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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적으로 트라이에 제로투가 안 나올 리가 없어!!!! ㄷㄷㄷㄷ




[산해정우산해]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일상 中







"야, 정우야. 서정우."



바로 옆에서, 자신을 애처롭게 부르는 목소리에 정우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옆을 올려보았다. 점심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다들 밥을 먹고 교실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책상에 앉아 노트필기를 하던 중이었던 정우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산해의 눈을 마주했다. 근심 가득한 얼굴과 애써 뒷짐을 진 손, 발 한 짝을 바닥에 대고 빙빙 돌리는 걸 보면 무슨 부탁인지는 금방 보인다. 하지만 예의상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야?"

"필기 좀 보여줘-!!"



두 손을 모으고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리는 산해에게 정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럴 줄 알았지. 이 녀석이 이런 표정을 할 때는 영락없이 공부와 관련된 일이었다. 정말 다 좋은데 어떻게 해도 녀석은 공부에는 도통 소질이 없었고, 애석하게도 부모님은 장남에게 거는 기대치가 큰 모양인지라 정우는 종종 산해의 공부를 도와주곤 했다. 별로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들은 제일 친한 친구니까.



"그래, 알았어. 자."



싱긋 웃으면서 노트를 건네주는 정우의 모습에 산해의 눈가가 해맑게 휘어지더니 그대로 그를 와락 껴안았다. 천사를 봤어도 이 정도로 감격한 얼굴을 하진 않을 것 같다.



"넌 역시 좋은 친구야!"

"네, 네. 자, 어서 베껴. 대체 뭐 하느라 숙제를 안 해온 거야?"

"축구부 연습이 좀 있어서. 집에 오니까 피곤해 죽겠더라구."



싱글싱글 웃으며 곧장 대답하는 산해의 손이 부지런히 하얀 종이 위를 오갔다. 쓰다가 이게 뭐지? 하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모르겠는지 으윽 신음을 흘리다가, 머리를 긁적이거나 펜을 입에 물거나 하기도 한다. 아는 문제가 나왔을 땐 아하, 하는 표정으로 밝게 웃는다. 참 표정 한 번 다양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며 정우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해도 요즘 산해가 속해 있는 축구부가 다가오는 대회에 대비해 훈련이 더 빡세졌다는 걸 모르지 않아서, 정우는 힘내라는 듯이 산해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얼마나 남았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웅얼거리며 절박하게 말하는 산해의 표정이 참 웃기다 싶어서 정우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문득 창 밖을 내다보았다. 여름이 훌쩍 다가온 탓인지 햇살은 쨍쨍하고, 날도 상당히 후덥지근하다. 유리창 너머로 하얗게 드리우는 햇빛이 책상 위로 번져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서 장마가 와야 그래도 좀 시원해질텐데. 속으로 중얼거리던 정우의 손이 책상 밑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심심한 김에 독서라도 할 생각이었던 정우의 계획은 다음 순간 자신의 반으로 찾아온 누군가에 의해 깨졌다.



"정우야, 잠깐만."



뒷문가에 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분명 같이 학생회를 하는 임원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여자애가 왜 갑자기 부르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상냥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웃는 정우의 미소의 여자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변화를 대번에 눈치챈 정우는 속으로 알게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면 안 되지만 곤란하다는 생각이 불쑥 드는 게 사실이었다. 다음에 여자애가 무슨 말을 할지 벌써 눈에 보인다.



"잠깐 시간 좀 내줄래?"



결심한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애를 보며 정우는 뭐라 말해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물론 그건 한 순간일 뿐, 소년은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입에 담았다.



"그래, 가자."



무슨 말을 할지 알아도 무작정 거절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게다가 제 생각과 다를 수도 있으니까. 유감스럽게도 이제껏 자신이 예상하면 그 예상과 거의 100% 일치하는 자신의 감을 생각하면 분명 이번에도 같을 것이라 직감했지만, 그렇다고 들어주지도 않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붙들고 정우는 여자애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나갔다. 어느 새 필기하던 손을 멈추고,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산해는 문득 들리는 여자애들의 수다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정우 쟤, 또 고백 받나?"

"보아하니 그런 것 같은데?"



대충 멀리서 봐도 살짝 빨개진 여자애의 얼굴을 보면 그냥 확정이다. 상냥하게 웃고 있는 모습만 보면 잘 모르겠지만, 사실 어느 정도 곤란해하고 있는 정우의 모습을 산해는 대번에 눈치챘다. 그냥 그 자리에서 거절하면 되는데 하여간 요령도 없다. 꼭 직접 얘기를 듣고 거절하는 게 속이 편하다나. 그게 녀석의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가끔은 좀 머리가 아프다. 펜을 잘근잘근 깨물며 산해는 하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책상에 박았다. 수군거림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번 달만 벌써 세 번째 아니야? 저렇게 불려나간 거."

"인기 진짜 많다. 근데 하긴 나도 정우는 꽤 좋은데. 잘생긴데다 상냥하잖아."



그거야 녀석은 정말 대단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산해는 실실 웃었다. 이상하게 불편한 마음을 가슴 한 구석에 내리담고서.


초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다니다가, 같은 중학교에 진학해서야 산해는 정우의 인기가 얼마나 좋은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냥 막연히 천재소년이라 불린 데다가 얼굴도 곱상하니까 인기가 많겠거니 생각했었지만 직접 근처에서 보니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디지몬 카이저였던 무뚝뚝하고 차가운 예전과 다르게 본래의 사근사근하고 다정한 성격으로 돌아온 녀석을 주위에서 그냥 냅둔다는 게 솔직히 더 말이 안 되는 소리겠지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온갖 러브레터에 고백을 받은 데다가 발렌타인 때는 초콜릿도 한가득 받았다. 물론 자신도 받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녀석에게 오는 양은 정말 한 달 내내 먹어야 할 것만치 많았다.


늘 전교권에서 놀 정도의 수재에 무엇보다 녀석은 노력파다. 굉장히 착실한데다 성격도 상냥한지라 2학년 때는 반장으로 임명되기도 했고. 귀가부긴 하지만 운동도 하라면 분명 자신보다 훨씬 잘할 것이다. 어둠의 씨앗 때문에 천재성이 극대화된 거라고 했지만 원래 모습도 상당한 수재다. 말마따라, 형의 그늘이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가려졌었던 것일 뿐이다. 점점 개화하는 꽃처럼 녀석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가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솔직히 얼굴로만 따지면 학교에서 녀석만큼 미인은 없을 것이다. 남자고 여자고를 떠나서. 선이 부드러운 얼굴이라 인상도 좋고 그 인상만큼이나 착하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상하게 이런 녀석에게도 적은 꽤 많다는 거다.



"그래? 난 쟤 그닥 그렇던데."



또 시작이다. 산해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갈색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기른 소녀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 예진아. 학기 초반엔 꽤 예쁘고 성격도 괜찮은 애라는 인상이었는데 그 인상마저 흐릿해진 건 얘가 정우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 후였다. 직설적인 성격이기도 하지만 정우의 행동이 그녀의 입장에선 퍽 답답한 모양이었다. 근데 신기한 건 정우도 진아를 엄청나게 불편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얘가 이렇게 거부감 일으키는 사람도 흔하지 않은데. 이유를 물어도 말을 안 해주고 말이다.



"샌님 같아서 별로지 않아? 남자애가 너무 허허실실, 누가 때려도 그냥 맞고 있을 것 같잖아."



산해는 속으로 웃었다. 샌님이라니. 유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정우 녀석은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훨씬 힘이 센 편이었다. 힘으로만 따지면 제가 더 쎄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근력이나 완력은 절대 제 또래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근데 누가 때리면 그냥 맞아주고 있을 것 같다는 건 절실히 공감했다. 저 성격에 누굴 때리기나 할지 모르겠다. 리키 녀석처럼 여차할 땐 팍팍 나서면 좋을 텐데.



"에이, 모범생에 공부 잘하고 성격도 좋은 걸. 사귀면 정말 잘해줄 것 같잖아."

"맞아, 맞아!"



맞장구치는 여자애들을 향해 진아가 반박했다.



"저런 타입은 사귀어도 피곤해. 너무 인기가 많으면 여친 입장에선 좀 그렇지 않아?"

"그런가…?"

"게다가 연애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걸 뭐. 맨날 친구하고만 붙어 다니고. 사귀어도 여친보다 친구를 택할 거 같은 남자는 딱 질색이야."



엄밀히 따지면 진아가 하는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성격상 모두에게 잘 해주는 편이긴 했지만 정우는 정말 친한 사람이랑만 어울리는 타입이었고, 여럿이서 어울리거나 놀 때는 잘만 끼어서 참여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언제나 제 곁에 앉아있곤 했다. 디지몬 세계에서 친해졌던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것도 있고. 기본적으로 소심한 편인지라 딱 선을 긋는 건 상대가 싫어서라기보단 그 자신이 낯을 가려서라는 말이 더 맞았다. 사교성은 좋은데 이상한 곳에서 미묘한 녀석.


이성으로는 틀린 말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친보다 친구를 우선시하지는 않을 거라고. 좀 씁쓸하지만. 올라오는 짜증에 산해는 책상을 탁 치고 일어났다. 여자애들이 그를 돌아보더니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산해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직감한 모양이었다. 하긴 대놓고 자기 단짝을 욕하고 있으니.



"얘기하는 건 좋지만 슬슬 그만 좀 하는 게 어때?"

"나는 사실을 말한 거라고."



진아의 예쁜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않냐고 반박하려던 산해는 다음 순간 치고 들어온 진아의 날카로운 대답에 멈칫했다.



"쟤가 너한테 의존도가 높은 건 사실이잖아?"

"뭐?"

"등교도 하교도 맨날 같이 하고. 맨날 붙어다니는 것도 모자라 너 축구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가고. 무슨 세트처럼 딱 붙어 있는데 솔직히 그럼 아니야? 여친이 있어도 네가 불러내면 곧바로 약속 취소하고 날아올 거 같던데."



하나하나 또박또박 따지는 진아의 표정이 그래 오늘 너 잘 걸렸다 하는 느낌이라 산해는 살짝 난감해졌다. 그리고 죄다 맞는 말 뿐이라 할 말이 없었다. 등하교 같이 하는 건 정우가 이사온 집이 제 집 근처여서 그런 거고, 축구부 끝나고 같이 집에 가는 건 녀석이 심심하대서…. '근데 정말 심심하다면 그냥 집에 가서 공부를 하고도 남을 성격인데 왜 굳이 자신을 기다리는가' 라는 의문은 차마 생각해내지 못하고 산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것도 아니지 않나. 그냥 친구끼리 같이 다니는 건데 뭐 그리 문제인가. 산해는 사실 진아가 어떻게 그 사실들을 다 알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간신히 핑계를 찾아내 대꾸했다.



"야, 사나이들의 우정은 네 생각보다 더 깊고 깊은 거라고."

"니들처럼 유별난 애들은 내 주변에 없거든?"

"근데 그렇다고 해도 그게 너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상관이 왜 없어?!"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는 진아의 목소리에 산해는 순간 귀를 막을 뻔했다가 겨우 참아냈다. 아, 여자애들은 진짜 톤이 높구나. 나리는 안 그러던데. 그렇게 생각하던 중 산해는 방금 전 진아가 내뱉은 말에 주목했다.



"어떻게 상관있는데?"

"그, 그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갑자기 말끝을 흐리더니 살짝 얼굴이 붉어져서 우물거린다. 그러더니 갑자기 홱 고개를 돌려 교실 밖으로 나가버리는 진아를 산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질문했다.



"야, 쟤 왜 저래?"

"어린애는 몰라도 됩니다."

"야, 근데 그건 진아가 너무 불쌍하지 않냐?"

"하여간 저렇게 티가 나는데 당사자는 눈치를 못 채니…."

"아, 왜! 뭐냐고!!"



쯧쯧거리는 눈빛으로 산해를 바라보던 여학생들은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산해를 배경으로 깔고서.




*



여자애와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교실로 돌아오던 정우는 이쪽으로 탁탁 달려오는 실루엣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진아였다. 그쪽도 정우를 알아보았는지 진아의 걸음걸이가 복도 중간에서 딱 하고 멈췄다.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에서 애써 미소를 지으려는 정우의 얼굴을, 진아가 불쾌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홱 그를 지나쳤다. 싸해지는 마음을 붙들고 애써 교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여자애들 사이에서 넉살좋게 웃고 있는 산해의 얼굴이 보였다.


욱신, 심장 한 구석이 쓰려왔다.



'-좋아해.'



수줍은 얼굴로 고백하는 여자애에게 제가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미안해요.'



돌려줄 수 있는 답이 이것 하나뿐이어서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여자애는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고, 어떤 아이는 그래도 괜찮다며 애써 웃어주었고, 또 어떤 아이는 재빨리 저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아마 대부분 우는 얼굴을 감추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정말로 예리하게 핵심을 찌르는 사람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 있니?'



그렇게 물으면 역시 답은 하나뿐이다.



'아니요.'



새빨간 거짓말.


처음에는 죄책감을 느끼다가도 이젠 익숙해져서인지 어느 정도는 무덤덤해진 게 다행이었다. 거짓말이라는 걸 들켜서도 곤란하니까. 당장 누구냐는 질문이 들어올 테고, 자신은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다.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 모든 게 다 순조롭게 풀리기에 세상은 냉혹하다는 걸 잘 알아서. 사랑과 우정 사이의 경계선에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요즘 들어 좀 위험하다. 특히 산해의 저런 얼굴을 볼 때면 더더욱.


들키면 안 돼. 특히 산해에게는 절대로.


중학교에 와서 산해가 예상보다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솔직히 놀랐다. 물론 자신과는 달리 사람 수는 적지만, 이성들이 거의 동경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다가오는 저와는 달리 산해의 경우는 진심인 아이들이 많다. 단순히 외양만을 보는 게 아니라, 내면을 보고 좋아해주는 상냥하고 다정한 아이들이 꽤 많았다. 일단 접근하지 못하게 철저히 선을 긋는 자신과는 달리 산해는 친근하게 누구에게나 잘 다가가는 타입이었다. 덜렁대는 게 심하고 가끔 철없어 보이긴 하지만 중요할 땐 진지하고 다정하니까. 아무래도 그런 점에 끌리는 거겠지.


그 사실이 언제나 정우를 괴롭혔다. 자신과는 달리, 언제든 제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에. 추추몬이 떠났을 때도 이런 감정은 아니었다. 추추몬이 죽었을 때는 회한과 죄책감으로 속이 말라 비틀어졌었다면, 산해한테 느끼는 감정은 독점욕 그 자체였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일인지 알면서도 현실이 그랬다.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참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예진아라고 했던가.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지만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그녀가 껄끄러우니까. 산해와 함께 있으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거북하고 불편했다. 너를 좋아한다는 오오라를 대놓고 뿌려대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엄습하는 두려움에, 일부러 축구부 연습이 끝날 때까지 산해를 기다렸다 같이 가곤 했다. 아마 그녀도 대충 눈치는 챘을 것이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넘기고는 있겠지만.


이런 자신이 최악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산해야."

"어? 정우 너, 이제 왔어?"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선 정우가 언제나와 같이 부드럽게 웃었다. 즐거운 듯이 웃으며 저를 반겨주는 산해의 얼굴에 정우는 우울해져 있던 제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산해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게 좋으면서도, 그게 싫었다. 누군가가 점점 너를 알아보는 게 무서워서. 어릴 때는 모르더라도, 크면 커갈수록 점점 네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가겠지.


