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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4

※ 제목은 차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Episode 5.

시작된 변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구우우-!!”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마리네뜨는 베개에 얼굴을 쿡 박았다. 그렇게 침대에 엎드린 채로 마구 발버둥을 치던 마리네뜨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에스미가 대체 뭐에 화가 났지?”



말을 걸어도 대답 안 해주고, 앞으로 다가가도 ‘내 앞엔 공기밖에 없다’ 식으로 무시하고, 애초에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애교를 부려봐도 냉랭하게 무시하는 걸 보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 그럼 나도 너랑 절교야! 를 외치기에는 에스미의 성격이 마음에 걸렸다.


겉으로 보기에 차가워 보여도, 에스미는 이유 없이 화를 낼 성격은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 이렇게 딱 짐작가는 게 없을까.


거하게 한숨을 내쉬는 마리네뜨를 티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푸념하듯이 말을 늘어놓았다.



“나한테 자기가 왜 화났는지 생각해보라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해도?”

“짐작가는 게 너무 많아!!”



이건가? 아니 이건가? 혹시 이거? 손가락을 접어가며 그간의 행동들을 되짚어보던 마리네뜨는 다시금 베개에 얼굴을 포옥 묻었다.



“으아, 모르겠어!”



또 다시 이리저리 버둥거리다가 침대에 축 늘어졌다. 살며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마리네뜨가 바로 옆에 보이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침대 위를 두들기다가 주먹을 꼭 쥐었다.



“어떡하지….”



눈을 깜빡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가볍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마리네뜨. 이런 경우는 아무래도 시간이 약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래?”

“대화를 나누기에는 지금은 좀 무리일 거 같으니까, 화가 조금이나마 풀릴 때까지 거리를 두는 게 어떨까?”

“그게 나으려나….”



티키의 제안에 마리네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다 배시시 웃었다. 그래, 괜찮겠지. 전에도 싸웠던 적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화해했었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 근데 그 때 뭘로 싸웠더라? 너무 졸려서일까, 잘 기억나지 않았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마리네뜨는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게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건 금세 드러났다.



“그럼, 이상으로 내일 있을 체험학습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치도록 하마. 준비물은 프린트에 적어두었으니 참고하고.”



체험학습을 잊고 있었어!


마리네뜨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프린트를 받아들었다. 이번 주 금요일, 즉 내일 있을 단체 체험학습은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에서 진행된다. 엄청나게 넓고 사람은 또 사람대로 많아서 돌아다니기도 힘들지만 세계 3대 자연사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만큼 볼거리는 충분한 곳이다. 감상문을 적어야 하는 게 좀 걸리기는 하지만.


원래는 에스미와 같이 돌아다니기로 했지만 이런 상태로는 무리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같은 조로 적어서 냈는데.


…올해도 또 혼자 다니게 되는 걸까.


쓰게 웃으면서 프린트를 가방에 집어넣고 짐을 챙기던 마리네뜨의 책상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마자 무감정한 얼굴로 제 앞에 서 있는 에스미를 본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뭐라 말할지 고민하다가 마리네뜨는 말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헤실 미소지었다. 왠지 지금 말을 꺼내면 다시 화낼 거 같아서 무섭다. 그러니 그냥 웃는 게 낫다. 설마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않을 테니까.


그저 헤헤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펴보던 에스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 바보를 어째야 할까.



“이거.”

“으, 응?”



에스미의 손에 들려 있는 체험학습 프린트를 본 마리네뜨의 눈이 깜빡거렸다. 뭐라 생각하기도 전에 에스미가 딱 잘라 말했다.



“같이 가야하니까 기다려, 그 날.”

“어, 응!!”



기합이 팍 들어서 크게 소리치는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스미는 아무렇지 않게 뒤로 돌아섰다. 별로 웃어주거나 이제 화해하자거나 이런 말 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마리네뜨는 에스미가 많이 누그러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미라큘러스의 힘이라기보단 친한 친구로서 느끼는 직감에 가까웠다.


책가방을 챙겨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온 마리네뜨는 교정을 거슬러 걸어가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대번에 기분이 좋아졌다.



“펠릭스!”



우울했던 기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에 하트를 그리며 펠릭스에게로 달려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명 마리네뜨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펠릭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근처에 있던 나무에 가만히 손을 댔다가, 뗐다.


손끝에서 나오는 검은 오오라가 파우더처럼 나무에 뿌려지자 손끝이 닿은 부분의 나무줄기가 살짝 건조해졌다. 동시에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있던 사과 하나가 휘청 흔들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잔뜩 미소를 뿌리며 뛰어오던 마리네뜨가 어느덧 나무 밑까지 다가왔다. 앞서가는 펠릭스를 어떻게든 따라잡으려 더욱 빨리 뛰기 위해 다리에 박차를 가려던 마리네뜨는, 싸한 예감에 저도 모르게 급제동을 걸었다.


마리네뜨가 멈춰서자마자 정확히 마리네뜨의 바로 앞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잡아챘다.


초록색 사과였다. 붉은 끼가 살짝 도는 걸 봐서는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이 분명한.



“어라? 왜 사과가 떨어졌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다시금 앞을 쳐다본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헉, 어디 갔지?”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펠릭스는 유유히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마리네뜨의 더듬이가 마리네뜨의 기분마냥 추욱 늘어졌다.


오늘도 놓쳤네.



“그렇게 매정하게 가버릴 건 없잖아!”



입을 불퉁하게 내밀며 투덜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은 그래도 방금 전보다는 훨씬 편안해 보였다. 이미 가버리고 없는 펠릭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또 놓치다니.


그러고 보니 요즘 자주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야. 발견했다 싶으면 꼭 이렇게 무슨 일이 생겨서 놓치게 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만.


울상을 지으며 마리네뜨는 들고 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지금은 딱딱하고, 살짝 시큼한 맛이 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달콤해질 사과를.









파리 5구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


세계 3대 자연사 박물관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는 이 자연사 박물관은 자르딘(Jardin Des Plantes)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식물정원과 동물원, 인류학 박물관으로 나뉘어 있다. 생물표본, 광석, 화석 등을 약 6000만점 소유하고 있으며, 식물 표본만도 800점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는 이 거대한 박물관에는 오늘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관광객들은 물론 파리 시민들까지도 나들이를 할 때는 여지없이 이 곳을 찾았다. 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식물원과 동물원이 갖춰져 있어 가족끼리 놀러 오기가 좋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으면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경우도 많았다.


진화관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보이는 것은 엄청나게 큰 덩치를 가진 여러 동물들이었다. 정확히는 그 동물들을 박제한 표본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코끼리를 선두로 그 뒤를 따라 어디론가 향하는 것처럼 묘사된 수많은 동물들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키기 충반했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히야….”



몇 번을 왔지만 언제 봐도 대단하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진화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마리네뜨는 지금 자신이 이렇게 들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에스미를 놓쳤다.


정확히는 너무 들떠서 이리저리 걸어다니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정도일까?


에스미, 어디 갔지? 오늘은 그래도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았는데 또 화났을지도 모른다. 하긴 나라도 이렇게까지 멍청하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을 거 같아. 들떴던 기분이 한 번에 축 가라앉았다.


모처럼 화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 왜 이 모양일까.


안 돼, 안 돼! 우울해하지 마. 벌써 이러면 안 돼.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어떻게든 웃기 위해 애쓰던 마리네뜨는 뒤에서 나지막히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 펠릭스 이 녀석 대체 어딜 간 거지.”



어라?


뒤를 돌아보니 갈색 피부에, 삐죽삐죽 솟은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개구진 얼굴이나 활동적으로 보이는 제스처를 보면, 도저히 그 진중하다 못해 조용한 펠릭스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체 얘가 펠릭스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사실 동명이인을 부른 건 아닐까? 그렇게 의심할 찰나, 마리네뜨를 발견한 소년이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거리더니 손가락으로 마리네뜨를 가리켰다.



“어, 너 펠릭스 근처를 맴도는 그 더듬이 아냐!”

“누가 더듬이야!”



대번에 버럭 소리지르며 씩씩거리는 마리네뜨의 기세에 놀랐는지 소년은 대번에 사과했다.



“불쾌하게 들렸다면 미안해. 그럼 넌 이름이 뭔데?”

“어…?”

“이름을 알아야 부를 거 아냐? 내 이름은 앨빈. 앨빈 에반워프야.”



상큼하게 웃으며 앨빈이 마리네뜨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이내 결심했는지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말했다.



“…마리네뜨. 마리네뜨 뒤팽 쳉.”

“그래. 아, 그나저나 너 혹시 펠릭스가 어디 갔는지 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나저나 네가 어떻게 펠릭스를 아는데?”

“같은 반이거든.”

“같은 반인데 왜 펠릭스를 찾아?”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



쌈박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친구? 펠릭스랑 친구가 되겠다고?”

“어, 왜?”

“그게….”



저렇게 세상 혼자 살 거 같은 녀석이랑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그 발상이 무척 놀라워서.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기에 마리네뜨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펠릭스가 상상 이상으로 무뚝뚝하다는 사실은 마리네뜨 자신도 이미 인정하고 있던 바였다.


일단 입을 열 때가 무척 적었다. 의사표현을 해야 할 때는 어지간해서는 고개 끄덕끄덕, 도리도리, 그것도 아니면 무시. 딱 이 세 가지 패턴을 고루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싫어해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지켜보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저렇게 살면 안 피곤한가? 나라면 되게 피곤할 거 같은데.


목소리도 좋은 애가 왜 그렇게 입을 꾹 닫고 사는지 마리네뜨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이젠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그나마 말을 좀 많이 했던 건 레이디버그로서 처음 만났을 때 정도였다. 그 때는 단순히 좀 무뚝뚝한가 싶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왜 그 때는 그렇게 말이 많았던 거지?


떨떠름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앨빈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저런 무뚝뚝한 녀석이랑 친구가 되려는지 궁금한 거지?

“으, 응?”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바라보던 앨빈이 피식 웃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구나.



“일단 그 녀석이나 찾으러 가볼까? 보나마나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닐 거 같으니까.”



그 말과 함께 손을 놓고 앞장서는 앨빈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마리네뜨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그의 뒤를 쫓았다.



“짐작가는 곳이 있어?”

“프린트에서 녀석이 어디를 보는지 몰래 살펴봤지. 진화관이랑 식물원을 보고 있던데 여기 없으니 아마 식물원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어.”

“헐, 그거 사생활 침해 아냐?”

“시도때도 없이 쫓아다니는 너만 할까.”



태연하게 맞받아치는 앨빈의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가족관계에 취미까지 조사했었던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긴 좀 민망하기도 했고.



“아,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갔네. 아무튼 내가 그 녀석이랑 친구가 되고 싶은 건….”

“되고 싶은 건?”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귀를 기울이는 마리네뜨를 돌아보며 앨빈은 싱긋 웃었다.



“내가 어느 날 축구를 하고 있었거든.”

“엥?”



갑자기 이게 뭔 소린가. 그렇게 묻는 듯한 마리네뜨의 표정을 보며 앨빈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막고 큭큭 웃으며 걸어가는 앨빈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이상한 놈 취급하듯이 쳐다보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이야, 너 진짜 얼굴에 다 티난다. 혹시 너, 평소에도 생각을 얼굴에 써붙이고 다닌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냐?”

“헉, 그걸 어떻게…!”



귀신보듯이 식겁한 표정으로 자신에게서 물러나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사람이 싫다는 건 아냐. 아무튼 이야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웃어서 미안해. 너 재미있네.”



악의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감탄사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신기한 녀석이다. 얼핏 들으면 기분 나쁠 법한 소리를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소화하다니.



“재미있어서 미안하게 됐네요. 그래서?”

“그 때, 내가 공격수였거든. 결정적인 찬스를 잡고 공을 찼는데, 이게 골대를 넘어서 공원 밖까지 넘어가 버렸지 뭐야.”

“응.”

“공원 밖으로 나와서 공을 찾았는데 공이 저 도로변까지 굴러가 있었어. 일단 시합 중이라 빨리 도로로 가서 공을 주웠지. 그리고 뒤로 돌아서려고 했는데….”

“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날 잡아당기는 거야.”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이다. 강렬한 기시감을 느끼며 마리네뜨는 속으로 설마를 중얼거렸다.



“엄청 강한 힘으로 칼라를 잡아당기는데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거 있지? 진짜 열받아서 누구냐고 소리지르려던 순간에, 보고 말았어.”

“뭘?”

“자동차가 바로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쌩하게 짓밟고 지나가는 걸.”



역시나.



“진짜 코앞에서 스쳤다니까. 그거 보고 놀라서 말문이 막혀가지고 입만 벙긋거렸었지. 뒤를 돌아보니까 엄-청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을 한 녀석이 내 뒤에 서 있더라고?”



참 과격하게 구해주는 건 사람을 불문하고 똑같구나. 새삼 펠릭스의 성격을 되새기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앨빈이 그 당시 얼마나 놀랐을지도 백 번 이해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과 똑같은지 전에 없던 연대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얼굴을 보고 더 놀랐어. 같은 반인데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던 녀석이었거든. 그리고 웃긴 건 다음 날 고맙다고 하려고 찾아갔는데….”

“-그렇게 감사받을 일은 아니야.”

“헐, 어떻게 알았냐?”

“그냥….”



그랬어. 말을 얼버무리는 마리네뜨를 잠시 수상하다는 듯이 살펴보던 앨빈은 곧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 때까지는 펠릭스에 대해 별 생각 없었거든. 워낙 조용하잖아. 협조성도 별로 없고. 뭐 성격 나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었고.”

“소문이 있었어?”

“수군거리는 놈들이 몇 있었지. 하지만 난 뜬소문 따위는 믿지 않아. 뭐든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어. 특히 사람은.”



진지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하는 앨빈을 보며 마리네뜨는 새삼 펠릭스에게는 정말 이름대로 운이 따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정말로 친구가 되면 좋을 텐데.


앨빈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좀 지켜보다 보니까….”

“보니까?”

“너무 말이 없어서 뭐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는 거야!”

“어, 그거 완전 공감해!”



자신이 초반에 했던 고생을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도 그랬냐는 듯이 마리네뜨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앨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같은 반이다 보니까 대충 일과는 알겠는데, 도통 말을 해야 말이지. 근데 계속 지켜보니까 의외로 말이 없는 거 빼고는 냉정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친절한 편이다 싶더라고. 계속 귀찮게 달라붙어도 말을 험하게 하거나 그러지도 않고. 남자새끼가 징그럽게 웃는다거나 뭐 이런 말을 하는 놈들도 있는데.”

“헉, 심하다.”

“그렇지? 근데 이 녀석은 음, 뭐랄까. 딱 잘라서 할 말만 한다고 해야 하나?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쪽이다 싶더라고.”

“예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은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지 않나 싶었지.”



어느덧 두 사람은 식물원 앞까지 다다랐다. 학생증을 보여주니 이미 학교에서 입장료를 지불했는지 군말 않고 들여보내줬다. 가지각색의 나무들이 모여 녹음을 드리웠다. 식물들을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는 앨빈의 얼굴에는 선선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자신을 지나치게 억누르는 것 같은 모습이 있는 거 같아서. 비슷한 경우를 알고 있어서 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길을 걸어가던 앨빈이 아, 소리를 내며 마리네뜨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기 사람한테는 굉장히 잘 해줄 거 같잖아? 일단 사귀기는 좀 힘들더라도.”



눈을 찡긋하며 웃는 앨빈의 모습에서 마리네뜨는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래, 이 애는 블랙캣을 닮았어. 머리색을 보면 블랙캣일 리는 없지만 분위기 자체는 매우 비슷했다.



“뭐, 다 떠나서 저 녀석이 마음에 들어서라는 이유가 크지만.”

“그렇구나.”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던 앨빈은 곧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빙그레 웃었다.



“너도 그렇지 않아?”

“응?”

“그 녀석 좋아하잖아.”



