐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안으로 휙 날아든 나비는 창문 바로 앞에 쭉 뻗어 있는 검지손가락 위로 올라앉았다. 살짝 날개를 파닥거리는 검은 나비를 말없이 바라보던 남자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즐거워 보이지만 그래서 더 오싹할 정도로 서늘한 미소와 함께 남자는 중얼거렸다.



“도둑을 잡기에는, 역시 같은 도둑만한 게 없겠지.”





※ Set a thief to catch a thief. - 프랑스 속담, 이이제이(以夷制夷)



- 10편으로




===


네, 책을 구입해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바꾼 대사가 있습니다.

제가 왜 대사를 바꿨냐면 원래 쓰려던 대사가 저거였는데 바꾸는 걸 까먹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뜻은 똑같아요. 재판본에는 저걸로 수정해서 낼 거 같네요...ㅠㅠㅠㅠ 저거 뜻 통하는 거 찾으려고 엄청 고생했었는데 뭐했죠 과거의 저(멍뎅)


운수 좋은 날! 제목 정말 언제 봐도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한국 문학의 모 소설이 떠오르신다면 아주 정확히 짚으신 겁니다 ㅇㅇ


다음 회 예고를 간략히 적어볼까 고민했지만 스포일러는 재미없으실 것 같아 제목도 생략하고 있죠! 머리쓰는 거 좋아합니다 후후 추론하면서 읽으셔도 재밌으시겠지만 굳이 안 하셔도 되요 우리의 해결사 펠릭스가 있으니까요!(펠릭스: 야


여름 에피에서 가장 즐겁게 작업한 화 중 하나입니다. 이 얘기 했더니 책을 읽으신 분들이 저를 악마보듯 보셔서 슬프네요 아니 어째서죠 이 정도 시련은 줘야 극이 재밌어지죠~ 안 그래요?^ㅁ^


다크한 성인용 정치극<<이라는 소재에 맞게 하기 위해 매우 많이 노력했습니다 ㅇㅇ 사실 수위가 너무 약한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읽으신 분들이 15금은 된다고 해서 안심한!(모두: 저건 진짜 악마다) 애들에게 시작되는 시련은 사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만 아이들은 아직 모르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죠?(모두: 저기요


최대한 현실적이고 희망찬 전개를 적기 위해 노력했사오니 즐겁게 지켜봐주셔요>ㅁ<!!


Posted by I.R.E
,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8.

두 명의 블랙캣







어두웠던 밤이 지나고 푸르른 새벽이 밝아오던 시간, 어두운 갤러리 안으로 빛이 살짝 들이치고 있었다. 부서진 벽들 앞에는 「들어오지 마시오」 라고 적혀 있는 노란 테이프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벽 위쪽에는 혹시 그림에 빛이 닿아 손상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새까만 색의 가리개들이 걸려 있었다. 하얀 햇살이 걸려 있는 그림들의 발치를 살짝 비추고 있었다.


이토록 조용하던 박물관의 단잠을 깨운 것은 어떤 그림자였다. 까치발을 살금살금 걸어오던 그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천천히 걸어와 어떤 그림 앞에 섰다. 가만히 그림을 올려다보던 그림자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림을 보호하고 있던 유리를 깨부수고 그림을 꺼냈다.


유유히 사라지는 그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좋은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오는 마리네뜨에게 사빈이 상냥하게 말했다.



“어서 와서 밥 먹으렴.”

“네….”



웅얼거리며 제 아빠의 옆에 앉아 마리네뜨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접시에 놓여 있던 소세지를 입에 넣으려는 찰나 TV에서는 갓 들어온 소식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뉴스입니다.]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소세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던 마리네뜨의 귓가에 온 파리가 뒤집어질 만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오늘 새벽, 세계적인 명작 「Mona Lisa」 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 명화의 행방을 찾고 있는….]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 그 내용을 이해하자마자 마리네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부모님도 놀라셨는지 TV를 망연히 쳐다보고 계셨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헐?”





[저번 폭탄 테러에 이어 또 다시 홍역을 앓게 된 박물관에서는 이번 사건의 범인에 강경히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뉴스의 화면이 바뀌고, 수사팀 반장이라는 자막을 밑에 띄운 중년의 남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고 있었다.



[“저희 경찰에서는 이번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에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최선을 다해 도둑맞은 그림의 행방을….”]



뚝, 소리와 함께 TV의 화면이 꺼졌다. 들고 있던 리모컨을 소파에 던지며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미쳤군.”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박물관에 꼬이는 미친놈들이 많은지. 한숨을 쉬며 넥타이를 마저 매기 시작한 펠릭스의 주변으로 플랙이 새까만 발자취를 뿌리며 날아왔다.



“오오! 사건인 거야?”

“몰라. 경찰에서 알아서 하겠지.”



평소처럼 단정하게 소매 단추까지 꼭 잠근 뒤, 펠릭스는 옆에 있던 가방을 들고 뒤돌아섰다. 가방 속으로 쏙 들어가는 플랙을 못 말린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펠릭스가 이내 미련 없이 거실을 떠났다.





“펠릭스~!!”



언제나처럼 자신을 쫓아오는 마리네뜨의 목소리에 펠릭스는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아침마다 마주치게 되는 걸까. 정말 스토커 아니야?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마리네뜨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 자신이 짜증나서 펠릭스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펠릭스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온 마리네뜨가 방긋 웃으며 표를 들었다.



“이번에 나랑 콘서트….”