언제까지 이렇게 네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자, 곧 수업 시작하는데, 필기는?"

"켁. 깜빡했어!! 으악, 잠시만!"



놀라서 허둥지둥 당황하는 산해의 모습이 웃긴 나머지, 정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피식피식 웃다가 짐짓 화난 듯이 표정을 바꾸고 질문했다.



"뭐 하느라 아직까지도 다 못 베꼈어?"

"아, 그게 사정이…."



헤헤 웃으며 변명하는 산해에게 정우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갈굴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냅두고 교과서를 펴는 정우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 있었다.


그래도 아직 이 정도가 좋지 않을까.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이 거리가 아직까지는 제일 편하다. 언제 말하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면 되리라 생각한다. 산해라면 무턱대고 자신에게 뭐라 하지는 않을 테니까.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정우는 다시 필기를 하는 산해의 옆모습을 힐끗 돌아보았다.


우정이 사랑으로 변하기까지, 앞으로 몇 걸음 전.




===


정우>산해

산해는 >정우 긴 한데 무자각이라는 설정이에요!


왜 트라이에 제로투가 없는 걸까요ㅋㅋㅋㅋㅋㅋㅋ전 무인도 좋고 제로투도 좋은데 ㄱ-

나르님한테 쓰겠다고 해서 부랴부랴 썼는데 아 역시 그냥 막 쓰니까 내용이 막 꼬이는 거 같...쿨럭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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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 나이프귀능과 스푼오르카.




[귀능다나/오르메두]


Change


<01>






1.


그의 하루는 굉장히 일찍 시작된다.


새벽 5시. 자명종 소리와 함께 남자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명종을 끄고 잠이 덜 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언제나와 같은 방 안임을 깨닫고 멍하니 앉아 있다. 이제 이렇게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오랫동안 굳어진 습관을 고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쁠 것 없는 습관이긴 했지만 일어날 때마다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는 건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미소와는 다른 텁텁한 웃음이 그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졸린 눈을 비비며 세면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다가 문득 거울 안을 들여다보니, 다크서클 가득한 얼굴이 놀란 얼굴로 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거울 속 얼굴도 따라 웃는다. 연습하듯이 몇 번 그렇게 웃다가도 남자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뒤돌아섰다. 수건을 들어 얼굴을 닦으면서 거실로 나와 아침을 차렸다. 간단한 토스트와 우유 한 잔. 시간에 여유가 생긴 지금은 훨씬 더 괜찮은 아침을 차려먹을 수 있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충 입에 토스트를 물고 남자는 옷장 쪽으로 다가갔다.


달칵, 소리와 함께 옷장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수십 벌의 옷들이 드러났다. 거의 대부분이 트레이닝 복이었지만, 남자는 여느 때와 다르게 그 옷들이 아닌 구석에 챙겨놓은 정장 한 벌을 꺼내 입었다. 셔츠를 걸치고 바지에 발을 집어넣는다. 자주 입지는 않는지 제법 서툰 솜씨로 넥타이를 매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꽤나 불편한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남자의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옷장 문에 달린 전신 거울에 몸을 비춰보았다. 그러더니 빗과 통 하나를 가져와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정말 귀찮아서라도 하지 않는 일들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2.


시내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굉장히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정장에 알록달록한 셔츠를 입은 짧은 흑단발의 남자(?)의 전체적인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무척 잘생기긴 했지만 쭉 찢어진 눈매나 붉은 눈동자에서는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차림새나 분위기만 보면 어디 조직에서 한 자리 꿰차먹을 법한 인상이었다.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인상 더러운 이 사람이 경찰과 공공기관을 지원해주는 정의의 히어로 전문 기관 스푼(Spoon)의 서장이라는 것을.


다나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형사고가 났다길래 현장으로 출동했더니 교통사고를 낸 당사자라는 놈은 뻔뻔하게 적반하장으로 나오질 않나, 피해자는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횡설수설하고. 다행히 근처에 목격자가 많아 가해자를 쉽게 체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끌려가는 중에도 그 새끼가 한 치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는 거지만.


후우, 한숨을 내쉬던 다나의 얼굴에는 한 순간 살기가 드러났다. 요근래 이상하게 사건사고가 많이 늘어난 느낌이다. 가뜩이나 인력도 없는데 할 일은 태산이고, 서장인 자신까지 발품을 팔아가면서 사건을 조율해도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이번 달은 재난의 달인가. 목 끝까지 차오른 피곤함을 내리누르며, 다나는 이제 돌아가 한숨 자볼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 때, 휴대폰이 울렸다. 수신번호가 뜨지 않았다.



"뭐지?"



의아해하면서도 다나는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히어로라는 직책상 수신번호가 뜨지 않는 전화는 그다지 좋은 소식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받지 않으면 미래에 일어날 위험을 방조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찝찝했다. 천천히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대며 다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 차도 옆을 지나는 중이었다.



"누구지?"



수화기 반대편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장난전화인가 싶어 짜증내며 끊으려던 순간,



[서장님?]



침묵을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은 톤의 미성이었다. 침착했지만, 살짝 들뜬 듯한 목소리를 보면 상대는 아마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순간 누군가 했지만, 다나는 금세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깜짝 놀라 잠시 자리에 멈춰선 다나의 표정이 싹 굳어버렸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귀능이냐?"

[딩동댕~]



정답. 그렇게 말하며 하하 웃는 목소리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다나의 목소리는 이내 험악해졌다. 



"너, 어디 있어."

[궁금해요?]

"그래."

[그냥 앞으로 쭉 걸어와요.]

"무슨 소리지?"

[믿기 싫으면 마시구요?]



이 와중에도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귀능의 태도에 다나는 열불이 터졌다. 갑자기 사라져놓고 뭐가 어쩌고 저째? 마음만 같아서는 더 따지고 싶었지만 녀석은 더 이상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급하게 앞으로 걸어가면서 다나는 이를 부득 갈았다.



"네 녀석, 잡히기만 해…."

[거기까지.]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앞으로 걸어나가던 다나의 어깨를 잡아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와주면서 다나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귀능이 웃고 있었다. 사라진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전혀 변한 게 없다. 정장을 입고 머리를 좀 까기는 했지만, 장난스러운 미소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대로다. 녀석은 정말,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괘씸하게도.



"오랜만이에요."

"뭐 하자는 짓이냐. 말장난이라면 관둬, 맞고 싶지 않으면."

"하하, 여전하시네요. 근데…."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던 귀능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장님, 제가 서장님을 오래 안 봤던 게 맞는 것 같아요."

"왜."

"표정이 더 흉흉해 지셨어요. 진짜 조폭 같…."

"더 말할 거냐?"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을 꽉 쥐어 들어올리자 곧바로 헙 입을 다무는 걸 보니 그나마 눈치는 늘어난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붙든 손을 놓지는 않는다. 묘하게 가까운 거리에 다나는 슬쩍 물러나려고 했지만 귀능의 손은 꿈쩍하지 않았다. 사실 뒤로 물러나자면 물러나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만큼 다나는 적당히 봐주자고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물어볼 게 있었다.



"너, 어디 갔었냐."

"네?"

"대체 어디로 갔다가 이제야 나타났냐고."



몇 년 전, 제 옆에서 홀연히 사라진 녀석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녀석을 정말 몇 달을 미치도록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잠시 눈을 뗀 사이 사라진 거라 다나는 한동안 자신을 크게 자책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릴 적부터 10년을 넘게 같이 지낸 녀석이니까. 하지만 다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가볼 만한 곳도 다 가보고 온갖 전단지를 돌렸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어도 단서 하나 없이 사라졌던 녀석이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그것도 지금 이 시기에.



"음…. 서장님이 들으면 화내실 거 같은데."

"뭔데."



곤란한 듯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귀능을 다나의 붉은 눈동자가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역시 변하긴 변했구나. 2년 만이라 그런지 확실히 얼굴은 예전보다 성숙해져 있었지만,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까불거리는 것처럼 굴어도 녀석 특유의 음울함이 예전보다 한층 짙어져 있는 게 보였다. 워낙 까불거리고 어린애같은 말투를 쓰고 있지만 귀능의 원래 성격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건 다나가 가장 잘 알았다. 왠지 모를 착잡함을 느끼면서도 다나는 그저 기다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다나의 침묵에 귀능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요."

"뭐?"

"그 썩은 생선이요. 뻔뻔하게 서장님 비서로 들러붙다니."

"…먼저 나간 건 너 아니었나?"

"뭐."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말하며 귀능은 싱긋 웃었다. 평상시와는 달리 위험스러운 느낌이 드는 미소가 다나의 마음을 싸하게 훑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그를 뿌리치고 물러나려고 한 다나의 팔을 귀능의 손이 붙잡았다. 이상하게 꿈쩍하지 않는 팔에 놀라기도 전에 귀능이 다나의 몸을 확 끌어당겼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귀능이 낮게 웃었다.



"왜 도망가세요?"



저 섭섭하게. 웃고 있는 귀능의 표정에서 다나는 심한 위화감을 느꼈다. 역시 이상하다. 뭔가 변했어. 어디가 변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시다고 하셨잖아요."

"…어디냐."



천천히 얼굴을 움직여 다나의 귀에 속삭이는 귀능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정말 다나만 들릴 것처럼 작게 속삭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이프."

"…뭐?"



그 순간 본능적으로 멱살을 잡으려고 한 다나의 손을 귀능은 가볍게 피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그가 다나를 보며 두 손을 들었다.



"아직은 잡힐 수 없거든요."

"너…."

"일단 선전포고만 하러 온 거니까요."

"선전포고라고?"

"가지고 싶었던 것이 있거든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걸 찾으러 돌아왔어요.


이해하지 못할 말들만 수두룩 늘어놓는 귀능을 보며 다나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오랜만에 돌아와 할 말이 고작 그것 뿐이냐? 범죄조직에 들어가 있어서 이제껏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리나 하고 앉아 있는 건가. 남아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알고 있어? 나이프에 들어갔다니, 그런 쓰레기같은 곳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이를 바득 갈면서 버럭 소리치는 다나에게 귀능은 쓸쓸한 듯이 웃어보였다.



"그래도 전 여기 있어야 해요."

"내 손으로 널 체포하길 바라는 거냐?"

"서장님은 생각보다 정에 약한 분이잖아요. 재회하자마자 저를 붙잡으려고 하시진 않으시겠죠."



잡혀 드리지도 않을 테지만. 귀능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허리를 숙이고 한 팔을 부드럽게 움직여 인사했다. 마술사가 쇼를 마친 뒤에나 할 법한 동작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뒤돌아서 골목을 빠져나간 귀능의 모습은 금방 인파에 섞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던 다나의 손이, 이내 들고 있던 휴대폰을 빠직 부셔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쓰다가 체력방전! 아 이제 자야지...


사실 커플링에 오르메두도 있는데 얘네 파트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걍 포기... 하하 별거 없어요 그냥 귀능이랑 마찬가지로 메두사가 열심히 비서로 일하고 있는 오르카 만나러 가는 거였....ㄷㄷㄷ


썰을 들었을 때부터 한 번쯤은 써보고 싶었어요! 문제 있으면 즉시 지우겠습니다 헤헤...ㄷㄷㄷㄷ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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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드사운드의 [조각나비] 라는 곡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이 곡 좋아요^~^

※ 꼬강이 위주 독백입니다.




[투림] 조각나비


WRITTEN BY. 리네







살랑 부는 바람이 눈가에 스치운다.


비가 개인 직후라, 유난히 맑은 하늘 위에는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살포시 걸려 있었다. 조물주가 붓으로 그려놓은 듯이 푸르고 넓은 들판의 흙은 축축하게 젖어서 질척거렸고, 잎사귀 끝에 매달려 있던 작은 물방울들이 바닥을 향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사방이 적막했다. 숲에선 흔하다던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들판을 지배했다. 들리는 거라곤 오직 바람이 잎사귀를 세차게 훑고 지나가는 그 소리 하나뿐.


아무도 없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는 누군가 서 있었다. 이제 막 중학생쯤 되었을까, 어린 티를 벗어가는 작은 소년이 하늘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저 위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데도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길을 천천히 되짚어보는 듯한 시선이 못내 처연하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소년이 이내 다시 입을 다문다.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구나.’




아득히 먼 날도 어젯밤 꿈처럼

추억의 물결을 따라 흘러와




아니, 사실 그렇게 오래 지난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1년 남짓 지났을까.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떠오르는 수많은 기억들이 저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른거리는 장면들이 제 머릿속을 채우고 그 날의 감정들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잊겠다고 결심했고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인데. 




아른거리는 그 날의 풍경은

모든 걸 주고 그린 그리움




이 곳에는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 맹세했었다. 마지막을 기억하게 만드는 장소 따위에 오고 싶지 않았으니까. 미친 듯이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을 수 없는 존재의 흔적을 되짚어 보는 건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좋은 추억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울 뿐이어서, 행복한 꿈을 꾸다가도 깨어났을 때 남는 건 고통뿐이어서. 그래서 모든 걸 잊고 싶었고 잊어가고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 다시 여기에 오게 된 걸까. 그냥 평소와 같이 집으로 가려고 학교를 나섰을 뿐이었는데. 마침 비가 왔을 뿐이었는데.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쓰고 있던 우산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제 손에 없었다. 도착하기 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정신없이 달렸을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개어 있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온통 푸른빛.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 풀밭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한참을 걸어 어느 한 지점에 섰을 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아- 여기다.


내가 당신을 떠나보낸 자리가.




비 개인 하늘로 비단결 날개가

돌아보지 않고 떠나간 자리




엄밀히 말하면 떠나보낸 건 아니었다. 그저, 보지 못할 뿐. ‘그 날’ 이후로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귀찮게 따라붙던 영충들도 귀신도, 저승사자였던 당신의 모습조차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사무실에 찾아가 보았지만 이미 매각된 장소라는 문구만이 눈에 처절하게 박혔다. 당신의 흔적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타들어가는 이 아픔 끝에는

상처가 되어 남은 그리움




당신은 언젠가 나를 떠나겠다고 했었다. 저승사자와 인간은 함께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속한 세계가 다르다고. 그러면 나는 늘 볼을 부풀리며 화를 내곤 했었다. 내가 누구랑 같이 있는가를 정하는 건 내 마음이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얼굴이 떠오른다. 안개 속에 감춰진 것처럼 뿌옇기만 하던 당신의 얼굴이 왜 여기 와서는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기억하느니만 못하다. 차라리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이리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스러울 바에는.




버려진 마음 깨져버린 조각을 모아

소리 없이 노래 하는데




헤어짐이 올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다. 삶과 죽음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게 그렇게 급작스러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당신을 보내던 날에는, 비가 왔었다.


근래에 드물던 폭우였다. 축축하게 물드는 습기와 더불어 짙은 음기가 사방을 지배했던 날. 힘을 얻고 날뛰는 수많은 악령들을 제령하기 위해 당신은 목숨을 걸었고, 죽을 위험에 처했었다. 당신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았고,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내 영력을 모두 쏟아부어도 모자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이 정말로 살기를 바랬으니까.


비가 개이자마자 당신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때는 그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살아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왜 그리 무거웠는지. 무엇에도 쫓기지 않으면서 쫓기는 것처럼 발걸음이 점점 급해졌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만큼 순식간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던 저승의 존재들이 지우개로 싹 지워버린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공포를 느꼈다. 처절하게 깨달았다. 당신과의 교차점이 사라져 버렸구나.


