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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1

댓글 다실거면 제발 후기 좀 읽으세요.




Episode 2.

블랙캣과의 만남







“저기!”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청회색 눈동자가 소년의 뒤에 서 있던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고, 위로 삐죽 솟은 더듬이같은 앞머리가 인상적인 동양계 소녀. 푸른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소녀는 딱 보기에도 꽤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소년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걸어가려는 순간 소녀가 소년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잔뜩 망설이는 얼굴을 하면서도 소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그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자신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소녀의 시선 앞에서도 소년은 무표정했다. 별로 달가워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딱히 소녀를 제지하지도 않았다.


한참 뒤, 소녀가 다시금 내뱉은 첫 마디는 매우 간단했다.



“나 기억해?”

“….”



아무런 말도 없는 소년에게 소녀는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개학식 날 기억해? 그 날 횡단보도에서 구해준 거, 고마워.”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 표정변화 없이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소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감사를 표시했다.



“정말 고마웠어. 나 그 날 좀 피곤했었거든. 너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차에 치였을지도 몰라. 아, 그 때 고맙다고 하려고 했는데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우리 학교 학생인 줄 알았으면 진작 인사했을 텐데, 너무 늦게 찾아왔다면 미안해. 그 때랑 같은 시간에 횡단보도에 나가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재잘재잘 떠들며 배시시 웃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년이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별로.”

“에?”

“그렇게까지 감사받을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침착하게 내려앉는 음성이 귀를 간지럽힌다. 역시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대답없이 눈을 깜빡거리는 소녀를 뒤로 한 채 소년은 그 자리를 떠났다. 조용히 자신을 무시하며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소녀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다른 학생들이 모두 복도에서 사라질 즈음에야 소녀의 긴 더듬이가 몇 번을 움직이더니 하트 모양을 그렸다. 얼굴에 홍조를 가뜩 띄우며 좋다는 듯이 웃고 있던 소녀는 마지막 수업종이 쳤을 때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꺅! 빨리 가야겠다!”



허겁지겁 교실로 달려가는 소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그래서, 만나보긴 했어?”



그 질문과 함께 에스미는 입에 물고 있던 빨대로 바나나 우유를 쪽 빨아마셨다. 무심한 얼굴의 제 친구와는 달리 마리네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 멋있어!”



좋아라 눈을 반짝거리는 친구의 모습을 못 봐주겠다는 듯이 에스미는 눈을 치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는 흥분한 얼굴로 눈을 반짝거리며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진짜 막, 딱 한 마디밖에 못 들은 게 너무 아쉬워. 아, 하지만 목소리 정말 좋더라. ‘그렇게까지 감사받을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라고 하는데……. 아, 진짜 나 어떡하지? 정말 사랑에 빠졌나봐!”



꺄악 비명을 지르며 책상에 털푸덕 엎어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서는 행복이 가득 묻어나왔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한 그 얼굴에 에스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젓다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의외인데? 니가 말한 상대가 그 녀석이라니.”

“뭐야, 에스미. 그 애에 대해 알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름 정도는 들어봤지. 아니, 그보다. 넌 우리 학교 전교 수석이 누군지도 몰라?”

“누군데?”



정말 모르는 듯한 마리네뜨의 질문에 에스미가 한숨을 쉬었다. 니가 그럼 그렇지.



“방금 네가 말한 걔. 펠릭스 아그레스트. 입학 때부터 한 번도 수석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괴물이잖아.”

“헉, 진짜? 머리 좋구나….”



멍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리네뜨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에스미의 표정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찝찝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에스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거 말고는 정보가 없어. 니 말마따라 무표정에 말수도 없는 타입이라 성격이 어떤지도 잘은 모르겠고. 같은 반 애들하고도 거의 대화를 안 한다고 하고. 매번 무표정한 모습이 어째 로봇같은 느낌이 나서 애들도 좀 꺼려한다더라. 듣자하니 어디 명문가 쪽 외동아들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여러 모로 수상쩍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알려진 정보가 없어서 괜한 편견을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에스미는 다시 마리네뜨를 힐끗 돌아보았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니 걱정부터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솔직하다 못해 속내를 아주 끄집어내놓고 사는 듯한 녀석이랑 아예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녀석의 조합이라니. 상상이 잘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고.


다 마신 우유의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에스미가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거라면 취미가 독서라는 것 정도? 늘 뭔가 책을 읽고 있다더라. 도서관에도 자주 나타나는 거 같고.”

“그래서 그렇게 똑똑하고 침착하구나. 진짜 멋있다….”

“세상에 콩깍지가 무섭다더니.”



뭘 어떻게 들으면 그런 결론이 나니?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왜? 멋있잖아.”



아무래도 상사병 중에서도 말기 증상인 것 같다. 뭘 어떻게 말해도 요지부동일 것만 같은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는 말려봐야 소용없겠다 싶어 가만히 한 마디를 던졌다.



“…뭐 네가 좋다면야.”

“좋아, 그럼 조사부터 시작해야지!”



책상에 한쪽 팔을 기대고 그 손 위에 턱을 괴고 있다가, 기운차게 소리치는 마리네뜨의 대답에 에스미의 얼굴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에스미가 불길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무슨 조사?”

※ 의지가 준비되어 있을 때, 발은 가볍다잖아?”



환하게 웃으며 투지를 불태우는 마리네뜨를 뒤로 한 채 에스미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저거 어째 불안한데….”




※ 프랑스의 노력 속담 중 하나. 원문은 : When the will is ready, the feet are light



///



펠릭스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펠릭스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한 타입에 속했다. 에스미의 말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본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성격도 아닌 듯했다. 말수가 적어서인지 대화를 해본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반나절 동안 학교 애들을 탐색하고 다녔지만 성과가 거의 없는 것에 마리네뜨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사람이 이렇게도 없다니!


그래도 다행인 건 펠릭스의 가문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꽤 된다는 점이었다. 알고 보니 펠릭스의 성인 아그레스트는 파리에서도 굉장히 오래된 명문가 중 하나였고, 때문에 선생님들에게서는 어느 정도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일단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부모를 일찍 타계했으며 유명한 정치가를 숙부로 두고 있다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알아낼 수 있었다. 현재는 7구 쪽에 있는 커다란 저택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다 미성년자의 신분임에도 숙부와 같이 살지 않는 이유는 아그레스트 가문을 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에 책이 많아서인지 밖으로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는 것 같고, 가끔 외출하는 경우에도 목적지는 학교거나 도서관인 경우가 90% 이상이었다.


취미는….



“책 읽는 걸 좋아한다라.”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리네뜨는 손에 들고 있는 수첩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책이라니. 몇 번을 봐도 참 골치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거하게 한숨지었다. 왜냐하면 마리네뜨의 인생에서 가장 인연이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책이었으니까. 공부는 그냥저냥 하지만.



“음악도 좋아하는 거 같다고 했던가….”



클래식한 음악을 좋아할 거 같아. 손끝부터 발끝까지 딱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다니던 펠릭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그래도 음악회 정도는 같이 가자고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일단 표를 한 번 구해봐야 할 것 같다.



“7구 쪽이라면 엄청 큰 집들일 텐데….”



지금은 5구나 8구가 부촌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부자 동네라고 하면 역시 7구를 빼놓을 수 없다. 에펠탑과 국회의사당 등 18세기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물들이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언제 한 번 7구를 지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도 길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우뚝 솟아있는 클래식하고 거대한 저택들에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딱 봐도 수십 명은 살 수 있을 것만 같이 커다랬었다. 그런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니.



“괜찮을까?”



자신이라면 분명 무척 무섭고 외로울 것이다. 지금도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조금 무서우니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안에 있다 보면, 처음에는 괜찮다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혼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침묵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 예전에는 늘 혼자였기에 그것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에스미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생각보다 많이 외로웠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직 어려서 이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펠릭스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마리네뜨.”



조그맣게 들리는 명랑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샤샥 주위를 둘러보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왼편으로는 센 강이 내다보이며 오른쪽에는 나무들이 빽빽한, 공원 가장자리를 가로지르는 이 길은 마리네뜨가 가장 애용하는 산책길 중 하나였다. 워낙 큰 공원이니만큼 다른 길들도 꽤 많지만, 그런 길들 쪽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산책은커녕 움직이기도 힘드니까.


오늘도 여지없이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리네뜨는 옆구리에 찬 가방을 향해 작게 소곤거렸다.



“티키, 쉿!”



마리네뜨의 말에 대답하듯 가방 속에서 꺄르르 웃음소리가 났다.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은 웃음소리는 듣기에 무척 좋았지만, 그걸 마냥 좋게만 받아들이기에 마리네뜨는 지금 심적으로 그리 태평하지 못했다. 특히 지금 도시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레이디버그의 등장으로 파리에는 일순 난리가 났다. 강도를 잡은 다음 날, 언론들은 하늘을 날아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사진 몇 장을 내걸고 짤막하지만 임팩트 있게 방송했고, 영화 속에나 나오는 히어로의 등장이라며 온갖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있는 신문들도 즐비했다. 파리에서 가장 명성 높은 일간지인 르 몽드와 르 피가로, 리베라시옹의 1면이 모두 레이디버그의 사진으로 가득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마리네뜨가 얼마나 기겁했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마리네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참 살고 볼 일이네. 살다살다 내가 신문 1면에 실릴 날이 오다니….”

“그만큼 모두 너를 환영한다는 소리라구, 마리네뜨!”



가방 안에서 뛰쳐나오며 발랄하게 웃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미소짓다가도 곧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글쎄. 정말 내가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어. 미라큘러스는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는 돌인걸. 마리네뜨, 넌 이 파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미라큘러스에 선택받은 사람이라구! 자신감을 가져 봐.”



회의적으로 말하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확신을 주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런 티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리네뜨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힘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시 변신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히어로가 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했다.



“애초에 네가 말한 세상에 위험이 닥쳤다는 말도 잘 모르겠구. 그게 굳이 이런 히어로가 필요할 정도의 일인가?”



마리네뜨의 질문에 티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절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미라큘러스가 깨어나는 순간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어.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

“마리네뜨. 너밖에 없어.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는 게 그렇게까지 싫은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레이디버그로서 변신했을 때의 감각은 여전히 마리네뜨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정말로 가벼워진 몸과 자유롭게 움직이는 팔다리,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자신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특히 하늘을 날아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정말로 즐거웠다. 맞부딪히는 바람이 상쾌했고,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파리 시내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잖아.


무엇보다 마리네뜨에게는 확신이 부족했다. 왜 하필 자신일까, 라는 의문은 아직도 마리네뜨의 안에 자리잡은 채로 속삭이고 있었다. 히어로라니, 왜 하필 나 같은 애한테? 그런 건 좀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임무 아니었어? 이리보고 저리봐도 자신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애일 뿐인데. 아니, 평범한 건 아닌가. 안 좋은 의미로는 자신도 특별하긴 했다.


마리네뜨는 쓰게 웃었다. 재수가 없는 걸로 파리 시내에서 자신만한 사람이 있긴 할까? 어릴 때부터 온갖 불행과 함께해온 터라 이젠 아무 일 없이 보내는 하루가 더 어색할 지경인데. 사람들을 구하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건수하지도 못하는 히어로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변신할 수 있다고 해도 나 혼자서 대체 뭘 할 수 있겠어? 당장 파리 시내만 해도 범죄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잖아. 그걸 일일이 다 막을 수도 없는걸. 내가 분신술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가 아니야.”

“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티키에 마리네뜨는 귀를 의심했다. 티키는 싱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다.



“동료가 있어.”

“동료?! 동료라니, 대체 누군데?”

“곧 만나게 될 거야.”



싱글싱글 웃는 티키의 모습을 보니 지금은 가르쳐주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다. 그에 마리네뜨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 자리에 멈춰섰다. 마리네뜨?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티키를 한참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티키.”

“응?”

“그런데 왜 꼭 내가 히어로가 되어야 해?”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는 난처한 기색이 가득 묻어났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다른 히어로가 있다면 굳이 내가 히어로가 될 필요는 없지 않아? 오히려 방해만 될 지도…. 모르는데.”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는 것이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영웅이 되야 한다고 하면 그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가 멋있다고는 생각했지만 한 번도 그 히어로에 자신을 대입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사고에 말려든 시민 1의 심정이 더 이해가 갔었으니까. 자신이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악당과 싸우게 된다고?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저번은 어찌어찌 해내기는 했지만 그건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분명 많은 비난을 받을 텐데.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나 같은 애가?


자신이 없었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마리네뜨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티키는 별로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티키가 이내 답을 내놓았다.



“마리네뜨 네가 아까 말한 것처럼,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

“그래서 동료가 필요한 거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놓는 대답은 어느 하나 틀린 것 없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우울해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티키는 다시 활짝 웃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리고 레이디버그가 되어서 좋은 점은 그것만이 아닌걸.”

“응? 그게 무슨….”



그 말을 내뱉자마자 마리네뜨는 뭔가의 예감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즉시 마리네뜨가 서 있던 자리에 무언가가 철퍽 떨어졌다. 하얀 새똥이었다.



“히익!”



급히 위를 올려다보자 제 머리 위를 빙빙 날아다니는 비둘기 한 마리가 보였다. 어떻게 피했지? 멍하게 앞쪽으로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미라큘러스가 단순히 변신만 도와주는 물건은 아니라구.”

“이건….”

“레이디버그의 능력 중 하나인 ‘직감’이야. 무당벌레는 행운을 상징한다잖아? 그건 바로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의 상징하는 능력에서부터 유래된 말이야.”

“행운을 상징한다고?”

“맞아. 변신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상시 발동하지.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레이디버그가 되어서도 위험을 직감하고 피해갈 수 있어.”

“와….”

“물론, 마리네뜨일 때도!”



생각지도 못한 능력에 마리네뜨는 그저 입을 헤 벌렸다. 무엇보다 자신의 불운한 체질과 정말이지 딱 들어맞는 능력이 아닌가. 저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게, 이렇게 스스로 위험을 피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는걸?


