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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10.

예감







에에취!


요란스럽게 튀어나온 재채기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민망함을 애써 숨기며 코를 문지르는 마리네뜨에게 같이 길을 걸어가던 에스미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뭐야, 감기라도 걸렸어?”

“아,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의 볼이 살짝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시내에 나와 있었다. 상당히 더운 날씨라 둘 다 반팔에 짧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별로 더위를 타지 않는 마리네뜨와 달리 에스미는 더운지 연신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남은 손에는 차가운 커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직후라 그런지 꽤나 나른했다. 오랜만에 놀러 나와서일까, 근처에 있는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재잘거리는 두 소녀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앗, 죄송합니다.”



어깨가 툭 맞닿았다. 사과의 말을 건네며 저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마리네뜨는 흘깃 쳐다보았다. 벌써 몇 번째다. 이 거리가 번화가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검은색의 정장을 입고 바쁘게 길을 걸어가는 직장인들은 물론, 귀에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보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친구들, 나들이를 온 것처럼 화사하게 입고 돌아다니는 가족들,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지고 돌아다니거나 목에 사진기를 걸고 돌아다니는 관광객 비스무리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왜 이렇게 여기에 사람이 몰리게 되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지금 파리 최대의 번화가라 불리는 샹젤리제 거리가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다. 3일은 더 지나야 공사가 마무리되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기로 예정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몰려온 듯 했다. 사실 마리네뜨와 에스미도 오늘 그쪽으로 놀러가기로 했었는데 보수공사 안내판을 보고 포기했던 거니까. 그에 속으로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던 마리네뜨는 순간 흠칫했다. 낯빛이 어두워지는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리네뜨. 너 표정이 왜 그래?”

“응?! 응….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스미가 한 손으로 마리네뜨의 볼을 꽈악 꼬집었다.



“꺅! 아퍼!”



마리네뜨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엄살을 부렸다. 하지만 정작 꼬집은 당사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손을 놓고 말했다.



“너 열이 좀 있는 거 아니야? 좀 뜨뜻한데?”

“어,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오늘 날씨가 더워서 얼굴에 열이 오른 건지도 몰라. 일단 저 가게에라도 들어갈까?”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고 에스미는 바로 앞에 보이는 연분홍빛 간판이 붙은 가게로 들어섰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파는 깔끔한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훅 불어왔다. 이번에 새로 런칭한 가게인지 가게 안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깨끗한 하늘색 파스텔톤의 벽지를 배경으로 예쁘게 반짝거리는 유리공예품과 오르골, 각종 장신구와 귀여운 봉제인형들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무덤덤한 얼굴을 하면서도 꽤나 신기한지 코너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에스미와 달리 마리네뜨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돌아서던 마리네뜨는 바로 앞에 있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두려움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서다 뒤에 있던 나무 선반에 등을 부딪혔다. 아얏, 작은 비명과 함께 재빨리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히어로가 되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각오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영화의 끝에는 반드시 악당의 죽음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 그래서 전력을 다해 싸웠고 그에 후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무엇에 휘둘리고 있는 거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것도 아니면, 영웅이라는 이름의 무게?


누군가를 찌르는 감각은 예상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끔찍했다. 푸욱, 소리와 함께 고무를 뚫듯 간단하게 생살이 찢기고 붉은 피가 샘물처럼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분명 그 자리에 있던 악당과 자신, 그리고 블랙캣 뿐이겠지.


마리네뜨는 순순히 인정했다. 정말 어이없지만, 이러면 안 되겠지만 자신은 그 악당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비둘기 떼에 둘러싸여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 위로 쓰러져버린 자신의 잔상이 겹쳐졌다.


나도 그렇게 죽게 될까? 누구도 진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게 될까?


비둘기들과 함께할 때 즐거워보이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어쩌면 처음에 했던 그 모든 말들은 그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인간들이 싫어서 그런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그를 단죄할 자격이 있을까? 그가 저지른 짓들은 과연 그렇게 죽어야만 했던 일이었을까? 내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뺏어갈 권리가 있는 걸까.


회의감이 들었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자조했다.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결심하고 또 결심했었는데 지금 자신은 흔들리고 있었다. 무서워졌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레 너무 엄청난 일을 도맡게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리네뜨?”



에스미가 부르는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마리네뜨의 행동이 유별나다는 듯 에스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살 거 없어? 여기 니 취향의 예쁜 물건들이 많은데?”

“어, 그럼 난….”



헤헤 웃으며 근처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던 마리네뜨는 어떤 물건 앞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한참을 멍하게 그것만 바라보고 있던 마리네뜨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붉은 색깔에 까만 점들이 드문드문 그려져 있는 예쁜 시계였는데, 겉을 유리로 제작했는지 투명한 붉은색에 선명하게 박힌 까만 점들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말없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제 친구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에스미가 뭐라고 말을 걸려는 찰나 누가 선수를 쳤다.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손님. 그 시계가 마음에 드시나요?”

“예?”



어느 샌가 마리네뜨 옆으로 다가온 점원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레이디버그를 테마로 만든 시계인데 여성분들이 많이 사가시더라구요. 예쁘고 실용적인 상품이라 그런가.”

“레이디버그 테마요?”



깜짝 놀라는 마리네뜨에게 직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요즘 파리에서 인기 많은 히어로니까요. 저희 집만 아니라 다른 가게들에서도 상품이 많이 나오고 있죠. 아, 블랙캣 테마를 원하신다면 이쪽에 있어요. 요즘 특히나 히어로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죠. 이번 샹젤리제 거리에서 일어났던 사건도 그렇고, 다들 응원하는 분위기예요.”



의외였다. 마리네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 하지만 결국 뭐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잖아요. 다들 매번 도시만 부서진다고 싫어하거나…. 그러지는 않을까요?”

“? 전혀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마리네뜨는 말을 잃었다. 직원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부서진 거야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 사건 규모만 봐도 히어로들이 없었으면 피해가 엄청나게 커졌을 거예요.”



당시 사건을 멀리서나마 목격했는지 점원은 생각 외로 샹젤리제 거리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살면서 건물보다 더 높이 치솟는 물기둥은 생전 처음 봤다고 질려하던 점원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감사하고 있어요.”

“에?”

“위험한 일이잖아요. 목숨을 걸고 악당이랑 싸워주는 사람들에게 그것밖에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시민이 된 것 같다며 웃는 점원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일 텐데도.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악당이랑 몇 년을 싸우는데 현실이라고 별반 다를까요. 부디 지지 않고 열심히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죠. 믿고 있어요.”



믿고 있어요. 그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그저 눈을 깜빡거렸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점원은 당황했는지 허둥거렸다.



“어머, 제가 너무 주절주절 떠들었나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에?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요! 설명 감사해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앞에 있던 시계를 집어들었다. 예쁘게 반짝거리는 시계를 손에 들고 빤히 들여다보던 마리네뜨가 헤실 웃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꼭 그거 사야 돼?”

“응?”

“넌…. 아니, 아니다.”



신경쓰지 마. 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앞장서는 에스미를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살펴보았다.


물건들을 계산하고 있는데 직원이 싱긋 웃으며 종이 두 장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직원은 친절하게 손으로 문 앞을 가리켰다.



“이번에 저희 가게에서 오픈 기념으로 추첨 이벤트를 열거든요. 상품이 꽤 호화스러우니까 한 번 뽑아보세요~”

“해볼까?”

“응!”



재밌겠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에스미의 뒤를 따라 나가던 마리네뜨의 눈 앞이 순간 흐릿해졌다. 몸이 기우뚱거렸다.


어?


살짝 어지러워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다시 선명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걸으면 넘어질 것만 같은 기시감에 선뜻 앞으로 발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 서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물었다.



“뭐해, 안 오고?”

“아, 응!”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었다. 다행히도 어지럼증은 한 순간의 문제였는지 다시 걸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출구로 나갈수록 점점 더워지는 느낌에 마리네뜨는 손을 들어 부채질을 했다. 아, 더워. 왜 이렇게 덥지?


가게 앞에 있는 추첨 부스에는 이미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맨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상품 목록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스미가 중얼거렸다.



“1등 상품이 자동차라고?!”

“우와.”



짧게 감탄사를 흘리며 웃는 마리네뜨를 에스미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평소였다면 더 방방 뛰면서 눈을 반짝거렸을 텐데 지금의 마리네뜨는 너무나 차분했다. 아니, 정확히는 오늘 하루 전반적으로 기운이 없어 보였지.



“마리네뜨, 너부터 할래?”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추첨함으로 손을 뻗었다. 머리가 아팠다. 자꾸 흐릿해지는 시야에 몇 번 눈을 깜빡이면서 간신히 종이 한 장을 꺼내들자 갑자기 짤랑짤랑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러지? 정신이 없어 허둥대는 마리네뜨에게 추첨함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3등을 뽑으셨어요.”

“예…?”

“이건 당첨 선물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남자가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몽롱한 정신에도 무사히 그것을 받아들고 마리네뜨는 추첨함 근처를 벗어나 한산해진 길가에 섰다. 이상할 정도로 공기가 무거웠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으려고 했지만 글자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받은 종이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마리네뜨의 등 뒤로 다가온 에스미가 깜짝 놀라서 중얼거렸다.



“와, 이거 이번에 공연한다던 유명한 오페라 티켓이잖아!”

“그래…?”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 없는 마리네뜨와 달리 에스미는 잘 됐다는 듯이 마리네뜨의 등을 툭툭 쳤다.



“그럼! 마침 잘 됐다. 그 바보 녀석한테 같이 가보자고 하지 그래? 이거 이번 분기 기대작이라 표가 나오면 전부 매진이라 구하기도 쉽지 않아. 심지어 VIP석이라고!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가 없을 걸?”



그런 걸로 같이 간다고 할 성격은 아닌데. 하지만 마리네뜨는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에스미의 텐션이 높은 이유는 아마 기운이 없어 보이는 자신을 달래주기 위한 나름의 배려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게 여실히 느껴져 마리네뜨는 그저 웃고 말았다.



“고마….”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다리에 살짝 힘이 풀렸다. 마리네뜨, 왜 그래? 너 얼굴이…. 흐릿하게 번지는 에스미의 목소리에 어라? 하던 순간 마리네뜨의 몸이 휘청이며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차가운 돌바닥으로 쓰러지려던 순간 무언가가 제 몸을 받쳐 안았다. 누구지? 열에 들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앞을 보기 위해 애써 눈을 떴지만 보이는 것은 암흑이었다.


마리네뜨는 그대로 기절했다.






“파트너.”

“왜.”



셔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여름인데도 긴 팔에 긴 바지, 심지어 단추까지 꼭 채워 입고 있는 소년을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전혀 개의치 않아 보이는 당사자와는 달리 불평은 의외의 곳에서 솟아나왔다. 펠릭스의 셔츠 속에 들어 있던 플랙이 작게 불평을 터트렸다.



“이런 더운 날씨에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을 오는 이유는 뭔데?”

“어쩔 수 없잖아. 서점에 괜찮은 책이 들어왔다고 하니까.”

“흐음, 나중에 사러 와도 되지 않나~? 왜 꼭 지금? 사람 많은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잠시 멈칫하더니 펠릭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하루빨리 읽고 싶으니까. 더 이유가 필요해?”

“그럼 옷이라도 좀 시원하게 입든지~? 보기만 해도 덥다구.”

“난 이게 편해.”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도 펠릭스는 제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힐끔 돌아보았다. 상당히 오래 전에 쓰여진 희귀본이라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책이 들어왔다는 말에 재빨리 집을 나서 시내로 나왔다. 확실히 날이 덥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책을 빨리 수령하는 게 더 중요했다. 티는 안 내려고 하지만 상당히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펠릭스를 플랙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빨리 집에 가서 책을 살펴볼 생각밖에 없는 펠릭스에게 플랙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좋은 소식 하나 알려줄까?”

“…정말 ‘나한테’ 좋은 소식이긴 한 거야?”



이제 장난에도 익숙해졌는지 대놓고 의심부터 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너무하네~’ 한 마디와 함께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이 근처에서.”

“…뭐?”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재빨리 주위를 스샥 둘러보았지만 잠잠했다. 플랙은 낄낄 웃었다.



“농담이지롱!”

“야, 너….”

“애초에 상대가 변신을 해야 기운이고 뭐고 느낄 수 있다구~?”

“…하아.”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했는지 가만히 침묵하다가, 펠릭스는 다시금 제 파트너의 이름을 불렀다.



“야, 플랙.”

“으응~?”

“…아니다.”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펠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플랙이 지적한 대로 책은 반쯤 핑계였다. 조용한 장소에서 산책을 하기엔 오히려 생각만 많아질 것 같아서 일부러 시끄러운 곳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덕분에 짜증은 치솟지만 뭔가 생각할 여유가 없는 점은 마음에 든다. 지금 혼자 있었다간 쓸데없는 생각들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자꾸 떠오르는 걱정이 있었다.


레이디버그는 괜찮을까.


눈물로 범벅이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먼젓번 샹젤리제 거리에서 드디어 악당 중 한 녀석을 해치웠다. 단서로 생각할 법한 것도 나왔다. 하지만 그 모든 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너졌다. 꽤나 덤덤한 자신과는 다르게, 많이 충격받은 건지 넋이 나간 얼굴로 미스터 피죤이 있는 자리만을 쳐다보던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심장 한 구석이 아릿해졌다.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멍해 있는 레이디버그를 데리고 재빨리 도망치기는 했지만, 얼굴에 묻은 핏자국도 닦아내지 않고 초점 없는 눈동자를 깜빡거리는 레이디버그가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레이디. 레이디. 한 손으로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꼭 끌어안고 작게 속삭이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레이디버그가 뭐라 중얼거렸지만 너무 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표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살짝 웃으며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흐릿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과대망상이라면 좋을 텐데.


미스터 피죤이 죽었든 말든 그건 솔직히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왔어야만 했고 레이디버그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생각하는 것과 현실의 감각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일에 나름 익숙해진 자신과는 다를 테니까.


이렇게 덤덤한 자신의 모습을 레이디버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냉정한 놈이라고 싫어하게 될까. 이 와중에도 당신만이 걱정되는 나를 이기적인 녀석이라 경멸하게 될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변신을 풀고 플랙에게 물었다.


‘그 악당, 정말 죽은 거야?’

‘직접 보고도 몰라?’


되려 질문하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짧게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어지간한 상처로는 죽지 않지만 불사신은 아니라구.’


이 와중까지도 플랙은 전혀 진지하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펠릭스는 별 감정의 동요 없이 대꾸했다.


‘…우리도 같은 꼴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아마도?’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것을 물었었다. 그 때도 플랙은 히어로는 거의 무적이라고 했었다. 약점이 없지는 않다는 소리냐고 물었을 때 플랙은 그랬었다.


욕심도 많다고.


그렇다는 건 저쪽에도 약점이 없지는 않다는 소리겠지. 같은 미라큘러스의 소유자니까. 그건 이번 사건에서 악당의 죽음으로 제대로 증명되었다. 물건이 망가지면 목숨을 잃게 되니까. 호크모스한테 써먹기는 어렵겠지만.

펠릭스가 다시금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그 호루라기에서 나온 나비.’

‘엉?’

‘그것도 호크모스와 관련된 건가?’


플랙은 꺄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그건 호크모스가 부리는 사령같은 거야.’

‘사령?’

‘물건에 깃들어 그 물건을 소유한 사람에게 힘을 주지만, 그들은 절대 호크모스를 거스를 수 없거든~ 일단 악당이 된 사람의 몸은 호크모스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혹시 자칫 잘못하다가 물건이 부숴지면 죽게 된다구. 힘을 거두는 것도 호크모스의 맘대로~ 그러니 누가 거역해? 물론 물건에 깃들어 있던 나비는 죽지 않지만.’

‘그럼 그 나비는 어떻게 되는데?’

‘뭘 어떻게 되겠어? 빌려준 사람이 사라졌으니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할 거 아니야~ 그나저나 왜 그렇게 나비에 대해 물어봐?’


낄낄 웃으면서도 날카롭게 핵심을 찔러오는 플랙의 질문에 펠릭스는 쓰게 웃었다.


‘…똑같이 생긴 나비를 봤으니까.’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때 박물관에서 아저씨의 손에 들려 있던 사진에 찍혀 있던 그 표본의 모양을. 그건 새까만 나비였다. 며칠 전에 봤던 나비에 비해 살짝 부식되어 있긴 했지만 모양만 따진다면 틀림없는 그 나비가 분명했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펠릭스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어떻게 그 나비가 화석처럼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거지? 주인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그리고 악당들은 왜 그 표본을 훔쳐간 걸까. 자신의 약점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아니, 이건 너무 단순한가.’

‘흐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비가 꼭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건 아닐걸? 호크모스보다 나비가 깃든 물건을 가진 사람이 늦게 죽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렇겠지. 그 사람이 죽어야 나비가 돌아올 테니 말이야….’


말끝을 흐리며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가상의 체스판 위로 다시 정렬되는 판의 모습을 펠릭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맨 앞쪽에 나열되어 있던 다섯 개의 말 중 하나가 아웃되었다. 현재 파악되는 악당의 수는 넷. 그리고 아마 뒤에 있을 무수한 졸개들. 이걸 소수의 집단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다.


정말 이들이 조직이라고 한다면….


펠릭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음모론 취급하지만 자신은 꽤나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이름이다. 카더라로만 알려져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간 파리에서 일어났었던 정치적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아주 없을 법한 소리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세워낸 가설대로라면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 파리의 상황을 조작해왔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자신만 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저번에 만났던 덥수룩한 갈색 머리의 기자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조직의 이름을 생각하자니 괜시리 심경이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건데.


지금 꽤나 그럴듯한 가설이 하나 떠오르긴 했지만 아직 몇 가지 정보가 부족했다. 일단 좀 더 정보를 모으고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전에 그 동굴이 있던 장소를 다시 둘러보는 정도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겠지.


‘파트너~ 혹시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난 빨리 죽긴 싫다구. 능글맞게 웃으며 엄살을 부리는 플랙의 말을 펠릭스는 가볍게 무시했었다. 하지만 그도 이 일이 위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더 큰 일이 닥치기 전에.


회상에서 벗어난 펠릭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지금은 사실 그것보다 신경쓰이는 일이 있단 말이지.


마리네뜨의 얼굴을 떠올리자 펠릭스의 기분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상당히 큰 사건이 터져서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그 때 당시의 마리네뜨의 행동은 분명 레이디버그와 닮아 있었다. 물론 머리색과 눈색은 일치하지만 이 넓은 파리에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만도 수백은 될 테고, 그 중에서도 하필 자신과 같은 학교에다 같은 학년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는 우연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보다 레이디버그의 정체를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펠릭스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왜지? 좋아하는 상대라면 당연히 정체가 궁금해야 할 텐데. 어째서?



“도련님?”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퍼뜩 놀라 재빨리 제 가슴 쪽을 내려다보았다. 플랙은 이미 눈치껏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자신을 부른 상대가 누군지는 뻔했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옆을 돌아보았다.



“엘렌.”



두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들을 들고 있는 엘렌이 보였다. 언제나와 같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올리고 있긴 했지만, 오늘은 일이 없는지 엘렌의 옷차림은 평소에 입던 정장이 아니었다. 하얀 티셔츠 위에 카키색의 가디건을 걸친 채 긴 청바지를 입고 있는 엘렌의 모습은 편한 차림이라 그런지 특유의 딱딱한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알게 모르게 경계하는 펠릭스와 달리 엘렌은 거리낌없이 펠릭스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도련님은 어쩐 일로 여기에?”



사람 많은 거 싫어하시잖습니까. 무덤덤하게 묻는 엘렌에게 펠릭스는 가볍게 대답했다.



“필요한 책이 들어왔다고 연락을 받아서. 그러는 당신은?”



엘렌이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봉지들을 가만히 들어올리자 펠릭스는 대번에 납득했다.



“아직도 거기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나 보지?”

“네.”



묵묵히 대답하는 엘렌의 얼굴에 살짝 씁쓸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에 놀랐지만 펠릭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고아원 출신이라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거기서 자랐죠.”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에도 마냥 무심하게 대답하는 엘렌에게 펠릭스는 조금 더 물었다.



“숙부님이 당신을 지원해줬다고 들었어. 학비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생활비까지 전부 다.”

“제가 쓸만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버려졌을 겁니다.”

“그래서 숙부님을 따르는 건가? 은혜를 갚으려고?”

“네.”



단호하게 대답하다가 엘렌은 답지 않게 잠깐 머뭇거리더니 딱 잘라 말했다.



“자기만족입니다.”

“….”

“제가 하는 일들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딱딱한 어조로 대답하는 엘렌의 목소리에 펠릭스의 손끝이 일순 차가워졌다. 동요하는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펠릭스는 재빨리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냈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리고 있었다.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꺼낸 걸까. 자신이 아는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펠릭스로서의? 그도 아니면 블랙캣으로서의?


어디까지 가늠해야 할지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이상 물어보는 건 너무 과한가? 아니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건가? 이건 기회인가,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역시,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펠릭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뭐하는 거냐고 짜증스레 돌아보던 펠릭스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말없이 어딘가를 쳐다보는 펠릭스를 의아하게 보던 엘렌의 고개가 펠릭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마리네뜨를 발견한 엘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저 아가씬….”

“…아는 얼굴이야?”

“도련님을 쫓아다니던 분이시라는 것 정도는.”



젠장. 속으로 낮게 욕지기를 뱉으면서 펠릭스는 가만히 질문했다.



“숙부님도 알아?”

“아니요.”

“어째서?”

“신경쓰실 만한 안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담담히 대답하던 엘렌이 펠릭스에게 되물었다.



“신경이 쓰이시나요?”

“별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대답하던 펠릭스의 시야에 마리네뜨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찍혔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펠릭스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여유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표정으로 제 옆을 스쳐가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엘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마리네뜨를 펠릭스는 간발의 차이로 받아냈다. 소녀를 받아내자마자 펠릭스의 얼굴 위로 확 달아올라 있었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침몰했다. 어느 새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고 이것저것을 지시하는 펠릭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렌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몽롱했다.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나른한 기분이었다.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에 이대로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아. 일어나면….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마리네뜨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자, 조금씩 선명해지더니 이윽고 옅은 분홍색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여기가 어딘지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방이었다.


살짝 시선을 내리니 따뜻한 이불이 자신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이마에 얹어져 있떤 시원한 무언가를 손으로 끌어내렸다. 수건이었다. 두통이 좀 가시니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억이 그러니까….

헉, 에스미!



“으아, 난 죽었다!”

“무슨 일이야, 공주님? 잠은 잘 잤어?”

“꺄악!”



갑작스레 들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워워, 진정하라구. 침대 바로 앞 의자에 앉아서 제 쪽을 응시하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블랙캣…?”



어떻게 여기에. 콜록거리며 자신을 마주하는 마리네뜨에게 가까이 다가간 블랙캣이 한 손을 들어 마리네뜨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음, 너 열이 심하던데, 지금은 좀 괜찮아졌네.”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무단침입으로 신고할 거야….”

“그래그래, 일단 몸이나 나은 후에 신고를 하든 때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하하 웃으면서 걱정스럽게 제 이마를 이리저리 짚어보는 블랙캣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뭔가가 보였다. 물이 가득 담긴 대야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수건.


간호해준 건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에 마리네뜨는 살며시 긴장을 풀고 블랙캣의 손에 이마를 톡 기댔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열에 들떠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응, 그래.



“좋네요. 블랙캣 손.”

“뭐?”

“차가워서…. 기분 좋아요.”



헤실헤실 웃으며 중얼거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급히 정신을 차렸다.


뭐지, 이 간질간질한 기분은?



“근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감기에 걸린 거야?”



이 날씨에. 민망한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애써 화제를 돌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별 생각 없이 멍하니 대답했다.



“아, 최근에 물벼락을 맞을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물벼락?”



의뭉스럽다는 듯이 되묻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으악,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아, 네네. 제, 제가 좀 재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비가 갠 후에는 꼭 우산을 들고 다니기도 하고….”



제가 대답하고도 참으로 그럴듯한 이유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흐뭇해졌다가, 또 다시 씁쓸해졌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직감이 생겼다지만 여전히 불안한 탓에 비가 개인 날은 자연스럽게 우산을 들고 다니게 된다.


여전히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블랙캣의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마리네뜨는 머리를 쥐어짜냈다. 아, 맞다!



“근데 정말 우리 집에는 어떻게 왔어요? 혹시 집주소 관리하는 곳 뭐 그런 데서 일해요?”

“설마. 그리고 개인정보 멋대로 빼내는 건 불법이거든?”

“그럼요?”

“…지나가는 길에 니가 쓰러지는 걸 봤어. 따라와 봤다가,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말이야. 오늘 부모님 집에 안 계시다며?”



살짝 뜨끔했지만 블랙캣은 애써 적당히 둘러댔다. 솔직히 거짓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마리네뜨는 다른 부분에서 깜짝 놀랐는지 이불을 끌어당겨 제 목 아래까지 꽁꽁 감쌌다.



“헉.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스토커예요?”

“웃기시네. 니 친구가 말해주고 갔어. 애초에 네 옷도 그 녀석이 갈아입힌 거잖아.”

“어 그러고 보니….”



슬쩍 내려다보니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뻘쭘해졌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는 마리네뜨를 블랙캣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애초에 난 한참 뒤에 왔거든? 말해두겠는데 정말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길래 확인 차 온 거야. 잠깐 봤더니 이제 좀 괜찮은가 싶어서 가려고 했는데 니가 손을 뻗어서 날 붙잡았다고.”

“내가 그랬다구요?”

“그래. 그러니 그냥 가기도 뭐해서 열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말들 뿐이었지만 블랙캣의 눈빛이 더없이 진지해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면 신기했다. 변신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신경써주고 있는 걸 보면 그 때 공원에서 꽤 인상이 좋았던 건가? 하지만 그 때 별반 좋은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은데. 속으로 고민하다가 다시금 몰려오는 두통에 마리네뜨는 그냥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나저나,



“근데 진짜 대체 어떻게 들어왔어요? 문은 잠겨 있었을 텐데.”

“창문으로 들어왔지.”



자랑스레 대답하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역시 스토커로 신고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의심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블랙캣이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더니, 곧 체념했는지 한숨을 내쉬면서 진지하게 입을 열였다.



“혼자 누워 있는 건 생각보다 훨씬 외로우니까.”

“아….”

“그, 그래서 그냥 가기가 뭐했던 것뿐이야! 절대 니가 특별하다거나 뭐 그래서가 아니라고!”



되려 찔리는지 버럭 소리지르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 모습이 얄미웠는지 하여간 넌 애가 뭐 그렇게 몸이 약하냐고, 살다살다 여름에 열이 올라서 길거리에서 쓰러진 애는 처음 봤다고 냅다 잔소리를 퍼붓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질문을 툭 던졌다.



“블랙캣. 그럼, 혹시 나 쓰러질 때 누가 날 받아줬는지 알아요?”

“그, 글쎄? 잘 모르겠는데?”



뜨끔해서는 단번에 부정하는 블랙캣을 마주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내가 도끼병인 걸까요? 쓰러지기 직전에 절대 그 자리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을 본 것 같았거든요.”

“….”

“이번에까지 도움받으면 두 번째인데…. 에이, 아무래도 아니겠죠.”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야?”

“맞아요.”



생각만으로도 좋은지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가슴 한 켠이 답답해졌다. 동시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이 녀석이 레이디버그일까? 이렇게 여려만 보이는데.



“대체 어디가 좋은데? 그 녀석.”

“그냥 다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대답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사랑같은 감정에 휘둘리는 거 지겹지 않아?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 거 같고.”



마리네뜨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쏟는 시간이 아까울 리가 없잖아요.”



블랙캣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동의하는 건지, 아니면 이런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이상한 건 나려나. 마리네뜨는 살풋 웃었다. 지금 블랙캣의 얼굴을 보면 분명 굉장히 꺼려지고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렇게도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때의 일.



“블랙캣, 내 이야기도 잠깐 들어줄래요?”

“뭔데.”

“고민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아서요.”

“어떤 고민이야?”

“…말하기 좀 그런데. 아무튼 좀 힘든 일을 겪었거든요.”



헤헤 웃던 마리네뜨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조금 힘들었어서. 그렇다고 막 그만두고 싶은 건 아닌데 내가 계속 이 일을 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고….”



추욱 고개를 숙이는 마리네뜨의 손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는 죄수마냥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던 마리네뜨의 머리 위로 무덤덤한 말이 툭 던져졌다.



“네 마음에 달린 일이겠지.”



그 한 마디에 마리네뜨의 얼굴에 서서히 놀라움이 번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블랙캣의 표정이 눈에 보였다. 웃고 있지만 평소처럼 장난스럽지 않았다. 의문이라던가 망설임이라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곧고 선명한 진심을 눈동자에 내비치고 있었다.



“너의 정의에 따라 가면 돼. 만약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가도 상관없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도망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너한테 선택을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누구도.”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것처럼 가벼운 대답이었지만 초록빛 눈동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런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블랙캣도, 그럴 때가 있어요?”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마리네뜨의 의문에 블랙캣은 간단히 답했다.



“있지.”



쳇바퀴처럼 굴러오는 삶의 무게가 가끔 너무 버거워서, 가끔 모든 것을 다 던지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한 때일 뿐. 누구보다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충동은 언제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바스라졌었다.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이 모습은 그런 내게 주어진 선물인 걸까.


속으로 피식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다시금 질문했다. 



“블랙캣은 어떻게 했어요?”

“나는 계속 버텼었지.”

“왜요?”

“이게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했거든. 그 길의 끝 정도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



선선히 대답하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조심스레 물었다.



“…힘들었나요?”

“조금은. 그래도 괜찮아. 그랬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잠깐 멈칫하더니, 픽 웃으며 손을 들어 마리네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무리할 필요는 없어.”



나와 너는 경우가 다르니까.



“그냥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듯이, 네게도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겠지. 그럼 그걸 하면 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마리네뜨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위로하듯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푸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그게 싫지 않다고 여기는 자신을, 블랙캣은 그제서야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생각보다 쟤를 별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네?’


플랙의 말을 떠올리며 블랙캣은 깔끔히 인정했다.


그래, 나는 네가 싫지 않아. 언젠가부터 싫지 않았어. 열심히 노력하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후회하지 않을 거라 말하며 나아가기를 망설이지 않는 네 모습을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나도 참 멍청하군.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설핏 웃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살며시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블랙캣.”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한 마디였지만, 마리네뜨가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살며시 웃고 있지만 어딘지 처연하게 느껴지는 마리네뜨의 미소를 보며 블랙캣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건….



“바보같은 줄만 알았는데 믿음직스러운 구석도 있네요.”



어느 새 기운을 차렸는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어이, 난 원래 똑똑…. ……?!”



블랙캣은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어라, 이 상황은…?


‘꽤 믿음직스럽네. 맨날 바보짓만 하는 줄만 알았는데….’

‘어이, 레이디. 나는 원래 똑똑하다고!’

‘네, 네. 알았으니 어서 저거나 처리하자구.’


막아두었던 둑이 터지듯,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기억들에 블랙캣은 말을 잃었다. 살짝 경악에 찬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가만히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블랙캣?”



설마?



“…나, 난 원래 똑똑하다고!”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는 너스레를 떠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별 일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금 웃으며 대답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가봐야 하지 않아요?”

“엉?”

“난 괜찮으니까.”



웃고 있는 마리네뜨와 달리 블랙캣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몸조리 잘 해.”

“네.”



그 말을 듣자마자 블랙캣은 창문께로 다가가더니 휙 날아서 사라졌다. 블랙캣이 모습을 감춘 걸 확인하자마자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티키, 거기 있어?”

“응.”



바닥에 던져져 있던 가방에서 뾰로롱 날아오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가 반가움을 표시했다. 환하게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로 달려든 티키가 뺨을 부볐다.



“쓰러졌을 때 깜짝 놀랐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해.”



사과하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나저나 배고프지 않아? 내려가서 뭐라도 먹을래?”

“그럴까? 헉, 그나저나 에스미는 어떡하지?”

“괜찮아. 그 애라면 엄청 걱정하는 눈치였는걸. 나중에 전화해주면 될 거야.”

“그렇겠지…?”



반신반의하며 마리네뜨는 조심스레 계단을 통해 부엌으로 내려갔다. 오늘 부모님은 두 분이서 나들이를 가셨으니 한동안은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식빵 몇 개에 잼을 발라 하나를 입에 물고, 나머지를 접시에 담았다. 총총거리며 소파로 다가간 마리네뜨가 근처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들고 TV를 켰다.


맨 처음 보이는 건 어떤 남자의 얼굴이었다.



[현재, 흉악한 범죄자 랄프 커티스는 인질 하나를 붙잡고 5구를 지나 14구 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TV를 켜자마자 쏟아지는 속보에 마리네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뉴스 앵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6월 30일에 발생되었던 감옥 붕괴 사건의 탈주범들은 대개 검거되었으나, 커티스는 경찰의 조사망을 피해 근처 모텔에 숙박하던 중 여관 주인의 신고로 인해 위치가 파악된 것에 앙심을 품고, 주인집의 아이를 붙잡아 인질극을 계획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잠깐만, 6월 30일이라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 도난 사건이 있었던 날이었다. 그 때 블랙캣이 분명 감옥을 부수고 탈출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점점 심각해지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티키가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마리네뜨…?”



티키를 마주보며 마리네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 14구 쪽에서는,



“가까이 오지 마!”



칼을 아이의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댄 채로 버럭 소리지르는 랄프에 경찰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건 그들의 앞에 서 있던 블랙캣도 마찬가지로, 비열한 악당을 노려보며 블랙캣은 생각에 잠겼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벌인 일의 파편이니 자신이 수습하는 게 맞다 생각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참으로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상대하는 악당 놈들보다는 편하기는 했지만 인질을 잡고 있다는 것이 조금 성가셨다.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빨리 차를 가져오라고 소리지르는 랄프를 보니 블랙캣은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여간 악당들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군. 이대로 냅두면 아이를 구하는 게 힘들어진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랬다간 말이 많아질 테고. 여차하면 조금 다치는 것을 감수할까도 고민하던 블랙캣은 제 옆으로 뛰어내리는 레이디버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레이디! 여긴 어떻게…?”

“어떻게라니. 악당이 있는 곳에 영웅이 있어야지~?”



블랙캣을 돌아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게 마냥 안타까워 슬프게 눈가를 일그리는 블랙캣을 모른 척 하면서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단 저 자를 붙잡는 것부터 생각하자.”

“방법이 있어?”

“음…. 블랙캣, 잠시 악당의 주의를 끌어줄 수 있겠어?”

“분부대로.”



눈을 찡긋거리며 앞으로 나서는 블랙캣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살짝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이후로는 처음으로 변신하는 거네.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것에 레이디버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편해진 걸까?



“거기, 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야?”



크게 소리지르는 블랙캣의 뒤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도 이런데 부모님은 오죽할까. 지금 구하지 않으면 분명 아이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아이를 구하려고 하면 저 남자가 아이의 목을 긋겠지. 틈을 낸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몇 초 정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무사히 구할 수 있지?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 방법을 떠올린 자신에게 레이디버그는 순간 혐오를 느꼈지만 애써 견뎌냈다. 그럼에도 한 번 떠올리니 자꾸만 잡생각이 뇌리를 둥둥 떠다녔다. 가령, 저런 남자 정도는 돌멩이 하나를 던져서도 죽일 수 있다는 거라던가.


안 돼. 이러면 저 남자랑 다를 게 없잖아.


애써 상념을 떨쳐버리고 레이디버그는 범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미 악당을 실컷 도발하고 있는 블랙캣을 흘낏 쳐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아주 잠깐이라도 아이의 목에서 칼날이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면.’



“이 새끼가!”



블랙캣의 도발이 먹혔는지 남자는 식칼을 들고 있던 손을 쭉 앞으로 뻗으며 뭐라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랄프가 다시 팔을 내리려던 순간 레이디버그는 있는 힘껏 그를 향해 뛰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앞으로 파고드는 레이디버그에 랄프는 기겁하며 들고 있던 식칼을 레이디버그에게로 내리쳤다. 슬로우 모션처럼 내려오는 칼날이 푸른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레이디버그의 손이 식칼의 날을 꽉 붙잡았다.



“레이디버그!!”



경악해서 소리지르는 블랙캣과 더불어 경찰들도 깜짝 놀랐는지 몇몇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식칼을 꽉 붙잡은 채로 레이디버그는 다른 손을 내밀어 남자의 복부를 주먹으로 세게 쳤다. 컥,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는 랄프에게서 아이를 뺏어들며 레이디버그는 천천히 식칼을 놓았다. 챙- 소리를 내며 식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쉬이, 이제 괜찮아.” 



눈물범벅인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며 레이디버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기절해버리는 아이를 안고서 살짝 한숨짓는 레이디버그 앞으로 블랙캣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레이디, 손은?! 손은 괜찮아?”

“아, 그거?”



레이디버그는 씨익 웃으며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블랙캣에게 식칼을 잡았던 손을 내밀었다. 손에 끼워져 있는 튼튼한 장갑을 보고 멍해진 블랙캣의 얼굴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강철 장갑이야. 손은 멀쩡하니 걱정하지 마.”

“….”

“그나저나 어서 도망가야겠다. 사람들이 오고 있어.”



아이를 경찰에게 넘겨주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잡아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따라오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작은 불안을 느꼈다. 역시 내 태도가 좀 이상했나? 최대한 태연하게 굴려고 애쓰기는 했는데 역시 어색해 보였는지도. 감정을 숨기는 데는 서투르니까.



“저, 블랙캣….”



주위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확인하고 레이디버그는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며 레이디버그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블랙캣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발버둥을 치려고 했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끌어안는 블랙캣의 손길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멈칫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놀랐는지 블랙캣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걱정 끼치지 마, 가뜩이나 넌…!!”



몸도 안 좋은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블랙캣은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블랙캣이 정말로 걱정했다는 것을 아는지 레이디버그는 살짝 웃으며 블랙캣의 등을 토닥거리다가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리고는 웃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본인은 밝게 웃는다고 웃는 것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지는 미소. 처연하게 웃는 얼굴은 방금 전에 만났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블랙캣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닮았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지금 레이디버그의 표정은 아까 본 마리네뜨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블랙캣이 다시금 물었다.



“아까 왜 그런 거야?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아이를 구할 방법이라면 있었잖아.”

“…그 사람을 죽이는 거?”

“동정할 가치도 없는 악당이야.”

“그래. 하지만 그걸 판단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잖아.”



입을 꾹 다무는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쓸쓸하게 읊조렸다.



“알아,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시 올 거라는 거. 방금처럼 그냥 붙잡아 경찰에 넘기는 방식으로는 끝낼 수 없는 상대들도 있으니까.”



푸른 눈동자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며칠 전에 상대했던 미스터 피죤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침묵하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블랙캣. 내가 말하지 않았지?”

“….”

“나, 미스터 피죤의 원래 모습이 누군지 알아.”

“뭐?!”

“정확히는 알자마자 금방 그렇게 댔지만.”



덤덤하게 털어놓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설핏 고뇌가 어렸다.



“죽음이라는 거,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진짜로 보니까 충격적이더라. 내가 아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니….”



하하,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레이디버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해야 한다면 해야겠지. 알고 있어. 하지만 가급적 그러고 싶지 않아. 살릴 수 있다면 살리고 싶어. 살아서 죄값을 치르게 하고 싶어.”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절대로.



“우린 또 다른 악당들을 죽여야 하겠지. 어쩔 수 없게도.”



왜냐하면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니까.


레이디버그가 후련하게 미소지었다. 마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각오는 했어.”

“…무슨 각오?”



차분하게 되묻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라는 말로 도피하지 않을 각오.”



죽음의 무게는 평등하다. 그 누구도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내가 영웅이건 그들이 악당이건 그런 건 중요치 않아. 그저 서로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며 그 결과가 죽음일 뿐이라는 것 말고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자신이 죽게 되든, 그들이 죽게 되든. 상대가 어떤 흉악무도한 악당일지라도 그걸 심판한다는 마음을 가진 채로 그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그랬다간, 분명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상대들과 싸우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고 싶어. 설령 그 길을 걷기 위해 부딪히고 아파해야 하더라도,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거야.”



옆으로 돌아선 레이디버그가 양손을 등 뒤로 모아 깍지를 꼈다.



“…이게 나의 대답이야.”



미스터 피존 사건에 대한.


레이디버그는 굳이 그 다음 대답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짐작했기에 블랙캣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네가 싫다면 너를 붙잡을 수는 없다는 거 알아. 이런 나를 약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때에 이렇게 망설이는 내가 바보같아 보일지도 몰라.”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제 시선을 피하는 레이디버그의 옆얼굴에서 블랙캣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조금 망설이던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들어 블랙캣을 돌아보았다.



“나를, 믿어줄래?”



초록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제까지 중 제일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블랙캣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그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도 레이디버그는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왠지 그라면 자신을 믿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절의 말을 듣는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슬플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 레이디버그는 정말로 놀랐다. 언제부터 내가 너를 이렇게 신뢰하게 된 걸까.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시선에 블랙캣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가, 곧 피식 웃었다.



“…응, 믿어.”



선선히 대답하는 블랙캣의 어조는 장난스러웠지만, 눈빛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믿지 않을 리가 없잖아.”



확신을 주듯이 재차 말하며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똑바로 마주하며 제 진심을 입에 담았다.



“당신은 정말로 강한 여자야.”



그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고마워.”



그리고 그 말에서조차 블랙캣은 마리네뜨의 모습을 읽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좋아!”



룰루루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마리네뜨는 길을 걷고 있었다. 감기도 다 나았고 오늘 날씨도 지금 기분도 최고로 좋은 상태였다.


오늘도 그 공원에 있을까?


