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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넘어서-. 의 뒷 이야기.

※ 크롭이기 때문에 본편이 완성되면 삭제될 위험이 있습니다. 본편이 겁나 길거든요.




2. 언젠가 너와 만났을 그 거리에서.


WRITTEN BY. 리네




귀찮아.


강림도령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돋았다. 뒤를 흘끗 돌아보자, 아까부터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얼굴이 보인다. 꽤 어리다. 기껏해야 생전의 저와 비슷한 정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저를 놓치지도 않고 따라오는 걸 보니 꽤 질긴 녀석인 건 확실했다. 차사 상태의 저를 알아보는 것도 놀랍거늘, 갑자기 제게 달려들어 저를 알아보냐고 묻는 이상한 녀석. 귀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이런 녀석을 본 기억은 없었다.


이런 녀석을 만났었다면, 분명 기억이 났을 텐데.


그러더니 갑자기 또 말이 없다. 심각해 보이지만 그건 제가 알 바가 아니었기에 등을 돌렸다. 다시 일하러 인간 모습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던 중, 시선을 느꼈다. 뭐지 싶어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전 그 녀석이 있었다. 계속 따라오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대체 언제까지 쫓아올 셈이지?”

“뭐야, 신경쓰지 마.”

“신경이 쓰인다고!”



쫌생이 같으니. 투덜거리는 모양새가 꽤나 얄밉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들어올리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저랑 외양은 비슷하면서 하는 행동은 아직 어린애다, 어린애. 화를 내는 것도 우스울 정도로. 고개를 젓다가 남자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저러다가 지치면 제풀에 떨어져 나갈 터였다.


그런데 낮이 지나고 한밤중이 다 되도록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지만,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볼 때마다 늘 제 뒤에 있다. 사람이 많던 적던 꼭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심지어 일을 하러 차사 모습으로 날아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똑바로 쫓아온다. 저를 찾아서. 그리고는 다시 따라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위치를 아는 건지 이쯤되면 놀랄 지경이다.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아니, 귀신은 나인가.


그렇게 서너 번이 지나자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제 쪽이었다.



“어이, 너.”

“왜?”



태연스레 대답하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루종일 제 뒤를 따라다녔으니 피곤할 법도 하건만, 지친 기색도 없는지 쌩쌩한 얼굴이다.



“너, 평범한 인간이냐?”

“질문이 늦네.”



이제야 물어봐?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삐딱한 자세를 취한 소년이 영문 모를 소리만 내뱉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 설마 제가 차사라는 것도 알고 있을 걸까.



“귀신이라고 생각해?”

“….”

“인간이야. 귀신이 이렇게 멀쩡하게 바닥을 걸어다닐 리가 없잖아.”



그랬음 진작 날아서 쫓아갔지. 두 손을 들고 발로 바닥을 몇 번 차낸다. 흙먼지가 이는 걸 보니 확실히 인간은 인간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어떻게 날 볼 수 있지?”

“어렸을 때부터 볼 수 있었어. 딱히 원했던 건 아니었지만.”

“영력이 있는 건가?”

“자유자재로 사용도 가능해, 봐.”



들고 있던 손을 휘두르자 소년의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일었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은 마치 제 의지가 있는 것처럼 허공을 채우며 넘실거렸다. 손짓으로 바람을 제 맘대로 다루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 뿐일까, 느껴지는 영력이나 기운은 확실히 어지간한 무당들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범상치 않았다. 많아봐야 고등학생 정도밖에 안 될 법한 어린애가.



“내가 누군지….”

“알아. 차사잖아?”

“알면…!! 후우, 그래. 그거지. 그런데 그걸 알면서 나한테 다가오는 이유가 뭐냐? 인간이면서.”



척척 대답하던 소년의 입가가 일순 꽉 다물렸다. 그러더니 다시 웃는다.



“그냥, 심심해서?”

“가서 친구들이랑 놀기나 해라. 영혼 때려잡는걸 보는 게 뭐가 재밌다고.”

“왜, 나름 재밌어. 아저씨 구경하는 거.”

“아…! 야, 꼬맹아. 난 아저씨가 아니거든?”

“…아저씨한테 난 언제나 꼬마구나.”

“뭐라고 했지?”

“아니, 아무것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던 남자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순간 어두워진 낯빛, 살짝 떨리는 눈동자, 싱글거리던 얼굴에 처음으로 스치듯 보인 망설임까지. 하지만 곧 다시 사라졌기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잘못 봤겠지.



“그나저나 진짜 언제까지 따라다닐 거냐? 지금은 밤이라고, 착한 어린이는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꼬맹아.”

“나 갈 곳이 없는데.”

“뭐야, 가출했냐?”

“아니, 그건 아닌데.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어.”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걱정할 텐데.”

“그런 거 없어.”



뭐?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놀라는 강림도령과 달리 소년은 시종일관 덤덤했다. 제게서 시선을 빗낀 얼굴은 웃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지극히 있는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잔잔했다. 그러더니 다시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방금 전까지 잔물결조차 없단 눈동자에 감정이 일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하고 가벼운 것들이 아닌, 그보다 더 짙고 복잡하면서 한없이 내려앉은. 악한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쁘거나 슬픈 것 같지도 않았다. 눈은 영혼을 비추는 창이니만큼 표정은 숨길 수 있어도 눈빛을 숨기지는 못한다.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그래.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녀석은 저를 보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록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근본적인 감정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래서?”



제 머리를 긁적거리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뭐라고 할지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지만, 혹시나 싶어서. 빙긋 미소짓던 소년이 제 용건을 꺼내자, 강림도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난처하게 웃었다. 저거, 얼굴에 철판을 몇 개나 깔았을까.



“신세 좀 질게.”




- TO BE CONTINUE



====


크롭입니다. 완성은 시간이 나면 마저 할 예정이에요.


시간을 넘어서를 보셨으면 알겠지만 꼬강이는 과거로 왔습니다. 여기는 5년 전, 강림이가 꼬강이를 처음 만나기도 훨씬 전의 시간이에요.


완성하면 묶어서 마저 올리겠습니다ㅠㅠ

Posted by I.R.E
,

※ 예전에 썼던 거 옮겨 왔습니다.

※ 타임리프 3부작. 꼬강이 17세.





[투림] 시간을 넘어서-.


Written By. Rine








붓으로 먹을 칠하는 것처럼. 아직 초저녁인데도 어두컴컴하게 물든 하늘이 불길하였다. 차가운 무언가가 제 얼굴로 떨어졌다. 구름 사이로 하나둘씩 떨어지는 빗방울. 처음에는 그저 몇 초에 한 번 가끔씩 떨어지다, 점점 그 수가 많아지면서 양동이에 물을 들이붓듯 세차게 쏟아진다. 빗방울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고, 모여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재빨리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방이나 신문지를 올려쓰고 뛰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그저 머리를 손으로 가리고 죽어라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도 거세지는 빗줄기에 옷이 젖어가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재빠르게 발을 놀려 공원을 벗어났다. 그렇게 비를 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이에서도, 그저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나이는 중학생,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아이는 우산도 없이 그저 가만히, 빗줄기에 몸을 맡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옷이 흠뻑 젖어 뼛속까지 시려울 텐데도,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그저 멍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풀썩 고개를 꺾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무언가를 참아내던 아이가, 띄엄띄엄 말을 뱉어냈다.



"거짓말…."



아니야, 아니야! 방금 전까지 사라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던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가. 너무나도 큰 전투를 마치고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났지만 그는 이미 제 곁에 없었다. 많이 다쳤다는 말에 그러려니 하면서 넘겼다. 면회 사절이라는 말에 그렇게 아픈가 싶어, 다 나으면 약골이라고 놀려주리라 생각했는데. 계속 기다렸고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았다. 무소식은 희소식이라는 옛 속담과는 다르게 발끝까지 끼쳐오는 두려움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어디 있어요?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그와 사이가 안 좋던 사라조차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안타깝다는 듯이 저를 바라보는 바리 누나의 얼굴에 마음이 술렁거렸다. 왜 그런 표정을 하냐고, 하하 웃으면서 말해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일그러지는 제 표정을 눈치챘는지 사라가 입을 열더라. 꼬마, 잘 들어. 충격받지 말고. 그는….



"아니야…."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런 거였을까. 마음이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이제는 그보다 약간 높아진 키. 멱살을 잡혔음에도 가만히 눈을 감고만 있는 사라의 모습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만 같았다. 평소라면 제 몸에 손대지 말라고 떨쳐냈을 것인데.



"아니, 라고…!"



죽었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말단이고 바보라지만 무척이나 강하고 대단하고, 심지어는 팔이 없어져도 재생되잖아.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것처럼 굴었잖아. 언제나 저를 놀려먹으며 즐거워했으면서. 자신은 너보다는 훨씬 오래오래 살 거라면서 그렇게 웃으며 말했잖아. 지금 단체로 몰카라도 찍어? 그래, 이 정도면 많이 속아준 거니까 이제 슬슬 나와. 제발 나와줘. 허하게 중얼거리는 제 목소리를 듣던 누나가 제 앞으로 나서며 무언가를 건네주기 전까지는. 그래도 자신은 많이 이성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천 위에 올려져 있는 조각난 하얀색 나뭇조각.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게 그가 언제나 메고 다니던 장승 목걸이의 파편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도 잘 만지지 못하게 했었던, 그가 언제나 애지중지 차고 다니던 물건인데. 너에게 줘야만 할 것 같아서, 라는 누나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레 손으로 받아들었다. 천 위로 느껴지는 단단하고 가벼운 감촉에, 결국 저는 그 자리를 뛰쳐나오고만 말았다. 정처없이 터벅터벅 걷다가 이 공원까지 흘러들어왔다. 솔직히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그저, 마음이 허했다.



"왜, 왜…!"