“안 가.”



딱 잘라 말하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지는 것을 보고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화들짝 놀란 펠릭스는 방금 전의 상념을 뿌리치겠다는 듯이 빠르게 마리네뜨의 옆을 벗어났다. 살짝 몸을 앞으로 향하며 터벅터벅 걷는 펠릭스의 팔다리가 양쪽 다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보고 있어. 자신을 마냥 바라보고만 있을 마리네뜨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예전처럼 매정해지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왜지? 그새 정이라도 든 걸까? 귀찮게 따라다닌다고 질색할 때는 언제고,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변덕스러웠던가? 아니, 지금도 귀찮기는 했다.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성가시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변한 걸까. 사람의 마음은 늘 변덕스럽다지만 자신에게는 절대 해당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번 공원에서 만났을 때부터인가? 아니면 호텔 연회장?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딘가 출발점이 있었을 텐데.


교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는 펠릭스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바보같긴, 이런 생각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라고. 어차피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아까 봤던 녀석의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시험은 무사히 넘긴 모양이다. 당연하겠지, 자신이 그렇게까지 시간을 내서 가르쳐줬는데 안 좋은 결과를 받아올 리가 없잖아. 그 때는 그저,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신기했었다.


만약 블랙캣이 나라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레이디버그도 사실은 싸우기 싫을지도 몰라요. 사람은 언제나 강하지 않으니까요. 약한 모습도 있다구요. 평범한 여자아이일 수도 있는 거야!’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손댈 수 없다. 본인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부분은 손대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이건 그 녀석을 꺼리게 되는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솔직한 시선으로 나를 파헤치려고 하는 네가 두려워.


절대 말할 일은 없겠지만.


한숨을 쉬며 문을 열자 여느 때와 같은 활발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여, 펠릭스!”



안녕? 반갑게 인사하는 앨빈을 흘끗 돌아보다가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짧게 대답했다.



“안녕.”



그 한 마디와 함께 자리로 가서 앉는 펠릭스에 앨빈은 깜짝 놀라서 후다닥 펠릭스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평소와 같이 책을 펴고 깔끔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펠릭스에게 앨빈이 물었다.



“왜, 왜 그래?”

“뭐?”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갑자기 영혼이라도 바뀐 거야?”

“…싫으면 말던지.”

“아냐, 아냐! 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오니까 굉장히 당황스럽네. 어메이징해!”



완전 감격했다는 듯이 두 손을 꼭 깍지끼고 중얼거리는 앨빈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올려다보던 펠릭스가 딱 잘라 말했다.



“니 자리로나 가라.”

“에이, 왜 그래 친구~?”

“징그러워.”

“어후, 너무하네. 내가 어딜 봐서 징그럽다는 거야?”

“전부.”



짤막짤막하지만 모두 제대로 대답하고 있는 펠릭스를 보며 앨빈은 그저 싱글벙글했다. 한편,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앨빈의 친구들은 모두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했다. 개중에는 눈을 비비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야, 내가 꿈을 꾸고 있냐? 앨빈이랑 쟤…, 왠지 대화를 하고 있는 거 같지 않아?”

“같지가 않아가 아니라 진짜야! 헐, 세상에. 저 새끼, 역시 무서운 놈이었어. 저 무뚝뚝한 놈하고 대화라는 게 가능하다니!”

“진짜 몇 주간을 줄창 쫓아다니더니 무슨 마술이라도 부렸나? 난 저 녀석이 대답을 세 번 이상 잇는 것도 처음 봐. 오, 미친.”

“진짜 독한 새끼. 이제 앨빈 저놈은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어. 복수도 진심 끈질기게 할 거 같아.”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친구들의 반응과는 별개로 앨빈은 정말로 즐거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앨빈을 참으로 특이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펠릭스는 남몰래 한숨지었다. 뭐가 재밌다고 이렇게 유치한 대화나 하고 있어야 하는지. 더 무서운 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처음만큼 이 상황이 귀찮지는 않다는 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짜증스레 머리를 긁적이던 펠릭스의 머리 위로 수업 종이 울렸다.





수업이 다 끝나고, 펠릭스는 가방에 교과서를 챙겨 넣고 있었다.



“파트너!”



다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필기구를 집어넣으려는 순간, 가방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며 웃고 있는 플랙의 모습에 펠릭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뭔데.”

“나타났어!”

“그래서, 가야 한다고?”

“그렇지~”



능글맞게 웃고 있는 플랙에게 더 이상 묻지 않고 펠릭스는 재빨리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왔다.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사람이 없는 뒤뜰로 나온 펠릭스는 가만히 반지를 낀 손을 올렸다. 검은빛이 번쩍하더니 소년이 있던 자리에서 튀어나온 블랙캣은 빠르게 건물 사이를 넘고 넘어 악당의 기운이 느껴지는 장소로 향했다. 한참을 뛰어가던 중 보이는 장소에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도난 사건으로 시끌벅적할 텐데 왜 굳이 저기에 나타났다는 거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블랙캣은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모르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


루브르 박물관 앞에는 역시나, 수많은 경찰차들과 경찰들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폴짝 뛰어 바닥에 착지하는 블랙캣을 보자마자 좌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어라? 왜 그러지? 의아한 눈으로 경찰들을 바라보는 블랙캣을 바라보던 경찰 하나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체포해!”



