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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지극한 의식의 흐름으로 흘러갑니다ㅇ.<



일단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솔직히 이번 온리전은 준비부터 역대 최고로 힘들었던 온리전이 아닐까 싶다.

(재밌기도 재밌었음 일단 그건 아래에)


왜냐면 이제까지 온리전에서 보통 개인지 한 권(두꺼운걸로) 내고 말았는데 이번은 개인지 두 권에다 엔솔까지 했어서. 근데 사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기로 결정한 책이 겁나 두꺼운 게 문제였다 콘티만 무려 반 년을 짰던 녀석이고 카페 사건으로 3개월을 그냥 날려버리는 바람에 한 달만에 본편원고만 800페이지 정도를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고.


솔직히 이 얘기 들은 지인들이 하나같이 그게 가능하긴 해요? 라고 물었음(사실 나도 안될줄 알았다


계획을 짜보긴 했는데 솔직히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가... 하루 매일매일 30페이지 이상을 써야 겨우 끝낼 스케줄인데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하단 말인가?(후기에도 적었지만 악덕 출판업체도 이딴 스케줄은 주지 않을것 한달 800이라니


근데 겨우 끝내기는 했음 나도 내가 신기함ㅇ_ㅇ(그리고 지인들도 나를 무척 신기해했다


심지어 캣마리 개인지도 이거 적던 중에 적은것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건 지인분과 예전에 캣마리 내겠다고 약속했던 것도 있는데 간만에 재밌는 소재가 떠올라서 적어보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그렇습니다(아무말


근데 진짜 박을 포기하니까(이건 지금도 통탄스럽다) 간신히 마감은 쳤다 8월 3일 오후 4시가 커트라인이었음.... 근데 정말 힘들었던 게 그간 계속 밖에 나가지를 못해서 체력도 아주 바닥이었는데다 이 더위에 컴퓨터 앞에서만 16시간을 넘게 앉아있는 일이 부지기수다 보니 스트레스도 스트레스고 더워 죽겠고 그냥 너무 놀고 싶었음... 마침 게임 하나에 치이기도 했고 아 진짜 게임까지 달리면서 이걸 다 마감친 내가 진짜 독하닼ㅋㅋㅋㅋ쉬는 시간 쪼개서 한 거긴 한데(게임시간 하루 2시간도 안되었을것


5일까지 설정집을 완결치고 나니 그제서야 마감이 끝났다는 실감이 나더라 근데 행사는 내일이었지(총체적 난국

너무 정신이 없어서 다른 분들 챙겨드릴 것까지 사갈 여유가 없어서 간단히 약속했던 마카롱들을 사러 홍대에 나갔는데 조금만 걸었는데도 넘 어지럽고... 그래도 오랜만에 바깥 나오니 해삐해삐했다 오래 잠자다 일어나 햇빛을 본 잠자는 공주의 마음이 이러했을까(진짜 아무말중


간단히 마카롱 사고 날씨가 더워서 상할까봐 후다닥 집에 돌아와서 설레는 마음으로(사실 책이 제때 올지 걱정되어서) 조금 뒤척이다가 2시에 잠듬


그리고 6시에 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게 왜 웃기냐면 나는 이 행사에서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임 부스입장이기도 하고 우리 집은 능곡에서 25분밖에 안 걸리는 곳에 있었어섴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탐라를 열심히 구경했다가 밥먹고 약먹고 준비하고 8시 반에 밖으로 나옴.


아 일찍 나온 이유가 이번 저 두꺼운 개인지를 다른 업체에 주문했는데 오늘 아침에 퀵으로 택배를 받는 걸로 되어있었기 때문임. 그래서 그거 혹시 일찍올까봐 미리 대기하려고 온 것도 있고 엔솔로지 관련으로 잔돈이 몇십만원어치 필요했음 그거 구하려고 나온 것도 있었음.


근데 문제는 구할 만한 곳이 없었지(이때부터 카오스 시작


어쩌지? 어쩌지? 이러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하늘다락 앞에서 겁나 수상한 사람처럼 대기타고 있다가 겁나 머리색이 화려한(후기를 쓴 모두가 꼭 기입하는 사실) 어떤 분을 보았음 바로 주최님ㅇ0ㅇ)) 근데 얼굴에 화장을 하셨는데도 넋이 반쯤은 나가계신 표정이라 넘 안타까웠음 아니 주무시려고 근처에 방 잡으셨다면서요.... 진짜 정신력으로 버티실 거 같긴 한데 아무튼 극한체험을 겪고 계신 것 같아서 많이 걱정되었던;

(정작 행사 진행하시면서 넘나 신나신 표정이라 걱정이 불식되었지만/그래도 피곤해 보이시긴 했다)


그래서 잠깐 얘기 나누다가 주최님은 행사준비하시러 가셨고, 주최님이 가자마자 멍청한 나님은 바로 손에 주최님과 스탭분들 드리려고 준비했던 마카롱을 전해드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음;ㅅ;(지금도 참 멍청했다고 생각함) 나중에 전해드리기엔 전날 사서 냉동고에 넣어놨던 거라 이 더운 날씨에 상할까봐 부리나케 하늘다락으로 조심조심 올라가서 마카롱 전해드리고 내려옴. 방해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표정들이 괜찮으셔서 다행이었다 ㅠㅁ ㅠ


아 그리고 책은... 책은 넘나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일단 이걸 가져와주신 택배기사님께 넘 죄송하고 감사했다 엘베가 없어서 들고 올라와주셨는데 너무 죄송하고 감사해서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던... 작은 거는 내가 낑낑 지고 올라갔지만 큰 짐은 내가 지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아저씨 감사합니다ㅠㅁ ㅠ


그리고 책 기다리던 도중에 내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거셨는데 첨엔 누군지 못알아봤는데 홀리님이라는 얘기 듣자마자 맞아 이분 홀리님이었지! 하는 생각이 떠오른거야(1월 케스에서 뵈었음) 그래서 허둥지둥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인사 나누다가 홀리님은 먼저 들어가셨고 나는 10시 15분에 책을 수령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ㅇㅇㅇ


아 그리고 은님... 은님에 대해서는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처음엔 그거였지 멍청하게 부스비번을 안 알려드려서 늦게 들어오시게 된거... 그때 책이 너무 많아서 사실 카오스였음 이것저것 열심히 뜯고 정리하다보니 트위터를 확인 못했다는 ㅠㅠㅠㅠ 나중에 들어오셨을 때 정말 죄송했다 이 더운 날씨에...



이제 판매전 관련으로 넘어가면,


판매전은 바빴음. 진심 리얼 바빴음 나 이렇게 판매전 바빴던 거 처음이야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행사를 부스러로 세 번쯤 뛰어봤지만 이번이 역대급이었다 일단 판매전 시간이 꽤나 짧았고 책 목록이 하도 많아서 정신이 없었음; 무엇보다 다른 분들도 바쁘셔서 선입금 수령을 부스시간에 다 못했음 은님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다 수령 못했을것이다(눈물철철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는데 엔솔로지 환급금 문제였음.

이거 위에 잠깐 언급했는데, 나는 반 년 전부터 기획된 4인 엔솔로지에 참가했었음 그리고 이 엔솔은 우리 부스에서 팔기로 했었고.. 부스러가 셋이었지만 한 분은 주최님이었고 다른 한 분은 크로스오버 엔솔로지를 하시게 되셨으니 내가 맡아야 했던 게 맞았다고 보긴 함.


근데 사실 엔솔이 문제가 아니라 엔솔에서 한 파트가 아예 펑크가 나버린 거임.


너무 늦게 알아서 펑크를 메울 다른 수단도 없었고, 결국 우리는 엔솔을 내되 그 파트를 제외한 돈 5천원을 선입금러분들에게 환급해드리기로 결정을 내림. 문제는 이 엔솔 예약자가 한둘이 아니었고 따라서 몇십만원어치 5천원권을 구해야 하지만 이걸 구할 수단이 은행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이걸 알아챈 날이 하필이면 행사 이틀 전인 목요일이었단 말임. 남은 셋 다 정말 바빠서 이거 의논을 제대로 못했다가 은행 시간을 놓쳐서 결국 행사날에 계속 잔돈을 구하러 다녀야 하는 일이 발생함.


솔직히 은님이 부스 도와주시고 계속 주변 지인들한테서 잔돈 구해다주시지 않았으면 힘들었을 거임 ㅠㅠㅠㅠㅠㅠ 결국 잔돈은 다 구했음 잔돈 기부해주신 홀리님 컨퓨님 메루님 그리고 다른 지인분들께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8ㅁ8(운다


근데 진짜 이 5천원이 너무 짜증났던 게 계속 이걸 구해야 하니까 그건 그것대로 스트레스고 우리 부스가 생각보다 줄이 너무 길어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난 이렇게 부스줄이 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구 늘 행사에서 널널한 사람이었어서 그런가...; 아무튼 진짜 이 때 카오스가 쩔었음 으악 그래도 사고싶었던 거랑 선입금 거의 다 수령했어서 뿌듯했다ㅠㅁ ㅠ 은님 아리가또 님은 제 천사님이야S2S2


근데 판매전에서 깨알같이 웃긴 일들 많았는데 그 중 하나는 역시 행사장에 경찰이 왔을 때였다.

솔직히 올 거 같다고 이미 주최측에서 메일을 받았기에 어 그렇구나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로 오다니 게다가 부른 놈은 뒤로 쏙 빠졌다는 사실을 나중에 듣고 분통터짐 뭐라고?! 그 때 마침 선입금 수령해야 해서 부스를 떠나있었기에 눈 앞에서 생생하게 봤다 토끼 귀를 다신 아스님이,


"자! 경찰분들 들어오십니다!"


이렇게 소리지르고 문이 벌컥 열리더니 스탭분들 두분이서 레드카펫 까시는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거 진짜 바로 앞에서 봤음 너무 웃겨서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다른 라인으로 빠졌음 아 지금도 생각하니 웃겨ㅋㅋㅋㅋㅋㅋㅋㅋ스탭분들 진짜 주섬주섬 카펫 까시는데 넘나 익숙한 동작이셔서 혹시 연습하셨나 싶었는데 나중에 진짜 연습했다고 듣고 빵터지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환호성과 함께 들어오시는 경찰분들을 보며 이 날씨에 뻘짓을 하시겠구나 하고 측은해하는 건 덤으로(


아무튼 진짜 판매전 때 물건 팔다가 좀 널널해졌을 때 성우님한테 드릴 책들 전해드리고 왔다 읽으실 지는 모르겠지만<<(솔직히 자기가 생각해도 두껍다)


책은...


.


이렇게 냈음(왼쪽 하얀색 책은 엔솔로지!)

아 근데 너무 죄송했던 게ㅠㅠㅠㅠㅠㅠㅠㅠㅠ 캣마리 개인지 책 표지가 좀 인쇄기가 인식하기 힘든 색이라 책의 절반이 좀 푸른끼가 도는 회색으로 나오는 일이 있었음 양해를 구한다고는 했지만 정말 죄송했다 ㅠㅁ ㅠ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으셨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아 진짜 그리고 펠릭마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거 정말 저한테는 좀 애증인데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1200페이지 정도로 내고 싶었어요 악당들에 대한 서사를 좀 더 많이 다루고 싶었는데 회당 30페이지 안에서 그걸 다 다루기는 한계가 있었던... 펠릭마리 정말 좋아하는데 많은 분들이 펠마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부디 돈이 아깝지 않으셨길...(간절



판매전에서 지인분들이랑 대화 거의 못했음.

이게 진짜 천추의 한으로 남을 거 같은데 지방에서 올라와주신 분들이랑도 대화 많이 못해서 아쉬웠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근데 너무 바빠서 진짜 멘탈이 날아가지 않은 게 신기함(그 와중에 밀린 게임 이벤트 꼬박꼬박 하고 계시던 은님 진짜 강적임)


맛있는 거 가져다주신 딘님 감사합니다 깨알같이 무당벌레 그려진 고정핀으로 묶어주신 거 넘 귀여웠구요... 헤헤 잘 먹겠습니다!

부스에 책 찾으러 갔을 때 제 말을 기억해주시고(?) 소세지를 네 개나 챙겨주신 춘님 감사합니다 그 소세지들은 어제 저녁에 맛있게 해치웠습니다^ㅁ^(춘님:

아 그리고 스카님이랑 레몬님 두 분이 레몬티랑 레몬에이드 하나씩 주고 가셨는데 너무 감사했어요 행사장이 너무 더워서 마실 건 그 자리에서 다 마셔버렸지만 덕분에 버텼습니다;ㅁ;

그리고 다른 것들도 많이 받았는데 지금 조금씩 먹구 있어요!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 먹을 걸 주고 가신 분들이 많아서 제가 한 분 한 분 불러드릴 수가 없어서 아쉬워요 그래도 감사하고 있답니다!


사실 놀란 점은 제가 초콜릿을 요즘 먹기 힘들어해서 다른 분들이 만약 초콜렛을 주신다면 조금씩 천천히 먹어치우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연인지 챙겨주신 건지 주신 음식들에 초콜릿이 거의 없더라구요 사탕이나 과자류가 많았어요! 그래서 감사히 우걱우걱중입니다...(감사함


그 밖에도 지인분들이랑 많이 얼굴은 본 것 같은데 대화는 많이 못했다 대체로 안부인사는 다 했지만ㅠㅠㅠㅠㅠㅠㅠ 근데 제일 인상깊었던 거 방장님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이미 옷부터 올블랙이었는데다 머리가 땀으로 푹 젖어 계셔서 다들 보자마자 방장님 더워요? 이랬을 지경이라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정말 정신이 없긴 했음.

판매전 3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짐작도 안되고 트위터도 할 정신이 없었을 지경. 완매되었다는 말만 간신히 쓸 수 있었다(이거 쓰는 와중에도 다른 분이 찾아오셔서 목록 확인 중이었다는 건 안비밀


진짜 얼마나 정신이 없었냐면 판매전 끝나고 정리를 해야하는데 아무리 해도 정리가 쉽게 끝이 안 나서... 중간에 이것저것 다 정산하고 계산했는데도ㅠㅠㅠ 주신 것들이랑 남은 재고들 주섬주섬 챙기는데 내가 너무 손이 느려서 죄송했다 주최님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악 미쳤다 트레카를 못샀잖아!!(땅치고 후회



그리고 이벤트 시작.

아 이벤트 진짜 웃긴 에피소드 많았는데 하나하나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일단 드레스코드 이벤트! 진짜 빨간 색부터 먼저 시작했는데 진심 처음부터 14개! 라고 하셔서 넘 놀랐다 세상에 14개나 붉은 색을 입고 왔다고?ㅇ_ㅇ???


라고 모두가 생각하며 앞으로 나온 분을 지그시 쳐다보았죠. 그리고 세는 광경을 보면서 다들 놀라움의 환성을 지르심 특히 이분의 경우는 모자 벗자마자 머리띠랑 머리끈 나오는 것도 웃겼지만 멜빵이 촌철살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떻게 이 날씨에 멜빵까지 입고 오신 걸까 경악을 금치 못했지 덕력이란...


근데 진짜 더 쩌는 건 검은색 드레스코드 때였음.

이건 후보가 두 분이었는데 여자분이랑 남자분 각각 14개! 아니 진짜 그래서 둘 다 앞으로 나와서 가지고 있는 검은색 악세사리랑 옷들 다 세보는데 두분 다 정말 강적이더라 이 날씨에... 심지어 여자분은 손에 기모장갑에 마스크에 벨트에 겉옷까지 온통 검은색이셨다 이거 보고 다들 기겁하심ㅋㅋㅋㅋㅋㅋ나도 놀랐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저라면 저렇게는 못합니다(절레


스탭분들도 헷갈리시는지 중간에 계속 잘못 세시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가위바위보로 끝냈음. 남자분이 이기셔서 커다란 상자 하나 받아가시고 여자분은 다른 경품 받으셨는데 옆에서 스탭님이 깨알같이 여자분한테 괜찮아요 저거 시중에서 살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온리전서만 얻을 수 있지! 하시던 거 참 귀여웠죠 호호호ㅇ▽ㅇ


그 다음은 아마 원고왕 이벤트였을 거임.

사실 난 이거 상품이 가장 궁금했음. 그리고 만화 파트 누가 원고왕이신지도... 왜냐면 솔직히 내가 마감을 친 순간부터 지인들이나 나나 소설 파트 원고왕은 나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ㅇㅇ(실제로 어떤 분이 나를 보니까 차마 원고왕 이벤트는 도전할 엄두도 안 나셨다고 해서 넘 웃펐던ㅋㅋㅋㅋㅋ) 원고왕 이벤트에 참가하려고 낸 책들을 들고 갔는데 책들 세는 도중 스탭분께서,


"그냥 원고왕 가져가셔도 될 거 같은데"


하셔서 넘 웃겼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도 그럴게 총합 1018페이지였음 나도 이 정도로 나올 줄은 몰랐어서 좀 놀라긴 했지만;; 실제로 사회자분이 페이지를 외친 순간 다들 경악의 비명을 토해내시더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혼을 갈면 이런 페이지가 가능하냐는 아스님의 질문에 그냥 간단하게,


"한 달 동안 집 밖으로 안 나가면 900페이지가 나올 수 있어요"


한 마디 하고 아드리앙 타월 경품으로 받고 내려왔습니다.....................(아드리앙 최애) 아 저는 그날 죽었서요 없어 죽었서 흑흑흑흑 아드리앙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 아드리앙 너무 잘생겼어요 솔직히 이걸 대체 어떻게 쓰지... 그냥 곱게 펴서 벽에 걸어둘까(고민


헤헤헤헤 아드리앙 잘생겼다!!!!ㅠㅁ ㅠ 리네는 복받았어요... 고이 모시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소비왕! 소비왕 타가신 분이 산 회지 수가 56개라고 하셔서 다들 놀라셨거든요? 근데 세보니까 56개 아님 59개였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더 놀라고... 스탭분들이 쌈박하게 인정하시며 이것저것 선물을 들려 드렸는데 소비왕 타신 분 정말 행복해보이셨다... 주최님이 현실 아드리앙이라며 쐐기를 박으셨죠 ㅇㅇㅇ


그 다음이 편지 이벤트였는데, 편지 이벤트에 앞서서 깜짝 서프라이즈 시크릿 이벤트가 있었다!

는 솔직히 말이 시크릿이지 부스러들은 이미 사전공고를 받아서 다 알고 있었음 왜냐면 선물을 미리 준비해야 했거든... 시크릿 이벤트는 바로!


이 오시기로 한 거였죠.

진짜 문이 열리자마자 다들 입 틀어막고 놀라시는데 나 진짜 그렇게 사람들이 놀라는 거 처음 봤어... 그러니까 환호성이나 그런 거랑은 다른 진짜 미친듯이 놀란 느낌! 숨 들이키는 소리 여기저기서 들리고 아무튼ㅋㅋㅋㅋㅋㅋ 성우님이 들어오셔서 맨 처음에 마이크 받고 한 말씀이,


"안녕? 마이 레이디?"


였는데 정말 듣자마자 모두가 한 마음으로 비명지른ㅋㅋㅋㅋㅋ 진짜 이거 실제로 들어봐야 합니다 글로는 느낌을 살릴 수가 없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성우님이 이렇게 사람 많을 줄 몰랐다고 놀랐다고 하시면서! 오는 거 알릴까 했지만 주최측에서 그랬다간 사람 더 미어터질 거라고 사전에 주의를 드렸다고 하더군요 스탭분들 나이스! 는 그래도 성우님이 온리전 입장 규칙 알티하셔서 다들 수군거리긴 했었지만요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솔직히 성우님 얘기 안했는데도 사람 정말 많았어요... 200~300명쯤 남아있었어서 ㅇㅇ


그러시면서 여기가 부모님 동반 입장이 안되는지라, 레이디버그 관련 PD님이 정말 오고 싶어하셨는데 같이 오지 못하셔서 아쉽다고 그러시고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간단히 인사하고 편지 이벤트를 시작했습니다!


편지 이벤트 첫번째 당첨자는 홀리님! 무려 '블랙캣' 에게 보내는 편지였어요. 홀리님이 낭독하는 거 들을 때마다 다들 넘 공감되서 계속 웃고 있고ㅋㅋㅋㅋㅋㅋㅋ널 처음보자마자 알았지 내 인생이 끝났다는 걸. 이러시는데 넘ㅋㅋㅋ넘 웃겨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목소리에 감정 안 실으려고 노력하면서도 본인도 웃긴지 계속 웃고 계시더라구요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그 다음에! 홀리님이 성우님한테 블랙캣 연기 한 번 해주십사 부탁드렸는데 대사가,


"오늘 밤, 무도회에서 난 네 기사야. 프린세스?"


였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나타니엘이 이블 아티스트가 된 9화에서 나온 프랑스어판 한정 대사죠 ㅇㅇㅇ 말하면서도 계속 웃기셨는지 홀리님 결국 종이에 적어서 주셨는데 진짜 빠르게 적으시는 거 보고 감탄했습니다 얼마나 듣고 싶으셨던 거지ㅇ0ㅇ!


여차저차해서 성우님이 그 대사를 연기하기 시작하셨는데 다들 들으면서 너무 좋으셨는지 꺅꺅 소리를 지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스탭님이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하시면서 우리 딱 녹음 끝난 후 1초 지나기까지만 조용히 하죠! 이랬어요.


그리고 다시 진지하게 대사를 읊으시는데 정말 아무도 소리 안 냄... 쥐죽은 듯한 분위기에서 대사가 끝나고 약 3초 후,


"꺄아아아앙나안아나아아아악"


소리 들리는데 진짜 다들 넘 귀여우셨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다시 생각해도 귀엽다 귀여워^_^(흐뭇


그리고 다음 편지 이벤트는 쥘레카 최애이신 분이 적으신 거라 성우님은 뒤로 살짝 물러나시고 쥘레카 최애이신 분의 절절한 사랑고백을 들었습니다 다들 넘나 감동했어요...(찡) 그래서 스탭분들이 상품으로 쥘레카랑 리플렉타 트레카 각각 5장씩 꺼내다가 그분한테 드렸습니다 예쁜 사랑하시라고ㅋㅋㅋㅋㅋ


원래 여기서 편지 이벤트는 끝났어야 했지만 그건 너무 아쉽다는 생각에 주최님들이 편지 몇 장을 더 뽑으셨어요. 마지막으로 뽑은 편지는 바로 레이디버그에게 보내는 편지였는데 이건 성우님이 블랙캣에 빙의해서 대신 읽어주셨습니다ㅇㅁㅇb 직접 읽으셨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으셨을 거 같기도 하지만요 ㅇㅇ!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가위바위보ㅋㅋㅋㅋㅋㅋㅋㅋ 가위바위보 다들 짐작하셨겠지만 성우님이랑 대결하는 거였습니다. 상품이 무려 감님 족자봉! 아 진짜 너무 갖고 싶었는데 역시 전 운이 없었나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못 탔어요! 족자봉 타가신 분들 넘넘 부러워요 복받으신 분들이야ㅠㅠㅠㅠ


근데 진짜 웃긴 게 뭐냐면 성우님도 그게 탐나셨는지 후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스탭분들이 이것저것 챙겨주시는데 옆에서 계속 족자봉은 없나요 족자봉은 없나요 이러시면서 눈 동그랗게 뜨고 계속 족자봉만 쳐다보시는데 너무 귀여우셨습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탭분도 계속 모른 척 하시다가 결국 웃으시면서 족자봉도 같이 꺼내드렸어요. 그제서야 해맑게 웃으시면서 족자봉 받으시는데 정말 현실 블랙캣이신줄...


아무튼 가위바위보 이벤트 할 때 성우님이 임무 완수! 외쳐주셨는데 그것도 너무 좋았어요 블랙캣ㅠㅠㅠㅠㅠㅠ 아 진짜 성우님 정말 현실 블랙캣같아요 재간둥이 기질을 마음껏 뽐내주시더란ㅋㅋㅋㅋ팬서비스를 되게 많이 해주셔서 무지무지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요즘 자기가 너무 행사를 많이 다니는 것 같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 미디어에 얼굴 내밀 일이 많아져서 자제하고는 있다시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성덕 있냐고 물어보실 때 많은 분들이 손드시는 거 보고 깜짝 놀라시기도 하셨습니다 ㅇㅁㅇ 그리고 자기가 레이디버그 오디션 볼 때 많은 도움을 주신 PD분이 계신데 그분이랑 못 오셔서 아쉽다고 그러셨어요 나중에 혹시 열린다면 그분도 같이 오실 수 있으시길...(기도


그리고 이제 가셔야 하는 시간이었는데... 가시기 전에 성우님이 등신대들을 보고 이것저것 묻다가 결국 등신대에 싸인도 해주고 가셨던ㅋㅋㅋㅋㅋㅋㅋㅋ 그 협력자분들이 받은 족자봉에도 싸인을 해주셨는데 다들 정말 좋아하셨어요!


그렇게 바람같이 오셔서 잔뜩 놀아주시고 받은 물건들과 함께 바람같이 사라지셨습니다 무슨 여름밤에만 나오는 재간둥이 요정이신줄(아무말


참고로 마지막에 외쳐주신 대사는 "하하, 재밌네" 였습니다! 저희는 정말 좋아했지만 정작 성우님은 그런 대사가 있었나? 하셔서 넘 웃겼던ㅋㅋㅋㅋㅋㅋㅋㅋㅋ 2회가 열린다면 그때는 레벅 성우님이신 여민정 성우님과 같이 참여하고 싶으시대요 허허 조금쯤 기대해봐도 좋으려나ㅇㅁㅇ)


중간에 좀 재밌는 일화들이 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저희 행사장이 허락받지 않은 사진 촬영이 금지거든요 등신대 제외하구요. 부스러분들 신상을 위해서 ㅇㅇ 근데 어떤 원피스 입은 여성분이 사진을 찍고 돌아다닌다는 제보를 들었다며 사회자(아스님)분이 되게 심각하게 "누구시죠? 지워주셨으면 합니다." 하고 계셨는데 사실 그 사진을 찍은 분은 홀리님이셨고 자그툰 본사에 보낼 사진을 찍고 계셨다는 걸 렐님이 말씀하시니까 아스님이


"아니 나한테는 왜 말 안 해줬어? 괜히 심각해졌잖아!"

(필자의 기억력에 다소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셔서 빵 터졌습니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뉘앙스부터 너무 귀여우셨단 말이에요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다음 즐거움은 등신대로!

등신대가 정말 정말 예뻤어요 닉네임 들었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는데 너무 예뻐요ㅠㅠㅠㅠ 족자봉들도 하나같이 넘넘 예뻤구요. 추첨 이벤트랑 등신대 이벤트 중 뭐부터 할까요? 하니까 다들 등신대를 외쳐주셔서 등신대부터 했습니다.


먼저 아월님 레이디버그! 아 아월님 레이디버그 너무 배경부터 분위기에 숨이 막혔어요 정말 신비하고 멋진 히어로 느낌이 팍팍 났어서ㅠㅠㅠㅠㅠ 상한가를 찍지 않은 건 의외였지만 넘나 존엄했다구요 ㅎㄷㄷ 너무 예쁘더라구요...


그리고 꼬욤님 블랙캣은 역시 상한가를 찍었습니닼ㅋㅋㅋㅋㅋㅋ블랙캣 데려가신 분이 정말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리고 마리네뜨! 마리네뜨 데려가신 분 소감이 인상적이었는데 계좌이체되면 100만원도 아깝지 않다고 줄줄 연설하시는데 넘 놀라웠구ㅋㅋㅋㅋㅋㅋㅋㅋㅋ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직장인이신 모양이더라구요! 아 부럽다...... 저도 최애 데려가고 싶다....


양님 아드리앙은 역시 상한가였습니다 흑흑 내가 데려오고 싶었는데.... 차마 제가 등신대를 제 더러운 방에 모실 수가 없어서8ㅁ8


사실 일단 제가 이 이벤트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바로 캣마리 족자봉 경매였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주최님이 캣마리 최애신데 진짜 캣마리 경매 시작하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넘 웃겼어요ㅋㅋㅋㅋㅋㅋ


"자 여러분. 이제 캣마리 경매니까 상한가를 전제로 저랑 대결하시면 됩니다"


뭐 이런 식이었는데 듣자마자 빵터진ㅋㅋㅋㅋㅋㅋ 사실 이 이벤트를 기대하고 있었던 이유가 캣마리를 정말 좋아하기로 유명한 분이 팬덤에 세 분 계셨는데 한 분은 못오시고 다른 두 분이 주최님과 연시님이라는 분이셨거든요. 둘 중 누가 캣마리를 가져갈까 흥미진진해하고 있었는데.....!


떨어지셔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 아니 진짜 세상 다 잃으신 표정을 짓고 계신 연시님이나 "악 내가 이거 가지고 싶어서 온리전 열었는데!!" 하고 소리치신 주최님이나 이러면 안 되지만 너무 귀여우셨던........ 아 진짜 상상도 못할 결과라서 다들 웃음바다되고 안타까워하고ㅋㅋㅋㅋㅋㅋ둘중에 하나만 해야할텐데 말이어요ㅇㅁㅇ;(땀땀


물론 그만큼 좋아하시는 분 손에 들어갔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캣마리 족자봉 가져가신 분 축하드려요!^ㅁ^



이제 추첨 이벤트!


음 솔직히 별로 쓸 말이 없네요... 막 인상깊은 에피소드가 없었어서!

삼진님 파우치 때 절규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던 건 기억합니다 지인분이 너무 슬퍼하셔서 기억해요ㅋㅋㅋㅋㅋㅋ


맞다 추첨 이벤트 때 이것저것 추첨했는데 그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다 있고요ㅇㅁㅇ)~

이 추첨함이 사회자이신 렐님과 아스님이 돌아가면서 뽑으셨거든요. 그런데 아스님이 추첨함에서 번호를 뽑았는데 나온 번호를 보고(40번이었음) 엄청 놀라시면서,


"헐, 이거 나잖아?"


하시며 근처 책상에 있던 전프레를 주섬주섬 뒤지시더니 더 깜짝 놀라심. 당시 대화가!


아스: 앗 역시 저네요ㅇㅁㅇ!

렐사: 그러게요 그럼 이건 없던 걸로!(정말 단호하셨다 단호박드신줄 심지어 웃으면서 저러심

아스: 왜! 왜!ㅠㅁ ㅠ!


이런 느낌으로 대화하셔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넘나 억울하신 느낌으로 소리치셔서 다들 꺄르르 웃음바다되고... 두분 사회 너무 잘하시는 거 같아요 인생페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 그대로같아...

(뭔가 모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절대 기분 탓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이벤트가 끝나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어요~

이번 행사 진짜 최고였어요 제가 온리전 많이 다녀봤고 이벤트 끝까지도 많이 봐봤지만 정말 진행이나 참관객들이나 이벤트들이나 역대급이었던; 


너무너무 재밌었고 판매전은 힘들긴 했지만 이벤트 때 너무 재밌어서 피곤한 것도 잊고 꺄르르 웃고 즐겁게 보냈습니다! 이벤트에서 깨알같이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많았지만 피곤하긴 했는지 기억이 많이 날아갔네요 아 휘발성 너무 높은 거 아니냐 내 뇌야(아무말


은님 덕분에 사고 싶은 거 전부 다 사기도 했고 아 어쨌든 너무너무 좋았어요 은님 사랑해요S2S2


주최측에서 정말 이것저것 대처 잘 해주시고 준비해주신 것들도 많아서 너무 좋았지만 그만큼 고생하셨겠구나 싶어서 안타깝기도 했어요;ㅅ; 아무래도 반년 간 지켜본 것들도 있고 이상한 놈들도 있고 하니까... 다른 분들 후기들 보시며 좋아하시는 모습들 보니까 제가 다 기쁘네요^ㅁ^


전프레도 너무 예뻤습니다 만원도 너무 싼 거 아닌가요 아니 세상에.... 진짜 청접장 보고 손 덜덜 떨면서 열었다구요 행사장에서는 확인할 시간이 없었어서 집와서 열었습니다ㅠㅠㅠㅠㅠ 진짜 전프레에 부채 넣어주셔서 감사했어요 날이 너무 더워서... 부스들 찾아갈 때마다 그분들이 제가 너무 더워 보이셨는지 부채로 바람 부쳐주시는데 넘넘 감사했던;ㅅ; 스티커나 책자나 가방이나 트레카나 모두모두 좋았습니다 이렇게 전프레 알찬 온리전도 처음이었고...ㅠㅠㅠㅠㅠㅠㅠ


후후 2기가 열릴지 안 열릴지는 주최님들 마음이시니 잘 모르겠지만 열린다면 그 때도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겠습니다^ㅁ^)9


정말 최고의 행사였고 이런 멋진 행사 열어주신 주최님과 스탭분들께 정말로 감사해요! 저 빈말하는 성격 아니니 마음껏 뿌듯해하셔도 됩니다 히힛>ㅁ<)/


부스러분들과 참관객으로 찾아주신 분들도 모두모두 즐거운 하루 되셨으리라 믿을게요 후후ㅇ.<!


<<임무 완수!>>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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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네>





<홀리>



최종 인포는 홀리님께서 작업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임무완수에서 만나요'▽')/


Posted by I.R.E
,

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5






Episode 6.

수상한 만남





“우와아아-!!”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지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반짝거리는 샹들리에와 깨끗하고 화사한 테이블, 예쁜 장식들까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넓은 실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빈 그릇에 음식을 채워넣는 요리사들과 칵테일 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돌아다니는 웨이터들도 있었다.


너무나도 화려한 주변에 마리네뜨는 그저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이런 곳을 처음 와봐서 그래, 응.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마리네뜨는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찬찬히 떠올렸다.







때는 바야흐로 며칠 전 학교에서였다.


‘초대권?’

‘그래. 우리 엄마가 받아오신 거야.’


에스미가 내미는 하얀 봉투와, 그 안에 담긴 카드를 보고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여기 샹그릴-라 호텔이잖아! 엄청 비싼데!’

‘맞아. 우리 엄마가 거기서 제과 쪽 총주방장을 맡게 되셨어서.’


에스미의 어머니는 파리에서도 유명한 파티쉐다. TV에도 몇 번 나왔을 정도로 유명한지라 마리네뜨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에스미네 집에 놀러갈 때마다 바빠서 뵙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나한테 한 번쯤 가 보라고 줬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날 일정이 있어.’

‘근데 그런 걸 나한테 줘도 돼?’

‘뭐 어때? 나야 엄마가 나중에 또 줄 텐데. 그리고 거기에….’

‘거기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스미는 정말 무관심한 어조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니가 좋아하는 그 녀석도 올지 몰라.’

‘에? 진짜?!’

‘어. 아무래도 파리 유명인사들은 모두 모인다고 들었거든. 그 녀석 정도 되는 집안이면 진작에 초대장이 날아갔겠지.’


그러니 잘 다녀와.


그 한 마디와 함께 초대권을 앞으로 쑥 내미는 에스미의 손이 왜 그렇게 고와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 손을 덥석 잡으며 넌 역시 내 친구라고 눈을 반짝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부담스러웠는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저번에 싸웠던 일 이후로 에스미가 과하게 상냥해진 느낌이 든다. 티는 잘 안 내지만 이런 것까지 가져다주는 걸 보니 그 때 일에 대해 많이 미안해하고 있는 걸까. 조금 나쁜 생각이지만, 그런 에스미의 친절이 싫지 않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헤실헤실 웃었다.


여기에 가면 펠릭스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오긴 왔는데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해서 그런지 절로 기가 죽었다. 나 오늘 이상하지는 않지? 마리네뜨는 가만히 제가 입고 있는 붉은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특별히 아끼던 붉은 색 원피스는 색깔이 색깔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이 연회장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일단 뭐라도 먹어야지.


기분 좋게 웃으며 마리네뜨는 테이블 위에 예쁘게 세팅된 음식 접시들로 다가가 음식 몇 가지를 집어들어 제 접시에 담았다. 수북히 음식을 담은 뒤 싱글벙글 웃으며 닭강정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마리네뜨의 시야에 누군가가 보였다.


몸매가 드러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긴 금발 머리를 늘어뜨린 예쁜 소녀였다. 귓가에는 하얀 깃털로 장식된 머리장식을 꽂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의 색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차림새는 성숙해 보였지만 얼굴을 보면 자신 또래인 것 같았다.


음식을 먹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하호호 웃고 있는 소녀는 손짓 하나하나에서부터 우아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마 분명 좋은 집 아이겠지.


저런 사람도 있구나.


제 또래임에도 왠지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가진 소녀를 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상념에 사로잡혔다. 펠릭스도 저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마리네뜨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

그러고 보니 닮았네.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누군가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몇 주 전에 만났던 악당, 러스트(lustre). 딱 한 번 만났음에도 이렇게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이유는 굉장히 강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하얀색의 복장만큼이나 정적이고 고요하며, 그만큼 강했던 사람. 나중에 만났을 때는 또 다시 위험해질 지도 몰랐다. 그 때와 같은 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테니까.



“헉. 왜 심각해지는 거야, 여기까지 와서!”



안 돼, 안 돼!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마리네뜨는 후다닥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가져온 크림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 안에 쏙 집어넣자 부드러운 크림 소스의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맛~있어!!”


역시 비싼 음식이라 맛도 다르구나. 이것저것 먹어보니 확실히 대체로 다 맛있었다. 특히 제일 맛있다고 생각되는 건 메인 디저트 중 하나인 딸기 무스였다. 상큼하고 별로 달지 않은데다 뒷맛이 몹시 깔끔한 게 단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음식을 에스미는 매일 먹고 사는구나. 집이 빵집을 하긴 하지만 마리네뜨의 집은 이런 전문적인 디저트보다는 실생활에서 먹기 편한 제과류를 다루는 쪽이었다. 그래도 언제 한 번 이런 걸 만들어 봐도 좋겠다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배실 웃었다.


티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곳에 오는 건 너무 위험했다. 똑같이 사람이 많아도 걷느라 바빠 자신을 신경쓰지 않는 등하교길과는 달리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 보통인 파티장은 경우가 달라도 매우 달랐다. 이쪽을 보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걸 신경쓰게 되다보면 자연스레 티키와 함께 오더라도 챙겨주기 어렵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티키에게는 무척 불편할 것 같아 그냥 집에 두고 왔지만, 늘 함께하던 상대가 오늘은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허전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펠릭스는 어디 있지? 안 왔나?


다시 그릇에 음식을 수북히 담고 천천히 파티장을 돌아다니던 중 저 멀리에 익숙한 금발 머리가 보였다. 반가움에 이름을 부르려다가 마리네뜨는 살짝 웃고 있는 펠릭스의 얼굴에 순간 멈칫했다. 몇 명의 어른들 사이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펠릭스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고, 그래서인지 평소와는 무척 달라 보였다. 어딘지 꾸민 듯하지만 그럼에도 무척 부드러운 미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펠릭스와 더 잘 어울렸다.


뭐랄까, 어른이라는 느낌?


혹시 다가가면 방해가 될까봐 마리네뜨는 살짝 거리를 두고 먼 발치에서 펠릭스를 훔쳐보았다. 음식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차, 이야기가 끝났는지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펠릭스를 급하게 뒤쫓아갔다.



“펠릭스!”



그 한 마디에 펠릭스가 걸음을 멈췄다. 설마, 싶으면서도 돌아보자마자 보이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펠릭스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평소보다 너무 솔직한 반응에 마리네뜨가 더 놀랄 정도였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순간 펠릭스의 뒤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펠릭스.”



한 손에 칵테일을 들고 멋스럽게 차려입은 백발의 신사가 펠릭스의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저 목소리를 듣자마자 펠릭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보다도 훨씬 냉랭한 표정을 짓고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만 같이 차가운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가슴이 철렁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러지?



“어라, 손님이 있었니.”



백발의 신사가 펠릭스의 어깨에 턱하니 손을 얹었다. 굉장히 차분하고 울림이 있어 듣기 좋은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순간 넋을 잃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인상은 다소 엄해 보이지만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얼굴은 왠지 모를 친근감을 풍겼다.


관록이 느껴지는 백색 눈동자가 마리네뜨를 찬찬히 주시했다.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하고 있던 마리네뜨는 다음 순간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는 남자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파티에는 처음 오나 보군요, 아가씨.”

“네, 네!”



허둥지둥 대답하자 그런 마리네뜨가 귀엽다는 듯이 살짝 웃음을 터트리던 남자는 펠릭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펠릭스, 아는 사람이냐?”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봐서는 보통 사이가 아닌 듯했다. 그러고 보니 펠릭스에게 숙부가 있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유명한 정치가라던데 그게 이 사람인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치만 보고 있던 마리네뜨는 싸늘하게 식은 펠릭스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펠릭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니요.”



무감정한 목소리가 폐부를 찔러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너를 아는 것 같은데.”

“제가 절 아는 사람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숙부님.”

“그것도 그렇다만. 아가씨, 어떻게 펠릭스를 알고 있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동요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펠릭스의 얼굴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듯한 시선에 몸이 차갑게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엄청 지겹게 쫓아다녀도 그냥 무심하기만 했엇지,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 적은 없었는데.


비참해지는 기분에 마리네뜨는 제 옷자락을 꽉 쥐었다.



“페, 펠릭스랑 같은 학교 친구예요.”



활짝 웃으려고 노력했지만 지금 자신이 제대로 웃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먹혀들어갔는지 남자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

“같은 학교… 애가 보이길래, 반가워서 인사해봤어요!”

“오호, 용케 이 녀석을 알아봤군요.”

“공부를 워낙 잘 하니까….”



겉으로는 밝게 웃으면서도 마리네뜨는 덜덜 떨리는 손을 재빨리 뒤로 돌리고 깍지를 꼈다. 접시를 내려놓고 오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다 티났을 텐데. 차마 펠릭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마리네뜨는 그저 눈 앞의 신사에게로 시선을 맞추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자신을 배려해주는 남자의 태도에 마리네뜨는 점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이 욱신거리는 건 여전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은 많이 닮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펠릭스와는 성격이 다른지 신기할 정도였다. 남자에게서 왠지 모를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방금 전 받은 충격 때문인지 마리네뜨는 왜 그런 기시감이 느껴지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 오래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다. 가볍게 인사치레로 몇 마디 주고받다가 다른 곳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남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하더니 가봐야겠다고, 편히 즐기다 가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배려해준다지만 그래도 저렇게 어른인 사람 앞에서는 아무래도 긴장하게 된다. 새삼 자신의 소심함을 깨달으며 마리네뜨는 다시금 파티장 안을 유유자적 돌아다녔다. 지루한 느낌에 살짝 화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혼자 오니까 재미없네. 펠릭스는 혼자 왔을까?


어느 순간 사라진 펠릭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충격받긴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펠릭스의 입장도 다소 납득이 갔다. 아는 사이라고 했고 학교 친구라고 했으면 분명히 학교에서 뭐 하고 지내냐느니 시시콜콜한 질문들이 돌아왔을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얘기하다가 말실수를 안할 자신은 없었다. 분명 당황해서 이것저것 떠들다가 펠릭스가 곤란해 할 만한 화제를 꺼내들지도 몰랐다. 차라리 말하기 전에 차단하는 게 낫지.


물론 이것만으로는 왜 그가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거짓말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로는 좀 부족했다. 그렇게 상냥한 숙부님 앞에서 묘하게 더 말이 없는 것도 그렇고. 쑥스러움을 타나? 윽, 정말 안 어울리는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벽 쪽으로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옆에 나 있던 문이 열리더니 팔 하나가 불쑥 나타나 마리네뜨의 입을 막고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끌려들어간 마리네뜨의 뒤에서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자신을 잡아당긴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펠릭스?”

“쉿.”