나만 아니었더라도. 그러한 자책감이 추위마냥, 소년의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명계와 얽히고 그와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 그의 임무에도 같이 나가곤 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최근에 와서는 제법 영력을 조절할 수 있었기에, 이런 자신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들떴던 모양이다. 상급령 세 마리. 저가 하나를 맡고 그가 둘을 맡았다. 여러 마리를 해치우던 중 자신이 방심했고, 거대한 꼬리가 자신을 내리치려는 순간 그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간신히 다 없애기는 했지만, 마지막 녀석을 봉인하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그의 몰골은 꽤나 엉망이었다. 여러 군데를 뜯겨 있어, 보기만 해도 안 아플까 걱정될 정도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달랑달랑한 팔 하나를 들어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바보령. 흐릿한 의식 속에서 본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면.



"우욱…."



빗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어떤 소리라도 다 묻어버릴 것처럼 타닥타닥 내려와, 제 귀와 이성을 마비시킨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저를 감싸고만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게, 보이지 않게. 차가운 빗줄기에 섞여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리게 얼어붙은 제 몸에 아직도 이런 온기가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입을 손으로 막았다. 빗물에 섞여들어 잘 보이지 않았고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든 울음을 삼켜내려는 듯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러다가 주저앉았다. 바닥에 손을 짚고 마음껏 슬픔을 토해냈다. 아무도 보지 않아. 여긴 나 혼자고, 설령 본다고 해도 이 소나기가 모든 것을 가려줄 거야.


다행이다. 지금 비가 와서.



"왜, 내가 아니야."



다쳤어야 하는 건 나인데. 죽었어야 했던 것도 나였고.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고, 당신은 내 곁에 없는 거지? 난 왜 이렇게까지 아파하며, 여기 주저앉아 괴로워해야 하는 걸까. 이래 봤자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잘 아는데, 당신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걸 잘 아는데. 머리로는 알지만 거부하는 심장이 쇼크가 올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몸은 시린데 가슴은 뜨겁게 끓어올라서 죽을 것만 같았다. 토해내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가 목에 걸려, 앓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와 자신에게 죽음이란, 그 무게가 다르다. 자신은 죽으면 명계로 가면 끝이지만, 그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인데. 왜 날 구하고 당신이, 어째서. 어째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과 함께 커다란 소리가 몸을 강타했고, 소년은 정신을 잃었다.




* * *



하늘이 푸르렀다.

비가 갠 후라 그런지 주변에 물 웅덩이들이 고여 있었고 흙바닥은 축축했다. 잎사귀 위에는 물방울들이 구슬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소년이었다. 창백한 얼굴색이 혹여 죽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웅덩이에 놓여 있던 소년의 손가락이 순간 움찔했다. 똑, 똑.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함께, 소년의 눈이 떠졌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눈을 깜빡이던 소년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던 눈동자가 다시 선명해졌다.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놀라던 얼굴이 침울해졌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에는 힘없이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죽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게 나갔으니 다들 걱정하고 있으리라. 솔직히 아직도 기분이 풀린 건 아니었다. 죄책감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저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억지로 자기위로를 하며 소년은 휘적휘적 거리를 걸어갔다. 이상할 만치 뽀송뽀송한 옷에 약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리라 여겼다. 공원 밖으로 나서서 시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제 눈에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 주변에서 엷은 빛이 비치는 것을 보아, 유령이구나. 평소라면 귀찮아서라도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오늘따라 눈길이 간다. 말이나 걸어볼까, 싶어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벤치로 다가가는 인영에 걸음을 멈췄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할머니, 여기 머물러 계시면 위험하다구요."



할머니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사람. 전투 모드와는 달리 검은 망토를 두르고 상냥하게 말을 거는 남자는, 소년이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멈췄다고 생각한 눈물들이 눈가에 고이는 것을 느꼈다. 눈물샘이 다시 터졌는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손으로 하염없이 닦아내던 아이가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할머니를 보낸 후, 뒤를 돌아보던 남자를 와락 껴안았다.



"바보령, 역시 살아 있었구나!"



죽지 않았어. 살아 있었어! 너무나도 반가워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기뻐서인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몇 주만에 만나는 걸까,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가 싶은 마음이었다. 갑작스레 저를 껴안는 아이에 당황했는지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소년을 밀어냈다. 뭐지?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너, 내가 보이나?"

"…뭐?"

"인간에게는 내 모습이 보일 리가 없는데…. 넌 누구지?"



이제야 다시 만났다 싶었는데,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 할 말이 없어졌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정말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설마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말한 건, 저에 대한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던가? 아니야,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성격들이 아니다. 어쨌든 살아 있다. 그런데 나를 알아보지 못해. 왜지? 심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쳤다.



"나 모르겠어?! 강림이라고, 강림!"

"…? 강림?"



그 말을 듣자마자 제 어깨를 거칠게 붙잡는 손이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다그치는 그 목소리가 노기를 띠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표정도 살짝,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정말 날 모르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버벅이던 소년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포착했다. 바람결에 날아가던 포스터, 그 위에 선명하게 찍히는 글자들에 다시 표정이 변했다. 눈동자가 커지며 동공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어서. 눈을 들어 바로 앞에서 저를 추궁하는 얼굴을 위 아래로 살펴보았다. 푸른 색이 감도는 흑발, 무심한 얼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기 증거가 버젓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간절히 바래서 꿈으로라도 보는 걸까. 아니면 이건 정말로, 진짜.


현실인 거야?


*


그들의 주변으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전단지 하나가 바람에 휘날려 두둥실 떠오른다. 하늘하늘 춤추며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전단지의 양면으로 커다랗게 숫자가 쓰여 있었다. 3일 후에 개봉될 뮤지컬을 홍보하는 이 포스터에 적힌 날짜는,


2009년 8월 15일.


5년 전, 강림도령과 아이가 만나기도 훨씬 전의. 바로 그 시간.




- To be continued?




※ 꼬강이가 비맞은 날짜는 2014년 9월경, 둘이 처음 만났던 1화 배경을 2009년 9월로 잡았습니다.

Posted by I.R.E
,

[가람찬] 첫 만남

둥글레차 2014. 11. 29. 19:57


※ 가람찬인데 가람이 거의 안나옴주의 / BL임다. / 정말 짧습니다.




[가람찬] 첫 만남.



WRITTEN BY. 리네






햇빛 잘 드는 창가, 한 소년이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푸른색의 교복 마이를 입고 팔로 제 머리를 받친 채 잠든 얼굴위로 햇살이 내리비췄다. 수수해 보이지만 잘 뜯어보면 매력적인 얼굴 위를 붉은색 머리카락이 덮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다들 나가서 조용한 공간 속에 숨소리도 없이 잠든 모습은 마치 실제 상황이 아니라 그려진 그림 같기도 했다. 그 때, 문이 드르륵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곧바로 소년이 있는 책상 쪽으로 향해가던 그가 싱긋 웃었다.



"야, 주은찬!!"

"…."

"언제까지 쳐 잘꺼냐?! 빨리 일어나라?"



탕탕, 책상을 두들기는 손이 자못 사나웠다. 그 손의 주인은 다른 손으로 제 옅은 회색빛 머리카락을 연신 헤집으며, 짜증스럽게 책상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며 책상 위에 엎어져 있는 제 친구를 보며 그가 가늘게 인상을 썼다. 깨워도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꼴을 보니 줘패면 일어나려나. 유도를 비롯한 각종 운동들을 휩쓴 유단자인 만큼 폭력은 자제하는 편이었으나 지금은 급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 때, 누워 있던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시시 눈을 비볐다. 이리저리 뻗쳐 있던 붉은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애써 가라앉히며, 그는 하품을 했다.



"무슨 일이야, 빽건."



졸려 죽겠는데. 그렇게 말하며 은찬은 제 눈을 가늘게 떴다. 들고 있던 손을 살며시 내리며, 백건은 짤막히 용건만 대답했다.



"수학 노트 좀 빌려줘."

"딴 애한테 빌려, 왜 하필 나야?"

"나 친구 없거든."



당당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은찬은 손으로 제 얼굴을 짚었다. 친구 없는 게 무슨 자랑거리냐. 모처럼의 단잠을 방해한 이유가 저런 쓸데없는 용건이라니.



"창피하지도 않냐?"

"니가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잔말말고 당장 노트나 이리 내."



안 그러면 죽여버릴 듯이 형형히 안광을 빛내는 백건의 모습에 은찬은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무슨 동네 북이냐. 하지만 솔직히,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기도 귀찮은 관계로 슬며시 책상에서 노트를 꺼냈다. 주면 먹고 알아서 떨어지겠지. 빨리 보내고 마저 자는 게 나았다. 모처럼의 점심시간을 이런 식으로 버릴 바에야.


노트를 건네주었다. 물론 그 노트에 요 며칠 간 거의 필기를 하지 못했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자, 여깄어. 6교시 전에 가져와."

"땡큐."



노트를 받아들자 더 이상의 잔소리는 없었다. 재빨리 교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은찬은 혀를 쯧쯧 찼다. 저걸 친구라고. 이미 여러 번 겪고 있는 일이라 별 감흥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한숨을 쉬던 은찬이 다시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요새는 이상하게 너무 피곤했다. 자도 자도 끝없이 자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이래 봬도 몸 하나는 건강한 편이라 체력이 딸리는 적은 없었는데, 요즘은 쉬는시간 뿐 아니라 수업 시간에도 엎어질 정도로 그 사태가 심각해졌다. 밤에 분명 잠을 자고 있는데도, 마치 한 잠도 자지 못하는 것처럼 몸이 축축 늘어졌다. 이제 곧 시험인데 일났네. 피식 웃던 은찬의 의식이 수면 밑으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동시에, 그의 몸까지도.




*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와 창가를 지나쳐 커튼을 뒤흔들었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교실을 한 바퀴 쓸어버리고 복도로 흘러나갔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무엇도.




*



"…어라?"



새까만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간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찬은 제 눈앞에 나타난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자신은 방금 전까지 책상에 엎드려 그나마 주어진 점심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숲이었다. 그것도 정말이지 도시 주변에는 절대 없을 거 같은, 하늘을 가릴 듯이 울창한 나무들이 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러니 경악할 수밖에. 최소한 자신은 이 동네에 살면서 이런 숲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건 꿈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은찬이 제 몸을 훑어보았다. 일단 입고 있는 옷은 교복이 확실했다. 요 근래 피곤하다 싶었더니 드디어 이런 꿈도 꾸는구나. 하하 웃으며 뺨을 긁적거리다, 제 앞에 있는 나무로 다가갔다. 손을 뻗으니 까슬하면서도 맨질맨질한 촉감이 손끝에 묻어났다. 꽤 리얼하다, 생각한 순간 나무뿌리에 발이 걸렸다. 꽈당 넘어져 흙에 고개를 묻은 은찬이 신음소리를 흘렸다.



