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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겁쟁이페달 스포가 아주아주 많습니다. 인터하이를 다 보지 못하신 분들께선 조용히 뒤로가기 눌러주세요!

대형 스포가 있기 때문입니다ㅠㅠㅠ

※ 마나미 독백이 많이 들어갑니다. 헤헤헤 조각글이니 그냥 가볍게 봐주세요!



[마나오노] 산가쿠(山岳)


WRITTEN BY. 리네





"사카미치군, 우리 시합할까?"



인터하이 이틀 째,

마나미 산가쿠(​真波 山岳​)는 언제나와 같이 웃으며 태연스레 그 말을 입에 담았다.


무더운 한여름의 중심에 서 있는 선수들의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지 오래였다. 한낮의 태양이 무겁게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며, 체력을 앗아간다. 이미 오늘 레이스의 전반부가 지나가고 있는 참이라 선수들도 슬슬 지칠 터였다. 이 와중에도 선두 집단들은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제 들어서는 곳은 본격적인 언덕라인. 클라이머들이 나서야 할 때였다.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일까, 선두 다툼은 그리 치열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달려나가는 몇몇의 선수들은 있었다. 오늘의 색깔 번호표 중, 빨간 번호표. '산악왕'을 쟁취하기 위해서였다. 전국에서 가장 빨리 산에 오르는 자, 그런 의미를 가진 이 '산악왕' 번호표는 팀의 사기를 올리는 효과도 있었지만 클라이머로서는 최고의 영예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땡볕의 더위와 치열한 선두 다툼 속에서도 웃는 얼굴로 산을 오르는 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나미 산가쿠. 올해 2학년이자 하코네 학교의 천재 클라이머라 불리는 남자였다.


마나미의 옆구리에 붙은 선수 번호표는 13. 3은 하코네의 에이스 클라이머를 상징하는 번호다. 전국에 있는 모든 선수들 중에서도 '왕좌' 하코네의 선수는 특별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인터하이의 달리는 연승의 전설이라 불린 강호답게, 하코네 자전거부는 그 규모도 크며 정예 멤버들은 다들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곳에서의 에이스 클라이머란 곧,


전국 최고의 클라이머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마나미는 혼자 달리고 있지 않았다. 그의 뒤에서 열심히 페달을 돌리고 있는 소년과 함께였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다소 체구가 작지만, 선하고 여려 보이는 얼굴이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달리는 것만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처럼. 마나미는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번호표 1을 단 노란색의 선수복. 작년 우승팀 '소호쿠'의 멤버이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작은 안경.


오노다 사카미치(小野田 坂道)

그리고, 아마 저에게 있어서는 최강의 라이벌.


태연하게 시합하자고 말하는 마나미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저를 따라오는 소년을 힐끗 내다보았다.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 그 누구보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변함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무언가가 조금 변했다. 지금 제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는 건 온전히 자전거만이 아니었다. 시커먼 무언가가 저를 움직인다. 제멋대로 입이 움직여서는 네게 말을 꺼낸다.


당황할 틈도 없이, 너는 언제나와 같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자, 시합하자!"



웃고 있는 소년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마나미는 다시 말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앞에 몇 명이 더 있겠지만 마나미는 애초에 누군가에게 관심을 쏟는 타입이 아니었다. 팀에 속해 있다지만 사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자유롭다. 심지어는 교토 후시미의, 거침없는 주행으로 악명 높은 그 미도스지보다도 더.


그런 그가 제 날개를 잠시 꺾었던 이유도 다름이 아니었다. '그 날' 이후, 너에게 졌던 그 순간부터 제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나던 알 수 없는 이 감정. 마치 괴물과도 같이 무섭게 자라난 이 감정의 정체는 아직 모르겠다. 그저 혼란스럽고 머리가 아프다. 너무나 강해서 가끔 현실의 제가 눌릴 것 같다. 원래의 저를 찢어발겨 두 번 다시 형체조차 찾지 못하게 만들 것만 같은.


관두자. 생각을 접어버리고 네게 다시 웃어주었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게.



"'저번' 인터하이 때처럼. 목표는 이 언덕의 맨 위에 있는 하얀 선이야."

"응!"

"하지만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내기라도 할까?"

"내기?"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아, 물론 무리한 거 말고."