조용히 해. 차분하지만 박력있는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펠릭스의 표정이 전에 없이 초조해 보이는 것에 마리네뜨는 살짝 놀랐다. 딱히 이야기를 질질 끌 생각은 없는지 펠릭스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잘 들어.”

“으, 응?”



딱 잘라 말하는 목소리와 달리 말의 내용은 상당히 뜬금없었다.



“절대 숙부한테 접근하지 마. 인사도 하지 마.”

“…어?”

“니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스스로 위험 속으로 걸어들어가지 말라고, 이 멍청한 여자야!”

“뭐?”



펠릭스가 이렇게까지 제 앞에서 말을 많이 했던 적이 있었던가? 멍하니 제게 퍼부어지는 폭언을 듣고 있던 마리네뜨는 다음 순간 펠릭스가 던진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정말 더럽게 말 안 듣는 거 알지만, 이번 얘기는 제발 머릿속에 새기고 가슴에 새겨! 멍청한 거 티내지 말고.”

“머, 멍청이?”

“그럼 멍청하지 아니야? 대체 무슨 배짱으로…!!”



열받은 얼굴로 뭐라 더 말하려다가 펠릭스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 엮이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기에 당황했었지만 어떻게 잘 넘기기는 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너도 위험한 일은 싫겠지.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그만 나한테서 손 떼!”



여기까지가 선이야. 그러니 더 이상 넘어오지 마. 펠릭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세계는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야. 적어도, 너 같은 평범한 여자애가 감당할 만한 것들은 아니라고.”



뭐라 더 설명하려다가 펠릭스는 입을 다물고 한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쳐다보며 펠릭스는 재차 강조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그만 다가오라고. 선을 넘지 마.”

“….”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너까지 챙겨줄 여유도 없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어.”



이렇게 감정적이고, 또 인간적으로 보이는 펠릭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늘 침착하고 정적이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감정이 가득 드러나는 얼굴로 빠르게 다그치는 펠릭스의 모습은 마리네뜨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머리를 휘몰아치는 충격에 어안이 벙벙한 마리네뜨의 표정을 뭘로 해석했는지 펠릭스의 얼굴이 쓰게 일그러졌다.



“어차피 나는….”



숙부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니까.


차마 거기까지 말하지는 못하고 펠릭스는 입을 꾹 다물고 돌아섰다. 그런 펠릭스의 태도에 말하기 곤란한 내용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마리네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싫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은 펠릭스의 발걸음을 단호한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드물게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펠릭스의 등 뒤에서 마리네뜨가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러고 싶지 않아. 난 앞으로도 계속계속 너한테 참견할 거고 계속 쫓아갈 거야!”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마리네뜨에 펠릭스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돌아섰다. 침착한 얼굴로 돌아온 펠릭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말라는 듯이 반문했다.



“헛소리 좀 하지 마. 굳이 위험한 길로 올 필요가 어디 있어?”

“널 좋아하니까!”



펠릭스의 눈가가 일순 움찔거렸다. 마리네뜨가 씩씩거리며 마저 말을 꺼냈다.



“대체 네가 날 언제 챙겨줬었는데? 챙겨줄 필요 없어. 내가 그런 걸 바랬던 적이 있었어? 맨날 나 혼자 좋아하고 쫓아다니고, …셀프로 실연당한 기분 들고 그랬지.”

“….”

“왜 갑자기 나를 걱정하는 척 하는데?”

“그건….”



할 말이 없는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펠릭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마리네뜨가 살짝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주먹을 꼭 쥐면서 애써 발랄하게 말하는 마리네뜨의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난 말이야. 아무런 노력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싫어. 그런 건 질렸으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절망하고 힘들어하고 쉽게 포기하고,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때 왜 그렇게 쉽게 포기했을까, 그렇게 후회하게 되는 게 싫어서.



“내가 좋다는데, 대체 왜 내 마음을 멋대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건데? 난 진심이야. 이렇게 진심이던 적이 없었다구.”

“….”

“확실히 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떨리려는 말끝을 애써 가다듬으며 마리네뜨는 펠릭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시작조차 하지 않는 건 더 문제라고 생각해.”



청회색 눈동자가 그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덤덤한 시선이 오히려 감정을 더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마리네뜨는 한 마디를 덧붙이며 살짝 웃었다.



“혹시 모르잖아. 의외로 잘 해내갈지도.”



레이디버그 일도 그렇다. 처음에는 내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괜히 민폐만 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다가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정말 나에게 히어로 같은 건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생각보다 나름 제대로 해나가고 있는 걸 보면 너무 많이 걱정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펠릭스가 나를 끝내 돌아봐주지 않는다면 무척 슬프겠지만,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벌써부터 물러서고 싶지는 않아.


자신감을 되찾은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하는 마리네뜨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펠릭스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참으로 대책없는 대답이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조건 비관적으로만 봐서는 삶을 꿈꿀 수 없는 걸.”



그 대답에 펠릭스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 그런 펠릭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네가 지금, 날 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살짝 떨려나오는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허세를 부리고는 있지만 그래, 솔직히 말해 좀 무서웠다. 고개를 숙인 채 마리네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펠릭스가 말한 대로 난 정말 바보 멍청이인지도.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 무섭고 지금도 자꾸 손이 떨리는데, 그래도 포기하는 게 더 싫은 걸 보면.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잡고 마리네뜨는 애써 밝게 웃으며 고개를 들고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좋아하게 해줘. 그 정도는 내버려둬 줄 수 있잖아.”



살짝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시선을 펠릭스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눈싸움하듯 서로를 응시하다가 먼저 물러난 쪽은 펠릭스였다.


더는 말하지 않고 펠릭스는 몸을 돌렸다. 미련 없이 돌아서서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다가, 펠릭스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가만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야, 너.”

“…응?”

“그럼 최소한 숙부님 앞에서만이라도 날 모르는 척해.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마.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나는 너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으니까.”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무뚝뚝하게 말을 건네는 펠릭스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살짝 놀랐다가, 곧 환하게 웃었다.



“응! 그럴게.”



한 손을 이마에 대고 경례 자세를 취하는 마리네뜨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펠릭스가 휙 뒤돌아섰다.



“이상한 녀석.”



넌 좀 나중에 나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다시 파티장으로 나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응시하던 마리네뜨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살짝 가셨다. 사람 좋게 웃고 있던 단정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방금 전 만났던 펠릭스의 숙부, 제레미를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고민에 빠졌다.



“뭘까?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너를 그렇게까지 말하게 만드는 거야?








조용히 문을 닫고 연회장으로 나온 뒤 펠릭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태연하게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려는 찰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왜 산 넘어 산이냐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친해 보이더라?”

“클로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소녀가 펠릭스에게로 걸어왔다. 살며시 미소짓는 얼굴은 여러 남자들을 홀릴 법한 미인이었지만, 펠릭스는 전혀 감흥 없다는 표정으로 제 소꿉친구의 모습을 무심히 훑어보았다.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에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러스트.


‘아니야.’


펠릭스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습만 생각해서는 충분히 의심을 할 법했지만 클로에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유명한 사업가이자 지금은 파리 시장인 마크 일레인의 딸로 태어나 외모, 두뇌, 집안까지,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녀석이 굳이 그런 모험을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일단 경계해서 나쁠 건 없겠지.



“너, 대체 그 여자애랑 무슨 관계야?”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펠릭스의 상념을 깨운 것은 싱글싱글 웃는 클로에의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펠릭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사이라고 할 것도 없어.”

“아무 사이도 아닌데, 천하의 펠릭스 아그레스트가 그렇게까지 신경쓴다고?”

“단어가 거슬리는군. 아니라고 했을 텐데.”

“하긴 그런가. 생각해보면 넌 은근히 사람한테 약한 타입이니까.”



혼자 묻고 납득하는 클로에를 보는 펠릭스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그가 나직히, 하지만 냉랭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만해.”

“…알았어.”



더 이상 말하면 화낼 거라는 걸 직감했는지 순순히 입을 다무는 클로에에게 펠릭스는 재차 못을 박았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뒀을 텐데. 지나친 참견은 불쾌하다고.”



냉정하게 선을 긋는 펠릭스의 목소리에 클로에는 일순 움찔했지만, 곧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 왜 그래? 당연히 알고 있지.”

“알면 됐고. 이야기는 끝난 거지?”

“어, 어…?”

“끝났으면 이만 가보겠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순 없으니까.”



망설임없이 돌아서 파티장 쪽으로 나가려는 펠릭스의 등을 보자마자 클로에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펠릭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살짝 돌아보는 펠릭스에게 클로에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지 마.”



지독히도 독점욕이 묻어나는 한 마디에 펠릭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급속도로 피곤해지는 기분에 펠릭스는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매번 질리도록 듣는 이야기. 지겹다.



“그런다고 너한테 가지는 않아.”



딱 잘라 내뱉는 펠릭스에게 클로에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렇게 말해도, 결국 넌 나를 택하게 될 거야.”



조용하지만 악에 받친 듯한 클로에의 목소리를 들은 펠릭스의 얼굴에 낮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정말로 질렸다는 듯이 공허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클로에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아주 살짝 떠오른 비릿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오싹해지게 만들 정도로 싸늘했다. 쉿쉿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클로에의 귓가에 서늘하게 꽂혔다.



“그거 참 기대되는군.”







“의원님.”



조용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제레미 유피테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비서의 무표정한 얼굴에 제레미는 웃으며 말했다.



“뭔가.”

“잠시.”



가까이 다가온 엘렌이 몇 마디를 소곤거리자 제레미의 눈이 일순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추진하도록 해주게.”

“네,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엘렌의 뒷모습에 제레미와 함께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



“자네 비서는 언제 봐도 미인이구만.”

“하하, 감사합니다.”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는 제레미에게 그 옆에 있던 사람도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웃을 줄 알면 좋겠건만, 저렇게 딱딱해서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잖은가.”

“그러게나 말일세. 무척 우수하다고는 들었네만, 거 여자가 나긋나긋한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하.”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던 제레미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쭉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제 곧 마크 시장님의 축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단상 위를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회장 안을 가로질렀다. 참석한 손님들이 모두 단상 위를 돌려다보자 금발 머리의 중년 남자가 단상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이 호텔의 주인이자 파리의 시장직을 맡고 있는 마크 일레인 시장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에, 친애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나와주셔서 감사합….]


“멈춰!”



거친 목소리가 시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허둥대기 시작하는 손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장이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대는 순간 불이 켜졌다.



“헉.”



검은 두건을 쓴 남자 다섯이 연회장의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각기 양 손에 들고 있던 기관총을 사람들에게 겨누자 다들 기겁한 얼굴로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어린애들 몇이 와앙 울기 시작하자 쩔쩔매며 달래는 부모들에게 선두에 선 남자가 소리질렀다.



“입 닥쳐!”

“이보시오, 이게 무슨….”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시장에게 남자는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 버튼 하나라도 눌렀다가는….”

“꺄악!”



그 말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와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꽉 잡아챘다. 강렬한 아픔에 클로에가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아니, 지금 무슨 짓이에요, 이…?!”



남자가 겨눈 딱딱한 총구가 클로에의 목에 닿았다. 경악해서는 입만 벙긋거리는 클로에나 그런 딸의 모습에 사색이 된 일레인 시장을 향해 남자는 짜증스레 소리쳤다.



“네 딸의 목숨을 대신 받아가겠다.”



소란스럽게 구는 사람들을 위협하듯 복면을 쓴 남자 중 한 명이 천장을 향해 총을 쐈다. 두두두두 울리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구멍이 뚫리고,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탄창 소리가 그렇게 소름끼칠 수가 없었다. 다들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피는 와중에 시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목적이오?”



사업가답게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레인 시장을 지긋이 바라보던 남자가 짧게 조소를 터트렸다. 자기가 먼저 시작했으면서 우리들 악당 취급하는 이런 언밸런스함이라니.



“뭐, 별 거 아니야. 이번에 당신이 추진하는 재개발 사업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만 쓰면 되니까.”



씹어뱉듯이 내뱉는 남자의 목소리에 주변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업? 무슨 사업? 아, 이번에 8구에서 추진되는 그거? 근데 그건 이미 승인까지 끝난 사항일 텐데? 그거 엎어보자고 지금 이러는 거야?


그런 주변의 소란과 상관없이 시장은 경악하는 얼굴로 말했다.



“웃기지 마시오! 이미 다 승인한 사업을 무슨 수로 뒤집는단 말입니까. 심지어 그건 시에서 주관하는 건데!”

“닥쳐!”



그 한 마디와 함께 남자는 시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린 그 재개발 사업 때문에 집에서 내쫓겨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알고 있소. 그래서 그 지역에 살던 세입자들에게는 제대로 보상을 했잖소. 왜 갑자기 이러는 거요?”

“본인 보기에 괜찮으면 다 제대로 된 보상인가 보지?”



복면 아래로 들려오는 비웃음에 시장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있었다. 곧 김도 나겠다 싶을 정도로.



“어, 어떡하지?”



한편 마리네뜨는 강도단과 상당히 떨어진 벽측에 서서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레이디버그로 변신해 해치우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티키가 곁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걸까?


시장이 쉽게 넘어오지 않자, 남자들은 일단 시장의 딸을 인질로 잡고 있을 생각인지 클로에를 데리고 파티장에서 철수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보냈다간 클로에가 멀쩡히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시장의 경호원들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인질이 더 위험해질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엇다.


기다려 달라고 다급히 소리치는 시장과 강도들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클로에의 모습을 보면서 마리네뜨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도 없다니.


속이 쓰렸다. 난 대체 얼마나 바보인 걸까. 뭐가 파리의 히어로야? 미라큘러스가 없는 나는 이렇게나 무력할 뿐인데. 들떠있었던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 같다. 티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잖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데.



‘어린애는 냅두고 날 인질로 잡지 그래.’



생각해보면 당시 펠릭스의 행동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물론 놀라울 만한 격투술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총신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다니. 난 이렇게 멀리 있어도 너무 무서운데.


생각해보면 악당들은 하나같이 패턴이 다 비슷한가 싶었다. 협박을 위해 인질을 붙잡는 것도 그렇고 그 당시 은행 강도들과 정말이지 똑같은 패턴에 절로 한숨만이 나왔다. 다른 점이라면 여기에는 레이디버그라는 영웅 대신 평범하고 무력한 여자아이밖에 없다는 것 정도일까.


그렇게 한창 자괴감에 빠져 있던 찰나 마리네뜨는 문득 제 눈앞에 있는 하얀 테이블보를 바라보았다. 이 파티장의 테이블들은 모두 바닥까지 오는 하얀 천으로 덮여 있어 테이블 아래쪽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테이블이 사방으로 많이 퍼져 있었다. 강도들 주변에도.


혹시, 저걸 이용하면….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마리네뜨는 곧 결심을 굳혔는지 테이블 쪽으로 슬슬 움직였다.


반면, 강도단과 거의 대치하는 자리에 서 있던 펠릭스는 지금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 강도들이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떨쳐내지 못한 위화감.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이게 무슨 생각인가 싶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저들은 대체 어떻게 이 파티장까지 올라왔지?


샹그릴-라 호텔은 파리에서도 알아주는 5성급 호텔이다. 에펠탑과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이 호텔은 전망도 전망이지만 특유의 엄격한 방비 시스템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총을 가지고 있어봤자 호텔의 모든 출입구는 철문 아니면 방탄유리였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제대로 출입을 허가받은 자가 아니라면 분명 한 번쯤은 경비 시스템이 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리셉션장까지 올라오기까지 소동은커녕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곰곰이 고민하던 펠릭스의 시야에 클로에가 남자가 세게 휘두른 총의 개다리판에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하는 장면이 클로즈업되어 찍혔다. 기절한 클로에가 남자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며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먼저 행동한 사람이 있었다.



“기다리시오.”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는 제레미를 보며 선두에 있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곧바로 겨누어지는 총구에 몇 사람이 안타까움의 비명을 질렀지만, 제레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이, 뭐 하는 짓이지?”

“상관없는 아이를 끌어들이다니, 너무 과한 행동 같소만.”

“죽고 싶은 건가?”

“하하하. 그쪽이야말로 배짱이 과한 것 같습니다.”

“어이, 이 영감탱이가 무슨….”

“그 총, 가짜 아닙니까?”



그 한 마디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고, 뒤에 있던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웃기지마, 무슨…!! 직접 두 눈으로 봤을 텐데? 천장이 아니라 당신 얼굴을 뚫어줘야 믿겠어?”

“그럼 그 총만 진짜겠지요.”



덤덤하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는 제레미는 도저히 목숨을 위협받은 사람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까지 느껴지는 제레미에 남자는 살짝 두려움까지 느꼈다.



“웃기지 마, 이런 건방진…!!”



바로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제레미를 노리기 위해 앞으로 한 걸음 나선 순간 남자의 몸이 비틀거렸다. 미끌거리는 것을 밟은 것처럼 발을 헛디딘 남자가 바닥으로 쾅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넘어졌다. 강도들도 놀랐지만 뒤에 서 있던 사람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쏴 보세요. 총은 한 자루가 아니지 않습니까?”



씨익 웃으며 계속 재촉하는 제레미에 강도들은 처음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소동 와중에 테이블 밑을 바쁘게 지나다니는 누군가가 있었다. 테이블에서 테이블로 조심스럽게 옮겨가며 강도들에게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테이블 아래쪽으로 옮겨간 마리네뜨는 천을 걷고 살짝 바깥을 내다보았다. 조금 두려운지 살짝 손을 떨다가, 테이블을 조금조금씩 강도들이 있는 쪽으로 밀어가기 시작했다.


서로 눈치만 보다가, 강도들 중 한 명이 재빨리 쓰러진 남자에게로 달려가 총을 집어들려고 했다.



“악!”



발에 뭔가 걸린 것처럼 바닥에 고개를 처박는 그를 보며 옆에 있던 동료가 소곤거렸다.



“야, 너 왜 그래?!”

“몰라, 갑자기 발이 미끄러졌다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클로에에 힘껏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한 마리네뜨는 생각하고 말고도 없이 있는 힘껏 클로에의 드레스를 잡고 제가 들어가 있는 테이블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빨리 총이나 집어들어!”



결국 다른 한 사람이 총을 집어들고 근처에 내려두었던 클로에를 끌어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어라?”



클로에가 사라진 것에 깜짝 놀라 주위를 휙휙 돌아보던 강도에게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퍽, 소리와 함께 커다란 접시를 등에 맞고 쓰러지는 강도를 마지막으로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강도들을 모두 붙잡았다. 그 광경을 뒤에서 마냥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제레미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돌아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아본 제레미가 웃으며 속삭였다.



“경찰에 연락했나, 엘렌?”

“네. 지금쯤이면 슬슬 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엘렌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제레미는 뭐라고 작게 속닥거렸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뒤로 돌아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지는 엘렌을 뒤로 한 채 제레미는 성큼성큼 걸어가 강도들 옆에 있던 테이블의 천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테이블 밑에는 클로에 혼자 기절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제레미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더니 곧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시장이 달려와서 쓰러져 있던 클로에를 끌어안는 장면을 마리네뜨는 한참 뒤에서 살펴보았다. 빨리 빠져나오길 잘했다. 들켰으면 왠지 민망했을 거 같은데.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돌아서는 마리네뜨의 앞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어, 펠릭스!”

“…역시 너였나.”



이런 대담한 짓을 한 사람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뺨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냥 보고 있기가 좀 뭐해서.”

“자칫하면 너까지 위험해졌을 수도 있는데?”

“음, 잘 되지 않을까 했었지. 내가 요즘 운이 좀 좋거든.”



헤실헤실 웃는 마리네뜨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펠릭스는 여느 때처럼 적당히 무시하고 넘기는 게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여간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는군. 방금 전 강도에게 접시를 던진 장본인이 할 생각은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신기하다, 어떻게 총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아셨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펠릭스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망설임을 접고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마, 저 인간들이 총을 너무 자유자재로 다뤄서겠지.”

“에?”



자신을 돌아보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다시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저 정도 크기의 기관총이면 굉장히 무거우니까. 장정 남자라도 저렇게 한 손으로 막 들고 다니지는 못하지. 실제로 아까 천장으로 총을 쏜 남자는 총을 두 손으로 붙잡고서 발사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사람 빼고는 다들 총을 대체로 가벼운 물건 다루듯 들고 있었어. 그런 점만 봐도 쉽게 추론이 가능하지. 아,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총만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구나.”

“그렇구나….”

“애초에 처음 그 사격만 해도 단순한 위협용이 아니라, 모든 총이 다 진짜일 거라는 암시를 하기 위한 장치였을 거고.”



감탄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펠릭스는 질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등을 돌렸다. 그런 펠릭스를 보며 살짝 웃음을 터트리다가 마리네뜨는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짓고 중얼거렸다.



“하긴, 그러고 보면 집 살 돈도 없어 내쫓긴 사람들이 무슨 돈이 있어 저런 비싼 총을 잔뜩 샀겠어.”

“그것도 있고.”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하는 펠릭스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져 있었다. 이쪽 벽에 불이 없어 어둡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표정이 좋지 않아서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아무튼, 다시 나 아는 척 하지 마.”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뒤돌아서 가버리는 펠릭스의 등 뒤에서 마리네뜨는 살짝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지가 먼저 아는 척해 놓곤.”






사건은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알고 보니 일레인 시장은 얼마 전부터 이 문제 관련으로 계속 협박장을 받고 있었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했는데 설마 파티장까지 숨어들어올 수 있을지는 몰랐다며, 앞으로 더욱 호텔의 보안을 철저히 할 것을 공약하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되었다.


시장의 상황 설명과 장황한 사과가 끝난 뒤, 다시 파티가 재개되었다. 아까 그런 소동이 있었음에도 전혀 문제없이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벽에 기대어 지켜보는 펠릭스의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서렸다.


그래, 여기는 이런 곳이지.

잊고 있었던 건 아닌데 새삼스레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걸까.


한 손에 주스잔을 들고 근처 벽에 기대어 생각 없이 연회장을 지켜보고 있던 펠릭스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기댔다. 시선을 살짝 돌려보자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냐고 물을 생각도 쫓아보낼 생각도 없었기에 펠릭스는 고개조차 돌리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자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펠릭스는 더 이상 연회장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참 그럴듯해. 정말로.”



펠릭스가 듣던 말던 남자는 그저 떠들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엔 참으로 좋은 미담이 아닐 수 없지. 목숨을 걸고 맨몸으로 나서서 잡혀있던 시민을 구하려고 했던 정치인에 대한 기사가 내일 신문에 뜨겠지. 호텔 피습 사건? 재개발 사건의 진실은? 뭐 이런 기사 헤드라인이 곧 다음 날 신문 1면을 장식할 거야. 내 기자로서의 경력을 걸고 장담할 수 있어.”



자신을 기자라고 소개하는 남자가 마저 말을 이었다.



“이 일로 다시금 일레인 시장이 추진하던 8구 재개발 사업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질 거야. 그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추진되어 왔든 이런 일이 생겼으니 분명 의혹이 제기될 거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진행되든 결국 욕을 먹게 되겠지. 사업 추진도 늘어질 거고.”

“….”

“설령 그 지역 재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 나름 굉장히 합리적인 판단 하에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말이야.”



펠릭스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소년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남자는 더욱 한탄어린 어조로 말했다.



“시민들은 멍청하니까. 겉으로 보기에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앞 뒤 안 가리고 나서는 이들도 많지. 결국 살펴보면 모두에게 이득인 관계라도 마찬가지야. 인간은 그리 이성적이지 못해.”

“….”

“그리고 그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알력에서 이득을 챙기는 건 매우 영리하고, 또 자기밖에 모르는 지독한 놈들이지.”



들고 있던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면서 남자는 살짝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이 일로 유피테르 의원의 인기는 또 하늘처럼 치솟겠지. 히야, 손해는커녕 이득만 가능한 상황이구만 이거?”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윤곽이 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뭐라고 말할 만한 사항은 아니었으므로 펠릭스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더 말해볼까? 기자 생활 초반부터 유피테르 의원을 봐왔지만 나는 저 양반이 한 번이라도 삐끗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늘 사람 좋은 얼굴로 건실하고 좋은, 시민들에게는 더없이 좋아보이는 정책들을 들고 나와서 신뢰를 얻었지.”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란 없잖아? 정치판 같은 곳이면 더더욱이나. 승승장구하는 저 의원을 짓누르려고 하던 사람들이 없었을 거 같아?”



있었지. 그 한 마디를 덧붙이며 남자는 다시금 목이 타는지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두 하나씩은 지독한 일을 당했단 말야?”

“….”

“이번 일레인 시장도, 다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이번 재개발 건으로 유피테르 의원과 충돌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고.”

“….”

“아주 구린 냄새가 난단 말이야. 딱 보기엔 굉장히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하얗게 덮으려고 해봤자 얼룩진 본성은 사라지지 않아. 감출 수 있을 뿐이야.”



자신을 오래 감출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영리한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알지만 나는 그를 모르기에.



“뭐, 나쁜 말이 나오지 않게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도 능력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기자는 펠릭스를 살짝 돌아보았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펠릭스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기자가 장난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뭣 좀 아십니까? 아그레스트 가의 도련님.”



아까의 중얼거림과는 달리 온전한 존댓말. 정중하게 제 의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펠릭스는 차분히 응수했다.



“…별로.”



그 한 마디와 함께 펠릭스는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파티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펠릭스를 바라보며 기자는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녀석일세.”






“그런 일이 있었구나.”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있는 제 주변을 뱅뱅 맴돌며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티키를 마리네뜨가 두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꺄르르 웃어대는 티키를 보며 피식 웃던 마리네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완전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나중에는 막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그래도 마리네뜨 진짜 용감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되게 무서웠을 텐데.”

“에헤헤, 그냥, 뭐….”



사실 마리네뜨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조금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히어로가 되더니 정의감만 늘었는지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또 그걸 실천에 옮기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티키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티키, 다음부터는 불편하더라도 같이 와 줄래?”

“나는 상관없어. 그러니까 오늘 일 너무 신경쓰지 마, 마리네뜨.”



또 제가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걱정되는지 다정스레 말을 건네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미라큘러스가 없는 나는 지극히 평범한 소녀지만-.”



자신은 평범하다. 아마 계속 히어로가 되더라도 나는 이 사실에 계속 염려하고 불안에 떨게 되겠지. 레이디버그는 나지만 내가 아니니까. 진짜 내 삶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


결국 레이디버그로서의 삶은 내게 있어 꿈에 지나지 않으니까.

꿈이란 잔인하다. 언제 끝나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에.



“아직은 미라큘러스가 내 손에 있으니까. 최소한 내가 레이디버그로 더 이상 변신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깜깜한 밤,


낮의 북적거림이 사라지고 고요한 밤이 식물원에 날아들었다. 관광객들과 시민들로 늘 사람이 넘쳤던 낮과는 달리 밤의 식물원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어두웠다. 곳곳에서 엷게 빛나는 백열등의 흐릿한 빛들이 식물원을 더욱 더 신비스럽게 연출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나무들 사이로 그림자가 하나 움직였다. 사람의 그림자였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건지 식물원 안을 유유히 거닐던 그림자는 곧 제 앞쪽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찾아냈다. 창백한 피부에 눈가에 찍힌 눈물점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마임맨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앞에 선 자신의 주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단정하게 정돈된 백발과 날카로운 백안을 빛내는 남자였다. 분명 젊었을 때 상당한 미남자였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정답게 그려주고 간 주름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남자의 눈빛은 냉랭했다. 낮에 보였던 온화한 얼굴 대신 냉혹한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웃음이라고는 모를 것처럼 무감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에게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탁한 백색의 눈동자가 흡사 뱀의 눈동자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마임맨에게 남자는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답에 만족했는지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시 터벅터벅 제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는 남자에게 마임맨은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시간이 걸릴 듯 싶습니다.”

“그렇군.”



마임맨의 바로 앞까지 왔다가,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마임맨의 옆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다루기 어려운 패는 필요없지.”



필요할 때까지만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간에.


그런 남자의 잔혹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마임맨은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의 앞에서는 말이 많아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이미 체득했기 때문이다.



“예정 날짜에 맞출 수 있도록 하지.”

“예.”



꾸벅 고개를 숙이는 마임맨을 뒤로 한 채,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투명한 유리 천장 너머로 별이 마냥 반짝거렸다.




- 봄: printemps : 인연의 시작 편 마침 / 여름: été로 이어집니다.




===

드디어 봄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네 길었죠? 달려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그리고 다들 대충 예감하셨겠지만 봄 에피는 진짜 프롤로그 격이라고 보시면 되구요... 여름부터 본격적인 애들의 사랑전선과 찌ㅋ통ㅋ이 시작됩니다 ㅎㅎㅎㅎ 여름 에피는 제가 봐도 정말 멘탈 후려치는 에피들이 대부분이라 애들이 좀 걱정되긴 하는데 뭐 잘들 해내겠죠 ㅇㅇ



6화를 작업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점은 히어로들을 출연시켜서 사건을 해결할지, 아니면 다른 루트를 사용할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다 정해놨지만 이걸 엄청 고민했었는데, 맥락상 안 넣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히어로들이 주인공인 건 맞지만, 꼭 매 에피마다 히어로들이 나와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나오는 화도 있고 쉬어주는 화도 있어야겠죠. 그리고 히어로들을 꼭 넣자고 생각하면 화마다 다룰 수 있는 주제가 매우 한정되어 버립니다. 뭐 이건 제 능력 탓일 수도 있지만요.


각설하고, 사실 6에피는 다 떠나서 저 아저씨를 등장시키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습니다ㅋㅋㅋㅋㅋ 6화의 제목이 왜 저럴까? 하신 분들이 계셨겠지만 6화의 제목은 맨 마지막을 위한 거였습니다 호호호. 다들 처음 나왔을 때부터 짐작하셨겠지만 당연히 저 아저씨가 호크모스입니다...


이중인격이 좀 쩌는 분인데 그냥 사회생활 잘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의외로 저런 정치인 현실에 꽤 많구요.. 현실을 열심히 반영해 보았습니다^ㅁ^


호크모스의 정체를 암시하는 것으로 봄 에피소드를 끝내고 싶었어요. 계절 파트마다 다루는 내용들이 딱 있고 마지막 부분은 그 다루는 주제에 종결을 찍는 식으로 구성했어요. 재미있으셔야 할텐데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다 부들...ㅠㅅㅠ


그리고 펠릭스는 당연히 숙부의 저런 성정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왜 펠릭스가 마리네뜨에게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며 화까지 내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기도 한데 이건 설명하자면 스포같아서 안 되겠습니다;ㅅ; 책에서 봐주세용^ㅁ^


봄 에피소드에서 제가 추구한 것이 일단 펠릭마리 두 사람이 히어로가 되는 계기와, 아이들 주변의 관계성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잘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성들을 알고 계셔야 전체적인 스토리 흐름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뭐 사실 좀 걱정되는 면들도 있습니다 5에피나 6에피의 경우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한 에피소드당 30페이지 내외로 끝내야 하기 때문에 필요 없는 부분들은 모두 컷하고 있습니다. 즉 제가 집어넣는 것들은 대체로 다 그 이유가 있다는 거죠. 하지만 표현하기 애매해서 그냥 상황적으로 판단하시게 냅두고 넘긴 부분들도 있습니다. 가령 6에피 사건 후반부가 좀 의아하신 분들이 계실 텐데 조금 머리를 굴려보시면 답이 나오실 겁니다 ㅎㅎ


여름 에피소드 재밌을 겁니다 최소 제 기준에는 봄보다 재밌더군요... 사실 쓰는 입장서는 봄이 제일 재미없었어서;ㅅ; 여름! 지금이 여름이니까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며 스퍼트를 올리면 되겠군요ㅇㅁㅇ!



이상입니다. 일단 온리전에서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_<

Posted by I.R.E
,

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4

※ 제목은 차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Episode 5.

시작된 변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구우우-!!”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마리네뜨는 베개에 얼굴을 쿡 박았다. 그렇게 침대에 엎드린 채로 마구 발버둥을 치던 마리네뜨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에스미가 대체 뭐에 화가 났지?”



말을 걸어도 대답 안 해주고, 앞으로 다가가도 ‘내 앞엔 공기밖에 없다’ 식으로 무시하고, 애초에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애교를 부려봐도 냉랭하게 무시하는 걸 보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 그럼 나도 너랑 절교야! 를 외치기에는 에스미의 성격이 마음에 걸렸다.


겉으로 보기에 차가워 보여도, 에스미는 이유 없이 화를 낼 성격은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 이렇게 딱 짐작가는 게 없을까.


거하게 한숨을 내쉬는 마리네뜨를 티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푸념하듯이 말을 늘어놓았다.



“나한테 자기가 왜 화났는지 생각해보라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해도?”

“짐작가는 게 너무 많아!!”



이건가? 아니 이건가? 혹시 이거? 손가락을 접어가며 그간의 행동들을 되짚어보던 마리네뜨는 다시금 베개에 얼굴을 포옥 묻었다.



“으아, 모르겠어!”



또 다시 이리저리 버둥거리다가 침대에 축 늘어졌다. 살며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마리네뜨가 바로 옆에 보이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침대 위를 두들기다가 주먹을 꼭 쥐었다.



“어떡하지….”



눈을 깜빡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가볍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마리네뜨. 이런 경우는 아무래도 시간이 약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래?”

“대화를 나누기에는 지금은 좀 무리일 거 같으니까, 화가 조금이나마 풀릴 때까지 거리를 두는 게 어떨까?”

“그게 나으려나….”



티키의 제안에 마리네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다 배시시 웃었다. 그래, 괜찮겠지. 전에도 싸웠던 적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화해했었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 근데 그 때 뭘로 싸웠더라? 너무 졸려서일까, 잘 기억나지 않았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마리네뜨는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게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건 금세 드러났다.



“그럼, 이상으로 내일 있을 체험학습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치도록 하마. 준비물은 프린트에 적어두었으니 참고하고.”



체험학습을 잊고 있었어!


마리네뜨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프린트를 받아들었다. 이번 주 금요일, 즉 내일 있을 단체 체험학습은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에서 진행된다. 엄청나게 넓고 사람은 또 사람대로 많아서 돌아다니기도 힘들지만 세계 3대 자연사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만큼 볼거리는 충분한 곳이다. 감상문을 적어야 하는 게 좀 걸리기는 하지만.


원래는 에스미와 같이 돌아다니기로 했지만 이런 상태로는 무리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같은 조로 적어서 냈는데.


…올해도 또 혼자 다니게 되는 걸까.


쓰게 웃으면서 프린트를 가방에 집어넣고 짐을 챙기던 마리네뜨의 책상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마자 무감정한 얼굴로 제 앞에 서 있는 에스미를 본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뭐라 말할지 고민하다가 마리네뜨는 말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헤실 미소지었다. 왠지 지금 말을 꺼내면 다시 화낼 거 같아서 무섭다. 그러니 그냥 웃는 게 낫다. 설마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않을 테니까.


그저 헤헤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펴보던 에스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 바보를 어째야 할까.



“이거.”

“으, 응?”



에스미의 손에 들려 있는 체험학습 프린트를 본 마리네뜨의 눈이 깜빡거렸다. 뭐라 생각하기도 전에 에스미가 딱 잘라 말했다.



“같이 가야하니까 기다려, 그 날.”

“어, 응!!”



기합이 팍 들어서 크게 소리치는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스미는 아무렇지 않게 뒤로 돌아섰다. 별로 웃어주거나 이제 화해하자거나 이런 말 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마리네뜨는 에스미가 많이 누그러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미라큘러스의 힘이라기보단 친한 친구로서 느끼는 직감에 가까웠다.


책가방을 챙겨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온 마리네뜨는 교정을 거슬러 걸어가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대번에 기분이 좋아졌다.



“펠릭스!”



우울했던 기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에 하트를 그리며 펠릭스에게로 달려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명 마리네뜨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펠릭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근처에 있던 나무에 가만히 손을 댔다가, 뗐다.


손끝에서 나오는 검은 오오라가 파우더처럼 나무에 뿌려지자 손끝이 닿은 부분의 나무줄기가 살짝 건조해졌다. 동시에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있던 사과 하나가 휘청 흔들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잔뜩 미소를 뿌리며 뛰어오던 마리네뜨가 어느덧 나무 밑까지 다가왔다. 앞서가는 펠릭스를 어떻게든 따라잡으려 더욱 빨리 뛰기 위해 다리에 박차를 가려던 마리네뜨는, 싸한 예감에 저도 모르게 급제동을 걸었다.


마리네뜨가 멈춰서자마자 정확히 마리네뜨의 바로 앞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잡아챘다.


초록색 사과였다. 붉은 끼가 살짝 도는 걸 봐서는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이 분명한.



“어라? 왜 사과가 떨어졌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다시금 앞을 쳐다본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헉, 어디 갔지?”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펠릭스는 유유히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마리네뜨의 더듬이가 마리네뜨의 기분마냥 추욱 늘어졌다.


오늘도 놓쳤네.



“그렇게 매정하게 가버릴 건 없잖아!”



입을 불퉁하게 내밀며 투덜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은 그래도 방금 전보다는 훨씬 편안해 보였다. 이미 가버리고 없는 펠릭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또 놓치다니.


그러고 보니 요즘 자주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야. 발견했다 싶으면 꼭 이렇게 무슨 일이 생겨서 놓치게 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만.


울상을 지으며 마리네뜨는 들고 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지금은 딱딱하고, 살짝 시큼한 맛이 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달콤해질 사과를.









파리 5구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


세계 3대 자연사 박물관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는 이 자연사 박물관은 자르딘(Jardin Des Plantes)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식물정원과 동물원, 인류학 박물관으로 나뉘어 있다. 생물표본, 광석, 화석 등을 약 6000만점 소유하고 있으며, 식물 표본만도 800점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는 이 거대한 박물관에는 오늘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관광객들은 물론 파리 시민들까지도 나들이를 할 때는 여지없이 이 곳을 찾았다. 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식물원과 동물원이 갖춰져 있어 가족끼리 놀러 오기가 좋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으면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경우도 많았다.


진화관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보이는 것은 엄청나게 큰 덩치를 가진 여러 동물들이었다. 정확히는 그 동물들을 박제한 표본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코끼리를 선두로 그 뒤를 따라 어디론가 향하는 것처럼 묘사된 수많은 동물들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키기 충반했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히야….”



몇 번을 왔지만 언제 봐도 대단하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진화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마리네뜨는 지금 자신이 이렇게 들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에스미를 놓쳤다.


정확히는 너무 들떠서 이리저리 걸어다니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정도일까?


에스미, 어디 갔지? 오늘은 그래도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았는데 또 화났을지도 모른다. 하긴 나라도 이렇게까지 멍청하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을 거 같아. 들떴던 기분이 한 번에 축 가라앉았다.


모처럼 화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 왜 이 모양일까.


안 돼, 안 돼! 우울해하지 마. 벌써 이러면 안 돼.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어떻게든 웃기 위해 애쓰던 마리네뜨는 뒤에서 나지막히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 펠릭스 이 녀석 대체 어딜 간 거지.”



어라?


뒤를 돌아보니 갈색 피부에, 삐죽삐죽 솟은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개구진 얼굴이나 활동적으로 보이는 제스처를 보면, 도저히 그 진중하다 못해 조용한 펠릭스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체 얘가 펠릭스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사실 동명이인을 부른 건 아닐까? 그렇게 의심할 찰나, 마리네뜨를 발견한 소년이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거리더니 손가락으로 마리네뜨를 가리켰다.



“어, 너 펠릭스 근처를 맴도는 그 더듬이 아냐!”

“누가 더듬이야!”



대번에 버럭 소리지르며 씩씩거리는 마리네뜨의 기세에 놀랐는지 소년은 대번에 사과했다.



“불쾌하게 들렸다면 미안해. 그럼 넌 이름이 뭔데?”

“어…?”

“이름을 알아야 부를 거 아냐? 내 이름은 앨빈. 앨빈 에반워프야.”



상큼하게 웃으며 앨빈이 마리네뜨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이내 결심했는지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말했다.



“…마리네뜨. 마리네뜨 뒤팽 쳉.”

“그래. 아, 그나저나 너 혹시 펠릭스가 어디 갔는지 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나저나 네가 어떻게 펠릭스를 아는데?”

“같은 반이거든.”

“같은 반인데 왜 펠릭스를 찾아?”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



쌈박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친구? 펠릭스랑 친구가 되겠다고?”

“어, 왜?”

“그게….”



저렇게 세상 혼자 살 거 같은 녀석이랑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그 발상이 무척 놀라워서.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기에 마리네뜨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펠릭스가 상상 이상으로 무뚝뚝하다는 사실은 마리네뜨 자신도 이미 인정하고 있던 바였다.


일단 입을 열 때가 무척 적었다. 의사표현을 해야 할 때는 어지간해서는 고개 끄덕끄덕, 도리도리, 그것도 아니면 무시. 딱 이 세 가지 패턴을 고루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싫어해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지켜보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저렇게 살면 안 피곤한가? 나라면 되게 피곤할 거 같은데.


목소리도 좋은 애가 왜 그렇게 입을 꾹 닫고 사는지 마리네뜨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이젠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그나마 말을 좀 많이 했던 건 레이디버그로서 처음 만났을 때 정도였다. 그 때는 단순히 좀 무뚝뚝한가 싶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왜 그 때는 그렇게 말이 많았던 거지?


떨떠름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앨빈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저런 무뚝뚝한 녀석이랑 친구가 되려는지 궁금한 거지?

“으, 응?”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바라보던 앨빈이 피식 웃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구나.



“일단 그 녀석이나 찾으러 가볼까? 보나마나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닐 거 같으니까.”



그 말과 함께 손을 놓고 앞장서는 앨빈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마리네뜨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그의 뒤를 쫓았다.



“짐작가는 곳이 있어?”

“프린트에서 녀석이 어디를 보는지 몰래 살펴봤지. 진화관이랑 식물원을 보고 있던데 여기 없으니 아마 식물원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어.”

“헐, 그거 사생활 침해 아냐?”

“시도때도 없이 쫓아다니는 너만 할까.”



태연하게 맞받아치는 앨빈의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가족관계에 취미까지 조사했었던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긴 좀 민망하기도 했고.



“아,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갔네. 아무튼 내가 그 녀석이랑 친구가 되고 싶은 건….”

“되고 싶은 건?”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귀를 기울이는 마리네뜨를 돌아보며 앨빈은 싱긋 웃었다.



“내가 어느 날 축구를 하고 있었거든.”

“엥?”



갑자기 이게 뭔 소린가. 그렇게 묻는 듯한 마리네뜨의 표정을 보며 앨빈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막고 큭큭 웃으며 걸어가는 앨빈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이상한 놈 취급하듯이 쳐다보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이야, 너 진짜 얼굴에 다 티난다. 혹시 너, 평소에도 생각을 얼굴에 써붙이고 다닌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냐?”

“헉, 그걸 어떻게…!”



귀신보듯이 식겁한 표정으로 자신에게서 물러나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사람이 싫다는 건 아냐. 아무튼 이야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웃어서 미안해. 너 재미있네.”



악의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감탄사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신기한 녀석이다. 얼핏 들으면 기분 나쁠 법한 소리를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소화하다니.



“재미있어서 미안하게 됐네요. 그래서?”

“그 때, 내가 공격수였거든. 결정적인 찬스를 잡고 공을 찼는데, 이게 골대를 넘어서 공원 밖까지 넘어가 버렸지 뭐야.”

“응.”

“공원 밖으로 나와서 공을 찾았는데 공이 저 도로변까지 굴러가 있었어. 일단 시합 중이라 빨리 도로로 가서 공을 주웠지. 그리고 뒤로 돌아서려고 했는데….”

“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날 잡아당기는 거야.”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이다. 강렬한 기시감을 느끼며 마리네뜨는 속으로 설마를 중얼거렸다.