순식간에 우르르 달려온 경찰들이 블랙캣의 주변을 둥그렇게 감싸더니 그에게로 달려들어 팔을 결박했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생각하며 블랙캣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짓이에요?! 설마 얼마 전처럼~ 그림을 훔쳐간 악당이 절 감옥에 처넣어 달라는 요구라도 했나봐요?”



빈정거리는 블랙캣에 경찰은 살짝 뜨끔한 얼굴을 했지만, 곧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크, 크흠. 고작 그런 걸로 우리가 널 체포하는 줄 아나?”

“고작 그런 걸로 우릴 사지로 내몰았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런 일로 네가 저지른 죄를 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죄를 짓지도 않았지만, 일단 들어는 보죠. 대체 왜 나를 체포하겠다는 겁니까?”

“흥, 이걸 봐라.”



선두에 선 형사가 내미는 사진을 보고 블랙캣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박물관 내부를 찍은 사진이었는데, 모나리자가 걸려 있는 유리관 쪽으로 걸어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고양이 귀를 쫑긋 세운 누군가.



“헉?”



자신과 똑 닮아있는 그 모습에 블랙캣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대체 왜 이놈이 나라는 거예요!”

“이렇게 똑 닮았는데도 시치미를….”

“내가 훨씬 잘생겼구만!”



당당하게 외치는 블랙캣의 한 마디에 경찰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지 그저 씩씩거리는 블랙캣에 경찰들은 더 할 말이 없다 싶었는지 한숨을 쉬었다. 앞에 서 있던 형사가 말했다.



“끌고 가.”






쾅- 소리와 함께 감옥의 문이 닫혔다. 진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감옥의 창살을 꼭 잡는 블랙캣을 보며 형사가 말했다.



“그간 파리를 위해 노력해준 것에 대한 예의로, 그림만 무사히 돌려준다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니 말해. 「Mona Lisa」는 어디 있지?”

“아니, 이건 무슨 개뼉다구같은 소리예요? 제가 그 그림을 훔쳤을 이유가 없잖아요!”

“이유가 없긴 왜 없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인데!”



블랙캣은 그건 무슨 괴상한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눈 앞의 경찰을 쳐다보았다.



“그것도 팔 수가 있어야 가치가 있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도둑맞았다고 알려졌는데, 그게 경매에 나오면 다들 얼씨구나 하면서 사가겠습니까? 곧바로 신고하지.” 

“경매가 아니라 그냥 암거래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오, 진짜! 이런 비싼 그림을 살 만한 사람이랑 제가 대체 무슨 인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시 모르지. 네 정체가 엄청난 부자라서 그런 쪽으로 인맥이 있을지도.”



경찰의 한 마디에 블랙캣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억울했다. 물론 그 뒷모습은 자신과 똑같아 보일 정도로 비슷하긴 했지만 그건 제가 아니다. 혹시, 요정에겐 히어로를 조종하는 능력도 있나? 플랙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변신을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왜 저라고 생각해요? 저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변장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웃기지 마. CCTV 모두 확인했는데, 아무리 봐도 네놈이었다구.”

“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반문하는 블랙캣에게 경찰이 자못 엄숙하게 말하며 사진 한 장을 던졌다.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진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블랙캣에게 경찰이 다시금 말했다.



“잘 생각해봐. 우리도 시간은 많이 못 주니까. 파리의 언론이 무척 소란스럽거든. 우리는 빨리 성과를 내야 해.”



그 말과 함께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는 악당을 다시 한 번 붙잡으려다 그만두고, 블랙캣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진짜, 이건 또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야?!”



살다살다 도둑으로 몰릴 때도 있군.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이를 득득 갈았다.



“애초에 말이지, 왜 하필 모나리자인데? 돈을 노렸다고 해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을 대체 어디다 내다판다는 거냐고~!! 그림의 진짜 값어치를 받으려면 적어도 유명 경매시장에 내놓아야 한단 말이야. 근데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거든. 그리고 도둑맞았다는 게 전 세계적으로 광고된 그림을 대체 누가 사간다는 거야? 이건 나한테 메리트가 전혀 없는 일이라고!”



평소에도 명작이란 굳이 손에 넣기보다는 멀리서 감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였는지라 더 분노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념과 위배되는 행동을 한 것도 모자라서 그 죄를 나한테 덮어씌워?



“나를 도둑으로 몰기 위해서 ‘굳이’ 모나리자를 훔쳐낸 것 같은데, 진짜 어이가 없네. 당하고만 있어줄 성격으로 보이나, 이 내가?”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한참을 짜증내다가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리고 나서야 블랙캣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겼지만 절대 자신은 아닌 자.



“…새로운 악당인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루브르 쪽에서 굳이 악당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것도 수상쩍었거니와, 사태를 보아하니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인 것 같고.


자신과 똑 닮은 녀석이라. 이제껏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딱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비눗방울을 불어서 사람을 공격하는 놈도 있고 비둘기를 타고 다니는 놈도 있고, 맨바닥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놈도 있는데. 저번 폭탄 사건 때 마주했던 놈은 심지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다루던 자가 아니었던가. 변신할 줄 아는 악당 한 명쯤 더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있지?”



자신은 그 악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자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누명을 벗을 수 있다는 거다. 그것도 이 좁은 감옥 속에서.



“아오, 미치겠네!”






“생각보다는 수월한 걸?”



살짝 느른하면서 섹시한 목소리가 붉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검은색의 망토를 걸치고 박쥐 모양의 가면을 쓴 악당이 우아하게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연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서 악당은 피식 웃었다.