마리네뜨의 손에는 감기에 걸린 날 뽑아왔던 오페라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물론 쓰러졌던 것에 대해서는 에스미의 어마무시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긴 하지만 그래도 공짜 티켓이 생겼으니 다시 펠릭스에게 말을 걸 구실이 생겼다. 거절당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겠지.


저번에 갔던 공원으로 가자 예상대로 펠릭스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마리네뜨는 살짝 볼을 붉혔다. 아아, 오늘도 멋지구나.


무시할 거라는 건 알지만 마리네뜨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펠릭스, 안녕!”

“…안녕.”



책을 덮으며 펠릭스가 인사를 건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 긴장해서일까, 펠릭스가 순순히 인사를 받아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마리네뜨는 가만히 펠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잘 생각나지 않았다. 지긋이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나, 나랑 이번에 열릴 오페라 같이 가지 않을래!”



엉겁결에 말한 뒤에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헉, 아니 이게 아닌데! 난 좀 더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했다고!


망했다. 난 왜 이 모양이야아아…! 속으로 절규하고 있던 마리네뜨는 차분하게 돌아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오페라인데?”

“시, 십이야라고….”

“언제, 어디서?”

“이번 주 토요일 오페라하우스 저녁 7시쯤에….”



횡설수설 열심히 설명하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가 딱 잘라 말했다.



“갈게.”

“뭐?!”

“싫으면 말고.”

“아니아니아니! 싫을 리가 없잖아!”

“그럼 그 날 봐.”



펠릭스는 그 말만 남기고 휙 돌아섰다.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마리네뜨를 뒤에 남겨두고 떠나가는 펠릭스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명확하지 못한 건 질색이다. 의심이 생겼다면 뭐라도 해서 어떤 방향으로든 해소하는 것이 옳은 법이겠지. 결론이 어떻든 간에.


확인해 봐야겠어.

돌아서는 펠릭스의 눈빛이 비장하게 빛났다.




===


드디어 두자릿수 회로 들어섰습니다! 웹연성은 후기를 쓸 수 있어 편리하네요.

10화는 후루룩 지나갔죠.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예ㅇㅁㅇ)~


몇 가지 사담을 해보도록 하죠.

제가 암시를 하고 있지만 에스미는 마리네뜨의 정체를 얼핏 눈치채고 있습니다. 물론 에스미의 성격이라면 마리네뜨가 말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절대 직접적으로 묻지 않을 거고 마리네뜨가 입을 열 일은 아마 없겠지만요.


피죤 사건으로 애들이 충격을 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특히 일반인(?)인 마리네뜨의 입장에서는 충격이 컸을 테고요 얘 여고생입니다 여고생. 네, 이런 부분의 묘사를 굳이 순화할 생각은 없었어서 좀 자세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9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계속 뭔가가 터질 거 같아요 이야 기대되지 않아요ㅇㅁㅇ)?(다들: 님만 기대하는 거겠지


마리네뜨가 짐작한 대로 감옥 탈출 건은 블랙캣이 감옥 부수고 나왔던 그 사건입니다. 고대의 재앙으로 감옥을 부수고 나왔고, 그 소란 속에서 몇 명의 죄수들이 탈출을 했는데 경찰 쪽에서 거의 다 잡았지만 마지막 한 놈이 저놈이죠 ㅇㅇ 솔직히 그 사건 시작부터가 경찰 잘못이라 뭐 그쪽에서 영웅들한테 할 말은 없겠지만(...) 


엘렌과 펠릭스의 관계는 굉장히 즐겁게 짰답니다. 엘렌은 나탈리와 같은 포지션이지만 성격은 많이 다릅니다. 어찌 보면 펠릭스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포커페이스 능력은 펠릭스보다도 뛰어나긴 하지만요. 그리고 플랙이 펠릭스에게 하는 말은 제 마음의 소리입니다(...) 한여름에도 그렇게 입고 다닐 거 알아 펠릭스...하...



마리네뜨를 방까지 데려와준 건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펠릭스입니다.


과정이 정확하게,

쓰러지는 마리네뜨를 간발의 차로 받아낸 펠릭스가 에스미와 같이 택시를 불러서 마리네뜨를 데리고 집으로 가요. 그 후에 펠릭스는 에스미한테 맡겨두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도 있고 에스미도 급한 전화를 받고 집에 돌아가야 했는지라, 괜히 찜찜한 탓에 블랙캣으로 변신한 뒤에 창문으로 들어온 거랍니다. 이건 마리네뜨에 대한 관심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있지만, 본인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예요. 펠릭스의 부모님은 8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플 때 혼자 있는 게 누구보다 외로운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본인 모습으로 남아 있으면 분명히 마리네뜨에게서 달갑지 않은 오해(...)를 살 것이 분명하기에 블랙캣으로!


펠릭스의 삶이 좀 많이 골치 아픕니다(...) 마리네뜨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펠릭스의 삶도 나름 험난하기 짝이 없답니다. 아 이건 스포니 일단 패스. 펠릭스의 삶에 대한 언급이 맨 처음 등장하는 건 1권 외전이지만 그건 웹상에 올릴 생각이 없어서요 ㅇㅇ;


다음 에피소드는 모두가 예상하시겠지만 데이트입니다^ㅁ^ 하하 평온한 데이트가 되기를 바라네요 진심으로(...)


뭔가 더 많이 적고 싶지만 너무 시끄러울 것 같아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번 회에 담은 이야기가 많아서인지 자꾸 말이 많아지네요;


빨리 11편을 올릴까 했는데 그럼 기다리는 재미가 없을까봐 나중에... 재판 수요조사 기간이 13일이었지만 일주일 늘릴 계획인데 그 전까지는 12편 모두 확실하게 올려둘 것을 약속드립니다 ㄷㅅㄷ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상은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답니다ㅇ.<

Posted by I.R.E
,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9.

운수 좋은 날







꿈을 꾸고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말이지~ 내가 어제 밤에….”

“그 드라마 남주인공이 완전….”



여느 때와 같은 아침 등교 시간이었다. 하하호호 떠들고 있는 학생들 사이로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저번에 그건, 뭐였지?


사라졌다고 생각한 동굴이 다시 나타나고 그 동굴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 그건 아무리 봐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때 실수로 드론을 부수지만 않았더라도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일에 연연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없다.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는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자신들이 막을 수 없는 범주일지도 모른다. 치밀하게 계획된 판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우스웠다. 단순히 악당을 해치우면 평화가 찾아올 거라 생각했던 건가? 그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여기는 현실이다. 생각해보면 악당들은 자신들을 적당히 상대해주기는 했지만 결코 전력으로 덤빈 적은 없었다. 여차할 때는 후퇴했다가 다시 나타나고, 늘 그랬었다. 마치 놀아주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을 때마다 다른 곳에서 미심쩍은 사건들이 하나씩 터졌었지. 아마 자신이 파악한 것보다 더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히어로 놀이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답지 않게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영웅 따위가 있을 리가 없는데. 그게 자신일리는 더더욱.


뒤에 누군가가 있다. 아주 영리하고 머리 좋은 누군가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파리의 상징 중 하나라고 불리는 루브르까지도 거리낌없이 터트릴 수 있는 상대였다. 대체 누구지? 뭐라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단서가 없었다. 배후가 누군지도 모르고,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에 대한 목적도 파악하지 못했다.


꼭 블라인드 체스를 두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서로의 정체를 감춘 채 그저 손만 내밀어 체스를 두게 되는 두 사람.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표정조차도 보지 못하는 상대의 수를 읽고 저쪽의 킹을 잡아야 한다.


현재까지 나타난 악당은 총 다섯. 하지만 아마 정말로 뒤에 어떤 조직이 있다면 폰에 해당되는 조직원들은 수십이 넘을지도 모른다. 상황을 봐서 아마 그들이 전면에 나설 일은 없을 것 같고, 아마 계속 악당들을 이용해 이쪽을 견제하겠지.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리 자주 나타나지는 않는다. 사실 한꺼번에 나타나서 우리를 없애는 게 여러 모로 더 편할 것 같은데, 그동안의 패턴을 보면 희한할 정도로 나타나는 빈도수를 조절하고 있어. 우연일까? 아니면….


신중해야 해.


한 발자국만 나가도 잡아먹힐지 몰라. 어떤 함정을 파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나타날 때마다 미라큘러스를 내놓으라고, 마치 미라큘러스가 본인들의 최대 목적인 것처럼 말을 한다. 정말로? 그렇다면 왜 우리를 없애려 들지 않는 거지. 다섯 명이서 동시에 덤비면 우리를 상대하기가 더 수월할 텐데.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상대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다. 가상의 체스판 앞에 앉은 채로 펠릭스는 살짝 저 건너 어둠 속을 훑어보았다. 마치 베일같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상대의 표정은 과연 어떨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짐작이 전혀 가지 않는다구? 정말로?


머릿속에서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펠릭스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생각했다. 아직은 아니야, 확신할 수 없어. 직접 내 눈으로 본 게 아니기도 하고. 속단은 금물이니까.


웃기지 마. 넌 이미 근접한 답을 찾아냈을 텐데?


비웃음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펠릭스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인정하기 싫은 것뿐이잖아.


저번 사건 때 레이디버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레이디버그는 이 일의 배후에 있는 존재가 호크모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미라큘러스를 가진 자의 소행이라고 했다.


호크모스(Hawkmoth)

제가 아는 뜻이 맞다면 그 이름의 뜻은 분명 박각시나방.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그들의 상징대로 이름이 지어진 것을 보아 분명 이 히어로의 상징도 그 뜻대로겠지. 나방, 나방이라. 나방과 비슷한 종류의 무언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것.


그러고 보면 원래부터 징후들이 몇 개 있긴 했었다. 예를 들면 박물관의 뒤편에 있던 숲에 나타났던 사람들. 그 때 동굴에서 무언가를 옮기고 있던 이들은 모두 검은색의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드론이 부서지기 직전 얼핏 본 그 문양은 옅은 자주빛의….


‘나비 같았지.’


멀리서 본지라 모양을 아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문양은 나비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펠릭스에게 나비라고 하면 가장 맨 처음 떠오르는 인물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은 건지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연관성이 짙은 사물이 있다고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단은 악당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무엇을 목적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저번 그림 도난 사건 때처럼 새로운 악당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플랙 녀석을 다그치니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아낼 수는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묻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았다는 기찬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게으르고 느릿한 성격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럼 앞으로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하겠다고 말하니 플랙 녀석은 아주 우거지상을 지었다.


다른 사람을 악당으로 만드는 능력이라. 그런 미라큘러스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데 대체 왜 우리의 미라큘러스를 노리는 거지? 그렇게 물었지만 플랙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않고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아직은 모르는 게 낫다고 대답하는 플랙에 진심으로 짜증날 뻔했지만 결국 추궁을 포기했다. 딱히 꼭 지금 알아야만 하는 사실도 아니었고 미라큘러스를 넘겨줄 일도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레이디버그에게는 뭐라고 해야 하지.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니까 제대로 확신할 만한 증거를 찾고 나서 말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놈들은 강하다. 우리가 낌새를 눈치챘다 싶으면 정말로 본격적으로 공격해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레이디는 그렇게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타입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손에 낀 반지가 너무도 갑갑했다. 벗어버리고 싶은데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뺄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는 건 알지만 그 방법을 지금 이 타이밍에 쓰고 싶지는 않았다. 두려웠다.


‘믿고 있는 게 당연하잖아.’


네가 다시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게 될까봐.

계속 이 상태로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영원히 감출 수 있는 진실같은 건 없으니까. 하지만….



“펠릭스?”



헉. 화들짝 놀라며 펠릭스는 마냥 눈을 깜빡거렸다.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누군지 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잠잠하던 푸른색 눈동자에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 걱정스러운 시선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낯빛이 어두워보이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헉, 세상에. 땀을 왜 이렇게 흘리고 있어? 괜찮아?”

“….”

“아, 잠깐만!”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낸 마리네뜨가 펠릭스의 얼굴에 손수건을 가져가려다 흠칫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제 얼굴의 땀을 닦아내는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펠릭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맙지만 이제 됐어.”

“어…?”

“먼저 갈게.”



평소와 달리 살짝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길을 마저 걸어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리네뜨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어디 아픈가?”






청명한 파리의 하늘 위.


에펠탑에서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무언가가 날고 있었다. 무수히 몰린 비둘기 떼들과 사람 하나는 충분히 올라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비눗방울 하나. 비둘기 위에 앉은뱅이 자세로 앉아 있던 미스터 피죤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커다란 비눗방울 위에 올라탄 채로 뒹굴거리며 묻는 버블맨에게 미스터 피죤이 다시금 말했다.



“히어로 녀석들을 죽여서라도 미라큘러스를 뺏어오라고 했던 거 말이야.”

“흐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버블맨의 태도에 미스터 피죤은 정말로 궁금한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요즘 그 녀석들이 우리 일을 많이 훼방놓았다는 건 인정해. 마임맨의 존재를 들켰고, 블랙캣을 도둑으로 몰아서 최소 신뢰를 잃게 하자는 작전도 실패로 돌아갔지. 시민들은 이제 전보다 더 그 녀석들을 믿고 신뢰하니까. 하지만 이 시점에서 굳이 그들을 죽여야만 할 필요가 있냐는 거야.”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아진 미스터 피죤을 가만히 바라보던 버블맨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봤자 아무 소용없잖아. 언제부터 우리한테 선택권이 있었다고. 우린 그냥 명령대로 하면 되는 거야. 깊게 생각하지 마, 아저씨.”

“으음….”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하는 미스터 피죤에게 버블맨은 설마, 하며 되물었다.



“녀석들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



찝찝하단 말이지. 미스터 피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운 날씨였다.


블라인드를 걷어내자 컴컴하던 사무실 안에 햇빛이 들이쳤다. 제레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걷어낸 블라인드 사이로 슬쩍 드러나는 창문 밖의 경치를 말없이 내다보았다.


하지만, 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흥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늘 날씨가 맑아서 좋다던가,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하얗게 빛나는 햇살들이 살을 따갑게 태우고 있음에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청명하게 빛나는 여름 하늘의 푸른색조차도 그의 마음에는 아무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색은 무채색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아, 눈에 띄기는 하겠군. 이것저것.



“부르셨습니까.”



살짝 고개를 숙이는 비서에게 제레미는 등을 보인 채 중얼거렸다.



“상당히 시끄럽군.”



귀가 아플 정도로. 무심히 말하고 있지만 그 말 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지금 제레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엘렌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시방석같은 자리라도 그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는 자리를 뜰 수 없다. 그의 상사는 눈치가 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으니까.


한참 뒤, 생각을 마쳤는지 다시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보기를 보이는 것도 중요하겠지.”



제레미의 입가에 피식 조소가 걸렸다.






“방학이다!”



아아아아아…. 말꼬리를 흐리며 책상에 푹 엎어졌던 마리네뜨가 마구 팔다리를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순간에 축 늘어졌다.



“생각해보니 학교를 못 가면 펠릭스를 못 만나잖아….”



나는 바보야. 책상 위로 눈물을 흩뿌리며 그저 방학이 다가온다고 좋아했던 자신의 멍청함을 마구 탓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에이, 괜찮아. 가끔 공원 나와서 산책하기도 하고 그럴 텐데 뭐. 자주 가는 공원 쪽을 가보면 있을 거야. 학교에서만큼 만나기 쉽지는 않겠지만….”



벌떡, 고개를 들어 티키를 향하던 마리네뜨가 이내 울먹거렸다.



“티키이~!!”



역시 내겐 너뿐이야~!! 두 손으로 티키를 붙잡은 마리네뜨가 티키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작거렸다. 꺄르르 웃으며 그런 마리네뜨의 어리광을 받아주고 있던 티키가 다시금 말했다.



“오늘 느낌 어때?”

“음, 좋아!”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가보자! 분명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펠릭스가 눈매를 살짝 치켜떴다. 심기가 좋지 않을 때의 버릇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펠릭스는 바로 앞에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길래 공원에나 나와서 여유롭게 독서나 하고 들어갈까 했는데, 어째서 이 녀석이 제 앞에 있는 것일까.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가 툭 내뱉었다.



“…스토커야?”



정말로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손사래를 쳤다.



“말했잖아, 요즘 운이 좋다니까?”



그렇게 말해도 영 못 미더운지 한참을 바라보던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리네뜨가 놀라 소리쳤다.



“어디 가?!”

“집.”

“왜! 같이 있으면 뭐 어때서.”

“넌 시끄러워.”



딱 잘라 말하며 앞으로 걸어가는 펠릭스의 뒤를 쪼르르 쫓아오면서 마리네뜨가 말했다.



“그럼 조용히 할게! 응? 이렇게 만났는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안 될까나…?”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놀란 표정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펠릭스의 시선 끝에 마리네뜨가 보였다. 살짝 빨개진 얼굴로 두 손의 검지손가락 끝을 맞대고 헤실거리며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 위로 언젠가의 기억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에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이름 정도는 알아도 좋지 않아요?’


붉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살짝 홍조가 어린 얼굴, 자신을 향해 웃던 맑은 푸른색 눈동자까지.


‘안, 안 될까나….’


설마, 그럴 리가….



“그래도 안 돼.”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하며 펠릭스는 다시 뒤돌아섰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다. 뒤에서 추욱 늘어졌을 녀석의 얼굴이 상상되어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시간되면.”

“응?”



더 이상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지 빠르게 걸어 자신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펠릭스를 가만히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이윽고 환하게 웃었다. 나중이라고 기약을 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역시 오늘은 티키의 말대로 운이 좋은 날인가봐! 싱글벙글 웃으며 공원을 나가려던 마리네뜨가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굳은 채로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물었다.



‘마리네뜨, 왜 그래?’

“티키, 방금 그 소리 들었어?”

‘소리?’

“나, 이 소리 알아.”



새가 우는 듯한 소리. 멍하니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뒤를 돌아 공원 안쪽을 향해 달렸다. 헉헉거리며 한참을 달린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어떤 벤치가 보였다. 많은 수의 비둘기가 모여 있는 벤치에 앉아 있던 중년의 신사를 보며 마리네뜨는 중얼거렸다.



“저 사람….”



자꾸만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마리네뜨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벤치가 점점 가까워지자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우뚝 멈춰선 마리네뜨가 두 손을 뒤로 가렸다. 마리네뜨가 다가온 것을 눈치챘는지 비둘기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활짝 웃음꽃을 피우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손에 들린 피리를 발견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뒤로 모았다. 손끝이 자꾸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마리네뜨는 마주 웃어주었다.



“아저씨.”

“응? 왜 그러니?”

“그, 손에 든 건 뭐예요?”

“아, 이거?”



허허, 웃던 남자는 선선히 답을 들려주었다.



“이건 호루라기란다.”

“아하.”

“평범한 호루라기랑은 조금 다르지. 이건 새를 부를 때 쓰는 녀석이니까.”

“그…, 래요?”

“그럼. 한 번 보겠니?”



남자가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힘껏 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같기도 하고 유리가 울리는 듯도 한 오묘한 소리가 나더니 비둘기들이 남자의 주변으로 날아올랐다. 남자의 팔, 어깨, 무릎과 머리 위로 올라온 비둘기들이 옹기종기 앉아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마리네뜨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둘기들을 보며 마리네뜨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재밌니? 재밌지!”



아이처럼 좋아하는 남자의 모습은 도저히 이 파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악당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속마음을 감추며 마리네뜨는 싱긋 웃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자비에. 자비에 라미에르. 그러는 아가씨는?”

“마리네뜨예요!”

“예쁜 이름이네~”



즐겁게 웃고 있는 남자를 상대로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탐색전에 들어갔다.



“여기에 자주 계시나요?”

“아니, 음…. 사정상 여러 공원들을 돌아다니고 있단다. 뭐 이 녀석들이 있는 곳이라면야 어디든 좋지만.”



애정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제 앞의 비둘기들을 내려다보는 자비에의 모습에서 마리네뜨는 확실하게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다시금 긴장하는 자신에게 괜찮다고 최면을 걸며 마리네뜨가 다시금 물었다.



“비둘기들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지. 마치 내 아이같다는 생각도 가끔 해요.”



사르르 풀어지는 얼굴로 찡긋 윙크하던 자비에의 시선이 비둘기들을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밑에 떨어져 있는 빵쪼가리만 열심히 주워먹고 있는 비둘기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자비에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뭐, 나나 이 녀석들이나 어딜 가든 문전박대를 당하긴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라며 피식 웃는 자비에의 얼굴이 퍽 쓸쓸해 보여서 마리네뜨는 순간 안타까워졌다. 탐색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순간,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비에 씨! 당신 또 여기서….”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다가오는 제복 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비에는 마리네뜨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런. 아가씨는 먼저 가 봐요. 좋은 일은 아닐 거 같으니까.”



즐거웠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자비에를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어 마리네뜨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계속 달려가다가 공원에서 한참 멀어졌을 때서야 멈춰선 마리네뜨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고개를 숙이고 헉헉거리며 들숨날숨을 열심히 반복하던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말을 걸었다.



“마리네뜨….”

“티, 티키. 맞지? 저 사람이지?”



기운이 느껴져? 마리네뜨의 질문에 티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호크모스를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 그의 수하라면, 변신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기운을 감지할 수가 없어.”

“그, 그렇구나….”



아직도 힘든지 마리네뜨의 숨소리가 살짝 거칠었다. 방학이 되어서 며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벌써 체력이 거지가 다 됐다며 웃고 있는 마리네뜨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여서 티키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아?”

“응? 응.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 모처럼 악당 한 명이 누군지 알았는걸.”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마리네뜨의 미소는 평소마냥 밝지는 못했다.





“흐음~”



마리네뜨와 헤어진 뒤, 묵묵히 길을 걸어가기만 하던 펠릭스의 셔츠 사이로 플랙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키득키득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조용히 타일렀다.



“플랙. 밖에 있을 때는 고개 내밀지 말랬지.”



대체 언제쯤에야 말을 들을 거냐고 짧게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 생각보다 쟤를 별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도끼눈을 뜨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뭘 그렇게 흥분하냐는 듯이 태평한 얼굴로 낄낄거렸다.



“그렇잖아~ 니 성격에 정말 싫었으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친절을 발휘하지도 않았을 거고 말이야~?”

“사람을 딱히 싫어하지는 않아. 귀찮을 뿐이지.”



딱 잘라 말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오~?”



일부러 길게 늘여 말하는 플랙이 얄미웠는지 펠릭스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플랙의 이마를 톡 튕겼다. 으앗! 비명을 지르며 펠릭스의 품에서 벗어난 플랙이 꺄하하 웃었다.



“나 잡아봐라~”

“야!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을…!!”



열받아서 소리치려던 순간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에 펠릭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무언가. 플랙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공중에 멈춰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펠릭스는 반지를 낀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플랙이 반지 속으로 빨려들더니 검은 오오라가 반지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반지에서 나오는 검은 빛들이 펠릭스의 몸을 감싸자마자 번쩍 빛이 폭발했다 사라졌다. 펠릭스가 서 있던 자리에 나타난 블랙캣이 펄쩍 뛰어올라 기운이 느껴진 장소로 향했다.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계속 달려가는 블랙캣의 눈앞에 파리의 번화가 중 하나인 샹젤리제 거리가 나타났다. 평소였다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활기찬 거리였어야 할 이곳에는 지금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물난리였다. 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소화전들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물이 한 가득 고여 있었고 물세례를 맞았는지 홀딱 젖은 사람들도 다수였다. 아무래도 이 거리에서 장난치고 있는 상대는 버블맨인 거 같다고 예상하며 블랙캣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난리가 아니네.”



바닥에 있는 물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블랙캣은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침 가고 있는 방향에서 크게 솟아오르는 분수에 블랙캣은 직감적으로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는 블랙캣의 옆으로 순식간에 다가온 레이디버그가 짜증스레 말했다.



“대체 이 물난리는 뭐야?”

“누가 아니래.”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 녀석밖에 없지.”



누가 파트너 아니랄까봐 호흡을 딱딱 맞추던 두 사람은 어느 새 샹젤리제 거리에서도 상당히 넓은 폭을 자랑하는 삼거리 쪽으로 들어섰다. 뭔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



“아니, 내가 왜 하필 네 녀석이랑 같이 싸워야 하는 거야? 난 물이 싫다고!”

“아, 불평 그만 하고 좀 거들어요. 그리고 저도 새는 싫어요. 냄새나는걸.”

“뭐얏?!”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미스터 피죤과 버블맨을 발견하고서 블랙캣은 쟤들 뭐하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레이디버그는 미스터 피죤을 발견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제 뺨을 두 손으로 탁탁 내리쳤다. 정신차려, 집중해야지!


두 히어로를 먼저 발견한 버블맨이 정답게 인사를 건넸다.



“여어, 왔어?”

“너희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이런, 이런. 그 대사 듣는 것도 슬슬 지겹네. 애초에 그만둘 거면 시작도 안 했겠지~ 알잖아?”



빙글빙글 웃는 그 얼굴이 어찌나 얄밉던지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표정이 왕창 구겨졌다. 열받은 얼굴로 공격에 들어가려던 블랙캣을 붙잡은 레이디버그가 작게 소곤거렸다.



“블랙캣, 미안한데 네가 미스터 피죤을 맡아줄 수 있어?”

“응? 그건 뭐 어렵지 않은데…, 왜 그래?”

“아, 아니. 그냥….”



우물쭈물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레이디가 원한다면야.”



그 말과 함께 블랙캣은 재빨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너클 한 쌍을 꺼낸 블랙캣이 그걸 각각 손에 끼고서 미스터 피죤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듯한 그 포즈에 미스터 피죤은 피리를 불며 블랙캣에게로 손짓했다. 비둘기들이 달려들었다.



“뭐야, 내 상대는 너인가?”



비눗방울 위에 올라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보는 버블맨을 노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방에서 날카로운 검을 하나 꺼내들었다. 방울을 다루는 녀석이니 방울을 터트리며 대응하면 된다.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버블맨은 히죽 웃으며 소리쳤다.



“제법 머리를 쓰네?”



대꾸 없이 달려들 준비를 하는 레이디버그에게 버블맨은 피식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이런.



“하지만 말이야. 내 특기가 방울이긴 하지만, 딱히 그것만 할 줄 아는 건 아니거든?”

“뭐?”

“지금 이 물난리를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 말과 함께 버블맨은 들고 있던 비눗방울채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땅이 진동하더니, 주변에 있던 소화전들에서 세찬 물줄기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놀라 주위를 둘러보는 레이디버그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낄낄 웃는 버블맨의 주변으로 모여든 물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했다. 기겁하며 살짝 뒷걸음질치는 레이디버그를 향해 버블맨이 채를 휘두르자마자 수룡(水龍)은 빠르게 아래쪽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꺄아악!”



달려드는 용을 피해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수룡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방향을 비틀더니 그대로 레이디버그를 덮쳤다. 파격음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리꽂힌 수룡이 다시 하늘로 승천하듯이 위쪽으로 크게 솟아올랐다. 미스터 피죤과 싸우다 그 모습을 본 블랙캣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레이디!”



수룡이 사라진 자리에 레이디버그가 쓰러져 있었다. 물에 흠뻑 젖어 검게 물들어 있는 바닥 위에 죽은 듯 엎어져 있던 레이디버그가 쿨럭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블랙캣이 서둘러 레이디버그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미스터 피죤이 보낸 비둘기 떼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가시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블랙캣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비둘기들에게 던졌다. 쌔앵 날아간 그물이 촤악 펴지더니 새들을 바닥으로 깔아뭉갰다. 악! 내 사랑스러운 비둘기들이! 비명을 지르는 미스터 피죤을 뒤로 한 채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에게로 후다닥 달려갔다.



“레이디, 설 수 있겠어?”

“쿨럭, 응. 당연하지.”



흠뻑 젖은 몰골로 상당히 물을 많이 먹었는지 계속 기침해대는 레이디버그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블랙캣이 시선을 위로 돌려 버블맨을 노려보았다. 히죽히죽 웃으며 버블맨은 다시금 물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런 버블맨을 초조하게 지켜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지? 아까와 같은 공격이 또 들어오면….”

“들어오기 전에 막거나 피하면 되잖아.”

“무리야. 아까 피하려고 했는데 방향을 바꾸더라구. 그리고 충격이 엄청나. 나라서 망정이지 일반 사람이 맞았으면 즉사였을 거야.”



당당하게 서 있었지만 방금 전의 충격 때문인지 레이디버그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어느 새 미스터 피죤까지 버블맨의 옆으로 다가온 것에 블랙캣은 속으로 짜증을 냈다. 아, 하나도 성가신데 둘이라니.


잠깐, 둘?



“아까 저 녀석들이 처음에 하던 대화 기억나, 레이디?”



작게 소곤거리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응?”

“그대로 한 번 가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이 몇 마디 속닥거렸다. 살짝 정신이 없는지 넋나간 표정으로 말없이 듣고 있던 레이디버그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될까?”

“그럼, 내가 누군데. 내가 하잔대로 해서 문제 생긴 적 있었어?”

“…아니.”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 레이디버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치며 블랙캣은 다시금 버블맨을 쳐다보았다. 두 번째 공격을 위한 준비를 이미 마쳤는지 이번에 만들어진 녀석은 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절묘하다고 키득거리며 블랙캣은 입가에 가득 미소를 그려냈다. 블랙캣은 봉을, 레이디버그는 각각 검을 꺼내들고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을 가만히 응시했다.


버블맨이 다시금 채를 휘둘렀다. 푸드득 날아 덤벼드는 새를 가만히 지켜보며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새가 아주 근접할 때까지 날아들다가 양 옆으로 나뉘어 피했다. 예상대로 움직임이 둔해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새를 응시하며 레이디버그는 방금 헤어지기 전, 블랙캣이 들려준 봉을 꺼내 바닥에 꽂고 날아올랐다.


미스터 피죤이 있는 쪽으로. 히익, 기겁하며 도망치기 위해 미스터 피죤이 방향을 선회하기 직전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몸을 숙여 방향을 바꿨다. 빠르게 날아오는데다 몸집도 거대해 쉽게 방향을 틀지 못하고 물새는 그대로 미스터 피죤과 충돌했다. 봉에 매달려 있다가, 엄청난 충격과 받고 비둘기들과 함께 추락하는 미스터 피죤을 발견한 레이디버그가 그를 향해 뛰어내렸다.


‘레이디, 지금 우리 힘만으로 저 둘을 다 상대하기는 좀 버거워. 하지만 말이지, 상대하는 놈이 둘이면 써먹을 수 있는 작전이 하나 있긴 하거든.’


가방 속에서 다시금 붉은 검을 꺼내든 레이디버그가 마치 검처럼 몸을 쭉 펴고 아래로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한 녀석을 이용해 다른 한 녀석을 잡자. 저 공격은 강하지만 아예 틈이 없는 것은 아니야. 아마 저 공격도 나보다는 레이디가 표적일 거야. 어떻게든 미스터 피죤에게로 저 공격을 유도해야 해. 내 봉을 빌려가.’


공기저항 때문인지 자꾸만 흔들리려는 중심을 애써 바로잡으며 레이디버그는 티키가 제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악당들은 악당으로 변신하게 해주는 촉매제가 있어. 마치 미라큘러스처럼.’


촉매제를 부수면 더 이상 악당으로 변하지 못하겠지. 그럼 문제를 일으키지도 못할 것이다. 촉매제가 뭔지는 뻔했다. 버블맨은 둘째치더라도 미스터 피죤의 촉매제는 분명….


미스터 피죤의 목에 매달려 있는 호루라기를 발견한 레이디버그의 눈이 매서워졌다.


한편, 미스터 피죤은 자신과 함께 추락하고 있는 비둘기들과 더불어 위쪽에서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내려오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후다닥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아직 저쪽에 남아 있는 새들이 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바로 그 순간, 사무실에 앉아 있던 제레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미스터 피죤의 몸에서 한 순간 힘이 빠졌다. 호루라기를 불어야 했던 타이밍을 아주 살짝 놓쳐버린 순간, 미처 궤도를 수정하지 못한 레이디버그의 검끝이 미스터 피죤의 배를 꿰뚫었다.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뜨거운 핏방울이 튀었다.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미스터 피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차가운 돌바닥 위로 추락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미스터 피죤의 주변으로 물에 젖은 새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파득파득, 애처롭게 날개를 움직이는 새들을 시선을 돌려 쳐다보던 미스터 피죤은 제 배를 뚫어버린 붉은 검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배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과 더불어 검의 주변으로 붉게 번지기 시작하는 자국들에 미스터 피죤은 직감했다.


여기까지인가.


죽음의 그림자가 제 눈가에 드리우고 있었다. 멍하니 제 주변에 있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비둘기들과 자신의 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멀쩡한 비둘기들을 바라보는 미스터 피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내겐 역시 마지막까지 너희들밖에 없구나.


우리가 대체 뭘 잘못한 걸까. 우리는 그저 쉴 장소가 필요했었을 뿐인데. 미스터 피죤이 입을 벙긋거렸다. 힘이 없어 희미한 신음 소리만이 입가로 새어나왔지만, 그는 분명히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 유유자적 이 녀석들과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걸까. 방해된다는 이유로 계속 쫓겨나기만 하고, 어떤 곳에 가더라도 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어디에도 우리가 쉴 수 있는 장소는 없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장소를 가지고 싶었어. 우리를 괴롭히는 인간들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그의 눈가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 까만 눈동자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천천히 손을 들었다. 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팔을 움직여 제 바로 가까이에 있는 비둘기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구구, 기분좋게 우는 비둘기를 보며 미스터 피죤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저, 자신 때문에 휘말려든 이 가여운 아이들이 불쌍할 뿐이었다.


미안하구나.



“이…. 저…. 나….”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가만히 중얼거리던 미스터 피죤의 몸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하얀 빛방울들이 천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구구?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둘기들을 쳐다보며 미스터 피죤은 활짝 웃었다. 새들과 같이 놀던 때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입가에 살며시 띄운 채로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감겼다.


그와 동시에 미스터 피죤의 얼굴 근처에 떨어져 있던 호루라기가 톡,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호루라기 사이에서 나타는 것은 다름 아닌 새까만 색의 나비였다. 검은 나비가 팔랑 날아오르더니 하늘로 날아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나비를 발견한 블랙캣의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공중으로 솟아오르던 빛방울들과 함께 미스터 피죤은 완전히 사라졌다. 시체조차 남지 않은 아름답지만 기괴한 광경에 블랙캣은 말을 잃었고, 버블맨은 이미 도망갔는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디버그는….



“아니.”



망연히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얼굴에 묻은 핏자국조차 신경쓰지 않고, 미스터 피죤이 사라진 자리만을 멍하게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표정은 흡사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아니야, 난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을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이 흡사 피에 범벅되어 있는 것만 같아 레이디버그는 몸을 덜덜 떨었다. 무섭다. 두렵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제 몸을 양팔로 껴안고 몸을 웅크렸다. 춥다. 너무 추웠다. 방금 전 물을 맞았기 때문일까? 여름인데도 마치 겨울처럼 추웠다. 몸의 떨림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저 촉매제를 부수려고 했을 뿐인데. 더 이상 피해가 나지 않기를 바랬을 뿐인데. 이렇게….


살짝 고개를 들자 구구거리는 비둘기들만이 돌바닥 위에 모여 있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저기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다. 존재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붉은 검을 발견한 레이디버그의 몸이 흠칫 튀어올랐다. 내가 휘두른 악몽의 흔적. 스스로가 불러낸, 사라지지 않는 죄의 표상.


내가, 사람을 죽였어?


하하, 자조의 웃음을 토해내던 레이디버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이미 검게 물들어버린 바닥으로 스며들어갔다.


고장난 소화전들, 물로 흠뻑 젖어버린 주변, 방금 전 싸움의 여파로 살짝 무너져버린 건물들. 아수라장이 된 거리 한복판에 앉아 레이디버그는 그저 절규했다. 



“왜 이렇게 된 거냐고!!”






푸른 도화지 같은 하늘 위로 까만 점이 천천히 움직였다.


바람결을 타고 팔랑팔랑 날아가던 검은 나비는 어느 한 건물에 다다랐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안으로 휙 날아든 나비는 창문 바로 앞에 쭉 뻗어 있는 검지손가락 위로 올라앉았다. 살짝 날개를 파닥거리는 검은 나비를 말없이 바라보던 남자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즐거워 보이지만 그래서 더 오싹할 정도로 서늘한 미소와 함께 남자는 중얼거렸다.



“도둑을 잡기에는, 역시 같은 도둑만한 게 없겠지.”





※ Set a thief to catch a thief. - 프랑스 속담, 이이제이(以夷制夷)



- 10편으로




===


네, 책을 구입해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바꾼 대사가 있습니다.

제가 왜 대사를 바꿨냐면 원래 쓰려던 대사가 저거였는데 바꾸는 걸 까먹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뜻은 똑같아요. 재판본에는 저걸로 수정해서 낼 거 같네요...ㅠㅠㅠㅠ 저거 뜻 통하는 거 찾으려고 엄청 고생했었는데 뭐했죠 과거의 저(멍뎅)


운수 좋은 날! 제목 정말 언제 봐도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한국 문학의 모 소설이 떠오르신다면 아주 정확히 짚으신 겁니다 ㅇㅇ


다음 회 예고를 간략히 적어볼까 고민했지만 스포일러는 재미없으실 것 같아 제목도 생략하고 있죠! 머리쓰는 거 좋아합니다 후후 추론하면서 읽으셔도 재밌으시겠지만 굳이 안 하셔도 되요 우리의 해결사 펠릭스가 있으니까요!(펠릭스: 야


여름 에피에서 가장 즐겁게 작업한 화 중 하나입니다. 이 얘기 했더니 책을 읽으신 분들이 저를 악마보듯 보셔서 슬프네요 아니 어째서죠 이 정도 시련은 줘야 극이 재밌어지죠~ 안 그래요?^ㅁ^


다크한 성인용 정치극<<이라는 소재에 맞게 하기 위해 매우 많이 노력했습니다 ㅇㅇ 사실 수위가 너무 약한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읽으신 분들이 15금은 된다고 해서 안심한!(모두: 저건 진짜 악마다) 애들에게 시작되는 시련은 사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만 아이들은 아직 모르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죠?(모두: 저기요


최대한 현실적이고 희망찬 전개를 적기 위해 노력했사오니 즐겁게 지켜봐주셔요>ㅁ<!!


Posted by I.R.E
,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8.

두 명의 블랙캣







어두웠던 밤이 지나고 푸르른 새벽이 밝아오던 시간, 어두운 갤러리 안으로 빛이 살짝 들이치고 있었다. 부서진 벽들 앞에는 「들어오지 마시오」 라고 적혀 있는 노란 테이프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벽 위쪽에는 혹시 그림에 빛이 닿아 손상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새까만 색의 가리개들이 걸려 있었다. 하얀 햇살이 걸려 있는 그림들의 발치를 살짝 비추고 있었다.


이토록 조용하던 박물관의 단잠을 깨운 것은 어떤 그림자였다. 까치발을 살금살금 걸어오던 그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천천히 걸어와 어떤 그림 앞에 섰다. 가만히 그림을 올려다보던 그림자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림을 보호하고 있던 유리를 깨부수고 그림을 꺼냈다.


유유히 사라지는 그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좋은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오는 마리네뜨에게 사빈이 상냥하게 말했다.



“어서 와서 밥 먹으렴.”

“네….”



웅얼거리며 제 아빠의 옆에 앉아 마리네뜨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접시에 놓여 있던 소세지를 입에 넣으려는 찰나 TV에서는 갓 들어온 소식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뉴스입니다.]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소세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던 마리네뜨의 귓가에 온 파리가 뒤집어질 만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오늘 새벽, 세계적인 명작 「Mona Lisa」 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 명화의 행방을 찾고 있는….]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 그 내용을 이해하자마자 마리네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부모님도 놀라셨는지 TV를 망연히 쳐다보고 계셨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헐?”





[저번 폭탄 테러에 이어 또 다시 홍역을 앓게 된 박물관에서는 이번 사건의 범인에 강경히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뉴스의 화면이 바뀌고, 수사팀 반장이라는 자막을 밑에 띄운 중년의 남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고 있었다.



[“저희 경찰에서는 이번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에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최선을 다해 도둑맞은 그림의 행방을….”]



뚝, 소리와 함께 TV의 화면이 꺼졌다. 들고 있던 리모컨을 소파에 던지며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미쳤군.”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박물관에 꼬이는 미친놈들이 많은지. 한숨을 쉬며 넥타이를 마저 매기 시작한 펠릭스의 주변으로 플랙이 새까만 발자취를 뿌리며 날아왔다.



“오오! 사건인 거야?”

“몰라. 경찰에서 알아서 하겠지.”



평소처럼 단정하게 소매 단추까지 꼭 잠근 뒤, 펠릭스는 옆에 있던 가방을 들고 뒤돌아섰다. 가방 속으로 쏙 들어가는 플랙을 못 말린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펠릭스가 이내 미련 없이 거실을 떠났다.





“펠릭스~!!”



언제나처럼 자신을 쫓아오는 마리네뜨의 목소리에 펠릭스는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아침마다 마주치게 되는 걸까. 정말 스토커 아니야?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마리네뜨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 자신이 짜증나서 펠릭스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펠릭스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온 마리네뜨가 방긋 웃으며 표를 들었다.



“이번에 나랑 콘서트….”

“안 가.”



딱 잘라 말하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지는 것을 보고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화들짝 놀란 펠릭스는 방금 전의 상념을 뿌리치겠다는 듯이 빠르게 마리네뜨의 옆을 벗어났다. 살짝 몸을 앞으로 향하며 터벅터벅 걷는 펠릭스의 팔다리가 양쪽 다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보고 있어. 자신을 마냥 바라보고만 있을 마리네뜨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예전처럼 매정해지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왜지? 그새 정이라도 든 걸까? 귀찮게 따라다닌다고 질색할 때는 언제고,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변덕스러웠던가? 아니, 지금도 귀찮기는 했다.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성가시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변한 걸까. 사람의 마음은 늘 변덕스럽다지만 자신에게는 절대 해당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번 공원에서 만났을 때부터인가? 아니면 호텔 연회장?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딘가 출발점이 있었을 텐데.