그리고 말을 돌려할 줄 모르는 것도 똑같았다. 직설적으로 꽂히는 물음에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버버 거리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굴에서 불이 나는데요.”

“시, 시끄러!”

“너야말로 그 녀석 어디가 좋은데?”

“상냥한 점!”



즉각적으로 말을 뱉자마자 마리네뜨는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의외라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앨빈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마리네뜨는 중얼중얼 말을 내뱉었다.



“아, 물론 그것만 좋은 건 아니야. 얼굴도 목소리도 다 좋달까. 특히 목소리가 살짝 낮아서 되게 듣기 좋아. 계속 듣고 싶은데 말이 너무 없어서 놀라긴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해. 물론 무뚝뚝한 성격인 건 맞고, 나를 귀찮게 여기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정말 나한테 상처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걸. 그게 본인의 편의에 의한 거라고 해도. 그것도 펠릭스 나름의 상냥함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

“언젠가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두 손끝을 모으면서 발그레 뺨을 붉히며 웃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살펴보던 앨빈의 손이 마리네뜨의 머리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구 헝크러뜨렸다.



“으아앗! 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아, 이 더듬이 만져보고 싶었는데 이런 느낌이었구나.”

“당장 손 안 치워?!”



제 머리를 헝크리는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은 마리네뜨가 낑낑거리며 앨빈의 손을 치워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킥킥 웃는 앨빈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묻어났다.



“음, 역시 난 네가 마음에 들어! 잘 되길 빌어줄게.”

“흥, 니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잘 될 거거든?”

“그래그래. 그런 의미에서 저기 있네.”

“에?”



앨빈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정확히는 펠릭스 혼자만은 아니었다. 펠릭스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에스미?’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마리네뜨와 달리 앨빈은 거리낌없이 펠릭스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를 들었는지 돌아보는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질렸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펠릭스에게로 다가간 앨빈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역시 여기 있었네.”

“…대체 왜 쫓아오는 거야.”

“심심한데 같이 구경이나 다니자. 아, 시끄러운 게 싫다면 조용히는 해 줄게.”

“귀찮아, 꺼져.”

“오, 이제 말이 좀 험악해지는데?”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는 앨빈의 모습에 펠릭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앨빈이 다시금 힘주어서 말했다.



“나랑 친구하자니까.”

“안 해.”

“에이, 왜. 닳냐?”

“닳아.”

“헉, 너한테 다른 친구가 있었어?”

“어째 욕으로 들리는군.”



한 쪽은 과하게 웃고 한 쪽은 과하게 냉랭했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밸런스가 맞는 듯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리네뜨는 지금 펠릭스에게 신경을 쓸 정신이 아니었다. 펠릭스와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에스미는 마리네뜨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말없이 등을 돌렸다. 어딘지 화난 듯이 빠르게 걸어가는 에스미의 뒤를 쫓아가는 마리네뜨의 목소리를 듣고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돌렸다. 잠깐 마리네뜨를 돌아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히죽 웃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앨빈에게 펠릭스는 냉랭하게 말했다.



“뭐냐.”

“아니~ 생각보다 아예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싶기도 하고.”

“뭐?”

“너도 은근히 쟤한테 관심있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펠릭스는 앨빈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펠릭스를 앨빈은 신난 얼굴로 뒤따라가며 물었다.



“따라가도 되냐?”

“…마음대로 해.”

“와우, 네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때도 있구나!”



신바람이 난 앨빈에게 대꾸할 기운도 없는지 펠릭스는 하아, 한숨을 쉬며 앞장서 식물원을 빠져나갔다. 저렇게 보여도 정말 싫었으면 계속 꺼지라고 했을 것을 알기 때문에 앨빈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펠릭스를 따라나섰다.


한편, 마리네뜨는 계속해서 에스미를 쫓고 있었다. 말없이 턱턱 걸어가는 에스미를 따라 식물원을 한 바퀴 돌면서도 마리네뜨는 차마 에스미의 옆으로 뛰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얼굴을 보기가 무서웠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졸졸 뒤따라가며 에스미의 이름을 불렀지만 듣지 못했다는 듯이 점점 더 빨리 걷기 시작하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에스미! 잠깐만!”



기다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부르는 목소리에 에스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돌아봐주지는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마리네뜨는 우물쭈물 말을 골랐다.



“그게….”

‘꺄아아아악!’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마리네뜨와 에스미는 물론 주변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소리의 크기를 봐서는 식물원 밖에서 무슨 일이 터진 것 같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투명한 온실 벽 너머로 보이는 무수한 새 떼를 발견한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미스터 피죤!’



“밖에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진화관 로비,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앨빈과는 다른 의미로 펠릭스의 얼굴도 굳어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도 놀랐는지 웅성거리고 있었다. 펠릭스의 눈빛에 고민이 서렸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 변신해야 하겠지만 무작정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간 의심을 받을 상황이었다. 위험 속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갈 사람은 없을 테니까.


다시 식물원 쪽에서, 나름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마리네뜨는 속으로 퍽 당황하고 있었다.


이걸 어쩌지? 하필 겨우 화해할 법한 이런 순간에!


그렇다고 악당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리네뜨는 일단 에스미가 있는 쪽 길로 뛰어가려고 했다. 그 쪽이 입구랑 가까우니까. 하지만 그 순간, 에스미가 제 옆을 스쳐 지나가려는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그 순간 올려다본 에스미의 표정에 묻어나는 걱정에 마리네뜨는 순간 무척 안도했다. 아주 화난 게 아니구나. 아플 정도로 꽉 붙잡은 에스미의 손을 내려다보던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였다가, 이내 결심했는지 에스미의 팔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잠깐 화장실 가려고! 급해서!”

“야! 여기 화장실이 어디…!!”



에스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리네뜨는 재빨리 뒷걸음질쳤다가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돌다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 천장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몇 분 뒤에 나타난 입구로 뛰쳐나간 마리네뜨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지점은 확실히 식물원에서 멀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일단 급한 대로 근처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빛이 번쩍 차오르더니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레이디버그는 빠르게 악당이 있을 만한 공원의 중심부로 향했다. 비둘기들을 부리며 사람들을 마구 위협하던 미스터 피죤은 제 앞에 나타난 레이디버그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홀홀홀. 왔구나, 레이디버그!”



근데 생각보다 빨리 왔는걸?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스터 피죤의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뜨끔했지만 그런 기분을 감추려는 듯 오히려 더 기세좋게 외쳤다.



“이 망할 아저씨야! 대체 여기서 왜 행패인데?”

“흥, 저 망할 꼬맹이가 비둘기들한테 돌을 던졌다고! 사랑스러운 나의 비둘기들한테!”

“그럼 그런 짓 하면 안 된다고 달래야지 지금 이게 어른이 취할 태도냐!”

“내 맘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던지며 미스터 피죤은 손에 들고 있던 호루라기를 불었다. 미스터 피죤의 웃음소리를 닮은 이상한 울림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멈칫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어디였더라?


길게 생각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마구잡이로 제게 달려드는 비둘기들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제 가방에 손을 넣으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요!”



크게 소리지르자 굳어 있던 사람들이 으아아,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한데 모여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비둘기 떼들을 가만히 노려보던 레이디버그는 새들이 최대한 가까이 오자마자 매직박스에서 무언가를 꺼내 집어던지고 위로 날아올랐다.


촤악,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물이 비둘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차게 날아들던 비둘기 떼들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우르르 그물 속으로 파고들었고, 모든 비둘기들이 다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그물 끝을 잡고 돌돌 감아 묶었다. 좁게 갇혀 겨우 날개만 살짝 푸드덕거리는 비둘기들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마음 속으로 사과를 보냈다.


미안, 다 끝나고 나서 꺼내줄게.


남은 비둘기는 지금 미스터 피죤을 태우고 있는 녀석들 뿐이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하는 미스터 피죤에게 레이디버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네 차례야!”







“아직 싸우고 있으려나?”



박물관 뒤쪽에 있는 숲 속을 달리며 블랙캣은 자못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밖에서 싸움이 났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경비원들이 정문을 통제하고 있어서 그쪽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급하게 뒤돌아서 후문을 찾긴 했지만 자꾸만 자신을 붙잡는 진드기 녀석을 떼어내는 것만도 한참이 걸렸다.


그나마 이렇게 빨리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블랙캣 본인이 이 박물관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어릴 적부터 이곳에 자주 왔었는지라 박물관과 공원의 구조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 어디에 후문이 있고 어떤 곳에 뭐가 있는지조차 줄줄이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명한 고고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펠릭스는 펠릭스 나름대로 이 박물관을 꽤나 좋아했다.


늦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계속 달리던 중, 블랙캣의 시야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재빨리 발에 제동을 걸고 멈춰섰다.



“이런 곳에 동굴이 있었나?”



언뜻 보기에 블랙홀을 연상시킬 만큼 시커멓게 입을 낼름거리는 듯한 어두운 동굴. 처음 보는 동굴에 블랙캣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이 공원을 찾아와 산책을 해서인지 이 넓은 공원에 뭐가 있는지 대체로 파악하고 있다 자부했지만, 그런 그의 기억에도 이렇게 커다란 동굴은 본 적이 없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사람 몇은 문제없이 나다닐 법한 커다란 동굴을 가만히 살펴보던 블랙캣이 천천히 다가가서 발을 디뎌보았다.


환상이 아니다. 동굴 특유의 시원한 공기가 블랙캣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들어가 볼까? 잠깐 고민하던 블랙캣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싶었는지 결국 돌아섰다. 지금은 일단 사건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레이디버그가 왔을지는 모르겠지만.


겨우내 숲을 벗어나 공원 쪽으로 나아오자마자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보였다. 그 옆에 다발로 잡혀서 구구거리고 있는 비둘기 떼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쿡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역시 마이 레이디야. 응용력이 뛰어나다니까.


레이디버그에 이어 블랙캣까지 나타나자, 미스터 피죤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너희는 왜 이렇게 매번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나를 방해하는 거야?”

“웃기시네, 니가 우리가 있는 곳만 골라서 나타나는 거겠지. 꼬치구이가 되고 싶어서!”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던 블랙캣이 들고 있던 봉을 미스터 피죤에게로 뻗었다. 순식간에 늘어난 봉이 미스터 피죤의 복부를 찌르려고 했지만 그는 유연하게 옆으로 허리를 돌려 위험을 피했다. 하늘에만 떠다니는 것은 불리하다 싶었는지 미스터 피죤은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비둘기들에게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자, 이걸로 다시 2:2가 되었군.”



히죽 웃던 미스터 피죤이 다시금 호루라기를 불었다. 미스터 피죤을 태우고 있던 비둘기들이 블랙캣에게로 마구 날아들기 시작했다. 칫, 혀를 차면서 다른 물건을 꺼내 비둘기들과 맞서 싸우는 블랙캣을 돌아보던 레이디버그는 바닥으로 내려온 미스터 피죤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한쪽 손이랑 발을 앞으로 내밀며 권법 자세를 취하는 미스터 피죤에게 레이디버그는 달려들어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합을 주고받으며 치열하게 싸우던 중, 레이디버그의 시야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 박물관 쪽에 보이는 인영에 레이디버그는 눈을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에스미가 이런 곳에 나왔을 리가 없는데.


갑자기 순간 멈칫거리는 레이디버그의 움직임을 미스터 피죤은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있나 싶어 힐끗 주위를 둘러보던 미스터 피죤은 뛰어난 시력으로 바로 제 뒤쪽에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발견했다.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미스터 피죤이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에스미가 있는 쪽으로 손짓하며 호루라기를 입에 무는 미스터 피죤을 보자마자 레이디버그는 놀라서 미스터 피죤을 뒤로 한 채 에스미가 있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마자 블랙캣과 대립하던 비둘기 떼들이 쏜살같이 에스미가 있는 쪽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놀란 에스미가 재빨리 뒤돌아 뛰기 시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에스미!!”



거의 울 법한 얼굴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토해내며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비둘기들이 거의 에스미를 덮치려는 순간 레이디버그는 가방에서 그물을 꺼내 비둘기 떼를 향해 던졌고, 비둘기들은 그물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빠르게 달려서 그런지 그 반동처럼 발을 헛디뎌 쓰러지는 에스미에게로 레이디버그가 헐레벌떡 달려갔다.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에스미를 레이디버그는 꼭 끌어안았다.


갇혀 있던 비둘기 떼들이 풀려나자 미스터 피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금 비둘기들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에 블랙캣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봉을 꺼내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행복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다시금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던 미스터 피죤이 갑자기 멈춰섰다.



“예? 돌아오라고요? 아니 어째서~ 이제 막 재밌어지려…. 헉. 알겠습니다.”

“뭐라는 거야?”



작게 중얼거리는 미스터 피죤에 블랙캣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작아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입모양을 자세히 보니 미스터 피죤이 쩔쩔매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큭, 내가 지금 사정이 있어 물러나지만! 다음번에는 꼭 너희의 미라큘러스를 뺏어주겠어!”



원통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미스터 피죤을 보며 블랙캣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또, 또. 악당의 전형적인 대사 좀 집어치우시지. 질리지도 않아?”

“시끄러!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대사라도 추천해 주던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어때?”



농담처럼 던진 말에도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그저 하늘 위로 날아올라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을 블랙캣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쟤 왜 저래?”







머리가 무거웠다.


물 속에 빠진 것처럼 묵직하고 이상한 느낌.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아 불쾌한 기분에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쳤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려고 하니 저 위에 빛이 보였다. 빛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나아가다가….


눈을 뜨니 하얀 배경에 무언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몇 번 눈을 깜빡여보자 그게 환하게 웃는 어떤 바보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에스미는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에스미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아 안도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리네뜨가 말을 꺼냈다.



“에스미, 다행이다. 정신이 들어?”

“여긴….”

“어, 박물관 의무실이야! 다행히도 기절한 것 뿐이라고 해서 일단 네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어.”

“…요즘 잠을 잘 못 잤더니.”



별 걸로 기절같은 걸 다 해보는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후다닥 옆에 있던 물컵을 건넸다. 그 물컵을 보며 온갖 표정을 다 구기던 에스미는 한숨을 내쉬더니 순순히 물컵을 받아들었다. 조용히 물을 마시고 있는 에스미를 향해 마리네뜨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그 한 마디에 에스미의 동작이 뚝 멎었다.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는 에스미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변했다.



“미안하다고?”

“응, 내가, 저기….”

“니가 뭐가 미안한데?”

“…에?”

“대체 니가 왜 나한테 미안해야 하냐고!”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에스미를 보며 마리네뜨는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에스미의 눈가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네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미안해하고, 화를 내면 무조건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무리한 부탁을 해도 제대로 거절하지도 못하고!”

“에, 에스미?”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정말 모르겠어? 나는 말이야. 서운하다고. 왜 아니라고 말을 못해?”



얼떨떨한 얼굴로 에스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에스미가 던진 다음 말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식겁했다.



“너 지금 나한테 뭐 숨기고 있잖아.”

“….”

“그 펠릭스인가 뭐시깽이인가 하는 녀석 때문에 약속을 펑크낸 게 아니라는 거 알아. 니가 그럴 성격이었으면 지금 이렇게 매번 손해보면서 살지도 않지.”



거하게 한숨을 내쉬며 제 눈가를 꾹꾹 누르는 에스미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놀라서.


에스미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을 해! 근데 넌 매번 변명도 안 하고 그냥 웃기만 하니까….”

“에스미.”

“나도 내가 어린애같은 거 아는데, 걱정되잖아. 누가 봐도 피곤해보이는 얼굴로 멀쩡하게 있는 다른 놈이나 걱정하고 앉아있으니 내 속이 터져, 안 터져? 나는 그 자식보다 니가 더 걱정된다고!!”



짜증스레 미간을 구기던 에스미가 휙 고개를 돌려 마리네뜨를 쳐다보았다. 그 기세에 흠칫할 찰나 에스미가 천천히 마리네뜨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뭐 일이 있나 싶은데 제대로 말하려고도 하지 않고. 물어보고 싶어도 그냥 모른 척 해달라는 듯한 얼굴이나 하고 있지를 않나.”