“그래, 식은 죽 먹기지. 하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얼마나 쉬운데? 조금만 머리를 쓰면 된다구.”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했는지, 악당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아, 이 그림? 뭐~ 진짜 경매장에 내놓았다간 경찰이 블랙캣에 대한 의심을 풀 거 아니야? 그냥 가지고 있어야지. 그럼 영원히 감옥행이겠네~”



불쌍해서 어쩌나. 큭큭 웃어대던 상대는 곧 말을 이었다.



“경찰은 일단 어떻게든 사건을 조용하게 끝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럴 수는 없지. 일단 한 놈은 가둬놨으니, 다른 한 녀석을 처리하러 가볼까?”



그럼 그 분이 무척 기뻐하시겠지.


간단하게 통화를 마치고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던 악당이 싱긋 미소지었다.



“자, 어떡할까나~?”






“네?! 블랙캣이 감옥에요?”



놀라는 레이디버그에게 40대쯤 되어 보이는 금발의 남자 경찰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다니까요. 이미 증거가 다 있는데도 계속 아니라고 우기고, 그림이 어디 있냐고 물어도 죄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아니, 근데 정말 블랙캣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CCTV에 명확하게 찍혔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경찰에게 레이디버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것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조심스럽게 요청하는 레이디버그에게 경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선선히 대답했다.



“안될 건 없죠.”



레이디버그를 데리고 박물관 안에 있는 관리실로 들어간 경찰이 곧 자리에 앉아 있는 직원을 불러 오늘 새벽의 CCTV 영상을 틀게 했다. 처음에는 어두운 갤러리의 모습만 나오다가 직원이 몇 번 버튼을 돌려가며 조율하자 곧 장면이 드러났다.



“여깁니다.”



레이디버그는 말을 잃었다. 갤러리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온 것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유리관을 부순 것도, 안에 있던 그림을 들고 있던 것도 모두 블랙캣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이상했다. 뭐지? 뭐가 이상하지?


레이디버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잠깐만 더 돌려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자 직원은 선선히 부탁을 들어줬다. 팬이라고 하면서 악수 한 번만 해달라고 웃는 직원에게 기분 좋게 악수를 건넨 뒤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화면에 집중했다. 몇 번을 돌려본 후에야 레이디버그는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림자….”

“예?”

“여기 봐요, 이 블랙캣. 그림자 모양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레이디버그는 급기야 손으로 버튼을 잡고 계속 영상을 돌리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블랙캣이 그림을 들고 박물관을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의 발에서부터 길게 늘어져 있는 그림자를 가리켰다.



“이거 보세요.”

“엇?!”



블랙캣의 발에서부터 이어지는 긴 그림자를 본 경찰과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서 있는 사람은 블랙캣이 맞았는데 그림자는 블랙캣의 것이 아니었다. 쫑긋 솟은 고양이 귀가 없는데다 체형도 미묘하게 달랐다.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레이디버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블랙캣을 만나야겠어요. 데려다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 하지만 저것만 가지고 무조건 블랙캣이 아니라고 하기엔….”



아직도 우물쭈물하는 경찰에게 레이디버그는 웃으며 말했다.



“얼굴 보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쵸?”



싱긋 웃으면서도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붙잡는 레이디버그의 손에 밖으로 끌려가던 경찰의 핸드폰이 띠리리링 울렸다. 레이디버그의 팔에 끌려가면서도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은 경찰이 잠시 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 탈옥?!”

“네?!”



그 말에 놀라 돌아본 레이디버그가 재빨리 경찰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갔다. 경찰이 하려던 순간 레이디버그는 다급하게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쉬잇-! 헙, 분위기에 눌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입으로 틀어막는 경찰을 내버려두고 레이디버그는 스마트폰의 스피커를 켜고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렇습니다! 감옥의 벽을 부수고 탈출한 모양이에요! 심지어 도망친 지 꽤 시간이 지난 거 같아요!]



심지어 이 소란을 틈타 죄수들 몇 명도 같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빨리 돌아와달라 재촉하는 목소리에 경찰은 다시 레이디버그에게서 핸드폰을 뺏어들고 몇 마디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골치 아프다는 듯 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탈옥이라니,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아, 한숨을 쉬는 남자의 옆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이디버그의 옆구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직 녀석을 만나기는 좀 어렵겠지만.”



권유해주는 경찰에게 레이디버그는 가방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전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그쪽 먼저 우선시해야 할 거 같아요. 그 바보를 발견하면 나중에 연락 주세요.”

“? 네 그러죠.”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경찰을 뒤로 한 채 레이디버그는 최대한 빠르게 루브르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지붕 위로 뛰어올라 한참을 달려온 뒤에야 레이디버그는 가방에 넣었던 손을 쑥 뺐다. 손에 든 알록달록한 모양의 스마트폰이 지잉지잉 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레이디버그가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 레이디. 안녕~?’

“너 지금 어디야?! 감옥 부숴먹고 탈옥했다는 건 또 뭐야!”



버럭 소리지르는 레이디버그에 조금 놀랐는지 블랙캣이 잠시 멈칫했다가 곧 태연하게 다시 말했다.



‘그건 아직 말해줄 수 없고~ 레이디. 혹시 경찰이 무슨 헛소리를 했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어. 나는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구.’

“그건 이미 알아, 이 멍청아! 이미 사실 다 확인했어! CCTV에 찍힌 사람은 그림자가 너랑 달랐다구.”