"아야야…." 



그러던 은찬이 순간 숨을 멈췄다. 아프다니. 꿈이라면 아플 리가 없을 텐데. 그러나 지금 그는 넘어진 제 얼굴이 무척 아팠으며, 입에 들어간 흙은 푸석푸석하고 텁텁했다. 일어서서 몸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골똘히 생각하다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은 그가 흙 한 움큼을 집어들어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촉감이나 냄새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꿈이 아니라면,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이야?!


납치라도 당한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의 귓가에 난데없이 무슨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귀를 기울였다. 작지만 선명한 이 소리는….



'말 울음소리?'



점점 다가오는 소리에 은찬은 절로 몸이 굳어졌다. 도망칠까? 아니야,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잖아. 나뭇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누군가가 예상대로 말을 타고 수풀 사이로 등장했다. 그리고 동시에, 은찬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백마를 탄 남자였다. 푸른빛이 감도는 긴 머리를 하늘을 향해 묶고, 화려한 옷을 차려 입은 귀공자. 아름다운 얼굴은 언뜻 보기엔 성별이 구분가지 않았지만 키나 골격을 보아서는 남자가 확실했다. 그가 은찬을 발견하더니 고삐를 세차게 잡아당겨, 그 자리에 멈춰섰다. 특이한 옷차림, 붉은색 머리카락. 마냥 놀라고 있는 은찬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적색의 눈동자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넌, 누구냐?"







끝/ㅅ/b



===


둥차 첫 BL연성을 가람찬으로 할지 몰랐네요 전 당연히 건찬으로 할 줄 알았는데 ㅋㅋㅋㅋ


배꼬님 가람왕 연성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짤막하게 연성해봤습니다:) 저는 차원이동이라는 소재를 매우 좋아해서 ㅋㅋㅋㅋ


제가 생각한 가람왕은 뭐랄까 평소에는 냉정하고 이지적인 왕인데 사생활로 들어가면 고집 세고 말 안들을 거 같은 그런...? 자기가 원하는 건 무조건 제 곁에 붙잡아놔야 되고 손에 넣지 못하는 건 없었으니까 꽤 거만할 거 같구요. 그래서 은찬이한테 집착해도 은찬이가 제 맘대로 안 되니까 더 사납게 굴고 그러면서도 초조해지고... 참새같은 이 녀석이 언젠가는 제 곁을 멋대로 떠나갈까봐.


반면 은찬이는 꽤 성실하고 우유부단하지만 중요할 때는 칼같을 거 같은 느낌? 건이를 다루는 걸 보면 알겠지만 귀찮아지는 걸 싫어하고 적당히 상대한테 맞춰주면서도 은근 상대 엿먹이기도 고단수... 그래서 가람이한테 따라주는 척 하면서 가람이를 많이 엿먹일듯. 가람이를 싫어하는 건 아닌데 가끔 그 집착이 숨이 막히고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우월감도 느끼고.


어쨌든 초반엔 많이 싸우겠죠. 처음에는 존대하던 은찬이가 참다참다 터져서 나중에 반말. 가람이는 넌 내것인데 왜 이리 제멋대로 구느냐고 하고 은찬이는 누가 니꺼냐고 당장 나한테서 손 떼라고 버럭버럭할듯 ㅋㅋㅋㅋㅋ 그러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은찬이가 휘두르게 되겠지 은근 사람 잘 꼬실 거 같단 말이죠 ㄷㄷ



제가 이 장르는 거의 소비러인 터라 이게 두 번째 연성이네요 ㅂㄷㅂㄷ


배꼬님께 바칩니다. 앞으로도 연성 기대할게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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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라] 사랑싸움







“둘이 싸웠어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사물함을 열던 손이 멈칫했다. 흑발에 쭉 째진 눈, 마치 여우같은 인상을 주는 남자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후배, 마나미 산가쿠(真波山岳)를 보며 아라키타 야스토모(荒北靖友)는 지긋이 인상을 썼다.



“하?”

“싸웠네, 싸웠어.”



매섭게 째려보는 눈초리가 무섭지도 않은지 마나미의 얼굴엔 겁먹은 기색 따윈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싸웠다고 단정짓는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마냥 아니라고만 하기에는 찔리는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괴상한 소리 지껄일 거면 당장 옷 갈아입고 꺼져라.”

“둘이 사귀죠?”

“….”

“아, 역시.”



순간 흠칫한 눈동자를 마나미는 놓치지 않았다. 저 얄미운 면상을 한 대 후려갈기고픈 충동을 애써 이겨내고, 아라키타는 묵묵히 옷을 갈아입었다. 머릿속은 빙글빙글 정신이 없었지만 말이다. 평소에는 나사 몇 개 풀려있는 놈이 왜 이럴 때만 날카롭기 그지없는 거냐고!


틈을 보인 제 자신을 저주하며 그는 사물함을 쾅 닫았다. 반박도 제대로 못 하는 건 지금 저 말들이 구구절절 틀린 구석 하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떻게 제 연애사를 이 자식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마나미는 시원스레 답을 내놓았다.



“신카이 선배가 요 근래 표정이 암울하거든요.”

“하? 그 돼지새끼가? 맨날 실실 쳐 웃는 거밖에 할 줄 모르잖아.”

“하긴 아라키타 선배 표정이 더 죽상이기는 하죠.”

“…죽는다 너.”



가뜩이나 심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성질 긁지 말라 이거다. 심상치 않은 선배의 표정에 마나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불편한 공기에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아라키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반면 마나미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라-? 신카이 선배?”

“역시 여기 있었구나, 마나미. 누가 널 찾아왔던데.”



신카이는 평소와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얼굴에서는 당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문 앞에 가만히 서서 여유롭게 미소짓는 얼굴이 꽤나 태평하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아라키타를 사이에 두고 그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 갔다.



“누가요? 설마 반장인가?”

“아니, 저번 그…. 소호쿠 쪽 안경 쓴 아이더라구.”

“정말이요?”

“그래.”



사카미치 군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나미는 환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로 변하는 제 눈빛을 숨기는 것이 참 그다웠다. 나가봐야겠다고 말하며 마나미는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는 아라키타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던 마나미가 툭 말을 던졌다. 물론 신카이한테.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방금 왔는데.”

“흐-음.”



알겠습니다. 그 말만을 남기고 마나미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남은 둘 사이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슬슬 정신이 들었는지 아니면 그와 말을 섞기 싫었는지, 따라 나가려던 아라키타의 앞에서 신카이는 팔을 뻗어 문을 쾅 닫아버렸다.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다가오는 그를 피해 아라키타는 몇 발자국 물러섰다.



“왜 그래? 야스토모.”

“오지 마, 돼지새꺄!!”



뒷걸음질치는 제 팔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려는 신카이를 짜증스레 밀어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그를 뿌리치려다 사물함에 몸을 부딪쳤다. 물러설 곳도 없고 이 와중에 얼굴은 더럽게 가깝다. 떨쳐내려고 주먹을 날렸지만 신카이도 만만찮았다. 많이 겪어봐서 그런지 몰라도 살짝 고개를 들어 피하더니 한 팔로 그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읏차.”

“이거 안 놔, 새꺄?!”



즐겁게 웃는 얼굴에 배알이 꼴렸다. 쿨한 얼굴을 해가지고는, 자신만 보면 바보같이 풀어지는 얼굴은 여전하다. 그게 좋냐 싫냐라고 묻는다면 확실히 싫지는 않다. 하지만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더 헤실하게 풀어지는 제 마음 때문이다. 다가오는 입술 사이에 손을 끼워 넣었다. 어이, 돼지새끼.



“치워, 나 아직 화 안 풀렸다?”

“왜 화가 났어?”

“….”

“벌써 3일째잖아. 내가 뭐 잘못했어?”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녀석을 순간 귀엽다고 생각한 저를 마구 내려치고 싶었다. 다 큰 저런 사내새끼가 어디가 귀엽다고,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것 같다. 아니, 그래도 눈빛을 보면 낑낑거리는 멍멍이 새끼 같아 보이기도 하….



“지랄도 병이라고!!”

“야, 야스토모?”

“짜증나, 당장 안 떨어져?!!”

“…싫어.”

“뭐?”



부루퉁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얼굴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 손을 뻗어 저를 꼭 껴안는다. 가뜩이나 체온이 높은 녀석이 껴안으니 더웠다. 등짝을 때려 내치려고 했지만, 녀석의 폼새가 마치 어리광치우는 멍멍이같아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동물에 약한 아라키타였다.



“안 때리네?”

“쳐맞고 싶냐?”

“아니아니, 맞을 거 각오했는데 조금 놀라서.”

“맞고 싶다 이거지?”



등짝을 시원하게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신카이의 표정이 꽤나 울상이었다. 그렇다고 진짜 때리냐는 듯이 쳐다보는 신카이의 눈빛을 아라키타는 여느 때와 같이 쌈박하게 무시했다. 하하, 사람 좋게 웃는 신카이의 얼굴을 보던 아라키타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팔자인가.



“야, 돼지새끼.”

“응?”

“…여자애들 적당히 떨궈내라.”



녀석이 토도 못지 않게 인기가 많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개인 팬클럽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니 말 다했지. 사실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초딩도 아니고. 하지만 말이다, 명색이 애인이란 놈이 제 앞에서 여자애들에게 선물을 받으며 희희낙락 웃고 있는 꼬라지는 봐줄 수가 없단 말이다. 아무렇지 않았던 광경에 열받을 정도로 변해버린 제 마음이 참으로 성가셨다. 치솟는 짜증에 그 자리에서 녀석을 끌고 나올까 고민했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랬다간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니까.



“나 걱정했어?”

“….”

“질투한 거지?”