“내가 그랬어?”

“그래. 그러면서, 누가 봐도 피곤에 찌든 얼굴로 좋아하는 남자애 얼굴 봤다고 좋아라 헤실거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열받는다고, 이 멍청아! 말을 끝맺는 것과 동시에 에스미의 손이 짜증스레 마리네뜨의 볼을 쭈욱 잡아늘렸다. 마리네뜨가 바둥거렸다.



“에으미…. 아프어어….”

“너는 내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어?”



손을 탁 놓으며 에스미가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가 친구가 된 이후로 너는 정말 터놓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없잖아. 내가 네게 차갑게 굴어도 네가 화냈던 적이 있어? 늘 내 눈치를 보듯이 망설이고 고민하기만 했지.”



말문이 막혔는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불합리하게 굴면 너는 화를 낼 권리가 있어. 한쪽만 양보하는 관계가 어떻게 건강한 관계야?”



할 말이 없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생각대로 실천하기가 너무 어려울 뿐이지.



“너는 너랑 오래도록 알고 싶으니까, 조금씩이나마 좀 욕심을 부려줬으면 좋겠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다음에도 계속 이러면 진짜 더 혼날 줄 알아.”

“이, 이보다 더?”



지긋이 자신을 노려보는 에스미의 눈빛에 마리네뜨는 더는 말하지 않고 깨갱 꼬리를 내렸다.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 걸 아니까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 생각났다. 예전에 에스미랑 싸웠을 때.


그 때도 나는 이랬었던 것 같다. 에스미가 뭐에 화났는지도 모르고 그저 내가 잘못했나 싶어 무조건 사과부터 했었지.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에스미가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었다.


내가 더 미안해, 라고.



“……고마워.”



한참을 망설이다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는 마리네뜨를 그저 빤하게 쳐다보던 에스미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까, 펠릭스인가 뭔가 하는 걔 만났을 때 말이지.”

“응?”

“전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대화나 좀 나눴을 뿐이야.”

“응!”



해맑게 웃으며 전혀 의심같은 거 없고 무조건 널 믿는다는 표정을 짓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에스미는 저걸 진짜 어떻게 가르쳐서 세상에 내놓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해야만 했다. 무방비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저러다 누가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냥 체념하듯 받아들일 것 같아서 더 열받는다.


체념, 인가.

떠오르는 금발의 누군가에 에스미는 가만히 인상을 찌푸렸다.


그 녀석을 마주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사라진 마리네뜨 녀석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던 중, 식물원에서 그를 만났다.


‘내 이름은 에스메랄다 세자르. 마리네뜨의 친구야.’


무시하고 돌아서려는 녀석의 앞을 가로막고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은 냉전 상태라지만 어쨌든 친구는 친구니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동자는 예상했던 만큼 냉혹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감정이 풍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 녀석한테 나 좀 그만 쫓아다니라고 말해.’


방금 했던 생각 취소. 툭 내뱉는 한 마디가 저리 매정하다니. 짜증스레 눈살을 구겼지만 이런 제 표정에도 녀석은 동요 하나 없었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이 덤덤한 그 태도에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왜 마리네뜨가 너 같은 녀석한테 목을 매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홧김에 내뱉었더니 딱딱하던 눈매가 아주 일순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그에 조금 놀라려던 찰나 녀석이 천천히 입을 벙긋거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피식 조소하는 그 얼굴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 녀석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는 듯한, 그런 얼굴.



“…뭐, 생각보다 나쁜 녀석은 아닌 거 같으니까.”

“응?”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에스미는 한숨을 내쉬며 마리네뜨를 째려보았다. 이 바보는 어쩌다 저렇게 딱 보기에도 복잡해 보이는 녀석한테 꽂혀가지고 제 속을 뒤집는 걸까.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문제겠지만, 만약 정말 사귀게 되더라도 꽤나 마음고생 하게 생긴 타입이다. 본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더라도 이 녀석은 듣지 않겠지.


그 때의 대화를 들려주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말하더라도 어차피 마리네뜨는 그 녀석을 계속 쫓아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더 걱정할 법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다. 에스미가 아는 마리네뜨는 그런 타입이었다. 무언가를 쉽게 바라지 않지만 바라는 것에는 집념이 엄청나다. 어찌 되었든 중간에서 포기할 만큼 어중간한 성격이 아니다. 분명 마지막까지 가보려고 하겠지.


설령 그 끝이 어떻더라도.



“…대답은 대충 알았으니까.”

“응? 뭐라고 했어?”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마리네뜨에게 손을 뻗었다. 또 볼을 꼬집히나 싶어 긴장하던 마리네뜨는 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에 금세 긴장하던 얼굴이 풀리고 예쁘게 웃는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는 복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기절하기 직전에 유독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마지막에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와 얼굴. 어떻게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었을까. 믿을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걱정되지만 묻지 않기를 바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묻어주는 것 뿐이다.


“어쨌든 조심해 뭐든. 알았어?”

“네!”


충성! 그렇게 말하며 한 손을 올려 경례를 하는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공원의 반대쪽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들 공원 한가운데서 벌어진 소동에 정신이 팔려 있을 즈음, 조용히 박물관 안에서 빠져나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상체는 검은색에 하체는 하얀색, 흑백의 의상을 입고 광대처럼 양쪽 눈에 눈물점 화장을 한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목표물을 확보했습니다.”



남자의 오른손이 제 손에 들린 손바닥보다 약간 더 큰 나무상자를 꽉 움켜쥐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던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지금 돌아가죠.”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지붕 위에 있던 남자는 박물관 뒤쪽 숲으로 뛰어내려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펠릭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혹여 제 기억력에 문제가 있나 걱정되어 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보고 봐도 여기가 분명했다. 자신이 처음 그 커다란 동굴을 발견했던 장소는.


그런데 지금 그 동굴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때 잠시 꿈을 꿨나, 싶을 정도로 절벽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광경에 펠릭스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꿈을 꿨을 리는 없다. 잠깐 안에 발을 디딜 뻔도 했으니까. 게다가 그 동굴은 사람 몇 명이 지나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컸다. 그런데 그런 큰 동굴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쎄한 느낌이 들었다.


저 절벽 뒤에 뭔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무력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이 동굴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작정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위험했다. 그리고 펠릭스는 본능이 울리는 신호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드는군.”



낮게 중얼거리는 펠릭스의 머리 위로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


자캐가 많이 나와서 좀 민망하네요. 하지만 꼭 넣어야 하는 에피소드라고생각해서 넣어봤습니다 ㅇㅇ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마리네뜨와 에스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무조건 메인 애들만이 주인공처럼 나오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바꿔 말하면 펠릭스와 앨빈의 에피소드도 나올지도 모르죠. 근데 이 둘은 그렇게 싸우기에는 둘 다 상당히 어른스러워서 그런 일은 없을 거 같네요. 사실 이 에피소드의 축이 펠릭스-앨빈, 마리네뜨-에스미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


역시나 한결같은 펠릭스! 참 쓰면서도 사람에 서툰 녀석이다 싶어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집니다... 가엾어서 그런지 쓸수록 더 좋아지기도 하지만요.


원래 본편에서 마리네뜨-알리야, 아드리앙-니노 구도가 아닌 다른 친구 구도를 짜낸 이유는 아무래도 애들 성격이 다르고 배경도 다르다보니 그에 맞는 친구들이 필요하겠다 싶어 창조한 거랍니다. 에스미도 그렇지만 앨빈이 특히 그렇죠.


앨빈의 경우는 되게 활발하고 조금 막가파적인 성격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어느 샌가 제 취향의 훈남이 되어 있네요OTL 근데 제 남최애는 펠릭스가 맞습니다 얘가 후반부에 정말 개쩔게 멋있어지기 때문에ㅇㅁㅇb 아 이거 스포이려나(땀땀


펠릭스에게 이런 애를 붙인 이유는 자신을 억누르고 사는 펠릭스를 이해해줄 만한 이해자가 한명쯤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아드리앙과 달리 펠릭스는 친구같은 건 필요 없다는 느낌으로 지내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니노같이 마냥 소년스럽고 천진한 타입이었으면 펠릭스는 절대 깔끔하게 무시하고 지내기만 했을 겁니다. 앨빈은 펠릭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지만, 지켜야 할 선은 상당히 칼같이 지키는 타입에 속합니다. 아직 설정이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앨빈은 원래 스킨십이 많은 편인데, 펠릭스에게는 농담삼아서라도 터치를 전혀 하지 않죠. 펠릭스가 그걸 꺼린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진짜 많이 신경썼습니다 묘사에 ㅇㅇ


그래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습니다. 오히려 앨빈의 친구들은 얘가 왜 펠릭스처럼 음침한 녀석에게 저렇게까지 접근하는지 이해를 못 할 정도죠. 근데 앨빈도 은근 마이페이스라서(...) 주변이 뭐라든 신경 정말 안 씁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넉살좋게 펠릭스한테 붙어있는 거겠죠? ㅎㅎ


성장하기 위해서 관계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면 그만큼 사람도 많이 변하니까요. 단순히 애정 관계뿐이 아니라 친구관계도 많은 영향을 끼치죠. 제가 이 글에서 지향하는 지향점이 마리네뜨와 펠릭스의 성장이고, 제가 해석한 두 사람의 성격은 사실 그렇게 적극적이거나 직설적인 타입들이 아닙니다. 이런 타입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직설적으로 직언을 꽂는 사람들이 좀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기에, 캐릭터들을 이렇게 짰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회당 후기를 적고 싶었지만 그럼 페이지가 너무 길어지겠죠. 5화는 아무래도 좀 편하고 즐겁게 쓴 화이다 보니 이것저것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선보다도 일단 주변의 관계를 돌아보는 화이다 보니까요. 초반에 에스미가 왜 저러나 싶으셨던 분들도 계실텐데 제대로 이해가 되었기를 바라겠습니다 ㅇㅇ!


아, 초반에 사과가 떨어지는 장면은 예전에 봤던 컨셉아트에서 채용한 겁니다. 요즘 자신을 직감적으로 잘 찾아내는 마리네뜨에 대항해 고대의 재앙 능력을 써서 마리네뜨에게 빈틈을 만들어 따돌리는 펠릭스! 하하 이 컨셉아트 정말 좋아해요^ㅁ^


후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하며, 내일 마지막 6화와 수량조사가 올라옵니다 ㅎㅎ 아마 선입금을 받는다면 25일에 폼이 올라올거예요 ㅇㅇ


감상은 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ㅅㅎ!

Posted by I.R.E
,

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3





Episode 4.

비눗방울과 환상





“야, 저리 안 가?!”



휘휘 손을 흔들어 모여드는 비둘기들을 쫓아내는 블랙캣의 얼굴에 질렸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쫓아도 쫓아도 계속 달려드는 모양새가 아주 저 악당 녀석이랑 판박이라고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공중을 날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블랙캣에 비둘기들이 몰려 있는 틈을 타 레이디버그가 던진 요요를 가볍게 피하면서 히죽 웃고 있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은 참으로 얄밉기 짝이 없었다. 두 히어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홀홀홀홀~~”



듣기에 매우 거슬리는 이상한 웃음소리도 한 몫 했지만. 



“아, 저거 진짜 열받네!”

“거기 서!”



봉과 요요를 던졌지만 삽시간에 방패처럼 모여든 비둘기 떼에 튕겨져 나왔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려는지 뒤로 슬슬 물러나는 미스터 피죤을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던 블랙캣이 다시금 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이건 어떠냐!”



블랙캣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가방에서 꺼낸 것은 몇 사람은 간단히 가둘법한 커다란 철창이었다. 작은 가방에서 천천히 나오기 시작하는 거대한 철창에 레이디버그는 물론 미스터 피죤도 경악한 표정으로 블랙캣을 쳐다보았다. 힘들이지 않고 철창을 두 손으로 든 블랙캣이 미스터 피죤에게로 철창을 던졌다. 야구공을 던진 것마냥 빠르고 묵직하게 날아오는 철창에 기겁하며 우왕좌왕하던 미스터 피죤은 아주 간발의 차이로 방향을 바꿔 철창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다.



“야, 거기 서!”



더 이상 지체했다간 더 엄청난 게 나올 거라 생각했는지 재빨리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을 분한 듯이 쳐다보던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찰칵찰칵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수첩과 카메라, 방송국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레이디버그! 블랙캣! 렉스프레스 잡지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좀 해주세요!”

“라우토 저널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여지없이 악당과 싸워 물리치고 계시는데요, 소감 한 마디 좀 해주세요!”

“BBC에서 단독 인터뷰를 신청하고 싶은데요!”

“워싱턴포스트입니다. 파리를 위협하는 악당에 대한 논설지를 예정 중입니다만, 코멘트 한 마디만 해주세요!”



우르르 달려오는 사람들의 무리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난처하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곧 서로 짰다는 듯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아, 죄송해요! 지금 바빠서 이만!”

“다음에 보자구!”



살짝 손을 들고 거절의사를 표하며 잽싸게 사라지는 두 히어로를 잡을 수 있는 능력자는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하늘로 뛰어올라 모습을 감춘 히어로들을 망연히 바라보던 기자들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분통을 터트렸다.



“오늘도 또 놓쳤어!”

“하여간 진짜 끈질기다니까. 몇 번을 인터뷰 요청해도 죄다 퇴짜를 놓는 걸 보면.”

“아하하, 그렇게 따지면 우리야말로 제일 끈질긴 거 아닌가? 솔직히 이래놓고 다들 히어로들 관련 기사를 쓸 거면서.”

“눈치챘나?”



큭큭 웃던 한 여성 기자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물었다. 담배 끝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더니 한 모금 빨았다. 아지랑이처럼 공중으로 흐늘흐늘 날아오르는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며 기자는 살짝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 보니 유투브에 영상이 엄청 떠돌아다니던데? 화질은 별로 좋지 않지만.”

“아, 그건 나도 봤어. 다들 믿기지 않는지 댓글란에 합성 아니냐는 의혹이 한가득이던데?”

“하하, 직접 볼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다들 직접 보면 그런 소리 쏙 들어갈 텐데. 기자생활 하면서 이런저런 일들 많이 봤지만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라 조금 설렐 정도라고.”



어릴 적 사라졌던 동심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사람 좋게 웃기 시작하는 남자에 동조하듯 다들 웃기 시작했다. 서로 경쟁하는 관계기는 하지만,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들을 직접 쫓아다니는 동질감 때문인지 기자들은 이제 겨우 몇 번 마주친 사이임에도 마치 몇 년을 같이 일한 동료같다는 느낌을 서로에게서 받고 있었다.



“맞아, 그래서 더 쫓아다니는 건지도 모르지. 지금 저만한 특종감이 없기도 하고.”

“하긴, 악당을 인터뷰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맞장구를 치며 낄낄 웃는 기자들의 머리 위로 하이얀 햇빛이 반짝거렸다.

좋은 날씨였다.




///



“피곤하다….”



책가방을 메고 등굣길을 걸어 올라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중얼거리던 마리네뜨가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캬악! 그 인간은 왜 시간이 없을 때만 나타나는 거야!”



크게 소리를 질러대는 마리네뜨를 주변에서 이상하다는 듯이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에 민망해졌는지 살짝 볼을 붉히고 뺨을 긁적대던 마리네뜨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제는 일찍 끝나서 다행이다. 블랙캣이 열받은 얼굴로 철창을 집어던질 때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믿지 말라는 건 아니야.’



블랙캣을 떠올릴 때마다 벌써 2주도 더 전에 티키가 했던 이야기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솔직히 아직 어떻게 판단할 단계는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까 더 조심해주길 바라는 거야. 마리네뜨, 난 네가 상처받을까봐 걱정이 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티키를 보며 알았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조금 반신반의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만날 때마다 별로 문제는 없었으니까. 평범하게 파트너로서 같이 싸우고, 끝나면 바로 헤어지고.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티키의 말대로라면 그것도 다 계획된 행동이라는 걸까?


