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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장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더니 ㅎㅎㅎㅎ...

※ 아드마리는 사귀는 사이입니다! 정체도 알아요!
별거 없지만 시즌1 26화 신캐 네타가 있으니 안 보신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아드마리] 속보






여느 때와 같은 아침.

역시 어느 때처럼 학교에 등교하는 아드리앙에게 수많은 아이들의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졸린 것 같지는 않지만 평소보다는 조금 멍한 얼굴로 천천히 자신의 반으로 향하던 아드리앙의 팔에 누군가가 달라붙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녕~ 아드리앙?”
“아, 클로이.”


금발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묶은 소녀가 그의 팔을 붙잡고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아드리앙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반대쪽 팔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안녕, 아드리앙? 오늘 일찍 왔네?”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예쁘게 눈꼬리를 휘며 요염하게 미소짓는 소녀의 모습에 클로이가 대놓고 눈가를 찌푸렸다. 매서운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점차 술렁거렸다. 하지만 다들 자리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손꼽히는 두 미녀가 남자 하나를 두고 싸우고 있는 상황이다. 그것도 이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소년, 아드리앙 아그레스트를 사이에 두고. 이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의 신경전은 계속되었다. 클로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왜 여기 있어?”
“왜긴? 우리 아드리앙을 보러 왔지~”


그 말과 함께 라일라는 아드리앙의 팔을 껴안고 살짝 그를 올려다봤다. 매력적인 미소에 주변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지만 아드리앙은 겸연쩍게 웃으며 손을 빼냈다.


“저기, 너무 가까운데.”
“어머, 가까우면 어때. 앞으로 더 가까워질 텐데~”


후후 웃으며 다시 다가서려는 라일라를 막은 건 클로이의 목소리였다.


“어이, 이봐. 떨어지시지. 누구 맘대로 아드리앙한테 달라붙는 거야?”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부르는 클로이를 돌아보는 라일라의 얼굴에 어려 있던 미소가 조금 가셨다. 의아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빙긋 웃으며 중얼거리는 라일라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어머, 꼬리 말고 도망친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뭐가 있나 싶어서 말이지. 너, 지금 아드리앙이 네 남친이라도 된 것마냥 구는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아드리앙은 너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을 텐데 말이지~ 나처럼 예쁜 소꿉친구가 있으니까 말이야?”


느릿하게 말하며 여유로운 미소를 날리는 클로이의 모습에 라일라는 부득 이를 갈았다. 곧 다시 호호 웃으며 살짝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는 라일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미모라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는 않는데. 이래뵈도 할리웃에 데뷔하지 않겠냐는 제안도 많이 들었다구?”
“흥, 그래봤자 헐리웃에 진짜로 간 건 아니잖아?”


둘 사이에서 파직파직 불꽃이 튀었다. 클로이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을 톡톡거렸다.


“재밌네. 너 정도면 뭐, 상대할 맛은 나겠어.”
“무슨 소리야?”
“이래봬도 아드리앙이랑은 소꿉친구라서 말이야. 덕분에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스킨십도 많이 했던 사이거든?”


앞머리를 휙 뒤로 넘기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클로이에 라일라는 순간 움찔한 것 같았지만, 아드리앙의 표정을 잠깐 살피더니 곧 다시 피식 조소를 날렸다.


“그러게, 아드리앙은 참 착한 거 같아~ 소꿉친구라서 귀찮아도 다 받아주는 걸 보면 말이야.” 
“뭐라고?!”
“한 번 해볼래?!”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는 클로이와 라일라.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흥미에 가득 찬 눈빛을 거두지 못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드리앙은 난감하게 웃다가도 별 관심이 없는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방금 막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를 찾아낸 아드리앙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부드럽게 웃는 아드리앙의 시선을 붙잡은 건 검은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였다. 바로,


“어, 마리네뜨.”


자신을 두고 대립하고 있던 둘을 내버려두고 마리네뜨에게로 다가서는 아드리앙의 발걸음이 깃털 달린 것처럼 가벼웠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물론, 클로이와 라일라도 서로를 노려보던 것을 잠시 멈추고 그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색을 띄고 마리네뜨의 앞으로 다가선 아드리앙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지금 오는 거야?”
“어, 응. 아드리앙 너는 이제 와? 근데 오늘따라 애들이 많네. 무슨 일 있나?”
“글쎄, 그것보다, 같이 들어갈까?”
“그, 그래!!”


허둥지둥 말을 꺼내면서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배시시 웃는 마리네뜨의 모습에 아드리앙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져 갔다. 소중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상냥한 눈빛에 괜시리 얼굴이 더 빨개지는 것은 마리네뜨 쪽이었다. 그렇게, 한창 좋은 분위기를 깬 건 날카롭게 소리치는 클로이의 목소리였다.


“아드리앙!!”


깜짝 놀라 돌아보는 아드리앙과 마리네뜨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클로이의 표정이 심통이 난 것처럼 부루퉁했다. 그것은 라일라도 마찬가지였는지, 웃고는 있지만 눈빛에 의심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왜 쟤랑 붙어 있지? 그것도 저렇게 다정하게.

클로이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뭐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여유로운 얼굴로 빈정거렸다.


“뭐 하러 마리네뜨같은 애하고 어울려 다녀? 수준 떨어지게 말이야~”


가까이 다가와 다시 팔을 붙잡으려는 클로이였지만, 아드리앙은 방금 전과는 달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클로이의 손을 피했다. 그에 어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클로이에게 아드리앙은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보니 말해야 하는데 깜빡했네.”
“어, 꺄악!!”


부드럽게 웃는다 싶더니,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환하게 웃었다. 졸지에 아드리앙의 가슴에 등을 기대게 된 상태가 된 마리네뜨는 입만 뻐끔거렸다. 놀라서 굳어있는 마리네뜨를 대신해 아드리앙이 해맑게 말했다.


“마리네뜨랑, 나. 사귀기로 했어.”


마치 곧 소풍을 가게 돼서 신나하는 어린아이마냥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비록 그 내용은 정말이지 폭탄선언이 따로 없었지만. 아드리앙을 제외한 모두가 그 말 한 마디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마리네뜨까지도. 한참을 지나 겨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라일라였다.

 
“……뭐?”
“……오, 아드리앙, 그런 재미없는 농담은 관둘 때가 되지 않았어?”
“그, 그래.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굴었지? 빨리 얘기 끝냈어야 하는데 얘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농담 아닌데?”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한 두 사람에게 다시금 쐐기를 박는 아드리앙의 얼굴에는 악의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드리앙의 모습에 클로이와 라일라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황했는지 마리네뜨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돌려 아드리앙을 쳐다보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아드리앙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려던 말들을 다 잊어버리고 다시 백지가 되긴 했지만.


“아, 아드리….”
“나, 마리네뜨를 좋아해.”


간결하지만 분명히 말하는 아드리앙의 대답에 다들 아무런 말도 못하고 꽁꽁 굳어있기만 했다. 툰드라 벌판처럼 싸늘한 분위기 가운데서 아드리앙의 주변에만 봄꽃이 가득 피어있는 것처럼 화사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너무 달라붙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좋아하는 사람한테 오해받고 싶지 않으니까.”


다정하지만 명백하게 선을 긋는 목소리. 그렇게 말하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려 마리네뜨를 쳐다보는 시선은 여전히 부드럽지만, 그 이상으로 열렬했다. 정말로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래, 소년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갈까, 마리네뜨?”
“어…. 응!!”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잡고 깍지를 끼는 아드리앙의 행동에 마리네뜨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곤란한 것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결코 싫지는 않은지 마주잡은 손을 더욱 꽉 쥐는 마리네뜨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그렇게 모두를 뒤로 한 채 교실로 걸어가는 아드리앙과 마리네뜨의 뒷모습에 배경으로 깔린 건 짜고 친 것처럼 동시에 던지는 라일라와 클로이의 비명같은 한 마디였다.


“이건 말도 안 돼!!”




- To Be Continued
읽으시는 분들 마음속에서!(찡긋


Posted by I.R.E
,

※ 춘님과 한 2인합작!

AU예요 고서점 손녀 마리네뜨와 부잣집 도련님 아드리앙~!!

마리네뜨가 20살이고 아드리앙이 25살입니다 ㅇㅁㅇ






[아드마리]

Buchini|st





딸랑,


맑게 울려퍼지는 방울소리와 함께, 옅은 바람 한 줄기가 열린 문틈 사이로 살랑 몸을 들이밀었다. 낡은 고(古)서점 안은 낮인데도 꽤나 침침했다. 낡은 책들을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흔한 스탠드 하나 설치되지 않은 가게 내부는 소리 하나 없이 적막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양 옆으로 보이는 책장들에 책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바닥을 밟으니 끼익 울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발을 내닫자마자 시원한 나무 향기와 낡은 종이 냄새가 섞인 듯한 독특한 향내가 코끝에 훅 번져왔다.


서점 안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정갈했다. 연갈색의 책장들과 선반 사이사이로 빼곡히 채워진 책들은 낡았지만 꽤나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고, 보기에 딱히 거슬린다 싶은 물건들도 없었다. 사실 책들 말고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갈빛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그 책상에 앉아있는 건 검은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였다. 안이 상당히 어두웠음에도, 바로 등 뒤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소녀의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었다. 책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꽤나 숙녀티가 나는 소녀였다.


평상시처럼 손님이 왔나 싶어 인사를 건네는 소녀의 목소리가 명랑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대꾸하는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살짝 어려 있엇다. 고작 인사를 했을 뿐인데, 마치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것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단번에 소녀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듣기 좋은 목소리는 마치 햇살같았다. 햇살을 담아놓은 듯한 따스함이 깃든 목소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소녀의 푸른빛 눈동자가 저를 부른 상대를 마주했다. 어두운 책장 사이를 걸어 소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선 남자의 머리카락은 햇빛으로 물들인 것만 같은 찬란한 금빛이었다. 그 목소리만큼이나.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지는 녹색 눈동자에 소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혹시, 주인 안 계십니까?”

“할아버지라면, 어. 지금은 일이 있어서 안 계세요. 근데….”