교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는 펠릭스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바보같긴, 이런 생각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라고. 어차피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아까 봤던 녀석의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시험은 무사히 넘긴 모양이다. 당연하겠지, 자신이 그렇게까지 시간을 내서 가르쳐줬는데 안 좋은 결과를 받아올 리가 없잖아. 그 때는 그저,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신기했었다.


만약 블랙캣이 나라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레이디버그도 사실은 싸우기 싫을지도 몰라요. 사람은 언제나 강하지 않으니까요. 약한 모습도 있다구요. 평범한 여자아이일 수도 있는 거야!’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손댈 수 없다. 본인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부분은 손대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이건 그 녀석을 꺼리게 되는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솔직한 시선으로 나를 파헤치려고 하는 네가 두려워.


절대 말할 일은 없겠지만.


한숨을 쉬며 문을 열자 여느 때와 같은 활발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여, 펠릭스!”



안녕? 반갑게 인사하는 앨빈을 흘끗 돌아보다가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짧게 대답했다.



“안녕.”



그 한 마디와 함께 자리로 가서 앉는 펠릭스에 앨빈은 깜짝 놀라서 후다닥 펠릭스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평소와 같이 책을 펴고 깔끔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펠릭스에게 앨빈이 물었다.



“왜, 왜 그래?”

“뭐?”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갑자기 영혼이라도 바뀐 거야?”

“…싫으면 말던지.”

“아냐, 아냐! 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오니까 굉장히 당황스럽네. 어메이징해!”



완전 감격했다는 듯이 두 손을 꼭 깍지끼고 중얼거리는 앨빈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올려다보던 펠릭스가 딱 잘라 말했다.



“니 자리로나 가라.”

“에이, 왜 그래 친구~?”

“징그러워.”

“어후, 너무하네. 내가 어딜 봐서 징그럽다는 거야?”

“전부.”



짤막짤막하지만 모두 제대로 대답하고 있는 펠릭스를 보며 앨빈은 그저 싱글벙글했다. 한편,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앨빈의 친구들은 모두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했다. 개중에는 눈을 비비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야, 내가 꿈을 꾸고 있냐? 앨빈이랑 쟤…, 왠지 대화를 하고 있는 거 같지 않아?”

“같지가 않아가 아니라 진짜야! 헐, 세상에. 저 새끼, 역시 무서운 놈이었어. 저 무뚝뚝한 놈하고 대화라는 게 가능하다니!”

“진짜 몇 주간을 줄창 쫓아다니더니 무슨 마술이라도 부렸나? 난 저 녀석이 대답을 세 번 이상 잇는 것도 처음 봐. 오, 미친.”

“진짜 독한 새끼. 이제 앨빈 저놈은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어. 복수도 진심 끈질기게 할 거 같아.”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친구들의 반응과는 별개로 앨빈은 정말로 즐거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앨빈을 참으로 특이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펠릭스는 남몰래 한숨지었다. 뭐가 재밌다고 이렇게 유치한 대화나 하고 있어야 하는지. 더 무서운 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처음만큼 이 상황이 귀찮지는 않다는 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짜증스레 머리를 긁적이던 펠릭스의 머리 위로 수업 종이 울렸다.





수업이 다 끝나고, 펠릭스는 가방에 교과서를 챙겨 넣고 있었다.



“파트너!”



다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필기구를 집어넣으려는 순간, 가방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며 웃고 있는 플랙의 모습에 펠릭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뭔데.”

“나타났어!”

“그래서, 가야 한다고?”

“그렇지~”



능글맞게 웃고 있는 플랙에게 더 이상 묻지 않고 펠릭스는 재빨리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왔다.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사람이 없는 뒤뜰로 나온 펠릭스는 가만히 반지를 낀 손을 올렸다. 검은빛이 번쩍하더니 소년이 있던 자리에서 튀어나온 블랙캣은 빠르게 건물 사이를 넘고 넘어 악당의 기운이 느껴지는 장소로 향했다. 한참을 뛰어가던 중 보이는 장소에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도난 사건으로 시끌벅적할 텐데 왜 굳이 저기에 나타났다는 거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블랙캣은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모르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


루브르 박물관 앞에는 역시나, 수많은 경찰차들과 경찰들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폴짝 뛰어 바닥에 착지하는 블랙캣을 보자마자 좌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어라? 왜 그러지? 의아한 눈으로 경찰들을 바라보는 블랙캣을 바라보던 경찰 하나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체포해!”



순식간에 우르르 달려온 경찰들이 블랙캣의 주변을 둥그렇게 감싸더니 그에게로 달려들어 팔을 결박했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생각하며 블랙캣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짓이에요?! 설마 얼마 전처럼~ 그림을 훔쳐간 악당이 절 감옥에 처넣어 달라는 요구라도 했나봐요?”



빈정거리는 블랙캣에 경찰은 살짝 뜨끔한 얼굴을 했지만, 곧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크, 크흠. 고작 그런 걸로 우리가 널 체포하는 줄 아나?”

“고작 그런 걸로 우릴 사지로 내몰았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런 일로 네가 저지른 죄를 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죄를 짓지도 않았지만, 일단 들어는 보죠. 대체 왜 나를 체포하겠다는 겁니까?”

“흥, 이걸 봐라.”



선두에 선 형사가 내미는 사진을 보고 블랙캣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박물관 내부를 찍은 사진이었는데, 모나리자가 걸려 있는 유리관 쪽으로 걸어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고양이 귀를 쫑긋 세운 누군가.



“헉?”



자신과 똑 닮아있는 그 모습에 블랙캣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대체 왜 이놈이 나라는 거예요!”

“이렇게 똑 닮았는데도 시치미를….”

“내가 훨씬 잘생겼구만!”



당당하게 외치는 블랙캣의 한 마디에 경찰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지 그저 씩씩거리는 블랙캣에 경찰들은 더 할 말이 없다 싶었는지 한숨을 쉬었다. 앞에 서 있던 형사가 말했다.



“끌고 가.”






쾅- 소리와 함께 감옥의 문이 닫혔다. 진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감옥의 창살을 꼭 잡는 블랙캣을 보며 형사가 말했다.



“그간 파리를 위해 노력해준 것에 대한 예의로, 그림만 무사히 돌려준다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니 말해. 「Mona Lisa」는 어디 있지?”

“아니, 이건 무슨 개뼉다구같은 소리예요? 제가 그 그림을 훔쳤을 이유가 없잖아요!”

“이유가 없긴 왜 없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인데!”



블랙캣은 그건 무슨 괴상한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눈 앞의 경찰을 쳐다보았다.



“그것도 팔 수가 있어야 가치가 있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도둑맞았다고 알려졌는데, 그게 경매에 나오면 다들 얼씨구나 하면서 사가겠습니까? 곧바로 신고하지.” 

“경매가 아니라 그냥 암거래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오, 진짜! 이런 비싼 그림을 살 만한 사람이랑 제가 대체 무슨 인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시 모르지. 네 정체가 엄청난 부자라서 그런 쪽으로 인맥이 있을지도.”



경찰의 한 마디에 블랙캣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억울했다. 물론 그 뒷모습은 자신과 똑같아 보일 정도로 비슷하긴 했지만 그건 제가 아니다. 혹시, 요정에겐 히어로를 조종하는 능력도 있나? 플랙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변신을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왜 저라고 생각해요? 저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변장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웃기지 마. CCTV 모두 확인했는데, 아무리 봐도 네놈이었다구.”

“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반문하는 블랙캣에게 경찰이 자못 엄숙하게 말하며 사진 한 장을 던졌다.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진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블랙캣에게 경찰이 다시금 말했다.



“잘 생각해봐. 우리도 시간은 많이 못 주니까. 파리의 언론이 무척 소란스럽거든. 우리는 빨리 성과를 내야 해.”



그 말과 함께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는 악당을 다시 한 번 붙잡으려다 그만두고, 블랙캣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진짜, 이건 또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야?!”



살다살다 도둑으로 몰릴 때도 있군.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이를 득득 갈았다.



“애초에 말이지, 왜 하필 모나리자인데? 돈을 노렸다고 해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을 대체 어디다 내다판다는 거냐고~!! 그림의 진짜 값어치를 받으려면 적어도 유명 경매시장에 내놓아야 한단 말이야. 근데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거든. 그리고 도둑맞았다는 게 전 세계적으로 광고된 그림을 대체 누가 사간다는 거야? 이건 나한테 메리트가 전혀 없는 일이라고!”



평소에도 명작이란 굳이 손에 넣기보다는 멀리서 감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였는지라 더 분노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념과 위배되는 행동을 한 것도 모자라서 그 죄를 나한테 덮어씌워?



“나를 도둑으로 몰기 위해서 ‘굳이’ 모나리자를 훔쳐낸 것 같은데, 진짜 어이가 없네. 당하고만 있어줄 성격으로 보이나, 이 내가?”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한참을 짜증내다가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리고 나서야 블랙캣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겼지만 절대 자신은 아닌 자.



“…새로운 악당인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루브르 쪽에서 굳이 악당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것도 수상쩍었거니와, 사태를 보아하니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인 것 같고.


자신과 똑 닮은 녀석이라. 이제껏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딱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비눗방울을 불어서 사람을 공격하는 놈도 있고 비둘기를 타고 다니는 놈도 있고, 맨바닥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놈도 있는데. 저번 폭탄 사건 때 마주했던 놈은 심지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다루던 자가 아니었던가. 변신할 줄 아는 악당 한 명쯤 더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있지?”



자신은 그 악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자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누명을 벗을 수 있다는 거다. 그것도 이 좁은 감옥 속에서.



“아오, 미치겠네!”






“생각보다는 수월한 걸?”



살짝 느른하면서 섹시한 목소리가 붉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검은색의 망토를 걸치고 박쥐 모양의 가면을 쓴 악당이 우아하게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연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서 악당은 피식 웃었다.



“그래, 식은 죽 먹기지. 하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얼마나 쉬운데? 조금만 머리를 쓰면 된다구.”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했는지, 악당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아, 이 그림? 뭐~ 진짜 경매장에 내놓았다간 경찰이 블랙캣에 대한 의심을 풀 거 아니야? 그냥 가지고 있어야지. 그럼 영원히 감옥행이겠네~”



불쌍해서 어쩌나. 큭큭 웃어대던 상대는 곧 말을 이었다.



“경찰은 일단 어떻게든 사건을 조용하게 끝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럴 수는 없지. 일단 한 놈은 가둬놨으니, 다른 한 녀석을 처리하러 가볼까?”



그럼 그 분이 무척 기뻐하시겠지.


간단하게 통화를 마치고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던 악당이 싱긋 미소지었다.



“자, 어떡할까나~?”






“네?! 블랙캣이 감옥에요?”



놀라는 레이디버그에게 40대쯤 되어 보이는 금발의 남자 경찰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다니까요. 이미 증거가 다 있는데도 계속 아니라고 우기고, 그림이 어디 있냐고 물어도 죄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아니, 근데 정말 블랙캣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CCTV에 명확하게 찍혔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경찰에게 레이디버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것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조심스럽게 요청하는 레이디버그에게 경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선선히 대답했다.



“안될 건 없죠.”



레이디버그를 데리고 박물관 안에 있는 관리실로 들어간 경찰이 곧 자리에 앉아 있는 직원을 불러 오늘 새벽의 CCTV 영상을 틀게 했다. 처음에는 어두운 갤러리의 모습만 나오다가 직원이 몇 번 버튼을 돌려가며 조율하자 곧 장면이 드러났다.



“여깁니다.”



레이디버그는 말을 잃었다. 갤러리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온 것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유리관을 부순 것도, 안에 있던 그림을 들고 있던 것도 모두 블랙캣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이상했다. 뭐지? 뭐가 이상하지?


레이디버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잠깐만 더 돌려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자 직원은 선선히 부탁을 들어줬다. 팬이라고 하면서 악수 한 번만 해달라고 웃는 직원에게 기분 좋게 악수를 건넨 뒤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화면에 집중했다. 몇 번을 돌려본 후에야 레이디버그는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림자….”

“예?”

“여기 봐요, 이 블랙캣. 그림자 모양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레이디버그는 급기야 손으로 버튼을 잡고 계속 영상을 돌리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블랙캣이 그림을 들고 박물관을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의 발에서부터 길게 늘어져 있는 그림자를 가리켰다.



“이거 보세요.”

“엇?!”



블랙캣의 발에서부터 이어지는 긴 그림자를 본 경찰과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서 있는 사람은 블랙캣이 맞았는데 그림자는 블랙캣의 것이 아니었다. 쫑긋 솟은 고양이 귀가 없는데다 체형도 미묘하게 달랐다.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레이디버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블랙캣을 만나야겠어요. 데려다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 하지만 저것만 가지고 무조건 블랙캣이 아니라고 하기엔….”



아직도 우물쭈물하는 경찰에게 레이디버그는 웃으며 말했다.



“얼굴 보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쵸?”



싱긋 웃으면서도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붙잡는 레이디버그의 손에 밖으로 끌려가던 경찰의 핸드폰이 띠리리링 울렸다. 레이디버그의 팔에 끌려가면서도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은 경찰이 잠시 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 탈옥?!”

“네?!”



그 말에 놀라 돌아본 레이디버그가 재빨리 경찰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갔다. 경찰이 하려던 순간 레이디버그는 다급하게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쉬잇-! 헙, 분위기에 눌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입으로 틀어막는 경찰을 내버려두고 레이디버그는 스마트폰의 스피커를 켜고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렇습니다! 감옥의 벽을 부수고 탈출한 모양이에요! 심지어 도망친 지 꽤 시간이 지난 거 같아요!]



심지어 이 소란을 틈타 죄수들 몇 명도 같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빨리 돌아와달라 재촉하는 목소리에 경찰은 다시 레이디버그에게서 핸드폰을 뺏어들고 몇 마디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골치 아프다는 듯 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탈옥이라니,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아, 한숨을 쉬는 남자의 옆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이디버그의 옆구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직 녀석을 만나기는 좀 어렵겠지만.”



권유해주는 경찰에게 레이디버그는 가방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전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그쪽 먼저 우선시해야 할 거 같아요. 그 바보를 발견하면 나중에 연락 주세요.”

“? 네 그러죠.”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경찰을 뒤로 한 채 레이디버그는 최대한 빠르게 루브르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지붕 위로 뛰어올라 한참을 달려온 뒤에야 레이디버그는 가방에 넣었던 손을 쑥 뺐다. 손에 든 알록달록한 모양의 스마트폰이 지잉지잉 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레이디버그가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 레이디. 안녕~?’

“너 지금 어디야?! 감옥 부숴먹고 탈옥했다는 건 또 뭐야!”



버럭 소리지르는 레이디버그에 조금 놀랐는지 블랙캣이 잠시 멈칫했다가 곧 태연하게 다시 말했다.



‘그건 아직 말해줄 수 없고~ 레이디. 혹시 경찰이 무슨 헛소리를 했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어. 나는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구.’

“그건 이미 알아, 이 멍청아! 이미 사실 다 확인했어! CCTV에 찍힌 사람은 그림자가 너랑 달랐다구.”

‘뭐야, 그런 것도 있었어? 그래도 사실을 알았다니 다행이네. 사실 레이디가 나를 믿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거든.’

“믿고 있는 게 당연하잖아.”

‘정말로?’



날카롭게 훅 찔러오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말문이 막혔다. 곤란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블랙캣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화제를 돌렸다.



‘뭐 그건 됐고. 지금 내가 급하게 어딜 들렀다 와야 하거든. 레이디는 지금 한가해?’

“그래, 누구씨 덕분에 곧 바빠질 거 같지만.”

‘그래, 그래. 그럼 부탁 좀 할게. 샹젤리제 거리 중심가에 가면 라뒤레라는 초록색 간판의 마카롱 가게가 있어. 거기 앞에 ‘데니스 브라운’이라는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을 가진 남자가 있을 거야. 그 남자 데리고 내가 말하는 장소로 와줘. 참고로 말은 조심해, 기자거든.’



그 외에도 블랙캣은 몇 마디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할 말은 다 끝났는지 전화를 끊으려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조용히 물었다.



“…왜 이런 걸 부탁하는 거야?”

‘음, 뭐랄까. 당하고만 있는 건 재미없잖아? 그래서 갚아주려고.’

“갚아준다니…. 어떻게?”

‘그건 아직 비밀. 기대해도 좋아. 이번 일을 보면 아무리 레이디라도 나한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걸?’



즐겁게 웃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끊어진 핸드폰 액정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레이디버그가 피식거렸다.



“하여간 잘난 척은.”



곧바로 샹젤리제 거리 쪽으로 날아간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이 말한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밝은 형광초록색으로 칠해진 간판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남자에게로 달려가 남자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어어…! 깜짝 놀랐는지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남자를 안고 계속 하늘을 달려가는 레이디버그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왠지 재미있는 자세네요.”

“네?”

“이 나이 들어서 공주님 안기를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헉, 죄송해요. 기분 나쁘시다면….”

“아뇨, 재미있고 좋은데요 뭐.”



처음 겪는 일에도 저렇게 태연하게 구는 것만 봐도 왠지 보통 성격은 아닌 듯 싶었다. 자신보다 작은 여자아이가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상당한 체구의 자신을 안고 가는 것이 놀라웠는지 남자는 잠시 경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보다 되게 신기하군요. 기자라면 피해 다닌다던 영웅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날도 있다니.”

“기자시라고 했죠?”

“네, 「르 피가로」 지의 기자인 데니스 브라운입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데니스에게 레이디버그는 다시 물었다.



“지금 뭘 하러 가시는지는 알고 계세요?”

“몰라요. 저는 오늘 기사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멋진 레이디께서 데리러 와주실 줄은 몰랐지만요.”

“기사요?”

“네, 기사.”



지붕을 크게 껑충 뛰면서 레이디버그는 공중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처음 듣는다는 듯이 제게 반문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뭔가를 짐작했는지 데니스가 태연하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가보면 알겠죠.”





“잘 찾아가려나~?”



전화를 뚝 끊고서 블랙캣은 폴짝폴짝 지붕을 건너다니며 필요한 장소로 향했다.


레이디버그의 얘기를 듣고서야 자신이 지금 탈옥한 상태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부숴진 감옥의 벽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될 불쌍한 간수에게 애도를 표하며 블랙캣은 다시금 하늘 위로 점프했다. 심경은 상당히 복잡했지만.

방금 전에 확인한 사실 때문에.


한 시간 전, 감옥 바닥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던 블랙캣은 머지 않아 탈출밖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아하니 저 무능한 경찰들에게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몇날 며칠을 여기에 갇혀있을 수는 없었다. 내일 학교를 가야 하는 입장에서 그건 무리한 요건이다. 적어도 오늘 안에 끝을 봐야만 했다.


소리없이 벽을 부수는 것은 쉬웠다. 고대의 재앙으로 벽에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틈을 만들고 밖으로 나왔다. 최대한 조용히, 자신이 사라진 사실을 가급적 늦게 눈치채도록.


계획을 얼핏 수립하기는 했지만 관객이 필요했다. 저절로 뇌리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이 있었지만 블랙캣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연락을 하지? 아는 사실이라고는 기자라는 직업과 얼굴, 목소리뿐이 없는데.


그냥 아무 곳에나 전화해서 다른 사람을 찾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중 블랙캣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물끄러미 제 가방을 살펴보다가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혹시 이런 것도 되려나?


반신반의하며 아무렇게나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간 후에 곧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블랙캣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저번 파티장에서 만났던 그 기자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그 사람의 전화번호가 없어도 원하는 사람한테 전화를 거는 게 가능하다고?


장난전화인 줄 알고 끊으려는 남자에게 대충 자신이 블랙캣이라고 소개하고 특종에 흥미 없냐고 물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껄껄 웃더니 매우 흥미 있다고 대답하는 기자에게 블랙캣은 만날 장소와 시간대를 얘기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혹시 자신이 진짜 블랙캣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딱히 손해볼 일은 없으니 반신반의하며 나오기는 하겠지.


데리러 가줄 사람은 정해져 있고.


감옥에서 나온 블랙캣이 맨 처음으로 향한 장소는 다름 아닌 파리 시청사였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블랙캣은 재빨리 시청사 뒤쪽에 있는 3층 창문으로 훅 뛰어 들어갔다. 분명 이 근처에 관제실이 있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피해 조심히 움직이던 블랙캣의 시선 끝에 관제실이라고 적힌 문이 발견되었다. 누가 오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살금살금 걸어서 관제실 문을 연 블랙캣은 자신을 등지고 앉아 있는 직원의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툭,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진 직원을 다시 의자에 앉혀놓고 앞에 보이는 수십 대의 모니터 화면을 살펴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엄청나네.”



언제 사람이 들어올지 몰랐기에 블랙캣은 재빨리 파리 전역에 설치되어 있는 교통카메라에 대한 정보를 켰다. 곧바로 화면들에 각 구를 관통하는 도로와 건물의 모습들이 보였다. 차분히 악당을 찾기 시작하는 블랙캣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악당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음에도 굳이 관제실을 찾은 이유는 느껴지는 악당의 기운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일이 찾아다니기엔 시간이 없으니 파리 전역을 살펴보고 필요한 상대를 찾아내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었다.


가지고 왔던 고양이 발바닥 무늬가 그려진 검은색 리모컨을 관제실 모니터 쪽에 연결하자 곧 바로 앞 모니터에 파리 어딘가의 영상이 떴다. 바람 때문인지 살짝 흔들리기는 했지만 영상을 확인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드론이 제대로 날고 있는가보다 싶어 안심하면서 블랙캣은 일단 교통카메라 정보를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힘이 느껴지던 방향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니 악당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둘기 떼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미스터 피죤을 지나, 북동쪽에서 느껴지는 힘의 방향에 설치되어 있는 교통카메라를 모조리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한 건물을 발견했다. 연결해두었던 드론을 조종해서 건물 위로 띄우자 곧 건물 지붕 위에 유유히 서있는 누군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치렁거리는 검은 망토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악당을 발견한 블랙캣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지만, 블랙캣이 느낀 악당의 수는 대략 세 명이었다. 또 새로운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니 확인해서 나쁠 건 없다 생각하면서 천천히 방향을 감지했다. 동남쪽 방향. 그쪽 방향에 있는 구의 카메라들을 모두 살펴보았으나 사정권 밖인지 찾기가 불편했다. 에잇, 혀를 차며 블랙캣은 다시금 드론을 움직였다. 그러나 드론이 향하는 방향에 있는 장소를 본 블랙캣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왜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 블랙캣은 침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드론을 제가 본 건물 쪽으로 움직였다. 하늘 높이 날고 있던 드론은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이 위치한 공원 안으로 조용히 날아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자연사 박물관의 뒤쪽 숲으로 방향을 잡고 드론을 움직였다. 그리고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동굴이 있었다.


저번에 몇 번 가봤을 때는 분명히 없었던 동굴 앞에 저번에 봤던 그 하얀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문제는 그 남자만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 옆에 서 있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문제였다. 모자를 쓰고 검은색 제복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악당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동굴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는데, 개중 몇 명은 악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조금 더 가까이 내렸다. 어느 정도 사람의 얼굴이 분명하게 보일 정도까지 아슬아슬하게 내리다가 블랙캣은 문득 창백한 얼굴의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누군가의 모자 위에 수놓아진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분명….


그 순간 제 쪽을 올려다보는 남자에 깜짝 놀라던 찰나, 화면이 꺼져버렸다.


꺼진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블랙캣은 살짝 고개를 내려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힘을 줘버렸는지 손에 든 리모컨이 박살나 있었다.

쫑긋, 귀를 세웠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가까이 오기 전에 블랙캣은 직원이 앉아있는 의자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펄쩍 뛰어올라 천장에 붙었다.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렸다.



“야, 살만하냐? 먹을 거 사들고 왔다~!”



발랄하게 소리치는 직원의 등 뒤로 폴짝 뛰어내린 블랙캣은 소리없이 문 밖으로 빠져나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빠르게 시청사를 벗어나서 자신이 목표한 상대가 있는 장소로 향하면서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신호음이 끊기고 전화를 받는 레이디버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안도하는 제 자신에 블랙캣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주는 것에 기뻤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조금만 더 나를 믿어주면 좋을 텐데.


아직 너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가 하기엔 비겁한 말일지도 모른다. 너를 좋아하면서도 온전히 너를 좋아한다고 인정하기에 겁쟁이인 나를 인정한다. 그래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좀 더 나를 봐줘. 나를 의지해줘.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다가 문득 블랙캣은 무척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기왕 엿을 먹일 거면 아주 제대로 먹이는 게 좋겠지? 피식피식 웃으며 블랙캣은 다시금 매직박스에서 핸드폰을 꺼내 몇 곳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키득거리며 웃던 블랙캣은 곧 생각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역을 통틀어 가장 큰 기차역이라 불리는 장소.


파리 북역이었다.


곧바로 북역으로 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건물로 숨어든 블랙캣은 곧 발을 동동거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레이디버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서 와, 레이디!”



반가운 마음에 레이디버그에게로 달려간 블랙캣이 자연스럽게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휙 손을 빼버리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도 좋다고 웃고 있던 블랙캣은 곧 뒤에 서 있던 기자를 발견하고 악수를 청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데니스 브라운 기자님.”

“오…. 천만에요.”



얼떨떨한 얼굴로 악수를 하고 난 뒤 데니스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반쯤 장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로 보게 되니 놀랍네요.”

“가져오라고 부탁드렸던 물건은 가져오셨나요?”

“물론이죠. 그래서, 제가 뭘 도와주면 되는 거죠?”

“제가 지금부터 재밌는 쇼를 보여드릴 예정이라서요.”

“쇼?”

“이걸 보시고 최대한 재미있게 기사를 적어주시면 됩니다.”



블랙캣의 설명을 다 듣고 나자 정말 재미있겠다는 듯이 데니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메이징! 정말 재미있겠네요. 하지만 이런 영광을 안을 사람으로 제가 선택된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기자님이라면 분명 멋진 기사를 써주실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웃으며 대답하는 블랙캣을 보며 데니스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하기 싫다는 거군요. 뭐, 알겠습니다. 저야 이런 특종을 거절할 이유는 없지요.”



시원시원하게 응수하는 데니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블랙캣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갈까요.”






“그 녀석이 탈주를 했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악당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북역 지붕 위에 서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던 중,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가 가져온 뜻밖의 소식에 악당은 다시금 계획을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행동할 줄은 몰랐다. 생각만큼 만만치는 않다는 건가.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뭐라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 분명 나를 찾아오겠지. 그 전에 수를 써야겠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쪽 일이나 잘해.”



뚝, 전화를 끊으며 악당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악당의 그림자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운이 악당의 온 몸을 덮더니 검은 고양이 수트를 입은 누군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그게 네 능력이구만.”



휙 돌아서는 악당의 앞으로 블랙캣이 탁 내려섰다. 웃고 있는 블랙캣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가 말을 툭 내뱉었다.



“뭐야, 너. 뭔데 나랑 똑같이 생겼어?”



정말 자신인 것마냥 당당하게 말하는 상대를 보며 블랙캣은 혀를 쳤다. 이것 봐라?



“어딜 봐서 니가 나라는 건데? 아무리 봐도 내가 더 미남이잖아!”

“웃기시네. 가짜 주제에 헛소리하지 마. 어디 여기서 진짜가 누군지 가려볼까!”



그 말과 함께 블랙캣의 모습을 한 악당이 블랙캣에게로 달려들었다. 재빨리 악당의 합을 받아내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악당은 그걸 막아내고 다시금 반격을 시작했다. 엎치락뒤치락 엉겨붙어 싸우던 두 사람에게로 레이디버그가 달려왔다.



“블랙캣!”

“오우, 레이디.”



바닥에 깔려 있던 블랙캣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에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두 사람 좀 떨어져줄래?”



그 말대로 뒤로 물러나는 두 사람의 발끝을 유심히 보던 레이디버그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한 녀석에게 달려들어 그의 복부를 세게 발로 찼다. 그 순간 레이디버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사람의 배가 아니라 단단한 목판을 걷어찬 것만 같은 이질감.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걷어차인 배를 붙잡고 뒤로 물러난 블랙캣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에 더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 모습을 바꿨다. 그림자 속으로 스르륵 사라지는 검은 연기와 함께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악당이 레이디버그를 노려보았다.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어떻게 나란 걸 알았지?”

“그걸 알려줄 의무는 없는걸? 넌 누구야?”

“내 이름은 셰이드 플뢰르. 생각보다는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모양이군. 벌써 나를 찾아내다니.”

“과연, 역시 그림자 술사였나.”



중얼거리는 블랙캣을 옆에 두고 레이디버그는 크게 소리쳤다.



“자, 이제 순순히 말하지 그래. 모나리자는 어디 있어?”

“흥,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내가 그걸 알려줄 이유는 없잖아?”



코웃음을 치며 악당은 제 그림자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림자 속에서 온통 새까만 검이 튀어나와 악당의 손에 들어갔다. 깜짝 놀라는 두 사람에게로 검이 날아들었다. 둘 다 양 옆으로 몸을 돌려 휘둘러지는 검날을 피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다시 덤벼드는 악당의 검을 레이디버그는 두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내리찍으려는 악당과 어떻게든 버티던 레이디버그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던 중 셰이드 플뢰르가 싱긋 미소지었다. 에? 놀라던 찰나 레이디버그의 손에 있던 검이 먼지처럼 스러졌다. 동시에 레이디버그의 뒤에서 날카로운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가만히 있어, 레이디!”



블랙캣이 재빨리 달려들어 그림자를 발로 걷어찼다. 블랙캣에게 얻어맞고 잠시 주춤하던 그림자는 곧 스르륵 바닥에 있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블랙캣은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그림자에 스며들어 사라지는 구슬을 보며 블랙캣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과연.



“저기, 레이디.”

“왜?”

“모나리자를 어디에 숨겼는지 알 거 같아.”

“정말?! 어딘데?”



놀라서 되묻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녀석의 배를 한 대쯤 더 쳐줘야 할 거 같은데. 가능하겠어?”

“해볼게.”

“그리고 제대로 설치해놨지? 그거.”

“물론.”



웃으며 대답하는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미안, 덕분에 무기도 사용 못해서.”

“괜찮아. 난 너보다 강하니까!”



당당하게 말하며 싱긋 웃는 레이디버그의 표정에 그래도 좀 기분이 나아졌는지 블랙캣은 웃으며 말했다.



“좋아, 해볼까. 그나저나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뭐가?”

“비밀. 벌써 알면 재미없잖아?”



싱글싱글 웃는 블랙캣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레이디버그는 곧 생각을 접었다. 알아서 하겠지. 그를 뒤로 한 채 셰이드 플뢰르에게로 달려들었다. 다시금 검을 빼든 셰이드 플뢰르는 마치 펜싱하듯이 검을 앞으로 찔러가며 레이디버그의 급소를 노렸다. 막기가 애매해 무작정 피하기만 하며 빈틈을 노리던 레이디버그는 한 순간 발견된 틈을 파고들어 셰이드의 복부에 주먹을 찔러넣었다.


이번에는 느낌이 있었다.


커억, 소리와 함께 뒤로 날아가는 셰이드의 뒤로 블랙캣이 날아들어 목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발버둥도 치지 못하게 목덜미를 꽉 붙잡고 악당의 모습을 그려내는 그림자에 세게 주먹질을 했다. 강한 힘으로 내리치자 그림자가 움찔거리더니 그 속에서 상당한 크기의 무언가가 튀어올랐다. 액자에 담겨 있는 커다란 그림을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액자 틀만 붙잡고 받아낸 블랙캣이 제 앞에 놓인 명화를 넋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역시 그림자 속에 숨겨두고 있었나.”



그 말과 함께 블랙캣은 붙잡고 있던 셰이드의 몸을 바로 옆으로 세게 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셰이드를 본체만체하며 가방에서 유리관을 꺼낸 블랙캣이 그림을 그 속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심한 충격을 주면 토해내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대로라 다행이네.”

“이 자식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악당에게 블랙캣이 피식 웃으며 충고했다.



“아, 맞다. 어서 도망가는 게 좋을 거야.”

“뭐?”



그 말과 함께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악당은 물론 레이디버그도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갖 로고를 단 헬리콥터들이 그들이 있는 장소로 날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멍하게 그 장면을 쳐다보고 있던 악당에게 블랙캣이 씨익 웃으며 정답을 들려주었다.



“방송사에 연락해놨거든. 특종 잡을 생각 없냐고 말이야.”

“이…!!”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게 없잖아? 더 일을 벌이면 좋을 게 없을 텐데. 어서 꺼지시지.”



웃으면서 말하지만 뼈가 있는 블랙캣의 한 마디에 악당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곧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악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깨닫자마자 블랙캣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캠코더 제대로 설치해놨지?”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디버그는 뒤쪽으로 후다닥 달려가더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잡고 들어올리는 모션을 했다. 허공에서 반투명한 천이 벗겨지더니 바닥 위에 고정해둔 캠코더가 나타났다.


레이디버그의 매직박스에서 꺼낸 카멜레온 천이었다. 덮어놓으면 주변의 사물과 섞여들어서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드는 특수한 재질을 가진 천. 그 밑에 있던 캠코더를 수거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재잘거렸다.



“말도 마. 진짜 이쪽으로 오지 않게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빌린 물건인데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떡하겠어?”

“그러게.”

“저기 오는 방송국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어서 숨겨야지. 나중에 그 기자분한테 갖다드려야 하니까.”



사람들이 그 그림 보고 되게 말이 많을 거라며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와는 달리 블랙캣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엷어졌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블랙캣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레이디, 진지하게 들어줘.”

“응?”



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악당들은 우연히 파리에 나타난 게 아닌 거 같아. 뒤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이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어? 호크모스 말하는 거야?”

“……호크모스?”

“너 몰라? 또 다른 미라큘러스를 가진 히어로인데 다른 사람에게 변신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저기, 블랙캣? 표정이 왜 그래?”



충격을 받은 것처럼 갑자기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블랙캣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디버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너 방금 무슨 말 하려고 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버려. 그나저나 많이도 왔네~”



다시금 웃는 얼굴로 돌아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굴고 있지만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처럼.





다음 날, 파리 시내는 또 한 번의 특종을 맞아 떠들썩했다. 「모나리자 도난의 진실!」 이라는 문구를 달고 제 1면을 장식한 기사에는 전날의 사건에 대한 진실과 더불어 경찰의 무능함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었다. 캠코더에서 찍었던 악당의 변신 장면이 그대로 찍혀 기사에 그대로 게시되었으며, 덕분에 경찰청 홈페이지에는 수백 개가 넘는 항의글이 올라왔고, 계속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기사의 바로 옆에는 감옥이 부숴졌을 때 같이 탈주한 흉악범 몇몇의 얼굴 사진도 작게나마 실려 있었다.



“파트너~ 표정이 왜 그래? 의도한 대로 다 잘 됐잖아.”



생각한 대로 다 이루고도 표정이 전혀 밝아보이지 않는 펠릭스를 플랙이 걱정스럽게 불렀다. 읽고 있던 신문을 의자 앞에 있던 테이블 위로 던지며 펠릭스는 앉아 있던 안락의자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가만히 중얼거렸다.



“…너무 얕잡아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엥?”

“……아니야, 아무것도.”



청회색 눈동자가 스르륵 감겼다.





-9편으로



===

새로운 악당의 등장이네요.

이름은 셰이드 플뢰르(Shade Fleur)! 그림자의 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매우 귀찮게 해줄 악당 하나가 또 등장했네요.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7화에서 나온 마임맨이 꺼려하던 상대가 바로 이 분이랍니다.


8편은 제목에서부터 눈치채셨겠지만 한국 에피소드 기준으로 3화의 카피캣 에피소드를 오마주했습니다.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적어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을지 모르겠네요ㅇㅁㅇ)


9화도 작업 중이랍니다. 일단 줄간격만 대충 정리하고 있으니 빨리 올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재판 시기를 적어놓지 않은 거 같은데 내년 1월입니다.

9월 둘째주 안으로 12화까지 업로드해두려고 합니다 ㄷㄷ

Posted by I.R.E
,

※ 글을 꼼꼼히 읽어주세요! 꼭 알아두셔야 하는 사실들을 적어두었습니다ㅠㅠ(추가사항이 있습니다)

주의사항이 너무 많아서 폼에 다 들어가지 않아 블로그를 빌립니다. 폼 링크는 맨 밑에 있습니다! 주의사항은 거의 복붙이에요!




레이디버그 2D 소설 Un Autre 의 재판 수량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위에 적어두었다시피 커플링은 [펠릭마리].

펠릭스와 마리네뜨 커플링이 들어간 2D 트레일러 내용을 토대로 2D에서 나올 법한 내용 전체를 재현하는 전개로 진행됩니다.

2D 트레일러의 유투브 주소는 여기>> https://www.youtube.com/watch?v=FlwV3scCgAM


2D 트레일러는 2012년에 나온 트레일러로, 현재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레이디버그의 초본쯤으로 생각하시면 편하실 거예요!

좀 어린 연령층을 타겟으로 제작된 3D와는 달리 2D의 분위기는 매우 어둡습니다.

원래는 성인층을 타겟으로 정치적 요소가 들어간 다크한 작품이었다고 하거든요.



일단 내용이 3d와 달리 좀 많이 어둡고 현실적입니다.

애들의 내면 갈등은 물론이고, 이 세계관에선 '신비한 치유의 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건물도 많이 부서지고 인명 피해도 조금 발생하며, 살인도 벌어집니다. 무엇보다 우리 히어로 애들도 좀 다쳐요. 물론 그렇게 많이 다치지는 않으니 염려마세요^ㅁ^

히어로물이지만 정치적인 내용도 다수 나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두뇌싸움이 많이 나오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장면도 심심찮게 나옵니다. 보통 히어로물 하면 꿈과 희망을 연상하지만 여기엔 그런 거 없어요 ㅎ... 일단 기적이란 개념을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2D 트레일러의 분위기에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했으니 분위기는 트레일러를 참고해주시면 됩니다!


전권 통판입니다. 나갈 행사가 없어서ㅠ




총 2권 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봄부터 겨울까지, 총 1년에 걸쳐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테마는 계절입니다.


1권에서 봄~여름(413p), 2권에서 가을~겨울(438p),

851p입니다.

각 계절 파트마다 6에피씩, 본편만 총 24에피로 되어 있습니다.

계절별로 서문이 하나씩 붙어 있습니다. 웹상에는 봄 서문만 공개되어 있어요!


구성: 본편 24에피 + 외전 2개(책마다 하나씩) + 에필로그 + 축전 + 후기

(삽화 없습니다)

40페이지 가량의 설정집 하나도 같이 보내드립니다!


가격은 두권 세트(set)에 70000원입니다.

절대 낱권으로 팔지 않아요. 무조건 세트로 판매합니다.

왜냐하면 저 두 책은 너무 페이지가 많아서 분권했을 뿐, 원래 한 권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단 2d가 정말 자료가 없는지라,

트레일러를 분석해서 스토리를 짰지만, 제 주관적인 해석과 창작적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레일러에 기반했지만 일단 제 취향이 많이 들어가 있는지라, 구매하실 때 그 점을 분명히 명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ㅠㅠ


일단 설정부터 굉장히 많이 갈아엎었습니다;ㅅ; 그래서 보시다보면 분명 3D와는 많이 다르다고 느끼실 거예요.


회당 30-40페이지라는 제약이 걸려 있기 때문에 전개가 상당히 빠릅니다.

현실적인 방향을 지향했지만 조금 의아하다 싶으신 부분들도 있을 거 같아요. 특히 마리네뜨와 펠릭스의 과거사는 자그툰에서 이야기했던 떡밥을 배경으로 구성했지만 정보가 너무 없기 터라 캐해석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ㅅ;


제 만족용으로 쓴 회지라,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너무 많이 기대하지는 마세요OTL


 

만 15세 이상부터 구매가 가능합니다.

위에 적어드렸다시피 내용이 너무 어둡고 가치관이 단순하게 굴러가지 않기 때문에 만 15세 이상으로 제한을 두었습니다. 즉, 구매는 00년생 이상이시거나 온리전 전에 생일이 지나시는 분만 가능합니다.

딱히 수위가 있어서는 아니고 다소 잔인한 묘사가 좀 들어갈 수 있다는 점과,

내용 일부에서 전연령이라 보기 힘든 몇몇 부분들이 있어서 15금으로 결정했습니다.


만 15세 이하이신 분이 구입을 하시려고 해도 환불 불가합니다.

저 이거 분명히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실 분이 없으시리라 믿지만 연령대가 어린 장르라 혹시나 싶어 말씀드립니다. 제발 그러지 말아주세요;

저는 저 나이보다 어리신 분에게 이걸 팔고 싶지 않습니다.

성인본도 아닌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물으신다면 개인적인 신념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통판의 경우는 폼에 신분증 사진을 첨부하는 것으로 인증을 할 생각입니다.

참고로 수위는 키스 정도가 전부라 수위를 기대하고 책을 구입하시면 정말 후회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샘플은 이쪽을 ↓

01: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1

02: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2

03: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3

04: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4

05: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5

06: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6

 

07: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7

08: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8

09: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9

10: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10

11: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11

12: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12

 



6편까지가 봄 에피소드이며 7~12가 여름 에피소드입니다.

봄을 프롤로그로 봐주시면 되고, 여름부터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됩니다 ㅎㅎ


+

후일담은 제작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구상하다가 파기한 프롤로그는 포스타입을 참고해주세요.

http://posty.pe/v6g3za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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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7.

흑백의 남자





“나는 말이지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 한 가운데서,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마리네뜨는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시이허엄이이 제일 싫어!!”