아, 모르겠다. 붕붕 고개를 돌리며 생각을 쫓아내려 애썼다. 가뜩이나 지금 히어로 일만도 골치가 아픈데.


결국 히어로를 하겠다고 결심하기는 했지만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스터 피죤은 생각보다 더 자주 나타났고 그만큼이나 끈질겼다. 한 번 상대하면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나타나 도발하듯 싸움을 거는 그를 보고 있자면 어떤 때는 그냥 자신에게 향하는 관심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홀홀홀 웃고 있는 미스터 피죤의 얼굴을 떠올리자 짜증으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니, 이 인간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왜 이렇게 자주 나타나냐고!

하긴,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라 말이지.


두 번째로 나타났던 미스터 피죤을 상대할 때 경찰에서 들어왔던 지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놀라웠다. 문제는 경찰차 수십 대에 무장까지 하고 나타났지만 비둘기 떼들 때문에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이지만. 오히려 부상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결국 자신들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엔간해서는 뒤로 피해 있으라고 당부를 해야 했다.


본인들이 무력하다는 것에 상당히 기분이 상했는지 경찰들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알겠다고 약속해줘서 다행이었다.



“호크모스라….”



자신과 같은 미라큘러스를 가진 사람. 자신이 가진 상징이 무당벌레라면 그쪽은 나방이라고 했다. 실제로 사진을 찾아보니 상당히 큰 크기의 나방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티키의 말로는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줘서 그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자라고 했다.


같이 미라큘러스에 선택받았는데, 그런 사람이 왜 파리에 혼란을 일으키는 걸까.


어째서?


터벅터벅 교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자신을 앞서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발견한 마리네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저렇게 곧게 뻗은 자세로 걸어가는 사람은 마리네뜨가 아는 한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럭키! 오늘은 그래도 재수가 좋네. 같이 등교하다니.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마리네뜨가 크게 소리쳤다.



“펠릭스!”



반응이 없었다. 뭐 이 정도는 늘상 그랬기 때문에 별 감각이 없었는지라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소리내어 그를 불렀다.



“펠릭스으으으!”



일부러 길게 소리를 뽑아내며 불렀음에도 전혀 돌아보는 기색도 없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에스미, 에스미.”

“왜 불러.”



잡지를 읽고 있는 에스미의 얼굴은 상당히 시큰둥했다. 그래도 듣지 않고 있는 건 아닌지 즉각 대답을 던져주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정말 완전 이상해! 하는 듯이 과장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펠릭스가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아?”

“직접 보지도 않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그냥 평소랑 똑같은데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



또 시작이냐는 듯이 무심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기는 에스미를 쳐다보며 마리네뜨가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아침에 펠릭스를 만나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이름을 불렀는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라구.”

“드디어 널 아예 무시하기로 결심했나 보네.”

“아냐, 그렇다고 보기엔 평소랑은 조금 느낌이 다른 거 같아서.”

“…하여간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지.”



묘하게 차가운 에스미의 목소리에는 다소 불만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물론 여전히 펠릭스에게 정신이 쏠려 있던 마리네뜨는 그런 에스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일일까? 조금 걱정돼.”

“어련히 잘하시겠지. 최소 너보다는 똑부러졌잖아.”

“헉, 내가 그렇게 물렁한 이미지야?”

“그간 너의 행동을 돌이켜보지 않을래?”



딱 잘라 말하는 에스미에게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헤실헤실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돌아보더니 에스미는 한숨을 쉬며 보고 있던 잡지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

“응?”

“너, 너무 펠릭스한테 정신 쏟는 거 아니야?”

“어….”

“첫사랑이라 네가 더 허둥댄다 싶기도 했어. 근데 너무 매달리는 거 아니야? 사랑이 밥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특히, 요즘 너 학교에서가 아니면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며칠 전에 약속한 것도 갑자기 펑크냈었잖아.”

“엇, 아 그게….”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데록데록 굴러갔다. 요즘 펠릭스를 쫓아다니느라 에스미와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었기에 마리네뜨는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 약속은 그런 게 아니라 미스터 피죤 때문이었는데….


약속을 나가기 직전, 마침 미스터 피죤이 나타났다는 걸 티키가 감지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약속을 취소하고 히어로로 변신해야 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기에 마리네뜨는 하하 웃으며 애써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그러고보니! 요즘 범죄가 좀 늘어난 거 같지 않아?”

“악당이라면 레이디버그랑 블랙캣이 알아서 해주겠지. 몇 주 전에 유투브에 동영상까지 떴잖아?”



무심히 중얼거리는 에스미의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우려했던 대로 동영상을 찍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에펠탑 사건 당시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미스터 피죤을 상대하던 동영상이 며칠 뒤 유투브에 올라왔다. 업로드가 되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몰고온 이 동영상은 조회수가 3일만에 몇백만을 찍었으며, 온갖 나라의 언어들이 댓글란에 가득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이게 말이 되냐고, 진짜가 아니라 합성인 거 아니냐고 묻는 댓글들도 간간히 보였다.


합성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에스미가 이런 분야에 별로 흥미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사실 에스미가 눈치를 채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악당도 악당인데, 여러 가지로 범죄 기사가 많이 뜨는 거 같아. 아침에 뉴스를 보면 누가 죽었다느니, 성폭행 사건이 터졌다느니 별 개 다 나오는걸.”

“세상이 그만큼 흉흉해졌다는 증거겠지. 이젠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악당까지 나오고, 드디어 이 거지같은 세상이 망하는 건가.”



냉랭한 말투에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에스미를 불렀다.



“에스미…? 화났어?”

“별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그 속에 타오르는 검은 기운을 읽어낸 마리네뜨는 금방 꼬리를 말았다.



“미,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내가 뭐에 화났는지는 아는 거야?”

“그건….”



더듬이를 추욱 늘어뜨린 채로 답을 찾지 모해 쩔쩔매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대로 생각해봐. 내가 왜 이러는지 말이야.”




///



청회색 눈동자가 하얀 구름을 쫓고 있었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펠릭스의 모습을 몇 명의 여자아이들이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곧게 펴진 등이나 반듯한 자세는 역시 펠릭스다 싶을 정도로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남녀를 불구하고 이런저런 말이 돌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펠릭스는 몇몇 여자애들에게는 꽤 인기가 있었다. 말수가 적기는 했지만 딱히 지위를 내세워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고, 걸려오는 시비는 다 유연하게 쳐냈다. 그 쿨한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다가올 용기가 없어서 조용히 펠릭스를 지켜보기만 하는 여자애들도 많았다. 늘 전교 1등을 꿰차며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수재였지만 성적이 좋다고 상대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누구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무시했다.



“하아.”



요즘 들어 자꾸 멍하게 있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붉은 잔상에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그런 여자를 떠올리고 있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써 딴 데로 생각을 돌리려고 책을 펴들었지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은 소년을 다시금 잡아먹고 세력을 키웠다. 붉은 가면을 쓰고 밝게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는 듯한 미소에 주변에서 조용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조차 펠릭스에게는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이 가는 여자이긴 했지.


강도를 잡던 그 순간의 모습이 뇌리에 사진으로 찍힌 것처럼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벌써 한 달은 지나버린 순간이 이토록 마음 한 구석을 잡고 놓아주지 이유는 무엇일까.


살짝 빨개진 것 같았던 얼굴도, 평소라면 바보같다 생각될 정도로 더듬거리는 말투도, 자신을 관찰하듯 훑어보는 시선도 전혀 싫지 않았다. 블랙캣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요령이 없는 타입인지 사람과 대화할 때 쩔쩔매는 모습조차도 거슬리기보단 오히려 귀엽다고 느껴졌었다.


당당한 미소로 자신을 응시하는 푸른 시선이 좋았다. 에펠탑 사건 당시 레이디버그가 왜 따라오냐고 질문했을 때, 내버려둘 수 없어서라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진심이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이 든 적이 있었던가?


고맙다는 한 마디가 정말로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아온 자신으로서는 참으로 이례적이게도.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당초의 목적대로 어떻게든 신뢰만 얻어내면 될 것을. 이용하고 끝내면 될 일이 아니었던가?


살짝 오른손을 들었다.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고양이 모양의 반지를 가만히 살펴보는 펠릭스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반지는 생각보다 무척 성가셨다. 어느 정도 컨트롤은 물론 가능했지만, 너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면 지 멋대로 발동할 때가 있어서 늘 마음에 평정심을 가져야 했다. 다행히도 어릴 때부터 감정 컨트롤은 익숙했는지라 느긋하게 넘기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매번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제일 골치아픈 건 시끄러운 녀석이 따라왔다는 것이다. 외관은 고양이를 닮았지만 고양이는 차라리 혼자 조용히 놀기라도 하지. 시끄럽기만 하면 좋은데 장난치는 것까지 좋아하니 더 정신이 없었다. 그것도 익숙해지니 이제는 그저 체념하는 수준에 다다랐지만, 가끔씩 조용하던 일상이 그립고는 했다.


그래서 접근한 것일 뿐이었는데.


얼굴을 떠올리고 있으면 진정이 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고 싶었다. 언제나 웃었으면 좋겠고 세상의 더러움같은 건 전혀 몰랐으면 했다. 하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니 분명 여러 문제들이 터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혹여 상처받을까 걱정되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심장소리가 템포를 올리듯 조금씩 빨라진다. 밝게 웃으면서도 가끔 짓는 처연한 표정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자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의지와 상관없이 뻗어지는 손에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괜찮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더 가라앉기만 한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난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좋아해!’


해맑게 외치며 자신을 따라붙던 검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감정적으로 덤벼드는 인간은 피곤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취향이 아닌 상대이기도 했다.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지?


‘사랑이란 계산되는 감정이 아니야.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누군가의 옆에 있고 싶다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 사랑은 아닐지라도 사랑에 무척 가까운 감정일 거야.’


오래 전에 잊혀졌다 생각했던 그리운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만 같은 감각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펠릭스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내가 그 여자를?




///



“하아아…….”



학교가 끝나고 여느 때와 같이 시내를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지친 것처럼 상당히 수척했다. 기나긴 한숨소리에 티키가 살짝 자켓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마리네뜨?”

“아무것도 아냐. 그냥 왠지 좀 피곤해서.”



요 며칠 새 운동을 많이 해서인가? 운동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격하다 싶기는 했지만. 비둘기를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자마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제 나타났었으니 오늘은 제발 나타나지 말아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다가 마리네뜨는 순간 스쳐가는 불길함에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 큼직한 돌멩이가 마리네뜨의 발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갔으면 꼼짝없이 밟고 넘어졌겠지.


마리네뜨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감이 좋아지니 편하네.”

“그렇지?”

“응. 이러다가 이 힘에 너무 의존하게 될까봐 겁날 정도로.”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올려다보며 티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건 마리네뜨 네 안에 있는 가능성이야.”

“내 안의 가능성?”

“응. 미라큘러스는 그 사람 내면의 힘을 끌어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그게 좋은 면인지, 나쁜 면인지는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을 끌어내주지.”

“하지만 난 원래 운이 없는걸.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아마 파리 시내에서 나만큼 재수가 없는 애도 없을 거야.”



피곤해서일까. 기운이 없어 보이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신감을 가져, 마리네뜨. 미라큘러스는 네게 잠재되어 있는 힘을 끌어내주지만, 결국 그 힘의 본질은 너한테 속해 있어.”



티키가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만약 사과를 먹고 싶은데 칼이 없잖아? 미라큘러스는 말이지, 그 사과를 갈아서 주스로 만들어주는 것과 똑같아. 도구와 같다고 보면 돼. 먹기 편해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래 재료인 사과까지 미라큘러스가 만든 건 아니잖아. 사과를 가지고 있는 건 너니까.”

“….”

“설령 미라큘러스가 네게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 힘이 네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는걸. 열심히 다듬다 보면 미라큘러스라는 도구가 없더라도 사용이 가능해지는 날이 올 거야.”

“…그런 걸까나?”

“그럼!”



당연하다는 듯이 싱긋 웃는 티키의 미소를 보며 조금은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마리네뜨는 살며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하긴 있을 때 누려야겠지? 물론 의존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마리네뜨가 편한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해. 모든 건 너의 선택이니까.”

“그래.”



즐거운 듯이 푸흐흐 웃음을 터트리던 마리네뜨의 어깨를 무언가가 세게 치고 지나갔다.



“아얏!”



마리네뜨에게 부딪혔던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힐끗 눈을 돌리더니 사과도 없이 빠르게 마리네뜨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화를 내려다가 다시 뒤에서 다가오는 인파에 마리네뜨는 재빨리 인도 안쪽으로 물러나는 것에 성공했다.


아주 재수가 없지 않은 건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중 느껴지는 기시감에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나저나 요즘 이상하게 거리에 사람들이 늘어난 거 같은데. 내 착각인가?”



사람이야 늘 많았지만 평소보다 더 붐비는 듯한 느낌이 든다. 착각인가 싶다가도, 사람에 부딪힐까 걱정되서 이렇게 안쪽으로 붙어야만 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대충 주위를 둘러봐도 외국인이 좀 많았다. 요 며칠 사이 계속 이랬던 거 같은데, 어째서?


이유가 뭘까. 가볍게 고민하던 찰나 꺄르르 웃는 목소리가 귓가에 푹 꽂혔다.



“정말 여기에 오면 히어로를 만날 수 있는 거예요?”



히어로?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뚝 정지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자, 어른들 사이에서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들 여럿이 눈에 띄었다. 보아하니 관광객들인 모양이다. 파리에 관광객이 오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그건 뭐 그러려니 했지만, 방금 전 발언은 뭔가 싶어 마리네뜨는 재빨리 발을 놀려 그들의 말소리가 들릴 법한 거리까지 접근했다.


가이드를 둘러싸고 꺄아꺄아 떠드는 아이들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정말로 히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옆에 있던 다른 남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저 알아요! 인터넷에서 봤어요. 이상하게 생긴 아저씨랑 붉은 옷 입은 누나가 싸우는 거!”

“검은 고양이 잠옷을 입은 형도요!”



풉.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가 마리네뜨는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너무 웃겼다. 고양이 잠옷이라니! 블랙캣이 들었다면 무척 어이없어했을 게 분명했다. 울상을 지으며 너무한다 소리칠 블랙캣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같이 활동할 때마다 느끼지만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는 녀석이었다. 발상도 참 거침없었고. 아니, 물론 가방에서 뭐든 꺼낼 수 있다지만 설마 거대한 철창을 꺼내서 던진다는 미친 발상을 하는 또라이가 있다니. 심지어 모양도 새장이었어.


새장에 갇혀 있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상상하자 또 다시 웃음보가 터졌다. 너무 웃겨서 한참을 조용히 킥킥거리다가 낭랑한 어조로 질문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마리네뜨의 귀를 간질였다.



“그래서 히어로는 어디 있어요?”

“악당이 나타나지 않으면 볼 수 없단다~”

“에에-!! 히어로 보고 싶어요, 히어로!”



땡깡을 부리는 아이들을 애써 달래는 가이드를 가만히 지켜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웃었다. 저 아이들은 모르겠지.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히어로가 바로 몇 걸음 옆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어서 집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천천히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즐겁게 떠들고 있는 아이들을 스쳐 지나가던 푸드득, 요란하게 들리는 날개짓 소리에 마리네뜨는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와아….”



많은 수의 비눗방울들이 공중으로 와르르 날아오르고 있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비눗방울들에 태양빛이 닿아 잘게 부서지며 예쁜 색색깔의 빛으로 반짝거렸다. 이 많은 비눗방울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생각지도 못한 장관에 입을 헤 벌리고 망연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건 비단 마리네뜨 혼자만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서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비눗방울들을 경탄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히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비눗방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때였다.