누구세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물어버리고, 소녀는 낭패라는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소녀가 귀여웠는지 남자는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청량하게 울리는 웃음소리에 소녀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 미안해요. 그 한 마디와 함께 남자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소개를 건넸다.



“아드리앙. 아드리앙 아그레스트라고 해요. 그쪽은?”



싱긋 웃는 그 시선에 소녀는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마주 웃어주었다.



“마리네뜨. 마리네뜨 뒤팽 쳉이에요.”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



“안녕, 마리네뜨?”

“꺄악!”



책장에 책을 꽂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는 마리네뜨의 손가락 사이로 책이 우르르 떨어졌다. 낭패라는 얼굴로 제 발밑을 한 번, 제 앞에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아드리앙을 한 번 흘겨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아 떨어진 책을 주워담기 시작했다. 힐끔 눈치를 보던 아드리앙이 살금살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책을 다 주운 뒤 들고 일어서려는 마리네뜨의 품에서 아드리앙이 책을 한 다발 뺏어들고 멋쩍게 웃었다.



“미안,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 아니에요.”

“이거 여기다 꽂는 거지? 들고 있어줄게, 천천히 해.”



호의 가득한 미소에 마리네뜨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그녀는 예정해두었던 장소에 책들을 골라 꽂아넣기 시작했다. 어느 새 자신의 존재는 잊어버린 듯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는 마리네뜨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아드리앙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그가 간간히 말을 걸었다.



“이번엔 어떤 책들이야?”

“오래된 고전 문학들이요. 꽤 괜찮은 것들이 들어와서요.”

“표정 보니까 신난 게 보이네. 나도 좀 봐봐도 돼?”

“잠시만요, 이거 좀 마저….”



책을 집어들려던 마리네뜨의 손가락이 아드리앙의 손끝에 살짝 닿았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내다가, 이내 어색한지 하하 웃으며 눈치를 보는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 아니요! 하하하. 아그레스트 씨가 좋아하실 만한 책은 이런 거려나요?”



허둥지둥 책장을 뒤져 무언가를 꺼낸 뒤, 책을 두 손으로 들고 그에게로 확 내미는 마리네뜨의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그에 멀뚱멀뚱 눈만 깜빡거리다, 고맙다고 답하며 책을 받아드는 아드리앙의 목소리에 마리네뜨의 귓불이 새빨개졌다. 지금 고개를 들면 분명히 들킬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차마 움츠린 얼굴을 들지 못하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읽어볼까.”



그 말과 함께 아드리앙은 책상 바로 옆 바닥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깨끗이 관리하려고 노력하지만 빈말로라도 깨끗하다 보기 힘든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주저앉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입고 있는 옷부터가 꽤 비싸 보이는데.


아드리앙이 앉아 있는 자리를 돌아서 책상으로 다가간 마리네뜨가 가만히 의자에 걸터앉아, 제 바로 옆에 내려앉아 있는 아드리앙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언제 봐도 잘생겼다. 몇 번을 봤는데도 변하지 않는 감상평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몰래 한숨지었다.



“내가 와서 막 불편한 건 아니지?”

“…네?”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몇 초 뒤 마리네뜨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뇨, 단골손님을 싫어할 리가!! …늘 찾아와주셔서 감사히 여기고 있는 걸요.”



진심이었다. 애초에 거의 혼자 있는 장소였으니까. 그게 별로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자주 찾아와줘서 즐거운 건 사실이었다.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의 마음이 이런 걸까. 이러다가 어느 날 오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서운할 거 같은데.


마리네뜨의 대답에 아드리앙은 살짝 책상 옆쪽에 머리를 기대고서 웃었다. 들썩거리는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책상이 살짝 떨렸다.



“하하, 다행이네. 내가 죽치고 앉아있어서 민폐인 건 아닌가 했는데.”

“원래 손님은 잘 없는 걸요. 이런 허름한 고서점을 계속 찾으시는 건 아그레스트 씨 정도밖에 없어요.”

“뭐야, 그 말은 내가 괴짜란 건가?”

“그럴지도요.”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바로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웃음도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마리네뜨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살짝 열어둔 창문 너머로 바람들이 불어와 커튼을 휘날렸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지 싸한 공기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지만, 곧 부드럽게 내리쬐는 햇살에 닿아 부서졌다. 상아색으로 옅게 내려앉은 햇빛이 말없이 책에 집중하는 두 사람의 주변으로 길게 늘어졌다. 햇빛의 그림자처럼 시간도 천천히 흘러가는 듯했다.


저 멀리서 흐릿하게 번지는 소리만이 간혹 들려오는 것을 제외하면 무척 조용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되어 군데군데 벗겨진 연갈빛의 나무 책장들이 조용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각사각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느릿느릿 지나가는 침묵을 조용히 깨부순 건 아드리앙의 목소리였다.



“역시 여긴 편하다니까.”

“…그래요?”

“응, 뭔가 안정되는 느낌이야.”



좋다. 그 말 한 마디와 함께 아드리앙은 살짝 고개를 들어 마리네뜨를 올려다보았다. 애써 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마리네뜨가 저도 모르게 아드리앙을 힐끗 돌아봤다가 후다닥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 마리네뜨를 보고 귀엽다는 듯이 작게 웃다가 아드리앙은 다시 종이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저도 그래요.”

“응?”

“여기를 좋아해요. 그냥, 여기의 분위기가 좋아요. 좀 밀폐되어 있긴 하지만 조용하고 아늑하고, 낡은 나무 냄새가 기분 좋기도 하고.”



처음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손에 자주 끌려왔었지만, 철없던 소녀는 사실 책들보다는 서점 내부에 맴도는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되었었다. 어린 소녀에게 높이 솟은 책장들은 몹시도 거대했고, 하나밖에 없는 창문 틈새로 내비치는 햇빛은 스포트라이트를 연상시켰다. 책장들 사이를 걸어서 그 쪽으로 향하는 걸음걸음이 그리 길게 느껴졌더란다.


그렇게 이곳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실 학기 중에는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반겨주는 할아버지의 미소를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할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야 여기로 돌아오게 되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피식 웃던 마리네뜨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 그녀는 무심결에 말을 꺼냈다.



“아그레스트 씨는, 어쩌다 여길 오게 된 거예요?”

“응? 나?”

“네.”



용기내어 묻자, 아드리앙은 잠시 고민하더니 싱긋 웃었다.



“나, 어릴 적에 큰 병을 앓았던 적이 있어.”

“네?”

“그래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하늘만 바라봤었어.”

“설마.”



지금 그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인다. 혈색도 좋고 어디로 보나 건장한 성인 남자의 몸이다. 놀라는 마리네뜨의 반응을 짐작했는지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야. 그래서 그 때는,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바라지 못했지. 동무라고는 비서가 가져다주는 책 한 권 정도. 모르긴 몰라도 우리집 서재에 있던 책들은 전부 다 읽었을걸?”

“그렇구나….”



말끝을 흐리는 마리네뜨의 표정이 꽤나 어둡다.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난처하다는 듯이 눈동자를 위로 굴리던 아드리앙이 가만히 입을 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여기는 정말 우연히 발견한 곳이야.”



찰나의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얼마 안 가서 잊어버렸을 법한, 아주 작은 호기심.



“구석에 있길래 뭐 별 거 있겠냐 싶었는데, 들어와보니 이거 참 신세계더라구. 재밌는 책도 많고 주인 할아버지도 좋은 분이고. 주인 어르신이랑 얘기를 나누다보니 고서에도 흥미를 가지게 됐고.”



그러던 게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간다. 마리네뜨와 만난 건 한 달 전쯤이다. 늘 반겨주던 할아버지가 아닌 웬 어린 소녀가 있는 걸 봤을 때는 솔직히 조금 놀랐지만, 그는 이건 이것대로 좋다고 생각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대를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니까. 특히 그에게는.



“그러다가 널 만난 거지.”



제 손을 가만히 그러잡는 따뜻한 온기에 마리네뜨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시선에 차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조용히 물었다.



“마리네뜨. 무슨 일 있어?”

“네? 무슨….”

“시치미 떼지 마. 무슨 일 있는 거지?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잖아.”



말해봐.


뒤돌아 앉은 아드리앙은 다른 한 손도 뻗어 마리네뜨의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커다란 손은 무척 따뜻했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는 꿀을 발라놓은 듯이 부드러웠다. 나른해진다 싶을 정도로 편안한 울림에 기분이 편안해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저를 향하는 시선이 무척이나 상냥해서 마리네뜨는 어느 샌가 더듬더듬 담아두었던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사실 할아버지가 좀 걱정돼요.”

“역시 그거였구나.”

“요즘 병세가 좋지 않으시대요. 조만간 다시 병문안을 가봐야 알 거 같긴 하지만….”

“그래.”



주인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 서점을 무척이나 아끼시는 어르신이 손녀라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맡길 정도니 심각하리라는 것도 예상했었고.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모습이 지적이고 멋진 분이셨는데, 언젠가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뼈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초췌해지신 모습에 놀란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저를 웃으며 반겨주시는 모습에 멍해졌었다. 무언가가 속에서 왈칵 치솟는 느낌이었다. 남인 저도 이런데 손녀인 그녀는 오죽하겠는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울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마리네뜨가 안타까워서, 아드리앙은 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런 아드리앙의 마음을 아는지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이다가, 기어코 말을 꺼냈다.



“아그레스트 씨.”

“응?”



왜? 그렇게 묻는 듯한 아드리앙의 녹색 눈동자를 보며, 마리네뜨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이 고서점이요. 할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어요.”

“응.”

“저는 방학중이라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만, 학기가 시작되면 대학으로 돌아가야 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마 여길 관리해줄 사람도 사라지겠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아드리앙의 표정이 조금, 아주 조금 변했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아드리앙에게 마리네뜨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이 고서점이 사라져도, 나와 할아버지를 기억해 줄래요?”