자, 여기서 문제. 마리네뜨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잠시 여기서 마리네뜨의 성격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마리네뜨는 기본적으로 성적에 크게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모종의 이유로 그랬던 적도 있었지만 커가면서 자신이 그쪽 머리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깔끔히 그만두었다. 아직 명확한 꿈은 없지만 엄마랑 아빠 닮아서 손재주는 있다고 칭찬 많이 들으니까 그쪽으로 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말고사가 이주 남았을 당시에도, 공부한다고 슬슬 바빠지기 시작하는 다른 애들과 달리 마리네뜨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다. 늘 망쳤으니 이번에도 망치겠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마리네뜨에게 날아든 부모님의 통보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저번 중간고사처럼 시험 망치면 앞으로 외출 금지다.


외출 금지라니! 이제 곧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이 무슨 기겁하실 소리란 말인가. 잘못했다고 빌어 봐도 부모님은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하긴 중간고사 성적 보시고 많이 충격받은 표정이시긴 했지만. 사실 그 점수는 나도 좀 놀랍긴 했다. 공부를 안 하면 이 정도까지 곤두박질칠 수 있구나! 싶어서.

물론 히어로 일을 하느라 공부에 좀 소홀했던 건 인정한다. 사실 너무 피곤해서 수업시간에 많이 졸기도 했고, 그 여파가 어떻게든 이런 식으로 나온 거겠지.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마음도 있었다. 저번 중간고사 성적을 처음으로 보셨던 부모님의 표정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하지만 그래도, 막상 하려니까 손에 안 잡히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집으로 돌아와서 책상에 앉아 있은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놀고 싶어지는 자신에 마리네뜨는 다시금 절규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과 공부에 대한 집중력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마리네뜨의 얼굴에 우울한 기색이 짙게 번졌다. 다른 과목도 문제였지만 특히 이번에 수학은 진짜 외계어를 설명하나 싶을 정도로 어려웠다. 막막하다. 예제를 몇 번이고 다시 풀어봤는데도 이해가 안 돼.



“아악, 어떡하지. 티키, 티키. 나 진짜 어쩌면 좋아?”

“마리네뜨….”



차마 이것까지 긍정해줄 수는 없는지 안쓰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티키에 마리네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내가 뿌린 씨앗이긴 한데. 그래도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하긴, 이번 기말까지 망치면 진짜 방학에 보충수업을 나가야 할 테니까 공부는 해야겠지….”



에스미한테 SOS를 쳐서 어느 정도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너무 집중이 안 돼서 미칠 것 같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마리네뜨는 제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다. 내가 이렇게 공부머리가 죽어있었나?



“그래, 이거까지는 다 좋은데….”



마리네뜨는 음산하게 웃었다. 살짝 맛간 듯한 표정으로 하하하 웃고만 있는 마리네뜨를 보며 티키는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마리네뜨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테러 예고까지 오는 건 뭐냐고!”



크게 소리질렀다. 안절부절못하는 티키를 내버려둔 채 열받은 얼굴로 씩씩거리던 마리네뜨는 곧바로 떠오른 생각에 절로 풀이 죽었다.



“그것도 시험 시작 이틀 전이야 날짜가….”



난 죽었다. 으아아 소리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는 마리네뜨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처량했다. 안쓰럽게 쳐다보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중얼중얼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왜, 왜 하필 지금이냐고오오…!”



일주일 전, 파리 경찰청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그것은 약간의 암호를 동반한 예고장으로, 경찰은 수사 끝에 암호문을 풀었지만 적혀 있는 건 장소와 날짜뿐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테러 날짜에 나타나는 범인을 체포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라고. 며칠 전, 악당과 싸우다가 돌아가려고 하기 직전에 경찰들에 붙잡혀서 이런저런 사정 설명을 들었다. 아무래도 보험을 들어두고 싶었는지, 테러 당일날 도와줄 수 있겠냐는 경찰의 부탁을 왜 내가 선선히 승낙했을까.


그 때 거절했어야 하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고.”



시험이 너무 싫다고 다시금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눈을 감고 책상에 콕 고개를 박았다.



“어떻게 악당들은 사람이 이렇게 바쁜 시기만 골라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사람이 한가해질 때 와주면 좀 좋아?”



투덜투덜 중얼거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안 하면 정말로 외출 금지를 당하게 될 텐데?”

“에에~!!”

“힘내, 마리네뜨. 넌 할 수 있어! 힘내자~!!”



옆에서 열심히 응원하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는 한숨과 함께 다시금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억지로라도 교과서에 눈을 붙이며 공부하기 시작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비장했다.






“우응~ 이게 다 뭐야? 파트너.”



책상 위에 쌓여져 있는 책들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묻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짧게 대답했다.



“책.”

“그건 알고~ 평소에 읽는 책들이랑 좀 다른데?”

“…교과서야.”



곧 시험이니까. 덤덤하게 말하며 펠릭스는 다시금 독서에 집중했다. 하지만 펠릭스가 읽고 있는 책은 책상 위에 있는 교과서가 아니라 다른 종류였다. 제목을 쭉 훑어보던 플랙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펠릭스의 뒤로 쪼르르 날아가 펠릭스가 읽고 있는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으앗!”



제게로 뻗어지는 손을 잽싸게 피하면서,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새빨개진 것을 본 플랙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꺄하하하! 아니, 왜 그런 걸 읽고 있는 거야~? 아, 저번에 그 가면 쓴 여자가 했던 말이 신경쓰여서?”

“야!”



바락바락 소리치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플랙은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깔깔 웃어댔다. 더 이상 말하면 죽여버릴 것처럼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펠릭스가 걱정되기는 했는지, 플랙은 펠릭스가 잡을 수 없는 높이까지 날아오르며 낄낄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재밌다니까~ 어젯밤 일은 말이야.”



킬킬거리는 플랙을 올려다보며 펠릭스는 정말 요정이란 신비한 존재인가에 대한 고민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블랙캣이 되면 변신했을 때는 요정과 그 동안의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왜 자신의 요정이 이런 녀석인가에 대해 새삼 제 팔자를 한탄하는 펠릭스의 머릿속으로 지난 밤의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에펠탑. 그 에펠탑을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블랙캣은 어딘가에 있을 레이디버그를 찾았다. 바로 아래쪽에 작게 보이는 누군가를 찾아내자마자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철근 위에 앉아 발을 여유롭게 앞뒤로 굴러가며 앉아 기다리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레이디버그가 앉아 있는 철근 위로 내려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시선에 심장이 살짝 뛰었다.


‘무슨 일로 불렀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정말로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이상했다. 평소에는 웃을 일이 별로 없는데 블랙캣이 되면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풍부해진다. 이게 변신의 영향 때문인지, 플랙의 말대로 내면에 있었던 원래의 성격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잘은 모르겠다.


예전의 성격은 이미 8년 전에 버렸을 텐데.


웃고는 있는데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 아무튼 준비했던 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가져왔던 장미꽃을 레이디버그에게로 내밀었다. 하지만 깜짝 놀란 듯하다가도 꽃을 받기는커녕 망설임없이 흥, 고개를 돌리는 레이디버그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축 처졌다. 곧바로 일어나서 물었다.


‘대체 왜 안 받아주는 건데! 저번에 꽃이 받고 싶다고 그래서 특별히 장미꽃까지 가져왔다구!’


팔락거리던 검은색 고양이 귀가 블랙캣의 기분마냥 추욱 늘어졌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전에도 말했잖아. 넌 내 취향이 아니라니까!’

‘대체 레이디의 취향은 어떤데?! 나한테도 좀 말해달라고!’

‘적어도 넌 아니라구! 우린 파트너일 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


그렇게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원위치. 기분이 상했는지 집에 갈래, 한 마디만을 남기고 돌아서서 가버린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니 저절로 씁쓸한 기분밖에 남지 않는다. 좀 욱해서 투닥거리긴 했지만 어제 레이디버그는 정말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그걸 알면서도 내 감정만을 요구하다니.



“…최악이군.”

응? 뭐라고 말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눈을 초롱초롱 빛나는 플랙을 가볍게 무시하며 펠릭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시끄러운 것에도 적응이 되니까 전처럼 플랙이 귀찮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너무 입이 가벼운 녀석이라 말이지. 나중에 레이디버그랑 만나게 되면 쓸데없는 소리만 줄창 늘어놓는 거 아닐까. 상상만으로도 두려운지 펠릭스의 손이 책의 커버를 꽉 움켜쥐었다.


정말 레이디버그랑 잘 되더라도 플랙하고는 가급적 만나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펠릭스는 무심한 얼굴로 다시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 펠릭스를 지긋이 쳐다보던 플랙은 불만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이빨을 드러낼 정도로 씨익 웃으며 펠릭스의 뒤쪽에 있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뒤에서 와르르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에 펠릭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플랙…. 책장에는 손대지 말랬지.”



또 정리해야 하잖아. 하아,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펠릭스가 책장으로 다가가 쏟아진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떨어진 책들을 보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착착 순서를 정리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부지런히 꽂기 시작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이 궁금하다는 듯이 공중에서 뒹굴거리며 물었다.



“근데, 왜 저 책들은 안 봐도 돼~? 시험 아니었어?”

“어느 정도 복습만 꾸준히 하면 문제없으니까 괜찮아. 니가 이렇게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짓만 안 벌린다면 말이야.”



살짝 비꼬는 목소리에도 칭찬 고맙다며 킬킬 웃고 있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책에서 읽었던 대화가 안 통하니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알 것 같았다.

다 됐다. 어느 새 책들을 다 정리한 펠릭스는 아직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플랙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지금 더 책을 읽었다간 또 심심하다고 장난칠 거 같다. 어제 일 얘기까지 다시 꺼낼까도 걱정이고, 어차피 독서할 기분도 날아가긴 했으니까,



“플랙, 너, 밖에 나가면 정말 조용히 하고 있어야 해.”

“뭐야? 어디 나가게?”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짤막히 대답했다.



“산책.”





“여어, 펠릭스!”



자연사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 후에, 펠릭스는 경비실에 부탁해서 제가 만날 사람에게 연락을 넣었다. 잠시 뒤, 뒤에서 제 이름을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하얀 가운을 입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하하 웃고 있었다. 제게 손을 흔드는 남자에게 펠릭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이 박물관에서도 권위 있는 생물학 연구자 중 한 사람인 파비앙 듀퐁(Fabien Dupont)은 오랜만에 만난 펠릭스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가 여긴 어쩐 일이냐? 고등학교 들어가고는 통 안 오더니만.”



섭섭하게스리. 짧게 한 마디를 덧붙이며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방해하러 온 건 아닌데.”

“아니다. 일단 좀 올라갈까?”



곧바로 직원들만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탄 두 사람은 파비앙 교수가 사용하는 연구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낯익은 풍경들이 눈에 띄었다. 책장들에 꽂혀 있는 온갖 생물학 저서들과 가죽의 빛이 살짝 바랜 낡은 소파, 책장 유리문 안쪽에 들어 있는 다양한 표본들과 샘플들까지. 펠릭스는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정말 예전 그대로네요.”

“뭐야, 그 아쉽다는 듯한 말투는.”



툴툴거리는 파비앙의 목소리에 펠릭스는 그렇게 티가 나냐고 반문하며 피식 웃었다.



“그냥, 아저씨는 늘 한결같잖아요. 신기해서요.”

“고작 1,2년 사이에 사람이 변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니, 나이를 먹기는 했지만 아직 너도 어리구나, 어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파비앙이 곧 마실 것을 가져와 펠릭스에게로 내밀었다. 시원한 주스병을 말없이 바라보던 펠릭스가 주스의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런 펠릭스를 조카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던 파비앙이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냐?”

“….”

“니가 아무런 이유 없이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잖니. 곧 시험기간인 이 바쁜 시기에.”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나도 너만한 딸이 있는데 모를 리가.”

“…언제 저 모르게 결혼하셨습니까? 숨겨둔 가족이라도 있었어요?”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지. 조카야, 조카!”



넌 왜 이리 귀여운 맛이 없냐고 투덜거리는 파비앙을 향해 펠릭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확인? 그래, 뭘 말이냐?”



정말 중요한 기밀정보만 아니면 뭐든 말해줄 수 있다며 웃고 있는 파비앙과는 달리, 펠릭스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이 박물관 뒤쪽 절벽에 엄청나게 커다란 동굴이 있지 않아요?”

“동굴이라니?”



그게 뭔 소리냐고 묻는 듯한 파비앙의 표정에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10년이 넘게 이 박물관에서 터를 잡고 일한 파비앙조차 그 동굴에 대해 모른다는 말은 펠릭스에게 싸한 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지만 펠릭스의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것을 알아챘는지 소년을 살펴보는 파비앙의 표정도 걱정스럽게 변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순간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펠릭스와 파비앙은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죠?”



자주 와봤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조용한 곳이었다. 밖에서 박물관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달리 이 연구동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데다, 여기에 모여 있는 학자들은 하나같이 자기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연구하는 것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이라 굳이 소음이 나올 이유가 없다. 펠릭스도 꽤나 자주 방문했었지만, 이렇게 시끄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다시 말해서, 시끄러울 법한 이유가 있다는 거다.


무슨 일이 있나 보려고 밖으로 나가보려는 펠릭스를 파비앙이 한 팔을 들어 제지했다. 나가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파비앙을 보며 펠릭스는 다시금 소파에 앉았다. 파비앙이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상당히 재밌는 시기에 방문했구나.”

“예?”

“이번에 우리 쪽에 큰 일이 하나 생겨서 말이지.”

“무슨….”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묻는 펠릭스에게 파비앙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거 우리들끼리도 쉬쉬하는 기밀 사항인데, 그래도 듣고 싶니?”

“듣고 싶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펠릭스에 파비앙은 조금 놀랐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일이구나. 네가 이런 일에 관심을 다 가지고.”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지금은 뭐든 알아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펠릭스의 얼굴에 파비앙은 살짝 놀란 탄성을 내뱉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가 밖에 떠들고 다닐 성격도 아니고.”



결벽적이고 입이 무거운 펠릭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되는지, 파비앙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도난이라….”



박물관을 떠나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가는 펠릭스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2주 전, 자연사 박물관에서 중요한 표본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 전시하기 전의 연구 단계인 표본인데 그간 나타나지 않았던 특이한 유형의 생명체라고.


학자들만이 열람할 수 있는 고급 표본실에 보관하고 있었던 귀중한 표본을 도둑맞은 터라 박물관은 당시 한 차례 난리가 났었다. 즉시 내부수사에 착수했지만 이 표본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무척 적었고, 무엇보다 어떻게 훔쳐갔는지가 우선 난제였다. 경찰에 알리기에는 박물관의 이미지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도난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연구진 내에서도 무척 적었다. 현재는 박물관 경비팀 쪽에서 이 문제를 전담하고 있다고 했다.


범인의 수법은 정말이지 깔끔했다. 어떤 흔적도 없이 전시관 유리에 동그랗게 구멍을 뚫어서 안에 들어 있던 표본만을 들고 나갔다고. 마치 훔쳐간 게 아니라 그냥 문을 열고 들어와서 표본을 가져간 듯한 자연스러운 수법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연구동 안의 누군가가 범인인 건 아니냐는 얘기까지 돌았다고 했다. 물론 다들 각자의 연구동 안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으며 연구동 복도에 설치된 CCTV에는 사람이 나다닌 흔적이 전혀 없었다.


정말 비밀이야! 그렇게 몇 번을 다짐받고 열람한 표본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평범해 보이는데 이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렇게 되물으니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체 반응이 다른 녀석들과는 정말 달라. 특히 뭐랄까….’


아니다. 고개를 절레 내젓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뭐라고 더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목이 타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에 파비앙은 마치 기밀 정보라도 발설하는 것마냥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진짜 기밀이긴 했지만.


‘에너지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몇 가지 검사가 있는데, 에너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특정된 반응이 강하게 나타난단다. 그런데 이 생물에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의 양이 상당했거든.’

‘그런가요?’

‘그래. 심지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화석에서 말이야.’


이게 제일 놀랍지. 살짝 웃음을 터트리며 파비앙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뭐, 우리도 이걸 발견한 건 지극히 우연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작은 개체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에너지 반응이 나타나는지 다들 신기해했었지. 뭐랄까, 꼭 에너지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것 같은 이미지가 그려진다고 하면 이해가 되겠니? 살짝 흐릿한 모양이지만.’

‘네.’


고개를 끄덕이자 파비앙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영문을 모르겠구나. 입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말이야. 대체 어떻게 알고 훔쳐간 건지 궁금하기도 하네.’


중얼거리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사실을 물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얘기를 저한테 다 해주셔도 되는 건가요.’

‘뭐 어떠냐. 너희 아버지가 왕년에 우리 박물관에 기부했던 기부금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이자도 안 될 거 같은데.’


그래도 다른 데서는 말하지 말라고, 잘리는 건 무섭다고 말하며 너스레를 떠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묻자 결심하고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언제 훔쳐갔죠?’

‘음, 솔직히 워낙 특이한 표본이긴 해서 아직 제대로 연구에 착수하지는 못했었단다. 뭐 그래도 3일에 한 번씩은 그 표본실에 들렀었는데, 5월 26일에 확인했을 당시에는 분명히 있었거든. 29일에 확인해보니 없어서 놀랐지만 말이야.’

‘CCTV는 있었나요?’

‘표본실 안에는 없었지만 표본실 밖 복도에는 설치해놨었지. 3일간의 CCTV를 돌려보니, 27일 오후쯤에 수상해 보이는 누군가가 다녀간 기록이 남아있긴 했었다.’

‘…어떤 사람이었죠?’

‘이런, 아주 탈탈 터는구나! 직접 보여줄 수는 없다만, 굉장히 특이한 차림을 한 남자였단다. 상의는 검은색 셔츠를 하의는 하얀색 바지를 입고 있었어.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피부색이 정말 창백했다는 건 기억에 남아.’


정말 특이하게 생겼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파비앙의 말에 펠릭스는 곧바로 머릿속에 한 단어를 떠올렸다.


악당.


‘그리고 방식도 매우 이상했어. 문의 손잡이를 잡고 뭔가를 하더니 갑자기 문이 철컹 열리는 거야. 보고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지.’


그리고 들어가서 표본이 들어 있던 갈색 나무상자를 가지고 나온 뒤로는 행방이 사라졌다고 했다. 혹시 경매시장에 나올까 싶어 유명한 옥션 쪽의 동향이나 소식들을 접하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다고. 정말 특이하게 입고 있었던 사람이니 분명 사복도 그럴 거라며, 혹시 나중에 찾아내면 꼭 연락 달라는 농담을 끝으로 이 이야기는 종료되었다.



“27일이라.”



펠릭스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 사건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날짜.



“분명히 5월 27일이었지.”



학교에서 현장실습을 갔던 날짜가. 게다가 그 날 마침 미스터 피죤이 나타났었고, 본격적으로 싸우려는 순간 갑자기 사정이 생겼다며 도망가 버렸다. 마치 시간을 끌고 있었다는 듯이.



“우연인가? 아니면….”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성급한 일반화는 좋지 않다. 연관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혹여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과 미스터 피죤이 서로 아는 사이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하지만 남자가 훔쳐갔다는 표본이 조금 신경쓰이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펠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어.

아직까지는.





“으아아, 으아아아….”



마치 좀비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 말이나 웅얼거리고 있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수척했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서 당장이라도 넘어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공부를 거의 안 하던 사람이 벌써 일주일 넘게 공부만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속된 말로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하긴 했는데 정말이지 정신이 쪽쪽 빨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오랜만에 많은 지식을 우겨담고 있어서인지 머리가 과부하를 호소하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에 레이디버그 일까지. 악당들도 평소에는 일을 하는지 요즘은 꼭 밤에만 나타나서 휘젓고 다니는데 그 덕분에 요즘은 잠까지 설치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는 자면 안 되니까 애써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니 긴장이 풀려서일까, 피곤해서 죽을 거 같다.


정말이지 딱 죽고 싶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무 힘들어.



‘마리네뜨….’



자켓 속에 숨어 있는 티키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들릴까. 피곤한지 거하게 하품하며 길을 걸어가던 마리네뜨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작은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 한산한 공원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공원 안으로 총총 들어섰다. 졸린 눈으로 휘적휘적 공원에 있는 벤치로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순간 비틀거렸다.



“어…?”



몸이 기우뚱하더니 넘어지려는 찰나, 단단한 무언가가 허리를 받치더니 마리네뜨를 꼭 붙잡았다. 깜짝 놀랐는지 눈만 껌뻑거리던 마리네뜨가 살며시 제 허리로 시선을 내렸다. 새까만 팔이 제 허리에 둘러져 있었다. 설마.


잠 다 깼다. 마리네뜨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조심해야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블랙캣과 달리 마리네뜨는 조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 전의 일을 떠올리자니 왠지 얼굴 보기가 거북한 것도 사실이라,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입을 우물거렸다.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떨어? 어디 아파, 공주님?”



상냥하게 묻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빙빙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요.”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블랙캣의 팔을 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벤치로 몸을 돌리려다가 다시금 바닥으로 넘어질 뻔한 마리네뜨가 공중에서 딱 멈춰섰다.



“호이차.”



마리네뜨의 가방을 양 손으로 붙잡고 블랙캣은 가볍게 마리네뜨를 일으켜 세웠다. 묘한 기시감에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떠오른 얼굴을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펠릭스가 훨씬 낫지.



“혹시 평소에 꽤 덜렁이는 타입?”



장난스럽게 묻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짜증스레 소리쳤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그냥?”

“…좀 쉬려고. 그나저나 블랙캣은요? 뭐 악당이라도 나타났어요?”



하지만 그런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악당이 없어도 변신할 수 있지 뭐~ 안 그래?”



사실은 다시 한 번 박물관 뒤편을 조사하기 위해 좀 더 안전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거지만 블랙캣은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는 얼굴이라 저도 모르게 구하긴 했는데 뭔가 좀 위태해 보이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블랙캣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벤치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는 마리네뜨를 쫓아간 블랙캣이 조금 거리를 두고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마리네뜨가 물었다.



“왜 따라와요?”

“심심해서.”



딱 잘라 말하는 블랙캣에 마리네뜨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마리네뜨가 그러든 말든 블랙캣은 즐거운지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블랙캣이 되면 평소보다 묘하게 들뜨는 것 같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랑 같이 있어도 재밌다는 생각밖에 안 드니까.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볼멘스레 중얼거렸다.



“그래서, 뭐 하고 놀아줘요? 쎄쎄쎄라도 할까요?”



툭 던지듯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질문하는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블랙캣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왜 웃는데?! 그렇게 묻는 듯한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웃음을 그치고 대답했다. 



“야, 너 생각보다 재미있다.”



언젠가의 누구와 똑같은 대답. 역시 블랙캣의 정체는 앨빈인 게 아닐까, 변신하면 머리카락이 염색되는 거 아니야? 의심스레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곧 생각을 접었다. 그럴 리가 없지.



“블랙캣은 생각보다 이상하네요.”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

“생면부지의 사람을 심심하다는 이유로 쫓아오는 것부터가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혹시 저 알아요?”

“아니? 그리고 생면부지라니, 인연이라면 아까 생겼잖아? 넘어질 뻔한 걸 구해줬는데 의외로 박정하네 공주님~”



날카로운 마리네뜨의 질문에 블랙캣은 조금 놀랐지만 곧 유연하게 되받아쳤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숙이고 블랙캣을 힐끔 돌아보았다.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블랙캣을 보면 딱히 자신에게 말을 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심심하대서 놀아달라고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마리네뜨는 그런 블랙캣의 태도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묘하게 상냥한 것 같은데. 레이디버그가 아닌 나한테도 이럴 수 있는 녀석이었나?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놀랐다. 기분이 나쁘다니, 어떤 점에서?


장난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평소보다는 차분한 블랙캣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었다.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고 많은 걸 묻지 않는다. 레이디버그인 자신한테는 늘 이것저것을 물어보거나 성가실 정도로 계속 말을 걸어대던 녀석이 갑자기 이러니 좀 당황스럽긴 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겠지만. 늘 방방 뛰고 지나치게 밝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탓일까.


얼마 전에 요란하게 장미꽃까지 가져와서 프로포즈하던 블랙캣을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생각했다. 레이디버그로 만났을 때도 딱 이 정도면 참 좋을 텐데. 아무리 좋아한다지만 좀 정도를 지켜줘야….


거기까지 떠올리고 마리네뜨는 흠칫했다.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내가 좋아서? 그래서 무엇도 계산하지 않고 그렇게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걸까. 그러고 보면 과장된 행동들이나 지나치게 텐션이 높은 듯한 모습들은 마치….



“블랙캣은, 평소에 사람들이랑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죠?”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마리네뜨 쪽이었다. 그 질문을 듣고 블랙캣은 조금 놀랐는지 마리네뜨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뭐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싱글싱글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옛날의 제가 떠올라서요.”



웃고는 있지만 분위기상 왠지 힘든 얘기를 꺼낼 것 같은 마리네뜨의 표정을 보고 블랙캣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앞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무언가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살짝 웃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말할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렇게 먼 과거는 아니지만.



“뭐, 그래서 사람들이랑 얘기를 하게 되면 너무 기뻐서 이것저것 막 말하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그래서 마구 떠들다 보면 오히려 사람들은 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구요.”


누군가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방법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어서. 어떻게든 사랑받고 싶어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재수없는 애’ 이상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싫어하기도 하고 애써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슬퍼하기도 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줄 사람은 없는 걸까? 라는 생각에 몰래 이불 속에서 울어보기도 했었다.



“그것에 상처받고 계속 고민하기를 반복하다가, 정말 저를 좋아해주는 친구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에스미를 만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걸.”



싱긋 웃으며 돌아보는 마리네뜨는 뜻밖에도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왜 저러지?



“아, 왕따 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니야, 날 뭘로 보고.”

“그럼 다행이구요.”



안심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리던 마리네뜨가 이내 기운차게 말을 꺼냈다.



“아무튼! 솔직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쪽은 말이죠, 쓸데없는 것들에는 정말 솔직하면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전혀 안 하려고 하는 타입 같단 말이에요.”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잘 웃고 매사에 익살스럽게 구는 점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무척 믿음직스러운 파트너. 매번 잘난 척을 하긴 하지만 같이 다니다 보면 그가 지키지 못할 말을 한 적은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가 자신의 마음 속을 오롯이 내보이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좋아한다고 마구 떠들지만 거기에 진심이 얼마나 담겨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건 내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레이디버그가 되고 나서 제 직감이 틀렸던 적은 거의 없었다.


블랙캣이 하하 웃으며 물었다.



“내가 그렇게 보였어?”

“그래요! 신중하게 말하는 건 좋지만, 뭐든 과하면 좋지 않아요.”

“…그런가.”

“그렇죠.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저도 아직 좀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정말로.”



블랙캣의 솔직함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변함없이 좋아한다 말하며 애정을 보내주는 그의 모습이 아주 싫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그렇게까지 사랑받는 ‘레이디버그’가 부럽기도 했다. 펠릭스를 이렇게나 좋아하게 된 건, 아마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상냥하게 대해줬던 사람이 거의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당신에게 흔들리는 건지도 몰라. 아주 조금이지만.


마리네뜨의 말을 계속 가만히 듣고 있던 블랙캣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구나.”



블랙캣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고였다. 잔잔하게 웃는 블랙캣의 얼굴을 보는 건 또 처음이라 마리네뜨는 힐끔 시선을 피했다. 왠지 창피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거 나중에 떠올리면서 막 쪽팔려하게 되는 거 아니야? 아악! 속으로 온갖 절규를 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옆에 두고서 블랙캣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말수가 많아봤자 미덕이 되지 않는다고 배워왔다. 말을 많이 하는 건 그만큼 틈을 많이 보인다는 뜻과도 같다. 그래서 계속 감추고 살았다. 사람들과 거의 떨어져서 마음을 죽이고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감정들을 모두 잘라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미숙한 자신이 틈을 보일까봐, 그 틈이 자신을 좀먹고 버려야 하는 감정들을 깨어나게 할까봐.


블랙캣이 되어서도 그랬다. 블랙캣의 모습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망설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든 멋있어 보이고 싶었으니까. 추한 모습같은 건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게 무엇이든 간에, 어떻게든 감추고 싶었다. 아니, 사실 마이 레이디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 내가 접근했던 건….


…그만두자.


더 이상 생각하기 꺼려졌던 탓에 블랙캣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말해야만 한다는 건 알지만, 적어도 아직은.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나랑은 생면부지인 사이 아니었어?”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블랙캣은 이미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본인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겠지. 잠깐 얘기한 사이인데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가 좀 신기하지만.


마리네뜨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왠지 친근감이 들어서요. 뭐 어디 가서 제 이야기 하고 다닐 건 아니잖아요.”

“오호, 신뢰를 받고 있는 건가?”

“파리의 영웅인데 그 정도 책임감은 있어야죠. 그리고 사실 그렇더라도 괜찮을 거 같아요.”

“왜?”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거든요.”



조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사람이 없는 공원 안에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블랙캣이야말로 괜찮아요? 히어로 일.”



블랙캣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말 그대로 정말 생면부지인 사이고, 지금 자신을 구해준 것도 단순히 운일지도 모른다. 미라큘러스를 지니고 다닌 후로 상당히 운이 좋아졌으니까. 이 참에 하고 싶은 말들은 다 해야겠다며 마리네뜨는 재차 물었다.



“안 힘들어요?”

“힘들지.”



망설이지도 않고 단언하며 블랙캣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시작한 거 끝을 봐야겠지. 그리고 아마 마이 레이디도 똑같이 생각할 거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신뢰를 읽은 마리네뜨의 심장이 차갑게 조여들었다. 기뻐야 하는 말인데 조금도 기쁘지 않은 나는 못된 아이인 걸까. 당신에게 나는 언제나 강한 사람인 건가 싶어서 불안하다.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당신도 강한 히어로로서의 내가 좋은 건지도 몰라. 아니야, 아닌데.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사실 지금도 너무 힘들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뭐?”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꼭 쥐면서 마리네뜨는 중얼거리듯 빠르게 내뱉었다.



“당신이 레이디버그의 뭘 아는데요?”

“….”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레이디버그도 사실은 싸우기 싫을지도 몰라요. 사람은 언제나 강하지 않으니까요. 약한 모습도 있다구요. 평범한 여자아이일 수도 있는 거야!”



좋게 말하려고 했는데, 감정이 북받쳐서인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깔끔하게 응수했다.



“알아.”



그걸 어떻게 아냐고 마리네뜨가 반박하려는 찰나 블랙캣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이 레이디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걸.”



자신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순간 말하는 것을 잊었다. 입을 다물고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를 돌아보지 않은 채 블랙캣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불안해. 오히려 너야말로, 레이디버그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모를 거야. 긍정적인 면들은 모두 가감없이 드러내지만, 부정적인 것들은 모두 다 속에 끌어안고 사는 것만 같은 사람이거든. 그건 좋은 게 아닌데.”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뭐, 그냥 걱정이 될 뿐이야. 뒤에서 몰래 울고 있는 건 아닐지, 그게 아니라면 언젠가 견디지 못하고 가슴이 터져버리거나 아예 곪아서 가라앉는 건 아닌지.”



너는 언제나 웃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무리하게 웃는 건 싫어.



“하지만 그게 레이디버그의 뜻이라면 난 존중할 거야.”



나는 너의 그런 모습까지도 좋아하니까.



“그런 자신을 드러내지 않길 원한다면 끝까지 모르는 척할 자신도 있어. 내가 아직 그만큼 의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그게 내 사랑 방식이야.


덤덤하게 말을 끝맺는 블랙캣의 모습이 꽤나 낯설었다. 이제껏 봤던 모습들 중에 제일로. 마리네뜨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레이디버그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좋아하지.”



블랙캣이 두 손을 제 정수리에 올리면서 히죽 웃었다.



“뭐, 아직 내 짝사랑이지만.”



조금은 씁쓸한 듯한 그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괜히 미안해졌지만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마음 가져봤자 좋을 게 없다. 블랙캣에게든 자신에게든. 그럼에도 뭔가 말해주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 나랑 닮았어.’


“계속 까불거리지 말고 그런 모습 좀 보여주는 건 어때요? 그 사람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훨씬 더 좋아할 거 같은데.”

“그럴까?”

“그래요. 마냥 밝기만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나도 네게 그런 식으로 비춰졌던 것 같지만.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마리네뜨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고, 블랙캣도 딱히 할 얘기가 없는지 조용해졌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마리네뜨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저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으아앗!”



허둥지둥 일어나면서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들려다가 열려 있던 가방문 사이로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한숨을 쉬더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마리네뜨가 떨어뜨린 물건들을 같이 줍기 시작했다.



“하여간 칠칠치 못하네.”

“하, 하하. 네, 뭐….”



살다살다 블랙캣한테까지 이런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한다니. 속으로 괴로워하던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이 다시금 말을 건넸다. 야.



“이거 왜 틀렸어?”

“…네?”



블랙캣이 손에 들고 있는 노란 공책이 무엇인지 알아채자마자 마리네뜨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내 수학 노트! 하지만 재빠르게 마리네뜨의 손을 피한 블랙캣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가지가지로 틀렸네. 이게 어떻게 3이야?”

“도, 돌려줘요!”

“여기서는 이 z의 방정식 값을 치환해서 원의 방정식이랑 연립해서 풀어야지.”

“…네?”

“그리고 여기는 이렇게 x를 여기가 아니라 여기에 대입해야지. 아니,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이런 풀이가 나와? 이건 이것 나름대로 창의적이네.”



어느 새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들더니 블랙캣은 간단한 공식과 함께 풀이를 시작했다. 얼떨결에 귀를 기울이던 마리네뜨는 선생님보다도 더 명료하게 설명해주는 블랙캣의 설명에 깜짝 놀랐다. 이해도 훨씬 쉬웠다. 마리네뜨는 놀라서 물었다.



“당신, 머리 좋았어요?”

“멍청하단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어.”



의외였다. 오늘따라 이 녀석의 의외인 면을 많이 본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 웃긴 표정이라고 생각하며 블랙캣은 푸핫 웃었다.



“왜 그렇게 신기한 표정으로 봐?”

“그, 그냥. 좀 신기해하면 어때서요!”

“네, 네. 그럼, 조금 가르쳐주고 갈까?”

“그…, 됐어요! 그 정도로 심각하진….”

“…너 이거도 못 풀면 이번 시험 분명 낙제야. 보충학습이 받고 싶다면 편할 대로 하시죠~”

“헐, 안 돼!”



도와줘요! 저도 모르게 블랙캣을 붙잡은 마리네뜨의 얼굴이 살짝 새빨개졌다. 블랙캣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봤자 플랙 녀석 때문에 공부도 못할 게 분명한데. 심심하다고 또 집안을 어지럽혀둘 녀석을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제 앞에서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웃는 마리네뜨를 보는 건 예상 외로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쓸데없이 제게 감정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조금은 귀여워 보이는 것도 같고.


아, 좋다. 평소에도 딱 이 정도면 좋을 텐데.


서로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둘은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정말로 열심히, 선생님보다 더 쉽게 설명해주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새삼 블랙캣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왜 블랙캣이 자신의 시험 날짜를 자세하게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래서, 이번 테러가 예고된 장소가 여기라구요?”



레이디버그가 물었다.



바로 맞췄네.”



시장이 대답했다.



“하, 하하….



웃고는 있지만 레이디버그의 얼굴은 영 떨떠름했다. 깜깜해진 밤, 흐릿한 주홍빛의 불빛 몇 가닥만이 창문들 사이로 번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 장소는 바로,



“와 진짜. 하필 여기라니.”



질렸다는 얼굴로 블랙캣은 제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파리가 자랑하는 명소 중 하나이며 관광객들은 물론 파리의 시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바로 그곳은,



“이거 진짜 미친 놈들 아니야? 루브르 박물관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 블랙캣이 온갖 과장된 몸짓으로 분노를 표현했다. 제대로 열받은 얼굴을 한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덤덤하게 건물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폭탄이 터진다고? 진짜?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시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테러 예고를 받은 순간부터 쭈욱 루브르 박물관에 경찰 인력을 늘렸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박물관은 파리의 자랑거리 중 하나니까. 물론 단순한 장난일 수도 있겠고, 우리도 제발 그러기를 바라지만 요즘 여러 가지로 안 좋은 일들도 터지고 해서.”



그 말과 함께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장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레이디버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박물관 3층 쪽을 순찰하는 걸 거들어 드리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아무래도 자네들이 경찰 수십 명보다 더 믿음직하니까!”



하하 웃으며 제 어깨를 툭툭 치는 일레인 시장에 레이디버그가 좀 싫은 듯한 표정을 지을 찰나 블랙캣이 시장의 손을 잡아챘다. 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시장에게 블랙캣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저하고도 악수해 주셨으면 해서 말이죠!”

“아하, 얼마든지요.”



시장의 손을 잡고 좀 과할 정도로 붕붕 흔드는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와준 걸까?



“레이디, 갈까?”



생각을 하던 중 불쑥 질문하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대답했다.



“응? 응!”



시장과 경찰들을 등진 채로 박물관 안으로 돌입한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물관 안은 깜깜했다. 그림들 주위에 흐릿하게 켜놓은 불빛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매직박스에서 적외선 안경을 꺼내 착용하는 레이디버그는 곧 자신과 똑같은 안경을 꺼내 쓰는 블랙캣에 깜짝 놀랐다.



“너, 그거 써?”

“? 응? 당연하지. 이번은 그냥 앞을 보는 게 아니라 폭탄을 찾는 거잖아. 적외선 안경은 물건이 있으면 불빛으로 보여주니까.”

“그, 그렇지.”



홱 고개를 돌리며 레이디버그는 다급히 적외선 안경을 착용했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블랙캣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좀 민망했다. 자신이 마리네뜨라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다행이지만 왠지 좀 찔리는 기분이었다.


빠르게 걸어 3층 회랑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폭탄은커녕 폭탄 비슷한 물건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제 20분만 있으면 예고한 시간인 자정인데도 전혀 수확이 없자 레이디버그는 점점 초조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어떻게 하지?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레이디버그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응?”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차피 폭탄을 설치해놨다면 막기는 힘들어. 이 박물관은 너무 넓고 일일이 다 살펴볼 수도 없으니까. 그냥 걷기만 해도 꼬박 일주일이 걸릴 만큼 넓은 장소에 숨긴 폭탄을 무슨 수로 찾아?”



안 그래? 그렇게 되물으며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마주보았다. 그가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귀를 긁적거렸다.



“이건 그냥 쇼라고. 정말 루브르에서 폭탄이 터지더라도, 경찰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고 말하기 위한 쇼. 안 터지면 다행인 거고 터지면 회피할 구실이 필요하니까.”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마주하며 말했다.



“우리까지 끌어들인 것도 그래서일 거라고 생각해. 시민들에게 먹히기 좋은 게 영웅이지. 그렇잖아?”

“….”

“혹시 잘해서 폭탄을 막아내면 그건 당연한 거고 못한다면 경찰은 분명 우리가 있었는데도 폭탄을 막지 못했다며 죄송하다는 기사를 낼 거야. 그럼 사람들의 관심은 우리에게 쏠릴 테고 경찰이 먹을 욕은 우리가 다 먹겠지. 알고 있잖아?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저 이용해먹기 좋은 구실일 뿐이야.”

“그렇겠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블랙캣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본론을 꺼냈다.



“…라고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겠지.”

“뭐?”



블랙캣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근처에 있던 창문 하나를 열었다. 창문 쪽에 발을 걸치며 레이디버그에게 손짓하는 블랙캣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조용히.”



그러면서 벽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블랙캣을 따라가면서 레이디버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지붕으로 올라가?”

“…사실 약속시간보다 일부러 일찍 왔거든. 아무래도 걸리는 점이 있어서. 그래서 일부러 일찍 와서 경찰들이 뭐라고 하는지 엿들었지. 가관이던데.”

“응?”

“아무리 그래도 영웅들을 그런 사지로 몰아넣어도 되냐고, 뭐 그런 식으로 떠들더라?”

“뭐?”



레이디버그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블랙캣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지붕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레이디. 우리가 돌아다녔던 복도 좀 이상하지 않았어? 있어야 하는 것들이 없었잖아.”

“뭐가?”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레이디버그를 살짝 뒤돌아보며 블랙캣이 씨익 웃었다.



“그림 말이야. 그 복도에 그림이 하나도 없었잖아.”

“…!! 아, 그러고 보니…!!”



생각해보니 복도에 걸려 있던 액자들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보수공사를 한다고 팻말이 걸려 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깜짝 놀라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웃으며 말했다.



“마이 레이디는 이런 점에서 순진한 구석이 있다니까? 뭐 그게 매력이지만.”

“…놀리는 거야?”

“설마, 칭찬이야.”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난감해진 블랙캣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게다가, 경찰들의 행동도 좀 수상쩍었지. 그 층의 복도를 모조리 우리한테 맡겼어. 위쪽으로 올라오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다고. 이게 뭘 의미하는 거 같아?”

“…일부러 우리를 여기로 보냈다는 건가?”

“아마도.”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블랙캣은 짜증스레 말했다.



“이건 함정이야.”

“함정?”

“그래,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 경찰이 왜 저쪽에 협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이 테러 예고장을 보낸 놈들의 진짜 목적은 우리일걸.”



열받은 얼굴로 블랙캣이 다시금 질문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경찰이 너무 거리낌없이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했지 않았어? 악당을 상대할 때는 물러나달라고 했었을 당시에 그렇게 자존심 상해하던 인간들이 말이야.”

“확실히 좀 의아하긴 했지.”

“그래, 그리고 이 드넓은 박물관을 봐. 소리소문없이 사람 한둘쯤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 같은데.”



으스스한 소리를 지껄이는 블랙캣의 말을 듣던 레이디버그가 살짝 움찔거렸다. 블랙캣이 다시금 씹어뱉듯이 말을 꺼냈다.