그래, 바로 이렇게.


예상대로 활짝 웃으며 제게 달라붙는다. 기뻐 죽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 정말 바보같아, 웃으면서 그 얼굴을 꾸욱꾸욱 밀어냈다.



“야야, 많이 컸다? 이게 아주 기어오르네.”

“야스토모 참 귀엽다.”

“이게 맞을라고. 난 남자거든 등신아, 눈깔 삐었냐?”

“바람은 걱정하지마. 난 야스토모 아닌 사람한테는 관심 없는걸.”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

“야스토모, 좋아해.”



갑작스러운 고백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틈을 노리지 않고 입을 맞추는 녀석의 얼굴을 끔뻑끔뻑 바라보았다. 정말 기뻐보이는 얼굴이라 할 말이 없어졌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징글맞게 여전한 녀석이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만을 똑바로 쳐다보는 이 눈빛도. 속으로 픽 웃었다. 하긴, 이 녀석의 이런 표정에 아직도 이리 약해지는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아라키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


이거 사실 신아라+마나오노예요... 시간이 없어서 일단 1탄인 신아라부터 썼다는ㅠㅠㅠ


음음 사실 처음 적는 신아라니까 최대한 꽁냥꽁냥하게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ㄷㄷ


어째 본편 보기 전보다 본편 보고 나서 캐해석이 더 난해하네요;; 신카이가 생각보다 굉장히 침착하고 과묵한 캐릭터라 다루기 어렵네요;ㅅ;


에구에구. 2탄은 언제 시간나면 써야겠죠 마나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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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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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위가 좀 있습니다. 더 넣기에는 아무래도 공개적인 장소인지라 무리겠군요 하하(땀땀

※ 저는 겁페를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오로지 탐라의 스포와 엔하위키의 힘입니다. 혹여 캐붕이라면 죄송합니다;;




[토도마키] 너의 곁으로.


WRITTEN BY. Rine






매앰, 매앰…. 매미 우는 소리가 간혹 가다 들려온다. 여름이 어느 정도 지나가서 그런지, 쨍쨍 내리쬐던 햇빛의 열기가 많이 사그러들었다. 여름의 끝과 함께 지나간 인터하이. 저 멀리서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껴안는 후배들을 바라보던 마키시마 유스케(巻島 裕介)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혹여 저를 알아볼까 싶은 노파심에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모자 사이로 드리워진 녹빛 머리카락을 살며시 뒤로 넘겼다. 아아-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도 맑구나. 마치, 승리를 축하하는 것처럼.



“돌아왔구나.”



*



“오랜만이야, 마키짱!”



집에 오자마자 저를 찾는 손님이 있다고 했다. 영국에서 돌아온 게 바로 그제인데, 대체 누가? 싱글거리는 집사의 얼굴에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설마설마 했는데. 응접실에 앉아 제 집마냥 편안하게 손을 흔드는 건 검은 단발머리의 남자였다. 반갑긴 한데,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역시나 너인가. 토도 진파치(東堂 尽八). 제가 다니던 소호쿠 자전거부와 경쟁하던 하코네 자전거부의 동갑내기 클라이머. 포지션이 겹치는데다 나이도 같아서 자연스레 서로 경쟁하게 되었던, 자신의 둘도 없는 라이벌이자….


저의 연인.



“언제 봐도 마키짱네 집은 화려하네~.”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마키를 향해, 그가 살살 손을 내저었다. 누가 주인이고 손님인지. 선선히 다가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토도에게, 마키가 툭 내뱉었다.



“할 말이 있는거니.”

“돌아온 걸 환영해!”



칼같이 나오는 대답. 싱글거리며 웃는 토도의 모습에 마키도 따라 웃었다. 쿡쿡대며 웃는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건데도, 마치 며칠 전에 만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가고 있었다. 토도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돌아오면 저 말을 꼭 해주리라 다짐했었는데 기뻐해줘서 다행이다. 태연하게 웃고는 있지만, 제가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했는지 그는 모르겠지. 그가 없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물론 연락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전화통화를 가끔 하긴 했지만, 말수가 적은 마키의 성격상 통화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전화할 때마다 보고 싶다고 말하려다 매번 그만두었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외롭다고 말하면, 티는 안 내겠지만 분명 걱정하겠지.


오랜만에 본 마키는 조금 변하긴 했다. 외양상으로는. 런던은 안개의 도시라더니, 안 그래도 하얗던 얼굴이 더 하얘졌다.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그건 좀 걱정스러웠지만 그것 빼고는 예전과 같았다. 별 탈없이 돌아온 것 같아 다행이다 싶으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돌아온다는 특급 정보를 전달해준 집사님께 감사 인사를. 왠지 저희들 사이를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뭐 어때.



“그나저나 올해도, 소호쿠가 우승하지 않았니~.”

“아아- 뭐. 간발의 차로 역전당할 줄은 몰랐지. 아까웠어.”

“실수도 실력이지 않니.”

“잠깐. 오늘 대회 보러 갔었어, 마키짱? 나보다 먼저 후배들을 보러 갔단 말이야?”



토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모양이 평소와 같았다. 저를 먼저 찾지 않다니 섭섭하다, 왜 온다고 빨리 연락은 안 했냐, 그나저나 밥은 잘 챙겨먹는 거냐, 왜 이리 얼굴색이 더 새하얘졌냐, 등등. 표정을 보니 연락 때문에만 서운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오늘 대회. 정말 아깝게 졌으니까. 이미 졸업했다고는 하지만 저가 속했던 학교가 진 것을 분해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겠지. 그래서 오늘따라 더 떠드는지도. 좀 시끄럽지만. 떽떽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던 마키가 툭 내뱉었다.



“그래도, 내가 와서 좋은 거 아니었니?”



그 말과 함께 정적이 흘렀다. 뭐니? 그렇게 말하려던 마키를 토도가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당연하지. 그렇게 대답하던 토도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턱을 붙잡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살짝 벌어진 입 안으로 물컹한 혀가 들어와, 서로 엉켜간다. 구강으로 밀려드는 체향에 소름이 돋았다. 오랜만이다, 싶어서 기분 좋게 반응해주고 있었다. 녀석이 이상할 정도로 저를 몰아붙이기 전까지는. 입 안을 샅샅이 핥고 혀를 뽑으려는 듯 감아올리는 키스가 평소보다 무척 거칠었다. 그렇다고 심하게 난폭하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여유가 없어보인다고 해야 하나.


오랜만이라 그런지 아니면 자극이 강해서인지, 몸이 평상시보다 빨리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열이 오르는 제 몸을 깨달았는지, 키스하던 그가 제 다리 사이로 다리를 밀어넣어 비비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오는 자극에 자꾸만 이성이 날아가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녀석의 목에 감고 몸에 기댔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격해지는 키스에 숨 쉬기가 힘들 정도여서 적당히 하라고 몸을 쳐내는데도 꿈쩍도 않는다. 아주 단단히 날을 잡은 것처럼 제 욕심을 취하고 있다.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흘러내렸다.


내려가던 손이 허리를 쓸어내리자, 마키가 하아- 숨을 뱉어냈다. 어느 새 입술을 떠난 토도가 아래로 내려와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쪼옥 소리를 내며 살살 혀를 내어 핥자, 마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런 마키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는 토도의 눈이 반달을 그리며 웃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평소에는 엄마처럼 굴면서, 이럴 때만 남자의 얼굴을 하지 말아주겠니. 차마 뱉을 수 없는 말들을 목 안으로 내리삼켰다. 응접실에서 난데없이 진한 스킨십이라니. 평소라면 이미 내쳤을 테지만 이렇게 순순히 당해주는 건, 저항하지 못하는 건 저에게 너무나 다정한 녀석의 태도가 맘에 들어서다.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제발 가지 말라는 듯이 저를 꼭 붙잡는 팔이 좋아서.


점점 내려오던 손이 허리를 지나, 제 둔부를 움켜쥐었다. 다른 한 손은 셔츠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오면서 제 척추 위를 덧그리고 있었다. 점점 대담해지는 손길에 흠칫거리던 마키가, 토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살짝 힘을 주어 밀어내자, 방금 전과는 달리 순순히 물러난다. 불안한지 살짝 굳은 얼굴로 저를 바라본다. 싫었어? 그렇게 물어보는 토도를 바라보던 마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적어도 여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니.”

“그럼….



침대로 갈래? 속삭이는 목소리에 돌아온 대답은 하나.


네가 데려가주련.




아랑 언니 리퀘로 쓴 글!! 헤헤헷>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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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도 없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살짝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어느 샌가 다가온 백발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이게 무슨 무례냐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울고 있는 제 얼굴을 들키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남자는 떠나지 않았다. 조용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그녀는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어떻게 여기에."

"가는 곳이야 뻔하지."



아니, 그러니까 그쪽이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묻는 그녀에게 그는 쯧쯧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둔탱이가 그렇게 좋나? 이렇게 숨어서 울고 있을 만큼."

"…상관 마요."



제가 누굴 좋아하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가뜩이나 방금 전 일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데, 왜 자꾸 제 앞에서 얼쩡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헛웃음이 터졌다. 하긴 그 일도 이렇게 울고 있을 만큼 대단한 건 아니지. 정말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저 편전 안에서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 웃어주는 모습을 봤을 뿐이었다. 짓궂은 농이라도 당했는지, 당황하면서 쩔쩔매는 그의 얼굴이 꽤나 즐거운 듯이 웃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동작을 멈췄다. 자신을 발견했는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더 보기 싫어서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 보여주던 미소를 내게도 지어준다는 건 참으로 씁쓸하다.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니까.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어째서 이렇게, 구석에 몰래 숨어 울고 있는 걸까.



"대체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요."



지금 이 곳은 세성 편전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있는 잔잔한 호숫가였다. 편전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자신만의 장소. 가끔 제 위치가 버거울 때마다, 여러 가지 고민들로 힘들 때마다 언제나 여기로 쉬러 오고는 했다. 언제나 거의 몰래 빠져나왔기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제 피난처. 그런 곳을 어떻게 이 자가 아는 거지.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을까?