아드리앙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청명하던 하늘 위로 비구름이 끼더니, 지면에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천천히 떨어지던 빗방울은 곧 세찬 빗줄기가 되어 맹렬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겨울이라 그런지 제법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쏟아지니 공기는 마치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거리, 낡은 고서점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우산을 쓰고 멍하니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OPEN]이라 쓰여져 있는 팻말을 가만히 쳐다보던 남자가 살짝 제 손을 문에 가져다댔다. 끼익, 소리가 오늘따라 음산하게 울리며 문이 열렸다. 재빨리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고, 우산을 접어 한쪽에 놓여져 있는 통에 담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가 와서 그런지 안은 한층 더 어두웠다. 내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리네뜨?”



있어? 가만히 부르는 목소리에 답하듯 저쪽 구석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왜 대답이 없지? 의아한 마음에 아드리앙은 천천히 걸어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갔다.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에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섬뜩해진다.


가까이 다가가니 마리네뜨는 늘 앉아 있던 의자에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반갑게 부르려고 했지만, 어둠에 눈이 익자 아드리앙은 제 눈앞에 보이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알아보고 흠칫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었다. 아니, 어두웠기에 더 눈에 띄었던 건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마리네뜨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착잡하게 내뱉어지는 한 마디에 아드리앙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마리네뜨는 피식 웃었다. 당장 본인이 죽을 것만치 초췌한 얼굴이면서, 그녀의 말투는 의외로 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감정이 메말랐다 싶을 정도였다.


덜컹, 소리를 내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 속에 얼마나 있었는지 마치 밝은 곳에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아, 맞다. 말씀하셨던 책이요, 어젠가 그제 들어왔더라구요. 지금 가져다 드릴게요.”

“….”

“되게 재밌을….”



왈칵 쏟아지려는 감정을 눌러가며 마리네뜨는 애써 밝게 웃었다. 이상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눈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뜨뜻한 무언가에 마리네뜨는 아무렇지 않은 척 눈물을 훔치며 씩씩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커다란 손이 마리네뜨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두 팔로 자신을 놓칠세라 조심스레 끌어안고 있는 아드리앙을 마리네뜨는 밀쳐낼 수도, 뭐라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입을 열면 무언가 터질 것 같은 예감에.



“괜찮아. 그런 것쯤은.”



상냥하게 등을 토닥거리는 아드리앙의 손길에 마리네뜨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안 돼. 아니야, 버텨, 버텨야 해. 지금은 안 돼. 적어도 이 사람이 떠나고 나서, 그 후에…. 아직은 괜찮아.


울지 마.



“힘들 때는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는 게 최고야. 내가 아팠을 때도 그랬거든.”



그런 마리네뜨의 생각을 읽었는지, 아드리앙은 담담히 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난 늘 아프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여 살았어. 그래서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었지. 그런데 어느 날은 너무 울고 싶은 거야. 서러워서.”



왜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걸까. 왜 여기에 이러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새장 속의 새처럼, 갇혀져 있어야만 하는 인생은 지긋지긋한데. 하지만 울면 내가 너무 불쌍해지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울 수 없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처음으로 아이처럼 막 울었는데, 웃긴 건 울고 나니까 오히려 속이 후련해지더라고.”



나를 가뒀던 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밖에, 내 아집밖에 없었던 작은 세계가 처음으로 부서졌던 순간. 똑똑히 기억한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처음으로 구원받았다 느꼈던 그 때의 감정을, 그 벅차던 순간을.



“마리네뜨, 자. 여긴 나랑 너뿐이잖아. 아무도 없어. 누구도 널 보지 못할 거야.”



물론 나도.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 셔츠를 적셔가는 무언가를 느낀 아드리앙이 작게 미소지었다. 조금씩 새어나오던 흐느낌이 어둠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더니,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와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 이따금 창문께서 번쩍이는 번개가 어스름한 서점 내부를 살짝 엿보았다. 계속해서 울고만 있는 마리네뜨를 토닥이는 아드리앙의 손길은 부드러웠고, 그에 그녀는 더욱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보지 않겠다는 말을 지키려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 쪽만을 바라보는 아드리앙의 눈매가 살짝 곤란하다는 듯이 찡그려졌다. 안절부절 못하는 거 같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실 지금 마리네뜨를 끌어안은 손이 자꾸 떨리려고 하는 걸 자제하는 것만도 좀 벅찼다. 폭주하면 안 된다. 안 돼. 몇 번이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진정하기 위해서.


한참을 울고 난 뒤 좀 진정이 되었는지 마리네뜨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저기, 저기요.”

“응.”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미친 걸까요?”

“….”

“여기가 사라지는 것도 싫은데….”



당신을 만나게 되지 못하는 게 더 슬퍼요.


차마 그 말까지는 꺼내지 못하고 꿀꺽 삼켜버린 마리네뜨의 입술이 꾹 닫혀 있었다. 아드리앙에게 꼭 안긴 상태로, 옷깃을 꽉 붙잡고 있던 마리네뜨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얼 그리도 두려워하는 걸까. 잠깐 무언가 고민을 하는 듯하던 아드리앙은 이내 결심한 듯이 말을 꺼냈다.



“마리네뜨, 나한테 올래?”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몰랐다가, 다음 순간 그 의미를 알아들은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마리네뜨의 시선이 아드리앙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눈동자가 퍽 진지했다.



“내가 여기를 살게. 그리고 너를 고용하는 거지. 나는 언제나처럼 가끔 여기를 찾아오고, 너는 여기서 일하다가 나랑 같이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때?”

“…네? 어…?”



혼란스러운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자신만 멀뚱히 쳐다보는 마리네뜨의 표정에 아드리앙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예상했다는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며 그는 짐짓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이거 섭섭한데. 이래뵈도 나름 고백하는 건데 반응이 너무 싱거운 거 아니야?”

“고백이요…?!”

“…싫어?”

“아, 아니요.”



기뻐요.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 마리네뜨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전히 혼란스러운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마리네뜨에게 그는 굳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마리네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를 좋아하세요?”

“응.”

“…왜요?”

“좋아하니까.”



담백하게 이어지는 고백에는 어떠한 미사여구도 없었다. 그만큼이나 직접적이고 꾸밈없이 다가오는 진심에 마리네뜨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이런 전개가 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지만, 그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한다.


자신도, 이런 식으로 프로포즈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말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을 뿐.



“하지만…,”

“응?”

“하지만, 저로 괜찮으시겠어요? 아그레스트 씨 정도면 분명 더 좋은 여자가 많을 거고…, 저는 아직 어리고….”

“응, 그럴지도 모르지.”



역시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마리네뜨의 눈빛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침착하려고 애쓰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리네뜨는 씁쓸한 듯이 말을 꺼냈다.



“그렇죠, 역ㅅ….”

“하지만 나는 네가 좋은걸.”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 행복하다고 느꼈던 건.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원래 여기로 걸음할 때도 즐거웠지만 너를 만나고 나서 몇 배는 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나를 향해 웃어주는 네 미소가 좋았고,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설레기 시작했었다.


알게 된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빠져버린 걸까.



“세상에 여자가 많으면 뭐해. 내가 좋아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되잖아?”

“….”

“너는 어때?”

“네?”

“정말 나로 괜찮은 거야?”



진지하게 말하는 아드리앙의 얼굴을 마리네뜨는 넋나간 듯이 쳐다보았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한 상대가 아닐지도 몰라. 일단 봐. 지금 나, 제가 약해졌을 때를 파고들고 있는 거라고. 무지 비겁하잖아?”

“…아그레스트 씨.”

“이름.”

“네?”

“아드리앙이라고 불러줄래?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성은 너무 딱딱하니까. 살짝 볼멘소리로 말하는 아드리앙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진지해서 마리네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만을 벙긋거렸다. 그는 마리네뜨를 놓아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대답은?”



장난스레, 하지만 꽤 초조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아드리앙을 향해 마리네뜨는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요!”



그 한 마디를 던지는 것과 동시에 마리네뜨가 도전적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든 순간 그들의 등 뒤로 번쩍 번개가 떠올랐다. 아드리앙의 놀란 얼굴과 더불어, 환하게 보여진 마리네뜨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그걸 본인도 깨달았는지,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푸욱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뺨을 두드리는 마리네뜨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아드리앙이 갑자기 팔을 벌려 다시금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우앗! 짧게 비명을 내지르며 끌어안겨진 마리네뜨와 달리, 아드리앙은 작게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 안 되겠어.”

“어, 저기….”

“넌 너무 귀여워.”

“예에?!”



이게 웬 쌩뚱맞은 소리란 말인가. 맥락을 이해할 수 없어 그저 당황하고만 있는 마리네뜨와 달리 아드리앙은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내가 고생하는 모습이 보이는 거 같다. 후우.”

“그게 무슨?”

“뭐, 몰라도 돼. 일단 지금은 이러고 있자.”



비가 그칠 때까지는. 그렇게 말하며 토닥토닥 제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마리네뜨는 잠깐 망설이더니, 몇 번을 멈칫거리다 조금씩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등을 살짝 끌어안자, 그에 좀 놀랐는지 순간 멍해졌던 아드리앙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더 이상의 대화가 오가는 일은 없었다. 그도, 마리네뜨도 눈을 감고 말없이 서로 끌어안고만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애잔하게.

내리는 비가 그칠 때까지.






- THE END







===

[buchini|st] 제목의 뜻은 루마니아어로 ‘고서점 점원’을 뜻합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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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인형] 전력으로 쓰려고 했던 글이에요! 아드리앙의 독백 느낌이랄까.



[아드버그] 마리오네뜨






나는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세계적인 디자이너 '가브리엘 아그레스트'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그의 브랜드 전속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는 15세의 소년이다.


아마 파리에서 어느 정도는 유명한 이름이지 않을까. 모델이라는 직업상 당장 거리에 나가면 나를 알아보고 힐끔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얼굴을 붉히며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무언가를 하면 대단하다고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고, 그럴 때마다 다들 내게 아버지를 닮았다고 찬사를 보내며 대단한 사람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자인데다 잘생기고 뭐든 이룰 수 있는, 겉으로 보이는 나는 무척 완벽한 사람이겠지. 나 자신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기대해주는 것에 감사하고 그만큼 노력하고는 있지만,그런 삶이 아예 답답하지 않느냐고 묻느냐면 서슴없이 NO를 외칠 수 없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뭐 하나 모자랄 것 없어뵈는 삶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거기에 내 의지라곤 거의 없었으니까. 눈에 띄는 건 물론 좋아하지만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안다. 주위의 시선들과 더불어 아드리앙 아그레스트라는 이름의 무게까지. 가끔 그 이름의 무게가 너무 벅차다.