“안녕~?”



위쪽에서 들려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위를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누군가가 떠 있었다.


푸른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딱 보기에도 체구가 무척 작은 게 눈에 띄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변성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차림새가 굉장히 특이했다. 팔다리에 쫙 달라붙은 짙은 하늘색의 쫄쫄이와는 달리, 상체와 하체를 동그랗고 커다란 에어슈트가 각각 감싸고 있었다. 동그랗고 반투명한 게 마치 비눗방울을 연상시키는 옅은 하늘색의 슈트였다. 등에는 커다란 통을 가방처럼 메고 있었다. 머리에는 팔다리의 색깔과 같은 하늘색의 베레모를 쓰고 있었는데, 옅은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특징할 점이라면, 그가 들고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비눗방울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올려다보던 마리네뜨는 티키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저 사람, 히어로야?”



미라큘러스의 힘으로 변신한 상대냐고 묻자 티키는 살짝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저 녀석도 만들어진 악당이라는 건가.


하지만 왜 갑자기 여기에?



“내 이름은 버블맨! 갑자기 나타나서 놀래킨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이지.”



입가에 사르르 미소를 걸고 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에 다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입을 벙긋하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버블맨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자주 나타난다는 히어로라고 부르는 녀석들 있잖아? 아, 레이디버그랑 블랙캣이랬나.”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리던 버블맨이 싱글싱글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위로 들었다.



“난 지금 무척 걔네를 만나고 싶거든. 하지만 그냥 기다리면 나오지 않을 게 뻔하잖아.”

“….”

“그러니 소동을 좀 피워야겠지?”



좌중이 침묵하는 사이에서 버블맨은 입가에 씨익 미소를 그렸다. 커다란 비눗방울채가 예고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누군가 크게 소리질렀다.



“도망쳐!!”



침묵이 깨졌다.


비눗방울채에서 나오는 무수히 많은 비눗방울들이 공중에서부터 아래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빠르게 만들어져서 달려드는 비눗방울들을 피해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개중에 도망치지 못한 몇 명은 비눗방울 사이에 갇혀서 하늘 위로 둥실 떠올랐다. 비눗방울 속에 갇히면 소리까지 모두 방음되는지 안쪽에서 뭐라 소리를 지르는데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갇힌 사람들의 가족과 친구, 연인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지노!”

“세레나!!”

“으아아아악!!”



비명소리와 절규가 시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 소동이 재밌는지 낄낄거리며 웃고 있던 버블맨의 머리로 붉은 무언가가 번쩍하며 날아왔다. 여유롭게 채를 들어 막아내는 버블맨의 바로 앞으로 붉은 인영이 날렵하게 착지했다.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를 발견한 버블맨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가 레이디버그구나?”

“너, 뭐야.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목적이 뭔데?”



비눗방울들을 피해 모두들 도망친 덕분에 시내에는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레이디버그는 손에 들고 있는 요요를 빙빙 흔들었다. 언제든지 던질 수 있게 준비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에게 버블맨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긴 왜야~ 너희의 미라큘러스를 가지러 왔지!”

“엥?”



생뚱맞은 대답에 맹렬히 흔들고 있던 요요를 바닥에 떨어뜨린 레이디버그와 달리 버블맨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걸 얻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며? 마음에 들어. 그러니 나한테 넘기라구!”



그 말과 함께 버블맨은 채를 마구 휘두르며 방울들을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요요를 휘둘러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비눗방울들을 모두 쳐내면서도, 레이디버그는 계속해서 방법을 궁리했지만 마땅히 파고들만한 틈이 없었다. 많은 방울들이 계속해서 몰려드는 통에 일단 상대가 어디 있는지부터가 파악이 어려웠고 순간의 틈을 찾기엔 방울들의 기세가 너무 매서웠다. 게다가 당장 요요를 다른 물건으로 바꿨다간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머리를 굴렸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언제 지칠 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던 찰나 갑자기 거짓말처럼 방울샤워가 멈췄다. 방울들이 사라진 너머로 보이는 것은 으악! 비명과 함께 이마를 손으로 감싸는 버블맨과, 휙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작은 부메랑이었다.


쏜살같이 날아온 부메랑을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언제 왔는지 제 옆에서 부메랑을 들고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이제야 와?”

“미안, 사람들을 좀 구하느라고.”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했는데?”

“커다란 잠자리채같은 거 하나 꺼내서 죄다 수거했어. 뭐, 일단 아래로 끌어내리기만 하면 터트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블랙캣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에 넘치는 표정을 보니 제대로 마무리짓고 온 것 같다. 블랙캣과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칭찬을 던졌다.



“그래, 잘됐네.”

“이제 늦게 온 거 용서해주는 거야?”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

“그래, 그럼 이제 어디 좀 제대로 해볼까?”



아직도 아픈지 공중에서 이마를 붙들고 버둥거리는 버블맨을 올려다보며,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각각 손에 들린 부메랑과 요요를 버블맨에게로 집어던졌다. 휘익- 소리를 내며 날아가던 물건들이 버블맨에게 닿을 찰나, 다른 쪽에서 날아온 무언가에 튕겨져 나갔다.


챙,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요요와 부메랑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히어로들이 재빨리 그것들이 떨어진 장소로 뛰어갔다. 요요와 부메랑 옆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막대가 떨어져 있었다. 재빨리 물건을 집어들고 두 히어로는 막대가 날아왔던 곳을 쳐다보았다.


지붕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버블맨이 작게 투덜거렸다.



“뭐야, 왜 이제야 와. 러스트?”



지붕 위에 있던 하얀 형체가 버블맨이 있는 쪽으로 휙 몸을 날렸다. 몇 번 공중에서 제비를 돌더니 버블맨이 만들어낸 비눗방울 위에 안착한, 러스트라고 불리는 악당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백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금발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얼굴에 역시 하얀 나비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은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를 연상케 했다.


비눗방울 위에 올라서 있던 러스트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저쪽은 말이 굉장히 많은데, 반면 이쪽은 묵묵부답이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관찰하듯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긴장태세를 갖췄다.



“그쪽도 악당인가? 저쪽이랑 느낌이 되게 다르긴 한데.”



가볍게 질문하는 블랙캣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러스트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손을 댔다. 뭐하는 짓인가 의아해하던 두 사람 앞으로 하얀 인영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윽!”



날아오는 금빛 막대를 재빨리 쳐낸 레이디버그가 반격하려는 순간 블랙캣이 재빨리 몸을 날려 레이디버그를 밀어냈다. 넘어지기 직전 레이디버그가 직감적으로 날린 요요에 손을 맞은 러스트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탁탁 손을 털고 있는 러스트를 한 번, 러스트의 주변에 있는 길들을 한 번 살펴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매끄럽게 빛나는 러스트의 주변을 보며 블랙캣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런 거였군.”

“에?!”

“저 악당, 이름이 러스트(lustre)잖아. 러스트의 뜻이 뭔지 잊어버렸어, 레이디?”

“에, 러스트라면. 윤기라던가, 광택이라던가.”

“정답. 그럼 저 녀석의 능력은 뭘까?”

“…주변을 매끄럽게 하는 거?”

“마찰을 없앤다고 하는 게 더 맞겠지. 그리고 자기가 만든 구역에서는 돌아다니는 것도 자유로운 것 같아.”

“에에, 좀 성가시겠네.”

“성가시지. 저 버블맨인가 뭔가하는 놈보다 더 성가셔.”



칫, 혀를 차며 블랙캣은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다.



“일단 저 손에 닿지 마. 아무래도 손으로 만져서 마찰력을 없애는 거 같아. 근거리전은 불리…!!”



날아드는 금빛 막대들을 부메랑으로 쳐내면서 블랙캣은 재빨리 가방을 열어 봉을 꺼냈다. 막대들을 살짝씩 몸을 돌려 피해가며 블랙캣은 봉을 길게 늘렸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봉이 러스트의 배를 정확히 찌르려는 찰나 몸을 피하는 러스트에게로 요요가 날아왔다.



“잡았다!”



요요에 꽁꽁 묶인 러스트를 보며 쾌재를 부를 찰나, 순식간에 묶여 있던 줄에서 빠져나오는 러스트를 보면서 레이디버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옆에 서 있던 블랙캣이 작게 소곤거렸다.



“안 돼. 마찰력을 없앨 수 있다면, 그런 걸로 묶어봤자 계속 빠져나오기만 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묶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쓰면 되겠지.”

“응?”

“이렇게 하자.”



블랙캣이 가만히 목소리를 낮춰 몇 마디 속삭이자 레이디버그가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뭔가 상당히 무식한 방법이네….”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근데 너, 은근히 머리 쓰는 것 같으면서도 막가파식으로 움직인다?”

“필요하다면 딱히 수단을 가리지 않을 뿐이야.”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블랙캣과 하하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를 내려다보며 버블맨은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거렸다.



“우와, 러스트가 오니까 정말 재밌어지네.”

“야! 비겁하게 공중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



분노에 찬 레이디버그의 목소리에도 버블맨은 ‘내가 왜?’ 라고 말하면서 러스트에게 손짓했다.



“러스트, 그거 좀 해줘.”



그거? 의아해하는 두 사람과 달리 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곧 일대가 순식간에 반짝반짝 매끄럽게 변하는 것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긴장한 얼굴로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지켜볼 수는 없었다. 버블맨이 갑자기 다시 비눗방울채를 휘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닥으로 쏟아지는 비눗방울들은 방금 전과는 달랐다. 사람들을 공격했던 비눗방울들은 바닥에 닿은 적이 없었고, 지면 가까이서 사람을 낚아채고 다시 하늘로 둥실 날아올랐다면 지금의 비눗방울들은 바닥에 내려앉더니 맹렬한 기세로 굴러오기 시작했다. 마치 공처럼.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달리기 시작하는 두 히어로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아아아아!”

“망할 자식, 저런 게 가능했어?!”



빠르게 쫓아오는 비눗방울도 문제였지만 바닥이 너무 미끌거려서 달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뒤를 돌아보며 짜증을 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소리쳤다.



“야, 어떡해 블랙캣!”

“일단 작전대로 간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골목으로 흩어졌다. 갑자기 쥐죽은 듯이 잠잠해진 주변에 버블맨과 러스트는 가만히, 그렇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골목에서 빠르게 튀어나오는 요요를 보자마자 러스트는 금빛 막대를 던졌다. 요요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골목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레이디버그가 러스트에게로 덤벼들었다. 주먹 휘두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맹렬히 싸우기 시작하는 두 사람 사이로 불꽃이 튀었다.


유유자적한 태도로 밑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흥미롭다는 얼굴로 구경하는 버블맨은 덤으로.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전력을 다해 덤비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러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는건 러스트 쪽이었지만 러스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상태면 분명히 금방 체력이 바닥나고 말 것이다. 실제로 레이디버그의 행동이 조금씩, 그렇지만 분명하게 둔해지고 있었으니까.


결국 영웅이라는 이름에 취한 무모한 애송이던가. 그렇게 생각한 러스트의 망막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비쳤다. 본인이 본인 몸 상태를 더 잘 알 텐데, 전혀 불리하지 않다는 듯이 씨익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에 러스트는 싸한 예감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예감과 함께 강한 발차기가 러스트의 복부를 관통했다.


한편, 버블맨은 다시금 비눗방울을 날려서 러스트를 지원할지, 재미있는데 그냥 계속 지켜볼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 중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후자가 제일 좋았지만 계속 놀기만 하는 건 좀 미안한데. 레이디버그의 발차기에 러스트가 뒤로 확 밀리는 것을 본 버블맨이 역시 거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채를 움직이려던 순간,



“Yo.”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버블맨의 머리 바로 위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투명한 무언가가 버블맨을 덮치며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는 러스트가 있었다.


쾅!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버블맨은 곧 제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러스트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버블맨은 자신들이 커다랗고 네모난 유리상자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블랙캣이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 어떠셔. 블랙캣 특제 초대형 유리감옥에 갇힌 소감이?”



마음에 들어? 피식 웃고 있는 블랙캣의 곁으로 레이디버그가 다가왔다. 상당히 힘들었는지 레이디버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짜증스레 소리쳤다.



“너 대체 왜 이렇게 늦게 나온 거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미안. 타이밍 잡기가 그렇게 힘들지 뭐야.”



블랙캣이 두 손을 모으며 사과했지만, 이번은 정말 힘들었는지 레이디버그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레이디버그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블랙캣은 놀란 얼굴을 한 버블맨을 향해 친절하게 설명을 개시했다.



“유인 작전에 걸려줘서 고마워.”

‘유인 작전이라고?’

“아무래도 너희를 잡으려면 새장같은 걸로는 어림도 없겠더라고. 조금이라도 공간이 비어 있으면 그 틈으로 빠져나갈 거 같아서 말이지. 저 러스트인가 뭔가 하는 악당의 능력대로라면 말이야.”



버블맨과 달리 묵묵히 듣고 있는 러스트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물론 그러든 말든 블랙캣은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간단히 머리를 좀 굴려봤을 뿐이야. 틈으로 빠져나간다면 틈을 아예 안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어?”



역시 자신은 천재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블랙캣을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유리를 부수려는지 들고 있던 비눗방울채를 유리에 쾅쾅 두들기기 시작하는 버블맨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으쓱거렸다.

포기해.



“이 유리상자가 우리 매직박스에서 나온 녀석이거든. 우리가 부수지 않는 한 절대 부술 수 없는 재질로 되어 있으니 허튼 저항은 그만둬.”



몇 번을 꽝꽝댔지만 흠집조차 나지 않는 유리에 버블맨은 질렸다는 얼굴로 밖에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은 버블맨의 눈빛에 블랙캣은 속으로 감탄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싱긋 웃는 블랙캣의 입가에 어려 있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나머지는 경찰서에 가서 자백하도록 하시죠.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만한 대가는 받아야지 않겠어?”




//



근처 건물 지붕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던 남자는 거리를 힐끗 돌아보던 중 주변을 돌아다니는 작은 꼬마아이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엄마를 놓치고 실수로 이 위험한 곳으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울먹거리는 얼굴로 엄마를 부르며 돌아다니는 꼬마의 모습에 무감정하던 남자의 눈동자에 연민의 빛이 아주 살짝 떠올랐다. 그도 잠시, 곧바로 손에 무언가를 쥐는 듯한 동작을 취한 그가 그것을 세게 던졌다.


정확히는 꼬마가 걸어가는 방향에 있는 가로수 쪽으로.




//


“엄마아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갓 4살은 되었을까 싶은 작은 남자아이가 엉엉 울면서 저 멀리서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엄마를 잃어버렸나? 아니, 그것보다 이쪽으로 오는 건 너무 위험한데!


레이디버그가 뭐라고 외치기 직전, 아이가 걸어오는 쪽에 서 있는 가로수가 휘청거렸다. 방금 전 레이디버그와 러스트가 격렬하게 싸운 여파 때문인지 나무가 휘청이는 소리가 녹슨 시계태엽이 굴러가는 소리마냥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제 머리 위로 커다란 그늘이 지는 것에 놀랐는지 울음범벅인 얼굴이 천천히 나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나무가 아이의 머리 위를 덮쳤다.



“안 돼!!”



앞 뒤 보지 않고 레이디버그는 아이가 있는 쪽으로 온 힘을 다해 뛰어들었다. 무기를 꺼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아이를 두 손으로 껴안은 레이디버그의 눈동자에 쓰러지는 거대한 나무 몸통이 천천히 슬로우 모션처럼 찍혔다. 피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칫!”



레이디버그가 아이를 구하러 뛰어드는 것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본능적으로 제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꺼낸 물건을 레이디버그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순식간에 부풀어오른 커다란 에어쿠션이 레이디버그와 가로수 사이를 꽉 차게 가로막았다. 나무는 궤도를 바꿔 레이디버그와 아이를 스쳐 지나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디버그는 곧 다시 울먹거리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쉬, 괜찮아. 이제 괜찮아.”