잠시 고민하더니 너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와중에도 너는 여전히 경계심이라고는 전혀 없구나. 그저 달리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골 앞까지는 이제 1km밖에 남지 않았다.



"준비…."



손바닥을 철썩 부딪히자마자, 앞으로 가속을 밟았다.



*



너를 인터하이에 데려온 것을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너는 아마 모르겠지.


처음에는 그저 순수하게 너와 달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첫 만남에 네게 물병을 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산에서 곤란해하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언덕은 나에게 살아갈 의미를 줬으니까. 언덕에서 만난 너에게 기이한 인연을 느꼈다. 나처럼 자전거를 탄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이상할 정도로 거듭되는 만남과 자전거에 대한 너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면서 너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갔다. 페달을 밟아 회전수를 높이는 재미있는 클라임을 하는 녀석. 얼마나 더 성장하게 될까? 인터하이에서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터하이에는 수많은 강자들이 몰려드니까. 많이 겨뤄보고 승부해보지 않으면, 아쉽잖아.


처음에는 반 장난삼아 말했던 '승부'가 그런 형태로 이루어질 줄 몰랐다. 인터하이 3일째의 선두라니. 너에게 화가 났던 것은 아니다. 너는 정당하게 내게 이겼고 졌다는 사실에 후회는 없다. 너와의 승부가 팀전의 우승을 결정하는 시합만 아니었어도, 나는 순수하게 그저 좋은 라이벌을 만났다고 기뻐했을 지도 모른다. 이제껏 달리면서 이렇게까지 즐거웠던 적은 없었으니까.


네가 그렇게까지 나를 따라올 것이라고도, 마지막까지 나와 골을 겨룰 것이라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언제나 승리는 저를 찾아왔고, 때문에 그렇게 사력을 다해 페달을 밟았던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무지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연약했기에, 내 무지함에 대한 원망을 너에게로 쏟아부었다. 네가 준 물병을 버린 것도 그래서였다. 네가 원망스러워서가 아니라는 걸, 토도 선배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네가 싫어서라기보단, 그걸 넘겨주며 다시 만나자고 말했던 내 자신이 싫어서. 내가 속한 팀을 무릎꿇리고 왕좌를 빼앗아갈 자가 너라는 걸 알았더라면.


생각보다 더 많이 후회했다. 누군가에게 지면 분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었다. 정말, 정말 분했다. 너를 인터하이에 끌어들인 과거의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을 정도로. 하코네의 모두는 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선배들도 그랬고, 깨닫지는 못했었지만 나도 그랬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1위로 올라서서 박수를 받고 있는 소호쿠를 보고 있자니 새삼 패배의 아픔이 몰려왔다. 이제야 깨닫다니. 나조차도 나 자신을 너무 모르고 있었나보다.


그저 등을 돌렸다. 내년에는 반드시-. 그런 맹세를 남기고서.



너란 존재에 집착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을까.

 

네가 준 물병을 버린 후부터, 나는 너를 만나게 되는 것이 무척 꺼려졌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승부에서 졌다고 뻐기거나 나를 비웃을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래도 너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질투라던가 원망 때문만은 아닌, 그 이상으로 생소한 감정.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



[앞으로 100m!! …50m, 10m…!!]



*



클라이머의 골인은 언제나 같다.

승자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패자는 분한 듯이 바닥에 엎드린다.


산의 맨 위를 결정하는 하얀 선, 그 위를 쌩하니 스쳐지나온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우렁찬 함성소리가 그들 주위를 뒤흔들었다.



[산 정상은 하코네 학교!! 하코네 학교 마나미 산가쿠 선수가, 산악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이겼다.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하늘색 위에 하얀 구름들이 둥실 떠다녔다. 하늘과 가까운 곳, 수십 번은 올랐을 터인데. 오를 때마다 새로웠고 아직도 제게는 미지의 세계이기도 했다. 이 곳에 발을 디딜 때면 언제나 경건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래서일까.


이겨서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실감나지도 않았다. 그냥, 힘을 다 쏟아내서인지 더 이상은 기운이 없었다. 들고 있던 팔을 다시 핸들에 걸치고 페달을 조금씩 밟다가, 옆을 바라보았다. 너 역시 지쳤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털썩 걸쳐있는 모습이 정말로 지쳐보여서 그냥, 지나가는 듯이 말을 걸었다.



"고마워."

"…."