사실 내 삶은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꽤나 어처구니 없을지도 모르는 이유로 가득하다. 모델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원하시니까. 스케줄에 쫓기고 가끔 힘들 때도 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는 건, 늘 완벽한 모습만을 보이려고 하는 건 그래야 아버지가 조금이나마 나를 돌아봐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들 나보고 특별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그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며 친구를 사귀고, 생일이 되면 친한 친구들을 불러모아 파티를 하고, 주에, 아니, 달에 한 번쯤은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며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일상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고 그저 '나'로서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대단하지 않아 보이지만 내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바란다고조차 말할 수 없다.


아버지가 원하지 않으시니까.

아버지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묵묵히 걸어나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버지는 변했다. 예전에도 바쁘고 엄하신 분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지금의 아버지에게서는 벽이 느껴진다. 서릿발같은 차가운 눈동자 앞에 서면 불길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게 된다. 조금씩 바닥으로 내려간 시선 끝에 보이는 아버지의 구두를 빤히 응시했다. 반질반질하고 윤택이 나는 새하얀 구두는 진열장 안에서 막 꺼내온 것처럼 깨끗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만 같은 구두에 새삼 거리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아주 원망하지만도 못하는 내 자신에 실소가 터진다.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련하다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사라지신 후로 아버지가 예전같지 않아진 건 사실이지만 나를 과할 정도로 싸고도는 것도 사실이니까.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같이 생활해온 나는 잘 알고 있다. 원체 엄하시니까 걱정을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거겠지. 그런 정황을 보면 뭔가 위험한 일이라도 있나? 싶으면서도 가슴 한 켠에 움트는 서운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불이 꺼져 있는 어두운 저택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그 앞으로 보이는 것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한 침묵 뿐이다. 어둠이 잔뜩 깔려 있는 것처럼 새까맣게 맨들거리는 바닥에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작게 갈린 뾰족한 어둠들이 내 발바닥에 박히는 것만 같았다. 날카로운 조각들은 천천히 내 발에 피멍을 새기고, 멍울진 상처들은 내 심장으로 타고 올라오며 따끔거리는 고통을 남긴다.


아픈가? 모르겠다. 이미 어느 정도가 아프고 덜 아픈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내 마음은 무감각해져 있었다. 지긋지긋했고, 그래, 외로웠다. 홀로 식당에 앉아 밥을 먹고, 말할 상대도 하나 없는 긴 하루를 보내고, 아무도 없는 저택으로 돌아와 애써 괜찮다고 자위하며 외로운 밤을 지내는 건.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도 못하는 것이 나의 모순이었다.


가끔, 나는 내 손과 발에 하얀 실이 묶여져 있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여기는 무대 위.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라는 인물의 삶을 배경으로 한 연극. 인형사의 의도에, 대본에 따라 무대 위로 걸어나와 춤추는 인형들.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건 실에 매달려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는 나. 그 모습을 상상하다보니 작게 실소가 터졌다. 그 말대로다. 누군가가 정해준 길만을 걸어가는 내가, 누군가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는 인형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 실의 끝을 쥐고 있는 건 아버지도, 나를 평가하는 무수히 많은 이들도 아니었다.


그 실을 잡고 있는 건 바로 나였다. 자유롭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과 반대되는 또 다른 자아, 애정에 목말라있는 어리고 어린 작은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부여한 이 이름에 책임을 느끼면서도, 이렇게라도 사랑받고 싶어 매달리는 내 안의 어린 부분이 지금의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더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이 실을 놓치면 어떻게 될까? 실이 끊어진 인형은 다시 제 발로 일어서서 걸어갈 수 있을까? 만약 그게 아니면? 이제껏 쌓아왔던 그 많은 것들이 모두 '아드리앙 아그레스트'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면?


그럼, 실을 끊은 뒤의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이름을 버린 후의 나라는 존재는 과연 누군가의 애정을 받을 만한 사람인 걸까. 실을 끊어버린 뒤에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정말로 인형일 뿐이었다면. 완벽한 외피 속에 감춰진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에 다들 실망하고 멀어진다면 어떡하지. 덜컥 몰아치려는 두려움을 애써 잠재웠다. 그럼에도 나를, 내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들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겁이 났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기에,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음 속에 피어나는 의문들을 애써 외면하며 그저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때,

나는 그녀를 만났다.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태양은 환했으며, 가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사실 날씨와는 별개로 마음은 꽤나 우울했다. 아버지와의 저녁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막 받았던 순간이니까. 기분 전환 겸 산책이나 나가야겠다 생각하고 밖으로 나왔다. 살짝 눈을 내리깔고 길을 걸어갔다. 먹구름처럼 마음을 가득 뒤덮은 실망감을 애써 털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만 잊어버리자 생각하고 그냥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을 뿐이었는데, 고개를 위로 올리자마자 무언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붉게 빛나던 한 소녀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가던 그 순간을, 아마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공중을 도약하며 날아오르는 붉은 가면을 쓴 소녀. 한 순간이었지만, 꽤나 독특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소녀에게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째서였을까? 제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소녀의 선명한 시선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감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날 파리에는 악당의 출현과 더불어 레이디버그라는 영웅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뉴스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게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걸고 악당들과 싸우는 그녀는 무척이나 자유롭고 그만큼 꾸밈이 없었다. 어디서 왔는지, 그 가면 뒤에 누가 숨어 있는지 모르는데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가슴 한 구석이 이상하게 술렁거리곤 했다. 그녀에겐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내가 정말로 손에 넣고 싶었지만 붙잡지 못했던 것들. 자유, 신념, 그 모든 것들보다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


언젠가 히어로 일이 힘들지 않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악당들을 상대하는 일은 솔직히 시간도 많이 들거니와 무척 번거롭다. 지겹지 않느냐고 물어봤을 때,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곧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지겹지. 넌 이게 안 지겨울 거 같애? 가끔 정말 나가기 싫을 때도 있고. 누군가 대타라도 뛰어줬으면 좋겠다니까."


정말 대놓고 말하는 모습에 솔직히 좀 놀랐다.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그녀의 눈빛은 무척 진지했고, 조금은 음울했다. 밝고 강하기만 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도. 하지만, 놀라는 내 얼굴에서 눈을 돌리며 앞을 쳐다보는 푸른빛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았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한 그녀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약속했으니까.”


이미 하기로 한 거,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해 보고 싶다고 웃으며 돌아보는 레이디버그의 얼굴을 나는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내게 무엇이 부족했던 건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건 바로 용기였다. 자신의 선택에 긍지를 가지고, 힘들어도 어려워도 후회하고 돌아보기보단 앞을 내다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는 올곧은 정신. 나와는 전혀 달랐다. 선택할 수 없는 삶을 답답하게 여기면서도, 미래가 두려워 그런 불안조차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움츠리기만 하는 자신의 비겁함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창피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푹 고개를 숙였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겁쟁이는 나였다. 내딛으면 분명 길이 있음을 확신하면서도 절벽으로 떨어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아가지 못하는 나. 주어진 현실이 답답하면서도 사실 그런 현실조차 더 최악으로 치달을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당당하고 올곧으면서도, 힘들 때는 솔직하게 제 마음 한 켠을 내보일 줄 안다. 억지로 강한 척 하지 않아. 힘들고 어려워도 그 길로 나아가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다. 늘 망설이고 고뇌하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기만 하며 남의 손짓에 따라 흔들리기만 하는 나와는 천지차이다.


물론 이건 계기였을 뿐이다. 처음에는 그 강인한 성격에 반하고, 부드럽게 웃는 미소에 두근거렸으며 나를 향하는 무심한 시선까지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모든 모습이 좋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도 그 작은 온기 하나에 떨리는 내 심장을 과연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의 그런 강함이 부러웠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본 모습을 내보이기 두려운 건지도 몰라. 블랙캣으로 만날 때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그녀 앞에 설 수 있으니까. 가면 뒤의 완벽하지만 초라한 내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온갖 껍데기로 가득한 본래의 내 모습을 너에게만은 내비치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존심이었다. 좋아하는 네 앞에서는 최대한 멋진 사람이고 싶다는 나의 이기심.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는 폼을 잡고 싶은 법이잖아.


아마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변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네가 반할 정도로 아주 멋진 사람이 되어도 모자랄 판에 제 앞가림 하나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멍청이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너는 너무 눈이 부셨고, 그런 너를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마이 레이디, 나의 사랑스러운 무당벌레 아가씨. 나는 어떡해야 좋을까? 너의 곁에서 함께하고 있어도, 지금 네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라고 자부함에도 더욱 초조해지기만 하는 이 마음을 어째야 좋을까.


자유롭고 싶다. 진심으로. 나를 얽어맨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본연의 모습으로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조금만 힘을 주면 끊어버릴 수 있을 듯한 얇은 실들의 무게가 내 팔다리를 짓누른다. 손을 흔들어 가볍게 털어냈다. 하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실들은 책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시금 내 신체와 이성을 옭아맨다. 그럼에도 나는 천천히, 계속해서 몸을 흔든다. 이 실을 끊어낸 뒤, 적어도 더 이상 예전과 같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좀 더 희망찬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변하고 싶은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너에게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어서,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다.


마이 레이디. 내게 있어 너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명제와 같아.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열렬하게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배웠으니까. 나를 밀어내는 너의 손길조차 애틋할 정도로 네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는걸. 그러니까 노력할게. 기다려줘. 당당하게 네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그래서 언젠가,

인형이 아닌 사람으로서 네 앞에 설 수 있도록.











