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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임무 완수에서 냈던 펠릭마리 개인지 Un Autre의 후일담 일부입니다.

이쪽으로 들어가주세요 :> http://posty.pe/v6g3za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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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캣마리 배포전에서 냈던 회지의 일부입니다. (재고 2권 있으니 필요하시다면 문의로)

※ 동화 AU / 괴물 블랙캣과 소녀 마리네뜨




Once Upon a Time




옛날옛적에,

나라 하나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기후, 한쪽에는 넓은 바다가 푸르게 빛나며 제 존재감을 과시했고, 반대쪽에는 험준한 산자락이 마치 방어벽처럼 나라를 크게 둘러싸고 있어 나쁜 무리들이 함부로 이 땅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축복받았다고 불릴 만큼 비옥한 토양에서는 좋은 곡식과 과일, 채소들이 생산되었고, 덕분에 국민들은 아주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답니다. 아, 사소하고 작은 다툼들이 간혹 일어나고는 했었지만요.


화려한 왕궁이 있는 이 나라의 수도는 변두리에 사는 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왕궁에 대한 이야기는 간혹 외곽 지역으로 흘러 들어오는 여행자들에게는 최고의 소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묘사에 홀린 이들은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꾸고는 했지요.


그들은 마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신비한 힘을 가진 이들이 있고 그들이 얼마나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과 척을 지는 것은 그리 현명한 결정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물론 이야기를 들은 대부분이 코웃음을 치곤 했지만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이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잘 가, 마리네뜨!”

“응, 알리야 너도! 내일 보자!”


검은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소녀가 자신에게로 멀어지는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언제나처럼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원래라면 같이 돌아가는 것이 맞았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알리야와는 달리 마리네뜨는 다른 볼일이 있었다. 이미 저 멀리로 가버린 알리야의 뒷모습을 마냥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앞에 거대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푸른 나뭇잎들이 매달리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숲은 수북한 잎사귀들이 만들어낸 그늘 때문인지 햇빛이 밝게 떠 있는 낮임에도 무척 을씨년스러웠다. 몇 번 와봤었지만 괜스레 느껴지는 위압감에 마리네뜨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 음침해보이지….”


자신이 지금 저 숲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늘진 숲을 쳐다보고 있던 마리네뜨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두 팔을 꼭 끌어안은 소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깜빡거리며 그 자리에 망연하게 서 있다가, 곧 씩씩하게 외쳤다.


“괜찮아! 위험한 동물같은 건 없으니까!”


숲에 자주 들락거리는 사냥꾼 아저씨한테서 들은 이야기니 아마 확실하겠지.


“가, 가자!”


괜찮을 거야.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마리네뜨는 씩씩하게 숲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숲은 서늘했다. 햇빛이 쨍쨍한 낮이었음에도 무성한 나뭇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온 햇빛들이 쭉 뻗어 내려와 바닥에 궤적을 그려냈다.


“우와….”


어둑한 숲에 실금처럼 비스듬히 그어지는 빛의 선들이 무척 아름다웠다. 절로 탄성이 나오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빛들이 유독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주변이 어둡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숲에 감도는 기이한 분위기 때문일까.


주변은 무척 조용했다. 그 흔하다는 다람쥐 한 마리 보지 못했다. 보통 숲이 이렇게까지 조용한가? 싶다가도 마리네뜨는 기척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늑대라도 나타나면 큰일나니까.


“으악!”


주변을 둘러보며 지나가느라 하마터면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도 손바닥으로 제때 바닥을 짚어서 큰 상처는 없었다. 그늘져 있음에도 생각보다 바닥이 축축하지 않은 것에 마리네뜨는 조금 놀랐다.


더러워진 손바닥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나무들뿐이었다. 숲의 어둠에 검게 물든 나무들이 제 앞으로 한 발짝 다가온 것처럼 보여 소녀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다.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해보니 주변이 왠지 생각보다 더 어두운 것 같다. 그늘졌다지만 낮인데 보통 이렇게까지 어둡나? 싸한 기운에 마리네뜨는 살짝 몸을 떨었다. 으으, 정말.


“왜 그 꽃은 여기에만 피는 걸까나….”


골든 호르테. 마리네뜨가 굳이 이 숲으로 들어온 이유였다. 붓꽃과 닮은 모양을 하고 있는 금빛의 꽃. 나쁜 일을 내쫓고 행운을 불러오며, 사랑을 이루어준다고 알려져 있는 무척 희귀한 꽃. 골든 호르테에 얽힌 젊은 청년과 처녀의 사랑 이야기는 이 나라에서는 누구든 어릴 적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설화이기도 했다. 물론 실존하는 꽃이라고는 하지만 무척 희귀해서 발견한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른다고도 했다.


며칠 전 부모님과 친하게 지내시던 사냥꾼 아저씨가 모자에 그 꽃을 꽂고 오지 않았더라면, 마리네뜨는 지금까지도 그 꽃은 그저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물건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깜짝 놀라 이것저것 물어서 겨우 대답을 얻어냈다. 숲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꽃밭에서 꺾어왔다고 했다. 꽃을 주실 수 없냐고도 물어봤지만 그건 단칼에 거절당했다.


‘이건 안 돼. 마누라한테 줄 거거든.’


난감한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는 아저씨에게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어 소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리네뜨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난감해하던 사냥꾼은 결국 꽃이 어디에 피어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쳐주었고,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조금만 더 가면 있겠지.


고요하고 어두웠다. 발밑에서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어두워지고 추워지는 것 같다. 어둠 속에서 초록빛의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소녀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기분 탓일까?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


소녀의 옆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히이익!!”


비명을 내지르며 소녀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소녀의 몸을 억누르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검은색의 오오라로 이루어진 그것은 제대로 된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어려웠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으르르르- 낮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마리네뜨는 겁에 질렸다.


이게 뭐야?!


두려움에 가득 차서 다시금 버둥거리려고 했지만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금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소녀는 뻣뻣하게 굳었다. 잡아먹히는 건가? 이렇게? 겁먹은 눈동자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을 바라보던 마리네뜨는 제 얼굴로 떨어지는 무언가를 알아채고 멈칫했다. 자신을 짓누른 차갑고 서늘한 촉감과는 다르게,


“…우는 거야?”


따뜻한 무언가가 계속 제 얼굴 위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어디서 떨어지는 거지?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마리네뜨는 곧 그 검은 오오라 사이에서 초록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깜빡거리는 초록빛 눈동자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똑바로 그 눈동자를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울음소리는 분명 짐승의 것인데, 방금 전처럼 무섭지만은 않았다. 어떤 감정으로 울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물을 떨구는 저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저어….”


입을 열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마리네뜨를 바라보던 초록색의 눈동자가 당황한 듯 깜빡거리더니 눈물을 그쳤다. 곧바로 제 몸을 누르던 힘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마리네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뒤를 돌아 사라지려던 녀석이 그 자리에 멈춰서는 모습을 보고 마리네뜨는 속으로 놀랐다. 내 말을 알아듣나? 물기가 가득한 얼굴을 소매로 슥슥 문지르며 소녀는 다시금 말을 걸었다.


“해, 해치지 않을 거야?”


‘그것’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천천히 넘실거렸다. 불길할 정도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어 마치 주변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괜히 말을 걸었나 싶다가도 마리네뜨는 다시금 용기를 내었다.


“소, 손.”


한쪽 무릎을 바닥에 굽히고 살며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경계하듯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소녀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워낙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필사적으로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면서도 불안한지 소녀는 눈가를 살짝 떨었다.


동물한테는 눈을 맞추는 거랬나? 아니었나? 이러다가 물리면 어떡하지? 그래서 숲 속에 버려져 있다가 지나가던 사냥꾼 아저씨한테 구조되고…. 아니, 근데 아저씨도 여기 자주 안 온다고 했잖아! 나 죽는 건가?! 그런 거야?!


저벅, 발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초록빛 눈동자에 소녀는 몸이 싸하게 굳었다. 굳어버린 마리네뜨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온 눈동자가 눈을 깜빡거렸다.


곧이어 손 위로 단단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어?


깜짝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는 마리네뜨를 초록색의 눈동자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녀는 방금 제가 내민 손바닥 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손 위에 검은색의 손 같은 것이 올려져 있었다. 아니, 발인가?


그러고 보면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인다니, 왠지 고양이 같기도. 소녀가 중얼거렸다.


“…고양이 같네.”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작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만 제외하면 ‘그것’은 그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움직이면 소녀가 겁을 먹을 거라는 걸 아는 것처럼.


햇빛이 위에서부터 뻗어와 잘게 부스러졌다. 빛이 닿아서 그런가? 방금 전보다는 형태가 제대로 보였다. 가루처럼 공중에서 나풀거리는 검은색의 오오라 너머로 새까만 몸체가 드러났다. 그래, 온통 새까맸다. 얼굴 위에 쫑긋 솟아있는 귀를 보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검은 고양이.

소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블랙캣, 이려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마리네뜨, 그 꽃은 뭐야?”


마리네뜨의 모자에 꽂혀 있는 금빛의 꽃을 보고 알리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알리야의 반응에 만족스러웠는지 마리네뜨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 


“예쁘지?”

“되게 예쁘네. 화사한 느낌이라 네 모자랑 잘 어울려.”


그 말대로였다. 붉은색 바탕에 금빛 자수를 놓은 모자와 골든 호르테는 무척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솜씨 좋게 만들어진 모자는 마리네뜨가 직접 만든 수제품이었다. 시골에서는 꽤나 귀할 법한 붉은 원단은 마리네뜨의 부모님이 도시에 출장을 갔을 때 선물로 사온 것이었다. 그 때문에 마리네뜨는 이 모자를 꽤 아꼈다.


알리야는 의아했다. 마리네뜨가 학교에 이 모자를 쓰고 오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모자가 꽃이랑 잘 어울리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꽃을 장식하자고 모자를 꺼내온 게 아닌가 싶었다. 노랗다기보단 환한 금빛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꽃은 확실히 무척 화려하고 예뻤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근데 어디서 난 거야? 그 꽃은. 처음 보는데.”

“…음, 우연히?”


뭔가 얼버무리려는 듯이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알리야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꽃,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 알리야. 선생님 들어오셨어!”

“앗, 이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담임 선생님의 모습에 알리야는 재빨리 몸을 돌리고 교과서를 펴냈다. 별로 관심은 없었는지 금세 선생님에게로 열중하는 알리야를 힐끗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멍하게 칠판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머릿속으로 어제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숲 한복판에 한가득 피어 있던 금빛 꽃밭과, 검은 고양이를.


‘우와! 이게 다 골든 호르테야?’


마리네뜨는 제 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나는 꽃밭이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뻥 뚫린 하늘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밝은 햇빛이 꽃들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반짝거렸다.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금빛 꽃밭이 파르르 물결쳤다. 원래도 무척 아름답게 생긴 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한데 모여서 햇빛까지 받고 있으니 마치 황금더미를 눈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꽤나 넓은 공터라서 그런지 나무들이 그렇게 빽빽하지 않아 햇빛을 가리는 나뭇잎들이 거의 없었다. 어둡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숲에 이런 공간이 있었던가. 몇 번 와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나 깊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전설로나 알려져 있던 꽃들이 이렇게나 많이 피어있는 광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쉽사리 믿겨지지가 않았다.


‘진짜 예쁘다….’


꽃밭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은 마리네뜨의 눈이 반짝거렸다. 바로 앞에 있는 꽃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유연하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꽃의 줄기를 붙잡고 살짝 뒤로 꺾었다. 똑, 소리와 함께 하얀 손가락이 꽃 한 송이를 꺾어들었다. 활짝 웃으며 기뻐하던 마리네뜨가 살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빛에 서 있는 마리네뜨와는 달리 어두운 숲의 그늘 아래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제 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검은 물체를 돌아보며 소녀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데려와줘서 고마워.’


으르르, 짧은 울음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마치 알겠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에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울음소리만 들으면 분명 짐승의 그것인데 이상하게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왜일까?


이 이상 다가오지 않겠다는 듯 제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블랙캣’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리네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블랙캣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땅에 붙박힌 고목나무처럼 꼼짝도 않고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초록빛 눈동자를 보며 마리네뜨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제 손에 있던 꽃을 블랙캣의 귓가에 살짝 꽂아주었다. 새까만 어둠 사이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은은하게 빛나는 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마리네뜨는 방금 전보다도 훨씬 검은 기운이 옅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쫑긋 솟은 검은색의 귀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잠깐 망설이던 마리네뜨가 천천히 손을 뻗으려다가, 살짝 뒤로 거둬들였다. 넘실거리는 검은색의 기운을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블랙캣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두려워하는 제 마음을 아는지, 석상처럼 꼼짝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만 같았다. 마리네뜨는 결심했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블랙캣에게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하지 않을까 싶었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만져본 적이 없는 느낌이었다. 분명 부드럽기는 했지만 그것은 털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털이랄 것이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매끄러운 옷감을 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신기한 느낌에 몇 번 더 쓰다듬었다. 스르륵 눈을 감고 기분 좋다는 듯이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물었다.


에, 그러니까, 뭐라고 물었더라? 여, 여…,


“마리네뜨!”

“헉!!”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마리네뜨는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칠판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은 물론이고 온통 제게로 쏠려 있는 반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고 마리네뜨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네 차례란다. 다음 페이지를 읽어보렴.”

‘마리네뜨, 28페이지야.’


작게 속삭여주는 알리야에게 감사하며 마리네뜨는 재빨리 28페이지를 펴들었다.


“옛날 옛날에 무척 잘생긴 청년이 있었답니다….”



청년은 이 나라에서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어요. 청년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온 나라에 파다했고, 청년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답니다. 그 중에서는 청년에게 반해서 그 자리에서 청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아가씨는 저 하늘의 별보다 많은 재물을 약속했고, 어떤 여성은 나라에서도 제일 가는 귀족 집안의 후계자로 청년에게 고귀한 지위와 명예를 약속했습니다. 또 어떤 아가씨는 청년에 못지 않게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이 사랑하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옆집에서 자란 소꿉친구 아가씨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고 이미 결혼하기로 어렸을 적부터 약속했던 사이였어요.


예쁘게 사랑하던 두 사람에게도 시련은 찾아왔습니다. 동쪽 숲의 경계선에 살고 있던 마법사가 청년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마법사는 온갖 방법들을 동원해 청년에게 구애했지만, 청년은 이미 마음에 정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마법사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몇 번을 찾아와도 끊임없이 거절하는 청년에게 마법사는 체념했다는 듯이 웃으며 들고 있던 음료수를 내밀었습니다. 이별의 선물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청년은 받지 않았습니다. 마법사가 주는 것은 그 무엇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선물을 거절하는 청년을 보며 마법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악수를 청했습니다. 얼떨결에 내밀어진 손을 맞잡은 청년은 손가락에서 따끔거리는 감촉을 느꼈습니다.


그와 동시에 청년은 제 연인에 관한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법사와 같이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처녀는 사방을 헤맸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연인을 찾아 돌아다니던 처녀는 어느 한 호숫가를 발견했어요. 잠깐 쉬어가야지 하면서 호숫가에 앉아 있던 처녀의 시선 끝에 예쁜 꽃이 보였습니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꽃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처녀는 손을 뻗어 꽃을 꺾었는데, 처녀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저기 호수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 보이지? 저 사람이야.’

‘정말로 딱하게 됐네. 왜 하필이면 동쪽 숲의 마법사한테 걸려서.’


동쪽 숲의 마법사.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녀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처녀의 등 뒤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는 참새 두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법사가 그 남자를 무척 아낀다며? 밖에도 내보내지 않을 정도라던데.’

‘맞아. 정확히는 마법이 풀릴 것을 걱정해서겠지.’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는 마법은 그 효과가 길지 않아. 당사자를 보는 순간 바로 떠오를 테니 격리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수다스럽게 재잘거리는 소리에 처녀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새들이 수다를 마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까지요. 그 대화 속에서 처녀는 마법사가 자신의 연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마법사는 청년을 자신의 저택 옆에 세워진 동쪽 탑에 가두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산책 정도는 가능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새들의 대화 중에 처녀가 가지고 있는 꽃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새들은 그 꽃이 행운을 불러올 것이니 만약 처녀가 그 꽃을 가지고 간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처녀는 청년을 구하기 위해 동쪽 숲으로 향했습니다.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금색 꽃을 손에 꼭 쥐고서요.


며칠간 꾸준히 걸어 처녀는 마침내 동쪽 숲에 도착했습니다. 웅장해 보일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이 한데 모여 있는 숲의 모습에 압도되었지만, 처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숲 속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숲은 울창하고 그만큼 어두웠지만, 처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신기할 정도로요. 길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처녀의 손에 들려 있는 꽃이 은은하게 어둠 속에서 빛났습니다. 마치 처녀를 인도해주는 것처럼.


한참을 걷다 보니 마법사의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도 낮이라 그런지 저택 앞으로 산책을 나와 있는 청년을 보고 처녀는 목이 메었습니다. 앞뒤 생각하지도 않고 청년의 앞에 나선 처녀는 질문했습니다.


‘나를 기억해?’


처녀의 모습은 엉망이었습니다. 집을 나서 오랜 시간 여행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했으니까요. 아름답고 매끄럽던 갈색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게 뻗쳐 있었고 깨끗하던 옷은 온통 다 헤져 있었습니다. 청년은 물론이고 처녀의 부모님조차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꾀죄죄했습니다.


반면 청년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직접 마주하면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는 했지만, 과연 이런 지금의 자신을 보고도 청년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러한 생각에 창피해져서 고개를 숙인 처녀를 가만히 쳐다보던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당연히.’


그 말과 함께 처녀를 끌어안았습니다. 놀라는 처녀에게 청년은,


‘내가 너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라고 덧붙였습니다.


처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었는지는 청년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거죠.


재회를 기뻐하던 두 연인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은 아무리 자신이 숲을 빠져나가려고 해도 걷다 보면 늘 저택으로 돌아오게 된다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처녀는 괜찮을 거라며 청년의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앞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나무들이 들썩거리더니 가지들이 연인들의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습니다. 마법에 걸려 있는 나뭇가지들의 움직임을 보며 당황하는 청년과 달리 처녀는 가까이 다가가 꽃으로 나뭇가지를 건드렸습니다.


꽃잎이 닿자마자 뒤로 슬슬 물러나면서 길을 열기 시작하는 나뭇가지들에 두 연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계속해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꽃으로 건드리며 나아가던 연인들이 숲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찰나, 뒤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청년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마법사가 뒤를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연인들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소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희미하게 다가오던 공포심도 점점 커져갔지요.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처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공중을 날아서 바로 뒤에까지 쫓아온 마법사에게 처녀는 들고 있던 꽃을 던졌습니다. 꽃이 닿자마자 마법사의 몸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하며 가루가 되어버린 마법사의 몸과 바스라진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은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두 연인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놀라는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에게 처녀는 자신이 겪었던 무용담들을 전부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저기를 떠도는 음유시인들도 그 자리에서 두 연인이 겪었던 일들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가서 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녀는 말했습니다. ‘마법은 강합니다. 그렇기에 마법을 이기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에요. 저와 제 연인을 구해준 이 아름다운 꽃에 경의를 담아, 이 꽃을 골든 호르테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금색의 행운이라는 의미로.’”


중얼거리듯 말을 꺼내던 마리네뜨는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풀밭 위에 가만히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블랙캣에게 소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고 있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다시금 말을 꺼냈다.


“재미있었어?”


미동도 않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살짝 눈매를 찡그린 것 같기도.


“솔직하네, 너.”


가만히 앉아 있던 블랙캣의 꼬리가 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불평을 말하는 걸까? 애완동물을 키워보지 않아서 그런지 쉽사리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 동물이라고 할 수 있나? 정말로?


블랙캣과 만나고부터 벌써 1주일이 넘게 지났다. 그 후로 마리네뜨는 매일매일 학교가 끝나고 블랙캣을 만나러 오고 있었다. 접선 장소는 처음 만났던 숲과 붙어있지만 마을에서는 꽤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정했다. 집으로 데려갈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마을로 데려가기엔 블랙캣은 너무 눈에 띄었으니까. 블랙캣이 위험하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을 테고.


마리네뜨는 블랙캣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초록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평범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 한층 그 생각이 강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기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느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하기엔 블랙캣은 무서울 정도로 영리했다. 


말수가 적은 말동무를 두는 기분이 이런 걸까? 분명 외양을 보면 동물에 가까웠지만 반응만 보면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믿겠다 싶을 정도로 확실했다. 마치 자신이 하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비록 대답하지는 않지만 움직임과 더불어 미세하게 움직이는 표정을 보고 긍정과 부정의 의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길가를 쏘다니는 동물들이나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란 말이야. 그렇게 재미가 없었어?”


블랙캣이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다는 것 같아 마리네뜨는 피식 웃었다.


“낭만적이지 않아? 사랑하는 연인을 한 눈에 알아보다니 이 얼마나 로맨틱해?”


홱 고개를 돌리는 블랙캣의 반응에 마리네뜨가 볼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하여간 너나 알리야나 소녀의 감성을 너무 모른다니까. 그나저나 너 말이야.”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변했네.”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깜빡거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다시금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죽 웃고 있는 블랙캣을 바라보며 마리네뜨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처음에 봤을 때보다 좀 윤곽이 뚜렷해진 것 같달까…. 처음에는 늑대같은 무서운 짐승인가 싶었단 말야?”


뾰족 솟은 고양이 귀와 달리 몸의 형태는 아무리 봐도 동물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털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매끈하게 뻗은 팔다리라던가, 전체적인 윤곽은 마치.


“사람…?”

“므르르…….”

“꺄악!!”


블랙캣이 갑자기 입을 열어 울음소리를 내는 것에 깜짝 놀란 마리네뜨가 손을 거둬들였다. 마리네뜨의 반응에 블랙캣은 재빨리 입을 닫아버렸지만 눈은 마치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물기에 젖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 날처럼.


처음 꽃밭에서 블랙캣을 쓰다듬을 때 마리네뜨는 물었습니다.


‘여기서 살아?’


으앗! 블랙캣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깜짝 놀랐던 마리네뜨가 반사적으로 손을 거뒀습니다. 괜히 미안해져서 다시금 조심조심 블랙캣의 머리에 손을 올렸습니다.


‘혼자?’


블랙캣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방금 놀란 소녀를 배려하듯이 아주 살짝,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소녀만이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요.


‘하지만 이 숲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끄덕끄덕도 절레절레도 아닌, 그저 소녀를 빤히 쳐다보는 블랙캣의 시선은 마치 알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외롭지 않아?’


이번에도 반응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는 블랙캣과 시선을 마주했습니다. 방금 전보다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소녀의 마음 한 구석이 쿡쿡 쑤셔왔습니다. 방금 전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울음소리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석고상처럼 앉아 있었음에도 소녀의 눈에는 왠지 블랙캣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갑자기 제 손에 머리를 부빗거리는 블랙캣의 행동에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깜빡거렸습니다. 이건 무슨 행동일까요? 애교라도 부리는 걸까요? 마치 가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보여서 얼떨떨해진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습니다.


‘으앗, 알았어. 그럼 나랑 친구하자! 내가 널 만나러 올게. 나랑 같이 놀자. 그러니까 울지 마! 아니, 우는 게 아닌가? 아무튼!’


왜 그 순간 친구하자는 말이 나왔는지는 모릅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정말 친구같은 관계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블랙캣을 마주보던 마리네뜨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질문했다.


“너 설마…, 사람이었어?”


블랙캣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들짝 놀라는 소녀의 얼굴이 살짝 빨갛게 물들었다.


“내가 하는 말 다 알아듣는 거야? 진짜?”


뭘 새삼스럽냐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과는 달리 소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떡해, 아, 진짜.”


뭔가 고민하는 것 같던 소녀가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이 블랙캣을 향해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


멀뚱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뭐랄까, 처음부터 사람인 줄 알았으면….”


좀 더 정중하게 친구가 되자고 했을 텐데. 차마 뒷말을 내뱉기가 창피해져서 마리네뜨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나름 예의있게 대한다고 대한 건데 사람한테 그랬다고 생각하니 다시 없을 무례한 짓이잖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구하자고 하다니! 아, 아니 그렇게 따지면 동물이랑 사람은 인사법 자체가 다르지 않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으악, 얘 입장에선 내가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마리네뜨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을 따라 일어서듯 네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선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말할게.”


나랑 친구가 되어줄래?


“으앗!”


갑자기 펄쩍 일어나 자신을 끌어안는 블랙캣의 행동에 마리네뜨가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검은색의 어깨가 눈 앞에 보였다. 생각보다 그가 키가 크다는 사실에 순간 마리네뜨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평소와 같은지, 조금은 다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몸은 무척 따뜻했고 소중한 것을 감싸안고 있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서,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블랙캣의 등에 닿지 못하는 두 손이 허공을 어색하게 배회했다.


새삼스레 블랙캣에 대해 생각하던 마리네뜨의 시선에 무언가가 언뜻 비쳤다. 소녀가 푸핫,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너 귀엽다.”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검은 꼬리가 마치 지금 블랙캣의 기분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여서, 절로 편안해지는 기분에 마리네뜨는 피식 웃으며 블랙캣의 등을 조심스럽게 껴안고 토닥토닥 두드렸다. 머리 위로 쫑긋거리는 귀가 귀여웠다. 옆에서 얼굴을 자세히 보니 금색에 가까운 머리카락들이 뻗쳐 있었다. 색이 좀 탁하긴 했지만.


“이름이 뭐야?”


한참 뒤 블랙캣을 놓아주고 다시 풀밭에 앉은 마리네뜨가 그렇게 질문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블랙캣의 모습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가 보다 싶어 마리네뜨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블랙캣은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


다시 고개를 내젓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감을 잡았다.


“이유를 모르는구나.”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이제까지 네 발로 움직였어? 그냥 두 발로도 걸을 수 있잖아.”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아차 싶었다. 긍정과 부정으로 대답하기 애매한 대답이잖아.


“네가 편하다면 그냥 두 발로 걸어도 돼. 말은 못하는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도리도리. 블랙캣의 반응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마리네뜨가 블랙캣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이 꽤 컸다. 자신보다 훨씬 더. 흠칫하더니 굳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듯한 블랙캣의 태도를 보며 마리네뜨는 블랙캣의 성격이 꽤나 신사일 거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럼 잘 부탁해.”


헤실 웃는 마리네뜨에게 대답하듯 블랙캣이 살짝 마리네뜨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블랙캣은 꽤나 재미있는 친구였다.


그 때로부터 2주가 훨씬 넘은 시점에서 마리네뜨가 내린 결론이었다. 비록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마리네뜨는 블랙캣만큼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고개를 돌리면 늘 자신을 바라보는 초록빛 눈동자가 있었다. 마치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올곧은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민망해져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먼저 고개를 돌리곤 했다.


블랙캣과 함께 지내면서 마리네뜨는 여러 가지를 경험했다. 들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고 가끔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산책 장소는 마을 외곽이나 블랙캣과 처음 만났던 숲으로 한정되었지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블랙캣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사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오면 그는 여지없이 최대한 마을과 가까운 지점까지 마리네뜨를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위험하니까 오면 안 된다고 얘기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블랙캣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것임을 알기에 마리네뜨는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지만 조심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마을을 한 번도 멀리 벗어나보지 못한 마리네뜨에게 마을 바깥이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블랙캣과 함께 다닐 때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어둡고 무섭다고만 생각했던 숲도 블랙캣과 함께 다니면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이것저것 떠들다가 들판 위에 나란히 누워 같이 하얀 은하수를 올려다보고 있자면 세상에 단 둘밖에 없는 기분이 들었다.


블랙캣이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들고 온 바구니를 떨어뜨릴 뻔했다. 블랙캣은 외양적으로는 아직 완전히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드문드문 인간처럼 보일 때가 간혹 있었는데, 얼굴에 표정을 드러냈을 때였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이 순간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여서,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가 떴을 때는 이미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미소는 마리네뜨의 마음 속에 꽤나 인상 깊게 기억되었다.


블랙캣을 만나러 가는 건 일주일에 세 번. 매일같이 오기엔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가끔 꽤 늦게까지 있을 때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 혼자 떠들다 보니 매일 오면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 그간의 반응을 보면 블랙캣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반응이 미묘하게 달랐다. 의아했다. 학교를 좋아하나? 뭐, 자신도 공부는 싫지만 친구들 만나는 것은 좋아하니 그런가 싶기도 하고.


요즘 들어 학교가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지는 마리네뜨를 이상하게 여긴 알리야의 추궁에도 마리네뜨는 그저 에헤헤 웃으며 넘겼다. 말해줘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알리야는 좋은 친구고 분명 비밀로 해달라면 비밀로 해주겠지. 하지만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속으로만 갈무리했다.


작은 비밀이 생겨난 것만 같았다.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비밀.


학교가 끝난 뒤 마리네뜨는 언제나처럼 블랙캣과 만나던 들판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들판으로 다가갈수록 저 멀리에 검은색 점처럼 찍혀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역시나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던 블랙캣의 손에 금빛의 꽃이 들려 있었다. 인사의 의미로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던지며 미소짓는 마리네뜨와 달리 블랙캣은 소녀를 보자마자 놀란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마리네뜨가 들고 온 바구니를 블랙캣에게 건넸다. 부모님이 하는 빵집에서 갓 구운 빵들이 수북히 들어 있었다. 바구니를 받아든 블랙캣이 옆에 그걸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마리네뜨에게로 몸을 숙였다. 손을 뻗어 가지고 온 골든 호르테를 제 머리카락에 조심스레 엮어주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아무런 반응도 없이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블랙캣의 태도에 마리네뜨의 입가에서 미소가 점점 걷혔다. 힘없이 피식 웃으면서 마리네뜨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아,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어. 들어줄래?”


고개를 끄덕이는 블랙캣에게 소녀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대회가 있었거든. 별 건 아니고, 예쁜 옷을 만드는 대회라고 해야 하나? 이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수도에 가서 공장을 견학할 수 있대, 굉장하지 않아? 그래서 열심히 준비했거든.”

“그르?”

“근데 졌어.”


깔끔하게 인정하는 마리네뜨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나름 자신이 있었단 말이야. 우승하고 나면 어떤 말을 할지도 생각해뒀었구. 근데 어…, 그래, 왜 나랑 똑같은 디자인의 의상을 그 애가 가지고 나온 걸까. 차례는 내가 훨씬 뒤였는데. 덕분에 제출도 못하고 그냥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어.”


웃기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이 퍽 쓸쓸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겠지~! ……근데 지금 왠지 털어놓고 싶어서.”


너라면 다른 곳에 떠들고 다니지도 않을 테니까. 피식 웃으며 블랙캣을 돌아보던 마리네뜨는 갑작스레 깜깜해지는 시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얼굴에 닿는 것이 자신을 끌어안은 블랙캣의 어깨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마리네뜨는 중얼거렸다.


“…위로해주는 거야?”


더듬더듬, 아주 어색하지만 천천히 제 등을 살며시 토닥거리는 블랙캣의 손길이 무척 다정했다. 피식 웃으며 소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블랙캣의 품에서는 숲의 향기가 났다. 마치 숲 그 자체인 것처럼 청량한 풀의 향기와 살짝은 텁텁한 흙의 냄새. 하루종일 숲에서 생활하니 그럴 만했다. 그래서 블랙캣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편안해지는 걸까? 알리야나 다른 누구보다, 너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고 여기게 된 내가 바보같은 걸까?


마음 속에 소용돌이치던 풍랑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마리네뜨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손을 뻗어 블랙캣을 끌어안는 소녀의 눈가에서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꺅?!”


갑자기 드는 부유감에 마리네뜨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을 안고 있던 블랙캣이 난데없이 팔을 뻗어 자신을 안아올린 것이다. 영락없는 공주님 안기에 순간 당황한 마리네뜨가 입을 벙긋거렸다.


“어, 아니. 지금 뭐해?”


블랙캣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연한 노을빛이 블랙캣의 얼굴 위로 물감이 번지듯 번져나갔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해 웃는 얼굴이 꼭 사람처럼 보여서 마리네뜨의 얼굴이 한 순간 확 새빨개졌다. 다행히도 노을빛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마리네뜨를 안아든 블랙캣이 제 목을 살짝 까딱거렸다. 잡으라는 듯한 움직임에 마리네뜨가 손을 뻗어 블랙캣의 목을 껴안자마자 그가 바닥을 세게 차올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숲 속을 빠르게 달려가는 블랙캣을 꼭 붙잡고서 마리네뜨는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블랙캣의 움직임이 멈추자 소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주변이 어두워서 순간 앞에 무엇이 있는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두려움에 마리네뜨는 블랙캣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뭐냐고 묻는 듯한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와앗?!”


작은 탄성이 마리네뜨의 입가에서 터져나왔다.


푸르게 빛나는 불빛들이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이곳이 자신이 블랙캣을 처음 만났었던 골든 호르테 꽃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금색으로 물든 꽃들이 반딧불이의 빛을 받아 은은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꽃들 주변에 가득한 둥근 불빛들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딧불이였다.

반딧불이의 숲.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우와, 엄청 예뻐!”


블랙캣의 품에서 내려온 마리네뜨의 입가에 한가득 웃음이 번졌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정신없이 꽃밭을 바라보는 마리네뜨를 지켜보던 블랙캣의 눈가가 예쁘게 휘어졌다.


마리네뜨는 꽃밭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자신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 반딧불이들의 모습을 조용히 구경하던 마리네뜨가 환하게 웃으며 블랙캣을 돌아보았다.


“여기, 정말 예쁘다!”


방금 전의 우울했던 일들은 까맣게 잊었는지 즐겁게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모습이 블랙캣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블랙캣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리네뜨는 이리 오라는 듯이 블랙캣에게 손짓했다. 천천히 걸어오는 블랙캣의 손을 붙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기는 마리네뜨의 손은 무척 하얗고 따뜻했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제 손을 빤히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그르….”


작게 울리는 울음소리,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마리네뜨는 살짝 숨을 집어삼켰다. 평소보다 훨씬 차분하게 저를 향하는 시선은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듯 보여서, 마리네뜨는 피식 웃으며 남은 한 손으로 블랙캣의 뺨을 쓰다듬었다.


“싫다. 왜 그런 얼굴하고 있어?”


네가 더 아파할 필요 없는데.


“예쁜 장면을 보여줘서 고마워. 덕분에 다음에는 더 좋은 옷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미소짓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던 블랙캣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살짝 휘어졌다. 얘 오늘 자주 웃네? 당황하는 마리네뜨의 앞에 블랙캣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잡고 있던 마리네뜨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그가 마리네뜨를 올려다보았다. 소중한 것을 대하듯, 마치 기사와 같은 정중한 행동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뻣뻣해진 고개를 애써 꽃밭으로 돌리며 쑥스러움을 무마하는 마리네뜨를 블랙캣은 상냥하게 기다려주었다. 소녀가 이제 만족했다고 말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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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3p 포함 총 85p입니다.

본편이 55, 외전이 27p로 외전은 블랙캣 시점의 본편입니다. 좀 더 동화스러운 느낌이에요..


통판폼 >

표지는 나중에 업로드해서 올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I.R.E
,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12.

세 번째 요정






말도 안 돼.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방 안을 빙빙 돌았다. 몇 시간째 같은 행동을 번복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보며 티키가 걱정스레 말했다.



“마리네뜨, 괜찮아?”

“괜찮…, 지 않아.”



힘없이 웃으며 마리네뜨는 빙빙 돌던 것을 멈추고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몇 번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펠릭스가 블랙캣이라니.


분명 변신이 풀리는 것을 바로 눈 앞에서 봤는데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혹시 나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남자는 사실 팬터마임 능력자가 아니라 환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들 정도로 블랙캣의 정체는 마리네뜨에게 충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악! 그럼 난 본인한테 그렇게 절절한 고백을 했단 말이야?!”



손으로 미친 듯이 베개를 내리치는 마리네뜨의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전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니 정말이지 답이 없었다. 그야말로 창피하기 짝이 없는 말들만 주구장창 늘어놓았던 것 같은데! 그것도 본인 앞에서! 아니 이미 고백 비슷한 건 했지만!



“잠깐, 그러고 보니….”


‘나, 레이디한테 반한 것 같아.’



씨익 웃으며 고백하던 블랙캣의 표정이 떠오르자 마리네뜨의 기분은 더욱 암전되었다. 그 때는 취향이 아니라고 딱 잘라 거절했었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아악, 어떻게 해? 이제 어떻게 블랙캣 얼굴을 보냐고! 아니, 펠릭스인가? 아무튼!”



그렇게 마구 떠들다가 마리네뜨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힘을 빼고 침대에 축 늘어진 상태로 마리네뜨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걸까…?”



확신할 수가 없었다. 티키가 그랬었다. 블랙캣을 믿지 말라고. 믿으면 너만 상처받을 거라고. 블랙캣의 비밀을 알려주던 티키의 목소리가 무의식 너머에서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베개를 끌어안고 옆으로 누워 있는 마리네뜨의 얼굴에 착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어쩌지?



‘마리네뜨~?’



밑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엄마? 무슨 일이야!”

‘누가 널 찾아왔는데?’

“날?”



설마.


불길한 마음에 마리네뜨는 재빨리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익숙한 금발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마리네뜨가 크게 소리질렀다.



“나 없다고 해줘!”

‘이미 있다고 해버렸어~!!’

“아, 엄마!”



울상이 된 얼굴로 소리쳤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버렸다.



‘만나기 곤란하다고 말해줄까?’



미안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엄마를 향해 마리네뜨는 한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아니, 됐어. 내가 나갈게.”



밖으로 나오자 역시나 펠릭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를 바꾸자는 듯이 눈짓하는 펠릭스를 따라 마리네뜨는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전에 블랙캣과 이야기했던 바로 그 공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침묵은 더한 무게를 가지고 마리네뜨를 내리눌렀다.


다시 펠릭스를 만나면 어떨까 생각했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어색했다. 전에는 딱히 대화가 오가지 않았음에도 늘 즐거웠는데. 공원에 도착해서도 마리네뜨는 펠릭스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살짝 시선을 내린 채로 제 앞에 선 마리네뜨의 모습이 펠릭스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딱 말할 거만 말하고 다시 들어가자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힘없이 말했다.



“언제부터 알았어?”



내가 레이디버그인 거. 뒷 문장은 생략되어 있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은 펠릭스가 짧게 대답했다.



“얼마 안 됐어.”