상냥하게 아이를 달래주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다행이라는 듯이 흐뭇하게 지켜보던 블랙캣은 반투명하게 변하며 사라지는 에어쿠션을 보자마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눈을 깜빡거렸다.


매직박스에서는 한 번당 하나의 물건밖에 꺼낼 수 없으며, 물건을 꺼내면 기존에 있던 물건은….


헛웃음을 지으며 블랙캣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유리박스도 사라졌지만 갇혀 있던 두 악당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블랙캣이 중얼거렸다.



“아, 이런.”



그 말과 동시에 삐용삐용 울리는 사이렌 소리들이 뒤에서 마구 들려왔다. 


곧 경찰차 수십 대가 그들의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쌌고, 덜덜 떨고 있던 아이를 경찰에게 넘기고 난 후에야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러스트가 마찰력을 없앴던 부분들은 어느 새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비눗방울들도 모두 사라졌고.


마치 한 때의 꿈처럼.



“그럼, 슬슬 헤어질까?”



방금 전 소동이 있던 거리에서 한참을 달려나온 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법한 거리의 지붕 위까지 온 레이디버그가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레이디버그를 쳐다보는 블랙캣의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지워졌다.



“레이디.”

“응?”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궁금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아까 왜 그렇게 대책없이 달려들었어? 농담이 아니라, 정말 레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잖아.”



가뜩이나 아까의 레이디버그는 미끼 역할을 하느라 체력까지 모두 다 소진된 상태였다. 자신이 돕지 않았으면 정말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이건 대체 뭐지?



“그런 생각할 틈도 없었어.”



그 대답에 깜짝 놀랐는지 블랙캣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냥 구해야겠다 생각하니까 발이 멋대로 움직이더라고.”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레이디버그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살짝 치며 말했다.



“너도 그렇지 않았어? 방금.”

“….”

“그래도 좀 대책없기는 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는 블랙캣이 이상했는지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랙캣?”



그렇구나.



“레이디. 이제 알겠어.”

“응?”



번민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그 위를 장난스러운 미소가 덮었다. 확실히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로 블랙캣은 씩 웃었다.



“나, 레이디한테 반한 거 같아.”



이걸 어쩌지?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진지한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레이디버그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웃고 싶어서 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레이디버그는 딱 잘라 말했다. 



“미안해, 아기 고양이씨. 마음은 고맙지만, 유감스럽게도 넌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돌아서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블랙캣은 레이디버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으로 머리를 쥐뜯으며 중얼거렸다.



“아, 망했다.”



저런 모습까지도 멋지다고 생각하다니.



“뭐, 그런다고 순순히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블랙캣은 씨익 웃었다.




//



살짝 빛이 들이치는 어두운 통로 안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사실 빛이라고 해봤자 정말 간간히 틈새를 따라 새어나오는 정도라 간신히 얼굴을 알아볼 정도였지만. 터벅터벅 걷고 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앞쪽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멈춰 섰다.



“아저씨?”



조심스럽게 묻는 버블맨의 목소리가 작은 통로 안에 울려퍼졌다.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긍정의 표시라는 걸 아는 버블맨이 툴툴거렸다.



“하여간 아저씨는 너무 말을 안 한다니까.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있었던 거예요?”

“….”

“우리가 위험해졌던 것도 봤겠네. 그럼 좀 도와주지. 자칫했으면 큰일날 뻔했잖아!”



툴툴거리는 버블맨과 달리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마임맨에게 러스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거리에서 소동을 피워놨으니 한동안 파리에는 관광객들이 끊기게 되겠지. 뭐, 상관없다. 그만큼 경찰은 이쪽 사건 뒷수습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딱히 큰 피해가 나지 않은 이상 외신(외국 신문)들은 파리의 실태를 알리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테러와는 다른 성격의 문제니까. 그리고, 악당들과 히어로들의 싸움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상처럼 되어야만 했다.


그게 왜 문제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파리에는 이제 더 많은 경찰들이 악당들을 견제하기 위해 전담되겠지. 그건 그만큼이나 다른 쪽에서 활동하기 편하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무슨 소리야? 목적이 달성되다니? 우리 목적은 미라큘러스를 뺏어오는 거 아니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버블맨에게 러스트는 짧게 대답했다.



“예에, 맞습니다.”



우선하는 목적이 따로 있었을 뿐.



“행동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파리라는 도시가 이 이상 주목받기를 바라지는 않으시니까요.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리는 마임맨에 답례하듯이 러스트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버블맨에게 러스트는 주의를 주었다.



“버블맨, 당신도 마임맨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삼가도록 하세요. 아직 드러나야 되는 패는 아닙니다.”

“칫, 알았어.”



투덜거리면서도 러스트의 말에 동조하는 버블맨에 러스트는 살짝, 아주 살짝 미소를 지으며 버블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마임맨에 뒤이어 두 사람도 다시금 은밀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어제는 정말 힘든 하루였어….”



언제나처럼 등굣길을 걸으며 마리네뜨는 티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살짝 걱정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뉴스를 보니까, 관광객들이 아무래도 겁을 먹었나봐.”


[전날의 사건 이후, 경찰의 보호를 요청하는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경찰 당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조치를 다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오늘 아침의 뉴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힘없이 웃었다.



“무리도 아니지.”



영화에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아무래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니까.



“그나저나 마리네뜨. 어제의 그건….”



티키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마리네뜨는 전혀 걱정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뭐 별로 상관없잖아. 이미 거절했는걸.”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래도 어쩌겠어.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계속 거절하다보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본인도 그러지 못하는 주제에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누군가가 보였다. 익숙한 갈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마리네뜨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에스미!”



에스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반갑게 부르는 마리네뜨에게서 살짝 시선을 돌렸다가, 휙 고개를 돌려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에스미를 보며 마리네뜨는 민망해진 손을 살짝 내렸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


(묘사는 차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러스트가 달려들던 씬은, 러스트가 자기 앞쪽의 길들에 마찰력을 없앤 뒤에 마치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듯이 순식간에 앞으로 확 달려나온 거라고 보시면 되요 ㅇㅇ


펠릭스는 생각보다 상당히 다혈질인 성격이라고 가정했습니다. 그 성격이 튀어나오는 게 블랙캣 버전이고요. 다혈질적인 성격을 이성으로 누르고 있는 타입이라 어찌 보면 대단하기도 한데 피곤하겠다 싶기도 하고...


마리네뜨는 사람을 좋아하고 밝은 성격이지만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매우 예민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봄 에피소드에서 나오지는 못할 거 같네요.


액션을 10페이지나 써야하니까 너무 힘드네요 읽는 분들이 재밌으셨을지도 모르겠고... 다음부턴 적당히 축약하자ㅠㅁ ㅠ 사실 액션 빼고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ㅎㅎ


착실히 작업 중입니다. 다른 마감을 그제 끝내고 4화는 어제 다 썼는데, 퇴고 때문에 오늘 올려요 ㅇㅇ



Posted by I.R.E
,

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2





Episode 3.

비둘기를 다루는 남자






파리의 어느 한 건물 안에 자리잡고 있는 사무실이 있었다.


창문에 설치된 블라인드가 모두 닫혀 있는 덕분인지 사무실 안은 상당히 어두웠다. 3인은 앉을 수 있을 법한 소파들이 테이블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소파들 바로 뒤에 문을 마주하는 자리에 놓여 있는 책상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전화를 하고 있는지 남자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뭐라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남자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웃고 있지만 왠지 싸해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그리던 남자는 이내 전화를 끊고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책상에는 파리의 주요 일간지들인 르 몽드, 르 피가로, 리베라시옹을 포함한 각종 신문들이 올려져 있었다. 성향이 각기 천차만별이고 특성도 죄다 다른 이 신문들이 이렇게나 의견일치를 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 파리 시내를 떠들썩하게 하는 이슈가 모든 신문들의 1면을 보란 듯이 장식하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파리에 등장한 수수께끼의 영웅?’


이거였다. 기사에 포함되어 있는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남자가 피식 조소를 흘렸다.


“재미있어지겠군.”





///



왜 꼭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를 않는 걸까.



“펠릭스, 안녕!”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소녀를 가볍게 무시하며 펠릭스는 제 갈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역시나 소녀는 포기하지 않고 펠릭스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상기된 눈동자, 뺨에 홍조를 띄고서 마리네뜨는 열심히 펠릭스를 훔쳐보았다. 며칠 동안 따라다녀 본 결과 펠릭스는 말을 걸든 안 걸든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하기는 하지만. 무시하는 것이 더 편한 모양인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신문을 읽고 있는 펠릭스의 옆얼굴에 마리네뜨는 시선을 집중했다. 진지한 표정이 참 멋지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헤실 웃었다. 에스미는 콩깍지라고 뭐라 그러지만 어떡해. 그래도 멋있는걸.


펠릭스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까지도 멍해 있던 마리네뜨는 그가 입을 열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저기.”

“으, 응?”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교실인데.”



어느 새 교실 앞까지 다 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정말 길다고 생각했던 복도가 왜 이렇게 짧은 걸까. 역시 사랑의 힘?


꺄악, 사랑이래! 자기가 생각하고도 좋은지 양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포옥 감싸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청회색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았다. 뭘 잘못 먹었냐고 말하는 듯한 그 시선에도 마리네뜨는 행복한 듯이 웃으며 펠릭스에게 대답을 건넸다.



“그그렇구나! 맞다, 이거. 주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허둥지둥 가방을 뒤져 커피 한 캔과 쿠키봉지를 꺼낸 마리네뜨가 펠릭스의 손을 잡고 그것들을 쥐어주었다. 놀랐는지 잠시 가만히 있던 펠릭스가 다음 순간 입을 열었다.



“받을 수 없….”

“그럼 이만 갈게. 나중에 봐!”



그것을 건네주자마자 마리네뜨는 등을 돌렸다. 크게 손을 흔들며 반대쪽에 있는 자신의 교실 방향으로 달려가는 마리네뜨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펠릭스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나중에…?”



또 오겠다는 뜻인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는 펠릭스의 손에 들린 가방 안쪽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오올, 인기 많은걸~?’

“조용히 해, 들키면 어쩌려고.”



펠릭스가 나직히 주의를 주었지만 플랙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것대로 재밌지 않을까나?’

“…까망베르 치즈 안 준다.”

‘헉, 그건 안 되지! 내 사랑 까망베르 치즈~!’

“알면 좀 조용히 좀 해. 가뜩이나 골치 아프니까.”



어쩌다 제 인생에 이렇게 귀찮은 녀석이 하나 더 끼어든 건지. 암담해지는 기분을 가눌 수가 없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재밌지 않아?’

“구경하는 너야 재밌겠지.”

‘에이, 왜? 원래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야~ 덕분에 삶이 꽤 재미있어지지 않았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런 녀석은 하나로도 벅차.”

‘솔직하지 못하구만.’



그저 재미있는지 계속 웃고만 있는 플랙의 목소리에 펠릭스는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했다. 그가 소곤거렸다.



“이제 교실에 들어가야 하니까 정말 조용히 좀 해줘. 안 그러면 다음에는 안 데려올 거니까.”



 절레 고개를 내젓다가도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펠릭스가 교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소란스럽던 교실이 한 순간 조용해졌다. 책상 주변에 모여서 떠들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잠깐 펠릭스에게로 머물렀다가 금방 다시 사라졌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 조용해서 좋다고 생각하며 교실 안으로 들어서는 펠릭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녕!”



무시했다. 휙 고개를 돌리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펠릭스의 뒤를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앉아 책을 꺼내는 펠릭스의 앞에 다가온 상대가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죽삐죽 솟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갈색빛 피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장난기가 많을 것 같아 보이는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플랙과도 좀 닮아 있었다.


무시하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소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펠릭스에게 말을 걸었다.



“인사를 했으면 대답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좋은 아침.”



그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금 책에 눈을 돌리는 펠릭스를 보며 소년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인사해준 건 무척 고마운데 말이야…. 왠지 지금 인사가 꼭 ‘시끄러우니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같은 느낌인데?”



정곡을 찌르는 소년의 질문에도 펠릭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꿋꿋하게 제 할 일에 충실하는 펠릭스에게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거는 소년은 확실히 강적이었다.



“대화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너무하네. 책만 보고 살면 안 심심해?”

“….”

“오늘 수학 들었지? 으악, 난 수학 진짜 싫던데 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문제를 푸는 거야?”

“….”

“오늘 점심은 뭐 먹을래? 혹시 예정 없으면 같이 먹어도 되냐?”

“…이러는 목적이 뭐야, 너.”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재잘재잘 떠드는 소년의 모습에 결국 펠릭스는 독서를 포기하고 조용히 책 표지를 덮었다. 매일매일, 벌써 일주일이 넘게 자신에게 다가와 꼬박꼬박 인사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무리 무시하고 냉랭하게 굴어도 질리지도 않고 달라붙는 게 꼭 진드기같다. 자신을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일까? 아니면 떨어질 콩고물을 노리고 달라붙는 걸까. 하지만 눈앞의 소년이 그런 생각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는 사실을 펠릭스라고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소년은 개구지게 웃으며 펠릭스의 말을 정정했다.



“너가 아니라 앨빈이야. 앨빈 에반워프.”

“그래서.”

“응? 별 거 없어. 그냥 너랑 친구가 되고 싶을 뿐.”

“거절한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딱 잘라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런 펠릭스에 앨빈은 깜짝 놀란 듯하다가도 이내 싱글싱글 웃었다.



“우와, 무서워라. 냉랭하기 짝이 없네.”



과장된 몸짓으로 양 팔로 제 몸을 감싼 앨빈이 바들바들 떠는 척 열연을 펼쳤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지 가만히 한쪽 눈가를 찡그리는 펠릭스에게 앨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다지 나쁜 녀석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너.”

“뭐?”



펠릭스가 되묻는 순간, 딩동댕동 소리가 교내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앨빈이 중얼거렸다.



“아, 종 쳤다. 그럼 지금은 이만 돌아갈게.”



선선히 의자에서 일어나 본인 자리로 돌아가는 앨빈을 바라보다가 펠릭스는 짧게 탄식을 지르더니 책상에 털썩 엎드려 팔로 머리를 감쌌다. 미치겠군. 지금은, 이라고 말하는 건 다음에 또 오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잖아.


머리가 아팠다. 다가오지 말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음에도 끈질기기 짝이 없다. 요즘 들어 왜 이런 녀석들만 꼬이는 걸까. 가방 안쪽에 고이 잠들어 있는 플랙 녀석만도 이미 충분히 골치가 아프건만.


가만히 중얼거렸다.



“피곤해.”





“으음….”



나무에 기댄 자세로 마리네뜨는 살짝 옆을 내다보았다. 오늘도 역시 똑같은 벤치에 앉아 독서에 빠져 있는 펠릭스의 모습을 흘깃흘깃 살피는 마리네뜨의 손에는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이번에 극장에서 열리는 클래식 음악회 티켓으로, 그쪽 분야에서 일하는 이모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펠릭스를 보려다가도,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급하게 다시 나무 뒤로 숨기를 반복하는 마리네뜨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 말을 걸 때는 그래도 나름 괜찮았는데, 데이트를 신청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긴장이 된다.


손에 든 티켓들을 꼬옥 쥐고 마리네뜨는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무 뒤에서 나와 펠릭스가 있는 벤치로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펠릭스가 책에서 눈을 떼고 마리네뜨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흠칫, 몸을 움츠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마리네뜨를 보고 한숨을 쉬던 펠릭스가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안 되는데!


떠나려는 듯이 움직이는 펠릭스에 마리네뜨는 후다닥 뛰어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런 마리네뜨를 돌아보더니 펠릭스는 걸어가던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펠릭스의 모습이 마치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만 같아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더듬이가 예쁜 하트를 그려냈다.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펠릭스를 바라보는 마리네뜨의 눈이 반짝거렸다. 말은 꽤나 더듬거렸지만.