==


안녕하세요. 리네입니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니까 정말 손이 안 움직이네요 흑흑ㅠㅁ ㅠ… 예~전에 레이디버그 전력 주제 중 [인형]이라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쓰고 싶었던 내용을 가볍게 끄적여보자! 라는 마음이었는데 어쩌다 이리 길어졌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내용은 간단히 말해서 '실을 끊은 마리오네뜨' 입니다. 제목을 저렇게 정하려다가 스포성이 짙어서 그냥 마리오네뜨라 명명했습니다! 인형=아드리앙 느낌인데, 아드리앙이 처음으로 제 팔다리의 실을 끊어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레이디버그라는 설정이에요. 아드리앙이 왜 레이디버그를 좋아하게 되었을까를 좀 고민하다가 제 마음대로 창작해 보았습니다. 솔직히 쓰면서도 이걸 어떻게 이해가 되게 적지…라는 고민을 무지 많이 했고, 다른 연출도 생각해봤지만 그걸 쓰려다간 이미 써둔 걸 다 엎어야 하는 실정이라(…) 그냥 이걸로 밀고 가기로 했습니다!^ㅁ^ 처음에 쓰기로 작정했을 때는 몰랐는데 이게 감정선을 풀기가 너무 어렵더라구요. 덕분에 문단 배치를 좀 고민했습니다.


아드리앙의 상황은 웹피소드에서 아드리앙 파트를 참고했습니다:)


아무래도 본편 기반을 주로 쓰려다보니 떡밥이 없으니까 쓰는 주제도 다 거기서 거기가 되어버려서ㅠㅠ 좀 색다른 게 적어보고 싶어져서 간단히 적어봤습니다. 아하하 늘 아드리앙을 굴리는 것에 매우 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음엔 좀 달달한 거 적어줘야겠어요 언제 칼들고 쫓아올 거 같아 무섭네요’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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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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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파이어 AU 썰 일부. 프리드가 뱀파이어, 은월은 인간.





[프리은월] nemo nisi mors








『To. 은월

안녕하세요, 은월?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인 거 같네요.


이렇게 편지를 받고 놀랐을 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그 때 너무 많은 신세를 져서 언제 꼭 감사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팬텀도 동의했구요.


결론부터 말하면 저희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국경을 넘으니 확실히 추격은 많이 줄어들더라구요. 물론 한 곳에 정착하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팬텀 성격에 그럴 리도 없고, 저도 새로운 세상을 더 많이많이 보고 싶으니까요.


지금 저는 비공정 안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빛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무척 예뻐요. 팬텀이 자기 비공정을 그렇게 자랑하던데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 거 같아요.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해요. 아, 오해하지 말아요. 성녀로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던 건 아니랍니다. 하지만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어디든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지금의 삶이 저에게는 더 잘 맞는 거 같아요. 


그 때 도와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당신이 저를 알아보고 숨겨주지 않았더라면, 전 지금쯤 다시 그 작은 방에 갇혀 눈물을 흘리고 있었겠죠? 팬텀도 말은 안 하지만 고마워하고 있어요. 쑥스러움을 타는 것뿐이에요.


맞다, 은월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아직도….』



“그건 뭐야?”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은월은 힐끗 옆을 돌아보았다. 언제 방 안으로 들어왔는지 프리드가 그를 향해 싱긋 웃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가려져 있던 달빛이 창문 너머로 흘러들어와 바닥에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원래라면 이렇게 일찍 들어올 리가 없는데 오늘은 볼일이 빨리 끝난 모양이다.


천천히 제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프리드에 은월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다섯, 셋, 둘, 하나.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리는 은월의 곁을 스쳐지나간 프리드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침대 앞에 다가섰다. 입고 있던 망토를 천천히 벗어내리는 프리드에게서 다시 시선을 거둬들인 은월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리아가 보낸 편지.”

“정말? 뭐라고 그러는데? 무사히 잘 도망갔어?”

“그렇다고 하는군.”



『아직도 솔직하지 못하고 있나요?』



“아아, 그거 다행이네.”



망토를 손에 들고 침대에 털썩 걸터앉은 프리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솔직히 팬텀 녀석은 무소식이 희소식인 타입이라 말이야. 어쩌다 연락이 오는 일도 드물어서. 이렇게라도 소식을 받으니 안심이야.”

“…그런 것치곤 여기에 꽤 많이 드나들지 않았던가?”

“그건 아리아랑 만나고 난 후였을 거야. 아리아를 만나기 전에 서로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던 게 언제였지? 10여 년 전이었나…. 뭐, 아리아 때문에 이 지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 가끔 오랜 친구가 떠올라서 날 찾아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하하 사람 좋게 웃는 프리드에게 은월은 말했다.



“꽤나 냉정하군.”

“뱀파이어의 특성이지. 우리 정도면 그래도 꽤 자주 연락하고 사는 편이었다고.”



뱀파이어, 그 말에 은월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에 프리드는 그저 웃으며 조용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황량할 정도로 넓은 침실에는 소파와 탁자, 침대 하나를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침실의 벽에는 온갖 신기한 문양들이 그려진 주술진이나 뱀파이어와 관련된 벽화의 일부를 재현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붉은색 카펫으로 가려져 있지만, 침실의 바닥에는 온갖 문양들이 빼곡히 적힌 거대한 주술진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이 집을 보호하기 위한 주술의 핵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섬뜩한 감각에 프리드는 한쪽 손을 들어 살펴보았다. 살짝 떨리고 있는 손가락을 보며 그는 쓰게 웃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여기 있어? 오늘은 일찍 자라고 했잖아.”



만월이라 그런지 감각이 한층 더 예민했다. 이래서 일찍 자라고 했던 건데.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라 생각하며 프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 프리드의 목소리에도 은월은 말이 없었다. 망토를 옆에 있는 의자에 걸쳐놓은 뒤 프리드는 몸을 돌려 은월을 상냥히 쳐다보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을 느끼고도 은월은 구태여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시선을 계속 편지에 붙박고서 그는 무언가를 망설이듯 몇 번 입을 우물거렸다. 그런 은월의 모습에 프리드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무슨 일이지? 물어보려는 찰나 은월이 입을 열었다.



“프리드.”

“왜?”

“…넌 날 어떻게 생각하나.”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무슨 말을 꺼내는 걸까.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프리드의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뭐가 어떻게야. 친한 친구로서….”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똑똑한 네가 모를 리 없어.”



프리드를 돌아보는 은월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일렁이는 눈빛이 그의 동요를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걸 본 프리드의 입가에서 웃음이 점차 엷어졌다.



“…무슨 대답을 바라는데?”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묻는 프리드에게 은월도 침착하게 말했다.



“네 진심.”



그 말을 끝으로 은월은 입을 꾹 다물고 프리드를 바라보았고, 프리드도 굳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탐색하는 것처럼 그저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나 눈빛은 매우 상이했다. 겉으로 보기엔 차가워 보였지만 감정적인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은월과 달리, 사람 좋게 웃고 있었지만 프리드의 눈빛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 건조함 뒤에 숨어있는 어둡고 깊은 고뇌가 프리드의 신경을 뒤흔들었다. 날이 날이라서 그런가. 은월의 눈동자를 한참 바라보던 프리드가 쓰게 웃었다.



“그 눈. 오랜만이네.”

“뭐?”

“나한테 네 피를 마셔도 좋다고 했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었지. 너.”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외양도 성격도 많이 변했는데, 왜 이런 점은 그대로인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잠깐 옛일을 회상하는 프리드에게 은월은 말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

“알아, 그래서 곤란해.”

“뭐가 곤란하지? 난 너에게라면…!”

“그게 곤란하다는 거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은월을 보며 프리드는 힘없이 웃었다. 쿨해 보이지만 사실 고집이 세고, 무엇에도 집착이 없어 보이지만 한 번 정한 일엔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는 너. 예전부터 나는 은연중에 그런 너를 무서워했던 것도 같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너에게 휩쓸려가는 내가 두려운 것일까.



“네게 나는 곤란한 존재인가? 그저 그 뿐?”



진지하게 묻는 은월에게 프리드는 잠깐 조용했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꼭 들어야겠어?”

“그래.”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그 말과 함께 프리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은월에게로 다가가는 프리드의 발걸음은 차분하고 여유로웠다. 그 속과는 다르게도. 은월의 앞에 선 프리드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시선을 피하지 않는 은월의 눈동자가 살짝 실룩였다.



“난 네 생각보다 훨씬 끈질기고 위험한 존재라구. 너에게 보이는 면만이 나의 전부는 아니야.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넌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어질지도 몰라.”

“…어떤?”

“뱀파이어는 언제나 갈증에 시달리거든. 네가 당장 피를 제공한다고 끝나지 않을 오래고 깊은, 그런 욕망 말이야.”

“….”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언젠가 이런 내가 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너 자신조차 집어삼키려 들지도 모를 일이야. 그런데도….”



넌 그걸로 괜찮은 거야?


싱긋 웃으며 말을 거는 목소리는 참으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럼에도 어딘지 오싹해지는 감각에 은월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 자신의 대답 하에 따라 무언가 달라지리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 제가 거절의 의사를 표한다면, 프리드는 더 이상 자신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남자니까.


하지만….


꿀꺽 침을 삼킨 뒤 은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아프고 힘든 건 싫지만, 너와 헤어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런 건 싫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보다는 네 입에서 떨어지는 거절의 한 마디가 더 무서운 걸.


결심했다는 듯이 굳은 표정을 짓는 은월을 바라보는 프리드의 눈동자가 무언가의 감정으로 번뜩였다.



“그럼, 후회하지 마.”



뭐라고 해도 이미 늦은 거니까.


그 말과 함께, 프리드의 손이 은월의 가슴을 툭 밀었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넘어진 은월의 눈동자가 천장을 보며 데록데록 굴러가다가, 그 위를 가리는 프리드의 얼굴에 뚝 정지했다. 검청색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퍼져 붉은 카펫 위를 가득 수놓았다. 마치 박제된 나비처럼.


프리드가 물었다.



“무서워?”

“…아니.”



어둡게 빛나는 프리드의 눈동자를 멍하니 응시하던 은월이 살짝 미소지었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네 것이라고.”

“…너는 물건이 아니잖아.”

“그런 너라서 내가 널 포기하지 못하는 거야.”

“….”



말이 없는 프리드에게 은월은 웃으며 말했다.



“내 피를 마셔.”

“….”

“걱정 마. 네 손에 죽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행복하겠지.”