“….”

“내가 블랙캣이라서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펠릭스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벌떡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덤덤했지만 초조해 보이는 펠릭스의 눈빛에 마리네뜨는 당황했다. 심장을 칼에 찔린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괴로웠다. 처음으로 보는 너의 얼굴들이 너무나 신기한데, 동시에 너무나 낯설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 내 앞에서 이런 모습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잖아.


그건 역시 내가 레이디버그라서?



“너, 나 피하고 있지?”



여전히 말이 없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는 재차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두워지는 마리네뜨의 안색을 살펴보는 펠릭스의 심정도 같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내일 말하자 생각했었다. 제대로 이야기하고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매일 공원으로 나가서 기다렸지만 마리네뜨는 다시 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매번 지겨울 정도로 공원에 와서 재잘거리던 녀석이 없어지니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용한 독서 시간이 이토록 어색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속이 타들어가는 감각인지 펠릭스는 다시금 체감했다. 그래서 직접 찾아왔는데 정말 곤란하다는 얼굴로 시선도 마주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리네뜨를 보니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한참을 우물거리던 마리네뜨는 겨우 대답했다.



“하, 할 말 없어.”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려는 듯이 뒤돌아서는 마리네뜨를 본 펠릭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걷혔다. 펠릭스 본인도 왜 이러는지 몰랐다. 블랙캣으로서 레이디버그에게 계속 거절당했을 때는 그저 섭섭했던 정도였는데, 어째서? 매번 받아온 거절임에도 마리네뜨의 입으로 듣는 건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울컥해진 펠릭스는 돌아서는 마리네뜨에게로 다가가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고 돌려세웠다.



“잠깐만!”

“놔!”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마리네뜨의 눈동자에 펠릭스는 심장이 아릿했지만 더욱 세게 팔을 붙잡았다. 펠릭스의 손을 뿌리치고자 팔을 마구 흔들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손에 울컥 감정이 치밀었는지 마리네뜨가 크게 소리질렀다.



“이거 놓으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마리네뜨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네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지 내가 아니잖아!!”



순간, 펠릭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와 동시에 손을 뿌리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마리네뜨를 멍하게 쳐다보던 펠릭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펠릭스의 셔츠 속에서 고개를 내민 플랙이 중얼거렸다.



“파트너, 안 쫓아가?”

“…지금 가봤자 날 보지 않을 거야.”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뒤돌아서던 펠릭스는 불에 덴 듯 올라오는 통증에 신음했다.



“으윽….”

“그러게, 무리하면 안 된다니까?”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 펠릭스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파트너인 플랙이 모를 리가 없었다. 펠릭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괜찮아.”



이 정도는.






빠르게 달려 집으로 돌아온 마리네뜨가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풀썩 엎드렸다. 엎어진 채로 아무런 말도 없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리네뜨, 마리네뜨.”



아무런 말이 없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티키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는 네가 심했어, 알지?”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다시금 말했다.



“그 애, 상처받은 거 같았어.”



마리네뜨가 뒤돌아섰을 때 쓸쓸하게 일그러지던 펠릭스의 표정을 티키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마리네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티키를 마주보았다.



“뭐가 상처받았다는 거야? 다 알면서도, 내가 레이디버그인 걸 알면서도 아무 말도 없었던 녀석인데. 블랙캣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던것도 다 계획적으로….”

“그게 아니라는 거 마리네뜨 너도 잘 알잖아.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 하면 마음이 편해져?”



정곡을 찌르는 티키의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잠시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알아! …펠릭스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거.”



정말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다면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질 리도 없었다.


마리네뜨가 두 손으로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몇 번을 우물거리다, 간신히 입을 여는 마리네뜨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고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상처받는 내가 너무 싫어.”

“마리네뜨….”

“레이디버그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 펠릭스도 분명 실망했겠지.”



힘없이 중얼거리던 마리네뜨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머물렀다.



“그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라는 강한 영웅이지, 마리네뜨라는 평범한 소녀가 아니니까.”






“하아….”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쓰러지는 펠릭스의 얼굴에 식은땀이 살짝 배어 있었다.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펠릭스는 피식 웃었다. 병원을 가서 치료를 받기에는 흔적이 남을 것 같아 집 안에서 치료하기는 했지만, 놀라서 헐레벌떡 달려온 집사를 납득시키는 것도 꽤나 고역이었다. 겨우 치료하긴 했지만 아마 당분간은 씻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문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거지만.


가상의 체스판을 들여다보는 펠릭스의 시선이 상대가 있는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가 다시 체스판으로 향했다. 킹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현재 그나마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말은 네 개. 하나는 크게 부상을 입었으니 당분간 활동을 자제하겠지.


뭐, 그건 자신도 그런가. 펠릭스는 쓰게 웃었다.


상대의 윤곽이 얼핏 보이는 것도 같았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패 중 하나가 실비아 에스프랑인 것을 안 이상, 뒤에 누가 있을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이미 전부터 눈치채고는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셰이드를 만났을 때부터 펠릭스는 셰이드가 실비아 에스프랑일 것이라 예상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실비아가 열렬하게 따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펠릭스는 순순히 인정했다.



“야, 좀 쉬라니까. 너 또 쓸데없는 생각하고 있지?”



또 시작이다. 자신이 다친 후로 이상할 정도로 잔소리가 많아진 플랙을 성가시다는 듯이 쳐다보던 펠릭스가 손으로 반지를 톡톡 쳤다. 으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플랙이 반지로 빨려들어가고 펠릭스는 곧 블랙캣의 모습으로 변했다. 읏차, 자리에서 일어나는 블랙캣은 제 몸을 휘휘 둘러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변신하면 확실히 고통이 줄어들긴 했다. 상처도 빨리 낫는 것 같고. 그래서 요즘은 평상시에도 집 안에서는 블랙캣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사는 허가하지 않으면 함부로 방문을 열지 않으니 목소리만으로도 지시하기는 꽤 쉬웠으니까.


가만히 있자니 자꾸 부정적인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블랙캣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책상 앞에 있는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노트북을 켜면서 그는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드론이었다.


상처 회복을 위해 블랙캣의 모습으로 자주 변신하게 된 지금, 블랙캣은 드론을 사용해 파리 시내를 자주 시찰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악당들의 움직임이 더 활발해진 느낌이 든다. 신문에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어려우니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드론은 참으로 편리한 물건이었다.


드론을 창문 밖으로 날려보내고 조종기의 선을 노트북과 연결했다. 도시를 한 바퀴 살펴본 후 언제나처럼 자연사 박물관 쪽으로 드론을 날렸다. 노트북에 떠 있는 화면을 감흥 없는 얼굴로 살펴보던 블랙캣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굴이 열려 있었다.


무슨 일이지? 놀라면서도 문득 걱정이 들었다. 저 동굴이 열려 있었을 때마다 무언가 꼭 일이 터졌으니까. 하지만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제발 자신이 갈 때까지 열려있기를 바라며 블랙캣은 재빨리 노트북을 끄고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바람처럼 달려 자연사 박물관 앞에 있는 동굴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동굴은 아직 열려 있었다.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동굴의 입구를 보며 블랙캣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파트너, 위험한 짓 하지 말라니까!’


플랙의 절규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런 플랙에게 미안했는지 블랙캣은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미룰 수 없어. 그러기엔 너무 예감이 좋지 않아.”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진실을 알아야겠어.


등의 상처가 다시금 욱신거리는 것도 같았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면서 블랙캣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괜찮아. 블랙캣 상태에서는 악당이 아닌 이상 쉽게 잡히진 않아.”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귀를 쫑긋 세웠다. 바람 소리에 섞여 들리는 작은 발소리들에 직감했다. 돌아오는구나. 블랙캣은 서둘러 서늘한 동굴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여유롭게 걸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소리없이 빠르게 발을 놀리며 블랙캣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동굴은 생각보다 굉장히 컸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졌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인공적으로 깎아낸 것만 같은 이질감이 풍겼다. 점점 밑으로 경사지는 동굴 안을 걷던 블랙캣은 곧 제 앞에 있는 문을 발견했다. 그냥 열었다가 사람이 바로 앞에 있으면 어쩌지? 순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블랙캣은 가방에서 물컵 하나를 꺼내들고 문 앞으로 다가가 컵을 문 위에 올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효과가 있었다. 간간히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에 블랙캣은 절로 초조해졌다. 몇 명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냥 확 들어가서 다 기절시켜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언제 나갔던 놈들이 돌아올지 모르는데.


하지만 제 존재를 노출시키는 건 너무 위험했다. 몸상태도 그렇고. 일단은 최대한 조용히 이 곳을 살펴보고 빠져나가는 것을 우위에 두어야 했다. 한숨을 내쉬며 블랙캣은 계속 기다렸다.


잠시 후, 정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즈음에서야 블랙캣은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세련되고 깔끔한 복도에 블랙캣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봐도 최신 연구 시설을 연상시키는 하얗고 깨끗한 복도의 바로 앞에는 철문이 하나 더 있었다. 굳이 엿듣지 않아도 분명 저 안에는 사람들이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블랙캣은 난감해졌다. 어떻게 저 안쪽으로 들어가지? 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


블랙캣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방에서 얇은 천을 하나 꺼냈다. 맨 처음 셰이드 플뢰르를 상대할 때 캠코더를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카멜레온 천. 덮어쓰면 주위와 동화되어 안에 들어간 사람이나 물건을 숨길 수 있다. 하여간 매직박스라는 건 언제 봐도 신기하다고 중얼거리며 반투명한 천을 머리에 뒤집어쓴 블랙캣이 살금살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기에 앞서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데 왜 이렇게 떨리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다행히도 문은 쉽게 열려주었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스르륵 문이 열리자마자 그 틈새로 낑겨들어간 블랙캣은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하얀 가운을 입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차트를 들고 두셋씩 붙어다니며 뭐라뭐라 떠들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복도는 시끌벅적했다. 이렇게 많은 연구원들을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펠릭스는 조금 놀랐다. 이 정도 인력을 모으자면 자금이 장난 아니게 필요했을 텐데.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큰 모양이었다.


사람들과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길을 돌아보고 있던 블랙캣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아들어 꽂혔다.



“아니, 아무리 봐도 보스가 갑자기 이상해지신 거 같지 않아? 갑자기 해외에 보냈던 연구팀까지 죄다 파리로 돌아오게 만들고.”



어떤 남자가 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인이 아닌지 남자의 목소리는 빠른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지만 알아듣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재빨리 남자의 뒤에 따라붙으며 블랙캣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두 사람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가 투덜거렸다.



“중요한 연구라고는 하는데 왜 갑자기 이런 연구를 시작하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은데 영….”

“어쩔 수 없지. 간부들만 아는 기밀 사항이라고 하니까.”

“바로 그게 문제야! 가뜩이나 이 연구 내용을 봐. 너무 수상쩍기 짝이 없다고.”

“쉿. 목소리 낮춰. 며칠 전에 숙청이 벌어졌던 거 잊었나?”



숙청?



“그래. 행방불명으로 처리되긴 했지만 개뿔. 분명히 위에서 처리한 거겠지. 이번 연구 때문에 간부진 사이에서도 대립이 심했다던 소문이 있던데.”

“그래봤자 별 수 있나. 조직에서 보스의 뜻은 절대적인데.”



하하 웃는 제 동료의 말에 남자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여간 나비, 나비. 이놈의 조직은 나비를 너무 좋아해. 이젠 살다살다….”

“쉿! 그 얘기는 금구일세.”



동료가 다시금 주의를 주자 그제서야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지 가만히 입을 다무는 두 사람을 블랙캣은 숨죽여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두 사람이 어느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목에 걸고 있던 카드를 리더기에 찍고 엄지손가락을 검사기 위에 올려 지문을 인식하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솔직히 이렇게 투덜대는 것 정도는 보스도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야? 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일했는데? 2월부터니까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가! 솔직히 지금도 이례적인 속도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위에서는 계속 빨리 성과를 내라 마라 잔소리를 하질 않나. 그렇게 말을 할 거면~ 자기들이 알아서 연구하든지!”



스트레스라며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남자에게 옆에 있던 동료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금방 끝나겠지. 좀만 더 힘내보세.”

“간만에 휴가를 낼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지. 이러다가 언제 이혼서류가 날아들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니까. 그렇다고 지금 여길 나가려고 들었다간 목숨이 위험할 테고. 뭐라 사정 설명을 하기도 애매하고.”

“하긴 우리도 이유를 모르니까.”

“누가 아니겠나.”



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지만, 블랙캣은 더 이상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더 이상 접근하다가는 위험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이 있었다. 저들의 대화에서 순간적으로 느꼈던 묘한 위화감.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블랙캣은 방금 전 대화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무언지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뭐지? 뭔가 이상했는데. 섬뜩한 감각이 전신을 후려치는 듯한 기분에 블랙캣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일했는데? 2월부터니까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가!’


체스판 위에 덮어져 있던 베일이 한 꺼풀 벗겨졌다. 상대가 들고 있는 건 바로 백색의 말.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시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미라큘러스를 깨웠던 것은 분명히 개학하고 사흘 뒤였다. 4일에 개학했으니까 정확히 3월 7일.


그런데 이 모든 게 2월부터 시작되었다고?


미라큘러스를 노린다는 말을 그다지 믿지는 않았었다. 악당들은 계속 파리에 나타났고, 꾸준히 미라큘러스를 노린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승부가 날라치면 발을 빼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미스터 피죤의 일례를 제외하고는 양쪽 다 위험할 정도로 승부가 치열하게 가지는 않았었다. 저번 오페라 하우스 사건 때는 자신이 작정하고 승부를 빨리 끝냈기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던 거였고.


저쪽이 먼저 수를 두기 시작했다는 건 이미 예전부터 무언가를 기획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적어도 2월부터는. 그렇다는 건 악당들도 자신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왜 우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파리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지?


만약 악당들이 파리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자신은 몰라도 마리네뜨는 더 이상 레이디버그로 변신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레이디버그는 몇 번이고 제게 이 모든 걸 그만두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었고, 자신은 그런 레이디버그의 마음을 이해했었다. 마리네뜨가 레이디버그로 변신했던 건 순전히 책임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인가? 우리를 계속 나타나게 하려고? 대체 왜?


자신들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뭐지? 언론의 관심?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이 영웅들에게 쏠려 있을 때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서?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블랙캣은 천천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정말로 미라큘러스를 노리는 게 아니었다면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


‘하여간 나비, 나비.’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려퍼진다.


‘이놈의 조직은 나비를 너무 좋아해. 이젠 살다살다….’

‘쉿! 그 얘기는 금구일세.’


나비를 좋아한다면, 역시.


블랙캣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실존했었나.


침착하게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간 블랙캣은 다시 끝없이 길게 늘어진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세히 둘러보니 연구원들은 목에 모두 목에 네모난 패스카드를 걸고 있었는데, 카드의 위쪽에는 작게 나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블랙캣은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아버지가 남겨두었던 책에 그려져 있던 호크모스의 브로치 모양과 거의 흡사했다. 그걸 알아본 블랙캣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난 대체 무얼 하고 하는 걸까.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블랙캣 자신도 쉽사리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다 파헤치고 나면, 그 뒤에는 진실이 남아 있을까?


하지만 그 다음에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잔혹한 진실의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만 같은 오싹한 기분에 블랙캣은 몸을 살짝 떨었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지만 호기심과 책임감으로 애써 내리눌렀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걷다보니 하얀 복도가 끝나고 또 다른 문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연구원들은 이쪽에서만 움직이는지 아무도 문의 근처로는 다가가려 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블랙캣의 눈앞에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시커먼 어둠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는 통로를 보며 블랙캣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밤눈이 밝은 블랙캣의 특성상 불을 켜지 않아도 통로를 걷는 것은 무척 수월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걸었을까, 블랙캣은 지금 자신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당한 거리를 걸어왔다는 건 분명했다. 지나오면서 여러 갈래로 나뉜 갈림길들도 몇 번 보았다. 되도록 중심부 쪽으로 방향을 잡으며 나아가니 더욱 길이 복잡하게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블랙캣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보아하니 지하에 온갖 통로를 뚫어놓은 모양이군.’


멀리 온 만큼이나 수많은 문들도 보았지만 블랙캣은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일일이 살펴볼 시간도 없을뿐더러 대체로 낡고 오래된 문들은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블랙캣은 다른 문을 찾고 있었다. 상당히 최근에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는, 그런 문.


중심부 쪽으로 올라오니 역시나 통로가 점점 더 밝아지기 시작했다. 통로를 흐릿하게 밝히고 있는 전등들을 보면서 블랙캣은 뒤집어쓰고 있는 천을 더욱 꼭 움켜쥐었다. 경사가 지고 있는 걸 봐서는 점점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불을 밝혀둔다는 건 자주 사용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리 전역에 이런 지하통로들이 거미줄처럼 존재하다니. 제대로 된 길을 모르면 영영 갇힐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블랙캣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누가 나타날지 모른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걷던 블랙캣의 바로 앞에 있던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가 나왔다.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러스트였다.


새하얀 복장이라 그런지 흐릿한 불빛 속에서도 러스트는 유독 눈에 띄었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창백한 얼굴과 무표정은 흡사 유령을 연상시켰다. 문을 닫은 러스트가 블랙캣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타박타박, 마치 풀밭 위를 밟는 것처럼 부드러운 발걸음 소리에 블랙캣의 얼굴은 긴장으로 바싹 조여들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들킨다.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바짝 굳은 블랙캣의 바로 옆으로 러스트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거침없이 걸어서 가까이로 오는 러스트의 모습에 블랙캣의 손이 구명줄을 잡듯이 천을 꼭 쥐었다. 그는 그저 커져가는 심장소리가 부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러스트가 블랙캣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블랙캣이 안심하려던 찰나, 동굴 안으로 갑자기 옅은 바람이 불어들었다. 러스트의 얼굴 쪽으로 불어온 바람 때문에 긴 금발이 살짝 흩날렸다.


문제는 블랙캣이 쓰고 있던 천까지도 바람에 쓸려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곧바로 뒤를 돌아보는 러스트에 블랙캣은 다시금 긴장의 끈을 붙잡았다. 아까 바람 때문에 살짝 발이 드러났던가? 아니야, 못 봤을 거야. 못 봤어야 해. 여기서 싸울 수는 없었다. 이곳이 러스트에게 굉장히 유리한 지형이기도 했지만, 전투를 하기에는 지금 제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여차하면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들키면 절대 자신을 살려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물끄러미 블랙캣이 있는 곳을 뚫어져라 살펴보던 러스트는 별다른 문제를 찾지 못했는지 곧 다시 몸을 돌렸다. 타박타박 울리는 발소리가 저 멀리로 사라졌을 즈음에야 블랙캣은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여간 스파이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블랙캣은 러스트가 나왔던 문 앞으로 다가섰다.


이 안에서 나왔다는 건 여기서 뭔가 있었다는 뜻이겠지?


조심스럽게 다가간 블랙캣이 살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절로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모습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지켜보던 푸른빛의 눈동자는, 살짝 눈을 감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안으로 들어간 블랙캣의 앞에 놓인 것은 위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이었다. 어둑한 주홍빛으로 빛나는 통로의 계단을 한참을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블랙캣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사람은 없었지만, 덩치 큰 한 사람이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좁은 통로라 누가 위에서 내려온다면 바로 들킬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왜 아예 몸을 투명하게 해주는 기능은 없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블랙캣은 문득, 이 통로 자체가 그리 낡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단 통로 자체가 상당히 깨끗했다. 특히 돌로 된 계단은 새로 지은 것만큼 반질반질했고 거의 때가 끼어있지도 않았다. 냄새도 살짝 새집에서 날 법한 느낌이고.


만든 지 얼마 안 됐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블랙캣의 앞에 문 하나가 나타났다. 나무문인데 생각보다 크기가 꽤 작았다. 제발 문이 열려있기를, 그리고 열 때 소리가 크지 않기를 바라며 블랙캣은 심호흡을 하고 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살짝 열고 그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자 나무로 된 작은 공간이 있었고, 또 문이 있었다. 가운데에 세로로 그어진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혹시 무슨 소리가 날까, 한참을 집중하던 블랙캣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판단 하에 앞에 있는 문을 두 손으로 천천히 밀었다.


화악 쏟아지는 빛과 함께 멀쩡하게 생긴 사무실이 나타났다. 그제서야 블랙캣은 자신이 연 문이 이 사무실의 옷장 뒤로 연결되어 있는 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천을 집어넣고 다시 가방에서 깨끗한 비닐신발을 꺼낸 블랙캣이 그걸 신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처음에는 꽤나 넓은 사무실이라 생각하기만 하다가 블랙캣은 바로 옆에 보이는 넓은 창문 쪽으로 다가섰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넓게 보이는 광장과 걸어다니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블랙캣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긴….’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그러면 여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리로 된 전시벽 안과 서랍들 위로 가지런히 세워진 트로피들과 그림들을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결론을 내렸다.


여기는 바로, 루브르 박물관의 관장이 머무는 관장실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중추라 불릴 수 있는 곳에 악당들이 나다닐 수 있는 통로가 있다니.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블랙캣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왜 러스트가 여기서 나왔을까?


관장도 저들과 한패라는 건가? 그러고 보면 그림 도난 사건때도 경찰에 비해 루브르의 대응이 상당히 소극적이긴 했었다. 어디까지나 경찰에 비해서라는 거지만.


그런데 왜 이런 통로를 만들었지? 잠깐만, 이번에 새로 만들어졌다면 전에는 없었다는 거잖아.


잠깐만, 관장이라고?


블랙캣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정보가 하나 있었다.


‘노아 바자르’


노아 바자르는 루브르 박물관의 전대 관장으로 차분하고 온화한 성격의 노신사였다. 루브르에 몇 번 가봤는지라 블랙캣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온화한 성격이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한 치의 타협도 없는 ‘루브르의 문지기’. 그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노아에겐 돈과 명예보다 예술 그 자체가 특히 중요했다. 몇십 년간 루브르에서 일해 온 만큼 그는 파리의 그 누구보다도 이 박물관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다. 아마 정전 사건 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아직까지도 관장직에 남아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렇게 박물관을 훼손하는 일에 절대 가담할 리가 없겠지.


관장이 정말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교체되었다는 소식은 블랙캣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곳이니만큼 빨리 후임자를 세우는 게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정전 사건은 이걸 위한 연막이었나.”



다른 피해자가 더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왜 루브르를 장악하기 위해 그런 번거로운 짓까지 한 건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쩔까, 생각한 순간 블랙캣이 귀를 쫑긋 세웠다.


발소리다.


후다닥 옷장 속으로 들어간 블랙캣은 최대한 소리없이 빠르게 옷장 문을 닫고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왔던 나무로 된 문으로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뒤, 블랙캣은 다시 가방에서 카멜레온 천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쓰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편,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지금 이 관장실의 주인인 맥스 베넌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관장실의 모습에 별 신경쓰지 않고 관장실로 들어오던 맥스의 책상 위에 있던 전화가 마구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기 위로 뜬 번호를 보자마자 맥스는 곧바로 자리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 정중히 대답했다.



“예, 제레미 님.”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온 블랙캣은 제 앞에 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이걸 열면 다시 통로로 나가게 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다시금 문을 열고 통로 쪽을 휙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고 안심하고 밖으로 나오던 순간 바로 뒤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문을 닫자마자 저쪽에서 블랙캣이 있는 쪽으로 몇 사람이 걸어왔다.


검은색 제복을 차려입고 있는 남자 세 명이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던 블랙캣은 남자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설치는 대충 마무리되고 있는 거 같지?”

“그래, 절반은 넘게 끝냈으니까 금방이야.”



놀란 가슴을 추스릴 새도 없이 블랙캣은 그들을 계속 따라가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방향을 계산했다. 여기가 루브르고 자신은 북쪽을 향해 걸어왔으니까, 아마 이 쪽은….



“보수를 많이 주는 건 좋은데 대체 우리가 왜 이걸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윗분들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투덜거리는 남자의 말에 다른 동료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옆에 있던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아마 비밀리에 불려간 녀석들도 제법 된다던데.”

“우와, 진짜? 살아 돌아오긴 하겠지?”

“쉿, 목소리가 커.”

“근데 사실이잖아. 위에서 불러서 갔다는 사람치고 멀쩡하게 돌아온 놈이 몇이나 있었냐고~”

“…그런 문제는 아닐 거야. 상당히 우수한 녀석들을 골라갔다고 들었거든.”

“그런 말 들어도 별로 안 부럽다, 야. 난 오래 살고 싶거든.”



많이 알면 그만큼 빨리 죽잖아? 웃으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블랙캣의 심장으로 날카롭게 날아와 꽂혔다. 그럼에도 담담한 자신에 블랙캣은 조금 놀랐다. 동시에 걱정도 들었다.


여기서 정말 뭐를 발견한다고 해도, 이걸 과연 레이디버그에게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자신과 똑같이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게?


블랙캣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모르는 것보다는 그래도 아는 게 낫다. 발을 빼기에 자신과 레이디버그는 이미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으니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것. 오직 그 뿐이다.


흔들리지 말자.



“그나저나 빨리 가야겠다. 시간 거의 다 됐어.”

“뭐가. 이대로 가면 나름 제 시간에 도착하겠는데.”

“너의 대충이란 개념에 목숨을 팔고 싶진 않아. 난 그 남자가 무서워 죽겠다고.”

“아, 그 하얀 얼굴의 덩치 큰 남자? 무섭지.”

“아무 말도 없는 게 더 무서워. 하긴 그 새까만 옷을 입은 여자보다는 나은 거 같지만.”

“켁, 그 여자 성격 장난 아닌 거 같던데. 게다가 능력도 진짜 괴물같다고. 악당이면 악당답게 히어로들이나 상대하고 있지 왜 우리까지 그 밑에서 일해야 하는 거야?”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블랙캣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이 녀석들과 악당들은 한 패거리였던 건가.



“야, 진짜 뛰어야겠다. 나 먼저 간다!”

“앗, 치사하게! 같이 가~!”

“너네 조용히 좀 해! 누구한테 들키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조용히 소리지르며 달려가는 남자들을 더 이상 쫓아가지 않고 블랙캣은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저번에 만났던 마임을 사용하는 남자가 있다면 이런 천쪼가리 하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장 성가시고 골치 아픈 상대를 마주하느니 차라리 다른 단서를 찾는 게 나을 것이다.


문득 블랙캣은 여기가 어디쯤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루브르에서 서남쪽으로 한참 걸어왔으니까, 아마 이곳은 1구 아니면 7구쯤이겠지.


7구라.


자신이 사는 동네다. 더불어 다른 누군가가 같이 떠올랐다.


한참을 고민하던 블랙캣은 결국 결정을 내리고 계속해서 걷기 시작했다. 위험하기는 했지만 천을 벗고 가방 속에서 나침반을 꺼내들었다. 나침반을 보고 서남쪽으로 걷기 시작하는 블랙캣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분명 이쯤 어디일 텐데.


문득 블랙캣은 자신이 별로 지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플랙의 말대로 블랙캣의 몸은 상당히 편했다. 쉽게 지치지도 않고, 상처 때문에 아직도 등이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이 상태로 있을 때는 특히나 치유력도 빨랐다.


하지만 이 힘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되었다. 블랙캣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익숙함은 더한 좌절을 부를 뿐이다.


머지않아 블랙캣은 곧 찾고 있던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커다란 돌로 막혀있는 입구는 딱 보기만 해도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커다랗고 두꺼운 돌문은 장정 여럿이서 덤벼야 겨우 조금 밀어낼 수 있을 만치 무거워 보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마 여기서 좌절하고 포기했겠지.


보통 사람이라면.


심호흡을 한 뒤에 블랙캣은 돌문을 꽉 잡았다. 별로 힘들이지 않았는데 돌문이 스윽 소리를 내며 옆으로 밀렸다. 딱 사람 하나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틈을 낸 다음에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을 닫았다. 낡은 돌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만큼 좁은 통로는 몇 세기는 거쳐온 것처럼 낡아 있었다. 계단의 돌들은 모양이 다 제각각 달랐고 천장과 계단의 가장자리에는 여기저기 이끼가 끼어 있었다. 불빛이 없어 사방이 매우 어두웠고 축축한 공기가 통로 전체를 둘러감고 있었다.


방금 전 지나왔던 루브르의 통로와는 다르게 일직선으로 높게 뻗어 있는 계단 위로 블랙캣은 발을 뻗었다. 어둠 속이라 그런 걸까, 위험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둘러쓴 천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주의하면서도 블랙캣은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모르겠다. 바로 앞에 희미한 빛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블랙캣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출구인가?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블랙캣은 그게 출구가 아닌, 계단 옆에 있는 공간에서 새어나오는 빛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공간은 이상했다. 반딧불이도 불빛도 아무것도 없는데도 안개처럼 희끄무레한 푸른빛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돌벽으로 감싸진 공간의 중앙에는 역시 돌로 된 둥근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작은 원형의 돌판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가까이서 보기 위해 공간에 발을 딛었다.


화악- 불어오는 바람에 블랙캣은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바람은 그만큼이나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바람이 잦아들자마자 블랙캣은 팔을 내리고 테이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둥근 테이블 위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정체불명들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외에 특징될 만한 점이라면 테이블에 나 있는 두 개의 홈이었는데, 테이블의 중앙에서 왼쪽으로 대각선 아래쪽에 육각형의 홈이 있었고 중앙에는 그보다는 두 배 정도 큰 직사각형의 홈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홈들의 가장자리를 정체 모를 글자들이 빼곡히 채웠다.


글자들을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이 글자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남겨두고 간 서적에 적힌 고대어들과 매우 닮아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지금 당장 읽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머릿속에 모양새를 기억한 다음 블랙캣은 미련없이 돌아섰다.


방에서 나와 다시금 위로 올라가던 블랙캣은 머지 않아 문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꽤나 평범하게 생긴 강철로 된 문이었다. 심호흡을 하고서 블랙캣은 다시금 카멜레온 천을 머리에 둘러썼다. 문의 손잡이를 잡고서 살짝 돌렸다. 끼익 소리가 날 때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상당히 세련되게 꾸며진 방이었지만 검푸른 보랏빛이 방 안을 가득 감싸고 있어서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지상인가, 지하인가. 문을 열기는 열었지만 쉽사리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블랙캣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던 중 블랙캣은 방 한 구석에 걸린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태피스트리 위로 거대한 나비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색깔은 어두워서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모양은 선명했다. 그리고 그에 블랙캣은 말을 잃었다.



“이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쩔까 망설이다가 블랙캣은 곧 결단을 내렸다. 천을 뒤집어쓴 채로 재빨리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와 근처 구석에 있는 옷장 뒤로 몸을 숨겼다.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체스판 앞에 걸려 있던 베일이 점점 벗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블랙캣은 보고 말았다. 하얀 양복을 입은 제레미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그리고 정확히는 제레미의 옆에서 날고 있는 세 번째 요정을.


자그마한 보라색 요정의 얼굴이 묘하게 슬퍼 보인다고, 블랙캣은 그렇게 느꼈다.


거리가 상당히 멀었고 거의 소곤거리듯 말해서 대화를 전부 다 엿듣지는 못했지만, 요정은 제레미에게 반항하고 있는 것 같았고 제레미는 시종일관 냉랭했다. 숙부의 입모양을 읽어내던 블랙캣은 순간 섬뜩해졌다.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라고?’



베일이 벗겨지고, 체스판 건너편에 앉아 있던 교활한 얼굴을 한 백발의 신사가 펠릭스를 조롱하듯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요정은 금세 풀이 죽었는지 살짝 꼬리를 내렸다.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하는 두 사람을 보고, 블랙캣은 이제 되었다 생각하며 두 사람의 곁을 지나 제레미가 들어온 문 밖으로 나갔다. 블랙캣이 스쳐 지나갈 때 요정이 살짝 그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것 같았지만 지금의 블랙캣에게는 그걸 신경쓸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이 곳에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밖으로 나오자 으리으리한 유피테르 가의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나비 저택.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저택을 뒤로 한 채 블랙캣은 빠르게 거리를 달려 제가 사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 변신을 풀자마자 펠릭스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계속 긴장하고 있던 게 풀려서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등의 상처가 터질세라 엎드려 누운 채로 펠릭스는 눈을 감았다. 플랙도 지쳤는지 바닥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었다.


그런 플랙을 내려다보며 펠릭스는 몇 번 입을 벙긋거리다 말았다. 너무 많은 정보를 알아서인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알게 된 건 있었다.


숙부의 정체를. 그리고 자신이 마주하게 된 운명을.


펠릭스의 입가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어떡하면 좋지?”



나는.





- 2권으로 이어집니다




===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벌써 12화를 다 업로드했다니 감회가 새롭군요. 일단 12화에 대한 설명만 좀 적고 사담을 적을게요.


제가 온리전 전에도 말했었지만 봄과 여름 에피소드는 여러 가지 떡밥을 뿌리는 장이었습니다. 가을과 겨울에 그 떡밥들을 전부 수거하게 되죠. 굳이 수거하지 않아도 되는 떡밥은 맥거핀으로 남기거나 설정집에 적어 두었습니다. 재판 때는 설정집을 배부하지 않지만 후일담에 내용 좀 더 추가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근데 별 거 없어요(...)


동굴 떡밥을 5화 때부터 뿌렸습니다만 여기서 이렇게 수거하게 되네요. 파리 전역에 거미줄처럼 그려진 비밀 통로. 지반에서 한참 밑에 있는 장소라 파리가 무너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파리는 도시계획상 고층 아파트가 정말 없는 동네라 지반에 별 압박이 가지도 않아요.


펠릭스는 정말로 똑똑한 아이입니다. 그건 아마 앞으로 차차 증명될거예요. 기획 단계에서 펠릭스와 마리네뜨의 비중과 활약을 고르게 잡기 위해 많이 노력했는데 잘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2권에서는 펠릭스가 좀 더 활약을 보여주겠지만 마리네뜨는 마리네뜨대로 중요한 축을 맡을 예정이랍니다.


아, 두 사람의 연애사는 어떻게 되냐고요? 하하 그건 스포니까 패스! 입이 근질거립니다만 뭐든 처음 볼 때의 즐거움은 소중한 법이니까요^ㅁ^ 재판은 1월쯤에 이루어질 예정이니 그 때 찾아와주세요~!


11화에 암시했던 비밀 방이나 12화의 떡밥들은 2권으로 넘어갑니다:) 저는 이 작품을 쓸 때 부제를 정하는 일이 가장 즐거웠는데 개인적으로 12화 부제 매우 좋아합니다. 세 번째 요정, 사실 12화의 내용은 이 마지막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죠. 마지막에 등장한 누루! 제레미! 그리고 호크모스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 펠릭스! 펠릭스가 블랙캣이라는 걸 알고 멘붕에 빠진 마리네뜨!


과연 그들의 앞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참, 여름의 부제는 소용돌이치는 진실, 이었답니다. 이제 가을: 선택의 기로 로 이어집니다.



재판수량조사 링크는 이쪽>> http://naver.me/x24EEI80




여기서부터는 사담입니다. 굳이 안 읽으셔도 되어요 제 잡담이니까요(...)


개인적으로 12화는 정말 의외롭게도 여름 에피소드 중 가장 편하게 작업한 화이기도 합니다. 거의 블랙캣 원맨쇼에 가까운 내용이라 묘사가 많아서 힘들 줄 알았는데 너무 작업이 잘 되서 쓴 저도 놀랐답니다(...) 아무래도 저는 한명만 다루는 걸 제일 편하게 생각하나봐요!ㅋㅋㅋㅋㅋ


12화 작업 당시에 정말 즐겁게 작업했고, 1권은 여기서 끝납니다! 사실 온리전 당시 작업할 때 너무 힘들어서 겨울 에피 작업할 때 그냥 1권만 낼까 했지만, 1권만 냈다가는 이 결말 보고 지인들이 이렇게 끝내놓고 다음권을 안내다니 미쳤냐고 제 목을 조르실 것이 자명하여(...) 그냥 2권까지 작업 끝냈습니다.


여름 에피가 어떠셨을지 모르겠어요. 일단 봄보다는 무겁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근데 사실 여름보다는 가을이, 가을보다는 겨울이 훨씬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뭐 이 정도는 주의사항 보신 분들이라면 이미 각오하셨겠죠?^ㅁ^


봄의 결말이 호크모스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었다면, 여름의 결말은 펠릭스가 숙부가 호크모스라는 걸 확인하는 것입니다. 파트별로 정해놓은 주제와 결말이 있는데 이번 회지에서 구상대로 잘 흘러간 거 같아서 기쁩니다.


개인적으로 1권도 재밌었지만 2권이 정말 재밌었습니다. 그만큼 힘들기도 했지만요. 왜냐하면 읽으시는 분들도 힘드시겠지만 작업할 때 제 멘탈도 같이 깨져갔기 때문이죠. 바스스스... 심지어 저는 모든 서사와 내용과 결말까지 다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에요. 이입해야 하니까.. 음 스포는 아니지만 펠릭마리는 정말 정신력이 캐짱쎈 아이들입니다bb


트레일러에 기반해 가급적 안정된 서사와 완벽한 결말을 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일단 제 최대 목표는 주의사항에도 적어놓았지만 트레일러의 재현이었거든요. 제가 보고 싶었으니까요 투디..ㅠㅠㅠ 실제로 1권 내용만 보셔도 트레일러에 나온 몇몇 장면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나머지는 2권에서 나올 예정입니다.


오랜만의 장편이라 그런지, 에피소드 구상과 배치에만도 정말 많이 시간을 잡아먹었는데 다들 재미있다고 감상을 주셔서 기쁩니다ㅠㅠㅠ 오랜만에 장편 작업하니 생각보다 너무 기력빠져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으윽... 2차에서 장편은 이걸 마지막으로 하고 싶네요 너무 힘들어요(mm 이게 다 펠릭마리가 예쁜 탓이고 감독님이 본편을 주지 않으시는 탓입니다(떠넘김(감독님: 야


너무 사담이 길었네요ㅇ0ㅇ 원체 후기적는 걸 좋아해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시어요(mm 


1월에 뵙겠습니다>< 감상 늘 감사드립니다>ㅁ<)/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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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11.

벗겨진 가면






“티키, 티키!”



마리네뜨가 다급한 표정으로 티키를 불렀다. 한 손에는 옅은 푸른색의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다른 쪽에는 흰색과 붉은색이 조화롭게 섞인 깜찍한 원피스를 들고서 마리네뜨가 질문했다. 