이제 나랑 당신은, 정말 안녕이구나.




귀 먼 나비도 이제 떠나갔다고

눈가를 스치는 바람




나비는 영혼을 상징한다고 한다. 당신이 화려하고 강해 보이지만 비에 한없이 약한 나비는 정말이지 당신과 닮아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스스로 조각내버린 당신의 모습을, 추억을 하나하나 끼워맞춰가다 보니 문득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짊어지고 가던 상여꾼들이 노래를 불렀어.’

‘헤에, 내가 본 장례식에선 안 부르던데?’

‘지금이야 상여 대신 차를 사용하니까 그렇지. 그 때는 대부분 무덤까지 먼 길을 가야 했으니까. 지금이야 장의사에 영구차까지 다 있는데 한가롭게 노래 부를 틈이 어딨냐?’

‘그런가?’

‘가는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서기도 하고.’



평소와 달리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던 찰나의 추억. 당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여전히 저승사자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혹시 이 근처에 있을까.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도 내 곁에 머물러 있을까. 여전히 맑게 개인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눈이 아팠다.


심호흡을 했다.




가만히 쉬어 가던 나비를

가녀린 그를 위해 부르던 노래




올린 고개가 슬슬 아파왔지만 내릴 수가 없었다. 그 한 순간에 당신의 모습이 스쳐 지나갈까봐. 부질없는 희망이라고 해도 버릴 수가 없는 이 마음이 서글프다. 천천히 입을 열어 무언가를 내뱉으려 했지만 차가운 숨소리만이 고요히 허공을 범람할 뿐이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입술을 움직였다. 짜디짠 눈물이 혀끝으로 번져간다. 말 한 마디 내뱉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건 노래니까. 이미 떠나간 너를 위해 부르는 무언(無言)의 노래. 들리지 않을 것임에도 계속 부르는 이유는,


네가 그리워서라.


아마 나는 당신이 계속 그리울 거야.




듣지 못하는 이를 위해 들리지 않는 노래 부르네

아득히 먼 날 꿈보다 짧았던 그 날….




인생에서 극히 짧을 그 순간들이 나는 너무나 그리울 것이라서.


설령 듣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이렇게 아파하는 나를 몰라도 돼. 하지만,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부디 당신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그리운 존재로 남아 있기를. 나를 쉽게 잊어버리지는 말아줘. 울컥 쏟아지는 마음이 계속해서 눈물을 뿌렸다. 갑자기 한심해졌다. 당신을 본 마지막 장소라는 이유만으로 이리도 미련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다가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에, 눈을 크게 떴다.


하늘을 물들인 고운 무지개 너머로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푸른 무언가를 본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금세 맑아진 시야에는 여전히 세간에서 말할 법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여전히 태양과 구름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하늘. 헛것을 본 것일까.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방 사라진 그 순간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고.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기다린다.








===


간단히 설명을 들어가겠습니다. 간만에 본진으로 돌아왔네요!


꼬강이가 화자고 강림이가 나비. 사실 조각나비의 가사가 많이 몽환적인데 저는 나비란 노래 부르는 사람이 기다리는 존재인 것과 동시에 그와의 추억이 아닌가 싶었거든요. 추억=그 의 개념이랄까? 그래서 쓰면서도 도입을 해 보았습니다 ㅇㅇ!


중간에 노래 가사를 좀 삽입했어요. 기울기가 되어 있는 대사들이 노래 가사입니다! 실제 가사에선 화자가 울지 않고 그냥 웃는데 꼬강이는 성격상 좀 울 거 같아서 그냥 울렸습니다^ㅁ^..


중간에 보시면 알겠지만 강림이랑 꼬강이는 물론 둘 다 살아 있습니다.(한놈은 저승사자지만) 다만 꼬강이가 영력이 없어져서 더 이상 강림이를 만나지 못하는 걸로 설정을...^^


고메느낌 나는 노래라고 해서 들어봤는데 오 좋더라구요! 여러분도 들어보세요 좋습니다>_<

노래를 영업해주신 리야님께 감사를+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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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이에요, 캐붕주의. 이영싫 귀능다나 기반의 귀능유다입니다! ......정말 미안하다 얘들아ㅠㅠㅠ

※ 굉장히 묘사를 잘랐지만 상황 자체가 19금입니다 피하실 분들 제발 피해주세요ㅠㅠ






[귀능유다]

이 밤이 지나가고는







-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헉…."



소리마저 덮어 버릴 듯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막힌 숨이 트이듯 거친 숨소리가 허공 위로 뿌옇게 흩뿌려졌다. 닫혀있는 문, 잠긴 문고리, 도망갈 수도 없을 만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까지. 다시 찾아온 적막 너머로는 신음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왔다. 새까만 어둠에 가려져 있는 얼굴은 필시 일그러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몸뚱아리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덧씌워졌다. 바로 앞에 누군가 있어도 그 윤곽조차 알아보기 힘들 것만치 어두운 방 안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은 신음을 조용히 삼키면서, 유다는 감았던 눈을 들어 제 위를 바라보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인지 저를 내려다보는 녀석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러 창문도 없는 깜깜한 방을 선택한 보람도 없이, 인간은 적응의 생물인지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눈앞의 사물을 알아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손가락의 감촉이 제 등을 끌어안고 피부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결코 내색하지는 않는 그를 향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목이 잠겨 탁해지긴 했지만 이런 상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난스럽고 명랑한 음성. 그 목소리조차 유다는 짜증이 났다.



"왜 소리 안 내요?"



너라면 내겠냐, 멍청아.


어이없다는 듯이 노려봐 주었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말도 없는 제가 못마땅한지, 등을 감싼 온기가 사라지더니 손가락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제 어깨 쪽으로 올라오더니 얼굴을 쓰다듬는다. 탁, 소리를 내며 쳐내자 불만스럽다는 듯한 음성이 들려온다.



"만지는 게 싫으시다면 말이라도 좀 해 주시죠?"

"…."

"참내, 제가 나가군처럼 투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리라도 내 주셔야 알아보죠. 진짜 보이는 게 아무 것도 없단 말이에요. 하필 왜 이런 방에서만 하겠다고 고집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싫으면, 관두던가."

"누가 싫대요? 아, 움직이지 마요! 다시 할 거니까요."



작게 웃음을 터트리던 녀석이 다시 자세를 고쳐잡는 것 같더니, 갑작스레 들어올려진 몸에 깜짝 놀랐다.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감각 때문인지 순간 쓰러질 뻔했지만, 손을 뻗어 녀석을 붙잡았다. 감촉으로 봐서는 목이 아닌가 싶었다.



"야, 이건 좀 힘든데."

"뀨?"

"소름 끼치니까 닥쳐. 다 큰 남정네가 애교 떠는 게 통할 거 같냐? 그런 건 차라리…."



녀석한테나 써먹어 보던가.


성격답지 않게 하고 싶은 말들을 눌러참고만 있자니 공연히 짜증이 났다. 이대로 목을 졸라버릴까. 어차피 내가 죽인 걸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그렇게 뻘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녀석이 다시 말을 건다. 주제부터가 제 성질을 긁을 만한.



"왜 이런 데서만 하는 걸 고집하는 거예요? 밝지는 않아도, 좀 불빛이 있는 데서 하면 안 돼나요? 여러 모로 불편한데 말이죠."

"…알 거 없어."

"그렇게 제 얼굴이 보기 싫은가요?"

"…그랬음 니 녀석과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그럼…."

"싫다고 했을 텐데."



딱 잘라 대답하자 실망했는지 궁시렁거리던 녀석이었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상대한다면 완력으로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다나만큼 능력을 잘 다루지는 못하지만 결정타 정도는 날릴 수 있었다. 저 녀석이 나를 때릴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얼굴이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녀석은 내가 자기 얼굴을 보기 싫어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천만에,


나는 네 놈 얼굴이 보기 싫은 게 아니라, 네 녀석이 내 얼굴을 보는 게 맘에 안 들 뿐이야. 



'나를 보면서….'



그 녀석을 떠올리지 말란 말이야.


죽어도 입에 담지 않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던 차에, 문득 이런 제 자신이 우스워졌다. 언제부터였더라?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이 행위 자체가 괴로워지기 시작한 건. 예전이었다면 서로의 만족을 채우고 나서 무심히도 헤어졌던 관계에, 끝나고 나서도 공허해지는 마음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건. 분명 처음엔 이렇지 않았는데. 서로의 실리가 맞아서 시작했던 가벼운 관계였을 뿐이었다. 녀석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했고 저는 마침 실연을 한 상태였다. 서로에게 있어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을 뿐이다. 리드하기도 귀찮았고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았기에 딱히 상관없다 생각하고 주도권을 넘겼던 거였는데, 어느 샌가 제가 휘둘리고 있었다.


그냥 가볍게 상대하자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변해버린 거지.


좋아하는 여자의 대체품으로 나를 원하는 녀석 따위에게 어느덧 정이라도 붙은 걸까. 몸이 가면 마음도 따라가는 걸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난 바보가 분명했다. 피식 웃음을 흘려보냈다. 정말 멍청해. 은비단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그새 잊어버렸단 말인가? 오랫동안 같이 지냈기 때문에 더 마음이 가고 정이 갔었다는 걸. 물론 깊이 관여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런 애송이를 이렇게 생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긴 했지만.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녀석의 얼굴이 언뜻 보이는 것만 같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스르륵 눈이 감겼다.


아아-.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이 밤이 지나가고도,

밤은 다시 찾아오겠지.


뿌리치지 못하는 저를 쫓아서.




FIN.




===

쓰고 나니 급속도로 밀려오는 현타... 쓰고 나니까 지워버리고 싶어진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봐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ㅠㅠㅠ


간단히 설명을 덧붙이자면, 글에서도 보셨다시피 귀능이는 다나를 대신할 대체품(...)을 원했고 유다는 실연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상호합의적으로 시작한 관계입니다만(애초에 유다 능력이 귀능이를 이겨먹음) 몸이 가니 마음도 가고 있다 뭐... 그런 내용이죠.


손풀이로 가볍게 쓰자고 썼지만 예상보다 시간이 좀 걸렸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캐릭터를 붕괴시킨 것에는 매우 큰 사죄를ㅠㅠㅠㅠ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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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능다나] 가르침

기타 2015. 3. 24. 20:12

※ 트위터에서 풀었던 킹스맨AU의 일부를 써 보았습니다.

다나는 귀능이의 후견인으로 어릴 때부터 그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돌봐줬습니다. 바이올렛(제비꽃) 씨로 통칭되고 있죠. 

귀능이가 다나를 만나게 되는 씬을 간략하게. 영화 스포가 조금 있습니다.






[귀능다나] 가르침





작고 허름하지만, 깨끗한 바(Bar)에는 주인을 제외하고 단 두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기껏해야 열댓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을 법한 작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처음 손님을 반기는 것은 낡은 나무 냄새들에 섞여 훅 풍겨오는 알코올 향기다.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보이는 온갖 낙서들과 바닥에 난 흠집들, 밟을 때마다 끼익 소리를 내는 나무판자 소리를 듣다 보면 이 술집의 역사가 고스란히 보이는 것만 같다. 둘러앉을 수 있는 몇 개의 테이블과 같이, 옆으로 앉게 만들어진 칵테일 바가 바로 오른쪽에 떡하니 서 있다. 찬장에 색색깔의 술병들을 그득 담아놓고서 술집의 마스터는 연신 손수건으로 쓰지 않는 유리잔을 닦아내고 있다.


그들은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캐주얼한 옷을 몸에 걸친 이제 갓 20세가 되었을 법한 청년이었고, 다른 한 쪽은 양복을 쫙 빼입은 검은 머리칼의 여성이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중성적인 외모와 단정한 자세,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하나로 묶고 손에 보드카가 담긴 술잔을 들고 있는 여자는 딱 보기에도 이런 낡은 술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다리를 꼬고 넥타이를 풀어헤친 모습은 어찌 보면 난폭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장소보다는 비싼 레스토랑이 더 어울릴 법한 차림새였다. 왜 여자가 양복바지를 입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밝은 햇빛이 창문을 타고 넘어 그들의 얼굴을 선명하게 비췄다.


두 사람 다 꽤나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소리쳤다.



"당신이 정말, 바이올렛 씨라구요?"

"바이올렛은 또 누구냐? 내 이름은 다나. 다나 하트다."

"오 맙소사, 세상에."

"뭘 그렇게 놀라지?"

"아니,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절 돌봐주신 바로 그 분이라고요?"

"그래."

"대체 몇 살이에요?! 겉으로 보기엔 저랑 그렇게까지 많이 차이나는 것 같진 않은데!"

"몰라. 계산하기 귀찮으니까 더 묻지 마라."



정말 귀찮다는 얼굴로 다나는 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눈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제 은사에게서 부탁받은 그의 아들. 그녀는 세간에 정체를 들킬 수 없었기에 그에게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고, 돈은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으나 돌봐주는 손길이 없어서 그런지 아이는 상당히 삐딱하게 자라난 듯 싶었다. 물론 저를 쳐다보는 눈빛은 빠릿하니 꽤 마음에 들긴 했지만.


녀석의 자신의 이름을 귀능이라고 소개했다. 이미 알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나는 제 손에 들고 있던 보드카를 조금 더 들이켰다. 그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구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나도 설마 네 녀석이 그 배지를 경찰서에서 사용할 줄은 몰랐다."

"윽. 어쩔 수 없었다구요! 방법이 없었으니까…."

"친구들을 말하는 거군."

"…."

"네 놈도 도통 신기한 녀석이 아니군. 보통 그런 데까지 가서도 의리를 따지냐? 잘못했다간 네 인생에 빨간 줄이 쫘악 그어지는 상황인데도?"

"제 마음인데요."



약올리는 듯한 말투에도 다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가 침착하게 제 앞에 앉아 있는 귀능을 살펴보았다. 소년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얼굴에는 그간의 고생한 흔적들이 두루 엿보였지만 묘하게 귀티가 존재했다. 불만스레 그녀를 쳐다보는 새까만 눈동자에는 총기가 가득했고, 캐주얼한 재킷과 티셔츠, 청바지로 감싸인 몸은 딱 봐도 밸런스가 제대로 잡혀 있었다. 어렸을 때 국가대표로 뽑힐 만큼 운동을 잘했다고 하더니 그 때의 체형이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술을 다시 홀짝 들이키면서 다나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툭 던졌다.



"어렸을 때 성적이 아주 좋았더군. 중학교 때까지 거의 A를 찍었던 걸 보면 말이야."

"…."

"고등학교서도 성적이 그렇게 좋더니만, 난데없이 학교를 중퇴하고 뒷골목 생활을 시작했지."

"뒷조사를 한 건가요?"

"설마. 이 정도를 가지고 뒷조사라고 할 수는 없지."



그를 노려보는 귀능의 눈초리를 쌈박하게 무시하면서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튼 좋아. 너 정도면 괜찮을 것 같군."

"뭐가요?"

"너, 계속 이런 식으로 살 거냐?"

"남이 어떻게 살든 말든…. 이라고는 못 하겠네요. 이제껏 절 후원해주신 분께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무언가 더 보람 있고 멋진 인생을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게 무슨…."



귀능은 몹시 놀랐다. 농담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녀의 눈동자가 무척 진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술집으로 쳐들어온 방해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들거리는 여러 명의 남자들. 그들이 누군지 곧바로 알아본 귀능이 제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소곤거렸다.