“그런 소리는 관두지. 날 혼자 두고 떠나겠다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 그저 마지막까지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표현이 격한 건 아니었지만, 정말 기쁘다는 듯이 웃고 있는 은월의 얼굴을 본 프리드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프리드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하, 하하. 작게 실소하던 프리드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그는 곧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정말로 슬퍼 보이는 그의 표정에 은월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리드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누군가한테 집착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는데.”

“프리드…?”

“미안하다.”



그 말과 함께 프리드는 은월의 목을 물어뜯었다. 윽, 비명을 삼키면서도 가만히 있는 은월의 몸을 끌어안으며 프리드는 더욱 깊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프리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 놓아주지 못하는 건 오히려 나야.


바보같이 왜 계속 내 곁에 남아 있었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망갔으면 그래도 괜찮았을 지도 모르는데. 너를 욕심내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이젠 되돌릴 수 없어. 설령 먼 미래에 네가 나를 원망하게 된다고 해도, 도망가고 싶다고 말해도 물러서지 않아. 듣지 않을 거야.


프리드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



앞의 팬텀아리랑 같은 배경이에요! 프리은월은 좀 썰풀이를 해야겠네요.


일단 프리드는 뱀파이어고, 은월은 아주 어릴 때 프리드에게 주워져서 길러졌어요. 물론 은월은 인간입니다. 프리드가 은월을 주운 건 변덕이랄까. 나이를 먹고 자라면서 은월은 변하지 않는 프리드의 모습에 그가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요. 그가 뱀파이어라는 걸 깨달은 건 청소년 시기. 지금 은월은 20대 초반입니다 ㅇㅇ


프리드한테 은월이 왜 내 피는 안 마시냐고 물어본 적 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요. 그 때 프리드는 놀라서 마시던 커피를 뿜어버렸었죠. 물론 그 얘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피를 마시진 않았어요. 뱀파이어지만 프리드나 팬텀은 흡혈 자체에는 별 흥미가 없어요. 참고로 뱀파이어가 특정 누군가의 피에 집착한다는 건 그 상대에 집착한다는 말과도 똑같습니다.


프리드랑 팬텀은 오랜 친구 사이고요, 친구라고는 해도 수십 년에 한두 번 얼굴 보는 사이였어요. 팬텀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프리드는 한 곳에 붙박이는 걸 좋아하니까요. 성향이 다르지만 성격은 비슷해요. 참고로 프리드가 은월 주워온 거 알았을 때 팬텀은 엄청나게 반대를 했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늘리지 말라고요. 근데 얘가 아리아에게 치인 뒤로는 이제 프리드가 팬텀을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함정(...)


팬텀아리가 도망칠 때 프리드네 집에 들렀던 적이 있어요. 당시 아리아가 부상을 좀 입었어서 한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추격이 오기 전에 재빨리 떠났지만요. 둘은 팬텀이 가진 비공정으로 갔고 지금은 잘 살고 있습니다^p^ 비공정이 이 지역 밖에 있었기 때문에 아리아를 데리고 거기까지 가야 했거든요. 중간에 일이 생겨서 숲을 헤매던 아리아를 은월이 발견했었구요 ㅇㅇ


뱀파이어는 오랜 세월을 사는 종족이라 무언가에 쉽게 집착하지 않아요. 한 번 집착하면 곧 죽어도 놓지를 못해서. 그래서 프리드도 은월에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집착하게 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뭐 그런 내용...?


제목인 nemo nisi mors은 라틴어로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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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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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파이어 AU 썰 일부예요! 아리아가 성녀고 팬텀은 뱀파이어.




[팬텀아리] 천국의 정의






“팬텀.”



갑작스런 부름에 팬텀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런 팬텀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아는 그저 하늘 위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성당에서 가장 높은 곳,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정돈된 테라스의 난간을 잡고 있는 아리아의 손이 살짝 꿈틀했다. 선선한 바람이 밤의 밀회를 훔쳐보러 간간히 들른다. 달빛 아래서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이 아리아의 움직임을 따라 사락거렸다.


그 모습에 순간 넋을 잃었음에도, 팬텀은 언제나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왜?”



장난스레 말을 받아치는 팬텀의 목소리가 살짝 의아한 기색을 띄었다. 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임에도 평소와는 다르다 느껴지는 건 어째서인지.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여자로서.”



돌아오는 대답에 보랏빛 눈동자가 저도 모르게 깜빡였다. 가볍게 생각하기엔 어째 진지했고, 아주 진지하다고 보기엔 어딘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도 그런 자신이 우스워진 팬텀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나름 사람의 속내에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네 앞에서는 이따금 자신이 없어지는 건지 모르겠군.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까. 물론, 이유는 알고 있다. 내 마음은 명확하니까. 문제는 너.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아리아는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팬텀은 짧고도 긴 생각을 마치고 놀리듯이 말했다.



“뭐, 생긴 건 여자같긴 한데 말이야.”

“와, 너무하네요.”

“근데 그건 왜?”

“좋아하는 남자가 돌아봐주질 않아서 말이죠.”



태연한 그 한 마디에 팬텀의 어깨가 아주 살짝 흠칫거렸다. 갑자기 조용해진 팬텀에 아리아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팬텀이 선수를 쳤다.



“너,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어?”



그의 반응은 덤덤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딱히 흥분한 기색도 없었거니와, 그렇다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감정했다. 방금 전의 웃음기는 어디로 가져다 버린 건지 살짝 딱딱해진 팬텀의 목소리에도 아리아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뭐야. 있으면 안 돼요?”



치사하게. 그러면서 웃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툭 말을 던졌다.



“…넌 성녀잖아.”

“그 전에 인간인걸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덧붙이는 아리아의 목소리가 퍽 장난스러웠다. 명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깊어지는 밤과 함께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아리아는 살며시 옆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표정을 굳히고 있는 팬텀의 옆얼굴에 아리아가 놀라기도 잠시 팬텀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좋지 않아.”



살짝 눈가를 일그리며 싱긋 웃는 팬텀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어딘가 달랐다. 깊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동자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다 겨우 멈춰섰다.


이상하다. 분명 얼굴은 웃고 있는데, 왜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지지?



“어째서요?”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그 자리에 서서, 똑바로 자신을 직시하는 푸른빛 눈동자에 팬텀은 피식 웃더니 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을 한 줌 손에 쥐어 제 앞으로 가져온 팬텀이 그 위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에 놀라 그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아리아를 팬텀이 살짝 올려다보더니, 이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널 정말 원하는 누군가가, 널 훔치려들지 모른다구?”



여유가 넘치는 얼굴과 달리, 절대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는 팬텀의 손가락은 견고했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감정들이 입 밖으로 내뱉으니 더욱 선명해지고 명확해졌다.


나는 너를 원하는 걸까.


어째서? 바래서는 안 되는 존재라 더욱 탐이 나는 걸까.


괴도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 싶으면서도 그게 아니라는 대답이 곧장 떠올랐다. 괴도이니만큼 희귀한 보물에 수집욕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니다 싶은 물건에 손을 댄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사실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팬텀은 속으로 자조했다. 아무래도 내게 너는 정말 특별한 지도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꺼내면 네가 곤란해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내 이기심을 채우고 있는 걸 보면.


그녀 입장에선 충분히 놀랄 만한 이야기임에도 차분하게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는 아리아에 팬텀은 답답해졌다. 움직이기 시작하는 아리아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팬텀의 눈동자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를 들면?”

“응?”

“예를 들면, 누가요?”



궁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리아의 모습에 팬텀은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진짜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건가? 재밌다는 듯이 미소짓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어느 쪽일까. 살짝 한숨을 내쉬며 팬텀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너….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묻냐.”

“짐작가는 건 있지만. 그건 제 짐작일 뿐이니까요.”



꼭 듣고 싶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다시 물었다.



“왜 그게 듣고 싶은데?”

“뻔하잖아요. 팬텀도 의외로 눈치가 없군요?”

“방금 한 이야기랑 관련 있어?”

“…글쎄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저 얼굴이 성녀가 아니라 악마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성녀. 그 한 단어에 팬텀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리고 새삼 아리아와 자신의 입장에 대해 떠올랐다. 싸해진 그의 얼굴에 고뇌가 떠올랐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녀석은 성녀다. 헌터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성당의 최고 무녀이자 성녀라고 불리는 존재. 자신은 그저 뱀파이어이고 일개 괴도일 뿐이지만, 아리아는 평생 성녀로서 자라온 몸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또 그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이름 하나에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삶. 그래서 그녀는 성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제껏 이 작은 성 안에서 외로이 살아왔다. 그런 아리아에게 자신이 이런 욕심을 부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렇게 얽히게 된 것만 해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더한 걸 바라도 되는 걸까.


팬텀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아리아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놓아준 팬텀이 망토를 뒤로 젖히고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에 깜짝 놀라서 그에게로 다가오려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한 손을 내밀고서 싱긋 웃었다.



“괴도는, 가지고 싶은 것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직업이라서요.”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단 하나.



“팬텀…?”



정중하게 내밀어진 손을 멀뚱히 바라보는 아리아에게 팬텀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고귀하신 성녀님.”

“….”

“저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 주시겠습니까?”



너는 성녀고 나는 뱀파이어. 서로가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다. 언제나 햇살이 쏟아지는 너의 세계와 달리 나의 세계는 칠흑같이 어둡고 조용한 음지의 공간이다. 세간에서 보면 내가 너를 타락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 빛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너를 끌어들인 내 존재는 모르는 이들에겐 두고두고 악마라 회자되겠지.


그럼에도 나는 네게 손을 내민다.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팬텀의 눈동자를 아리아는 똑바로 응시했다.



“전, 지옥에 갈 생각은 없어요.”



그 말에, 팬텀의 한쪽 눈가가 씰룩거렸다. 그럼에도 덤덤하게 자신을 향하는 팬텀의 얼굴을 본 아리아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살짝 한 걸음 다가온 아리아가 한 손을 내밀어 제 앞에 놓인 팬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변함없는 표정과 달리 살짝 동공이 커지는 팬텀의 눈동자를 보며 아리아는 싱긋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당신과 함께라면 그 어디든,”



내겐 천국일 테니까.