마리네뜨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새가 지저귀는 듯한 높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마리네뜨가 저도 모르게 자켓의 한쪽을 살짝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티키, 숨어!”



티키가 재빨리 그 안으로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마리네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들 사이를 살펴봐도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서야 마리네뜨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하하, 힘없이 웃다가 마리네뜨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솔길이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바로 공원 출구가 보일 것이다.


천천히 걸어 모퉁이를 돌자마자 탁 트인 커다란 원형의 공터가 보였다. 초록빛의 나무들 앞에는 나무 벤치들이 줄을 맞춰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마리네뜨 바로 가까이에 있는 벤치 앞에는 많은 수의 비둘기들이 모여 있었는데, 앉아 있던 남자가 마리네뜨를 보더니 살짝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갈색빛의 허름한 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있는 나이 지긋한 남자의 손에는 호루라기를 닮은 피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방금 전의 소리는 저 사람이 낸 걸까?


떨떠름하게 웃다가, 마리네뜨는 이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벤치 위 종이봉투 속에 들어있던 먹이를 비둘기들에게 뿌려주며 즐거워하는 남자를 스쳐 공원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리네뜨의 뒤로 화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저기요, 자비에 씨! 몇 번을 말해야 알겠습니까. 비둘기, 모이주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아니, 그래도….”

“계속 모이를 주면 아무데나 똥을 싸잖아요! 공원 관리인들한테서 항의가 들어오고 있단 말입니다! 당장 꺼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마리네뜨는 재빨리 뛰어서 공원을 빠져나갔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대화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뭐라고 하는지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방금 전 아저씨를 꾸짖는 남자의 목소리는 워낙 소리가 크다보니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소곤거렸다.



“진짜 목소리 크시네.”

“그러게, 기차 화통을 삶아 드신 걸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마리네뜨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면서 마리네뜨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저 아저씨 되게 안쓰럽다. 모이 하나 줬다고 저렇게 비난을 들어야 하다니.”

“그러게 말이야.”



가방을 열고 티키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마리네뜨는 그런 티키를 내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비록 힘없는 미소였지만.



“자신이 없어.”

“마리네뜨….”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티키? 아직은….”



뭐라 정하기가 어려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름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마주 웃어주었다.



“응, 알았어.”

“그래, 그럼 일단 집에나 가자!”



다시 환하게 웃으며 길을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도 없어 보였다. 속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마리네뜨의 주변으로 스산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알든 모르든, 이미 이 아름다운 도시에 깔리기 시작한 어두운 기운을 감지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리네뜨는 재빨리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수학숙제가 많은 거냐며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마리네뜨의 뒤에서 티키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그저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러갔다. 시침이 어느 덧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는 순간에서야 마리네뜨는 의자에 기대 쭈욱 기지개를 폈다.



“으아, 힘들어!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된다…!!”

“힘내, 마리네뜨!”

“고마워, 티키. 아, 진짜 이게 무슨 일….”



마리네뜨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방의 형광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갑자기 꺼져버렸다. 어라? 스탠드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해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전인가? 그런데 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까맣게 물든 시야는 바로 앞에 뭐가 있는지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자신의 경우 잘못 움직이다가는 뭘 밟고 넘어지든 뾰족한 것을 밟든 아무튼 다칠 가능성이 매우 높기도 했고. 창문 밖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걸 보니 파리 시내 전체가 정전이 된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네뜨, 방금 이상한 기운을 느꼈어!”

“기운?”

“적인지 아군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느낌이 좋지 않아.”



이렇게 다급해보이는 티키의 목소리는 또 처음이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양심이 너무나도 찔렸다.



“제발 가보면 안 될까?”



티키의 간곡한 부탁에 마리네뜨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새까맣게 변한 도시를 바라보고는 이내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계속 정전이 지속되면 나한테도 좋지 않을뿐더러,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면 그래도 좀 덜 다친다니까 괜찮겠지. 이렇게까지 어두우면 사람들이 알아보지도 못할 거고. 그렇게 애써 위안하며 조심스럽게 외쳤다.



“변신!”






“진짜 어둡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파리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혀를 내둘렀다.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된 상황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모든 소란들을 애써 무시하며 티키가 말해준 방향으로 조용히 계속 나아가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에는 적외선 안경이 끼워져 있었다. 손전등을 쓰면 분명 사람들 눈에 띌 것이 분명했으니까.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가자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목적한 장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빛이 하나도 없어 마치 어둠에 녹아든 것만 같은 커다란 건물을 올려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역시, 전력소인가.”

“어이, 그쪽도 지금 온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재빨리 등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쫄쫄이를 입은 남자의 얼굴에는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덥수룩한 금발의 머리 위로 쫑긋 솟은 귀가 마치….


고양이 같았다. 레이디버그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그쪽은?”

“어라? 그쪽 요정이 설명 안 해줬어?”



검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한 남자는 싱글싱글 웃더니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고 손등에 살짝 키스했다. 깜짝 놀라는 얼굴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남자는 자기소개를 건넸다.



“나는 블랙캣. 너랑 마찬가지로 요정의 부름을 받고 히어로가 된 사람이야. 레이디버그.”

“날 알아?”

“당연하지, 널 만나게 될 날을 얼마나 기다렸다구.”



찡긋 윙크하는 블랙캣의 모습에 온 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잡혔던 손을 빼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남자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어딘지 과장된 몸짓, 행동은 어딘지 조금 느끼하긴 하지만 나름 귀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단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러다가 레이디버그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블랙캣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질문을 던졌다.



“너, 내가 잘 보여?”

“응.”

“안경도 없이, 어떻게 이 어둠 속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데?”

“나는 고양이거든. 밤눈이 밝지.”

“호오.”



레이디버그가 흘린 감탄사에 블랙캣은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가만히 레이디버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시죠, 레이디.”

“어라, 왜?”

“가방에서 한 번에 물건 하나밖에 못 꺼내는 거 알지? 귀중한 재원을 적외선 안경 따위에 쓸 수는 없잖아. 이 전력소, 한 바퀴 돌아보고 왔었는데 아무래도 낌새가 좀 이상하거든.”

“그래서?”

“난 그런 거 없어도 앞을 잘 보니까. 내가 데려가줄게. 혹시 모르니까, 다른 무기를 꺼내서 위험에 대비하도록 해.”



진지하게 말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안경을 접어 가방에 넣은 뒤 요요를 꺼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생각보다 믿음직한 것 같기도.



“아, 잠깐만 기다려봐. 저쪽에 뭐가 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가던 블랙캣은 다음 순간 우당탕-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졌다. 저 멀리까지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볼멘소리가 터졌다.



“으악, 누구야! 이런 곳에다 상자를 갖다둔 사람이!”



…그것도 아닌가.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블랙캣은 천천히 어두운 전력소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런 블랙캣의 오른손을 꽉 붙들고 레이디버그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전력소 안은 적막했다. 깜깜하기도 깜깜했지만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탁탁- 발과 바닥이 짧게 마찰하는 소리만이 돌을 던진 수면처럼 서서히 퍼져나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곧바로 일대의 전기를 관리하는 메인 제어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부 지도에는 4층에 제어실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전기가 흐르지 않아 엘리베이터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라 두 사람은 비상계단을 통해 제어실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의 손을 꽉 잡고 비상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던 블랙캣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응?”

“이런 대형사태가 벌어졌는데도 건물 안이 너무 조용하지 않아? 당장 이 전력소에 배치된 사람이 몇인데.”

“그러고 보니….”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깜짝 놀라고 있는 레이디버그를 뒤로 한 채 블랙캣은 계속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파리 전역에 정전이 벌어졌는데 몇십 분째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

“게다가 더 이상한 건, 보통 이런 전력소는 전기가 나가더라도 예비 전력은 늘 상비하기 마련이야. 그런데 우리가 처음에 찾아왔을 때부터 전력소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잖아, 안 그래?”



이쯤 되니 블랙캣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레이디버그가 입을 열었다.



“누가 일부러 전기를 차단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바로 맞췄어, 레이디.”

“대체 왜?”

“그건, 이제 밝혀야겠지!”



순식간에 4층에 도착한 블랙캣이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철컥철컥, 잠겨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 문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부술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그랬다간 너무 소리가 클 것이 분명했다. 이 앞에 어떤 상대가 있는지 모르는데 쓸데없이 위치를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곧 결론을 내렸는지 블랙캣은 살짝 레이디버그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만 시선이 맞지 않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잠깐 고민하더니, 짐짓 능청스레 말했다.



“잠깐만, 레이디. 혹시 잠시만 내 손 놓아줄 수 있겠어?”

“응? 왜?!”

“아주 잠깐이면 돼. 버리고 가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구.”



능글맞게 대답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부루퉁한 얼굴을 한 레이디버그가 귀여웠는지 블랙캣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계속 나랑 손을 잡고 싶은 거야?”

“…!! 그런 거 아니거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뿌리치는 레이디버그에 블랙캣은 알겠다는 듯이 작게 웃더니 곧 잠잠해졌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지자, 마치 어둠 속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들고 있던 요요를 다시 적외선 안경으로 바꾸고 싶어지는 충동을 애써 이겨내면서 레이디버그는 작게 소곤거렸다.



“……블랙캣?”

“나 불렀어?”

“꺄악!”



다시 잡아오는 손과 더불어 장난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블랙캣이 키득거리며 레이디버그를 이끌었다.



“자, 어서 들어가자.”

“문 열었어?”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하하 웃으며 앞장서가는 블랙캣의 모습은 인정하기 싫지만 확실히 믿음직스러웠다. 블랙캣의 손을 꽉 잡으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그를 따라 4층으로 들어갔다.


4층으로 들어가자마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복도 끝에 보이는 메인 제어실로 달려갔다. 역시나 제어실의 문도 복도의 문과 마찬가지로 잠겨 있었고,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재빨리 발을 들어 문을 세게 걷어찼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들어간 레이디버그의 발에 뭔가가 걸렸다. 물컹한 감촉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엄마야!”

“으으윽….”



그것도 잠시, 밑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곧 그것이 사람의 다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아팠겠다, 세게 밟은 거 같은데. 저도 모르게 사과를 건넸다.



“괘, 괜찮아요?”

“레이디, 불을 켤 테니 잠깐 눈 감아!”



이미 이것저것 기계를 만지고 있었는지 다급히 소리치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눈을 꼭 감았고, 곧이어 블랙캣의 손이 전원을 올렸다.


전력소에 불이 켜지는 것과 동시에, 파리 시내에 다시 불빛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전력소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두웠던 밤의 바다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블랙캣이 툭 말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뒤를 돌아보자 동력실 근처에 쓰러져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직원들인지 다들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기 위해 몇 사람을 흔들어 깨웠지만, 아무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제어실 안에도 두 사람이 기절해 있었는데, 이들은 그래도 여파가 적었는지 금방 눈을 떴다. 그리고 그제서야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사정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전력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연기 때문에 모두들 정신을 잃고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 있던 두 사람도.


방금 전 파리 시내가 모두 정전사태에 빠졌다는 말을 꺼내자 두 직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됩니다. 분명 제어실 문을 잠가뒀는데, 어떻게….”

“확실해요?”

“물론입니다. 애초에 제어실 문을 아무렇게나 열어둘 리가 없잖습니까? 다들 쓰러지는 걸 보고 놀라서 재빨리 문을 잠갔는데 어째서 동력원이 내려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쇠는 저랑 이 친구 둘이서만 보관하고 있었는데요.”



옆에 있던 직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 두 히어로의 표정은 각각 달랐다. 레이디버그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인 반면에 블랙캣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칫 잘못했다간 더 큰 문제가 발생했을 거라 생각하니 정말로 오싹해지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 분은 누구시죠?”



직원들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블랙캣이 씨익 웃더니 레이디버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블랙캣이고, 여기 아리따운 아가씨는 레이디버그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예쁜 이름이죠?”

“오, 혹시 저번에 은행 강도를 잡아주셨다는 그…?”

“맞습니다. 다들 뉴스 좀 보시는 모양이네요.”



능청스레 대답하며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좀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하려다가, 블랙캣이 다음에 던진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는 입을 다물었다.



“더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저희는 이만 돌아가야 해서요.”



딱 좋게 빠질 타이밍을 만들어주는데 말을 잘못해서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으니까.



“하,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까봐 걱정하는 듯한 두 직원들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조금 더 남아서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블랙캣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화 좀 주시겠습니까?”



직원한테서 핸드폰을 건네받은 블랙캣이 번호 몇 개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수신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이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주고받다가 블랙캣은 핸드폰에서 귀를 떼고 손짓으로 레이디버그를 불렀다.



“경찰에 연락했어요. 전력소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뒀으니 아마 도움이 될 거예요. 레이디, 레이디도 한 마디 해줄래?”

“어, 나?”

“나보다는 레이디가 더 신뢰되지 않겠어?”



짓궂게 말하는 블랙캣을 살짝 흘기다가 레이디버그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받아들고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대하기가 어려운지 우물쭈물하면서도 열심히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가만히 지켜보는 블랙캣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불이 환하게 들어온 전력소 앞에서 작별인사를 건넸다.



“오늘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나야말로. 레이디를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아, 아니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운걸. 신경쓰지 마.”



밝게 웃으며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블랙캣.”



파트너로서.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레이디버그를 바라보는 블랙캣의 눈이 깜빡거렸다. 초록빛 눈동자가 커지더니 블랙캣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정말로 기뻐보이는 얼굴로 웃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얘가 왜 이러지?


블랙캣이 천천히 손을 뻗어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레이디버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방금 전에도 당했지만 더 정중한 태도에 당황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마이 레이디.”

“에? 마이 레이디라니….”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의 손을 놓고 뒤로 돌아섰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블랙캣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며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쟤 뭐야?”





한편, 남은 두 명의 직원들은,



“으악! 이거 손잡이가 왜 이렇게 된 거야?!”