"너와 달릴 수 있어서 기뻤어. 1년 전에도, 지금도."

"…."

"내 소원은…. 별거 아냐, 그냥."

"…."

"이런 와중에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하지만…. 난 그냥 네가, 나를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어."



이름이란 제게 특별하다. 너를 신경쓰게 되고 이름을 부르게 된 계기는, 너의 이름이 '사카미치(坂道)' 였기 때문에. 산의 이름을 타고난 저기에, 같은 뜻의 이름을 가진 네가 신기했다. 너를 '사카미치 군' 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아마 그런 친근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너도 나를, 나와 같이 생각하기를 바랬다. 모두를 좋아하는 너에게 조금은 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1년 전 그 순간부터 너는 내게 친구였고, 아마도 일생의 라이벌이 될 것이라 예감했기에.


그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네가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땀으로 범벅된 너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그래,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바보가 아니었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무언가가, 그저 힘겨워서 흘리는 땀이 아니라 눈물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절로 몸이 떨려왔다. 이 와중에 네가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너의 눈동자에는 악의나 원망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들어찬 것은 오로지 순수하디 순수한 나를 향한 동경과 찬사. 그리고 분하고 분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흘러나오는 눈물뿐이었다. 너는 네 괴로움을 눈물로 쏟아내고 있었다.


마치 1년 전의 나처럼.



"나도, 너와 달릴 수 있어서 좋았어."

"…."

"축하해, 산가쿠(山岳) 군."



눈물범벅이 되어서도 제게 웃어주려 애쓰는 너를 보니, 가슴 한 부분이 더 조여오는 것 같았다. 네가 처음으로 불러준 나의 이름은 생각만큼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들떠 있던 마음이 냉수를 들이부은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맑고 환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무채색으로 물들었다. 울컥 치받아오르는 무언가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내면에 잠들어 있던 그 괴물이 다시 고개를 들고 안에서 날뛰었다. 두근두근, 무서울 정도로 세차게 펌프질하는 심장이 너무도 아파, 저도 모르게 가슴을 쥐어뜯었다.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닌데, 악의 없는 눈빛에 왜 이렇게 마음이 찢기는 것 같을까?


그렇게 생각하고서야, 이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너에 대한 질투와 원망 이전에, 너라는 존재를 갈망하는 정말이지 추악할 정도의 이기심.


언제부터 너에 대한 마음이 이리도 변질되었을까. 네가 나를 이겼을 때부터? 아니면 인터하이에서 만났을 때? 그도 아니면 하코네에서, 아님 처음부터 그랬을까. 그조차 나는 알 수가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너에게 손을 뻗고 싶은 이 마음을 억누르는 것만도 벅찼다. 너란 존재가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달랐던 것은 그래서였을까. 졌다는 사실에 자신을 자학하고 괴로워했을 때조차 나는 너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역시, 나를 너무나도 몰랐다.


'산가쿠(山岳) 군.'


목소리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해서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이름이라는 것의 무게를 새삼 깨달았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이름에 얼마만큼의 감정을 담고 있었는지 너는 알고 있을까. 모르겠지. 당사자인 나도 이제야 알았는데.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픈 걸까.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와, 내가 너를 부를 때의 감정이 같지 않다는 걸 알기에. 너는 약속대로, 앞으로도 나를 그렇게 부르겠지. 그 이름을 부르는 네 마음이 나와 같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기뻐하겠지, 그리고 절망하겠지. 감정의 온도차에 안타까워하고 제 마음을 죽이고 싶어지겠지.



그래도, 나는 결코 그 이름을 버리지 못할 거야.





- fin.



===


저의 겁페 최애는 마나미! 아마 얘가 아주 싸이코가 되지 않는 이상은 변함없을 거 같네요 ㅇㅇ

개인적으로는 마나미가 상큼하기도 하지만, 레이스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면이 좋아요. 자전거에 진지하고 자존심 강하지만 책임감도 투철한, 마나미의 그런 면을 좋아합니다.