“협력하지 않으면 박물관을 제대로 날려버리겠다는 협박이라도 했나 보더군. 어떻게 협박했길래 경찰이 이런 수까지 쓰나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따져보면 경찰한테는 별 거 아닌 거래잖아. 영웅이라고 불리지만 그래봤자 애송이 둘과 수백 년간 파리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박물관의 안위, 뭐가 더 중요하겠어? 대답은 안 봐도 뻔하지.”



어느 새 회랑 복도를 감싸고 있는 지붕을 지나, 다른 곳보다 높게 솟은 지붕 쪽으로 다가간 블랙캣은 재빨리 지붕에 납작 엎드리더니 유리 피라미드가 있는 중앙의 공터 쪽을 내다보았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는 블랙캣의 옆에 붙어 빼꼼 고개를 내밀고 바깥쪽을 바라보던 레이디버그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전히 대기하고 있는 수십 대의 경찰차들 주변으로 경찰들이 모여서 뭐라뭐라 떠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부분 박물관에서 철수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듣자듣자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무작정 응하지 않았다간 분명 무슨 짓을 하려고 들 것 같아서 그냥 받아들인 거야. 경찰들 앞에서 대놓고 말할 수는 없잖아?”



블랙캣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괴물처럼 강하니까 폭탄을 맞든 뭘 맞든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그럴 수가….”



이번에는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살짝 창백해진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지 무심하게 대꾸했다.



“일단 예정 시각이 지날 때까지만 여기에 좀 숨어 있어야겠어.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잖아.”



지금 빠져나가기엔 경찰들이 저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좀 어려울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공권력이랑 대립하게 되는 구도는 사절이라며 블랙캣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경찰들이 부탁한 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니까 안전할 거야.”



걱정하지 말라는 듯 블랙캣은 씨익 웃었다.




한편, 루브르 근처에 있는 지하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으로 마치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처럼 지긋이 그걸 들여다보던 남자는 곧 지붕 쪽으로 올라가서 뭐라뭐라 대화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을 발견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는 중얼거렸다.



“목표는 저기 있나.”



그 시각, 레이디버그는 싸늘한 감각이 제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뭔가 터질 것처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경찰이 말한 폭탄 예고 시간은 자정이고 아직 시간이 몇 분쯤은 남았는데, 왜 벌써? 오감이 예민해져서인지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가 제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곧 직감이 시키는 대로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는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남자가 서 있는 자리 옆에 있던 손전등이 남자가 서 있는 벽을 환하게 비추었는데, 놀라운 점은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것 같았던 남자의 손에 물건의 그림자가 추가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펌프처럼 생긴 그것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남자는 한 번 힘을 주더니,


왜 그래? 그렇게 묻는 블랙캣의 질문에도 레이디버그는 대답 없이 그를 잡아끌더니 지붕을 세게 딛고 몸을 날렸다.


손잡이를 밑으로 세게 눌렀다.


쾅, 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건물의 지붕에서 화려한 주홍빛의 불꽃이 솟아올랐다. 지붕이 폭발하는 소리와 그 규모에 피라미드 앞에 있던 경찰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폭발의 규모가 커서인지 꽤나 멀리까지 반짝이는 주홍빛에 루브르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몇몇 사람들도 있었다. 그건 에펠탑 근처를 날아다니던 미스터 피죤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깜짝 놀란 그가 손을 이마에 대고 폭발이 일어난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헉! 저건 뭐다냐!”



폭발의 여파를 정통으로 맞았지만 두 히어로는 다행히도 무사했다. 으아악! 소리와 함께 추락하는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폭탄이 터지는 반동을 이용해 한 바퀴를 돌며 부드럽게 잔디밭에 착지했다. 머리부터 떨어져 끙끙거리는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어떤 불빛 하나를 발견했다.



“블랙캣, 저 쪽이야!”

“엉?”



블랙캣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레이디버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분명히 저 쪽이다.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걸 잡아야 한다고.


지하도 안에 있던 남자는 멀리서 터지는 폭탄을 보고도 별 감흥없다는 얼굴로 옆에 놓여 있던 손전등을 껐다. 언제나처럼 유유히 뒤로 돌아 사라지려던 남자를 붙잡은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거기 서!”






제 직감이 말하는 장소를 향해 순식간에 달려간 레이디버그의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잡혔다. 돌아서서 움직이려던 남자에게 레이디버그가 크게 소리쳤다.



“거기 서!”



그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의 기색이 떠올랐다. 설마 싶으면서도 천천히 레이디버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는 남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로 놀랐는지 살짝 눈을 크게 치켜뜨는 남자에게 레이디버그가 소리쳤다.



“당신, 누구야! 왜 이런 짓을 하지?”



그런 레이디버그의 뒤를 따라 도착한 블랙캣도 곧 남자를 발견했다. 초록빛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들어찼다.


‘상의는 검은색, 하의는 하얀색, 모자를 쓴 창백한 얼굴의 남자!’


뭐라 말을 못하고 마냥 남자를 바라보기만 하는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가방에서 요요를 꺼내 빙빙 돌리더니 남자에게로 던졌다. 남자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챙!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튕겨져 나가는 요요에 레이디버그는 물론이고 블랙캣도 깜짝 놀랐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남자는 손에 무언가를 쥐는 시늉을 하더니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에게로 팔을 휘둘렀다. 섬광탄이 터지는 것처럼 빛이 번쩍했다.


그리고 섬광탄이 터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레이디버그가 소리쳤다.



“어디 갔지?!”





타닥타닥,


발소리 하나가 어두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어둠 속을 한참을 달리던 남자의 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살짝 흐릿하게 비쳤다. 방금 전 레이디버그와 블랙캣과 대치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들을 문제없이 따돌리기는 했지만 사실 남자는 지금도 꽤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아챈 건가. 절대 눈치챌 수 없을 만한 거리였는데.


후우, 한숨과 함께 남자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간 남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한 40대 초반의 남자는 한숨을 쉬며 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몇 번 신호음이 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들켰습니다.”



망설임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흘러갔다.



“네, 그래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뭐라 하는 말들에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두려워하면 이쪽 일을 할 수 없다. 처음에는 애써 표정을 감추는 정도였지만 3개월이나 지나니 나름 익숙해졌다.


들킨 건 문제이긴 했으니 뭐라고 해도 일단 듣고 보자는 생각에 귀를 기울였지만, 다음에 들려온 대답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네, 곧 돌아온다구요? 그 녀석이?”



상대가 몇 마디를 더 말하자, 남자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8편으로




재판 수량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링크는 이쪽 >> http://naver.me/x24EEI80

Posted by I.R.E
,

매우 지극한 의식의 흐름으로 흘러갑니다ㅇ.<



일단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솔직히 이번 온리전은 준비부터 역대 최고로 힘들었던 온리전이 아닐까 싶다.

(재밌기도 재밌었음 일단 그건 아래에)


왜냐면 이제까지 온리전에서 보통 개인지 한 권(두꺼운걸로) 내고 말았는데 이번은 개인지 두 권에다 엔솔까지 했어서. 근데 사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기로 결정한 책이 겁나 두꺼운 게 문제였다 콘티만 무려 반 년을 짰던 녀석이고 카페 사건으로 3개월을 그냥 날려버리는 바람에 한 달만에 본편원고만 800페이지 정도를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고.


솔직히 이 얘기 들은 지인들이 하나같이 그게 가능하긴 해요? 라고 물었음(사실 나도 안될줄 알았다


계획을 짜보긴 했는데 솔직히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가... 하루 매일매일 30페이지 이상을 써야 겨우 끝낼 스케줄인데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하단 말인가?(후기에도 적었지만 악덕 출판업체도 이딴 스케줄은 주지 않을것 한달 800이라니


근데 겨우 끝내기는 했음 나도 내가 신기함ㅇ_ㅇ(그리고 지인들도 나를 무척 신기해했다


심지어 캣마리 개인지도 이거 적던 중에 적은것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건 지인분과 예전에 캣마리 내겠다고 약속했던 것도 있는데 간만에 재밌는 소재가 떠올라서 적어보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그렇습니다(아무말


근데 진짜 박을 포기하니까(이건 지금도 통탄스럽다) 간신히 마감은 쳤다 8월 3일 오후 4시가 커트라인이었음.... 근데 정말 힘들었던 게 그간 계속 밖에 나가지를 못해서 체력도 아주 바닥이었는데다 이 더위에 컴퓨터 앞에서만 16시간을 넘게 앉아있는 일이 부지기수다 보니 스트레스도 스트레스고 더워 죽겠고 그냥 너무 놀고 싶었음... 마침 게임 하나에 치이기도 했고 아 진짜 게임까지 달리면서 이걸 다 마감친 내가 진짜 독하닼ㅋㅋㅋㅋ쉬는 시간 쪼개서 한 거긴 한데(게임시간 하루 2시간도 안되었을것


5일까지 설정집을 완결치고 나니 그제서야 마감이 끝났다는 실감이 나더라 근데 행사는 내일이었지(총체적 난국

너무 정신이 없어서 다른 분들 챙겨드릴 것까지 사갈 여유가 없어서 간단히 약속했던 마카롱들을 사러 홍대에 나갔는데 조금만 걸었는데도 넘 어지럽고... 그래도 오랜만에 바깥 나오니 해삐해삐했다 오래 잠자다 일어나 햇빛을 본 잠자는 공주의 마음이 이러했을까(진짜 아무말중


간단히 마카롱 사고 날씨가 더워서 상할까봐 후다닥 집에 돌아와서 설레는 마음으로(사실 책이 제때 올지 걱정되어서) 조금 뒤척이다가 2시에 잠듬


그리고 6시에 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게 왜 웃기냐면 나는 이 행사에서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임 부스입장이기도 하고 우리 집은 능곡에서 25분밖에 안 걸리는 곳에 있었어섴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탐라를 열심히 구경했다가 밥먹고 약먹고 준비하고 8시 반에 밖으로 나옴.


아 일찍 나온 이유가 이번 저 두꺼운 개인지를 다른 업체에 주문했는데 오늘 아침에 퀵으로 택배를 받는 걸로 되어있었기 때문임. 그래서 그거 혹시 일찍올까봐 미리 대기하려고 온 것도 있고 엔솔로지 관련으로 잔돈이 몇십만원어치 필요했음 그거 구하려고 나온 것도 있었음.


근데 문제는 구할 만한 곳이 없었지(이때부터 카오스 시작


어쩌지? 어쩌지? 이러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하늘다락 앞에서 겁나 수상한 사람처럼 대기타고 있다가 겁나 머리색이 화려한(후기를 쓴 모두가 꼭 기입하는 사실) 어떤 분을 보았음 바로 주최님ㅇ0ㅇ)) 근데 얼굴에 화장을 하셨는데도 넋이 반쯤은 나가계신 표정이라 넘 안타까웠음 아니 주무시려고 근처에 방 잡으셨다면서요.... 진짜 정신력으로 버티실 거 같긴 한데 아무튼 극한체험을 겪고 계신 것 같아서 많이 걱정되었던;

(정작 행사 진행하시면서 넘나 신나신 표정이라 걱정이 불식되었지만/그래도 피곤해 보이시긴 했다)


그래서 잠깐 얘기 나누다가 주최님은 행사준비하시러 가셨고, 주최님이 가자마자 멍청한 나님은 바로 손에 주최님과 스탭분들 드리려고 준비했던 마카롱을 전해드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음;ㅅ;(지금도 참 멍청했다고 생각함) 나중에 전해드리기엔 전날 사서 냉동고에 넣어놨던 거라 이 더운 날씨에 상할까봐 부리나케 하늘다락으로 조심조심 올라가서 마카롱 전해드리고 내려옴. 방해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표정들이 괜찮으셔서 다행이었다 ㅠㅁ ㅠ


아 그리고 책은... 책은 넘나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일단 이걸 가져와주신 택배기사님께 넘 죄송하고 감사했다 엘베가 없어서 들고 올라와주셨는데 너무 죄송하고 감사해서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던... 작은 거는 내가 낑낑 지고 올라갔지만 큰 짐은 내가 지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아저씨 감사합니다ㅠㅁ ㅠ


그리고 책 기다리던 도중에 내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거셨는데 첨엔 누군지 못알아봤는데 홀리님이라는 얘기 듣자마자 맞아 이분 홀리님이었지! 하는 생각이 떠오른거야(1월 케스에서 뵈었음) 그래서 허둥지둥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인사 나누다가 홀리님은 먼저 들어가셨고 나는 10시 15분에 책을 수령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ㅇㅇㅇ


아 그리고 은님... 은님에 대해서는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처음엔 그거였지 멍청하게 부스비번을 안 알려드려서 늦게 들어오시게 된거... 그때 책이 너무 많아서 사실 카오스였음 이것저것 열심히 뜯고 정리하다보니 트위터를 확인 못했다는 ㅠㅠㅠㅠ 나중에 들어오셨을 때 정말 죄송했다 이 더운 날씨에...



이제 판매전 관련으로 넘어가면,


판매전은 바빴음. 진심 리얼 바빴음 나 이렇게 판매전 바빴던 거 처음이야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행사를 부스러로 세 번쯤 뛰어봤지만 이번이 역대급이었다 일단 판매전 시간이 꽤나 짧았고 책 목록이 하도 많아서 정신이 없었음; 무엇보다 다른 분들도 바쁘셔서 선입금 수령을 부스시간에 다 못했음 은님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다 수령 못했을것이다(눈물철철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는데 엔솔로지 환급금 문제였음.

이거 위에 잠깐 언급했는데, 나는 반 년 전부터 기획된 4인 엔솔로지에 참가했었음 그리고 이 엔솔은 우리 부스에서 팔기로 했었고.. 부스러가 셋이었지만 한 분은 주최님이었고 다른 한 분은 크로스오버 엔솔로지를 하시게 되셨으니 내가 맡아야 했던 게 맞았다고 보긴 함.


근데 사실 엔솔이 문제가 아니라 엔솔에서 한 파트가 아예 펑크가 나버린 거임.


너무 늦게 알아서 펑크를 메울 다른 수단도 없었고, 결국 우리는 엔솔을 내되 그 파트를 제외한 돈 5천원을 선입금러분들에게 환급해드리기로 결정을 내림. 문제는 이 엔솔 예약자가 한둘이 아니었고 따라서 몇십만원어치 5천원권을 구해야 하지만 이걸 구할 수단이 은행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이걸 알아챈 날이 하필이면 행사 이틀 전인 목요일이었단 말임. 남은 셋 다 정말 바빠서 이거 의논을 제대로 못했다가 은행 시간을 놓쳐서 결국 행사날에 계속 잔돈을 구하러 다녀야 하는 일이 발생함.


솔직히 은님이 부스 도와주시고 계속 주변 지인들한테서 잔돈 구해다주시지 않았으면 힘들었을 거임 ㅠㅠㅠㅠㅠㅠ 결국 잔돈은 다 구했음 잔돈 기부해주신 홀리님 컨퓨님 메루님 그리고 다른 지인분들께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8ㅁ8(운다


근데 진짜 이 5천원이 너무 짜증났던 게 계속 이걸 구해야 하니까 그건 그것대로 스트레스고 우리 부스가 생각보다 줄이 너무 길어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난 이렇게 부스줄이 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구 늘 행사에서 널널한 사람이었어서 그런가...; 아무튼 진짜 이 때 카오스가 쩔었음 으악 그래도 사고싶었던 거랑 선입금 거의 다 수령했어서 뿌듯했다ㅠㅁ ㅠ 은님 아리가또 님은 제 천사님이야S2S2


근데 판매전에서 깨알같이 웃긴 일들 많았는데 그 중 하나는 역시 행사장에 경찰이 왔을 때였다.

솔직히 올 거 같다고 이미 주최측에서 메일을 받았기에 어 그렇구나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로 오다니 게다가 부른 놈은 뒤로 쏙 빠졌다는 사실을 나중에 듣고 분통터짐 뭐라고?! 그 때 마침 선입금 수령해야 해서 부스를 떠나있었기에 눈 앞에서 생생하게 봤다 토끼 귀를 다신 아스님이,


"자! 경찰분들 들어오십니다!"


이렇게 소리지르고 문이 벌컥 열리더니 스탭분들 두분이서 레드카펫 까시는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거 진짜 바로 앞에서 봤음 너무 웃겨서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다른 라인으로 빠졌음 아 지금도 생각하니 웃겨ㅋㅋㅋㅋㅋㅋㅋㅋ스탭분들 진짜 주섬주섬 카펫 까시는데 넘나 익숙한 동작이셔서 혹시 연습하셨나 싶었는데 나중에 진짜 연습했다고 듣고 빵터지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환호성과 함께 들어오시는 경찰분들을 보며 이 날씨에 뻘짓을 하시겠구나 하고 측은해하는 건 덤으로(


아무튼 진짜 판매전 때 물건 팔다가 좀 널널해졌을 때 성우님한테 드릴 책들 전해드리고 왔다 읽으실 지는 모르겠지만<<(솔직히 자기가 생각해도 두껍다)


책은...


.


이렇게 냈음(왼쪽 하얀색 책은 엔솔로지!)

아 근데 너무 죄송했던 게ㅠㅠㅠㅠㅠㅠㅠㅠㅠ 캣마리 개인지 책 표지가 좀 인쇄기가 인식하기 힘든 색이라 책의 절반이 좀 푸른끼가 도는 회색으로 나오는 일이 있었음 양해를 구한다고는 했지만 정말 죄송했다 ㅠㅁ ㅠ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으셨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아 진짜 그리고 펠릭마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거 정말 저한테는 좀 애증인데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1200페이지 정도로 내고 싶었어요 악당들에 대한 서사를 좀 더 많이 다루고 싶었는데 회당 30페이지 안에서 그걸 다 다루기는 한계가 있었던... 펠릭마리 정말 좋아하는데 많은 분들이 펠마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부디 돈이 아깝지 않으셨길...(간절



판매전에서 지인분들이랑 대화 거의 못했음.

이게 진짜 천추의 한으로 남을 거 같은데 지방에서 올라와주신 분들이랑도 대화 많이 못해서 아쉬웠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근데 너무 바빠서 진짜 멘탈이 날아가지 않은 게 신기함(그 와중에 밀린 게임 이벤트 꼬박꼬박 하고 계시던 은님 진짜 강적임)


맛있는 거 가져다주신 딘님 감사합니다 깨알같이 무당벌레 그려진 고정핀으로 묶어주신 거 넘 귀여웠구요... 헤헤 잘 먹겠습니다!

부스에 책 찾으러 갔을 때 제 말을 기억해주시고(?) 소세지를 네 개나 챙겨주신 춘님 감사합니다 그 소세지들은 어제 저녁에 맛있게 해치웠습니다^ㅁ^(춘님:

아 그리고 스카님이랑 레몬님 두 분이 레몬티랑 레몬에이드 하나씩 주고 가셨는데 너무 감사했어요 행사장이 너무 더워서 마실 건 그 자리에서 다 마셔버렸지만 덕분에 버텼습니다;ㅁ;

그리고 다른 것들도 많이 받았는데 지금 조금씩 먹구 있어요!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 먹을 걸 주고 가신 분들이 많아서 제가 한 분 한 분 불러드릴 수가 없어서 아쉬워요 그래도 감사하고 있답니다!


사실 놀란 점은 제가 초콜릿을 요즘 먹기 힘들어해서 다른 분들이 만약 초콜렛을 주신다면 조금씩 천천히 먹어치우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연인지 챙겨주신 건지 주신 음식들에 초콜릿이 거의 없더라구요 사탕이나 과자류가 많았어요! 그래서 감사히 우걱우걱중입니다...(감사함


그 밖에도 지인분들이랑 많이 얼굴은 본 것 같은데 대화는 많이 못했다 대체로 안부인사는 다 했지만ㅠㅠㅠㅠㅠㅠㅠ 근데 제일 인상깊었던 거 방장님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이미 옷부터 올블랙이었는데다 머리가 땀으로 푹 젖어 계셔서 다들 보자마자 방장님 더워요? 이랬을 지경이라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정말 정신이 없긴 했음.

판매전 3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짐작도 안되고 트위터도 할 정신이 없었을 지경. 완매되었다는 말만 간신히 쓸 수 있었다(이거 쓰는 와중에도 다른 분이 찾아오셔서 목록 확인 중이었다는 건 안비밀


진짜 얼마나 정신이 없었냐면 판매전 끝나고 정리를 해야하는데 아무리 해도 정리가 쉽게 끝이 안 나서... 중간에 이것저것 다 정산하고 계산했는데도ㅠㅠㅠ 주신 것들이랑 남은 재고들 주섬주섬 챙기는데 내가 너무 손이 느려서 죄송했다 주최님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악 미쳤다 트레카를 못샀잖아!!(땅치고 후회



그리고 이벤트 시작.

아 이벤트 진짜 웃긴 에피소드 많았는데 하나하나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일단 드레스코드 이벤트! 진짜 빨간 색부터 먼저 시작했는데 진심 처음부터 14개! 라고 하셔서 넘 놀랐다 세상에 14개나 붉은 색을 입고 왔다고?ㅇ_ㅇ???


라고 모두가 생각하며 앞으로 나온 분을 지그시 쳐다보았죠. 그리고 세는 광경을 보면서 다들 놀라움의 환성을 지르심 특히 이분의 경우는 모자 벗자마자 머리띠랑 머리끈 나오는 것도 웃겼지만 멜빵이 촌철살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떻게 이 날씨에 멜빵까지 입고 오신 걸까 경악을 금치 못했지 덕력이란...


근데 진짜 더 쩌는 건 검은색 드레스코드 때였음.

이건 후보가 두 분이었는데 여자분이랑 남자분 각각 14개! 아니 진짜 그래서 둘 다 앞으로 나와서 가지고 있는 검은색 악세사리랑 옷들 다 세보는데 두분 다 정말 강적이더라 이 날씨에... 심지어 여자분은 손에 기모장갑에 마스크에 벨트에 겉옷까지 온통 검은색이셨다 이거 보고 다들 기겁하심ㅋㅋㅋㅋㅋㅋ나도 놀랐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저라면 저렇게는 못합니다(절레


스탭분들도 헷갈리시는지 중간에 계속 잘못 세시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가위바위보로 끝냈음. 남자분이 이기셔서 커다란 상자 하나 받아가시고 여자분은 다른 경품 받으셨는데 옆에서 스탭님이 깨알같이 여자분한테 괜찮아요 저거 시중에서 살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온리전서만 얻을 수 있지! 하시던 거 참 귀여웠죠 호호호ㅇ▽ㅇ


그 다음은 아마 원고왕 이벤트였을 거임.

사실 난 이거 상품이 가장 궁금했음. 그리고 만화 파트 누가 원고왕이신지도... 왜냐면 솔직히 내가 마감을 친 순간부터 지인들이나 나나 소설 파트 원고왕은 나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ㅇㅇ(실제로 어떤 분이 나를 보니까 차마 원고왕 이벤트는 도전할 엄두도 안 나셨다고 해서 넘 웃펐던ㅋㅋㅋㅋㅋ) 원고왕 이벤트에 참가하려고 낸 책들을 들고 갔는데 책들 세는 도중 스탭분께서,


"그냥 원고왕 가져가셔도 될 거 같은데"


하셔서 넘 웃겼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도 그럴게 총합 1018페이지였음 나도 이 정도로 나올 줄은 몰랐어서 좀 놀라긴 했지만;; 실제로 사회자분이 페이지를 외친 순간 다들 경악의 비명을 토해내시더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혼을 갈면 이런 페이지가 가능하냐는 아스님의 질문에 그냥 간단하게,


"한 달 동안 집 밖으로 안 나가면 900페이지가 나올 수 있어요"


한 마디 하고 아드리앙 타월 경품으로 받고 내려왔습니다.....................(아드리앙 최애) 아 저는 그날 죽었서요 없어 죽었서 흑흑흑흑 아드리앙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 아드리앙 너무 잘생겼어요 솔직히 이걸 대체 어떻게 쓰지... 그냥 곱게 펴서 벽에 걸어둘까(고민


헤헤헤헤 아드리앙 잘생겼다!!!!ㅠㅁ ㅠ 리네는 복받았어요... 고이 모시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소비왕! 소비왕 타가신 분이 산 회지 수가 56개라고 하셔서 다들 놀라셨거든요? 근데 세보니까 56개 아님 59개였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더 놀라고... 스탭분들이 쌈박하게 인정하시며 이것저것 선물을 들려 드렸는데 소비왕 타신 분 정말 행복해보이셨다... 주최님이 현실 아드리앙이라며 쐐기를 박으셨죠 ㅇㅇㅇ


그 다음이 편지 이벤트였는데, 편지 이벤트에 앞서서 깜짝 서프라이즈 시크릿 이벤트가 있었다!

는 솔직히 말이 시크릿이지 부스러들은 이미 사전공고를 받아서 다 알고 있었음 왜냐면 선물을 미리 준비해야 했거든... 시크릿 이벤트는 바로!


이 오시기로 한 거였죠.

진짜 문이 열리자마자 다들 입 틀어막고 놀라시는데 나 진짜 그렇게 사람들이 놀라는 거 처음 봤어... 그러니까 환호성이나 그런 거랑은 다른 진짜 미친듯이 놀란 느낌! 숨 들이키는 소리 여기저기서 들리고 아무튼ㅋㅋㅋㅋㅋㅋ 성우님이 들어오셔서 맨 처음에 마이크 받고 한 말씀이,


"안녕? 마이 레이디?"


였는데 정말 듣자마자 모두가 한 마음으로 비명지른ㅋㅋㅋㅋㅋ 진짜 이거 실제로 들어봐야 합니다 글로는 느낌을 살릴 수가 없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성우님이 이렇게 사람 많을 줄 몰랐다고 놀랐다고 하시면서! 오는 거 알릴까 했지만 주최측에서 그랬다간 사람 더 미어터질 거라고 사전에 주의를 드렸다고 하더군요 스탭분들 나이스! 는 그래도 성우님이 온리전 입장 규칙 알티하셔서 다들 수군거리긴 했었지만요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솔직히 성우님 얘기 안했는데도 사람 정말 많았어요... 200~300명쯤 남아있었어서 ㅇㅇ


그러시면서 여기가 부모님 동반 입장이 안되는지라, 레이디버그 관련 PD님이 정말 오고 싶어하셨는데 같이 오지 못하셔서 아쉽다고 그러시고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간단히 인사하고 편지 이벤트를 시작했습니다!


편지 이벤트 첫번째 당첨자는 홀리님! 무려 '블랙캣' 에게 보내는 편지였어요. 홀리님이 낭독하는 거 들을 때마다 다들 넘 공감되서 계속 웃고 있고ㅋㅋㅋㅋㅋㅋㅋ널 처음보자마자 알았지 내 인생이 끝났다는 걸. 이러시는데 넘ㅋㅋㅋ넘 웃겨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목소리에 감정 안 실으려고 노력하면서도 본인도 웃긴지 계속 웃고 계시더라구요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그 다음에! 홀리님이 성우님한테 블랙캣 연기 한 번 해주십사 부탁드렸는데 대사가,


"오늘 밤, 무도회에서 난 네 기사야. 프린세스?"


였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나타니엘이 이블 아티스트가 된 9화에서 나온 프랑스어판 한정 대사죠 ㅇㅇㅇ 말하면서도 계속 웃기셨는지 홀리님 결국 종이에 적어서 주셨는데 진짜 빠르게 적으시는 거 보고 감탄했습니다 얼마나 듣고 싶으셨던 거지ㅇ0ㅇ!


여차저차해서 성우님이 그 대사를 연기하기 시작하셨는데 다들 들으면서 너무 좋으셨는지 꺅꺅 소리를 지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스탭님이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하시면서 우리 딱 녹음 끝난 후 1초 지나기까지만 조용히 하죠! 이랬어요.


그리고 다시 진지하게 대사를 읊으시는데 정말 아무도 소리 안 냄... 쥐죽은 듯한 분위기에서 대사가 끝나고 약 3초 후,


"꺄아아아앙나안아나아아아악"


소리 들리는데 진짜 다들 넘 귀여우셨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다시 생각해도 귀엽다 귀여워^_^(흐뭇


그리고 다음 편지 이벤트는 쥘레카 최애이신 분이 적으신 거라 성우님은 뒤로 살짝 물러나시고 쥘레카 최애이신 분의 절절한 사랑고백을 들었습니다 다들 넘나 감동했어요...(찡) 그래서 스탭분들이 상품으로 쥘레카랑 리플렉타 트레카 각각 5장씩 꺼내다가 그분한테 드렸습니다 예쁜 사랑하시라고ㅋㅋㅋㅋㅋ


원래 여기서 편지 이벤트는 끝났어야 했지만 그건 너무 아쉽다는 생각에 주최님들이 편지 몇 장을 더 뽑으셨어요. 마지막으로 뽑은 편지는 바로 레이디버그에게 보내는 편지였는데 이건 성우님이 블랙캣에 빙의해서 대신 읽어주셨습니다ㅇㅁㅇb 직접 읽으셨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으셨을 거 같기도 하지만요 ㅇㅇ!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가위바위보ㅋㅋㅋㅋㅋㅋㅋㅋ 가위바위보 다들 짐작하셨겠지만 성우님이랑 대결하는 거였습니다. 상품이 무려 감님 족자봉! 아 진짜 너무 갖고 싶었는데 역시 전 운이 없었나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못 탔어요! 족자봉 타가신 분들 넘넘 부러워요 복받으신 분들이야ㅠㅠㅠㅠ


근데 진짜 웃긴 게 뭐냐면 성우님도 그게 탐나셨는지 후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스탭분들이 이것저것 챙겨주시는데 옆에서 계속 족자봉은 없나요 족자봉은 없나요 이러시면서 눈 동그랗게 뜨고 계속 족자봉만 쳐다보시는데 너무 귀여우셨습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탭분도 계속 모른 척 하시다가 결국 웃으시면서 족자봉도 같이 꺼내드렸어요. 그제서야 해맑게 웃으시면서 족자봉 받으시는데 정말 현실 블랙캣이신줄...


아무튼 가위바위보 이벤트 할 때 성우님이 임무 완수! 외쳐주셨는데 그것도 너무 좋았어요 블랙캣ㅠㅠㅠㅠㅠㅠ 아 진짜 성우님 정말 현실 블랙캣같아요 재간둥이 기질을 마음껏 뽐내주시더란ㅋㅋㅋㅋ팬서비스를 되게 많이 해주셔서 무지무지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요즘 자기가 너무 행사를 많이 다니는 것 같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 미디어에 얼굴 내밀 일이 많아져서 자제하고는 있다시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성덕 있냐고 물어보실 때 많은 분들이 손드시는 거 보고 깜짝 놀라시기도 하셨습니다 ㅇㅁㅇ 그리고 자기가 레이디버그 오디션 볼 때 많은 도움을 주신 PD분이 계신데 그분이랑 못 오셔서 아쉽다고 그러셨어요 나중에 혹시 열린다면 그분도 같이 오실 수 있으시길...(기도


그리고 이제 가셔야 하는 시간이었는데... 가시기 전에 성우님이 등신대들을 보고 이것저것 묻다가 결국 등신대에 싸인도 해주고 가셨던ㅋㅋㅋㅋㅋㅋㅋㅋ 그 협력자분들이 받은 족자봉에도 싸인을 해주셨는데 다들 정말 좋아하셨어요!


그렇게 바람같이 오셔서 잔뜩 놀아주시고 받은 물건들과 함께 바람같이 사라지셨습니다 무슨 여름밤에만 나오는 재간둥이 요정이신줄(아무말


참고로 마지막에 외쳐주신 대사는 "하하, 재밌네" 였습니다! 저희는 정말 좋아했지만 정작 성우님은 그런 대사가 있었나? 하셔서 넘 웃겼던ㅋㅋㅋㅋㅋㅋㅋㅋㅋ 2회가 열린다면 그때는 레벅 성우님이신 여민정 성우님과 같이 참여하고 싶으시대요 허허 조금쯤 기대해봐도 좋으려나ㅇㅁㅇ)


중간에 좀 재밌는 일화들이 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저희 행사장이 허락받지 않은 사진 촬영이 금지거든요 등신대 제외하구요. 부스러분들 신상을 위해서 ㅇㅇ 근데 어떤 원피스 입은 여성분이 사진을 찍고 돌아다닌다는 제보를 들었다며 사회자(아스님)분이 되게 심각하게 "누구시죠? 지워주셨으면 합니다." 하고 계셨는데 사실 그 사진을 찍은 분은 홀리님이셨고 자그툰 본사에 보낼 사진을 찍고 계셨다는 걸 렐님이 말씀하시니까 아스님이


"아니 나한테는 왜 말 안 해줬어? 괜히 심각해졌잖아!"

(필자의 기억력에 다소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셔서 빵 터졌습니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뉘앙스부터 너무 귀여우셨단 말이에요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다음 즐거움은 등신대로!

등신대가 정말 정말 예뻤어요 닉네임 들었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는데 너무 예뻐요ㅠㅠㅠㅠ 족자봉들도 하나같이 넘넘 예뻤구요. 추첨 이벤트랑 등신대 이벤트 중 뭐부터 할까요? 하니까 다들 등신대를 외쳐주셔서 등신대부터 했습니다.


먼저 아월님 레이디버그! 아 아월님 레이디버그 너무 배경부터 분위기에 숨이 막혔어요 정말 신비하고 멋진 히어로 느낌이 팍팍 났어서ㅠㅠㅠㅠㅠ 상한가를 찍지 않은 건 의외였지만 넘나 존엄했다구요 ㅎㄷㄷ 너무 예쁘더라구요...


그리고 꼬욤님 블랙캣은 역시 상한가를 찍었습니닼ㅋㅋㅋㅋㅋㅋ블랙캣 데려가신 분이 정말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리고 마리네뜨! 마리네뜨 데려가신 분 소감이 인상적이었는데 계좌이체되면 100만원도 아깝지 않다고 줄줄 연설하시는데 넘 놀라웠구ㅋㅋㅋㅋㅋㅋㅋㅋㅋ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직장인이신 모양이더라구요! 아 부럽다...... 저도 최애 데려가고 싶다....


양님 아드리앙은 역시 상한가였습니다 흑흑 내가 데려오고 싶었는데.... 차마 제가 등신대를 제 더러운 방에 모실 수가 없어서8ㅁ8


사실 일단 제가 이 이벤트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바로 캣마리 족자봉 경매였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주최님이 캣마리 최애신데 진짜 캣마리 경매 시작하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넘 웃겼어요ㅋㅋㅋㅋㅋㅋ


"자 여러분. 이제 캣마리 경매니까 상한가를 전제로 저랑 대결하시면 됩니다"


뭐 이런 식이었는데 듣자마자 빵터진ㅋㅋㅋㅋㅋㅋ 사실 이 이벤트를 기대하고 있었던 이유가 캣마리를 정말 좋아하기로 유명한 분이 팬덤에 세 분 계셨는데 한 분은 못오시고 다른 두 분이 주최님과 연시님이라는 분이셨거든요. 둘 중 누가 캣마리를 가져갈까 흥미진진해하고 있었는데.....!


떨어지셔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 아니 진짜 세상 다 잃으신 표정을 짓고 계신 연시님이나 "악 내가 이거 가지고 싶어서 온리전 열었는데!!" 하고 소리치신 주최님이나 이러면 안 되지만 너무 귀여우셨던........ 아 진짜 상상도 못할 결과라서 다들 웃음바다되고 안타까워하고ㅋㅋㅋㅋㅋㅋ둘중에 하나만 해야할텐데 말이어요ㅇㅁㅇ;(땀땀


물론 그만큼 좋아하시는 분 손에 들어갔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캣마리 족자봉 가져가신 분 축하드려요!^ㅁ^



이제 추첨 이벤트!


음 솔직히 별로 쓸 말이 없네요... 막 인상깊은 에피소드가 없었어서!

삼진님 파우치 때 절규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던 건 기억합니다 지인분이 너무 슬퍼하셔서 기억해요ㅋㅋㅋㅋㅋㅋ


맞다 추첨 이벤트 때 이것저것 추첨했는데 그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다 있고요ㅇㅁㅇ)~

이 추첨함이 사회자이신 렐님과 아스님이 돌아가면서 뽑으셨거든요. 그런데 아스님이 추첨함에서 번호를 뽑았는데 나온 번호를 보고(40번이었음) 엄청 놀라시면서,


"헐, 이거 나잖아?"


하시며 근처 책상에 있던 전프레를 주섬주섬 뒤지시더니 더 깜짝 놀라심. 당시 대화가!


아스: 앗 역시 저네요ㅇㅁㅇ!

렐사: 그러게요 그럼 이건 없던 걸로!(정말 단호하셨다 단호박드신줄 심지어 웃으면서 저러심

아스: 왜! 왜!ㅠㅁ ㅠ!


이런 느낌으로 대화하셔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넘나 억울하신 느낌으로 소리치셔서 다들 꺄르르 웃음바다되고... 두분 사회 너무 잘하시는 거 같아요 인생페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 그대로같아...

(뭔가 모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절대 기분 탓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이벤트가 끝나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어요~

이번 행사 진짜 최고였어요 제가 온리전 많이 다녀봤고 이벤트 끝까지도 많이 봐봤지만 정말 진행이나 참관객들이나 이벤트들이나 역대급이었던; 


너무너무 재밌었고 판매전은 힘들긴 했지만 이벤트 때 너무 재밌어서 피곤한 것도 잊고 꺄르르 웃고 즐겁게 보냈습니다! 이벤트에서 깨알같이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많았지만 피곤하긴 했는지 기억이 많이 날아갔네요 아 휘발성 너무 높은 거 아니냐 내 뇌야(아무말


은님 덕분에 사고 싶은 거 전부 다 사기도 했고 아 어쨌든 너무너무 좋았어요 은님 사랑해요S2S2


주최측에서 정말 이것저것 대처 잘 해주시고 준비해주신 것들도 많아서 너무 좋았지만 그만큼 고생하셨겠구나 싶어서 안타깝기도 했어요;ㅅ; 아무래도 반년 간 지켜본 것들도 있고 이상한 놈들도 있고 하니까... 다른 분들 후기들 보시며 좋아하시는 모습들 보니까 제가 다 기쁘네요^ㅁ^


전프레도 너무 예뻤습니다 만원도 너무 싼 거 아닌가요 아니 세상에.... 진짜 청접장 보고 손 덜덜 떨면서 열었다구요 행사장에서는 확인할 시간이 없었어서 집와서 열었습니다ㅠㅠㅠㅠㅠ 진짜 전프레에 부채 넣어주셔서 감사했어요 날이 너무 더워서... 부스들 찾아갈 때마다 그분들이 제가 너무 더워 보이셨는지 부채로 바람 부쳐주시는데 넘넘 감사했던;ㅅ; 스티커나 책자나 가방이나 트레카나 모두모두 좋았습니다 이렇게 전프레 알찬 온리전도 처음이었고...ㅠㅠㅠㅠㅠㅠㅠ


후후 2기가 열릴지 안 열릴지는 주최님들 마음이시니 잘 모르겠지만 열린다면 그 때도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겠습니다^ㅁ^)9


정말 최고의 행사였고 이런 멋진 행사 열어주신 주최님과 스탭분들께 정말로 감사해요! 저 빈말하는 성격 아니니 마음껏 뿌듯해하셔도 됩니다 히힛>ㅁ<)/


부스러분들과 참관객으로 찾아주신 분들도 모두모두 즐거운 하루 되셨으리라 믿을게요 후후ㅇ.<!


<<임무 완수!>>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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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네>





<홀리>



최종 인포는 홀리님께서 작업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임무완수에서 만나요'▽')/


Posted by I.R.E
,

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5






Episode 6.

수상한 만남





“우와아아-!!”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지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반짝거리는 샹들리에와 깨끗하고 화사한 테이블, 예쁜 장식들까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넓은 실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빈 그릇에 음식을 채워넣는 요리사들과 칵테일 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돌아다니는 웨이터들도 있었다.


너무나도 화려한 주변에 마리네뜨는 그저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이런 곳을 처음 와봐서 그래, 응.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마리네뜨는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찬찬히 떠올렸다.







때는 바야흐로 며칠 전 학교에서였다.


‘초대권?’

‘그래. 우리 엄마가 받아오신 거야.’


에스미가 내미는 하얀 봉투와, 그 안에 담긴 카드를 보고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여기 샹그릴-라 호텔이잖아! 엄청 비싼데!’

‘맞아. 우리 엄마가 거기서 제과 쪽 총주방장을 맡게 되셨어서.’


에스미의 어머니는 파리에서도 유명한 파티쉐다. TV에도 몇 번 나왔을 정도로 유명한지라 마리네뜨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에스미네 집에 놀러갈 때마다 바빠서 뵙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나한테 한 번쯤 가 보라고 줬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날 일정이 있어.’

‘근데 그런 걸 나한테 줘도 돼?’

‘뭐 어때? 나야 엄마가 나중에 또 줄 텐데. 그리고 거기에….’

‘거기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스미는 정말 무관심한 어조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니가 좋아하는 그 녀석도 올지 몰라.’

‘에? 진짜?!’

‘어. 아무래도 파리 유명인사들은 모두 모인다고 들었거든. 그 녀석 정도 되는 집안이면 진작에 초대장이 날아갔겠지.’


그러니 잘 다녀와.


그 한 마디와 함께 초대권을 앞으로 쑥 내미는 에스미의 손이 왜 그렇게 고와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 손을 덥석 잡으며 넌 역시 내 친구라고 눈을 반짝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부담스러웠는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저번에 싸웠던 일 이후로 에스미가 과하게 상냥해진 느낌이 든다. 티는 잘 안 내지만 이런 것까지 가져다주는 걸 보니 그 때 일에 대해 많이 미안해하고 있는 걸까. 조금 나쁜 생각이지만, 그런 에스미의 친절이 싫지 않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헤실헤실 웃었다.