“엄청 강한 힘으로 칼라를 잡아당기는데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거 있지? 진짜 열받아서 누구냐고 소리지르려던 순간에, 보고 말았어.”

“뭘?”

“자동차가 바로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쌩하게 짓밟고 지나가는 걸.”



역시나.



“진짜 코앞에서 스쳤다니까. 그거 보고 놀라서 말문이 막혀가지고 입만 벙긋거렸었지. 뒤를 돌아보니까 엄-청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을 한 녀석이 내 뒤에 서 있더라고?”



참 과격하게 구해주는 건 사람을 불문하고 똑같구나. 새삼 펠릭스의 성격을 되새기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앨빈이 그 당시 얼마나 놀랐을지도 백 번 이해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과 똑같은지 전에 없던 연대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얼굴을 보고 더 놀랐어. 같은 반인데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던 녀석이었거든. 그리고 웃긴 건 다음 날 고맙다고 하려고 찾아갔는데….”

“-그렇게 감사받을 일은 아니야.”

“헐, 어떻게 알았냐?”

“그냥….”



그랬어. 말을 얼버무리는 마리네뜨를 잠시 수상하다는 듯이 살펴보던 앨빈은 곧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 때까지는 펠릭스에 대해 별 생각 없었거든. 워낙 조용하잖아. 협조성도 별로 없고. 뭐 성격 나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었고.”

“소문이 있었어?”

“수군거리는 놈들이 몇 있었지. 하지만 난 뜬소문 따위는 믿지 않아. 뭐든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어. 특히 사람은.”



진지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하는 앨빈을 보며 마리네뜨는 새삼 펠릭스에게는 정말 이름대로 운이 따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정말로 친구가 되면 좋을 텐데.


앨빈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좀 지켜보다 보니까….”

“보니까?”

“너무 말이 없어서 뭐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는 거야!”

“어, 그거 완전 공감해!”



자신이 초반에 했던 고생을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도 그랬냐는 듯이 마리네뜨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앨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같은 반이다 보니까 대충 일과는 알겠는데, 도통 말을 해야 말이지. 근데 계속 지켜보니까 의외로 말이 없는 거 빼고는 냉정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친절한 편이다 싶더라고. 계속 귀찮게 달라붙어도 말을 험하게 하거나 그러지도 않고. 남자새끼가 징그럽게 웃는다거나 뭐 이런 말을 하는 놈들도 있는데.”

“헉, 심하다.”

“그렇지? 근데 이 녀석은 음, 뭐랄까. 딱 잘라서 할 말만 한다고 해야 하나?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쪽이다 싶더라고.”

“예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은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지 않나 싶었지.”



어느덧 두 사람은 식물원 앞까지 다다랐다. 학생증을 보여주니 이미 학교에서 입장료를 지불했는지 군말 않고 들여보내줬다. 가지각색의 나무들이 모여 녹음을 드리웠다. 식물들을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는 앨빈의 얼굴에는 선선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자신을 지나치게 억누르는 것 같은 모습이 있는 거 같아서. 비슷한 경우를 알고 있어서 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길을 걸어가던 앨빈이 아, 소리를 내며 마리네뜨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기 사람한테는 굉장히 잘 해줄 거 같잖아? 일단 사귀기는 좀 힘들더라도.”



눈을 찡긋하며 웃는 앨빈의 모습에서 마리네뜨는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래, 이 애는 블랙캣을 닮았어. 머리색을 보면 블랙캣일 리는 없지만 분위기 자체는 매우 비슷했다.



“뭐, 다 떠나서 저 녀석이 마음에 들어서라는 이유가 크지만.”

“그렇구나.”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던 앨빈은 곧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빙그레 웃었다.



“너도 그렇지 않아?”

“응?”

“그 녀석 좋아하잖아.”



그리고 말을 돌려할 줄 모르는 것도 똑같았다. 직설적으로 꽂히는 물음에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버버 거리는 마리네뜨에게 앨빈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굴에서 불이 나는데요.”

“시, 시끄러!”

“너야말로 그 녀석 어디가 좋은데?”

“상냥한 점!”



즉각적으로 말을 뱉자마자 마리네뜨는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의외라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앨빈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마리네뜨는 중얼중얼 말을 내뱉었다.



“아, 물론 그것만 좋은 건 아니야. 얼굴도 목소리도 다 좋달까. 특히 목소리가 살짝 낮아서 되게 듣기 좋아. 계속 듣고 싶은데 말이 너무 없어서 놀라긴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해. 물론 무뚝뚝한 성격인 건 맞고, 나를 귀찮게 여기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정말 나한테 상처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걸. 그게 본인의 편의에 의한 거라고 해도. 그것도 펠릭스 나름의 상냥함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

“언젠가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두 손끝을 모으면서 발그레 뺨을 붉히며 웃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살펴보던 앨빈의 손이 마리네뜨의 머리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구 헝크러뜨렸다.



“으아앗! 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아, 이 더듬이 만져보고 싶었는데 이런 느낌이었구나.”

“당장 손 안 치워?!”



제 머리를 헝크리는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은 마리네뜨가 낑낑거리며 앨빈의 손을 치워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킥킥 웃는 앨빈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묻어났다.



“음, 역시 난 네가 마음에 들어! 잘 되길 빌어줄게.”

“흥, 니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잘 될 거거든?”

“그래그래. 그런 의미에서 저기 있네.”

“에?”



앨빈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정확히는 펠릭스 혼자만은 아니었다. 펠릭스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에스미?’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마리네뜨와 달리 앨빈은 거리낌없이 펠릭스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를 들었는지 돌아보는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질렸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펠릭스에게로 다가간 앨빈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역시 여기 있었네.”

“…대체 왜 쫓아오는 거야.”

“심심한데 같이 구경이나 다니자. 아, 시끄러운 게 싫다면 조용히는 해 줄게.”

“귀찮아, 꺼져.”

“오, 이제 말이 좀 험악해지는데?”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는 앨빈의 모습에 펠릭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앨빈이 다시금 힘주어서 말했다.



“나랑 친구하자니까.”

“안 해.”

“에이, 왜. 닳냐?”

“닳아.”

“헉, 너한테 다른 친구가 있었어?”

“어째 욕으로 들리는군.”



한 쪽은 과하게 웃고 한 쪽은 과하게 냉랭했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밸런스가 맞는 듯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리네뜨는 지금 펠릭스에게 신경을 쓸 정신이 아니었다. 펠릭스와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에스미는 마리네뜨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말없이 등을 돌렸다. 어딘지 화난 듯이 빠르게 걸어가는 에스미의 뒤를 쫓아가는 마리네뜨의 목소리를 듣고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돌렸다. 잠깐 마리네뜨를 돌아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히죽 웃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앨빈에게 펠릭스는 냉랭하게 말했다.



“뭐냐.”

“아니~ 생각보다 아예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싶기도 하고.”

“뭐?”

“너도 은근히 쟤한테 관심있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펠릭스는 앨빈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펠릭스를 앨빈은 신난 얼굴로 뒤따라가며 물었다.



“따라가도 되냐?”

“…마음대로 해.”

“와우, 네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때도 있구나!”



신바람이 난 앨빈에게 대꾸할 기운도 없는지 펠릭스는 하아, 한숨을 쉬며 앞장서 식물원을 빠져나갔다. 저렇게 보여도 정말 싫었으면 계속 꺼지라고 했을 것을 알기 때문에 앨빈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펠릭스를 따라나섰다.


한편, 마리네뜨는 계속해서 에스미를 쫓고 있었다. 말없이 턱턱 걸어가는 에스미를 따라 식물원을 한 바퀴 돌면서도 마리네뜨는 차마 에스미의 옆으로 뛰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얼굴을 보기가 무서웠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졸졸 뒤따라가며 에스미의 이름을 불렀지만 듣지 못했다는 듯이 점점 더 빨리 걷기 시작하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에스미! 잠깐만!”



기다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부르는 목소리에 에스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돌아봐주지는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마리네뜨는 우물쭈물 말을 골랐다.



“그게….”

‘꺄아아아악!’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마리네뜨와 에스미는 물론 주변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소리의 크기를 봐서는 식물원 밖에서 무슨 일이 터진 것 같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투명한 온실 벽 너머로 보이는 무수한 새 떼를 발견한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미스터 피죤!’



“밖에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진화관 로비,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앨빈과는 다른 의미로 펠릭스의 얼굴도 굳어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도 놀랐는지 웅성거리고 있었다. 펠릭스의 눈빛에 고민이 서렸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 변신해야 하겠지만 무작정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간 의심을 받을 상황이었다. 위험 속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갈 사람은 없을 테니까.


다시 식물원 쪽에서, 나름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마리네뜨는 속으로 퍽 당황하고 있었다.


이걸 어쩌지? 하필 겨우 화해할 법한 이런 순간에!


그렇다고 악당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리네뜨는 일단 에스미가 있는 쪽 길로 뛰어가려고 했다. 그 쪽이 입구랑 가까우니까. 하지만 그 순간, 에스미가 제 옆을 스쳐 지나가려는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그 순간 올려다본 에스미의 표정에 묻어나는 걱정에 마리네뜨는 순간 무척 안도했다. 아주 화난 게 아니구나. 아플 정도로 꽉 붙잡은 에스미의 손을 내려다보던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였다가, 이내 결심했는지 에스미의 팔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잠깐 화장실 가려고! 급해서!”

“야! 여기 화장실이 어디…!!”



에스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리네뜨는 재빨리 뒷걸음질쳤다가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돌다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 천장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몇 분 뒤에 나타난 입구로 뛰쳐나간 마리네뜨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지점은 확실히 식물원에서 멀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일단 급한 대로 근처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빛이 번쩍 차오르더니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레이디버그는 빠르게 악당이 있을 만한 공원의 중심부로 향했다. 비둘기들을 부리며 사람들을 마구 위협하던 미스터 피죤은 제 앞에 나타난 레이디버그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홀홀홀. 왔구나, 레이디버그!”



근데 생각보다 빨리 왔는걸?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스터 피죤의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뜨끔했지만 그런 기분을 감추려는 듯 오히려 더 기세좋게 외쳤다.



“이 망할 아저씨야! 대체 여기서 왜 행패인데?”

“흥, 저 망할 꼬맹이가 비둘기들한테 돌을 던졌다고! 사랑스러운 나의 비둘기들한테!”

“그럼 그런 짓 하면 안 된다고 달래야지 지금 이게 어른이 취할 태도냐!”

“내 맘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던지며 미스터 피죤은 손에 들고 있던 호루라기를 불었다. 미스터 피죤의 웃음소리를 닮은 이상한 울림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멈칫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어디였더라?


길게 생각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마구잡이로 제게 달려드는 비둘기들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제 가방에 손을 넣으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요!”



크게 소리지르자 굳어 있던 사람들이 으아아,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한데 모여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비둘기 떼들을 가만히 노려보던 레이디버그는 새들이 최대한 가까이 오자마자 매직박스에서 무언가를 꺼내 집어던지고 위로 날아올랐다.


촤악,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물이 비둘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차게 날아들던 비둘기 떼들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우르르 그물 속으로 파고들었고, 모든 비둘기들이 다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그물 끝을 잡고 돌돌 감아 묶었다. 좁게 갇혀 겨우 날개만 살짝 푸드덕거리는 비둘기들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마음 속으로 사과를 보냈다.


미안, 다 끝나고 나서 꺼내줄게.


남은 비둘기는 지금 미스터 피죤을 태우고 있는 녀석들 뿐이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하는 미스터 피죤에게 레이디버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네 차례야!”







“아직 싸우고 있으려나?”



박물관 뒤쪽에 있는 숲 속을 달리며 블랙캣은 자못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밖에서 싸움이 났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경비원들이 정문을 통제하고 있어서 그쪽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급하게 뒤돌아서 후문을 찾긴 했지만 자꾸만 자신을 붙잡는 진드기 녀석을 떼어내는 것만도 한참이 걸렸다.


그나마 이렇게 빨리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블랙캣 본인이 이 박물관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어릴 적부터 이곳에 자주 왔었는지라 박물관과 공원의 구조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 어디에 후문이 있고 어떤 곳에 뭐가 있는지조차 줄줄이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명한 고고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펠릭스는 펠릭스 나름대로 이 박물관을 꽤나 좋아했다.


늦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계속 달리던 중, 블랙캣의 시야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재빨리 발에 제동을 걸고 멈춰섰다.



“이런 곳에 동굴이 있었나?”



언뜻 보기에 블랙홀을 연상시킬 만큼 시커멓게 입을 낼름거리는 듯한 어두운 동굴. 처음 보는 동굴에 블랙캣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이 공원을 찾아와 산책을 해서인지 이 넓은 공원에 뭐가 있는지 대체로 파악하고 있다 자부했지만, 그런 그의 기억에도 이렇게 커다란 동굴은 본 적이 없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사람 몇은 문제없이 나다닐 법한 커다란 동굴을 가만히 살펴보던 블랙캣이 천천히 다가가서 발을 디뎌보았다.


환상이 아니다. 동굴 특유의 시원한 공기가 블랙캣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들어가 볼까? 잠깐 고민하던 블랙캣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싶었는지 결국 돌아섰다. 지금은 일단 사건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레이디버그가 왔을지는 모르겠지만.


겨우내 숲을 벗어나 공원 쪽으로 나아오자마자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보였다. 그 옆에 다발로 잡혀서 구구거리고 있는 비둘기 떼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쿡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역시 마이 레이디야. 응용력이 뛰어나다니까.


레이디버그에 이어 블랙캣까지 나타나자, 미스터 피죤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너희는 왜 이렇게 매번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나를 방해하는 거야?”

“웃기시네, 니가 우리가 있는 곳만 골라서 나타나는 거겠지. 꼬치구이가 되고 싶어서!”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던 블랙캣이 들고 있던 봉을 미스터 피죤에게로 뻗었다. 순식간에 늘어난 봉이 미스터 피죤의 복부를 찌르려고 했지만 그는 유연하게 옆으로 허리를 돌려 위험을 피했다. 하늘에만 떠다니는 것은 불리하다 싶었는지 미스터 피죤은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비둘기들에게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자, 이걸로 다시 2:2가 되었군.”



히죽 웃던 미스터 피죤이 다시금 호루라기를 불었다. 미스터 피죤을 태우고 있던 비둘기들이 블랙캣에게로 마구 날아들기 시작했다. 칫, 혀를 차면서 다른 물건을 꺼내 비둘기들과 맞서 싸우는 블랙캣을 돌아보던 레이디버그는 바닥으로 내려온 미스터 피죤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한쪽 손이랑 발을 앞으로 내밀며 권법 자세를 취하는 미스터 피죤에게 레이디버그는 달려들어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합을 주고받으며 치열하게 싸우던 중, 레이디버그의 시야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 박물관 쪽에 보이는 인영에 레이디버그는 눈을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에스미가 이런 곳에 나왔을 리가 없는데.


갑자기 순간 멈칫거리는 레이디버그의 움직임을 미스터 피죤은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있나 싶어 힐끗 주위를 둘러보던 미스터 피죤은 뛰어난 시력으로 바로 제 뒤쪽에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발견했다.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미스터 피죤이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에스미가 있는 쪽으로 손짓하며 호루라기를 입에 무는 미스터 피죤을 보자마자 레이디버그는 놀라서 미스터 피죤을 뒤로 한 채 에스미가 있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마자 블랙캣과 대립하던 비둘기 떼들이 쏜살같이 에스미가 있는 쪽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놀란 에스미가 재빨리 뒤돌아 뛰기 시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에스미!!”



거의 울 법한 얼굴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토해내며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비둘기들이 거의 에스미를 덮치려는 순간 레이디버그는 가방에서 그물을 꺼내 비둘기 떼를 향해 던졌고, 비둘기들은 그물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빠르게 달려서 그런지 그 반동처럼 발을 헛디뎌 쓰러지는 에스미에게로 레이디버그가 헐레벌떡 달려갔다.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에스미를 레이디버그는 꼭 끌어안았다.


갇혀 있던 비둘기 떼들이 풀려나자 미스터 피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금 비둘기들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에 블랙캣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봉을 꺼내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행복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다시금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던 미스터 피죤이 갑자기 멈춰섰다.



“예? 돌아오라고요? 아니 어째서~ 이제 막 재밌어지려…. 헉. 알겠습니다.”

“뭐라는 거야?”



작게 중얼거리는 미스터 피죤에 블랙캣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작아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입모양을 자세히 보니 미스터 피죤이 쩔쩔매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큭, 내가 지금 사정이 있어 물러나지만! 다음번에는 꼭 너희의 미라큘러스를 뺏어주겠어!”



원통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미스터 피죤을 보며 블랙캣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또, 또. 악당의 전형적인 대사 좀 집어치우시지. 질리지도 않아?”

“시끄러!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대사라도 추천해 주던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어때?”



농담처럼 던진 말에도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그저 하늘 위로 날아올라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을 블랙캣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쟤 왜 저래?”







머리가 무거웠다.


물 속에 빠진 것처럼 묵직하고 이상한 느낌.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아 불쾌한 기분에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쳤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려고 하니 저 위에 빛이 보였다. 빛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나아가다가….


눈을 뜨니 하얀 배경에 무언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몇 번 눈을 깜빡여보자 그게 환하게 웃는 어떤 바보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에스미는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에스미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아 안도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리네뜨가 말을 꺼냈다.



“에스미, 다행이다. 정신이 들어?”

“여긴….”

“어, 박물관 의무실이야! 다행히도 기절한 것 뿐이라고 해서 일단 네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어.”

“…요즘 잠을 잘 못 잤더니.”



별 걸로 기절같은 걸 다 해보는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후다닥 옆에 있던 물컵을 건넸다. 그 물컵을 보며 온갖 표정을 다 구기던 에스미는 한숨을 내쉬더니 순순히 물컵을 받아들었다. 조용히 물을 마시고 있는 에스미를 향해 마리네뜨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그 한 마디에 에스미의 동작이 뚝 멎었다.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는 에스미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변했다.



“미안하다고?”

“응, 내가, 저기….”

“니가 뭐가 미안한데?”

“…에?”

“대체 니가 왜 나한테 미안해야 하냐고!”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에스미를 보며 마리네뜨는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에스미의 눈가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네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미안해하고, 화를 내면 무조건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무리한 부탁을 해도 제대로 거절하지도 못하고!”

“에, 에스미?”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정말 모르겠어? 나는 말이야. 서운하다고. 왜 아니라고 말을 못해?”



얼떨떨한 얼굴로 에스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에스미가 던진 다음 말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식겁했다.



“너 지금 나한테 뭐 숨기고 있잖아.”

“….”

“그 펠릭스인가 뭐시깽이인가 하는 녀석 때문에 약속을 펑크낸 게 아니라는 거 알아. 니가 그럴 성격이었으면 지금 이렇게 매번 손해보면서 살지도 않지.”



거하게 한숨을 내쉬며 제 눈가를 꾹꾹 누르는 에스미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놀라서.


에스미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을 해! 근데 넌 매번 변명도 안 하고 그냥 웃기만 하니까….”

“에스미.”

“나도 내가 어린애같은 거 아는데, 걱정되잖아. 누가 봐도 피곤해보이는 얼굴로 멀쩡하게 있는 다른 놈이나 걱정하고 앉아있으니 내 속이 터져, 안 터져? 나는 그 자식보다 니가 더 걱정된다고!!”



짜증스레 미간을 구기던 에스미가 휙 고개를 돌려 마리네뜨를 쳐다보았다. 그 기세에 흠칫할 찰나 에스미가 천천히 마리네뜨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뭐 일이 있나 싶은데 제대로 말하려고도 하지 않고. 물어보고 싶어도 그냥 모른 척 해달라는 듯한 얼굴이나 하고 있지를 않나.”

“내가 그랬어?”

“그래. 그러면서, 누가 봐도 피곤에 찌든 얼굴로 좋아하는 남자애 얼굴 봤다고 좋아라 헤실거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열받는다고, 이 멍청아! 말을 끝맺는 것과 동시에 에스미의 손이 짜증스레 마리네뜨의 볼을 쭈욱 잡아늘렸다. 마리네뜨가 바둥거렸다.



“에으미…. 아프어어….”

“너는 내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어?”



손을 탁 놓으며 에스미가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가 친구가 된 이후로 너는 정말 터놓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없잖아. 내가 네게 차갑게 굴어도 네가 화냈던 적이 있어? 늘 내 눈치를 보듯이 망설이고 고민하기만 했지.”



말문이 막혔는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불합리하게 굴면 너는 화를 낼 권리가 있어. 한쪽만 양보하는 관계가 어떻게 건강한 관계야?”



할 말이 없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생각대로 실천하기가 너무 어려울 뿐이지.



“너는 너랑 오래도록 알고 싶으니까, 조금씩이나마 좀 욕심을 부려줬으면 좋겠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다음에도 계속 이러면 진짜 더 혼날 줄 알아.”

“이, 이보다 더?”



지긋이 자신을 노려보는 에스미의 눈빛에 마리네뜨는 더는 말하지 않고 깨갱 꼬리를 내렸다.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 걸 아니까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 생각났다. 예전에 에스미랑 싸웠을 때.


그 때도 나는 이랬었던 것 같다. 에스미가 뭐에 화났는지도 모르고 그저 내가 잘못했나 싶어 무조건 사과부터 했었지.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에스미가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었다.


내가 더 미안해, 라고.



“……고마워.”



한참을 망설이다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는 마리네뜨를 그저 빤하게 쳐다보던 에스미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까, 펠릭스인가 뭔가 하는 걔 만났을 때 말이지.”

“응?”

“전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대화나 좀 나눴을 뿐이야.”

“응!”



해맑게 웃으며 전혀 의심같은 거 없고 무조건 널 믿는다는 표정을 짓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에스미는 저걸 진짜 어떻게 가르쳐서 세상에 내놓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해야만 했다. 무방비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저러다 누가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냥 체념하듯 받아들일 것 같아서 더 열받는다.


체념, 인가.

떠오르는 금발의 누군가에 에스미는 가만히 인상을 찌푸렸다.


그 녀석을 마주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사라진 마리네뜨 녀석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던 중, 식물원에서 그를 만났다.


‘내 이름은 에스메랄다 세자르. 마리네뜨의 친구야.’


무시하고 돌아서려는 녀석의 앞을 가로막고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은 냉전 상태라지만 어쨌든 친구는 친구니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동자는 예상했던 만큼 냉혹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감정이 풍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 녀석한테 나 좀 그만 쫓아다니라고 말해.’


방금 했던 생각 취소. 툭 내뱉는 한 마디가 저리 매정하다니. 짜증스레 눈살을 구겼지만 이런 제 표정에도 녀석은 동요 하나 없었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이 덤덤한 그 태도에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왜 마리네뜨가 너 같은 녀석한테 목을 매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홧김에 내뱉었더니 딱딱하던 눈매가 아주 일순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그에 조금 놀라려던 찰나 녀석이 천천히 입을 벙긋거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피식 조소하는 그 얼굴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 녀석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는 듯한, 그런 얼굴.



“…뭐, 생각보다 나쁜 녀석은 아닌 거 같으니까.”

“응?”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에스미는 한숨을 내쉬며 마리네뜨를 째려보았다. 이 바보는 어쩌다 저렇게 딱 보기에도 복잡해 보이는 녀석한테 꽂혀가지고 제 속을 뒤집는 걸까.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문제겠지만, 만약 정말 사귀게 되더라도 꽤나 마음고생 하게 생긴 타입이다. 본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더라도 이 녀석은 듣지 않겠지.


그 때의 대화를 들려주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말하더라도 어차피 마리네뜨는 그 녀석을 계속 쫓아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더 걱정할 법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다. 에스미가 아는 마리네뜨는 그런 타입이었다. 무언가를 쉽게 바라지 않지만 바라는 것에는 집념이 엄청나다. 어찌 되었든 중간에서 포기할 만큼 어중간한 성격이 아니다. 분명 마지막까지 가보려고 하겠지.


설령 그 끝이 어떻더라도.



“…대답은 대충 알았으니까.”

“응? 뭐라고 했어?”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마리네뜨에게 손을 뻗었다. 또 볼을 꼬집히나 싶어 긴장하던 마리네뜨는 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에 금세 긴장하던 얼굴이 풀리고 예쁘게 웃는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는 복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기절하기 직전에 유독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마지막에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와 얼굴. 어떻게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었을까. 믿을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걱정되지만 묻지 않기를 바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묻어주는 것 뿐이다.


“어쨌든 조심해 뭐든. 알았어?”

“네!”


충성! 그렇게 말하며 한 손을 올려 경례를 하는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공원의 반대쪽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들 공원 한가운데서 벌어진 소동에 정신이 팔려 있을 즈음, 조용히 박물관 안에서 빠져나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상체는 검은색에 하체는 하얀색, 흑백의 의상을 입고 광대처럼 양쪽 눈에 눈물점 화장을 한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목표물을 확보했습니다.”



남자의 오른손이 제 손에 들린 손바닥보다 약간 더 큰 나무상자를 꽉 움켜쥐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던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지금 돌아가죠.”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지붕 위에 있던 남자는 박물관 뒤쪽 숲으로 뛰어내려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펠릭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혹여 제 기억력에 문제가 있나 걱정되어 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보고 봐도 여기가 분명했다. 자신이 처음 그 커다란 동굴을 발견했던 장소는.


그런데 지금 그 동굴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때 잠시 꿈을 꿨나, 싶을 정도로 절벽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광경에 펠릭스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꿈을 꿨을 리는 없다. 잠깐 안에 발을 디딜 뻔도 했으니까. 게다가 그 동굴은 사람 몇 명이 지나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컸다. 그런데 그런 큰 동굴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쎄한 느낌이 들었다.


저 절벽 뒤에 뭔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무력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이 동굴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작정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위험했다. 그리고 펠릭스는 본능이 울리는 신호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드는군.”



낮게 중얼거리는 펠릭스의 머리 위로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


자캐가 많이 나와서 좀 민망하네요. 하지만 꼭 넣어야 하는 에피소드라고생각해서 넣어봤습니다 ㅇㅇ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마리네뜨와 에스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무조건 메인 애들만이 주인공처럼 나오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바꿔 말하면 펠릭스와 앨빈의 에피소드도 나올지도 모르죠. 근데 이 둘은 그렇게 싸우기에는 둘 다 상당히 어른스러워서 그런 일은 없을 거 같네요. 사실 이 에피소드의 축이 펠릭스-앨빈, 마리네뜨-에스미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


역시나 한결같은 펠릭스! 참 쓰면서도 사람에 서툰 녀석이다 싶어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집니다... 가엾어서 그런지 쓸수록 더 좋아지기도 하지만요.


원래 본편에서 마리네뜨-알리야, 아드리앙-니노 구도가 아닌 다른 친구 구도를 짜낸 이유는 아무래도 애들 성격이 다르고 배경도 다르다보니 그에 맞는 친구들이 필요하겠다 싶어 창조한 거랍니다. 에스미도 그렇지만 앨빈이 특히 그렇죠.


앨빈의 경우는 되게 활발하고 조금 막가파적인 성격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어느 샌가 제 취향의 훈남이 되어 있네요OTL 근데 제 남최애는 펠릭스가 맞습니다 얘가 후반부에 정말 개쩔게 멋있어지기 때문에ㅇㅁㅇb 아 이거 스포이려나(땀땀


펠릭스에게 이런 애를 붙인 이유는 자신을 억누르고 사는 펠릭스를 이해해줄 만한 이해자가 한명쯤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아드리앙과 달리 펠릭스는 친구같은 건 필요 없다는 느낌으로 지내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니노같이 마냥 소년스럽고 천진한 타입이었으면 펠릭스는 절대 깔끔하게 무시하고 지내기만 했을 겁니다. 앨빈은 펠릭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지만, 지켜야 할 선은 상당히 칼같이 지키는 타입에 속합니다. 아직 설정이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앨빈은 원래 스킨십이 많은 편인데, 펠릭스에게는 농담삼아서라도 터치를 전혀 하지 않죠. 펠릭스가 그걸 꺼린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진짜 많이 신경썼습니다 묘사에 ㅇㅇ


그래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습니다. 오히려 앨빈의 친구들은 얘가 왜 펠릭스처럼 음침한 녀석에게 저렇게까지 접근하는지 이해를 못 할 정도죠. 근데 앨빈도 은근 마이페이스라서(...) 주변이 뭐라든 신경 정말 안 씁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넉살좋게 펠릭스한테 붙어있는 거겠죠? ㅎㅎ


성장하기 위해서 관계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면 그만큼 사람도 많이 변하니까요. 단순히 애정 관계뿐이 아니라 친구관계도 많은 영향을 끼치죠. 제가 이 글에서 지향하는 지향점이 마리네뜨와 펠릭스의 성장이고, 제가 해석한 두 사람의 성격은 사실 그렇게 적극적이거나 직설적인 타입들이 아닙니다. 이런 타입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직설적으로 직언을 꽂는 사람들이 좀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기에, 캐릭터들을 이렇게 짰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회당 후기를 적고 싶었지만 그럼 페이지가 너무 길어지겠죠. 5화는 아무래도 좀 편하고 즐겁게 쓴 화이다 보니 이것저것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선보다도 일단 주변의 관계를 돌아보는 화이다 보니까요. 초반에 에스미가 왜 저러나 싶으셨던 분들도 계실텐데 제대로 이해가 되었기를 바라겠습니다 ㅇㅇ!


아, 초반에 사과가 떨어지는 장면은 예전에 봤던 컨셉아트에서 채용한 겁니다. 요즘 자신을 직감적으로 잘 찾아내는 마리네뜨에 대항해 고대의 재앙 능력을 써서 마리네뜨에게 빈틈을 만들어 따돌리는 펠릭스! 하하 이 컨셉아트 정말 좋아해요^ㅁ^


후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하며, 내일 마지막 6화와 수량조사가 올라옵니다 ㅎㅎ 아마 선입금을 받는다면 25일에 폼이 올라올거예요 ㅇㅇ


감상은 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ㅅㅎ!

Posted by I.R.E
,

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3





Episode 4.

비눗방울과 환상





“야, 저리 안 가?!”



휘휘 손을 흔들어 모여드는 비둘기들을 쫓아내는 블랙캣의 얼굴에 질렸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쫓아도 쫓아도 계속 달려드는 모양새가 아주 저 악당 녀석이랑 판박이라고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공중을 날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블랙캣에 비둘기들이 몰려 있는 틈을 타 레이디버그가 던진 요요를 가볍게 피하면서 히죽 웃고 있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은 참으로 얄밉기 짝이 없었다. 두 히어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홀홀홀홀~~”



듣기에 매우 거슬리는 이상한 웃음소리도 한 몫 했지만. 



“아, 저거 진짜 열받네!”

“거기 서!”



봉과 요요를 던졌지만 삽시간에 방패처럼 모여든 비둘기 떼에 튕겨져 나왔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려는지 뒤로 슬슬 물러나는 미스터 피죤을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던 블랙캣이 다시금 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이건 어떠냐!”



블랙캣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가방에서 꺼낸 것은 몇 사람은 간단히 가둘법한 커다란 철창이었다. 작은 가방에서 천천히 나오기 시작하는 거대한 철창에 레이디버그는 물론 미스터 피죤도 경악한 표정으로 블랙캣을 쳐다보았다. 힘들이지 않고 철창을 두 손으로 든 블랙캣이 미스터 피죤에게로 철창을 던졌다. 야구공을 던진 것마냥 빠르고 묵직하게 날아오는 철창에 기겁하며 우왕좌왕하던 미스터 피죤은 아주 간발의 차이로 방향을 바꿔 철창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다.



“야, 거기 서!”



더 이상 지체했다간 더 엄청난 게 나올 거라 생각했는지 재빨리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을 분한 듯이 쳐다보던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찰칵찰칵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수첩과 카메라, 방송국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레이디버그! 블랙캣! 렉스프레스 잡지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좀 해주세요!”

“라우토 저널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여지없이 악당과 싸워 물리치고 계시는데요, 소감 한 마디 좀 해주세요!”

“BBC에서 단독 인터뷰를 신청하고 싶은데요!”

“워싱턴포스트입니다. 파리를 위협하는 악당에 대한 논설지를 예정 중입니다만, 코멘트 한 마디만 해주세요!”



우르르 달려오는 사람들의 무리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난처하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곧 서로 짰다는 듯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아, 죄송해요! 지금 바빠서 이만!”

“다음에 보자구!”



살짝 손을 들고 거절의사를 표하며 잽싸게 사라지는 두 히어로를 잡을 수 있는 능력자는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하늘로 뛰어올라 모습을 감춘 히어로들을 망연히 바라보던 기자들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분통을 터트렸다.



“오늘도 또 놓쳤어!”

“하여간 진짜 끈질기다니까. 몇 번을 인터뷰 요청해도 죄다 퇴짜를 놓는 걸 보면.”

“아하하, 그렇게 따지면 우리야말로 제일 끈질긴 거 아닌가? 솔직히 이래놓고 다들 히어로들 관련 기사를 쓸 거면서.”

“눈치챘나?”



큭큭 웃던 한 여성 기자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물었다. 담배 끝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더니 한 모금 빨았다. 아지랑이처럼 공중으로 흐늘흐늘 날아오르는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며 기자는 살짝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 보니 유투브에 영상이 엄청 떠돌아다니던데? 화질은 별로 좋지 않지만.”

“아, 그건 나도 봤어. 다들 믿기지 않는지 댓글란에 합성 아니냐는 의혹이 한가득이던데?”

“하하, 직접 볼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다들 직접 보면 그런 소리 쏙 들어갈 텐데. 기자생활 하면서 이런저런 일들 많이 봤지만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라 조금 설렐 정도라고.”



어릴 적 사라졌던 동심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사람 좋게 웃기 시작하는 남자에 동조하듯 다들 웃기 시작했다. 서로 경쟁하는 관계기는 하지만,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들을 직접 쫓아다니는 동질감 때문인지 기자들은 이제 겨우 몇 번 마주친 사이임에도 마치 몇 년을 같이 일한 동료같다는 느낌을 서로에게서 받고 있었다.



“맞아, 그래서 더 쫓아다니는 건지도 모르지. 지금 저만한 특종감이 없기도 하고.”

“하긴, 악당을 인터뷰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맞장구를 치며 낄낄 웃는 기자들의 머리 위로 하이얀 햇빛이 반짝거렸다.

좋은 날씨였다.




///



“피곤하다….”



책가방을 메고 등굣길을 걸어 올라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중얼거리던 마리네뜨가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캬악! 그 인간은 왜 시간이 없을 때만 나타나는 거야!”



크게 소리를 질러대는 마리네뜨를 주변에서 이상하다는 듯이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에 민망해졌는지 살짝 볼을 붉히고 뺨을 긁적대던 마리네뜨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제는 일찍 끝나서 다행이다. 블랙캣이 열받은 얼굴로 철창을 집어던질 때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믿지 말라는 건 아니야.’



블랙캣을 떠올릴 때마다 벌써 2주도 더 전에 티키가 했던 이야기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솔직히 아직 어떻게 판단할 단계는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까 더 조심해주길 바라는 거야. 마리네뜨, 난 네가 상처받을까봐 걱정이 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티키를 보며 알았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조금 반신반의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만날 때마다 별로 문제는 없었으니까. 평범하게 파트너로서 같이 싸우고, 끝나면 바로 헤어지고.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티키의 말대로라면 그것도 다 계획된 행동이라는 걸까?


아, 모르겠다. 붕붕 고개를 돌리며 생각을 쫓아내려 애썼다. 가뜩이나 지금 히어로 일만도 골치가 아픈데.


결국 히어로를 하겠다고 결심하기는 했지만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스터 피죤은 생각보다 더 자주 나타났고 그만큼이나 끈질겼다. 한 번 상대하면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나타나 도발하듯 싸움을 거는 그를 보고 있자면 어떤 때는 그냥 자신에게 향하는 관심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홀홀홀 웃고 있는 미스터 피죤의 얼굴을 떠올리자 짜증으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니, 이 인간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왜 이렇게 자주 나타나냐고!

하긴,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라 말이지.


두 번째로 나타났던 미스터 피죤을 상대할 때 경찰에서 들어왔던 지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놀라웠다. 문제는 경찰차 수십 대에 무장까지 하고 나타났지만 비둘기 떼들 때문에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이지만. 오히려 부상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결국 자신들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엔간해서는 뒤로 피해 있으라고 당부를 해야 했다.


본인들이 무력하다는 것에 상당히 기분이 상했는지 경찰들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알겠다고 약속해줘서 다행이었다.



“호크모스라….”



자신과 같은 미라큘러스를 가진 사람. 자신이 가진 상징이 무당벌레라면 그쪽은 나방이라고 했다. 실제로 사진을 찾아보니 상당히 큰 크기의 나방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티키의 말로는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줘서 그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자라고 했다.


같이 미라큘러스에 선택받았는데, 그런 사람이 왜 파리에 혼란을 일으키는 걸까.


어째서?


터벅터벅 교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자신을 앞서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발견한 마리네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저렇게 곧게 뻗은 자세로 걸어가는 사람은 마리네뜨가 아는 한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럭키! 오늘은 그래도 재수가 좋네. 같이 등교하다니.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마리네뜨가 크게 소리쳤다.



“펠릭스!”



반응이 없었다. 뭐 이 정도는 늘상 그랬기 때문에 별 감각이 없었는지라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소리내어 그를 불렀다.



“펠릭스으으으!”



일부러 길게 소리를 뽑아내며 불렀음에도 전혀 돌아보는 기색도 없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에스미, 에스미.”

“왜 불러.”



잡지를 읽고 있는 에스미의 얼굴은 상당히 시큰둥했다. 그래도 듣지 않고 있는 건 아닌지 즉각 대답을 던져주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정말 완전 이상해! 하는 듯이 과장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펠릭스가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아?”

“직접 보지도 않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그냥 평소랑 똑같은데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



또 시작이냐는 듯이 무심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기는 에스미를 쳐다보며 마리네뜨가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아침에 펠릭스를 만나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이름을 불렀는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라구.”

“드디어 널 아예 무시하기로 결심했나 보네.”

“아냐, 그렇다고 보기엔 평소랑은 조금 느낌이 다른 거 같아서.”

“…하여간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지.”



묘하게 차가운 에스미의 목소리에는 다소 불만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물론 여전히 펠릭스에게 정신이 쏠려 있던 마리네뜨는 그런 에스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일일까? 조금 걱정돼.”

“어련히 잘하시겠지. 최소 너보다는 똑부러졌잖아.”

“헉, 내가 그렇게 물렁한 이미지야?”

“그간 너의 행동을 돌이켜보지 않을래?”



딱 잘라 말하는 에스미에게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헤실헤실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돌아보더니 에스미는 한숨을 쉬며 보고 있던 잡지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

“응?”

“너, 너무 펠릭스한테 정신 쏟는 거 아니야?”

“어….”

“첫사랑이라 네가 더 허둥댄다 싶기도 했어. 근데 너무 매달리는 거 아니야? 사랑이 밥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특히, 요즘 너 학교에서가 아니면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며칠 전에 약속한 것도 갑자기 펑크냈었잖아.”

“엇, 아 그게….”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데록데록 굴러갔다. 요즘 펠릭스를 쫓아다니느라 에스미와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었기에 마리네뜨는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 약속은 그런 게 아니라 미스터 피죤 때문이었는데….


약속을 나가기 직전, 마침 미스터 피죤이 나타났다는 걸 티키가 감지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약속을 취소하고 히어로로 변신해야 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기에 마리네뜨는 하하 웃으며 애써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그러고보니! 요즘 범죄가 좀 늘어난 거 같지 않아?”

“악당이라면 레이디버그랑 블랙캣이 알아서 해주겠지. 몇 주 전에 유투브에 동영상까지 떴잖아?”



무심히 중얼거리는 에스미의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우려했던 대로 동영상을 찍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에펠탑 사건 당시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미스터 피죤을 상대하던 동영상이 며칠 뒤 유투브에 올라왔다. 업로드가 되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몰고온 이 동영상은 조회수가 3일만에 몇백만을 찍었으며, 온갖 나라의 언어들이 댓글란에 가득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이게 말이 되냐고, 진짜가 아니라 합성인 거 아니냐고 묻는 댓글들도 간간히 보였다.


합성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에스미가 이런 분야에 별로 흥미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사실 에스미가 눈치를 채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악당도 악당인데, 여러 가지로 범죄 기사가 많이 뜨는 거 같아. 아침에 뉴스를 보면 누가 죽었다느니, 성폭행 사건이 터졌다느니 별 개 다 나오는걸.”

“세상이 그만큼 흉흉해졌다는 증거겠지. 이젠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악당까지 나오고, 드디어 이 거지같은 세상이 망하는 건가.”



냉랭한 말투에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에스미를 불렀다.



“에스미…? 화났어?”

“별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그 속에 타오르는 검은 기운을 읽어낸 마리네뜨는 금방 꼬리를 말았다.



“미,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내가 뭐에 화났는지는 아는 거야?”

“그건….”



더듬이를 추욱 늘어뜨린 채로 답을 찾지 모해 쩔쩔매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대로 생각해봐. 내가 왜 이러는지 말이야.”




///



청회색 눈동자가 하얀 구름을 쫓고 있었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펠릭스의 모습을 몇 명의 여자아이들이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곧게 펴진 등이나 반듯한 자세는 역시 펠릭스다 싶을 정도로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남녀를 불구하고 이런저런 말이 돌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펠릭스는 몇몇 여자애들에게는 꽤 인기가 있었다. 말수가 적기는 했지만 딱히 지위를 내세워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고, 걸려오는 시비는 다 유연하게 쳐냈다. 그 쿨한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다가올 용기가 없어서 조용히 펠릭스를 지켜보기만 하는 여자애들도 많았다. 늘 전교 1등을 꿰차며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수재였지만 성적이 좋다고 상대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누구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무시했다.



“하아.”



요즘 들어 자꾸 멍하게 있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붉은 잔상에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그런 여자를 떠올리고 있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써 딴 데로 생각을 돌리려고 책을 펴들었지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은 소년을 다시금 잡아먹고 세력을 키웠다. 붉은 가면을 쓰고 밝게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는 듯한 미소에 주변에서 조용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조차 펠릭스에게는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이 가는 여자이긴 했지.


강도를 잡던 그 순간의 모습이 뇌리에 사진으로 찍힌 것처럼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벌써 한 달은 지나버린 순간이 이토록 마음 한 구석을 잡고 놓아주지 이유는 무엇일까.


살짝 빨개진 것 같았던 얼굴도, 평소라면 바보같다 생각될 정도로 더듬거리는 말투도, 자신을 관찰하듯 훑어보는 시선도 전혀 싫지 않았다. 블랙캣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요령이 없는 타입인지 사람과 대화할 때 쩔쩔매는 모습조차도 거슬리기보단 오히려 귀엽다고 느껴졌었다.


당당한 미소로 자신을 응시하는 푸른 시선이 좋았다. 에펠탑 사건 당시 레이디버그가 왜 따라오냐고 질문했을 때, 내버려둘 수 없어서라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진심이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이 든 적이 있었던가?


고맙다는 한 마디가 정말로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아온 자신으로서는 참으로 이례적이게도.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당초의 목적대로 어떻게든 신뢰만 얻어내면 될 것을. 이용하고 끝내면 될 일이 아니었던가?