오노다한테 돌려받은 물병을 버렸다는 에피소드를 봤을 때, 이런 소재로 한 번 다크한 분위기를 적어보고 싶었어요. 마나미 독백! 생각보다 하코네의 패배에 대해 엄청 책임감을 느끼길래;; 그 내면은 어떨까 싶었습니다 되게 어두웠을 거 같아요ㅠㅠㅠ


사실 겁페에서 가장 캐해석이 힘든게, 정말 겁페 통틀어 최고로 성격이 많이 바뀐 아이라서요... 진짜 20권 중반부부터 애가 성격이 완전 변하더니 30권 넘어가니까 아주ㅠㅠㅠ 인터하이에서의 패배가 그 정도로 영향이 컸던 거 같아 좀 안쓰럽습니다8ㅁ8

뭐,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줘서 나름 안심했지만.


사실 오노다와의 승부는 2일째에 산악승부 했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는 이때는 마나미가 이기고, 3일째 우승은 소호쿠가 했음 좋겠습니다^~^ 원래 이런 경기는 무조건 중립하자는 입장인데요, 사실 마나미가 너무 가엾어서 이번 2학년은 하코네가 이겼으면 하고 했지만 잡지사랑 이즈미다가 소호쿠 홀대하는 모습이 너무 짜증나서ㅋㅋㅋㅋ 걍 이번 종합우승도 소호쿠였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솔직히 이즈미다가 주장하는 모습이 후쿠짱이랑 달리 전혀 호감이 안 가요....ㅠㅠㅠ


미안해 마나미 이런 누나라서8ㅅ8


그럼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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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 시간을 넘어서-. 의 뒷 이야기.

※ 크롭이기 때문에 본편이 완성되면 삭제될 위험이 있습니다. 본편이 겁나 길거든요.




2. 언젠가 너와 만났을 그 거리에서.


WRITTEN BY. 리네




귀찮아.


강림도령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돋았다. 뒤를 흘끗 돌아보자, 아까부터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얼굴이 보인다. 꽤 어리다. 기껏해야 생전의 저와 비슷한 정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저를 놓치지도 않고 따라오는 걸 보니 꽤 질긴 녀석인 건 확실했다. 차사 상태의 저를 알아보는 것도 놀랍거늘, 갑자기 제게 달려들어 저를 알아보냐고 묻는 이상한 녀석. 귀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이런 녀석을 본 기억은 없었다.


이런 녀석을 만났었다면, 분명 기억이 났을 텐데.


그러더니 갑자기 또 말이 없다. 심각해 보이지만 그건 제가 알 바가 아니었기에 등을 돌렸다. 다시 일하러 인간 모습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던 중, 시선을 느꼈다. 뭐지 싶어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전 그 녀석이 있었다. 계속 따라오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대체 언제까지 쫓아올 셈이지?”

“뭐야, 신경쓰지 마.”

“신경이 쓰인다고!”



쫌생이 같으니. 투덜거리는 모양새가 꽤나 얄밉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들어올리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저랑 외양은 비슷하면서 하는 행동은 아직 어린애다, 어린애. 화를 내는 것도 우스울 정도로. 고개를 젓다가 남자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저러다가 지치면 제풀에 떨어져 나갈 터였다.


그런데 낮이 지나고 한밤중이 다 되도록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지만,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볼 때마다 늘 제 뒤에 있다. 사람이 많던 적던 꼭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심지어 일을 하러 차사 모습으로 날아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똑바로 쫓아온다. 저를 찾아서. 그리고는 다시 따라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위치를 아는 건지 이쯤되면 놀랄 지경이다.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아니, 귀신은 나인가.


그렇게 서너 번이 지나자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제 쪽이었다.



“어이, 너.”

“왜?”



태연스레 대답하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루종일 제 뒤를 따라다녔으니 피곤할 법도 하건만, 지친 기색도 없는지 쌩쌩한 얼굴이다.



“너, 평범한 인간이냐?”

“질문이 늦네.”



이제야 물어봐?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삐딱한 자세를 취한 소년이 영문 모를 소리만 내뱉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 설마 제가 차사라는 것도 알고 있을 걸까.



“귀신이라고 생각해?”

“….”

“인간이야. 귀신이 이렇게 멀쩡하게 바닥을 걸어다닐 리가 없잖아.”



그랬음 진작 날아서 쫓아갔지. 두 손을 들고 발로 바닥을 몇 번 차낸다. 흙먼지가 이는 걸 보니 확실히 인간은 인간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어떻게 날 볼 수 있지?”

“어렸을 때부터 볼 수 있었어. 딱히 원했던 건 아니었지만.”

“영력이 있는 건가?”

“자유자재로 사용도 가능해, 봐.”