===


일삼님과 풀었던 뱀파이어 썰 일부를 간단히 적어봤습니다. 팬텀아리 고백 장면! 여기서 아리아는 헌터들의 중심에 있는 몇 개의 커다란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 중 가장 큰 곳에 머무는 성녀구요 그 자체로 신의 상징이라 불리는 존재예요. 그리고 팬텀은 뱀파이어이자 괴도입니다.


이 다음엔 둘이 탈주해요. 중간에 프리드네 집에 들르기도 할텐데 아마 무사히 탈주해서 나름 행복하게 잘 살 거예요 ㅇㅇ 이 때 아리아가 은월이랑 좀 친해져서 서로 편지 주고받는 사이가 되기도 하고요!


원래 이 썰이 팬텀아리랑 프리은월 둘 다 있는데 프리은월 마음 확인은 나중에 적을게요 지금은 자야겠다ㅠㅠㅠ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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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전력. 안나님과 2인 전력!





[아드마리]

Merry Christmas






“마리네뜨.”



티키가 조용히 그녀를 부르자, 마리네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원피스를 손에 들고 있던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눈가를 초승달처럼 곱게 휘고서 살짝 빨갛게 홍조를 띠고 있는 얼굴은 어딘지 들뜬 것처럼 몽롱했다. 히죽 웃고 있는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아, 눈빛은 왠지 초조한 것 같기도.


그런 마리네뜨의 앞에는, 마구 펼쳐진 채로 침대 위를 수놓고 있는 옷들이 있었다. 몇 시간 째 그 앞에서 계속 고민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티키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언제까지 고르고 있을 거야?”

“그치만그치만, 아드리앙과의 데이트라구!!”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들고 있던 옷을 꼭 끌어안고, 황홀한 듯이 얼굴을 붉히는 마리네뜨의 머릿속에서는 다시 망상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아드리앙이 먼저 제안한 데이트였다. 말하면서도 쑥스러웠는지 머리를 긁적이는 아드리앙 진짜 귀여웠는데. 아드리앙이 깜짝 놀랄 만큼 예쁘게 입고 가야지. 그럼 아드리앙은 분명 오, 마리네뜨. 너 오늘 정말 예쁘다라고 말하며 엄청 근사하게 웃어줄 거야.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 오늘 네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워! 라고 말하면서 키, 키, 키스를……!!



“마리네뜨!!”



헉. 저도 모르게 입술을 내밀고 있던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열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망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마리네뜨의 주변을 빙빙 돌던 티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물론 데이트야 좋지만, 빨리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슬슬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있잖아?”

“앗, 벌써?!”



어두워진 창밖을 휙 쳐다보다가, 탁상시계로 시선을 돌린 마리네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침대에 널려 있는 옷들을 두루 훑어보던 마리네뜨는 결심한 듯이 옷들 몇 개를 집어들었다. 다 입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던 마리네뜨가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음, 역시 이걸로 해야겠다.”



검은색의 상의와 하얀 반바지, 모자가 달린 붉은빛의 산타 케이프를 몸에 걸친 마리네뜨의 모습은 딱 보기에도 발랄하고 예뻐 보였다. 살짝 푸른끼가 도는 흑발이나 하얀 얼굴이 빨간 케이프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좋아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은 곧 다가올 데이트에 대한 기대로 밝아졌다. 그럼에도, 마리네뜨를 쳐다보는 티키의 표정이 꼭 딸을 물가에 내놓은 어머니를 연상시켰다.



“그렇게 입고 나가면 춥지 않을까?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괜찮아. 이 케이프 생각보다 꽤 따뜻하다구.”



마리네뜨는 실실 웃었다. 사실 감기에 걸린다고 해도, 아드리앙 앞에서는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사실 그의 입에서 예쁘다는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좋아서 승천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너무 기뻐서 방방 뛰어다니느라 더워질지도.


슬슬 나가지 않으면 차가 막혀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거 같다. 재빨리 물건을 챙기고 가방을 옆에 매고서 마리네뜨는 웃었다. 



“그럼, 나가자. 티키.”




*


파리의 거리는 언제나보다 더 북적거렸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꽤나 분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는데, 약속 장소인 샹젤리제 거리 근처로 점점 다가갈수록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도로가를 꽉꽉 채운 자동차들의 클락션 소리마저도 묻어버릴 만큼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들이 참으로 활기찼다. 다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곳곳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서 산타 복장을 하고 어깨에 진 자루에서 선물을 나눠주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 보였다. 아이들이 오밀조밀하게 몰려서 선물 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은 꽤나 흐뭇한 장면이었다. 얼굴에 하얀 턱수염을 붙이고 장난치듯이 웃는 산타들을 가만히 쳐다보던 마리네뜨는, 곧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새까만 전선들이 얇게 휘감겨 있었다. 그 위에 매달린 불빛들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 조용하게 그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다가올 밤을 위해 맹렬하게 타오를 준비를 하는 것처럼.


길가에 세워진 노점상들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가게들 문 위에 걸려 있는 예쁜 크리스마스 화환들에 저도 모르게 눈길을 주다 보면, 곧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안쪽에도 시선이 가게 된다. 개중 어느 가게는 정말로 예쁘게 꾸며져 있어 홀린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 밖으로 나오는 마리네뜨의 손에는 향초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빨간색과 초록색. 사버렸다- 고 중얼거리면서도 마리네뜨는 피식 웃었다.


아드리앙한테 주면 좋아할까?


걔야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겠지만, 그래도 모처럼 주는 선물인데 거절하지는 않겠지.


향초를 쳐다보다가,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던 마리네뜨의 눈동자가 몇 번 깜빡거렸다. 곧 다시 기분 좋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던 마리네뜨의 주변을 서늘한 바람들이 훑고 지나간다. 화륵 공중으로 휘날리는 붉은색 케이프가 마치 깃발처럼 바람을 따라 춤을 춘다.


약속 장소는 샹젤리제 거리 근처에 있는 커다란 광장이었다. 여기서 만난 뒤 같이 거리를 걷기로 예정했었다. 광장 안에 있는 커다란 가로수 아래에 살며시 기대어, 마리네뜨는 자꾸만 삐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려고 노력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아무렴 뭐 어떠랴. 티키와 대화하기에는 너무 보는 눈이 많았기에 심심해진 마리네뜨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런저런 망상을 떠올리다가, 꺄악 소리지르는 마리네뜨를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약속 시간이 되었다.


아드리앙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기다렸다. 약속 시간서 10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아드리앙에 이상함을 느낀 것도 잠시였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면서 마리네뜨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오지 않는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아드리앙에게선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봐도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소리만 반복해서 되돌아올 뿐이다. 겨울이라 벌써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바람이 점점 쌀쌀해지고 있었다. 서 있던 자리에서 작게 팔자를 그리며 돌아다니던 마리네뜨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결국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마리네뜨의 뒷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터벅터벅 인파를 비집고 힘없이 거리를 걸어가는 마리네뜨의 표정은 나오기 전과 달리 조금은 풀이 죽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운함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게 정말 소박맞은 아낙네 같았다. 차라리 오지 못하겠으면 전화라도 해주지, 전화까지 꺼두고 이렇게 바람맞히는 건 또 뭐냔 말이다.


아드리앙 앞에서는 아닌 척했었지만 사실 되게 많이 기대했었다. 사귄 이래로 그에게서 이런 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하물며 크리스마스는 연인들의 날이라잖아. 기대했던 건 자신뿐이었던 걸까. 그는 바쁘니까,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하려 애써도 축 처지는 몸은 어쩔 수 없다.


지금쯤이면 설마 광장에 도착했을까? 어차피 자신은 이미 나와버렸지만. 핸드폰도 꺼버렸다. 지금 기분으론 도저히 다른 애들이 보내는 크리스마스 인사를 받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이기적이긴 했지만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더 우울해진다. 그러다가 심통이 났는지 마리네뜨는 문득 자리에 멈춰서 크게 발을 구르며 소리질렀다.



“아드리앙, 이 바보!”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마리네뜨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입술을 깨물면서 짜증을 쏟아내는 마리네뜨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솔직히 짜증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신기하지 않은가. 데이트를 신청한 건 그 쪽인데 이렇게 바람을 맞히다니!


마구 화를 내던 중,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자신을 흘끗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리네뜨는 뻘쭘하게 웃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화를 내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물 먹은 스펀지처럼 더더욱 우울해진다.


‘나’를 그렇게까진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가 반했던 건 레이디버그니까. 변신하고 있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날 좋아한다고 해줬는데. 결국 그런 식으로라도 서로 옆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역시 운명이라고 말하며 아드리앙이 제 손을 꼭 잡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솔직히 그 때는 이게 과연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었는데, 나는 정말로 꿈을 꾼 걸까.


유독 시린 바람에 케이프를 꼭 붙잡고 몸을 떨었다. 추워서 그런 걸까. 자꾸 시야가 흐릿해진다. 나 안경도 안 끼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손에 들린 봉지 소리가 바람에 바스락거린다. 그에 더 서러워졌다.


만약 네 말대로 우리가 운명이라면,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너는 나를 찾아낼 텐데.


그 때였다.


사람들 사이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커다란 손이 마리네뜨의 팔을 세게 붙잡자, 깜짝 놀라서 뒤로 돌아서는 마리네뜨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방울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푸른빛의 시선 끝에 맨 처음 보인 색깔은 녹색이었다. 초록색 눈동자. 들고 있던 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딸꾹, 숨을 넘기는 마리네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어떻게.


아드리앙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확히는 정장 위에 검은색 외투를 입고, 패션쇼라도 했는지 평소와는 머리스타일이 좀 달랐다. 하지만 꽤나 황급히 달려왔는지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었을 머리카락은 마구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마리네뜨의 팔을 붙잡은 아드리앙이 하하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마리네뜨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 울어?”

“어….”

“미, 미안해. 촬영이 늦게…, 핸드폰이 망가져서….”