4층 비상계단 쪽 문의 모습에 경악하고 있었다. 문 자체는 멀쩡한데 손잡이가 멀쩡하지 못했다. 다 녹아서 바닥에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문의 손잡이를 보고, 이건 대체 누구 짓이냐며 절규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두 영웅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도시로 향했다. 다시 활기차게 빛나는 파리 시내였지만 그들이 몸을 숨기면서 날아다닐 만한 어둠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흐음….”



그리고 그건 물론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도시의 하늘로 날아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골목 사이의 어둠 속에서 주시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눈물이 그려져 있는 무심한 눈동자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리네뜨는 곧장 변신을 해제했다. 후아, 한숨을 뱉으며 침대로 쓰러지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싱글싱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 마리네뜨! 역시 대단해~”

“아니야, 생각보다 잘 끝나서 되게 기분이 이상하던걸. 그나저나 블랙캣인가, 그 애가 티키 네가 말했던 동료야?”



그렇게 묻자 티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대지.”

“그럼, 아까 네가 느꼈다던 이상한 기운의 정체가 걔인가?”

“으음, 그건 잘 모르겠어. 비슷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게 뭐야.”



꽤 긴장이 풀렸는지 마리네뜨는 편안한 얼굴로 소리내어 웃었다.



“생각보다는 괜찮더라. 꽤 믿음직하고 말이야.”



좀 대하기 어려운 타입이기는 하지만. 웃으면서 기지개를 펴는 마리네뜨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티키가 한 마디를 꺼냈다. 



“하지만 마리네뜨.”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절레 고개를 내젓는 티키를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 행복하다는 듯이 뒹굴거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조금은 히어로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으음, 잘 모르겠어어어-.”



꼬르르륵-


갑자기 울리는 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티키가 배를 부여잡고서 난처한 듯이 헤헤 웃었다.



“그나저나 마리네뜨, 나 배가 좀 고파….”



변신을 하고 나면 기력이 다한다는 말이 사실이긴 사실인 모양이다. 마리네뜨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알았어, 지금 뭐라도 가지고 올게. 기다려봐!”



방에서 내려와 부엌 쪽으로 가니 마리네뜨의 어머니인 사빈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하고 냉장고에서 쿠키를 꺼낸 뒤 돌아가려던 찰나, 마리네뜨는 사빈의 다리에 크게 붙어 있는 반창고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엄마, 그 반창고는?”

“아, 이거? 아까 정전이 있었잖니. 촛불을 찾으러 가다가 좀 부딪쳤지 뭐야.”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는 사빈의 인자한 목소리와 달리 마리네뜨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그런 딸의 모습을 눈치챘는지 사빈은 달래듯이 마리네뜨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다행히도 손은 안 다쳤으니 내일도 문제없이 일할 수 있단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자기가 다친 것처럼 우울해하는 딸을 꼭 끌어안으며 사빈은 마리네뜨의 등을 토닥거렸다.



“우리 딸, 너무 걱정하지 말렴. 그런 표정 지으면 엄마가 더 가슴이 아프잖니.”


‘좀 더 빨리 정전이 해결되었다면, 엄마가 다치지 않았을 텐데.’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사빈의 품으로 파고드는 마리네뜨에게 사빈은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우리 공주님이 왜 갑자기 이렇게 어리광이 많아진 걸까~?”

“엄마. 나를 믿어?”

“믿지, 언제나.”

“그럼, 내가….”



다른 사람들을 구할 만한 사람이라고 믿어?


역시 말하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그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파리 시내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서는 간밤에 소동이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또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를 유유자적 걸어가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신문을 읽고 있지만 청회색 눈동자는 흥미로운 것을 찾았다는 것처럼 조용히 반짝거렸다.


펠릭스의 손에는 르 피가로(le Figaro)지 한 부가 들려 있었는데, 신문의 1면에는 간밤에 있었던 정전 사태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간략히 요약하면 정전이 발생했는데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수사를 촉구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기절했던 직원들을 검진했을 때 모두 강력한 수면 효과가 있는 성분이 발견된지라, 직원들에게 책임을 묻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현재 정전 사태의 원인을 찾기 위해 경찰에서 부단히 애쓰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펠릭스가 흥미롭게 보고 있는 기사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정전 사태에 관련된 기사 밑에 조그맣게 실려 있는 건, 간밤에 벌어진 또 하나의 대형 사건이었다. ‘노아 바자르’ 라는 이름의 70대 노인이 완벽한 밀실에서 살해당한 사건. 비록 정전 사태라는 큰 사태에 가려 살짝 묻히기는 했지만, 예술계에서 유명했던 노인의 부고에 이 기사를 쓴 기자도 안타까워하는 느낌의 논조를 사용하고 있었다.


천천히 길을 걸어가며 기사를 마저 읽고 있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누군가가 주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챘음에도 애써 무시하고 걸어가는 펠릭스의 곁으로 다가온 마리네뜨가 인사를 건넸다.



“펠릭스, 안녕!”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펠릭스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밝게 인사하는 마리네뜨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는 펠릭스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 마리네뜨가 고개를 들어 펠릭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저번처럼 아무런 답이 없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마리네뜨는 그저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내 이름은 마리네뜨야. 앞으로 잘 부탁해!”



뭐를 잘 부탁한다는 건지. 그렇게 묻기도 전에 마구 손을 흔들며 앞으로 뛰어가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왠지 앞으로 피곤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조용히 이맛살을 찌푸리자, 펠릭스가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재밌는 일이 생길 거 같은데~?”

“시끄러워, 플랙.”



조용히 하라고 중얼거리는 펠릭스의 손에는 검은색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난데없이 인사하더니 그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진 소녀를 떠올리며, 소년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상한 녀석.”





- 3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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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는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2편을 6월 말에 올리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여행 일정이 잡혀버려서 이제야 작업을 했네요.

일단 수량조사를 7월 7일에 먼저 올리고 선입금 폼은 7월 25일에 올리려고 예정을 잡고 있습니다. 제대로 마감을 다 마친다면요^_T...


하루에 한 편씩 7월 4일까지 6편 업로드를 마칠 예정입니다. 너무 빡센 스케줄이라 좀 골치가 아픈데 어찌어찌 하고는 있습니다 헤헤... 마감하고 나면 칭찬해주세요 흑흑 후기에 아주 영혼을 갈아넣고 있습니다ㅠ.ㅠ...


봄 에피소드를 모두 올리는 이유는 이 에피소드들이 프롤로그격인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사건은 여름부터 시작되며, 봄의 에피소드는 관계도에 대해 명시하면서 떡밥을 솔솔 뿌리는 정도거든요.


그리고 중요한 거.

영혼 없는 댓글 제발 좀 달지 마세요. 요즘들어 자꾸 이상한 댓글 다는 분이 느셨던데 안 다느니만 못합니다. 한 번만 더 이러시는 분들 나오면 그냥 티스토리 댓글을 닫거나 글을 아예 비밀글로 돌리겠습니다. 근데 이러고 싶지 않으니 제발 다들 매너를 지켜주세요. 댓글이면 다 기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의 무례한 생각이신거죠;


관심 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꼭 레이디버그 온리전에서 책을 들고 올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_T...

Posted by I.R.E
,

※ 스크롤주의. 약 22500자




맨디님 그림 보니 떠오르는 썰이 있다.


호크모스 해치우고 새로운 빌런수장이 된 레이디버그! 최후의 싸움 때 블랙캣은 목숨을 잃었고 그걸 보고 폭주해 호크모스까지 죽게 하고 새로운 나비 요정에게 선택받은..


진짜 그 최후의 싸움 때 싸우던 장소는 모조리 쑥대밭이 되었고, 호크모스는 사라져 버렸으나 남아 있던 나비 요정이 그 자리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마리네뜨에 들러붙어 버림. 이 때 폭주의 여파로 미라클스톤은 부서졌고 티키의 행방도 찾지 못함.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변신하고, 자기 의지와는 달리 다른 장소에 와버린 마리네뜨는 경악함. 순간 정신이 들었는데 갑자기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기겁하지. 그런데 요정이 굉장히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제안을 해.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아?"


살리고 싶은 사람.

그 한 마디를 마리네뜨는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음. 자신의 눈 앞에서 쓰러지던 블랙캣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지. 그 전투 이후로 아드리앙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어. 아파서 못 나온다는 사유를 내걸고. 병문안을 가도 돌아오는 대답은,


‘도련님은 집에 안 계십니다.’


라는 비서의 쌀쌀한 대답뿐이고 병원이 어디냐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아. 마지막 싸움을 한 장소에 가도 거의 폐허가 된 장소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음. 호크모스의 시체조차 남지 않았는걸.


그에 절망한 마리네뜨는 결국 요정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호크모스가 되어 빌런을 만들기 시작해. 요정의 제안은 자신이 힘을 얻는 방법은 여러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사람의 공포를 먹고 자란다는 거였어. 어느 정도 힘이 모이면 미라큘러스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지. 솔직히 좀 소름끼치잖아 사람의 공포를 먹고 산다니;; 마리네뜨도 물론 기겁했지만 그 요정이 제안한 이야기는 차마 마리네뜨의 입장에선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


게다가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에 대한 엄청난 죄책감과 그의 상실로 인한 공허함을 같이 갖고 있었음. 둘도 없는 파트너이자 연인을 잃어버린 마리네뜨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지. 자포자기한 그녀는 결국 요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호크모스가 되어 파리를 위협하기 시작해. 연보랏빛 옷을 입고 등에 커다란 날개같은 펄럭이는 천이 돋아나 있는 모습으로 변신했고, 검은 나비를 만들 수도 있지만 등에 달라붙어 있는 천을 무한대로 조절해 상대를 겁박할 수 있어. 거미줄처럼.


겉보기는 우아한 공주님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리네뜨는 변신하면 자기 의지대로 몸을 막 움직일 수 없어; 그러니까, 요정의 의도를 벗어나면 자동적으로 결합된 요정이 그녀의 움직임을 막는 거. 마치 인형을 조종하듯이; 당연히 마리네뜨는 티키때와 달리 그 요정을 싫어해. 자기를 조종해서 이익을 챙기는 것도 그렇거니와 결국 이 요정때문에 블랙캣이 죽은 거나 마찬가진데. 그런데도 그런 요정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는 자신의 이기심이 너무 밉고, 언제나 사랑받던 레이디버그에서 모두가 욕하고 비난하는 빌런이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굉장한 스트레스와 자책감을 주지. 사실 변신했을 때는 요정의 영향인지 악행에 전혀 자책감이 없음. 근데 변신 풀리고 나면 진짜 자기 자신에 회의감이 밀려오는 거야.


내가 진짜 이런 짓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학교를 다니니까 주로 아이들의 어둠에 접근해 그들을 빌런으로 만들었고, 사실 아이들은 성숙하는 과정이라 어른보다 더 멘탈이 약하기에 한층 수월했지.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마리네뜨는 사람들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돼. 심지어 알리야한테조차.


알리야는 점점 어둡고 말수가 적어져가는 마리네뜨를 걱정하지만 언제나 마리네뜨는 괜찮다고 말하며 웃어넘기니 더 답답한 거. 빌런네뜨가 주로 서 있는 장소는 바로 에펠탑 꼭대기. 도도하게 에펠탑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지만 그 눈빛은 악당답지 않게 자못 슬퍼보여.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큰 변수가 생겼지.


아드리앙이 돌아온 거야.



그녀가 빌런이 된지 어언 3개월이 지난 뒤였어.


빌런활동까지 하느라 너무 피곤한 마리네뜨는 학교에서 엎어져 자는 일이 잦았어. 그래서 제 앞에 누군가가 앉는 것도 모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데,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네.'


명랑하고 익숙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비몽사몽한 와중에 뭐지... 하고 생각하다가 다음 순간 인지하고 홱 고개를 들어. 근데 정말 아드리앙이 앉아 있어. 이건 꿈인가? 하고 마리네뜨는 자기 손등을 꼬집는데 꿈이 아니야. 정말 다 떠나서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고 마리네뜨는 그의 이름을 불러.


"아...드리앙?"


그가 뒤를 돌아봐.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반짝이는 녹빛의 눈동자. 자신이 기억하는 그가 확실해. 살아 있었던 건가? 정말 복잡하게 굴러가는 마리네뜨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든 건 아드리앙의 그 한 마디였어.


"...미안하지만, 넌 누구야?"



아드리앙에겐 지난 1년간의 기억이 하나도 없었어.


사실을 조금 풀어놓자면, 블랙캣이 죽은 줄 알고 마리네뜨가 폭주했던 그 시기에 사실 블랙캣은 죽지 않았고 플랙의 가호로 간신히 숨은 붙어 있었음. 그러나 폭주한 미라클스톤의 파장으로 거기에 공명한 블랙캣의 반지도 어느 정도의 폭주 증상을 보였고, 그 후유증으로 히어로가 되었던 이후의 기억을 모두 상실한 거야. 빌런으로 변신된 마리네뜨가 터벅터벅 사라진 후에 블랙캣은 정신을 차렸지만 사실 그건 아드리앙의 의지라기보단 플랙의 의지였을지도 모르지.


길거리를 배회하던 블랙캣은 어느 순간 털썩 쓰러졌고 그제서야 변신이 풀리면서 상처투성이인 아드리앙의 모습으로 발견되었거든. 깨어나고 나서는 자기가 어떻게 거기 있었는지도, 어떻게 그런 상처를 입었는지도 몰라.


사실 재미있는 건 이 시점에서 파리에 새로운 레이디버그가 나타났다는 점이지. 티키가 무사했던 건가?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빌런을 조종할 땐 밖으로 나설 수 없고, 레벅의 정체를 모르는데 레벅을 찾아다닐 수는 없었지.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자신처럼 다시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슈퍼히어로로 활약해. 그에 마리네뜨는 굉장히 허탈감을 느껴.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구나.


나를 필요로 한 게 아니야. 그냥 영웅이라는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 씁쓸하고, 마음이 무거워져.


그리고, '진짜 자신'을 필요로 해 줬었던 한 사람의 존재가 떠올라. 네가 레이디버그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나는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던 그 상냥한 녹색 눈동자가 떠오르니까 정말 울고 싶은 거야.