"가요."

"감히 내 차를 훔쳐 타다니,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냐?"

"니가 보스의 총애를 받고 있다지만 이번에는 보스도 네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거든?"

"넌, 죽었어."

"어이, 너희들."



귀능을 툭툭 치던 남자도 입꼬리를 뒤틀려 웃던 남자도, 주먹에서 엄지손가락만 빼들고 죽었다는 듯이 바닥을 가리키던 남자도 모두 그녀를 돌아보았다. 호리호리한 얼굴에 박력 있는 눈동자가 그들을 쓱 훑어본다.



"난 지금 기분이 매우 좋지 않거든. 좋은 말로 할 때 조용히 꺼…. 나가준다면 정말 고맙겠어."

"다나, 일단 가라니까요."

"이 여잔 또 뭐야? 그새 새로운 물주라도 잡았냐?"

"오올, 능력자로구만~?!"



낄낄거리는 웃음과 무례할 정도로 경박한 언사들. 그런 남자들의 모습에 다나의 미간이 살짝 씰룩거렸다. 휴우, 한숨을 내쉬며 다나는 조금 남은 보드카를 탁자에 내려놓고 제 옆에 있던 우산을 집어들고서 천천히 걸음했다. 남자들은 입에 손을 넣고 휘파람을 불었고, 귀능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입기는 바라지 않았으니까. 특히 저 사람은 더더군다나.


어릴 때부터 동경해왔던 사람이니까.



"젊은 남자가 필요하면 스미스 가에나 가보라구?"

"으하하하-!!"



다나의 걸음걸이가 그 순간 멈춰섰다. 나가려는 것처럼 문 쪽으로 걸어간다 싶더니, 그녀는 손을 내밀어 가만히 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유달리 선명하게 들렸다.



"매너가,"



맨 위에 달려 있는 경첩을 왼쪽으로 닫더니, 그 옆의 경첩에 손을 댄다.



"사람을,"



두 번째 찰칵거리는 소리가 시곗바늘이 굴러가는 것마냥 선명하게 찍혔다. 그녀의 손이 출입문 쪽에 있는 마지막 잠금쇠로 향했다.



"만든다."



철컥. 마지막 탈출구가 닫힌 것마냥, 술집의 문은 그렇게 잠겼다. 그녀의 말에 빈정이 상했는지 귀능에게서 돌아서 다나에게로 다가가는 남자들의 모습에 귀능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었다. 어쩌자고 저러는 걸까?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나. 라고 생각하며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아니, 놀란 건 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르쳐주지."



다가오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를 가만히 듣던 중, 다나의 손이 제 우산의 끝을 붙잡고 탁자를 향해 휘둘렀다. 정확히는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술잔을 향해서. 우산 손잡이에 정확하게 걸린 술잔은 탁자를 드르륵 긁어내리다 공중으로 날아, 무리의 바로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의 얼굴에 정확히 명중했다. 피를 흘리며 천천히 바닥으로 풀썩 쓰러진 제 보스의 모습에 남자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무서울 정도로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솜씨에 여유로운 미소. 공기가 변하며 두려움이 지천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정도도 모르다니. 머저리들."

"어, 어…!!"

"종일 서 있기만 할 거냐?"



방금 전까지 조곤거리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살벌하게 변했다. 눈빛을 싹 바꾸며 다나는 제 머리를 박박 긁었다. 한쪽 발을 내밀고 우산을 제 어깨에 걸치고서, 발을 건들거리며 악당 같은 미소를 짓던 다나가 킥킥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에 남자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차갑게 일갈했다.



"와라, 애송이들."



*



"고작 이 정도인가."



탁탁 손을 털어내는 다나의 모습을 귀능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우산으로 술잔을 날려 보스급인 남자의 머리통을 명중시킨 것을 시작으로 난투가 벌어졌고, 그녀는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솜씨로 남자들을 제압했다. 칼을 휘두르고 온갖 물건들을 휘두르는 남자들을 상대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때려눕힌다. 우산 하나를 가지고 사람을 저렇게까지 신명나게 팰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널부러져 있는 남자들 사이에서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귀능을 보며 다나가 씩 웃었다.



"어이, 그 얼빠진 표정은 뭐냐?"

"…당신, 정체가 뭐예요?"

"그게 알고 싶다면 따라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뒤돌아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귀능이 결심하고 제게로 다가올 때까지. 한참 뒤, 제 쪽으로 발을 내딛는 소리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물론 그가 그 표정을 봤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제서야 발걸음을 옮기는 다나를 따라가며 귀능은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데요?"



정말로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제게 묻는 그에게, 다나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니 직장이 될 수도 있는 곳."



아직까지는.




FIN.



Posted by I.R.E
,


※ 유하님 생일 축전입니다. 예,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이유하님 맞아요(...)

얀데레 설정이 좀 들어가 있습니다. 그 점 주의해주세요! 수위는 없습니다. 그리고 짧아요!

그럼 시작.






[유하강림]

소녀, 그 방, 그리고 반복되는 하루






“강림아, 안녕?”


오늘 기분은 어때? 아, 나는 아주 잘 지냈어. 그냥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고, 언제나처럼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은 후에 또 수업을 들었어. 종례를 마치고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처지상 어쩔 수 없이 학원으로 날아가야 했지만. 왜 우리나라 입시는 이다지도 빡빡할까, 거참 피곤하게.


학원을 마치니까 벌써 새까맣게 물든 밤이야. 가뜩이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왜 이렇게 가로등도 별로 없는지 모르겠어. 좀 무서웠지만 꿋꿋하게 집에 돌아왔어, 나 잘했지? 이제 게임만 좀 하고 자면 완벽한 하루…. 였겠지만 오늘따라 게임에서 트러블이 생겼어. 게임에서 정말 노답인 새끼를 만나서 말이야. 아악!! 생각해보면 이렇게 발암인데 난 왜 이걸 계속 하고 있을까…. 가끔은 정말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니까. 넌 어떻게 생각해?


강림아? 듣고 있어?


긴 흑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해맑게 웃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소녀는 가만히 눈앞의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세를 약간 숙여서일까, 하나로 질끈 동여맨 머리카락이 조금 아래로 흘러내렸다.



“왜 대답을 안하니?”



섭섭하다는 듯이 한쪽 눈가를 찡그린다. 여전히 말이 없는 남자의 모습에도 소녀는 그저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하얀 손을 그에게로 뻗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려나 싶었더만, 바로 그 옆을 지나 남자의 입에 물려 있던 손수건을 가만히 매만진다. 한참을 그러더니 손을 거둬들였다. 입에 재갈처럼 손수건을 물고서 의자에 묶인 남자의 눈동자가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았지만, 소녀는 그저 좋다는 듯이 꺄르르 웃었다.



“불편하구나? 미안해. 하지만 풀어주면 소리지를 거잖아.”



그건 싫거든. 딱 잘라 말하는 소녀에 발끈한 걸까, 남자는 읍읍거리며 그녀에게 달려들 듯이 몸을 내밀었지만 그뿐이었다. 계속해서 몸을 비틀어도 얼마나 튼튼하게 묶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의자는 마치 다리가 바닥에 붙박인 것처럼 미동도 없다. 몇 번을 그러다가 결국 체념했는지 남자의 고개가 한 쪽으로 툭 떨어졌다. 그런 남자의 얼굴에 소녀의 입가에는 가만히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내가 싫어?”



이젠 아예 눈을 감고 자신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웃고만 있던 소녀의 인상이 돌변했다. 손이 잽싸게 움직이더니 그의 머리카락을 덥석 움켜쥐고 자신 쪽으로 홱 치켜들었다. 거친 손길에 남자의 입을 막고 있던 검은색 손수건이 풀려버렸다. 수분기 없는 꺼끌한 음성이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나왔다.



“윽….”

“내가 말했잖아? 나랑 있을 땐,”



나만 보라고.


환하던 웃음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변했다. 그제서야 남자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건 명백한 거절. 그걸 모를 만큼 소녀는 둔하지도 않았고 그런 시선을 용납할 만큼 인내심이 강한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녀는 좀 이상했다. 말없이 노려보는 시선의 끝이 가시처럼 그녀에게로 와 박혔지만, 소녀는 그저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날 부정하지 말아줘.”



그럼 슬프잖아.


쓸쓸하게 웃는 눈동자, 처연한 말투. 살짝 무릎을 숙여 그의 앞으로 다가선 얼굴이 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이 웃는다. 허나 그럼에도 남자의 표정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아니, 눈매를 씰룩거리는 폼을 보니 그냥 어이가 없는 듯했다. 그는 입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장 이걸 풀던가.”

“아니, 그건 얘기가 다르지.”



금방 특유의 해맑은 미소로 돌아온 소녀가 살짝 제 볼을 부풀렸다. 그러고는 작게 투덜거린다.



“에이, 이런 가녀린 소녀가 이렇게까지 말해주는데 너무한다. 보통은 넘어오는 게 정상 아니야?”

“…건장한 남정네를 전기 스턴건으로 기절시켜서 방에 유폐한 사람 입에서 나올 대사가 아닌데? 가녀린 소녀라며?”

“그거야 난 힘이 없으니까!”

“웃기고 있네. 잔말 말고 적당히 이거 풀어. 나 일하는 데서 짤리면 니가 책임질 거냐?”

“어? 책임지면 돼?! 그럼 그냥 우리 집에 살아! 내가 두 사람 먹여살릴 정도로는 벌어올 테니까!”

“이게 말이라도 못하면….”



한숨을 내쉬며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강림은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주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찌나 꽁꽁 묶어놨는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밧줄을 푸는 게 불가능했고, 고로 그녀를 설득하지 않으면 자력으로는 여길 빠져나갈 수 없다.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 갇혀 있어서인지 시간을 알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녀가 들어온 횟수로 따져보면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것이다. 꽤나 많이 지났으니 슬슬 저를 찾는 사람들이 있겠지. 하지만 과연 저를 발견할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소녀는 생각보다 철저했고, 또 끈질겼으니까. 장난으로라도 절대 저를 묶어둔 밧줄을 풀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몸이 이 상태여서야 구조를 요청하기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때였다. 갑자기 무언가가 퍼뜩 떠오른 것처럼 소녀의 얼굴에 오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의 표정이 싸악 식어갔다. 불길한 마음에 어떻게든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재빠르게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워든 그녀가 다시 그의 입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야, 이게 무슨 짓…!! 읍읍!!”

“벌써 자야할 시간인데 너무 끌었다. 강림이도 피곤하지? 어서 자.”

“읍읍!! 으으읍!!”



정말 화가 났는지 이마에 힘줄까지 돋아가며 마구 노려보는 눈길에도, 소녀는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그의 입을 꽁꽁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는다. 마치 애완동물을 다루는 것마냥. 전혀 꿈쩍하지 않는 소녀의 모습에 강림은 또 다시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길, 또 이 패턴이냐.


등을 돌리는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휘릭 공중으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뚜벅뚜벅 걸어 방을 나서려는 순간 소녀가 홱 뒤를 돌았다. 순간 움찔하는 남자를 향해 유하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잘 자, 강림아.”



내일 봐.


삐걱대던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시 세상은 조용해졌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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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는 <이런 날 부정하지 말아줘> 였습니다!

별 거 없어서 미안... 유하 생일 축전입니당!ㅠㅁㅠ

Posted by I.R.E
,

※ 주의사항:

BL입니다. 별 거 없음 주의!

현대 AU인데, 살짝 원조교제 느낌이 나긴 합니다. 싫어하시는 분들께서는 조용히 뒤로가기를.

수위는 전혀 없습니다 ㅇㅇ 맹세할 수 있어요. 다만 꽤 다크한 분위기입니다.








[사라강림] 불청객





비가 내린다.


저는 비오는 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는 낭만이 있어 좋다지만 최소한 저에게는 그랬다. 칙칙하게 잿빛으로 물드는 하늘도, 길을 걸어갈 때마다 커다랗게 고여 있는 웅덩이들에 발을 멈칫하게 되는 상황도 달갑지 않았을 뿐더러, 눅눅하게 제 몸에 들러붙는 습기도, 우산을 쓰고 있어도 찬바람을 타고 제 옷을 습격하는 빗물도, 아무리 조심해도 축축하게 제 구두 위로 튀어오르는 탁한 물자락들도 정말이지 제 취향은 아니었다.


그 날은 하루종일 비가 왔던,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하루였다. 


퇴근 시간이 되도록 멎지 않는 빗줄기에 저절로 입가에 욕이 번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물론 아침처럼 쏟아지는 비에 제 옷을 버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쏟아지는 폼새를 보아 역시 우산을 쓰고 가야 할 것 같았다. 쯧, 귀찮게. 속으로 혀를 차며 적당히 하던 일을 마무리짓고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 손에는 서류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밝은 건물에서 어두운 거리로 발을 내딛었다.


제가 사는 곳은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였다. 걸어서 20분 정도면 그래도 꽤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 화려하게 불빛이 반짝이는 번화가를 지나가다 문득 모퉁이를 돌면, 불빛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한 10분 정도를 걸어가다보면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그 모습을 드러내겠지.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우산을 잡고 있는 제 손등에 자꾸만 달라붙는다. 계속해서 나오는 웅덩이를 피해가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기던 바로 그 때였다.



'저건…?'



이미 불빛이 꺼진 깜깜한 건물의 계단 쪽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뭐지? 저도 모르게 우뚝 발걸음을 멈춰섰다. 평소였다면 그러든 말든 그냥 무시하고 갔겠지만 무슨 변덕이 든 걸까. 발걸음을 천천히 그쪽으로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제가 발견한 녀석이 꽤 어리다는 것을 알아챘다. 명찰이 박힌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는 물론이요, 옆으로 맨 가방까지. 많이 봐준다 해도 고등학생 정도일까.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보이지 않는 얼굴 대신, 물기를 머금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소년은 생각보다 꽤 젖은 상태였다. 아무리 처마가 있다지만 비가 들이치지 않을 리도 없었고, 옷이 꽤나 푹 젖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이 퍽이나 기이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계단께에 미동 없이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괴담에 나오는 무슨 귀신마냥 흉흉해 보였다. 이 날씨에 우산도 없이, 왜 이런 곳에 죽은 듯 앉아 있는 걸까. 설마 진짜 죽은 건 아니겠지?



"꼬맹이는 벌써 집에 들어갔어야 하는 시간 아닌가?"



툭 말을 던지자 그제서야 소년이 고개를 든다. 예상대로 꽤 어린 얼굴. 선이 가늘지만 꽤 남자다운 얼굴은 소년이라 보긴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청년도 아니었다. 성장기라 그런 것일까. 그는 남자를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을 하더니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연다. 변성기가 오는지 조금 탁하게 가라앉은 미성이 빗줄기에 섞여 들려온다.



"가출 중."



표정이 없던 얼굴에 씨익 웃음이 들어찬다. 어른에게 하는 대답치고는 상당히 건방져 보이는 언사에도 남자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경계하는 검은색 눈동자가 남자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번드르르한 양복을 입고서 은발을 말끔히 빗어넘긴 얼굴은 딱 보기에도 굉장한 미형이었지만, 감정이 보이지 않는 보랏빛 눈동자는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하다.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길에 남자는 짜증스레 말을 뱉었다.



"그걸 자랑이라고 입 밖에 내뱉냐, 당장 집으로 꺼져."