살짝 오른손을 들었다.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고양이 모양의 반지를 가만히 살펴보는 펠릭스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반지는 생각보다 무척 성가셨다. 어느 정도 컨트롤은 물론 가능했지만, 너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면 지 멋대로 발동할 때가 있어서 늘 마음에 평정심을 가져야 했다. 다행히도 어릴 때부터 감정 컨트롤은 익숙했는지라 느긋하게 넘기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매번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제일 골치아픈 건 시끄러운 녀석이 따라왔다는 것이다. 외관은 고양이를 닮았지만 고양이는 차라리 혼자 조용히 놀기라도 하지. 시끄럽기만 하면 좋은데 장난치는 것까지 좋아하니 더 정신이 없었다. 그것도 익숙해지니 이제는 그저 체념하는 수준에 다다랐지만, 가끔씩 조용하던 일상이 그립고는 했다.


그래서 접근한 것일 뿐이었는데.


얼굴을 떠올리고 있으면 진정이 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고 싶었다. 언제나 웃었으면 좋겠고 세상의 더러움같은 건 전혀 몰랐으면 했다. 하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니 분명 여러 문제들이 터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혹여 상처받을까 걱정되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심장소리가 템포를 올리듯 조금씩 빨라진다. 밝게 웃으면서도 가끔 짓는 처연한 표정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자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의지와 상관없이 뻗어지는 손에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괜찮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더 가라앉기만 한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난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좋아해!’


해맑게 외치며 자신을 따라붙던 검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감정적으로 덤벼드는 인간은 피곤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취향이 아닌 상대이기도 했다.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지?


‘사랑이란 계산되는 감정이 아니야.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누군가의 옆에 있고 싶다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 사랑은 아닐지라도 사랑에 무척 가까운 감정일 거야.’


오래 전에 잊혀졌다 생각했던 그리운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만 같은 감각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펠릭스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내가 그 여자를?




///



“하아아…….”



학교가 끝나고 여느 때와 같이 시내를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지친 것처럼 상당히 수척했다. 기나긴 한숨소리에 티키가 살짝 자켓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마리네뜨?”

“아무것도 아냐. 그냥 왠지 좀 피곤해서.”



요 며칠 새 운동을 많이 해서인가? 운동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격하다 싶기는 했지만. 비둘기를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자마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제 나타났었으니 오늘은 제발 나타나지 말아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다가 마리네뜨는 순간 스쳐가는 불길함에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 큼직한 돌멩이가 마리네뜨의 발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갔으면 꼼짝없이 밟고 넘어졌겠지.


마리네뜨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감이 좋아지니 편하네.”

“그렇지?”

“응. 이러다가 이 힘에 너무 의존하게 될까봐 겁날 정도로.”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올려다보며 티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건 마리네뜨 네 안에 있는 가능성이야.”

“내 안의 가능성?”

“응. 미라큘러스는 그 사람 내면의 힘을 끌어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그게 좋은 면인지, 나쁜 면인지는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을 끌어내주지.”

“하지만 난 원래 운이 없는걸.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아마 파리 시내에서 나만큼 재수가 없는 애도 없을 거야.”



피곤해서일까. 기운이 없어 보이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신감을 가져, 마리네뜨. 미라큘러스는 네게 잠재되어 있는 힘을 끌어내주지만, 결국 그 힘의 본질은 너한테 속해 있어.”



티키가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만약 사과를 먹고 싶은데 칼이 없잖아? 미라큘러스는 말이지, 그 사과를 갈아서 주스로 만들어주는 것과 똑같아. 도구와 같다고 보면 돼. 먹기 편해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래 재료인 사과까지 미라큘러스가 만든 건 아니잖아. 사과를 가지고 있는 건 너니까.”

“….”

“설령 미라큘러스가 네게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 힘이 네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는걸. 열심히 다듬다 보면 미라큘러스라는 도구가 없더라도 사용이 가능해지는 날이 올 거야.”

“…그런 걸까나?”

“그럼!”



당연하다는 듯이 싱긋 웃는 티키의 미소를 보며 조금은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마리네뜨는 살며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하긴 있을 때 누려야겠지? 물론 의존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마리네뜨가 편한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해. 모든 건 너의 선택이니까.”

“그래.”



즐거운 듯이 푸흐흐 웃음을 터트리던 마리네뜨의 어깨를 무언가가 세게 치고 지나갔다.



“아얏!”



마리네뜨에게 부딪혔던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힐끗 눈을 돌리더니 사과도 없이 빠르게 마리네뜨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화를 내려다가 다시 뒤에서 다가오는 인파에 마리네뜨는 재빨리 인도 안쪽으로 물러나는 것에 성공했다.


아주 재수가 없지 않은 건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중 느껴지는 기시감에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나저나 요즘 이상하게 거리에 사람들이 늘어난 거 같은데. 내 착각인가?”



사람이야 늘 많았지만 평소보다 더 붐비는 듯한 느낌이 든다. 착각인가 싶다가도, 사람에 부딪힐까 걱정되서 이렇게 안쪽으로 붙어야만 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대충 주위를 둘러봐도 외국인이 좀 많았다. 요 며칠 사이 계속 이랬던 거 같은데, 어째서?


이유가 뭘까. 가볍게 고민하던 찰나 꺄르르 웃는 목소리가 귓가에 푹 꽂혔다.



“정말 여기에 오면 히어로를 만날 수 있는 거예요?”



히어로?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뚝 정지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자, 어른들 사이에서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들 여럿이 눈에 띄었다. 보아하니 관광객들인 모양이다. 파리에 관광객이 오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그건 뭐 그러려니 했지만, 방금 전 발언은 뭔가 싶어 마리네뜨는 재빨리 발을 놀려 그들의 말소리가 들릴 법한 거리까지 접근했다.


가이드를 둘러싸고 꺄아꺄아 떠드는 아이들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정말로 히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옆에 있던 다른 남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저 알아요! 인터넷에서 봤어요. 이상하게 생긴 아저씨랑 붉은 옷 입은 누나가 싸우는 거!”

“검은 고양이 잠옷을 입은 형도요!”



풉.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가 마리네뜨는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너무 웃겼다. 고양이 잠옷이라니! 블랙캣이 들었다면 무척 어이없어했을 게 분명했다. 울상을 지으며 너무한다 소리칠 블랙캣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같이 활동할 때마다 느끼지만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는 녀석이었다. 발상도 참 거침없었고. 아니, 물론 가방에서 뭐든 꺼낼 수 있다지만 설마 거대한 철창을 꺼내서 던진다는 미친 발상을 하는 또라이가 있다니. 심지어 모양도 새장이었어.


새장에 갇혀 있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상상하자 또 다시 웃음보가 터졌다. 너무 웃겨서 한참을 조용히 킥킥거리다가 낭랑한 어조로 질문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마리네뜨의 귀를 간질였다.



“그래서 히어로는 어디 있어요?”

“악당이 나타나지 않으면 볼 수 없단다~”

“에에-!! 히어로 보고 싶어요, 히어로!”



땡깡을 부리는 아이들을 애써 달래는 가이드를 가만히 지켜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웃었다. 저 아이들은 모르겠지.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히어로가 바로 몇 걸음 옆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어서 집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천천히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즐겁게 떠들고 있는 아이들을 스쳐 지나가던 푸드득, 요란하게 들리는 날개짓 소리에 마리네뜨는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와아….”



많은 수의 비눗방울들이 공중으로 와르르 날아오르고 있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비눗방울들에 태양빛이 닿아 잘게 부서지며 예쁜 색색깔의 빛으로 반짝거렸다. 이 많은 비눗방울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생각지도 못한 장관에 입을 헤 벌리고 망연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건 비단 마리네뜨 혼자만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서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비눗방울들을 경탄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히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비눗방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때였다.



“안녕~?”



위쪽에서 들려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위를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누군가가 떠 있었다.


푸른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딱 보기에도 체구가 무척 작은 게 눈에 띄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변성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차림새가 굉장히 특이했다. 팔다리에 쫙 달라붙은 짙은 하늘색의 쫄쫄이와는 달리, 상체와 하체를 동그랗고 커다란 에어슈트가 각각 감싸고 있었다. 동그랗고 반투명한 게 마치 비눗방울을 연상시키는 옅은 하늘색의 슈트였다. 등에는 커다란 통을 가방처럼 메고 있었다. 머리에는 팔다리의 색깔과 같은 하늘색의 베레모를 쓰고 있었는데, 옅은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특징할 점이라면, 그가 들고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비눗방울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올려다보던 마리네뜨는 티키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저 사람, 히어로야?”



미라큘러스의 힘으로 변신한 상대냐고 묻자 티키는 살짝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저 녀석도 만들어진 악당이라는 건가.


하지만 왜 갑자기 여기에?



“내 이름은 버블맨! 갑자기 나타나서 놀래킨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이지.”



입가에 사르르 미소를 걸고 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에 다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입을 벙긋하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버블맨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자주 나타난다는 히어로라고 부르는 녀석들 있잖아? 아, 레이디버그랑 블랙캣이랬나.”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리던 버블맨이 싱글싱글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위로 들었다.



“난 지금 무척 걔네를 만나고 싶거든. 하지만 그냥 기다리면 나오지 않을 게 뻔하잖아.”

“….”

“그러니 소동을 좀 피워야겠지?”



좌중이 침묵하는 사이에서 버블맨은 입가에 씨익 미소를 그렸다. 커다란 비눗방울채가 예고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누군가 크게 소리질렀다.



“도망쳐!!”



침묵이 깨졌다.


비눗방울채에서 나오는 무수히 많은 비눗방울들이 공중에서부터 아래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빠르게 만들어져서 달려드는 비눗방울들을 피해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개중에 도망치지 못한 몇 명은 비눗방울 사이에 갇혀서 하늘 위로 둥실 떠올랐다. 비눗방울 속에 갇히면 소리까지 모두 방음되는지 안쪽에서 뭐라 소리를 지르는데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갇힌 사람들의 가족과 친구, 연인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지노!”

“세레나!!”

“으아아아악!!”



비명소리와 절규가 시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 소동이 재밌는지 낄낄거리며 웃고 있던 버블맨의 머리로 붉은 무언가가 번쩍하며 날아왔다. 여유롭게 채를 들어 막아내는 버블맨의 바로 앞으로 붉은 인영이 날렵하게 착지했다.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를 발견한 버블맨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가 레이디버그구나?”

“너, 뭐야.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목적이 뭔데?”



비눗방울들을 피해 모두들 도망친 덕분에 시내에는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레이디버그는 손에 들고 있는 요요를 빙빙 흔들었다. 언제든지 던질 수 있게 준비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에게 버블맨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긴 왜야~ 너희의 미라큘러스를 가지러 왔지!”

“엥?”



생뚱맞은 대답에 맹렬히 흔들고 있던 요요를 바닥에 떨어뜨린 레이디버그와 달리 버블맨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걸 얻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며? 마음에 들어. 그러니 나한테 넘기라구!”



그 말과 함께 버블맨은 채를 마구 휘두르며 방울들을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요요를 휘둘러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비눗방울들을 모두 쳐내면서도, 레이디버그는 계속해서 방법을 궁리했지만 마땅히 파고들만한 틈이 없었다. 많은 방울들이 계속해서 몰려드는 통에 일단 상대가 어디 있는지부터가 파악이 어려웠고 순간의 틈을 찾기엔 방울들의 기세가 너무 매서웠다. 게다가 당장 요요를 다른 물건으로 바꿨다간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머리를 굴렸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언제 지칠 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던 찰나 갑자기 거짓말처럼 방울샤워가 멈췄다. 방울들이 사라진 너머로 보이는 것은 으악! 비명과 함께 이마를 손으로 감싸는 버블맨과, 휙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작은 부메랑이었다.


쏜살같이 날아온 부메랑을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언제 왔는지 제 옆에서 부메랑을 들고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이제야 와?”

“미안, 사람들을 좀 구하느라고.”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했는데?”

“커다란 잠자리채같은 거 하나 꺼내서 죄다 수거했어. 뭐, 일단 아래로 끌어내리기만 하면 터트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블랙캣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에 넘치는 표정을 보니 제대로 마무리짓고 온 것 같다. 블랙캣과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칭찬을 던졌다.



“그래, 잘됐네.”

“이제 늦게 온 거 용서해주는 거야?”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

“그래, 그럼 이제 어디 좀 제대로 해볼까?”



아직도 아픈지 공중에서 이마를 붙들고 버둥거리는 버블맨을 올려다보며,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각각 손에 들린 부메랑과 요요를 버블맨에게로 집어던졌다. 휘익- 소리를 내며 날아가던 물건들이 버블맨에게 닿을 찰나, 다른 쪽에서 날아온 무언가에 튕겨져 나갔다.


챙,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요요와 부메랑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히어로들이 재빨리 그것들이 떨어진 장소로 뛰어갔다. 요요와 부메랑 옆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막대가 떨어져 있었다. 재빨리 물건을 집어들고 두 히어로는 막대가 날아왔던 곳을 쳐다보았다.


지붕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버블맨이 작게 투덜거렸다.



“뭐야, 왜 이제야 와. 러스트?”



지붕 위에 있던 하얀 형체가 버블맨이 있는 쪽으로 휙 몸을 날렸다. 몇 번 공중에서 제비를 돌더니 버블맨이 만들어낸 비눗방울 위에 안착한, 러스트라고 불리는 악당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백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금발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얼굴에 역시 하얀 나비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은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를 연상케 했다.


비눗방울 위에 올라서 있던 러스트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저쪽은 말이 굉장히 많은데, 반면 이쪽은 묵묵부답이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관찰하듯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긴장태세를 갖췄다.



“그쪽도 악당인가? 저쪽이랑 느낌이 되게 다르긴 한데.”



가볍게 질문하는 블랙캣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러스트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손을 댔다. 뭐하는 짓인가 의아해하던 두 사람 앞으로 하얀 인영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윽!”



날아오는 금빛 막대를 재빨리 쳐낸 레이디버그가 반격하려는 순간 블랙캣이 재빨리 몸을 날려 레이디버그를 밀어냈다. 넘어지기 직전 레이디버그가 직감적으로 날린 요요에 손을 맞은 러스트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탁탁 손을 털고 있는 러스트를 한 번, 러스트의 주변에 있는 길들을 한 번 살펴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매끄럽게 빛나는 러스트의 주변을 보며 블랙캣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런 거였군.”

“에?!”

“저 악당, 이름이 러스트(lustre)잖아. 러스트의 뜻이 뭔지 잊어버렸어, 레이디?”

“에, 러스트라면. 윤기라던가, 광택이라던가.”

“정답. 그럼 저 녀석의 능력은 뭘까?”

“…주변을 매끄럽게 하는 거?”

“마찰을 없앤다고 하는 게 더 맞겠지. 그리고 자기가 만든 구역에서는 돌아다니는 것도 자유로운 것 같아.”

“에에, 좀 성가시겠네.”

“성가시지. 저 버블맨인가 뭔가하는 놈보다 더 성가셔.”



칫, 혀를 차며 블랙캣은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렸다.



“일단 저 손에 닿지 마. 아무래도 손으로 만져서 마찰력을 없애는 거 같아. 근거리전은 불리…!!”



날아드는 금빛 막대들을 부메랑으로 쳐내면서 블랙캣은 재빨리 가방을 열어 봉을 꺼냈다. 막대들을 살짝씩 몸을 돌려 피해가며 블랙캣은 봉을 길게 늘렸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봉이 러스트의 배를 정확히 찌르려는 찰나 몸을 피하는 러스트에게로 요요가 날아왔다.



“잡았다!”



요요에 꽁꽁 묶인 러스트를 보며 쾌재를 부를 찰나, 순식간에 묶여 있던 줄에서 빠져나오는 러스트를 보면서 레이디버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옆에 서 있던 블랙캣이 작게 소곤거렸다.



“안 돼. 마찰력을 없앨 수 있다면, 그런 걸로 묶어봤자 계속 빠져나오기만 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묶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쓰면 되겠지.”

“응?”

“이렇게 하자.”



블랙캣이 가만히 목소리를 낮춰 몇 마디 속삭이자 레이디버그가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뭔가 상당히 무식한 방법이네….”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근데 너, 은근히 머리 쓰는 것 같으면서도 막가파식으로 움직인다?”

“필요하다면 딱히 수단을 가리지 않을 뿐이야.”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블랙캣과 하하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를 내려다보며 버블맨은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거렸다.



“우와, 러스트가 오니까 정말 재밌어지네.”

“야! 비겁하게 공중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



분노에 찬 레이디버그의 목소리에도 버블맨은 ‘내가 왜?’ 라고 말하면서 러스트에게 손짓했다.



“러스트, 그거 좀 해줘.”



그거? 의아해하는 두 사람과 달리 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곧 일대가 순식간에 반짝반짝 매끄럽게 변하는 것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긴장한 얼굴로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지켜볼 수는 없었다. 버블맨이 갑자기 다시 비눗방울채를 휘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닥으로 쏟아지는 비눗방울들은 방금 전과는 달랐다. 사람들을 공격했던 비눗방울들은 바닥에 닿은 적이 없었고, 지면 가까이서 사람을 낚아채고 다시 하늘로 둥실 날아올랐다면 지금의 비눗방울들은 바닥에 내려앉더니 맹렬한 기세로 굴러오기 시작했다. 마치 공처럼.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달리기 시작하는 두 히어로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아아아아!”

“망할 자식, 저런 게 가능했어?!”



빠르게 쫓아오는 비눗방울도 문제였지만 바닥이 너무 미끌거려서 달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뒤를 돌아보며 짜증을 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소리쳤다.



“야, 어떡해 블랙캣!”

“일단 작전대로 간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골목으로 흩어졌다. 갑자기 쥐죽은 듯이 잠잠해진 주변에 버블맨과 러스트는 가만히, 그렇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골목에서 빠르게 튀어나오는 요요를 보자마자 러스트는 금빛 막대를 던졌다. 요요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골목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레이디버그가 러스트에게로 덤벼들었다. 주먹 휘두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맹렬히 싸우기 시작하는 두 사람 사이로 불꽃이 튀었다.


유유자적한 태도로 밑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흥미롭다는 얼굴로 구경하는 버블맨은 덤으로.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전력을 다해 덤비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러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는건 러스트 쪽이었지만 러스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상태면 분명히 금방 체력이 바닥나고 말 것이다. 실제로 레이디버그의 행동이 조금씩, 그렇지만 분명하게 둔해지고 있었으니까.


결국 영웅이라는 이름에 취한 무모한 애송이던가. 그렇게 생각한 러스트의 망막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비쳤다. 본인이 본인 몸 상태를 더 잘 알 텐데, 전혀 불리하지 않다는 듯이 씨익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에 러스트는 싸한 예감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예감과 함께 강한 발차기가 러스트의 복부를 관통했다.


한편, 버블맨은 다시금 비눗방울을 날려서 러스트를 지원할지, 재미있는데 그냥 계속 지켜볼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 중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후자가 제일 좋았지만 계속 놀기만 하는 건 좀 미안한데. 레이디버그의 발차기에 러스트가 뒤로 확 밀리는 것을 본 버블맨이 역시 거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채를 움직이려던 순간,



“Yo.”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버블맨의 머리 바로 위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투명한 무언가가 버블맨을 덮치며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는 러스트가 있었다.


쾅!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버블맨은 곧 제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러스트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버블맨은 자신들이 커다랗고 네모난 유리상자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블랙캣이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 어떠셔. 블랙캣 특제 초대형 유리감옥에 갇힌 소감이?”



마음에 들어? 피식 웃고 있는 블랙캣의 곁으로 레이디버그가 다가왔다. 상당히 힘들었는지 레이디버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짜증스레 소리쳤다.



“너 대체 왜 이렇게 늦게 나온 거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미안. 타이밍 잡기가 그렇게 힘들지 뭐야.”



블랙캣이 두 손을 모으며 사과했지만, 이번은 정말 힘들었는지 레이디버그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레이디버그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블랙캣은 놀란 얼굴을 한 버블맨을 향해 친절하게 설명을 개시했다.



“유인 작전에 걸려줘서 고마워.”

‘유인 작전이라고?’

“아무래도 너희를 잡으려면 새장같은 걸로는 어림도 없겠더라고. 조금이라도 공간이 비어 있으면 그 틈으로 빠져나갈 거 같아서 말이지. 저 러스트인가 뭔가 하는 악당의 능력대로라면 말이야.”



버블맨과 달리 묵묵히 듣고 있는 러스트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물론 그러든 말든 블랙캣은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간단히 머리를 좀 굴려봤을 뿐이야. 틈으로 빠져나간다면 틈을 아예 안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어?”



역시 자신은 천재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블랙캣을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유리를 부수려는지 들고 있던 비눗방울채를 유리에 쾅쾅 두들기기 시작하는 버블맨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으쓱거렸다.

포기해.



“이 유리상자가 우리 매직박스에서 나온 녀석이거든. 우리가 부수지 않는 한 절대 부술 수 없는 재질로 되어 있으니 허튼 저항은 그만둬.”



몇 번을 꽝꽝댔지만 흠집조차 나지 않는 유리에 버블맨은 질렸다는 얼굴로 밖에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은 버블맨의 눈빛에 블랙캣은 속으로 감탄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싱긋 웃는 블랙캣의 입가에 어려 있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나머지는 경찰서에 가서 자백하도록 하시죠.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만한 대가는 받아야지 않겠어?”




//



근처 건물 지붕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던 남자는 거리를 힐끗 돌아보던 중 주변을 돌아다니는 작은 꼬마아이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엄마를 놓치고 실수로 이 위험한 곳으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울먹거리는 얼굴로 엄마를 부르며 돌아다니는 꼬마의 모습에 무감정하던 남자의 눈동자에 연민의 빛이 아주 살짝 떠올랐다. 그도 잠시, 곧바로 손에 무언가를 쥐는 듯한 동작을 취한 그가 그것을 세게 던졌다.


정확히는 꼬마가 걸어가는 방향에 있는 가로수 쪽으로.




//


“엄마아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갓 4살은 되었을까 싶은 작은 남자아이가 엉엉 울면서 저 멀리서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엄마를 잃어버렸나? 아니, 그것보다 이쪽으로 오는 건 너무 위험한데!


레이디버그가 뭐라고 외치기 직전, 아이가 걸어오는 쪽에 서 있는 가로수가 휘청거렸다. 방금 전 레이디버그와 러스트가 격렬하게 싸운 여파 때문인지 나무가 휘청이는 소리가 녹슨 시계태엽이 굴러가는 소리마냥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제 머리 위로 커다란 그늘이 지는 것에 놀랐는지 울음범벅인 얼굴이 천천히 나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나무가 아이의 머리 위를 덮쳤다.



“안 돼!!”



앞 뒤 보지 않고 레이디버그는 아이가 있는 쪽으로 온 힘을 다해 뛰어들었다. 무기를 꺼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아이를 두 손으로 껴안은 레이디버그의 눈동자에 쓰러지는 거대한 나무 몸통이 천천히 슬로우 모션처럼 찍혔다. 피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칫!”



레이디버그가 아이를 구하러 뛰어드는 것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본능적으로 제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꺼낸 물건을 레이디버그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순식간에 부풀어오른 커다란 에어쿠션이 레이디버그와 가로수 사이를 꽉 차게 가로막았다. 나무는 궤도를 바꿔 레이디버그와 아이를 스쳐 지나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디버그는 곧 다시 울먹거리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쉬, 괜찮아. 이제 괜찮아.”



상냥하게 아이를 달래주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다행이라는 듯이 흐뭇하게 지켜보던 블랙캣은 반투명하게 변하며 사라지는 에어쿠션을 보자마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눈을 깜빡거렸다.


매직박스에서는 한 번당 하나의 물건밖에 꺼낼 수 없으며, 물건을 꺼내면 기존에 있던 물건은….


헛웃음을 지으며 블랙캣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유리박스도 사라졌지만 갇혀 있던 두 악당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블랙캣이 중얼거렸다.



“아, 이런.”



그 말과 동시에 삐용삐용 울리는 사이렌 소리들이 뒤에서 마구 들려왔다. 


곧 경찰차 수십 대가 그들의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쌌고, 덜덜 떨고 있던 아이를 경찰에게 넘기고 난 후에야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러스트가 마찰력을 없앴던 부분들은 어느 새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비눗방울들도 모두 사라졌고.


마치 한 때의 꿈처럼.



“그럼, 슬슬 헤어질까?”



방금 전 소동이 있던 거리에서 한참을 달려나온 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법한 거리의 지붕 위까지 온 레이디버그가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레이디버그를 쳐다보는 블랙캣의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지워졌다.



“레이디.”

“응?”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궁금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아까 왜 그렇게 대책없이 달려들었어? 농담이 아니라, 정말 레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잖아.”



가뜩이나 아까의 레이디버그는 미끼 역할을 하느라 체력까지 모두 다 소진된 상태였다. 자신이 돕지 않았으면 정말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이건 대체 뭐지?



“그런 생각할 틈도 없었어.”



그 대답에 깜짝 놀랐는지 블랙캣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냥 구해야겠다 생각하니까 발이 멋대로 움직이더라고.”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레이디버그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살짝 치며 말했다.



“너도 그렇지 않았어? 방금.”

“….”

“그래도 좀 대책없기는 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는 블랙캣이 이상했는지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랙캣?”



그렇구나.



“레이디. 이제 알겠어.”

“응?”



번민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그 위를 장난스러운 미소가 덮었다. 확실히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로 블랙캣은 씩 웃었다.



“나, 레이디한테 반한 거 같아.”



이걸 어쩌지?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진지한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레이디버그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웃고 싶어서 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레이디버그는 딱 잘라 말했다. 



“미안해, 아기 고양이씨. 마음은 고맙지만, 유감스럽게도 넌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뒤돌아서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블랙캣은 레이디버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으로 머리를 쥐뜯으며 중얼거렸다.



“아, 망했다.”



저런 모습까지도 멋지다고 생각하다니.



“뭐, 그런다고 순순히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블랙캣은 씨익 웃었다.




//



살짝 빛이 들이치는 어두운 통로 안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사실 빛이라고 해봤자 정말 간간히 틈새를 따라 새어나오는 정도라 간신히 얼굴을 알아볼 정도였지만. 터벅터벅 걷고 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앞쪽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멈춰 섰다.



“아저씨?”



조심스럽게 묻는 버블맨의 목소리가 작은 통로 안에 울려퍼졌다.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긍정의 표시라는 걸 아는 버블맨이 툴툴거렸다.



“하여간 아저씨는 너무 말을 안 한다니까.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있었던 거예요?”

“….”

“우리가 위험해졌던 것도 봤겠네. 그럼 좀 도와주지. 자칫했으면 큰일날 뻔했잖아!”



툴툴거리는 버블맨과 달리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마임맨에게 러스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거리에서 소동을 피워놨으니 한동안 파리에는 관광객들이 끊기게 되겠지. 뭐, 상관없다. 그만큼 경찰은 이쪽 사건 뒷수습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딱히 큰 피해가 나지 않은 이상 외신(외국 신문)들은 파리의 실태를 알리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테러와는 다른 성격의 문제니까. 그리고, 악당들과 히어로들의 싸움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상처럼 되어야만 했다.


그게 왜 문제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파리에는 이제 더 많은 경찰들이 악당들을 견제하기 위해 전담되겠지. 그건 그만큼이나 다른 쪽에서 활동하기 편하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무슨 소리야? 목적이 달성되다니? 우리 목적은 미라큘러스를 뺏어오는 거 아니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버블맨에게 러스트는 짧게 대답했다.



“예에, 맞습니다.”



우선하는 목적이 따로 있었을 뿐.



“행동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파리라는 도시가 이 이상 주목받기를 바라지는 않으시니까요.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리는 마임맨에 답례하듯이 러스트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버블맨에게 러스트는 주의를 주었다.



“버블맨, 당신도 마임맨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삼가도록 하세요. 아직 드러나야 되는 패는 아닙니다.”

“칫, 알았어.”



투덜거리면서도 러스트의 말에 동조하는 버블맨에 러스트는 살짝, 아주 살짝 미소를 지으며 버블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마임맨에 뒤이어 두 사람도 다시금 은밀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어제는 정말 힘든 하루였어….”



언제나처럼 등굣길을 걸으며 마리네뜨는 티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리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살짝 걱정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뉴스를 보니까, 관광객들이 아무래도 겁을 먹었나봐.”


[전날의 사건 이후, 경찰의 보호를 요청하는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경찰 당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조치를 다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오늘 아침의 뉴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힘없이 웃었다.



“무리도 아니지.”



영화에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아무래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니까.



“그나저나 마리네뜨. 어제의 그건….”



티키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마리네뜨는 전혀 걱정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뭐 별로 상관없잖아. 이미 거절했는걸.”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래도 어쩌겠어.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계속 거절하다보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본인도 그러지 못하는 주제에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누군가가 보였다. 익숙한 갈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마리네뜨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에스미!”



에스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반갑게 부르는 마리네뜨에게서 살짝 시선을 돌렸다가, 휙 고개를 돌려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에스미를 보며 마리네뜨는 민망해진 손을 살짝 내렸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


(묘사는 차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러스트가 달려들던 씬은, 러스트가 자기 앞쪽의 길들에 마찰력을 없앤 뒤에 마치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듯이 순식간에 앞으로 확 달려나온 거라고 보시면 되요 ㅇㅇ


펠릭스는 생각보다 상당히 다혈질인 성격이라고 가정했습니다. 그 성격이 튀어나오는 게 블랙캣 버전이고요. 다혈질적인 성격을 이성으로 누르고 있는 타입이라 어찌 보면 대단하기도 한데 피곤하겠다 싶기도 하고...


마리네뜨는 사람을 좋아하고 밝은 성격이지만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매우 예민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봄 에피소드에서 나오지는 못할 거 같네요.


액션을 10페이지나 써야하니까 너무 힘드네요 읽는 분들이 재밌으셨을지도 모르겠고... 다음부턴 적당히 축약하자ㅠㅁ ㅠ 사실 액션 빼고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ㅎㅎ


착실히 작업 중입니다. 다른 마감을 그제 끝내고 4화는 어제 다 썼는데, 퇴고 때문에 오늘 올려요 ㅇㅇ



Posted by I.R.E
,

전편 :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2





Episode 3.

비둘기를 다루는 남자






파리의 어느 한 건물 안에 자리잡고 있는 사무실이 있었다.


창문에 설치된 블라인드가 모두 닫혀 있는 덕분인지 사무실 안은 상당히 어두웠다. 3인은 앉을 수 있을 법한 소파들이 테이블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소파들 바로 뒤에 문을 마주하는 자리에 놓여 있는 책상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전화를 하고 있는지 남자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뭐라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남자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웃고 있지만 왠지 싸해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그리던 남자는 이내 전화를 끊고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책상에는 파리의 주요 일간지들인 르 몽드, 르 피가로, 리베라시옹을 포함한 각종 신문들이 올려져 있었다. 성향이 각기 천차만별이고 특성도 죄다 다른 이 신문들이 이렇게나 의견일치를 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 파리 시내를 떠들썩하게 하는 이슈가 모든 신문들의 1면을 보란 듯이 장식하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파리에 등장한 수수께끼의 영웅?’


이거였다. 기사에 포함되어 있는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남자가 피식 조소를 흘렸다.


“재미있어지겠군.”





///



왜 꼭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를 않는 걸까.



“펠릭스, 안녕!”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소녀를 가볍게 무시하며 펠릭스는 제 갈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역시나 소녀는 포기하지 않고 펠릭스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상기된 눈동자, 뺨에 홍조를 띄고서 마리네뜨는 열심히 펠릭스를 훔쳐보았다. 며칠 동안 따라다녀 본 결과 펠릭스는 말을 걸든 안 걸든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하기는 하지만. 무시하는 것이 더 편한 모양인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신문을 읽고 있는 펠릭스의 옆얼굴에 마리네뜨는 시선을 집중했다. 진지한 표정이 참 멋지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헤실 웃었다. 에스미는 콩깍지라고 뭐라 그러지만 어떡해. 그래도 멋있는걸.


펠릭스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까지도 멍해 있던 마리네뜨는 그가 입을 열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저기.”

“으, 응?”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교실인데.”



어느 새 교실 앞까지 다 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정말 길다고 생각했던 복도가 왜 이렇게 짧은 걸까. 역시 사랑의 힘?


꺄악, 사랑이래! 자기가 생각하고도 좋은지 양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포옥 감싸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청회색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았다. 뭘 잘못 먹었냐고 말하는 듯한 그 시선에도 마리네뜨는 행복한 듯이 웃으며 펠릭스에게 대답을 건넸다.



“그그렇구나! 맞다, 이거. 주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허둥지둥 가방을 뒤져 커피 한 캔과 쿠키봉지를 꺼낸 마리네뜨가 펠릭스의 손을 잡고 그것들을 쥐어주었다. 놀랐는지 잠시 가만히 있던 펠릭스가 다음 순간 입을 열었다.



“받을 수 없….”

“그럼 이만 갈게. 나중에 봐!”



그것을 건네주자마자 마리네뜨는 등을 돌렸다. 크게 손을 흔들며 반대쪽에 있는 자신의 교실 방향으로 달려가는 마리네뜨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펠릭스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나중에…?”



또 오겠다는 뜻인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는 펠릭스의 손에 들린 가방 안쪽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오올, 인기 많은걸~?’

“조용히 해, 들키면 어쩌려고.”



펠릭스가 나직히 주의를 주었지만 플랙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것대로 재밌지 않을까나?’

“…까망베르 치즈 안 준다.”

‘헉, 그건 안 되지! 내 사랑 까망베르 치즈~!’

“알면 좀 조용히 좀 해. 가뜩이나 골치 아프니까.”



어쩌다 제 인생에 이렇게 귀찮은 녀석이 하나 더 끼어든 건지. 암담해지는 기분을 가눌 수가 없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재밌지 않아?’

“구경하는 너야 재밌겠지.”

‘에이, 왜? 원래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야~ 덕분에 삶이 꽤 재미있어지지 않았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런 녀석은 하나로도 벅차.”

‘솔직하지 못하구만.’



그저 재미있는지 계속 웃고만 있는 플랙의 목소리에 펠릭스는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했다. 그가 소곤거렸다.



“이제 교실에 들어가야 하니까 정말 조용히 좀 해줘. 안 그러면 다음에는 안 데려올 거니까.”



 절레 고개를 내젓다가도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펠릭스가 교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소란스럽던 교실이 한 순간 조용해졌다. 책상 주변에 모여서 떠들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잠깐 펠릭스에게로 머물렀다가 금방 다시 사라졌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 조용해서 좋다고 생각하며 교실 안으로 들어서는 펠릭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녕!”



무시했다. 휙 고개를 돌리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펠릭스의 뒤를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앉아 책을 꺼내는 펠릭스의 앞에 다가온 상대가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죽삐죽 솟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갈색빛 피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장난기가 많을 것 같아 보이는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플랙과도 좀 닮아 있었다.


무시하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소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펠릭스에게 말을 걸었다.



“인사를 했으면 대답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좋은 아침.”



그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금 책에 눈을 돌리는 펠릭스를 보며 소년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인사해준 건 무척 고마운데 말이야…. 왠지 지금 인사가 꼭 ‘시끄러우니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같은 느낌인데?”



정곡을 찌르는 소년의 질문에도 펠릭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꿋꿋하게 제 할 일에 충실하는 펠릭스에게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거는 소년은 확실히 강적이었다.



“대화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너무하네. 책만 보고 살면 안 심심해?”

“….”

“오늘 수학 들었지? 으악, 난 수학 진짜 싫던데 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문제를 푸는 거야?”

“….”

“오늘 점심은 뭐 먹을래? 혹시 예정 없으면 같이 먹어도 되냐?”

“…이러는 목적이 뭐야, 너.”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재잘재잘 떠드는 소년의 모습에 결국 펠릭스는 독서를 포기하고 조용히 책 표지를 덮었다. 매일매일, 벌써 일주일이 넘게 자신에게 다가와 꼬박꼬박 인사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무리 무시하고 냉랭하게 굴어도 질리지도 않고 달라붙는 게 꼭 진드기같다. 자신을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일까? 아니면 떨어질 콩고물을 노리고 달라붙는 걸까. 하지만 눈앞의 소년이 그런 생각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는 사실을 펠릭스라고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소년은 개구지게 웃으며 펠릭스의 말을 정정했다.



“너가 아니라 앨빈이야. 앨빈 에반워프.”

“그래서.”

“응? 별 거 없어. 그냥 너랑 친구가 되고 싶을 뿐.”

“거절한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딱 잘라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런 펠릭스에 앨빈은 깜짝 놀란 듯하다가도 이내 싱글싱글 웃었다.



“우와, 무서워라. 냉랭하기 짝이 없네.”



과장된 몸짓으로 양 팔로 제 몸을 감싼 앨빈이 바들바들 떠는 척 열연을 펼쳤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지 가만히 한쪽 눈가를 찡그리는 펠릭스에게 앨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다지 나쁜 녀석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너.”

“뭐?”



펠릭스가 되묻는 순간, 딩동댕동 소리가 교내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앨빈이 중얼거렸다.



“아, 종 쳤다. 그럼 지금은 이만 돌아갈게.”



선선히 의자에서 일어나 본인 자리로 돌아가는 앨빈을 바라보다가 펠릭스는 짧게 탄식을 지르더니 책상에 털썩 엎드려 팔로 머리를 감쌌다. 미치겠군. 지금은, 이라고 말하는 건 다음에 또 오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잖아.


머리가 아팠다. 다가오지 말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음에도 끈질기기 짝이 없다. 요즘 들어 왜 이런 녀석들만 꼬이는 걸까. 가방 안쪽에 고이 잠들어 있는 플랙 녀석만도 이미 충분히 골치가 아프건만.


가만히 중얼거렸다.



“피곤해.”





“으음….”



나무에 기댄 자세로 마리네뜨는 살짝 옆을 내다보았다. 오늘도 역시 똑같은 벤치에 앉아 독서에 빠져 있는 펠릭스의 모습을 흘깃흘깃 살피는 마리네뜨의 손에는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이번에 극장에서 열리는 클래식 음악회 티켓으로, 그쪽 분야에서 일하는 이모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펠릭스를 보려다가도,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급하게 다시 나무 뒤로 숨기를 반복하는 마리네뜨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 말을 걸 때는 그래도 나름 괜찮았는데, 데이트를 신청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긴장이 된다.


손에 든 티켓들을 꼬옥 쥐고 마리네뜨는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무 뒤에서 나와 펠릭스가 있는 벤치로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펠릭스가 책에서 눈을 떼고 마리네뜨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흠칫, 몸을 움츠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마리네뜨를 보고 한숨을 쉬던 펠릭스가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안 되는데!


떠나려는 듯이 움직이는 펠릭스에 마리네뜨는 후다닥 뛰어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런 마리네뜨를 돌아보더니 펠릭스는 걸어가던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펠릭스의 모습이 마치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만 같아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더듬이가 예쁜 하트를 그려냈다.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펠릭스를 바라보는 마리네뜨의 눈이 반짝거렸다. 말은 꽤나 더듬거렸지만.



“저, 저기, 펠릭스. 혹시 오늘 시간 있니? 이번에 클래식 음악회 티켓을 구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우물쭈물하면서도 끝까지 질문을 마치고 마리네뜨는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가 무색하게 펠릭스는 살짝 눈을 감은 채로 관심없다는 듯이 홱 고개를 돌렸다. 거절의 대답이라는 걸 짐작한 마리네뜨의 어깨가 축 처졌다.


마리네뜨에게서 돌아선 상태로 펠릭스가 툭 말을 꺼냈다.



“선약이 있어.”

“그, 그럼. 다음에 시간이 나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돌려 사라지는 펠릭스의 등을 향해 마리네뜨는 ‘같이…, 가….’를 중얼거리다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좋은지 더 이상 쫓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그저 하염없이 펠릭스가 사라진 방향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 입을 우물거리다가 쓸쓸하게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손에 들려 있던 티켓의 가장자리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살짝 구겨졌다.




그런 마리네뜨를 뒤로 한 채 펠릭스는 약속장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공원을 벗어난 뒤 한참을 걷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골라 타고는, 몇 분 후에 내려서 다시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보통 이 시간대의 파리 거리들은 대체로 사람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펠릭스가 걷고 있는 길의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비싸보이는 차가 몇 대 지나다니는 것 말고는 상당히 한적했다.


주택가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방문할 만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변의 집들이 커서 그런지 거리에는 넓은 그늘이 져 있어 햇빛이 거의 들이치지 않았다. 싸할 정도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그늘길을 한참을 걷던 펠릭스는 어느 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옅은 베이지색의 벽 위에 금빛 지붕이 둘러진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이 근방의 집들이 모두 훌륭한 대저택들이긴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생김새였다. 창문들은 모두 아름다운 나비 문양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져 있었고,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벽들에도 각각 곡선의 문양들이 얇게 그려져 있었다. 그 위풍당당한 자태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전을 연상시켰다.


파리에 사는 시민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유피테르’ 가의 대저택 앞에서, 펠릭스는 가만히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소리와 함께 초인종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는 화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닫혀 있던 철창문이 열리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펠릭스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금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익숙하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저택 안으로 들어온 펠릭스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 바탕에 검은색 방울무늬가 그려져 있는 정장을 차려입은 금발의 여자였다.


엘렌 생쿼(Hélène Sancoeur). 이 저택 주인의 비서이자 저택의 관리까지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파일을 손에 들고, 단정하게 틀어올린 머리에 펠릭스만큼이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엘렌이 펠릭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숙부님은?”

“예정에 좀 차질이 생기셔서, 응접실에서 일단 기다리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엘렌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말없이 엘렌의 뒤를 따라가는 펠릭스의 주변으로 나비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확히는 살아있는 나비가 아니라, 그려진 나비들이었지만.


이 저택의 가장 큰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 반짝거리는 신전같은 외관도 아니며, 파리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는 오랜 역사도 아니다.


건축학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이 저택의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건 바로 나비였다. 나비가 그려지지 않은 장소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비들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진 창문은 물론이고 복도와 기둥, 심지어는 바닥에까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 모든 나비 문양들은 거의 천 년 전쯤에 세공된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상황인지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건물을 소유한 유피테르 가의 상징물이 나비가 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이 저택을 ‘나비 저택’ 이라고 불렀다.


응접실로 안내받아 소파에 털썩 앉은 펠릭스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군더더기 없는 배치와 깔끔한 응접실 안을 말없이 살펴보고 있는 펠릭스의 앞에 엘렌은 차와 쿠키가 든 쟁반을 내려놓았다. 금빛 나비가 새겨진 하얀 찻잔에 엘렌이 차를 따라주자 펠릭스는 천천히 왼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슬핏 웃으면서 찻잔을 내려놓고 펠릭스는 입을 열었다.



“여전히 깔끔하군.”

“아닙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엘렌이 다시 질문했다.



“학교 생활은 어떠십니까?”

“별로. 그냥저냥 지내고 있지.”

“….”

“걱정할 필요 없어. 성적은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정중하지만 걱정이 묻어나는 엘렌의 말투에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너는 날 보면 늘 그런 걸 묻는군.”



꽤나 즐거운지 무표정을 거두고 작게나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파리에 히어로라는 자들이 나타났었죠.”



찻잔을 들던 펠릭스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며 다시 차를 마시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담담하게 고하듯 말했다.



“의원님께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숙부님이?”

“네.”

“나한테 그런 걸 말해도 되는 건가?”

“도련님이 의원님께 해가 되는 일을 하실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침착하게 맞받아치는 엘렌의 대답에 펠릭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금 차를 호록 마시는 펠릭스의 옆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서서 엘렌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도련님.”

“….”

“의원님을 너무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답이 없는 펠릭스에게 엘렌은 재차 말을 꺼냈다.



“도련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려고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늘 혼자 지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꺼내는 건조한 대답에 펠릭스는 어이가 없었는지 하, 기가 찬 듯한 메마른 웃음을 내뱉었다.



“내 뒷조사를 한 건가?”