여기에 가면 펠릭스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오긴 왔는데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해서 그런지 절로 기가 죽었다. 나 오늘 이상하지는 않지? 마리네뜨는 가만히 제가 입고 있는 붉은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특별히 아끼던 붉은 색 원피스는 색깔이 색깔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이 연회장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일단 뭐라도 먹어야지.


기분 좋게 웃으며 마리네뜨는 테이블 위에 예쁘게 세팅된 음식 접시들로 다가가 음식 몇 가지를 집어들어 제 접시에 담았다. 수북히 음식을 담은 뒤 싱글벙글 웃으며 닭강정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마리네뜨의 시야에 누군가가 보였다.


몸매가 드러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긴 금발 머리를 늘어뜨린 예쁜 소녀였다. 귓가에는 하얀 깃털로 장식된 머리장식을 꽂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의 색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차림새는 성숙해 보였지만 얼굴을 보면 자신 또래인 것 같았다.


음식을 먹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하호호 웃고 있는 소녀는 손짓 하나하나에서부터 우아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마 분명 좋은 집 아이겠지.


저런 사람도 있구나.


제 또래임에도 왠지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가진 소녀를 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상념에 사로잡혔다. 펠릭스도 저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마리네뜨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

그러고 보니 닮았네.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누군가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몇 주 전에 만났던 악당, 러스트(lustre). 딱 한 번 만났음에도 이렇게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이유는 굉장히 강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하얀색의 복장만큼이나 정적이고 고요하며, 그만큼 강했던 사람. 나중에 만났을 때는 또 다시 위험해질 지도 몰랐다. 그 때와 같은 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테니까.



“헉. 왜 심각해지는 거야, 여기까지 와서!”



안 돼, 안 돼!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마리네뜨는 후다닥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가져온 크림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 안에 쏙 집어넣자 부드러운 크림 소스의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맛~있어!!”


역시 비싼 음식이라 맛도 다르구나. 이것저것 먹어보니 확실히 대체로 다 맛있었다. 특히 제일 맛있다고 생각되는 건 메인 디저트 중 하나인 딸기 무스였다. 상큼하고 별로 달지 않은데다 뒷맛이 몹시 깔끔한 게 단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음식을 에스미는 매일 먹고 사는구나. 집이 빵집을 하긴 하지만 마리네뜨의 집은 이런 전문적인 디저트보다는 실생활에서 먹기 편한 제과류를 다루는 쪽이었다. 그래도 언제 한 번 이런 걸 만들어 봐도 좋겠다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배실 웃었다.


티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곳에 오는 건 너무 위험했다. 똑같이 사람이 많아도 걷느라 바빠 자신을 신경쓰지 않는 등하교길과는 달리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 보통인 파티장은 경우가 달라도 매우 달랐다. 이쪽을 보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걸 신경쓰게 되다보면 자연스레 티키와 함께 오더라도 챙겨주기 어렵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티키에게는 무척 불편할 것 같아 그냥 집에 두고 왔지만, 늘 함께하던 상대가 오늘은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허전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펠릭스는 어디 있지? 안 왔나?


다시 그릇에 음식을 수북히 담고 천천히 파티장을 돌아다니던 중 저 멀리에 익숙한 금발 머리가 보였다. 반가움에 이름을 부르려다가 마리네뜨는 살짝 웃고 있는 펠릭스의 얼굴에 순간 멈칫했다. 몇 명의 어른들 사이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펠릭스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고, 그래서인지 평소와는 무척 달라 보였다. 어딘지 꾸민 듯하지만 그럼에도 무척 부드러운 미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펠릭스와 더 잘 어울렸다.


뭐랄까, 어른이라는 느낌?


혹시 다가가면 방해가 될까봐 마리네뜨는 살짝 거리를 두고 먼 발치에서 펠릭스를 훔쳐보았다. 음식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차, 이야기가 끝났는지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펠릭스를 급하게 뒤쫓아갔다.



“펠릭스!”



그 한 마디에 펠릭스가 걸음을 멈췄다. 설마, 싶으면서도 돌아보자마자 보이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펠릭스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평소보다 너무 솔직한 반응에 마리네뜨가 더 놀랄 정도였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순간 펠릭스의 뒤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펠릭스.”



한 손에 칵테일을 들고 멋스럽게 차려입은 백발의 신사가 펠릭스의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저 목소리를 듣자마자 펠릭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보다도 훨씬 냉랭한 표정을 짓고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만 같이 차가운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가슴이 철렁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러지?



“어라, 손님이 있었니.”



백발의 신사가 펠릭스의 어깨에 턱하니 손을 얹었다. 굉장히 차분하고 울림이 있어 듣기 좋은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순간 넋을 잃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인상은 다소 엄해 보이지만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얼굴은 왠지 모를 친근감을 풍겼다.


관록이 느껴지는 백색 눈동자가 마리네뜨를 찬찬히 주시했다.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하고 있던 마리네뜨는 다음 순간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는 남자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파티에는 처음 오나 보군요, 아가씨.”

“네, 네!”



허둥지둥 대답하자 그런 마리네뜨가 귀엽다는 듯이 살짝 웃음을 터트리던 남자는 펠릭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펠릭스, 아는 사람이냐?”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봐서는 보통 사이가 아닌 듯했다. 그러고 보니 펠릭스에게 숙부가 있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유명한 정치가라던데 그게 이 사람인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치만 보고 있던 마리네뜨는 싸늘하게 식은 펠릭스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펠릭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니요.”



무감정한 목소리가 폐부를 찔러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너를 아는 것 같은데.”

“제가 절 아는 사람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숙부님.”

“그것도 그렇다만. 아가씨, 어떻게 펠릭스를 알고 있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동요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펠릭스의 얼굴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듯한 시선에 몸이 차갑게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엄청 지겹게 쫓아다녀도 그냥 무심하기만 했엇지,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 적은 없었는데.


비참해지는 기분에 마리네뜨는 제 옷자락을 꽉 쥐었다.



“페, 펠릭스랑 같은 학교 친구예요.”



활짝 웃으려고 노력했지만 지금 자신이 제대로 웃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먹혀들어갔는지 남자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

“같은 학교… 애가 보이길래, 반가워서 인사해봤어요!”

“오호, 용케 이 녀석을 알아봤군요.”

“공부를 워낙 잘 하니까….”



겉으로는 밝게 웃으면서도 마리네뜨는 덜덜 떨리는 손을 재빨리 뒤로 돌리고 깍지를 꼈다. 접시를 내려놓고 오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다 티났을 텐데. 차마 펠릭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마리네뜨는 그저 눈 앞의 신사에게로 시선을 맞추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자신을 배려해주는 남자의 태도에 마리네뜨는 점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이 욱신거리는 건 여전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은 많이 닮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펠릭스와는 성격이 다른지 신기할 정도였다. 남자에게서 왠지 모를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방금 전 받은 충격 때문인지 마리네뜨는 왜 그런 기시감이 느껴지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 오래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다. 가볍게 인사치레로 몇 마디 주고받다가 다른 곳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남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하더니 가봐야겠다고, 편히 즐기다 가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배려해준다지만 그래도 저렇게 어른인 사람 앞에서는 아무래도 긴장하게 된다. 새삼 자신의 소심함을 깨달으며 마리네뜨는 다시금 파티장 안을 유유자적 돌아다녔다. 지루한 느낌에 살짝 화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혼자 오니까 재미없네. 펠릭스는 혼자 왔을까?


어느 순간 사라진 펠릭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충격받긴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펠릭스의 입장도 다소 납득이 갔다. 아는 사이라고 했고 학교 친구라고 했으면 분명히 학교에서 뭐 하고 지내냐느니 시시콜콜한 질문들이 돌아왔을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얘기하다가 말실수를 안할 자신은 없었다. 분명 당황해서 이것저것 떠들다가 펠릭스가 곤란해 할 만한 화제를 꺼내들지도 몰랐다. 차라리 말하기 전에 차단하는 게 낫지.


물론 이것만으로는 왜 그가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거짓말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로는 좀 부족했다. 그렇게 상냥한 숙부님 앞에서 묘하게 더 말이 없는 것도 그렇고. 쑥스러움을 타나? 윽, 정말 안 어울리는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벽 쪽으로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옆에 나 있던 문이 열리더니 팔 하나가 불쑥 나타나 마리네뜨의 입을 막고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끌려들어간 마리네뜨의 뒤에서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자신을 잡아당긴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펠릭스?”

“쉿.”



조용히 해. 차분하지만 박력있는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펠릭스의 표정이 전에 없이 초조해 보이는 것에 마리네뜨는 살짝 놀랐다. 딱히 이야기를 질질 끌 생각은 없는지 펠릭스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잘 들어.”

“으, 응?”



딱 잘라 말하는 목소리와 달리 말의 내용은 상당히 뜬금없었다.



“절대 숙부한테 접근하지 마. 인사도 하지 마.”

“…어?”

“니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스스로 위험 속으로 걸어들어가지 말라고, 이 멍청한 여자야!”

“뭐?”



펠릭스가 이렇게까지 제 앞에서 말을 많이 했던 적이 있었던가? 멍하니 제게 퍼부어지는 폭언을 듣고 있던 마리네뜨는 다음 순간 펠릭스가 던진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정말 더럽게 말 안 듣는 거 알지만, 이번 얘기는 제발 머릿속에 새기고 가슴에 새겨! 멍청한 거 티내지 말고.”

“머, 멍청이?”

“그럼 멍청하지 아니야? 대체 무슨 배짱으로…!!”



열받은 얼굴로 뭐라 더 말하려다가 펠릭스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 엮이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기에 당황했었지만 어떻게 잘 넘기기는 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너도 위험한 일은 싫겠지.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그만 나한테서 손 떼!”



여기까지가 선이야. 그러니 더 이상 넘어오지 마. 펠릭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세계는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야. 적어도, 너 같은 평범한 여자애가 감당할 만한 것들은 아니라고.”



뭐라 더 설명하려다가 펠릭스는 입을 다물고 한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쳐다보며 펠릭스는 재차 강조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그만 다가오라고. 선을 넘지 마.”

“….”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너까지 챙겨줄 여유도 없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어.”



이렇게 감정적이고, 또 인간적으로 보이는 펠릭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늘 침착하고 정적이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감정이 가득 드러나는 얼굴로 빠르게 다그치는 펠릭스의 모습은 마리네뜨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머리를 휘몰아치는 충격에 어안이 벙벙한 마리네뜨의 표정을 뭘로 해석했는지 펠릭스의 얼굴이 쓰게 일그러졌다.



“어차피 나는….”



숙부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니까.


차마 거기까지 말하지는 못하고 펠릭스는 입을 꾹 다물고 돌아섰다. 그런 펠릭스의 태도에 말하기 곤란한 내용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마리네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싫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은 펠릭스의 발걸음을 단호한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드물게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펠릭스의 등 뒤에서 마리네뜨가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러고 싶지 않아. 난 앞으로도 계속계속 너한테 참견할 거고 계속 쫓아갈 거야!”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마리네뜨에 펠릭스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돌아섰다. 침착한 얼굴로 돌아온 펠릭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말라는 듯이 반문했다.



“헛소리 좀 하지 마. 굳이 위험한 길로 올 필요가 어디 있어?”

“널 좋아하니까!”



펠릭스의 눈가가 일순 움찔거렸다. 마리네뜨가 씩씩거리며 마저 말을 꺼냈다.



“대체 네가 날 언제 챙겨줬었는데? 챙겨줄 필요 없어. 내가 그런 걸 바랬던 적이 있었어? 맨날 나 혼자 좋아하고 쫓아다니고, …셀프로 실연당한 기분 들고 그랬지.”

“….”

“왜 갑자기 나를 걱정하는 척 하는데?”

“그건….”



할 말이 없는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펠릭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마리네뜨가 살짝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주먹을 꼭 쥐면서 애써 발랄하게 말하는 마리네뜨의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난 말이야. 아무런 노력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싫어. 그런 건 질렸으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절망하고 힘들어하고 쉽게 포기하고,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때 왜 그렇게 쉽게 포기했을까, 그렇게 후회하게 되는 게 싫어서.



“내가 좋다는데, 대체 왜 내 마음을 멋대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건데? 난 진심이야. 이렇게 진심이던 적이 없었다구.”

“….”

“확실히 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떨리려는 말끝을 애써 가다듬으며 마리네뜨는 펠릭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시작조차 하지 않는 건 더 문제라고 생각해.”



청회색 눈동자가 그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덤덤한 시선이 오히려 감정을 더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마리네뜨는 한 마디를 덧붙이며 살짝 웃었다.



“혹시 모르잖아. 의외로 잘 해내갈지도.”



레이디버그 일도 그렇다. 처음에는 내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괜히 민폐만 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다가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정말 나에게 히어로 같은 건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생각보다 나름 제대로 해나가고 있는 걸 보면 너무 많이 걱정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펠릭스가 나를 끝내 돌아봐주지 않는다면 무척 슬프겠지만,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벌써부터 물러서고 싶지는 않아.


자신감을 되찾은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하는 마리네뜨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펠릭스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참으로 대책없는 대답이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조건 비관적으로만 봐서는 삶을 꿈꿀 수 없는 걸.”



그 대답에 펠릭스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 그런 펠릭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네가 지금, 날 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살짝 떨려나오는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허세를 부리고는 있지만 그래, 솔직히 말해 좀 무서웠다. 고개를 숙인 채 마리네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펠릭스가 말한 대로 난 정말 바보 멍청이인지도.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 무섭고 지금도 자꾸 손이 떨리는데, 그래도 포기하는 게 더 싫은 걸 보면.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잡고 마리네뜨는 애써 밝게 웃으며 고개를 들고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좋아하게 해줘. 그 정도는 내버려둬 줄 수 있잖아.”



살짝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시선을 펠릭스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눈싸움하듯 서로를 응시하다가 먼저 물러난 쪽은 펠릭스였다.


더는 말하지 않고 펠릭스는 몸을 돌렸다. 미련 없이 돌아서서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다가, 펠릭스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가만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야, 너.”

“…응?”

“그럼 최소한 숙부님 앞에서만이라도 날 모르는 척해.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마.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나는 너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으니까.”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무뚝뚝하게 말을 건네는 펠릭스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살짝 놀랐다가, 곧 환하게 웃었다.



“응! 그럴게.”



한 손을 이마에 대고 경례 자세를 취하는 마리네뜨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펠릭스가 휙 뒤돌아섰다.



“이상한 녀석.”



넌 좀 나중에 나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다시 파티장으로 나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응시하던 마리네뜨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살짝 가셨다. 사람 좋게 웃고 있던 단정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방금 전 만났던 펠릭스의 숙부, 제레미를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고민에 빠졌다.



“뭘까?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너를 그렇게까지 말하게 만드는 거야?








조용히 문을 닫고 연회장으로 나온 뒤 펠릭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태연하게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려는 찰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왜 산 넘어 산이냐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친해 보이더라?”

“클로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소녀가 펠릭스에게로 걸어왔다. 살며시 미소짓는 얼굴은 여러 남자들을 홀릴 법한 미인이었지만, 펠릭스는 전혀 감흥 없다는 표정으로 제 소꿉친구의 모습을 무심히 훑어보았다.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에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러스트.


‘아니야.’


펠릭스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습만 생각해서는 충분히 의심을 할 법했지만 클로에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유명한 사업가이자 지금은 파리 시장인 마크 일레인의 딸로 태어나 외모, 두뇌, 집안까지,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녀석이 굳이 그런 모험을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일단 경계해서 나쁠 건 없겠지.



“너, 대체 그 여자애랑 무슨 관계야?”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펠릭스의 상념을 깨운 것은 싱글싱글 웃는 클로에의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펠릭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사이라고 할 것도 없어.”

“아무 사이도 아닌데, 천하의 펠릭스 아그레스트가 그렇게까지 신경쓴다고?”

“단어가 거슬리는군. 아니라고 했을 텐데.”

“하긴 그런가. 생각해보면 넌 은근히 사람한테 약한 타입이니까.”



혼자 묻고 납득하는 클로에를 보는 펠릭스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그가 나직히, 하지만 냉랭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만해.”

“…알았어.”



더 이상 말하면 화낼 거라는 걸 직감했는지 순순히 입을 다무는 클로에에게 펠릭스는 재차 못을 박았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뒀을 텐데. 지나친 참견은 불쾌하다고.”



냉정하게 선을 긋는 펠릭스의 목소리에 클로에는 일순 움찔했지만, 곧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 왜 그래? 당연히 알고 있지.”

“알면 됐고. 이야기는 끝난 거지?”

“어, 어…?”

“끝났으면 이만 가보겠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순 없으니까.”



망설임없이 돌아서 파티장 쪽으로 나가려는 펠릭스의 등을 보자마자 클로에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펠릭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살짝 돌아보는 펠릭스에게 클로에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지 마.”



지독히도 독점욕이 묻어나는 한 마디에 펠릭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급속도로 피곤해지는 기분에 펠릭스는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매번 질리도록 듣는 이야기. 지겹다.



“그런다고 너한테 가지는 않아.”



딱 잘라 내뱉는 펠릭스에게 클로에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렇게 말해도, 결국 넌 나를 택하게 될 거야.”



조용하지만 악에 받친 듯한 클로에의 목소리를 들은 펠릭스의 얼굴에 낮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정말로 질렸다는 듯이 공허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클로에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아주 살짝 떠오른 비릿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오싹해지게 만들 정도로 싸늘했다. 쉿쉿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클로에의 귓가에 서늘하게 꽂혔다.



“그거 참 기대되는군.”







“의원님.”



조용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제레미 유피테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비서의 무표정한 얼굴에 제레미는 웃으며 말했다.



“뭔가.”

“잠시.”



가까이 다가온 엘렌이 몇 마디를 소곤거리자 제레미의 눈이 일순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추진하도록 해주게.”

“네,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엘렌의 뒷모습에 제레미와 함께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



“자네 비서는 언제 봐도 미인이구만.”

“하하, 감사합니다.”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는 제레미에게 그 옆에 있던 사람도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웃을 줄 알면 좋겠건만, 저렇게 딱딱해서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잖은가.”

“그러게나 말일세. 무척 우수하다고는 들었네만, 거 여자가 나긋나긋한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하.”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던 제레미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쭉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제 곧 마크 시장님의 축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단상 위를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회장 안을 가로질렀다. 참석한 손님들이 모두 단상 위를 돌려다보자 금발 머리의 중년 남자가 단상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이 호텔의 주인이자 파리의 시장직을 맡고 있는 마크 일레인 시장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에, 친애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나와주셔서 감사합….]


“멈춰!”



거친 목소리가 시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허둥대기 시작하는 손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장이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대는 순간 불이 켜졌다.



“헉.”



검은 두건을 쓴 남자 다섯이 연회장의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각기 양 손에 들고 있던 기관총을 사람들에게 겨누자 다들 기겁한 얼굴로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어린애들 몇이 와앙 울기 시작하자 쩔쩔매며 달래는 부모들에게 선두에 선 남자가 소리질렀다.



“입 닥쳐!”

“이보시오, 이게 무슨….”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시장에게 남자는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 버튼 하나라도 눌렀다가는….”

“꺄악!”



그 말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와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꽉 잡아챘다. 강렬한 아픔에 클로에가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아니, 지금 무슨 짓이에요, 이…?!”



남자가 겨눈 딱딱한 총구가 클로에의 목에 닿았다. 경악해서는 입만 벙긋거리는 클로에나 그런 딸의 모습에 사색이 된 일레인 시장을 향해 남자는 짜증스레 소리쳤다.



“네 딸의 목숨을 대신 받아가겠다.”



소란스럽게 구는 사람들을 위협하듯 복면을 쓴 남자 중 한 명이 천장을 향해 총을 쐈다. 두두두두 울리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구멍이 뚫리고,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탄창 소리가 그렇게 소름끼칠 수가 없었다. 다들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피는 와중에 시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목적이오?”



사업가답게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레인 시장을 지긋이 바라보던 남자가 짧게 조소를 터트렸다. 자기가 먼저 시작했으면서 우리들 악당 취급하는 이런 언밸런스함이라니.



“뭐, 별 거 아니야. 이번에 당신이 추진하는 재개발 사업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만 쓰면 되니까.”



씹어뱉듯이 내뱉는 남자의 목소리에 주변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업? 무슨 사업? 아, 이번에 8구에서 추진되는 그거? 근데 그건 이미 승인까지 끝난 사항일 텐데? 그거 엎어보자고 지금 이러는 거야?


그런 주변의 소란과 상관없이 시장은 경악하는 얼굴로 말했다.



“웃기지 마시오! 이미 다 승인한 사업을 무슨 수로 뒤집는단 말입니까. 심지어 그건 시에서 주관하는 건데!”

“닥쳐!”



그 한 마디와 함께 남자는 시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린 그 재개발 사업 때문에 집에서 내쫓겨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알고 있소. 그래서 그 지역에 살던 세입자들에게는 제대로 보상을 했잖소. 왜 갑자기 이러는 거요?”

“본인 보기에 괜찮으면 다 제대로 된 보상인가 보지?”



복면 아래로 들려오는 비웃음에 시장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있었다. 곧 김도 나겠다 싶을 정도로.



“어, 어떡하지?”



한편 마리네뜨는 강도단과 상당히 떨어진 벽측에 서서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레이디버그로 변신해 해치우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티키가 곁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걸까?


시장이 쉽게 넘어오지 않자, 남자들은 일단 시장의 딸을 인질로 잡고 있을 생각인지 클로에를 데리고 파티장에서 철수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보냈다간 클로에가 멀쩡히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시장의 경호원들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인질이 더 위험해질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엇다.


기다려 달라고 다급히 소리치는 시장과 강도들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클로에의 모습을 보면서 마리네뜨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도 없다니.


속이 쓰렸다. 난 대체 얼마나 바보인 걸까. 뭐가 파리의 히어로야? 미라큘러스가 없는 나는 이렇게나 무력할 뿐인데. 들떠있었던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 같다. 티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잖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데.



‘어린애는 냅두고 날 인질로 잡지 그래.’



생각해보면 당시 펠릭스의 행동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물론 놀라울 만한 격투술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총신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다니. 난 이렇게 멀리 있어도 너무 무서운데.


생각해보면 악당들은 하나같이 패턴이 다 비슷한가 싶었다. 협박을 위해 인질을 붙잡는 것도 그렇고 그 당시 은행 강도들과 정말이지 똑같은 패턴에 절로 한숨만이 나왔다. 다른 점이라면 여기에는 레이디버그라는 영웅 대신 평범하고 무력한 여자아이밖에 없다는 것 정도일까.


그렇게 한창 자괴감에 빠져 있던 찰나 마리네뜨는 문득 제 눈앞에 있는 하얀 테이블보를 바라보았다. 이 파티장의 테이블들은 모두 바닥까지 오는 하얀 천으로 덮여 있어 테이블 아래쪽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테이블이 사방으로 많이 퍼져 있었다. 강도들 주변에도.


혹시, 저걸 이용하면….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마리네뜨는 곧 결심을 굳혔는지 테이블 쪽으로 슬슬 움직였다.


반면, 강도단과 거의 대치하는 자리에 서 있던 펠릭스는 지금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 강도들이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떨쳐내지 못한 위화감.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이게 무슨 생각인가 싶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저들은 대체 어떻게 이 파티장까지 올라왔지?


샹그릴-라 호텔은 파리에서도 알아주는 5성급 호텔이다. 에펠탑과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이 호텔은 전망도 전망이지만 특유의 엄격한 방비 시스템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총을 가지고 있어봤자 호텔의 모든 출입구는 철문 아니면 방탄유리였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제대로 출입을 허가받은 자가 아니라면 분명 한 번쯤은 경비 시스템이 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리셉션장까지 올라오기까지 소동은커녕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곰곰이 고민하던 펠릭스의 시야에 클로에가 남자가 세게 휘두른 총의 개다리판에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하는 장면이 클로즈업되어 찍혔다. 기절한 클로에가 남자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며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먼저 행동한 사람이 있었다.



“기다리시오.”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는 제레미를 보며 선두에 있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곧바로 겨누어지는 총구에 몇 사람이 안타까움의 비명을 질렀지만, 제레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이, 뭐 하는 짓이지?”

“상관없는 아이를 끌어들이다니, 너무 과한 행동 같소만.”

“죽고 싶은 건가?”

“하하하. 그쪽이야말로 배짱이 과한 것 같습니다.”

“어이, 이 영감탱이가 무슨….”

“그 총, 가짜 아닙니까?”



그 한 마디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고, 뒤에 있던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웃기지마, 무슨…!! 직접 두 눈으로 봤을 텐데? 천장이 아니라 당신 얼굴을 뚫어줘야 믿겠어?”

“그럼 그 총만 진짜겠지요.”



덤덤하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는 제레미는 도저히 목숨을 위협받은 사람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까지 느껴지는 제레미에 남자는 살짝 두려움까지 느꼈다.



“웃기지 마, 이런 건방진…!!”



바로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제레미를 노리기 위해 앞으로 한 걸음 나선 순간 남자의 몸이 비틀거렸다. 미끌거리는 것을 밟은 것처럼 발을 헛디딘 남자가 바닥으로 쾅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넘어졌다. 강도들도 놀랐지만 뒤에 서 있던 사람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쏴 보세요. 총은 한 자루가 아니지 않습니까?”



씨익 웃으며 계속 재촉하는 제레미에 강도들은 처음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소동 와중에 테이블 밑을 바쁘게 지나다니는 누군가가 있었다. 테이블에서 테이블로 조심스럽게 옮겨가며 강도들에게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테이블 아래쪽으로 옮겨간 마리네뜨는 천을 걷고 살짝 바깥을 내다보았다. 조금 두려운지 살짝 손을 떨다가, 테이블을 조금조금씩 강도들이 있는 쪽으로 밀어가기 시작했다.


서로 눈치만 보다가, 강도들 중 한 명이 재빨리 쓰러진 남자에게로 달려가 총을 집어들려고 했다.



“악!”



발에 뭔가 걸린 것처럼 바닥에 고개를 처박는 그를 보며 옆에 있던 동료가 소곤거렸다.



“야, 너 왜 그래?!”

“몰라, 갑자기 발이 미끄러졌다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클로에에 힘껏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한 마리네뜨는 생각하고 말고도 없이 있는 힘껏 클로에의 드레스를 잡고 제가 들어가 있는 테이블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빨리 총이나 집어들어!”



결국 다른 한 사람이 총을 집어들고 근처에 내려두었던 클로에를 끌어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어라?”



클로에가 사라진 것에 깜짝 놀라 주위를 휙휙 돌아보던 강도에게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퍽, 소리와 함께 커다란 접시를 등에 맞고 쓰러지는 강도를 마지막으로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강도들을 모두 붙잡았다. 그 광경을 뒤에서 마냥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제레미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돌아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아본 제레미가 웃으며 속삭였다.



“경찰에 연락했나, 엘렌?”

“네. 지금쯤이면 슬슬 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엘렌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제레미는 뭐라고 작게 속닥거렸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뒤로 돌아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지는 엘렌을 뒤로 한 채 제레미는 성큼성큼 걸어가 강도들 옆에 있던 테이블의 천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테이블 밑에는 클로에 혼자 기절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제레미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더니 곧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시장이 달려와서 쓰러져 있던 클로에를 끌어안는 장면을 마리네뜨는 한참 뒤에서 살펴보았다. 빨리 빠져나오길 잘했다. 들켰으면 왠지 민망했을 거 같은데.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돌아서는 마리네뜨의 앞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어, 펠릭스!”

“…역시 너였나.”



이런 대담한 짓을 한 사람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뺨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냥 보고 있기가 좀 뭐해서.”

“자칫하면 너까지 위험해졌을 수도 있는데?”

“음, 잘 되지 않을까 했었지. 내가 요즘 운이 좀 좋거든.”



헤실헤실 웃는 마리네뜨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펠릭스는 여느 때처럼 적당히 무시하고 넘기는 게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여간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는군. 방금 전 강도에게 접시를 던진 장본인이 할 생각은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신기하다, 어떻게 총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아셨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펠릭스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망설임을 접고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마, 저 인간들이 총을 너무 자유자재로 다뤄서겠지.”

“에?”



자신을 돌아보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다시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저 정도 크기의 기관총이면 굉장히 무거우니까. 장정 남자라도 저렇게 한 손으로 막 들고 다니지는 못하지. 실제로 아까 천장으로 총을 쏜 남자는 총을 두 손으로 붙잡고서 발사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사람 빼고는 다들 총을 대체로 가벼운 물건 다루듯 들고 있었어. 그런 점만 봐도 쉽게 추론이 가능하지. 아,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총만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구나.”

“그렇구나….”

“애초에 처음 그 사격만 해도 단순한 위협용이 아니라, 모든 총이 다 진짜일 거라는 암시를 하기 위한 장치였을 거고.”



감탄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펠릭스는 질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등을 돌렸다. 그런 펠릭스를 보며 살짝 웃음을 터트리다가 마리네뜨는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짓고 중얼거렸다.



“하긴, 그러고 보면 집 살 돈도 없어 내쫓긴 사람들이 무슨 돈이 있어 저런 비싼 총을 잔뜩 샀겠어.”

“그것도 있고.”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하는 펠릭스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져 있었다. 이쪽 벽에 불이 없어 어둡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표정이 좋지 않아서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아무튼, 다시 나 아는 척 하지 마.”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뒤돌아서 가버리는 펠릭스의 등 뒤에서 마리네뜨는 살짝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지가 먼저 아는 척해 놓곤.”






사건은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알고 보니 일레인 시장은 얼마 전부터 이 문제 관련으로 계속 협박장을 받고 있었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했는데 설마 파티장까지 숨어들어올 수 있을지는 몰랐다며, 앞으로 더욱 호텔의 보안을 철저히 할 것을 공약하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되었다.


시장의 상황 설명과 장황한 사과가 끝난 뒤, 다시 파티가 재개되었다. 아까 그런 소동이 있었음에도 전혀 문제없이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벽에 기대어 지켜보는 펠릭스의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서렸다.


그래, 여기는 이런 곳이지.

잊고 있었던 건 아닌데 새삼스레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걸까.


한 손에 주스잔을 들고 근처 벽에 기대어 생각 없이 연회장을 지켜보고 있던 펠릭스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기댔다. 시선을 살짝 돌려보자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냐고 물을 생각도 쫓아보낼 생각도 없었기에 펠릭스는 고개조차 돌리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자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펠릭스는 더 이상 연회장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참 그럴듯해. 정말로.”



펠릭스가 듣던 말던 남자는 그저 떠들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참으로 좋은 미담이 아닐 수 없지. 목숨을 걸고 맨몸으로 나서서 잡혀있던 시민을 구하려고 했던 정치인에 대한 기사가 내일 신문에 뜨겠지. 호텔 피습 사건? 재개발 사건의 진실은? 뭐 이런 기사 헤드라인이 곧 다음 날 신문 1면을 장식할 거야. 내 기자로서의 경력을 걸고 장담할 수 있어.”



자신을 기자라고 소개하는 남자가 마저 말을 이었다.



“이 일로 다시금 일레인 시장이 추진하던 8구 재개발 사업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질 거야. 그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추진되어 왔든 이런 일이 생겼으니 분명 의혹이 제기될 거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진행되든 결국 욕을 먹게 되겠지. 사업 추진도 늘어질 거고.”

“….”

“설령 그 지역 재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 나름 굉장히 합리적인 판단 하에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말이야.”



펠릭스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소년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남자는 더욱 한탄어린 어조로 말했다.



“시민들은 멍청하니까. 겉으로 보기에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앞 뒤 안 가리고 나서는 이들도 많지. 결국 살펴보면 모두에게 이득인 관계라도 마찬가지야. 인간은 그리 이성적이지 못해.”

“….”

“그리고 그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알력에서 이득을 챙기는 건 매우 영리하고, 또 자기밖에 모르는 지독한 놈들이지.”



들고 있던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면서 남자는 살짝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이 일로 유피테르 의원의 인기는 또 하늘처럼 치솟겠지. 히야, 손해는커녕 이득만 가능한 상황이구만 이거?”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윤곽이 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뭐라고 말할 만한 사항은 아니었으므로 펠릭스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더 말해볼까? 기자 생활 초반부터 유피테르 의원을 봐왔지만 나는 저 양반이 한 번이라도 삐끗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늘 사람 좋은 얼굴로 건실하고 좋은, 시민들에게는 더없이 좋아보이는 정책들을 들고 나와서 신뢰를 얻었지.”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란 없잖아? 정치판 같은 곳이면 더더욱이나. 승승장구하는 저 의원을 짓누르려고 하던 사람들이 없었을 거 같아?”



있었지. 그 한 마디를 덧붙이며 남자는 다시금 목이 타는지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두 하나씩은 지독한 일을 당했단 말야?”

“….”

“이번 일레인 시장도, 다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이번 재개발 건으로 유피테르 의원과 충돌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고.”

“….”

“아주 구린 냄새가 난단 말이야. 딱 보기엔 굉장히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하얗게 덮으려고 해봤자 얼룩진 본성은 사라지지 않아. 감출 수 있을 뿐이야.”



자신을 오래 감출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영리한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알지만 나는 그를 모르기에.



“뭐, 나쁜 말이 나오지 않게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도 능력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기자는 펠릭스를 살짝 돌아보았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펠릭스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기자가 장난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뭣 좀 아십니까? 아그레스트 가의 도련님.”



아까의 중얼거림과는 달리 온전한 존댓말. 정중하게 제 의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펠릭스는 차분히 응수했다.



“…별로.”



그 한 마디와 함께 펠릭스는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파티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펠릭스를 바라보며 기자는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녀석일세.”






“그런 일이 있었구나.”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있는 제 주변을 뱅뱅 맴돌며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티키를 마리네뜨가 두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꺄르르 웃어대는 티키를 보며 피식 웃던 마리네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완전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나중에는 막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그래도 마리네뜨 진짜 용감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되게 무서웠을 텐데.”

“에헤헤, 그냥, 뭐….”



사실 마리네뜨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조금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히어로가 되더니 정의감만 늘었는지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또 그걸 실천에 옮기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티키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티키, 다음부터는 불편하더라도 같이 와 줄래?”

“나는 상관없어. 그러니까 오늘 일 너무 신경쓰지 마, 마리네뜨.”



또 제가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걱정되는지 다정스레 말을 건네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미라큘러스가 없는 나는 지극히 평범한 소녀지만-.”



자신은 평범하다. 아마 계속 히어로가 되더라도 나는 이 사실에 계속 염려하고 불안에 떨게 되겠지. 레이디버그는 나지만 내가 아니니까. 진짜 내 삶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


결국 레이디버그로서의 삶은 내게 있어 꿈에 지나지 않으니까.

꿈이란 잔인하다. 언제 끝나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에.



“아직은 미라큘러스가 내 손에 있으니까. 최소한 내가 레이디버그로 더 이상 변신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깜깜한 밤,


낮의 북적거림이 사라지고 고요한 밤이 식물원에 날아들었다. 관광객들과 시민들로 늘 사람이 넘쳤던 낮과는 달리 밤의 식물원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어두웠다. 곳곳에서 엷게 빛나는 백열등의 흐릿한 빛들이 식물원을 더욱 더 신비스럽게 연출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나무들 사이로 그림자가 하나 움직였다. 사람의 그림자였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건지 식물원 안을 유유히 거닐던 그림자는 곧 제 앞쪽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찾아냈다. 창백한 피부에 눈가에 찍힌 눈물점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마임맨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앞에 선 자신의 주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단정하게 정돈된 백발과 날카로운 백안을 빛내는 남자였다. 분명 젊었을 때 상당한 미남자였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정답게 그려주고 간 주름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남자의 눈빛은 냉랭했다. 낮에 보였던 온화한 얼굴 대신 냉혹한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웃음이라고는 모를 것처럼 무감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에게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탁한 백색의 눈동자가 흡사 뱀의 눈동자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마임맨에게 남자는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답에 만족했는지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시 터벅터벅 제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는 남자에게 마임맨은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시간이 걸릴 듯 싶습니다.”

“그렇군.”



마임맨의 바로 앞까지 왔다가,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마임맨의 옆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다루기 어려운 패는 필요없지.”



필요할 때까지만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간에.


그런 남자의 잔혹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마임맨은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의 앞에서는 말이 많아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이미 체득했기 때문이다.



“예정 날짜에 맞출 수 있도록 하지.”

“예.”



꾸벅 고개를 숙이는 마임맨을 뒤로 한 채,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투명한 유리 천장 너머로 별이 마냥 반짝거렸다.




- 봄: printemps : 인연의 시작 편 마침 / 여름: été로 이어집니다.




===

드디어 봄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네 길었죠? 달려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그리고 다들 대충 예감하셨겠지만 봄 에피는 진짜 프롤로그 격이라고 보시면 되구요... 여름부터 본격적인 애들의 사랑전선과 찌ㅋ통ㅋ이 시작됩니다 ㅎㅎㅎㅎ 여름 에피는 제가 봐도 정말 멘탈 후려치는 에피들이 대부분이라 애들이 좀 걱정되긴 하는데 뭐 잘들 해내겠죠 ㅇㅇ



6화를 작업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점은 히어로들을 출연시켜서 사건을 해결할지, 아니면 다른 루트를 사용할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다 정해놨지만 이걸 엄청 고민했었는데, 맥락상 안 넣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히어로들이 주인공인 건 맞지만, 꼭 매 에피마다 히어로들이 나와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나오는 화도 있고 쉬어주는 화도 있어야겠죠. 그리고 히어로들을 꼭 넣자고 생각하면 화마다 다룰 수 있는 주제가 매우 한정되어 버립니다. 뭐 이건 제 능력 탓일 수도 있지만요.


각설하고, 사실 6에피는 다 떠나서 저 아저씨를 등장시키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습니다ㅋㅋㅋㅋㅋ 6화의 제목이 왜 저럴까? 하신 분들이 계셨겠지만 6화의 제목은 맨 마지막을 위한 거였습니다 호호호. 다들 처음 나왔을 때부터 짐작하셨겠지만 당연히 저 아저씨가 호크모스입니다...


이중인격이 좀 쩌는 분인데 그냥 사회생활 잘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의외로 저런 정치인 현실에 꽤 많구요.. 현실을 열심히 반영해 보았습니다^ㅁ^


호크모스의 정체를 암시하는 것으로 봄 에피소드를 끝내고 싶었어요. 계절 파트마다 다루는 내용들이 딱 있고 마지막 부분은 그 다루는 주제에 종결을 찍는 식으로 구성했어요. 재미있으셔야 할텐데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다 부들...ㅠㅅㅠ


그리고 펠릭스는 당연히 숙부의 저런 성정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왜 펠릭스가 마리네뜨에게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며 화까지 내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기도 한데 이건 설명하자면 스포같아서 안 되겠습니다;ㅅ; 책에서 봐주세용^ㅁ^


봄 에피소드에서 제가 추구한 것이 일단 펠릭마리 두 사람이 히어로가 되는 계기와, 아이들 주변의 관계성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잘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성들을 알고 계셔야 전체적인 스토리 흐름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뭐 사실 좀 걱정되는 면들도 있습니다 5에피나 6에피의 경우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한 에피소드당 30페이지 내외로 끝내야 하기 때문에 필요 없는 부분들은 모두 컷하고 있습니다. 즉 제가 집어넣는 것들은 대체로 다 그 이유가 있다는 거죠. 하지만 표현하기 애매해서 그냥 상황적으로 판단하시게 냅두고 넘긴 부분들도 있습니다. 가령 6에피 사건 후반부가 좀 의아하신 분들이 계실 텐데 조금 머리를 굴려보시면 답이 나오실 겁니다 ㅎㅎ


여름 에피소드 재밌을 겁니다 최소 제 기준에는 봄보다 재밌더군요... 사실 쓰는 입장서는 봄이 제일 재미없었어서;ㅅ; 여름! 지금이 여름이니까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며 스퍼트를 올리면 되겠군요ㅇㅁㅇ!



이상입니다. 일단 온리전에서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_<

Posted by I.R.E
,

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4

※ 제목은 차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Episode 5.

시작된 변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구우우-!!”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마리네뜨는 베개에 얼굴을 쿡 박았다. 그렇게 침대에 엎드린 채로 마구 발버둥을 치던 마리네뜨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에스미가 대체 뭐에 화가 났지?”



말을 걸어도 대답 안 해주고, 앞으로 다가가도 ‘내 앞엔 공기밖에 없다’ 식으로 무시하고, 애초에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애교를 부려봐도 냉랭하게 무시하는 걸 보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 그럼 나도 너랑 절교야! 를 외치기에는 에스미의 성격이 마음에 걸렸다.


겉으로 보기에 차가워 보여도, 에스미는 이유 없이 화를 낼 성격은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 이렇게 딱 짐작가는 게 없을까.


거하게 한숨을 내쉬는 마리네뜨를 티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푸념하듯이 말을 늘어놓았다.



“나한테 자기가 왜 화났는지 생각해보라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해도?”

“짐작가는 게 너무 많아!!”



이건가? 아니 이건가? 혹시 이거? 손가락을 접어가며 그간의 행동들을 되짚어보던 마리네뜨는 다시금 베개에 얼굴을 포옥 묻었다.



“으아, 모르겠어!”



또 다시 이리저리 버둥거리다가 침대에 축 늘어졌다. 살며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마리네뜨가 바로 옆에 보이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침대 위를 두들기다가 주먹을 꼭 쥐었다.



“어떡하지….”



눈을 깜빡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가볍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마리네뜨. 이런 경우는 아무래도 시간이 약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래?”

“대화를 나누기에는 지금은 좀 무리일 거 같으니까, 화가 조금이나마 풀릴 때까지 거리를 두는 게 어떨까?”

“그게 나으려나….”