정말 얼굴과 매치되지 않는 격한 목소리였다. 소년은 재미있다는 듯이 그를 마주했다. 



"우와, 아저씨. 성깔 있네."

"이런 곳에서 청승맞게 비나 맞으면서 헤헤 웃는 놈한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은데. 그리고 존대 써라."

"예, 예. 아, 그리고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야."

"…."

"돌아갈 수 있으면 진작 돌아갔지, 여기서 이렇게 청승떨고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눈빛을 보면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걸 알아챘는지 남자는 다시 침묵을 고수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년이었다. 장난스레 말하고는 있지만 그를 똑바로 마주하는 검은색 눈동자가 살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아저씨, 그런데."

"…?"

"혹시 혼자 살아?"

"그렇다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한쪽 눈가를 살며시 찡그렸다. 제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귀찮다는 듯이 우산을 들고서 저를 쳐다보는 남자를 쳐다보는 소년의 얼굴이 능청스레 웃고 있었다. 그럼,



"나 좀, 주워가주면 안 될까."




*  *  *



"우와…."



방 안을 둘러보면서 소년이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이미 방에 들어가 양복을 갈아입고 나온 남자가 소년에게 티셔츠와 반바지를 던져주었다. 소년은 그걸 주섬주섬 들고 그가 지정해준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고 나왔다. 이 날씨에 입기에는 조금 추운 옷차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지만 사실 소년은 남자보다 훨씬 키가 클 뿐만 아니라 팔다리도 긴 편이었다. 어지간한 옷은 맞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신기하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소년을 향해 남자가 물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하지?"

"응? 아니, 그냥. 놀라서."

"뭐가."



여전히 반말을 쓰는 소년의 모습에, 남자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딱히 제재하지는 않았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 탓이었다.



"내가 데려와달라고 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데려와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



아니, 애시당초 이런 애송이를 집에 들인 것부터가 제일 귀찮은 짓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싫으면 나가든지. 난 상관없어."

"아니, 누가 싫대? 그냥 신기하다고."



그냥, 믿겨지지 않을 뿐이야. 그 말만 하고서 맞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만 하던 소년에게 남자가 다시 물었다.



"너, 이름이 뭐지?"

"그건 왜 물어?"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집에 들이는 건 위험하지. 일단 그 정도는 알아둬야 하지 않겠어?"

"이미 들인 주제에 말은…."

"그래서, 이름은."

"…강림."



강림이라, 저승사자의 이름인가. 그 이상 감흥이 들지 않았는지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강림이 들어갔다 나온 방을 가리켰다.



"저 방을 써라. 거실을 돌아다니든 말든 상관없지만 정말 무슨 일이 없는 이상 내 방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마. 내가 있을 때는 더더욱. 난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니까. 음식은 적당히 냉장고에 있는 반찬이랑 밥솥에 밥이 있으니까 그걸 챙겨먹고, 나가든 여기 있든 상관은 안 하지만 나갈 거면 문을 잠그고 나가. 열쇠는 저 화분 밑에 있으니까 그걸로 잠그고 문틈 사이로 집어넣어 놔. 퇴근하자마자 도둑이 들어 난장판이 된 집이랑 마주하긴 싫으니까."

"열쇠까지 알려주네. 혹시 내가 도둑질을 하면 어쩌려고?"

"해봐."

"…?"

"하는 즉시 내 모든 인맥을 총 동원해서라도 네 놈을 찾아 지옥으로 보내줄 테니까."

"히익."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보랏빛 눈동자는 지극히 살벌했다. 분위기를 파악하고 합 입을 다문 소년을 쳐다보며,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알아서 있다가, 알아서 나가라."



그 이상은 귀찮다는 듯이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려는 남자를 강림이 불러세웠다. 저기, 잠깐만.



"그런데, 그쪽 이름은 뭐야?"

"사라."



그렇게만 답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라의 뒷모습을 강림은 한참 동안 서서 계속 쳐다보았다. 이름을 몇 번이고 입 속에서 굴려보았다. 사라, 사라라.



"이름은 예쁘네. 가진 사람 성질이 더러워서 문제지."



작게 투덜거리던 강림이 제 머리를 긁적거렸다. 뻘쭘하게 잠시 서 있던 그가 뒤를 돌아 사라가 지정해준, 그의 방에서 정확히 맞은 편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뚜벅뚜벅 울리던 발소리가 멈추고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찰나에, 다시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점점 깊어가는 밤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서로 다른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


사라는 디자인 회사 팀장이고 상당히 잘 나가는 엘리트. 강림이는 나온 대로 고등학생입니다. 아마 동거해도 사라가 강림이한테 손댈 리도 없고 강림이가 사라한테 그렇게까지 관심을 둘 리도 없을 겁니다 ㅇㅇ 근데 뒤를 쓴다면 그 동거의 감정선을 느릿느릿하고 감성 있게 다루지 않을까요 마치 화양연화처럼...ㅋㅋㅋㅋㅋ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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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3월 웹툰 온리전에서 배포한 배포본입니다. 길이는 대략 14500자 정도.


※ 주의사항.


네이버 웹툰 ‘이런 영웅은 싫어’ 의 [귀능다나] 커플링 팬소설입니다.

뱀파이어 AU. 스푼(Spoon)이 뱀파이어 헌터 기관이며, 나이프(Knife)는 뱀파이어 관련 범죄 조직으로 순혈과 혼혈, 잡종(뱀파이어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된 존재)들이 섞여 있는 곳.

원작처럼 다나는 스푼의 서장, 귀능이는 순혈 뱀파이어로 서장 비서를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다나 시점의 1인칭으로 진행됩니다.

상상이 많고 캐붕이 우려되니 주의해주세요:)







[귀능다나]

귀찮음과 애정의 그 중간 사이






“으, 으아아악!!”



비명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멀쩡했던 벽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면서 와르르 무너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무너진 벽 아래에 남자가 주저앉았다. 경악에 가득 찬 얼굴이 단단한 벽을 마치 얇은 종잇장을 뚫어버리는 것처럼 쉽게 부수는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벽을 부순 장본인은 후,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제 손을 거둬들였다. 놀랍게도 그의 양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사람의 주먹이 저렇게 강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뭐, 뭐야! 사, 사람 맞아?!”

“어쩌라고.”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상대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로 중성적인 외모는 가만히 보고 있자면 꽤 호감형일 터였지만, 그러기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묘하게 상대를 압박하는 카리스마나 더러운 인상을 보면 흡사 조폭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일단 옷차림부터 그래 보이고.


살벌한 눈길에 순식간에 다시 쪼그라든 남자가 벌벌 떨었다. 나대다간 더 처맞을 것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런 촉이라도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하나.


남자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하나 더 드리웠다. 그림자의 주인은 꽤나 앳된 얼굴을 가진 소년으로, 나이는 많아봤자 20대 초반 정도가 될 것 같았다.



“서장님, 이쪽 다 정리했어요오-.”

“그래? 그럼 철수하자. 일단 이놈 체포하고.”



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심드렁히 대꾸하고 뒤돌아서는 뒤통수로 날아드는 칼이 있었다. 주저앉아 있던 남자가 최후의 발악으로 몸을 날린 것이었다. 뒤돌아선 상대는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끝이다.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올려붙은 순간,



“앗, 위험하니 이건 압수.”



남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손에 가해지는 충격과 동시에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진 와중에도 그는 한동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남자의 손목을 쳐내고 그를 바닥으로 메다꽂은 건 바로 옆에 서 있던 소년이었다. 잡고 있던 남자의 팔을 강하게 비틀자, 아악, 소리와 함께 남자가 칼을 떨어뜨렸다. 싱그르르 웃으며 제 팔에 수갑을 채우는 소년을 향해 남자는 이를 갈았다.



“이…!”

“반항하면 몸만 더 피곤해진다구요? 순순히 오라를 받으시죠!”

“…빌어먹을.”

“사실 그런 걸로 찔러봤자 소용도 없을 테지만, 기분 나빠요.”



소년의 목소리가 마치 놀이공원에 놀러나온 어린애마냥 해맑았다. 하지만 남자의 팔을 올려꺾는 완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몇 번을 발버둥쳤지만 꼼짝조차 하지 않았다. 소년이 쯧쯧 혀를 찼다.



“악당은 포기하는 게 너무 느려서 탈이에요. 어차피 잡힐 거 순순히 잡히면 너도 좋고 나도 좋은데 말이죠.”

“웃기지마! 네놈들은 대체…. 큭.”



꺾인 팔이 아파서 신음소리를 흘리는 남자의 팔을 붙잡은 소년이 엎어져 있던 그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멀리서 짜증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잡설 그만하고 어서 따라와!”

“지금 가요!”



남자를 경찰에 넘겨주고 난 뒤 소년은 뒤를 돌아 저를 부른 사람을 따라갔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바이, 바이. 손을 흔들어주는 소년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



“요즘 잡것들이 왜 이리 설치고 다니는 거지.”



다나는 짜증스레 제 눈앞의 서류들을 쳐다보았다. 원래 이놈의 서류라는 녀석은 해도해도 끝이 보이지 않긴 했지만, 요즘따라 유독 심했다. 며칠을 밤새서 일했는데도 바닥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처리했다 싶으면 직원이 또 한 다발의 종이뭉치를 들고 온다. 사실 이것만이라면 좋을 터인데, 사람이 부족해서 서장인 자신까지 서류를 결제하다 말고 밖으로 체포를 다녀야 한다니. 정말이지 짜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놈의 서류는 왜 이리 많은 거야!”

“인력이 부족하니까요. 어쩔 수 없죠.”



그녀의 옆에서 종이에 도장을 찍고 있던 귀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서라는 이유로 그녀와 같이 밤을 샌지라 그의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완연했다. 다나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뱀파이어란 놈들은 지치지도 않나. 아니면 지금이 배고픈 시기인건가?”

“뀨우? 전 딱히 배 안 고픈데요?”

“누가 네놈한테 물어봤냐? 아무튼,”

“요즘 확실히 빈도수가 잦기는 해요. 파견 요원들도 피곤에 쩔어 사는 것 같더라구요. 하도 임무가 많아서.”

“아오….”

“이쯤되면 저희 과로사 시키려고 이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라니까요.”



귀능이 다 처리한 서류들을 다나에게로 넘겨주었다. 다나의 붉은 눈동자가 빙그르 굴러가면서 내용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둘 다 대화를 하면서도 일을 척척 처리하는 걸 보니 한두 번 있었던 상황도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서류가 바닥을 보이자 그제서야 두 사람은 손에서 서류를 내려놓았다. 다나는 옆에 있던 각성제의 뚜껑을 따서 벌컥 들이키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귀능은 다시 노트북을 꺼내 중요사항을 체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서장님이 짱짱 세니까 어쩔 수 없죠. 보통은 서장님이 날리는 주먹 하나만 봐도 쫄아서 항복하는 놈들이 많잖아요?”

“…후.”

“요즘은 나이프가 잠잠해서 다행이에요. 가뜩이나 귀찮은 시국에.”

“그놈들까지 설치면….”



더 이상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몸을 일으켜 책상 쪽으로 다가간 귀능의 시야에, 고개를 젖힌 채로 눈을 감고 있는 다나의 얼굴이 들어왔다. 지쳤는지 수척해진 얼굴색을 보아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물끄러미 그 얼굴을 내려다보던 귀능이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야.”

“뀨?”

“귀여운 척 하지 말고, 이거 당장 치워라.”



어느 새 올라온 손이 그의 얼굴을 막고 있었다. 잠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꾸욱꾸욱 밀어내는 손바닥에 귀능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의자에 묻었던 몸을 일으키며 다나가 제 머리를 북북 헝클어뜨렸다. 귀능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하여간 서장님은 빈틈이 없다니깐요. 재미없게.”

“쓸데없이 짜증나게 하지 마라. 죽고 싶냐?”

“하하, 아뇨아뇨. 오래 살아야죠, 오-래.”



사람 좋게 웃으며 뒤로 물러나는 귀능을 보고 다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속한 기관인 스푼(Spoon).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헌터 기관으로 특기를 가진 인간들과 소수의 뱀파이어들이 속해 있는 단체다. 인간의 피를 노리는 뱀파이어들로부터 도시를 수호하고 경찰서나 공공기관을 돕기도 하는 일명 정의의 사도들.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냥 셔틀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이 스푼의 서장을 맡고 있는 존재가 바로 다나였다. 스푼의 서장이자 유능한 뱀파이어 헌터. 평소 행동거지나 말투를 보면 든든한 오빠같지만 사실 이래 봬도 여자다. 특기는 금강불괴로, 어떤 물리적인 공격에도 타격을 입지 않는 방어력과 강철도 부수는 완력의 소유자.


그리고 그런 그녀의 비서를 맡고 있는 게 귀능이었다. 스푼 내에서도 드문 뱀파이어, 그것도 순혈종으로, 귀여운 얼굴과 달리 어마어마한 괴력을 소유한 인물. 스푼 내에서도 완력으로는 한 사람 빼고는 그를 이길 상대가 없다고 한다.


물론 그 사람은 다나였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더 주무시지 그러세요?”

“됐거든. 방금 자고 있는 사람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했던 놈이 어디에 누구였더라. 망할 자식아.”

“뀨? 저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구요?”

“뭐…?!”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있는데, 다가가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뭐, 진짜 손댈 생각은 없었지만요.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말투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다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따르르릉-. 침묵 속에서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고 대화를 나누던 다나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졌다. 끊어진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서류더미를 뒤적거리더니 파일 하나를 꺼내 귀능에게 건넸다.



“임무다. 이 서류 3조에 가져다 주고 와.”

“네.”



그는 다행히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파일을 받아들고 서장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다나는 다시 털썩 의자에 기대앉았다. 골이 아파오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피곤하긴 한 건지 평소보다 얼굴이 뜨거웠다. 차가운 거나 마시고 싶군. 심드렁히 중얼거리며 몸을 조용히 의자에 기대는 다나의 뇌리에 방금 전 이곳을 나간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워지지 않는 잔상에 절로 머리가 아팠다.



“아-, 귀찮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



‘좋아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뭐냐? 이제와서 낯간지럽게.’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던 건지도 모른다. 결코 녀석의 마음을 무시한 게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탓이 더 컸다. 하지만 그 때 녀석의 태도에는 벙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

‘엉?’

‘…이성으로 보고 있다구요.’



꾹 다물린 녀석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정말 못할 말을 꺼낸다는 것처럼 비장한 모습에 차마 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웃으면서 장난스레 넘기기에는 녀석이 정말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그래서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있었던 녀석한테 고백을 받으면 다들 기분이 이럴까.



‘…생각할 시간을 줘라.’



단숨에 거절했어야 옳은 일이거늘, 얼떨결에 튀어나온 제 대답에 경악할 틈도 없이 녀석은 내 손을 턱 부여잡고 말했다.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보니 차마 실수였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쭉 이 상태다. 틈만 나면 달라붙으려고 하는 녀석을 떼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설마 진짜 자고 있을 때 무슨 짓 했던 건 아니었겠지. 애당초 제가 초래한 일이라 화를 내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다시 말을 꺼낼 타이밍이 좀체 잡히지 않았다. 아니, 사실 말하고자 했다면 진작 얘기하고 떨쳐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하는 건 제가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녀석이 상처받을까 두려웠다. 전처럼 모든 걸 잃은 듯이 공허한 얼굴로 저를 쳐다볼까봐. 예전부터 저는 녀석에게는 약했으니까. 과거, 제 옷자락을 붙드는 녀석을 외면하지 못했던 것처럼.