“…어느 정도의 보고는 받고 있습니다. 설마 의원님께서 도련님의 후견인이라는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펠릭스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에도 또박또박 대답을 내놓는 엘렌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엘렌은 계속 말을 꺼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눌러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 커서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도련님은 좀 더 자유로워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너의 의지인가?”

“네, 저의 의지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는 엘렌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펠릭스는 결국 나직이 한숨을 쉬며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그럼 그게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도 알겠군.”

“알고 있습니다.”



꿋꿋하게 대답을 마치는 엘렌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는 딱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펠릭스는 엘렌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고 직감했다. 매사에 더없이 합리적이고 필요 이상으로 말하기를 삼가는 성격의 비서는 지금 자신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괜찮냐고 매번 물을 때마다 언젠가 이런 말이 나오지는 않을까 막연히 짐작하기는 했었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니 조금은 놀라웠다.



“나는….”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에펠탑 근처에 있는 샹 드 마르스(Champ de Mars) 공원.


많은 가족들과 관광객들이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두르고 있는 공원에 모여 하하호호 떠들고 있었다.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먹는 무리들과 벤치에 앉아 있는 커플들, 사진기를 들고 공원 안을 기웃거리는 이들도 있었으며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의 경우 부모님과 같이 온 경우가 많았지만 보통은 친구들끼리 놀러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공원 한 구석에 모여 있는 네 명의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애를 세 명의 아이가 둘러싸고 있었다.



“정말 레이디버그랑 아는 사이야?”



곱슬거리는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콧등에 주근깨가 살짝 나 있는 여자아이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렇다니까?”



갈색 단발머리를 한 여자애는 자신 있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정말 친해. 얼마 전에도 서로 안부인사 주고받았거든.”

“근데 왜 요즘은 안 보이는 건데? 저번 정전 사건 이후로 소식이 안 들리는걸.”



곱슬거리는 짧은 금발머리의 남자애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걸 본 갈색 단발머리 여자애는 키득 웃었다.



“너 레이디버그 좋아해? 루크.”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멋있잖아!”

“그게 좋아하는 거지.”



말문이 막힌 루크를 뒤로 한 채 검은색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갈색 피부의 남자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그럼, 릴리. 나 번호만 좀 알려주면 안 될까? 목소리만이라도 들어보고 싶은데.”

“그건 곤란해 테오. 영웅의 사생활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어?”

“그런가….”



어리긴. 쯧쯧 혀를 차는 릴리의 앞에서 테오는 실망한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분위기를 개선하려는 건지 금발의 여자아이가 발랄하게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전해줘! 무지무지 기대하고 있다고 말이야.”

“그래.”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릴리의 모습에 세 아이는 그저 좋은지 즐거운 얼굴로 수군수군 대화를 주고받았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도 이미 화제 만발이었지만, 파리에서 벌어졌던 정전 사태에 도움을 준 사람이 두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자마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단 두 번 나타났을 뿐인 히어로들에 대해 파리의 언론들은 제대로 특종이다 싶었는지 그들의 활약상은 신문의 앞면에 대서특필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인기를 견인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히어로들의 등장에 파리 시내가 들썩이고 있었다. 그들의 인기는 특히나 어린 층으로 갈수록 더욱 높아졌다. 그러니, 그런 히어로와 아는 사이라는 릴리의 말에 세 아이가 크게 관심을 두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금발의 여자아이, 로즈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예쁘게 반짝거렸다.



“아, 저기 아이스크림 트럭이 있다!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좋지~! 루크랑 릴리도 먹을 거지?”

“콜. 나는 바닐라. 릴리 너는?”

“난 초코로 부탁해.”

“알았어~”



릴리만을 남겨두고 세 명이 아이스크림 트럭 쪽으로 뛰어가자, 그제서야 릴리는 긴장을 풀고 참고 있던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어쩌지?


사실 릴리는 레이디버그와 친하기는커녕 만난 적도 없었다. 신문기사에 떠 있던 사진으로 얼핏 보기는 했지만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시작은 간단했다. 그냥 미아 저 계집애가 예쁜 옷을 입고 와서 자랑하는 게 얄미워서 충동적으로 내뱉었던 거짓말일 뿐인데, 문제는 다들 그 말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순순히 믿고 있다는 거다.


처음부터 농담이었다고 해야 했다. 문제는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애들의 관심어린 시선이 좋아서 나중에 말하자고 계속 해명을 미루다 보니 어느 샌가 일이 너무 커져 있었다. 계속 얼버무리는 것에도 슬슬 한계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러다가 정말로 다시는 안 나타나면 어쩌지? 그러면 애들도 언젠가는 수상하게 생각할 텐데. 다시 나타나도 문제기는 했다. 레이디버그와 마주쳤을 때 나를 모르는 것처럼 보이면 모든 게 끝이었다. 어떻게든 해결하자. 의외로 사정을 설명하면 도와줄지도 모르고.


태평한 생각을 하며 벤치에 등을 기대는 릴리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레이디버그랑 친하다고?”



높은 톤이지만 굵기를 봐서는 남자 목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릴리는 짜증이 났다. 이젠 쟤들도 모자라서 상관없는 다른 사람한테까지 레이디버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다니. 저 멀리 트럭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애들의 모습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쟤네는 하여간 너무 목소리가 커서 탈이라니까.



“아, 그래요, 그래. 저 레이디버그랑 친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는 마세요. 가급적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무렇게나 내뱉는 릴리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뒤에 서 있던 남자의 입꼬리가 한 쪽으로 크게 올라갔다.



“그럼, 네가 위험해지면 레이디버그가 나타나려나?”

“네네, 당연…. 네?”



싸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마자, 제 위로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의 주인을 본 릴리의 입술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꺄아아아악!”





///



“하아, 역시 쉽지 않구나.”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마리네뜨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데이트 신청에 실패해서인지 평소보다 더 기운이 없는 마리네뜨의 손에 티켓 두 장이 꼭 쥐어져 있었다.



“마리네뜨, 너무 슬퍼하지 마.”



가방 속에 들어가 있던 티키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작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울해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티키는 재차 한 마디를 더 던졌다.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

“오늘은 정말 바빠서 거절했던 건지도 몰라. 선약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나중에 한가해질 때 다시 같이 가자고 해보자. 응?”



상냥하게 달래는 티키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일순 눈을 깜빡거렸다가, 다시 활짝 웃었다.



“그래 맞아!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구!”



조금은 기운을 차렸는지 다시 밝게 웃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티키는 흐뭇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아직 많이 얘기해보지 않은 사이라 어색해서 거절한 건지도 몰라. 응, 그럴 거야. 솔직히 몇 번 얘기해보지 않은 여자애가 난데없이 같이 공연보러 가자고 하면 좀 난감하잖아. 그래,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조금 더 친해지고 나서 다시 말해볼까. 괜찮아, 시간이야 아직 많으니까.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뭐!”



이 정도에 포기할 만큼 난 약하지 않다고! 계속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리다가 두 손을 주먹쥐고 힘차게 하늘로 뻗는 마리네뜨의 눈동자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티켓을 들고 있던 손을 펴자, 꾸깃꾸깃한 모양새로 손바닥 위에 올려진 티켓이 눈에 들어왔다. 우울해진 마음을 눌려펴듯 티켓을 다시금 반듯하게 펴면서 마리네뜨는 힘차게 중얼거렸다.



“아직 기회는 많으니까! 내일은 분명…!”



아니, 중얼거리려고 했다.



[긴급 속보입니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전광판에 띄워진 광고가 갑자기 뚝 꺼지더니 다른 화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면에 나온 앵커는 최대한 침착하고 빠르게 속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악당이 에펠탑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현재 이 악당은 어린아이 하나를 붙잡아 에펠탑 꼭대기에 인질로 잡아놓고 농성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뭐라고? 놀란 얼굴로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옆에서 티키가 다급히 마리네뜨를 불렀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경찰에서 헬리콥터를 동원했지만, 비둘기 떼에 막혀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마리네뜨. 느껴져!’

“느껴진다니, 뭐가?”



가방 쪽을 내려다보며 작게 소곤거리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재빨리 다음 말을 꺼냈다.



“저번에 말했던 이상한 기운!”

“정말?”



그 때, 전광판에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괴상한 차림새로 비둘기 떼를 타고 에펠탑 주변을 날아다니는 남자에 마리네뜨는 물론 시민들도 모두 경악했다. 하늘을 날고 있어?! 게다가 옷도 이상해!



<내 이름은 미스터 피죤. 레이디버그, 네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순순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을 거다!>


[보시다시피, 이 악당은 레이디버그의 친구를 붙잡고 있다며, 친구를 구하고 싶다면 에펠탑으로 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엥? 내 친구?”



설마 에스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마리네뜨는 다시금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비둘기들은 사람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막고 있지만 드론 카메라에는 관심이 없는지, 언론에서 취재를 위해 보내놓은 드론 카메라가 전송한 장면이 뉴스 화면 위로 떠올랐다.


이제 11-12살 정도 될 법한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를 본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보는 아인데?”


[정말 이 소녀는 레이디버그의 친구일까요? 만약 친구라면, 레이디버그는 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음, 어떻게 된 거지….”



에스미가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문제네. 턱에 손을 올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마리네뜨를 티키가 재촉했다.



“마리네뜨. 어쨌든 일단 저기 있는 장소로 가보자!”

“하긴, 악당이 나타났는데 히어로가 가만 있을 수는 없겠지.”



하아, 한숨을 쉬던 마리네뜨가 재빨리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번쩍, 빛이 새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붉은 인영이 건물들 사이에서 휙 뛰어올라 하늘로 솟았다. 모두 전광판에 정신이 팔려 있던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에펠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펠릭스는 엘렌을 쳐다보았다. 엘렌이 조용히 말했다.



“제 전화군요.”



한 치의 동요도 없는 얼굴로 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들었지만, 그 전화의 발신인이 누군지를 확인하자마자 엘렌의 얼굴에 짤막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의원님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엘렌은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펠릭스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전화를 해준 숙부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나저나 방금 그 소리는 핸드폰 벨소리인가? 요즘은 벨소리로 최신 가요를 쓰는 사람들이 많던데, 기본형으로 되어 있는 전화벨 소리조차 참으로 엘렌답다 생각하며 펠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우선 본인부터 돌보는 게 더 좋을 텐데.


혼자인데다 할 일이 없기도 해서 가만히 다 마신 찻잔을 노려보고 있을 찰나였다.



“파트너!”



갑자기 가방 속에서 튀어나와 제 앞으로 다가온 플랙에 펠릭스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깜빡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놀란 게 분명한 펠릭스를 보며 낄낄 웃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불퉁한 목소리라 말했다.



“플랙, 갑자기 나오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지금 아무도 없잖아~ 그것보다, 이상한 게 느껴지는데?”

“이상한 거라고?”

“아마 저쪽도 같은 걸 느꼈을 거야~”



플랙이 말하는 저쪽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들었다. 펠릭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열심히 쿠키를 주워먹고 있는 플랙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후, 응접실 문이 열렸다. 통화를 다 끝냈는지 엘렌의 목소리가 살짝 난처한 기색을 띄었다. 



“도련님, 아무래도 오늘은 사정상 만나뵙지 못할 거 같으시다고…. 도련님?”



응접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펠탑 근처까지 도착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껑충껑충 건물들을 뛰어 에펠탑 바로 앞까지 도착한 레이디버그는 곧이어 낯익은 뒤통수를 발견하고 동작을 멈췄다.



“여, 레이디?”



블랙캣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너도 소식 듣고 왔어?”

“아아, 대충.”

“말해두겠는데, 난 그 여자애 잘 몰라.”



단호하게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잠깐 멍하게 쳐다보던 블랙캣은 곧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기냐는 듯이 자신을 흘겨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겨우 웃음을 그치고 대답했다.



“알고 있어. 애초에 지금 나나 레이디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파리에 있을 리가 없잖아.”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는 듯 능글맞게 웃고 있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괜히 민망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제 어떡하지?”

“레이디는 어쩌고 싶은데?”

“어쩌긴. 저 애도 구출하고, 그 악당이라는 사람도 물리쳐야겠지.”

“계획 있어? 지금 에펠탑 쪽으로 접근하는 건 거의 무리라고 보는데.”

“계획이라면 있지.”



이번엔 레이디버그가 반격할 차례였다.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블랙캣, 미끼 작전이라고 알아?”

“응?”



의미심장하게 웃는 레이디버그의 미소에 불안해졌는지 뒤로 물러서려는 블랙캣의 어깨를 꽉 잡고, 레이디버그는 웃으며 말했다.



“미끼 좀 되어줄래?”





“어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펠탑 바로 옆을 날아다니는 비둘기들 위에 타고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꼭 비둘기와 닮은 모습의 슈트를 입고 있던 남자는 한참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발견하고 만면에 가득 화색을 띄웠다. 에펠탑에서 좀 떨어진 건물의 지붕 위에 선 블랙캣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블랙캣의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남자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혼자 온 건가?”

“우리 레이디까지 출동할 필요는 없거든~ 너는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도발하듯이 말한 블랙캣이 들고 있던 봉을 남자에게로 뻗었다. 순식간에 늘어난 봉이 남자의 턱을 정확히 가격했고, 그 충격으로 남자는 하마터면 공중에서 떨어질 뻔했다. 주변에서 날아다니던 비둘기들이 재빨리 받쳐주지 않았다면 가벼운 상처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쉽다는 듯이 쳇, 혀를 차는 블랙캣에 제대로 약이 올랐는지 남자는 물론이고 남자가 부리는 비둘기들이 모두 블랙캣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비둘기들과 악당이 블랙캣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시각, 에펠탑 꼭대기에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붉은 색 바탕에 검은 점박이가 점점이 박힌 행글라이더는 에펠탑 꼭대기를 한 바퀴 돌다가 전망대 위로 부드럽게 착지했다. 번쩍, 빛이 나는 것과 함께 행글라이더가 사라진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은, 붉은색 바탕에 검은 점들이 그려진 타이즈를 입은 소녀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레이디버그는 꼭대기 근처에 묶여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역시 레이디버그를 발견했는지 깜짝 놀라는 소녀에게로 달려간 레이디버그가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이제 괜찮아.”

“어, 정말 레이디버그…?”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잔뜩 지쳐 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본 레이디버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소녀를 번쩍 안아올렸다. 소녀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꺄악!”

“눈을 감고 나를 꽉 잡아요. 절대로 눈을 뜨지 말고.”

“네?”

“순식간일 테니까.”



당당하게 미소짓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올려다보던 소녀가 이내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뭐라 말하고 싶은지 뻐끔뻐끔 입을 벌리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는 소녀에게 레이디버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우리, 초면이죠?”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레이디버그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지만, 일단은 물어보았다.



“악당은 당신이 내 친구라고 말하고 있던데. 어떻게 된 건지 물을 수 있을까요?”

“…죄,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일이 커질 거라고는….”



정말로 미안한지 새빨개진 얼굴로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를 보며 레이디버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네?”

“나랑 아는 사이라고 해봐야, 이런 일만 겪게 되잖아요.”



영화만 봐도 그렇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상냥하게 웃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릴리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레이디버그는 그런 릴리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레이디버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일단 빨리 가야겠네요. 눈 감아요!”



소녀가 눈을 감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순식간에 요요를 사용해 에펠탑 아래로 내려온 레이디버그가 소녀를 에펠탑 근처에 있던 공원에 내려주었다. 살며시 눈을 뜬 소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세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테오, 루크, 로즈….”

“릴리! 너 괜찮아?!”



헐레벌떡 뛰어온 아이들이 릴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재잘거렸다. 이름이 릴리였구나.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럼, 친구 잘 챙겨줘요.”



그 말과 함께 요요를 던져 비둘기 떼가 몰려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레이디버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세 아이는 릴리를 돌아보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너 짱이다! 진짜 레이디버그랑 아는 사이였어?”

“진짜 멋있더라! 에펠탑 꼭대기에서 부웅 날아오는데, 완전 영화 속에 들어온 거 같았어!”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흥분해서 떠드는 아이들을 말없이 쳐다보던 릴리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아니야.”

“응?”

“거짓말해서 미안해. 나, 레이디버그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전에 만난 적 한 번도 없어.”



고개를 돌려 제 친구들을 똑바로 응시하는 릴리의 얼굴이 매우 단호했다. 할 말을 잃었는지 그저 황망히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릴리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도 구하러 와줬어. 화내지도 않고.”



자신을 보며 웃어주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지금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역시 악당을 상대하러 갔을까. 그 무시무시한 남자를?


그 남자에게 붙들려가던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나 릴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살다살다 악당에게 붙잡혀 에펠탑 꼭대기에 묶이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애초에 지금 상황이 전부 다 꿈만 같았다. 이런 게 현실에서 정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레이디버그가 떠나버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릴리는 중얼거렸다.



“무서운 거구나….”



영웅이란.






한편, 블랙캣과 미스터 피죤은 나름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나 잡아봐라~”



지붕 위를 요리조리 뛰어다니며 비둘기 떼들을 피해다니면서도 블랙캣은 속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왜 아직이지? 그러던 중 블랙캣은 미스터 피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 설마 눈치챘나?


의아해할 틈도 없이 미스터 피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춤을 추듯 엉덩이를 몇 번 씰룩거리던 미스터 피죤이 두 팔을 똑바로 블랙캣이 있는 방향으로 내뻗자, 비둘기 떼들이 한데 뭉쳐 그에게로 덤벼들었다.



“으악!”



삽시간에 덤벼든 비둘기 떼가 블랙캣을 감싸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원을 그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비둘기들이 사납게 구구거리는 소리가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소름끼쳤다.


하지만 잠시 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피죤은 재빨리 비둘기들을 모아 공격을 막아냈다. 피죤의 지시가 사라지자 블랙캣을 감싸고 있던 비둘기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재빨리 지붕 위로 착지하는 블랙캣의 옆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요요였다. 그리고 그 요요에 매달려있는 누군가.



“블랙캣!”

“오, 레이디. 이제야 오면 어떡해~?”



기다리다 몸에 사리가 나올 지경이었다구. 능청스레 대꾸하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살짝 눈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미스터 피존을 향해 소리쳤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목적이 뭐야! 죄 없는 어린아이를 붙잡고 사람들을 협박하다니….”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에게 피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뭐?”

“사람 한 둘 정도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당신….”

“인간은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생명을 죽이는데.”



그 한 마디에 요요를 던지려던 레이디버그의 동작이 일순 멈추었다. 블랙캣은 그런 레이디버그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피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피죤은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 드넓은 자연을 파괴하고, 늘상 이용하고 오염시키는 게 누구지? 바로 인간들이잖아. 그런데 본인들은 죽기 싫다고? 그거야말로 이기적인 거 아닌가?”

“….”

“자연과 어울려 지내려고 하기보다는 독차지하고 파괴하기만 하려고 하지. 난 그런 인간들이 너무나도 싫거든.”



히죽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미스터 피죤의 말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악당이지만 그가 하는 말은 별반 틀린 것이 없었다. 인간이라고 해도 결국 동물의 한 종일 뿐인데, 어째서 인간들만이 특별하게 취급되어야 하냐는 그의 의문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 토론해온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입을 딱 다물고 있는 두 히어로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지 미스터 피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모두 없애고….”



다만 그 다음 말이 너무 황당한 게 문제였지만.



“우리 비둘기들의 세상을 만드는 거야!”



홀홀홀 웃으며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미스터 피존의 모습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산통 다 깼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한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냥 후려쳐버려! 저건 또라이가 분명하다구, 레이디!”



옳은 말씀.


그 말에 백 번 공감하며 레이디버그는 힘차게 요요를 던져 미스터 피죤의 이마를 가격했다. 악!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부여잡고 뒹굴거리던 미스터 피죤은 다시금 날아오는 요요에 히익,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다. 그런 미스터 피죤의 주변으로 비둘기들이 몰려들더니 그를 감싸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늘에서 두 히어로를 내려다보면서 미스터 피죤은 크게 웃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주지! 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너희들을 해치워주겠다!”



그 말과 함께 하늘로 날아 사라지는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보면서 블랙캣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악당의 전형적인 대사 아냐?”

“누가 아니래.”

“그나저나, 레이디. 우리 어서 도망가야 할 거 같은데.”

“? 왜?”

“하늘을 봐.”



블랙캣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본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방송국 로고가 그려진 헬리콥터 몇 대가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지붕 아래에도 시민들이 많이 몰려와서 핸드폰을 들이대고 있었다. 레이디버그는 헛숨을 들이켰다.



“헉.”

“이야~ 많이도 몰려왔는데?”

“지금 감탄할 때야?! 어서 도망가자!”



그 말과 함께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잡아끌었다. 요요를 던져 그 줄을 타고 사라지는 블랙캣과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시민들은 우왕좌왕하며 그들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그들을 붙잡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산한 골목에 도착해서야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놓아주었다. 제 팔을 뿌리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일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시 가면을 벗을 시간이다. 왠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 기분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돌아서려는 블랙캣을 레이디버그가 불렀다.



“블랙캣.”

“응? 왜, 레이디?”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물론이지, 뭐든 물어봐.”



화색이 되어 대답하는 블랙캣의 얼굴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레이디버그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너, 정말로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이야? 히어로.”

“….”

“이런 일이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한 레이디버그의 표정에 뭔가를 짐작했는지 블랙캣의 입가에서 미소가 살짝 가셨다.



“레이디는 하기 싫은가봐?”



정곡을 찌르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질까봐? 이번에 붙잡혀 간 소녀처럼.”

“그것도 있고, 그냥 내키지 않아.”



투정부리듯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관찰하듯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결론을 내렸는지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거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아무렇지 않은 듯 날카롭게 속을 후벼파는 블랙캣의 대답을 레이디버그는 장난스럽게 맞받아쳤다.



“너 진짜 싫다.”

“우와, 너무해. 나 상처받는다구? 이래뵈도 연약한 아기 고양이란 말이지.”

“퍽도 연약하겠다.”



블랙캣이 던진 농담에 피식 웃으며 레이디버그는 뒤로 돌아섰다. 집에 가야겠다,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가던 레이디버그는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걸어간 거리만큼을 따라온 블랙캣을 쳐다보며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왜 계속 나를 쫓아와?”

“같이 있고 싶어서.”

“왜 같이 있고 싶다는 건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가?”

“말을 돌리네, 너.”



한숨을 쉬듯 말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살짝 미소지었다. 마냥 밝기만 한 미소가 아니라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는 듯한 쓸쓸한 미소.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면서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그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차 흐려졌다. 그런 레이디버그의 표정을 본 블랙캣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런 표정이라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억지로 웃는 듯한 표정.”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재차 말했다.



“웃기 싫으면 차라리 인상을 찡그리는 게 나아. 뭐, 레이디한테는 활짝 웃는 얼굴이 가장 잘 어울리긴 하지만.”

“가면으로 가렸는데 그게 보여?”

“보이지. 저번에도 말했잖아. 고양이는 눈이 밝다니까?”



능청스레 말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풋 웃었다. 정말 따라오지 말라고 강조하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돌아섰다. 그런 제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블랙캣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레이디버그는 잠시 멈칫했다.



“고마워.”



던지듯 그 한 마디를 던지고 레이디버그는 휘익 날아서 사라졌다. 레이디버그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블랙캣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난 망했어….”



곧장 집으로 돌아온 뒤 제 방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마리네뜨의 목소리에 우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사진도 사진인데, 분명 동영상 찍은 사람도 있을 거라고! 방송사를 피한 건 그나마 다행인데 진짜 어쩌지. 유투브에 영상이라도 올라오면….”

“유투브? 그게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티키에게 마리네뜨가 간단히 설명을 해주자 티키는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렸다.



“그런 게 있구나!”

“사진까지는 그래도 넘기겠는데, 제발 동영상 찍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머리를 쥐어뜯는 마리네뜨를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던 티키가 한참 고민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그것보다 마리네뜨. 지금 중요하게 해야 하는 말이 있어.”

“중요한 말?”



수척해진 얼굴을 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장 최악의 가능성이 실현된 것 같아.”

“최악이라니….”



여기서 뭐가 더 최악인데? 그렇게 묻는 듯한 마리네뜨의 얼굴을 마주하며 티키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우리가 오늘 만난 악당. 그 악당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은, 호크모스의 것이었어.”

“호크모스?”

“또 다른 미라큘러스, 나방 미라큘러스를 가진 히어로야.”

“미라큘러스가 더 있다고?”



깜짝 놀라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뇌리를 스치고 떠오르는 생각에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저번에 그 정전 사건!! 그럼 그 사건 때도, 그쪽에서 관련했을 수도 있다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미라큘러스는 히어로로 변신시켜 주는 물건이 아니었어?”

“미라큘러스는 선하다, 악하다로 나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칼로 빵을 자르면 괜찮지만 사람을 찌르면 흉기가 되잖아? 마찬가지야. 다만 되도록 선한 사람에게 넘어가도록 설계되어 있을 뿐이지.”



마리네뜨의 손이 제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미라큘러스의 직감 때문일까? 위험을 감지한 건지 파르르 떨리는 제 손을 베개에 묻으며 마리네뜨는 티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티키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마리네뜨. 아무래도 조금은 힘든 싸움이 될 거 같아. 특히 절대 정체를 들켜서는 안 돼. 그 누구한테도. 너는 물론이고 네 정체를 아는 사람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으응, 알았어.”



머뭇머뭇 대답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티키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마리네뜨.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응?”

“블랙캣을 너무 믿지 마.”



순간 티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말뜻을 이해한 마리네뜨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슨 말이야, 티키?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

“블랙캣과 협력하는 건 좋지만, 아주 믿어서는 안 돼. 블랙캣은 말이지, 어떻게든 너한테서 신뢰를 얻어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 신뢰?”



어째서. 그렇게 묻자 티키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블랙캣은 조금 특별해. 왜냐하면, 블랙캣이 가진 힘은 자칫 잘못하면 끝없이 위험해질 수 있거든. 마리네뜨, 왜 검은 고양이가 불행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것도 블랙캣에게서 비롯된 거라는 거야? 레이디버그처럼?”



티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마리네뜨,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왜 호크모스가 아니라 블랙캣이 너의 동료라고 말한 건지.”

“그건….”

“너와 블랙캣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네 상상보다 더.”



너무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들어서일까. 어지러운지 그저 눈만 깜빡거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티키는 다음에 마저 말해야겠다 생각했는지 적당히 말을 끝냈다.



“지금은 더 말할 상황이 아닌 거 같아. 나중에 제대로 다시 얘기할게. 아무튼, 조심했으면 좋겠어.”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티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이는 마리네뜨도 마찬가지였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부여잡고 마리네뜨는 베개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절규와 함께.



“이게 뭐냐구!”





===



P.S. 저는 펠릭스가 티키와 만나지 않은 것이 레이디버그 최고의 밸런스 패치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Posted by I.R.E
,

※ 1편: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1

댓글 다실거면 제발 후기 좀 읽으세요.




Episode 2.

블랙캣과의 만남







“저기!”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청회색 눈동자가 소년의 뒤에 서 있던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고, 위로 삐죽 솟은 더듬이같은 앞머리가 인상적인 동양계 소녀. 푸른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소녀는 딱 보기에도 꽤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소년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걸어가려는 순간 소녀가 소년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잔뜩 망설이는 얼굴을 하면서도 소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그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자신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소녀의 시선 앞에서도 소년은 무표정했다. 별로 달가워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딱히 소녀를 제지하지도 않았다.


한참 뒤, 소녀가 다시금 내뱉은 첫 마디는 매우 간단했다.



“나 기억해?”

“….”



아무런 말도 없는 소년에게 소녀는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개학식 날 기억해? 그 날 횡단보도에서 구해준 거, 고마워.”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 표정변화 없이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소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감사를 표시했다.



“정말 고마웠어. 나 그 날 좀 피곤했었거든. 너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차에 치였을지도 몰라. 아, 그 때 고맙다고 하려고 했는데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우리 학교 학생인 줄 알았으면 진작 인사했을 텐데, 너무 늦게 찾아왔다면 미안해. 그 때랑 같은 시간에 횡단보도에 나가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재잘재잘 떠들며 배시시 웃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년이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별로.”

“에?”

“그렇게까지 감사받을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침착하게 내려앉는 음성이 귀를 간지럽힌다. 역시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대답없이 눈을 깜빡거리는 소녀를 뒤로 한 채 소년은 그 자리를 떠났다. 조용히 자신을 무시하며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소녀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다른 학생들이 모두 복도에서 사라질 즈음에야 소녀의 긴 더듬이가 몇 번을 움직이더니 하트 모양을 그렸다. 얼굴에 홍조를 가뜩 띄우며 좋다는 듯이 웃고 있던 소녀는 마지막 수업종이 쳤을 때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꺅! 빨리 가야겠다!”



허겁지겁 교실로 달려가는 소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그래서, 만나보긴 했어?”



그 질문과 함께 에스미는 입에 물고 있던 빨대로 바나나 우유를 쪽 빨아마셨다. 무심한 얼굴의 제 친구와는 달리 마리네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 멋있어!”



좋아라 눈을 반짝거리는 친구의 모습을 못 봐주겠다는 듯이 에스미는 눈을 치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는 흥분한 얼굴로 눈을 반짝거리며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진짜 막, 딱 한 마디밖에 못 들은 게 너무 아쉬워. 아, 하지만 목소리 정말 좋더라. ‘그렇게까지 감사받을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라고 하는데……. 아, 진짜 나 어떡하지? 정말 사랑에 빠졌나봐!”



꺄악 비명을 지르며 책상에 털푸덕 엎어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서는 행복이 가득 묻어나왔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한 그 얼굴에 에스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젓다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의외인데? 니가 말한 상대가 그 녀석이라니.”

“뭐야, 에스미. 그 애에 대해 알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름 정도는 들어봤지. 아니, 그보다. 넌 우리 학교 전교 수석이 누군지도 몰라?”

“누군데?”



정말 모르는 듯한 마리네뜨의 질문에 에스미가 한숨을 쉬었다. 니가 그럼 그렇지.



“방금 네가 말한 걔. 펠릭스 아그레스트. 입학 때부터 한 번도 수석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괴물이잖아.”

“헉, 진짜? 머리 좋구나….”



멍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리네뜨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에스미의 표정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찝찝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에스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거 말고는 정보가 없어. 니 말마따라 무표정에 말수도 없는 타입이라 성격이 어떤지도 잘은 모르겠고. 같은 반 애들하고도 거의 대화를 안 한다고 하고. 매번 무표정한 모습이 어째 로봇같은 느낌이 나서 애들도 좀 꺼려한다더라. 듣자하니 어디 명문가 쪽 외동아들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여러 모로 수상쩍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알려진 정보가 없어서 괜한 편견을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에스미는 다시 마리네뜨를 힐끗 돌아보았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니 걱정부터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솔직하다 못해 속내를 아주 끄집어내놓고 사는 듯한 녀석이랑 아예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녀석의 조합이라니. 상상이 잘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고.


다 마신 우유의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에스미가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거라면 취미가 독서라는 것 정도? 늘 뭔가 책을 읽고 있다더라. 도서관에도 자주 나타나는 거 같고.”

“그래서 그렇게 똑똑하고 침착하구나. 진짜 멋있다….”

“세상에 콩깍지가 무섭다더니.”



뭘 어떻게 들으면 그런 결론이 나니?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왜? 멋있잖아.”



아무래도 상사병 중에서도 말기 증상인 것 같다. 뭘 어떻게 말해도 요지부동일 것만 같은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는 말려봐야 소용없겠다 싶어 가만히 한 마디를 던졌다.



“…뭐 네가 좋다면야.”

“좋아, 그럼 조사부터 시작해야지!”



책상에 한쪽 팔을 기대고 그 손 위에 턱을 괴고 있다가, 기운차게 소리치는 마리네뜨의 대답에 에스미의 얼굴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에스미가 불길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무슨 조사?”

※ 의지가 준비되어 있을 때, 발은 가볍다잖아?”



환하게 웃으며 투지를 불태우는 마리네뜨를 뒤로 한 채 에스미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저거 어째 불안한데….”




※ 프랑스의 노력 속담 중 하나. 원문은 : When the will is ready, the feet are light



///



펠릭스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펠릭스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한 타입에 속했다. 에스미의 말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본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성격도 아닌 듯했다. 말수가 적어서인지 대화를 해본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반나절 동안 학교 애들을 탐색하고 다녔지만 성과가 거의 없는 것에 마리네뜨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사람이 이렇게도 없다니!


그래도 다행인 건 펠릭스의 가문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꽤 된다는 점이었다. 알고 보니 펠릭스의 성인 아그레스트는 파리에서도 굉장히 오래된 명문가 중 하나였고, 때문에 선생님들에게서는 어느 정도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일단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부모를 일찍 타계했으며 유명한 정치가를 숙부로 두고 있다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알아낼 수 있었다. 현재는 7구 쪽에 있는 커다란 저택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다 미성년자의 신분임에도 숙부와 같이 살지 않는 이유는 아그레스트 가문을 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에 책이 많아서인지 밖으로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는 것 같고, 가끔 외출하는 경우에도 목적지는 학교거나 도서관인 경우가 90% 이상이었다.


취미는….



“책 읽는 걸 좋아한다라.”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리네뜨는 손에 들고 있는 수첩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책이라니. 몇 번을 봐도 참 골치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거하게 한숨지었다. 왜냐하면 마리네뜨의 인생에서 가장 인연이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책이었으니까. 공부는 그냥저냥 하지만.



“음악도 좋아하는 거 같다고 했던가….”



클래식한 음악을 좋아할 거 같아. 손끝부터 발끝까지 딱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다니던 펠릭스를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그래도 음악회 정도는 같이 가자고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일단 표를 한 번 구해봐야 할 것 같다.



“7구 쪽이라면 엄청 큰 집들일 텐데….”



지금은 5구나 8구가 부촌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부자 동네라고 하면 역시 7구를 빼놓을 수 없다. 에펠탑과 국회의사당 등 18세기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물들이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언제 한 번 7구를 지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도 길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우뚝 솟아있는 클래식하고 거대한 저택들에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딱 봐도 수십 명은 살 수 있을 것만 같이 커다랬었다. 그런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니.



“괜찮을까?”



자신이라면 분명 무척 무섭고 외로울 것이다. 지금도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조금 무서우니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안에 있다 보면, 처음에는 괜찮다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혼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침묵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 예전에는 늘 혼자였기에 그것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에스미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생각보다 많이 외로웠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직 어려서 이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펠릭스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마리네뜨.”



조그맣게 들리는 명랑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샤샥 주위를 둘러보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왼편으로는 센 강이 내다보이며 오른쪽에는 나무들이 빽빽한, 공원 가장자리를 가로지르는 이 길은 마리네뜨가 가장 애용하는 산책길 중 하나였다. 워낙 큰 공원이니만큼 다른 길들도 꽤 많지만, 그런 길들 쪽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산책은커녕 움직이기도 힘드니까.


오늘도 여지없이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리네뜨는 옆구리에 찬 가방을 향해 작게 소곤거렸다.



“티키, 쉿!”



마리네뜨의 말에 대답하듯 가방 속에서 꺄르르 웃음소리가 났다.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은 웃음소리는 듣기에 무척 좋았지만, 그걸 마냥 좋게만 받아들이기에 마리네뜨는 지금 심적으로 그리 태평하지 못했다. 특히 지금 도시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레이디버그의 등장으로 파리에는 일순 난리가 났다. 강도를 잡은 다음 날, 언론들은 하늘을 날아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사진 몇 장을 내걸고 짤막하지만 임팩트 있게 방송했고, 영화 속에나 나오는 히어로의 등장이라며 온갖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있는 신문들도 즐비했다. 파리에서 가장 명성 높은 일간지인 르 몽드와 르 피가로, 리베라시옹의 1면이 모두 레이디버그의 사진으로 가득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마리네뜨가 얼마나 기겁했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마리네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참 살고 볼 일이네. 살다살다 내가 신문 1면에 실릴 날이 오다니….”

“그만큼 모두 너를 환영한다는 소리라구, 마리네뜨!”



가방 안에서 뛰쳐나오며 발랄하게 웃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는 살짝 미소짓다가도 곧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글쎄. 정말 내가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어. 미라큘러스는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는 돌인걸. 마리네뜨, 넌 이 파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미라큘러스에 선택받은 사람이라구! 자신감을 가져 봐.”



회의적으로 말하는 마리네뜨를 향해 티키는 확신을 주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런 티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리네뜨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힘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시 변신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히어로가 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했다.



“애초에 네가 말한 세상에 위험이 닥쳤다는 말도 잘 모르겠구. 그게 굳이 이런 히어로가 필요할 정도의 일인가?”



마리네뜨의 질문에 티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절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미라큘러스가 깨어나는 순간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어.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

“마리네뜨. 너밖에 없어.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는 게 그렇게까지 싫은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레이디버그로서 변신했을 때의 감각은 여전히 마리네뜨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정말로 가벼워진 몸과 자유롭게 움직이는 팔다리,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자신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특히 하늘을 날아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정말로 즐거웠다. 맞부딪히는 바람이 상쾌했고,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파리 시내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잖아.


무엇보다 마리네뜨에게는 확신이 부족했다. 왜 하필 자신일까, 라는 의문은 아직도 마리네뜨의 안에 자리잡은 채로 속삭이고 있었다. 히어로라니, 왜 하필 나 같은 애한테? 그런 건 좀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임무 아니었어? 이리보고 저리봐도 자신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애일 뿐인데. 아니, 평범한 건 아닌가. 안 좋은 의미로는 자신도 특별하긴 했다.


마리네뜨는 쓰게 웃었다. 재수가 없는 걸로 파리 시내에서 자신만한 사람이 있긴 할까? 어릴 때부터 온갖 불행과 함께해온 터라 이젠 아무 일 없이 보내는 하루가 더 어색할 지경인데. 사람들을 구하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건수하지도 못하는 히어로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변신할 수 있다고 해도 나 혼자서 대체 뭘 할 수 있겠어? 당장 파리 시내만 해도 범죄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잖아. 그걸 일일이 다 막을 수도 없는걸. 내가 분신술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가 아니야.”

“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티키에 마리네뜨는 귀를 의심했다. 티키는 싱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다.



“동료가 있어.”

“동료?! 동료라니, 대체 누군데?”

“곧 만나게 될 거야.”



싱글싱글 웃는 티키의 모습을 보니 지금은 가르쳐주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다. 그에 마리네뜨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 자리에 멈춰섰다. 마리네뜨?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티키를 한참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티키.”

“응?”

“그런데 왜 꼭 내가 히어로가 되어야 해?”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는 난처한 기색이 가득 묻어났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다른 히어로가 있다면 굳이 내가 히어로가 될 필요는 없지 않아? 오히려 방해만 될 지도…. 모르는데.”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는 것이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영웅이 되야 한다고 하면 그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가 멋있다고는 생각했지만 한 번도 그 히어로에 자신을 대입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사고에 말려든 시민 1의 심정이 더 이해가 갔었으니까. 자신이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악당과 싸우게 된다고?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저번은 어찌어찌 해내기는 했지만 그건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분명 많은 비난을 받을 텐데.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나 같은 애가?


자신이 없었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마리네뜨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티키는 별로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티키가 이내 답을 내놓았다.



“마리네뜨 네가 아까 말한 것처럼,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

“그래서 동료가 필요한 거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놓는 대답은 어느 하나 틀린 것 없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우울해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티키는 다시 활짝 웃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리고 레이디버그가 되어서 좋은 점은 그것만이 아닌걸.”

“응? 그게 무슨….”



그 말을 내뱉자마자 마리네뜨는 뭔가의 예감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즉시 마리네뜨가 서 있던 자리에 무언가가 철퍽 떨어졌다. 하얀 새똥이었다.



“히익!”



급히 위를 올려다보자 제 머리 위를 빙빙 날아다니는 비둘기 한 마리가 보였다. 어떻게 피했지? 멍하게 앞쪽으로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미라큘러스가 단순히 변신만 도와주는 물건은 아니라구.”

“이건….”

“레이디버그의 능력 중 하나인 ‘직감’이야. 무당벌레는 행운을 상징한다잖아? 그건 바로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의 상징하는 능력에서부터 유래된 말이야.”

“행운을 상징한다고?”

“맞아. 변신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상시 발동하지.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레이디버그가 되어서도 위험을 직감하고 피해갈 수 있어.”

“와….”

“물론, 마리네뜨일 때도!”



생각지도 못한 능력에 마리네뜨는 그저 입을 헤 벌렸다. 무엇보다 자신의 불운한 체질과 정말이지 딱 들어맞는 능력이 아닌가. 저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게, 이렇게 스스로 위험을 피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는걸?


마리네뜨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새가 지저귀는 듯한 높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마리네뜨가 저도 모르게 자켓의 한쪽을 살짝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티키, 숨어!”



티키가 재빨리 그 안으로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마리네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들 사이를 살펴봐도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서야 마리네뜨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하하, 힘없이 웃다가 마리네뜨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솔길이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바로 공원 출구가 보일 것이다.


천천히 걸어 모퉁이를 돌자마자 탁 트인 커다란 원형의 공터가 보였다. 초록빛의 나무들 앞에는 나무 벤치들이 줄을 맞춰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마리네뜨 바로 가까이에 있는 벤치 앞에는 많은 수의 비둘기들이 모여 있었는데, 앉아 있던 남자가 마리네뜨를 보더니 살짝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갈색빛의 허름한 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있는 나이 지긋한 남자의 손에는 호루라기를 닮은 피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방금 전의 소리는 저 사람이 낸 걸까?


떨떠름하게 웃다가, 마리네뜨는 이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벤치 위 종이봉투 속에 들어있던 먹이를 비둘기들에게 뿌려주며 즐거워하는 남자를 스쳐 공원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리네뜨의 뒤로 화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저기요, 자비에 씨! 몇 번을 말해야 알겠습니까. 비둘기, 모이주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아니, 그래도….”

“계속 모이를 주면 아무데나 똥을 싸잖아요! 공원 관리인들한테서 항의가 들어오고 있단 말입니다! 당장 꺼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마리네뜨는 재빨리 뛰어서 공원을 빠져나갔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대화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뭐라고 하는지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방금 전 아저씨를 꾸짖는 남자의 목소리는 워낙 소리가 크다보니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소곤거렸다.



“진짜 목소리 크시네.”

“그러게, 기차 화통을 삶아 드신 걸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마리네뜨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면서 마리네뜨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저 아저씨 되게 안쓰럽다. 모이 하나 줬다고 저렇게 비난을 들어야 하다니.”

“그러게 말이야.”



가방을 열고 티키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마리네뜨는 그런 티키를 내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비록 힘없는 미소였지만.



“자신이 없어.”

“마리네뜨….”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티키? 아직은….”



뭐라 정하기가 어려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름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마주 웃어주었다.



“응, 알았어.”

“그래, 그럼 일단 집에나 가자!”



다시 환하게 웃으며 길을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도 없어 보였다. 속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마리네뜨의 주변으로 스산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알든 모르든, 이미 이 아름다운 도시에 깔리기 시작한 어두운 기운을 감지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리네뜨는 재빨리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수학숙제가 많은 거냐며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마리네뜨의 뒤에서 티키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그저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러갔다. 시침이 어느 덧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는 순간에서야 마리네뜨는 의자에 기대 쭈욱 기지개를 폈다.



“으아, 힘들어!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된다…!!”

“힘내, 마리네뜨!”

“고마워, 티키. 아, 진짜 이게 무슨 일….”



마리네뜨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방의 형광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갑자기 꺼져버렸다. 어라? 스탠드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해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전인가? 그런데 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까맣게 물든 시야는 바로 앞에 뭐가 있는지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자신의 경우 잘못 움직이다가는 뭘 밟고 넘어지든 뾰족한 것을 밟든 아무튼 다칠 가능성이 매우 높기도 했고. 창문 밖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걸 보니 파리 시내 전체가 정전이 된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네뜨, 방금 이상한 기운을 느꼈어!”