“이거랑, 이거. 어느 게 더 괜찮아?”



자기 몸에 옷을 대보며 진지하게 묻는 마리네뜨에 티키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붉은색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게 말하며 마리네뜨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런 마리네뜨의 주변에는 온갖 옷가지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도대체 몇 벌을 꺼낸 건지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이는 바닥 위에서 마리네뜨는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이제 며칠 후면 드디어 펠릭스와의 데이트 날이라구!”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행복해하는 마리네뜨를 티키는 못 말리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도 흐뭇하게 웃었다. 어쨌든 소원대로 데이트를 하게 되었으니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사실 메인은 오페라였지만, 지금 오페라가 얼마나 훌륭하고 말고는 마리네뜨에게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줄거리를 꼼꼼히 읽어보니 재밌을 것 같기는 했지만 당장 자신이 무대에 집중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헉, 펠릭스한테 이상한 애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계속 펠릭스만 쳐다보지 않게 조심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다시금 희희낙락 웃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리네뜨, 아직 3일이나 남았어.”

“‘3일밖에’ 안 남은 거겠지~”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하는 마리네뜨의 표정에 결국 티키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어휴, 못 말리겠다. 그런데 이거 정리는 언제….”



티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마리네뜨는 원피스를 들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몇 번을 꾸물꾸물거리다 마리네뜨는 이내 힘을 빼고 침대에 축 늘어졌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앞으로 티키가 다가왔다. 날아오는 티키를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붙잡고 마리네뜨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토요일이 왔으면 좋겠다~”



행복해.






“에에취!”



커다란 재채기 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처럼 서재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펠릭스에게 플랙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감기라도 걸렸어?”

“별로.”



누가 내 얘기라도 하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를 문지르며 중얼거리는 펠릭스에 플랙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누구라면, 그 여자애?”

“그럴지도 모르지.”



하아.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이내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낄낄거렸다.



“그나저나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걔랑 만나기로 한 거야?”



더욱 깊게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의 모습에 플랙은 더욱 싱글벙글 웃으며 펠릭스를 놀려먹었다.



“귀찮다고 죄다 거절하던 건 언제고~? 응? 나 몰래 너희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능글맞게 웃으며 질문폭탄을 던지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 녀석이 레이디버그일 지도 몰라.”

“걔가?”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는 플랙과 달리 펠릭스의 눈빛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닮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둘 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머리를 묶고 다니는 스타일도 말투도 전부 비슷했다. 왜 이걸 이제야 눈치챘나 싶을 정도로.



“확인해 볼 생각이야.”



진짜 레이디버그인지 아닌지.


다짐하듯 대답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흐음…. 뭐 그건 네 자유기는 하지만, 조심하라구.”

“알고 있어.”

“가뜩이나 레이디버그한테 붙은 녀석은 귀찮단 말이야.”

“…어떤 점에서?”

“잔소리가 심하거든~!”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하는 플랙에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플랙이 저렇게 말하는 상대라면 보통 끈기를 가진 게 아닐 것이다. 말만 들어도 왠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 같다.



“아, 너 또 이상한 생각했지?”

“아닌데.”



휙 고개를 돌리며 부정하는 펠릭스의 모습을 플랙이 수상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다시 낄낄 웃었다.



“이야, 아무튼 재밌어지겠네!”



공중에서 빙글빙글 서재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짜증스레 말했다.



“너 제발 거기 가서는 가만히 있어. 정체를 확인하러 갔다가 역으로 들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맨입으로?”

“치즈 한 판이면 되지?”

“콜!”



신났는지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하는 플랙의 몸에서 새까만 빛이 가루처럼 떨어졌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서재 안이 들썩거렸다. 펠릭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너 가만히 좀 있어!”

“냐하하하~!”



펠릭스가 뭐라든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돌아다니던 플랙이 어느 책장 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플랙을 보고 펠릭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파트너, 이 책은 뭐야?”

“야! 만지지 마!”



이미 늦었다. 우르르 쏟아지는 책 더미를 보며 펠릭스의 얼굴에는 또 다시 고뇌가 서렸다. 이미 떨어진 거 어쩌겠냐 싶어서 그저 한숨지으며 책을 줍기 시작하던 펠릭스는 떨어진 책 중 하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뭔데, 뭔데?”

“…아버지가 좋아했던 책이야.”



씁쓸한 표정으로 나직히 중얼거리며 펠릭스는 그 책을 고이 집어들어 탁탁 털었다. 먼지가 많이 묻어나는 걸 보면 확실히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르긴 했던 모양이다. 부모님의 사고 이후로 두 분의 물건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었으니까. 최근에서야 조금씩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상당히 독특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호탕하게 웃고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며 작은 어린아이와도 늘 진심으로 놀아줄 수 있는 사람. 사실 지금도 조금은 그리웠다. 아버지라면 분명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진심으로 이해해줄 텐데.



“…그러고 보면 옛날에 아버지가 그랬었지. 자기의 꿈은 요정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이야.”


‘우리 아들~ 아빠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오호, 꿈이 크시구만?”



낄낄거리며 웃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게. 너처럼 속 썩이는 녀석이라는 걸 아셨으면 진작에 환상을 버리셨을 텐데.”

“너무하네~ 내가 뭐 어때서?”


‘요정은 실존한단다. 분명히.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플랙과 투닥거리면서도 펠릭스는 점점 많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 묵혀 두어서 거의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고고학을 연구해서인지 아버지는 세계 곳곳의 나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우화들이나 전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야기처럼 자신에게 들려주곤 했다. 요정에 대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요정에 대해 말하면서, 아버지가 지겹도록 자주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붉은 동그라미에 검은 점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요정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네.’


펠릭스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잠깐만.


‘검은 고양이는 늘 외톨이. 하지만 그들은 고독하기에 오히려 더 영리하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깜짝 놀라는 펠릭스의 얼굴을 보고 플랙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뭔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기적을 담아.’

“잉?”

‘기회는 단 한 번뿐. 그렇기에 기적이란 아름다운 것이라네.’



가만히 중얼거리던 펠릭스가 그 순간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책장 쪽으로 다가갔다. 어딘지 나사 하나 빠진 얼굴로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는 펠릭스를 보며 플랙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너 뭐해?”

“이 노래가 적혀 있는 책이 있었어. 잠깐만.”



기억을 되짚어가며 책장을 찾는 펠릭스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대화가 필름을 감는 것처럼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빠, 그건 대체 무슨 노래야?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말하는 게 제대로 안 이어지잖아!’

‘하하, 아들. 언젠가 아들도 이 노래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야.’

‘지금 알려주면 안 돼?’

‘안 돼. 이걸 이해하기에 우리 아들은 아직 어리니까~’

‘쳇.’


그 때, 울상이던 자신을 보며 난처해하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으며 제게 말했었다.


‘그럼, 대신 이렇게 하면 어때?’


그 말과 함께 아버지는 맨 위쪽에 있던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보여주며 눈을 찡긋거렸다.


‘만약 우리 아들이 아버지가 알려주기 전에 이 노래를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이 책을 찾아보렴. 원하는 것을 모두 알 수 있을 테니까. 단, 그 전까지는 손대지 않기!’


금빛으로 빛나는 글씨가 박힌 자주색의 책이었다. 독특한 생김새라 어떻게 생겼는지도 어디에 꽂혀 있었는지도 대충 기억이 난다.


물론 이건 어린 시절부터 서재에서 살다시피 했던 펠릭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이 넓은 서재에서 9년이나 전에 꽂아두었던 책 한 권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찾았다.”



나직히 중얼거리며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자주빛 책등으로 손을 뻗어 책을 꺼내들었다. 사다리에 매달린 채로 책의 표지를 넘겨보던 펠릭스의 손이 멈칫했다.


책 안은 백지였다. 어떤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멍해 있는 펠릭스의 곁으로 휙 날아온 플랙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게 뭐야?”

“잘못 찾았나? 아니야, 분명 이거였는데….”



그렇게 말하기도 잠시,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는 책장에 펠릭스는 놀라서 사다리를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부드럽게 바닥을 구르며 90°로 벌어지던 책장이 펠릭스의 코끝에서 우뚝 멈춰섰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펠릭스는 책장이 서 있던 자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문이 있었다. 상당히 오래 사용하지 않았는지 꽤나 낡아있는 나무문은 손으로 밀기만 해도 끼익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조심조심 다가간 펠릭스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열리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펠릭스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가, 도약하면서 문을 세게 발로 찼다. 문이 부숴지면서 방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드러난 방 안을 보며 펠릭스는 깜짝 놀랐다.



“이건…!!”



한 10평 정도의, 사람 한 사람이 들어가서 작업하면 딱 좋을 듯한 작은 방이었다. 방 안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가운데에 놓여 있는 갈색의 나무 탁자와 의자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서려던 펠릭스는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방 안을 둘러보더니, 뒤로 돌아갔다가 제 필통에 있던 지우개를 가져와 방 안으로 던져보았다.


툭, 데구르르…. 별 문제 없이 방 안으로 굴러가는 지우개를 보며 펠릭스는 조용히 생각했다. 위험한 건 없나 보군.


조심스럽게 문설주를 넘어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던 펠릭스는 나무 책상 바로 뒤쪽에 놓여 있는 커다란 강철 상자를 발견했다. 아까는 책상에 가려져서 안 보였던 모양이다. 열쇠구멍 하나가 달려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특징도 없어 보이는 강철 상자는 옛날의 정취를 고스란히 가져왔다 평가될 만한 이 낡은 방과 대조되어서인지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풍겼다.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펠릭스는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뚜껑을 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것에 난감해졌다. 역시 열쇠가 있어야 하나. 하지만 열쇠 구멍을 살펴보니 딱 보기에도 모양이 상당히 독특했다. 집에 있는 열쇠들 중에 이런 모양의 열쇠가 있었던가. 일단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펠릭스의 옆으로 플랙이 날아왔다.



“뭐야, 왜 그래 파트너? 이거 안 열어봐?”

“…열쇠가 없는데 어떻게 열어. 잠깐만, 일단 열쇠를 가지고 와야.”

“흐흥~? 그런 게 왜 필요해?”

“뭐?”



씨익 웃던 플랙이 쏜살같이 상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펠릭스가 말릴 틈도 없이 플랙이 상자를 통과해 들어가고 한참 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상자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상자의 뚜껑이 툭 소리와 함께 열리면서 플랙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휘잉 돌아다니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 재주도 있었어?”

“그럼~ 예전에 많이 써먹었지!”



키득키득 웃고 있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에 썼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써먹었을 것 같아 묻기도 겁난다.


어쨌든 수고를 덜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펠릭스는 가만히 상자 속을 살펴보았다. 상자 안에는 두꺼운 몇 권의 노트와 더불어 다발로 묶인 종이뭉치 등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종이 자체는 꽤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끽해야 5~10년 정도? 노트와 종이들에는 하나같이 빽빽하게 무어라 적혀 있었는데, 프랑스어가 아닌 괴상한 문양의 글자들도 같이 적혀 있었다.


뭐가 더 없을까 생각하며 상자 속을 뒤적거리던 펠릭스의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손에 닿는 맨들맨들한 촉감이 종이와는 확연히 달랐다. 조심스럽게 상자 속에서 빼낸 물건은 짙은 파란색으로 된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상자였다. 다행히도 열쇠는 없었고 작은 고리 하나가 달려 있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상자를 열어본 펠릭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책이었다. 엄청나게 낡은 책. 다른 종이뭉치나 노트들과는 달리 붉은 가죽으로 된 테두리에는 얼룩이 가득 져 있었고, 살짝 펴본 책의 종이는 굉장히 낡아 있었다. 게다가 사용된 종이는 적어도 몇 세기 전에 사용했을 법한 재질로 되어 있었다. 족히 몇백 년은 묵었을 법한 책이었지만, 낡았다는 점을 빼면 종이의 상태는 아직도 양호한 편이었으며 글씨들도 상당히 선명했다. 펠릭스는 다른 것보다 이 점이 가장 신기했다. 무슨 수를 쓴 거지?


첫 장을 폈지만 당최 무슨 말인지 읽을 수가 없는 글자들이 수두룩했다. 고대어인가? 생각하며 몇 장을 더 넘기다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책이 든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건…?!”



책에는 글자만이 아니라 그림들도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펠릭스가 펴든 페이지에 그려져 있는 건 붉은 바탕에 검은 점박이가 박힌 옷을 입고 있는 누군가의 그림이었다. 황급히 다음 장들을 넘기자 다양한 옷을 입은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블랙캣은 물론이고 전혀 모르겠는 몇몇의 사람들을 지나, 호크모스가 있는 페이지를 발견하고서 펠릭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왜 여기에….”

“파트너~ 이쪽에도 뭐가 있는데?”



플랙이 부르는 소리에 펠릭스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새 모두 열어젖혀져 있는 책상의 서랍들을 보며 펠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플랙, 아무거나 뒤지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뭐 종이같은 게 있는데에~? 어디, 누가 쓴 걸까나~”



언제나처럼 펠릭스의 말을 무시하고 종이 하나를 꺼내든 플랙이 쫙 펼친 종이를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친애하는 펠릭스에게? 우웩, 닭살 돋는구만. 파트너, 이거 너한테 쓴 거 같은데?”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플랙에게서 편지를 낚아챘다. 빠르게 편지를 읽어내리는 펠릭스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편지를 다 읽고 잠시간 말이 없던 펠릭스는 곧바로 플랙에게 물었다.



“편지가 이거 한 통 뿐이야?”

“으음, 아니~? 저기 가지런히 쌓여 있던데? 날짜까지 제대로 적혀 있더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서랍에 들어 있는 편지들을 닥치는 대로 꺼내기 시작했다. 묵묵히 종이를 훑어보면서 날짜 순서대로 분류하기 시작하는 펠릭스의 주변을 날아다니던 플랙은 그런 펠릭스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뭐야, 그거 누군데?”



편지들을 모두 정리한 펠릭스가 가장 처음에 쓰여진 편지라 추정되는 종이를 집어들었다. 천천히, 침착하게 편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펠릭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




『펠릭스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지금 너는 몇 살쯤 되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이 편지를 읽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만약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적어도 서재 안에 있는 비밀 방을 발견했다는 거겠지. 나와 너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모르면 절대 방을 발견할 수 없을 테니 그는 걱정하지 않는단다.


가급적 네가 어른이 된 뒤에 내 손으로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으니까 말이다.


언제 내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이 편지를 남긴다.


아직 어린 아이인 너를 보며 벌써부터 죽음을 생각하는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무슨 소리지? 펠릭스는 천천히 다음 구절을 읽어내렸다.



『지금 나는 네게 무척이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남기려고 한단다.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조차도 네 선택이니 존중해야겠지. 하지만 이 편지에 담긴 내용들은 하나부터 끝까지 모두 진실임을 맹세하겠다. 그러니 끝까지 읽어주기를 바란다.』



그 말과 함께 편지에는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오래 전의 쓰여진 편지에서도 더한 과거를 회상한다는 점에서 조금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는 놀라운 일이 한 가득이지. 개중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상식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한 일들도 많단다. 내가 고고학자를 꿈꾸게 된 것도 바로 그런 놀라운 일들에 대한 진실을 탐구해보고자 했던 열망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펠릭스. 사실 내가 고고학자를 꿈꾸게 된 근본적인 계기는 바로 이 집에 있었단다. 네가 발견했을 이 비밀 방은 내가 만든 게 아니야. 오래 전부터 이 집에 존재해왔던 거지.』



오래 전부터?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했다. 유지공사를 좀 하기는 했지만 이 저택이 만들어진 건 자신이 알기로도 대략 몇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럼 그 때부터 계속 이런 공간이 존재했었다는 말인가?



『옆에 있는 금고를 열어봤을지 모르겠구나. 안에 많은 종이뭉치들이 들어 있지? 그건 내가 아직 성인이 되기 전, 이 방을 발견했던 당시부터 계속해서 꾸준히 연구해왔던 모든 것이란다.』



성인이 되기 전이라면 지금 자신의 나이 또래인 걸까. 자신과 아버지가 비슷한 시기에 이 곳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니 기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낡은 책 한 권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



그 한 구절이 펠릭스의 마음 속에 쿡 박혀왔다. 한참을 그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펠릭스는 애써 밑의 문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책은 아주 오래 전, 매우 영리하고 똑똑한 학자의 손에 쓰여진 것이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져버린 여명 같은 사람이었지. 이 책에서는 그 학자가 알아낸, ‘미라큘러스’ 라는 신비한 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빠르게 편지의 마지막 구절로 시선을 돌렸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구나. 얘기해주마. 내가 최대한으로 알아낸, 우리 가문에 얽힌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를.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읽어내리던 펠릭스의 손이 힘없이 편지를 놓쳤다.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지는 편지에 적혀 있는 마지막 구절이 청회색 눈동자에 선명하게 찍혔다.



『네 어머니의 친가인, 유피테르 가문에 대해서도.』






“펠릭스?”

“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색 원피스를 차려입고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본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멍해졌다. 어딘지 얼이 빠진 듯한 얼굴에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짧은 대답과 함께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의 시선에 마리네뜨의 얼굴에는 살짝 홍조가 피어났다. 쑥스러운지 눈을 데록데록 굴리던 마리네뜨가 밝게 소리쳤다.



“그래? 그럼 들어가자! 곧 시작이야~!”



그렇게 말하며 마리네뜨가 손을 펠릭스에게로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헤헤 웃으며 그냥 뒤돌아서 오페라하우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마리네뜨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펠릭스는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순간 레이디버그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이 정도면 중증이라고 생각하며 펠릭스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자신을 앞서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어가는 마리네뜨를 부지런히 쫓아가면서도 펠릭스는 제 머릿속을 잠식하는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우연한 기회로 발견한 비밀 방에서 그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자료들과 편지들을 발견했다. 밤새 편지들을 모두 꼼꼼하게 읽고 나서야 펠릭스는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금고 속에 담겨 있던 해석본들을 꾸준히 읽어보았지만 미처 다 읽지 못했다. 그만큼 많았고, 그걸 차치하고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종종 보였다. 전체를 해석한 해석본보다는 부분부분씩 해석해놓은 종이들이 더 많았는데, 그 이유는 책이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펠릭스의 아버지, 라파엘 아그레스트의 편지에 저술되어 있었다.


그래도 상당히 많은 양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단순히 책을 해설해놓은 것만이 아니라, 책에 쓰인 고대어를 어떻게 읽는지에 대한 방법까지 노트에 자세하게 남겨두고 간 아버지의 선견지명에 펠릭스는 혀를 내둘렀다. 사실 상자에는 책에 대한 해석본뿐만 아니라 연구 일지들, 과거에 나타났던 히어로들이 활동했던 당시의 이야기들에 관해서도 적혀 있었다. 이건 분명 아버지가 따로 조사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이것을 같이 보지 못해서 안타깝기도 했다.


그리고 편지에서 좀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신빙성 없는 소리를 적어놓으실 성격이 아니니 어느 정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펠릭스?”

“…어?”



어느 샌가 제 앞으로 다가온 마리네뜨의 얼굴에 펠릭스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놓고 놀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펠릭스를 보며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오늘 왠지 멍한 느낌이네?”

“…잠을 잘 못 자서.”



사실이었다. 자료들을 읽느라 밤을 거의 샌 건 사실이니까. 낮에 좀 자긴 했지만 아직도 조금은 피곤했고.



“빨리 가자. 곧 들어갈 시간이라잖아.”



별 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 마리네뜨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빠르게 걸어가는 마리네뜨를 바라보며 펠릭스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차리자.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 녀석이 레이디버그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은 여기에 왔고, 제대로 물어봐야만 했다. 그런데 자꾸 한눈을 팔면 어쩌자는 거야?


관객석으로 가는 문을 열자 웅장한 팔레 가르니에의 내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급스러운 붉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들이 금빛 난간과 기둥들 사이로 치아처럼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아직 극이 시작하지 않아 객석 안은 살짝 어두웠고 무대는 붉은 천으로 감추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샹들리에까지. 어마무시하게 화려한 풍경에 마리네뜨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반면 펠릭스는 익숙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마리네뜨가 가진 표는 앞에서 네 번째 줄의 정 가운데였다. 이곳에 앉으니 무대가 한 눈에 보였다. 괜히 VIP석이 아니구나 싶어 속으로 감탄하던 찰나, 제 옆에 와서 조용히 앉은 펠릭스의 움직임에 마리네뜨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펠릭스와 단 둘이 오페라를 보러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절로 긴장되는 손끝을 애써 우그리며 마리네뜨는 방금 전에 가지고 온 팜플렛에 얼굴을 묻고 생각을 딴 데로 돌리려고 애썼다.


팜플렛을 열자마자 바로 맨 앞에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자의 사진이 보였다. 고혹적인 눈매에 단정한 이목구비, 살짝 짓는 미소는 무척 매력적이었으며 왼쪽 눈가에 찍힌 눈물점조차도 사랑스러웠다. 미인(美人)이라는 말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한동안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자의 사진 밑으로 작게 뭐라고 적혀 있었다.


<비올라 역, 실비아 에스프랑>


오페라 <십이야>의 주연인 비올라의 이름을 본 마리네뜨는 며칠 전 읽어보았던 십이야의 시놉시스를 떠올렸다.


살아남기 위해 남장을 했지만 자신을 고용한 백작을 사랑하게 되어 고뇌하게 되는 여인.


정체를 숨기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마리네뜨는 살짝 궁금해졌다.


비올라의 정체를 끝내 몰랐다면, 백작은 결국 비올라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까?


한편, 마리네뜨와는 별개의 이유로 펠릭스도 팜플렛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물론 그는 배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마리네뜨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오페라가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제작되게 되었는지 그 세세한 과정까지도 펠릭스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투자자 중에 자신이 잘 아는 남자가 있었으니까.


펠릭스는 지금 오페라의 내용을 새삼 되새겨보고 있었다. 오페라에서 보여주는 상황은 재미있게도 지금 그들의 상황을 나름대로 정확히 그려내고 있었다. 변장을 하는 남장을 하고 백작에게 고용되는 비올라. 하지만 백작은 올리비아를 사랑하고 있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비올라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엇갈리다 맺어지는 이야기. 펠릭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한결같이 자신을 바라보는 비올라가 아닌 다른 여자만을 바라보던 백작. 비올라는 그런 백작을 원망했을까?


그러던 중, 마리네뜨의 뇌리에 섬뜩한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가 물었다.



“왜 그래?”

“응? 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이상한?”

“근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뭔가 음, 느낌이 좋지 않…, 달까?”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말하고서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마리네뜨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이 바보야. 데이트하고 있는데 불길하다는 말이나 하고 있으면 어떡해! 마음 같아서는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지만 차마 펠릭스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일념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그런 마리네뜨를 내버려두고 펠릭스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시작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인지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들어온 상태였다. 그러던 중 펠릭스는 옆쪽에 붙은 객석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몇몇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멀어서 아주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신문이나 뉴스에서 자주 보던 얼굴들이었다. 몇몇 정치가들과 사업가들이 무리지어 앉아 뭐라고 소곤대거나, 위쪽에 달려 있는 객석에서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무대 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초연이라서 그런가. 이 오페라가 파리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그쪽에서도 관심을 가질 줄이야.


이런 유명인사들이 어쩌다 이렇게 많이 모이게 된 거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괜한 불길함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펠릭스가 마리네뜨에게 뭐라 더 물어보려던 순간, 불이 꺼지고 무대가 시작되었다.





오페라 <십이야>는 셰익스피어가 써낸 희곡 ‘십이야’ 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쌍둥이 남매 세바스찬과 비올라는 폭풍으로 인해 배가 침몰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어느 섬에 정박한 비올라는 백작이 고용인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장을 하고서 백작을 찾아간다. 백작의 곁에서 백작을 위해 일하는 동안 비올라는 백작을 사랑하게 되지만, 백작이 올리비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백작의 앞에서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입장에 괴로워하게 된다.


1막이 진행되는 와중 펠릭스는 힐끔 시선을 돌려 마리네뜨를 살펴보았다. 자신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때의 그 호기는 어디다 버려둔 건지 반짝거리는 눈으로 무대를 쳐다보고 있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펠릭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정말 네가 레이디버그일까?


오늘 하루만도 몇 번씩 되새겼던 질문들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는 펠릭스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대체 뭘 확인하려고 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레이디버그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자신이 펠릭스는 무척 낯설었다. 생각해보면 그 전까지만 해도 레이디버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체를 그렇게 막 궁금해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걸까. 어째서?


오빠인 세바스찬을 그리워하며 노래부르는 비올라의 움직임을 멍하니 좇고 있던 마리네뜨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단번에 직감했다.


보고 있어.


왜 오페라가 아니라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까. 여기서 돌아봤다간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버릴 것만 같아서 마리네뜨는 다시 무대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긴장으로 손에 자꾸 땀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참 뒤에도 거두어질 기미가 없는 시선에 마리네뜨는 울고 싶어졌다.


돌아보고 싶어, 돌아보고 싶어, 돌아보고 싶어!!


괜찮을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마리네뜨에 펠릭스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마리네뜨를 마주보았다.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환한 불빛이 한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놀란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나던 순간, 마리네뜨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참지 못하고 마리네뜨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


객석의 불이 켜졌다.


1막이 끝났다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휴식 시간을 맞아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괜히 뻘쭘해져서 아무런 말도 못하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물.”

“어, 어?”

“사러 갈 건데. 마실 거야?”

“어, 응!! 고, 고마워.”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를 힐끗 돌아보다가 펠릭스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아, 긴장해서 죽는 줄 알았네.”



아직 주변에 사람들이 꽤 남아 있어 티키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가만히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마리네뜨는 문득 입구 쪽이 묘하게 소란스럽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지?”





물을 사고 곧바로 극장으로 돌아오다가, 방금 전보다 급격하게 늘어난 경비원들의 숫자를 본 펠릭스의 얼굴에 미미하게 경련이 일었다. 침착하게 최대한 경비원들 가까이 접근한 펠릭스는 지금 몇몇 사람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이야기를 주워듣자마자 다시 발길을 돌려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번쩍, 빛과 함께 변신한 블랙캣이 어스름한 복도를 재빨리 벗어나 창문 쪽으로 향했다.



“밖인가?”



가만히 중얼거리던 블랙캣이 창문에 발을 올려놓은 순간 건물 전체가 덜덜 요동쳤다. 그에 난리가 났는지 제가 지나온 통로 쪽이 웅성거리는 목소리들로 소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쳇, 혀를 차며 블랙캣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남겨두고 온 마리네뜨가 걱정되었지만 괜찮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벽을 타고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올라갔다. 건물 옥상에 올라서자마자 낯익은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묶여 있는 몇 명의 사람들과 그들 앞에 서 있는 셰이드 플뢰르와 마임맨을 보자마자 블랙캣은 재빨리 구석으로 숨었다. 살금살금 다가간 블랙캣이 그들의 근처에 숨어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제, 제발. 살려 주시게.”



애원하는 남자에게 바로 앞에 서 있던 셰이드 플뢰르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럼 우리를 배신하지 말았어야지.”



배신? 이상한 단어에 블랙캣은 귀를 쫑긋거렸다. 셰이드가 이어서 말했다.



“조직을 배신하면 곧 죽음뿐. 여기서 오래 지내본 당신들이 그걸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

“그분께서는 당신들의 행동을 몰라서 내버려두신 게 아니야. 꼬리를 잡기 위해 기다린 거지. 접신 장소를 대범하게 이런 곳으로 잡은 건 칭찬해주지.”



잡기도 쉬웠으니까. 무심하게 대꾸하는 셰이드에게 남자들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 하지만…! 그 계획은 너무나 터무니없지 않소.”



항의하는 남자의 모습에 블랙캣은 점점 더 숨을 죽였다. 그런데 목소리를 죽였는지 그 다음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뭐라는 거지? 더 정확하게 듣기 위해 조금 더 살짝 고개를 숙이는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날아오는 느낌에 블랙캣은 간신히 얼굴을 숙여 그것을 피했다. 이미 들켰다는 생각에 순순히 앞으로 걸어나온 블랙캣의 모습에 셰이드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블랙캣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눈치챈 건 저 형씨 뿐이었던가.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보통 눈치가 아닌 건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같은 악당이 분명한데도 셰이드 플뢰르와 달리 저 자에게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지?


설마, 기척을 감출 수도 있는 건가? 가뜩이나 성가셔 보이는 상대한테 골치 아픈 능력까지 있군.


블랙캣이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말했다.



“어이쿠, 대단하네. 설마 그걸 눈치챌 줄이야.”



비아냥섞인 칭찬에도 마임맨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블랙캣은 다시금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형씨는 그 때 보고 오랜만에 보는 걸. 이름이 뭐야?”



여전히 침묵. 알려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왠지 펠릭스로서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상대라고 생각하며 블랙캣은 가방에서 봉을 꺼내 한 바퀴 휘두르다가 그들을 향해 겨누며 씨익 웃었다.



“선량한 시민들을 괴롭히다니, 그건 안 되지~!”

“쳇.”



블랙캣을 보자마자 셰이드는 묶여 있던 남자들에게로 한 손을 뻗었다. 그들 주변으로 꽃 모양의 그림자가 그려지고, 가장자리에서 스멀스멀 연기처럼 올라오기 시작하던 그림자들이 곧 날카로운 창이 되어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피와 비명을 흩뿌리며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블랙캣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신들 미쳤어?”

“지금 저 자들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셰이드가 손을 뻗자마자 블랙캣의 그림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곧바로 제 그림자 밑에서 날아드는 날카로운 가시들을 간신히 피한 블랙캣이 폴짝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셰이드는 재빨리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창을 꺼내 블랙캣에게로 던졌다. 날아오는 창에 깜짝 놀란 블랙캣은 가방에서 방패를 꺼내 창을 튕겨내고 간신히 옥상 바닥에 착지했다. 블랙캣의 얼굴에 살짝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나만도 벅찬데 둘이나 있다니.


전혀 흠집 하나 없는 방패를 내려다보며 블랙캣은 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다른 미라큘러스에 의해 만들어진 악당이라서 그런지 파워는 확실히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무시할 수 있는 위력은 또 아니었다. 지금이야 한 명을 상대하고 있으니 그럭저럭 버티는 거지만 옆에 있는 저 남자가 덤비기 시작하면 일이 귀찮아진다.


그러고 보면 방금 뭐였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는데, 마치 다트를 던지듯 손을 움직였다. 방금 제 얼굴 옆으로 무언가 스쳐 지나가던 감각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존재한 무언가.


잠깐, 그러고 보니 저 손동작은….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긴가민가하며 블랙캣은 중얼거렸다.



“…팬터마임?”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자가 살짝 눈을 치켜뜨더니 손을 들어 무언가를 던졌다.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하자 바닥으로 챙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또 다시 제게 날아오는 그림자로 된 검날에 블랙캣은 속으로 하핫 웃었다.


이거 진짜 살 떨리는데.


챙- 튕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블랙캣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붉은 머리끈을 휘날리며 제 앞에 서 있는 레이디버그를 올려다보며 블랙캣은 피식 웃었다.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건데.


이러면 정말 의심하게 되잖아.



“여, 레이디.”

“블랙캣, 너 괜찮아? 쟤넨 또 뭐야?!”



힐끔 블랙캣을 돌아보다가 다시 악당들을 노려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나지막히 속삭였다.



“레이디, 한 명씩 맡아야 할 거 같아. 미안한데, 저 하얀 녀석을 상대할 수 있겠어?”

“저 남자? 못할 건 없지.”



선선히 대답하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땡큐. 그럼 일단, 그림자가 질 만한 장소로 저 자식을 유인해 가도록 해. 안 그러면 좀 위험하니까.”

“그림자? 왜?”

“저 녀석의 능력이 뭔지 알 거 같아. 녀석은 팬터마임 능력자야.”

“팬터마임이라고?!”



깜짝 놀라서 자신을 돌아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끄덕였다. 툭툭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 손을 집어넣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말했다.



“근데 왜 굳이 네가 저쪽을 맡겠다는 건데?”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마 맞을 거 같긴 하지만.”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편한 대로 해.”

“오케이.”



그들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분위기를 살피던 블랙캣이 가방에서 거대한 창을 꺼내더니 정확히 셰이드와 마임맨이 서 있는 중앙을 향해 던졌다. 창을 피하기 위해 두 악당이 양 옆으로 갈라지자마자 레이디버그는 마임맨에게로 달려들어 발을 휘둘렀다. 그것을 가볍게 막아내며 뒤로 물러나는 마임맨을 향해 레이디버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마임맨을 조금씩 뒤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편 블랙캣은 셰이드 플뢰르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림자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셰이드 때문에 바닥에 발을 거의 디딜 수가 없었는지라 블랙캣은 공중을 뛰어다니며 탐색전을 펼쳤다.


‘그림자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건 한 가지씩뿐.’


두 개 이상을 꺼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제약은 자신들과 비슷한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가방에서 너클 한 쌍을 꺼내들어 손에 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약점은.


가까이 접근하는 블랙캣에 셰이드는 그림자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블랙캣이 한 발 더 빨랐다. 재빠르게 그림자를 피해 블랙캣이 주먹을 휘두르자 셰이드는 양 팔을 X자로 모아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림자에서 검을 꺼내드는 셰이드의 모습에 블랙캣이 픽 웃으며 조롱했다.



“역시, 반응속도가 느리군.”



그림자에서 무언가를 꺼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5초 정도. 물론 일반인이 대응하기에는 무척 짧은 시간이지만 히어로라면 경우가 달랐다.

두 손을 흔들며 블랙캣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검을 휘둘러 너클을 막아내는 셰이드의 얼굴에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블랙캣은 달랐다. 자신은 그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블랙캣의 눈에 찾고 있던 것이 스쳐 지나갔다.


왼쪽 얼굴 밑에 있을 눈물점.


긴 발톱들이 달린 너클로 셰이드의 검과 맞부딪히던 순간, 블랙캣이 조용히 속삭였다.



“…실비아 에스프랑?”



블랙캣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셰이드의 몸이 한 순간 싸악 굳었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않은 블랙캣의 주먹이 셰이드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혔다. 쿨럭,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셰이드를 보며 블랙캣은 큰일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의외로 순진하네. 악당이 그래서 쓰겠어?”



가면을 쓰고 있는데 눈가가 보일 리가 없잖아.


한심하다는 듯이 내뱉는 블랙캣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셰이드 플뢰르를 내버려두고 블랙캣은 서둘러 레이디버그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상당히 일방적으로 끝난 블랙캣과 셰이드의 대결과는 달리, 레이디버그와 마임맨은 꽤 아슬아슬한 승부를 보이고 있었다.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의 옥상에서 벗어나 근처 건물들의 지붕 위로 내려와 숨가쁘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임맨은 신체능력도 뛰어났지만 머리도 무척이나 좋은 악당이었다. 무엇보다 본인의 능력을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격투술도 뛰어났지만 중간중간 무기를 꺼내들고 움직이는 통에 레이디버그는 계속 마임맨의 그림자를 보며 그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는지를 신경써야 했다.


몇 번의 합을 주고받다가 세게 밀려난 레이디버그의 등 뒤에 차가운 촉감이 닿았다. 벽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레이디버그의 앞으로 빠르게 파고든 마임맨이 다시 무언가를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힐끗 그림자를 보고서 그가 망치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공격을 피했다.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귓가에 무섭도록 선명하게 꽂혔다.


피어나는 먼지들 사이에서 뛰어나온 레이디버그가 다시 마임맨에게 발을 휘둘렀다. 벽이 부서지는 반동에 잠깐 자세가 흐트러졌던 마임맨이 레이디버그의 발차기를 막으며 몇 발자국 뒷걸음질쳤다가, 있는 힘껏 자신을 걷어차는 레이디버그에 밀려 크게 뒤로 물러났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상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레이디버그가 살짝 빨랐는지, 아슬아슬하게 레이디버그의 주먹을 피한 마임맨이 레이디버그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공격을 막기 위해 두 손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피할 수 없어-!


그 순간, 새까만 무언가가 레이디버그를 꼭 끌어안았다. 곧이어 공기가 진동할 정도로 커다랗게 퍽, 소리가 났지만 레이디버그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신체적으로는 분명 그랬다. 자신을 막아서며 씨익 웃는 얼굴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뭐야, 왜 니가 여기 있는데?



“블…, 랙캣?”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자신을 끌어안은 채로 제 어깨 위로 추욱 늘어지는 블랙캣의 등을 끌어안자 끈적한 무언가가 손에 가득 묻어났다. 그게 곧 피라는 사실을 알아챈 레이디버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블랙캣!!”



블랙캣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레이디버그를 보고 마임맨은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짐작했다. 마저 해치울까라는 고민이 드는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경찰들이 도착하기 전에 뒤처리를 끝내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휙 날아 사라지는 마임맨을 뒤로 한 채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데리고 건물 밑에 있는 골목길로 내려섰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 봐도 전혀 미동조차 없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옥상으로 돌아온 마임맨이 재빨리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죽어버린 사람들의 뒤처리를 해놓은 뒤, 쓰러져 있는 셰이드 플뢰르를 발견한 그가 조용히 셰이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물러나지.”

“쿨럭….”

“임무는 끝났어. 더 이상 쓸데없이 힘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는 셰이드를 들쳐업은 마임맨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휘익 날아 사라지는 마임맨의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신 좀 차려봐, 블랙캣!”



움직이지 않는 블랙캣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레이디버그는 어떻게서든 블랙캣을 깨우기 위해 애썼다. 숨을 쉬고 있는 걸 보니 죽은 건 아니었지만 그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호흡은 거칠었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블랙캣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처럼 심각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레이디버그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어, 어떡하지? 진짜 어떡해?”



블랙캣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주려던 레이디버그가 일순 멈칫했다. 천천히 제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양손에 가득 묻어나는 피에서는 녹슨 쇠 냄새가 났다. 지독한 죽음의 냄새.


그 생각에 흠칫하며 레이디버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야, 안 죽어.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미스터 피죤의 마지막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싫어.



“싫어. 너까지 그렇게 되는 건 싫어.”



고개를 숙인 레이디버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크게 소리치는 레이디버그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나 대신에 네가 그렇게 되는 건 더 싫다고!”