대체 그 녀석은 왜 하필 내가 좋다는 걸까.


생각해 보겠다고 했으니 생각은 하고 있는데, 당최 녀석의 마음에 대해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저를 보고 연애감정을 떠올린다는 게 말이 되나? 솔직히 녀석을 그런 대상으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긴 어렸을 때부터 얼굴보고 지낸 녀석한테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그거야말로 더 문제가 아닌가. 악세사리로 은팔찌를 달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꽤 오래 전 지원을 나간 적이 있다. 습격당한 뱀파이어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스푼의 업무는 주로 뱀파이어를 퇴치하는 일이지만, 뱀파이어 세계의 균형점이 깨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도 업무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보통 인간에 적대적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에 우호적인 존재들은 있었고, 그들은 비밀리에 스푼과 협력해 동족이 일으키는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지원을 가게 된 이유는 그 사실이 알려져 동족의 습격을 받은 뱀파이어 가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뱀파이어 가문 중에서도 꽤 오래 되었다고 알려진 순혈 가문의 저택에는 죽은 자들의 피비린내가 즐비했다. 너무 늦게 도착했기에, 제가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남자아이 하나뿐이었다. 혈향으로 물든 처참한 현장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공허하게 저를 올려다보던 그 눈동자를 아직도 기억한다.


이제는 즐겁게 웃고 있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녀석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모양이다. 부모의 사체 앞에서 목이 졸려 죽을 뻔했던 기억 때문인지 녀석은 뱀파이어 주제에 피를 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피를 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목을 긁어대는 건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이겠지.


그냥 은인에 대한 존경심을 애정으로 착각한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하는 짓들이 너무 발칙했다. 비서라서 떨어져 있기도 어렵고, 녀석 대신 다른 비서를 구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익숙한 게 편한 법이다. 그런 이유로 녀석을 멀리하기엔 그 동안 함께했던 세월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묘하게 눈치를 보게 되는 제가 있다. 단 둘이 있을 때도 전과는 달리 어색하기만 하다. 그걸 즐기는 듯한 녀석에게도 화가 나고, 그럼에도 차마 이 모든 것을 끝내지 못하고 질질 끄는 제 자신에게 제일 짜증이 났다.


정말, 답지 않게도.



*



너와 나는 정말 다르다. 자라온 환경도, 나이도, 심지어 종족부터가 우리는 너무나 달라서.



“서장님, 괜찮아요?”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저를 향해 미소짓는 녀석에게 차마 마주 웃어줄 수가 없어서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시작은 그저 간단했다. 많은 수의 뱀파이어들이 나타나 사고를 친다는 보고를 받고 출동한 게 처음이었다. 역시 사람이 부족한 탓으로 현장인원은 저와 비서인 이 녀석밖에 없었다. 아무리 저라지만 밤샘을 너무 한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까무룩 감길 것만 같은 눈꺼풀을 각성제로 애써 깨워냈다. 현장으로 달려가보니 뱀파이어 종족 특유의 검은 망토들이 보였다.


쪽수가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와 이 녀석이라면 문제없이 제압할 수 있는 정도였다. 다만 싸우던 중간에 머저리들 중 하나가 하필 저 바보 녀석을 들먹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녀석은 종족들 사이에서는 그리 소문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족의 수치다, 인간에게 붙어먹은 배신자다, 이렇게 우리 종족을 배신하고 무사할 줄 아느냐, 순혈종의 피가 아깝다 등등.


정말이지 악당의 전형적인 대사들을 듣고 있자니 가뜩이나 피곤한 몸이 더욱 눅눅해졌다.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 앞으로 달려드는 녀석을 올려차려던 발이 헛돌았던 것도, 동시에 주먹이 제 배를 강타한 것도, 사실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피곤한 마음에 누웠다 일어나볼까, 일어나선 맨 처음 날 때린 저놈부터 조져야지, 라고 생각하며 그냥 바닥에 엎어졌던 것도.


쓰러진 저를 보고 녀석이 그렇게 돌변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인간의 것이 아닌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었다. 공중을 날아다니며 놈들을 베어내는 하얀 뒷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점점 새까맣게 물들어가는 검은 망토자락들과 함께, 비릿한 향이 코끝을 감돌았다.


흡사 지옥도를 보는 느낌이었다.


제가 보는 이 광경이 꿈이 아닌가 싶었다. 사실 맞은 순간에 이미 기절했던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열댓 명이 넘는 뱀파이어 녀석들이 피가 즐비한 바닥 위로 쓰러지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꿈만 같았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 밤샘은 이제 그만 해야겠다.


녀석은 평소에 누군가를 해치는 걸 절대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피가 튀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누군가가 죽어가는 모습을 좋아하는 건 악취미가 분명해요. 부르르 떨면서 질색하는 그 모습에 넌 정말 뱀파이어가 맞냐고 구박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녀석은 웃고 있었다.


머리가 싸악 식어갔다.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대체 저건 누구지? 사람을, 아니지 뱀파이어를, 제 동족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죽여가는 저 녀석이, 과연 제가 알고 있던 그 녀석이 맞는 것일까. 웃고 있는 녀석의 입술 사이로 하얀 송곳니가 보였다. 싸우던 중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저를 보고는 씨익 웃는다. 그래, 흡사 피에 굶주린 듯한 광기어린 눈빛을 하고서. 피 묻은 손을 핥는 녀석의 눈썹이 움찔거리며, 얼굴 위로 환희가 가득 차올랐다. 심장이 자꾸만 덜컹거렸다. 


피를 무서워하던 그 바보 녀석은 어디로 간 거지?

혼란스러웠다.



“…서장님?”



녀석이 다가오기 전에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피갑칠을 한 녀석에게 제 외투를 벗어서 던져 주었다. 받아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얼굴이 평소와 같았다. 그럼에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체포가 우선이긴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을 경우에는 뱀파이어를 사살하는 것도 허용된다. 나라에서도 허가한 일이다.


그런데도-.



“난 괜찮아. 뒤처리를 부탁한다. 끝나면 곧바로 퇴근해.”

“…? 네.”



어리둥절한 녀석을 내버려두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돌아가는 중에도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너에게 실망한 것은 아니다. 그놈들은 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그 건물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피를 빨아먹은 괴물들이다. 천벌을 받았어도 할 말은 없겠지. 네가 뱀파이어로서의 본능을 보여줬던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너와 함께 한 오랜 세월동안 나는 그러한 모습을 꽤 많이 보았고, 이제 와서 너를 탓하고 실망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만 이렇게 혼란스러운 이유는 있다. 그 아수라장을 누비며 놈들을 해치우던 너와 시선이 맞닿았던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너와 나는 다르다.

자라난 환경도, 나이도, 종족도 정말이지 다르다.


단 한 번도 너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고백을 받아주기 귀찮다거나 어떻게 대답해야 서로 계속 잘 지낼까, 이런 생각은 해 봤어도 종족이 다르다고 느낀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뱀파이어의 흡혈 본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들었다. 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아마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본능대로 싸우는 너를 본 것이 정말이지 오래 전이라서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너의 모습을 보고 새삼 깨달았다. 평소에는 맹한 녀석이지만 너도 뱀파이어라는 걸. 나는 아니지만, 세간에서는 너라는 존재를 괴물로 생각할 것이라는 것도.


이제껏 전혀 그런 기색을 느낄 수조차 없었던 건 네가 숨겼기 때문이겠지. 새삼 네가 나와 함께 있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알 것만 같아서,

비밀스런 무언가를 훔쳐본 기분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는 뱀파이어고, 나는 인간.

유치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말이 너와 내 관계의 핵심이었다.

나는 어째야 하는 걸까.




*



“서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뭐가.”



살짝 째려보자 나가 녀석이 흠칫 몸을 움츠린다. 그리고는 울먹거리며 말하는 목소리가 겁에 질린 듯하다. 스푼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능력자인 녀석이 왜 저렇게 겁은 많은 건지.



“아, 아니, 그냥….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일이 징글징글하게 많아서 잠을 못 잤을 뿐이다.”

“언니 괜찮아?”



저를 걱정하는 혜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동생이라고, 언니 걱정해주는 건 너뿐이구나. 사실 일 때문에 잠을 못 잔 건 아니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좋은 게 좋은 거지.



“어? 나가군. 여기 있었네요!”



들리는 목소리에 순간 몸을 흠칫거렸다. 녀석이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마치 시한부 선고마냥 쿵쿵 울린다.



“아, 난 이만 간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그 자리를 떴다. 복도를 달리듯 걸어가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가지치기하듯 쳐냈다. 일은 많이 줄었지만 저는 여전히 잘 수가 없었다. 고민거리가 하나 더 늘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과의 관계.


꽤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인생서 이렇게 머리를 써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제게 단순한 서장과 비서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는 녀석에게 슬슬 답을 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명확하게 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녀석은 뱀파이어다. 그리고 저는 인간. 인간은 뱀파이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고, 대부분의 뱀파이어에게 인간은 식량일 뿐이다. 어느 사회에 가든 뱀파이어와 인간이 어울리는 걸 좋게 보는 놈들은 없을 테고, 그게 친구 이상의 관계라면 더 그러하겠지.


아마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저는 귀찮은 일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지금 스푼에서만도 골치아픈 일들이 산더미인데, 굳이 거기에 고민거리를 더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걸 감수하면서도 함께 있고 싶을 만큼, 제게 녀석이 소중한 걸까?


이 질문에 결론을 짓지 못하는 이상,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을 뻗을 수도, 녀석을 쳐낼 수도.




=



“언니랑 무슨 일 있었어?”



혜나의 질문에 귀능은 그저 웃었다.



“에이, 저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어요?”

“거짓말. 그렇기엔 언니가 너무 대놓고 피하는걸?”

“혜나 양 눈에도 티가 나나 보네요.”

“당연하지.”



어깨를 으쓱하는 조그만 소녀를 내려다보던 귀능이 눈을 반달로 접으며 웃었다. 평소처럼.



“그거,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뭘?”

“서장님이 절 피하시는 거, 제가 알고 있다는 거요.”

“뭐, 상관은 없는데….”

“감사합니다.”

“정말, 별 일 아닌 거지?”



걱정스레 말하는 혜나에게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어주었다.



“네, 그럼요.”



그 속은 그렇지 않을 지라도.



*



“안녕?”



태평하게 인사하는 백모래를 향해 다나가 주먹을 날렸다. 어이쿠, 소리를 내며 피하는 그를 향해 다시 발차기가 날아왔다. 그조차 사뿐히 피하는 녀석을 노려보던 다나가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이를 으득 갈았다.



“할 말이 그것뿐이냐?”

“하하, 다나는 역시 난폭해.”

“넌 너무 깝죽대고!”



다시 주먹을 날리자 하하 웃으면서도 다 피하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다. 노리기는 쉬웠다. 하얀 옷으로 온몸을 돌돌 말고 있는 녀석은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보통 뱀파이어는 검은 옷차림을 선호한다. 어둠에 몸을 숨기고 사냥하는 종족인지라 옷이 밝으면 표적이 되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런 관습으로 볼 때 녀석의 옷차림은 꽤나 이단적이었다.


그 특이한 특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나타난 나이프는 평소보다 끈질겼다. 저와 백모래를 제외한 나머지 녀석들은 서로 엉켜서 치고박고 싸우는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단은 녀석에 집중했다. 저는 이 눈앞의 쥐새끼를 잡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요리조리 피하는 놈을 잡는 것에 슬슬 열이 뻗치고 있었지만,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오르카 녀석이 제게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봤자 칼이 먼저 우그러질 테니까.



“서장님, 위험해요!”



나는 괜찮은데.

너는 왜 내 앞을 막아선 거지. 왜, 어째서.

하얀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어간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



겁 없이 맨몸으로 나를 막아선 너의 어깨죽지에 칼이 박혔다. 뿜어져나온 피가 옷을 얼룩지고, 머리카락 끝을 물들이면서, 내 얼굴에도 몇 방울이 튀었다. 그럼에도 너는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더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슬로우 모션처럼 그 모든 게 천천히 눈앞에 재생되었다. 비명소리가 들리다가도 아스라이 흩어진다. 귓가가 웅웅 울려왔다. 아, 어지럽다. 눈앞이 흐릿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화조차 나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일까.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쓰러진 녀석을 보고서부터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올려찼다. 왜 싸우는지도 잊어버렸다. 그냥 모든 걸 부수고 싶었다.


악몽이라면 이쯤에서 깨어날 텐데.



“서장님, 서장님! 다 끝났어요, 정신 차리세요!”



저를 부르는 나가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나이프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저는 애꿎은 벽에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저 멀리 누워있는 녀석이 보였다. 터벅터벅 걸어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옮기는 발걸음에 오늘따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굽혀 쓰러져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코 밑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대자, 숨소리가 손에 묻어났다. 긴장이 턱 풀렸다. 다행이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거 같아요.”

“…그러냐.”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녀석의 하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려주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손의 떨림을 들키지 않게 조심히. 제 손길에 움찔거리던 녀석이 서서히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가 사람들을 빙그르 둘러보더니 마지막으로 저를 향한다. 뭐라고 말할까 망설이고 있던 차, 녀석이 입을 열었다.



“오우, 이거 생각보다 꽤 아프네요.”

“….”

“왜 다들 죽을상을 하고 있어요? 나 안 죽었는데?”



죽다 살아난 사람치고는 굉장히 명랑한 목소리였다. 어깨에 칼빵을 맞아놓고 할 말이 고작 저것뿐인가. 엄숙하던 분위기를 한 방에 깨고는 다나를 올려다보던 귀능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장님.



“제발 째진 눈 하지 마시라니까요. 가뜩이나 인상이 무서운데 여기서 더 무서워지면 진짜 조폭으로 오인받아요?”



다나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부들거림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를 아는 스푼 사원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다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컥, 으아악!”



배에 주먹을 얻어맞은 귀능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기절. 때리고도 더 때리지 못해 한이라는 얼굴로 손을 탁탁 털던 다나가 쌈박하게 명령했다.



“이놈을 병원으로 데려가.”



*



그렇게 명치를 얻어맞고 기절한 귀능은 무사히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뱀파이어 중에서도 순혈이라 그런지 회복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아니, 빠르다 못해서 거의 괴물 수준이었다. 결코 얕지 않던 상처가 며칠 만에 아물었다는 진료 결과에는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리고 다나는, 한 닷새는 지나서야 그의 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침대에 앉아 무료함에 하품을 하고 있던 귀능이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어, 서장님!”

“….”

“이제야 오신 거예요?”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정말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쌩쌩했다. 이미 붕대를 풀었는지 병원복 사이로 드러난 어깨에는 흉터조차 거의 남지 않았다. 자신한 이유는 있었던 모양이다. 그 상처가 닷새만에 거의 흔적조차 남지 않다니.



“…상처는.”

“아, 괜찮아요. 이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붕붕 휘둘러댄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가 다시 열이 받았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있었다. 다나는 느지막히 말을 뱉었다.



“야.”

“네?”

“거기서, 왜 뛰어들었냐?”

“에? 아, 그거요?”



저는 이래 봬도 금강불괴의 소유자다. 제게 물리적으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자는 스푼 내에는 물론 나이프에도 존재치 않았다. 금강불괴는 그 정도로 무적인 특기였다. 물론 같은 체질을 가진 유다 녀석과는 붙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걸 잘 아는 게 바로 이 녀석일 터인데도. 녀석은 제 앞을 가로막았다.