“기운?”

“적인지 아군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느낌이 좋지 않아.”



이렇게 다급해보이는 티키의 목소리는 또 처음이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양심이 너무나도 찔렸다.



“제발 가보면 안 될까?”



티키의 간곡한 부탁에 마리네뜨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새까맣게 변한 도시를 바라보고는 이내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계속 정전이 지속되면 나한테도 좋지 않을뿐더러,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면 그래도 좀 덜 다친다니까 괜찮겠지. 이렇게까지 어두우면 사람들이 알아보지도 못할 거고. 그렇게 애써 위안하며 조심스럽게 외쳤다.



“변신!”






“진짜 어둡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파리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혀를 내둘렀다.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된 상황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모든 소란들을 애써 무시하며 티키가 말해준 방향으로 조용히 계속 나아가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에는 적외선 안경이 끼워져 있었다. 손전등을 쓰면 분명 사람들 눈에 띌 것이 분명했으니까.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가자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목적한 장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빛이 하나도 없어 마치 어둠에 녹아든 것만 같은 커다란 건물을 올려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역시, 전력소인가.”

“어이, 그쪽도 지금 온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재빨리 등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쫄쫄이를 입은 남자의 얼굴에는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덥수룩한 금발의 머리 위로 쫑긋 솟은 귀가 마치….


고양이 같았다. 레이디버그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그쪽은?”

“어라? 그쪽 요정이 설명 안 해줬어?”



검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한 남자는 싱글싱글 웃더니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고 손등에 살짝 키스했다. 깜짝 놀라는 얼굴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남자는 자기소개를 건넸다.



“나는 블랙캣. 너랑 마찬가지로 요정의 부름을 받고 히어로가 된 사람이야. 레이디버그.”

“날 알아?”

“당연하지, 널 만나게 될 날을 얼마나 기다렸다구.”



찡긋 윙크하는 블랙캣의 모습에 온 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잡혔던 손을 빼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남자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어딘지 과장된 몸짓, 행동은 어딘지 조금 느끼하긴 하지만 나름 귀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단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러다가 레이디버그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블랙캣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질문을 던졌다.



“너, 내가 잘 보여?”

“응.”

“안경도 없이, 어떻게 이 어둠 속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데?”

“나는 고양이거든. 밤눈이 밝지.”

“호오.”



레이디버그가 흘린 감탄사에 블랙캣은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가만히 레이디버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시죠, 레이디.”

“어라, 왜?”

“가방에서 한 번에 물건 하나밖에 못 꺼내는 거 알지? 귀중한 재원을 적외선 안경 따위에 쓸 수는 없잖아. 이 전력소, 한 바퀴 돌아보고 왔었는데 아무래도 낌새가 좀 이상하거든.”

“그래서?”

“난 그런 거 없어도 앞을 잘 보니까. 내가 데려가줄게. 혹시 모르니까, 다른 무기를 꺼내서 위험에 대비하도록 해.”



진지하게 말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안경을 접어 가방에 넣은 뒤 요요를 꺼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생각보다 믿음직한 것 같기도.



“아, 잠깐만 기다려봐. 저쪽에 뭐가 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가던 블랙캣은 다음 순간 우당탕-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졌다. 저 멀리까지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볼멘소리가 터졌다.



“으악, 누구야! 이런 곳에다 상자를 갖다둔 사람이!”



…그것도 아닌가.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블랙캣은 천천히 어두운 전력소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런 블랙캣의 오른손을 꽉 붙들고 레이디버그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전력소 안은 적막했다. 깜깜하기도 깜깜했지만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탁탁- 발과 바닥이 짧게 마찰하는 소리만이 돌을 던진 수면처럼 서서히 퍼져나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곧바로 일대의 전기를 관리하는 메인 제어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부 지도에는 4층에 제어실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전기가 흐르지 않아 엘리베이터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라 두 사람은 비상계단을 통해 제어실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의 손을 꽉 잡고 비상계단을 빠르게 걸어 올라가던 블랙캣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응?”

“이런 대형사태가 벌어졌는데도 건물 안이 너무 조용하지 않아? 당장 이 전력소에 배치된 사람이 몇인데.”

“그러고 보니….”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깜짝 놀라고 있는 레이디버그를 뒤로 한 채 블랙캣은 계속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파리 전역에 정전이 벌어졌는데 몇십 분째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

“게다가 더 이상한 건, 보통 이런 전력소는 전기가 나가더라도 예비 전력은 늘 상비하기 마련이야. 그런데 우리가 처음에 찾아왔을 때부터 전력소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잖아, 안 그래?”



이쯤 되니 블랙캣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레이디버그가 입을 열었다.



“누가 일부러 전기를 차단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바로 맞췄어, 레이디.”

“대체 왜?”

“그건, 이제 밝혀야겠지!”



순식간에 4층에 도착한 블랙캣이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철컥철컥, 잠겨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 문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부술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그랬다간 너무 소리가 클 것이 분명했다. 이 앞에 어떤 상대가 있는지 모르는데 쓸데없이 위치를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곧 결론을 내렸는지 블랙캣은 살짝 레이디버그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만 시선이 맞지 않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잠깐 고민하더니, 짐짓 능청스레 말했다.



“잠깐만, 레이디. 혹시 잠시만 내 손 놓아줄 수 있겠어?”

“응? 왜?!”

“아주 잠깐이면 돼. 버리고 가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구.”



능글맞게 대답하는 블랙캣에 레이디버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부루퉁한 얼굴을 한 레이디버그가 귀여웠는지 블랙캣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계속 나랑 손을 잡고 싶은 거야?”

“…!! 그런 거 아니거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뿌리치는 레이디버그에 블랙캣은 알겠다는 듯이 작게 웃더니 곧 잠잠해졌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지자, 마치 어둠 속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들고 있던 요요를 다시 적외선 안경으로 바꾸고 싶어지는 충동을 애써 이겨내면서 레이디버그는 작게 소곤거렸다.



“……블랙캣?”

“나 불렀어?”

“꺄악!”



다시 잡아오는 손과 더불어 장난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블랙캣이 키득거리며 레이디버그를 이끌었다.



“자, 어서 들어가자.”

“문 열었어?”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하하 웃으며 앞장서가는 블랙캣의 모습은 인정하기 싫지만 확실히 믿음직스러웠다. 블랙캣의 손을 꽉 잡으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그를 따라 4층으로 들어갔다.


4층으로 들어가자마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복도 끝에 보이는 메인 제어실로 달려갔다. 역시나 제어실의 문도 복도의 문과 마찬가지로 잠겨 있었고,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재빨리 발을 들어 문을 세게 걷어찼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들어간 레이디버그의 발에 뭔가가 걸렸다. 물컹한 감촉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랐다.



“엄마야!”

“으으윽….”



그것도 잠시, 밑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곧 그것이 사람의 다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아팠겠다, 세게 밟은 거 같은데. 저도 모르게 사과를 건넸다.



“괘, 괜찮아요?”

“레이디, 불을 켤 테니 잠깐 눈 감아!”



이미 이것저것 기계를 만지고 있었는지 다급히 소리치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눈을 꼭 감았고, 곧이어 블랙캣의 손이 전원을 올렸다.


전력소에 불이 켜지는 것과 동시에, 파리 시내에 다시 불빛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전력소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두웠던 밤의 바다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블랙캣이 툭 말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뒤를 돌아보자 동력실 근처에 쓰러져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직원들인지 다들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기 위해 몇 사람을 흔들어 깨웠지만, 아무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제어실 안에도 두 사람이 기절해 있었는데, 이들은 그래도 여파가 적었는지 금방 눈을 떴다. 그리고 그제서야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사정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전력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연기 때문에 모두들 정신을 잃고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 있던 두 사람도.


방금 전 파리 시내가 모두 정전사태에 빠졌다는 말을 꺼내자 두 직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됩니다. 분명 제어실 문을 잠가뒀는데, 어떻게….”

“확실해요?”

“물론입니다. 애초에 제어실 문을 아무렇게나 열어둘 리가 없잖습니까? 다들 쓰러지는 걸 보고 놀라서 재빨리 문을 잠갔는데 어째서 동력원이 내려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쇠는 저랑 이 친구 둘이서만 보관하고 있었는데요.”



옆에 있던 직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 두 히어로의 표정은 각각 달랐다. 레이디버그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인 반면에 블랙캣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칫 잘못했다간 더 큰 문제가 발생했을 거라 생각하니 정말로 오싹해지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 분은 누구시죠?”



직원들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블랙캣이 씨익 웃더니 레이디버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블랙캣이고, 여기 아리따운 아가씨는 레이디버그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예쁜 이름이죠?”

“오, 혹시 저번에 은행 강도를 잡아주셨다는 그…?”

“맞습니다. 다들 뉴스 좀 보시는 모양이네요.”



능청스레 대답하며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좀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하려다가, 블랙캣이 다음에 던진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는 입을 다물었다.



“더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저희는 이만 돌아가야 해서요.”



딱 좋게 빠질 타이밍을 만들어주는데 말을 잘못해서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으니까.



“하,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까봐 걱정하는 듯한 두 직원들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조금 더 남아서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블랙캣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화 좀 주시겠습니까?”



직원한테서 핸드폰을 건네받은 블랙캣이 번호 몇 개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수신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이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주고받다가 블랙캣은 핸드폰에서 귀를 떼고 손짓으로 레이디버그를 불렀다.



“경찰에 연락했어요. 전력소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뒀으니 아마 도움이 될 거예요. 레이디, 레이디도 한 마디 해줄래?”

“어, 나?”

“나보다는 레이디가 더 신뢰되지 않겠어?”



짓궂게 말하는 블랙캣을 살짝 흘기다가 레이디버그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받아들고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대하기가 어려운지 우물쭈물하면서도 열심히 말하는 레이디버그를 가만히 지켜보는 블랙캣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불이 환하게 들어온 전력소 앞에서 작별인사를 건넸다.



“오늘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나야말로. 레이디를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아, 아니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운걸. 신경쓰지 마.”



밝게 웃으며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블랙캣.”



파트너로서.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레이디버그를 바라보는 블랙캣의 눈이 깜빡거렸다. 초록빛 눈동자가 커지더니 블랙캣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정말로 기뻐보이는 얼굴로 웃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얘가 왜 이러지?


블랙캣이 천천히 손을 뻗어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레이디버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방금 전에도 당했지만 더 정중한 태도에 당황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마이 레이디.”

“에? 마이 레이디라니….”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의 손을 놓고 뒤로 돌아섰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블랙캣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며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쟤 뭐야?”





한편, 남은 두 명의 직원들은,



“으악! 이거 손잡이가 왜 이렇게 된 거야?!”



4층 비상계단 쪽 문의 모습에 경악하고 있었다. 문 자체는 멀쩡한데 손잡이가 멀쩡하지 못했다. 다 녹아서 바닥에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문의 손잡이를 보고, 이건 대체 누구 짓이냐며 절규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두 영웅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도시로 향했다. 다시 활기차게 빛나는 파리 시내였지만 그들이 몸을 숨기면서 날아다닐 만한 어둠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흐음….”



그리고 그건 물론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도시의 하늘로 날아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골목 사이의 어둠 속에서 주시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눈물이 그려져 있는 무심한 눈동자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리네뜨는 곧장 변신을 해제했다. 후아, 한숨을 뱉으며 침대로 쓰러지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싱글싱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 마리네뜨! 역시 대단해~”

“아니야, 생각보다 잘 끝나서 되게 기분이 이상하던걸. 그나저나 블랙캣인가, 그 애가 티키 네가 말했던 동료야?”



그렇게 묻자 티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대지.”

“그럼, 아까 네가 느꼈다던 이상한 기운의 정체가 걔인가?”

“으음, 그건 잘 모르겠어. 비슷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게 뭐야.”



꽤 긴장이 풀렸는지 마리네뜨는 편안한 얼굴로 소리내어 웃었다.



“생각보다는 괜찮더라. 꽤 믿음직하고 말이야.”



좀 대하기 어려운 타입이기는 하지만. 웃으면서 기지개를 펴는 마리네뜨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티키가 한 마디를 꺼냈다. 



“하지만 마리네뜨.”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절레 고개를 내젓는 티키를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 행복하다는 듯이 뒹굴거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조금은 히어로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으음, 잘 모르겠어어어-.”



꼬르르륵-


갑자기 울리는 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티키가 배를 부여잡고서 난처한 듯이 헤헤 웃었다.



“그나저나 마리네뜨, 나 배가 좀 고파….”



변신을 하고 나면 기력이 다한다는 말이 사실이긴 사실인 모양이다. 마리네뜨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알았어, 지금 뭐라도 가지고 올게. 기다려봐!”



방에서 내려와 부엌 쪽으로 가니 마리네뜨의 어머니인 사빈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하고 냉장고에서 쿠키를 꺼낸 뒤 돌아가려던 찰나, 마리네뜨는 사빈의 다리에 크게 붙어 있는 반창고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엄마, 그 반창고는?”

“아, 이거? 아까 정전이 있었잖니. 촛불을 찾으러 가다가 좀 부딪쳤지 뭐야.”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는 사빈의 인자한 목소리와 달리 마리네뜨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그런 딸의 모습을 눈치챘는지 사빈은 달래듯이 마리네뜨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다행히도 손은 안 다쳤으니 내일도 문제없이 일할 수 있단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자기가 다친 것처럼 우울해하는 딸을 꼭 끌어안으며 사빈은 마리네뜨의 등을 토닥거렸다.



“우리 딸, 너무 걱정하지 말렴. 그런 표정 지으면 엄마가 더 가슴이 아프잖니.”


‘좀 더 빨리 정전이 해결되었다면, 엄마가 다치지 않았을 텐데.’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사빈의 품으로 파고드는 마리네뜨에게 사빈은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우리 공주님이 왜 갑자기 이렇게 어리광이 많아진 걸까~?”

“엄마. 나를 믿어?”

“믿지, 언제나.”

“그럼, 내가….”



다른 사람들을 구할 만한 사람이라고 믿어?


역시 말하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그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파리 시내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서는 간밤에 소동이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또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를 유유자적 걸어가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신문을 읽고 있지만 청회색 눈동자는 흥미로운 것을 찾았다는 것처럼 조용히 반짝거렸다.


펠릭스의 손에는 르 피가로(le Figaro)지 한 부가 들려 있었는데, 신문의 1면에는 간밤에 있었던 정전 사태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간략히 요약하면 정전이 발생했는데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수사를 촉구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기절했던 직원들을 검진했을 때 모두 강력한 수면 효과가 있는 성분이 발견된지라, 직원들에게 책임을 묻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현재 정전 사태의 원인을 찾기 위해 경찰에서 부단히 애쓰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펠릭스가 흥미롭게 보고 있는 기사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정전 사태에 관련된 기사 밑에 조그맣게 실려 있는 건, 간밤에 벌어진 또 하나의 대형 사건이었다. ‘노아 바자르’ 라는 이름의 70대 노인이 완벽한 밀실에서 살해당한 사건. 비록 정전 사태라는 큰 사태에 가려 살짝 묻히기는 했지만, 예술계에서 유명했던 노인의 부고에 이 기사를 쓴 기자도 안타까워하는 느낌의 논조를 사용하고 있었다.


천천히 길을 걸어가며 기사를 마저 읽고 있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누군가가 주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챘음에도 애써 무시하고 걸어가는 펠릭스의 곁으로 다가온 마리네뜨가 인사를 건넸다.



“펠릭스, 안녕!”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펠릭스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밝게 인사하는 마리네뜨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는 펠릭스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 마리네뜨가 고개를 들어 펠릭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저번처럼 아무런 답이 없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마리네뜨는 그저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내 이름은 마리네뜨야. 앞으로 잘 부탁해!”



뭐를 잘 부탁한다는 건지. 그렇게 묻기도 전에 마구 손을 흔들며 앞으로 뛰어가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왠지 앞으로 피곤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조용히 이맛살을 찌푸리자, 펠릭스가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재밌는 일이 생길 거 같은데~?”

“시끄러워, 플랙.”



조용히 하라고 중얼거리는 펠릭스의 손에는 검은색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난데없이 인사하더니 그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진 소녀를 떠올리며, 소년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상한 녀석.”





- 3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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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는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2편을 6월 말에 올리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여행 일정이 잡혀버려서 이제야 작업을 했네요.

일단 수량조사를 7월 7일에 먼저 올리고 선입금 폼은 7월 25일에 올리려고 예정을 잡고 있습니다. 제대로 마감을 다 마친다면요^_T...


하루에 한 편씩 7월 4일까지 6편 업로드를 마칠 예정입니다. 너무 빡센 스케줄이라 좀 골치가 아픈데 어찌어찌 하고는 있습니다 헤헤... 마감하고 나면 칭찬해주세요 흑흑 후기에 아주 영혼을 갈아넣고 있습니다ㅠ.ㅠ...


봄 에피소드를 모두 올리는 이유는 이 에피소드들이 프롤로그격인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사건은 여름부터 시작되며, 봄의 에피소드는 관계도에 대해 명시하면서 떡밥을 솔솔 뿌리는 정도거든요.


그리고 중요한 거.

영혼 없는 댓글 제발 좀 달지 마세요. 요즘들어 자꾸 이상한 댓글 다는 분이 느셨던데 안 다느니만 못합니다. 한 번만 더 이러시는 분들 나오면 그냥 티스토리 댓글을 닫거나 글을 아예 비밀글로 돌리겠습니다. 근데 이러고 싶지 않으니 제발 다들 매너를 지켜주세요. 댓글이면 다 기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의 무례한 생각이신거죠;


관심 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꼭 레이디버그 온리전에서 책을 들고 올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_T...

Posted by I.R.E
,

※ 스크롤주의. 약 22500자




맨디님 그림 보니 떠오르는 썰이 있다.


호크모스 해치우고 새로운 빌런수장이 된 레이디버그! 최후의 싸움 때 블랙캣은 목숨을 잃었고 그걸 보고 폭주해 호크모스까지 죽게 하고 새로운 나비 요정에게 선택받은..


진짜 그 최후의 싸움 때 싸우던 장소는 모조리 쑥대밭이 되었고, 호크모스는 사라져 버렸으나 남아 있던 나비 요정이 그 자리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마리네뜨에 들러붙어 버림. 이 때 폭주의 여파로 미라클스톤은 부서졌고 티키의 행방도 찾지 못함.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변신하고, 자기 의지와는 달리 다른 장소에 와버린 마리네뜨는 경악함. 순간 정신이 들었는데 갑자기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기겁하지. 그런데 요정이 굉장히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제안을 해.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아?"


살리고 싶은 사람.

그 한 마디를 마리네뜨는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음. 자신의 눈 앞에서 쓰러지던 블랙캣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지. 그 전투 이후로 아드리앙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어. 아파서 못 나온다는 사유를 내걸고. 병문안을 가도 돌아오는 대답은,


‘도련님은 집에 안 계십니다.’


라는 비서의 쌀쌀한 대답뿐이고 병원이 어디냐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아. 마지막 싸움을 한 장소에 가도 거의 폐허가 된 장소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음. 호크모스의 시체조차 남지 않았는걸.


그에 절망한 마리네뜨는 결국 요정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호크모스가 되어 빌런을 만들기 시작해. 요정의 제안은 자신이 힘을 얻는 방법은 여러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사람의 공포를 먹고 자란다는 거였어. 어느 정도 힘이 모이면 미라큘러스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지. 솔직히 좀 소름끼치잖아 사람의 공포를 먹고 산다니;; 마리네뜨도 물론 기겁했지만 그 요정이 제안한 이야기는 차마 마리네뜨의 입장에선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


게다가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에 대한 엄청난 죄책감과 그의 상실로 인한 공허함을 같이 갖고 있었음. 둘도 없는 파트너이자 연인을 잃어버린 마리네뜨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지. 자포자기한 그녀는 결국 요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호크모스가 되어 파리를 위협하기 시작해. 연보랏빛 옷을 입고 등에 커다란 날개같은 펄럭이는 천이 돋아나 있는 모습으로 변신했고, 검은 나비를 만들 수도 있지만 등에 달라붙어 있는 천을 무한대로 조절해 상대를 겁박할 수 있어. 거미줄처럼.


겉보기는 우아한 공주님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리네뜨는 변신하면 자기 의지대로 몸을 막 움직일 수 없어; 그러니까, 요정의 의도를 벗어나면 자동적으로 결합된 요정이 그녀의 움직임을 막는 거. 마치 인형을 조종하듯이; 당연히 마리네뜨는 티키때와 달리 그 요정을 싫어해. 자기를 조종해서 이익을 챙기는 것도 그렇거니와 결국 이 요정때문에 블랙캣이 죽은 거나 마찬가진데. 그런데도 그런 요정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는 자신의 이기심이 너무 밉고, 언제나 사랑받던 레이디버그에서 모두가 욕하고 비난하는 빌런이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굉장한 스트레스와 자책감을 주지. 사실 변신했을 때는 요정의 영향인지 악행에 전혀 자책감이 없음. 근데 변신 풀리고 나면 진짜 자기 자신에 회의감이 밀려오는 거야.


내가 진짜 이런 짓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학교를 다니니까 주로 아이들의 어둠에 접근해 그들을 빌런으로 만들었고, 사실 아이들은 성숙하는 과정이라 어른보다 더 멘탈이 약하기에 한층 수월했지.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마리네뜨는 사람들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돼. 심지어 알리야한테조차.


알리야는 점점 어둡고 말수가 적어져가는 마리네뜨를 걱정하지만 언제나 마리네뜨는 괜찮다고 말하며 웃어넘기니 더 답답한 거. 빌런네뜨가 주로 서 있는 장소는 바로 에펠탑 꼭대기. 도도하게 에펠탑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지만 그 눈빛은 악당답지 않게 자못 슬퍼보여.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큰 변수가 생겼지.


아드리앙이 돌아온 거야.



그녀가 빌런이 된지 어언 3개월이 지난 뒤였어.


빌런활동까지 하느라 너무 피곤한 마리네뜨는 학교에서 엎어져 자는 일이 잦았어. 그래서 제 앞에 누군가가 앉는 것도 모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데,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네.'


명랑하고 익숙한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비몽사몽한 와중에 뭐지... 하고 생각하다가 다음 순간 인지하고 홱 고개를 들어. 근데 정말 아드리앙이 앉아 있어. 이건 꿈인가? 하고 마리네뜨는 자기 손등을 꼬집는데 꿈이 아니야. 정말 다 떠나서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고 마리네뜨는 그의 이름을 불러.


"아...드리앙?"


그가 뒤를 돌아봐.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반짝이는 녹빛의 눈동자. 자신이 기억하는 그가 확실해. 살아 있었던 건가? 정말 복잡하게 굴러가는 마리네뜨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든 건 아드리앙의 그 한 마디였어.


"...미안하지만, 넌 누구야?"



아드리앙에겐 지난 1년간의 기억이 하나도 없었어.


사실을 조금 풀어놓자면, 블랙캣이 죽은 줄 알고 마리네뜨가 폭주했던 그 시기에 사실 블랙캣은 죽지 않았고 플랙의 가호로 간신히 숨은 붙어 있었음. 그러나 폭주한 미라클스톤의 파장으로 거기에 공명한 블랙캣의 반지도 어느 정도의 폭주 증상을 보였고, 그 후유증으로 히어로가 되었던 이후의 기억을 모두 상실한 거야. 빌런으로 변신된 마리네뜨가 터벅터벅 사라진 후에 블랙캣은 정신을 차렸지만 사실 그건 아드리앙의 의지라기보단 플랙의 의지였을지도 모르지.


길거리를 배회하던 블랙캣은 어느 순간 털썩 쓰러졌고 그제서야 변신이 풀리면서 상처투성이인 아드리앙의 모습으로 발견되었거든. 깨어나고 나서는 자기가 어떻게 거기 있었는지도, 어떻게 그런 상처를 입었는지도 몰라.


사실 재미있는 건 이 시점에서 파리에 새로운 레이디버그가 나타났다는 점이지. 티키가 무사했던 건가?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빌런을 조종할 땐 밖으로 나설 수 없고, 레벅의 정체를 모르는데 레벅을 찾아다닐 수는 없었지.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자신처럼 다시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슈퍼히어로로 활약해. 그에 마리네뜨는 굉장히 허탈감을 느껴.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구나.


나를 필요로 한 게 아니야. 그냥 영웅이라는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 씁쓸하고, 마음이 무거워져.


그리고, '진짜 자신'을 필요로 해 줬었던 한 사람의 존재가 떠올라. 네가 레이디버그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나는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던 그 상냥한 녹색 눈동자가 떠오르니까 정말 울고 싶은 거야.


사실 빌런네뜨의 모습으로는 마리네뜨는 거의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아. 그냥 무표정으로 도도하게 모든 일을 관망할 뿐. 왜냐하면 빌런네뜨의 모습은 마리네뜨 안에 있는 허무함과 무기력함을 극대화하는 변신이었거든. 그리고 새로운 레이디버그가 나타나면서 그녀의 어둠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하고, 빌런들의 능력도 그에 따라 강해지기 시작함. 사실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빌런네뜨로 서는 일이 몇 배는 힘들어졌어.


지금은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그리고 내가 지금 파리를 위협하는 빌런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나를 경멸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마리네뜨는 당장이라도 빌런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나비 요정은 우리 계약은 끝나지 않았고 지금 그만두면 당장 그 남자애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함. 마리네뜨에게 최우선은 아드리앙이었기에 죄책감을 가지고서도 마리네뜨는 억지로라도 빌런 일을 수행해. 문제는 빌런 상태에서는 가뜩이나 있던 감정도 심화되는데 마리네뜨의 스트레스가 도를 넘어가고 있었던 거지. 빌런네뜨의 표정변화는 점점 없어지면서 눈빛은 점점 침잠하기 시작함. 그런데도 요정을 믿을 수 없어서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을 돕겠다는 핑계로 그의 곁을 맴돌아. 그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서 문제가 뭐냐면,

기억을 잃고도 아드리앙이 레이디버그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알아챈 계기는 별로 대단한 건 아냐. 언젠가는 빌런이 생성된 곳에 아드리앙이 있었고 그 때 그가 레이디버그랑 마주쳤거든. 레이디버그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아드리앙의 표정에서부터 빌런네뜨는 모든 걸 읽었어. 그리고 제발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랬지.


그런데 새로운 레벅을 처음 마주친 이후로 아드리앙이 그녀에 대해 조금씩 묻기 시작한 거야. 주변에 가장 친한 친구가 마리네뜨와 니노밖에 없었으니까 이 둘한테. 니노는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데 듣고 있던 마리네뜨는 점점 괴로워져.


뭔가 낯설지 않은 느낌이야. 보고 있으면 그리운 느낌이 들어. 예전에 관련이 있었던 사람일까? 등등을 말하는 아드리앙에게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는지 몰라.


아니, 아니야. 그 여자가 아니야! 보지 마. 그 여자를 생각하면서 그런 표정 짓지 마!

...결국 네가 좋아한 사람도 내가 아니라, 레이디버그였던 것 뿐이야?


이 생각 하나가, 마리네뜨를 엄청나게 절망하게 만들어. 진짜 어느 정도냐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마리네뜨를 마리네뜨로 만들어주던 끈조차 끊어진 느낌. 그 정도로 그녀의 안에서는 아드리앙의 존재가 컸던 거야. 근데 그게 끊어졌지.


그러니 어떻게 됐겠어?


여기서 잠깐 사담을 하자면 블랙캣의 미라클스톤은 부서지지 않았어. 근데 고양이반지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음. 플랙이 깨어나지도 못한 채로. 아드리앙은 깨어났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물건이라 보석함에 고이 담아두고 쉽사리 꺼내지 않았고, 그래서 플랙이 오랜 시간 깨어나지 못했던 거지. 아드리앙을 마지막까지 보호하느라 플랙도 자신의 에너지를 한계치까지 끌어다 썼거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아드리앙은 다시 보석함을 열어 반지를 만졌고 그 때 다시 플랙이 깨어나 그를 블랙캣으로 만들지.


그리고 그는 새로운 레이디버그와 다시 같이 활동하기 시작해. 곁에 있고 싶다는 이유로.


...참으로 우습지. 기억을 잃고도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니. 다시 나타난 블랙캣에 빌런네뜨는 기겁할 만큼 놀라고, 다른 사람인가 싶었지만 그의 움직임을 보고 절망스러운 확신을 하게 돼. 그는 아드리앙이라는 걸. 자신과 활동할 때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거야. 차이점이라면 그녀가 레이디버그가 아니고, 그와 적대시하는 입장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 혼자, 그와 함께했던 모든 추억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빌런네뜨로서 계속 악당을 보내야 하면서도 마리네뜨는 악당을 보낼 때마다 블랙캣과 레벅의 다정다감한 모습을 봐야 했고 그걸 볼 때마다 밤에 굉장한 악몽에 시달리게 됨. 그런데 우습게도 그런 마리네뜨의 우울함이 빌런을 더 강화시켰고, 어느 날은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구하려다 크게 다치게 돼. 그 모습을 보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경악하고, 빌런네뜨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에 동공만 살짝 커져. 블랙캣을 붙들고 걱정하던 레벅이 정말 무지막지한 속도로 빌런을 해치우기 시작하고, 쓰러진 블랙캣을 멍하니 보던 빌런네뜨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해.


///


얼굴에 느껴지는 촉촉함에 그녀는 살며시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매만졌다. 눈동자에 묻어나는 미지근한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 아..."


의미 없는 탄식을 토해내던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스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매가 일그러지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그러나 이례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오래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탓인지, 얼굴의 근육들은 격한 감정에 비명을 질러댔다. 고개를 푹 떨구고 그저 뚝뚝 눈물을 쏟아내던 그녀의 얼굴이 비참함에 일그러지며, 비명과도 같은 울음을 토해냈다.


"아, 아, 아아...."


감정을 표현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가엾은 빌런은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괴로움을 토해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하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입 밖으로 천천히 말을 토해냈다.


"싫..., 어...."


제발 그만해.


그를 상처입히기 위해 빌런이 된 게 아니야. 이런 추한 모습이 되어가면서까지 내가 바랬던 건 오직 하나뿐인데, 어째서. 어째서 나에겐 그것조차... 이것이 벌인가. 내가 그동안 해왔던 짓들에 대한?


그녀는 결국 비명을 토해내. 누군가 들었다면 분명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날카롭고, 슬픈 목소리로.


"싫어, 싫어, 싫어!!!!!"


펑펑 눈물을 쏟으며 그저 싫다고 몇 번이고 소리질러. 몇 번이고. 속으로도 중얼거리지.


그만두고 싶어. 그만하고 싶어. 이제 됐잖아. 충분하잖아.


난 할 만큼 했어. 정말, 정말 열심히 했단 말이야. 그런데 왜!!! 왜 너는 날 알아봐주지 않아?

왜, 왜 그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 거야.


이 와중에도 그가 그녀를 감쌌다는 사실에 질투하는 자신에 마리네뜨는 픽 웃을 수밖에 없었어.


정말로 추해졌구나, 나.



///


한편, 블랙캣의 상처는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어 다행히도. 하지만 아드리앙은 어쩔 수 없이 병원에 한 3일은 입원하게 됐지. 기억을 잃었을 때도 그랬지만 아드리앙은 병원을 굉장히 싫어함. 원래 일주일인데 3일로 타협한 거기도 하고. 일단 학교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고, 회사 관계자들도 찾아와.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로 아드리앙이 실질적으로 회사 쪽에 손을 대고 있었거든. 1년간의 기억만 없지 다른 지식들은 모두 멀쩡하니까. 여전히 까망베르 치즈를 찾는 플랙에 아드리앙은 귀찮아하면서도 나탈리에게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음. 그 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려(아드리앙의 병실은 개인실). 들어오라고 하니까 과일 바구니와 봉투 하나를 든 마리네뜨가 안으로 들어와. 아드리앙은 그녀가 왠지 꽤 반가웠어.


일단 기억을 잃고 자주 같이 어울리기도 한 친구고, 사실 아드리앙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리네뜨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거든. 다만 기억은 나지 않아서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야. 다만 이상한게 니노랑 달리 마리네뜨에게선 어딘지 불편하고 꺼려지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어. 그 감각의 정체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친하게 지내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둠. 다만 마리네뜨가 가끔 살짝 웃을 때 괜히 신경이 쓰여.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듯 웃는 얼굴이 그녀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


좀 더 밝게 웃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라는 느낌이랄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근데 레벅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굉장히 그리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받아. 그래서 아드리앙은 그녀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거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리네뜨도 눈에 밟혔지.


솔직히 감정에 대해 아주 확신하지는 못했는데, 뭐 그래도 이 심심한 병실에 그나마 좀 얘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와준 게 어디야. 니노는 어젠가 왔었고. 과일바구니를 옆 책상에 내려놓은 마리네뜨가 가지고 온 작은 봉투를 아드리앙에게 건네.


아드리앙이 물어.


"이게 뭐야?"


마리네뜨가 담담히 대답해.


"필요할 거 같아서."


의아한 얼굴로 봉투 안을 열어봤는데 단번에 고약한 냄새가 풍겨. 뭔지 단번에 알았지. 까망베르 치즈. 아드리앙이 멍하게 물어.


"...어떻게 알았어?"

"뭐라고 했어?"

"아, 아니."


다행히도 제대로 듣지 않은 모양이야.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아드리앙은 감사히 치즈를 받아들어.(플랙은 이미 숨어들었음) 그리고 의자에 앉은 마리네뜨한테 그날 수업에 대한 소식과 통신문을 받아.


학부모 발표회 관련.


아드리앙의 표정이 단번에 쓸쓸하게 구겨짐. 그런 아드리앙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통신문을 건네주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왜 그런 표정을 하냐고 물어. 마리네뜨가 대답해.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그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아. 잠깐의 침묵 끝에 마리네뜨가 다시 입을 열어.


"상처는..."

"아, 괜찮아. 별 거 아니야."


금방 퇴원할 수 있어. 가볍게 대꾸하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가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어버림.


"그 상처가 사흘만에 낫는다고?"

"응?"


되묻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낭패라는 얼굴로 눈을 데록데록 굴림. 그에 아드리앙은 좀 이상하게 생각해. 마치 자신의 상처를 잘 알고 있다는 투잖아.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제 주치의랑, 또 한 명.


"...레이디버그?"


정말 아무 생각없이 말을 뱉어내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자기가 무슨 말을 인지했는지 떠올린 아드리앙은 제가 한 말에 경악해. 아니아니아니 잠깐. 나 지금 말실수한...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하게 마리네뜨를 쳐다보고 있는데, 조금 놀란 듯했던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의 표정에 그 속을 짐작했는지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


"갑자기 웬 레이디버그 얘기야? 실없게."


거짓말.


아드리앙은 본인이 그렇게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마리네뜨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보였어. 근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단순히 그녀가 레이디버그다, 라고 생각하기엔 제가 아는 레이디버그가 그녀와 너무 달랐으니까. 제가 아는 레이디버그는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똑부러지고 강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기서부터 갑자기 아드리앙은 뭔가 이상함을 느껴. 뭐지? 자기가 알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이미지가 어딘지 모르게 모순되는 점이 있는 거야. 어떨 때는 왠지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또 어떨 때는 굉장히 강인하고 자신의 앞에서 달려나가는, 어떨 때는 정말 순수하게 웃으며 제게 애교스럽게 달라붙었던 것 같은데... 뭔가 다가가려고 하면 막 떼어내고 밀어냈던 것 같기도 해. 불퉁한 표정이었던가? 내가 그녀에게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나?


자, 여기서 이제 기억에 혼란이 오기 시작함. 뭐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기억이 이렇게 꼬여 있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정말 다 같은 사람일까?


정말 딱 한 순간에 떠오른 사실에 아드리앙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려. 놀란 표정으로 주먹을 정말 꽉 쥔채로 경악한 표정을 짓고만 있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봐. 그리고 불러.


"아드리앙?"

"...어?"


아드리앙은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드는데, 그 부름이 익숙하다고 생각한 자신에 놀라. 그와 동시에 머리가 미친듯이 아파오기 시작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엄청나게 놀라서 다가가 손을 대려는 순간 아드리앙이 멋대로 휘두른 팔에 손이 탁 쳐짐. 마리네뜨는 그 순간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아드리앙은 그런 마리네뜨 표정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그 와중에도 두통이 너무 심해서 아드리앙이 간신히 입을 열어서 띄엄띄엄 말해.


"미안, 오늘은 이만 돌아가줘."

"너, 괜찮아? 의사 선생님은.."

"...안 불러줘도, 돼."


너무 아파서 겨우겨우 말을 잇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얼굴로 침대 옆에 있던 인터폰으로 주치의를 호출함. 그리고 말해.


"나 이만 갈게. 넌 이렇게 안 하면 또 혼자 아파하다 말 거 같으니까."


치료 잘 받고 빨리 나아.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바람처럼 병실을 나가고,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던 아드리앙의 표정도 황망해짐. 그런 와중에 두통이 어느 정도 가신 것을 알아채고 놀란 얼굴로 제 손바닥을 쳐다봄. 식은땀이 묻어 축축히 젖어있는 손바닥을 이불에 슥슥 문지르고, 아드리앙은 방금 전 마리네뜨의 태도에 대해 고민해. 왜 그렇게 말한 걸까.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친한 사이긴 했지만 뭔가, 좀 다른 느낌이었던 것 같았는데. 두통은 매우매우 아팠지만, 지나고 나니까 뭔가 머릿속에 쓰여 있던 안개가 살짝 걷힌 느낌이야. 생각이 좀 더 명확해졌어. 떠오르는 것들도 있고. 잠시 후 의사가 와서 이것저것 물어본 뒤에 결론을 말해줘.


"혹시,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잊었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어서 가벼운 기억 충돌이 발생한 거 같다고 의사는 허허 웃는데, 그 말에 아드리앙은 안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불안해져. 왜냐하면 방금 전의 두통은 레이디버그를 생각할 때 발생했었으니까. 그녀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때 머리가 아팠고, 그렇다는 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레이디버그가 있다는 건데, 그 때도 그녀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걸까.


그렇게 결론을 내고 싶지만 아드리앙은 뭔가 굉장히 찝찝해. 의사가 나가고 아드리앙 가방 속에 숨어 있던 플랙이 튀어나와. 까망베르 치즈~! 하면서 달려들려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은 치즈통을 들고 물어봄.


"플랙, 나 예전에도 레이디버그랑 같이 활동했었어?"


치즈를 들고 위협하는 아드리앙을 가만히 쳐다보던 플랙이 킬킬 웃기 시작하더니 아드리앙의 주변을 휘잉 돌아.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플랙이 정말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말해.


그걸 이제야 물어봐?


당연히 플랙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죠 암요 ㅇㅇ 플랙이 긍정의 대답을 해주자, 그 한 마디에 멍-해져서는 왜 근데 이때까지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이 장난스럽게 말함.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대답해줘야 할 이유는 없잖아?


사실은 아드리앙이 혼란스러워 할까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지만. 아무튼 그래서 아드리앙은 플랙한테 물어. 혹시, 내가..


"그녀를 좋아했었어?"

"그랬지."


아주 좋아죽겠다고 하면서 시도 쓰고 꽃다발도 갖다바쳤다니까? 투덜거리는 플랙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드리앙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해. 무엇보다 너무 찝찝해. 그래서 넌지시 물어봐.


- 니가 알던 레이디버그는... 어땠어?


그 말을 듣고, 플랙은 아드리앙이 건네준 치즈를 꿀꺽 삼키면서 킬킬거려.


- 그건 니가 판단할 문제 아니었어?


알아서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플랙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아드리앙은 얼굴을 찡그려. 사실 자신이 레이디버그를 좋아했었다는 것보다도 더 신경쓰이는 건 레이디버그를 보며 떠올리는 왠지 모를 위화감. 그런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는 다시 빌런을 상대하러 나갔을 때, 제 옆에 있는 레이디버그를 유심히 관찰해. 아,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당당하기도 한데 어딘지 가냘퍼 보이고 애교도 많은 성격이었음. 자신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는 레벅한테 블랙캣은 굉장한 위화감을 느껴. 늘 했던 행동인데 왜?


그래서 그녀의 손을 마주잡지 못하고, 그냥 레이디버그한테 넌지시 물어봐. 우리 예전에도 같이 활동한 적 있었냐고. 레이디버그는 살짝 놀란 눈치더니 밝게 웃으며 대답함.


- 무슨 소리야? 우리 아직 만난지 얼마 안 됐잖아?


진짜 그 순간 블랙캣은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저도 모르게 표정이 싹 굳어.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과 달리 엄청나게 심각한 얼굴이 되어버린 블캣에 레벅은 의아해하고, 빌런을 다 퇴치하고 나서도 블랙캣의 싱숭생숭한 기분은 여전해.


헤어진 뒤에, 블랙캣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 변신을 풀려고 했는데 그 순간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나.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여자는 보기에도 꽤나 차림새가 특이했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보랏빛에 등에는 커다란 천이 나비처럼 쫙 펴져 있고.


그냥 악당이라 간주하기엔 분위기가 좀 이상해. 막 공격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제게로 다가오는 걸음걸이는 우아하기 그지없었어. 무엇보다 시선. 부드럽게 웃는 푸른 시선에 블랙캣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제게로 걸어오는 걸 마냥 지켜봐.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타입이었달까. 딱 그의 앞에 서서는 여자가 살짝 웃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거야. 근데 익숙한 느낌이야 어쩐지. 눈동자도 그래. 분명 처음 보는데, 처음이 아닌 거 같은 느낌.


여자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어리고, 그와 동시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밑으로 살짝 끌어당겨. 블랙캣은 자신의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려앉는 걸 느끼고 눈을 크게 뜨지만, 밀어낼 생각같은 건 하지 못하지. 눈을 감은 여자랑 달리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짧지만 긴 입맞춤이 끝난 뒤에, 보랏빛의 여인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의 놀란 얼굴을 어딘지 슬프게 쳐다보는 것 같다가, 킥킥 웃으며 말해.


"빈틈이 많네. 도둑고양이 씨."


라고 말하며 그를 세게 골목 밖으로 밀쳐냄.


밀려난 블랙캣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골목에는 아무도 없어. 그리고 이 때부터 블랙캣은 그 여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돼. 레이디버그하고 있을 때는 편안하고 즐겁지만 단지 그 뿐인데, 그 여자를 보고 있을 때는 심장이 조여들었거든.


옷차림을 봐서는 히어로인가, 싶다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야. 그럼 빌런인가? 적이라고? 상황만 보면 그게 더 맞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서 적대감을 느끼지는 못했어. 정말 꼼짝도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그 여자를 마주하고 느꼈음. 그런데도 계속 떠오르는 거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는 자신에 기겁하며 아드리앙은 베개를 쾅쾅 내리쳐. 엎어져서는 웅얼거리는 아드리앙을 보며 그러든 말든 치즈나 꺼내먹고 있는 플랙에게 아드리앙이 물어.


"플랙."

"왜?"

"내가 미쳤다고 하면 어쩔래?"

"이미 지금도 정상이 아닌데~?"

"..니가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또 그러는구나~ 하겠지? 뭐야, 무슨 미친 생각이라도 한 거야?"

"아, 아니."


얼버무리며 아드리앙은 다시 얼굴을 침대에 묻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는 불길해서일까 설레서일까.


그 후로 아드리앙은 멍때리는 일이 더 잦아짐.


한편 마리네뜨는 그 병원 일 이후로 묘하게 아드리앙을 피해. 만나서 인사하고 이런 건 좋은데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아드리앙은 요즘 마리네뜨가 자주 안 보인다는 건 알고 있어. 그때 내가 너무 매정하게 말했나? 싶어서 괜히 안절부절 못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복도에서 마리네뜨를 딱 마주쳐. 아드리앙은 놀라는데 마리네뜨는 홱 시선을 피함.