들고 있던 손을 휘두르자 소년의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일었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은 마치 제 의지가 있는 것처럼 허공을 채우며 넘실거렸다. 손짓으로 바람을 제 맘대로 다루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 뿐일까, 느껴지는 영력이나 기운은 확실히 어지간한 무당들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범상치 않았다. 많아봐야 고등학생 정도밖에 안 될 법한 어린애가.



“내가 누군지….”

“알아. 차사잖아?”

“알면…!! 후우, 그래. 그거지. 그런데 그걸 알면서 나한테 다가오는 이유가 뭐냐? 인간이면서.”



척척 대답하던 소년의 입가가 일순 꽉 다물렸다. 그러더니 다시 웃는다.



“그냥, 심심해서?”

“가서 친구들이랑 놀기나 해라. 영혼 때려잡는걸 보는 게 뭐가 재밌다고.”

“왜, 나름 재밌어. 아저씨 구경하는 거.”

“아…! 야, 꼬맹아. 난 아저씨가 아니거든?”

“…아저씨한테 난 언제나 꼬마구나.”

“뭐라고 했지?”

“아니, 아무것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던 남자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순간 어두워진 낯빛, 살짝 떨리는 눈동자, 싱글거리던 얼굴에 처음으로 스치듯 보인 망설임까지. 하지만 곧 다시 사라졌기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잘못 봤겠지.



“그나저나 진짜 언제까지 따라다닐 거냐? 지금은 밤이라고, 착한 어린이는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꼬맹아.”

“나 갈 곳이 없는데.”

“뭐야, 가출했냐?”

“아니, 그건 아닌데.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어.”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걱정할 텐데.”

“그런 거 없어.”



뭐?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놀라는 강림도령과 달리 소년은 시종일관 덤덤했다. 제게서 시선을 빗낀 얼굴은 웃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지극히 있는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잔잔했다. 그러더니 다시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방금 전까지 잔물결조차 없단 눈동자에 감정이 일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하고 가벼운 것들이 아닌, 그보다 더 짙고 복잡하면서 한없이 내려앉은. 악한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쁘거나 슬픈 것 같지도 않았다. 눈은 영혼을 비추는 창이니만큼 표정은 숨길 수 있어도 눈빛을 숨기지는 못한다.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그래.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녀석은 저를 보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록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근본적인 감정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래서?”



제 머리를 긁적거리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뭐라고 할지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지만, 혹시나 싶어서. 빙긋 미소짓던 소년이 제 용건을 꺼내자, 강림도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난처하게 웃었다. 저거, 얼굴에 철판을 몇 개나 깔았을까.



“신세 좀 질게.”




- TO BE CONTINUE



====


크롭입니다. 완성은 시간이 나면 마저 할 예정이에요.


시간을 넘어서를 보셨으면 알겠지만 꼬강이는 과거로 왔습니다. 여기는 5년 전, 강림이가 꼬강이를 처음 만나기도 훨씬 전의 시간이에요.


완성하면 묶어서 마저 올리겠습니다ㅠㅠ

Posted by I.R.E
,

※ 예전에 썼던 거 옮겨 왔습니다.

※ 타임리프 3부작. 꼬강이 17세.





[투림] 시간을 넘어서-.


Written By. Rine








붓으로 먹을 칠하는 것처럼. 아직 초저녁인데도 어두컴컴하게 물든 하늘이 불길하였다. 차가운 무언가가 제 얼굴로 떨어졌다. 구름 사이로 하나둘씩 떨어지는 빗방울. 처음에는 그저 몇 초에 한 번 가끔씩 떨어지다, 점점 그 수가 많아지면서 양동이에 물을 들이붓듯 세차게 쏟아진다. 빗방울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고, 모여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재빨리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방이나 신문지를 올려쓰고 뛰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그저 머리를 손으로 가리고 죽어라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도 거세지는 빗줄기에 옷이 젖어가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재빠르게 발을 놀려 공원을 벗어났다. 그렇게 비를 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이에서도, 그저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나이는 중학생,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아이는 우산도 없이 그저 가만히, 빗줄기에 몸을 맡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옷이 흠뻑 젖어 뼛속까지 시려울 텐데도,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그저 멍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풀썩 고개를 꺾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무언가를 참아내던 아이가, 띄엄띄엄 말을 뱉어냈다.