어째서?



“서장님이 다칠 뻔했잖아요.”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하는 녀석의 말을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나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저걸 변명이라고 하는 걸까? 놀리는 건가 싶어 다시 한 번 명치를 때려줘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노려보는 제 눈초리에도 녀석은 싱글벙글이었다. 산뜻하게 웃는 얼굴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 능력이 뭐지?”

“뭘 새삼스레 물어보세요. 금강불괴죠.”

“너랑 나 둘 중에 맞으면 누가 더 덜 아프겠냐?”

“서장님이요.”



망설임 없이 나오는 대답들에 이젠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 알면서.



“그걸 아는 놈이 왜 거기서 달려들어?!”

“서장님이 인간이니까요.”

“….”

“혹시 모르잖아요. 화나시면 금강불괴고 뭐고 다 소용없는데. 아무래도 그냥 제가 맞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화가 나면 금강불괴가 소용없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극히 드문 경우로, 화를 조절하는 것쯤은 어느 정도 가능했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문득 알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녀석이 제 본성을 드러냈던 때, 제가 답지 않게 바닥에 잠시 고꾸라졌던 때. 그 모습은 흡사 금강불괴가 작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지도.


녀석은 그걸 신경 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종족 특성상 회복력 하난 끝내주잖아요, 제가.”

“….”

“죄송해요. 사실 서장님이 다치는 게 보기 싫었어요. 그뿐이에요.”



그래도 더 이상 말이 없는 다나의 모습이 불안했는지 우물쭈물하던 귀능이 대뜸 다시 말을 꺼냈다.



“그리고, 제가 쓰러져도 서장님이라면 다 해치우실 거라고 믿었다구요.”

“….”

“역시 생각대로 정말 다 해치우신 거 보고 감탄했어요! 이야 역시 우리 서장님!”



엄지를 척 세우며 발랄하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급속도로 냉각되는 분위기를 느끼고 그는 재빨리 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아무래도 그때처럼 한 대 맞을까봐 겁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주먹이 날아오지 않았다. 뭐지? 싶어 살짝 팔을 내리자마자 그는 얼굴을 얻어맞고 뒤로 풀썩 넘어졌다. 침대인데다 다나가 평소보다 힘을 얕게 줬는지 매트릭스가 조금 파이는 수준에서 그쳤다. 귀능이 일어나서는 항의했다.



“아야야야야…. 서장님 치사해요! 이런 게 어딨어!”

“….”

“반칙! 반칙!”



재잘거리는 귀능의 목소리에도 영 말이 없던 다나가 갑자기 자리에서 불쑥 일어났다. 순간 움찔거리는 귀능을 돌아보는 눈빛이 살벌했다. 웃던 얼굴 그대로 굳어버린 그를 돌아보던 그녀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다시 흠칫 몸을 굳혔다. 곤란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다, 다음 순간 표정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마에 힘줄이 돋아 있는 걸 보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가 짜증스레 말했다.



“이런 걸 걱정한 내가 미쳤지. 간다.”

“…옙.”



의자에서 일어난 다나가 뚜벅뚜벅 걸어 문 앞으로 다가섰다. 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우뚝 몸을 멈췄다. 아, 맞다. 무언가 잊었다는 듯이 그녀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신 다치지 마라.”

“….”

“날 위해서라며 덤벼들다가 다치는, 그런 헛짓꺼리를 한번만 더 했다간 스푼 건물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하게 될 테니까.”

“…헉.”



헛숨을 들이키는 귀능을 보던 다나가 짜증스레 말했다.



“지금부터 다 네라고만 대답해. 첫째, 난 몸을 함부로 굴리는 놈은 절대 사양이다.”

“네.”

“둘째. 한 번 했던 얘기를 반복하게 만드는 놈도 싫다. 귀찮으니까.”

“딱히 반복해서 말해주시진 않….”

“닥쳐.”

“넵.”



깝죽대려고 하던 귀능이 다나의 살벌한 한 마디에 금세 깨갱했다. 카리스마가 넘치다 못해 압력에 눌려 사망하시겠다.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면서.


다나가 다시 말했다.



“솔직히 넌 좀 귀찮다.”

“…네.”



귀능은 애써 웃었다. 귀찮다는 그 말에 심장이 철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다나의 목소리는 험악한 기색은 가셨지만 그만큼 진지했다. 그걸 잘 알았기에 그는 목이 턱 하니 막혀왔다. 답답했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입을 열었다간, 지금 저를 짓누르는 감정의 덩어리들이 제 의지를 배반하고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꼬맹이 때랑 정말이지 달라진 게 없냐. 손이 많이 가는 것도 그렇지만.”

“…죄송해요.”

“네라고만 하라고 했지.”

“네.”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귀능은 제 고개를 풀썩 떨어뜨렸다. 말을 할 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는 것만도 용한 일이었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는데…. 귀찮을 것도 잘 아는데 말이지.”

“….”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다나는 제 머리를 세차게 헝크러뜨렸다. 그러더니 표정이 쉭쉭 바뀌었다. 끙끙 고민하는 표정이다가도, 입을 우물거리기도 했으며, 그러더니 나중에는 체념했는지 한풀 꺾인 얼굴로 힘없이 답했다. 물론 귀능은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보지 못했다. 바닥을 보고 있었으니까.



“네놈에 한해서는 귀찮음을 감수하기로 했으니까, 영광으로 알아라.”

“네, 알겠습…. 네?!”

“이상. 난 간다.”



귀능이 말릴 새도 없이 다나는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사라진 그 자리를 귀능은 멍하니 보고 있었다. 손을 들어 몇 번 얼굴을 매만지더니 볼을 꼬집는다. 아얏. 느껴지는 아픔에 꿈이 아니라는 걸 체감했다. 벙쪄있던 얼굴에 순식간에 활기가 돌았다. 잠시 스쳐가듯 봤지만 분명 얼굴이 조금이나마 붉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걸 대답이라고 봐도, 좋은 거려나.




=



“…내가 미쳤지.”



환호성이 들려오는 병실을 뒤로 한 채, 다나는 병실 문 밖 바로 옆에 있는 벽에 기대서 있었다. 어두운 병실 복도에 홀로 덩그러니 서서, 그녀는 방금 전에 제가 했던 말을 곱씹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충분한 대답이 된 건가. 한 손으로 제 눈 밑을 가린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져 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봤다면 아마 꿈이라고 생각했겠지. 믿기지 않는 장면일 테니까.


다나가 피식 웃었다. 뭐,



“어쩔 수 없는 거려나.”



생각보다 내게 네가 중요한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달았으니까.


귀찮은 건 싫지만, 귀찮아도 곁에 두고 싶을 정도로.

옆에 네가 없는 걸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너란 녀석을, 마음에 둔 것 같아서.








* 후일담



“어이.”



다나의 눈썹이 조용히 씰룩였다. 소파에 앉아 손에 든 신문을 차분히 읽어내려가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다나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 무릎 위로 세운 두 손등 위에 제 얼굴을 기대고서, 귀능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뀨?”



그리 표정이 좋아보이지 않는 다나와는 달리 대답하는 목소리가 참으로 해맑았다. 그에 더 짜증이 났는지 그녀가 버럭 성질을 냈다.



“지금 뭐하자는 거냐?”

“보시다시피 서장님을 관찰하는 중인데요.”

“…날 관찰해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러지?”

“약점 탐구? 서장님을 화나게 만드는 법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모….”



말을 잇기도 전에 주먹이 그의 머리로 날아왔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아픈 머리를 부여잡은 귀능을 무시하고서 다나는 다시 신문을 읽었다. 얼마 전에 대대적으로 벌인 소탕 작전이 기사로 떴다. 궤멸 수준이 꽤 컸으니 이 정도면 한동안은 설치지 못하겠지. 당분간은 윗선들의 잔소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후련했다.


다시 신문 삼매경에 빠져들려는 찰나, 다나를 잡아끈 건 부드럽고 차분한 저음의 목소리였다.



“뻥이고요, 사실 봐도봐도 보고 싶어서 그래요.”



힐끔 시선을 돌려 녀석을 쳐다보았다. 목소리도 표정도, 평소의 발랄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웃음기가 싹 걷힌 얼굴이 꽤나 낯설어서, 저도 모르게 툭 말을 내뱉었다.



“…그 대사 정말 오글거리는 거 알지?”

“에에, 그런가요?!”



나름 설레라고 한 말인데. 볼을 뿌우 부풀리며 투덜거리는 모습이 다시 평소와 같아서, 다나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방금 전의 녀석이 어쩐지 녀석답지 않아서. 깝죽댈 때와는 달리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가 듣기에 좋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묘하게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런, 나 지금 무슨 생각한 거야.


헛생각이다. 왠지 목이 말라오는 기분에, 다나는 제 앞에 놓여 있던 커피잔을 집어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 와중에 귀능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근데, 서장님.”

“뭐.”

“저희,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푸웁…!”



마시고 있던 커피를 내뿜을 뻔했다.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거리던 다나가 근처에 있던 티슈를 뽑아 제 입가를 닦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하는 거냐.”

“하지만, 분명 그러셨잖아요. 귀찮은 건 질색이지만 저에 한에서는 귀찮음을 감수하겠다고. 그건 즉 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겠다는 뜻 아니….”



떠벌떠벌 떠들어대는 녀석의 입을 손으로 부리나케 틀어막았다. 분명 그렇게 말한 건 저였고,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만큼 녀석이 둔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았다. 각오하고 뱉은 말이니만큼 무를 생각은 없었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녀석과 함께한 십몇 년은 그렇게 쉽게 뒤집어질 것이 아니었다.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뚫어져라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진지하게 저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에 할짝, 오돌도돌한 무언가가 손바닥에 닿았다.


손바닥을 쓸어올리는 물컹한 감촉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황급히 손을 떼려고 했지만 강한 힘이 제 손을 붙잡았다. 분명 스푼에서 완력으로 저를 이길 상대는 없을 터인데, 꿈쩍않는 손을 잡아뺄 수가 없었다. 녀석이 입꼬리만 올려 씨익 웃었다.


순식간에 공기가 변했다.



“너, 뭐하는…!”



다나가 놀랄 틈도 없이, 귀능은 혀를 내어 뻗어있는 그녀의 손가락들 중 가운데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천천히 혀로 감아서 빨아올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하얀 송곳니가 드러났다. 말릴 틈도 없이, 따끔거리는 감촉과 함께 비릿한 혈향이 손끝을 따라 배어나왔다. 피가 스며나오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핥아올리는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황홀했다. 마치, 무척 맛있는 것을 맛보고 있는 것처럼.


느릿느릿 혀를 써가며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다나는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손가락서 느껴지는 감각은 낯설고 간지럽고, 그리고 무척 뜨거웠다. 화악 번지는 열기가 손끝을 타고 저를 덮쳐오는 것처럼 온 몸이 더웠다.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자꾸만 몽롱해졌다. 미지근한 물 속으로 점점 가라앉는 것처럼 평온하다. 몸에서 힘이 점점 빠지며 나른해졌다. 갑자기 왜 이러지. 약이라도 먹인 걸까. 하지만 제 몸은 오수의 마약조차 듣지 않는데. 그럼 대체 이건 뭘까. 흐릿해지는 눈동자를 애써 깜빡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저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제 눈앞에 있었다. 평소와는 달랐다. 살짝 접힌 눈웃음도 천천히 제 손을 감아올리는 손가락도, 그 무엇도 녀석에게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른하게 짓는 미소에 맥박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몽롱해지는 정신 중에도 생각했다. 뱀파이어들은 특유의 색기라는 걸 가지고 있다는데, 이게 바로 그건가? 저를 쳐다보던 녀석이 나른하게 미소를 짓는다. 어렸을 때부터 봤던 녀석인데, 지금은 무척이나 커 보였다. 이 녀석의 손이 이렇게 단단했던가. 흡사 남자인 것 같….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귀능은 세차게 뒤로 밀려났다. 소파가 넘어지며 그 위로 나가떨어진 그의 시선 끝에 살벌한 붉은 눈이 마주했다. 금방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다나의 눈초리도, 갑작스럽게 돌변한 이유도 귀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꽤 좋지 않았던가. 당황스러웠는지, 넘어진 그 자세 그대로 멍하니 올려다보는 그를 향해 다나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꺼져라, 당장.”

“엣, 아니. 그러니까….”

“맞고 꺼질래, 그냥 꺼질래?”

“그냥 나갈게요!”



후다닥 몸을 일으킨 귀능이 서장실 문을 열고 달음박질쳤다. 어느 정도 멀어지자, 쫓아오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그는 천천히 달리는 속도를 늦췄다. 가만히 숨을 몰아쉬면서 복도를 뛰어가던 그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반응했던 거 같은데…?”





귀능이 나가자마자 다나는 서장실 문을 조용히 닫았다. 문을 잠그고 넘어진 소파를 다시 세운 뒤, 그 위에 털썩 올라앉았다.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얼굴 대신,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죽었어.”



씩씩거리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두 사람 다, 서로 솔직해질 날은 언제나 올런지.




FIN.





* 후기



안녕하세요. 리네라고 합니다:)

배포본 안 내겠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이번이 네 번째 배포본이네요(…) 허허허허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트위터에서 푼 썰을 토대로 대충 구체화를 시켜 보았습니다. 뱀파이어 귀능다나!

지만 사실 뱀파이어적인 면이 하나도 안 나와서ㅋㅋㅋㅋ 그냥 본편물 같네요 제가 봐도(._, 사실 이게 회지였으면 좀 더 디테일이 가미되었을 거고 이것저것 추가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페이지로 봐서는 이게 한계입니다ㅠㅠ


웹툰온리전이라 뭐라도 내고 싶어서 고민하던 차, 친한 동생의 배려로 배포본을 내고 위탁까지 했네요 유프님 아리가또>_<

이영싫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캐붕이 있을까 우려되네요. 그 점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애초에 본진이 이 쪽이 아니라서요 ㅎㅎ; 물론 연성만 안할 뿐이지 이영싫은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다나가 참 잘생쁨하고 성격도 멋져서 볼 때마다 두근거립니다. 귀능이는 참 귀여운데 중요할 땐 상남자라서 좋아요 헤헷!