사실 마리네뜨가 피하는 건 병원 일이 문제가 아니라 빌런네뜨가 되었을 때 키스했던 게 양심에 찔려서...


초반에도 말했지만 빌런으로 변신하면 그 동안은 감정이나 성향이 좀 격해지는 부분이 있음. 그리고 죄책감이 없지. 그 골목에서 키스했던 것도 거의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일이라 변신 풀리고 나서 밤에 이불킥 팡팡하고 아드리앙 얼굴 차마 못 보겠어서 마구 피한 건데 타이밍이 매우 안 맞았던 거죠.


대놓고 피하면서 후다닥 제 옆으로 지나가려는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자기 옆으로 지나가는 마리네뜨 팔 붙잡고 빈 교실로 끌고 들어가. 마리네뜨는 발버둥치지만 현실에선 아드리앙을 힘으로 이길 수 없지. 힘없이 끌려가면서 아드리앙을 다시 보는데 괜히 울컥해. 그가 돌아온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여전히 가슴에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야. 보고 있으면 아픈데 빼내면 죽을 거 같아서 빼낼 수가 없는.


교실에 끌려 들어와서 무슨 용건이냐고 묻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할 말이 없어. 왜 자기가 이런 행동을 했는지도 몰라.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 너 요새 왜 나 피하냐고. 마리네뜨는 대답 못함. 그냥 난 너 피한 적 없다고 하고 나가려는데 벽을 짚는 아드리앙 손바닥이 마리네뜨 바로 앞을 탁 가로막아. 그 때 병원에서 내가 네 손 쳐내서 그런 거냐고 물어보는데 마리네뜨는 그건 생각지도 않고 있었어서 어? 무슨 일? 하고 당황하는데 아드리앙은 그녀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음.


근데 그거랑 별개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자기가 손을 쳐냈을 때 마리네뜨의 상처받은 표정. 그 때, 자기가 느꼈던 감각이 떠오른 거야. 심장이 멈추는 듯한 순간의 충격은, 자신이 얼마 전에 만났던 그 여자의 미소를 봤을 때 느꼈던 감각이랑 매우 비슷함. 그거에 충격을 받은 아드리앙이 마리네뜨를 다시 한 번 훑어봐. 얘가? 설마. 설마. 설마. 그럴 리 없어. 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아드리앙의 이마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고, 그 감촉에 아드리앙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마리네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그의 이마에 짚고 있어. 열은 없는데. 라고 말하는 마리네뜨의 손이 너무 차가워서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마리네뜨의 손을 붙잡아.


"너 어디 아파?"

"응?"

"손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그 말과 함께 단호히 손을 뿌리치는 마리네뜨의 얼굴도 자세히 보니 꽤 안색이 안 좋아. 아드리앙은 당초의 목적을 잊고, 역시 병원가보는 게 어떠냐고 걱정하는데 마리네뜨가 그 순간 소리질러.


"내버려 둬!!"

"..."

"너랑은 상관없잖아!!"


깜짝 놀란 그를 홱 노려보고서 마리네뜨는 재빨리 교실에서 나가버림. 뒤에 남은 아드리앙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기가 잡은 손의 감촉을 떠올려. 말랑말랑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 성격이랑 달리 의외로 연약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느낌이..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얼굴이 더워지기 시작해. 어, 어? 하면서도 얼굴이 새빨개지는 거야. 허둥지둥 얼굴을 탁탁 때리는데 품속에서 나온 플랙이 깔깔거리면서 비웃음. 너 레이디버그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하고 약올리는데 아드리앙은 걍 패닉.


마리네뜨와 레이디버그, 그리고 그 의문의 여인.


뭔가 떠오를 듯 말듯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아. 그럼에도 이 상황 자체가 위화감이 쩔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날은 빌런을 처치하러 다시 나서는데, 빌런이 이번에는 두 명임. 남매였어.


각각 한 명씩 맡아서 상대하고 있는데 빌런들이 요즘 너무 강해서 혼자 상대하기가 버거움. 그런데 이상한게, 자기가 상대하는 빌런이 어딘가 이상한 거야. 막 공격하려다가도 자꾸 멈추고, 멈추고. 레벅 쪽을 힐끗 봤지만 그녀가 상대하는 빌런에는 그런 현상이 없었어. 그에 블랙캣은 누군가 이 빌런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주위를 둘러봄. 그 틈을 타서 악당이 그를 내리치려고 했는데 얼굴에 빌런마크가 뜨면서 몸이 딱 멈춰. 그리고 그 순간, 블랙캣은 무언가 빛이 반짝이는 걸 눈치채.


에펠탑 꼭대기.


그걸 보자마자 블랙캣은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레이디버그에게 신호함. 재빨리 달려들려는 빌런을 후려친 뒤에 레벅을 안고 봉을 늘려서 지붕 위로, 지붕 위에서 다시 봉을 늘린 뒤에 에펠탑으로 기울여. 꼭대기에 무사히 착지! 한 블랙캣은 고요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빌런네뜨를 보고 당황해. 그 때 자기한테 키스했던 여자!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에 빌런마크가 떠 있음. 블랙캣의 옆에 선 레이디버그가 그녀에게 물어.


넌 누구야?


빌런네뜨는 말이 없음. 그래서 블랙캣이 다시 묻지.


당신이 파리에 악당을 만들어내고 있는 녀석이야?


하니까 빌런네뜨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어. 단 이건 빌런네뜨 입장에선 자기 자신을 위한 조소였지만 두 사람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지. 긴장한 얼굴을 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러자 빌런네뜨 등 뒤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천이 의지를 가진 듯 움직이면서 덤벼드는 두 사람을 가볍게 쳐냄. 뒤로 내동그라진 두 사람이 저 천은 대체 뭐냐고 기겁하는데, 천이 다시 매섭게 늘어나면서 두 사람에게 덤벼서 꽁꽁 묶어버림. 빌런네뜨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천이 매섭게 두 사람의 몸을 옥죄기 시작해. 점점 숨이 막혀가서 둘 다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하는데도 천은 꼼짝도 하지 않고 찢어지지도 않아. 끙끙거리며 천을 풀어내려는 레벅과 달리 블랙캣은 그 와중에도 빌런네뜨를 계속 쳐다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는데, 블랙캣은 이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저 녀석은 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함. 자신을 보는 눈동자에 적의가 없어. 뭔가 숨은 점점 막혀가는데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음.


그 순간, 그녀가 몇 번 망설이듯 눈동자를 깜빡여. 동시에 블랙캣을 조였던 천의 움직임이 아주, 아주 살짝 느슨해짐.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들고 있던 봉을 늘려서 자신의 움직임을 잡고 있는 빌런네뜨의 등 바로 뒤에 붙어있는 천을 눌러버림. 역시 거기가 축이었는지 천이 확 풀리고, 빌런네뜨가 행동할 틈도 없이 블랙캣은 재빨리 달려들어 그녀 앞으로 파고듬. 휙,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바로 앞까지 파고든 블랙캣이 빌런네뜨를 올려다보는데 무표정한 얼굴이 당황한 것처럼 시선을 피함.


그리고 그녀의 팔을 오른손으로 세게 붙잡아.


그런데 얄궂은 운명처럼, 그 팔을 잡자마자 블랙캣은 그 손의 감촉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너무 선명하게 깨달은 거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는 더 이상 행동하지 못하고 그녀를 마냥 올려다봄.


빌런네뜨도 덩달아 꼼짝하지 못해. 저번에는 기습적으로 당해서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녀의 모습이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겹쳐 보여. 자신을 두려워하는 듯한 푸른빛 눈동자를 가까이서 보았을 때야 블랙캣은, 어딘지 모르게 원망하는 듯한 그 시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정말 명확하게. 정말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는 경악한 눈빛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어.


"마...리네뜨?"



///



"마...리네뜨?"


순간의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빌런네뜨는 팔을 뻗어 그를 세게 밀어내. 마치 그 골목에서 키스한 뒤 자신을 세게 밀쳐냈던 것처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던 그녀가 에펠탑 아래로 떨어져. 깜짝 놀라서 후다닥 달려가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는 보이지 않아.


홀연히 사라져버린 빌런네뜨의 잔상을 쫓던 블랙캣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뒤로 돌아가 쓰러져있는 레이디버그를 일으켜.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저건 대체 무슨 괴물이냐고 말하는 레벅에게 블랙캣은 차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어서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해. 변신을 풀고 집에 와서 고민과 착잡함에 추욱 늘어지는 아드리앙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떠다녀.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그건 분명 마리네뜨가 확실하다는 어떠한 확신이 머릿속에 있어.


마리네뜨가 이제껏 빌런들을 만들어서 파리를 위협한 악당이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는 이유 모를 배신감에 화가 나. 절대 아닐 거 같다고 믿고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그 다음에 드는 건 의문이야.


도대체 왜?


그가 아는 마리네뜨는 상당히 조용하지만 의사 표현 확실한데다, 조금 감정이 격해질 때는 있지만 사람을 잘 배려해주는 좋은 아이- 라는 인상이었거든. 기억을 잃고 돌아온 자신을 여러 면에서 도와준 것도 그녀였고. 반에서도 평판이 매우 좋고.


그런 그녀가 왜 굳이 빌런이 되어서 파리를 위협하는 걸까. 굳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이득을 얻으려는 타입은 아니어 보였는데 다 연기인 걸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 그런데 자신한테 키스는 왜 한 거지? 뭔가 이유가 있나? 갑자기 그 때 기억이 떠오르니까 입술에 닿았던 감촉까지 떠올라서 아드리앙 얼굴도 좀 붉어짐. 아아아악 비명을 질러대는 아드리앙을 플랙이 안쓰럽다는 눈으로 쳐다봐. 드디어 미쳤냐는 듯이.


"쯧쯧, 그러게 말했잖아. 그런 가면 쓴 여자보단 치즈가 더 최고라니까~?"

"시끄러, 플랙. 몇 번을 말했지만 나한텐 그녀밖에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아드리앙은 하려던 말을 뚝 멈춰.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몇 번을 말했다고?


아드리앙은 이제껏 레이디버그에 대해 직접적인 연심을 표출한 건 아니었거든. 그녀를 좋아하긴 하지만 사랑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의문의 여자를 상대로도 그런 적 없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드리앙이 날아다니는 플랙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아. 으아아~!! 하고 비명을 지르는 플랙한테 아드리앙이 진지하게 말해.


"너, 뭔가 알고 있지?"


어서 말해!! 다그치면서 플랙을 마구 흔드는 아드리앙 때문에 플랙은 어지러워 죽을맛. 알았다고 소리치니까 그제서야 아드리앙이 플랙을 놓아줘. 플랙이 켁켁거리다가 장난스럽게 말해.


"예전에 네가 같이 다녔던 레이디버그가 그 여자야."

"...뭐?"


엄청난 사실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는 플랙에 아드리앙은 진짜 진심으로 패닉이 온ㅋㅋㅋㅋ 솔직히 아무 기억도 안 나는 상황에서 저런 말은 정말 폭탄선언이지. 짐작은 했었는데 그녀가 정말 제 잃어버린 기억 속의 레이디버그였단 말이야? 근데, 그럼.


대체 그녀가 왜 악당이 된 거지?


플랙에게 물어도 나는 거기까지는 모르겠으니 니가 직접 물어봐~ 라는 대답만 들음. 열은 받지만 맞는말이라 아드리앙은 내일 그녀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하고 잠이 들지.


하지만, 다음 날부터 마리네뜨가 결석하기 시작함.


처음에는 아파서 못 나온다는 말에 기다리자고 생각했지만 3일 넘게 안 나오는 마리네뜨에, 결국 아드리앙은 병문안을 목적으로 마리네뜨 집으로 찾아가. 아드리앙에게 다행인 건 이 때 마리네뜨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셨다는 거지. 일정이 있어서 밖에 나가계심.


누군가 싶어 나가봤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아드리앙을 본 마리네뜨의 안색이 좋지 못해. 얼굴이 핼쓱한 걸 보니 진짜 아팠나 싶어서 아드리앙은 걱정함. 마리네뜨가 곧장 문을 닫으려고 하니까 한 발을 문 사이에 들이밀고, 그대로 비집고 들어와.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서 문에서 손을 떼. 아드리앙이 다칠까봐.


진짜 아팠나 보네. 라고 말하면서 능청스레 대꾸하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가 물어.


"여기 왠일이야?"

"말했잖아, 병문안이라니까."


저번에 네가 와준 답례로. 라고 말하며 아드리앙은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선물상자를 딱 내밀어서 마리네뜨에게 건네줘.


뭐냐고 물으니까, 이럴 땐 뭐 사와야 하는지 몰라서 대충 괜찮다고 추천받은 거 사왔다고 머리를 긁적이는 아드리앙은 이 와중에도 잘생겼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아드리앙을 거실로 데려와.


뭐 마시겠냐고 묻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잠깐 고민하다가 곧 직구를 던짐.


"니가 그 '여자'야?"


냉장고를 열려던 마리네뜨의 손이 우뚝 멈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알잖아, 무슨 소리인지."

"정말 몰라."

"사흘 전쯤에 나랑 만났었지? 에펠탑 꼭대기에서."

"…글쎄."


여전히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마리네뜨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어. 들켰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마리네뜨는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을 뿐.


아드리앙이 한숨을 쉬면서 말해.


"…그럼 일단 질문을 바꿀게. 몸은 괜찮아?"

"괜찮아. 가벼운 감기니까."


진짜 아팠는지 마리네뜨는 잠옷 차림인데 얼굴도 살짝 붉었어. 아드리앙은 가만히 사과해.


"멋대로 찾아온 건 미안하게 생각해. 좀 초조했거든."

"…뭐가?"

"어?"

"뭐가…, 초조한데?"

"네가 거기서 떨어져서, 크게 다쳤을까봐."


마리네뜨는 입을 꾹 다물어. 다정한 그 한 마디에 자꾸 심장이 울컥하니까. 저 말들이 그저 친구로서 사소한 걱정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확신하고 있는 거 같지만. 끝까지 부인하려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다시 한 번 물어.


"왜… 그런 거야?"

"…"

"왜 악당들을 만드는 거야? 목적이 뭐야. 내가 아는 너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드리앙은 말꼬리를 흐려. 그에게서 뒤돌아서 있던 마리네뜨는 그 순간 냉장고 문을 쾅 닫고, 앞으로 홱 돌아서 아드리앙과 시선을 맞추고 그에게로 걸어와. 그와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문지방 위에 서서 아드리앙한테 말해.


"왜 그렇게 말하는데?"

"뭐?"

"네가 아는 나는 어떤데? 기억이 돌아오긴 했어?"

"아니, 그건 아직…"


확 기세가 변한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매우 당황해.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는 정말 화난 것 같은 얼굴로 또박또박 따져.


"내가 무슨 이유로 이러고 있냐고 물었지. 그걸 알면 뭔가 달라지기라도 해?"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드리앙에게 울컥했는지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함.


"왜 이러는 거야."

"…"

"내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마리네뜨?"

"난 네가 너무 미워."


밉다는 그 한 마디에 아드리앙의 어깨가 살짝 튕겨 올라갔다. 마리네뜨는 조소했다.


"그런 어중간한 상냥함이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생각해보긴 했어?"


차라리 미워하고 경멸하고 화를 내. 왜 이유를 묻는 거야. 왜 나한테 그런 식으로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거야? 왜 기대하게 해?


네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면서-.


마리네뜨가 허탈한 듯이 중얼거려. 지친 목소리로.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넌."


모든 추억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외롭고 슬픈 일이다.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역시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리네뜨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한 줄기에 아드리앙은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랐지만, 마리네뜨는 점점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와 별개로 입술은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이젠 지긋지긋해!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혼자 기억하는 건-!!"

"마리네뜨, 진정해. 저기, 잠깐만-."


다가와서 제 두 팔을 붙잡는 아드리앙의 손을 마리네뜨는 거세게 뿌리쳤지만 꼼짝도 안해.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진짜 발을 써서 아드리앙의 무릎을 세게 차니까, 윽 소리를 내며 아드리앙은 손을 놓아줌. 손자국이 날 정도로 제게 붙잡혔던 팔을 감싸고 뒤로 물러나면서, 마리네뜨가 말해.


"돌아가."

"잠깐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마리네뜨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어. 소름끼칠 정도로 억양 없는 목소리.


"너는 히어로, 나는 악당."

"…"

"우리 사이는 그것뿐이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등을 돌리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버려.


거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아드리앙의 표정은 그저 멍해. 폭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야. 위층에서 들리는 콜록콜록 기침소리에 번뜩 정신이 든 아드리앙은 마리네뜨가 올라간 계단 쪽을 망연히 쳐다봐. 한참 뒤에 마리네뜨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니까 식탁 위에 봉지가 놓여 있네. 뭔가 싶었더니 각종 감기약이랑 비타민이야. 휘갈겨진 메모가 하나 있어. 두 손으로 펼쳐서 읽어봐.


[잠시 휴전이야.]


제 딴에는 걱정되서 약을 사왔지만, 그냥 두고 가면 안 먹을까봐 저렇게 적어놓은 거지. 마리네뜨의 손에 들린 메모가 살짝 구겨져.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


“진짜 멋없네. 핑계도 이런 거나 대고 말이야….”


마리네뜨의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해. 차라리 그를 미워할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악당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 그리고 역시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아드리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리고 아드리앙은 정말 진지하게 기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해. 그녀가 빌런이 된 이유는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 속에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에.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지금 같이 활동하는 레이디버그는 절대 자신에게 정체를 밝히려고 들지 않아. 더 이상한 건 레벅이 제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챈 거 같다는 점이야. 이건 일단 접어두고, 아드리앙은 어떻게든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서 플랙을 추궁해. 단서를 가진 놈이 이놈밖에 없잖아. 플랙은 굳어 있는 아드리앙의 표정을 보고 이제야 좀 알고 싶어졌냐고 물으면서 과거의 일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해주기 시작해.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얘기 뿐이야. 예전에 자신이 마리네뜨랑 사귀는 사이였고, 예전에 싸우던 빌런 때문에 죽을 위기까지 갔었다니. 플랙은 그 빌런이 너희 아버지였다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설명을 들으니까 대충 마리네뜨의 태도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 하지만 빌런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감을 못 잡겠어. 끙끙거리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은 낄낄거리며 물어.


뭘 그리 고민해?


"그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조금쯤은 알 것 같기도 한데~?"

"마리네뜨 입장에서?"

"너라면 어떻겠어?"

"…"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3개월이 넘게 비밀에 부쳐졌었다고 했잖아?"

"그렇지."


순순히 인정하자 플랙이 다시 질문을 던져.


"만약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봐."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편한 상대인 마리네뜨를 떠올렸다. 그녀가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욱신거리는 심장에 속이 안 좋다. 토할 것 같았다.


아마 엄청 슬플 거야.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가, 나중에서야 베갯잇을 붙들고 조금이나마 울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아닐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 같은 느낌…


…?!


아드리앙의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생각이 있어. 소년의 얼굴이 쓸쓸하게 일그러지며 힘없는 어조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해.


"무척 마음이 아플 거야."

"그래?"

"펑펑 울지도 몰라."

"우와, 꼴불견이네~!"

"삶이라는 게 다 부질없게 느껴질지도."

"우웩, 그거 참 느끼하네."

"…빌런이 되었어도, 상관없었던 걸까."


자만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 말을 힘없이 덧붙이는 아드리앙에게 플랙은 니 알아서 생각하라고 말하며 다시 치즈를 집으러 치즈가 담긴 통으로 날아가. 아드리앙은 쓰게 웃어. 하지만 이건 모두 다 추측일 뿐이니까, 결국 다시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피할 걸 알지만. 그런데 마리네뜨는 의외로 다시 학교에 계속 나와. 그에 안심하면서도 그녀를 어째야 하나 아드리앙은 고민해. 어쨌든 빌런이고 자신이 물리쳐야 하는 상대잖아. 시간을 끌수록 희생자는 계속 나올텐데.


한편 레벅은 블캣한테 물어봐. 너 요즘 뭔가 숨기는 거 있냐고.


빌런 잡을 때도 설렁설렁이고 어딘가 정신이 딴 데로 가 있는 거 같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에게 필요 이상의 스킨십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었지만 레벅은 굳이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블캣에게 레벅은 웃으면서 말해.


"거짓말하지 마. 뭔가 켕기는 듯한 얼굴 하고는."

"에이, 난 언제나 솔직하다구?"

"…저번에 만났던 그 여자, 너 혹시 짐작가는 사람 있어?"

"? 없지. 그건 왜 물어봐?"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지만 블랙캣은 속으로는 매우 찔려해. 레벅이 말해. 짐작가는 거 있으면 말하라고. 더 이상 악당들이 설치게 놔둘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 박력에 눌려서 블랙캣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니까, 레벅이 웃으면서


"좋아, 그럼 됐고."


라고 말하며 팔을 잡았는데 블랙캣이 저도 모르게 움찔해. 평소랑 달리 당황하는 듯한 모습에 레벅은 쿡쿡 웃음을 터트려.


"너랑 더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서운하지만."

"…뭐?"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블캣이 눈을 동그랗게 뜨니까, 레벅은 너 진짜 둔하구나, 라는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하며 말해.


"널 좋아하니까 그러지."

"어… 에에에에에?!!"

"뭐야, 진짜 몰랐어?"


그렇게 대쉬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말하는 레벅의 목소리에도 블캣은 정신이 없어.


"미... 미안."


받아들일 수 없어. 허둥지둥 대답을 건네는 블랙캣에 레벅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


"…어차피 쉽지는 않을 거라는 거 예상했었으니까."

"응? 뭐라고?"


작아서 뭐라는지 잘 못들어서, 블캣이 고개를 갸우뚱하니 레벅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저 웃어. 그렇게 블랙캣에게는 고민 하나가 더 추가되었지 삼각관계 최고!


그리고 아드리앙은 다시 또 자신의 기억을 알 만한 인물을 찾아. 바로 니노. 그리고 알리야. 알리야는 마리네뜨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지.


둘에게 따로 찾아가서 맛난 거 사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주 가관이야. 사실 이 둘이 사귀는 건 니노랑 알리야만 알고 있었거든.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어보는데 알리야가 네가 돌아왔을 때 마리네뜨가 티는 안 냈어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데 아드리앙은 겁나게 죄책감이 듬. 좋아하던 사람한테서 하루아침에 나 너 잊어버렸다는 선고를 듣는 게 어떤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리네뜨가 지금처럼 말수가 적고 아프게 웃는 타입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 때 알아. 자기가 사라진 뒤부터였다고 말하는데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드리앙에게 알리야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않냐고 쿨하게 넘겨줌. 대신 앞으로 좀 잘하라고 사람 좋게 웃어주는데 아드리앙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야. 그리고 다음으로 찾은 장소는 자기가 길거리에 쓰러졌던 날,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최종결전 장소) 거기를 가보기로 하고 짐을 챙겨.


여기서 마리네뜨 시점. 마리네뜨는 사실 아드리앙이 온 날로부터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궁금한데 묻기가 두려운 거야; 자기가 빌런을 생성한다는 거 알면서도 계속 아무 움직임이나 제재가 없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그가 자신을 역시 싫어하게 될 거라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함. 애써 인사하고 말을 걸면서도 속이 자꾸만 메슥거려. 무엇보다 빌런의 힘이 레벅 때와 달리 마리네뜨에게 너무 부담이 심해서, 그때 감기도 사실 힘에 대한 부작용으로 걸린 거니까.


그러다가 폭발한 마리네뜨는 결국 요정한테 선언해. 나 더 이상 너한테 협력 안 하겠다고.


그러니까 요정이 웃으면서 말해.


"그렇게는 안 돼."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마리네뜨는 정신을 잃어. 순식간에 빌런화된 마리네뜨가 평소랑 다른 거라면 눈에 초점이 없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빌런네뜨는 무언가를 인지했다는 듯이 어느 곳으로 향해.


마리네뜨가 쉽게 요정한테 마음을 먹혔던 이유는 마리네뜨의 정신 상태가 너무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야. 그간은 이성으로 어떻게 버텼지만 아드리앙에게 들키고는 참아왔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터진 거지. 그녀는 지나가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빌런으로 만들고 그 빌런들이 도시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함. 건물이 터지고 자동차가 날아가는 도시를 유유히 빠져나오는 빌런네뜨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어.


한편, 아드리앙은 지금 산산히 부서진 폐허에 와 있어. 바위와 자갈들만이 간간히 바스라져 있는 공터에는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아. 가만히 주저앉아 바닥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보던 아드리앙은 이 공간에 남은 음울한 기운에 절로 인상을 찡그려. 플랙이 기분 나쁘니까 돌아가자고 징징대도 꿈쩍 않고 주변을 살펴보던 아드리앙은 어느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춰. 하얀 바닥에 검게 얼룩져 있는 이건,


분명 핏자국.


거기까지. 뒤에서 날아드는 살기에 아드리앙은 옆으로 몸을 날려서 피해. 돌아보고 깜짝 놀라.


"마리네뜨?"


불렀지만 대답 대신 날아오는 건 날카로운 천이었어. 또 그걸 피해서 근처에 있던 낡은 벽 뒤에 숨어버린 아드리앙이 플랙을 불러 변신해. 그리고 살짝 내다보는데 빌런네뜨의 모습이 좀 이상해. 전에 만났을 때랑 조금 달라. 게다가 방금 넘어졌을 때 다쳤는지 아드리앙은 다리에서 둔통을 느꼈어. 피냄새도 좀 나고.


근데, 피냄새를 맡으니까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해. 그와 함께 강렬한 두통이 머리를 쾅 때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요동치고,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고 터져나오는 비명을 눌러삼켜. 눈앞에 보이는 건 밤이야. 빠르게 달려드는 무기들, 날아오는 무언가, 날카로운 고통, 피냄새.


피냄새와 함께 몰려오는 욕지기에 토할 거 같아.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소리. 절규하는 듯이 기억 속에서 메아리치는 그 비명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워. 쿵, 쿵, 쿵,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서 고통스러워.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머리가 터질 듯 아파.


그런데도 떠오르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어. 고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그 이미지를 놓지 않은 블랙캣의 초록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어.


그리고 그 순간, 블랙캣은 몸을 날려 피해. 숨어 있던 벽이 천에 쓸려 산산조각나.


"…그렇게 된 거였군."


뭔가를 중얼거리던 블랙캣이 봉을 들고 진지하게 빌런네뜨와 싸우기 시작해. 그녀의 등 뒤에서 뻗어나오는 천들을 훌쩍훌쩍 피하고 쳐내면서 블랙캣은 크게 소리질러.


"마리네뜨!! 너 마리네뜨야?!"


움찔, 순간 멈추는 빌런네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곧바로 매서운 공격이 가해졌지만 블랙캣은 굴하지 않아. 가만히 서있는 빌런네뜨에게 블랙캣이 크게 소리쳐.


"내가 밉지?"

"…"

"내가 미우면 차라리 그렇다고 말해!"

"…"

"다 받아줄 테니까, 어떤 변명이든 할 테니까! 그렇게 인형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지는 말란 말이야!!"


마구 소리치면서 나아가려고 하지만 더 이상은 접근이 힘들어. 천들은 살아있는 촉수처럼 블랙캣을 압박했고, 그는 뒤로 조금씩 물러나지게 됨. 블랙캣을 공격하려는 듯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는 빌런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이를 갈듯이 소리쳐.


"내가 좋아하는 마이 레이디는 그런 나약한 여자가 아니라고!!"


그 순간, 빌런네뜨의 손이 움직이지 않아. 천들도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점점 찡그려지기 시작하는데 괴로워 보여.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블랙캣은 몸을 일으켜 달려들기 시작해. 다시 그에게로 달려들지 시작하는 천들이 그래도 아까만큼 기세가 매섭지 않아. 얻어맞기도 하고 날카로운 천의 끝에 쓸려 옷이 찢어져 피가 나면서도 블랙캣은 그녀에게로 있는 힘껏 달려가. 그리고 그녀를 와락 껴안아. 빌런네뜨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블랙캣이 가만히 중얼거려.


"……………미안해."

"…"

"기다리게, 해서."


블랙캣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어. 그녀를 안고 있는 손은 경련을 일으키듯 계속 떨리고 있고.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블랙캣은 고백해.


"계속, 혼자 내버려둬서 미안해."

"…"

"이제 괜찮아. 난 여기 있으니까."


떠나지 않아.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빌런네뜨는 잠깐 움찔 몸을 떨어. 그녀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블랙캣의 어깨를 적시기 시작해. 자신을 안아주는 따뜻한 온기에 빌런네뜨의 입이 열리고, 천천히 말이 새어나와.


"아…드리…앙?"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가 몇 번을 깜빡거렸고, 눈물은 계속 쏟아져. 제 가슴께를 축축하게 적시는 눈물을 느끼고 블랙캣의 눈가도 빨갛게 변하지만, 그는 꾹 참고 상냥하게 대답해줘.


“그래, 나야.”

“정말 너야?”


정말 너냐는 듯이 계속해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블랙캣은 끊임없이 답해줘. 나라고, 나는 여기 있다고. 그에 빌런네뜨는 그를 마주 끌어안고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해. 아이처럼.


“아드리앙, 아드리앙…!!”

“그래, 응. 나야.”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빨리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

“나 기다렸어. 계속 기다렸어.”


제 품으로 더욱 파고들며 계속 울고 있는 빌런네뜨를 블랙캣은 더욱 꽉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정말 아드리앙이지? 이거 꿈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더 이상 꿈은 싫어…!!”

“꿈이 아니야.”


확인하려는 듯이 계속 중얼거리면서, 마치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블랙캣을 꽉 붙드는 빌런네뜨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 블랙캣은 반대로 자꾸만 떨리려는 손을 애써 조심하면서 다시금 빌런네뜨를 소중하게 껴안아.


그동안 쌓여왔던 것들을 모두 털어내려는 것처럼 솔직하고, 아주 서럽게 울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너무 미안해서 블랙캣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많이 불안하고 힘들었을 텐데, 계속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여자한테 관심두는 자신을 보고 있기 괴로웠을 텐데. 이렇게 돌아와준 것이 고맙고 너무 미안해서 블랙캣의 눈가에서도 천천히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어.


그렇게 서로 끌어안고 울고 있는데, 빌런네뜨의 변신이 풀리기 시작해.

그 때였어.


"위험해!!"


블랙캣이 빌런네뜨를 껴안고 옆으로 굴러.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휙 날아들었다 거둬지는 물건을 본 빌런네뜨의 눈동자가 크게 떠져.


붉은 요요.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새로운 레이디버그. 근데 상태가 좀 이상하네.


참고로 빌런네뜨의 변신은 다 풀린 게 아니야. 다만 아까보다 몸에 힘이 없고 손이 떨려. 그리고 새로 나타난 레이디버그 얼굴에 선명히 나타나 있는 건 빌런마크. 씨익 웃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블랙캣은 깜짝 놀라지만, 빌런네뜨는 뭔가를 깨달은 듯이 얼굴이 새파래져.


"…속았구나."


사태가 어떻게 된 거냐면, 이 요정은 처음부터 마리네뜨를 그렇게까지 믿지 않았어. 아드리앙이 살아 돌아왔을 때부터는 더더욱. 그래서 그가 나타난 뒤로 자신의 힘을 나눠서 새로운 빌런을 하나 더 만들었어.


물론 마리네뜨 모르게. 마리네뜨가 정신력이 강하긴 했지만, 그녀도 가끔 요정의 통제 하에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간간히 있었거든. 그 때 요정은 자신의 힘을 나누어서 새로운 빌런을 만들었지. 마리네뜨가 그 때 상당히 많은 힘을 거둬줘서 힘을 나누기는 어렵지 않았어 그게 바로 새로운 레이디버그. 진짜 미라큘러스로 변신한 게 아니었던 거야.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사실 아드리앙을 짝사랑하던 어떤 소녀였음. 그에 대한 마음을 빌미로 요정은 그녀를 이용하고 있을 뿐.


사실 새로운 레이디버그는 본래 모습일 때는 자기가 레벅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것도 알지 못해. 블랙캣의 앞에서 변신을 풀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바로 그거임. 정말 요정 손에서 놀아난 거지. 재빨리 마리네뜨를 끌고 다른 바위 쪽으로 피신하는 블랙캣에게 빌런네뜨가 말해.


"아드리앙. 아니, 블랙캣."

"어, 왜?"


그러면서 빌런네뜨는 자기 가슴쪽에 달린 브로치를 가리켜.


"이거랑 똑같은 걸 가지고 있을 거야. 그걸 부숴."

"너는 어쩌게?"


걱정스레 묻는 블랙캣에게 빌런네뜨가 단호하게 말해.


"지금 이 브로치를 부수면 내게 있는 힘까지도 저 애한테 가게 될지도 몰라. 일단 도망다니고 있을 테니까, 서둘러줘."


칼같이 대답하는 빌런네뜨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나만 믿으라는 듯이 웃는 그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서, 블랙캣은 웃으면서 말해.


"알았다구요, 제 하나뿐인 공주님께서 부탁하니 이거 뭐."

"…어서 가기나 해."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퉁명스레 말하며 뒤돌자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 그에 블랙캣은 밖으로 나가서 그녀를 상대하기 시작하고, 빌런네뜨는 어떻게 그를 도울까 고민함.


지금 자신에게 레벅의 힘은 없지만, 분명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면서 빌런네뜨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지 확인해. 밖에서는 블랙캣이 고전하고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의 공격이 이쪽은 안 노리네.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가 빌런네뜨는 순간 그 이유를 깨달아. 도전해볼 만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바위 밖으로 나와서 레벅에게로 뛰어감. 깜짝 놀라서 피하라고 소리치는 블랙캣의 말도 무시하고 마구 달려나가는데 요요의 공격은 오지 않지.


왜냐하면 엄연히 아직 요정의 본체는 빌런네뜨 쪽에 있었거든. 함부로 공격이 불가능한 거지. 그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한 빌런네뜨는 최대한 그녀의 움직임을 막는 암시를 걸고 블랙캣에게 지시해. 잡으라고. 곧바로 봉을 날려서 레벅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빌런네뜨의 몸에서 땀이 비오듯 떨어지고 있어. 근데 브로치가 안 보여. 어디 있나 허둥지둥하는 블랙캣을 보고 있던 빌런네뜨의 시선이, 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물건으로 향해.


요요.


"블랙캣! 요요야!!!"


그 말을 듣자마자 블랙캣은 일어나서 요요 앞으로 간 뒤에 세게 발로 밟아. 요요가 깨지고 그 안에 있던 펜던트에 금이 가 있어. 검은 나비가 나오는 걸 보고서야 빌런네뜨는 싱긋 웃어.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브로치를 블랙캣에게 던져줘. 블랙캣이 고대의 재앙을 써서 그 브로치를 부수자마자 모든 것이 풀린다. 빌런이 되었던 사람들의 모습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빌런 모습을 한 마리네뜨의 변신도 풀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이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해.


"너 괜찮아?"

"응… 괜찮아."


헤헤 웃으며 대꾸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이 정말로 괜찮아 보여서 블랙캣은 안심해.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져. 하지만 피하지는 않지.


그나저나,


"지금… 도시가 난리가 났을 텐데, 어떡하지? 정화의 힘이 없는데."

"아, 그러게. 근데 잠깐만, 그 레이디버그는 정화의 힘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어, 그러네?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함에 레벅이었던 소녀가 쓰러진 자리로 가 보자 그녀의 귓가에서 붉은 바탕에 검은 점들이 박힌 귀걸이가 반짝여. 어라? 하면서 블랙캣에게서 내려선 마리네뜨가 그 귀걸이에 손을 대자, 그 순간 귀걸이에서 빛이 나더니 티키가 튀어나와.


"마리네뜨!!!"


소녀가 진짜 레이디버그의 힘을 쓴 건 사실이었어.


다만 폭주했을 당시 티키 쪽에도 타격이 커서, 티키는 당분간 깨어나지 못했고 마리네뜨가 정신을 잃었던 사이 요정이 따로 귀걸이를 감췄던 거지. 나중에 써먹었고. 변신한 레이디버그는 신비한 치유의 힘을 써서 도시를 정화함. 그리고 다시 마리네뜨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미 변신이 풀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드리앙이 레벅이었던 소녀를 등에 업고 있어. 그에 질투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피식 웃는데, 아드리앙이 그런 그녀를 보고 웃으면서 말해.


"마리네뜨."

"어?"


뒤를 돌아보자, 아드리앙이 한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고 있어. 잡으라는 듯이. 부드럽게 웃는 아드리앙의 미소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마리네뜨는 곧 환하게 웃으며 그 손을 잡아. 그리고 돌아가지.


그들이 살고 있는, 이제는 평화로울 도시로.




fin.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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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아리] 무도회

기타 2016. 6. 13. 22:52




[팬텀아리]

무도회





Written by. 리네






하얀 낮이 지나가고 어두운 밤의 장막이 온 하늘 위를 옅게 수놓을 시각, 새까맣게 물드는 하늘 아래서도 하얗게 빛나는 성의 안쪽에서는 화려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집 몇 채가 들어갈 법한 커다란 성의 창문들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문을 들여다보면 천장 위에서 제 몸을 화려하게 불태우는 샹들리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연회색 벽을 따라 사람 여럿이 서 있어도 좋을 만큼 넓고 커다란 창문들이 줄을 서고 있었는데, 테두리가 금빛으로 빛나는 붉은 커튼들이 그 사이사이로 휘장처럼 늘어져 있었다. 붉은 열매를 빻아 즙을 낸 것처럼 부드럽게 깔린 카펫 위로 사각사각, 조심스러운 발소리들이 살짝씩 들려온다.


눈부시도록 붉은 무도회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참가하고 있었다. 간간히 놓여 있는 하늘색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음식과 술들 사이사이를 아름다운 꽃들이 장식했다. 가장자리 쪽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악기를 들고 잔잔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고, 파트너를 찾아 돌아다니는 이들도 있었으며 사람들 틈을 벗어나 멀뚱히 창가 쪽에 서 있는 남자도 있었다. 정장과 화려한 장신구들로 치장하고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로 쟁반을 들고 있는 바텐더들이 바쁘게 발을 놀렸다.


그들 사이로 지나가는 한 여자가 있었다.


하얀 드레스 위로 반투명한 푸른 숄을 걸치고, 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의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가면 너머로 드러나는 푸른 눈동자는 총명하게 반짝거렸다. 제 머리색과 같은 나비가면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푹신한 카펫 위를 밟으며 천천히 회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여인은 신기하다는 듯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일까, 들뜬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여자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이 여인의 정체가 현 에레브의 여제, 아리아라는 걸 알면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지만.


- 진짜 화려하네.


지나가던 바텐더에게서 받아든 무알콜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아리아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수행원도 없이 온 걸 알면 나중에 신수한테 엄청 혼날 게 분명했지만, 이런 장소에까지 따라오면 자유롭게 활동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막상 와보니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혼자 오면 분명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는 통에 아리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누구랑 같이 오자고 했어야 했나.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떠오르는 생각에 아리아는 곧장 방금 했던 생각을 취소했다. 말했다간 분명 체통이 있다며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를 한 다발로 들었을 것이 뻔했으니까. 생각만 해도 두통인지라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면서 아리아는 들고 있던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그래, 사람이라면 여기도 잔뜩 있잖아! 아무나 말 걸어서 같이 놀면 되지 뭐! 뭐가 문제겠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웃고 있는 아리아에게로 여러 개의 시선들이 따갑게 꽂히고 있었다. 대부분 남자들이었는데, 얼굴이 보이지는 않아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건 짐작했는지 힐끔힐끔, 몇몇은 꽤나 노골적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아리아가 그 시선들을 눈치챌 수 있었을 리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런 그녀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시선 하나가 있었다. 잔 하나를 들고 창가 쪽 커다란 기둥에 기대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푸른색의 가면이 걸려 있었다. 건조하게 회장을 훑어내리던 자주빛 눈동자는 아리아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하다가, 차분히 살펴보더니 곧 이채로운 빛을 띠었다. 긴가민가한 건지 살짝 고개를 갸웃이던 남자는 무언가 재미난 생각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칵테일을 다 마신 뒤 빈 잔을 들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리아의 모습에 그녀가 혼자라는 걸 알았는지 남자들 몇 명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던 남자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그녀를 부른 건,



“실례합니다.”



속으로 뭐하고 놀지에 대해 열심히 궁리하고 있던 아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푸른 망토를 두르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모습이 흡사 귀족을 연상시키는 남자였다.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리아에게 남자는 싱긋 웃으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아, 감사하지만 지금은….”



진짜 누구 잡아서 놀겠다고는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정체가 탄로나면 엄청 귀찮아질 걸 아니까. 갑작스러운 춤 신청을 거절하려던 찰나, 남자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더니 아리아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꺅! 살짝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품에 안긴 아리아가 항의하려던 찰나,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야?”

“뭐? 누구…?”



끌어안긴 채로 고개를 들자 남자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놨지만, 저 웃음기 가득한 눈동자는….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리아는 그의 정체를 눈치채고 깜짝 놀라 작게 소곤거렸다.



“팬텀?!”

“이제 알았어? 둔하네, 너.”

“여긴 어떻게….”

“일하러 왔지.”



태연하게 말하며 제 허리를 끌어안는 팬텀의 행동에 아리아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뭘 훔치러 온 건가요?”

“음, 글쎄?”



더 이상은 안 알려준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는 팬텀에게 아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랑 얘기하고 있어도 되요? 잘못하다가 들키면 어떡하려구요.”

“이런 허접한 녀석들한테 들킨다면 괴도 팬텀의 이름이 아깝지.”



그렇게 속삭이며 팬텀은 망토를 살짝 들어올려 아리아를 감싸안았다. 갑작스럽게 어두워지는 시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금발의 소녀를 다정하게 내려다보던 팬텀은 곧 자신과 아리아를 주목하는 몇 명의 남자들에게 피식 조소를 날렸다. 꺼지라는 듯이 살벌한 시선에다 아무리 봐도 귀한 집 자제처럼 보이는 팬텀에게 굳이 시비를 걸러 오는 남자는 없었다. 아리아를 향한 시선이 거슬렸던 팬텀에게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팬텀?”



팬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는 걸 깨달은 아리아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아, 미안.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뒤로 물러난 팬텀의 얼굴은 비록 가면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눈빛은 평소와 같이 장난스러웠다. 어라, 착각했나? 아리아는 주변을 슥슥 둘러보았다. 다행히 자신들에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팬텀을 이끌고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향했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서야 그녀는 겨우 한숨을 토로하며 속닥였다.



“정말 뭐 훔치러 온 거예요?”

“궁금해?”

“궁금하죠, 당연히. 괴도 팬텀이 직접 나서게 할 정도의 보물은 흔하지 않잖아요?”

“뭐, 그렇지. 너도 스카이아로 사기를 쳤으니까 말이야.”

“신경쓰고 있었군요.”

“참내, 그 보석은 노카운트야. 전설대로의 물건이 아니었으니 흥미 없어졌어. 오히려….”

“오히려?”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는 아리아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던 팬텀이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손가락을 맞부딪혔다. 딱,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 사이로 나오는 붉은 장미에 아리아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니, 장미를 닮은 아름다운 머리핀이었다.



“자, 선물.”

“아, 고마워요!”



손수 아리아의 머리에 핀을 달아주는 손길이 묘하게 상냥하다는 생각에 아리아는 시선을 올려 팬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까이 붙어 있어서 그런가, 기분 좋게 뛰고 있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싫지 않아 아리아는 살짝 웃었다. 아리아의 머리에 꽂힌 핀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팬텀이 그런 그녀의 미소를 보고 피식 웃었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있어?”