그 때, 블랙캣의 몸에서 검은 오오라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흐릿하게 피어오르던 오오라와 함께 블랙캣의 몸에서 번쩍 빛이 나더니 곧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금발의 무뚝뚝한 얼굴. 상태가 좋지 않은지 얼굴색이 한층 더 창백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기절할 듯이 놀라던 레이디버그가 펠릭스를 내려놓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레이디버그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던 소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흐릿해진 초록빛 눈동자가 레이디버그를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왜…, 울고 있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표정이 지독히도 다정해서 레이디버그는 더 울고 싶어졌다.


너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구나. 전혀 몰랐어.



“왜 그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펠릭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펠릭스는 레이디버그의 눈가로 올린 제 손을 발견했다. 멍하던 머리가 선명하게 걷히자 그제서야 사태 파악이 되는지 펠릭스는 천천히 제 얼굴을 만져보았다.


가면이 없었다. 경악하는 얼굴로 펠릭스가 천천히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라 말하려는지 제 팔을 붙잡는 펠릭스의 손을 레이디버그는 냉정하게 뿌리치고 벌떡 일어섰다. 슬프게 일그러지는 초록빛 눈동자를 알아챌 여유조차 없었다.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생각이 정리되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펠릭스가 블랙캣이었다고? 펠릭스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두려웠던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펠릭스가 뭐라고 말할지도 무서웠지만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너무도 두려웠다. 잘 이어지던 실이 마구 꼬여버린 것만 같았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뒤로 돌아섰다. 기어코 떠나려는 레이디버그의 뒤에서 펠릭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가지 마!”



그래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려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초조해진 펠릭스가 다시금 크게 소리쳤다.



“기다려, 마리네뜨!”



세상이 멈춰버렸다.

그 순간, 레이디버그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췄다.


헉헉 숨을 몰아쉬던 펠릭스가 몸을 일으키려다 짧게 신음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무릎이 꺾일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으니 괜찮은가? 플랙이 했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움직일 수도 있는 걸 보니 치명상은 피한 것 같고.


레이디버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방금 들었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마리네뜨라고?


지금 나를 마리네뜨라고 불렀어?


삐걱삐걱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애써 돌렸다. 필사적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펠릭스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야, 난 저런 펠릭스는 몰라!


다시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펠릭스는 다시금 소리치려고 했다.



“기다리…. 쿨럭쿨럭.”



마치 등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펠릭스는 절로 신음했다. 그래도 계속 레이디버그를 쫓아가려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펠릭스에게 반지에서 빠져나온 플랙이 소리쳤다.



“파트너, 무리하면 안 돼!”

“플랙, 변신을….”

“지금 쫓아가봤자 소용없다고~!! 너랑 말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어 보이잖아!”

“말해야, 해.”



이를 악물고 대답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플랙을 신경쓰던 사이 레이디버그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레이디버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던 펠릭스의 얼굴에 절망이 스며들었다.


벽을 세게 내리치는 펠릭스의 주먹에서 살짝 피가 흘렀다. 낮게 절규하는 목소리가 어두운 골목에 울려퍼졌다.



“젠장!!”




- 12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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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를 적을 때가 참 재미있네요. 사실 2권 전개가 1권보다 더 그러합니다만ㅋㅋㅋㅋ 후기를 회마다 적지 못하는 게 회지의 가장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한답니다.(말많은 애


솔직히 회지를 많이 내본 건 아니지만 나름 두꺼운 애들을 여러 차례 낸 편인데, 이 회지는 그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손이 많이 간 회지입니다. 2차라지만 자료가 너무 부족해서 거의 1차기도 한데 설정들이 너무 빈곤하여 덧대고 뜯어고치고 별 짓을 다 했었죠 콘티 단계에서부터; 콘티를 짜면서 솔직히 예상으로는 페이지 40페이지 정도로 한 30에피쯤은 필요하겠다 싶었는데, 그걸 모두 구상하기엔 제 능력이 부족하고 페이지도 부족하여(...) 현실과 타협해서 가장 필요하다 싶은 핵심 에피소드들만 골라내서 극을 진행했습니다.(30페 안팎 24에피) 그래서 전개가 빠르게 몰아치죠. 봄에서 애들 관계선에 대해 이것저것 적어보고 싶었지만 지면이 부족했다는 게 아쉽네요 ㅎㅎ;


아참, 마지막 장면 적으면서 무척 즐거웠답니다. 저번 회에서 평온한 데이트가 되기를 바란다고 적어놓았지만 사실 그게 평온한 데이트로 만들어주겠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잖아요?^ㅁ^!


가급적 애들 상황과 들어맞는 오페라를 찾기 위해 오페라 백과사전에서 수백 개의 오페라를 살펴봤습니다만 오페라의 성향들이 다 희극, 아니면 비극 정도라 맞는 걸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선을 선회해서 연극 쪽에서 작품을 찾아왔어요 십이야!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죠. 저도 좋아하는 작품이고요 ㅇㅇ 물론 아직 오페라로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에요 영화화나 연극화는 되었지만요.


이번에도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가 나왔지만 가장 하이라이트는 역시 정체 들통이겠죠! 저는 펠릭마리가 정체를 알게 된다면 낌새는 펠릭스가 먼저 채는데, 먼저 정체를 알게 되는 건 마리네뜨일 것 같다고 쭉 생각했었어서.. 솔직히 펠릭마리 감정선에 엄청나게 신경썼는데 읽으시는 분들이 납득하실지 걱정했었어요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었지;ㅠㅠ


과연 그들의 운명은?! 다음화를 주목해주시라!>ㅁ<


펠릭스의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셔서 작중에 등장하지 않지만 작중에서 나름의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들을 꿰차고 계시답니다. 개인적으로 아버님의 첫 번째 편지를 적으면서 좀 슬펐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미래에 있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지...;ㅅ;


펠릭스 부모님의 이야기는 후일담을 적을 때 외전으로라도 짧게 적어보고 싶지만 너무 귀찮아서 고민 중입니다..


붉은 동그라미에 검은 점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요정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네.

검은 고양이는 늘 외톨이. 하지만 그들은 고독하기에 오히려 더 영리하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기적을 담아.

기회는 단 한 번뿐. 그렇기에 기적이란 아름다운 것이라네.


후후. 이 노랫말을 지어내면서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마음에 드는 내용이라 공개하고 싶었지만 중반부 스포일러라 꺼낼 수가 없었어요;ㅅ;

이 노랫말은 고대서부터 전해져오던 경구 중 하나입니다.(그런 설정) 미라큘러스의 전설에 대해 다루고 있죠. 이 또한 펠릭스의 아버지가 알아낸 것입니다. 펠릭스의 아버지 라파엘은 생전에 유명한 고고학자였거든요.


12화는 내일이나 모레 올릴게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상도 감사해요>ㅁ<)/


Posted by I.R.E
,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10.

예감







에에취!


요란스럽게 튀어나온 재채기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민망함을 애써 숨기며 코를 문지르는 마리네뜨에게 같이 길을 걸어가던 에스미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뭐야, 감기라도 걸렸어?”

“아,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의 볼이 살짝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시내에 나와 있었다. 상당히 더운 날씨라 둘 다 반팔에 짧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별로 더위를 타지 않는 마리네뜨와 달리 에스미는 더운지 연신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남은 손에는 차가운 커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직후라 그런지 꽤나 나른했다. 오랜만에 놀러 나와서일까, 근처에 있는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재잘거리는 두 소녀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앗, 죄송합니다.”



어깨가 툭 맞닿았다. 사과의 말을 건네며 저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마리네뜨는 흘깃 쳐다보았다. 벌써 몇 번째다. 이 거리가 번화가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검은색의 정장을 입고 바쁘게 길을 걸어가는 직장인들은 물론, 귀에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보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친구들, 나들이를 온 것처럼 화사하게 입고 돌아다니는 가족들,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지고 돌아다니거나 목에 사진기를 걸고 돌아다니는 관광객 비스무리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왜 이렇게 여기에 사람이 몰리게 되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지금 파리 최대의 번화가라 불리는 샹젤리제 거리가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다. 3일은 더 지나야 공사가 마무리되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기로 예정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몰려온 듯 했다. 사실 마리네뜨와 에스미도 오늘 그쪽으로 놀러가기로 했었는데 보수공사 안내판을 보고 포기했던 거니까. 그에 속으로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던 마리네뜨는 순간 흠칫했다. 낯빛이 어두워지는 마리네뜨를 보며 에스미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리네뜨. 너 표정이 왜 그래?”

“응?! 응….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스미가 한 손으로 마리네뜨의 볼을 꽈악 꼬집었다.



“꺅! 아퍼!”



마리네뜨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엄살을 부렸다. 하지만 정작 꼬집은 당사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손을 놓고 말했다.



“너 열이 좀 있는 거 아니야? 좀 뜨뜻한데?”

“어,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오늘 날씨가 더워서 얼굴에 열이 오른 건지도 몰라. 일단 저 가게에라도 들어갈까?”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고 에스미는 바로 앞에 보이는 연분홍빛 간판이 붙은 가게로 들어섰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파는 깔끔한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훅 불어왔다. 이번에 새로 런칭한 가게인지 가게 안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깨끗한 하늘색 파스텔톤의 벽지를 배경으로 예쁘게 반짝거리는 유리공예품과 오르골, 각종 장신구와 귀여운 봉제인형들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무덤덤한 얼굴을 하면서도 꽤나 신기한지 코너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에스미와 달리 마리네뜨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돌아서던 마리네뜨는 바로 앞에 있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두려움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서다 뒤에 있던 나무 선반에 등을 부딪혔다. 아얏, 작은 비명과 함께 재빨리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히어로가 되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각오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영화의 끝에는 반드시 악당의 죽음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 그래서 전력을 다해 싸웠고 그에 후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무엇에 휘둘리고 있는 거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것도 아니면, 영웅이라는 이름의 무게?


누군가를 찌르는 감각은 예상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끔찍했다. 푸욱, 소리와 함께 고무를 뚫듯 간단하게 생살이 찢기고 붉은 피가 샘물처럼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분명 그 자리에 있던 악당과 자신, 그리고 블랙캣 뿐이겠지.


마리네뜨는 순순히 인정했다. 정말 어이없지만, 이러면 안 되겠지만 자신은 그 악당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비둘기 떼에 둘러싸여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 위로 쓰러져버린 자신의 잔상이 겹쳐졌다.


나도 그렇게 죽게 될까? 누구도 진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게 될까?


비둘기들과 함께할 때 즐거워보이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어쩌면 처음에 했던 그 모든 말들은 그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인간들이 싫어서 그런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그를 단죄할 자격이 있을까? 그가 저지른 짓들은 과연 그렇게 죽어야만 했던 일이었을까? 내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뺏어갈 권리가 있는 걸까.


회의감이 들었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자조했다.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결심하고 또 결심했었는데 지금 자신은 흔들리고 있었다. 무서워졌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레 너무 엄청난 일을 도맡게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리네뜨?”



에스미가 부르는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마리네뜨의 행동이 유별나다는 듯 에스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살 거 없어? 여기 니 취향의 예쁜 물건들이 많은데?”

“어, 그럼 난….”



헤헤 웃으며 근처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던 마리네뜨는 어떤 물건 앞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한참을 멍하게 그것만 바라보고 있던 마리네뜨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붉은 색깔에 까만 점들이 드문드문 그려져 있는 예쁜 시계였는데, 겉을 유리로 제작했는지 투명한 붉은색에 선명하게 박힌 까만 점들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말없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제 친구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에스미가 뭐라고 말을 걸려는 찰나 누가 선수를 쳤다.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손님. 그 시계가 마음에 드시나요?”

“예?”



어느 샌가 마리네뜨 옆으로 다가온 점원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레이디버그를 테마로 만든 시계인데 여성분들이 많이 사가시더라구요. 예쁘고 실용적인 상품이라 그런가.”

“레이디버그 테마요?”



깜짝 놀라는 마리네뜨에게 직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요즘 파리에서 인기 많은 히어로니까요. 저희 집만 아니라 다른 가게들에서도 상품이 많이 나오고 있죠. 아, 블랙캣 테마를 원하신다면 이쪽에 있어요. 요즘 특히나 히어로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죠. 이번 샹젤리제 거리에서 일어났던 사건도 그렇고, 다들 응원하는 분위기예요.”



의외였다. 마리네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 하지만 결국 뭐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잖아요. 다들 매번 도시만 부서진다고 싫어하거나…. 그러지는 않을까요?”

“? 전혀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마리네뜨는 말을 잃었다. 직원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부서진 거야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 사건 규모만 봐도 히어로들이 없었으면 피해가 엄청나게 커졌을 거예요.”



당시 사건을 멀리서나마 목격했는지 점원은 생각 외로 샹젤리제 거리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살면서 건물보다 더 높이 치솟는 물기둥은 생전 처음 봤다고 질려하던 점원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감사하고 있어요.”

“에?”

“위험한 일이잖아요. 목숨을 걸고 악당이랑 싸워주는 사람들에게 그것밖에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시민이 된 것 같다며 웃는 점원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일 텐데도.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악당이랑 몇 년을 싸우는데 현실이라고 별반 다를까요. 부디 지지 않고 열심히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죠. 믿고 있어요.”



믿고 있어요. 그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그저 눈을 깜빡거렸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점원은 당황했는지 허둥거렸다.



“어머, 제가 너무 주절주절 떠들었나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에?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요! 설명 감사해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앞에 있던 시계를 집어들었다. 예쁘게 반짝거리는 시계를 손에 들고 빤히 들여다보던 마리네뜨가 헤실 웃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꼭 그거 사야 돼?”

“응?”

“넌…. 아니, 아니다.”



신경쓰지 마. 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앞장서는 에스미를 마리네뜨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살펴보았다.


물건들을 계산하고 있는데 직원이 싱긋 웃으며 종이 두 장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직원은 친절하게 손으로 문 앞을 가리켰다.



“이번에 저희 가게에서 오픈 기념으로 추첨 이벤트를 열거든요. 상품이 꽤 호화스러우니까 한 번 뽑아보세요~”

“해볼까?”

“응!”



재밌겠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에스미의 뒤를 따라 나가던 마리네뜨의 눈 앞이 순간 흐릿해졌다. 몸이 기우뚱거렸다.


어?


살짝 어지러워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다시 선명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걸으면 넘어질 것만 같은 기시감에 선뜻 앞으로 발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 서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에스미가 물었다.



“뭐해, 안 오고?”

“아, 응!”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었다. 다행히도 어지럼증은 한 순간의 문제였는지 다시 걸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출구로 나갈수록 점점 더워지는 느낌에 마리네뜨는 손을 들어 부채질을 했다. 아, 더워. 왜 이렇게 덥지?


가게 앞에 있는 추첨 부스에는 이미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맨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상품 목록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스미가 중얼거렸다.



“1등 상품이 자동차라고?!”

“우와.”



짧게 감탄사를 흘리며 웃는 마리네뜨를 에스미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평소였다면 더 방방 뛰면서 눈을 반짝거렸을 텐데 지금의 마리네뜨는 너무나 차분했다. 아니, 정확히는 오늘 하루 전반적으로 기운이 없어 보였지.



“마리네뜨, 너부터 할래?”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는 에스미에게 마리네뜨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추첨함으로 손을 뻗었다. 머리가 아팠다. 자꾸 흐릿해지는 시야에 몇 번 눈을 깜빡이면서 간신히 종이 한 장을 꺼내들자 갑자기 짤랑짤랑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러지? 정신이 없어 허둥대는 마리네뜨에게 추첨함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3등을 뽑으셨어요.”

“예…?”

“이건 당첨 선물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남자가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몽롱한 정신에도 무사히 그것을 받아들고 마리네뜨는 추첨함 근처를 벗어나 한산해진 길가에 섰다. 이상할 정도로 공기가 무거웠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으려고 했지만 글자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받은 종이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마리네뜨의 등 뒤로 다가온 에스미가 깜짝 놀라서 중얼거렸다.



“와, 이거 이번에 공연한다던 유명한 오페라 티켓이잖아!”

“그래…?”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 없는 마리네뜨와 달리 에스미는 잘 됐다는 듯이 마리네뜨의 등을 툭툭 쳤다.



“그럼! 마침 잘 됐다. 그 바보 녀석한테 같이 가보자고 하지 그래? 이거 이번 분기 기대작이라 표가 나오면 전부 매진이라 구하기도 쉽지 않아. 심지어 VIP석이라고!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가 없을 걸?”



그런 걸로 같이 간다고 할 성격은 아닌데. 하지만 마리네뜨는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에스미의 텐션이 높은 이유는 아마 기운이 없어 보이는 자신을 달래주기 위한 나름의 배려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게 여실히 느껴져 마리네뜨는 그저 웃고 말았다.



“고마….”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다리에 살짝 힘이 풀렸다. 마리네뜨, 왜 그래? 너 얼굴이…. 흐릿하게 번지는 에스미의 목소리에 어라? 하던 순간 마리네뜨의 몸이 휘청이며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차가운 돌바닥으로 쓰러지려던 순간 무언가가 제 몸을 받쳐 안았다. 누구지? 열에 들떠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앞을 보기 위해 애써 눈을 떴지만 보이는 것은 암흑이었다.


마리네뜨는 그대로 기절했다.






“파트너.”

“왜.”



셔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여름인데도 긴 팔에 긴 바지, 심지어 단추까지 꼭 채워 입고 있는 소년을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전혀 개의치 않아 보이는 당사자와는 달리 불평은 의외의 곳에서 솟아나왔다. 펠릭스의 셔츠 속에 들어 있던 플랙이 작게 불평을 터트렸다.



“이런 더운 날씨에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을 오는 이유는 뭔데?”

“어쩔 수 없잖아. 서점에 괜찮은 책이 들어왔다고 하니까.”

“흐음, 나중에 사러 와도 되지 않나~? 왜 꼭 지금? 사람 많은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잠시 멈칫하더니 펠릭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하루빨리 읽고 싶으니까. 더 이유가 필요해?”

“그럼 옷이라도 좀 시원하게 입든지~? 보기만 해도 덥다구.”

“난 이게 편해.”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도 펠릭스는 제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힐끔 돌아보았다. 상당히 오래 전에 쓰여진 희귀본이라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책이 들어왔다는 말에 재빨리 집을 나서 시내로 나왔다. 확실히 날이 덥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책을 빨리 수령하는 게 더 중요했다. 티는 안 내려고 하지만 상당히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펠릭스를 플랙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빨리 집에 가서 책을 살펴볼 생각밖에 없는 펠릭스에게 플랙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좋은 소식 하나 알려줄까?”

“…정말 ‘나한테’ 좋은 소식이긴 한 거야?”



이제 장난에도 익숙해졌는지 대놓고 의심부터 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너무하네~’ 한 마디와 함께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이 근처에서.”

“…뭐?”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재빨리 주위를 스샥 둘러보았지만 잠잠했다. 플랙은 낄낄 웃었다.



“농담이지롱!”

“야, 너….”

“애초에 상대가 변신을 해야 기운이고 뭐고 느낄 수 있다구~?”

“…하아.”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했는지 가만히 침묵하다가, 펠릭스는 다시금 제 파트너의 이름을 불렀다.



“야, 플랙.”

“으응~?”

“…아니다.”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펠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플랙이 지적한 대로 책은 반쯤 핑계였다. 조용한 장소에서 산책을 하기엔 오히려 생각만 많아질 것 같아서 일부러 시끄러운 곳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덕분에 짜증은 치솟지만 뭔가 생각할 여유가 없는 점은 마음에 든다. 지금 혼자 있었다간 쓸데없는 생각들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자꾸 떠오르는 걱정이 있었다.


레이디버그는 괜찮을까.


눈물로 범벅이던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먼젓번 샹젤리제 거리에서 드디어 악당 중 한 녀석을 해치웠다. 단서로 생각할 법한 것도 나왔다. 하지만 그 모든 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너졌다. 꽤나 덤덤한 자신과는 다르게, 많이 충격받은 건지 넋이 나간 얼굴로 미스터 피죤이 있는 자리만을 쳐다보던 레이디버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심장 한 구석이 아릿해졌다.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멍해 있는 레이디버그를 데리고 재빨리 도망치기는 했지만, 얼굴에 묻은 핏자국도 닦아내지 않고 초점 없는 눈동자를 깜빡거리는 레이디버그가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레이디. 레이디. 한 손으로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꼭 끌어안고 작게 속삭이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레이디버그가 뭐라 중얼거렸지만 너무 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표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살짝 웃으며 사라지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흐릿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과대망상이라면 좋을 텐데.


미스터 피죤이 죽었든 말든 그건 솔직히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왔어야만 했고 레이디버그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생각하는 것과 현실의 감각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일에 나름 익숙해진 자신과는 다를 테니까.


이렇게 덤덤한 자신의 모습을 레이디버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냉정한 놈이라고 싫어하게 될까. 이 와중에도 당신만이 걱정되는 나를 이기적인 녀석이라 경멸하게 될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변신을 풀고 플랙에게 물었다.


‘그 악당, 정말 죽은 거야?’

‘직접 보고도 몰라?’


되려 질문하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짧게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어지간한 상처로는 죽지 않지만 불사신은 아니라구.’


이 와중까지도 플랙은 전혀 진지하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펠릭스는 별 감정의 동요 없이 대꾸했다.


‘…우리도 같은 꼴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아마도?’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것을 물었었다. 그 때도 플랙은 히어로는 거의 무적이라고 했었다. 약점이 없지는 않다는 소리냐고 물었을 때 플랙은 그랬었다.


욕심도 많다고.


그렇다는 건 저쪽에도 약점이 없지는 않다는 소리겠지. 같은 미라큘러스의 소유자니까. 그건 이번 사건에서 악당의 죽음으로 제대로 증명되었다. 물건이 망가지면 목숨을 잃게 되니까. 호크모스한테 써먹기는 어렵겠지만.

펠릭스가 다시금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그 호루라기에서 나온 나비.’

‘엉?’

‘그것도 호크모스와 관련된 건가?’


플랙은 꺄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그건 호크모스가 부리는 사령같은 거야.’

‘사령?’

‘물건에 깃들어 그 물건을 소유한 사람에게 힘을 주지만, 그들은 절대 호크모스를 거스를 수 없거든~ 일단 악당이 된 사람의 몸은 호크모스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혹시 자칫 잘못하다가 물건이 부숴지면 죽게 된다구. 힘을 거두는 것도 호크모스의 맘대로~ 그러니 누가 거역해? 물론 물건에 깃들어 있던 나비는 죽지 않지만.’

‘그럼 그 나비는 어떻게 되는데?’

‘뭘 어떻게 되겠어? 빌려준 사람이 사라졌으니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할 거 아니야~ 그나저나 왜 그렇게 나비에 대해 물어봐?’


낄낄 웃으면서도 날카롭게 핵심을 찔러오는 플랙의 질문에 펠릭스는 쓰게 웃었다.


‘…똑같이 생긴 나비를 봤으니까.’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때 박물관에서 아저씨의 손에 들려 있던 사진에 찍혀 있던 그 표본의 모양을. 그건 새까만 나비였다. 며칠 전에 봤던 나비에 비해 살짝 부식되어 있긴 했지만 모양만 따진다면 틀림없는 그 나비가 분명했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펠릭스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어떻게 그 나비가 화석처럼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거지? 주인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그리고 악당들은 왜 그 표본을 훔쳐간 걸까. 자신의 약점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아니, 이건 너무 단순한가.’

‘흐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비가 꼭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건 아닐걸? 호크모스보다 나비가 깃든 물건을 가진 사람이 늦게 죽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렇겠지. 그 사람이 죽어야 나비가 돌아올 테니 말이야….’


말끝을 흐리며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가상의 체스판 위로 다시 정렬되는 판의 모습을 펠릭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맨 앞쪽에 나열되어 있던 다섯 개의 말 중 하나가 아웃되었다. 현재 파악되는 악당의 수는 넷. 그리고 아마 뒤에 있을 무수한 졸개들. 이걸 소수의 집단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다.


정말 이들이 조직이라고 한다면….


펠릭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음모론 취급하지만 자신은 꽤나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이름이다. 카더라로만 알려져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간 파리에서 일어났었던 정치적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아주 없을 법한 소리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세워낸 가설대로라면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 파리의 상황을 조작해왔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자신만 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저번에 만났던 덥수룩한 갈색 머리의 기자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조직의 이름을 생각하자니 괜시리 심경이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건데.


지금 꽤나 그럴듯한 가설이 하나 떠오르긴 했지만 아직 몇 가지 정보가 부족했다. 일단 좀 더 정보를 모으고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전에 그 동굴이 있던 장소를 다시 둘러보는 정도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겠지.


‘파트너~ 혹시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난 빨리 죽긴 싫다구. 능글맞게 웃으며 엄살을 부리는 플랙의 말을 펠릭스는 가볍게 무시했었다. 하지만 그도 이 일이 위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더 큰 일이 닥치기 전에.


회상에서 벗어난 펠릭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지금은 사실 그것보다 신경쓰이는 일이 있단 말이지.


마리네뜨의 얼굴을 떠올리자 펠릭스의 기분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상당히 큰 사건이 터져서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그 때 당시의 마리네뜨의 행동은 분명 레이디버그와 닮아 있었다. 물론 머리색과 눈색은 일치하지만 이 넓은 파리에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만도 수백은 될 테고, 그 중에서도 하필 자신과 같은 학교에다 같은 학년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는 우연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보다 레이디버그의 정체를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펠릭스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왜지? 좋아하는 상대라면 당연히 정체가 궁금해야 할 텐데. 어째서?



“도련님?”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퍼뜩 놀라 재빨리 제 가슴 쪽을 내려다보았다. 플랙은 이미 눈치껏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자신을 부른 상대가 누군지는 뻔했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옆을 돌아보았다.



“엘렌.”



두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들을 들고 있는 엘렌이 보였다. 언제나와 같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올리고 있긴 했지만, 오늘은 일이 없는지 엘렌의 옷차림은 평소에 입던 정장이 아니었다. 하얀 티셔츠 위에 카키색의 가디건을 걸친 채 긴 청바지를 입고 있는 엘렌의 모습은 편한 차림이라 그런지 특유의 딱딱한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알게 모르게 경계하는 펠릭스와 달리 엘렌은 거리낌없이 펠릭스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도련님은 어쩐 일로 여기에?”



사람 많은 거 싫어하시잖습니까. 무덤덤하게 묻는 엘렌에게 펠릭스는 가볍게 대답했다.



“필요한 책이 들어왔다고 연락을 받아서. 그러는 당신은?”



엘렌이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봉지들을 가만히 들어올리자 펠릭스는 대번에 납득했다.



“아직도 거기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나 보지?”

“네.”



묵묵히 대답하는 엘렌의 얼굴에 살짝 씁쓸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에 놀랐지만 펠릭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고아원 출신이라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거기서 자랐죠.”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에도 마냥 무심하게 대답하는 엘렌에게 펠릭스는 조금 더 물었다.



“숙부님이 당신을 지원해줬다고 들었어. 학비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생활비까지 전부 다.”

“제가 쓸만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버려졌을 겁니다.”

“그래서 숙부님을 따르는 건가? 은혜를 갚으려고?”

“네.”



단호하게 대답하다가 엘렌은 답지 않게 잠깐 머뭇거리더니 딱 잘라 말했다.



“자기만족입니다.”

“….”

“제가 하는 일들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딱딱한 어조로 대답하는 엘렌의 목소리에 펠릭스의 손끝이 일순 차가워졌다. 동요하는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펠릭스는 재빨리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냈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리고 있었다.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꺼낸 걸까. 자신이 아는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펠릭스로서의? 그도 아니면 블랙캣으로서의?


어디까지 가늠해야 할지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이상 물어보는 건 너무 과한가? 아니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건가? 이건 기회인가,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역시,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펠릭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뭐하는 거냐고 짜증스레 돌아보던 펠릭스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말없이 어딘가를 쳐다보는 펠릭스를 의아하게 보던 엘렌의 고개가 펠릭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마리네뜨를 발견한 엘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저 아가씬….”

“…아는 얼굴이야?”

“도련님을 쫓아다니던 분이시라는 것 정도는.”



젠장. 속으로 낮게 욕지기를 뱉으면서 펠릭스는 가만히 질문했다.



“숙부님도 알아?”

“아니요.”

“어째서?”

“신경쓰실 만한 안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담담히 대답하던 엘렌이 펠릭스에게 되물었다.



“신경이 쓰이시나요?”

“별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대답하던 펠릭스의 시야에 마리네뜨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찍혔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펠릭스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여유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표정으로 제 옆을 스쳐가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엘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마리네뜨를 펠릭스는 간발의 차이로 받아냈다. 소녀를 받아내자마자 펠릭스의 얼굴 위로 확 달아올라 있었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침몰했다. 어느 새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고 이것저것을 지시하는 펠릭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렌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몽롱했다.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나른한 기분이었다.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에 이대로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아. 일어나면….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마리네뜨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자, 조금씩 선명해지더니 이윽고 옅은 분홍색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마리네뜨는 여기가 어딘지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방이었다.


살짝 시선을 내리니 따뜻한 이불이 자신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이마에 얹어져 있떤 시원한 무언가를 손으로 끌어내렸다. 수건이었다. 두통이 좀 가시니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억이 그러니까….

헉, 에스미!



“으아, 난 죽었다!”

“무슨 일이야, 공주님? 잠은 잘 잤어?”

“꺄악!”



갑작스레 들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워워, 진정하라구. 침대 바로 앞 의자에 앉아서 제 쪽을 응시하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블랙캣…?”



어떻게 여기에. 콜록거리며 자신을 마주하는 마리네뜨에게 가까이 다가간 블랙캣이 한 손을 들어 마리네뜨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음, 너 열이 심하던데, 지금은 좀 괜찮아졌네.”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무단침입으로 신고할 거야….”

“그래그래, 일단 몸이나 나은 후에 신고를 하든 때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하하 웃으면서 걱정스럽게 제 이마를 이리저리 짚어보는 블랙캣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뭔가가 보였다. 물이 가득 담긴 대야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수건.


간호해준 건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에 마리네뜨는 살며시 긴장을 풀고 블랙캣의 손에 이마를 톡 기댔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열에 들떠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응, 그래.



“좋네요. 블랙캣 손.”

“뭐?”

“차가워서…. 기분 좋아요.”



헤실헤실 웃으며 중얼거리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급히 정신을 차렸다.


뭐지, 이 간질간질한 기분은?



“근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감기에 걸린 거야?”



이 날씨에. 민망한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애써 화제를 돌리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별 생각 없이 멍하니 대답했다.



“아, 최근에 물벼락을 맞을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물벼락?”



의뭉스럽다는 듯이 되묻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으악,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아, 네네. 제, 제가 좀 재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비가 갠 후에는 꼭 우산을 들고 다니기도 하고….”



제가 대답하고도 참으로 그럴듯한 이유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흐뭇해졌다가, 또 다시 씁쓸해졌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직감이 생겼다지만 여전히 불안한 탓에 비가 개인 날은 자연스럽게 우산을 들고 다니게 된다.


여전히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블랙캣의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마리네뜨는 머리를 쥐어짜냈다. 아, 맞다!



“근데 정말 우리 집에는 어떻게 왔어요? 혹시 집주소 관리하는 곳 뭐 그런 데서 일해요?”

“설마. 그리고 개인정보 멋대로 빼내는 건 불법이거든?”

“그럼요?”

“…지나가는 길에 니가 쓰러지는 걸 봤어. 따라와 봤다가,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말이야. 오늘 부모님 집에 안 계시다며?”



살짝 뜨끔했지만 블랙캣은 애써 적당히 둘러댔다. 솔직히 거짓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마리네뜨는 다른 부분에서 깜짝 놀랐는지 이불을 끌어당겨 제 목 아래까지 꽁꽁 감쌌다.



“헉.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스토커예요?”

“웃기시네. 니 친구가 말해주고 갔어. 애초에 네 옷도 그 녀석이 갈아입힌 거잖아.”

“어 그러고 보니….”



슬쩍 내려다보니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뻘쭘해졌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는 마리네뜨를 블랙캣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애초에 난 한참 뒤에 왔거든? 말해두겠는데 정말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길래 확인 차 온 거야. 잠깐 봤더니 이제 좀 괜찮은가 싶어서 가려고 했는데 니가 손을 뻗어서 날 붙잡았다고.”

“내가 그랬다구요?”

“그래. 그러니 그냥 가기도 뭐해서 열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말들 뿐이었지만 블랙캣의 눈빛이 더없이 진지해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면 신기했다. 변신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신경써주고 있는 걸 보면 그 때 공원에서 꽤 인상이 좋았던 건가? 하지만 그 때 별반 좋은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은데. 속으로 고민하다가 다시금 몰려오는 두통에 마리네뜨는 그냥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나저나,



“근데 진짜 대체 어떻게 들어왔어요? 문은 잠겨 있었을 텐데.”

“창문으로 들어왔지.”



자랑스레 대답하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역시 스토커로 신고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의심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블랙캣이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더니, 곧 체념했는지 한숨을 내쉬면서 진지하게 입을 열였다.



“혼자 누워 있는 건 생각보다 훨씬 외로우니까.”

“아….”

“그, 그래서 그냥 가기가 뭐했던 것뿐이야! 절대 니가 특별하다거나 뭐 그래서가 아니라고!”



되려 찔리는지 버럭 소리지르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 모습이 얄미웠는지 하여간 넌 애가 뭐 그렇게 몸이 약하냐고, 살다살다 여름에 열이 올라서 길거리에서 쓰러진 애는 처음 봤다고 냅다 잔소리를 퍼붓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질문을 툭 던졌다.



“블랙캣. 그럼, 혹시 나 쓰러질 때 누가 날 받아줬는지 알아요?”

“그, 글쎄? 잘 모르겠는데?”



뜨끔해서는 단번에 부정하는 블랙캣을 마주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내가 도끼병인 걸까요? 쓰러지기 직전에 절대 그 자리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을 본 것 같았거든요.”

“….”

“이번에까지 도움받으면 두 번째인데…. 에이, 아무래도 아니겠죠.”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야?”

“맞아요.”



생각만으로도 좋은지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가슴 한 켠이 답답해졌다. 동시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이 녀석이 레이디버그일까? 이렇게 여려만 보이는데.



“대체 어디가 좋은데? 그 녀석.”

“그냥 다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대답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사랑같은 감정에 휘둘리는 거 지겹지 않아?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 거 같고.”



마리네뜨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쏟는 시간이 아까울 리가 없잖아요.”



블랙캣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동의하는 건지, 아니면 이런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이상한 건 나려나. 마리네뜨는 살풋 웃었다. 지금 블랙캣의 얼굴을 보면 분명 굉장히 꺼려지고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렇게도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때의 일.



“블랙캣, 내 이야기도 잠깐 들어줄래요?”

“뭔데.”

“고민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아서요.”

“어떤 고민이야?”

“…말하기 좀 그런데. 아무튼 좀 힘든 일을 겪었거든요.”



헤헤 웃던 마리네뜨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조금 힘들었어서. 그렇다고 막 그만두고 싶은 건 아닌데 내가 계속 이 일을 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고….”



추욱 고개를 숙이는 마리네뜨의 손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는 죄수마냥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던 마리네뜨의 머리 위로 무덤덤한 말이 툭 던져졌다.



“네 마음에 달린 일이겠지.”



그 한 마디에 마리네뜨의 얼굴에 서서히 놀라움이 번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블랙캣의 표정이 눈에 보였다. 웃고 있지만 평소처럼 장난스럽지 않았다. 의문이라던가 망설임이라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곧고 선명한 진심을 눈동자에 내비치고 있었다.



“너의 정의에 따라 가면 돼. 만약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가도 상관없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도망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너한테 선택을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누구도.”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것처럼 가벼운 대답이었지만 초록빛 눈동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런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블랙캣도, 그럴 때가 있어요?”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마리네뜨의 의문에 블랙캣은 간단히 답했다.



“있지.”



쳇바퀴처럼 굴러오는 삶의 무게가 가끔 너무 버거워서, 가끔 모든 것을 다 던지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한 때일 뿐. 누구보다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충동은 언제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바스라졌었다.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이 모습은 그런 내게 주어진 선물인 걸까.


속으로 피식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다시금 질문했다. 



“블랙캣은 어떻게 했어요?”

“나는 계속 버텼었지.”

“왜요?”

“이게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했거든. 그 길의 끝 정도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



선선히 대답하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조심스레 물었다.



“…힘들었나요?”

“조금은. 그래도 괜찮아. 그랬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잠깐 멈칫하더니, 픽 웃으며 손을 들어 마리네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무리할 필요는 없어.”



나와 너는 경우가 다르니까.



“그냥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듯이, 네게도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겠지. 그럼 그걸 하면 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마리네뜨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위로하듯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리네뜨의 푸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그게 싫지 않다고 여기는 자신을, 블랙캣은 그제서야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생각보다 쟤를 별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네?’


플랙의 말을 떠올리며 블랙캣은 깔끔히 인정했다.


그래, 나는 네가 싫지 않아. 언젠가부터 싫지 않았어. 열심히 노력하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후회하지 않을 거라 말하며 나아가기를 망설이지 않는 네 모습을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나도 참 멍청하군.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설핏 웃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가 살며시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블랙캣.”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한 마디였지만, 마리네뜨가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살며시 웃고 있지만 어딘지 처연하게 느껴지는 마리네뜨의 미소를 보며 블랙캣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건….



“바보같은 줄만 알았는데 믿음직스러운 구석도 있네요.”



어느 새 기운을 차렸는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어이, 난 원래 똑똑…. ……?!”



블랙캣은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어라, 이 상황은…?


‘꽤 믿음직스럽네. 맨날 바보짓만 하는 줄만 알았는데….’

‘어이, 레이디. 나는 원래 똑똑하다고!’

‘네, 네. 알았으니 어서 저거나 처리하자구.’


막아두었던 둑이 터지듯,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기억들에 블랙캣은 말을 잃었다. 살짝 경악에 찬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가만히 쳐다보며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블랙캣?”



설마?



“…나, 난 원래 똑똑하다고!”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는 너스레를 떠는 블랙캣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별 일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금 웃으며 대답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가봐야 하지 않아요?”

“엉?”

“난 괜찮으니까.”



웃고 있는 마리네뜨와 달리 블랙캣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몸조리 잘 해.”

“네.”



그 말을 듣자마자 블랙캣은 창문께로 다가가더니 휙 날아서 사라졌다. 블랙캣이 모습을 감춘 걸 확인하자마자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티키, 거기 있어?”

“응.”