어... 사실 비하인드를 더 말하자면 이 썰이 사실 스케일이 좀 많이 큰 녀석이어서, 원래 설계대로 쓰면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중간 부분들을 많이 잘랐습니다. 참고로 중간중간 장면을 건너뛰는 게 보이실 텐데, 끊긴 그 사이사이의 텀이 생각보다 깁니다. 둘의 성격상(특히 다나) 썸을 좀 길게 탔을 거고 그 과정을 제대로 그렸어야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거죠bb(모두들: 웃기시네


마지막 후일담은 뱀파이어적인 면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적었습니다. 수위를 조절하는 것에 좀 많이 애먹었습니다(...) 손가락 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안 괜찮으면 곤란해요ㅠㅁㅠ


사실 이 썰은 귀능이랑 다나가 이어지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마음이 통하고도 서로 고민이라던가 갈등하는 부분이 많을 거고, 그 과정에서 둘 중 한쪽이 폭발해서 일이 꼬이고 그럴 거 같은데... 그리고 아마 둘 다 성장하겠죠 감정들이 ㅇㅇ 그려보고 싶으나 제게 지금 시간이 없으므로 언제 다시 손댈지는 모르겠습니다^_^(안할거라 확답은 안하겠습니다 이래놓고 또 재밌겠다 싶으면 할 저를 잘 알아서...(먼산)


귀다를 파시는 분들께서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셨기를 빕니다ㅠㅁㅠ


가져가주시고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귀능다나 행쇼하렴!^^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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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프가 어제 뱀파이어 au 귀다 얘기해서 문득 생각했는데 귀능이가 뱀파이어인데 얘네 집안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기에 그걸 경계한 뱀파이어들이 집안 멸족시켰다 해도 재밌겠다... 같은 뱀파이어지만 서로서로 알력다툼이 심해서 그걸로도 싸움이 나고 스푼의 주 업무는 헌터기도 하지만 그런 싸움들이 일어날때 일반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감시원이고,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가 있어서 온건의 경우는 비밀리에 스푼과도 협력하고 있어서. 귀능이네가 온건 쪽이었고 그래서 지원나갔던 다나가 귀능이를 구해서 키우게 되는(?) 귀능이는 뱀파이어지만 아버지 죽을 당시의 기억때문에 피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뱀파주제에 피만 보면 부들부들 떠는걸로. 근데 이상하게 서장님 곁에 있음 묘하게 안 떨리는...?


뱀파이어들은 사실 피를 어느 정도만 섭취해도 몇 달 정도는 안 마셔도 딱히 지장이 없고 사람의 음식도 어느 정도는 먹을수 있음. 그러나 아예 안 먹고 살 수는 없는지라 다나가 초반에 고생하겠지 기껏 구해놨더니 굶어죽을판이닠ㅋㅋㅋ


뱀파이어 세계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는건, 강경의 경우 왜 우리가 짜피 우리보다 하찮은 존재들을 위해 절제하고 사냐 난 내맘대로 살겠다 느낌이고 온건은 다른 종족이라도 서로간의 존중과 배려는 필요하다고 생각함. 그러나 종족에는 강경이 훨씬 많아서 온건파는 살짝 배척당하는 느낌...? 뱀파이어의 이념 자체랑 어긋나는건 사실이니까. 아무튼 나중에 썸을 타더라도 둘은 꽤나 고된 사랑을 하지 않을까. 어쩌다 귀능이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면 꽤나 괴물처럼 보일텐데 그걸 보고 다나가 매우 고민할 거 같다 평소엔 다나가 훨씬 세지만 어쩌다 귀능이가 빡돌면 진짜 어지간한 순혈 뱀파이어보다 세다는 걸로. 적들 다 죽이고 피범벅을 하고선 괜찮냐고 자길 보고 웃고 있는 귀능이를 보면서 다나는 물론 고맙긴 하지만 마음이 많이 착잡해질듯.


평소엔 맹한 녀석이라 잊고 있었는데 이 녀석도 뱀파이어고, 세간에서는 이런 녀석을 괴물이라 칭할 테니까. 그 때서야 다나는 생각보다 종족의 차이라는 게 굉장히 무거운 장애물이라는 걸 깨닫겠지. 그리고 귀능이와의 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거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고민은,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텐데 그래도 곁에 두고 싶을 만큼 이 녀석을 좋아하는가? 겠지. 귀능이는 귀능이대로 그날 이후 묘하게 자길 피하는 다나 모습에 대충 눈치는 채겠지만 티는 내지 않을거 같다.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 나이프가 한 번 깽판쳐주면 재밌겠다. 모래야 니가 악역한번 맡아줘야 할거같다... 아무튼 싸우다가 귀능이가 어쩌다가 쓰러지고 다나는 그걸 보면서 머릿속이 백지가 되지만 화가나면 능력이 사라지기에 아무 생각을 안하려고 하면서 일단 나이프를 쫓아보내긴 할듯. 뭐 그래서 귀능이 살펴보는데 이 미친놈은 중상 입고도 농담치면서 하하 웃는데 그제서야 방금 나려다 만 화까지 다 치솟아서 다나가 귀능이 한대 세게 때릴거같다 지못미 귀능아..(죽을뻔한 판다씨 


지원나온 나가 편에 본부로 귀능이 돌려보내고 다나는 뒷수습을 하면서 생각에 잠김. 며칠 후에 귀능이 입원한 곳으로 다나가 찾아옴. 괴물같은 회복력으로 거의 며칠만에 상처가 많이 아물었음. 다행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구는 귀능이랑 얘기를 하다가 다나가 말을 툭 던진다.



-야

-네

-거기서 왜 뛰어들었냐?

(다나 구하려다 중상입음)

-서장님이 다칠 뻔했잖아요.

그말에 다나는 어이가 없어질듯. 다시 질문.

-내 능력이 뭐지?

-금강불괴죠.

-너랑 나 둘 중에 맞으면 누가 더 덜 아프겠냐?

-서장님이요.


정말 다 즉답하는데 그래서 다나는 진짜 말이 안나올거같다


-그걸 아는놈이 왜 거기서 달려들어?!

-서장님이 인간이니까요.

-...

-혹시 모르잖아요. 화나시면 금강불괴고 뭐고 다 소용없는데. 아무래도 그냥 제가 맞는게 나을거 같았죠?

-...

-제가 쓰러져도 서장님이라면 다 해치우실 거라고 믿었어요.


그리고 정말 다 해치우셨잖아요. 이야 역시 우리 서장님! 그러면서 귀능이가 엄지 척 세울거같다 그리고 한대 맞을걸 예상하고 팔로 가리는데 예상외로 주먹이 안 날아와 놀라서 팔 내리는 순간 맞는 귀능이ㅋㅋㅋ 그리고 다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이마에 빠직마크 붙임.

- 이런 걸 걱정한 내가 미쳤지. 간다.

그러면서 나가려는데 나가기 전에 한 마디 덧붙임.

-다신 다치지 마라.

-...

-날 위해서라며 다치는 헛짓꺼리를 한번만 더 했다간 건물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하게 될 테니까.

-...헉

-지금부터 다 네라고만 대답해. 첫째, 난 몸을 함부로 하는 놈은 사양이다.

-네

-둘째. 한 번 했던 얘기를 반복하게 만드는 놈도 싫다. 귀찮으니까.

-딱히 반복해서 말해주시진 않...

-닥쳐.

-넵(깨갱)

-솔직히 넌 좀 귀찮다.

-...네

-정말 귀찮지만 네놈에 한해서는 귀찮음을 감수하기로 했다. 영광으로 알아라.

-네 알겠습....네?!!

-이상. 난 간다.


그리고 동시에 문닫고 나가버리는 다나를 붙잡지도 못하고 귀능이는 벙찌고 문닫고 복도에 서 있던 다나는 살짝 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살짝 가리고ㅇㅇ 그렇게 일단 고백아닌 고백을 한 다나의 말 이후로 애들은 꽁냥꽁냥 잘 살았겠죠? 대충 마무리ㅋㅋㅋ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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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패랑 홍옥이가 초콜릿 만들어요~!

※ 무지 짧습니다. 삼삼님 리퀘작 ㅇㅇ





[마기/無커플링] Valentine Day 






"으아!!"



콜록콜록, 훅 불어오는 까만 연기에 기침을 몰아쉬던 소녀의 손이 허공을 휘휘 내저었다. 긴 분홍빛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고, 화려한 앞치마를 입은 소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하얀 포대와 주걱, 초콜릿이 올려진 도마와 커다란 칼, 그리고 그 모든 게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주변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만드려고 했다는 것만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녀는 그저 말없이 냄비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미 형체를 잃고 참혹하게 변한 초콜릿의 형태에 들리지 않을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실패했네…."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 하라는 대로 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소녀는 속으로 온갖 불만을 곱씹으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초콜릿을 자르래서 잘랐을 뿐이고, 끓이래서 끓였을 뿐이다. 크림을 만들려면 거품을 내야 한대서 힘껏 저어줬더니 어느샌가 들고 있던 통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는 게 없었다.


난감해졌다. 이제 재료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창문 너머로 검푸르게 물든 하늘을 슬쩍 쳐다보았다. 곧 날이 밝을테고, 다들 일어나기 전에 일을 마치지 않으면 곤란하다. 얼굴에 묻은 크림의 잔해를 손으로 훑었다. 입에 넣으니 달콤한 맛이 난다. 씁쓸한 기분과는 다르게도.



"홍옥?"



흠칫하자마자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인물은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꽤나 뜻밖이기도 했다. 이 시간에 보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사람.



"호, 홍패?!"

"이 시간에, 왕실 주방에서 대체 뭘 하고…. 는 대충 짐작가네."



딱 보기에도 처참한 주방의 모습에 홍패는 혀를 끌끌 찼다. 홍옥의 목소리가 넓은 주방을 카랑카랑하니 울리고 지나갔다.



"시, 시끄러!! 너야말로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

"나야 수련하러 일어났지. 탄 냄새가 심하게 나길래 불이라도 났나 해서 와본 거라고."

"윽."

"대체 뭘 만드는 거야? 요리라곤 생전 해보지도 않았을 것 같은 공주님이."

"그게…."



성큼성큼 다가온 홍패가 도마 바로 옆에 있던 한지를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몇 자 읽더니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콜렛? 이건 또 뭐지."

"이번에, 타국 사절단이 가져온 증정품인데, 맛있었다구! 그…. 직접 만들어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행사도 있다고 했어!"

"그래서 만들고 있었던 거야?"

"뭐, 뭐!! 그럼 안 돼?!"



안 된다고 말하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이 홍옥이 제 얼굴을 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패는 말없이 한참 글자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곧바로,



"초콜릿이라는 게 이 까만 거야?"

"…어?"



주걱과 통, 냄비 안을 꼼꼼히 살펴보던 홍패가 제 눈살을 찌푸렸다. 읽고 있던 얇은 한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소녀를 향해 휘휘 흔들더니, 말한다. 야.



"제대로 읽긴 읽었어? 이거."

"에?"

"냄비에 저걸 끓일 때는 냄비에 그냥 끓이는 게 아니라, 접시에 담아서 주변에 물을 붓고 녹이는 거라고 되어 있잖아."

"뭐? 진짜?!"

"이 크림인가 뭐시기도 알 만하네. 그냥 막 저었지? 적당히 살살하랬지 누가 무식하게 막 휘두르래?!"



거침없는 타박에 홍옥은 울상을 짓긴 했지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열은 받지만 대꾸할 말이 없어서임이 분명했다. 그런 그녀를 내버려둔 채, 홍패를 창문 밖을 한 번 흘낏 건너보더니 주변을 주섬주섬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주위를 대충 정리하던 소년이 도마에 올려져 있던 칼을 집어들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걸 지켜보는 소녀에게 홍패가 간단히 말했다.



"얼마 안 남았네. 물이나 끓여봐."

"…?"



칼을 몇 번 휘두르더니, 홍패가 진지한 표정으로 도마 위에 있는 초콜릿을 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초스피드로 간다."




*



"여기, 받으세요!"

"자, 받아."

"뭐야, 내가 주는 걸 감히 사양하겠단 건 아니겠지?"



환하게 웃으며 작은 상자를 건네는 홍옥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성 안 사람들에게 초콜릿을 뿌리고 다니는 공주의 모습에 아마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으리라. 거무죽죽하니 이상하게 생겨먹은 속 안의 내용물은 둘째치고라도.


홍염이나 홍명은 그래도 다행히 사절단이 가져온 진상품들을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독살 위협으로 간주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 얼떨떨한지 손에 든 상자와 홍옥을 번갈아가며 눈짓하긴 했지만, 먹어보고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아 맛도 그럭저럭 합격선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알리바바는 대놓고 기겁했다. 생긴 것부터가 정상적인 요리는 아니니 저게 평범한 반응이기는 했다. 그러려니 한 홍패와 달리 홍옥은 마음이 좀 상했는지 버럭버럭 짜증을 냈다. 한바탕 말다툼이 벌어졌다. 뭐, 결국 먹어보고는 맛있다 말한 알리바바의 한 마디에 금방 기분이 풀리는 걸 봐서는, 홍옥도 아직 여린 소녀이긴 한 모양이었다.


좋아라 돌아다니는 홍옥의 뒤를 홍패는 계속 따라다녔다. 아무래도 오늘은 뭔가 따라다녀야만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정말 즐거워보여서 조금 약오르기도 했지만, 웃는 얼굴을 보니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기분이 좋으니 이거 참 문제였다. 새벽에 제가 홍옥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울상이 되어 있었을까.


대충 방법을 보고 다시 처음부터 재료들을 섞고 만들고 틀에 찍어내고, 그리고 주변을 정리하고 나니 동이 터오고 있었다. 비밀로 하고 싶었는지, 주방으로 다가오는 걸음소리를 듣자마자 녀석은 저를 비밀문으로 끌어냈다. 그러고는 좋다고 상자들에 저것들을 포장하더니 성 안에 뿌리고 다니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재료를 많이 가져왔던지 실패한 흔적이 상당했는데도 남은 재료만도 굉장히 많았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홍옥의 바구니에 남아 있던 상자들도 하나 둘 씩 사라지고, 바구니가 텅 비어버렸다.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야!"



슬슬 방으로 돌아가려는 걸까, 복도를 따라 앞장서가던 홍옥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홍패는 그녀의 세 걸음 차이나게 뒤를 따르고 있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무언가에 놀라면서도, 재빨리 잡아챈 홍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붙잡은 것은 제 손바닥만한 작은 상자였다. 붉은 비단으로 감싸진 상자의 자태가 노을빛과도 닮아 있었다.



"줄게, 가져가."

"뭐야? 이건."



홍패의 질문에 홍옥은 잠시 입을 딱 다물었다. 금방 얼굴이 빨개지더니, 툴툴거리며 답했다.



"…뭐긴 뭐야? 답례."

"뭐야, 만든 건 나인데?"

"재, 재료는! 내가 가져왔잖아! 포장도 내가 다 했고…."



찔리긴 찔리는지 점점 기어들어가는 홍옥의 대답에 홍패가 큭큭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에 더 창피한지 소녀가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시, 싫으면 관둬! 다시 내놓던가!!"

"누가 싫대?"

"…."

"다 주는데 나만 안 줘서, 더 있다간 삐질 뻔했다고. 잘 먹겠습니다."



또래 소년만치 피식거리며 웃던 홍패가 발걸음을 돌렸다. 정말 즐거운지 경쾌하게 스탭을 밟으며 복도를 걸어나가는 뒷모습을 홍옥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니, 사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다. 이번에 도와줘서 고맙다고, 너 아니었음 이렇게 완성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그래도 폼을 재려고 했는데. 뭔가 직접 주려고 하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들이 엉키고 섥혀 하나를 꺼내자면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해야만 할 판국이었다.


그 와중에 떠오른 것은, 제게 이 음식의 제조방법을 알려주었던 사절단의 마지막 전언이었다.



- 저희 나라에는 특별한 행사가 있습니다.

- 특별한 행사요?

-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담은 초콜렛을 전하는 날이죠.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좋고, 그런 사람이 없다면 주변의 친한 이들에게도 나눠주기도 한답니다.

- ….

-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요.



입을 열었다. 이미 가버리고 없는 소년의 뒷자락에, 소녀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Happy Valentine. 홍패."




FIN.






===


홍옥이는 요리 못할 거 같습니다(단호


근데 은근 홍패는 막 잘하지는 않아도 레시피 주면 잘 하지 않을까 해서요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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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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