가달라고 온 몸에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데, 전혀 그럴 생각은 없는지 남자가 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졌다.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바리였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그쪽이 일어날 때까지?"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이쪽도 농담하는 거 아닌데."



말이 안 통한다. 설득을 포기하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난 후, 이번에는 사라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렇게 서럽나?"

"에…?"

"자기가 좋아하는 녀석이, 자신만을 바라봐주지 않는다는 건."



갑자기 왠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바리는 그의 말에 대꾸해주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문질러 닦으면서 살짝 고개를 들었다.



"뭐, 그렇죠."

"그러면 그런 상대를 찾으면 되잖아?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나요."

"고백도 하지 못할 거면서 이렇게 질질 짜는 것보다는, 차라리 포기하는 게 더 편할 텐데."



아픈 곳을 찔러댄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끔은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에, 속에 담아두었던 이 감정들을 오롯이 토해내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지금의 이 관계도 끝날지 모르니까. 말하지 못하는 연심에 혼자 울면서 괴로워하는 것도 힘들지만, 영영 그의 곁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게 더 무서운걸.


사라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악스럽게 그녀의 턱을 붙잡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장난 아닌 악력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얏, 아파요!"

"몰골이 참 끔찍하군. 아름답지 않아."



못볼 걸 봤다는 것처럼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그가 너무 얄미웠다. 아니 울면 당연히 화장도 지워지고 눈도 퉁퉁 붓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막말로 그가 울어도 자신이랑 같은 꼴이 될 터였다. 특히 눈 주위에 발라진 저 보랏빛 눈화장은 번지면 꽤나 처치곤란할 것 같았다.



"내가 알아서 하거든요? 그러니까 저리 가…."



말을 멈춘 건 결단코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제 입에 살짝 붙었다 떨어진 입술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해주듯, 닿기만 하고 떨어지는 부드러운 베이비 키스였다. 순간 무슨 일인지 몰라 어벙벙하다, 다음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깨닫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지금, 지금, 그러니까…!!



"표정 참 다양하게도 변하는군."

"다, 당신, 지금, 이게, 무…!!"

"왜 그리 놀라? 키스 처음 해보나?"



대답 대신 그녀는 귓볼까지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움츠려야만 했다. 사라도 눈치껏 깨달았는지 낭패라는 얼굴이었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걱서걱 밟히는 풀잎 소리를 배경 삼아 그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금은 보기 좀 그렇지만 말이야."

"…."

"그쪽, 평소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

"자신감을 가지는 게 어때. 그리고 가끔은 주위도 좀 둘러보고."



의미심장한 마지막 대사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게 무슨 소리지? 고개를 들고 살며시 뒤를 돌아보자 사라는 이미 한참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제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안 걸까, 귀신같이 뒤를 돌아본 사라가 손을 흔들었다. 내던지듯 툭 뱉은 마지막 대사에 바리의 얼굴이 다시 빨개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반은 창피하고, 반은 열받아서.



"잘 먹었습니다."





===



난 이렇게 풋풋하고 아련한 사라바리를 쓰려고 한 게 아닌데...


퇴폐적으로 쓰려다가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닫고 걍 편하게 썼습니다 ㅋㅋㅋㅋ 능력이 부족하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요'A'


짧은 조각글만을 연성하게 되는 건 생각보다 그리 유쾌하지 않군요 제길 ㅋㅋㅋㅋㅋㅋㅋ



간단히 설정 풀자면,


바리는 여전히 강림바라기고 사라가 그런 바리를 지켜보다가 관심이 좀 생겼다는 컨셉입니다. 아직 사라는 그녀에 대한 호감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거구요. 즉, 저 키스는 무의식. 아이구 불쌍한 우리 바리언니...ㄷㄷㄷ 고생 좀 할 팔자입니다.


원래는 좀 더 말싸움하다가 욱한 사라가 찐한 딮키스를 한다는 설정으로 가려고 했으나(그게 더 성격상 맞구요) 한시간밖에 여유가 없었던지라 이것만 썼습니다. 헤헤헤헤...>_<


Posted by I.R.E
,

※ 리야님 생일 축하드려요^ㅁ^




[투림] 생일상


Written by. 리네






아이의 하루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대개 6시. 세수를 하고 후다닥 밥을 먹은 후 잘 다려둔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전날 준비해둔 책가방을 열어 빼먹은 것이 없나 확인한 후, 한쪽 어깨에 맨다. 액자 너머로 끼워진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선다. 출발 시간은 대략 7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올라가게 된 중학교는 집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지라 되도록 빨리 가는 것이 시간상으로는 무리가 없으니까.


학교가 끝나고 나서는 집으로 돌아와 일을 나간다. 유감스럽게도 아이에게는 가족이 없는지라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여러 가지를 하지만, 특히 아이는 주로 영혼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가끔 저승으로 가야 하는데 그 순리를 어기고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있다. 그러한 존재들을 찾아 그들이 올바른 목적지로 찾아갈 수 있게 인도해주는 자들에게 넘기는 것이 아이의 역할이기도 하였다.


가끔 일이 없어 한가할 때는 게임이나 숙제를 하거나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가족은 이미 오래 전에 전부 잃었고 친구라 부를 만한 이도 없었다. 혼자라는 것에 이미 익숙해진 아이인지라 그렇게까지 외로움을 타지는 않았지만. 다만 가끔은, 쥐죽은 듯 조용한 집 안은 노닐고 있노라면 자그마한 가시가 박힌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따끔거리고는 하였다.


딱히 정해놓은 것도 아니었지만 마치 스케줄이 짜여진 것처럼 하루하루가 변화 없이 일정하게 굴러갔다. 사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았으니 저 이상 변화가 생기기는 어려웠으리라.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하기 짝이 없을 법도 하건만, 그래도 아이는 자신의 삶에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런 하루가 계속 반복되리라 생각했었다.


"…이게 뭐야?"


아이는 언제나처럼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제 방으로 올라가려던 중 문득 눈가에 살짝 스쳐가듯 지나간 장면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거실에 무언가가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무언가가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살짝 천을 들춘 아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뭐지?


갈색의 작은 앉은뱅이상 위에 여러 가지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흰 쌀밥은 물론이고 각종 나물들과 불고기, 그리고 초록색 미역이 얹어진 미역국까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홉뜬 채로 아이는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온 흔적은 없었다. 누가 온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럼 이 상은 대체 뭐지? 아이의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상상이 스쳐갔다.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닌가? 혹시 누가 몰래 우리 집에 세들어서 사나? 아니면 책 속에서나 나온다는 우렁각시가 현신한 건지도. 밥그릇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숟가락 젓가락에 눈길이 간 그 순간,


"어라, 너 벌써 왔냐?"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그가 서 있었다. 푸른색이 살짝 감도는 흑발에 새까만 눈동자,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꽤나 바보인 사람. 아니, 딱 보면 사람같지만 저래 봬도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것뿐 아니라 죽은 영혼들을 저승으로 인도해가는 고스트 메신저라는 존재이기도 했다.


"이게 뭔 짓이야? 상은 왜 차렸어, 그쪽은 어차피 안 먹어도 상관없잖아." 

"…머리를 좀 굴려라. 저걸 보고 떠오르는 게 없냐?"

"음…. 담당하는 영혼이 숨기라도 했어? 그래서 제사라도 지내게? 설마 나 먹으라고 차린 건 아닐 거 아냐?"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


에? 아이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이걸 저보고 먹으라고 차린 거라고? 의심어린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설마…."

"설마?"

"독이라도 탄 건 아니겠지. 나 오늘 죽을 날인가?"

"이게 진짜! 하여간 곱게 넘어가질 않아요. 꼬맹이가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 애면 애답게 챙겨주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조용히 수저를 드는 게 어때?"

"어이구, 애가 아니라서 미안하네요. 갑자기 왜 이래? 바보령이 날 챙겨줄 이유가 없잖아. 오늘 무슨 날이야?"


지극히 당연한 것을 되묻자, 남자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질세라 쳐다보았더니 남자가 갑자기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제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둔탁하게 밀려오는 아픔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손 한 번 더럽게 맵네. 인상을 쓰고 노려보자 남자는 쯧쯧 혀를 차며 제게 반문했다.


"넌 니 생일도 까먹고 사냐?"


생일? 아이는 한참을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며칠인가 싶어 조용히 속으로 날짜를 곱씹어보았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또래들과 달리 아이는 유독 기념일에 관심이 없는 편인지라, 사실 그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물론 그건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라는 이유가 크기도 하겠지만.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아이의 시선에 남자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민망한지 살짝 빨개진 얼굴로 흠흠 기침하다가, 그는 마저 대답했다.


"자기 생일도 까먹는 멍청이가 여기 있을 줄이야."

"…뭐, 고마워."

"고마우면 빨리 먹기나 해라. 힘들게 만든거니까 남기면 죽을 줄 알아."

"이거 바보령이 다 한 거야?"

"참내, 그럼 누가 했겠냐? 우렁각시라도 불러왔겠어?"


나물은 집에 있던 걸 꺼낸 건 맞지만 나머지는 남자가 한 게 맞긴 했다. 인터넷 열심히 뒤져가며 레시피를 찾아보고 실패할까봐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친 후 내놓은 음식들이라는 걸 아이는 아마 모를 테지. 묵묵히 자리에 앉아 순가락을 든 아이가 밥을 한 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반찬과 같이 입 안에 넣은 아이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을 만 하네."

"헹, 순순히 맛있다고 하는 게 어떠냐."

"열심히 했다니까 특별히 먹어는 주지."

"…넌 정말 얄미운 꼬맹이야."


새삼. 그렇게 대꾸하며 아이는 계속 밥을 먹었다. 꺼낸 지 얼마 안 됐는지 밥은 무척 따뜻하고 야들야들했다. 그걸 씹고 있자니 아이는 마음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치받아 오르는 감정에 목이 턱 막혀왔다. 억지로 무시하고 반찬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아, 그리고."

"…?"

"생…. 흠흠. 생일 축하한다, 어쨌든."

"…."

"…어?! 야, 너 왜 울어?!"