바닥에 던져져 있던 가방에서 뾰로롱 날아오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가 반가움을 표시했다. 환하게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로 달려든 티키가 뺨을 부볐다.



“쓰러졌을 때 깜짝 놀랐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해.”



사과하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나저나 배고프지 않아? 내려가서 뭐라도 먹을래?”

“그럴까? 헉, 그나저나 에스미는 어떡하지?”

“괜찮아. 그 애라면 엄청 걱정하는 눈치였는걸. 나중에 전화해주면 될 거야.”

“그렇겠지…?”



반신반의하며 마리네뜨는 조심스레 계단을 통해 부엌으로 내려갔다. 오늘 부모님은 두 분이서 나들이를 가셨으니 한동안은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식빵 몇 개에 잼을 발라 하나를 입에 물고, 나머지를 접시에 담았다. 총총거리며 소파로 다가간 마리네뜨가 근처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들고 TV를 켰다.


맨 처음 보이는 건 어떤 남자의 얼굴이었다.



[현재, 흉악한 범죄자 랄프 커티스는 인질 하나를 붙잡고 5구를 지나 14구 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TV를 켜자마자 쏟아지는 속보에 마리네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뉴스 앵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6월 30일에 발생되었던 감옥 붕괴 사건의 탈주범들은 대개 검거되었으나, 커티스는 경찰의 조사망을 피해 근처 모텔에 숙박하던 중 여관 주인의 신고로 인해 위치가 파악된 것에 앙심을 품고, 주인집의 아이를 붙잡아 인질극을 계획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잠깐만, 6월 30일이라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 도난 사건이 있었던 날이었다. 그 때 블랙캣이 분명 감옥을 부수고 탈출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점점 심각해지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티키가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마리네뜨…?”



티키를 마주보며 마리네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 14구 쪽에서는,



“가까이 오지 마!”



칼을 아이의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댄 채로 버럭 소리지르는 랄프에 경찰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건 그들의 앞에 서 있던 블랙캣도 마찬가지로, 비열한 악당을 노려보며 블랙캣은 생각에 잠겼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벌인 일의 파편이니 자신이 수습하는 게 맞다 생각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참으로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상대하는 악당 놈들보다는 편하기는 했지만 인질을 잡고 있다는 것이 조금 성가셨다.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빨리 차를 가져오라고 소리지르는 랄프를 보니 블랙캣은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여간 악당들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군. 이대로 냅두면 아이를 구하는 게 힘들어진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랬다간 말이 많아질 테고. 여차하면 조금 다치는 것을 감수할까도 고민하던 블랙캣은 제 옆으로 뛰어내리는 레이디버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레이디! 여긴 어떻게…?”

“어떻게라니. 악당이 있는 곳에 영웅이 있어야지~?”



블랙캣을 돌아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게 마냥 안타까워 슬프게 눈가를 일그리는 블랙캣을 모른 척 하면서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단 저 자를 붙잡는 것부터 생각하자.”

“방법이 있어?”

“음…. 블랙캣, 잠시 악당의 주의를 끌어줄 수 있겠어?”

“분부대로.”



눈을 찡긋거리며 앞으로 나서는 블랙캣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살짝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이후로는 처음으로 변신하는 거네.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것에 레이디버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편해진 걸까?



“거기, 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야?”



크게 소리지르는 블랙캣의 뒤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도 이런데 부모님은 오죽할까. 지금 구하지 않으면 분명 아이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아이를 구하려고 하면 저 남자가 아이의 목을 긋겠지. 틈을 낸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몇 초 정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무사히 구할 수 있지?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 방법을 떠올린 자신에게 레이디버그는 순간 혐오를 느꼈지만 애써 견뎌냈다. 그럼에도 한 번 떠올리니 자꾸만 잡생각이 뇌리를 둥둥 떠다녔다. 가령, 저런 남자 정도는 돌멩이 하나를 던져서도 죽일 수 있다는 거라던가.


안 돼. 이러면 저 남자랑 다를 게 없잖아.


애써 상념을 떨쳐버리고 레이디버그는 범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미 악당을 실컷 도발하고 있는 블랙캣을 흘낏 쳐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아주 잠깐이라도 아이의 목에서 칼날이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면.’



“이 새끼가!”



블랙캣의 도발이 먹혔는지 남자는 식칼을 들고 있던 손을 쭉 앞으로 뻗으며 뭐라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랄프가 다시 팔을 내리려던 순간 레이디버그는 있는 힘껏 그를 향해 뛰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앞으로 파고드는 레이디버그에 랄프는 기겁하며 들고 있던 식칼을 레이디버그에게로 내리쳤다. 슬로우 모션처럼 내려오는 칼날이 푸른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레이디버그의 손이 식칼의 날을 꽉 붙잡았다.



“레이디버그!!”



경악해서 소리지르는 블랙캣과 더불어 경찰들도 깜짝 놀랐는지 몇몇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식칼을 꽉 붙잡은 채로 레이디버그는 다른 손을 내밀어 남자의 복부를 주먹으로 세게 쳤다. 컥,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는 랄프에게서 아이를 뺏어들며 레이디버그는 천천히 식칼을 놓았다. 챙- 소리를 내며 식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쉬이, 이제 괜찮아.” 



눈물범벅인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며 레이디버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기절해버리는 아이를 안고서 살짝 한숨짓는 레이디버그 앞으로 블랙캣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레이디, 손은?! 손은 괜찮아?”

“아, 그거?”



레이디버그는 씨익 웃으며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블랙캣에게 식칼을 잡았던 손을 내밀었다. 손에 끼워져 있는 튼튼한 장갑을 보고 멍해진 블랙캣의 얼굴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강철 장갑이야. 손은 멀쩡하니 걱정하지 마.”

“….”

“그나저나 어서 도망가야겠다. 사람들이 오고 있어.”



아이를 경찰에게 넘겨주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잡아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따라오는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작은 불안을 느꼈다. 역시 내 태도가 좀 이상했나? 최대한 태연하게 굴려고 애쓰기는 했는데 역시 어색해 보였는지도. 감정을 숨기는 데는 서투르니까.



“저, 블랙캣….”



주위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확인하고 레이디버그는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며 레이디버그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블랙캣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발버둥을 치려고 했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끌어안는 블랙캣의 손길에 레이디버그는 순간 멈칫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놀랐는지 블랙캣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걱정 끼치지 마, 가뜩이나 넌…!!”



몸도 안 좋은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블랙캣은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블랙캣이 정말로 걱정했다는 것을 아는지 레이디버그는 살짝 웃으며 블랙캣의 등을 토닥거리다가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리고는 웃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본인은 밝게 웃는다고 웃는 것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지는 미소. 처연하게 웃는 얼굴은 방금 전에 만났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블랙캣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닮았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지금 레이디버그의 표정은 아까 본 마리네뜨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블랙캣이 다시금 물었다.



“아까 왜 그런 거야?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아이를 구할 방법이라면 있었잖아.”

“…그 사람을 죽이는 거?”

“동정할 가치도 없는 악당이야.”

“그래. 하지만 그걸 판단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잖아.”



입을 꾹 다무는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쓸쓸하게 읊조렸다.



“알아,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시 올 거라는 거. 방금처럼 그냥 붙잡아 경찰에 넘기는 방식으로는 끝낼 수 없는 상대들도 있으니까.”



푸른 눈동자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며칠 전에 상대했던 미스터 피죤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침묵하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블랙캣. 내가 말하지 않았지?”

“….”

“나, 미스터 피죤의 원래 모습이 누군지 알아.”

“뭐?!”

“정확히는 알자마자 금방 그렇게 댔지만.”



덤덤하게 털어놓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설핏 고뇌가 어렸다.



“죽음이라는 거,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진짜로 보니까 충격적이더라. 내가 아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니….”



하하,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레이디버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해야 한다면 해야겠지. 알고 있어. 하지만 가급적 그러고 싶지 않아. 살릴 수 있다면 살리고 싶어. 살아서 죄값을 치르게 하고 싶어.”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절대로.



“우린 또 다른 악당들을 죽여야 하겠지. 어쩔 수 없게도.”



왜냐하면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니까.


레이디버그가 후련하게 미소지었다. 마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각오는 했어.”

“…무슨 각오?”



차분하게 되묻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라는 말로 도피하지 않을 각오.”



죽음의 무게는 평등하다. 그 누구도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내가 영웅이건 그들이 악당이건 그런 건 중요치 않아. 그저 서로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며 그 결과가 죽음일 뿐이라는 것 말고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자신이 죽게 되든, 그들이 죽게 되든. 상대가 어떤 흉악무도한 악당일지라도 그걸 심판한다는 마음을 가진 채로 그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그랬다간, 분명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상대들과 싸우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고 싶어. 설령 그 길을 걷기 위해 부딪히고 아파해야 하더라도,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거야.”



옆으로 돌아선 레이디버그가 양손을 등 뒤로 모아 깍지를 꼈다.



“…이게 나의 대답이야.”



미스터 피존 사건에 대한.


레이디버그는 굳이 그 다음 대답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짐작했기에 블랙캣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네가 싫다면 너를 붙잡을 수는 없다는 거 알아. 이런 나를 약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때에 이렇게 망설이는 내가 바보같아 보일지도 몰라.”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제 시선을 피하는 레이디버그의 옆얼굴에서 블랙캣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조금 망설이던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들어 블랙캣을 돌아보았다.



“나를, 믿어줄래?”



초록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제까지 중 제일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블랙캣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그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도 레이디버그는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왠지 그라면 자신을 믿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절의 말을 듣는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슬플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 레이디버그는 정말로 놀랐다. 언제부터 내가 너를 이렇게 신뢰하게 된 걸까.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시선에 블랙캣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가, 곧 피식 웃었다.



“…응, 믿어.”



선선히 대답하는 블랙캣의 어조는 장난스러웠지만, 눈빛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믿지 않을 리가 없잖아.”



확신을 주듯이 재차 말하며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똑바로 마주하며 제 진심을 입에 담았다.



“당신은 정말로 강한 여자야.”



그 한 마디에 레이디버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고마워.”



그리고 그 말에서조차 블랙캣은 마리네뜨의 모습을 읽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좋아!”



룰루루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마리네뜨는 길을 걷고 있었다. 감기도 다 나았고 오늘 날씨도 지금 기분도 최고로 좋은 상태였다.


오늘도 그 공원에 있을까?


마리네뜨의 손에는 감기에 걸린 날 뽑아왔던 오페라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물론 쓰러졌던 것에 대해서는 에스미의 어마무시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긴 하지만 그래도 공짜 티켓이 생겼으니 다시 펠릭스에게 말을 걸 구실이 생겼다. 거절당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겠지.


저번에 갔던 공원으로 가자 예상대로 펠릭스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마리네뜨는 살짝 볼을 붉혔다. 아아, 오늘도 멋지구나.


무시할 거라는 건 알지만 마리네뜨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펠릭스, 안녕!”

“…안녕.”



책을 덮으며 펠릭스가 인사를 건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 긴장해서일까, 펠릭스가 순순히 인사를 받아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마리네뜨는 가만히 펠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잘 생각나지 않았다. 지긋이 자신을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나, 나랑 이번에 열릴 오페라 같이 가지 않을래!”



엉겁결에 말한 뒤에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헉, 아니 이게 아닌데! 난 좀 더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했다고!


망했다. 난 왜 이 모양이야아아…! 속으로 절규하고 있던 마리네뜨는 차분하게 돌아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오페라인데?”

“시, 십이야라고….”

“언제, 어디서?”

“이번 주 토요일 오페라하우스 저녁 7시쯤에….”



횡설수설 열심히 설명하는 마리네뜨에게 펠릭스가 딱 잘라 말했다.



“갈게.”

“뭐?!”

“싫으면 말고.”

“아니아니아니! 싫을 리가 없잖아!”

“그럼 그 날 봐.”



펠릭스는 그 말만 남기고 휙 돌아섰다.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마리네뜨를 뒤에 남겨두고 떠나가는 펠릭스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명확하지 못한 건 질색이다. 의심이 생겼다면 뭐라도 해서 어떤 방향으로든 해소하는 것이 옳은 법이겠지. 결론이 어떻든 간에.


확인해 봐야겠어.

돌아서는 펠릭스의 눈빛이 비장하게 빛났다.




===


드디어 두자릿수 회로 들어섰습니다! 웹연성은 후기를 쓸 수 있어 편리하네요.

10화는 후루룩 지나갔죠.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예ㅇㅁㅇ)~


몇 가지 사담을 해보도록 하죠.

제가 암시를 하고 있지만 에스미는 마리네뜨의 정체를 얼핏 눈치채고 있습니다. 물론 에스미의 성격이라면 마리네뜨가 말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절대 직접적으로 묻지 않을 거고 마리네뜨가 입을 열 일은 아마 없겠지만요.


피죤 사건으로 애들이 충격을 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특히 일반인(?)인 마리네뜨의 입장에서는 충격이 컸을 테고요 얘 여고생입니다 여고생. 네, 이런 부분의 묘사를 굳이 순화할 생각은 없었어서 좀 자세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9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계속 뭔가가 터질 거 같아요 이야 기대되지 않아요ㅇㅁㅇ)?(다들: 님만 기대하는 거겠지


마리네뜨가 짐작한 대로 감옥 탈출 건은 블랙캣이 감옥 부수고 나왔던 그 사건입니다. 고대의 재앙으로 감옥을 부수고 나왔고, 그 소란 속에서 몇 명의 죄수들이 탈출을 했는데 경찰 쪽에서 거의 다 잡았지만 마지막 한 놈이 저놈이죠 ㅇㅇ 솔직히 그 사건 시작부터가 경찰 잘못이라 뭐 그쪽에서 영웅들한테 할 말은 없겠지만(...) 


엘렌과 펠릭스의 관계는 굉장히 즐겁게 짰답니다. 엘렌은 나탈리와 같은 포지션이지만 성격은 많이 다릅니다. 어찌 보면 펠릭스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포커페이스 능력은 펠릭스보다도 뛰어나긴 하지만요. 그리고 플랙이 펠릭스에게 하는 말은 제 마음의 소리입니다(...) 한여름에도 그렇게 입고 다닐 거 알아 펠릭스...하...



마리네뜨를 방까지 데려와준 건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펠릭스입니다.


과정이 정확하게,

쓰러지는 마리네뜨를 간발의 차로 받아낸 펠릭스가 에스미와 같이 택시를 불러서 마리네뜨를 데리고 집으로 가요. 그 후에 펠릭스는 에스미한테 맡겨두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도 있고 에스미도 급한 전화를 받고 집에 돌아가야 했는지라, 괜히 찜찜한 탓에 블랙캣으로 변신한 뒤에 창문으로 들어온 거랍니다. 이건 마리네뜨에 대한 관심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있지만, 본인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예요. 펠릭스의 부모님은 8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플 때 혼자 있는 게 누구보다 외로운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본인 모습으로 남아 있으면 분명히 마리네뜨에게서 달갑지 않은 오해(...)를 살 것이 분명하기에 블랙캣으로!


펠릭스의 삶이 좀 많이 골치 아픕니다(...) 마리네뜨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펠릭스의 삶도 나름 험난하기 짝이 없답니다. 아 이건 스포니 일단 패스. 펠릭스의 삶에 대한 언급이 맨 처음 등장하는 건 1권 외전이지만 그건 웹상에 올릴 생각이 없어서요 ㅇㅇ;


다음 에피소드는 모두가 예상하시겠지만 데이트입니다^ㅁ^ 하하 평온한 데이트가 되기를 바라네요 진심으로(...)


뭔가 더 많이 적고 싶지만 너무 시끄러울 것 같아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번 회에 담은 이야기가 많아서인지 자꾸 말이 많아지네요;


빨리 11편을 올릴까 했는데 그럼 기다리는 재미가 없을까봐 나중에... 재판 수요조사 기간이 13일이었지만 일주일 늘릴 계획인데 그 전까지는 12편 모두 확실하게 올려둘 것을 약속드립니다 ㄷㅅㄷ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상은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답니다ㅇ.<

Posted by I.R.E
,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9.

운수 좋은 날







꿈을 꾸고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말이지~ 내가 어제 밤에….”

“그 드라마 남주인공이 완전….”



여느 때와 같은 아침 등교 시간이었다. 하하호호 떠들고 있는 학생들 사이로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펠릭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저번에 그건, 뭐였지?


사라졌다고 생각한 동굴이 다시 나타나고 그 동굴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 그건 아무리 봐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때 실수로 드론을 부수지만 않았더라도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일에 연연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없다.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는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자신들이 막을 수 없는 범주일지도 모른다. 치밀하게 계획된 판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우스웠다. 단순히 악당을 해치우면 평화가 찾아올 거라 생각했던 건가? 그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여기는 현실이다. 생각해보면 악당들은 자신들을 적당히 상대해주기는 했지만 결코 전력으로 덤빈 적은 없었다. 여차할 때는 후퇴했다가 다시 나타나고, 늘 그랬었다. 마치 놀아주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을 때마다 다른 곳에서 미심쩍은 사건들이 하나씩 터졌었지. 아마 자신이 파악한 것보다 더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히어로 놀이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답지 않게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영웅 따위가 있을 리가 없는데. 그게 자신일리는 더더욱.


뒤에 누군가가 있다. 아주 영리하고 머리 좋은 누군가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파리의 상징 중 하나라고 불리는 루브르까지도 거리낌없이 터트릴 수 있는 상대였다. 대체 누구지? 뭐라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단서가 없었다. 배후가 누군지도 모르고,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에 대한 목적도 파악하지 못했다.


꼭 블라인드 체스를 두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서로의 정체를 감춘 채 그저 손만 내밀어 체스를 두게 되는 두 사람.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표정조차도 보지 못하는 상대의 수를 읽고 저쪽의 킹을 잡아야 한다.


현재까지 나타난 악당은 총 다섯. 하지만 아마 정말로 뒤에 어떤 조직이 있다면 폰에 해당되는 조직원들은 수십이 넘을지도 모른다. 상황을 봐서 아마 그들이 전면에 나설 일은 없을 것 같고, 아마 계속 악당들을 이용해 이쪽을 견제하겠지.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리 자주 나타나지는 않는다. 사실 한꺼번에 나타나서 우리를 없애는 게 여러 모로 더 편할 것 같은데, 그동안의 패턴을 보면 희한할 정도로 나타나는 빈도수를 조절하고 있어. 우연일까? 아니면….


신중해야 해.


한 발자국만 나가도 잡아먹힐지 몰라. 어떤 함정을 파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나타날 때마다 미라큘러스를 내놓으라고, 마치 미라큘러스가 본인들의 최대 목적인 것처럼 말을 한다. 정말로? 그렇다면 왜 우리를 없애려 들지 않는 거지. 다섯 명이서 동시에 덤비면 우리를 상대하기가 더 수월할 텐데.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상대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다. 가상의 체스판 앞에 앉은 채로 펠릭스는 살짝 저 건너 어둠 속을 훑어보았다. 마치 베일같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상대의 표정은 과연 어떨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짐작이 전혀 가지 않는다구? 정말로?


머릿속에서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펠릭스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생각했다. 아직은 아니야, 확신할 수 없어. 직접 내 눈으로 본 게 아니기도 하고. 속단은 금물이니까.


웃기지 마. 넌 이미 근접한 답을 찾아냈을 텐데?


비웃음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펠릭스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인정하기 싫은 것뿐이잖아.


저번 사건 때 레이디버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레이디버그는 이 일의 배후에 있는 존재가 호크모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미라큘러스를 가진 자의 소행이라고 했다.


호크모스(Hawkmoth)

제가 아는 뜻이 맞다면 그 이름의 뜻은 분명 박각시나방.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그들의 상징대로 이름이 지어진 것을 보아 분명 이 히어로의 상징도 그 뜻대로겠지. 나방, 나방이라. 나방과 비슷한 종류의 무언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것.


그러고 보면 원래부터 징후들이 몇 개 있긴 했었다. 예를 들면 박물관의 뒤편에 있던 숲에 나타났던 사람들. 그 때 동굴에서 무언가를 옮기고 있던 이들은 모두 검은색의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드론이 부서지기 직전 얼핏 본 그 문양은 옅은 자주빛의….


‘나비 같았지.’


멀리서 본지라 모양을 아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문양은 나비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펠릭스에게 나비라고 하면 가장 맨 처음 떠오르는 인물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은 건지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연관성이 짙은 사물이 있다고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단은 악당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무엇을 목적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저번 그림 도난 사건 때처럼 새로운 악당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플랙 녀석을 다그치니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아낼 수는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묻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았다는 기찬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게으르고 느릿한 성격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럼 앞으로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하겠다고 말하니 플랙 녀석은 아주 우거지상을 지었다.


다른 사람을 악당으로 만드는 능력이라. 그런 미라큘러스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데 대체 왜 우리의 미라큘러스를 노리는 거지? 그렇게 물었지만 플랙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않고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아직은 모르는 게 낫다고 대답하는 플랙에 진심으로 짜증날 뻔했지만 결국 추궁을 포기했다. 딱히 꼭 지금 알아야만 하는 사실도 아니었고 미라큘러스를 넘겨줄 일도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레이디버그에게는 뭐라고 해야 하지.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니까 제대로 확신할 만한 증거를 찾고 나서 말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놈들은 강하다. 우리가 낌새를 눈치챘다 싶으면 정말로 본격적으로 공격해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레이디는 그렇게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타입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손에 낀 반지가 너무도 갑갑했다. 벗어버리고 싶은데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뺄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는 건 알지만 그 방법을 지금 이 타이밍에 쓰고 싶지는 않았다. 두려웠다.


‘믿고 있는 게 당연하잖아.’


네가 다시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게 될까봐.

계속 이 상태로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영원히 감출 수 있는 진실같은 건 없으니까. 하지만….



“펠릭스?”



헉. 화들짝 놀라며 펠릭스는 마냥 눈을 깜빡거렸다.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누군지 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잠잠하던 푸른색 눈동자에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 걱정스러운 시선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낯빛이 어두워보이는 펠릭스의 얼굴을 본 마리네뜨는 깜짝 놀랐다.



“헉, 세상에. 땀을 왜 이렇게 흘리고 있어? 괜찮아?”

“….”

“아, 잠깐만!”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낸 마리네뜨가 펠릭스의 얼굴에 손수건을 가져가려다 흠칫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제 얼굴의 땀을 닦아내는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펠릭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맙지만 이제 됐어.”

“어…?”

“먼저 갈게.”



평소와 달리 살짝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길을 마저 걸어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리네뜨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어디 아픈가?”






청명한 파리의 하늘 위.


에펠탑에서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무언가가 날고 있었다. 무수히 몰린 비둘기 떼들과 사람 하나는 충분히 올라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비눗방울 하나. 비둘기 위에 앉은뱅이 자세로 앉아 있던 미스터 피죤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커다란 비눗방울 위에 올라탄 채로 뒹굴거리며 묻는 버블맨에게 미스터 피죤이 다시금 말했다.



“히어로 녀석들을 죽여서라도 미라큘러스를 뺏어오라고 했던 거 말이야.”

“흐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버블맨의 태도에 미스터 피죤은 정말로 궁금한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요즘 그 녀석들이 우리 일을 많이 훼방놓았다는 건 인정해. 마임맨의 존재를 들켰고, 블랙캣을 도둑으로 몰아서 최소 신뢰를 잃게 하자는 작전도 실패로 돌아갔지. 시민들은 이제 전보다 더 그 녀석들을 믿고 신뢰하니까. 하지만 이 시점에서 굳이 그들을 죽여야만 할 필요가 있냐는 거야.”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아진 미스터 피죤을 가만히 바라보던 버블맨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봤자 아무 소용없잖아. 언제부터 우리한테 선택권이 있었다고. 우린 그냥 명령대로 하면 되는 거야. 깊게 생각하지 마, 아저씨.”

“으음….”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하는 미스터 피죤에게 버블맨은 설마, 하며 되물었다.



“녀석들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딱히 그런 건 아니다만.”



찝찝하단 말이지. 미스터 피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운 날씨였다.


블라인드를 걷어내자 컴컴하던 사무실 안에 햇빛이 들이쳤다. 제레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걷어낸 블라인드 사이로 슬쩍 드러나는 창문 밖의 경치를 말없이 내다보았다.


하지만, 밖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흥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늘 날씨가 맑아서 좋다던가,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하얗게 빛나는 햇살들이 살을 따갑게 태우고 있음에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청명하게 빛나는 여름 하늘의 푸른색조차도 그의 마음에는 아무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색은 무채색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아, 눈에 띄기는 하겠군. 이것저것.



“부르셨습니까.”



살짝 고개를 숙이는 비서에게 제레미는 등을 보인 채 중얼거렸다.



“상당히 시끄럽군.”



귀가 아플 정도로. 무심히 말하고 있지만 그 말 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지금 제레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엘렌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시방석같은 자리라도 그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는 자리를 뜰 수 없다. 그의 상사는 눈치가 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으니까.


한참 뒤, 생각을 마쳤는지 다시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보기를 보이는 것도 중요하겠지.”



제레미의 입가에 피식 조소가 걸렸다.






“방학이다!”



아아아아아…. 말꼬리를 흐리며 책상에 푹 엎어졌던 마리네뜨가 마구 팔다리를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순간에 축 늘어졌다.



“생각해보니 학교를 못 가면 펠릭스를 못 만나잖아….”



나는 바보야. 책상 위로 눈물을 흩뿌리며 그저 방학이 다가온다고 좋아했던 자신의 멍청함을 마구 탓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에이, 괜찮아. 가끔 공원 나와서 산책하기도 하고 그럴 텐데 뭐. 자주 가는 공원 쪽을 가보면 있을 거야. 학교에서만큼 만나기 쉽지는 않겠지만….”



벌떡, 고개를 들어 티키를 향하던 마리네뜨가 이내 울먹거렸다.



“티키이~!!”



역시 내겐 너뿐이야~!! 두 손으로 티키를 붙잡은 마리네뜨가 티키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작거렸다. 꺄르르 웃으며 그런 마리네뜨의 어리광을 받아주고 있던 티키가 다시금 말했다.



“오늘 느낌 어때?”

“음, 좋아!”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가보자! 분명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펠릭스가 눈매를 살짝 치켜떴다. 심기가 좋지 않을 때의 버릇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펠릭스는 바로 앞에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마리네뜨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길래 공원에나 나와서 여유롭게 독서나 하고 들어갈까 했는데, 어째서 이 녀석이 제 앞에 있는 것일까.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가 툭 내뱉었다.



“…스토커야?”



정말로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펠릭스에게 마리네뜨는 손사래를 쳤다.



“말했잖아, 요즘 운이 좋다니까?”



그렇게 말해도 영 못 미더운지 한참을 바라보던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리네뜨가 놀라 소리쳤다.



“어디 가?!”

“집.”

“왜! 같이 있으면 뭐 어때서.”

“넌 시끄러워.”



딱 잘라 말하며 앞으로 걸어가는 펠릭스의 뒤를 쪼르르 쫓아오면서 마리네뜨가 말했다.



“그럼 조용히 할게! 응? 이렇게 만났는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안 될까나…?”



그 말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놀란 표정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펠릭스의 시선 끝에 마리네뜨가 보였다. 살짝 빨개진 얼굴로 두 손의 검지손가락 끝을 맞대고 헤실거리며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 위로 언젠가의 기억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에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이름 정도는 알아도 좋지 않아요?’


붉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살짝 홍조가 어린 얼굴, 자신을 향해 웃던 맑은 푸른색 눈동자까지.


‘안, 안 될까나….’


설마, 그럴 리가….



“그래도 안 돼.”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하며 펠릭스는 다시 뒤돌아섰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다. 뒤에서 추욱 늘어졌을 녀석의 얼굴이 상상되어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시간되면.”

“응?”



더 이상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지 빠르게 걸어 자신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펠릭스를 가만히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이윽고 환하게 웃었다. 나중이라고 기약을 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역시 오늘은 티키의 말대로 운이 좋은 날인가봐! 싱글벙글 웃으며 공원을 나가려던 마리네뜨가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굳은 채로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물었다.



‘마리네뜨, 왜 그래?’

“티키, 방금 그 소리 들었어?”

‘소리?’

“나, 이 소리 알아.”



새가 우는 듯한 소리. 멍하니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뒤를 돌아 공원 안쪽을 향해 달렸다. 헉헉거리며 한참을 달린 마리네뜨의 시선 끝에 어떤 벤치가 보였다. 많은 수의 비둘기가 모여 있는 벤치에 앉아 있던 중년의 신사를 보며 마리네뜨는 중얼거렸다.



“저 사람….”



자꾸만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마리네뜨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벤치가 점점 가까워지자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우뚝 멈춰선 마리네뜨가 두 손을 뒤로 가렸다. 마리네뜨가 다가온 것을 눈치챘는지 비둘기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활짝 웃음꽃을 피우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손에 들린 피리를 발견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뒤로 모았다. 손끝이 자꾸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마리네뜨는 마주 웃어주었다.



“아저씨.”

“응? 왜 그러니?”

“그, 손에 든 건 뭐예요?”

“아, 이거?”



허허, 웃던 남자는 선선히 답을 들려주었다.



“이건 호루라기란다.”

“아하.”

“평범한 호루라기랑은 조금 다르지. 이건 새를 부를 때 쓰는 녀석이니까.”

“그…, 래요?”

“그럼. 한 번 보겠니?”



남자가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힘껏 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같기도 하고 유리가 울리는 듯도 한 오묘한 소리가 나더니 비둘기들이 남자의 주변으로 날아올랐다. 남자의 팔, 어깨, 무릎과 머리 위로 올라온 비둘기들이 옹기종기 앉아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마리네뜨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둘기들을 보며 마리네뜨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재밌니? 재밌지!”



아이처럼 좋아하는 남자의 모습은 도저히 이 파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악당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속마음을 감추며 마리네뜨는 싱긋 웃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자비에. 자비에 라미에르. 그러는 아가씨는?”

“마리네뜨예요!”

“예쁜 이름이네~”



즐겁게 웃고 있는 남자를 상대로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탐색전에 들어갔다.



“여기에 자주 계시나요?”

“아니, 음…. 사정상 여러 공원들을 돌아다니고 있단다. 뭐 이 녀석들이 있는 곳이라면야 어디든 좋지만.”



애정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제 앞의 비둘기들을 내려다보는 자비에의 모습에서 마리네뜨는 확실하게 미스터 피죤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다시금 긴장하는 자신에게 괜찮다고 최면을 걸며 마리네뜨가 다시금 물었다.



“비둘기들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지. 마치 내 아이같다는 생각도 가끔 해요.”



사르르 풀어지는 얼굴로 찡긋 윙크하던 자비에의 시선이 비둘기들을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밑에 떨어져 있는 빵쪼가리만 열심히 주워먹고 있는 비둘기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자비에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뭐, 나나 이 녀석들이나 어딜 가든 문전박대를 당하긴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라며 피식 웃는 자비에의 얼굴이 퍽 쓸쓸해 보여서 마리네뜨는 순간 안타까워졌다. 탐색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순간,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비에 씨! 당신 또 여기서….”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다가오는 제복 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비에는 마리네뜨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런. 아가씨는 먼저 가 봐요. 좋은 일은 아닐 거 같으니까.”



즐거웠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자비에를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어 마리네뜨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계속 달려가다가 공원에서 한참 멀어졌을 때서야 멈춰선 마리네뜨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고개를 숙이고 헉헉거리며 들숨날숨을 열심히 반복하던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말을 걸었다.



“마리네뜨….”

“티, 티키. 맞지? 저 사람이지?”



기운이 느껴져? 마리네뜨의 질문에 티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호크모스를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 그의 수하라면, 변신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기운을 감지할 수가 없어.”

“그, 그렇구나….”



아직도 힘든지 마리네뜨의 숨소리가 살짝 거칠었다. 방학이 되어서 며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벌써 체력이 거지가 다 됐다며 웃고 있는 마리네뜨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여서 티키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아?”

“응? 응.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 모처럼 악당 한 명이 누군지 알았는걸.”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마리네뜨의 미소는 평소마냥 밝지는 못했다.





“흐음~”



마리네뜨와 헤어진 뒤, 묵묵히 길을 걸어가기만 하던 펠릭스의 셔츠 사이로 플랙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키득키득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플랙에게 펠릭스가 조용히 타일렀다.



“플랙. 밖에 있을 때는 고개 내밀지 말랬지.”



대체 언제쯤에야 말을 들을 거냐고 짧게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 생각보다 쟤를 별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도끼눈을 뜨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뭘 그렇게 흥분하냐는 듯이 태평한 얼굴로 낄낄거렸다.



“그렇잖아~ 니 성격에 정말 싫었으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친절을 발휘하지도 않았을 거고 말이야~?”

“사람을 딱히 싫어하지는 않아. 귀찮을 뿐이지.”



딱 잘라 말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오~?”



일부러 길게 늘여 말하는 플랙이 얄미웠는지 펠릭스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플랙의 이마를 톡 튕겼다. 으앗! 비명을 지르며 펠릭스의 품에서 벗어난 플랙이 꺄하하 웃었다.



“나 잡아봐라~”

“야!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을…!!”



열받아서 소리치려던 순간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에 펠릭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무언가. 플랙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공중에 멈춰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펠릭스는 반지를 낀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플랙이 반지 속으로 빨려들더니 검은 오오라가 반지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반지에서 나오는 검은 빛들이 펠릭스의 몸을 감싸자마자 번쩍 빛이 폭발했다 사라졌다. 펠릭스가 서 있던 자리에 나타난 블랙캣이 펄쩍 뛰어올라 기운이 느껴진 장소로 향했다.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계속 달려가는 블랙캣의 눈앞에 파리의 번화가 중 하나인 샹젤리제 거리가 나타났다. 평소였다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활기찬 거리였어야 할 이곳에는 지금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물난리였다. 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소화전들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물이 한 가득 고여 있었고 물세례를 맞았는지 홀딱 젖은 사람들도 다수였다. 아무래도 이 거리에서 장난치고 있는 상대는 버블맨인 거 같다고 예상하며 블랙캣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난리가 아니네.”



바닥에 있는 물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블랙캣은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침 가고 있는 방향에서 크게 솟아오르는 분수에 블랙캣은 직감적으로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는 블랙캣의 옆으로 순식간에 다가온 레이디버그가 짜증스레 말했다.



“대체 이 물난리는 뭐야?”

“누가 아니래.”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 녀석밖에 없지.”



누가 파트너 아니랄까봐 호흡을 딱딱 맞추던 두 사람은 어느 새 샹젤리제 거리에서도 상당히 넓은 폭을 자랑하는 삼거리 쪽으로 들어섰다. 뭔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



“아니, 내가 왜 하필 네 녀석이랑 같이 싸워야 하는 거야? 난 물이 싫다고!”

“아, 불평 그만 하고 좀 거들어요. 그리고 저도 새는 싫어요. 냄새나는걸.”

“뭐얏?!”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미스터 피죤과 버블맨을 발견하고서 블랙캣은 쟤들 뭐하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레이디버그는 미스터 피죤을 발견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제 뺨을 두 손으로 탁탁 내리쳤다. 정신차려, 집중해야지!


두 히어로를 먼저 발견한 버블맨이 정답게 인사를 건넸다.



“여어, 왔어?”

“너희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이런, 이런. 그 대사 듣는 것도 슬슬 지겹네. 애초에 그만둘 거면 시작도 안 했겠지~ 알잖아?”



빙글빙글 웃는 그 얼굴이 어찌나 얄밉던지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표정이 왕창 구겨졌다. 열받은 얼굴로 공격에 들어가려던 블랙캣을 붙잡은 레이디버그가 작게 소곤거렸다.



“블랙캣, 미안한데 네가 미스터 피죤을 맡아줄 수 있어?”

“응? 그건 뭐 어렵지 않은데…, 왜 그래?”

“아, 아니. 그냥….”



우물쭈물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블랙캣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레이디가 원한다면야.”



그 말과 함께 블랙캣은 재빨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너클 한 쌍을 꺼낸 블랙캣이 그걸 각각 손에 끼고서 미스터 피죤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듯한 그 포즈에 미스터 피죤은 피리를 불며 블랙캣에게로 손짓했다. 비둘기들이 달려들었다.



“뭐야, 내 상대는 너인가?”



비눗방울 위에 올라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보는 버블맨을 노려보며 레이디버그는 가방에서 날카로운 검을 하나 꺼내들었다. 방울을 다루는 녀석이니 방울을 터트리며 대응하면 된다.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버블맨은 히죽 웃으며 소리쳤다.



“제법 머리를 쓰네?”



대꾸 없이 달려들 준비를 하는 레이디버그에게 버블맨은 피식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이런.



“하지만 말이야. 내 특기가 방울이긴 하지만, 딱히 그것만 할 줄 아는 건 아니거든?”

“뭐?”

“지금 이 물난리를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 말과 함께 버블맨은 들고 있던 비눗방울채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땅이 진동하더니, 주변에 있던 소화전들에서 세찬 물줄기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놀라 주위를 둘러보는 레이디버그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낄낄 웃는 버블맨의 주변으로 모여든 물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했다. 기겁하며 살짝 뒷걸음질치는 레이디버그를 향해 버블맨이 채를 휘두르자마자 수룡(水龍)은 빠르게 아래쪽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꺄아악!”



달려드는 용을 피해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수룡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방향을 비틀더니 그대로 레이디버그를 덮쳤다. 파격음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리꽂힌 수룡이 다시 하늘로 승천하듯이 위쪽으로 크게 솟아올랐다. 미스터 피죤과 싸우다 그 모습을 본 블랙캣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레이디!”



수룡이 사라진 자리에 레이디버그가 쓰러져 있었다. 물에 흠뻑 젖어 검게 물들어 있는 바닥 위에 죽은 듯 엎어져 있던 레이디버그가 쿨럭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블랙캣이 서둘러 레이디버그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미스터 피죤이 보낸 비둘기 떼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가시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블랙캣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비둘기들에게 던졌다. 쌔앵 날아간 그물이 촤악 펴지더니 새들을 바닥으로 깔아뭉갰다. 악! 내 사랑스러운 비둘기들이! 비명을 지르는 미스터 피죤을 뒤로 한 채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에게로 후다닥 달려갔다.



“레이디, 설 수 있겠어?”

“쿨럭, 응. 당연하지.”