‘뭐야, 그런 것도 있었어? 그래도 사실을 알았다니 다행이네. 사실 레이디가 나를 믿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거든.’

“믿고 있는 게 당연하잖아.”

‘정말로?’



날카롭게 훅 찔러오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말문이 막혔다. 곤란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블랙캣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화제를 돌렸다.



‘뭐 그건 됐고. 지금 내가 급하게 어딜 들렀다 와야 하거든. 레이디는 지금 한가해?’

“그래, 누구씨 덕분에 곧 바빠질 거 같지만.”

‘그래, 그래. 그럼 부탁 좀 할게. 샹젤리제 거리 중심가에 가면 라뒤레라는 초록색 간판의 마카롱 가게가 있어. 거기 앞에 ‘데니스 브라운’이라는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을 가진 남자가 있을 거야. 그 남자 데리고 내가 말하는 장소로 와줘. 참고로 말은 조심해, 기자거든.’



그 외에도 블랙캣은 몇 마디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할 말은 다 끝났는지 전화를 끊으려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조용히 물었다.



“…왜 이런 걸 부탁하는 거야?”

‘음, 뭐랄까. 당하고만 있는 건 재미없잖아? 그래서 갚아주려고.’

“갚아준다니…. 어떻게?”

‘그건 아직 비밀. 기대해도 좋아. 이번 일을 보면 아무리 레이디라도 나한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걸?’



즐겁게 웃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끊어진 핸드폰 액정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레이디버그가 피식거렸다.



“하여간 잘난 척은.”



곧바로 샹젤리제 거리 쪽으로 날아간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이 말한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밝은 형광초록색으로 칠해진 간판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남자에게로 달려가 남자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어어…! 깜짝 놀랐는지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남자를 안고 계속 하늘을 달려가는 레이디버그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왠지 재미있는 자세네요.”

“네?”

“이 나이 들어서 공주님 안기를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헉, 죄송해요. 기분 나쁘시다면….”

“아뇨, 재미있고 좋은데요 뭐.”



처음 겪는 일에도 저렇게 태연하게 구는 것만 봐도 왠지 보통 성격은 아닌 듯 싶었다. 자신보다 작은 여자아이가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상당한 체구의 자신을 안고 가는 것이 놀라웠는지 남자는 잠시 경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보다 되게 신기하군요. 기자라면 피해 다닌다던 영웅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날도 있다니.”

“기자시라고 했죠?”

“네, 「르 피가로」 지의 기자인 데니스 브라운입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데니스에게 레이디버그는 다시 물었다.



“지금 뭘 하러 가시는지는 알고 계세요?”

“몰라요. 저는 오늘 기사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멋진 레이디께서 데리러 와주실 줄은 몰랐지만요.”

“기사요?”

“네, 기사.”



지붕을 크게 껑충 뛰면서 레이디버그는 공중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처음 듣는다는 듯이 제게 반문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뭔가를 짐작했는지 데니스가 태연하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가보면 알겠죠.”





“잘 찾아가려나~?”



전화를 뚝 끊고서 블랙캣은 폴짝폴짝 지붕을 건너다니며 필요한 장소로 향했다.


레이디버그의 얘기를 듣고서야 자신이 지금 탈옥한 상태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부숴진 감옥의 벽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될 불쌍한 간수에게 애도를 표하며 블랙캣은 다시금 하늘 위로 점프했다. 심경은 상당히 복잡했지만.

방금 전에 확인한 사실 때문에.


한 시간 전, 감옥 바닥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던 블랙캣은 머지 않아 탈출밖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아하니 저 무능한 경찰들에게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몇날 며칠을 여기에 갇혀있을 수는 없었다. 내일 학교를 가야 하는 입장에서 그건 무리한 요건이다. 적어도 오늘 안에 끝을 봐야만 했다.


소리없이 벽을 부수는 것은 쉬웠다. 고대의 재앙으로 벽에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틈을 만들고 밖으로 나왔다. 최대한 조용히, 자신이 사라진 사실을 가급적 늦게 눈치채도록.


계획을 얼핏 수립하기는 했지만 관객이 필요했다. 저절로 뇌리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이 있었지만 블랙캣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연락을 하지? 아는 사실이라고는 기자라는 직업과 얼굴, 목소리뿐이 없는데.


그냥 아무 곳에나 전화해서 다른 사람을 찾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중 블랙캣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물끄러미 제 가방을 살펴보다가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혹시 이런 것도 되려나?


반신반의하며 아무렇게나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간 후에 곧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블랙캣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저번 파티장에서 만났던 그 기자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그 사람의 전화번호가 없어도 원하는 사람한테 전화를 거는 게 가능하다고?


장난전화인 줄 알고 끊으려는 남자에게 대충 자신이 블랙캣이라고 소개하고 특종에 흥미 없냐고 물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껄껄 웃더니 매우 흥미 있다고 대답하는 기자에게 블랙캣은 만날 장소와 시간대를 얘기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혹시 자신이 진짜 블랙캣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딱히 손해볼 일은 없으니 반신반의하며 나오기는 하겠지.


데리러 가줄 사람은 정해져 있고.