티키의 제안에 마리네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다 배시시 웃었다. 그래, 괜찮겠지. 전에도 싸웠던 적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화해했었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 근데 그 때 뭘로 싸웠더라? 너무 졸려서일까, 잘 기억나지 않았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마리네뜨는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게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건 금세 드러났다.



“그럼, 이상으로 내일 있을 체험학습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치도록 하마. 준비물은 프린트에 적어두었으니 참고하고.”



체험학습을 잊고 있었어!


마리네뜨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프린트를 받아들었다. 이번 주 금요일, 즉 내일 있을 단체 체험학습은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에서 진행된다. 엄청나게 넓고 사람은 또 사람대로 많아서 돌아다니기도 힘들지만 세계 3대 자연사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만큼 볼거리는 충분한 곳이다. 감상문을 적어야 하는 게 좀 걸리기는 하지만.


원래는 에스미와 같이 돌아다니기로 했지만 이런 상태로는 무리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같은 조로 적어서 냈는데.


…올해도 또 혼자 다니게 되는 걸까.


쓰게 웃으면서 프린트를 가방에 집어넣고 짐을 챙기던 마리네뜨의 책상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마자 무감정한 얼굴로 제 앞에 서 있는 에스미를 본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뭐라 말할지 고민하다가 마리네뜨는 말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헤실 미소지었다. 왠지 지금 말을 꺼내면 다시 화낼 거 같아서 무섭다. 그러니 그냥 웃는 게 낫다. 설마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않을 테니까.


그저 헤헤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펴보던 에스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 바보를 어째야 할까.



“이거.”

“으, 응?”



에스미의 손에 들려 있는 체험학습 프린트를 본 마리네뜨의 눈이 깜빡거렸다. 뭐라 생각하기도 전에 에스미가 딱 잘라 말했다.



“같이 가야하니까 기다려, 그 날.”

“어, 응!!”



기합이 팍 들어서 크게 소리치는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스미는 아무렇지 않게 뒤로 돌아섰다. 별로 웃어주거나 이제 화해하자거나 이런 말 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마리네뜨는 에스미가 많이 누그러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미라큘러스의 힘이라기보단 친한 친구로서 느끼는 직감에 가까웠다.


책가방을 챙겨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온 마리네뜨는 교정을 거슬러 걸어가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대번에 기분이 좋아졌다.



“펠릭스!”



우울했던 기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에 하트를 그리며 펠릭스에게로 달려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명 마리네뜨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펠릭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근처에 있던 나무에 가만히 손을 댔다가, 뗐다.


손끝에서 나오는 검은 오오라가 파우더처럼 나무에 뿌려지자 손끝이 닿은 부분의 나무줄기가 살짝 건조해졌다. 동시에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있던 사과 하나가 휘청 흔들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잔뜩 미소를 뿌리며 뛰어오던 마리네뜨가 어느덧 나무 밑까지 다가왔다. 앞서가는 펠릭스를 어떻게든 따라잡으려 더욱 빨리 뛰기 위해 다리에 박차를 가려던 마리네뜨는, 싸한 예감에 저도 모르게 급제동을 걸었다.


마리네뜨가 멈춰서자마자 정확히 마리네뜨의 바로 앞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잡아챘다.


초록색 사과였다. 붉은 끼가 살짝 도는 걸 봐서는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이 분명한.



“어라? 왜 사과가 떨어졌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다시금 앞을 쳐다본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헉, 어디 갔지?”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펠릭스는 유유히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마리네뜨의 더듬이가 마리네뜨의 기분마냥 추욱 늘어졌다.


오늘도 놓쳤네.



“그렇게 매정하게 가버릴 건 없잖아!”



입을 불퉁하게 내밀며 투덜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은 그래도 방금 전보다는 훨씬 편안해 보였다. 이미 가버리고 없는 펠릭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또 놓치다니.


그러고 보니 요즘 자주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야. 발견했다 싶으면 꼭 이렇게 무슨 일이 생겨서 놓치게 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만.


울상을 지으며 마리네뜨는 들고 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지금은 딱딱하고, 살짝 시큼한 맛이 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달콤해질 사과를.









파리 5구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


세계 3대 자연사 박물관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는 이 자연사 박물관은 자르딘(Jardin Des Plantes)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식물정원과 동물원, 인류학 박물관으로 나뉘어 있다. 생물표본, 광석, 화석 등을 약 6000만점 소유하고 있으며, 식물 표본만도 800점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는 이 거대한 박물관에는 오늘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관광객들은 물론 파리 시민들까지도 나들이를 할 때는 여지없이 이 곳을 찾았다. 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식물원과 동물원이 갖춰져 있어 가족끼리 놀러 오기가 좋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으면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경우도 많았다.


진화관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보이는 것은 엄청나게 큰 덩치를 가진 여러 동물들이었다. 정확히는 그 동물들을 박제한 표본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코끼리를 선두로 그 뒤를 따라 어디론가 향하는 것처럼 묘사된 수많은 동물들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키기 충반했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히야….”



몇 번을 왔지만 언제 봐도 대단하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진화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마리네뜨는 지금 자신이 이렇게 들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에스미를 놓쳤다.


정확히는 너무 들떠서 이리저리 걸어다니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정도일까?


에스미, 어디 갔지? 오늘은 그래도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았는데 또 화났을지도 모른다. 하긴 나라도 이렇게까지 멍청하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을 거 같아. 들떴던 기분이 한 번에 축 가라앉았다.


모처럼 화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 왜 이 모양일까.


안 돼, 안 돼! 우울해하지 마. 벌써 이러면 안 돼.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어떻게든 웃기 위해 애쓰던 마리네뜨는 뒤에서 나지막히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 펠릭스 이 녀석 대체 어딜 간 거지.”



어라?


뒤를 돌아보니 갈색 피부에, 삐죽삐죽 솟은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개구진 얼굴이나 활동적으로 보이는 제스처를 보면, 도저히 그 진중하다 못해 조용한 펠릭스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체 얘가 펠릭스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사실 동명이인을 부른 건 아닐까? 그렇게 의심할 찰나, 마리네뜨를 발견한 소년이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거리더니 손가락으로 마리네뜨를 가리켰다.



“어, 너 펠릭스 근처를 맴도는 그 더듬이 아냐!”

“누가 더듬이야!”



대번에 버럭 소리지르며 씩씩거리는 마리네뜨의 기세에 놀랐는지 소년은 대번에 사과했다.



“불쾌하게 들렸다면 미안해. 그럼 넌 이름이 뭔데?”

“어…?”

“이름을 알아야 부를 거 아냐? 내 이름은 앨빈. 앨빈 에반워프야.”



상큼하게 웃으며 앨빈이 마리네뜨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이내 결심했는지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말했다.



“…마리네뜨. 마리네뜨 뒤팽 쳉.”

“그래. 아, 그나저나 너 혹시 펠릭스가 어디 갔는지 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나저나 네가 어떻게 펠릭스를 아는데?”

“같은 반이거든.”

“같은 반인데 왜 펠릭스를 찾아?”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



쌈박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친구? 펠릭스랑 친구가 되겠다고?”

“어, 왜?”

“그게….”



저렇게 세상 혼자 살 거 같은 녀석이랑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그 발상이 무척 놀라워서.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기에 마리네뜨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펠릭스가 상상 이상으로 무뚝뚝하다는 사실은 마리네뜨 자신도 이미 인정하고 있던 바였다.


일단 입을 열 때가 무척 적었다. 의사표현을 해야 할 때는 어지간해서는 고개 끄덕끄덕, 도리도리, 그것도 아니면 무시. 딱 이 세 가지 패턴을 고루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싫어해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지켜보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저렇게 살면 안 피곤한가? 나라면 되게 피곤할 거 같은데.


목소리도 좋은 애가 왜 그렇게 입을 꾹 닫고 사는지 마리네뜨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이젠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그나마 말을 좀 많이 했던 건 레이디버그로서 처음 만났을 때 정도였다. 그 때는 단순히 좀 무뚝뚝한가 싶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왜 그 때는 그렇게 말이 많았던 거지?


떨떠름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앨빈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저런 무뚝뚝한 녀석이랑 친구가 되려는지 궁금한 거지?

“으, 응?”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바라보던 앨빈이 피식 웃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구나.



“일단 그 녀석이나 찾으러 가볼까? 보나마나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닐 거 같으니까.”



그 말과 함께 손을 놓고 앞장서는 앨빈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마리네뜨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그의 뒤를 쫓았다.



“짐작가는 곳이 있어?”

“프린트에서 녀석이 어디를 보는지 몰래 살펴봤지. 진화관이랑 식물원을 보고 있던데 여기 없으니 아마 식물원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어.”

“헐, 그거 사생활 침해 아냐?”

“시도때도 없이 쫓아다니는 너만 할까.”



태연하게 맞받아치는 앨빈의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가족관계에 취미까지 조사했었던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긴 좀 민망하기도 했고.



“아,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갔네. 아무튼 내가 그 녀석이랑 친구가 되고 싶은 건….”

“되고 싶은 건?”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귀를 기울이는 마리네뜨를 돌아보며 앨빈은 싱긋 웃었다.



“내가 어느 날 축구를 하고 있었거든.”

“엥?”



갑자기 이게 뭔 소린가. 그렇게 묻는 듯한 마리네뜨의 표정을 보며 앨빈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막고 큭큭 웃으며 걸어가는 앨빈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이상한 놈 취급하듯이 쳐다보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이야, 너 진짜 얼굴에 다 티난다. 혹시 너, 평소에도 생각을 얼굴에 써붙이고 다닌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냐?”

“헉, 그걸 어떻게…!”



귀신보듯이 식겁한 표정으로 자신에게서 물러나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사람이 싫다는 건 아냐. 아무튼 이야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웃어서 미안해. 너 재미있네.”



악의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감탄사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신기한 녀석이다. 얼핏 들으면 기분 나쁠 법한 소리를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소화하다니.



“재미있어서 미안하게 됐네요. 그래서?”

“그 때, 내가 공격수였거든. 결정적인 찬스를 잡고 공을 찼는데, 이게 골대를 넘어서 공원 밖까지 넘어가 버렸지 뭐야.”

“응.”

“공원 밖으로 나와서 공을 찾았는데 공이 저 도로변까지 굴러가 있었어. 일단 시합 중이라 빨리 도로로 가서 공을 주웠지. 그리고 뒤로 돌아서려고 했는데….”

“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날 잡아당기는 거야.”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이다. 강렬한 기시감을 느끼며 마리네뜨는 속으로 설마를 중얼거렸다.



“엄청 강한 힘으로 칼라를 잡아당기는데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거 있지? 진짜 열받아서 누구냐고 소리지르려던 순간에, 보고 말았어.”

“뭘?”

“자동차가 바로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쌩하게 짓밟고 지나가는 걸.”



역시나.



“진짜 코앞에서 스쳤다니까. 그거 보고 놀라서 말문이 막혀가지고 입만 벙긋거렸었지. 뒤를 돌아보니까 엄-청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을 한 녀석이 내 뒤에 서 있더라고?”



참 과격하게 구해주는 건 사람을 불문하고 똑같구나. 새삼 펠릭스의 성격을 되새기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앨빈이 그 당시 얼마나 놀랐을지도 백 번 이해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과 똑같은지 전에 없던 연대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얼굴을 보고 더 놀랐어. 같은 반인데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던 녀석이었거든. 그리고 웃긴 건 다음 날 고맙다고 하려고 찾아갔는데….”

“-그렇게 감사받을 일은 아니야.”

“헐, 어떻게 알았냐?”

“그냥….”



그랬어. 말을 얼버무리는 마리네뜨를 잠시 수상하다는 듯이 살펴보던 앨빈은 곧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 때까지는 펠릭스에 대해 별 생각 없었거든. 워낙 조용하잖아. 협조성도 별로 없고. 뭐 성격 나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었고.”

“소문이 있었어?”

“수군거리는 놈들이 몇 있었지. 하지만 난 뜬소문 따위는 믿지 않아. 뭐든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어. 특히 사람은.”



진지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하는 앨빈을 보며 마리네뜨는 새삼 펠릭스에게는 정말 이름대로 운이 따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정말로 친구가 되면 좋을 텐데.


앨빈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좀 지켜보다 보니까….”

“보니까?”

“너무 말이 없어서 뭐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는 거야!”

“어, 그거 완전 공감해!”



자신이 초반에 했던 고생을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도 그랬냐는 듯이 마리네뜨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앨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같은 반이다 보니까 대충 일과는 알겠는데, 도통 말을 해야 말이지. 근데 계속 지켜보니까 의외로 말이 없는 거 빼고는 냉정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친절한 편이다 싶더라고. 계속 귀찮게 달라붙어도 말을 험하게 하거나 그러지도 않고. 남자새끼가 징그럽게 웃는다거나 뭐 이런 말을 하는 놈들도 있는데.”

“헉, 심하다.”

“그렇지? 근데 이 녀석은 음, 뭐랄까. 딱 잘라서 할 말만 한다고 해야 하나?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쪽이다 싶더라고.”

“예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은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지 않나 싶었지.”



어느덧 두 사람은 식물원 앞까지 다다랐다. 학생증을 보여주니 이미 학교에서 입장료를 지불했는지 군말 않고 들여보내줬다. 가지각색의 나무들이 모여 녹음을 드리웠다. 식물들을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는 앨빈의 얼굴에는 선선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자신을 지나치게 억누르는 것 같은 모습이 있는 거 같아서. 비슷한 경우를 알고 있어서 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길을 걸어가던 앨빈이 아, 소리를 내며 마리네뜨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기 사람한테는 굉장히 잘 해줄 거 같잖아? 일단 사귀기는 좀 힘들더라도.”



눈을 찡긋하며 웃는 앨빈의 모습에서 마리네뜨는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래, 이 애는 블랙캣을 닮았어. 머리색을 보면 블랙캣일 리는 없지만 분위기 자체는 매우 비슷했다.



“뭐, 다 떠나서 저 녀석이 마음에 들어서라는 이유가 크지만.”

“그렇구나.”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던 앨빈은 곧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빙그레 웃었다.



“너도 그렇지 않아?”

“응?”

“그 녀석 좋아하잖아.”



그리고 말을 돌려할 줄 모르는 것도 똑같았다. 직설적으로 꽂히는 물음에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버버 거리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굴에서 불이 나는데요.”

“시, 시끄러!”

“너야말로 그 녀석 어디가 좋은데?”

“상냥한 점!”



즉각적으로 말을 뱉자마자 마리네뜨는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의외라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앨빈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마리네뜨는 중얼중얼 말을 내뱉었다.



“아, 물론 그것만 좋은 건 아니야. 얼굴도 목소리도 다 좋달까. 특히 목소리가 살짝 낮아서 되게 듣기 좋아. 계속 듣고 싶은데 말이 너무 없어서 놀라긴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해. 물론 무뚝뚝한 성격인 건 맞고, 나를 귀찮게 여기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정말 나한테 상처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걸. 그게 본인의 편의에 의한 거라고 해도. 그것도 펠릭스 나름의 상냥함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

“언젠가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두 손끝을 모으면서 발그레 뺨을 붉히며 웃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살펴보던 앨빈의 손이 마리네뜨의 머리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구 헝크러뜨렸다.



“으아앗! 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아, 이 더듬이 만져보고 싶었는데 이런 느낌이었구나.”

“당장 손 안 치워?!”



제 머리를 헝크리는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은 마리네뜨가 낑낑거리며 앨빈의 손을 치워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킥킥 웃는 앨빈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묻어났다.



“음, 역시 난 네가 마음에 들어! 잘 되길 빌어줄게.”

“흥, 니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잘 될 거거든?”

“그래그래. 그런 의미에서 저기 있네.”

“에?”



앨빈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정확히는 펠릭스 혼자만은 아니었다. 펠릭스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에스미?’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마리네뜨와 달리 앨빈은 거리낌없이 펠릭스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를 들었는지 돌아보는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질렸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펠릭스에게로 다가간 앨빈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역시 여기 있었네.”

“…대체 왜 쫓아오는 거야.”

“심심한데 같이 구경이나 다니자. 아, 시끄러운 게 싫다면 조용히는 해 줄게.”

“귀찮아, 꺼져.”

“오, 이제 말이 좀 험악해지는데?”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는 앨빈의 모습에 펠릭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앨빈이 다시금 힘주어서 말했다.



“나랑 친구하자니까.”

“안 해.”

“에이, 왜. 닳냐?”

“닳아.”

“헉, 너한테 다른 친구가 있었어?”

“어째 욕으로 들리는군.”



한 쪽은 과하게 웃고 한 쪽은 과하게 냉랭했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밸런스가 맞는 듯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리네뜨는 지금 펠릭스에게 신경을 쓸 정신이 아니었다. 펠릭스와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에스미는 마리네뜨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말없이 등을 돌렸다. 어딘지 화난 듯이 빠르게 걸어가는 에스미의 뒤를 쫓아가는 마리네뜨의 목소리를 듣고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돌렸다. 잠깐 마리네뜨를 돌아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히죽 웃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앨빈에게 펠릭스는 냉랭하게 말했다.



“뭐냐.”

“아니~ 생각보다 아예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싶기도 하고.”

“뭐?”

“너도 은근히 쟤한테 관심있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펠릭스는 앨빈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펠릭스를 앨빈은 신난 얼굴로 뒤따라가며 물었다.



“따라가도 되냐?”

“…마음대로 해.”

“와우, 네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때도 있구나!”



신바람이 난 앨빈에게 대꾸할 기운도 없는지 펠릭스는 하아, 한숨을 쉬며 앞장서 식물원을 빠져나갔다. 저렇게 보여도 정말 싫었으면 계속 꺼지라고 했을 것을 알기 때문에 앨빈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펠릭스를 따라나섰다.


한편, 마리네뜨는 계속해서 에스미를 쫓고 있었다. 말없이 턱턱 걸어가는 에스미를 따라 식물원을 한 바퀴 돌면서도 마리네뜨는 차마 에스미의 옆으로 뛰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얼굴을 보기가 무서웠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졸졸 뒤따라가며 에스미의 이름을 불렀지만 듣지 못했다는 듯이 점점 더 빨리 걷기 시작하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에스미! 잠깐만!”



기다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부르는 목소리에 에스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돌아봐주지는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마리네뜨는 우물쭈물 말을 골랐다.



“그게….”

‘꺄아아아악!’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마리네뜨와 에스미는 물론 주변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소리의 크기를 봐서는 식물원 밖에서 무슨 일이 터진 것 같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투명한 온실 벽 너머로 보이는 무수한 새 떼를 발견한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미스터 피죤!’



“밖에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진화관 로비,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앨빈과는 다른 의미로 펠릭스의 얼굴도 굳어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도 놀랐는지 웅성거리고 있었다. 펠릭스의 눈빛에 고민이 서렸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 변신해야 하겠지만 무작정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간 의심을 받을 상황이었다. 위험 속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갈 사람은 없을 테니까.


다시 식물원 쪽에서, 나름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마리네뜨는 속으로 퍽 당황하고 있었다.


이걸 어쩌지? 하필 겨우 화해할 법한 이런 순간에!


그렇다고 악당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리네뜨는 일단 에스미가 있는 쪽 길로 뛰어가려고 했다. 그 쪽이 입구랑 가까우니까. 하지만 그 순간, 에스미가 제 옆을 스쳐 지나가려는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그 순간 올려다본 에스미의 표정에 묻어나는 걱정에 마리네뜨는 순간 무척 안도했다. 아주 화난 게 아니구나. 아플 정도로 꽉 붙잡은 에스미의 손을 내려다보던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였다가, 이내 결심했는지 에스미의 팔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잠깐 화장실 가려고! 급해서!”

“야! 여기 화장실이 어디…!!”



에스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리네뜨는 재빨리 뒷걸음질쳤다가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돌다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 천장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몇 분 뒤에 나타난 입구로 뛰쳐나간 마리네뜨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지점은 확실히 식물원에서 멀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일단 급한 대로 근처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빛이 번쩍 차오르더니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레이디버그는 빠르게 악당이 있을 만한 공원의 중심부로 향했다. 비둘기들을 부리며 사람들을 마구 위협하던 미스터 피죤은 제 앞에 나타난 레이디버그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홀홀홀. 왔구나, 레이디버그!”



근데 생각보다 빨리 왔는걸?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스터 피죤의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뜨끔했지만 그런 기분을 감추려는 듯 오히려 더 기세좋게 외쳤다.



“이 망할 아저씨야! 대체 여기서 왜 행패인데?”

“흥, 저 망할 꼬맹이가 비둘기들한테 돌을 던졌다고! 사랑스러운 나의 비둘기들한테!”

“그럼 그런 짓 하면 안 된다고 달래야지 지금 이게 어른이 취할 태도냐!”

“내 맘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던지며 미스터 피죤은 손에 들고 있던 호루라기를 불었다. 미스터 피죤의 웃음소리를 닮은 이상한 울림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멈칫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어디였더라?


길게 생각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마구잡이로 제게 달려드는 비둘기들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제 가방에 손을 넣으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요!”



크게 소리지르자 굳어 있던 사람들이 으아아,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한데 모여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비둘기 떼들을 가만히 노려보던 레이디버그는 새들이 최대한 가까이 오자마자 매직박스에서 무언가를 꺼내 집어던지고 위로 날아올랐다.


촤악,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물이 비둘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차게 날아들던 비둘기 떼들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우르르 그물 속으로 파고들었고, 모든 비둘기들이 다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그물 끝을 잡고 돌돌 감아 묶었다. 좁게 갇혀 겨우 날개만 살짝 푸드덕거리는 비둘기들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마음 속으로 사과를 보냈다.


미안, 다 끝나고 나서 꺼내줄게.


남은 비둘기는 지금 미스터 피죤을 태우고 있는 녀석들 뿐이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하는 미스터 피죤에게 레이디버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네 차례야!”







“아직 싸우고 있으려나?”



박물관 뒤쪽에 있는 숲 속을 달리며 블랙캣은 자못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밖에서 싸움이 났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경비원들이 정문을 통제하고 있어서 그쪽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급하게 뒤돌아서 후문을 찾긴 했지만 자꾸만 자신을 붙잡는 진드기 녀석을 떼어내는 것만도 한참이 걸렸다.


그나마 이렇게 빨리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블랙캣 본인이 이 박물관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어릴 적부터 이곳에 자주 왔었는지라 박물관과 공원의 구조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 어디에 후문이 있고 어떤 곳에 뭐가 있는지조차 줄줄이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명한 고고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펠릭스는 펠릭스 나름대로 이 박물관을 꽤나 좋아했다.


늦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계속 달리던 중, 블랙캣의 시야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재빨리 발에 제동을 걸고 멈춰섰다.



“이런 곳에 동굴이 있었나?”



언뜻 보기에 블랙홀을 연상시킬 만큼 시커멓게 입을 낼름거리는 듯한 어두운 동굴. 처음 보는 동굴에 블랙캣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이 공원을 찾아와 산책을 해서인지 이 넓은 공원에 뭐가 있는지 대체로 파악하고 있다 자부했지만, 그런 그의 기억에도 이렇게 커다란 동굴은 본 적이 없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사람 몇은 문제없이 나다닐 법한 커다란 동굴을 가만히 살펴보던 블랙캣이 천천히 다가가서 발을 디뎌보았다.


환상이 아니다. 동굴 특유의 시원한 공기가 블랙캣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들어가 볼까? 잠깐 고민하던 블랙캣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싶었는지 결국 돌아섰다. 지금은 일단 사건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레이디버그가 왔을지는 모르겠지만.


겨우내 숲을 벗어나 공원 쪽으로 나아오자마자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보였다. 그 옆에 다발로 잡혀서 구구거리고 있는 비둘기 떼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쿡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역시 마이 레이디야. 응용력이 뛰어나다니까.


레이디버그에 이어 블랙캣까지 나타나자, 미스터 피죤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너희는 왜 이렇게 매번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나를 방해하는 거야?”

“웃기시네, 니가 우리가 있는 곳만 골라서 나타나는 거겠지. 꼬치구이가 되고 싶어서!”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던 블랙캣이 들고 있던 봉을 미스터 피죤에게로 뻗었다. 순식간에 늘어난 봉이 미스터 피죤의 복부를 찌르려고 했지만 그는 유연하게 옆으로 허리를 돌려 위험을 피했다. 하늘에만 떠다니는 것은 불리하다 싶었는지 미스터 피죤은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비둘기들에게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자, 이걸로 다시 2:2가 되었군.”



히죽 웃던 미스터 피죤이 다시금 호루라기를 불었다. 미스터 피죤을 태우고 있던 비둘기들이 블랙캣에게로 마구 날아들기 시작했다. 칫, 혀를 차면서 다른 물건을 꺼내 비둘기들과 맞서 싸우는 블랙캣을 돌아보던 레이디버그는 바닥으로 내려온 미스터 피죤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한쪽 손이랑 발을 앞으로 내밀며 권법 자세를 취하는 미스터 피죤에게 레이디버그는 달려들어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합을 주고받으며 치열하게 싸우던 중, 레이디버그의 시야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 박물관 쪽에 보이는 인영에 레이디버그는 눈을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에스미가 이런 곳에 나왔을 리가 없는데.


갑자기 순간 멈칫거리는 레이디버그의 움직임을 미스터 피죤은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있나 싶어 힐끗 주위를 둘러보던 미스터 피죤은 뛰어난 시력으로 바로 제 뒤쪽에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발견했다.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미스터 피죤이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에스미가 있는 쪽으로 손짓하며 호루라기를 입에 무는 미스터 피죤을 보자마자 레이디버그는 놀라서 미스터 피죤을 뒤로 한 채 에스미가 있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마자 블랙캣과 대립하던 비둘기 떼들이 쏜살같이 에스미가 있는 쪽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놀란 에스미가 재빨리 뒤돌아 뛰기 시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에스미!!”



거의 울 법한 얼굴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토해내며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비둘기들이 거의 에스미를 덮치려는 순간 레이디버그는 가방에서 그물을 꺼내 비둘기 떼를 향해 던졌고, 비둘기들은 그물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빠르게 달려서 그런지 그 반동처럼 발을 헛디뎌 쓰러지는 에스미에게로 레이디버그가 헐레벌떡 달려갔다.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에스미를 레이디버그는 꼭 끌어안았다.


갇혀 있던 비둘기 떼들이 풀려나자 미스터 피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금 비둘기들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에 블랙캣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봉을 꺼내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행복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다시금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던 미스터 피죤이 갑자기 멈춰섰다.



“예? 돌아오라고요? 아니 어째서~ 이제 막 재밌어지려…. 헉. 알겠습니다.”

“뭐라는 거야?”



작게 중얼거리는 미스터 피죤에 블랙캣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작아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입모양을 자세히 보니 미스터 피죤이 쩔쩔매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큭, 내가 지금 사정이 있어 물러나지만! 다음번에는 꼭 너희의 미라큘러스를 뺏어주겠어!”



원통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미스터 피죤을 보며 블랙캣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또, 또. 악당의 전형적인 대사 좀 집어치우시지. 질리지도 않아?”

“시끄러!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대사라도 추천해 주던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어때?”



농담처럼 던진 말에도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그저 하늘 위로 날아올라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을 블랙캣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쟤 왜 저래?”







머리가 무거웠다.


물 속에 빠진 것처럼 묵직하고 이상한 느낌.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아 불쾌한 기분에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쳤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려고 하니 저 위에 빛이 보였다. 빛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나아가다가….


눈을 뜨니 하얀 배경에 무언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몇 번 눈을 깜빡여보자 그게 환하게 웃는 어떤 바보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에스미는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에스미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아 안도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리네뜨가 말을 꺼냈다.



“에스미, 다행이다. 정신이 들어?”

“여긴….”

“어, 박물관 의무실이야! 다행히도 기절한 것 뿐이라고 해서 일단 네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어.”

“…요즘 잠을 잘 못 잤더니.”



별 걸로 기절같은 걸 다 해보는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후다닥 옆에 있던 물컵을 건넸다. 그 물컵을 보며 온갖 표정을 다 구기던 에스미는 한숨을 내쉬더니 순순히 물컵을 받아들었다. 조용히 물을 마시고 있는 에스미를 향해 마리네뜨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그 한 마디에 에스미의 동작이 뚝 멎었다.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는 에스미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변했다.



“미안하다고?”

“응, 내가, 저기….”

“니가 뭐가 미안한데?”

“…에?”

“대체 니가 왜 나한테 미안해야 하냐고!”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에스미를 보며 마리네뜨는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에스미의 눈가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네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미안해하고, 화를 내면 무조건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무리한 부탁을 해도 제대로 거절하지도 못하고!”

“에, 에스미?”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정말 모르겠어? 나는 말이야. 서운하다고. 왜 아니라고 말을 못해?”



얼떨떨한 얼굴로 에스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에스미가 던진 다음 말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식겁했다.



“너 지금 나한테 뭐 숨기고 있잖아.”

“….”

“그 펠릭스인가 뭐시깽이인가 하는 녀석 때문에 약속을 펑크낸 게 아니라는 거 알아. 니가 그럴 성격이었으면 지금 이렇게 매번 손해보면서 살지도 않지.”



거하게 한숨을 내쉬며 제 눈가를 꾹꾹 누르는 에스미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놀라서.


에스미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을 해! 근데 넌 매번 변명도 안 하고 그냥 웃기만 하니까….”

“에스미.”

“나도 내가 어린애같은 거 아는데, 걱정되잖아. 누가 봐도 피곤해보이는 얼굴로 멀쩡하게 있는 다른 놈이나 걱정하고 앉아있으니 내 속이 터져, 안 터져? 나는 그 자식보다 니가 더 걱정된다고!!”



짜증스레 미간을 구기던 에스미가 휙 고개를 돌려 마리네뜨를 쳐다보았다. 그 기세에 흠칫할 찰나 에스미가 천천히 마리네뜨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뭐 일이 있나 싶은데 제대로 말하려고도 하지 않고. 물어보고 싶어도 그냥 모른 척 해달라는 듯한 얼굴이나 하고 있지를 않나.”

“내가 그랬어?”

“그래. 그러면서, 누가 봐도 피곤에 찌든 얼굴로 좋아하는 남자애 얼굴 봤다고 좋아라 헤실거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열받는다고, 이 멍청아! 말을 끝맺는 것과 동시에 에스미의 손이 짜증스레 마리네뜨의 볼을 쭈욱 잡아늘렸다. 마리네뜨가 바둥거렸다.



“에으미…. 아프어어….”

“너는 내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어?”



손을 탁 놓으며 에스미가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가 친구가 된 이후로 너는 정말 터놓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없잖아. 내가 네게 차갑게 굴어도 네가 화냈던 적이 있어? 늘 내 눈치를 보듯이 망설이고 고민하기만 했지.”



말문이 막혔는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불합리하게 굴면 너는 화를 낼 권리가 있어. 한쪽만 양보하는 관계가 어떻게 건강한 관계야?”



할 말이 없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생각대로 실천하기가 너무 어려울 뿐이지.



“너는 너랑 오래도록 알고 싶으니까, 조금씩이나마 좀 욕심을 부려줬으면 좋겠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다음에도 계속 이러면 진짜 더 혼날 줄 알아.”

“이, 이보다 더?”



지긋이 자신을 노려보는 에스미의 눈빛에 마리네뜨는 더는 말하지 않고 깨갱 꼬리를 내렸다.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 걸 아니까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 생각났다. 예전에 에스미랑 싸웠을 때.


그 때도 나는 이랬었던 것 같다. 에스미가 뭐에 화났는지도 모르고 그저 내가 잘못했나 싶어 무조건 사과부터 했었지.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에스미가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었다.


내가 더 미안해, 라고.



“……고마워.”



한참을 망설이다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는 마리네뜨를 그저 빤하게 쳐다보던 에스미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까, 펠릭스인가 뭔가 하는 걔 만났을 때 말이지.”

“응?”

“전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대화나 좀 나눴을 뿐이야.”

“응!”



해맑게 웃으며 전혀 의심같은 거 없고 무조건 널 믿는다는 표정을 짓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에스미는 저걸 진짜 어떻게 가르쳐서 세상에 내놓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해야만 했다. 무방비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저러다 누가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냥 체념하듯 받아들일 것 같아서 더 열받는다.


체념, 인가.

떠오르는 금발의 누군가에 에스미는 가만히 인상을 찌푸렸다.


그 녀석을 마주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사라진 마리네뜨 녀석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던 중, 식물원에서 그를 만났다.


‘내 이름은 에스메랄다 세자르. 마리네뜨의 친구야.’


무시하고 돌아서려는 녀석의 앞을 가로막고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은 냉전 상태라지만 어쨌든 친구는 친구니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동자는 예상했던 만큼 냉혹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감정이 풍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 녀석한테 나 좀 그만 쫓아다니라고 말해.’


방금 했던 생각 취소. 툭 내뱉는 한 마디가 저리 매정하다니. 짜증스레 눈살을 구겼지만 이런 제 표정에도 녀석은 동요 하나 없었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이 덤덤한 그 태도에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왜 마리네뜨가 너 같은 녀석한테 목을 매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홧김에 내뱉었더니 딱딱하던 눈매가 아주 일순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그에 조금 놀라려던 찰나 녀석이 천천히 입을 벙긋거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피식 조소하는 그 얼굴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 녀석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는 듯한, 그런 얼굴.



“…뭐, 생각보다 나쁜 녀석은 아닌 거 같으니까.”

“응?”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에스미는 한숨을 내쉬며 마리네뜨를 째려보았다. 이 바보는 어쩌다 저렇게 딱 보기에도 복잡해 보이는 녀석한테 꽂혀가지고 제 속을 뒤집는 걸까.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문제겠지만, 만약 정말 사귀게 되더라도 꽤나 마음고생 하게 생긴 타입이다. 본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더라도 이 녀석은 듣지 않겠지.


그 때의 대화를 들려주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말하더라도 어차피 마리네뜨는 그 녀석을 계속 쫓아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더 걱정할 법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다. 에스미가 아는 마리네뜨는 그런 타입이었다. 무언가를 쉽게 바라지 않지만 바라는 것에는 집념이 엄청나다. 어찌 되었든 중간에서 포기할 만큼 어중간한 성격이 아니다. 분명 마지막까지 가보려고 하겠지.


설령 그 끝이 어떻더라도.



“…대답은 대충 알았으니까.”

“응? 뭐라고 했어?”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마리네뜨에게 손을 뻗었다. 또 볼을 꼬집히나 싶어 긴장하던 마리네뜨는 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에 금세 긴장하던 얼굴이 풀리고 예쁘게 웃는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는 복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기절하기 직전에 유독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마지막에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와 얼굴. 어떻게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었을까. 믿을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걱정되지만 묻지 않기를 바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묻어주는 것 뿐이다.


“어쨌든 조심해 뭐든. 알았어?”

“네!”


충성! 그렇게 말하며 한 손을 올려 경례를 하는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공원의 반대쪽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들 공원 한가운데서 벌어진 소동에 정신이 팔려 있을 즈음, 조용히 박물관 안에서 빠져나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상체는 검은색에 하체는 하얀색, 흑백의 의상을 입고 광대처럼 양쪽 눈에 눈물점 화장을 한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목표물을 확보했습니다.”



남자의 오른손이 제 손에 들린 손바닥보다 약간 더 큰 나무상자를 꽉 움켜쥐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던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지금 돌아가죠.”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지붕 위에 있던 남자는 박물관 뒤쪽 숲으로 뛰어내려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펠릭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혹여 제 기억력에 문제가 있나 걱정되어 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보고 봐도 여기가 분명했다. 자신이 처음 그 커다란 동굴을 발견했던 장소는.


그런데 지금 그 동굴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때 잠시 꿈을 꿨나, 싶을 정도로 절벽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광경에 펠릭스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꿈을 꿨을 리는 없다. 잠깐 안에 발을 디딜 뻔도 했으니까. 게다가 그 동굴은 사람 몇 명이 지나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컸다. 그런데 그런 큰 동굴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쎄한 느낌이 들었다.


저 절벽 뒤에 뭔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무력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이 동굴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작정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위험했다. 그리고 펠릭스는 본능이 울리는 신호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드는군.”



낮게 중얼거리는 펠릭스의 머리 위로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


자캐가 많이 나와서 좀 민망하네요. 하지만 꼭 넣어야 하는 에피소드라고생각해서 넣어봤습니다 ㅇㅇ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마리네뜨와 에스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무조건 메인 애들만이 주인공처럼 나오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바꿔 말하면 펠릭스와 앨빈의 에피소드도 나올지도 모르죠. 근데 이 둘은 그렇게 싸우기에는 둘 다 상당히 어른스러워서 그런 일은 없을 거 같네요. 사실 이 에피소드의 축이 펠릭스-앨빈, 마리네뜨-에스미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


역시나 한결같은 펠릭스! 참 쓰면서도 사람에 서툰 녀석이다 싶어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집니다... 가엾어서 그런지 쓸수록 더 좋아지기도 하지만요.


원래 본편에서 마리네뜨-알리야, 아드리앙-니노 구도가 아닌 다른 친구 구도를 짜낸 이유는 아무래도 애들 성격이 다르고 배경도 다르다보니 그에 맞는 친구들이 필요하겠다 싶어 창조한 거랍니다. 에스미도 그렇지만 앨빈이 특히 그렇죠.


앨빈의 경우는 되게 활발하고 조금 막가파적인 성격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어느 샌가 제 취향의 훈남이 되어 있네요OTL 근데 제 남최애는 펠릭스가 맞습니다 얘가 후반부에 정말 개쩔게 멋있어지기 때문에ㅇㅁㅇb 아 이거 스포이려나(땀땀


펠릭스에게 이런 애를 붙인 이유는 자신을 억누르고 사는 펠릭스를 이해해줄 만한 이해자가 한명쯤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아드리앙과 달리 펠릭스는 친구같은 건 필요 없다는 느낌으로 지내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니노같이 마냥 소년스럽고 천진한 타입이었으면 펠릭스는 절대 깔끔하게 무시하고 지내기만 했을 겁니다. 앨빈은 펠릭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지만, 지켜야 할 선은 상당히 칼같이 지키는 타입에 속합니다. 아직 설정이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앨빈은 원래 스킨십이 많은 편인데, 펠릭스에게는 농담삼아서라도 터치를 전혀 하지 않죠. 펠릭스가 그걸 꺼린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진짜 많이 신경썼습니다 묘사에 ㅇㅇ


그래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습니다. 오히려 앨빈의 친구들은 얘가 왜 펠릭스처럼 음침한 녀석에게 저렇게까지 접근하는지 이해를 못 할 정도죠. 근데 앨빈도 은근 마이페이스라서(...) 주변이 뭐라든 신경 정말 안 씁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넉살좋게 펠릭스한테 붙어있는 거겠죠? ㅎㅎ


성장하기 위해서 관계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면 그만큼 사람도 많이 변하니까요. 단순히 애정 관계뿐이 아니라 친구관계도 많은 영향을 끼치죠. 제가 이 글에서 지향하는 지향점이 마리네뜨와 펠릭스의 성장이고, 제가 해석한 두 사람의 성격은 사실 그렇게 적극적이거나 직설적인 타입들이 아닙니다. 이런 타입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직설적으로 직언을 꽂는 사람들이 좀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기에, 캐릭터들을 이렇게 짰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회당 후기를 적고 싶었지만 그럼 페이지가 너무 길어지겠죠. 5화는 아무래도 좀 편하고 즐겁게 쓴 화이다 보니 이것저것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선보다도 일단 주변의 관계를 돌아보는 화이다 보니까요. 초반에 에스미가 왜 저러나 싶으셨던 분들도 계실텐데 제대로 이해가 되었기를 바라겠습니다 ㅇㅇ!


아, 초반에 사과가 떨어지는 장면은 예전에 봤던 컨셉아트에서 채용한 겁니다. 요즘 자신을 직감적으로 잘 찾아내는 마리네뜨에 대항해 고대의 재앙 능력을 써서 마리네뜨에게 빈틈을 만들어 따돌리는 펠릭스! 하하 이 컨셉아트 정말 좋아해요^ㅁ^


후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하며, 내일 마지막 6화와 수량조사가 올라옵니다 ㅎㅎ 아마 선입금을 받는다면 25일에 폼이 올라올거예요 ㅇㅇ


감상은 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ㅅㅎ!

Posted by I.R.E
,

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3





Episode 4.

비눗방울과 환상





“야, 저리 안 가?!”



휘휘 손을 흔들어 모여드는 비둘기들을 쫓아내는 블랙캣의 얼굴에 질렸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쫓아도 쫓아도 계속 달려드는 모양새가 아주 저 악당 녀석이랑 판박이라고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공중을 날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블랙캣에 비둘기들이 몰려 있는 틈을 타 레이디버그가 던진 요요를 가볍게 피하면서 히죽 웃고 있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은 참으로 얄밉기 짝이 없었다. 두 히어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홀홀홀홀~~”



듣기에 매우 거슬리는 이상한 웃음소리도 한 몫 했지만. 



“아, 저거 진짜 열받네!”

“거기 서!”



봉과 요요를 던졌지만 삽시간에 방패처럼 모여든 비둘기 떼에 튕겨져 나왔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려는지 뒤로 슬슬 물러나는 미스터 피죤을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던 블랙캣이 다시금 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이건 어떠냐!”



블랙캣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가방에서 꺼낸 것은 몇 사람은 간단히 가둘법한 커다란 철창이었다. 작은 가방에서 천천히 나오기 시작하는 거대한 철창에 레이디버그는 물론 미스터 피죤도 경악한 표정으로 블랙캣을 쳐다보았다. 힘들이지 않고 철창을 두 손으로 든 블랙캣이 미스터 피죤에게로 철창을 던졌다. 야구공을 던진 것마냥 빠르고 묵직하게 날아오는 철창에 기겁하며 우왕좌왕하던 미스터 피죤은 아주 간발의 차이로 방향을 바꿔 철창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다.



“야, 거기 서!”