쑥스러운지 그 뒷말을 잇지 못하던 남자는 갑자기 눈물을 울컥 터트리는 아이에 기겁했다. 그렇게 맛이 없었나? 분명히 이미 자신이 간을 다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괜시리 불길해졌다. 있는 거라곤 자존심밖에 없는 이 꼬맹이가 왜 갑자기 이러는가 이 말이다. 어지간한 일로는 눈물 한 방울 안 보이는 독종이.


"어, 어이. 맛없으면 억지로 안 먹어도…."

"…고마워."

"뭐? 뭐라고 했어? 야, 일단 뚝 그치고 좀…!!"


아이의 목소리는 아주 작아서, 차마 남자의 귀에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쩔쩔매며 아이를 달랬지만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속 밥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생일 같은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잊고 살았는데. 기억해봤자 어차피 챙겨줄 사람도 없을 테고, 그런 걸 기억하고 살기에는 제 앞가림 하기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도 기억 못한 생일을 기억해준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기쁜 걸까.


너무 오래 악을 쓰고 살아온 탓일까, 제가 아직 어리다는 것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나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실, 생일이라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이런 기념일을 챙겨줄 만한 누군가가 제게도 생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벅차오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혼자인 게 괜찮을 리 없으니까.


혼자라는 사실을 감당하기 힘들 때가 아예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가끔씩 정말 세상에 저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지독할 만치 몰려오는 외로움을 감당하기 힘들어, 절로 손끝이 차가워지곤 했다. 끊임없이 괜찮다고 세뇌하면서 제 마음을 부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으니까. 쭉 혼자였고 사람과 어울리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막연한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눈물 젖은 눈으로 아이는 제 눈 앞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저를 걱정하는지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무척 기뻐서, 슬며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남자 몰래 살짝 웃으며, 아이는 생각했다.


오늘은 그래도 평소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하루인 것 같다고.



===


리야님 생일 축하드려요~!!

오늘 다행이 시간이 나서 짤막글!! 다른 분들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받아주셔요(수줍수줍

투림빵을 받고 싶으시다기에 적어 보았...(과연 투림인지는 의문입니다만 ㅎㄷㄷ


헤헤 행복한 생일 되세요^ㅁ^

Posted by I.R.E
,

※ 메이즈러너현대 AU. 음대 일상물입니당:)

※ 뱅님의 로그를 이은 작품이옵니다(--)(__)(--)(__)




"에, 그게…."


토마스는 지금 실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단 자신은 연습할 곳이 없었고 대학을 온종일 뒤졌음에도 자신에게 연습실을 빌려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마침 구원자라도 되는 것마냥 제 앞에 나타난 녀석이 자신을 초대하겠다고 한 건 좋았다. 그래, 물론 저를 놀리는 투가 다분했지만 설마 나쁜 의도는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따라온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끌고 다니다가 '글레이드'라고 쓰여진 나무문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따라오라는 듯이 들어가길래 쭈빗쭈빗 들어간 것도 좋다 이거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사람들이 갑자기 저를 붙잡고 의자에 앉히고 빤히 바라보는 것도, 그 중에서도 유난히 덩치 큰 동양인 녀석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벌써 한참이 지나도록 이 상태인 건 좀 심하지 않나. 동물원 우리에 갇혀 구경거리가 되는 듯한 기분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다는 걸 부디 알아줬으면 하는데 말이다.


불편한 마음에도 애써 태연을 가장하면서 토마스는 뉴트를 가만히 째려보았다. 제 앞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이 금발머리 녀석은 이런 저를 구해줄 생각도 없는지 그저 웃고만 있다. 제 쪽에서 말을 걸고 싶어도 왠지 모를 위압감에 입을 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생각이 끝났는지 토마스를 노려보던 동양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편입생이라고?"

"이,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듣자하니 연습실에서 다 쫓겨났다고 하던데, 그래서 여기로 흘러들어온 거야?"

"아니, 그게….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말끝을 흐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더욱 살벌해지는 남자의 눈빛에 토마스는 급하게 말을 뱉어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뉴트는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눈빛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 잘못 온 건가? 그 생각이 들락말락할 즈음에 갑자기 사람들이 와하하 웃기 시작했다. 배를 잡고 웃거나 입을 크게 벌리고 웃거나, 심지어는 제 앞에서 온갖 폼을 잡던 남자까지 큭큭거리며 웃는 모습에 토마스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졌다. 심각한 상황 아니었던가?


"야야, 불쌍하다 불쌍해. 그만 놀리자."


너무 웃어서 눈꼬리에 눈물이 살짝 맺힌 뉴트가 눈가를 닦아내며 남자에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남자가 웃으며 토마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는 좀 무서웠는데 이제 보니까 상당히 개구장이 같은 인상이었다. 뭐지 싶어 멀뚱멀뚱 바라보는 토마스에게 남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네?"

"미안. 간만에 신입이 들어온다니까 놀리고 싶어지길래, 그만. 어쨌든 잘 왔어. 보아하니 텃세 때문에 고생한 거 같은데, 편입생이라 모르겠지만 여기가 좀 쪼잔한 놈들이 많아서 말이야. 이래 봬도 우린 그런 건 없으니 안심해도 돼. 뉴트가 데려왔으니 설마 이상한 놈은 아니겠지."


조금만 더 정신이 있었다면 농담을 왜 그렇게 살벌하게 치냐고 물었을 지도 모른다. 남자의 손이 아직도 얼떨떨한지 쭈빗거리던 토마스의 손을 꼭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내 이름은 민호. 2학년 피아노과야. 네 이름은?"

"…토마스입니다. 2학년이고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그들이 인사하는 걸 보더니 다른 이들도 속속들이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 내 이름은 척이고 2학년이야. 현재 트럼펫 전공하고 있어!"

"어이, 3학년인 주제에 신입한테 약을 팔지 마! 나는 갤리고, 현재 클라리넷을 전공하고 있다. 학년은 이 녀석과 마찬가지로 3학년이야."


상당히 통통하고 체구가 작은 소년같은 남자의 뒤를 이어 왠지 관악기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척, 갤리…. 하나하나 열심히 외우고 있던 토마스의 어깨를 누군가 팡팡 때렸다. 아픔에 뒤를 돌아보자 덩치 큰 흑인이 뒤에 서 있었다. 키가 꽤 컸고 전체적으로 선해보이는 인상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내 이름은 알비. 지금 이 '글레이드' 팀의 리더이자 작곡가 겸 지휘자를 맡고 있지."


잘 부탁해. 눈을 찡긋거리며 토마스의 머리카락을 북북 쓰다듬던 남자, 알비가 뒤로 물러나 제 동료들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모여 있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토마스는 이 멤버들 모두가 외모도 국적도 전공도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성격들도 개성이 넘치는 것 같은데 그렇게 허물있어 보이지도 않고. 그러다가, 토마스는 문득 구석에 기대 있던 금발머리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봤을 때는 요정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요정은 장난끼도 많은 모양이었다. 자신을 향한 눈길에 뉴트는 벽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키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앉아 있는 토마스의 앞에 선 뉴트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까도 소개했지만 난 뉴트. 여기 헬퍼를 맡고 있고, 현재 첼로 전공 3학년이야."

"선배…. 였습니까?"

"어쩌다 보니.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뉴트의 입꼬리가 선선히 올라갔다. 토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뉴트의 얼굴이 해사했다. 내밀어진 손을 꼭 잡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글레이드에 온 걸 환영해."



*


연주를 할 때의 녀석들은 평소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첫째, 녀석들은 악보를 잘 보지 않는다. 보통 긴 곡들은 악보를 보고 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들은 악보보다는 상대의 눈을 본다. 서로에게 흘깃 눈길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음을 맞춰가는 것이다. 둘째, 잘 웃는다. 각 과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들의 모임이라는 명성답게 연주 하나에는 수많은 피드백과 다툼이 일어났다. 이게 낫다느니 저게 낫다느니, 올라가기 바로 직전까지 투닥거리면서도 막상 무대에서 연주를 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듯이 웃는 것이다. 마치 이 순간만으로도 행복해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그들은 연주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장난끼도 다분했다. 연주 솜씨도 훌륭하고 서로서로 호흡도 잘 맞는다. 팀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을 정도로. 하지만 연주를 하다가도 문득 장난끼가 드는지 한 명이 갑자기 템포를 바꾸기 시작할 때가 있다. 그러면 보통 어그러지기 십상인데 이 녀석들은 오히려 어디 해봐라라는 식으로 그 템포를 따라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다른 리듬을 섞는다. 그러면 이제 너도나도 자기 쪽으로 흐름을 끌어오기 위해 역량을 발휘하려고 한다. 조용한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 마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것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걸 끝낸 후 박수소리를 받는 얼굴들에는 환희가 차 있다. 그러고는 내려오면서 다음에는 내가 이길 거라느니 그런 소리들을 한다. 그런 그들의 유대가 토마스는 가끔 부러울 때가 있었다.


"뭐, 그거야 너보다는 오래 같이 지냈으니까 그렇지."


너도 꽤 빨리 적응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민호는 토마스의 등을 팍팍 쳤다. 팀 내에서 유일하게 같은 학년이다 보니 자연스레 토마스는 민호와 가장 빨리 친해졌다. 학년이 같다보니 가끔 이것저것 수업이 겹치기도 하고 가치관 면에서도 맞는 면이 많았다. 그래도 살짝 걱정하는 듯한 토마스의 얼굴에 민호는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쭉 폈다.


"야, 그렇게 따지면 나도 처음부터 막 친해진 건 아니야. 하물며 아직 들어온 지 두 달밖에 안 된 네 입장에서는 조금 거리감을 느껴도 어쩔 수 없지 뭐."

"그러려나."

"그래, 그리고 솔직히 친한 걸로만 친다면 리더랑 헬퍼가 가장 친할 걸? 두 사람이 지금의 글레이드 팀을 만든 장본인이니까."


지금의 글레이드를 만들고 계획을 짠 건 알비, 과를 돌면서 단원들을 모아온 건 뉴트라고 들었다. 어쩌면 저렇게 능력 있는 녀석들만 골라오는지 모르겠다고 민호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팀원들 하나하나가 꽤나 성격이 드센데, 저 자존심 센 녀석들을 정말 수월하게 팀으로 끌어들인단 말이야. 가끔 신기해."