사실 빌런네뜨의 모습으로는 마리네뜨는 거의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아. 그냥 무표정으로 도도하게 모든 일을 관망할 뿐. 왜냐하면 빌런네뜨의 모습은 마리네뜨 안에 있는 허무함과 무기력함을 극대화하는 변신이었거든. 그리고 새로운 레이디버그가 나타나면서 그녀의 어둠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하고, 빌런들의 능력도 그에 따라 강해지기 시작함. 사실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빌런네뜨로 서는 일이 몇 배는 힘들어졌어.


지금은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그리고 내가 지금 파리를 위협하는 빌런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나를 경멸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마리네뜨는 당장이라도 빌런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나비 요정은 우리 계약은 끝나지 않았고 지금 그만두면 당장 그 남자애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함. 마리네뜨에게 최우선은 아드리앙이었기에 죄책감을 가지고서도 마리네뜨는 억지로라도 빌런 일을 수행해. 문제는 빌런 상태에서는 가뜩이나 있던 감정도 심화되는데 마리네뜨의 스트레스가 도를 넘어가고 있었던 거지. 빌런네뜨의 표정변화는 점점 없어지면서 눈빛은 점점 침잠하기 시작함. 그런데도 요정을 믿을 수 없어서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을 돕겠다는 핑계로 그의 곁을 맴돌아. 그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서 문제가 뭐냐면,

기억을 잃고도 아드리앙이 레이디버그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알아챈 계기는 별로 대단한 건 아냐. 언젠가는 빌런이 생성된 곳에 아드리앙이 있었고 그 때 그가 레이디버그랑 마주쳤거든. 레이디버그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아드리앙의 표정에서부터 빌런네뜨는 모든 걸 읽었어. 그리고 제발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랬지.


그런데 새로운 레벅을 처음 마주친 이후로 아드리앙이 그녀에 대해 조금씩 묻기 시작한 거야. 주변에 가장 친한 친구가 마리네뜨와 니노밖에 없었으니까 이 둘한테. 니노는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데 듣고 있던 마리네뜨는 점점 괴로워져.


뭔가 낯설지 않은 느낌이야. 보고 있으면 그리운 느낌이 들어. 예전에 관련이 있었던 사람일까? 등등을 말하는 아드리앙에게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는지 몰라.


아니, 아니야. 그 여자가 아니야! 보지 마. 그 여자를 생각하면서 그런 표정 짓지 마!

...결국 네가 좋아한 사람도 내가 아니라, 레이디버그였던 것 뿐이야?


이 생각 하나가, 마리네뜨를 엄청나게 절망하게 만들어. 진짜 어느 정도냐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마리네뜨를 마리네뜨로 만들어주던 끈조차 끊어진 느낌. 그 정도로 그녀의 안에서는 아드리앙의 존재가 컸던 거야. 근데 그게 끊어졌지.


그러니 어떻게 됐겠어?


여기서 잠깐 사담을 하자면 블랙캣의 미라클스톤은 부서지지 않았어. 근데 고양이반지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음. 플랙이 깨어나지도 못한 채로. 아드리앙은 깨어났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물건이라 보석함에 고이 담아두고 쉽사리 꺼내지 않았고, 그래서 플랙이 오랜 시간 깨어나지 못했던 거지. 아드리앙을 마지막까지 보호하느라 플랙도 자신의 에너지를 한계치까지 끌어다 썼거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아드리앙은 다시 보석함을 열어 반지를 만졌고 그 때 다시 플랙이 깨어나 그를 블랙캣으로 만들지.


그리고 그는 새로운 레이디버그와 다시 같이 활동하기 시작해. 곁에 있고 싶다는 이유로.


...참으로 우습지. 기억을 잃고도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니. 다시 나타난 블랙캣에 빌런네뜨는 기겁할 만큼 놀라고, 다른 사람인가 싶었지만 그의 움직임을 보고 절망스러운 확신을 하게 돼. 그는 아드리앙이라는 걸. 자신과 활동할 때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거야. 차이점이라면 그녀가 레이디버그가 아니고, 그와 적대시하는 입장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 혼자, 그와 함께했던 모든 추억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빌런네뜨로서 계속 악당을 보내야 하면서도 마리네뜨는 악당을 보낼 때마다 블랙캣과 레벅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봐야 했고 그걸 볼 때마다 밤에 굉장한 악몽에 시달리게 됨. 그런데 우습게도 그런 마리네뜨의 우울함이 빌런을 더 강화시켰고, 어느 날은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구하려다 크게 다치게 돼. 그 모습을 보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경악하고, 빌런네뜨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에 동공만 살짝 커져. 블랙캣을 붙들고 걱정하던 레벅이 정말 무지막지한 속도로 빌런을 해치우기 시작하고, 쓰러진 블랙캣을 멍하니 보던 빌런네뜨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해.


///


얼굴에 느껴지는 촉촉함에 그녀는 살며시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매만졌다. 눈동자에 묻어나는 미지근한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 아..."


의미 없는 탄식을 토해내던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스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매가 일그러지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그러나 이례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오래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탓인지, 얼굴의 근육들은 격한 감정에 비명을 질러댔다. 고개를 푹 떨구고 그저 뚝뚝 눈물을 쏟아내던 그녀의 얼굴이 비참함에 일그러지며, 비명과도 같은 울음을 토해냈다.


"아, 아, 아아...."


감정을 표현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가엾은 빌런은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괴로움을 토해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하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입 밖으로 천천히 말을 토해냈다.


"싫..., 어...."


제발 그만해.


그를 상처입히기 위해 빌런이 된 게 아니야. 이런 추한 모습이 되어가면서까지 내가 바랬던 건 오직 하나뿐인데, 어째서. 어째서 나에겐 그것조차... 이것이 벌인가. 내가 그동안 해왔던 짓들에 대한?


그녀는 결국 비명을 토해내. 누군가 들었다면 분명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날카롭고, 슬픈 목소리로.


"싫어, 싫어, 싫어!!!!!"


펑펑 눈물을 쏟으며 그저 싫다고 몇 번이고 소리질러. 몇 번이고. 속으로도 중얼거리지.


그만두고 싶어. 그만하고 싶어. 이제 됐잖아. 충분하잖아.


난 할 만큼 했어. 정말, 정말 열심히 했단 말이야. 그런데 왜!!! 왜 너는 날 알아봐주지 않아?

왜, 왜 그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 거야.


이 와중에도 그가 그녀를 감쌌다는 사실에 질투하는 자신에 마리네뜨는 픽 웃을 수밖에 없었어.


정말로 추해졌구나, 나.



///


한편, 블랙캣의 상처는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어 다행히도. 하지만 아드리앙은 어쩔 수 없이 병원에 한 3일은 입원하게 됐지. 기억을 잃었을 때도 그랬지만 아드리앙은 병원을 굉장히 싫어함. 원래 일주일인데 3일로 타협한 거기도 하고. 일단 학교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고, 회사 관계자들도 찾아와.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로 아드리앙이 실질적으로 회사 쪽에 손을 대고 있었거든. 1년간의 기억만 없지 다른 지식들은 모두 멀쩡하니까. 여전히 까망베르 치즈를 찾는 플랙에 아드리앙은 귀찮아하면서도 나탈리에게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음. 그 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려(아드리앙의 병실은 개인실). 들어오라고 하니까 과일 바구니와 봉투 하나를 든 마리네뜨가 안으로 들어와. 아드리앙은 그녀가 왠지 꽤 반가웠어.


일단 기억을 잃고 자주 같이 어울리기도 한 친구고, 사실 아드리앙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리네뜨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거든. 다만 기억은 나지 않아서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야. 다만 이상한게 니노랑 달리 마리네뜨에게선 어딘지 불편하고 꺼려지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어. 그 감각의 정체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친하게 지내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둠. 다만 마리네뜨가 가끔 살짝 웃을 때 괜히 신경이 쓰여.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듯 웃는 얼굴이 그녀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


좀 더 밝게 웃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라는 느낌이랄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근데 레벅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굉장히 그리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받아. 그래서 아드리앙은 그녀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거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리네뜨도 눈에 밟혔지.


솔직히 감정에 대해 아주 확신하지는 못했는데, 뭐 그래도 이 심심한 병실에 그나마 좀 얘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와준 게 어디야. 니노는 어젠가 왔었고. 과일바구니를 옆 책상에 내려놓은 마리네뜨가 가지고 온 작은 봉투를 아드리앙에게 건네.


아드리앙이 물어.


"이게 뭐야?"


마리네뜨가 담담히 대답해.


"필요할 거 같아서."


의아한 얼굴로 봉투 안을 열어봤는데 단번에 고약한 냄새가 풍겨. 뭔지 단번에 알았지. 까망베르 치즈. 아드리앙이 멍하게 물어.


"...어떻게 알았어?"

"뭐라고 했어?"

"아, 아니."


다행히도 제대로 듣지 않은 모양이야.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아드리앙은 감사히 치즈를 받아들어.(플랙은 이미 숨어들었음) 그리고 의자에 앉은 마리네뜨한테 그날 수업에 대한 소식과 통신문을 받아.


학부모 발표회 관련.


아드리앙의 표정이 단번에 쓸쓸하게 구겨짐. 그런 아드리앙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통신문을 건네주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왜 그런 표정을 하냐고 물어. 마리네뜨가 대답해.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그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아. 잠깐의 침묵 끝에 마리네뜨가 다시 입을 열어.


"상처는..."

"아, 괜찮아. 별 거 아니야."


금방 퇴원할 수 있어. 가볍게 대꾸하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가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어버림.


"그 상처가 사흘만에 낫는다고?"

"응?"


되묻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낭패라는 얼굴로 눈을 데록데록 굴림. 그에 아드리앙은 좀 이상하게 생각해. 마치 자신의 상처를 잘 알고 있다는 투잖아.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제 주치의랑, 또 한 명.


"...레이디버그?"


정말 아무 생각없이 말을 뱉어내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자기가 무슨 말을 인지했는지 떠올린 아드리앙은 제가 한 말에 경악해. 아니아니아니 잠깐. 나 지금 말실수한...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하게 마리네뜨를 쳐다보고 있는데, 조금 놀란 듯했던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의 표정에 그 속을 짐작했는지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


"갑자기 웬 레이디버그 얘기야? 실없게."


거짓말.


아드리앙은 본인이 그렇게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마리네뜨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보였어. 근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단순히 그녀가 레이디버그다, 라고 생각하기엔 제가 아는 레이디버그가 그녀와 너무 달랐으니까. 제가 아는 레이디버그는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똑부러지고 강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기서부터 갑자기 아드리앙은 뭔가 이상함을 느껴. 뭐지? 자기가 알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이미지가 어딘지 모르게 모순되는 점이 있는 거야. 어떨 때는 왠지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또 어떨 때는 굉장히 강인하고 자신의 앞에서 달려나가는, 어떨 때는 정말 순수하게 웃으며 제게 애교스럽게 달라붙었던 것 같은데... 뭔가 다가가려고 하면 막 떼어내고 밀어냈던 것 같기도 해. 불퉁한 표정이었던가? 내가 그녀에게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나?


자, 여기서 이제 기억에 혼란이 오기 시작함. 뭐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기억이 이렇게 꼬여 있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정말 다 같은 사람일까?


정말 딱 한 순간에 떠오른 사실에 아드리앙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려. 놀란 표정으로 주먹을 정말 꽉 쥔채로 경악한 표정을 짓고만 있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봐. 그리고 불러.


"아드리앙?"

"...어?"


아드리앙은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드는데, 그 부름이 익숙하다고 생각한 자신에 놀라. 그와 동시에 머리가 미친듯이 아파오기 시작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엄청나게 놀라서 다가가 손을 대려는 순간 아드리앙이 멋대로 휘두른 팔에 손이 탁 쳐짐. 마리네뜨는 그 순간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아드리앙은 그런 마리네뜨 표정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그 와중에도 두통이 너무 심해서 아드리앙이 간신히 입을 열어서 띄엄띄엄 말해.


"미안, 오늘은 이만 돌아가줘."

"너, 괜찮아? 의사 선생님은.."

"...안 불러줘도, 돼."


너무 아파서 겨우겨우 말을 잇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얼굴로 침대 옆에 있던 인터폰으로 주치의를 호출함. 그리고 말해.


"나 이만 갈게. 넌 이렇게 안 하면 또 혼자 아파하다 말 거 같으니까."


치료 잘 받고 빨리 나아.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바람처럼 병실을 나가고,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던 아드리앙의 표정도 황망해짐. 그런 와중에 두통이 어느 정도 가신 것을 알아채고 놀란 얼굴로 제 손바닥을 쳐다봄. 식은땀이 묻어 축축히 젖어있는 손바닥을 이불에 슥슥 문지르고, 아드리앙은 방금 전 마리네뜨의 태도에 대해 고민해. 왜 그렇게 말한 걸까.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친한 사이긴 했지만 뭔가, 좀 다른 느낌이었던 것 같았는데. 두통은 매우매우 아팠지만, 지나고 나니까 뭔가 머릿속에 쓰여 있던 안개가 살짝 걷힌 느낌이야. 생각이 좀 더 명확해졌어. 떠오르는 것들도 있고. 잠시 후 의사가 와서 이것저것 물어본 뒤에 결론을 말해줘.


"혹시,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잊었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어서 가벼운 기억 충돌이 발생한 거 같다고 의사는 허허 웃는데, 그 말에 아드리앙은 안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불안해져. 왜냐하면 방금 전의 두통은 레이디버그를 생각할 때 발생했었으니까. 그녀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때 머리가 아팠고, 그렇다는 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레이디버그가 있다는 건데, 그 때도 그녀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걸까.


그렇게 결론을 내고 싶지만 아드리앙은 뭔가 굉장히 찝찝해. 의사가 나가고 아드리앙 가방 속에 숨어 있던 플랙이 튀어나와. 까망베르 치즈~! 하면서 달려들려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은 치즈통을 들고 물어봄.