흠뻑 젖은 몰골로 상당히 물을 많이 먹었는지 계속 기침해대는 레이디버그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블랙캣이 시선을 위로 돌려 버블맨을 노려보았다. 히죽히죽 웃으며 버블맨은 다시금 물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런 버블맨을 초조하게 지켜보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지? 아까와 같은 공격이 또 들어오면….”

“들어오기 전에 막거나 피하면 되잖아.”

“무리야. 아까 피하려고 했는데 방향을 바꾸더라구. 그리고 충격이 엄청나. 나라서 망정이지 일반 사람이 맞았으면 즉사였을 거야.”



당당하게 서 있었지만 방금 전의 충격 때문인지 레이디버그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어느 새 미스터 피죤까지 버블맨의 옆으로 다가온 것에 블랙캣은 속으로 짜증을 냈다. 아, 하나도 성가신데 둘이라니.


잠깐, 둘?



“아까 저 녀석들이 처음에 하던 대화 기억나, 레이디?”



작게 소곤거리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응?”

“그대로 한 번 가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이 몇 마디 속닥거렸다. 살짝 정신이 없는지 넋나간 표정으로 말없이 듣고 있던 레이디버그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될까?”

“그럼, 내가 누군데. 내가 하잔대로 해서 문제 생긴 적 있었어?”

“…아니.”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 레이디버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치며 블랙캣은 다시금 버블맨을 쳐다보았다. 두 번째 공격을 위한 준비를 이미 마쳤는지 이번에 만들어진 녀석은 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절묘하다고 키득거리며 블랙캣은 입가에 가득 미소를 그려냈다. 블랙캣은 봉을, 레이디버그는 각각 검을 꺼내들고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을 가만히 응시했다.


버블맨이 다시금 채를 휘둘렀다. 푸드득 날아 덤벼드는 새를 가만히 지켜보며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새가 아주 근접할 때까지 날아들다가 양 옆으로 나뉘어 피했다. 예상대로 움직임이 둔해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새를 응시하며 레이디버그는 방금 헤어지기 전, 블랙캣이 들려준 봉을 꺼내 바닥에 꽂고 날아올랐다.


미스터 피죤이 있는 쪽으로. 히익, 기겁하며 도망치기 위해 미스터 피죤이 방향을 선회하기 직전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몸을 숙여 방향을 바꿨다. 빠르게 날아오는데다 몸집도 거대해 쉽게 방향을 틀지 못하고 물새는 그대로 미스터 피죤과 충돌했다. 봉에 매달려 있다가, 엄청난 충격과 받고 비둘기들과 함께 추락하는 미스터 피죤을 발견한 레이디버그가 그를 향해 뛰어내렸다.


‘레이디, 지금 우리 힘만으로 저 둘을 다 상대하기는 좀 버거워. 하지만 말이지, 상대하는 놈이 둘이면 써먹을 수 있는 작전이 하나 있긴 하거든.’


가방 속에서 다시금 붉은 검을 꺼내든 레이디버그가 마치 검처럼 몸을 쭉 펴고 아래로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한 녀석을 이용해 다른 한 녀석을 잡자. 저 공격은 강하지만 아예 틈이 없는 것은 아니야. 아마 저 공격도 나보다는 레이디가 표적일 거야. 어떻게든 미스터 피죤에게로 저 공격을 유도해야 해. 내 봉을 빌려가.’


공기저항 때문인지 자꾸만 흔들리려는 중심을 애써 바로잡으며 레이디버그는 티키가 제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악당들은 악당으로 변신하게 해주는 촉매제가 있어. 마치 미라큘러스처럼.’


촉매제를 부수면 더 이상 악당으로 변하지 못하겠지. 그럼 문제를 일으키지도 못할 것이다. 촉매제가 뭔지는 뻔했다. 버블맨은 둘째치더라도 미스터 피죤의 촉매제는 분명….


미스터 피죤의 목에 매달려 있는 호루라기를 발견한 레이디버그의 눈이 매서워졌다.


한편, 미스터 피죤은 자신과 함께 추락하고 있는 비둘기들과 더불어 위쪽에서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내려오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후다닥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아직 저쪽에 남아 있는 새들이 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바로 그 순간, 사무실에 앉아 있던 제레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미스터 피죤의 몸에서 한 순간 힘이 빠졌다. 호루라기를 불어야 했던 타이밍을 아주 살짝 놓쳐버린 순간, 미처 궤도를 수정하지 못한 레이디버그의 검끝이 미스터 피죤의 배를 꿰뚫었다. 레이디버그의 얼굴에 뜨거운 핏방울이 튀었다.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미스터 피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차가운 돌바닥 위로 추락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미스터 피죤의 주변으로 물에 젖은 새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파득파득, 애처롭게 날개를 움직이는 새들을 시선을 돌려 쳐다보던 미스터 피죤은 제 배를 뚫어버린 붉은 검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배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과 더불어 검의 주변으로 붉게 번지기 시작하는 자국들에 미스터 피죤은 직감했다.


여기까지인가.


죽음의 그림자가 제 눈가에 드리우고 있었다. 멍하니 제 주변에 있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비둘기들과 자신의 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멀쩡한 비둘기들을 바라보는 미스터 피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내겐 역시 마지막까지 너희들밖에 없구나.


우리가 대체 뭘 잘못한 걸까. 우리는 그저 쉴 장소가 필요했었을 뿐인데. 미스터 피죤이 입을 벙긋거렸다. 힘이 없어 희미한 신음 소리만이 입가로 새어나왔지만, 그는 분명히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 유유자적 이 녀석들과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걸까. 방해된다는 이유로 계속 쫓겨나기만 하고, 어떤 곳에 가더라도 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어디에도 우리가 쉴 수 있는 장소는 없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장소를 가지고 싶었어. 우리를 괴롭히는 인간들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그의 눈가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 까만 눈동자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천천히 손을 들었다. 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팔을 움직여 제 바로 가까이에 있는 비둘기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구구, 기분좋게 우는 비둘기를 보며 미스터 피죤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저, 자신 때문에 휘말려든 이 가여운 아이들이 불쌍할 뿐이었다.


미안하구나.



“이…. 저…. 나….”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가만히 중얼거리던 미스터 피죤의 몸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하얀 빛방울들이 천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구구?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둘기들을 쳐다보며 미스터 피죤은 활짝 웃었다. 새들과 같이 놀던 때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입가에 살며시 띄운 채로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감겼다.


그와 동시에 미스터 피죤의 얼굴 근처에 떨어져 있던 호루라기가 톡,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호루라기 사이에서 나타는 것은 다름 아닌 새까만 색의 나비였다. 검은 나비가 팔랑 날아오르더니 하늘로 날아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나비를 발견한 블랙캣의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공중으로 솟아오르던 빛방울들과 함께 미스터 피죤은 완전히 사라졌다. 시체조차 남지 않은 아름답지만 기괴한 광경에 블랙캣은 말을 잃었고, 버블맨은 이미 도망갔는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디버그는….



“아니.”



망연히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얼굴에 묻은 핏자국조차 신경쓰지 않고, 미스터 피죤이 사라진 자리만을 멍하게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의 표정은 흡사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아니야, 난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을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이 흡사 피에 범벅되어 있는 것만 같아 레이디버그는 몸을 덜덜 떨었다. 무섭다. 두렵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제 몸을 양팔로 껴안고 몸을 웅크렸다. 춥다. 너무 추웠다. 방금 전 물을 맞았기 때문일까? 여름인데도 마치 겨울처럼 추웠다. 몸의 떨림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저 촉매제를 부수려고 했을 뿐인데. 더 이상 피해가 나지 않기를 바랬을 뿐인데. 이렇게….


살짝 고개를 들자 구구거리는 비둘기들만이 돌바닥 위에 모여 있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저기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다. 존재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붉은 검을 발견한 레이디버그의 몸이 흠칫 튀어올랐다. 내가 휘두른 악몽의 흔적. 스스로가 불러낸, 사라지지 않는 죄의 표상.


내가, 사람을 죽였어?


하하, 자조의 웃음을 토해내던 레이디버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이미 검게 물들어버린 바닥으로 스며들어갔다.


고장난 소화전들, 물로 흠뻑 젖어버린 주변, 방금 전 싸움의 여파로 살짝 무너져버린 건물들. 아수라장이 된 거리 한복판에 앉아 레이디버그는 그저 절규했다. 



“왜 이렇게 된 거냐고!!”






푸른 도화지 같은 하늘 위로 까만 점이 천천히 움직였다.


바람결을 타고 팔랑팔랑 날아가던 검은 나비는 어느 한 건물에 다다랐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안으로 휙 날아든 나비는 창문 바로 앞에 쭉 뻗어 있는 검지손가락 위로 올라앉았다. 살짝 날개를 파닥거리는 검은 나비를 말없이 바라보던 남자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즐거워 보이지만 그래서 더 오싹할 정도로 서늘한 미소와 함께 남자는 중얼거렸다.



“도둑을 잡기에는, 역시 같은 도둑만한 게 없겠지.”





※ Set a thief to catch a thief. - 프랑스 속담, 이이제이(以夷制夷)



- 10편으로




===


네, 책을 구입해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바꾼 대사가 있습니다.

제가 왜 대사를 바꿨냐면 원래 쓰려던 대사가 저거였는데 바꾸는 걸 까먹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뜻은 똑같아요. 재판본에는 저걸로 수정해서 낼 거 같네요...ㅠㅠㅠㅠ 저거 뜻 통하는 거 찾으려고 엄청 고생했었는데 뭐했죠 과거의 저(멍뎅)


운수 좋은 날! 제목 정말 언제 봐도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한국 문학의 모 소설이 떠오르신다면 아주 정확히 짚으신 겁니다 ㅇㅇ


다음 회 예고를 간략히 적어볼까 고민했지만 스포일러는 재미없으실 것 같아 제목도 생략하고 있죠! 머리쓰는 거 좋아합니다 후후 추론하면서 읽으셔도 재밌으시겠지만 굳이 안 하셔도 되요 우리의 해결사 펠릭스가 있으니까요!(펠릭스: 야


여름 에피에서 가장 즐겁게 작업한 화 중 하나입니다. 이 얘기 했더니 책을 읽으신 분들이 저를 악마보듯 보셔서 슬프네요 아니 어째서죠 이 정도 시련은 줘야 극이 재밌어지죠~ 안 그래요?^ㅁ^


다크한 성인용 정치극<<이라는 소재에 맞게 하기 위해 매우 많이 노력했습니다 ㅇㅇ 사실 수위가 너무 약한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읽으신 분들이 15금은 된다고 해서 안심한!(모두: 저건 진짜 악마다) 애들에게 시작되는 시련은 사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만 아이들은 아직 모르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죠?(모두: 저기요


최대한 현실적이고 희망찬 전개를 적기 위해 노력했사오니 즐겁게 지켜봐주셔요>ㅁ<!!


Posted by I.R.E
,

※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8.

두 명의 블랙캣







어두웠던 밤이 지나고 푸르른 새벽이 밝아오던 시간, 어두운 갤러리 안으로 빛이 살짝 들이치고 있었다. 부서진 벽들 앞에는 「들어오지 마시오」 라고 적혀 있는 노란 테이프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벽 위쪽에는 혹시 그림에 빛이 닿아 손상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새까만 색의 가리개들이 걸려 있었다. 하얀 햇살이 걸려 있는 그림들의 발치를 살짝 비추고 있었다.


이토록 조용하던 박물관의 단잠을 깨운 것은 어떤 그림자였다. 까치발을 살금살금 걸어오던 그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천천히 걸어와 어떤 그림 앞에 섰다. 가만히 그림을 올려다보던 그림자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림을 보호하고 있던 유리를 깨부수고 그림을 꺼냈다.


유유히 사라지는 그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좋은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오는 마리네뜨에게 사빈이 상냥하게 말했다.



“어서 와서 밥 먹으렴.”

“네….”



웅얼거리며 제 아빠의 옆에 앉아 마리네뜨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접시에 놓여 있던 소세지를 입에 넣으려는 찰나 TV에서는 갓 들어온 소식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뉴스입니다.]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소세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던 마리네뜨의 귓가에 온 파리가 뒤집어질 만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오늘 새벽, 세계적인 명작 「Mona Lisa」 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 명화의 행방을 찾고 있는….]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 그 내용을 이해하자마자 마리네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부모님도 놀라셨는지 TV를 망연히 쳐다보고 계셨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헐?”





[저번 폭탄 테러에 이어 또 다시 홍역을 앓게 된 박물관에서는 이번 사건의 범인에 강경히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뉴스의 화면이 바뀌고, 수사팀 반장이라는 자막을 밑에 띄운 중년의 남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고 있었다.



[“저희 경찰에서는 이번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에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최선을 다해 도둑맞은 그림의 행방을….”]



뚝, 소리와 함께 TV의 화면이 꺼졌다. 들고 있던 리모컨을 소파에 던지며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미쳤군.”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박물관에 꼬이는 미친놈들이 많은지. 한숨을 쉬며 넥타이를 마저 매기 시작한 펠릭스의 주변으로 플랙이 새까만 발자취를 뿌리며 날아왔다.



“오오! 사건인 거야?”

“몰라. 경찰에서 알아서 하겠지.”



평소처럼 단정하게 소매 단추까지 꼭 잠근 뒤, 펠릭스는 옆에 있던 가방을 들고 뒤돌아섰다. 가방 속으로 쏙 들어가는 플랙을 못 말린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펠릭스가 이내 미련 없이 거실을 떠났다.





“펠릭스~!!”



언제나처럼 자신을 쫓아오는 마리네뜨의 목소리에 펠릭스는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아침마다 마주치게 되는 걸까. 정말 스토커 아니야?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마리네뜨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 자신이 짜증나서 펠릭스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펠릭스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온 마리네뜨가 방긋 웃으며 표를 들었다.



“이번에 나랑 콘서트….”

“안 가.”



딱 잘라 말하자 마리네뜨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지는 것을 보고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화들짝 놀란 펠릭스는 방금 전의 상념을 뿌리치겠다는 듯이 빠르게 마리네뜨의 옆을 벗어났다. 살짝 몸을 앞으로 향하며 터벅터벅 걷는 펠릭스의 팔다리가 양쪽 다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보고 있어. 자신을 마냥 바라보고만 있을 마리네뜨를 떠올리며 펠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예전처럼 매정해지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왜지? 그새 정이라도 든 걸까? 귀찮게 따라다닌다고 질색할 때는 언제고,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변덕스러웠던가? 아니, 지금도 귀찮기는 했다.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성가시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변한 걸까. 사람의 마음은 늘 변덕스럽다지만 자신에게는 절대 해당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번 공원에서 만났을 때부터인가? 아니면 호텔 연회장?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딘가 출발점이 있었을 텐데.


교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는 펠릭스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바보같긴, 이런 생각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라고. 어차피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아까 봤던 녀석의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시험은 무사히 넘긴 모양이다. 당연하겠지, 자신이 그렇게까지 시간을 내서 가르쳐줬는데 안 좋은 결과를 받아올 리가 없잖아. 그 때는 그저,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신기했었다.


만약 블랙캣이 나라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레이디버그도 사실은 싸우기 싫을지도 몰라요. 사람은 언제나 강하지 않으니까요. 약한 모습도 있다구요. 평범한 여자아이일 수도 있는 거야!’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손댈 수 없다. 본인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부분은 손대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이건 그 녀석을 꺼리게 되는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솔직한 시선으로 나를 파헤치려고 하는 네가 두려워.


절대 말할 일은 없겠지만.


한숨을 쉬며 문을 열자 여느 때와 같은 활발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여, 펠릭스!”



안녕? 반갑게 인사하는 앨빈을 흘끗 돌아보다가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짧게 대답했다.



“안녕.”



그 한 마디와 함께 자리로 가서 앉는 펠릭스에 앨빈은 깜짝 놀라서 후다닥 펠릭스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평소와 같이 책을 펴고 깔끔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펠릭스에게 앨빈이 물었다.



“왜, 왜 그래?”

“뭐?”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갑자기 영혼이라도 바뀐 거야?”

“…싫으면 말던지.”

“아냐, 아냐! 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오니까 굉장히 당황스럽네. 어메이징해!”



완전 감격했다는 듯이 두 손을 꼭 깍지끼고 중얼거리는 앨빈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올려다보던 펠릭스가 딱 잘라 말했다.



“니 자리로나 가라.”

“에이, 왜 그래 친구~?”

“징그러워.”

“어후, 너무하네. 내가 어딜 봐서 징그럽다는 거야?”

“전부.”



짤막짤막하지만 모두 제대로 대답하고 있는 펠릭스를 보며 앨빈은 그저 싱글벙글했다. 한편,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앨빈의 친구들은 모두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했다. 개중에는 눈을 비비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야, 내가 꿈을 꾸고 있냐? 앨빈이랑 쟤…, 왠지 대화를 하고 있는 거 같지 않아?”

“같지가 않아가 아니라 진짜야! 헐, 세상에. 저 새끼, 역시 무서운 놈이었어. 저 무뚝뚝한 놈하고 대화라는 게 가능하다니!”

“진짜 몇 주간을 줄창 쫓아다니더니 무슨 마술이라도 부렸나? 난 저 녀석이 대답을 세 번 이상 잇는 것도 처음 봐. 오, 미친.”

“진짜 독한 새끼. 이제 앨빈 저놈은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어. 복수도 진심 끈질기게 할 거 같아.”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친구들의 반응과는 별개로 앨빈은 정말로 즐거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앨빈을 참으로 특이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펠릭스는 남몰래 한숨지었다. 뭐가 재밌다고 이렇게 유치한 대화나 하고 있어야 하는지. 더 무서운 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처음만큼 이 상황이 귀찮지는 않다는 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짜증스레 머리를 긁적이던 펠릭스의 머리 위로 수업 종이 울렸다.





수업이 다 끝나고, 펠릭스는 가방에 교과서를 챙겨 넣고 있었다.



“파트너!”



다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필기구를 집어넣으려는 순간, 가방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며 웃고 있는 플랙의 모습에 펠릭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뭔데.”

“나타났어!”

“그래서, 가야 한다고?”

“그렇지~”



능글맞게 웃고 있는 플랙에게 더 이상 묻지 않고 펠릭스는 재빨리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왔다.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사람이 없는 뒤뜰로 나온 펠릭스는 가만히 반지를 낀 손을 올렸다. 검은빛이 번쩍하더니 소년이 있던 자리에서 튀어나온 블랙캣은 빠르게 건물 사이를 넘고 넘어 악당의 기운이 느껴지는 장소로 향했다. 한참을 뛰어가던 중 보이는 장소에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도난 사건으로 시끌벅적할 텐데 왜 굳이 저기에 나타났다는 거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블랙캣은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모르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


루브르 박물관 앞에는 역시나, 수많은 경찰차들과 경찰들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폴짝 뛰어 바닥에 착지하는 블랙캣을 보자마자 좌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어라? 왜 그러지? 의아한 눈으로 경찰들을 바라보는 블랙캣을 바라보던 경찰 하나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체포해!”



순식간에 우르르 달려온 경찰들이 블랙캣의 주변을 둥그렇게 감싸더니 그에게로 달려들어 팔을 결박했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생각하며 블랙캣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짓이에요?! 설마 얼마 전처럼~ 그림을 훔쳐간 악당이 절 감옥에 처넣어 달라는 요구라도 했나봐요?”



빈정거리는 블랙캣에 경찰은 살짝 뜨끔한 얼굴을 했지만, 곧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크, 크흠. 고작 그런 걸로 우리가 널 체포하는 줄 아나?”

“고작 그런 걸로 우릴 사지로 내몰았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런 일로 네가 저지른 죄를 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죄를 짓지도 않았지만, 일단 들어는 보죠. 대체 왜 나를 체포하겠다는 겁니까?”

“흥, 이걸 봐라.”



선두에 선 형사가 내미는 사진을 보고 블랙캣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박물관 내부를 찍은 사진이었는데, 모나리자가 걸려 있는 유리관 쪽으로 걸어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고양이 귀를 쫑긋 세운 누군가.



“헉?”



자신과 똑 닮아있는 그 모습에 블랙캣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대체 왜 이놈이 나라는 거예요!”

“이렇게 똑 닮았는데도 시치미를….”

“내가 훨씬 잘생겼구만!”



당당하게 외치는 블랙캣의 한 마디에 경찰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지 그저 씩씩거리는 블랙캣에 경찰들은 더 할 말이 없다 싶었는지 한숨을 쉬었다. 앞에 서 있던 형사가 말했다.



“끌고 가.”






쾅- 소리와 함께 감옥의 문이 닫혔다. 진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감옥의 창살을 꼭 잡는 블랙캣을 보며 형사가 말했다.



“그간 파리를 위해 노력해준 것에 대한 예의로, 그림만 무사히 돌려준다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니 말해. 「Mona Lisa」는 어디 있지?”

“아니, 이건 무슨 개뼉다구같은 소리예요? 제가 그 그림을 훔쳤을 이유가 없잖아요!”

“이유가 없긴 왜 없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인데!”



블랙캣은 그건 무슨 괴상한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눈 앞의 경찰을 쳐다보았다.



“그것도 팔 수가 있어야 가치가 있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도둑맞았다고 알려졌는데, 그게 경매에 나오면 다들 얼씨구나 하면서 사가겠습니까? 곧바로 신고하지.” 

“경매가 아니라 그냥 암거래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오, 진짜! 이런 비싼 그림을 살 만한 사람이랑 제가 대체 무슨 인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시 모르지. 네 정체가 엄청난 부자라서 그런 쪽으로 인맥이 있을지도.”



경찰의 한 마디에 블랙캣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억울했다. 물론 그 뒷모습은 자신과 똑같아 보일 정도로 비슷하긴 했지만 그건 제가 아니다. 혹시, 요정에겐 히어로를 조종하는 능력도 있나? 플랙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변신을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왜 저라고 생각해요? 저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변장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웃기지 마. CCTV 모두 확인했는데, 아무리 봐도 네놈이었다구.”

“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반문하는 블랙캣에게 경찰이 자못 엄숙하게 말하며 사진 한 장을 던졌다.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진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블랙캣에게 경찰이 다시금 말했다.



“잘 생각해봐. 우리도 시간은 많이 못 주니까. 파리의 언론이 무척 소란스럽거든. 우리는 빨리 성과를 내야 해.”



그 말과 함께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는 악당을 다시 한 번 붙잡으려다 그만두고, 블랙캣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진짜, 이건 또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야?!”



살다살다 도둑으로 몰릴 때도 있군.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블랙캣은 이를 득득 갈았다.



“애초에 말이지, 왜 하필 모나리자인데? 돈을 노렸다고 해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을 대체 어디다 내다판다는 거냐고~!! 그림의 진짜 값어치를 받으려면 적어도 유명 경매시장에 내놓아야 한단 말이야. 근데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거든. 그리고 도둑맞았다는 게 전 세계적으로 광고된 그림을 대체 누가 사간다는 거야? 이건 나한테 메리트가 전혀 없는 일이라고!”



평소에도 명작이란 굳이 손에 넣기보다는 멀리서 감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였는지라 더 분노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념과 위배되는 행동을 한 것도 모자라서 그 죄를 나한테 덮어씌워?



“나를 도둑으로 몰기 위해서 ‘굳이’ 모나리자를 훔쳐낸 것 같은데, 진짜 어이가 없네. 당하고만 있어줄 성격으로 보이나, 이 내가?”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한참을 짜증내다가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리고 나서야 블랙캣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겼지만 절대 자신은 아닌 자.



“…새로운 악당인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루브르 쪽에서 굳이 악당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것도 수상쩍었거니와, 사태를 보아하니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인 것 같고.


자신과 똑 닮은 녀석이라. 이제껏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딱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비눗방울을 불어서 사람을 공격하는 놈도 있고 비둘기를 타고 다니는 놈도 있고, 맨바닥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놈도 있는데. 저번 폭탄 사건 때 마주했던 놈은 심지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다루던 자가 아니었던가. 변신할 줄 아는 악당 한 명쯤 더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있지?”



자신은 그 악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자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누명을 벗을 수 있다는 거다. 그것도 이 좁은 감옥 속에서.



“아오, 미치겠네!”






“생각보다는 수월한 걸?”



살짝 느른하면서 섹시한 목소리가 붉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검은색의 망토를 걸치고 박쥐 모양의 가면을 쓴 악당이 우아하게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연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서 악당은 피식 웃었다.



“그래, 식은 죽 먹기지. 하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얼마나 쉬운데? 조금만 머리를 쓰면 된다구.”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했는지, 악당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아, 이 그림? 뭐~ 진짜 경매장에 내놓았다간 경찰이 블랙캣에 대한 의심을 풀 거 아니야? 그냥 가지고 있어야지. 그럼 영원히 감옥행이겠네~”



불쌍해서 어쩌나. 큭큭 웃어대던 상대는 곧 말을 이었다.



“경찰은 일단 어떻게든 사건을 조용하게 끝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럴 수는 없지. 일단 한 놈은 가둬놨으니, 다른 한 녀석을 처리하러 가볼까?”



그럼 그 분이 무척 기뻐하시겠지.


간단하게 통화를 마치고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던 악당이 싱긋 미소지었다.



“자, 어떡할까나~?”






“네?! 블랙캣이 감옥에요?”



놀라는 레이디버그에게 40대쯤 되어 보이는 금발의 남자 경찰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다니까요. 이미 증거가 다 있는데도 계속 아니라고 우기고, 그림이 어디 있냐고 물어도 죄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아니, 근데 정말 블랙캣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CCTV에 명확하게 찍혔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경찰에게 레이디버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것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조심스럽게 요청하는 레이디버그에게 경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선선히 대답했다.



“안될 건 없죠.”



레이디버그를 데리고 박물관 안에 있는 관리실로 들어간 경찰이 곧 자리에 앉아 있는 직원을 불러 오늘 새벽의 CCTV 영상을 틀게 했다. 처음에는 어두운 갤러리의 모습만 나오다가 직원이 몇 번 버튼을 돌려가며 조율하자 곧 장면이 드러났다.



“여깁니다.”



레이디버그는 말을 잃었다. 갤러리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온 것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유리관을 부순 것도, 안에 있던 그림을 들고 있던 것도 모두 블랙캣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이상했다. 뭐지? 뭐가 이상하지?


레이디버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잠깐만 더 돌려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자 직원은 선선히 부탁을 들어줬다. 팬이라고 하면서 악수 한 번만 해달라고 웃는 직원에게 기분 좋게 악수를 건넨 뒤 레이디버그는 다시금 화면에 집중했다. 몇 번을 돌려본 후에야 레이디버그는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림자….”

“예?”

“여기 봐요, 이 블랙캣. 그림자 모양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레이디버그는 급기야 손으로 버튼을 잡고 계속 영상을 돌리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블랙캣이 그림을 들고 박물관을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의 발에서부터 길게 늘어져 있는 그림자를 가리켰다.



“이거 보세요.”

“엇?!”



블랙캣의 발에서부터 이어지는 긴 그림자를 본 경찰과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서 있는 사람은 블랙캣이 맞았는데 그림자는 블랙캣의 것이 아니었다. 쫑긋 솟은 고양이 귀가 없는데다 체형도 미묘하게 달랐다.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레이디버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블랙캣을 만나야겠어요. 데려다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 하지만 저것만 가지고 무조건 블랙캣이 아니라고 하기엔….”



아직도 우물쭈물하는 경찰에게 레이디버그는 웃으며 말했다.



“얼굴 보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쵸?”



싱긋 웃으면서도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붙잡는 레이디버그의 손에 밖으로 끌려가던 경찰의 핸드폰이 띠리리링 울렸다. 레이디버그의 팔에 끌려가면서도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은 경찰이 잠시 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 탈옥?!”

“네?!”



그 말에 놀라 돌아본 레이디버그가 재빨리 경찰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갔다. 경찰이 하려던 순간 레이디버그는 다급하게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쉬잇-! 헙, 분위기에 눌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입으로 틀어막는 경찰을 내버려두고 레이디버그는 스마트폰의 스피커를 켜고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렇습니다! 감옥의 벽을 부수고 탈출한 모양이에요! 심지어 도망친 지 꽤 시간이 지난 거 같아요!]



심지어 이 소란을 틈타 죄수들 몇 명도 같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빨리 돌아와달라 재촉하는 목소리에 경찰은 다시 레이디버그에게서 핸드폰을 뺏어들고 몇 마디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골치 아프다는 듯 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탈옥이라니,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아, 한숨을 쉬는 남자의 옆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이디버그의 옆구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직 녀석을 만나기는 좀 어렵겠지만.”



권유해주는 경찰에게 레이디버그는 가방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전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그쪽 먼저 우선시해야 할 거 같아요. 그 바보를 발견하면 나중에 연락 주세요.”

“? 네 그러죠.”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경찰을 뒤로 한 채 레이디버그는 최대한 빠르게 루브르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지붕 위로 뛰어올라 한참을 달려온 뒤에야 레이디버그는 가방에 넣었던 손을 쑥 뺐다. 손에 든 알록달록한 모양의 스마트폰이 지잉지잉 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레이디버그가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 레이디. 안녕~?’

“너 지금 어디야?! 감옥 부숴먹고 탈옥했다는 건 또 뭐야!”



버럭 소리지르는 레이디버그에 조금 놀랐는지 블랙캣이 잠시 멈칫했다가 곧 태연하게 다시 말했다.



‘그건 아직 말해줄 수 없고~ 레이디. 혹시 경찰이 무슨 헛소리를 했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어. 나는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구.’

“그건 이미 알아, 이 멍청아! 이미 사실 다 확인했어! CCTV에 찍힌 사람은 그림자가 너랑 달랐다구.”

‘뭐야, 그런 것도 있었어? 그래도 사실을 알았다니 다행이네. 사실 레이디가 나를 믿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거든.’

“믿고 있는 게 당연하잖아.”

‘정말로?’



날카롭게 훅 찔러오는 블랙캣의 질문에 레이디버그는 말문이 막혔다. 곤란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블랙캣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화제를 돌렸다.



‘뭐 그건 됐고. 지금 내가 급하게 어딜 들렀다 와야 하거든. 레이디는 지금 한가해?’

“그래, 누구씨 덕분에 곧 바빠질 거 같지만.”

‘그래, 그래. 그럼 부탁 좀 할게. 샹젤리제 거리 중심가에 가면 라뒤레라는 초록색 간판의 마카롱 가게가 있어. 거기 앞에 ‘데니스 브라운’이라는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을 가진 남자가 있을 거야. 그 남자 데리고 내가 말하는 장소로 와줘. 참고로 말은 조심해, 기자거든.’



그 외에도 블랙캣은 몇 마디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할 말은 다 끝났는지 전화를 끊으려는 블랙캣에게 레이디버그는 조용히 물었다.



“…왜 이런 걸 부탁하는 거야?”

‘음, 뭐랄까. 당하고만 있는 건 재미없잖아? 그래서 갚아주려고.’

“갚아준다니…. 어떻게?”

‘그건 아직 비밀. 기대해도 좋아. 이번 일을 보면 아무리 레이디라도 나한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걸?’



즐겁게 웃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끊어진 핸드폰 액정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레이디버그가 피식거렸다.



“하여간 잘난 척은.”



곧바로 샹젤리제 거리 쪽으로 날아간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이 말한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밝은 형광초록색으로 칠해진 간판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남자에게로 달려가 남자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어어…! 깜짝 놀랐는지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남자를 안고 계속 하늘을 달려가는 레이디버그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왠지 재미있는 자세네요.”

“네?”

“이 나이 들어서 공주님 안기를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헉, 죄송해요. 기분 나쁘시다면….”

“아뇨, 재미있고 좋은데요 뭐.”



처음 겪는 일에도 저렇게 태연하게 구는 것만 봐도 왠지 보통 성격은 아닌 듯 싶었다. 자신보다 작은 여자아이가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상당한 체구의 자신을 안고 가는 것이 놀라웠는지 남자는 잠시 경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보다 되게 신기하군요. 기자라면 피해 다닌다던 영웅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날도 있다니.”

“기자시라고 했죠?”

“네, 「르 피가로」 지의 기자인 데니스 브라운입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데니스에게 레이디버그는 다시 물었다.



“지금 뭘 하러 가시는지는 알고 계세요?”

“몰라요. 저는 오늘 기사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멋진 레이디께서 데리러 와주실 줄은 몰랐지만요.”

“기사요?”

“네, 기사.”



지붕을 크게 껑충 뛰면서 레이디버그는 공중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처음 듣는다는 듯이 제게 반문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 뭔가를 짐작했는지 데니스가 태연하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가보면 알겠죠.”





“잘 찾아가려나~?”



전화를 뚝 끊고서 블랙캣은 폴짝폴짝 지붕을 건너다니며 필요한 장소로 향했다.


레이디버그의 얘기를 듣고서야 자신이 지금 탈옥한 상태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부숴진 감옥의 벽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될 불쌍한 간수에게 애도를 표하며 블랙캣은 다시금 하늘 위로 점프했다. 심경은 상당히 복잡했지만.

방금 전에 확인한 사실 때문에.


한 시간 전, 감옥 바닥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던 블랙캣은 머지 않아 탈출밖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아하니 저 무능한 경찰들에게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몇날 며칠을 여기에 갇혀있을 수는 없었다. 내일 학교를 가야 하는 입장에서 그건 무리한 요건이다. 적어도 오늘 안에 끝을 봐야만 했다.


소리없이 벽을 부수는 것은 쉬웠다. 고대의 재앙으로 벽에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틈을 만들고 밖으로 나왔다. 최대한 조용히, 자신이 사라진 사실을 가급적 늦게 눈치채도록.


계획을 얼핏 수립하기는 했지만 관객이 필요했다. 저절로 뇌리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이 있었지만 블랙캣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연락을 하지? 아는 사실이라고는 기자라는 직업과 얼굴, 목소리뿐이 없는데.


그냥 아무 곳에나 전화해서 다른 사람을 찾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중 블랙캣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물끄러미 제 가방을 살펴보다가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혹시 이런 것도 되려나?


반신반의하며 아무렇게나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간 후에 곧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블랙캣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저번 파티장에서 만났던 그 기자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그 사람의 전화번호가 없어도 원하는 사람한테 전화를 거는 게 가능하다고?


장난전화인 줄 알고 끊으려는 남자에게 대충 자신이 블랙캣이라고 소개하고 특종에 흥미 없냐고 물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껄껄 웃더니 매우 흥미 있다고 대답하는 기자에게 블랙캣은 만날 장소와 시간대를 얘기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혹시 자신이 진짜 블랙캣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딱히 손해볼 일은 없으니 반신반의하며 나오기는 하겠지.


데리러 가줄 사람은 정해져 있고.


감옥에서 나온 블랙캣이 맨 처음으로 향한 장소는 다름 아닌 파리 시청사였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블랙캣은 재빨리 시청사 뒤쪽에 있는 3층 창문으로 훅 뛰어 들어갔다. 분명 이 근처에 관제실이 있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피해 조심히 움직이던 블랙캣의 시선 끝에 관제실이라고 적힌 문이 발견되었다. 누가 오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살금살금 걸어서 관제실 문을 연 블랙캣은 자신을 등지고 앉아 있는 직원의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툭,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진 직원을 다시 의자에 앉혀놓고 앞에 보이는 수십 대의 모니터 화면을 살펴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엄청나네.”



언제 사람이 들어올지 몰랐기에 블랙캣은 재빨리 파리 전역에 설치되어 있는 교통카메라에 대한 정보를 켰다. 곧바로 화면들에 각 구를 관통하는 도로와 건물의 모습들이 보였다. 차분히 악당을 찾기 시작하는 블랙캣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악당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음에도 굳이 관제실을 찾은 이유는 느껴지는 악당의 기운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일이 찾아다니기엔 시간이 없으니 파리 전역을 살펴보고 필요한 상대를 찾아내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었다.


가지고 왔던 고양이 발바닥 무늬가 그려진 검은색 리모컨을 관제실 모니터 쪽에 연결하자 곧 바로 앞 모니터에 파리 어딘가의 영상이 떴다. 바람 때문인지 살짝 흔들리기는 했지만 영상을 확인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드론이 제대로 날고 있는가보다 싶어 안심하면서 블랙캣은 일단 교통카메라 정보를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힘이 느껴지던 방향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니 악당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둘기 떼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미스터 피죤을 지나, 북동쪽에서 느껴지는 힘의 방향에 설치되어 있는 교통카메라를 모조리 살펴보던 블랙캣은 곧 한 건물을 발견했다. 연결해두었던 드론을 조종해서 건물 위로 띄우자 곧 건물 지붕 위에 유유히 서있는 누군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치렁거리는 검은 망토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악당을 발견한 블랙캣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지만, 블랙캣이 느낀 악당의 수는 대략 세 명이었다. 또 새로운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니 확인해서 나쁠 건 없다 생각하면서 천천히 방향을 감지했다. 동남쪽 방향. 그쪽 방향에 있는 구의 카메라들을 모두 살펴보았으나 사정권 밖인지 찾기가 불편했다. 에잇, 혀를 차며 블랙캣은 다시금 드론을 움직였다. 그러나 드론이 향하는 방향에 있는 장소를 본 블랙캣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왜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 블랙캣은 침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드론을 제가 본 건물 쪽으로 움직였다. 하늘 높이 날고 있던 드론은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이 위치한 공원 안으로 조용히 날아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자연사 박물관의 뒤쪽 숲으로 방향을 잡고 드론을 움직였다. 그리고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동굴이 있었다.


저번에 몇 번 가봤을 때는 분명히 없었던 동굴 앞에 저번에 봤던 그 하얀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문제는 그 남자만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 옆에 서 있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문제였다. 모자를 쓰고 검은색 제복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악당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동굴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는데, 개중 몇 명은 악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조금 더 가까이 내렸다. 어느 정도 사람의 얼굴이 분명하게 보일 정도까지 아슬아슬하게 내리다가 블랙캣은 문득 창백한 얼굴의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누군가의 모자 위에 수놓아진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분명….


그 순간 제 쪽을 올려다보는 남자에 깜짝 놀라던 찰나, 화면이 꺼져버렸다.


꺼진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블랙캣은 살짝 고개를 내려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힘을 줘버렸는지 손에 든 리모컨이 박살나 있었다.

쫑긋, 귀를 세웠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가까이 오기 전에 블랙캣은 직원이 앉아있는 의자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펄쩍 뛰어올라 천장에 붙었다.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렸다.



“야, 살만하냐? 먹을 거 사들고 왔다~!”