“재미있어서요. 팬텀이랑 만나게 될 줄 상상도 못했거든요. 혼자 있기 심심했었는데.”

“뭐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렇게 웃을 생각이었어?”

“…팬텀이라서 더 즐거운지도 몰라요.”



솔직하게 말하는 아리아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팬텀은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같이 따라 웃으면서도 아리아는 정말 여유로워 보이는 팬텀에 걱정이 앞섰다. 이렇게 가면까지 착용하고 온 걸 보면 분명 뭔가 훔치러 온 모양인데, 자신은 재밌지만 이 사람에게는 소중한 시간을 뺏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팬텀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 끝에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라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너 날 뭘로 보는 거야? 나는 괴도 팬텀이라구. 내가 훔치지 못할 보물같은 건 없단 말이지.”



자신만만하게 이어지는 팬텀의 목소리에 아리아는 역시 당신답다고 생각하며 따라 웃기만 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팬텀의 말에는 깜짝 놀랐다.



“딱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가 자기 입으로 자신의 실패를, 그것도 저렇게 태연하게 거론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진짜요? 뭔데요?”

“음, 그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반짝거리는 아리아의 눈빛에도 팬텀은 잠깐 고민하는 척하더니, 아주 부드럽게 오른팔을 움직이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한 곡 춰주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싱긋 웃으며 손을 내미는 팬텀을 멀뚱히 보던 아리아가 풋 웃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살포시 웃는 아리아의 얼굴을 잠깐 뚫어져라 바라보던 팬텀이 곧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단단하게 자신을 붙잡는 팬텀의 손에 아리아는 살짝 당황했는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긴장하고 있는 아리아를 눈치챈 팬텀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이끌고 무도회장 가운데로 걸어나갔다.


마침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바뀌었다.


잔잔한 왈츠가 악기들이 연주하는 선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앞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해하는 아리아와 달리 팬텀은 느긋한 태도로 아리아의 허리를 살짝 감싸안았다. 순간 놀라서 팬텀을 쳐다보는 아리아에게 그는 괜찮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팬텀과 아리아는 천천히 원을 돌기 시작했다. 가볍게 몇 번 원을 돌다가도 팬텀은 곧 익숙한 솜씨로 아리아를 리드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템포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자니 긴장이 점점 풀리는지 아리아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돌아오고 있었다. 가면 너머로 그런 아리아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팬텀이 곧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리아에게로 더욱 몸을 바짝 붙였다.


강하지만 부드럽게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에 아리아는 저항 없이 끌려갔다.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아리아는 반사적으로 팬텀을 올려다봤다가 멈칫했다.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흩날리는 백금발의 머리카락,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자주빛 눈동자는 마치 자신을 꿰뚫어볼 것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더 이상한 건 그 시선이 싫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본다는 것처럼 집중하고 있는 팬텀의 눈빛에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팬텀이 그런 아리아를 보고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손으로 걷어내었다.


정말 부드럽게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에 아리아는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순간 모든 게 어색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팬텀의 어깨에 올려둔 손을 내려야 할지 냅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색했다.


무엇보다 얼굴이 너무 더웠다. 팬텀이 싫은 게 아닌데 이상하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덜컹거리는 느낌에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소곤거렸다.



“팬텀, 너, 너무 가까운데….”

“뭐야. 긴장 돼?”

“…?! 그런 거 아니거든요?”



발끈해서 대꾸하는 아리아의 모습에 팬텀은 그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청량하지만 시원한 웃음소리가 음악소리와 함께 드문드문 아리아의 귓가로 살포시 파고들어왔다.


이 소리를 듣고 있는 건 자신뿐일까?


그렇다면 좋을 텐데. 순간 그렇게 생각한 자신에 아리아는 당황했지만 애써 의연하게 팬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을 본 팬텀의 눈동자가 놀란 듯 살짝 커졌지만, 그는 끝까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춤이 끝나고 많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팬텀과 아리아가 있는 쪽으로 시선들이 와르르 꽂히는 걸 보면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특유의 분위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 모양이었다. 따끔따끔할 정도의 시선들을 뒤로 한 채 팬텀과 아리아는 발코니로 나왔다. 다행히도 이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 채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발코니 쪽에 서 있던 아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줘야죠.”



당신이 훔치지 못했던 보물. 그렇게 입을 떼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잠깐 말이 없더니 이내 대답했다. 



“…역시 안 가르쳐줄래.”

“왜요?!”


춤추면 알려준댔잖아! 억울하다는 듯이 팬텀을 쏘아보는 아리아의 눈빛에도 팬텀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팬텀의 미소에 난감한 기색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리아가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팬텀은 곧 결론을 내렸는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아리아에게로 다가왔다. 탁하게 얼룩진 자주빛 눈동자에 아리아는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와는 다른 팬텀의 분위기에 뒷걸음질치고 싶어졌지만 그녀는 애써 이겨냈다. 그런 아리아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팬텀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아리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도망칠 수 없다는 듯이.



“왜냐면….”



그 말과 함께 팬텀은 다른 한 손으로 아리아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가면들이 살짝 부딪혀 조금 삐뚤어졌지만 아리아는 그런 걸 신경쓸 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상황인지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게 꿈인 것만 같았다. 신분을 숨기고 무도회에 놀러 온 것도, 우연히 팬텀을 만나 춤을 춘 것도, 지금 그가 자신에게 키스하고 있는 이 상황까지도.


쪽, 소리와 함께 팬텀은 천천히 아리아의 얼굴에서 고개를 들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꼼짝도 못하는 아리아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훔칠 거거든.”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 꺼내는 아리아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팬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간만에 즐거워 미치겠다는 얼굴로.



“그럼 이만. 잔금은 나중에 받으러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발코니 바깥쪽으로 다가간 팬텀의 기척은 금세 사라졌다. 그런 그를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아리아는 그저 손을 올려 제 입술을 어루만졌다. 방금 전의 감촉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가, 그러니까, 팬텀이랑 키스를….


자각하자마자 아리아의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엄청나게 펌프질하는 상황에서 아리아는 새빨개진 볼에 두 손을 올렸다. 뜨거웠다. 아까는 살짝 더운 정도였지만, 지금은 차가운 밤바람으로도 속일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말도 안 돼.”



망연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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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리퀘로 간단하게 쓰려던 팬텀아리 무도회! 근데 왜 이렇게 길어졌지 망할.


Posted by I.R.E
,

※ 주의!!! 일단 이 영상을 일단 봐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FlwV3scCgAM


보셨으면, 시작합니다!





<porte ouest - 서문>









Episode 1.

내 이름은 레이디버그!






“으앗!”



위험했다! 넘어질 것처럼 중심이 기울어졌지만, 소녀는 간신히 한 발로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소녀는 뒤로 홱 고개를 돌려 방금 발에 채였던 작은 돌멩이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필 하고많은 돌멩이 중에 제 발 밑으로 굴러오다니. 하마터면 바닥과 열정적인 키스를 하게 될 뻔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한참을 돌멩이를 쳐다보던 중, 소녀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힘없이 풋 웃었다.


됐어,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몇 번 깜빡였다.



“어서 가야지.”



다시 돌아서 한참을 걸어가자, 회색 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살짝 울퉁불퉁했던 길이 끝나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길이 나타났다. 갈라진 틈들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물이 고이지 않던 먼젓번 길과 달리 이제 막 보이기 시작한 길들 주변에는 커다란 물웅덩이들이 퍼져 있었다. 길가에 드문드문 자리한 웅덩이 위로 빠르게 걸어가는 소녀의 모습이 간간히 반사되어 보였다, 사라진다. 하얀 블라우스 위에 짙은 남색 자켓을 걸치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청바지를 입은 소녀의 손에 들린 붉은 우산이 특히 인상적이다. 하얀 구름이 옅게 번진 푸른빛 하늘이 소녀의 등 뒤로 눈부시게 반짝인다.


고즈넉한 파리의 저택과 건물들을 배경으로 소녀는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한참 골목길을 걸어가다보니 넓은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몇몇의 사람들만이 광장을 거슬러 지나가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소녀는 싱긋 웃으며 춤을 추듯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붉은 우산을 멋들어지게 움직이며 빙그르르 돌던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를 찰나,



“꺅!”



너무 빨리 돌은 걸까.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는 쪽으로 내려가던 중 발이 꼬였다. 재빨리 우산을 바닥에 짚은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소녀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늘 생각하지만 참 신기하면서 이해할 수가 없다. 천성적으로 운동신경이 없는 편은 절대 아닌데 왜 밖에만 나오면 꼭 뭔가에 발이 걸리거나 넘어질 위기에 처하는 걸까. 재수가 없어서? 아니면 덜렁대서? 그래도 이젠 익숙해져서인지 그렇게 자주 넘어지지는 않지만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손에 든 우산을 꼭 쥐었다. 어제 비가 많이 오긴 했지만 오늘은 말끔하게 개어 있는 좋은 날씨다. 그럼에도 굳이 커다란 우산을 손에 들고 다니는 소녀의 모습을 몇몇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흘깃 쳐다본다. 하지만 소녀는 역시 개의치 않았다.


광장을 지나, 다시 골목 쪽으로 접어들고,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하는 골목 끝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사거리였다. 넓은 횡단보도가 도로를 크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횡단보도 바로 앞에 서서 소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금방 초록불이 들어왔지만 길을 건너는 사람들과 달리 소녀는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힐끔거리는 소녀의 시야로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서둘러 여기까지 온 이유는 학교 때문은 아니었다. 등교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여유가 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시간에 이 횡단보도 앞으로 온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오늘은 있을까?’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지만 찾는 사람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역시 오늘도 나타나지 않는 건가, 실망할 찰나 갑자기 자동차 하나가 순식간에 소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으앗!”



촤악, 소리와 함께 바닥에 고여있던 웅덩이의 물이 크게 튀었다. 우산을 펴들 새도 없이 순식간에 소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을 가득 뒤집어쓴 생쥐 꼴이 되었다. 옷과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추욱 늘어져서 그런지 소녀는 방금 전보다 한층 더 작아 보였다. 보통이라면 짜증을 내며 욕이라도 할 텐데, 소녀는 아무 말도 없이 처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대충 옷의 물기를 짜낸 뒤, 소녀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횡단보도를 건너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소녀의 이름은 마리네뜨 뒤팽 쳉. 조금 재수가 없고, 많이 덜렁대며, 굳이 특출난 점을 찾기 어려운 보통의 여자아이다. 하지만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 선량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밝게 웃을 줄 알며, 소심하지만 한 번 정한 일에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평범한 소녀이기도 했다.


이날까지는.




///



“너 꼴이 그게 뭐야!”

“에스미.”



물에 젖은 채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리네뜨를 본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와 굽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살짝 올려 묶은 소녀의 검은색 눈동자가 총명하게 반짝거렸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반에는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성큼성큼 제게 다가오는 친구의 험악한 기세에 마리네뜨의 머리카락이 절로 쭈뼛 곤두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네뜨의 상태를 둘러보던 에스미는 한숨을 내쉬며 제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래, 오는 길에 물벼락이라도 맞았어?”

“아냐아냐, 에, 어제 비가 왔잖아? 물이 많이 고여 있는데, 차가 엄청 빨리 달려와서….”

“알 만하다. 너 또 길가에서 멍때렸지?”

“아냐! …그런 거.”



손을 휙휙 내저으며 강하게 부정하는 마리네뜨를 잠깐 응시하던 에스미는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으니 어서 옷이나 갈아입어. 그 꼴로 어떻게 수업 들을래?”

“응! 화장실 다녀올게. 체육복이….”



라고 말하는 순간 마리네뜨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가방이 어디 있지?”

“처음부터 안 들고 왔어.”

“어, 그래? 아무래도 까먹고 안 가져온 모양이네, 에헤헤.”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쉬는 마리네뜨에 에스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니, 넌?”

“그런가?”

“으이구, 일단 내 체육복 빌려줄게. 일단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옷은 대충 빨아서 말려봐. 집에 갈 때까지는 마르겠지.”



[Esmeralda Sezer(에스메랄다 세자르)]라고 적혀 있는 사물함 문을 열고 수건과 체육복을 꺼낸 에스미가 마리네뜨에게 그것을 휙 던졌다. 허둥지둥 그것들을 받아 안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에스미가 절로 혀를 찼지만 그와 별개로 시선은 퍽 다정했다.


에스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좀 모자라지만 귀여운 딸내미를 보는 엄마의 심정이란 이런 걸까.



“고마워, 에스미!”

“오냐.”



어서 다녀오라는 듯이 손을 내젓는 에스미를 뒤로 한 채 마리네뜨는 옷을 갈아입고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가며 반으로 돌아왔다. 그 때쯤에는 슬슬 등교를 시작하는지 반에 사람이 몇 명 더 늘어나 있었다. 쪼르르 자리로 와서 앉아 두 팔에 턱을 괴고 엎드리는 모습은 딱 보기에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비단 물벼락을 맞아서 그런 것만은 아닌지, 그녀는 한숨과 함께 흘리듯 중얼거렸다.



“…오늘도 없었어.”



바로 옆 사람에게나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였다. 마리네뜨의 옆, 맨 뒤 창가자리에 앉아 있던 에스미는 그런 마리네뜨를 쳐다보더니 또 시작이냐는 듯이 심드렁하게 맞받아쳤다.



“뭐가? 아, 니가 찾고 있다던 그 남자애?”

“으응….”





일주일 전쯤이었나.


2학기가 시작하던 날 아침, 마리네뜨는 언제나처럼 졸린 눈을 비비며 등교를 하고 있었다. 파리의 중심부라 그런지 꽤 이른 시간에 나왔는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물론 등교시간에 딱 맞춰가면 더 많이 잘 수 있겠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그다지 좋았던 기억이 없는지라 마리네뜨는 최대한 일찍 일어나서 학교를 가곤 했다.


그 날도 그랬었다. 익숙하게 걸어다니던 길들을 지나 횡단보도 앞에 서서 건널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파리의 도로는 혼잡하기로 악명이 높다. 학교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기에 망정이지, 오죽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승용차보다 편할 정도였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자니 절로 피곤이 몰려왔다.



“하암….”



졸려. 계속 하품을 하는 마리네뜨의 눈에는 졸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개학 전날은 꼭 잠을 설치곤 했는데 그날따라 좀 많이 긴장했던 것 같다. 이번 학년에는 단짝친구가 생겨서 학교가는 게 조금은 더 즐거워지긴 했지만, 오랜 습관이란 쉽게 고쳐지지 않는 악우와도 같았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얌전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자니 더욱 졸렸다. 그래서인지 마리네뜨는 어느 새 제 뒤에 누군가 서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학교에 가서 자야겠다는 생각에 마리네뜨는 신호가 들어오자마자 도로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엇?”



그 순간, 뒤에서 강한 힘이 마리네뜨의 책가방을 붙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런 끌려감에 무슨 짓이냐고 말하려던 찰나,


빵빵-.


승용차가 클락션을 울리며 바로 눈앞을 스쳐갔다. 빠른 속도로 자신을 지나쳐 순식간에 저 멀리에 보이는 자동차에 마리네뜨의 눈이 번쩍 터졌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었다. 구해준 건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서 있던 것은 소년이었다. 금발에 무뚝뚝한 인상을 가진 남자애. 얼굴만 봐서는 제 또래처럼 보였지만 단정한 정장차림에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 때문인지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책가방 위쪽 끈을 잡고 있던 소년의 청회색 눈동자가 지긋이 마리네뜨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괜히 뻘쭘해진 마리네뜨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시선을 피했다. 이상하게 얼굴이 더웠다.


어라, 내가 왜 이러지?



“아, 감사합니다.”



부랴부랴 인사를 건네자 소년은 알겠다는 것처럼 가만히 책가방에서 손을 떼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휙 돌아서서 길을 건너는 소년의 뒷모습을 마리네뜨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두근, 두근, 조용히 박동치는 심장소리가 온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딱히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숨이 막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저, 저기…!!”



이미 멀어진 소년을 쫓아갔지만 소년은 이미 불어난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로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어서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가서 기다렸지만 모두 허탕을 친 상태였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일주일 내내 기다렸는데도 안 보여어어어어….”



팔을 쭉 뻗은 채로 책상에 고개를 콕 박고 바르작거리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에스미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게 이름이라도 물어보지 그랬어. 목소리도 모른다며?”

“그러게. 마리네뜨 이 멍청이! 난 정말 바보야!! 왜 그때 말을 안 하고 멍을 때려서!”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 그래봤자 다시 돌아가서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찾을 생각을 해야지.”



심드렁하게 대답을 던지는 친구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들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에 에스미는 풋 웃으며 마리네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예 이쪽으로 지나다니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날만 어쩌다보니 이쪽 횡단보도로 왔다던가….”



에스미가 하는 말을 듣자마자 마리네뜨는 벌떡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어떡해? 이대로 못 찾는 걸까?”

“아니, 이건 가능성일 뿐이니까. 의외로 우리 학교 학생일지도 몰라. 그 횡단보도에서 우리 학교까지 10분밖에 안 걸리니까. 게다가 개학식 날이었기도 하고. 생김새가 어땠는데?”

“어…. 일단 금발에, 검은색 조끼랑 회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더라. 넥타이도 맸던 거 같고….”



손가락을 접어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질문했다.



“켁, 완전 어른이나 입을 거 같은 드레스코드인데? 우리 또래이긴 한 거야?”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진 않았어. 표정은 무뚝뚝했지만….”



잘 웃지 않는 것 같았지.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보는 에스미의 눈동자에 걱정이 들어찼다. 반응에서 대충 짐작이 가긴 하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근데 걔는 왜 그렇게 찾아? 정말 반한 거야? 이런 참견은 좀 그런가 싶긴 하지만, 좋아할 상대는 신중하게 골라.”



넌 진짜 간이고 쓸개고 다 퍼줄 거 같아서 걱정이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게 걱정임을 모르지 않기에, 마리네뜨는 헤헤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글쎄, 반했나?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런 거겠지?”

“…일주일 내내 사람 찾겠다고 쇼하는 게 단순히 인사나 하자고 하는 짓은 아닐 거 아니냐.”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소년이 무뚝뚝한 건 사실이었다. 말을 하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는 것도 없었고, 얼굴에도 표정이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리네뜨는 소년이 분명 겉보기만큼 차가운 성격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애초에 자신을 도와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 애, 왠지 상냥할 거 같았거든.”



수줍게 웃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에스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오는 거야?”

“보이는 게 다는 아니잖아. 잠깐 본 사람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만…. 하긴 일단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꼭 다시 만날 거야! 내일도 일찍 나가야지.”

“계속 그러게?”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럼 일단은 계속 해봐야지.”



꼭 찾고야 말겠다고 다시 전의를 불태우는 마리네뜨의 모습은 또 묘하게 귀여워서, 에스미는 결국 피식 웃으며 마리네뜨의 머리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래, 그래. 힘내라.”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늘도 역시 허탕인가. 하교하면서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 찾지 못했다. 비슷한 외양의 사람은 몇 명 봤지만 다들 아니었다. 하긴, 금발은 꽤 흔하기도 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한참을 걷던 마리네뜨는 어느 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빵집인지라 문 너머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그냥 들어가려다 여느 때처럼 힐끗 눈을 돌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마리네뜨는 흠칫했다.


너무 우울해 보이나?


으음, 입을 우물거리며 난처하다는 듯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던 마리네뜨는 주변을 슥슥 둘러보다가 재빨리 표정을 점검했다. 검지손가락들로 입꼬리를 크게 밀어올리고 즐거운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집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빵 냄새라던가.

그렇게 몇 번 웃는 연습을 하다가, 괜찮다 싶어지자 마리네뜨는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우리 딸~”



카운터에 앉아서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어머니에게 마리네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응!! 엄마, 나 일단 빨래 좀 해도 될까? 옷이 좀 젖어서.”

“그래. 아, 마리네뜨. 미안한데 올라가는 김에 다락방에 가서 둘둘 말린 천 있지, 그것도 좀 같이 꺼내다 줄래?”

“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맨 처음 보인 물건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책가방이었다. 요즘 진짜 정신이 없긴 했나 보다.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은 들고 가고 가져가야 하는 책가방은 놓고 오다니. 그 전날 비가 와서 쫄딱 젖어야 했던지라 오늘도 혹시 그럴까봐 챙겼던 건데 결국 비는 오지 않았다. 한숨을 쉬었다.


난 왜 맨날 이 모양이지.



“천이 어디에 있더라…?”



석양이 지고 있는지라 다락방은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애초에 방에 전등이 없는지라, 곧 밤이 되면 손전등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빨리 물건을 찾아서 나가자는 생각에 방 안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마리네뜨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저 빛은…?”



창문 밑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뭐지? 의아한 마음에 빛이 있는 장소로 다가가자, 마리네뜨는 곧 그 빛이 작은 보석함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이하게 생긴 문양들이 잔뜩 그려져 있는 육각형의 상자였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함을 열어보았다. 



“귀걸이네.”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점이 다섯 개 찍혀 있는 귀걸이 한 쌍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대려는 순간,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공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여든 빛 한가운데서 나타난 것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무언가였다. 



“꺄아아아악!!”



뭔지도 모를 붉은색 생명체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은 마리네뜨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비명을 토해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기겁해서 손발을 바둥거리며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마리네뜨에게 ‘그것’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마, 말을 해!! 벌레? 쥐? 아니, 이상하게 생겼는데 아무튼 무, 무기! 파리채!!”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횡설수설하며 마리네뜨는 두 손을 마구 휘둘렀다. 패닉 상태에 빠진 마리네뜨를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괴상하게 생긴 - 최소한 마리네뜨는 그렇게 생각했다 - 작은 생명체는 입을 열었다.



“잠깐만! 내 말 좀 들어줘! 무서워하지 마. 난 네 친구야.”

“친구…?”



침착하고 낭랑한, 또래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정말로 친구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마리네뜨는 동작을 멈췄다. 그제서야 조금 여유가 돌아왔는지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느낌에 눈이 꽤 컸다. 자세히 살펴보니 붉기만 한 게 아니라 점점이 박혀 있는 검은 점들도 눈에 띄었다. 무언가가 연상되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이던 찰나 밑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네뜨, 무슨 일이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얼버무린 뒤 마리네뜨는 방금 뱉어낸 말에 경악해서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왜 그랬지? 그냥 엄마를 불러야 했는데! 저렇게 작아도 위험한 생물일지 어떻게 알아? 막 닿으면 치명적인 병에 걸리는 바이러스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분명 말을 했는데? 말하는 거 보니까 괜찮아 보이긴 했는데….


목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힐끔 돌아보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말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아니야. 근데 너는….”

“아, 내 소개를 안 했구나.”



마리네뜨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녀’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는 티키라고 해. 너는 이름이 뭐니?”

“아, 안녕? 나는 마리네뜨야. 마리네뜨 뒤팽 쳉.”

“마리네뜨라니, 예쁜 이름이구나.”

“고마워…, 는 넌 대체 누구야?”

“나는 티키(Tikky).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를 수호하는 요정이지.”

“요정…?”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상황들이 바로 눈앞에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마리네뜨는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아얏! 비명과 함께 얼얼한 뺨을 한 손으로 감싸쥐고 마리네뜨는 얼떨떨한 눈동자로 다시 한 번 티키를 돌아보았다. 사라지지 않는 티키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다시금 눈을 깜빡거렸다.


꿈이 아니네?



“마리네뜨. 내가 하는 말들이 믿기지 않겠지만, 부탁이 있어.”

“부탁?”

“세상에 곧 위기가 찾아올 거야. 레이디버그로 변신해서 세상을 지켜줬으면 해.”

“레이디버그? 그게 뭔데?”



제법 진정이 되었는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질문하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생긋 웃으며 공중을 한 바퀴 돌았다.



“네가 열었던 보석함 속에 들어있는 귀걸이! 그게 바로 레이디버그로 변신할 수 있는 기적의 돌, 미라큘러스야.”

“미라큘러스?”

“이걸 사용하면 히어로로 변신할 수 있어. 한 번 해볼래?”



티키는 재빨리 잡동사니들 사이에 들어 있던 보석함을 꺼내 마리네뜨 앞에 밀어놓았다. 붉게 반짝거리는 귀걸이를 머뭇거리며 집어든 마리네뜨가 천천히 그것들을 귀에 끼웠다. 여전히 망설이는 듯한 마리네뜨와는 달리 티키는 발랄한 목소리로 주문을 알려주었다.



“변신! 이라고 외치면 돼.”

“벼, 변신? 으아앗!”



귀걸이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마리네뜨의 온 몸을 덮었다. 빛이 사라지고 나자 바뀌어 있는 제 모습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전체적으로는 붉은 바탕에 검은색 점들이 알록달록하게 찍혀 있는 타이즈 차림에, 머리에는 바닥까지 끌릴 법한 긴 붉은색 끈들이 양갈래로 묶여 있었다. 눈가에 느껴지는 무언가의 감촉에 얼굴을 더듬어보니 가면이 만져졌다. 가면에 손을 대고 잡아당기자마자 다시 번쩍 빛이 일더니 마리네뜨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시 나타난 티키가 주의를 주었다.


“안 돼, 마리네뜨! 가면을 벗으면 변신이 풀리고 말아.”

“변신이 풀리면 안 좋은 거야?”

“당연하지. 누구에게도 정체를 들켜서는 안 돼. 미라큘러스의 존재가 알려지면 분명 많은 악당들이 이걸 노리고 널 습격할 테니까.”

“이게 그렇게 대단해? 이런 쫄쫄이 하나 입혀주는 귀걸이가 대체 뭐가 좋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단순히 옷만 바꿔입은 게 아니야. 다시 변신해서, 허리에 차고 있는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봐.”

“물건?”

“그래, 아무거나 생각나는 걸 상상해서.”



티키의 말대로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변신을 외쳤다. 다시금 레이디버그의 모습으로 변한 뒤 무엇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차, 그녀는 다락방 구석에 굴러다니던 요요를 발견했다. 가방에 손을 넣자마자 손 안에 꽉 차게 들어오는 동그란 무언가를 느끼고 레이디버그는 손을 뺐다.


천천히 손을 펴자, 검은 점들이 박힌 붉은색 요요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기도 잠시 레이디버그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꺼내래서 꺼냈는데,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거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일단 포기하고 다시 변신을 풀자 티키가 질문을 던졌다.



“방금 꺼낸 물건은 뭐야?”

“요요를 모르니? 이건 이렇게 줄을 달아서 늘렸다, 줄였다 하는 물건이야.”



구석에 있던 요요를 가져와 시범을 보이니 티키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은 선택이야. 싸울 때 상대를 붙잡을 수 있고, 도시를 돌아다니기에도 좋을 거 같아.”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결국 항복했다는 듯이 마리네뜨는 한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



“저기, 일단 설명을 좀 해줄래…? 대체 이게 뭐야?”

“아, 내가 설명을 안 했구나. 마리네뜨. 변신한 뒤에 네가 차고 있는 가방은 마법 상자야. 거기에 손을 넣으면 네가 원하는 무언가를 그 안에서 꺼낼 수 있어.”

“진짜?!”

“응, 대신 한 번 물건을 꺼내면 그 물건을 다시 집어넣거나 부숴질 때까지 다른 물건을 꺼낼 수 없으니까, 그것만 주의해주면 돼.”



상냥하게 설명해주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다시금 질문했다.



“근데 아까 말한, 세상을 지켜달라는 게 무슨 말이야?”





“무리무리무리무리!”



손과 고개를 붕붕 내저으며 온 몸으로 거절 의사를 표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라큘러스(Miraculous). 신비한 힘을 가진 기적의 돌. 각 돌마다 상징하는 의미가 있으며 돌을 수호하는 요정이 곁에 붙어 있다. 세상에 위기가 닥칠 때, 즉 미라큘러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한 시기에 요정들은 주인을 찾아 깨어나게 된다. 미라큘러스의 주인으로 선택된 이들은 요정들과 미라큘러스의 힘으로 굉장한 능력을 지닌 능력자로 변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리네뜨가 발견한 레이디버그가 상징하는 능력은 ‘행운’. 놀라운 방어력과 더불어 입기만 해도 비약적으로 신체능력이 상승하는 수트, 온갖 필요한 물건들을 꺼낼 수 있는 마법 가방 등이 ‘레이디버그’가 가진 능력의 일부였다.


여기까지가 티키의 설명이었고,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네뜨는 그런 역할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발견한 건 그저 우연일 뿐이야. 난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평범한 소녀라구. 나 같은 애가 대체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겠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팔로 X자를 그리면서 중얼거리는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자조하듯이 흐리게 번졌다.



“난 솔직히 별로 잘 하는 것도 없고, 늘 실수투성이에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아. 이런 내가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악당이랑 싸우겠어? 애초에 네가 상징하는 능력이 행운이라며? 난 운이랑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구.”

“마리네뜨, 그렇지 않아. 넌 선택받은 아이야.”

“그러게. 요정을 만나는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 평생의 운을 너와의 만남에 다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야.”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씁쓸한 체념이 감돌았다.



“나를 선택했다고 해준 건 기쁘지만….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걸.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도….”

“너라면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내 눈은 정확하다구.”



어떻게든 마리네뜨를 달래려는 티키의 노력에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이는 듯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역시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나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찾는 거 도와줄게. 물론 대신할 사람을 찾은 후에는 너에 대한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고. 그걸로는 안 될까?”

“마리네뜨….”



간절하게 쳐다보는 티키의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커다란 눈이 안 된다고, 다시 생각해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애절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제 성격을 살짝 원망하면서 마리네뜨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일단 생각할 시간을 줄래? 당장 결정할 만한 문제는 아닌 거 같아.”




///



“하아….”



길고 긴 하루가 끝나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마리네뜨의 발걸음은 평상시보다 느리고 무거웠다. 터벅터벅 시내의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얼굴에는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마리네뜨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은 평범한 소녀였을 뿐인데, 지금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자리를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니. 하룻밤 사이에 변한 자신의 처지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영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상황이 정말 현실에서 벌어지다니. 사실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을 반겨주는 티키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꿈으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건지가 궁금하다. 옛날부터 정말 운이라곤 없지 않았던가. 밖에 나가면 열에 아홉은 꼭 넘어지거나 문제가 생긴다. 사소하게 음료수를 엎지르는 것에서부터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으르렁거리는 개한테 쫓겨다니게 되거나 그도 아니면 시비가 걸리거나, 아무튼 무척 다양했다.


허리 옆에서 흔들리는 가방을 힐끔 내려보았다. 왼쪽 어깨에 달린 끈을 따라 오른쪽에 자리한 작은 하얀색 가방은 학교에 따라오겠다는 티키를 위해 일부러 가져온 것이다.


‘계속 같이 다녀야 필요할 때 변신할 수 있잖아.’


라고 말하는 티키의 말에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방 안을 뒤져서 티키가 들어갈 만한 작은 가방을 찾아냈다.


사실 마리네뜨는 티키를 꽤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생물인가 했지만, 티키는 정말로 상냥했고 목소리만 들으면 그냥 사람이랑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똑똑했다. 깨어난 게 최근은 아닌지 티키는 지금 세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스마트폰을 보고 신기해하는 티키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꺄르르 웃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꼭 친구 하나가 더 생긴 기분이었다.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것만 아니라면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하지만 너무 부담스럽다고!


그냥 확 수락할까도 싶었지만, 이런 큰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결정할 만큼 마리네뜨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TV에서 보면 영웅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특출난 면이 하나쯤은 있지 않던가. 대체 자신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 선택되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하염없이 걷던 중 마리네뜨의 귓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뭐지?”



고개를 들었지만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싶은 순간 다시금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결을 따라 간간히 들렸다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계속 고막을 간지럽혔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마리네뜨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려던 순간 마리네뜨는 헉 소리를 낼 뻔했다. 다행히도 목소리를 내기 전에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벽으로 붙었다. 그리고 살짝 얼굴을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강도다.


얼굴에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3인조가 은행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총을 들고 있는 건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인질로 잡은 듯한 어린 소년의 목에 팔을 두르고 소년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남은 한 명은 커다란 가방을 잔뜩 들고 있었는데 저 안에는 아마 은행에서 훔쳐낸 돈다발이 들어 있겠지.


볼일은 거의 다 끝났는지 강도들은 들고 있던 가방을 차에 싣고 있는 중이었다. 시민들이 그런 그들의 주변에 넓게 퍼져 있었지만,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어서인지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경찰은 왜 아직도 안 오지?”



혹시 몰라 귀를 기울여봤지만 사이렌 소리는커녕 클락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강도들은 짐을 다 싣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서로 눈짓하더니, 계속 인질로 삼으려는지 아이를 끌고 움직이는 강도들의 모습에 시민들 사이에서 분노하는 소리들이 쏟아졌다. 다시 아이에게 총을 겨누며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는 강도의 한 마디에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죽일 듯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이 엄마인 듯한 여자의 표정은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새하얘졌고, 아이는 공포에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떠나보내면 아이는 분명히 죽을 텐데. 어쩌면 좋지? 어떡해?



“변신하면, 저 애를 구할 수 있는 힘이 생길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마리네뜨는 헉 하고 놀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이야. 나는 히어로같은 거….



“잠깐. 그 손 놔.”



어?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마리네뜨의 귀를 잡아끌었다. 침착하지만 명확하게 꽂히는 목소리에 강도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놀란 얼굴을 한 시민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무덤덤한 시선을 한 금발의 소년.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가 애타게 찾고 있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무슨 수작이냐는 듯이 총을 겨누는 강도에게 소년은 태연한 얼굴로 폭탄선언을 던졌다.



“어린애는 냅두고 날 인질로 삼지 그래.”

“뭐?”



얼빠진 듯한 강도의 목소리와 함께 시민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앞에 나서서 인질을 자기로 바꾸라고 하는 소년의 행동은 그야말로 간이 크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미친 짓이었다. 아이를 구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따라가면 분명 목숨이 위험하게 될 텐데. 근처에 있던 중년 남자가 말리려는 듯이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소년은 간단히 어깨를 털어버리고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섰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리네뜨가 손을 들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두근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하는 심장에 마리네뜨의 손이 셔츠를 사정없이 비틀었다. 불안감이 심장을 점점 옥죄어가고 있었다.


한편 강도들은 당당하게 자신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하는 소년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는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비웃음에 시민들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소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강도 중 한 명이 소년에게 손가락질을 날리며 조소했다.



“하, 네가 뭐라고….”

“인질이면 더 비싼 쪽이 낫지 않나? 그 꼬맹이보다는 값어치가 높을 거라 장담하는데.”

“건방진…!!”



목숨이 걸린 결정임에도 무심한 얼굴로 셈을 던지는 소년의 태연한 모습이 거슬렸는지 강도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붙잡고 있던 강도가 다른 총을 들고 있는 강도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 야, 저놈 잡아와!”

“아이를 먼저 놔.”

“…그 건방진 입이 언제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봐주지. 아이는 버리고 저 놈을 데려간다.”



다른 한 명이 소년에게 총을 겨눈 순간, 강도는 데리고 있던 아이를 풀어주었다. 울음을 터트리며 엄마에게로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을 흘깃 돌아보고, 소년은 느릿하게 양 손을 위로 올렸다.


천천히 강도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소년을 본 순간 마리네뜨는 다급히 소리쳤다.



“티키!”

“응?”



설명할 시간조차 없었다. 가방 속에서 훅 솟아나온 티키를 보자마자 마리네뜨는 주문을 읊조렸다.



“변신, 레이디버그!”



강도 중 한 명이 소년에게 다가가 팔을 움켜쥐려는 찰나, 하늘로 날아오른 붉은 인영이 무언가를 세게 던졌다. 머리를 얻어맞고 순식간에 그 자리에 쓰러지는 강도의 모습에 시민들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남아있던 다른 강도 한 명의 얼굴에는 경악이 깃들었다.


바닥에 내려서서 요요를 흔들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시민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칫, 혀를 차며 총을 든 남자가 그녀에게 총신을 겨누려던 차에 레이디버그는 요요를 던져 남자의 손을 정통으로 맞췄다.



“으악!”



강렬한 아픔에 남자가 총을 떨어뜨리자마자 바로 앞에 서 있던 소년이 빠르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억,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꺾으면서 등을 밀어 바닥에 깔아뭉개고, 바둥거리는 남자의 목 뒤를 쳐서 기절시킨 뒤 소년은 천천히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소년의 모습에 레이디버그와 시민들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히익!”



운전석에서 그걸 지켜보던 나머지 강도 한 명이 재빨리 차를 출발시켰다.  앞으로 달려가는 차를 보며 레이디버그는 손에 들고 있던 요요를 다시 휙휙 돌렸다.



“놓칠 줄 알고?!”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길게 늘어난 요요가 차의 트렁크 위에 붙어 있던 장식을 돌돌 휘감았다. 감긴 걸 확인하고 세게 잡아당기자마자 차는 속수무책으로 끌려왔고. 더욱 패닉 상태가 된 강도가 열심히 엑셀을 밟았지만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질질 끌려오는 자동차를 보며 시민들은 물론이고 레이디버그 본인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그녀는 별로 힘들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힘이 세진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게다가 몸도 무척 가벼웠다. 바닥에 발을 딛을 때마다 몸에 풍선을 매단 것처럼 사뿐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몸무게가 거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자동차가 다시 원래 있던 자리까지 끌려오자마자 시민들이 달려들어서 차에 타고 있던 강도를 끌어내렸다. 기절한 두 강도를 묶고 전화기를 꺼내 경찰에 신고하는 시민들을 뒤로 한 채,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소년의 모습을 발견한 레이디버그가 그를 불렀다.



“저기요!”

“…?”



뒤돌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다행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불렀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이 말없이 서 있는 소년에게 레이디버그는 다급히 가장 먼저 떠오른 것부터 질문했다.



“이름, 이름이 뭐예요?!”

“음?”

“아, 저기, 그게…. 그, 그냥 궁금해서요! 에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이름 정도는 알아도 좋지 않아요?”



지긋이 자신을 살피는 듯한 눈동자에 절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생각해보면 굳이 이름을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수상하잖아!



“안, 안 될까나….”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검지손가락 끝을 맞부딪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면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물어본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그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소년의 시선에 레이디버그의 뇌리에 온갖 부정적인 가설이 떠올랐다. 아, 난 역시 운이 없나봐아아아아-. 그렇게 속으로 절규하고 있던 레이디버그에게 소년은 대답했다.



“…펠릭스.”

“네?”

“펠릭스 아그레스트.”

“어, 그게 이름…?”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 아니 펠릭스를 보며 레이디버그는 멍한 정신을 추스르고 황급히 방금 들었던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좋구나.



“네, 네. 고마워요!”

“그쪽은?”

“어, 저요?”



끄덕.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닌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펠릭스에게 레이디버그는 발랄하게 대답했다.



“마…, 레이디버그! 레이디버그예요.”



하마터면 진짜 이름을 뱉을 뻔했다. 티키가 비밀로 하랬는데! 그래도 실수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레이디버그와 달리, 그녀를 쳐다보는 펠릭스의 눈빛에는 묘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호의인지 적의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애매하기도 한. 다행인지 불운인지 그런 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는 다시 말을 걸었다.



“근데 어쩌다 이 근처를 지나고 있었어요?”

“학교가 이 근처라서.”

“어라, 혹시 솅 에트와르(Saint étoile) 학교?”

“……어떻게.”



그야 당신이랑 같은 학교니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는지라 떨떠름하게 미소지으며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아까 보니까 되게 잘 싸우던데, 뭐 운동 같은 거 하나 봐요?”

“사정상 호신술을 배웠어서.”

“그, 그렇구나!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렇게 총 들고 있는 사람한테 막 다가가는 거 아니에요. 위험하잖아요.”

“…주의하죠.”



그 말과 함께 처음으로 무표정을 거두고 피식 웃는 그의 모습에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왠지 더웠다. 주변의 공기가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귀에 메아리치듯 크게 울리는데, 소리가 너무 커서 앞에 있는 사람에게 들릴까 겁날 정도였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펠릭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가 어려운 탓에 그녀는 살짝 시선을 옆으로 비꼈다. 똑바로 쳐다보면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걔는 왜 그렇게 찾아? 정말 반한 거야? 이런 참견은 좀 그런가 싶긴 하지만, 좋아할 상대는 신중하게 골라.’


이 순간 갑자기 왜 이 말이 떠오르는 걸까. 일단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 싶어서 레이디버그는 입을 열었다.



“아, 저기….”



뭐라고 하지? 고민하던 찰나 삐용삐용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레이디버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자신이 레이디버그가 아닌 마리네뜨의 입장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허둥지둥 작별인사를 건넸다.



“아, 경찰이 왔으니 저는 이만!”



펠릭스가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몸을 날려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펠릭스의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레이디버그.”






“다행이다, 안 들킨 거 같지?”



헤실거리는 미소를 가면 뒤로 감추고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힘차게 파리의 상공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가볍게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파리의 건물들 위를 날아다니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발견한 몇몇 사람들이 경악의 탄성을 내뱉었다. 아마 내일이면 레이디버그에 대한 기사들과 목격담으로 떠들썩해지겠지.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 것에 조금도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찾던 사람을 드디어 찾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같은 학교라니. 계속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펠릭스라….”



펠릭스(Felix). 행운이라는 뜻의 고대어에서 유래된 이름.



“좋은 이름이네.”



즐거이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 2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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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일단 이 소설에 대해 설명을 해야겠죠. 이번 8월 6일에 열릴 레이디버그 온리전에 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2D 레이디버그 소설입니다.

트레일러를 전체적으로 해석해 아예 본편을 통째로 만들어낼 예정이죠. 제목은 [Un Autre].프랑스어로 '또 다른' 이라는 뜻입니다.


일단 주의사항을 말씀드려야겠죠.


간단하게 설정을 설명하자면 가장 큰 특징은 기적이라는 개념 거의 없습니다. 신비한 치유의 힘 없고요 안면인식장애도 없습니다. 그래서 건물 부서지면 복구 안 되구요 사람도 죽고 다칩니다. 물론 히어로 애들도 예외 없습니다. 굉장히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고, 그래서 등장 인물들이 굉장히 똑똑하고 눈치도 빠릅니다. 다크한 성인용 정치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얼마나 잘 써낼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만족용이니 너무 크게 기대하진 마세요OTL


참고로 책의 수위는 15금입니다. 수위 때문이 아니라 내용이 좀 잔인해서요. 전개에 자비가 별로 없습니다 하하하하하


일단 책의 챕터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로 나누어서 각 계절당 에피소드가 6개씩 들어갑니다. 그래서 본편만 에피소드 24개. 일단 봄 에피소드는 모두 공개할 예정이에요 6편까지. 2편은 6월 말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각 챕터마다 주제가 있고 전체적인 주제도 여럿 있습니다만, 대체로 두 사람의 애정라인과 성장, 메인 스토리적으로는 치열한 두뇌싸움이 주가 될 거 같습니다. 최대한 2D 트레일러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하면서 제 취향을 섞었지만 보시는 분들 눈엔 어떨지 모르겠네요.


자캐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트레일러에 나오는 인물들만으로는 스토리를 짜내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ㅅ; 전체적으로 인물 수는 많지 않습니다만 악당은 몇 명 더 추가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라인은 메인 캐릭터들 위주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묘사는 차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페이지는 600-800페이지 사이로 아마 두 권으로 나눌 거 같습니다. 2권 세트로 3.5-5만원 사이를 생각 중입니다. 페이지에 따라 가격조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행사일 2주 전쯤에 딱 일주일만 전권 선입금 받고 끝낼 생각입니다. 인쇄비가 너무 비싸서 현장판매분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ㅅ; 그러니 책을 사고 싶으시다면 이 시기에 제 계정을 찾아와주세요. 통판도 이 때 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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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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