“저, 저기, 펠릭스. 혹시 오늘 시간 있니? 이번에 클래식 음악회 티켓을 구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우물쭈물하면서도 끝까지 질문을 마치고 마리네뜨는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가 무색하게 펠릭스는 살짝 눈을 감은 채로 관심없다는 듯이 홱 고개를 돌렸다. 거절의 대답이라는 걸 짐작한 마리네뜨의 어깨가 축 처졌다.


마리네뜨에게서 돌아선 상태로 펠릭스가 툭 말을 꺼냈다.



“선약이 있어.”

“그, 그럼. 다음에 시간이 나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돌려 사라지는 펠릭스의 등을 향해 마리네뜨는 ‘같이…, 가….’를 중얼거리다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좋은지 더 이상 쫓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그저 하염없이 펠릭스가 사라진 방향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 입을 우물거리다가 쓸쓸하게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손에 들려 있던 티켓의 가장자리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살짝 구겨졌다.




그런 마리네뜨를 뒤로 한 채 펠릭스는 약속장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공원을 벗어난 뒤 한참을 걷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골라 타고는, 몇 분 후에 내려서 다시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보통 이 시간대의 파리 거리들은 대체로 사람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펠릭스가 걷고 있는 길의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비싸보이는 차가 몇 대 지나다니는 것 말고는 상당히 한적했다.


주택가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방문할 만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변의 집들이 커서 그런지 거리에는 넓은 그늘이 져 있어 햇빛이 거의 들이치지 않았다. 싸할 정도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그늘길을 한참을 걷던 펠릭스는 어느 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옅은 베이지색의 벽 위에 금빛 지붕이 둘러진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이 근방의 집들이 모두 훌륭한 대저택들이긴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생김새였다. 창문들은 모두 아름다운 나비 문양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져 있었고,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벽들에도 각각 곡선의 문양들이 얇게 그려져 있었다. 그 위풍당당한 자태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전을 연상시켰다.


파리에 사는 시민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유피테르’ 가의 대저택 앞에서, 펠릭스는 가만히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소리와 함께 초인종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는 화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닫혀 있던 철창문이 열리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펠릭스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금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익숙하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저택 안으로 들어온 펠릭스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 바탕에 검은색 방울무늬가 그려져 있는 정장을 차려입은 금발의 여자였다.


엘렌 생쿼(Hélène Sancoeur). 이 저택 주인의 비서이자 저택의 관리까지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파일을 손에 들고, 단정하게 틀어올린 머리에 펠릭스만큼이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엘렌이 펠릭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숙부님은?”

“예정에 좀 차질이 생기셔서, 응접실에서 일단 기다리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엘렌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말없이 엘렌의 뒤를 따라가는 펠릭스의 주변으로 나비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확히는 살아있는 나비가 아니라, 그려진 나비들이었지만.


이 저택의 가장 큰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 반짝거리는 신전같은 외관도 아니며, 파리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는 오랜 역사도 아니다.


건축학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이 저택의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건 바로 나비였다. 나비가 그려지지 않은 장소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비들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진 창문은 물론이고 복도와 기둥, 심지어는 바닥에까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나비 문양들은 거의 천 년 전쯤에 세공된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상황인지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건물을 소유한 유피테르 가의 상징물이 나비가 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이 저택을 ‘나비 저택’ 이라고 불렀다.


응접실로 안내받아 소파에 털썩 앉은 펠릭스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군더더기 없는 배치와 깔끔한 응접실 안을 말없이 살펴보고 있는 펠릭스의 앞에 엘렌은 차와 쿠키가 든 쟁반을 내려놓았다. 금빛 나비가 새겨진 하얀 찻잔에 엘렌이 차를 따라주자 펠릭스는 천천히 왼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슬핏 웃으면서 찻잔을 내려놓고 펠릭스는 입을 열었다.



“여전히 깔끔하군.”

“아닙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엘렌이 다시 질문했다.



“학교 생활은 어떠십니까?”

“별로. 그냥저냥 지내고 있지.”

“….”

“걱정할 필요 없어. 성적은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정중하지만 걱정이 묻어나는 엘렌의 말투에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너는 날 보면 늘 그런 걸 묻는군.”



꽤나 즐거운지 무표정을 거두고 작게나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파리에 히어로라는 자들이 나타났었죠.”



찻잔을 들던 펠릭스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며 다시 차를 마시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담담하게 고하듯 말했다.



“의원님께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숙부님이?”

“네.”

“나한테 그런 걸 말해도 되는 건가?”

“도련님이 의원님께 해가 되는 일을 하실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침착하게 맞받아치는 엘렌의 대답에 펠릭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금 차를 호록 마시는 펠릭스의 옆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서서 엘렌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도련님.”

“….”

“의원님을 너무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답이 없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재차 말을 꺼냈다.



“도련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려고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늘 혼자 지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꺼내는 건조한 대답에 펠릭스는 어이가 없었는지 하, 기가 찬 듯한 메마른 웃음을 내뱉었다.



“내 뒷조사를 한 건가?”

“…어느 정도의 보고는 받고 있습니다. 설마 의원님께서 도련님의 후견인이라는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펠릭스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에도 또박또박 대답을 내놓는 엘렌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엘렌은 계속 말을 꺼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눌러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 커서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도련님은 좀 더 자유로워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너의 의지인가?”

“네, 저의 의지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는 엘렌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펠릭스는 결국 나직이 한숨을 쉬며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그럼 그게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도 알겠군.”

“알고 있습니다.”



꿋꿋하게 대답을 마치는 엘렌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는 딱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펠릭스는 엘렌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고 직감했다. 매사에 더없이 합리적이고 필요 이상으로 말하기를 삼가는 성격의 비서는 지금 자신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괜찮냐고 매번 물을 때마다 언젠가 이런 말이 나오지는 않을까 막연히 짐작하기는 했었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니 조금은 놀라웠다.



“나는….”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에펠탑 근처에 있는 샹 드 마르스(Champ de Mars) 공원.


많은 가족들과 관광객들이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두르고 있는 공원에 모여 하하호호 떠들고 있었다.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먹는 무리들과 벤치에 앉아 있는 커플들, 사진기를 들고 공원 안을 기웃거리는 이들도 있었으며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의 경우 부모님과 같이 온 경우가 많았지만 보통은 친구들끼리 놀러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공원 한 구석에 모여 있는 네 명의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애를 세 명의 아이가 둘러싸고 있었다.



“정말 레이디버그랑 아는 사이야?”



곱슬거리는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콧등에 주근깨가 살짝 나 있는 여자아이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렇다니까?”



갈색 단발머리를 한 여자애는 자신 있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정말 친해. 얼마 전에도 서로 안부인사 주고받았거든.”

“근데 왜 요즘은 안 보이는 건데? 저번 정전 사건 이후로 소식이 안 들리는걸.”



곱슬거리는 짧은 금발머리의 남자애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걸 본 갈색 단발머리 여자애는 키득 웃었다.



“너 레이디버그 좋아해? 루크.”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멋있잖아!”

“그게 좋아하는 거지.”



말문이 막힌 루크를 뒤로 한 채 검은색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갈색 피부의 남자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그럼, 릴리. 나 번호만 좀 알려주면 안 될까? 목소리만이라도 들어보고 싶은데.”

“그건 곤란해 테오. 영웅의 사생활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어?”

“그런가….”



어리긴. 쯧쯧 혀를 차는 릴리의 앞에서 테오는 실망한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분위기를 개선하려는 건지 금발의 여자아이가 발랄하게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전해줘! 무지무지 기대하고 있다고 말이야.”

“그래.”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릴리의 모습에 세 아이는 그저 좋은지 즐거운 얼굴로 수군수군 대화를 주고받았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도 이미 화제 만발이었지만, 파리에서 벌어졌던 정전 사태에 도움을 준 사람이 두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자마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단 두 번 나타났을 뿐인 히어로들에 대해 파리의 언론들은 제대로 특종이다 싶었는지 그들의 활약상은 신문의 앞면에 대서특필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인기를 견인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히어로들의 등장에 파리 시내가 들썩이고 있었다. 그들의 인기는 특히나 어린 층으로 갈수록 더욱 높아졌다. 그러니, 그런 히어로와 아는 사이라는 릴리의 말에 세 아이가 크게 관심을 두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금발의 여자아이, 로즈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예쁘게 반짝거렸다.



“아, 저기 아이스크림 트럭이 있다!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좋지~! 루크랑 릴리도 먹을 거지?”

“콜. 나는 바닐라. 릴리 너는?”

“난 초코로 부탁해.”

“알았어~”



릴리만을 남겨두고 세 명이 아이스크림 트럭 쪽으로 뛰어가자, 그제서야 릴리는 긴장을 풀고 참고 있던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어쩌지?


사실 릴리는 레이디버그와 친하기는커녕 만난 적도 없었다. 신문기사에 떠 있던 사진으로 얼핏 보기는 했지만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시작은 간단했다. 그냥 미아 저 계집애가 예쁜 옷을 입고 와서 자랑하는 게 얄미워서 충동적으로 내뱉었던 거짓말일 뿐인데, 문제는 다들 그 말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순순히 믿고 있다는 거다.


처음부터 농담이었다고 해야 했다. 문제는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애들의 관심어린 시선이 좋아서 나중에 말하자고 계속 해명을 미루다 보니 어느 샌가 일이 너무 커져 있었다. 계속 얼버무리는 것에도 슬슬 한계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러다가 정말로 다시는 안 나타나면 어쩌지? 그러면 애들도 언젠가는 수상하게 생각할 텐데. 다시 나타나도 문제기는 했다. 레이디버그와 마주쳤을 때 나를 모르는 것처럼 보이면 모든 게 끝이었다. 어떻게든 해결하자. 의외로 사정을 설명하면 도와줄지도 모르고.


태평한 생각을 하며 벤치에 등을 기대는 릴리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레이디버그랑 친하다고?”



높은 톤이지만 굵기를 봐서는 남자 목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릴리는 짜증이 났다. 이젠 쟤들도 모자라서 상관없는 다른 사람한테까지 레이디버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다니. 저 멀리 트럭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애들의 모습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쟤네는 하여간 너무 목소리가 커서 탈이라니까.



“아, 그래요, 그래. 저 레이디버그랑 친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는 마세요. 가급적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무렇게나 내뱉는 릴리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뒤에 서 있던 남자의 입꼬리가 한 쪽으로 크게 올라갔다.



“그럼, 네가 위험해지면 레이디버그가 나타나려나?”

“네네, 당연…. 네?”



싸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마자, 제 위로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의 주인을 본 릴리의 입술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꺄아아아악!”





///



“하아, 역시 쉽지 않구나.”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마리네뜨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데이트 신청에 실패해서인지 평소보다 더 기운이 없는 마리네뜨의 손에 티켓 두 장이 꼭 쥐어져 있었다.



“마리네뜨, 너무 슬퍼하지 마.”



가방 속에 들어가 있던 티키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작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울해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티키는 재차 한 마디를 더 던졌다.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

“오늘은 정말 바빠서 거절했던 건지도 몰라. 선약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나중에 한가해질 때 다시 같이 가자고 해보자. 응?”



상냥하게 달래는 티키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일순 눈을 깜빡거렸다가, 다시 활짝 웃었다.



“그래 맞아!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구!”



조금은 기운을 차렸는지 다시 밝게 웃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티키는 흐뭇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아직 많이 얘기해보지 않은 사이라 어색해서 거절한 건지도 몰라. 응, 그럴 거야. 솔직히 몇 번 얘기해보지 않은 여자애가 난데없이 같이 공연보러 가자고 하면 좀 난감하잖아. 그래,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조금 더 친해지고 나서 다시 말해볼까. 괜찮아, 시간이야 아직 많으니까.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뭐!”



이 정도에 포기할 만큼 난 약하지 않다고! 계속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리다가 두 손을 주먹쥐고 힘차게 하늘로 뻗는 마리네뜨의 눈동자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티켓을 들고 있던 손을 펴자, 꾸깃꾸깃한 모양새로 손바닥 위에 올려진 티켓이 눈에 들어왔다. 우울해진 마음을 눌려펴듯 티켓을 다시금 반듯하게 펴면서 마리네뜨는 힘차게 중얼거렸다.



“아직 기회는 많으니까! 내일은 분명…!”



아니, 중얼거리려고 했다.



[긴급 속보입니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전광판에 띄워진 광고가 갑자기 뚝 꺼지더니 다른 화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면에 나온 앵커는 최대한 침착하고 빠르게 속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악당이 에펠탑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현재 이 악당은 어린아이 하나를 붙잡아 에펠탑 꼭대기에 인질로 잡아놓고 농성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뭐라고? 놀란 얼굴로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옆에서 티키가 다급히 마리네뜨를 불렀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경찰에서 헬리콥터를 동원했지만, 비둘기 떼에 막혀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마리네뜨. 느껴져!’

“느껴진다니, 뭐가?”



가방 쪽을 내려다보며 작게 소곤거리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재빨리 다음 말을 꺼냈다.



“저번에 말했던 이상한 기운!”

“정말?”



그 때, 전광판에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괴상한 차림새로 비둘기 떼를 타고 에펠탑 주변을 날아다니는 남자에 마리네뜨는 물론 시민들도 모두 경악했다. 하늘을 날고 있어?! 게다가 옷도 이상해!



<내 이름은 미스터 피죤. 레이디버그, 네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순순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을 거다!>


[보시다시피, 이 악당은 레이디버그의 친구를 붙잡고 있다며,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에펠탑으로 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엥? 내 친구?”



설마 에스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마리네뜨는 다시금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비둘기들은 사람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막고 있지만 드론 카메라에는 관심이 없는지, 언론에서 취재를 위해 보내놓은 드론 카메라가 전송한 장면이 뉴스 화면 위로 떠올랐다.


이제 11-12살 정도 될 법한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를 본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보는 아인데?”


[정말 이 소녀는 레이디버그의 친구일까요? 만약 친구라면, 레이디버그는 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음, 어떻게 된 거지….”



에스미가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문제네. 턱에 손을 올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마리네뜨를 티키가 재촉했다.



“마리네뜨. 어쨌든 일단 저기 있는 장소로 가보자!”

“하긴, 악당이 나타났는데 히어로가 가만 있을 수는 없겠지.”



하아, 한숨을 쉬던 마리네뜨가 재빨리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번쩍, 빛이 새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붉은 인영이 건물들 사이에서 휙 뛰어올라 하늘로 솟았다. 모두 전광판에 정신이 팔려 있던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에펠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펠릭스는 엘렌을 쳐다보았다. 엘렌이 조용히 말했다.



“제 전화군요.”



한 치의 동요도 없는 얼굴로 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들었지만, 그 전화의 발신인이 누군지를 확인하자마자 엘렌의 얼굴에 짤막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의원님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엘렌은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펠릭스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전화를 해준 숙부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나저나 방금 그 소리는 핸드폰 벨소리인가? 요즘은 벨소리로 최신 가요를 쓰는 사람들이 많던데, 기본형으로 되어 있는 전화벨 소리조차 참으로 엘렌답다 생각하며 펠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우선 본인부터 돌보는 게 더 좋을 텐데.


혼자인데다 할 일이 없기도 해서 가만히 다 마신 찻잔을 노려보고 있을 찰나였다.



“파트너!”



갑자기 가방 속에서 튀어나와 제 앞으로 다가온 플랙에 펠릭스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깜빡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놀란 게 분명한 펠릭스를 보며 낄낄 웃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불퉁한 목소리라 말했다.



“플랙, 갑자기 나오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지금 아무도 없잖아~ 그것보다, 이상한 게 느껴지는데?”

“이상한 거라고?”

“아마 저쪽도 같은 걸 느꼈을 거야~”



플랙이 말하는 저쪽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들었다. 펠릭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열심히 쿠키를 주워먹고 있는 플랙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후, 응접실 문이 열렸다. 통화를 다 끝냈는지 엘렌의 목소리가 살짝 난처한 기색을 띄었다. 