"넌 어떻게 들어왔어?"

"역시나 스카웃. 솔직히 엮일 일도 전혀 없는 사람이라 나도 이름이나 얼굴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피아노 치는 걸 듣더니 자기 팀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하더라.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었지."

"용케 수락했네."

"왠지 저 사람은 뭐랄까, 묘하게 거절할 수가 없잖아."


늘 웃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박력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토마스도 그에 공감했다. 실제로 첫 만남부터 꽤 수상하다고 생각했음에도, 결국 아무 말 없이 따라간 전적이 있지 않던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이나 행동거지들은 가끔 그가 어린아이인지 어른인지 헷갈리게 한다. 실력으로는 이미 프로를 능가하는 첼리스트지만.


"뭐, 그래도 말이야. 들어오니까 재미있고 난 만족해. 너도 그렇잖아?"


털털하게 웃는 민호가 제 옆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에 토마스는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게."


즐거워.



FIN.



 마지막이 좀 이상하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를 해주셔요ㅠㅅㅠ



※ 헬퍼(helper): 리더를 돕는 역할. 팀의 부리더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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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 이름날조가 좀 있습니다. 주의 부탁드려요 ㄷㅅㄷ





"어디 다녀 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그녀, 현 주작은 뒤를 돌아보았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저를 맞이하는 사람이 누군가 싶어서.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백호였다. 큰 키에 백발의 머리카락, 고요한 호박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입고 있던 외투를 의자에 던져놓으며 주작은 생글생글 웃었다.



"뭐야, 너였어?"

"나라서 실망이냐."

"조금은?"

"아무튼 어디 다녀 와? 고양이 새끼마냥."



그녀는 평상복을 벗고 다시 평소에 제가 입던 붉은빛이 감도는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사신강림을 한 후로 전혀 변하지 않은 외모는 언제나와 같이 아름다웠다. 그녀에게 사신이 강림한 나이는 열 아홉, 수십 년이 지난 후로도 여전히 어려 보이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성격도 여전했다. 물론 그건 백호도 마찬가지였지만.



"아, 오랜만에 지상에 내려갔는데 재미있는 아이를 만나서."

"누군데?"

"내 후계자."



귀엽더라고. 의자에 앉아 턱을 괴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덩달아 흥미가 일었는지 그녀의 맞은 편에 앉은 백호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아, 이번에 남자로 태어났다던 그 아이 말하는 거지?"

"그렇지."



주작 가의 후계자는 예로부터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관례다. 음양오행에서 주작의 성질은 양. 음기를 가진 여자와 만나야 그 힘을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다. 같은 양기를 가진 남자는 주작의 힘을 다루기도 힘들 뿐더러 사신강림에도 상당한 제약이 올 수 있을 터였다. 뭐, 아이를 선택한 것은 하늘의 뜻이고 자신들이 거기에 뭐라 할 입장은 안 되었지만.


사실 그 아이가 남자로 태어난 것 말고도 이번 후계자들에 꽤 이상한 점들이 보이고 있긴 했지만.



"그래서 어떻게 했냐?"

"애가 친구를 만들고 싶어하길래, 현재 백호 후계자네 집에 데려다주고 왔지."



나 잘했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미소짓는 주작에게 백호는 웃으며 칼같이 대답했다.



"미쳤구나."

"뭐야?!"

"너네 본가 대전에 있다며? 고작 열 살짜리 애가 집에는 어떻게 가라고 걔를 서울로 데려가?!"



백호의 본가는 서울에 위치한다. 사신인 자신들에게는 한 걸음이면 가는 곳이라지만 지상에서는 차를 이용한다 해도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 어린애가 거기까지 갔다는 것도 걱정될 일이거늘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말에 데려간 곳이 왜 하필 그 먼 곳에 있는 백호 본가란 말인가. 그는 현 주작이자 자신의 소꿉친구를 보면서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정말이지 예전부터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성격이긴 했지만 사신이 되고 나서는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뭐, 어때. 너희 집 부자잖아. 알아서 보내줄 텐데 뭐 그리 걱정해?"

"왜 하필 우리 집으로 보냈어?"

"우리처럼 친해지라고 보낸 거지 뭐~. 어릴 때부터 친해두면 좋잖아? 같은 처지니까."



어차피 지상이랑은 인연도 없는데 뭐. 태연하게 손가락을 빙빙 흔들며 대꾸하는 주작을 보던 백호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하여간 왈가닥. 하긴 이미 지상을 떠난 입장에서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지만, 본가 사람들은 좀 골치를 썩을 터였다. 그는 난데없이 들이칠 후계자를 감당하게 될 제 형과 형수에게 살짝 애도를 표했다.



"그럼 우리처럼 자라려나."

"그래도 남자들끼리니까 좀 다르지 않을까? 남자들만의 우정, 뭐 그런 거."

"음? 우리 중에 여자가 있었나? 나는 너와도 충분히 남자들끼리의 우정을 쌓았다고 생각…. 컥!"



오호호 웃던 주작이 발을 들어 백호의 무릎을 세게 찼다. 아픈 무릎을 손으로 문지르며 그는 주작을 노려보았다. 백호는 금강불괴를 쓴다지만, 그런 능력도 주술 앞에선 거의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힘이나 무술은 당연히 녀석보다 강하지만 주술이라는 건 생각보다 꽤 성가신 능력이었다. 아군일 땐 좋지만 싸울 때는 정말 귀찮기 짝이 없는 능력. 더구나 주술에는 현무보다도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 난 게 이 녀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니가 사신강림을 했을 때 정말 충격먹었지."

"왜? 너무 이뻐서? 하긴 그 때 너 입이 딱 벌어졌었잖아, 호호호."

"…니 입으로 그런 말 하고 싶냐?"



창피하게. 그렇게 말을 돌리던 백호의 귓볼이 살짝 빨개져 있었다. 확실히 그 때는 넋을 놓긴 했었으니까. 솔직히 그 전까지는 그녀는 제게 그냥 왈가닥에 놀려먹기 좋은 친구였을 뿐이었다. 물론 외형이나 몸매나 얼굴은 나름 여자가 맞았지만,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 막역한 사이였으니까. 그녀에게 사신이 강림했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붉게 물든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화려한 옷을 입은 녀석은 확실히 주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웠으니까.


맨날 못생겼다 못생겼다 놀렸지만 사실 그렇게 진심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길거리를 나가면 나름 주목을 받는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예쁘게 꾸미는 것에는 관심이 없던 녀석이라 꾸몄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자신이야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주목받을 정도로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게 다들 차례차례로 사신강림을 한 후 하늘로 올라왔다. 이제 후계들이 성장하게 되면 자신들도 은퇴하게 되겠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는 가끔씩 네 명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수련하던 시절이 못내 그리울 때가 있었다. 소소한 것들에 즐거워하고 순수하게 무언가를 열망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에게 솔직했던 그 때가.



"난 말이야."

"어?"

"사실 은찬이가 남자로 태어난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냥 그렇다고.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리던 주작이 제 손을 들어 깍지를 꼈다. 그렇게 한참을 말이 없다가 고개를 든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금빛의 눈동자는 그녀가 그와 알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결코 변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우직할 정도로 순수한 눈.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무서운 말이기도 했다. 최소한 그녀에게는.



"야, 그나저나 너 언제 가려고?"

"…."

"내일도 바빠질 텐데 어서 준비해야지. 자고 갈거면 손님 방을 쓰던가."



어색해진 분위기에 하하 웃던 주작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문고리를 잡아당겨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가 멈칫한 것은 백호가 내뱉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가은아."



나가려던 주작이 멈칫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버거울 정도로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의자에서 끼익거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붙잡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박에 묶인 것처럼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 흡사 주술에 걸린 것처럼 온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은아, 주가은."

"그 이름 부르지 마."

"언제까지 내가 널 기다려야 하냐?"



그렇게 말하는 그를 가은은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대답하기가 겁난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녀는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딱 붙어버린 입을 억지로 열어가며 천천히 대꾸했다.



"우린 영원히 살잖아."

"그래서."

"자식이라던가 낳으면 그 아이는 분명 자라나면서 우릴 보고 괴로워하겠지."

"안 낳으면 되지. 그리고 청룡은 결혼해서 애도 낳았잖아. 걔도 후계자라고 하더만."

"그 녀석이랑 우리가 같아?"

"야."

"넌 내 친구야, 백훈."



언제나와 같은 질문, 언제나와 같은 대답. 그녀가 들려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고 포기할 수 없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말이 없는 훈을 내버려둔 채 가은은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달음질쳐서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문을 닫고 주륵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던 가은은 하하 실소했다.



"친구잖아, 우리는."

'나, 네가 좋은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그가 했던 고백. 이제는 바래고 퇴색될 법 하건만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고 자신은 언제나와 같이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친구니까. 친구라는 유대는 연인의 것보다 영원하니까. 자조하던 그녀는 오늘 보았던 자신의 조카를 떠올렸다. 남자로 태어나 이 험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주작의 후계자. 사실 나는 네가 남자로 태어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좋아할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으니, 적어도 이런 감정에는 좀 더 면역이 있을 테니까.


어렸을 때부터 줄곧 품어왔던 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은 이 관계를 깨는 것도 겁이 난다. 친구라는 울타리는 너무나도 편해서 그걸 벗어나면 무언가가 변할까 두려우니까. 가은은 다시 고개를 푹 떨구었다. 눈물이 떨어져 그녀의 옷자락을 적셔갔다.



"쫓아와서 날 붙잡을 용기도 없냐, 바보 백호. 팔 하나 낚아채면서 내 여자 되라~ 하면 되줄 지도 모르는데."