감옥에서 나온 블랙캣이 맨 처음으로 향한 장소는 다름 아닌 파리 시청사였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블랙캣은 재빨리 시청사 뒤쪽에 있는 3층 창문으로 훅 뛰어 들어갔다. 분명 이 근처에 관제실이 있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피해 조심히 움직이던 블랙캣의 시선 끝에 관제실이라고 적힌 문이 발견되었다. 누가 오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살금살금 걸어서 관제실 문을 연 블랙캣은 자신을 등지고 앉아 있는 직원의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툭,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진 직원을 다시 의자에 앉혀놓고 앞에 보이는 수십 대의 모니터 화면을 살펴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엄청나네.”



언제 사람이 들어올지 몰랐기에 블랙캣은 재빨리 파리 전역에 설치되어 있는 교통카메라에 대한 정보를 켰다. 곧바로 화면들에 각 구를 관통하는 도로와 건물의 모습들이 보였다. 차분히 악당을 찾기 시작하는 블랙캣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악당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음에도 굳이 관제실을 찾은 이유는 느껴지는 악당의 기운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일이 찾아다니기엔 시간이 없으니 파리 전역을 살펴보고 필요한 상대를 찾아내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었다.


가지고 왔던 고양이 발바닥 무늬가 그려진 검은색 리모컨을 관제실 모니터 쪽에 연결하자 곧 바로 앞 모니터에 파리 어딘가의 영상이 떴다. 바람 때문인지 살짝 흔들리기는 했지만 영상을 확인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드론이 제대로 날고 있는가보다 싶어 안심하면서 블랙캣은 일단 교통카메라 정보를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힘이 느껴지던 방향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니 악당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둘기 떼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미스터 피죤을 지나, 북동쪽에서 느껴지는 힘의 방향에 설치되어 있는 교통카메라를 모조리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한 건물을 발견했다. 연결해두었던 드론을 조종해서 건물 위로 띄우자 곧 건물 지붕 위에 유유히 서있는 누군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치렁거리는 검은 망토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악당을 발견한 블랙캣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지만, 블랙캣이 느낀 악당의 수는 대략 세 명이었다. 또 새로운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니 확인해서 나쁠 건 없다 생각하면서 천천히 방향을 감지했다. 동남쪽 방향. 그쪽 방향에 있는 구의 카메라들을 모두 살펴보았으나 사정권 밖인지 찾기가 불편했다. 에잇, 혀를 차며 블랙캣은 다시금 드론을 움직였다. 그러나 드론이 향하는 방향에 있는 장소를 본 블랙캣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왜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 블랙캣은 침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드론을 제가 본 건물 쪽으로 움직였다. 하늘 높이 날고 있던 드론은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이 위치한 공원 안으로 조용히 날아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자연사 박물관의 뒤쪽 숲으로 방향을 잡고 드론을 움직였다. 그리고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동굴이 있었다.


저번에 몇 번 가봤을 때는 분명히 없었던 동굴 앞에 저번에 봤던 그 하얀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문제는 그 남자만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 옆에 서 있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문제였다. 모자를 쓰고 검은색 제복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악당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동굴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는데, 개중 몇 명은 악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조금 더 가까이 내렸다. 어느 정도 사람의 얼굴이 분명하게 보일 정도까지 아슬아슬하게 내리다가 블랙캣은 문득 창백한 얼굴의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누군가의 모자 위에 수놓아진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분명….


그 순간 제 쪽을 올려다보는 남자에 깜짝 놀라던 찰나, 화면이 꺼져버렸다.


꺼진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블랙캣은 살짝 고개를 내려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힘을 줘버렸는지 손에 든 리모컨이 박살나 있었다.

쫑긋, 귀를 세웠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가까이 오기 전에 블랙캣은 직원이 앉아있는 의자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펄쩍 뛰어올라 천장에 붙었다.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렸다.



“야, 살만하냐? 먹을 거 사들고 왔다~!”



발랄하게 소리치는 직원의 등 뒤로 폴짝 뛰어내린 블랙캣은 소리없이 문 밖으로 빠져나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빠르게 시청사를 벗어나서 자신이 목표한 상대가 있는 장소로 향하면서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신호음이 끊기고 전화를 받는 레이디버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안도하는 제 자신에 블랙캣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주는 것에 기뻤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조금만 더 나를 믿어주면 좋을 텐데.


아직 너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가 하기엔 비겁한 말일지도 모른다. 너를 좋아하면서도 온전히 너를 좋아한다고 인정하기에 겁쟁이인 나를 인정한다. 그래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좀 더 나를 봐줘. 나를 의지해줘.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다가 문득 블랙캣은 무척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기왕 엿을 먹일 거면 아주 제대로 먹이는 게 좋겠지? 피식피식 웃으며 블랙캣은 다시금 매직박스에서 핸드폰을 꺼내 몇 곳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키득거리며 웃던 블랙캣은 곧 생각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역을 통틀어 가장 큰 기차역이라 불리는 장소.


파리 북역이었다.


곧바로 북역으로 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건물로 숨어든 블랙캣은 곧 발을 동동거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레이디버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서 와, 레이디!”



반가운 마음에 레이디버그에게로 달려간 블랙캣이 자연스럽게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휙 손을 빼버리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도 좋다고 웃고 있던 블랙캣은 곧 뒤에 서 있던 기자를 발견하고 악수를 청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데니스 브라운 기자님.”

“오…. 천만에요.”



얼떨떨한 얼굴로 악수를 하고 난 뒤 데니스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반쯤 장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로 보게 되니 놀랍네요.”

“가져오라고 부탁드렸던 물건은 가져오셨나요?”

“물론이죠. 그래서, 제가 뭘 도와주면 되는 거죠?”