“도련님, 아무래도 오늘은 사정상 만나뵙지 못할 거 같으시다고…. 도련님?”



응접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펠탑 근처까지 도착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껑충껑충 건물들을 뛰어 에펠탑 바로 앞까지 도착한 레이디버그는 곧이어 낯익은 뒤통수를 발견하고 동작을 멈췄다.



“여, 레이디?”



블랙캣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너도 소식 듣고 왔어?”

“아아, 대충.”

“말해두겠는데, 난 그 여자애 잘 몰라.”



단호하게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잠깐 멍하게 쳐다보던 블랙캣은 곧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기냐는 듯이 자신을 흘겨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겨우 웃음을 그치고 대답했다.



“알고 있어. 애초에 지금 나나 레이디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파리에 있을 리가 없잖아.”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는 듯 능글맞게 웃고 있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괜히 민망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제 어떡하지?”

“레이디는 어쩌고 싶은데?”

“어쩌긴. 저 애도 구출하고, 그 악당이라는 사람도 물리쳐야겠지.”

“계획 있어? 지금 에펠탑 쪽으로 접근하는 건 거의 무리라고 보는데.”

“계획이라면 있지.”



이번엔 레이디버그가 반격할 차례였다.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블랙캣, 미끼 작전이라고 알아?”

“응?”



의미심장하게 웃는 레이디버그의 미소에 불안해졌는지 뒤로 물러서려는 블랙캣의 어깨를 꽉 잡고, 레이디버그는 웃으며 말했다.



“미끼 좀 되어줄래?”





“어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펠탑 바로 옆을 날아다니는 비둘기들 위에 타고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꼭 비둘기와 닮은 모습의 슈트를 입고 있던 남자는 한참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발견하고 만면에 가득 화색을 띄웠다. 에펠탑에서 좀 떨어진 건물의 지붕 위에 선 블랙캣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블랙캣의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남자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혼자 온 건가?”

“우리 레이디까지 출동할 필요는 없거든~ 너는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도발하듯이 말한 블랙캣이 들고 있던 봉을 남자에게로 뻗었다. 순식간에 늘어난 봉이 남자의 턱을 정확히 가격했고, 그 충격으로 남자는 하마터면 공중에서 떨어질 뻔했다. 주변에서 날아다니던 비둘기들이 재빨리 받쳐주지 않았다면 가벼운 상처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쉽다는 듯이 쳇, 혀를 차는 블랙캣에 제대로 약이 올랐는지 남자는 물론이고 남자가 부리는 비둘기들이 모두 블랙캣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비둘기들과 악당이 블랙캣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시각, 에펠탑 꼭대기에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붉은 색 바탕에 검은 점박이가 점점이 박힌 행글라이더는 에펠탑 꼭대기를 한 바퀴 돌다가 전망대 위로 부드럽게 착지했다. 번쩍, 빛이 나는 것과 함께 행글라이더가 사라진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은, 붉은색 바탕에 검은 점들이 그려진 타이즈를 입은 소녀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레이디버그는 꼭대기 근처에 묶여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역시 레이디버그를 발견했는지 깜짝 놀라는 소녀에게로 달려간 레이디버그가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이제 괜찮아.”

“어, 정말 레이디버그…?”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잔뜩 지쳐 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본 레이디버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소녀를 번쩍 안아올렸다. 소녀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꺄악!”

“눈을 감고 나를 꽉 잡아요. 절대로 눈을 뜨지 말고.”

“네?”

“순식간일 테니까.”



당당하게 미소짓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올려다보던 소녀가 이내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뭐라 말하고 싶은지 뻐끔뻐끔 입을 벌리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는 소녀에게 레이디버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우리, 초면이죠?”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레이디버그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지만, 일단은 물어보았다.



“악당은 당신이 내 친구라고 말하고 있던데. 어떻게 된 건지 물을 수 있을까요?”

“…죄,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일이 커질 거라고는….”



정말로 미안한지 새빨개진 얼굴로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를 보며 레이디버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네?”

“나랑 아는 사이라고 해봐야, 이런 일만 겪게 되잖아요.”



영화만 봐도 그렇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상냥하게 웃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릴리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레이디버그는 그런 릴리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레이디버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일단 빨리 가야겠네요. 눈 감아요!”



소녀가 눈을 감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순식간에 요요를 사용해 에펠탑 아래로 내려온 레이디버그가 소녀를 에펠탑 근처에 있던 공원에 내려주었다. 살며시 눈을 뜬 소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세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테오, 루크, 로즈….”

“릴리! 너 괜찮아?!”



헐레벌떡 뛰어온 아이들이 릴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재잘거렸다. 이름이 릴리였구나.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럼, 친구 잘 챙겨줘요.”



그 말과 함께 요요를 던져 비둘기 떼가 몰려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레이디버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세 아이는 릴리를 돌아보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너 짱이다! 진짜 레이디버그랑 아는 사이였어?”

“진짜 멋있더라! 에펠탑 꼭대기에서 부웅 날아오는데, 완전 영화 속에 들어온 거 같았어!”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흥분해서 떠드는 아이들을 말없이 쳐다보던 릴리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아니야.”

“응?”

“거짓말해서 미안해. 나, 레이디버그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전에 만난 적 한 번도 없어.”



고개를 돌려 제 친구들을 똑바로 응시하는 릴리의 얼굴이 매우 단호했다. 할 말을 잃었는지 그저 황망히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릴리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도 구하러 와줬어. 화내지도 않고.”



자신을 보며 웃어주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지금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역시 악당을 상대하러 갔을까. 그 무시무시한 남자를?


그 남자에게 붙들려가던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나 릴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살다살다 악당에게 붙잡혀 에펠탑 꼭대기에 묶이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애초에 지금 상황이 전부 다 꿈만 같았다. 이런 게 현실에서 정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레이디버그가 떠나버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릴리는 중얼거렸다.



“무서운 거구나….”



영웅이란.






한편, 블랙캣과 미스터 피죤은 나름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나 잡아봐라~”



지붕 위를 요리조리 뛰어다니며 비둘기 떼들을 피해다니면서도 블랙캣은 속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왜 아직이지? 그러던 중 블랙캣은 미스터 피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 설마 눈치챘나?


의아해할 틈도 없이 미스터 피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춤을 추듯 엉덩이를 몇 번 씰룩거리던 미스터 피죤이 두 팔을 똑바로 블랙캣이 있는 방향으로 내뻗자, 비둘기 떼들이 한데 뭉쳐 그에게로 덤벼들었다.



“으악!”



삽시간에 덤벼든 비둘기 떼가 블랙캣을 감싸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원을 그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비둘기들이 사납게 구구거리는 소리가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소름끼쳤다.


하지만 잠시 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피죤은 재빨리 비둘기들을 모아 공격을 막아냈다. 피죤의 지시가 사라지자 블랙캣을 감싸고 있던 비둘기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재빨리 지붕 위로 착지하는 블랙캣의 옆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요요였다. 그리고 그 요요에 매달려있는 누군가.



“블랙캣!”

“오, 레이디. 이제야 오면 어떡해~?”



기다리다 몸에 사리가 나올 지경이었다구. 능청스레 대꾸하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눈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미스터 피존을 향해 소리쳤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목적이 뭐야! 죄 없는 어린아이를 붙잡고 사람들을 협박하다니….”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에게 피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뭐?”

“사람 한 둘 정도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당신….”

“인간은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생명을 죽이는데.”



그 한 마디에 요요를 던지려던 레이디버그의 동작이 일순 멈추었다. 블랙캣은 그런 레이디버그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피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피죤은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 드넓은 자연을 파괴하고, 늘상 이용하고 오염시키는 게 누구지? 바로 인간들이잖아. 그런데 본인들은 죽기 싫다고? 그거야말로 이기적인 거 아닌가?”

“….”

“자연과 어울려 지내려고 하기보다는 독차지하고 파괴하기만 하려고 하지. 난 그런 인간들이 너무나도 싫거든.”



히죽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미스터 피죤의 말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악당이지만 그가 하는 말은 별반 틀린 것이 없었다. 인간이라고 해도 결국 동물의 한 종일 뿐인데, 어째서 인간들만이 특별하게 취급되어야 하냐는 그의 의문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 토론해온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입을 딱 다물고 있는 두 히어로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지 미스터 피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모두 없애고….”



다만 그 다음 말이 너무 황당한 게 문제였지만.



“우리 비둘기들의 세상을 만드는 거야!”



홀홀홀 웃으며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미스터 피존의 모습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산통 다 깼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한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냥 후려쳐버려! 저건 또라이가 분명하다구, 레이디!”



옳은 말씀.


그 말에 백 번 공감하며 레이디버그는 힘차게 요요를 던져 미스터 피죤의 이마를 가격했다. 악!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부여잡고 뒹굴거리던 미스터 피죤은 다시금 날아오는 요요에 히익,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다. 그런 미스터 피죤의 주변으로 비둘기들이 몰려들더니 그를 감싸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늘에서 두 히어로를 내려다보면서 미스터 피죤은 크게 웃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주지! 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너희들을 해치워주겠다!”



그 말과 함께 하늘로 날아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보면서 블랙캣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악당의 전형적인 대사 아냐?”

“누가 아니래.”

“그나저나, 레이디. 우리 어서 도망가야 할 거 같은데.”

“? 왜?”

“하늘을 봐.”



블랙캣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본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방송국 로고가 그려진 헬리콥터 몇 대가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지붕 아래에도 시민들이 많이 몰려와서 핸드폰을 들이대고 있었다. 레이디버그는 헛숨을 들이켰다.



“헉.”

“이야~ 많이도 몰려왔는데?”

“지금 감탄할 때야?! 어서 도망가자!”



그 말과 함께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잡아끌었다. 요요를 던져 그 줄을 타고 사라지는 블랙캣과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시민들은 우왕좌왕하며 그들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그들을 붙잡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산한 골목에 도착해서야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놓아주었다. 제 팔을 뿌리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일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시 가면을 벗을 시간이다. 왠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 기분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돌아서려는 블랙캣을 레이디버그가 불렀다.



“블랙캣.”

“응? 왜, 레이디?”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물론이지, 뭐든 물어봐.”



화색이 되어 대답하는 블랙캣의 얼굴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레이디버그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너, 정말로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이야? 히어로.”

“….”

“이런 일이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한 레이디버그의 표정에 뭔가를 짐작했는지 블랙캣의 입가에서 미소가 살짝 가셨다.



“레이디는 하기 싫은가봐?”



정곡을 찌르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질까봐? 이번에 붙잡혀 간 소녀처럼.”

“그것도 있고, 그냥 내키지 않아.”



투정부리듯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관찰하듯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결론을 내렸는지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거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아무렇지 않은 듯 날카롭게 속을 후벼파는 블랙캣의 대답을 레이디버그는 장난스럽게 맞받아쳤다.



“너 진짜 싫다.”

“우와, 너무해. 나 상처받는다구? 이래뵈도 연약한 아기 고양이란 말이지.”

“퍽도 연약하겠다.”



블랙캣이 던진 농담에 피식 웃으며 레이디버그는 뒤로 돌아섰다. 집에 가야겠다,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가던 레이디버그는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걸어간 거리만큼을 따라온 블랙캣을 쳐다보며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왜 계속 나를 쫓아와?”

“같이 있고 싶어서.”

“왜 같이 있고 싶다는 건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가?”

“말을 돌리네, 너.”



한숨을 쉬듯 말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살짝 미소지었다. 마냥 밝기만 한 미소가 아니라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듯한 쓸쓸한 미소.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면서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그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차 흐려졌다. 그런 레이디버그의 표정을 본 블랙캣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런 표정이라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억지로 웃는 듯한 표정.”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재차 말했다.



“웃기 싫으면 차라리 인상을 찡그리는 게 나아. 뭐, 레이디한테는 활짝 웃는 얼굴이 가장 잘 어울리긴 하지만.”

“가면으로 가렸는데 그게 보여?”

“보이지. 저번에도 말했잖아. 고양이는 눈이 밝다니까?”



능청스레 말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풋 웃었다. 정말 따라오지 말라고 강조하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돌아섰다. 그런 제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블랙캣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레이디버그는 잠시 멈칫했다.



“고마워.”



던지듯 그 한 마디를 던지고 레이디버그는 휘익 날아서 사라졌다. 레이디버그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블랙캣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난 망했어….”



곧장 집으로 돌아온 뒤 제 방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마리네뜨의 목소리에 우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사진도 사진인데, 분명 동영상 찍은 사람도 있을 거라고! 방송사를 피한 건 그나마 다행인데 진짜 어쩌지. 유투브에 영상이라도 올라오면….”

“유투브? 그게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티키에게 마리네뜨가 간단히 설명을 해주자 티키는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렸다.



“그런 게 있구나!”

“사진까지는 그래도 넘기겠는데, 제발 동영상 찍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머리를 쥐어뜯는 마리네뜨를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던 티키가 한참 고민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그것보다 마리네뜨. 지금 중요하게 해야 하는 말이 있어.”

“중요한 말?”



수척해진 얼굴을 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장 최악의 가능성이 실현된 것 같아.”

“최악이라니….”



여기서 뭐가 더 최악인데? 그렇게 묻는 듯한 마리네뜨의 얼굴을 마주하며 티키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우리가 오늘 만난 악당. 그 악당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은, 호크모스의 것이었어.”

“호크모스?”

“또 다른 미라큘러스, 나방 미라큘러스를 가진 히어로야.”

“미라큘러스가 더 있다고?”



깜짝 놀라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뇌리를 스치고 떠오르는 생각에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저번에 그 정전 사건!! 그럼 그 사건 때도, 그쪽에서 관련했을 수도 있다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미라큘러스는 히어로로 변신시켜 주는 물건이 아니었어?”

“미라큘러스는 선하다, 악하다로 나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칼로 빵을 자르면 괜찮지만 사람을 찌르면 흉기가 되잖아? 마찬가지야. 다만 되도록 선한 사람에게 넘어가도록 설계되어 있을 뿐이지.”



마리네뜨의 손이 제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미라큘러스의 직감 때문일까? 위험을 감지한 건지 파르르 떨리는 제 손을 베개에 묻으며 마리네뜨는 티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티키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마리네뜨. 아무래도 조금은 힘든 싸움이 될 거 같아. 특히 절대 정체를 들켜서는 안 돼. 그 누구한테도. 너는 물론이고 네 정체를 아는 사람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으응, 알았어.”



머뭇머뭇 대답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티키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마리네뜨.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응?”

“블랙캣을 너무 믿지 마.”



순간 티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말뜻을 이해한 마리네뜨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슨 말이야, 티키?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

“블랙캣과 협력하는 건 좋지만, 아주 믿어서는 안 돼. 블랙캣은 말이지, 어떻게든 너한테서 신뢰를 얻어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 신뢰?”



어째서. 그렇게 묻자 티키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블랙캣은 조금 특별해. 왜냐하면, 블랙캣이 가진 힘은 자칫 잘못하면 끝없이 위험해질 수 있거든. 마리네뜨, 왜 검은 고양이가 불행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것도 블랙캣에게서 비롯된 거라는 거야? 레이디버그처럼?”



티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마리네뜨,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왜 호크모스가 아니라 블랙캣이 너의 동료라고 말한 건지.”

“그건….”

“너와 블랙캣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네 상상보다 더.”



너무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들어서일까. 어지러운지 그저 눈만 깜빡거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티키는 다음에 마저 말해야겠다 생각했는지 적당히 말을 끝냈다.



“지금은 더 말할 상황이 아닌 거 같아. 나중에 제대로 다시 얘기할게. 아무튼, 조심했으면 좋겠어.”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티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이는 마리네뜨도 마찬가지였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부여잡고 마리네뜨는 베개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절규와 함께.



“이게 뭐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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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저는 펠릭스가 티키와 만나지 않은 것이 레이디버그 최고의 밸런스 패치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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