발랄하게 소리치는 직원의 등 뒤로 폴짝 뛰어내린 블랙캣은 소리없이 문 밖으로 빠져나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빠르게 시청사를 벗어나서 자신이 목표한 상대가 있는 장소로 향하면서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신호음이 끊기고 전화를 받는 레이디버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안도하는 제 자신에 블랙캣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주는 것에 기뻤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조금만 더 나를 믿어주면 좋을 텐데.


아직 너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가 하기엔 비겁한 말일지도 모른다. 너를 좋아하면서도 온전히 너를 좋아한다고 인정하기에 겁쟁이인 나를 인정한다. 그래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좀 더 나를 봐줘. 나를 의지해줘.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다가 문득 블랙캣은 무척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기왕 엿을 먹일 거면 아주 제대로 먹이는 게 좋겠지? 피식피식 웃으며 블랙캣은 다시금 매직박스에서 핸드폰을 꺼내 몇 곳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키득거리며 웃던 블랙캣은 곧 생각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역을 통틀어 가장 큰 기차역이라 불리는 장소.


파리 북역이었다.


곧바로 북역으로 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건물로 숨어든 블랙캣은 곧 발을 동동거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레이디버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서 와, 레이디!”



반가운 마음에 레이디버그에게로 달려간 블랙캣이 자연스럽게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휙 손을 빼버리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에도 좋다고 웃고 있던 블랙캣은 곧 뒤에 서 있던 기자를 발견하고 악수를 청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데니스 브라운 기자님.”

“오…. 천만에요.”



얼떨떨한 얼굴로 악수를 하고 난 뒤 데니스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반쯤 장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로 보게 되니 놀랍네요.”

“가져오라고 부탁드렸던 물건은 가져오셨나요?”

“물론이죠. 그래서, 제가 뭘 도와주면 되는 거죠?”

“제가 지금부터 재밌는 쇼를 보여드릴 예정이라서요.”

“쇼?”

“이걸 보시고 최대한 재미있게 기사를 적어주시면 됩니다.”



블랙캣의 설명을 다 듣고 나자 정말 재미있겠다는 듯이 데니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메이징! 정말 재미있겠네요. 하지만 이런 영광을 안을 사람으로 제가 선택된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기자님이라면 분명 멋진 기사를 써주실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웃으며 대답하는 블랙캣을 보며 데니스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하기 싫다는 거군요. 뭐, 알겠습니다. 저야 이런 특종을 거절할 이유는 없지요.”



시원시원하게 응수하는 데니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블랙캣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갈까요.”






“그 녀석이 탈주를 했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악당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북역 지붕 위에 서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던 중,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가 가져온 뜻밖의 소식에 악당은 다시금 계획을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행동할 줄은 몰랐다. 생각만큼 만만치는 않다는 건가.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뭐라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 분명 나를 찾아오겠지. 그 전에 수를 써야겠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쪽 일이나 잘해.”



뚝, 전화를 끊으며 악당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악당의 그림자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운이 악당의 온 몸을 덮더니 검은 고양이 수트를 입은 누군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그게 네 능력이구만.”



휙 돌아서는 악당의 앞으로 블랙캣이 탁 내려섰다. 웃고 있는 블랙캣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가 말을 툭 내뱉었다.



“뭐야, 너. 뭔데 나랑 똑같이 생겼어?”



정말 자신인 것마냥 당당하게 말하는 상대를 보며 블랙캣은 혀를 쳤다. 이것 봐라?



“어딜 봐서 니가 나라는 건데? 아무리 봐도 내가 더 미남이잖아!”

“웃기시네. 가짜 주제에 헛소리하지 마. 어디 여기서 진짜가 누군지 가려볼까!”



그 말과 함께 블랙캣의 모습을 한 악당이 블랙캣에게로 달려들었다. 재빨리 악당의 합을 받아내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악당은 그걸 막아내고 다시금 반격을 시작했다. 엎치락뒤치락 엉겨붙어 싸우던 두 사람에게로 레이디버그가 달려왔다.



“블랙캣!”

“오우, 레이디.”



바닥에 깔려 있던 블랙캣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에 레이디버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두 사람 좀 떨어져줄래?”



그 말대로 뒤로 물러나는 두 사람의 발끝을 유심히 보던 레이디버그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한 녀석에게 달려들어 그의 복부를 세게 발로 찼다. 그 순간 레이디버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사람의 배가 아니라 단단한 목판을 걷어찬 것만 같은 이질감.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걷어차인 배를 붙잡고 뒤로 물러난 블랙캣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레이디버그에 더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 모습을 바꿨다. 그림자 속으로 스르륵 사라지는 검은 연기와 함께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악당이 레이디버그를 노려보았다.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어떻게 나란 걸 알았지?”

“그걸 알려줄 의무는 없는걸? 넌 누구야?”

“내 이름은 셰이드 플뢰르. 생각보다는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모양이군. 벌써 나를 찾아내다니.”

“과연, 역시 그림자 술사였나.”



중얼거리는 블랙캣을 옆에 두고 레이디버그는 크게 소리쳤다.



“자, 이제 순순히 말하지 그래. 모나리자는 어디 있어?”

“흥,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내가 그걸 알려줄 이유는 없잖아?”



코웃음을 치며 악당은 제 그림자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림자 속에서 온통 새까만 검이 튀어나와 악당의 손에 들어갔다. 깜짝 놀라는 두 사람에게로 검이 날아들었다. 둘 다 양 옆으로 몸을 돌려 휘둘러지는 검날을 피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다시 덤벼드는 악당의 검을 레이디버그는 두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내리찍으려는 악당과 어떻게든 버티던 레이디버그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던 중 셰이드 플뢰르가 싱긋 미소지었다. 에? 놀라던 찰나 레이디버그의 손에 있던 검이 먼지처럼 스러졌다. 동시에 레이디버그의 뒤에서 날카로운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가만히 있어, 레이디!”



블랙캣이 재빨리 달려들어 그림자를 발로 걷어찼다. 블랙캣에게 얻어맞고 잠시 주춤하던 그림자는 곧 스르륵 바닥에 있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블랙캣은 뭔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그림자에 스며들어 사라지는 구슬을 보며 블랙캣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과연.



“저기, 레이디.”

“왜?”

“모나리자를 어디에 숨겼는지 알 거 같아.”

“정말?! 어딘데?”



놀라서 되묻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녀석의 배를 한 대쯤 더 쳐줘야 할 거 같은데. 가능하겠어?”

“해볼게.”

“그리고 제대로 설치해놨지? 그거.”

“물론.”



웃으며 대답하는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미안, 덕분에 무기도 사용 못해서.”

“괜찮아. 난 너보다 강하니까!”



당당하게 말하며 싱긋 웃는 레이디버그의 표정에 그래도 좀 기분이 나아졌는지 블랙캣은 웃으며 말했다.



“좋아, 해볼까. 그나저나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뭐가?”

“비밀. 벌써 알면 재미없잖아?”



싱글싱글 웃는 블랙캣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레이디버그는 곧 생각을 접었다. 알아서 하겠지. 그를 뒤로 한 채 셰이드 플뢰르에게로 달려들었다. 다시금 검을 빼든 셰이드 플뢰르는 마치 펜싱하듯이 검을 앞으로 찔러가며 레이디버그의 급소를 노렸다. 막기가 애매해 무작정 피하기만 하며 빈틈을 노리던 레이디버그는 한 순간 발견된 틈을 파고들어 셰이드의 복부에 주먹을 찔러넣었다.


이번에는 느낌이 있었다.


커억, 소리와 함께 뒤로 날아가는 셰이드의 뒤로 블랙캣이 날아들어 목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발버둥도 치지 못하게 목덜미를 꽉 붙잡고 악당의 모습을 그려내는 그림자에 세게 주먹질을 했다. 강한 힘으로 내리치자 그림자가 움찔거리더니 그 속에서 상당한 크기의 무언가가 튀어올랐다. 액자에 담겨 있는 커다란 그림을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액자 틀만 붙잡고 받아낸 블랙캣이 제 앞에 놓인 명화를 넋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역시 그림자 속에 숨겨두고 있었나.”



그 말과 함께 블랙캣은 붙잡고 있던 셰이드의 몸을 바로 옆으로 세게 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셰이드를 본체만체하며 가방에서 유리관을 꺼낸 블랙캣이 그림을 그 속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심한 충격을 주면 토해내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대로라 다행이네.”

“이 자식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악당에게 블랙캣이 피식 웃으며 충고했다.



“아, 맞다. 어서 도망가는 게 좋을 거야.”

“뭐?”



그 말과 함께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악당은 물론 레이디버그도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갖 로고를 단 헬리콥터들이 그들이 있는 장소로 날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멍하게 그 장면을 쳐다보고 있던 악당에게 블랙캣이 씨익 웃으며 정답을 들려주었다.



“방송사에 연락해놨거든. 특종 잡을 생각 없냐고 말이야.”

“이…!!”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게 없잖아? 더 일을 벌이면 좋을 게 없을 텐데. 어서 꺼지시지.”



웃으면서 말하지만 뼈가 있는 블랙캣의 한 마디에 악당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곧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악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깨닫자마자 블랙캣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캠코더 제대로 설치해놨지?”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디버그는 뒤쪽으로 후다닥 달려가더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잡고 들어올리는 모션을 했다. 허공에서 반투명한 천이 벗겨지더니 바닥 위에 고정해둔 캠코더가 나타났다.


레이디버그의 매직박스에서 꺼낸 카멜레온 천이었다. 덮어놓으면 주변의 사물과 섞여들어서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드는 특수한 재질을 가진 천. 그 밑에 있던 캠코더를 수거하면서 레이디버그가 재잘거렸다.



“말도 마. 진짜 이쪽으로 오지 않게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빌린 물건인데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떡하겠어?”

“그러게.”

“저기 오는 방송국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어서 숨겨야지. 나중에 그 기자분한테 갖다드려야 하니까.”



사람들이 그 그림 보고 되게 말이 많을 거라며 웃고 있는 레이디버그와는 달리 블랙캣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엷어졌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블랙캣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레이디, 진지하게 들어줘.”

“응?”



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악당들은 우연히 파리에 나타난 게 아닌 거 같아. 뒤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이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어? 호크모스 말하는 거야?”

“……호크모스?”

“너 몰라? 또 다른 미라큘러스를 가진 히어로인데 다른 사람에게 변신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저기, 블랙캣? 표정이 왜 그래?”



충격을 받은 것처럼 갑자기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블랙캣의 모습에 레이디버그는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블랙캣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디버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너 방금 무슨 말 하려고 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버려. 그나저나 많이도 왔네~”



다시금 웃는 얼굴로 돌아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굴고 있지만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처럼.





다음 날, 파리 시내는 또 한 번의 특종을 맞아 떠들썩했다. 「모나리자 도난의 진실!」 이라는 문구를 달고 제 1면을 장식한 기사에는 전날의 사건에 대한 진실과 더불어 경찰의 무능함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었다. 캠코더에서 찍었던 악당의 변신 장면이 그대로 찍혀 기사에 그대로 게시되었으며, 덕분에 경찰청 홈페이지에는 수백 개가 넘는 항의글이 올라왔고, 계속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기사의 바로 옆에는 감옥이 부숴졌을 때 같이 탈주한 흉악범 몇몇의 얼굴 사진도 작게나마 실려 있었다.



“파트너~ 표정이 왜 그래? 의도한 대로 다 잘 됐잖아.”



생각한 대로 다 이루고도 표정이 전혀 밝아보이지 않는 펠릭스를 플랙이 걱정스럽게 불렀다. 읽고 있던 신문을 의자 앞에 있던 테이블 위로 던지며 펠릭스는 앉아 있던 안락의자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가만히 중얼거렸다.



“…너무 얕잡아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엥?”

“……아니야, 아무것도.”



청회색 눈동자가 스르륵 감겼다.





-9편으로



===

새로운 악당의 등장이네요.

이름은 셰이드 플뢰르(Shade Fleur)! 그림자의 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매우 귀찮게 해줄 악당 하나가 또 등장했네요.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7화에서 나온 마임맨이 꺼려하던 상대가 바로 이 분이랍니다.


8편은 제목에서부터 눈치채셨겠지만 한국 에피소드 기준으로 3화의 카피캣 에피소드를 오마주했습니다.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적어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을지 모르겠네요ㅇㅁㅇ)


9화도 작업 중이랍니다. 일단 줄간격만 대충 정리하고 있으니 빨리 올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재판 시기를 적어놓지 않은 거 같은데 내년 1월입니다.

9월 둘째주 안으로 12화까지 업로드해두려고 합니다 ㄷㄷ

Posted by I.R.E
,

※ 글을 꼼꼼히 읽어주세요! 꼭 알아두셔야 하는 사실들을 적어두었습니다ㅠㅠ(추가사항이 있습니다)

주의사항이 너무 많아서 폼에 다 들어가지 않아 블로그를 빌립니다. 폼 링크는 맨 밑에 있습니다! 주의사항은 거의 복붙이에요!




레이디버그 2D 소설 Un Autre 의 재판 수량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위에 적어두었다시피 커플링은 [펠릭마리].

펠릭스와 마리네뜨 커플링이 들어간 2D 트레일러 내용을 토대로 2D에서 나올 법한 내용 전체를 재현하는 전개로 진행됩니다.

2D 트레일러의 유투브 주소는 여기>> https://www.youtube.com/watch?v=FlwV3scCgAM


2D 트레일러는 2012년에 나온 트레일러로, 현재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레이디버그의 초본쯤으로 생각하시면 편하실 거예요!

좀 어린 연령층을 타겟으로 제작된 3D와는 달리 2D의 분위기는 매우 어둡습니다.

원래는 성인층을 타겟으로 정치적 요소가 들어간 다크한 작품이었다고 하거든요.



일단 내용이 3d와 달리 좀 많이 어둡고 현실적입니다.

애들의 내면 갈등은 물론이고, 이 세계관에선 '신비한 치유의 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건물도 많이 부서지고 인명 피해도 조금 발생하며, 살인도 벌어집니다. 무엇보다 우리 히어로 애들도 좀 다쳐요. 물론 그렇게 많이 다치지는 않으니 염려마세요^ㅁ^

히어로물이지만 정치적인 내용도 다수 나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두뇌싸움이 많이 나오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장면도 심심찮게 나옵니다. 보통 히어로물 하면 꿈과 희망을 연상하지만 여기엔 그런 거 없어요 ㅎ... 일단 기적이란 개념을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2D 트레일러의 분위기에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했으니 분위기는 트레일러를 참고해주시면 됩니다!


전권 통판입니다. 나갈 행사가 없어서ㅠ




총 2권 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봄부터 겨울까지, 총 1년에 걸쳐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테마는 계절입니다.


1권에서 봄~여름(413p), 2권에서 가을~겨울(438p),

851p입니다.

각 계절 파트마다 6에피씩, 본편만 총 24에피로 되어 있습니다.

계절별로 서문이 하나씩 붙어 있습니다. 웹상에는 봄 서문만 공개되어 있어요!


구성: 본편 24에피 + 외전 2개(책마다 하나씩) + 에필로그 + 축전 + 후기

(삽화 없습니다)

40페이지 가량의 설정집 하나도 같이 보내드립니다!


가격은 두권 세트(set)에 70000원입니다.

절대 낱권으로 팔지 않아요. 무조건 세트로 판매합니다.

왜냐하면 저 두 책은 너무 페이지가 많아서 분권했을 뿐, 원래 한 권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단 2d가 정말 자료가 없는지라,

트레일러를 분석해서 스토리를 짰지만, 제 주관적인 해석과 창작적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레일러에 기반했지만 일단 제 취향이 많이 들어가 있는지라, 구매하실 때 그 점을 분명히 명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ㅠㅠ


일단 설정부터 굉장히 많이 갈아엎었습니다;ㅅ; 그래서 보시다보면 분명 3D와는 많이 다르다고 느끼실 거예요.


회당 30-40페이지라는 제약이 걸려 있기 때문에 전개가 상당히 빠릅니다.

현실적인 방향을 지향했지만 조금 의아하다 싶으신 부분들도 있을 거 같아요. 특히 마리네뜨와 펠릭스의 과거사는 자그툰에서 이야기했던 떡밥을 배경으로 구성했지만 정보가 너무 없기 터라 캐해석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ㅅ;


제 만족용으로 쓴 회지라,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너무 많이 기대하지는 마세요OTL


 

만 15세 이상부터 구매가 가능합니다.

위에 적어드렸다시피 내용이 너무 어둡고 가치관이 단순하게 굴러가지 않기 때문에 만 15세 이상으로 제한을 두었습니다. 즉, 구매는 00년생 이상이시거나 온리전 전에 생일이 지나시는 분만 가능합니다.

딱히 수위가 있어서는 아니고 다소 잔인한 묘사가 좀 들어갈 수 있다는 점과,

내용 일부에서 전연령이라 보기 힘든 몇몇 부분들이 있어서 15금으로 결정했습니다.


만 15세 이하이신 분이 구입을 하시려고 해도 환불 불가합니다.

저 이거 분명히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실 분이 없으시리라 믿지만 연령대가 어린 장르라 혹시나 싶어 말씀드립니다. 제발 그러지 말아주세요;

저는 저 나이보다 어리신 분에게 이걸 팔고 싶지 않습니다.

성인본도 아닌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물으신다면 개인적인 신념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통판의 경우는 폼에 신분증 사진을 첨부하는 것으로 인증을 할 생각입니다.

참고로 수위는 키스 정도가 전부라 수위를 기대하고 책을 구입하시면 정말 후회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샘플은 이쪽을 ↓

01: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1

02: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2

03: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3

04: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4

05: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5

06: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6

 

07: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7

08: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8

09: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09

10: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10

11: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11

12: http://eclilps.tistory.com/entry/FEMA12

 



6편까지가 봄 에피소드이며 7~12가 여름 에피소드입니다.

봄을 프롤로그로 봐주시면 되고, 여름부터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됩니다 ㅎㅎ


+

후일담은 제작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구상하다가 파기한 프롤로그는 포스타입을 참고해주세요.

http://posty.pe/v6g3za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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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형식에 맞춰서 적은 거라 웹연출과 책의 연출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Episode 7.

흑백의 남자





“나는 말이지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 한 가운데서,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마리네뜨는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시이허엄이이 제일 싫어!!”



자, 여기서 문제. 마리네뜨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잠시 여기서 마리네뜨의 성격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마리네뜨는 기본적으로 성적에 크게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모종의 이유로 그랬던 적도 있었지만 커가면서 자신이 그쪽 머리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깔끔히 그만두었다. 아직 명확한 꿈은 없지만 엄마랑 아빠 닮아서 손재주는 있다고 칭찬 많이 들으니까 그쪽으로 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말고사가 이주 남았을 당시에도, 공부한다고 슬슬 바빠지기 시작하는 다른 애들과 달리 마리네뜨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다. 늘 망쳤으니 이번에도 망치겠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마리네뜨에게 날아든 부모님의 통보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저번 중간고사처럼 시험 망치면 앞으로 외출 금지다.


외출 금지라니! 이제 곧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이 무슨 기겁하실 소리란 말인가. 잘못했다고 빌어 봐도 부모님은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하긴 중간고사 성적 보시고 많이 충격받은 표정이시긴 했지만. 사실 그 점수는 나도 좀 놀랍긴 했다. 공부를 안 하면 이 정도까지 곤두박질칠 수 있구나! 싶어서.

물론 히어로 일을 하느라 공부에 좀 소홀했던 건 인정한다. 사실 너무 피곤해서 수업시간에 많이 졸기도 했고, 그 여파가 어떻게든 이런 식으로 나온 거겠지.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마음도 있었다. 저번 중간고사 성적을 처음으로 보셨던 부모님의 표정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하지만 그래도, 막상 하려니까 손에 안 잡히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집으로 돌아와서 책상에 앉아 있은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놀고 싶어지는 자신에 마리네뜨는 다시금 절규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과 공부에 대한 집중력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마리네뜨의 얼굴에 우울한 기색이 짙게 번졌다. 다른 과목도 문제였지만 특히 이번에 수학은 진짜 외계어를 설명하나 싶을 정도로 어려웠다. 막막하다. 예제를 몇 번이고 다시 풀어봤는데도 이해가 안 돼.



“아악, 어떡하지. 티키, 티키. 나 진짜 어쩌면 좋아?”

“마리네뜨….”



차마 이것까지 긍정해줄 수는 없는지 안쓰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티키에 마리네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내가 뿌린 씨앗이긴 한데. 그래도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하긴, 이번 기말까지 망치면 진짜 방학에 보충수업을 나가야 할 테니까 공부는 해야겠지….”



에스미한테 SOS를 쳐서 어느 정도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너무 집중이 안 돼서 미칠 것 같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마리네뜨는 제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다. 내가 이렇게 공부머리가 죽어있었나?



“그래, 이거까지는 다 좋은데….”



마리네뜨는 음산하게 웃었다. 살짝 맛간 듯한 표정으로 하하하 웃고만 있는 마리네뜨를 보며 티키는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마리네뜨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테러 예고까지 오는 건 뭐냐고!”



크게 소리질렀다. 안절부절못하는 티키를 내버려둔 채 열받은 얼굴로 씩씩거리던 마리네뜨는 곧바로 떠오른 생각에 절로 풀이 죽었다.



“그것도 시험 시작 이틀 전이야 날짜가….”



난 죽었다. 으아아 소리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는 마리네뜨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처량했다. 안쓰럽게 쳐다보는 티키에게 마리네뜨는 중얼중얼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왜, 왜 하필 지금이냐고오오…!”



일주일 전, 파리 경찰청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그것은 약간의 암호를 동반한 예고장으로, 경찰은 수사 끝에 암호문을 풀었지만 적혀 있는 건 장소와 날짜뿐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테러 날짜에 나타나는 범인을 체포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라고. 며칠 전, 악당과 싸우다가 돌아가려고 하기 직전에 경찰들에 붙잡혀서 이런저런 사정 설명을 들었다. 아무래도 보험을 들어두고 싶었는지, 테러 당일날 도와줄 수 있겠냐는 경찰의 부탁을 왜 내가 선선히 승낙했을까.


그 때 거절했어야 하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고.”



시험이 너무 싫다고 다시금 중얼거리며 마리네뜨는 눈을 감고 책상에 콕 고개를 박았다.



“어떻게 악당들은 사람이 이렇게 바쁜 시기만 골라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사람이 한가해질 때 와주면 좀 좋아?”



투덜투덜 중얼거리는 마리네뜨에게 티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안 하면 정말로 외출 금지를 당하게 될 텐데?”

“에에~!!”

“힘내, 마리네뜨. 넌 할 수 있어! 힘내자~!!”



옆에서 열심히 응원하는 티키를 보며 마리네뜨는 한숨과 함께 다시금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억지로라도 교과서에 눈을 붙이며 공부하기 시작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비장했다.






“우응~ 이게 다 뭐야? 파트너.”



책상 위에 쌓여져 있는 책들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묻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짧게 대답했다.



“책.”

“그건 알고~ 평소에 읽는 책들이랑 좀 다른데?”

“…교과서야.”



곧 시험이니까. 덤덤하게 말하며 펠릭스는 다시금 독서에 집중했다. 하지만 펠릭스가 읽고 있는 책은 책상 위에 있는 교과서가 아니라 다른 종류였다. 제목을 쭉 훑어보던 플랙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펠릭스의 뒤로 쪼르르 날아가 펠릭스가 읽고 있는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으앗!”



제게로 뻗어지는 손을 잽싸게 피하면서,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새빨개진 것을 본 플랙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꺄하하하! 아니, 왜 그런 걸 읽고 있는 거야~? 아, 저번에 그 가면 쓴 여자가 했던 말이 신경쓰여서?”

“야!”



바락바락 소리치는 펠릭스의 모습에도 플랙은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깔깔 웃어댔다. 더 이상 말하면 죽여버릴 것처럼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펠릭스가 걱정되기는 했는지, 플랙은 펠릭스가 잡을 수 없는 높이까지 날아오르며 낄낄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재밌다니까~ 어젯밤 일은 말이야.”



킬킬거리는 플랙을 올려다보며 펠릭스는 정말 요정이란 신비한 존재인가에 대한 고민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블랙캣이 되면 변신했을 때는 요정과 그 동안의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왜 자신의 요정이 이런 녀석인가에 대해 새삼 제 팔자를 한탄하는 펠릭스의 머릿속으로 지난 밤의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에펠탑. 그 에펠탑을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블랙캣은 어딘가에 있을 레이디버그를 찾았다. 바로 아래쪽에 작게 보이는 누군가를 찾아내자마자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철근 위에 앉아 발을 여유롭게 앞뒤로 굴러가며 앉아 기다리고 있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레이디버그가 앉아 있는 철근 위로 내려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시선에 심장이 살짝 뛰었다.


‘무슨 일로 불렀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정말로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이상했다. 평소에는 웃을 일이 별로 없는데 블랙캣이 되면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풍부해진다. 이게 변신의 영향 때문인지, 플랙의 말대로 내면에 있었던 원래의 성격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잘은 모르겠다.


예전의 성격은 이미 8년 전에 버렸을 텐데.


웃고는 있는데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 레이디버그의 모습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 아무튼 준비했던 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가져왔던 장미꽃을 레이디버그에게로 내밀었다. 하지만 깜짝 놀란 듯하다가도 꽃을 받기는커녕 망설임없이 흥, 고개를 돌리는 레이디버그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축 처졌다. 곧바로 일어나서 물었다.


‘대체 왜 안 받아주는 건데! 저번에 꽃이 받고 싶다고 그래서 특별히 장미꽃까지 가져왔다구!’


팔락거리던 검은색 고양이 귀가 블랙캣의 기분마냥 추욱 늘어졌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전에도 말했잖아. 넌 내 취향이 아니라니까!’

‘대체 레이디의 취향은 어떤데?! 나한테도 좀 말해달라고!’

‘적어도 넌 아니라구! 우린 파트너일 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


그렇게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원위치. 기분이 상했는지 집에 갈래, 한 마디만을 남기고 돌아서서 가버린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니 저절로 씁쓸한 기분밖에 남지 않는다. 좀 욱해서 투닥거리긴 했지만 어제 레이디버그는 정말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그걸 알면서도 내 감정만을 요구하다니.



“…최악이군.”

응? 뭐라고 말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눈을 초롱초롱 빛나는 플랙을 가볍게 무시하며 펠릭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시끄러운 것에도 적응이 되니까 전처럼 플랙이 귀찮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너무 입이 가벼운 녀석이라 말이지. 나중에 레이디버그랑 만나게 되면 쓸데없는 소리만 줄창 늘어놓는 거 아닐까. 상상만으로도 두려운지 펠릭스의 손이 책의 커버를 꽉 움켜쥐었다.


정말 레이디버그랑 잘 되더라도 플랙하고는 가급적 만나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펠릭스는 무심한 얼굴로 다시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 펠릭스를 지긋이 쳐다보던 플랙은 불만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이빨을 드러낼 정도로 씨익 웃으며 펠릭스의 뒤쪽에 있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뒤에서 와르르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에 펠릭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플랙…. 책장에는 손대지 말랬지.”



또 정리해야 하잖아. 하아,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펠릭스가 책장으로 다가가 쏟아진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떨어진 책들을 보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착착 순서를 정리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부지런히 꽂기 시작하는 펠릭스에게 플랙이 궁금하다는 듯이 공중에서 뒹굴거리며 물었다.



“근데, 왜 저 책들은 안 봐도 돼~? 시험 아니었어?”

“어느 정도 복습만 꾸준히 하면 문제없으니까 괜찮아. 니가 이렇게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짓만 안 벌린다면 말이야.”



살짝 비꼬는 목소리에도 칭찬 고맙다며 킬킬 웃고 있는 플랙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책에서 읽었던 대화가 안 통하니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알 것 같았다.

다 됐다. 어느 새 책들을 다 정리한 펠릭스는 아직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플랙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지금 더 책을 읽었다간 또 심심하다고 장난칠 거 같다. 어제 일 얘기까지 다시 꺼낼까도 걱정이고, 어차피 독서할 기분도 날아가긴 했으니까,



“플랙, 너, 밖에 나가면 정말 조용히 하고 있어야 해.”

“뭐야? 어디 나가게?”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플랙에게 펠릭스는 짤막히 대답했다.



“산책.”





“여어, 펠릭스!”



자연사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 후에, 펠릭스는 경비실에 부탁해서 제가 만날 사람에게 연락을 넣었다. 잠시 뒤, 뒤에서 제 이름을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하얀 가운을 입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하하 웃고 있었다. 제게 손을 흔드는 남자에게 펠릭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이 박물관에서도 권위 있는 생물학 연구자 중 한 사람인 파비앙 듀퐁(Fabien Dupont)은 오랜만에 만난 펠릭스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가 여긴 어쩐 일이냐? 고등학교 들어가고는 통 안 오더니만.”



섭섭하게스리. 짧게 한 마디를 덧붙이며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방해하러 온 건 아닌데.”

“아니다. 일단 좀 올라갈까?”



곧바로 직원들만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탄 두 사람은 파비앙 교수가 사용하는 연구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낯익은 풍경들이 눈에 띄었다. 책장들에 꽂혀 있는 온갖 생물학 저서들과 가죽의 빛이 살짝 바랜 낡은 소파, 책장 유리문 안쪽에 들어 있는 다양한 표본들과 샘플들까지. 펠릭스는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정말 예전 그대로네요.”

“뭐야, 그 아쉽다는 듯한 말투는.”



툴툴거리는 파비앙의 목소리에 펠릭스는 그렇게 티가 나냐고 반문하며 피식 웃었다.



“그냥, 아저씨는 늘 한결같잖아요. 신기해서요.”

“고작 1,2년 사이에 사람이 변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니, 나이를 먹기는 했지만 아직 너도 어리구나, 어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파비앙이 곧 마실 것을 가져와 펠릭스에게로 내밀었다. 시원한 주스병을 말없이 바라보던 펠릭스가 주스의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런 펠릭스를 조카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던 파비앙이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냐?”

“….”

“니가 아무런 이유 없이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잖니. 곧 시험기간인 이 바쁜 시기에.”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나도 너만한 딸이 있는데 모를 리가.”

“…언제 저 모르게 결혼하셨습니까? 숨겨둔 가족이라도 있었어요?”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지. 조카야, 조카!”



넌 왜 이리 귀여운 맛이 없냐고 투덜거리는 파비앙을 향해 펠릭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확인? 그래, 뭘 말이냐?”



정말 중요한 기밀정보만 아니면 뭐든 말해줄 수 있다며 웃고 있는 파비앙과는 달리, 펠릭스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이 박물관 뒤쪽 절벽에 엄청나게 커다란 동굴이 있지 않아요?”

“동굴이라니?”



그게 뭔 소리냐고 묻는 듯한 파비앙의 표정에 펠릭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10년이 넘게 이 박물관에서 터를 잡고 일한 파비앙조차 그 동굴에 대해 모른다는 말은 펠릭스에게 싸한 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지만 펠릭스의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것을 알아챘는지 소년을 살펴보는 파비앙의 표정도 걱정스럽게 변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순간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펠릭스와 파비앙은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죠?”



자주 와봤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조용한 곳이었다. 밖에서 박물관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달리 이 연구동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데다, 여기에 모여 있는 학자들은 하나같이 자기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연구하는 것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이라 굳이 소음이 나올 이유가 없다. 펠릭스도 꽤나 자주 방문했었지만, 이렇게 시끄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다시 말해서, 시끄러울 법한 이유가 있다는 거다.


무슨 일이 있나 보려고 밖으로 나가보려는 펠릭스를 파비앙이 한 팔을 들어 제지했다. 나가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파비앙을 보며 펠릭스는 다시금 소파에 앉았다. 파비앙이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상당히 재밌는 시기에 방문했구나.”

“예?”

“이번에 우리 쪽에 큰 일이 하나 생겨서 말이지.”

“무슨….”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묻는 펠릭스에게 파비앙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거 우리들끼리도 쉬쉬하는 기밀 사항인데, 그래도 듣고 싶니?”

“듣고 싶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펠릭스에 파비앙은 조금 놀랐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일이구나. 네가 이런 일에 관심을 다 가지고.”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지금은 뭐든 알아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펠릭스의 얼굴에 파비앙은 살짝 놀란 탄성을 내뱉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가 밖에 떠들고 다닐 성격도 아니고.”



결벽적이고 입이 무거운 펠릭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되는지, 파비앙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도난이라….”



박물관을 떠나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가는 펠릭스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2주 전, 자연사 박물관에서 중요한 표본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 전시하기 전의 연구 단계인 표본인데 그간 나타나지 않았던 특이한 유형의 생명체라고.


학자들만이 열람할 수 있는 고급 표본실에 보관하고 있었던 귀중한 표본을 도둑맞은 터라 박물관은 당시 한 차례 난리가 났었다. 즉시 내부수사에 착수했지만 이 표본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무척 적었고, 무엇보다 어떻게 훔쳐갔는지가 우선 난제였다. 경찰에 알리기에는 박물관의 이미지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도난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연구진 내에서도 무척 적었다. 현재는 박물관 경비팀 쪽에서 이 문제를 전담하고 있다고 했다.


범인의 수법은 정말이지 깔끔했다. 어떤 흔적도 없이 전시관 유리에 동그랗게 구멍을 뚫어서 안에 들어 있던 표본만을 들고 나갔다고. 마치 훔쳐간 게 아니라 그냥 문을 열고 들어와서 표본을 가져간 듯한 자연스러운 수법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연구동 안의 누군가가 범인인 건 아니냐는 얘기까지 돌았다고 했다. 물론 다들 각자의 연구동 안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으며 연구동 복도에 설치된 CCTV에는 사람이 나다닌 흔적이 전혀 없었다.


정말 비밀이야! 그렇게 몇 번을 다짐받고 열람한 표본을 보며 펠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평범해 보이는데 이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렇게 되물으니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체 반응이 다른 녀석들과는 정말 달라. 특히 뭐랄까….’


아니다. 고개를 절레 내젓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뭐라고 더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목이 타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에 파비앙은 마치 기밀 정보라도 발설하는 것마냥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진짜 기밀이긴 했지만.


‘에너지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몇 가지 검사가 있는데, 에너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특정된 반응이 강하게 나타난단다. 그런데 이 생물에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의 양이 상당했거든.’

‘그런가요?’

‘그래. 심지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화석에서 말이야.’


이게 제일 놀랍지. 살짝 웃음을 터트리며 파비앙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뭐, 우리도 이걸 발견한 건 지극히 우연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작은 개체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에너지 반응이 나타나는지 다들 신기해했었지. 뭐랄까, 꼭 에너지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것 같은 이미지가 그려진다고 하면 이해가 되겠니? 살짝 흐릿한 모양이지만.’

‘네.’


고개를 끄덕이자 파비앙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영문을 모르겠구나. 입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말이야. 대체 어떻게 알고 훔쳐간 건지 궁금하기도 하네.’


중얼거리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사실을 물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얘기를 저한테 다 해주셔도 되는 건가요.’

‘뭐 어떠냐. 너희 아버지가 왕년에 우리 박물관에 기부했던 기부금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이자도 안 될 거 같은데.’


그래도 다른 데서는 말하지 말라고, 잘리는 건 무섭다고 말하며 너스레를 떠는 파비앙에게 펠릭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묻자 결심하고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언제 훔쳐갔죠?’

‘음, 솔직히 워낙 특이한 표본이긴 해서 아직 제대로 연구에 착수하지는 못했었단다. 뭐 그래도 3일에 한 번씩은 그 표본실에 들렀었는데, 5월 26일에 확인했을 당시에는 분명히 있었거든. 29일에 확인해보니 없어서 놀랐지만 말이야.’

‘CCTV는 있었나요?’

‘표본실 안에는 없었지만 표본실 밖 복도에는 설치해놨었지. 3일간의 CCTV를 돌려보니, 27일 오후쯤에 수상해 보이는 누군가가 다녀간 기록이 남아있긴 했었다.’

‘…어떤 사람이었죠?’

‘이런, 아주 탈탈 터는구나! 직접 보여줄 수는 없다만, 굉장히 특이한 차림을 한 남자였단다. 상의는 검은색 셔츠를 하의는 하얀색 바지를 입고 있었어.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피부색이 정말 창백했다는 건 기억에 남아.’


정말 특이하게 생겼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파비앙의 말에 펠릭스는 곧바로 머릿속에 한 단어를 떠올렸다.


악당.


‘그리고 방식도 매우 이상했어. 문의 손잡이를 잡고 뭔가를 하더니 갑자기 문이 철컹 열리는 거야. 보고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지.’


그리고 들어가서 표본이 들어 있던 갈색 나무상자를 가지고 나온 뒤로는 행방이 사라졌다고 했다. 혹시 경매시장에 나올까 싶어 유명한 옥션 쪽의 동향이나 소식들을 접하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다고. 정말 특이하게 입고 있었던 사람이니 분명 사복도 그럴 거라며, 혹시 나중에 찾아내면 꼭 연락 달라는 농담을 끝으로 이 이야기는 종료되었다.



“27일이라.”



펠릭스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 사건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날짜.



“분명히 5월 27일이었지.”



학교에서 현장실습을 갔던 날짜가. 게다가 그 날 마침 미스터 피죤이 나타났었고, 본격적으로 싸우려는 순간 갑자기 사정이 생겼다며 도망가 버렸다. 마치 시간을 끌고 있었다는 듯이.



“우연인가? 아니면….”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성급한 일반화는 좋지 않다. 연관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혹여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과 미스터 피죤이 서로 아는 사이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하지만 남자가 훔쳐갔다는 표본이 조금 신경쓰이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펠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어.

아직까지는.





“으아아, 으아아아….”



마치 좀비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 말이나 웅얼거리고 있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수척했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서 당장이라도 넘어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공부를 거의 안 하던 사람이 벌써 일주일 넘게 공부만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속된 말로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하긴 했는데 정말이지 정신이 쪽쪽 빨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오랜만에 많은 지식을 우겨담고 있어서인지 머리가 과부하를 호소하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에 레이디버그 일까지. 악당들도 평소에는 일을 하는지 요즘은 꼭 밤에만 나타나서 휘젓고 다니는데 그 덕분에 요즘은 잠까지 설치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는 자면 안 되니까 애써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니 긴장이 풀려서일까, 피곤해서 죽을 거 같다.


정말이지 딱 죽고 싶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무 힘들어.



‘마리네뜨….’