"플랙, 나 예전에도 레이디버그랑 같이 활동했었어?"


치즈를 들고 위협하는 아드리앙을 가만히 쳐다보던 플랙이 킬킬 웃기 시작하더니 아드리앙의 주변을 휘잉 돌아.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플랙이 정말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말해.


그걸 이제야 물어봐?


당연히 플랙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죠 암요 ㅇㅇ 플랙이 긍정의 대답을 해주자, 그 한 마디에 멍-해져서는 왜 근데 이때까지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이 장난스럽게 말함.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대답해줘야 할 이유는 없잖아?


사실은 아드리앙이 혼란스러워 할까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지만. 아무튼 그래서 아드리앙은 플랙한테 물어. 혹시, 내가..


"그녀를 좋아했었어?"

"그랬지."


아주 좋아죽겠다고 하면서 시도 쓰고 꽃다발도 갖다바쳤다니까? 투덜거리는 플랙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드리앙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해. 무엇보다 너무 찝찝해. 그래서 넌지시 물어봐.


- 니가 알던 레이디버그는... 어땠어?


그 말을 듣고, 플랙은 아드리앙이 건네준 치즈를 꿀꺽 삼키면서 킬킬거려.


- 그건 니가 판단할 문제 아니었어?


알아서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플랙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아드리앙은 얼굴을 찡그려. 사실 자신이 레이디버그를 좋아했었다는 것보다도 더 신경쓰이는 건 레이디버그를 보며 떠올리는 왠지 모를 위화감. 그런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는 다시 빌런을 상대하러 나갔을 때, 제 옆에 있는 레이디버그를 유심히 관찰해. 아,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당당하기도 한데 어딘지 가냘퍼 보이고 애교도 많은 성격이었음. 자신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는 레벅한테 블랙캣은 굉장한 위화감을 느껴. 늘 했던 행동인데 왜?


그래서 그녀의 손을 마주잡지 못하고, 그냥 레이디버그한테 넌지시 물어봐. 우리 예전에도 같이 활동한 적 있었냐고. 레이디버그는 살짝 놀란 눈치더니 밝게 웃으며 대답함.


- 무슨 소리야? 우리 아직 만난지 얼마 안 됐잖아?


진짜 그 순간 블랙캣은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저도 모르게 표정이 싹 굳어.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과 달리 엄청나게 심각한 얼굴이 되어버린 블캣에 레벅은 의아해하고, 빌런을 다 퇴치하고 나서도 블랙캣의 싱숭생숭한 기분은 여전해.


헤어진 뒤에, 블랙캣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 변신을 풀려고 했는데 그 순간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나.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여자는 보기에도 꽤나 차림새가 특이했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보랏빛에 등에는 커다란 천이 나비처럼 쫙 펴져 있고.


그냥 악당이라 간주하기엔 분위기가 좀 이상해. 막 공격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제게로 다가오는 걸음걸이는 우아하기 그지없었어. 무엇보다 시선. 부드럽게 웃는 푸른 시선에 블랙캣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제게로 걸어오는 걸 마냥 지켜봐.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타입이었달까. 딱 그의 앞에 서서는 여자가 살짝 웃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거야. 근데 익숙한 느낌이야 어쩐지. 눈동자도 그래. 분명 처음 보는데, 처음이 아닌 거 같은 느낌.


여자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어리고, 그와 동시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밑으로 살짝 끌어당겨. 블랙캣은 자신의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려앉는 걸 느끼고 눈을 크게 뜨지만, 밀어낼 생각같은 건 하지 못하지. 눈을 감은 여자랑 달리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짧지만 긴 입맞춤이 끝난 뒤에, 보랏빛의 여인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의 놀란 얼굴을 어딘지 슬프게 쳐다보는 것 같다가, 킥킥 웃으며 말해.


"빈틈이 많네. 도둑고양이 씨."


라고 말하며 그를 세게 골목 밖으로 밀쳐냄.


밀려난 블랙캣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골목에는 아무도 없어. 그리고 이 때부터 블랙캣은 그 여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돼. 레이디버그하고 있을 때는 편안하고 즐겁지만 단지 그 뿐인데, 그 여자를 보고 있을 때는 심장이 조여들었거든.


옷차림을 봐서는 히어로인가, 싶다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야. 그럼 빌런인가? 적이라고? 상황만 보면 그게 더 맞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서 적대감을 느끼지는 못했어. 정말 꼼짝도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그 여자를 마주하고 느꼈음. 그런데도 계속 떠오르는 거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는 자신에 기겁하며 아드리앙은 베개를 쾅쾅 내리쳐. 엎어져서는 웅얼거리는 아드리앙을 보며 그러든 말든 치즈나 꺼내먹고 있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이 물어.


"플랙."

"왜?"

"내가 미쳤다고 하면 어쩔래?"

"이미 지금도 정상이 아닌데~?"

"..니가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또 그러는구나~ 하겠지? 뭐야, 무슨 미친 생각이라도 한 거야?"

"아, 아니."


얼버무리며 아드리앙은 다시 얼굴을 침대에 묻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는 불길해서일까 설레서일까.


그 후로 아드리앙은 멍때리는 일이 더 잦아짐.


한편 마리네뜨는 그 병원 일 이후로 묘하게 아드리앙을 피해. 만나서 인사하고 이런 건 좋은데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아드리앙은 요즘 마리네뜨가 자주 안 보인다는 건 알고 있어. 그때 내가 너무 매정하게 말했나? 싶어서 괜히 안절부절 못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복도에서 마리네뜨를 딱 마주쳐. 아드리앙은 놀라는데 마리네뜨는 홱 시선을 피함.


사실 마리네뜨가 피하는 건 병원 일이 문제가 아니라 빌런네뜨가 되었을 때 키스했던 게 양심에 찔려서...


초반에도 말했지만 빌런으로 변신하면 그 동안은 감정이나 성향이 좀 격해지는 부분이 있음. 그리고 죄책감이 없지. 그 골목에서 키스했던 것도 거의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일이라 변신 풀리고 나서 밤에 이불킥 팡팡하고 아드리앙 얼굴 차마 못 보겠어서 마구 피한 건데 타이밍이 매우 안 맞았던 거죠.


대놓고 피하면서 후다닥 제 옆으로 지나가려는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자기 옆으로 지나가는 마리네뜨 팔 붙잡고 빈 교실로 끌고 들어가. 마리네뜨는 발버둥치지만 현실에선 아드리앙을 힘으로 이길 수 없지. 힘없이 끌려가면서 아드리앙을 다시 보는데 괜히 울컥해. 그가 돌아온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여전히 가슴에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야. 보고 있으면 아픈데 빼내면 죽을 거 같아서 빼낼 수가 없는.


교실에 끌려 들어와서 무슨 용건이냐고 묻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할 말이 없어. 왜 자기가 이런 행동을 했는지도 몰라.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 너 요새 왜 나 피하냐고. 마리네뜨는 대답 못함. 그냥 난 너 피한 적 없다고 하고 나가려는데 벽을 짚는 아드리앙 손바닥이 마리네뜨 바로 앞을 탁 가로막아. 그 때 병원에서 내가 네 손 쳐내서 그런 거냐고 물어보는데 마리네뜨는 그건 생각지도 않고 있었어서 어? 무슨 일? 하고 당황하는데 아드리앙은 그녀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음.


근데 그거랑 별개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자기가 손을 쳐냈을 때 마리네뜨의 상처받은 표정. 그 때, 자기가 느꼈던 감각이 떠오른 거야. 심장이 멈추는 듯한 순간의 충격은, 자신이 얼마 전에 만났던 그 여자의 미소를 봤을 때 느꼈던 감각이랑 매우 비슷함. 그거에 충격을 받은 아드리앙이 마리네뜨를 다시 한 번 훑어봐. 얘가? 설마. 설마. 설마. 그럴 리 없어. 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아드리앙의 이마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고, 그 감촉에 아드리앙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마리네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그의 이마에 짚고 있어. 열은 없는데. 라고 말하는 마리네뜨의 손이 너무 차가워서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마리네뜨의 손을 붙잡아.


"너 어디 아파?"

"응?"

"손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그 말과 함께 단호히 손을 뿌리치는 마리네뜨의 얼굴도 자세히 보니 꽤 안색이 안 좋아. 아드리앙은 당초의 목적을 잊고, 역시 병원가보는 게 어떠냐고 걱정하는데 마리네뜨가 그 순간 소리질러.


"내버려 둬!!"

"..."

"너랑은 상관없잖아!!"


깜짝 놀란 그를 홱 노려보고서 마리네뜨는 재빨리 교실에서 나가버림. 뒤에 남은 아드리앙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기가 잡은 손의 감촉을 떠올려. 말랑말랑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 성격이랑 달리 의외로 연약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느낌이..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얼굴이 더워지기 시작해. 어, 어? 하면서도 얼굴이 새빨개지는 거야. 허둥지둥 얼굴을 탁탁 때리는데 품속에서 나온 플랙이 깔깔거리면서 비웃음. 너 레이디버그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하고 약올리는데 아드리앙은 걍 패닉.


마리네뜨와 레이디버그, 그리고 그 의문의 여인.


뭔가 떠오를 듯 말듯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아. 그럼에도 이 상황 자체가 위화감이 쩔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날은 빌런을 처치하러 다시 나서는데, 빌런이 이번에는 두 명임. 남매였어.


각각 한 명씩 맡아서 상대하고 있는데 빌런들이 요즘 너무 강해서 혼자 상대하기가 버거움. 그런데 이상한게, 자기가 상대하는 빌런이 어딘가 이상한 거야. 막 공격하려다가도 자꾸 멈추고, 멈추고. 레벅 쪽을 힐끗 봤지만 그녀가 상대하는 빌런에는 그런 현상이 없었어. 그에 블랙캣은 누군가 이 빌런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주위를 둘러봄. 그 틈을 타서 악당이 그를 내리치려고 했는데 얼굴에 빌런마크가 뜨면서 몸이 딱 멈춰. 그리고 그 순간, 블랙캣은 무언가 빛이 반짝이는 걸 눈치채.


에펠탑 꼭대기.


그걸 보자마자 블랙캣은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레이디버그에게 신호함. 재빨리 달려들려는 빌런을 후려친 뒤에 레벅을 안고 봉을 늘려서 지붕 위로, 지붕 위에서 다시 봉을 늘린 뒤에 에펠탑으로 기울여. 꼭대기에 무사히 착지! 한 블랙캣은 고요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빌런네뜨를 보고 당황해. 그 때 자기한테 키스했던 여자!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에 빌런마크가 떠 있음. 블랙캣의 옆에 선 레이디버그가 그녀에게 물어.


넌 누구야?


빌런네뜨는 말이 없음. 그래서 블랙캣이 다시 묻지.


당신이 파리에 악당을 만들어내고 있는 녀석이야?


하니까 빌런네뜨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어. 단 이건 빌런네뜨 입장에선 자기 자신을 위한 조소였지만 두 사람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지. 긴장한 얼굴을 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러자 빌런네뜨 등 뒤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천이 의지를 가진 듯 움직이면서 덤벼드는 두 사람을 가볍게 쳐냄. 뒤로 내동그라진 두 사람이 저 천은 대체 뭐냐고 기겁하는데, 천이 다시 매섭게 늘어나면서 두 사람에게 덤벼서 꽁꽁 묶어버림. 빌런네뜨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천이 매섭게 두 사람의 몸을 옥죄기 시작해. 점점 숨이 막혀가서 둘 다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하는데도 천은 꼼짝도 하지 않고 찢어지지도 않아. 끙끙거리며 천을 풀어내려는 레벅과 달리 블랙캣은 그 와중에도 빌런네뜨를 계속 쳐다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는데, 블랙캣은 이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저 녀석은 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함. 자신을 보는 눈동자에 적의가 없어. 뭔가 숨은 점점 막혀가는데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음.


그 순간, 그녀가 몇 번 망설이듯 눈동자를 깜빡여. 동시에 블랙캣을 조였던 천의 움직임이 아주, 아주 살짝 느슨해짐.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들고 있던 봉을 늘려서 자신의 움직임을 잡고 있는 빌런네뜨의 등 바로 뒤에 붙어있는 천을 눌러버림. 역시 거기가 축이었는지 천이 확 풀리고, 빌런네뜨가 행동할 틈도 없이 블랙캣은 재빨리 달려들어 그녀 앞으로 파고듬. 휙,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바로 앞까지 파고든 블랙캣이 빌런네뜨를 올려다보는데 무표정한 얼굴이 당황한 것처럼 시선을 피함.


그리고 그녀의 팔을 오른손으로 세게 붙잡아.


그런데 얄궂은 운명처럼, 그 팔을 잡자마자 블랙캣은 그 손의 감촉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너무 선명하게 깨달은 거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는 더 이상 행동하지 못하고 그녀를 마냥 올려다봄.


빌런네뜨도 덩달아 꼼짝하지 못해. 저번에는 기습적으로 당해서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녀의 모습이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겹쳐 보여. 자신을 두려워하는 듯한 푸른빛 눈동자를 가까이서 보았을 때야 블랙캣은, 어딘지 모르게 원망하는 듯한 그 시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정말 명확하게. 정말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는 경악한 눈빛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어.


"마...리네뜨?"



///



"마...리네뜨?"


순간의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빌런네뜨는 팔을 뻗어 그를 세게 밀어내. 마치 그 골목에서 키스한 뒤 자신을 세게 밀쳐냈던 것처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던 그녀가 에펠탑 아래로 떨어져. 깜짝 놀라서 후다닥 달려가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는 보이지 않아.


홀연히 사라져버린 빌런네뜨의 잔상을 쫓던 블랙캣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뒤로 돌아가 쓰러져있는 레이디버그를 일으켜.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저건 대체 무슨 괴물이냐고 말하는 레벅에게 블랙캣은 차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어서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해. 변신을 풀고 집에 와서 고민과 착잡함에 추욱 늘어지는 아드리앙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떠다녀.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그건 분명 마리네뜨가 확실하다는 어떠한 확신이 머릿속에 있어.