더 이상 지체했다간 더 엄청난 게 나올 거라 생각했는지 재빨리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을 분한 듯이 쳐다보던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찰칵찰칵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수첩과 카메라, 방송국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레이디버그! 블랙캣! 렉스프레스 잡지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좀 해주세요!”

“라우토 저널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여지없이 악당과 싸워 물리치고 계시는데요, 소감 한 마디 좀 해주세요!”

“BBC에서 단독 인터뷰를 신청하고 싶은데요!”

“워싱턴포스트입니다. 파리를 위협하는 악당에 대한 논설지를 예정 중입니다만, 코멘트 한 마디만 해주세요!”



우르르 달려오는 사람들의 무리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난처하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곧 서로 짰다는 듯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아, 죄송해요! 지금 바빠서 이만!”

“다음에 보자구!”



살짝 손을 들고 거절의사를 표하며 잽싸게 사라지는 두 히어로를 잡을 수 있는 능력자는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하늘로 뛰어올라 모습을 감춘 히어로들을 망연히 바라보던 기자들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분통을 터트렸다.



“오늘도 또 놓쳤어!”

“하여간 진짜 끈질기다니까. 몇 번을 인터뷰 요청해도 죄다 퇴짜를 놓는 걸 보면.”

“아하하, 그렇게 따지면 우리야말로 제일 끈질긴 거 아닌가? 솔직히 이래놓고 다들 히어로들 관련 기사를 쓸 거면서.”

“눈치챘나?”



큭큭 웃던 한 여성 기자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물었다. 담배 끝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더니 한 모금 빨았다. 아지랑이처럼 공중으로 흐늘흐늘 날아오르는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며 기자는 살짝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 보니 유투브에 영상이 엄청 떠돌아다니던데? 화질은 별로 좋지 않지만.”

“아, 그건 나도 봤어. 다들 믿기지 않는지 댓글란에 합성 아니냐는 의혹이 한가득이던데?”

“하하, 직접 볼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다들 직접 보면 그런 소리 쏙 들어갈 텐데. 기자생활 하면서 이런저런 일들 많이 봤지만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라 조금 설렐 정도라고.”



어릴 적 사라졌던 동심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사람 좋게 웃기 시작하는 남자에 동조하듯 다들 웃기 시작했다. 서로 경쟁하는 관계기는 하지만,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들을 직접 쫓아다니는 동질감 때문인지 기자들은 이제 겨우 몇 번 마주친 사이임에도 마치 몇 년을 같이 일한 동료같다는 느낌을 서로에게서 받고 있었다.



“맞아, 그래서 더 쫓아다니는 건지도 모르지. 지금 저만한 특종감이 없기도 하고.”

“하긴, 악당을 인터뷰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맞장구를 치며 낄낄 웃는 기자들의 머리 위로 하이얀 햇빛이 반짝거렸다.

좋은 날씨였다.




///



“피곤하다….”



책가방을 메고 등굣길을 걸어 올라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중얼거리던 마리네뜨가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캬악! 그 인간은 왜 시간이 없을 때만 나타나는 거야!”



크게 소리를 질러대는 마리네뜨를 주변에서 이상하다는 듯이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에 민망해졌는지 살짝 볼을 붉히고 뺨을 긁적대던 마리네뜨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제는 일찍 끝나서 다행이다. 블랙캣이 열받은 얼굴로 철창을 집어던질 때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믿지 말라는 건 아니야.’



블랙캣을 떠올릴 때마다 벌써 2주도 더 전에 티키가 했던 이야기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솔직히 아직 어떻게 판단할 단계는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까 더 조심해주길 바라는 거야. 마리네뜨, 난 네가 상처받을까봐 걱정이 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티키를 보며 알았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조금 반신반의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만날 때마다 별로 문제는 없었으니까. 평범하게 파트너로서 같이 싸우고, 끝나면 바로 헤어지고.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티키의 말대로라면 그것도 다 계획된 행동이라는 걸까?


아, 모르겠다. 붕붕 고개를 돌리며 생각을 쫓아내려 애썼다. 가뜩이나 지금 히어로 일만도 골치가 아픈데.


결국 히어로를 하겠다고 결심하기는 했지만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스터 피죤은 생각보다 더 자주 나타났고 그만큼이나 끈질겼다. 한 번 상대하면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나타나 도발하듯 싸움을 거는 그를 보고 있자면 어떤 때는 그냥 자신에게 향하는 관심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홀홀홀 웃고 있는 미스터 피죤의 얼굴을 떠올리자 짜증으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니, 이 인간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왜 이렇게 자주 나타나냐고!

하긴,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라 말이지.


두 번째로 나타났던 미스터 피죤을 상대할 때 경찰에서 들어왔던 지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놀라웠다. 문제는 경찰차 수십 대에 무장까지 하고 나타났지만 비둘기 떼들 때문에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이지만. 오히려 부상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결국 자신들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엔간해서는 뒤로 피해 있으라고 당부를 해야 했다.


본인들이 무력하다는 것에 상당히 기분이 상했는지 경찰들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알겠다고 약속해줘서 다행이었다.



“호크모스라….”



자신과 같은 미라큘러스를 가진 사람. 자신이 가진 상징이 무당벌레라면 그쪽은 나방이라고 했다. 실제로 사진을 찾아보니 상당히 큰 크기의 나방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티키의 말로는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줘서 그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자라고 했다.


같이 미라큘러스에 선택받았는데, 그런 사람이 왜 파리에 혼란을 일으키는 걸까.


어째서?


터벅터벅 교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자신을 앞서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발견한 마리네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저렇게 곧게 뻗은 자세로 걸어가는 사람은 마리네뜨가 아는 한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럭키! 오늘은 그래도 재수가 좋네. 같이 등교하다니.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마리네뜨가 크게 소리쳤다.



“펠릭스!”



반응이 없었다. 뭐 이 정도는 늘상 그랬기 때문에 별 감각이 없었는지라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소리내어 그를 불렀다.



“펠릭스으으으!”



일부러 길게 소리를 뽑아내며 불렀음에도 전혀 돌아보는 기색도 없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에스미, 에스미.”

“왜 불러.”



잡지를 읽고 있는 에스미의 얼굴은 상당히 시큰둥했다. 그래도 듣지 않고 있는 건 아닌지 즉각 대답을 던져주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정말 완전 이상해! 하는 듯이 과장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펠릭스가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아?”

“직접 보지도 않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그냥 평소랑 똑같은데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



또 시작이냐는 듯이 무심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기는 에스미를 쳐다보며 마리네뜨가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아침에 펠릭스를 만나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이름을 불렀는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라구.”

“드디어 널 아예 무시하기로 결심했나 보네.”

“아냐, 그렇다고 보기엔 평소랑은 조금 느낌이 다른 거 같아서.”

“…하여간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지.”



묘하게 차가운 에스미의 목소리에는 다소 불만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물론 여전히 펠릭스에게 정신이 쏠려 있던 마리네뜨는 그런 에스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일일까? 조금 걱정돼.”

“어련히 잘하시겠지. 최소 너보다는 똑부러졌잖아.”

“헉, 내가 그렇게 물렁한 이미지야?”

“그간 너의 행동을 돌이켜보지 않을래?”



딱 잘라 말하는 에스미에게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헤실헤실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돌아보더니 에스미는 한숨을 쉬며 보고 있던 잡지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

“응?”

“너, 너무 펠릭스한테 정신 쏟는 거 아니야?”

“어….”

“첫사랑이라 네가 더 허둥댄다 싶기도 했어. 근데 너무 매달리는 거 아니야? 사랑이 밥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특히, 요즘 너 학교에서가 아니면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며칠 전에 약속한 것도 갑자기 펑크냈었잖아.”

“엇, 아 그게….”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데록데록 굴러갔다. 요즘 펠릭스를 쫓아다니느라 에스미와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었기에 마리네뜨는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 약속은 그런 게 아니라 미스터 피죤 때문이었는데….


약속을 나가기 직전, 마침 미스터 피죤이 나타났다는 걸 티키가 감지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약속을 취소하고 히어로로 변신해야 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기에 마리네뜨는 하하 웃으며 애써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그러고보니! 요즘 범죄가 좀 늘어난 거 같지 않아?”

“악당이라면 레이디버그랑 블랙캣이 알아서 해주겠지. 몇 주 전에 유투브에 동영상까지 떴잖아?”



무심히 중얼거리는 에스미의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우려했던 대로 동영상을 찍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에펠탑 사건 당시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미스터 피죤을 상대하던 동영상이 며칠 뒤 유투브에 올라왔다. 업로드가 되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몰고온 이 동영상은 조회수가 3일만에 몇백만을 찍었으며, 온갖 나라의 언어들이 댓글란에 가득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이게 말이 되냐고, 진짜가 아니라 합성인 거 아니냐고 묻는 댓글들도 간간히 보였다.


합성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에스미가 이런 분야에 별로 흥미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사실 에스미가 눈치를 채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악당도 악당인데, 여러 가지로 범죄 기사가 많이 뜨는 거 같아. 아침에 뉴스를 보면 누가 죽었다느니, 성폭행 사건이 터졌다느니 별 개 다 나오는걸.”

“세상이 그만큼 흉흉해졌다는 증거겠지. 이젠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악당까지 나오고, 드디어 이 거지같은 세상이 망하는 건가.”



냉랭한 말투에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에스미를 불렀다.



“에스미…? 화났어?”

“별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그 속에 타오르는 검은 기운을 읽어낸 마리네뜨는 금방 꼬리를 말았다.



“미,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내가 뭐에 화났는지는 아는 거야?”

“그건….”



더듬이를 추욱 늘어뜨린 채로 답을 찾지 모해 쩔쩔매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대로 생각해봐. 내가 왜 이러는지 말이야.”




///



청회색 눈동자가 하얀 구름을 쫓고 있었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펠릭스의 모습을 몇 명의 여자아이들이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곧게 펴진 등이나 반듯한 자세는 역시 펠릭스다 싶을 정도로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남녀를 불구하고 이런저런 말이 돌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펠릭스는 몇몇 여자애들에게는 꽤 인기가 있었다. 말수가 적기는 했지만 딱히 지위를 내세워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고, 걸려오는 시비는 다 유연하게 쳐냈다. 그 쿨한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다가올 용기가 없어서 조용히 펠릭스를 지켜보기만 하는 여자애들도 많았다. 늘 전교 1등을 꿰차며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수재였지만 성적이 좋다고 상대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누구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무시했다.



“하아.”



요즘 들어 자꾸 멍하게 있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붉은 잔상에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그런 여자를 떠올리고 있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써 딴 데로 생각을 돌리려고 책을 펴들었지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은 소년을 다시금 잡아먹고 세력을 키웠다. 붉은 가면을 쓰고 밝게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는 듯한 미소에 주변에서 조용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조차 펠릭스에게는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이 가는 여자이긴 했지.


강도를 잡던 그 순간의 모습이 뇌리에 사진으로 찍힌 것처럼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벌써 한 달은 지나버린 순간이 이토록 마음 한 구석을 잡고 놓아주지 이유는 무엇일까.


살짝 빨개진 것 같았던 얼굴도, 평소라면 바보같다 생각될 정도로 더듬거리는 말투도, 자신을 관찰하듯 훑어보는 시선도 전혀 싫지 않았다. 블랙캣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요령이 없는 타입인지 사람과 대화할 때 쩔쩔매는 모습조차도 거슬리기보단 오히려 귀엽다고 느껴졌었다.


당당한 미소로 자신을 응시하는 푸른 시선이 좋았다. 에펠탑 사건 당시 레이디버그가 왜 따라오냐고 질문했을 때, 내버려둘 수 없어서라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진심이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이 든 적이 있었던가?


고맙다는 한 마디가 정말로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아온 자신으로서는 참으로 이례적이게도.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당초의 목적대로 어떻게든 신뢰만 얻어내면 될 것을. 이용하고 끝내면 될 일이 아니었던가?


살짝 오른손을 들었다.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고양이 모양의 반지를 가만히 살펴보는 펠릭스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반지는 생각보다 무척 성가셨다. 어느 정도 컨트롤은 물론 가능했지만, 너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면 지 멋대로 발동할 때가 있어서 늘 마음에 평정심을 가져야 했다. 다행히도 어릴 때부터 감정 컨트롤은 익숙했는지라 느긋하게 넘기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매번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제일 골치아픈 건 시끄러운 녀석이 따라왔다는 것이다. 외관은 고양이를 닮았지만 고양이는 차라리 혼자 조용히 놀기라도 하지. 시끄럽기만 하면 좋은데 장난치는 것까지 좋아하니 더 정신이 없었다. 그것도 익숙해지니 이제는 그저 체념하는 수준에 다다랐지만, 가끔씩 조용하던 일상이 그립고는 했다.


그래서 접근한 것일 뿐이었는데.


얼굴을 떠올리고 있으면 진정이 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고 싶었다. 언제나 웃었으면 좋겠고 세상의 더러움같은 건 전혀 몰랐으면 했다. 하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니 분명 여러 문제들이 터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혹여 상처받을까 걱정되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심장소리가 템포를 올리듯 조금씩 빨라진다. 밝게 웃으면서도 가끔 짓는 처연한 표정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자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의지와 상관없이 뻗어지는 손에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괜찮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더 가라앉기만 한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난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좋아해!’


해맑게 외치며 자신을 따라붙던 검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감정적으로 덤벼드는 인간은 피곤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취향이 아닌 상대이기도 했다.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지?


‘사랑이란 계산되는 감정이 아니야.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누군가의 옆에 있고 싶다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 사랑은 아닐지라도 사랑에 무척 가까운 감정일 거야.’


오래 전에 잊혀졌다 생각했던 그리운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만 같은 감각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펠릭스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내가 그 여자를?




///



“하아아…….”



학교가 끝나고 여느 때와 같이 시내를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지친 것처럼 상당히 수척했다. 기나긴 한숨소리에 티키가 살짝 자켓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마리네뜨?”

“아무것도 아냐. 그냥 왠지 좀 피곤해서.”



요 며칠 새 운동을 많이 해서인가? 운동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격하다 싶기는 했지만. 비둘기를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자마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제 나타났었으니 오늘은 제발 나타나지 말아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다가 마리네뜨는 순간 스쳐가는 불길함에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 큼직한 돌멩이가 마리네뜨의 발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갔으면 꼼짝없이 밟고 넘어졌겠지.


마리네뜨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감이 좋아지니 편하네.”

“그렇지?”

“응. 이러다가 이 힘에 너무 의존하게 될까봐 겁날 정도로.”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올려다보며 티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건 마리네뜨 네 안에 있는 가능성이야.”

“내 안의 가능성?”

“응. 미라큘러스는 그 사람 내면의 힘을 끌어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그게 좋은 면인지, 나쁜 면인지는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을 끌어내주지.”

“하지만 난 원래 운이 없는걸.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아마 파리 시내에서 나만큼 재수가 없는 애도 없을 거야.”



피곤해서일까. 기운이 없어 보이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신감을 가져, 마리네뜨. 미라큘러스는 네게 잠재되어 있는 힘을 끌어내주지만, 결국 그 힘의 본질은 너한테 속해 있어.”



티키가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만약 사과를 먹고 싶은데 칼이 없잖아? 미라큘러스는 말이지, 그 사과를 갈아서 주스로 만들어주는 것과 똑같아. 도구와 같다고 보면 돼. 먹기 편해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래 재료인 사과까지 미라큘러스가 만든 건 아니잖아. 사과를 가지고 있는 건 너니까.”

“….”

“설령 미라큘러스가 네게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 힘이 네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는걸. 열심히 다듬다 보면 미라큘러스라는 도구가 없더라도 사용이 가능해지는 날이 올 거야.”

“…그런 걸까나?”

“그럼!”



당연하다는 듯이 싱긋 웃는 티키의 미소를 보며 조금은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마리네뜨는 살며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하긴 있을 때 누려야겠지? 물론 의존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마리네뜨가 편한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해. 모든 건 너의 선택이니까.”

“그래.”



즐거운 듯이 푸흐흐 웃음을 터트리던 마리네뜨의 어깨를 무언가가 세게 치고 지나갔다.



“아얏!”



마리네뜨에게 부딪혔던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힐끗 눈을 돌리더니 사과도 없이 빠르게 마리네뜨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화를 내려다가 다시 뒤에서 다가오는 인파에 마리네뜨는 재빨리 인도 안쪽으로 물러나는 것에 성공했다.


아주 재수가 없지 않은 건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중 느껴지는 기시감에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나저나 요즘 이상하게 거리에 사람들이 늘어난 거 같은데. 내 착각인가?”



사람이야 늘 많았지만 평소보다 더 붐비는 듯한 느낌이 든다. 착각인가 싶다가도, 사람에 부딪힐까 걱정되서 이렇게 안쪽으로 붙어야만 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대충 주위를 둘러봐도 외국인이 좀 많았다. 요 며칠 사이 계속 이랬던 거 같은데, 어째서?


이유가 뭘까. 가볍게 고민하던 찰나 꺄르르 웃는 목소리가 귓가에 푹 꽂혔다.



“정말 여기에 오면 히어로를 만날 수 있는 거예요?”



히어로?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뚝 정지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자, 어른들 사이에서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들 여럿이 눈에 띄었다. 보아하니 관광객들인 모양이다. 파리에 관광객이 오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그건 뭐 그러려니 했지만, 방금 전 발언은 뭔가 싶어 마리네뜨는 재빨리 발을 놀려 그들의 말소리가 들릴 법한 거리까지 접근했다.


가이드를 둘러싸고 꺄아꺄아 떠드는 아이들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정말로 히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옆에 있던 다른 남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저 알아요! 인터넷에서 봤어요. 이상하게 생긴 아저씨랑 붉은 옷 입은 누나가 싸우는 거!”

“검은 고양이 잠옷을 입은 형도요!”



풉.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가 마리네뜨는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너무 웃겼다. 고양이 잠옷이라니! 블랙캣이 들었다면 무척 어이없어했을 게 분명했다. 울상을 지으며 너무한다 소리칠 블랙캣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같이 활동할 때마다 느끼지만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는 녀석이었다. 발상도 참 거침없었고. 아니, 물론 가방에서 뭐든 꺼낼 수 있다지만 설마 거대한 철창을 꺼내서 던진다는 미친 발상을 하는 또라이가 있다니. 심지어 모양도 새장이었어.


새장에 갇혀 있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상상하자 또 다시 웃음보가 터졌다. 너무 웃겨서 한참을 조용히 킥킥거리다가 낭랑한 어조로 질문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마리네뜨의 귀를 간질였다.



“그래서 히어로는 어디 있어요?”

“악당이 나타나지 않으면 볼 수 없단다~”

“에에-!! 히어로 보고 싶어요, 히어로!”



땡깡을 부리는 아이들을 애써 달래는 가이드를 가만히 지켜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웃었다. 저 아이들은 모르겠지.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히어로가 바로 몇 걸음 옆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어서 집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천천히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즐겁게 떠들고 있는 아이들을 스쳐 지나가던 푸드득, 요란하게 들리는 날개짓 소리에 마리네뜨는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와아….”



많은 수의 비눗방울들이 공중으로 와르르 날아오르고 있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비눗방울들에 태양빛이 닿아 잘게 부서지며 예쁜 색색깔의 빛으로 반짝거렸다. 이 많은 비눗방울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생각지도 못한 장관에 입을 헤 벌리고 망연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건 비단 마리네뜨 혼자만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서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비눗방울들을 경탄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히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비눗방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때였다.



“안녕~?”



위쪽에서 들려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위를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누군가가 떠 있었다.


푸른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딱 보기에도 체구가 무척 작은 게 눈에 띄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변성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차림새가 굉장히 특이했다. 팔다리에 쫙 달라붙은 짙은 하늘색의 쫄쫄이와는 달리, 상체와 하체를 동그랗고 커다란 에어슈트가 각각 감싸고 있었다. 동그랗고 반투명한 게 마치 비눗방울을 연상시키는 옅은 하늘색의 슈트였다. 등에는 커다란 통을 가방처럼 메고 있었다. 머리에는 팔다리의 색깔과 같은 하늘색의 베레모를 쓰고 있었는데, 옅은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특징할 점이라면, 그가 들고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비눗방울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올려다보던 마리네뜨는 티키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저 사람, 히어로야?”



미라큘러스의 힘으로 변신한 상대냐고 묻자 티키는 살짝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저 녀석도 만들어진 악당이라는 건가.


하지만 왜 갑자기 여기에?



“내 이름은 버블맨! 갑자기 나타나서 놀래킨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이지.”



입가에 사르르 미소를 걸고 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에 다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입을 벙긋하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버블맨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자주 나타난다는 히어로라고 부르는 녀석들 있잖아? 아, 레이디버그랑 블랙캣이랬나.”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리던 버블맨이 싱글싱글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위로 들었다.



“난 지금 무척 걔네를 만나고 싶거든. 하지만 그냥 기다리면 나오지 않을 게 뻔하잖아.”

“….”

“그러니 소동을 좀 피워야겠지?”



좌중이 침묵하는 사이에서 버블맨은 입가에 씨익 미소를 그렸다. 커다란 비눗방울채가 예고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누군가 크게 소리질렀다.



“도망쳐!!”



침묵이 깨졌다.


비눗방울채에서 나오는 무수히 많은 비눗방울들이 공중에서부터 아래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빠르게 만들어져서 달려드는 비눗방울들을 피해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개중에 도망치지 못한 몇 명은 비눗방울 사이에 갇혀서 하늘 위로 둥실 떠올랐다. 비눗방울 속에 갇히면 소리까지 모두 방음되는지 안쪽에서 뭐라 소리를 지르는데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갇힌 사람들의 가족과 친구, 연인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지노!”

“세레나!!”

“으아아아악!!”



비명소리와 절규가 시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 소동이 재밌는지 낄낄거리며 웃고 있던 버블맨의 머리로 붉은 무언가가 번쩍하며 날아왔다. 여유롭게 채를 들어 막아내는 버블맨의 바로 앞으로 붉은 인영이 날렵하게 착지했다.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를 발견한 버블맨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가 레이디버그구나?”

“너, 뭐야.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목적이 뭔데?”



비눗방울들을 피해 모두들 도망친 덕분에 시내에는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레이디버그는 손에 들고 있는 요요를 빙빙 흔들었다. 언제든지 던질 수 있게 준비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에게 버블맨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긴 왜야~ 너희의 미라큘러스를 가지러 왔지!”

“엥?”



생뚱맞은 대답에 맹렬히 흔들고 있던 요요를 바닥에 떨어뜨린 레이디버그와 달리 버블맨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걸 얻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며? 마음에 들어. 그러니 나한테 넘기라구!”



그 말과 함께 버블맨은 채를 마구 휘두르며 방울들을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요요를 휘둘러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비눗방울들을 모두 쳐내면서도, 레이디버그는 계속해서 방법을 궁리했지만 마땅히 파고들만한 틈이 없었다. 많은 방울들이 계속해서 몰려드는 통에 일단 상대가 어디 있는지부터가 파악이 어려웠고 순간의 틈을 찾기엔 방울들의 기세가 너무 매서웠다. 게다가 당장 요요를 다른 물건으로 바꿨다간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머리를 굴렸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언제 지칠 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던 찰나 갑자기 거짓말처럼 방울샤워가 멈췄다. 방울들이 사라진 너머로 보이는 것은 으악! 비명과 함께 이마를 손으로 감싸는 버블맨과, 휙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작은 부메랑이었다.


쏜살같이 날아온 부메랑을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언제 왔는지 제 옆에서 부메랑을 들고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이제야 와?”

“미안, 사람들을 좀 구하느라고.”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했는데?”

“커다란 잠자리채같은 거 하나 꺼내서 죄다 수거했어. 뭐, 일단 아래로 끌어내리기만 하면 터트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블랙캣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에 넘치는 표정을 보니 제대로 마무리짓고 온 것 같다. 블랙캣과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칭찬을 던졌다.



“그래, 잘됐네.”

“이제 늦게 온 거 용서해주는 거야?”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

“그래, 그럼 이제 어디 좀 제대로 해볼까?”



아직도 아픈지 공중에서 이마를 붙들고 버둥거리는 버블맨을 올려다보며,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각각 손에 들린 부메랑과 요요를 버블맨에게로 집어던졌다. 휘익- 소리를 내며 날아가던 물건들이 버블맨에게 닿을 찰나, 다른 쪽에서 날아온 무언가에 튕겨져 나갔다.


챙,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요요와 부메랑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히어로들이 재빨리 그것들이 떨어진 장소로 뛰어갔다. 요요와 부메랑 옆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막대가 떨어져 있었다. 재빨리 물건을 집어들고 두 히어로는 막대가 날아왔던 곳을 쳐다보았다.


지붕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버블맨이 작게 투덜거렸다.



“뭐야, 왜 이제야 와. 러스트?”



지붕 위에 있던 하얀 형체가 버블맨이 있는 쪽으로 휙 몸을 날렸다. 몇 번 공중에서 제비를 돌더니 버블맨이 만들어낸 비눗방울 위에 안착한, 러스트라고 불리는 악당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백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금발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얼굴에 역시 하얀 나비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은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를 연상케 했다.


비눗방울 위에 올라서 있던 러스트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저쪽은 말이 굉장히 많은데, 반면 이쪽은 묵묵부답이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관찰하듯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긴장태세를 갖췄다.



“그쪽도 악당인가? 저쪽이랑 느낌이 되게 다르긴 한데.”



가볍게 질문하는 블랙캣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러스트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손을 댔다. 뭐하는 짓인가 의아해하던 두 사람 앞으로 하얀 인영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윽!”



날아오는 금빛 막대를 재빨리 쳐낸 레이디버그가 반격하려는 순간 블랙캣이 재빨리 몸을 날려 레이디버그를 밀어냈다. 넘어지기 직전 레이디버그가 직감적으로 날린 요요에 손을 맞은 러스트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탁탁 손을 털고 있는 러스트를 한 번, 러스트의 주변에 있는 길들을 한 번 살펴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매끄럽게 빛나는 러스트의 주변을 보며 블랙캣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런 거였군.”

“에?!”

“저 악당, 이름이 러스트(lustre)잖아. 러스트의 뜻이 뭔지 잊어버렸어, 레이디?”

“에, 러스트라면. 윤기라던가, 광택이라던가.”

“정답. 그럼 저 녀석의 능력은 뭘까?”

“…주변을 매끄럽게 하는 거?”

“마찰을 없앤다고 하는 게 더 맞겠지. 그리고 자기가 만든 구역에서는 돌아다니는 것도 자유로운 것 같아.”

“에에, 좀 성가시겠네.”

“성가시지. 저 버블맨인가 뭔가하는 놈보다 더 성가셔.”



칫, 혀를 차며 블랙캣은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다.



“일단 저 손에 닿지 마. 아무래도 손으로 만져서 마찰력을 없애는 거 같아. 근거리전은 불리…!!”



날아드는 금빛 막대들을 부메랑으로 쳐내면서 블랙캣은 재빨리 가방을 열어 봉을 꺼냈다. 막대들을 살짝씩 몸을 돌려 피해가며 블랙캣은 봉을 길게 늘렸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봉이 러스트의 배를 정확히 찌르려는 찰나 몸을 피하는 러스트에게로 요요가 날아왔다.



“잡았다!”



요요에 꽁꽁 묶인 러스트를 보며 쾌재를 부를 찰나, 순식간에 묶여 있던 줄에서 빠져나오는 러스트를 보면서 레이디버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옆에 서 있던 블랙캣이 작게 소곤거렸다.



“안 돼. 마찰력을 없앨 수 있다면, 그런 걸로 묶어봤자 계속 빠져나오기만 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묶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쓰면 되겠지.”

“응?”

“이렇게 하자.”



블랙캣이 가만히 목소리를 낮춰 몇 마디 속삭이자 레이디버그가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뭔가 상당히 무식한 방법이네….”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근데 너, 은근히 머리 쓰는 것 같으면서도 막가파식으로 움직인다?”

“필요하다면 딱히 수단을 가리지 않을 뿐이야.”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블랙캣과 하하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를 내려다보며 버블맨은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거렸다.



“우와, 러스트가 오니까 정말 재밌어지네.”

“야! 비겁하게 공중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



분노에 찬 레이디버그의 목소리에도 버블맨은 ‘내가 왜?’ 라고 말하면서 러스트에게 손짓했다.



“러스트, 그거 좀 해줘.”



그거? 의아해하는 두 사람과 달리 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곧 일대가 순식간에 반짝반짝 매끄럽게 변하는 것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긴장한 얼굴로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지켜볼 수는 없었다. 버블맨이 갑자기 다시 비눗방울채를 휘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닥으로 쏟아지는 비눗방울들은 방금 전과는 달랐다. 사람들을 공격했던 비눗방울들은 바닥에 닿은 적이 없었고, 지면 가까이서 사람을 낚아채고 다시 하늘로 둥실 날아올랐다면 지금의 비눗방울들은 바닥에 내려앉더니 맹렬한 기세로 굴러오기 시작했다. 마치 공처럼.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달리기 시작하는 두 히어로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아아아아!”

“망할 자식, 저런 게 가능했어?!”



빠르게 쫓아오는 비눗방울도 문제였지만 바닥이 너무 미끌거려서 달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뒤를 돌아보며 짜증을 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소리쳤다.



“야, 어떡해 블랙캣!”

“일단 작전대로 간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골목으로 흩어졌다. 갑자기 쥐죽은 듯이 잠잠해진 주변에 버블맨과 러스트는 가만히, 그렇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골목에서 빠르게 튀어나오는 요요를 보자마자 러스트는 금빛 막대를 던졌다. 요요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골목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레이디버그가 러스트에게로 덤벼들었다. 주먹 휘두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맹렬히 싸우기 시작하는 두 사람 사이로 불꽃이 튀었다.


유유자적한 태도로 밑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흥미롭다는 얼굴로 구경하는 버블맨은 덤으로.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전력을 다해 덤비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러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는건 러스트 쪽이었지만 러스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상태면 분명히 금방 체력이 바닥나고 말 것이다. 실제로 레이디버그의 행동이 조금씩, 그렇지만 분명하게 둔해지고 있었으니까.


결국 영웅이라는 이름에 취한 무모한 애송이던가. 그렇게 생각한 러스트의 망막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비쳤다. 본인이 본인 몸 상태를 더 잘 알 텐데, 전혀 불리하지 않다는 듯이 씨익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에 러스트는 싸한 예감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예감과 함께 강한 발차기가 러스트의 복부를 관통했다.


한편, 버블맨은 다시금 비눗방울을 날려서 러스트를 지원할지, 재미있는데 그냥 계속 지켜볼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 중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후자가 제일 좋았지만 계속 놀기만 하는 건 좀 미안한데. 레이디버그의 발차기에 러스트가 뒤로 확 밀리는 것을 본 버블맨이 역시 거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채를 움직이려던 순간,



“Yo.”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버블맨의 머리 바로 위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투명한 무언가가 버블맨을 덮치며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는 러스트가 있었다.


쾅!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버블맨은 곧 제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러스트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버블맨은 자신들이 커다랗고 네모난 유리상자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블랙캣이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 어떠셔. 블랙캣 특제 초대형 유리감옥에 갇힌 소감이?”



마음에 들어? 피식 웃고 있는 블랙캣의 곁으로 레이디버그가 다가왔다. 상당히 힘들었는지 레이디버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짜증스레 소리쳤다.



“너 대체 왜 이렇게 늦게 나온 거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미안. 타이밍 잡기가 그렇게 힘들지 뭐야.”



블랙캣이 두 손을 모으며 사과했지만, 이번은 정말 힘들었는지 레이디버그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레이디버그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블랙캣은 놀란 얼굴을 한 버블맨을 향해 친절하게 설명을 개시했다.



“유인 작전에 걸려줘서 고마워.”

‘유인 작전이라고?’

“아무래도 너희를 잡으려면 새장같은 걸로는 어림도 없겠더라고. 조금이라도 공간이 비어 있으면 그 틈으로 빠져나갈 거 같아서 말이지. 저 러스트인가 뭔가 하는 악당의 능력대로라면 말이야.”



버블맨과 달리 묵묵히 듣고 있는 러스트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물론 그러든 말든 블랙캣은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간단히 머리를 좀 굴려봤을 뿐이야. 틈으로 빠져나간다면 틈을 아예 안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어?”



역시 자신은 천재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블랙캣을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유리를 부수려는지 들고 있던 비눗방울채를 유리에 쾅쾅 두들기기 시작하는 버블맨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으쓱거렸다.

포기해.



“이 유리상자가 우리 매직박스에서 나온 녀석이거든. 우리가 부수지 않는 한 절대 부술 수 없는 재질로 되어 있으니 허튼 저항은 그만둬.”



몇 번을 꽝꽝댔지만 흠집조차 나지 않는 유리에 버블맨은 질렸다는 얼굴로 밖에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은 버블맨의 눈빛에 블랙캣은 속으로 감탄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싱긋 웃는 블랙캣의 입가에 어려 있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나머지는 경찰서에 가서 자백하도록 하시죠.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만한 대가는 받아야지 않겠어?”




//



근처 건물 지붕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던 남자는 거리를 힐끗 돌아보던 중 주변을 돌아다니는 작은 꼬마아이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엄마를 놓치고 실수로 이 위험한 곳으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울먹거리는 얼굴로 엄마를 부르며 돌아다니는 꼬마의 모습에 무감정하던 남자의 눈동자에 연민의 빛이 아주 살짝 떠올랐다. 그도 잠시, 곧바로 손에 무언가를 쥐는 듯한 동작을 취한 그가 그것을 세게 던졌다.


정확히는 꼬마가 걸어가는 방향에 있는 가로수 쪽으로.




//


“엄마아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갓 4살은 되었을까 싶은 작은 남자아이가 엉엉 울면서 저 멀리서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엄마를 잃어버렸나? 아니, 그것보다 이쪽으로 오는 건 너무 위험한데!


레이디버그가 뭐라고 외치기 직전, 아이가 걸어오는 쪽에 서 있는 가로수가 휘청거렸다. 방금 전 레이디버그와 러스트가 격렬하게 싸운 여파 때문인지 나무가 휘청이는 소리가 녹슨 시계태엽이 굴러가는 소리마냥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제 머리 위로 커다란 그늘이 지는 것에 놀랐는지 울음범벅인 얼굴이 천천히 나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나무가 아이의 머리 위를 덮쳤다.



“안 돼!!”



앞 뒤 보지 않고 레이디버그는 아이가 있는 쪽으로 온 힘을 다해 뛰어들었다. 무기를 꺼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아이를 두 손으로 껴안은 레이디버그의 눈동자에 쓰러지는 거대한 나무 몸통이 천천히 슬로우 모션처럼 찍혔다. 피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칫!”



레이디버그가 아이를 구하러 뛰어드는 것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본능적으로 제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꺼낸 물건을 레이디버그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순식간에 부풀어오른 커다란 에어쿠션이 레이디버그와 가로수 사이를 꽉 차게 가로막았다. 나무는 궤도를 바꿔 레이디버그와 아이를 스쳐 지나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디버그는 곧 다시 울먹거리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쉬, 괜찮아. 이제 괜찮아.”



상냥하게 아이를 달래주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다행이라는 듯이 흐뭇하게 지켜보던 블랙캣은 반투명하게 변하며 사라지는 에어쿠션을 보자마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눈을 깜빡거렸다.


매직박스에서는 한 번당 하나의 물건밖에 꺼낼 수 없으며, 물건을 꺼내면 기존에 있던 물건은….


헛웃음을 지으며 블랙캣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유리박스도 사라졌지만 갇혀 있던 두 악당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블랙캣이 중얼거렸다.



“아, 이런.”



그 말과 동시에 삐용삐용 울리는 사이렌 소리들이 뒤에서 마구 들려왔다. 


곧 경찰차 수십 대가 그들의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쌌고, 덜덜 떨고 있던 아이를 경찰에게 넘기고 난 후에야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러스트가 마찰력을 없앴던 부분들은 어느 새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비눗방울들도 모두 사라졌고.


마치 한 때의 꿈처럼.



“그럼, 슬슬 헤어질까?”



방금 전 소동이 있던 거리에서 한참을 달려나온 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법한 거리의 지붕 위까지 온 레이디버그가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레이디버그를 쳐다보는 블랙캣의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지워졌다.



“레이디.”

“응?”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궁금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아까 왜 그렇게 대책없이 달려들었어? 농담이 아니라, 정말 레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잖아.”



가뜩이나 아까의 레이디버그는 미끼 역할을 하느라 체력까지 모두 다 소진된 상태였다. 자신이 돕지 않았으면 정말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이건 대체 뭐지?



“그런 생각할 틈도 없었어.”



그 대답에 깜짝 놀랐는지 블랙캣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냥 구해야겠다 생각하니까 발이 멋대로 움직이더라고.”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레이디버그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살짝 치며 말했다.



“너도 그렇지 않았어? 방금.”

“….”

“그래도 좀 대책없기는 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는 블랙캣이 이상했는지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랙캣?”



그렇구나.



“레이디. 이제 알겠어.”

“응?”



번민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그 위를 장난스러운 미소가 덮었다. 확실히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로 블랙캣은 씩 웃었다.



“나, 레이디한테 반한 거 같아.”



이걸 어쩌지?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진지한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레이디버그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웃고 싶어서 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레이디버그는 딱 잘라 말했다. 



“미안해, 아기 고양이씨. 마음은 고맙지만, 유감스럽게도 넌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돌아서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블랙캣은 레이디버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으로 머리를 쥐뜯으며 중얼거렸다.



“아, 망했다.”



저런 모습까지도 멋지다고 생각하다니.



“뭐, 그런다고 순순히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블랙캣은 씨익 웃었다.




//



살짝 빛이 들이치는 어두운 통로 안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사실 빛이라고 해봤자 정말 간간히 틈새를 따라 새어나오는 정도라 간신히 얼굴을 알아볼 정도였지만. 터벅터벅 걷고 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앞쪽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멈춰 섰다.



“아저씨?”



조심스럽게 묻는 버블맨의 목소리가 작은 통로 안에 울려퍼졌다.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긍정의 표시라는 걸 아는 버블맨이 툴툴거렸다.



“하여간 아저씨는 너무 말을 안 한다니까.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있었던 거예요?”

“….”

“우리가 위험해졌던 것도 봤겠네. 그럼 좀 도와주지. 자칫했으면 큰일날 뻔했잖아!”



툴툴거리는 버블맨과 달리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마임맨에게 러스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거리에서 소동을 피워놨으니 한동안 파리에는 관광객들이 끊기게 되겠지. 뭐, 상관없다. 그만큼 경찰은 이쪽 사건 뒷수습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딱히 큰 피해가 나지 않은 이상 외신(외국 신문)들은 파리의 실태를 알리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테러와는 다른 성격의 문제니까. 그리고, 악당들과 히어로들의 싸움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상처럼 되어야만 했다.


그게 왜 문제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파리에는 이제 더 많은 경찰들이 악당들을 견제하기 위해 전담되겠지. 그건 그만큼이나 다른 쪽에서 활동하기 편하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무슨 소리야? 목적이 달성되다니? 우리 목적은 미라큘러스를 뺏어오는 거 아니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버블맨에게 러스트는 짧게 대답했다.



“예에, 맞습니다.”



우선하는 목적이 따로 있었을 뿐.



“행동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파리라는 도시가 이 이상 주목받기를 바라지는 않으시니까요.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리는 마임맨에 답례하듯이 러스트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버블맨에게 러스트는 주의를 주었다.



“버블맨, 당신도 마임맨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삼가도록 하세요. 아직 드러나야 되는 패는 아닙니다.”

“칫, 알았어.”



투덜거리면서도 러스트의 말에 동조하는 버블맨에 러스트는 살짝, 아주 살짝 미소를 지으며 버블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마임맨에 뒤이어 두 사람도 다시금 은밀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어제는 정말 힘든 하루였어….”



언제나처럼 등굣길을 걸으며 마리네뜨는 티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살짝 걱정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뉴스를 보니까, 관광객들이 아무래도 겁을 먹었나봐.”


[전날의 사건 이후, 경찰의 보호를 요청하는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경찰 당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조치를 다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오늘 아침의 뉴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힘없이 웃었다.



“무리도 아니지.”



영화에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아무래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니까.



“그나저나 마리네뜨. 어제의 그건….”



티키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마리네뜨는 전혀 걱정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뭐 별로 상관없잖아. 이미 거절했는걸.”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래도 어쩌겠어.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계속 거절하다보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본인도 그러지 못하는 주제에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누군가가 보였다. 익숙한 갈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마리네뜨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에스미!”



에스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반갑게 부르는 마리네뜨에게서 살짝 시선을 돌렸다가, 휙 고개를 돌려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에스미를 보며 마리네뜨는 민망해진 손을 살짝 내렸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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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는 차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러스트가 달려들던 씬은, 러스트가 자기 앞쪽의 길들에 마찰력을 없앤 뒤에 마치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듯이 순식간에 앞으로 확 달려나온 거라고 보시면 되요 ㅇㅇ


펠릭스는 생각보다 상당히 다혈질인 성격이라고 가정했습니다. 그 성격이 튀어나오는 게 블랙캣 버전이고요. 다혈질적인 성격을 이성으로 누르고 있는 타입이라 어찌 보면 대단하기도 한데 피곤하겠다 싶기도 하고...


마리네뜨는 사람을 좋아하고 밝은 성격이지만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매우 예민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봄 에피소드에서 나오지는 못할 거 같네요.


액션을 10페이지나 써야하니까 너무 힘드네요 읽는 분들이 재밌으셨을지도 모르겠고... 다음부턴 적당히 축약하자ㅠㅁ ㅠ 사실 액션 빼고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ㅎㅎ


착실히 작업 중입니다. 다른 마감을 그제 끝내고 4화는 어제 다 썼는데, 퇴고 때문에 오늘 올려요 ㅇㅇ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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