실없는 소리를 하던 가은이 소맷자락을 들어 제 얼굴을 닦았다. 그럼에도 눈물은 그치지 않는 수도꼭지처럼 방울방울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를 비집고 흘러내렸다. 자신이 나온 방에서 심란하니 생각에 잠기고 있을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쫓아오지 않는 너를 오늘도 난 기다리고만 있다. 아니, 사실 겁쟁이는 나인지도 몰라. 내가 손 내밀기 두려워서 네가 다가와주길 기다리고만 있으니까. 사실 답답하기도 해. 네가 내 말에 연연하지 않고 그냥 날 붙잡아준다면 휩쓸려서라도 네 품에 안길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건만, 넌 그러지 않지. 평소엔 제멋대로처럼 굴어도 결국 넌 언제나 내 마음을 우선하니까. 주술은 내가 위지만 남자인 네게 완력으로 이길 수는 없는데. 얼마든지 힘으로 날 빼앗을 수 있을 텐데도 넌 나를 기다리기만 하니까.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아 거기에 고개를 묻고, 가은은 애처로이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내가 네게 먼저 손 내밀 수 있을 때까지.







==


여담이지만 현 주작의 이름은 주가은이라고 멋대로 설정했습니다!


주작 이름은 주작이 은찬이 이모라고 했으니 아마 돌림자를 쓰지 않았나 생각해서 은 자를 넣어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감사해요: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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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찬] 첫 만남  (0) 2014.11.29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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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잔향(殘香): 남아 있는 향기.


2. 잔향(殘響): 실내의 발음체에서 내는 소리가 울리다가 그친 후에도 남아서 들리는 소리. 실내 음향 효과를 내는 데 중요한 현상으로, 음악은 1.5~2.5초, 강연에서는 1~1.5초가 적당하다.


[비슷한 말] 뒤울림.




※ 잔향의 테러 기반으로 한 썰. 잔테를 보시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됨요 훠이훠이.






1.

일단 여기에는 자캐 여자애 한 명 등장하는 게 좋겠더라. 사실 상황을 보면 꼬강이가 리사하면 참 좋겠지만 그러면 나머지 배역이 곤란해지므로 일단 자캐 여자애 등장. 이름은 적당히 시아로 하자. 착하고 조곤조곤하니 말씨 곱고 머리카락은 긴 청순한 여자애. 공부는 꽤 하는 편인데 말주변은 별로 없고, 존재감이 굉장히 희박한 아이.


아무튼 시아는 어릴 적부터 부모로부터 온갖 학대를 받았던 아이? 로 설정. 애가 어릴 적부터 폭력을 당하다 보니 굉장히 소극적이고 음침하게 되어서 학교에서도 그리 주목을 받는 애는 아님. 그렇다고 왕따는 아니고 그냥 가까이 가기 꺼려지는 애? 뭐 그 정도랄까. 친구가 없어서 혼자 다니는 거 말고는 학교생활은 문제가 없어. 굉장히 존재감이 없어서 잊혀지기 쉬운 아이야. 사실 그게 독이었던 게, 이 여자애는 집에서 당하는 학대에 대해서 누구한테도 의지할 수가 없었어. 한 번 선생님한테 말했던 적이 있는데 그 선생이 처신을 잘못해서 시아는 집에서 죽도록 맞아야만 했어. 그 때문에 어른한테는 절대 마음을 열지 않아.


그리고 또 하나 비밀이 있는데. 시아는 사실 귀신을 볼 줄 알아. 외가 쪽이 그쪽 계통이라 어렸을 때부터 발현한 능력이지. 사실 이건 아이가 어두운 방과 인연이 깊어서이기도 해. 어두운 방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일 때가 많아서 빛보다는 어둠과 친했지. 사실 그 때 령충들같은 애들이랑 놀아서 얘는 사실 령충에는 거부감이 없는 아이야.


그러던 시아가 어느 날 꼬강이를 만난 거야. 여기서 꼬강이가 트웰브 역할을 하는 거지. 학원에 가야 해서 서두르고 있는데 앞을 잘못 보고 넘어져서 펜이랑 가방 내용물들이 다 굴러떨어짐. 그런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황급히 주워담고 있는데 앞에서 누가 같이 주워주는거야. 그래서 고개를 들었는데 굉장히 귀엽게 생긴 남자애였어. 나이는 자기 또래? 한 18살 정도 되어보이는.(여기서 꼬강이는 18살) 근데 입을 여니까 약간 말씨가 난폭하긴 한데 묵묵히 주워주는 걸로 봐선 나쁜 애는 아냐.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령충이 나타나서 시아 가방에 달라붙었거든. 무의식중에 시아가 그걸 털어내는데 꼬강이가 그걸 보고는 약간 놀란 눈초리로 보는거야. 빤히 바라보는 눈초리를 보니까 시아는 설마 이상해 보이나? 들킨 건가 싶어서 좀 무안했지만 꼬강이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그냥 이상한 애다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겼지.


아무튼 그런 꼬강이가 참 고마웠던 시아는 답례라고 하면서 자기가 먹으려고 가져온 초콜릿 상자를 건네. 내 이름은 시아인데 넌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까 갑자기 앞에서 누가 꼬강이를 불러. 그게 강림이인 건 시아는 나중에 알지. 어쨌든 그 목소리 듣고 꼬강이는 지금 가봐야겠다고 얼버무리며 초콜릿 잘 먹겠다고 웃으면서 무리 속으로 사라져버려.


그런데 며칠 후에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가게 된 거야. 장소는 63빌딩. 근데 다들 짝짜꿍 다니지만 시아는 친구가 없어 혼자니까 그냥 혼자 돌아다니면서 감상하고 자료 수집하고 그랬지. 그런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비상통로로 들어가게 되었어. 호기심이 생긴 시아는 비상계단을 내려가보는데 거기서 먼젓번 그 남자애를 또 만난 거야. 바로 꼬강이. 그런데 남자애가 이상한 인형을 들고 있어. 근데 그 인형이 자기랑 놀던 령충들이랑 너무 닮아 있는 거야. 놀라서 시아는 말을 더듬어.


"그... 인형은...?"

"아하, 너 역시."


보이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개구지게 웃는 얼굴에 시아는 약간 무서워졌어. 보이냐고 말하는 건 이 남자애도 자기랑 같은 걸 본다는 거잖아. 놀라는 시아에게 꼬강이는 자기가 품에 들고 있던 령충인형을 그녀에게로 던져. 그냥 받아드는 시아에게 꼬강이는 소중히 다루라고 말하면서 유유히 계단을 내려가. 그리고 시아는 그걸 보고만 있어. 인형을 손에 꼭 들고.


한편 꼬강이는 내려가면서 전화를 걸어. 상대는 강림이. 무슨 일이냐고 강림이가 묻는데 꼬강이가 웃으면서 말해.


"우리랑 같은 걸 보는 애가 있어."

"..."

"흥미롭지 않아?"

"퍽이나."


냉정하게 자르는 강림이에게 꼬강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근데 그 아이도 몸 상태는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고 말해. 교복 사이사이에 숨겨진 멍이랑 상처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알아본거야. 강림은 잡소리 그만하고 빨리 빠져나오라고, 곧 시작되니까. 라고 말해. 그리고 꼬강이는 건물 내부를 정전시켜. 다들 우왕좌왕하는 틈에 꼬강이는 령들의 도움을 받아 쉽게 밖으로 나오고, 강림이와 만나지. 그리고 강림이는 스위치를 눌러. 그러자 꼬강이가 군데군데 설치해둔 인형폭탄들이 터지기 시작해. 다만 비어있는 층들에 설치한데다가 사전에 정전소동을 일으켜서 대부분 대피했기 때문에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고, 빌딩도 무너지지 않아. 기둥을 죄다 피했거든. 이건 일단 테러의 프롤로그 격이니까.


그런데 다들 도망가는 중에서도 시아는 아직 건물 안에 있어. 그걸 눈치챈 강림이는 할 수 없이 약간 부적? 같은 걸 써서 영파를 연결하는 주술을 써.(둘 다 주술이 가능하지만 더 뛰어난 건 강림이.) 한 번 본 사람이면 대충 영파를 기억하고 감지해낼 수 있어.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놀라는 시아에게 딱 잘라 말해. 살고 싶냐고. 그리고는 말하지.


"살고 싶지? 그럼 선택해."

"..."

"공범자가 될 것인지, 그냥 그렇게 살다 죽을 건지."


애가 학대를 받고 사는 거 같다는 걸 들은 강림이도 생각이 좀 있었던 거야. 어쨌든 자신들을 본 것도 사실이지만 일단 자신들과 같은 걸 보고 산다는 것에 나름의 동질감이 들었던 거지. 물론 동료애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연민 정도. 그래서 선택하라고 하는데 시아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말해.


"살고 싶어!"


그 말을 들은 강림이는 지시를 내리기 시작해. 일단 4층까지 내려와서, 그 령충 인형을 창문 근처에 두라고. 그리고 숨으라고. 재빨리 지시대로 하자 폭탄이 또 터져. 그리고 밑에는 꼬강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해맑게 웃으면서 뛰어내리라고 말해. 무서워하던 시아는 결국 뛰어내리고 꼬강이에게 안겨.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강림이한테로 가. 그리고 강림이는 다가온 시아에게 말하지.



"이제 되돌릴 수 없어. 넌 공범자니까."






===


썰도 막 지어내려니까 쉬운 게 아니네요 ㅋㅋㅋ 헷갈려 ㅂㄷㅂㄷ 더 풀기엔 너무 늦었으니 자야겠다 ㄷㄷ


여기는 캐릭터를 정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ㅋㅋㅋ 근데 아마 시바사키는 바리가 될 거 같고 화이브는 사라가 될 거 같아요 ㄷㄷ;;


사실 시바사키랑 나인의 유대감이 좀 상당하길래 강림이랑 바리 콤비가 좋겠다 싶었거든요 ㅇㅇ 집착은 역시 사라로...ㅋㅋㅋㅋㅋㅋ 사라만한 캐릭터가 없어요..ㅠㅠ


사실 잔향의 뜻을 두 개 적어놨는데 일단 잔향의 테러는 2번째 뜻에서 나오는 그 잔향을 씁니다. 제 생각에는 세상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나인과 트웰브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ㅇㅇ 테러를 하면 그 기억은 굉장히 오래 남으니까요. 그렇게라도 기억되고 싶었던 거리라 생각합니다 ㄷㄷ;;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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