마리네뜨가 이제껏 빌런들을 만들어서 파리를 위협한 악당이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는 이유 모를 배신감에 화가 나. 절대 아닐 거 같다고 믿고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그 다음에 드는 건 의문이야.


도대체 왜?


그가 아는 마리네뜨는 상당히 조용하지만 의사 표현 확실한데다, 조금 감정이 격해질 때는 있지만 사람을 잘 배려해주는 좋은 아이- 라는 인상이었거든. 기억을 잃고 돌아온 자신을 여러 면에서 도와준 것도 그녀였고. 반에서도 평판이 매우 좋고.


그런 그녀가 왜 굳이 빌런이 되어서 파리를 위협하는 걸까. 굳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이득을 얻으려는 타입은 아니어 보였는데 다 연기인 걸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 그런데 자신한테 키스는 왜 한 거지? 뭔가 이유가 있나? 갑자기 그 때 기억이 떠오르니까 입술에 닿았던 감촉까지 떠올라서 아드리앙 얼굴도 좀 붉어짐. 아아아악 비명을 질러대는 아드리앙을 플랙이 안쓰럽다는 눈으로 쳐다봐. 드디어 미쳤냐는 듯이.


"쯧쯧, 그러게 말했잖아. 그런 가면 쓴 여자보단 치즈가 더 최고라니까~?"

"시끄러, 플랙. 몇 번을 말했지만 나한텐 그녀밖에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아드리앙은 하려던 말을 뚝 멈춰.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몇 번을 말했다고?


아드리앙은 이제껏 레이디버그에 대해 직접적인 연심을 표출한 건 아니었거든. 그녀를 좋아하긴 하지만 사랑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의문의 여자를 상대로도 그런 적 없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드리앙이 날아다니는 플랙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아. 으아아~!! 하고 비명을 지르는 플랙한테 아드리앙이 진지하게 말해.


"너, 뭔가 알고 있지?"


어서 말해!! 다그치면서 플랙을 마구 흔드는 아드리앙 때문에 플랙은 어지러워 죽을맛. 알았다고 소리치니까 그제서야 아드리앙이 플랙을 놓아줘. 플랙이 켁켁거리다가 장난스럽게 말해.


"예전에 네가 같이 다녔던 레이디버그가 그 여자야."

"...뭐?"


엄청난 사실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는 플랙에 아드리앙은 진짜 진심으로 패닉이 온ㅋㅋㅋㅋ 솔직히 아무 기억도 안 나는 상황에서 저런 말은 정말 폭탄선언이지. 짐작은 했었는데 그녀가 정말 제 잃어버린 기억 속의 레이디버그였단 말이야? 근데, 그럼.


대체 그녀가 왜 악당이 된 거지?


플랙에게 물어도 나는 거기까지는 모르겠으니 니가 직접 물어봐~ 라는 대답만 들음. 열은 받지만 맞는말이라 아드리앙은 내일 그녀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하고 잠이 들지.


하지만, 다음 날부터 마리네뜨가 결석하기 시작함.


처음에는 아파서 못 나온다는 말에 기다리자고 생각했지만 3일 넘게 안 나오는 마리네뜨에, 결국 아드리앙은 병문안을 목적으로 마리네뜨 집으로 찾아가. 아드리앙에게 다행인 건 이 때 마리네뜨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셨다는 거지. 일정이 있어서 밖에 나가계심.


누군가 싶어 나가봤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아드리앙을 본 마리네뜨의 안색이 좋지 못해. 얼굴이 핼쓱한 걸 보니 진짜 아팠나 싶어서 아드리앙은 걱정함. 마리네뜨가 곧장 문을 닫으려고 하니까 한 발을 문 사이에 들이밀고, 그대로 비집고 들어와.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서 문에서 손을 떼. 아드리앙이 다칠까봐.


진짜 아팠나 보네. 라고 말하면서 능청스레 대꾸하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가 물어.


"여기 왠일이야?"

"말했잖아, 병문안이라니까."


저번에 네가 와준 답례로. 라고 말하며 아드리앙은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선물상자를 딱 내밀어서 마리네뜨에게 건네줘.


뭐냐고 물으니까, 이럴 땐 뭐 사와야 하는지 몰라서 대충 괜찮다고 추천받은 거 사왔다고 머리를 긁적이는 아드리앙은 이 와중에도 잘생겼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아드리앙을 거실로 데려와.


뭐 마시겠냐고 묻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잠깐 고민하다가 곧 직구를 던짐.


"니가 그 '여자'야?"


냉장고를 열려던 마리네뜨의 손이 우뚝 멈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알잖아, 무슨 소리인지."

"정말 몰라."

"사흘 전쯤에 나랑 만났었지? 에펠탑 꼭대기에서."

"…글쎄."


여전히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마리네뜨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어. 들켰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마리네뜨는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을 뿐.


아드리앙이 한숨을 쉬면서 말해.


"…그럼 일단 질문을 바꿀게. 몸은 괜찮아?"

"괜찮아. 가벼운 감기니까."


진짜 아팠는지 마리네뜨는 잠옷 차림인데 얼굴도 살짝 붉었어. 아드리앙은 가만히 사과해.


"멋대로 찾아온 건 미안하게 생각해. 좀 초조했거든."

"…뭐가?"

"어?"

"뭐가…, 초조한데?"

"네가 거기서 떨어져서, 크게 다쳤을까봐."


마리네뜨는 입을 꾹 다물어. 다정한 그 한 마디에 자꾸 심장이 울컥하니까. 저 말들이 그저 친구로서 사소한 걱정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확신하고 있는 거 같지만. 끝까지 부인하려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다시 한 번 물어.


"왜… 그런 거야?"

"…"

"왜 악당들을 만드는 거야? 목적이 뭐야. 내가 아는 너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드리앙은 말꼬리를 흐려. 그에게서 뒤돌아서 있던 마리네뜨는 그 순간 냉장고 문을 쾅 닫고, 앞으로 홱 돌아서 아드리앙과 시선을 맞추고 그에게로 걸어와. 그와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문지방 위에 서서 아드리앙한테 말해.


"왜 그렇게 말하는데?"

"뭐?"

"네가 아는 나는 어떤데? 기억이 돌아오긴 했어?"

"아니, 그건 아직…"


확 기세가 변한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매우 당황해.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는 정말 화난 것 같은 얼굴로 또박또박 따져.


"내가 무슨 이유로 이러고 있냐고 물었지. 그걸 알면 뭔가 달라지기라도 해?"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드리앙에게 울컥했는지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함.


"왜 이러는 거야."

"…"

"내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마리네뜨?"

"난 네가 너무 미워."


밉다는 그 한 마디에 아드리앙의 어깨가 살짝 튕겨 올라갔다. 마리네뜨는 조소했다.


"그런 어중간한 상냥함이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생각해보긴 했어?"


차라리 미워하고 경멸하고 화를 내. 왜 이유를 묻는 거야. 왜 나한테 그런 식으로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거야? 왜 기대하게 해?


네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면서-.


마리네뜨가 허탈한 듯이 중얼거려. 지친 목소리로.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넌."


모든 추억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외롭고 슬픈 일이다.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역시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리네뜨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한 줄기에 아드리앙은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랐지만, 마리네뜨는 점점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와 별개로 입술은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이젠 지긋지긋해!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혼자 기억하는 건-!!"

"마리네뜨, 진정해. 저기, 잠깐만-."


다가와서 제 두 팔을 붙잡는 아드리앙의 손을 마리네뜨는 거세게 뿌리쳤지만 꼼짝도 안해.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진짜 발을 써서 아드리앙의 무릎을 세게 차니까, 윽 소리를 내며 아드리앙은 손을 놓아줌. 손자국이 날 정도로 제게 붙잡혔던 팔을 감싸고 뒤로 물러나면서, 마리네뜨가 말해.


"돌아가."

"잠깐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마리네뜨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어. 소름끼칠 정도로 억양 없는 목소리.


"너는 히어로, 나는 악당."

"…"

"우리 사이는 그것뿐이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등을 돌리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버려.


거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아드리앙의 표정은 그저 멍해. 폭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야. 위층에서 들리는 콜록콜록 기침소리에 번뜩 정신이 든 아드리앙은 마리네뜨가 올라간 계단 쪽을 망연히 쳐다봐. 한참 뒤에 마리네뜨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니까 식탁 위에 봉지가 놓여 있네. 뭔가 싶었더니 각종 감기약이랑 비타민이야. 휘갈겨진 메모가 하나 있어. 두 손으로 펼쳐서 읽어봐.


[잠시 휴전이야.]


제 딴에는 걱정되서 약을 사왔지만, 그냥 두고 가면 안 먹을까봐 저렇게 적어놓은 거지. 마리네뜨의 손에 들린 메모가 살짝 구겨져.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


“진짜 멋없네. 핑계도 이런 거나 대고 말이야….”


마리네뜨의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해. 차라리 그를 미워할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악당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 그리고 역시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아드리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리고 아드리앙은 정말 진지하게 기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해. 그녀가 빌런이 된 이유는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 속에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에.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지금 같이 활동하는 레이디버그는 절대 자신에게 정체를 밝히려고 들지 않아. 더 이상한 건 레벅이 제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챈 거 같다는 점이야. 이건 일단 접어두고, 아드리앙은 어떻게든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서 플랙을 추궁해. 단서를 가진 놈이 이놈밖에 없잖아. 플랙은 굳어 있는 아드리앙의 표정을 보고 이제야 좀 알고 싶어졌냐고 물으면서 과거의 일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해주기 시작해.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얘기 뿐이야. 예전에 자신이 마리네뜨랑 사귀는 사이였고, 예전에 싸우던 빌런 때문에 죽을 위기까지 갔었다니. 플랙은 그 빌런이 너희 아버지였다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설명을 들으니까 대충 마리네뜨의 태도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 하지만 빌런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감을 못 잡겠어. 끙끙거리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은 낄낄거리며 물어.


뭘 그리 고민해?


"그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조금쯤은 알 것 같기도 한데~?"

"마리네뜨 입장에서?"

"너라면 어떻겠어?"

"…"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3개월이 넘게 비밀에 부쳐졌었다고 했잖아?"

"그렇지."


순순히 인정하자 플랙이 다시 질문을 던져.


"만약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봐."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편한 상대인 마리네뜨를 떠올렸다. 그녀가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욱신거리는 심장에 속이 안 좋다. 토할 것 같았다.


아마 엄청 슬플 거야.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가, 나중에서야 베갯잇을 붙들고 조금이나마 울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아닐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 같은 느낌…


…?!


아드리앙의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생각이 있어. 소년의 얼굴이 쓸쓸하게 일그러지며 힘없는 어조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해.


"무척 마음이 아플 거야."

"그래?"

"펑펑 울지도 몰라."

"우와, 꼴불견이네~!"

"삶이라는 게 다 부질없게 느껴질지도."

"우웩, 그거 참 느끼하네."

"…빌런이 되었어도, 상관없었던 걸까."


자만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 말을 힘없이 덧붙이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은 니 알아서 생각하라고 말하며 다시 치즈를 집으러 치즈가 담긴 통으로 날아가. 아드리앙은 쓰게 웃어. 하지만 이건 모두 다 추측일 뿐이니까, 결국 다시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피할 걸 알지만. 그런데 마리네뜨는 의외로 다시 학교에 계속 나와. 그에 안심하면서도 그녀를 어째야 하나 아드리앙은 고민해. 어쨌든 빌런이고 자신이 물리쳐야 하는 상대잖아. 시간을 끌수록 희생자는 계속 나올텐데.


한편 레벅은 블캣한테 물어봐. 너 요즘 뭔가 숨기는 거 있냐고.


빌런 잡을 때도 설렁설렁이고 어딘가 정신이 딴 데로 가 있는 거 같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에게 필요 이상의 스킨십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었지만 레벅은 굳이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블캣에게 레벅은 웃으면서 말해.


"거짓말하지 마. 뭔가 켕기는 듯한 얼굴 하고는."

"에이, 난 언제나 솔직하다구?"

"…저번에 만났던 그 여자, 너 혹시 짐작가는 사람 있어?"

"? 없지. 그건 왜 물어봐?"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지만 블랙캣은 속으로는 매우 찔려해. 레벅이 말해. 짐작가는 거 있으면 말하라고. 더 이상 악당들이 설치게 놔둘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 박력에 눌려서 블랙캣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니까, 레벅이 웃으면서


"좋아, 그럼 됐고."


라고 말하며 팔을 잡았는데 블랙캣이 저도 모르게 움찔해. 평소랑 달리 당황하는 듯한 모습에 레벅은 쿡쿡 웃음을 터트려.


"너랑 더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서운하지만."

"…뭐?"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블캣이 눈을 동그랗게 뜨니까, 레벅은 너 진짜 둔하구나, 라는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하며 말해.


"널 좋아하니까 그러지."

"어… 에에에에에?!!"

"뭐야, 진짜 몰랐어?"


그렇게 대쉬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말하는 레벅의 목소리에도 블캣은 정신이 없어.


"미... 미안."


받아들일 수 없어. 허둥지둥 대답을 건네는 블랙캣에 레벅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


"…어차피 쉽지는 않을 거라는 거 예상했었으니까."

"응? 뭐라고?"


작아서 뭐라는지 잘 못들어서, 블캣이 고개를 갸우뚱하니 레벅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저 웃어. 그렇게 블랙캣에게는 고민 하나가 더 추가되었지 삼각관계 최고!


그리고 아드리앙은 다시 또 자신의 기억을 알 만한 인물을 찾아. 바로 니노. 그리고 알리야. 알리야는 마리네뜨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지.