자켓 속에 숨어 있는 티키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들릴까. 피곤한지 거하게 하품하며 길을 걸어가던 마리네뜨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작은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 한산한 공원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마리네뜨가 공원 안으로 총총 들어섰다. 졸린 눈으로 휘적휘적 공원에 있는 벤치로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순간 비틀거렸다.



“어…?”



몸이 기우뚱하더니 넘어지려는 찰나, 단단한 무언가가 허리를 받치더니 마리네뜨를 꼭 붙잡았다. 깜짝 놀랐는지 눈만 껌뻑거리던 마리네뜨가 살며시 제 허리로 시선을 내렸다. 새까만 팔이 제 허리에 둘러져 있었다. 설마.


잠 다 깼다. 마리네뜨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조심해야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블랙캣과 달리 마리네뜨는 조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 전의 일을 떠올리자니 왠지 얼굴 보기가 거북한 것도 사실이라,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마리네뜨는 입을 우물거렸다.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떨어? 어디 아파, 공주님?”



상냥하게 묻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빙빙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요.”



그 말과 함께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블랙캣의 팔을 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벤치로 몸을 돌리려다가 다시금 바닥으로 넘어질 뻔한 마리네뜨가 공중에서 딱 멈춰섰다.



“호이차.”



마리네뜨의 가방을 양 손으로 붙잡고 블랙캣은 가볍게 마리네뜨를 일으켜 세웠다. 묘한 기시감에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떠오른 얼굴을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펠릭스가 훨씬 낫지.



“혹시 평소에 꽤 덜렁이는 타입?”



장난스럽게 묻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짜증스레 소리쳤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그냥?”

“…좀 쉬려고. 그나저나 블랙캣은요? 뭐 악당이라도 나타났어요?”



하지만 그런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악당이 없어도 변신할 수 있지 뭐~ 안 그래?”



사실은 다시 한 번 박물관 뒤편을 조사하기 위해 좀 더 안전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거지만 블랙캣은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는 얼굴이라 저도 모르게 구하긴 했는데 뭔가 좀 위태해 보이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블랙캣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벤치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는 마리네뜨를 쫓아간 블랙캣이 조금 거리를 두고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마리네뜨가 물었다.



“왜 따라와요?”

“심심해서.”



딱 잘라 말하는 블랙캣에 마리네뜨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마리네뜨가 그러든 말든 블랙캣은 즐거운지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블랙캣이 되면 평소보다 묘하게 들뜨는 것 같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랑 같이 있어도 재밌다는 생각밖에 안 드니까.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볼멘스레 중얼거렸다.



“그래서, 뭐 하고 놀아줘요? 쎄쎄쎄라도 할까요?”



툭 던지듯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질문하는 마리네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블랙캣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왜 웃는데?! 그렇게 묻는 듯한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며 블랙캣은 웃음을 그치고 대답했다. 



“야, 너 생각보다 재미있다.”



언젠가의 누구와 똑같은 대답. 역시 블랙캣의 정체는 앨빈인 게 아닐까, 변신하면 머리카락이 염색되는 거 아니야? 의심스레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곧 생각을 접었다. 그럴 리가 없지.



“블랙캣은 생각보다 이상하네요.”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

“생면부지의 사람을 심심하다는 이유로 쫓아오는 것부터가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혹시 저 알아요?”

“아니? 그리고 생면부지라니, 인연이라면 아까 생겼잖아? 넘어질 뻔한 걸 구해줬는데 의외로 박정하네 공주님~”



날카로운 마리네뜨의 질문에 블랙캣은 조금 놀랐지만 곧 유연하게 되받아쳤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숙이고 블랙캣을 힐끔 돌아보았다.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블랙캣을 보면 딱히 자신에게 말을 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심심하대서 놀아달라고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마리네뜨는 그런 블랙캣의 태도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묘하게 상냥한 것 같은데. 레이디버그가 아닌 나한테도 이럴 수 있는 녀석이었나?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리네뜨는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놀랐다. 기분이 나쁘다니, 어떤 점에서?


장난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평소보다는 차분한 블랙캣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었다.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고 많은 걸 묻지 않는다. 레이디버그인 자신한테는 늘 이것저것을 물어보거나 성가실 정도로 계속 말을 걸어대던 녀석이 갑자기 이러니 좀 당황스럽긴 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겠지만. 늘 방방 뛰고 지나치게 밝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탓일까.


얼마 전에 요란하게 장미꽃까지 가져와서 프로포즈하던 블랙캣을 떠올리며 마리네뜨는 생각했다. 레이디버그로 만났을 때도 딱 이 정도면 참 좋을 텐데. 아무리 좋아한다지만 좀 정도를 지켜줘야….


거기까지 떠올리고 마리네뜨는 흠칫했다.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내가 좋아서? 그래서 무엇도 계산하지 않고 그렇게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걸까. 그러고 보면 과장된 행동들이나 지나치게 텐션이 높은 듯한 모습들은 마치….



“블랙캣은, 평소에 사람들이랑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죠?”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마리네뜨 쪽이었다. 그 질문을 듣고 블랙캣은 조금 놀랐는지 마리네뜨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뭐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싱글싱글 웃고 있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옛날의 제가 떠올라서요.”



웃고는 있지만 분위기상 왠지 힘든 얘기를 꺼낼 것 같은 마리네뜨의 표정을 보고 블랙캣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앞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무언가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살짝 웃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말할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렇게 먼 과거는 아니지만.



“뭐, 그래서 사람들이랑 얘기를 하게 되면 너무 기뻐서 이것저것 막 말하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그래서 마구 떠들다 보면 오히려 사람들은 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구요.”


누군가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방법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어서. 어떻게든 사랑받고 싶어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재수없는 애’ 이상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싫어하기도 하고 애써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슬퍼하기도 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줄 사람은 없는 걸까? 라는 생각에 몰래 이불 속에서 울어보기도 했었다.



“그것에 상처받고 계속 고민하기를 반복하다가, 정말 저를 좋아해주는 친구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에스미를 만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걸.”



싱긋 웃으며 돌아보는 마리네뜨는 뜻밖에도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블랙캣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왜 저러지?



“아, 왕따 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니야, 날 뭘로 보고.”

“그럼 다행이구요.”



안심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리던 마리네뜨가 이내 기운차게 말을 꺼냈다.



“아무튼! 솔직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쪽은 말이죠, 쓸데없는 것들에는 정말 솔직하면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전혀 안 하려고 하는 타입 같단 말이에요.”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잘 웃고 매사에 익살스럽게 구는 점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무척 믿음직스러운 파트너. 매번 잘난 척을 하긴 하지만 같이 다니다 보면 그가 지키지 못할 말을 한 적은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가 자신의 마음 속을 오롯이 내보이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좋아한다고 마구 떠들지만 거기에 진심이 얼마나 담겨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건 내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레이디버그가 되고 나서 제 직감이 틀렸던 적은 거의 없었다.


블랙캣이 하하 웃으며 물었다.



“내가 그렇게 보였어?”

“그래요! 신중하게 말하는 건 좋지만, 뭐든 과하면 좋지 않아요.”

“…그런가.”

“그렇죠.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저도 아직 좀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정말로.”



블랙캣의 솔직함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변함없이 좋아한다 말하며 애정을 보내주는 그의 모습이 아주 싫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그렇게까지 사랑받는 ‘레이디버그’가 부럽기도 했다. 펠릭스를 이렇게나 좋아하게 된 건, 아마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상냥하게 대해줬던 사람이 거의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당신에게 흔들리는 건지도 몰라. 아주 조금이지만.


마리네뜨의 말을 계속 가만히 듣고 있던 블랙캣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구나.”



블랙캣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고였다. 잔잔하게 웃는 블랙캣의 얼굴을 보는 건 또 처음이라 마리네뜨는 힐끔 시선을 피했다. 왠지 창피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거 나중에 떠올리면서 막 쪽팔려하게 되는 거 아니야? 아악! 속으로 온갖 절규를 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옆에 두고서 블랙캣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말수가 많아봤자 미덕이 되지 않는다고 배워왔다. 말을 많이 하는 건 그만큼 틈을 많이 보인다는 뜻과도 같다. 그래서 계속 감추고 살았다. 사람들과 거의 떨어져서 마음을 죽이고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감정들을 모두 잘라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미숙한 자신이 틈을 보일까봐, 그 틈이 자신을 좀먹고 버려야 하는 감정들을 깨어나게 할까봐.


블랙캣이 되어서도 그랬다. 블랙캣의 모습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망설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든 멋있어 보이고 싶었으니까. 추한 모습같은 건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게 무엇이든 간에, 어떻게든 감추고 싶었다. 아니, 사실 마이 레이디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 내가 접근했던 건….


…그만두자.


더 이상 생각하기 꺼려졌던 탓에 블랙캣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말해야만 한다는 건 알지만, 적어도 아직은.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나랑은 생면부지인 사이 아니었어?”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블랙캣은 이미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본인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겠지. 잠깐 얘기한 사이인데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가 좀 신기하지만.


마리네뜨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왠지 친근감이 들어서요. 뭐 어디 가서 제 이야기 하고 다닐 건 아니잖아요.”

“오호, 신뢰를 받고 있는 건가?”

“파리의 영웅인데 그 정도 책임감은 있어야죠. 그리고 사실 그렇더라도 괜찮을 거 같아요.”

“왜?”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거든요.”



조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사람이 없는 공원 안에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블랙캣이야말로 괜찮아요? 히어로 일.”



블랙캣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말 그대로 정말 생면부지인 사이고, 지금 자신을 구해준 것도 단순히 운일지도 모른다. 미라큘러스를 지니고 다닌 후로 상당히 운이 좋아졌으니까. 이 참에 하고 싶은 말들은 다 해야겠다며 마리네뜨는 재차 물었다.



“안 힘들어요?”

“힘들지.”



망설이지도 않고 단언하며 블랙캣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시작한 거 끝을 봐야겠지. 그리고 아마 마이 레이디도 똑같이 생각할 거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신뢰를 읽은 마리네뜨의 심장이 차갑게 조여들었다. 기뻐야 하는 말인데 조금도 기쁘지 않은 나는 못된 아이인 걸까. 당신에게 나는 언제나 강한 사람인 건가 싶어서 불안하다.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당신도 강한 히어로로서의 내가 좋은 건지도 몰라. 아니야, 아닌데.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사실 지금도 너무 힘들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뭐?”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꼭 쥐면서 마리네뜨는 중얼거리듯 빠르게 내뱉었다.



“당신이 레이디버그의 뭘 아는데요?”

“….”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레이디버그도 사실은 싸우기 싫을지도 몰라요. 사람은 언제나 강하지 않으니까요. 약한 모습도 있다구요. 평범한 여자아이일 수도 있는 거야!”



좋게 말하려고 했는데, 감정이 북받쳐서인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치는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은 깔끔하게 응수했다.



“알아.”



그걸 어떻게 아냐고 마리네뜨가 반박하려는 찰나 블랙캣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이 레이디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걸.”



자신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한 마디에 마리네뜨는 순간 말하는 것을 잊었다. 입을 다물고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마리네뜨를 돌아보지 않은 채 블랙캣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불안해. 오히려 너야말로, 레이디버그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모를 거야. 긍정적인 면들은 모두 가감없이 드러내지만, 부정적인 것들은 모두 다 속에 끌어안고 사는 것만 같은 사람이거든. 그건 좋은 게 아닌데.”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뭐, 그냥 걱정이 될 뿐이야. 뒤에서 몰래 울고 있는 건 아닐지, 그게 아니라면 언젠가 견디지 못하고 가슴이 터져버리거나 아예 곪아서 가라앉는 건 아닌지.”



너는 언제나 웃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무리하게 웃는 건 싫어.



“하지만 그게 레이디버그의 뜻이라면 난 존중할 거야.”



나는 너의 그런 모습까지도 좋아하니까.



“그런 자신을 드러내지 않길 원한다면 끝까지 모르는 척할 자신도 있어. 내가 아직 그만큼 의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그게 내 사랑 방식이야.


덤덤하게 말을 끝맺는 블랙캣의 모습이 꽤나 낯설었다. 이제껏 봤던 모습들 중에 제일로. 마리네뜨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레이디버그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좋아하지.”



블랙캣이 두 손을 제 정수리에 올리면서 히죽 웃었다.



“뭐, 아직 내 짝사랑이지만.”



조금은 씁쓸한 듯한 그 목소리에 마리네뜨는 괜히 미안해졌지만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마음 가져봤자 좋을 게 없다. 블랙캣에게든 자신에게든. 그럼에도 뭔가 말해주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 나랑 닮았어.’


“계속 까불거리지 말고 그런 모습 좀 보여주는 건 어때요? 그 사람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훨씬 더 좋아할 거 같은데.”

“그럴까?”

“그래요. 마냥 밝기만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나도 네게 그런 식으로 비춰졌던 것 같지만.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마리네뜨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고, 블랙캣도 딱히 할 얘기가 없는지 조용해졌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마리네뜨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저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으아앗!”



허둥지둥 일어나면서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들려다가 열려 있던 가방문 사이로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마리네뜨를 보며 블랙캣은 한숨을 쉬더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마리네뜨가 떨어뜨린 물건들을 같이 줍기 시작했다.



“하여간 칠칠치 못하네.”

“하, 하하. 네, 뭐….”



살다살다 블랙캣한테까지 이런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한다니. 속으로 괴로워하던 마리네뜨에게 블랙캣이 다시금 말을 건넸다. 야.



“이거 왜 틀렸어?”

“…네?”



블랙캣이 손에 들고 있는 노란 공책이 무엇인지 알아채자마자 마리네뜨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내 수학 노트! 하지만 재빠르게 마리네뜨의 손을 피한 블랙캣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가지가지로 틀렸네. 이게 어떻게 3이야?”

“도, 돌려줘요!”

“여기서는 이 z의 방정식 값을 치환해서 원의 방정식이랑 연립해서 풀어야지.”

“…네?”

“그리고 여기는 이렇게 x를 여기가 아니라 여기에 대입해야지. 아니,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이런 풀이가 나와? 이건 이것 나름대로 창의적이네.”



어느 새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들더니 블랙캣은 간단한 공식과 함께 풀이를 시작했다. 얼떨결에 귀를 기울이던 마리네뜨는 선생님보다도 더 명료하게 설명해주는 블랙캣의 설명에 깜짝 놀랐다. 이해도 훨씬 쉬웠다. 마리네뜨는 놀라서 물었다.



“당신, 머리 좋았어요?”

“멍청하단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어.”



의외였다. 오늘따라 이 녀석의 의외인 면을 많이 본다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 웃긴 표정이라고 생각하며 블랙캣은 푸핫 웃었다.



“왜 그렇게 신기한 표정으로 봐?”

“그, 그냥. 좀 신기해하면 어때서요!”

“네, 네. 그럼, 조금 가르쳐주고 갈까?”

“그…, 됐어요! 그 정도로 심각하진….”

“…너 이거도 못 풀면 이번 시험 분명 낙제야. 보충학습이 받고 싶다면 편할 대로 하시죠~”

“헐, 안 돼!”



도와줘요! 저도 모르게 블랙캣을 붙잡은 마리네뜨의 얼굴이 살짝 새빨개졌다. 블랙캣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봤자 플랙 녀석 때문에 공부도 못할 게 분명한데. 심심하다고 또 집안을 어지럽혀둘 녀석을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제 앞에서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웃는 마리네뜨를 보는 건 예상 외로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쓸데없이 제게 감정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조금은 귀여워 보이는 것도 같고.


아, 좋다. 평소에도 딱 이 정도면 좋을 텐데.


서로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둘은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정말로 열심히, 선생님보다 더 쉽게 설명해주는 블랙캣을 보며 마리네뜨는 새삼 블랙캣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왜 블랙캣이 자신의 시험 날짜를 자세하게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래서, 이번 테러가 예고된 장소가 여기라구요?”



레이디버그가 물었다.



바로 맞췄네.”



시장이 대답했다.



“하, 하하….



웃고는 있지만 레이디버그의 얼굴은 영 떨떠름했다. 깜깜해진 밤, 흐릿한 주홍빛의 불빛 몇 가닥만이 창문들 사이로 번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 장소는 바로,



“와 진짜. 하필 여기라니.”



질렸다는 얼굴로 블랙캣은 제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파리가 자랑하는 명소 중 하나이며 관광객들은 물론 파리의 시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바로 그곳은,



“이거 진짜 미친 놈들 아니야? 루브르 박물관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 블랙캣이 온갖 과장된 몸짓으로 분노를 표현했다. 제대로 열받은 얼굴을 한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덤덤하게 건물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폭탄이 터진다고? 진짜?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시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테러 예고를 받은 순간부터 쭈욱 루브르 박물관에 경찰 인력을 늘렸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박물관은 파리의 자랑거리 중 하나니까. 물론 단순한 장난일 수도 있겠고, 우리도 제발 그러기를 바라지만 요즘 여러 가지로 안 좋은 일들도 터지고 해서.”



그 말과 함께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장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레이디버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박물관 3층 쪽을 순찰하는 걸 거들어 드리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아무래도 자네들이 경찰 수십 명보다 더 믿음직하니까!”



하하 웃으며 제 어깨를 툭툭 치는 일레인 시장에 레이디버그가 좀 싫은 듯한 표정을 지을 찰나 블랙캣이 시장의 손을 잡아챘다. 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시장에게 블랙캣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저하고도 악수해 주셨으면 해서 말이죠!”

“아하, 얼마든지요.”



시장의 손을 잡고 좀 과할 정도로 붕붕 흔드는 블랙캣을 보며 레이디버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와준 걸까?



“레이디, 갈까?”



생각을 하던 중 불쑥 질문하는 블랙캣의 목소리에 레이디버그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대답했다.



“응? 응!”



시장과 경찰들을 등진 채로 박물관 안으로 돌입한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물관 안은 깜깜했다. 그림들 주위에 흐릿하게 켜놓은 불빛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매직박스에서 적외선 안경을 꺼내 착용하는 레이디버그는 곧 자신과 똑같은 안경을 꺼내 쓰는 블랙캣에 깜짝 놀랐다.



“너, 그거 써?”

“? 응? 당연하지. 이번은 그냥 앞을 보는 게 아니라 폭탄을 찾는 거잖아. 적외선 안경은 물건이 있으면 불빛으로 보여주니까.”

“그, 그렇지.”



홱 고개를 돌리며 레이디버그는 다급히 적외선 안경을 착용했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블랙캣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좀 민망했다. 자신이 마리네뜨라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다행이지만 왠지 좀 찔리는 기분이었다.


빠르게 걸어 3층 회랑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폭탄은커녕 폭탄 비슷한 물건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제 20분만 있으면 예고한 시간인 자정인데도 전혀 수확이 없자 레이디버그는 점점 초조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어떻게 하지?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레이디버그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응?”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차피 폭탄을 설치해놨다면 막기는 힘들어. 이 박물관은 너무 넓고 일일이 다 살펴볼 수도 없으니까. 그냥 걷기만 해도 꼬박 일주일이 걸릴 만큼 넓은 장소에 숨긴 폭탄을 무슨 수로 찾아?”



안 그래? 그렇게 되물으며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마주보았다. 그가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귀를 긁적거렸다.



“이건 그냥 쇼라고. 정말 루브르에서 폭탄이 터지더라도, 경찰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고 말하기 위한 쇼. 안 터지면 다행인 거고 터지면 회피할 구실이 필요하니까.”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블랙캣은 레이디버그를 마주하며 말했다.



“우리까지 끌어들인 것도 그래서일 거라고 생각해. 시민들에게 먹히기 좋은 게 영웅이지. 그렇잖아?”

“….”

“혹시 잘해서 폭탄을 막아내면 그건 당연한 거고 못한다면 경찰은 분명 우리가 있었는데도 폭탄을 막지 못했다며 죄송하다는 기사를 낼 거야. 그럼 사람들의 관심은 우리에게 쏠릴 테고 경찰이 먹을 욕은 우리가 다 먹겠지. 알고 있잖아?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저 이용해먹기 좋은 구실일 뿐이야.”

“그렇겠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블랙캣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본론을 꺼냈다.



“…라고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겠지.”

“뭐?”



블랙캣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근처에 있던 창문 하나를 열었다. 창문 쪽에 발을 걸치며 레이디버그에게 손짓하는 블랙캣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조용히.”



그러면서 벽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블랙캣을 따라가면서 레이디버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지붕으로 올라가?”

“…사실 약속시간보다 일부러 일찍 왔거든. 아무래도 걸리는 점이 있어서. 그래서 일부러 일찍 와서 경찰들이 뭐라고 하는지 엿들었지. 가관이던데.”

“응?”

“아무리 그래도 영웅들을 그런 사지로 몰아넣어도 되냐고, 뭐 그런 식으로 떠들더라?”

“뭐?”



레이디버그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블랙캣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지붕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레이디. 우리가 돌아다녔던 복도 좀 이상하지 않았어? 있어야 하는 것들이 없었잖아.”

“뭐가?”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레이디버그를 살짝 뒤돌아보며 블랙캣이 씨익 웃었다.



“그림 말이야. 그 복도에 그림이 하나도 없었잖아.”

“…!! 아, 그러고 보니…!!”



생각해보니 복도에 걸려 있던 액자들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보수공사를 한다고 팻말이 걸려 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깜짝 놀라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은 웃으며 말했다.



“마이 레이디는 이런 점에서 순진한 구석이 있다니까? 뭐 그게 매력이지만.”

“…놀리는 거야?”

“설마, 칭찬이야.”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 레이디버그를 보며 난감해진 블랙캣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게다가, 경찰들의 행동도 좀 수상쩍었지. 그 층의 복도를 모조리 우리한테 맡겼어. 위쪽으로 올라오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다고. 이게 뭘 의미하는 거 같아?”

“…일부러 우리를 여기로 보냈다는 건가?”

“아마도.”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블랙캣은 짜증스레 말했다.



“이건 함정이야.”

“함정?”

“그래,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 경찰이 왜 저쪽에 협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이 테러 예고장을 보낸 놈들의 진짜 목적은 우리일걸.”



열받은 얼굴로 블랙캣이 다시금 질문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경찰이 너무 거리낌없이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했지 않았어? 악당을 상대할 때는 물러나달라고 했었을 당시에 그렇게 자존심 상해하던 인간들이 말이야.”

“확실히 좀 의아하긴 했지.”

“그래, 그리고 이 드넓은 박물관을 봐. 소리소문없이 사람 한둘쯤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 같은데.”



으스스한 소리를 지껄이는 블랙캣의 말을 듣던 레이디버그가 살짝 움찔거렸다. 블랙캣이 다시금 씹어뱉듯이 말을 꺼냈다.



“협력하지 않으면 박물관을 제대로 날려버리겠다는 협박이라도 했나 보더군. 어떻게 협박했길래 경찰이 이런 수까지 쓰나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따져보면 경찰한테는 별 거 아닌 거래잖아. 영웅이라고 불리지만 그래봤자 애송이 둘과 수백 년간 파리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박물관의 안위, 뭐가 더 중요하겠어? 대답은 안 봐도 뻔하지.”



어느 새 회랑 복도를 감싸고 있는 지붕을 지나, 다른 곳보다 높게 솟은 지붕 쪽으로 다가간 블랙캣은 재빨리 지붕에 납작 엎드리더니 유리 피라미드가 있는 중앙의 공터 쪽을 내다보았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는 블랙캣의 옆에 붙어 빼꼼 고개를 내밀고 바깥쪽을 바라보던 레이디버그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전히 대기하고 있는 수십 대의 경찰차들 주변으로 경찰들이 모여서 뭐라뭐라 떠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부분 박물관에서 철수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는 레이디버그에게 블랙캣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듣자듣자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무작정 응하지 않았다간 분명 무슨 짓을 하려고 들 것 같아서 그냥 받아들인 거야. 경찰들 앞에서 대놓고 말할 수는 없잖아?”



블랙캣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괴물처럼 강하니까 폭탄을 맞든 뭘 맞든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그럴 수가….”



이번에는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살짝 창백해진 레이디버그와 달리 블랙캣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지 무심하게 대꾸했다.



“일단 예정 시각이 지날 때까지만 여기에 좀 숨어 있어야겠어.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잖아.”



지금 빠져나가기엔 경찰들이 저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좀 어려울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공권력이랑 대립하게 되는 구도는 사절이라며 블랙캣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경찰들이 부탁한 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니까 안전할 거야.”



걱정하지 말라는 듯 블랙캣은 씨익 웃었다.




한편, 루브르 근처에 있는 지하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으로 마치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처럼 지긋이 그걸 들여다보던 남자는 곧 지붕 쪽으로 올라가서 뭐라뭐라 대화하고 있는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을 발견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는 중얼거렸다.



“목표는 저기 있나.”



그 시각, 레이디버그는 싸늘한 감각이 제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뭔가 터질 것처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경찰이 말한 폭탄 예고 시간은 자정이고 아직 시간이 몇 분쯤은 남았는데, 왜 벌써? 오감이 예민해져서인지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가 제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곧 직감이 시키는 대로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는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남자가 서 있는 자리 옆에 있던 손전등이 남자가 서 있는 벽을 환하게 비추었는데, 놀라운 점은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것 같았던 남자의 손에 물건의 그림자가 추가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펌프처럼 생긴 그것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남자는 한 번 힘을 주더니,


왜 그래? 그렇게 묻는 블랙캣의 질문에도 레이디버그는 대답 없이 그를 잡아끌더니 지붕을 세게 딛고 몸을 날렸다.


손잡이를 밑으로 세게 눌렀다.


쾅, 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건물의 지붕에서 화려한 주홍빛의 불꽃이 솟아올랐다. 지붕이 폭발하는 소리와 그 규모에 피라미드 앞에 있던 경찰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폭발의 규모가 커서인지 꽤나 멀리까지 반짝이는 주홍빛에 루브르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몇몇 사람들도 있었다. 그건 에펠탑 근처를 날아다니던 미스터 피죤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깜짝 놀란 그가 손을 이마에 대고 폭발이 일어난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헉! 저건 뭐다냐!”



폭발의 여파를 정통으로 맞았지만 두 히어로는 다행히도 무사했다. 으아악! 소리와 함께 추락하는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폭탄이 터지는 반동을 이용해 한 바퀴를 돌며 부드럽게 잔디밭에 착지했다. 머리부터 떨어져 끙끙거리는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어떤 불빛 하나를 발견했다.



“블랙캣, 저 쪽이야!”

“엉?”



블랙캣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레이디버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분명히 저 쪽이다.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걸 잡아야 한다고.


지하도 안에 있던 남자는 멀리서 터지는 폭탄을 보고도 별 감흥없다는 얼굴로 옆에 놓여 있던 손전등을 껐다. 언제나처럼 유유히 뒤로 돌아 사라지려던 남자를 붙잡은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거기 서!”






제 직감이 말하는 장소를 향해 순식간에 달려간 레이디버그의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잡혔다. 돌아서서 움직이려던 남자에게 레이디버그가 크게 소리쳤다.



“거기 서!”



그 목소리에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의 기색이 떠올랐다. 설마 싶으면서도 천천히 레이디버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는 남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로 놀랐는지 살짝 눈을 크게 치켜뜨는 남자에게 레이디버그가 소리쳤다.



“당신, 누구야! 왜 이런 짓을 하지?”



그런 레이디버그의 뒤를 따라 도착한 블랙캣도 곧 남자를 발견했다. 초록빛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들어찼다.


‘상의는 검은색, 하의는 하얀색, 모자를 쓴 창백한 얼굴의 남자!’


뭐라 말을 못하고 마냥 남자를 바라보기만 하는 블랙캣과 달리 레이디버그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가방에서 요요를 꺼내 빙빙 돌리더니 남자에게로 던졌다. 남자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챙!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튕겨져 나가는 요요에 레이디버그는 물론이고 블랙캣도 깜짝 놀랐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남자는 손에 무언가를 쥐는 시늉을 하더니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에게로 팔을 휘둘렀다. 섬광탄이 터지는 것처럼 빛이 번쩍했다.


그리고 섬광탄이 터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레이디버그가 소리쳤다.



“어디 갔지?!”





타닥타닥,


발소리 하나가 어두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어둠 속을 한참을 달리던 남자의 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살짝 흐릿하게 비쳤다. 방금 전 레이디버그와 블랙캣과 대치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들을 문제없이 따돌리기는 했지만 사실 남자는 지금도 꽤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아챈 건가. 절대 눈치챌 수 없을 만한 거리였는데.


후우, 한숨과 함께 남자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간 남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한 40대 초반의 남자는 한숨을 쉬며 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몇 번 신호음이 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들켰습니다.”



망설임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흘러갔다.



“네, 그래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뭐라 하는 말들에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두려워하면 이쪽 일을 할 수 없다. 처음에는 애써 표정을 감추는 정도였지만 3개월이나 지나니 나름 익숙해졌다.


들킨 건 문제이긴 했으니 뭐라고 해도 일단 듣고 보자는 생각에 귀를 기울였지만, 다음에 들려온 대답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네, 곧 돌아온다구요? 그 녀석이?”



상대가 몇 마디를 더 말하자, 남자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8편으로




재판 수량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링크는 이쪽 >> http://naver.me/x24EEI80

Posted by I.R.E
,

※ 예전에 신카에서 썼던 짧은 독백입니다. 오랜만에 보다가 마음에 들어서 살짝 공개해봐요ㅇ.<

사망소재 있습니다. 글자 수는 3,683자.

 

 

 


 

 

 

 

너를 보내고


written by. 리네

 

 

 

 



 그 날은, 시리도록 춥고 추운 날이었다.


 한겨울인지라 쌩쌩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칼바람이 눈과 만나 휘몰아치고 있었다. 수많은 하얀 알갱이들이 나의 모자, 목도리, 코트, 신발에까지 계속해서 달라붙다가 떨어져 나갔다. 몸이 얼어붙을 듯이 싸늘하게 내 주위를 감싸는 바람 속에서 나의 손과 발은 손가락, 발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빨개지고 얼어붙었다. 호호 불어봐도 온기가 돌아오지 않는 나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근처에 있던 나무에 살짝 기댄 채로 눈을 돌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시험의 층에서 만나 아직까지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과 그 녀석의 동료 몇 명이 다였다. 모두들 가만히 서서 작은 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저 비석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비석 아래에 누군가를 담은 작은 나무관이 묻혀 있으리라. 모두들 그 납작하고 네모난 돌을 바라보면서 이 추운 날씨에도 누구도 불평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떤 녀석은 눈물을 흘리면서, 어떤 녀석은 그저 슬프다는 얼굴을 한 채로, 안타깝다는 얼굴을 한 이도 있었으며 대놓고 대성통곡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담담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는 이도 있었다.


 내가 그랬다.


 그가 사라지면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너무 괴로워서 숨이 막힐 거라고, 언제나 너를 떠올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네가 없는 삶은 매 순간순간 고통뿐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왜? 나에게 너란 존재는 결코 그렇게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너를 구해 내 곁에 두려고 했다. 설령 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 정도로 나에게 너란 존재는 무겁고, 평생을 옭아매는 사슬과도 같았다. 스스로 그것을 택했지만 그래서 더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너는 이제 없다. 지금 너의 자그맣고 연약한 육체는 이 에일 듯이 날카로운 눈바람이 불고 있는 곳에서 우리가 서 있는 이 단단하고 차가운 땅 속으로 들어가, 안식을 취하고 있다. 그 안은 여기보다는 좀 더 따뜻하려나. 편안하려나? 이제야 너에게 주어져있던 무거운 족쇄를 벗고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었는데,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 여기 위에 있는 나와 이 녀석들은 시리도록 추운 곳에서 삶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는 채로 너를 배웅한다. 편안하겠지만 조금 외롭고 고독한 길에서, 네게 행운이 있기를.


 바람이 조금씩 멎어가기 시작하였고 눈들이 하얀 가루처럼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이들도 그것을 느끼고 움츠렸던 몸을 조금은 폈다. 그렇게 바람이 멎어가자 나는 코트에 꽂고 있던 한 손을 꺼내어 밖으로 내밀었다. 금방 손이 새빨개졌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손을 뻗고 있었다. 그렇게 뻗은 내 손 안으로 하얀 눈송이들이 천천히, 다가와서 담겼다. 차갑다. 내 손도 차가웠는데도 눈송이들은 자신보다 따뜻한 것을 만나서인지 금방 녹아, 손에서 또르르 떨어졌다. 한참을 그러다가 나는 살짝 얼어붙은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고개를 살며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빛의 구름이 서서히 지나가고 맑은 하늘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자그마한 네가 너무나도 길고 외로운 길을 떠나게 된 날, 나는 그렇게 너를 보냈다.

 

 

 


 

◈ ▣ ◈

 

 

 



 그 이후로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저 늘 그랬듯이 하루하루를 보냈고 친구들은 그런 내게 언제나 물어왔다.


 괜찮냐고.


 솔직하게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 녀석들은 늘 내 눈치를 살피고 나를 걱정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 같았는데,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냥 평범하게 아침에 일어나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늘 그랬듯이 하던 일들을 하고 가끔 친구들을 만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늘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를 그렇게 보낸 후, 뒤통수까지 오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어졌다. 그렇게 시간이란 열차에 내 몸을 맡기면서 정처없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수가 말했다. 오랜만에 그를 보러 가자고. 물론 거절했다. 왜냐고 이유를 묻자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냥 가고 싶지 않았다. 굳이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자 그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가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약간 처진 어깨를 하고 성을 떠나갔고, 그런 친우의 뒷모습을 보던 나의 마음은 알싸한 시나몬 사탕을 먹은 듯이, 그렇게 씁쓸하면서도 후련했다. 왜 이러는 걸까, 왜 나는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너를 다시 만나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걸까?


 이상하게 마음에서는 시끄럽게 경고음이 울려퍼졌다. 가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깔끔히 무시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미 아무 감정도 없고, 시간도 상당히 지났으니 문제될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미 내가 그의 죽음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철저하고 이성적이고, 냉정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온 나였다. 물론 그와 있을 때는 조금쯤은 감정적인 면이 드러나기도 했었지만 그가 없으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것뿐이다. 별로 불편한 것은 없었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






◈ ▣ ◈






 오랜만에 온 그의 무덤은 그 때도 생각했었지만 작고 황량했다. 상당히 추워진 날씨에 나는 옷깃을 부여잡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벌써 1년이나 되었구나, 여기 온 것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무덤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저번에 왔을 때는 조금 떨어져서 슬퍼하는 이들을 바라보았었는데 지금은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 하늘에서는 그 때처럼 다시 회색빛의 구름이 하늘을 감싸고, 그 짙은 장막 속에서 눈꽃들이 나풀나풀 춤을 추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감돌기 시작하는 어둡고 탁한 분위기는 마치 그를 보내던 날과 비슷했다. 우중충한 하늘은 꼭 그의 죽음을 슬퍼하듯이 더욱 어두웠던 그 때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무덤 앞으로 가서 비석을 살펴보았다. 돌판에는 반듯한 글씨체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쥬 비올레 그레이스                 

                         - 스물다섯번째 밤'


 


 


 나는 그 글씨를 천천히 읽어가면서 뭐라 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진짜 이게 녀석의 무덤인건가, 녀석이 이곳에 잠들어 있는 건가, 너는 정말… 이제 없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손등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눈을 크게 뜨고 손을 바라보았다. 물방울이었다. 눈이 녹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곧, 그것이 나의 눈가에서 떨어지는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씩 떨어지던 눈물들은 점점 더 많이, 방울방울 내 얼굴을 타고 떨어졌다.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들은 내 발치에 떨어져 번져나갔다. 그렇게, 그렇게 계속 눈물 흘리던 나는 갑자기 현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제 그는 내 곁에 없다. 이제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다시는… 너를 만지고 너의 체온을 느낄 수도 없다.


너는 영원히 가 버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나도 서러워지고 가슴 속이 뜨거워졌다. 나는 정말로 울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들을 흘려가면서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너무나도 어리석었다는 것을. 나는 그의 죽음에 담담했던 게 아니었다. 깨닫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 깨달으면,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분명하게 인식하면 내가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어서. 네가 더 이상 내 곁에 없다는 걸 죽어도 실감하고 싶지 않았기에. 숨이 막혀오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겨울이고 추운 날씨인데도 전혀 춥지 않았다. 그저 죽을 것만 같은 이 고통을 견뎌내는 일에 급급했을 뿐이다. 너무 아파서, 너무 괴로워서, 당장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아파오는 목에서는 오열이 터져나왔다. 흐르는 눈물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굵은 눈물방울들을 흘려가면서 나는 꺽꺽 울어댔다.

 

 

"밤, 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이렇게 아파하는 나를 두고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니. 너는 거기서 행복하니, 조금은 내 생각을 하고 있니, 아니면 나를 깨끗하게 잊었니? 나는 지금 내가 너무나도 바보 같아. 어떻게 너를 잊고, 너의 죽음을 견디고 살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까. 지금 네가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찢겨나갈 것 같이 아프고 숨이 막혀오는데. 원망도 해보았다. 왜 나를 두고 그렇게 가버렸니, 왜 나를 버리고, 그렇게 내 곁을 영영 떠나가버린 거니. 나를 왜, 이런 외로운 길에 홀로 내버려두고 가 버렸니?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다. 늘 거짓말만 하던 나의 감정은 선명하게 나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물들을 손으로 훔쳐가면서 비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밤, 나는 말이야….

 

 

"보고, 싶다."

 

 

 그래. 사실은, 정말 지금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다시 한 번 너를 만나고 싶고 너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고 싶고 찬란하게 빛나던 호박색의 눈동자를 다시 보고 싶어. 네가 나에게 다가오면 손을 뻗어 너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네가 웃으면 널 꼭 껴안고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 너무 힘든 길만 걸어온 우리였기에, 이제는 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어. 근데 왜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은 이렇게 짧았을까. 신이 야속하다. 이렇게 괴로운 시간을 주실 거였다면 그래도 조금 더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대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나도 짧은 행복이 끝나고, 길고 긴 끝없는 고통과 절망이 나를 덮치고 있다. 신은 어째서 나에게, 우리에게 이렇게 잔인한 걸까.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 간절히,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네가 듣고 있는지는 모른다. 황량한 무덤가에 소복히 쌓이는 눈들과, 내 곁을 스쳐가는 바람만이 내 기도를 들었으리라.

 

 

"단, 한 번 만이라도…."

 

 

 

널 다시 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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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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