“제가 지금부터 재밌는 쇼를 보여드릴 예정이라서요.”

“쇼?”

“이걸 보시고 최대한 재미있게 기사를 적어주시면 됩니다.”



블랙캣의 설명을 다 듣고 나자 정말 재미있겠다는 듯이 데니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메이징! 정말 재미있겠네요. 하지만 이런 영광을 안을 사람으로 제가 선택된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기자님이라면 분명 멋진 기사를 써주실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웃으며 대답하는 블랙캣을 보며 데니스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하기 싫다는 거군요. 뭐, 알겠습니다. 저야 이런 특종을 거절할 이유는 없지요.”



시원시원하게 응수하는 데니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블랙캣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갈까요.”






“그 녀석이 탈주를 했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악당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북역 지붕 위에 서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던 중,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가 가져온 뜻밖의 소식에 악당은 다시금 계획을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행동할 줄은 몰랐다. 생각만큼 만만치는 않다는 건가.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뭐라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 분명 나를 찾아오겠지. 그 전에 수를 써야겠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쪽 일이나 잘해.”



뚝, 전화를 끊으며 악당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악당의 그림자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운이 악당의 온 몸을 덮더니 검은 고양이 수트를 입은 누군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그게 네 능력이구만.”



휙 돌아서는 악당의 앞으로 블랙캣이 탁 내려섰다. 웃고 있는 블랙캣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가 말을 툭 내뱉었다.



“뭐야, 너. 뭔데 나랑 똑같이 생겼어?”



정말 자신인 것마냥 당당하게 말하는 상대를 보며 블랙캣은 혀를 쳤다. 이것 봐라?



“어딜 봐서 니가 나라는 건데? 아무리 봐도 내가 더 미남이잖아!”

“웃기시네. 가짜 주제에 헛소리하지 마. 어디 여기서 진짜가 누군지 가려볼까!”



그 말과 함께 블랙캣의 모습을 한 악당이 블랙캣에게로 달려들었다. 재빨리 악당의 합을 받아내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악당은 그걸 막아내고 다시금 반격을 시작했다. 엎치락뒤치락 엉겨붙어 싸우던 두 사람에게로 레이디버그가 달려왔다.



“블랙캣!”

“오우, 레이디.”



바닥에 깔려 있던 블랙캣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에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두 사람 좀 떨어져줄래?”



그 말대로 뒤로 물러나는 두 사람의 발끝을 유심히 보던 레이디버그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한 녀석에게 달려들어 그의 복부를 세게 발로 찼다. 그 순간 레이디버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사람의 배가 아니라 단단한 목판을 걷어찬 것만 같은 이질감.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걷어차인 배를 붙잡고 뒤로 물러난 블랙캣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에 더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 모습을 바꿨다. 그림자 속으로 스르륵 사라지는 검은 연기와 함께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악당이 레이디버그를 노려보았다.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어떻게 나란 걸 알았지?”

“그걸 알려줄 의무는 없는걸? 넌 누구야?”

“내 이름은 셰이드 플뢰르. 생각보다는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모양이군. 벌써 나를 찾아내다니.”

“과연, 역시 그림자 술사였나.”



중얼거리는 블랙캣을 옆에 두고 레이디버그는 크게 소리쳤다.



“자, 이제 순순히 말하지 그래. 모나리자는 어디 있어?”

“흥,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내가 그걸 알려줄 이유는 없잖아?”



코웃음을 치며 악당은 제 그림자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림자 속에서 온통 새까만 검이 튀어나와 악당의 손에 들어갔다. 깜짝 놀라는 두 사람에게로 검이 날아들었다. 둘 다 양 옆으로 몸을 돌려 휘둘러지는 검날을 피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다시 덤벼드는 악당의 검을 레이디버그는 두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내리찍으려는 악당과 어떻게든 버티던 레이디버그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던 중 셰이드 플뢰르가 싱긋 미소지었다. 에? 놀라던 찰나 레이디버그의 손에 있던 검이 먼지처럼 스러졌다. 동시에 레이디버그의 뒤에서 날카로운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가만히 있어, 레이디!”



블랙캣이 재빨리 달려들어 그림자를 발로 걷어찼다. 블랙캣에게 얻어맞고 잠시 주춤하던 그림자는 곧 스르륵 바닥에 있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블랙캣은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그림자에 스며들어 사라지는 구슬을 보며 블랙캣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과연.



“저기, 레이디.”

“왜?”

“모나리자를 어디에 숨겼는지 알 거 같아.”

“정말?! 어딘데?”



놀라서 되묻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녀석의 배를 한 대쯤 더 쳐줘야 할 거 같은데. 가능하겠어?”

“해볼게.”

“그리고 제대로 설치해놨지? 그거.”

“물론.”



웃으며 대답하는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미안, 덕분에 무기도 사용 못해서.”

“괜찮아. 난 너보다 강하니까!”



당당하게 말하며 싱긋 웃는 레이디버그의 표정에 그래도 좀 기분이 나아졌는지 블랙캣은 웃으며 말했다.



“좋아, 해볼까. 그나저나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뭐가?”

“비밀. 벌써 알면 재미없잖아?”



싱글싱글 웃는 블랙캣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레이디버그는 곧 생각을 접었다. 알아서 하겠지. 그를 뒤로 한 채 셰이드 플뢰르에게로 달려들었다. 다시금 검을 빼든 셰이드 플뢰르는 마치 펜싱하듯이 검을 앞으로 찔러가며 레이디버그의 급소를 노렸다. 막기가 애매해 무작정 피하기만 하며 빈틈을 노리던 레이디버그는 한 순간 발견된 틈을 파고들어 셰이드의 복부에 주먹을 찔러넣었다.