둘에게 따로 찾아가서 맛난 거 사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주 가관이야. 사실 이 둘이 사귀는 건 니노랑 알리야만 알고 있었거든.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어보는데 알리야가 네가 돌아왔을 때 마리네뜨가 티는 안 냈어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데 아드리앙은 겁나게 죄책감이 듬. 좋아하던 사람한테서 하루아침에 나 너 잊어버렸다는 선고를 듣는 게 어떤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리네뜨가 지금처럼 말수가 적고 아프게 웃는 타입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 때 알아. 자기가 사라진 뒤부터였다고 말하는데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드리앙에게 알리야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않냐고 쿨하게 넘겨줌. 대신 앞으로 좀 잘하라고 사람 좋게 웃어주는데 아드리앙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야. 그리고 다음으로 찾은 장소는 자기가 길거리에 쓰러졌던 날,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최종결전 장소) 거기를 가보기로 하고 짐을 챙겨.


여기서 마리네뜨 시점. 마리네뜨는 사실 아드리앙이 온 날로부터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궁금한데 묻기가 두려운 거야; 자기가 빌런을 생성한다는 거 알면서도 계속 아무 움직임이나 제재가 없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그가 자신을 역시 싫어하게 될 거라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함. 애써 인사하고 말을 걸면서도 속이 자꾸만 메슥거려. 무엇보다 빌런의 힘이 레벅 때와 달리 마리네뜨에게 너무 부담이 심해서, 그때 감기도 사실 힘에 대한 부작용으로 걸린 거니까.


그러다가 폭발한 마리네뜨는 결국 요정한테 선언해. 나 더 이상 너한테 협력 안 하겠다고.


그러니까 요정이 웃으면서 말해.


"그렇게는 안 돼."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마리네뜨는 정신을 잃어. 순식간에 빌런화된 마리네뜨가 평소랑 다른 거라면 눈에 초점이 없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빌런네뜨는 무언가를 인지했다는 듯이 어느 곳으로 향해.


마리네뜨가 쉽게 요정한테 마음을 먹혔던 이유는 마리네뜨의 정신 상태가 너무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야. 그간은 이성으로 어떻게 버텼지만 아드리앙에게 들키고는 참아왔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터진 거지. 그녀는 지나가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빌런으로 만들고 그 빌런들이 도시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함. 건물이 터지고 자동차가 날아가는 도시를 유유히 빠져나오는 빌런네뜨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어.


한편, 아드리앙은 지금 산산히 부서진 폐허에 와 있어. 바위와 자갈들만이 간간히 바스라져 있는 공터에는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아. 가만히 주저앉아 바닥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보던 아드리앙은 이 공간에 남은 음울한 기운에 절로 인상을 찡그려. 플랙이 기분 나쁘니까 돌아가자고 징징대도 꿈쩍 않고 주변을 살펴보던 아드리앙은 어느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춰. 하얀 바닥에 검게 얼룩져 있는 이건,


분명 핏자국.


거기까지. 뒤에서 날아드는 살기에 아드리앙은 옆으로 몸을 날려서 피해. 돌아보고 깜짝 놀라.


"마리네뜨?"


불렀지만 대답 대신 날아오는 건 날카로운 천이었어. 또 그걸 피해서 근처에 있던 낡은 벽 뒤에 숨어버린 아드리앙이 플랙을 불러 변신해. 그리고 살짝 내다보는데 빌런네뜨의 모습이 좀 이상해. 전에 만났을 때랑 조금 달라. 게다가 방금 넘어졌을 때 다쳤는지 아드리앙은 다리에서 둔통을 느꼈어. 피냄새도 좀 나고.


근데, 피냄새를 맡으니까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해. 그와 함께 강렬한 두통이 머리를 쾅 때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요동치고,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고 터져나오는 비명을 눌러삼켜. 눈앞에 보이는 건 밤이야. 빠르게 달려드는 무기들, 날아오는 무언가, 날카로운 고통, 피냄새.


피냄새와 함께 몰려오는 욕지기에 토할 거 같아.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소리. 절규하는 듯이 기억 속에서 메아리치는 그 비명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워. 쿵, 쿵, 쿵,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서 고통스러워.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머리가 터질 듯 아파.


그런데도 떠오르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어. 고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그 이미지를 놓지 않은 블랙캣의 초록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어.


그리고 그 순간, 블랙캣은 몸을 날려 피해. 숨어 있던 벽이 천에 쓸려 산산조각나.


"…그렇게 된 거였군."


뭔가를 중얼거리던 블랙캣이 봉을 들고 진지하게 빌런네뜨와 싸우기 시작해. 그녀의 등 뒤에서 뻗어나오는 천들을 훌쩍훌쩍 피하고 쳐내면서 블랙캣은 크게 소리질러.


"마리네뜨!! 너 마리네뜨야?!"


움찔, 순간 멈추는 빌런네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곧바로 매서운 공격이 가해졌지만 블랙캣은 굴하지 않아. 가만히 서있는 빌런네뜨에게 블랙캣이 크게 소리쳐.


"내가 밉지?"

"…"

"내가 미우면 차라리 그렇다고 말해!"

"…"

"다 받아줄 테니까, 어떤 변명이든 할 테니까! 그렇게 인형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지는 말란 말이야!!"


마구 소리치면서 나아가려고 하지만 더 이상은 접근이 힘들어. 천들은 살아있는 촉수처럼 블랙캣을 압박했고, 그는 뒤로 조금씩 물러나지게 됨. 블랙캣을 공격하려는 듯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는 빌런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이를 갈듯이 소리쳐.


"내가 좋아하는 마이 레이디는 그런 나약한 여자가 아니라고!!"


그 순간, 빌런네뜨의 손이 움직이지 않아. 천들도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점점 찡그려지기 시작하는데 괴로워 보여.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몸을 일으켜 달려들기 시작해. 다시 그에게로 달려들지 시작하는 천들이 그래도 아까만큼 기세가 매섭지 않아. 얻어맞기도 하고 날카로운 천의 끝에 쓸려 옷이 찢어져 피가 나면서도 블랙캣은 그녀에게로 있는 힘껏 달려가. 그리고 그녀를 와락 껴안아. 빌런네뜨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블랙캣이 가만히 중얼거려.


"……………미안해."

"…"

"기다리게, 해서."


블랙캣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어. 그녀를 안고 있는 손은 경련을 일으키듯 계속 떨리고 있고.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블랙캣은 고백해.


"계속, 혼자 내버려둬서 미안해."

"…"

"이제 괜찮아. 난 여기 있으니까."


떠나지 않아.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빌런네뜨는 잠깐 움찔 몸을 떨어. 그녀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블랙캣의 어깨를 적시기 시작해. 자신을 안아주는 따뜻한 온기에 빌런네뜨의 입이 열리고, 천천히 말이 새어나와.


"아…드리…앙?"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가 몇 번을 깜빡거렸고, 눈물은 계속 쏟아져. 제 가슴께를 축축하게 적시는 눈물을 느끼고 블랙캣의 눈가도 빨갛게 변하지만, 그는 꾹 참고 상냥하게 대답해줘.


“그래, 나야.”

“정말 너야?”


정말 너냐는 듯이 계속해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블랙캣은 끊임없이 답해줘. 나라고, 나는 여기 있다고. 그에 빌런네뜨는 그를 마주 끌어안고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해. 아이처럼.


“아드리앙, 아드리앙…!!”

“그래, 응. 나야.”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빨리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

“나 기다렸어. 계속 기다렸어.”


제 품으로 더욱 파고들며 계속 울고 있는 빌런네뜨를 블랙캣은 더욱 꽉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정말 아드리앙이지? 이거 꿈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더 이상 꿈은 싫어…!!”

“꿈이 아니야.”


확인하려는 듯이 계속 중얼거리면서, 마치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블랙캣을 꽉 붙드는 빌런네뜨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 블랙캣은 반대로 자꾸만 떨리려는 손을 애써 조심하면서 다시금 빌런네뜨를 소중하게 껴안아.


그동안 쌓여왔던 것들을 모두 털어내려는 것처럼 솔직하고, 아주 서럽게 울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너무 미안해서 블랙캣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많이 불안하고 힘들었을 텐데, 계속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여자한테 관심두는 자신을 보고 있기 괴로웠을 텐데. 이렇게 돌아와준 것이 고맙고 너무 미안해서 블랙캣의 눈가에서도 천천히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어.


그렇게 서로 끌어안고 울고 있는데, 빌런네뜨의 변신이 풀리기 시작해.

그 때였어.


"위험해!!"


블랙캣이 빌런네뜨를 껴안고 옆으로 굴러.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휙 날아들었다 거둬지는 물건을 본 빌런네뜨의 눈동자가 크게 떠져.


붉은 요요.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새로운 레이디버그. 근데 상태가 좀 이상하네.


참고로 빌런네뜨의 변신은 다 풀린 게 아니야. 다만 아까보다 몸에 힘이 없고 손이 떨려. 그리고 새로 나타난 레이디버그 얼굴에 선명히 나타나 있는 건 빌런마크. 씨익 웃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블랙캣은 깜짝 놀라지만, 빌런네뜨는 뭔가를 깨달은 듯이 얼굴이 새파래져.


"…속았구나."


사태가 어떻게 된 거냐면, 이 요정은 처음부터 마리네뜨를 그렇게까지 믿지 않았어. 아드리앙이 살아 돌아왔을 때부터는 더더욱. 그래서 그가 나타난 뒤로 자신의 힘을 나눠서 새로운 빌런을 하나 더 만들었어.


물론 마리네뜨 모르게. 마리네뜨가 정신력이 강하긴 했지만, 그녀도 가끔 요정의 통제 하에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간간히 있었거든. 그 때 요정은 자신의 힘을 나누어서 새로운 빌런을 만들었지. 마리네뜨가 그 때 상당히 많은 힘을 거둬줘서 힘을 나누기는 어렵지 않았어 그게 바로 새로운 레이디버그. 진짜 미라큘러스로 변신한 게 아니었던 거야.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사실 아드리앙을 짝사랑하던 어떤 소녀였음. 그에 대한 마음을 빌미로 요정은 그녀를 이용하고 있을 뿐.


사실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본래 모습일 때는 자기가 레벅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것도 알지 못해. 블랙캣의 앞에서 변신을 풀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바로 그거임. 정말 요정 손에서 놀아난 거지. 재빨리 마리네뜨를 끌고 다른 바위 쪽으로 피신하는 블랙캣에게 빌런네뜨가 말해.


"아드리앙. 아니, 블랙캣."

"어, 왜?"


그러면서 빌런네뜨는 자기 가슴쪽에 달린 브로치를 가리켜.


"이거랑 똑같은 걸 가지고 있을 거야. 그걸 부숴."

"너는 어쩌게?"


걱정스레 묻는 블랙캣에게 빌런네뜨가 단호하게 말해.


"지금 이 브로치를 부수면 내게 있는 힘까지도 저 애한테 가게 될지도 몰라. 일단 도망다니고 있을 테니까, 서둘러줘."


칼같이 대답하는 빌런네뜨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나만 믿으라는 듯이 웃는 그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서, 블랙캣은 웃으면서 말해.


"알았다구요, 제 하나뿐인 공주님께서 부탁하니 이거 뭐."

"…어서 가기나 해."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퉁명스레 말하며 뒤돌자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 그에 블랙캣은 밖으로 나가서 그녀를 상대하기 시작하고, 빌런네뜨는 어떻게 그를 도울까 고민함.


지금 자신에게 레벅의 힘은 없지만, 분명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면서 빌런네뜨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지 확인해. 밖에서는 블랙캣이 고전하고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의 공격이 이쪽은 안 노리네.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가 빌런네뜨는 순간 그 이유를 깨달아. 도전해볼 만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바위 밖으로 나와서 레벅에게로 뛰어감. 깜짝 놀라서 피하라고 소리치는 블랙캣의 말도 무시하고 마구 달려나가는데 요요의 공격은 오지 않지.


왜냐하면 엄연히 아직 요정의 본체는 빌런네뜨 쪽에 있었거든. 함부로 공격이 불가능한 거지. 그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한 빌런네뜨는 최대한 그녀의 움직임을 막는 암시를 걸고 블랙캣에게 지시해. 잡으라고. 곧바로 봉을 날려서 레벅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빌런네뜨의 몸에서 땀이 비오듯 떨어지고 있어. 근데 브로치가 안 보여. 어디 있나 허둥지둥하는 블랙캣을 보고 있던 빌런네뜨의 시선이, 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물건으로 향해.


요요.


"블랙캣! 요요야!!!"


그 말을 듣자마자 블랙캣은 일어나서 요요 앞으로 간 뒤에 세게 발로 밟아. 요요가 깨지고 그 안에 있던 펜던트에 금이 가 있어. 검은 나비가 나오는 걸 보고서야 빌런네뜨는 싱긋 웃어.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브로치를 블랙캣에게 던져줘. 블랙캣이 고대의 재앙을 써서 그 브로치를 부수자마자 모든 것이 풀린다. 빌런이 되었던 사람들의 모습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빌런 모습을 한 마리네뜨의 변신도 풀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이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해.


"너 괜찮아?"

"응… 괜찮아."


헤헤 웃으며 대꾸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이 정말로 괜찮아 보여서 블랙캣은 안심해.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져. 하지만 피하지는 않지.


그나저나,


"지금… 도시가 난리가 났을 텐데, 어떡하지? 정화의 힘이 없는데."

"아, 그러게. 근데 잠깐만, 그 레이디버그는 정화의 힘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어, 그러네?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함에 레벅이었던 소녀가 쓰러진 자리로 가 보자 그녀의 귓가에서 붉은 바탕에 검은 점들이 박힌 귀걸이가 반짝여. 어라? 하면서 블랙캣에게서 내려선 마리네뜨가 그 귀걸이에 손을 대자, 그 순간 귀걸이에서 빛이 나더니 티키가 튀어나와.


"마리네뜨!!!"


소녀가 진짜 레이디버그의 힘을 쓴 건 사실이었어.


다만 폭주했을 당시 티키 쪽에도 타격이 커서, 티키는 당분간 깨어나지 못했고 마리네뜨가 정신을 잃었던 사이 요정이 따로 귀걸이를 감췄던 거지. 나중에 써먹었고. 변신한 레이디버그는 신비한 치유의 힘을 써서 도시를 정화함. 그리고 다시 마리네뜨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미 변신이 풀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드리앙이 레벅이었던 소녀를 등에 업고 있어. 그에 질투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피식 웃는데, 아드리앙이 그런 그녀를 보고 웃으면서 말해.