"거짓말…."



아니야, 아니야! 방금 전까지 사라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던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가. 너무나도 큰 전투를 마치고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났지만 그는 이미 제 곁에 없었다. 많이 다쳤다는 말에 그러려니 하면서 넘겼다. 면회 사절이라는 말에 그렇게 아픈가 싶어, 다 나으면 약골이라고 놀려주리라 생각했는데. 계속 기다렸고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았다. 무소식은 희소식이라는 옛 속담과는 다르게 발끝까지 끼쳐오는 두려움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어디 있어요?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그와 사이가 안 좋던 사라조차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안타깝다는 듯이 저를 바라보는 바리 누나의 얼굴에 마음이 술렁거렸다. 왜 그런 표정을 하냐고, 하하 웃으면서 말해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일그러지는 제 표정을 눈치챘는지 사라가 입을 열더라. 꼬마, 잘 들어. 충격받지 말고. 그는….



"아니야…."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런 거였을까. 마음이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이제는 그보다 약간 높아진 키. 멱살을 잡혔음에도 가만히 눈을 감고만 있는 사라의 모습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만 같았다. 평소라면 제 몸에 손대지 말라고 떨쳐냈을 것인데.



"아니, 라고…!"



죽었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말단이고 바보라지만 무척이나 강하고 대단하고, 심지어는 팔이 없어져도 재생되잖아.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것처럼 굴었잖아. 언제나 저를 놀려먹으며 즐거워했으면서. 자신은 너보다는 훨씬 오래오래 살 거라면서 그렇게 웃으며 말했잖아. 지금 단체로 몰카라도 찍어? 그래, 이 정도면 많이 속아준 거니까 이제 슬슬 나와. 제발 나와줘. 허하게 중얼거리는 제 목소리를 듣던 누나가 제 앞으로 나서며 무언가를 건네주기 전까지는. 그래도 자신은 많이 이성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천 위에 올려져 있는 조각난 하얀색 나뭇조각.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게 그가 언제나 메고 다니던 장승 목걸이의 파편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도 잘 만지지 못하게 했었던, 그가 언제나 애지중지 차고 다니던 물건인데. 너에게 줘야만 할 것 같아서, 라는 누나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레 손으로 받아들었다. 천 위로 느껴지는 단단하고 가벼운 감촉에, 결국 저는 그 자리를 뛰쳐나오고만 말았다. 정처없이 터벅터벅 걷다가 이 공원까지 흘러들어왔다. 솔직히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그저, 마음이 허했다.



"왜, 왜…!"



나만 아니었더라도. 그러한 자책감이 추위마냥, 소년의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명계와 얽히고 그와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 그의 임무에도 같이 나가곤 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최근에 와서는 제법 영력을 조절할 수 있었기에, 이런 자신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들떴던 모양이다. 상급령 세 마리. 저가 하나를 맡고 그가 둘을 맡았다. 여러 마리를 해치우던 중 자신이 방심했고, 거대한 꼬리가 자신을 내리치려는 순간 그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간신히 다 없애기는 했지만, 마지막 녀석을 봉인하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그의 몰골은 꽤나 엉망이었다. 여러 군데를 뜯겨 있어, 보기만 해도 안 아플까 걱정될 정도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달랑달랑한 팔 하나를 들어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바보령. 흐릿한 의식 속에서 본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면.



"우욱…."



빗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어떤 소리라도 다 묻어버릴 것처럼 타닥타닥 내려와, 제 귀와 이성을 마비시킨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저를 감싸고만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게, 보이지 않게. 차가운 빗줄기에 섞여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리게 얼어붙은 제 몸에 아직도 이런 온기가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입을 손으로 막았다. 빗물에 섞여들어 잘 보이지 않았고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든 울음을 삼켜내려는 듯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러다가 주저앉았다. 바닥에 손을 짚고 마음껏 슬픔을 토해냈다. 아무도 보지 않아. 여긴 나 혼자고, 설령 본다고 해도 이 소나기가 모든 것을 가려줄 거야.


다행이다. 지금 비가 와서.



"왜, 내가 아니야."