이번에는 느낌이 있었다.


커억, 소리와 함께 뒤로 날아가는 셰이드의 뒤로 블랙캣이 날아들어 목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발버둥도 치지 못하게 목덜미를 꽉 붙잡고 악당의 모습을 그려내는 그림자에 세게 주먹질을 했다. 강한 힘으로 내리치자 그림자가 움찔거리더니 그 속에서 상당한 크기의 무언가가 튀어올랐다. 액자에 담겨 있는 커다란 그림을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액자 틀만 붙잡고 받아낸 블랙캣이 제 앞에 놓인 명화를 넋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역시 그림자 속에 숨겨두고 있었나.”



그 말과 함께 블랙캣은 붙잡고 있던 셰이드의 몸을 바로 옆으로 세게 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셰이드를 본체만체하며 가방에서 유리관을 꺼낸 블랙캣이 그림을 그 속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심한 충격을 주면 토해내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대로라 다행이네.”

“이 자식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악당에게 블랙캣이 피식 웃으며 충고했다.



“아, 맞다. 어서 도망가는 게 좋을 거야.”

“뭐?”



그 말과 함께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악당은 물론 레이디버그도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갖 로고를 단 헬리콥터들이 그들이 있는 장소로 날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멍하게 그 장면을 쳐다보고 있던 악당에게 블랙캣이 씨익 웃으며 정답을 들려주었다.



“방송사에 연락해놨거든. 특종 잡을 생각 없냐고 말이야.”

“이…!!”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게 없잖아? 더 일을 벌이면 좋을 게 없을 텐데. 어서 꺼지시지.”



웃으면서 말하지만 뼈가 있는 블랙캣의 한 마디에 악당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곧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악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깨닫자마자 블랙캣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캠코더 제대로 설치해놨지?”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디버그는 뒤쪽으로 후다닥 달려가더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잡고 들어올리는 모션을 했다. 허공에서 반투명한 천이 벗겨지더니 바닥 위에 고정해둔 캠코더가 나타났다.


레이디버그의 매직박스에서 꺼낸 카멜레온 천이었다. 덮어놓으면 주변의 사물과 섞여들어서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드는 특수한 재질을 가진 천. 그 밑에 있던 캠코더를 수거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재잘거렸다.



“말도 마. 진짜 이쪽으로 오지 않게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빌린 물건인데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떡하겠어?”

“그러게.”

“저기 오는 방송국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어서 숨겨야지. 나중에 그 기자분한테 갖다드려야 하니까.”



사람들이 그 그림 보고 되게 말이 많을 거라며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와는 달리 블랙캣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엷어졌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블랙캣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레이디, 진지하게 들어줘.”

“응?”



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악당들은 우연히 파리에 나타난 게 아닌 거 같아. 뒤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이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어? 호크모스 말하는 거야?”

“……호크모스?”

“너 몰라? 또 다른 미라큘러스를 가진 히어로인데 다른 사람에게 변신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저기, 블랙캣? 표정이 왜 그래?”



충격을 받은 것처럼 갑자기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블랙캣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디버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너 방금 무슨 말 하려고 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버려. 그나저나 많이도 왔네~”



다시금 웃는 얼굴로 돌아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굴고 있지만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처럼.





다음 날, 파리 시내는 또 한 번의 특종을 맞아 떠들썩했다. 「모나리자 도난의 진실!」 이라는 문구를 달고 제 1면을 장식한 기사에는 전날의 사건에 대한 진실과 더불어 경찰의 무능함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었다. 캠코더에서 찍었던 악당의 변신 장면이 그대로 찍혀 기사에 그대로 게시되었으며, 덕분에 경찰청 홈페이지에는 수백 개가 넘는 항의글이 올라왔고, 계속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기사의 바로 옆에는 감옥이 부숴졌을 때 같이 탈주한 흉악범 몇몇의 얼굴 사진도 작게나마 실려 있었다.



“파트너~ 표정이 왜 그래? 의도한 대로 다 잘 됐잖아.”



생각한 대로 다 이루고도 표정이 전혀 밝아보이지 않는 펠릭스를 플랙이 걱정스럽게 불렀다. 읽고 있던 신문을 의자 앞에 있던 테이블 위로 던지며 펠릭스는 앉아 있던 안락의자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가만히 중얼거렸다.



“…너무 얕잡아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엥?”

“……아니야, 아무것도.”



청회색 눈동자가 스르륵 감겼다.





-9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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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악당의 등장이네요.

이름은 셰이드 플뢰르(Shade Fleur)! 그림자의 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매우 귀찮게 해줄 악당 하나가 또 등장했네요.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7화에서 나온 마임맨이 꺼려하던 상대가 바로 이 분이랍니다.


8편은 제목에서부터 눈치채셨겠지만 한국 에피소드 기준으로 3화의 카피캣 에피소드를 오마주했습니다.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적어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을지 모르겠네요ㅇㅁㅇ)


9화도 작업 중이랍니다. 일단 줄간격만 대충 정리하고 있으니 빨리 올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재판 시기를 적어놓지 않은 거 같은데 내년 1월입니다.

9월 둘째주 안으로 12화까지 업로드해두려고 합니다 ㄷㄷ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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