"마리네뜨."

"어?"


뒤를 돌아보자, 아드리앙이 한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고 있어. 잡으라는 듯이. 부드럽게 웃는 아드리앙의 미소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마리네뜨는 곧 환하게 웃으며 그 손을 잡아. 그리고 돌아가지.


그들이 살고 있는, 이제는 평화로울 도시로.




fin.

Posted by I.R.E
,

[팬텀아리] 무도회

기타 2016. 6. 13. 22:52




[팬텀아리]

무도회





Written by. 리네






하얀 낮이 지나가고 어두운 밤의 장막이 온 하늘 위를 옅게 수놓을 시각, 새까맣게 물드는 하늘 아래서도 하얗게 빛나는 성의 안쪽에서는 화려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집 몇 채가 들어갈 법한 커다란 성의 창문들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문을 들여다보면 천장 위에서 제 몸을 화려하게 불태우는 샹들리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연회색 벽을 따라 사람 여럿이 서 있어도 좋을 만큼 넓고 커다란 창문들이 줄을 서고 있었는데, 테두리가 금빛으로 빛나는 붉은 커튼들이 그 사이사이로 휘장처럼 늘어져 있었다. 붉은 열매를 빻아 즙을 낸 것처럼 부드럽게 깔린 카펫 위로 사각사각, 조심스러운 발소리들이 살짝씩 들려온다.


눈부시도록 붉은 무도회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참가하고 있었다. 간간히 놓여 있는 하늘색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음식과 술들 사이사이를 아름다운 꽃들이 장식했다. 가장자리 쪽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악기를 들고 잔잔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고, 파트너를 찾아 돌아다니는 이들도 있었으며 사람들 틈을 벗어나 멀뚱히 창가 쪽에 서 있는 남자도 있었다. 정장과 화려한 장신구들로 치장하고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로 쟁반을 들고 있는 바텐더들이 바쁘게 발을 놀렸다.


그들 사이로 지나가는 한 여자가 있었다.


하얀 드레스 위로 반투명한 푸른 숄을 걸치고, 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의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가면 너머로 드러나는 푸른 눈동자는 총명하게 반짝거렸다. 제 머리색과 같은 나비가면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푹신한 카펫 위를 밟으며 천천히 회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여인은 신기하다는 듯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일까, 들뜬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여자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이 여인의 정체가 현 에레브의 여제, 아리아라는 걸 알면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지만.


- 진짜 화려하네.


지나가던 바텐더에게서 받아든 무알콜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아리아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수행원도 없이 온 걸 알면 나중에 신수한테 엄청 혼날 게 분명했지만, 이런 장소에까지 따라오면 자유롭게 활동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막상 와보니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혼자 오면 분명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는 통에 아리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누구랑 같이 오자고 했어야 했나.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떠오르는 생각에 아리아는 곧장 방금 했던 생각을 취소했다. 말했다간 분명 체통이 있다며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를 한 다발로 들었을 것이 뻔했으니까. 생각만 해도 두통인지라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면서 아리아는 들고 있던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그래, 사람이라면 여기도 잔뜩 있잖아! 아무나 말 걸어서 같이 놀면 되지 뭐! 뭐가 문제겠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웃고 있는 아리아에게로 여러 개의 시선들이 따갑게 꽂히고 있었다. 대부분 남자들이었는데, 얼굴이 보이지는 않아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건 짐작했는지 힐끔힐끔, 몇몇은 꽤나 노골적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아리아가 그 시선들을 눈치챌 수 있었을 리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런 그녀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시선 하나가 있었다. 잔 하나를 들고 창가 쪽 커다란 기둥에 기대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푸른색의 가면이 걸려 있었다. 건조하게 회장을 훑어내리던 자주빛 눈동자는 아리아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하다가, 차분히 살펴보더니 곧 이채로운 빛을 띠었다. 긴가민가한 건지 살짝 고개를 갸웃이던 남자는 무언가 재미난 생각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칵테일을 다 마신 뒤 빈 잔을 들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리아의 모습에 그녀가 혼자라는 걸 알았는지 남자들 몇 명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던 남자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그녀를 부른 건,



“실례합니다.”



속으로 뭐하고 놀지에 대해 열심히 궁리하고 있던 아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푸른 망토를 두르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모습이 흡사 귀족을 연상시키는 남자였다.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리아에게 남자는 싱긋 웃으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아, 감사하지만 지금은….”



진짜 누구 잡아서 놀겠다고는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정체가 탄로나면 엄청 귀찮아질 걸 아니까. 갑작스러운 춤 신청을 거절하려던 찰나, 남자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더니 아리아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꺅! 살짝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품에 안긴 아리아가 항의하려던 찰나,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야?”

“뭐? 누구…?”



끌어안긴 채로 고개를 들자 남자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놨지만, 저 웃음기 가득한 눈동자는….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리아는 그의 정체를 눈치채고 깜짝 놀라 작게 소곤거렸다.



“팬텀?!”

“이제 알았어? 둔하네, 너.”

“여긴 어떻게….”

“일하러 왔지.”



태연하게 말하며 제 허리를 끌어안는 팬텀의 행동에 아리아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뭘 훔치러 온 건가요?”

“음, 글쎄?”



더 이상은 안 알려준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는 팬텀에게 아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랑 얘기하고 있어도 되요? 잘못하다가 들키면 어떡하려구요.”

“이런 허접한 녀석들한테 들킨다면 괴도 팬텀의 이름이 아깝지.”



그렇게 속삭이며 팬텀은 망토를 살짝 들어올려 아리아를 감싸안았다. 갑작스럽게 어두워지는 시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금발의 소녀를 다정하게 내려다보던 팬텀은 곧 자신과 아리아를 주목하는 몇 명의 남자들에게 피식 조소를 날렸다. 꺼지라는 듯이 살벌한 시선에다 아무리 봐도 귀한 집 자제처럼 보이는 팬텀에게 굳이 시비를 걸러 오는 남자는 없었다. 아리아를 향한 시선이 거슬렸던 팬텀에게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팬텀?”



팬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는 걸 깨달은 아리아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아, 미안.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뒤로 물러난 팬텀의 얼굴은 비록 가면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눈빛은 평소와 같이 장난스러웠다. 어라, 착각했나? 아리아는 주변을 슥슥 둘러보았다. 다행히 자신들에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팬텀을 이끌고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향했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서야 그녀는 겨우 한숨을 토로하며 속닥였다.



“정말 뭐 훔치러 온 거예요?”

“궁금해?”

“궁금하죠, 당연히. 괴도 팬텀이 직접 나서게 할 정도의 보물은 흔하지 않잖아요?”

“뭐, 그렇지. 너도 스카이아로 사기를 쳤으니까 말이야.”

“신경쓰고 있었군요.”

“참내, 그 보석은 노카운트야. 전설대로의 물건이 아니었으니 흥미 없어졌어. 오히려….”

“오히려?”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는 아리아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던 팬텀이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손가락을 맞부딪혔다. 딱,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 사이로 나오는 붉은 장미에 아리아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니, 장미를 닮은 아름다운 머리핀이었다.



“자, 선물.”

“아, 고마워요!”



손수 아리아의 머리에 핀을 달아주는 손길이 묘하게 상냥하다는 생각에 아리아는 시선을 올려 팬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까이 붙어 있어서 그런가, 기분 좋게 뛰고 있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싫지 않아 아리아는 살짝 웃었다. 아리아의 머리에 꽂힌 핀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팬텀이 그런 그녀의 미소를 보고 피식 웃었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있어?”

“재미있어서요. 팬텀이랑 만나게 될 줄 상상도 못했거든요. 혼자 있기 심심했었는데.”

“뭐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렇게 웃을 생각이었어?”

“…팬텀이라서 더 즐거운지도 몰라요.”



솔직하게 말하는 아리아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팬텀은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같이 따라 웃으면서도 아리아는 정말 여유로워 보이는 팬텀에 걱정이 앞섰다. 이렇게 가면까지 착용하고 온 걸 보면 분명 뭔가 훔치러 온 모양인데, 자신은 재밌지만 이 사람에게는 소중한 시간을 뺏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팬텀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 끝에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라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너 날 뭘로 보는 거야? 나는 괴도 팬텀이라구. 내가 훔치지 못할 보물같은 건 없단 말이지.”



자신만만하게 이어지는 팬텀의 목소리에 아리아는 역시 당신답다고 생각하며 따라 웃기만 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팬텀의 말에는 깜짝 놀랐다.



“딱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가 자기 입으로 자신의 실패를, 그것도 저렇게 태연하게 거론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진짜요? 뭔데요?”

“음, 그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반짝거리는 아리아의 눈빛에도 팬텀은 잠깐 고민하는 척하더니, 아주 부드럽게 오른팔을 움직이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한 곡 춰주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싱긋 웃으며 손을 내미는 팬텀을 멀뚱히 보던 아리아가 풋 웃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살포시 웃는 아리아의 얼굴을 잠깐 뚫어져라 바라보던 팬텀이 곧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단단하게 자신을 붙잡는 팬텀의 손에 아리아는 살짝 당황했는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긴장하고 있는 아리아를 눈치챈 팬텀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이끌고 무도회장 가운데로 걸어나갔다.


마침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바뀌었다.


잔잔한 왈츠가 악기들이 연주하는 선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앞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해하는 아리아와 달리 팬텀은 느긋한 태도로 아리아의 허리를 살짝 감싸안았다. 순간 놀라서 팬텀을 쳐다보는 아리아에게 그는 괜찮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팬텀과 아리아는 천천히 원을 돌기 시작했다. 가볍게 몇 번 원을 돌다가도 팬텀은 곧 익숙한 솜씨로 아리아를 리드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템포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자니 긴장이 점점 풀리는지 아리아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돌아오고 있었다. 가면 너머로 그런 아리아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팬텀이 곧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리아에게로 더욱 몸을 바짝 붙였다.


강하지만 부드럽게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에 아리아는 저항 없이 끌려갔다.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아리아는 반사적으로 팬텀을 올려다봤다가 멈칫했다.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흩날리는 백금발의 머리카락,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자주빛 눈동자는 마치 자신을 꿰뚫어볼 것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더 이상한 건 그 시선이 싫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본다는 것처럼 집중하고 있는 팬텀의 눈빛에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팬텀이 그런 아리아를 보고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손으로 걷어내었다.


정말 부드럽게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에 아리아는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순간 모든 게 어색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팬텀의 어깨에 올려둔 손을 내려야 할지 냅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색했다.


무엇보다 얼굴이 너무 더웠다. 팬텀이 싫은 게 아닌데 이상하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덜컹거리는 느낌에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소곤거렸다.



“팬텀, 너, 너무 가까운데….”

“뭐야. 긴장 돼?”

“…?! 그런 거 아니거든요?”



발끈해서 대꾸하는 아리아의 모습에 팬텀은 그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청량하지만 시원한 웃음소리가 음악소리와 함께 드문드문 아리아의 귓가로 살포시 파고들어왔다.


이 소리를 듣고 있는 건 자신뿐일까?


그렇다면 좋을 텐데. 순간 그렇게 생각한 자신에 아리아는 당황했지만 애써 의연하게 팬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을 본 팬텀의 눈동자가 놀란 듯 살짝 커졌지만, 그는 끝까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춤이 끝나고 많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팬텀과 아리아가 있는 쪽으로 시선들이 와르르 꽂히는 걸 보면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특유의 분위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 모양이었다. 따끔따끔할 정도의 시선들을 뒤로 한 채 팬텀과 아리아는 발코니로 나왔다. 다행히도 이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 채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발코니 쪽에 서 있던 아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줘야죠.”



당신이 훔치지 못했던 보물. 그렇게 입을 떼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잠깐 말이 없더니 이내 대답했다. 



“…역시 안 가르쳐줄래.”

“왜요?!”


춤추면 알려준댔잖아! 억울하다는 듯이 팬텀을 쏘아보는 아리아의 눈빛에도 팬텀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팬텀의 미소에 난감한 기색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리아가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팬텀은 곧 결론을 내렸는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아리아에게로 다가왔다. 탁하게 얼룩진 자주빛 눈동자에 아리아는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와는 다른 팬텀의 분위기에 뒷걸음질치고 싶어졌지만 그녀는 애써 이겨냈다. 그런 아리아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팬텀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아리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도망칠 수 없다는 듯이.



“왜냐면….”



그 말과 함께 팬텀은 다른 한 손으로 아리아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가면들이 살짝 부딪혀 조금 삐뚤어졌지만 아리아는 그런 걸 신경쓸 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상황인지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게 꿈인 것만 같았다. 신분을 숨기고 무도회에 놀러 온 것도, 우연히 팬텀을 만나 춤을 춘 것도, 지금 그가 자신에게 키스하고 있는 이 상황까지도.


쪽, 소리와 함께 팬텀은 천천히 아리아의 얼굴에서 고개를 들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꼼짝도 못하는 아리아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훔칠 거거든.”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 꺼내는 아리아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팬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간만에 즐거워 미치겠다는 얼굴로.



“그럼 이만. 잔금은 나중에 받으러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발코니 바깥쪽으로 다가간 팬텀의 기척은 금세 사라졌다. 그런 그를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아리아는 그저 손을 올려 제 입술을 어루만졌다. 방금 전의 감촉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가, 그러니까, 팬텀이랑 키스를….


자각하자마자 아리아의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엄청나게 펌프질하는 상황에서 아리아는 새빨개진 볼에 두 손을 올렸다. 뜨거웠다. 아까는 살짝 더운 정도였지만, 지금은 차가운 밤바람으로도 속일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말도 안 돼.”



망연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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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리퀘로 간단하게 쓰려던 팬텀아리 무도회! 근데 왜 이렇게 길어졌지 망할.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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