다쳤어야 하는 건 나인데. 죽었어야 했던 것도 나였고.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고, 당신은 내 곁에 없는 거지? 난 왜 이렇게까지 아파하며, 여기 주저앉아 괴로워해야 하는 걸까. 이래 봤자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잘 아는데, 당신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걸 잘 아는데. 머리로는 알지만 거부하는 심장이 쇼크가 올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몸은 시린데 가슴은 뜨겁게 끓어올라서 죽을 것만 같았다. 토해내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가 목에 걸려, 앓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와 자신에게 죽음이란, 그 무게가 다르다. 자신은 죽으면 명계로 가면 끝이지만, 그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인데. 왜 날 구하고 당신이, 어째서. 어째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과 함께 커다란 소리가 몸을 강타했고, 소년은 정신을 잃었다.




* * *



하늘이 푸르렀다.

비가 갠 후라 그런지 주변에 물 웅덩이들이 고여 있었고 흙바닥은 축축했다. 잎사귀 위에는 물방울들이 구슬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소년이었다. 창백한 얼굴색이 혹여 죽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웅덩이에 놓여 있던 소년의 손가락이 순간 움찔했다. 똑, 똑.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함께, 소년의 눈이 떠졌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눈을 깜빡이던 소년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던 눈동자가 다시 선명해졌다.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놀라던 얼굴이 침울해졌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에는 힘없이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죽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게 나갔으니 다들 걱정하고 있으리라. 솔직히 아직도 기분이 풀린 건 아니었다. 죄책감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저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억지로 자기위로를 하며 소년은 휘적휘적 거리를 걸어갔다. 이상할 만치 뽀송뽀송한 옷에 약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리라 여겼다. 공원 밖으로 나서서 시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제 눈에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 주변에서 엷은 빛이 비치는 것을 보아, 유령이구나. 평소라면 귀찮아서라도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오늘따라 눈길이 간다. 말이나 걸어볼까, 싶어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벤치로 다가가는 인영에 걸음을 멈췄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할머니, 여기 머물러 계시면 위험하다구요."



할머니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사람. 전투 모드와는 달리 검은 망토를 두르고 상냥하게 말을 거는 남자는, 소년이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멈췄다고 생각한 눈물들이 눈가에 고이는 것을 느꼈다. 눈물샘이 다시 터졌는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손으로 하염없이 닦아내던 아이가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할머니를 보낸 후, 뒤를 돌아보던 남자를 와락 껴안았다.



"바보령, 역시 살아 있었구나!"



죽지 않았어. 살아 있었어! 너무나도 반가워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기뻐서인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몇 주만에 만나는 걸까,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가 싶은 마음이었다. 갑작스레 저를 껴안는 아이에 당황했는지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소년을 밀어냈다. 뭐지?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너, 내가 보이나?"

"…뭐?"

"인간에게는 내 모습이 보일 리가 없는데…. 넌 누구지?"



이제야 다시 만났다 싶었는데,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 할 말이 없어졌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정말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설마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말한 건, 저에 대한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던가? 아니야,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성격들이 아니다. 어쨌든 살아 있다. 그런데 나를 알아보지 못해. 왜지? 심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쳤다.



"나 모르겠어?! 강림이라고, 강림!"

"…? 강림?"



그 말을 듣자마자 제 어깨를 거칠게 붙잡는 손이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다그치는 그 목소리가 노기를 띠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표정도 살짝,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정말 날 모르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버벅이던 소년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포착했다. 바람결에 날아가던 포스터, 그 위에 선명하게 찍히는 글자들에 다시 표정이 변했다. 눈동자가 커지며 동공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어서. 눈을 들어 바로 앞에서 저를 추궁하는 얼굴을 위 아래로 살펴보았다. 푸른 색이 감도는 흑발, 무심한 얼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기 증거가 버젓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간절히 바래서 꿈으로라도 보는 걸까. 아니면 이건 정말로, 진짜.


현실인 거야?


*


그들의 주변으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전단지 하나가 바람에 휘날려 두둥실 떠오른다. 하늘하늘 춤추며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전단지의 양면으로 커다랗게 숫자가 쓰여 있었다. 3일 후에 개봉될 뮤지컬을 홍보하는 이 포스터에 적힌 날짜는,


2009년 8월 15일.


5년 전, 강림도령과 아이가 만나기도 훨씬 전의. 바로 그 시간.




- To be continued?




※ 꼬강이가 비맞은 날짜는 2014년 9월경, 둘이 처음 만났던 1화 배경을 2009년 9월로 잡았습니다.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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