나중에 만나면 따지려고 했는데, 화내려고 했는데.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는 아드리앙의 표정이 정말로 미안해 보여서, 마리네뜨는 멍하니 그런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리저리 굴러가는 초록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정말 당황했는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정말 화났나 싶어 눈치만 보고 있는 아드리앙을 보던 마리네뜨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펑, 하는 굉음과 함께 광장 쪽에서 커다란 먼지구름이 일었다. 동시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그들의 귓가에 꽂혔다. 그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도 놀랐는지 그쪽 방향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뭐야? 뭐야?!”

“저기 무슨 일 났나?”



점점 커져가는 수군거림 사이를 벗어난 두 사람이 각기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골목 사이에서 반짝 빛이 빛나더니 변신한 두 사람이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이야, 저거 참. 난리도 아니네. 눈가에 손을 올리고 멀리 내다보던 블랙캣이 장난스레 대꾸하자, 레이디버그는 피식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게. 또 어떤 사람이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에 저리 날뛰고 있을까~?”

“뭐야, 왜 내쪽을 쳐다봐?”



지레 찔리는지 몸을 움츠리는 블랙캣을 향해 가만히 눈짓하던 레이디버그가 손에서 요요를 꺼내, 근처 가로등으로 던졌다. 실이 팽팽하게 묶였는지를 확인하자마자 뛰어내리는 레이디버그에 블랙캣은 깜짝 놀랐다.



“먼저 간다!”

“야아, 같이 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광장으로 날아가는 레이디버그의 뒤를 블랙캣이 황급히 쫓았다. 볼멘소리를 던지고는 있지만,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레이디버그의 뒷모습을 보던 블랙캣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악당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하는 사람은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꼭 같이 파티하자고 약속해놓고도 집을 비우는 부모님에 서운하지 않을 아이는 없을 것이다. 나만 불행한 건 불공평하다며 세상의 모든 행복한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겠다고 소리치던 빌런은,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을 빼앗긴 것에 땡깡부리는 작은 아이였을 뿐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제 부모님에게로 뛰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던 레이디버그는 작게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건 모두 마찬가지구나.


그러고 보니 부모님. 레이디버그는 저도 모르게 블랙캣을 돌아보았다. 부모님에게 안겨 밝게 웃는 아이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퍽 쓸쓸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흐뭇해 보이는 게, 부모님과 같이 있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이를 보면서 만족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잠시 후 변신이 풀리자, 아드리앙과 마리네뜨는 약속했던 대로 같이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파리 시민들이 자부하는 만큼이나, 크리스마스를 맞은 샹젤리제 거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자동차나 사람이 많아 혼잡하긴 했지만, 개선문을 사이에 두고 도로 양 옆으로 웅장하게 세워져 있는 나무들은 마치 이 거리를 지키는 기사같았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휘감겨 있는 색색의 불빛들이 밤의 파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지나갈 때마다 보이는 가로수들에 열매처럼 매달려 있는 불빛들이 참으로 어여쁘다. 노랗게 빛났다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붉게 변하는.


앞서 가는 아드리앙의 뒤를 말없이 따라가는 마리네뜨의 몸에는 검은색 외투가 걸쳐져 있었다. 변신이 풀리고 난 뒤 마리네뜨의 차림을 보더니, 아드리앙은 잠깐 아무 말이 없다가 곧장 자신이 입었던 외투를 벗어 건네줬었다. 왜냐고 물으니 예쁘긴 하지만 추워 보인다나. 쑥스럽다는 듯이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는 아드리앙의 행동은 마리네뜨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예쁘다는 말을 들었으니 좋아야할 텐데, 신기하게도 생각했던 만큼 막 들뜨지는 않았다. 그냥, 마음이 따뜻해졌다. 자신을 배려해주는 행동이 기뻤다. 이런 외투를 입지 않아도, 저 한 마디만으로도.


고민하는 얼굴로 마리네뜨는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아드리앙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드리앙의 손을 향해서. 살짝 내밀었다가 다시 주저하고, 조금 더 뻗었다치면 흔들거리는 아드리앙의 손에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손을 뻗었다 거두는 것에 따라 마리네뜨의 표정도 마구 구겨졌다. 용기 없는 자신을 타박하면서 마리네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보 마리네뜨, 왜 이렇게 망설여? 명색이 우린 사귀는 사이잖아! 꺅, 내가 아드리앙이랑 사귄대! 아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연인끼리 손 정도는 잡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 그래도….


용기를 내어 손을 잡으려던 찰나, 갑자기 뒤돌아선 아드리앙에 깜짝 놀란 마리네뜨는 절로 뒷짐을 졌다. 하하, 뻘쭘하게 웃으며 하얀 치아를 드러내는 마리네뜨에 아드리앙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왜, 무슨 일이야?”

“아, 맞다.”



그제서야 용건이 생각났는지 아드리앙은 부드럽게 한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손.”

“응?”

“어…, 손 잡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마이 레이디?”



제게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아드리앙을 쳐다보다가. 잠시 멍해졌던 마리네뜨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가, 곧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렸다.



“응!”



제 손을 꼭 붙잡고 어린 아이처럼 미소짓는 마리네뜨를 지켜보다가, 아드리앙은 작게 웃으며 마리네뜨의 이마 위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드러난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 아드리앙의 행동에 마리네뜨는 순식간에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러니까, 지금, 지금…!!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개진 마리네뜨가 더듬더듬 소리쳤다.



“아, 아, 아드리앙?!”

“아, 미안. 싫었어?”

“그, 그런 건 아니고. 왜 갑자기?!”

“그냥…, 그러고 싶어서.”



웃으면서 폭탄선언을 던지는 아드리앙에 마리네뜨는 정신이 없었다.



“사실은 입에 할까도 고민했는데,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지만 그래도 갑자기 입술에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곤란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아드리앙의 얼굴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리네뜨의 손을 꼭 붙잡는 손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런 아드리앙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리네뜨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쳐갔다. 다른 한 손도 뻗어 아드리앙의 손을 꼭 붙잡은 그녀가 아드리앙에게로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들어 아드리앙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아드리앙이 놀랄 차례였다.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녹빛 눈동자가 키스를 끝내고 창피함에 살짝 시선을 피하는 마리네뜨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본인이 해놓고도 좀 대담하다 싶었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시, 싫지 않아. 애초에 연인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 사실 손도 내가 먼저 잡으려고 했었는데, 해도 되나 걱정되서. 아니, 그러니까. 기쁘다구! 사실 네가 예쁘다고 해줬을 때도 너무 기뻤고, 그, 그리고….”

“….”

“메리 크리스마스, 아드리앙. 너랑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어서, 기뻐.”



평상시의 강한 모습과는 달리 수줍게 대답하는 마리네뜨를 보던 아드리앙의 손이 마리네뜨를 확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아까보다 더 당황하는 마리네뜨를 꼬옥 끌어안은 아드리앙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변신했을 때의 당당함도 좋지만, 제 앞에서만 보여주는 이런 모습도 정말이지 사랑스럽다. 그가 가만히 속삭였다.



“나도 기뻐.”



메리 크리스마스, 마이 레이디.









====

향초는 변신할 때 잃어버렸습니다. 정확히는 아드리앙 만나고요 하하하.

안나님의 마음에 드는 내용이길 바래요 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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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 나이프귀능 스푼오르카





[귀능다나/오르메두]

Change


<04>




7.



"으윽…."


비틀린 신음소리와 함께 누워 있던 나가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부스스 눈을 뜨자, 진갈색의 나무로 된 천장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뭐지, 내가 왜 여기에…. 가늘게 뜬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나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제 얼굴을 더듬었다. 안경!! 놀라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상하게 목 뒤가 시큰거렸다. 왜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나가의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아, 일어났어요, 나가 군?"


헉.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고개를 애써 돌리자, 침대 바로 옆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사과를 깎던 손을 멈추고 싱긋 웃는 얼굴이 누구인가를 깨닫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던 나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가 허둥지둥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가 당황한 듯이 눈가를 일그렸다. 그런 나가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던 귀능은, 나가가 무엇 때문에 곤란해하는지 깨닫고 작게 웃었다.


"초능력이 안 나오죠?"
"어…."
"잠깐 수를 좀 썼거든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초능력을 쓰는 건 무리일 거예요."


무슨 수를 쓴 건데?!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한 거였어?! 경악하는 나가에게 귀능은 사실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몇 번을 사용하려고 시도했지만 초능력은 나올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고, 막막해지는 심정을 애써 달래기 위해 나가는 심호흡을 했다. 대답을 듣기가 무서웠지만 아무튼 물어보았다.


"…약이라도 먹인 건가요?"
"설마. 제가 그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너무하네요."


너라면 납치범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겠냐.

하마터면 튀어나갈 뻔한 마음의 소리를 간신히 눌러참고 나가는 슬금슬금 침대 가장자리로 옆걸음질쳤다. 최대한 자신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 듯한 나가의 모습에 귀능은 가만히 웃다가, 나가가 목이 아픈지 인상을 찡그리자 깜짝 놀라서 그를 제지했다.


"가만히 좀 있어요! …진짜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도 되요. 명령이라 데려오긴 했지만 나중에 빠져나갈 수 있게 손을 써줄테니까."
"그럼, 지금 보내주면 안 되요?"
"당연히 안 되죠. 일단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누군데요?"
"만나보면 알아요."


더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딱 잘라 대답하는 귀능의 미소에 나가는 결국 포기하고 다시 원래 누워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설령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초능력이 없는 자신은 대응하기도 어려우니까. 게다가 이 사람 싸움도 잘할 거 같은데, 자칫 잘못해서 성질 건드렸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건 더 싫었다. 인생은 안전빵으로 살자, 가 제 모토인데.


"아, 그 인간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으니, 그 동안 이야기나 좀 해볼까요?"
"무슨…, 얘기요?"
"별 거 없어요. 그냥…."


거기까지 말했다가 귀능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밝았던 그의 표정이 살짝 음울해졌다, 순식간에 다시 밝게 변했다. 싱글싱글 웃던 귀능이 이쑤시개로 사과를 찍은 뒤 그걸 나가에게 내밀었다.


"사과 먹을래요?"



*


"무슨 일이세요?"


오르카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서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이친 다나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험악했다. 넘쳐나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살벌하게 쳐다보는 눈빛에 오르카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조용히 있어야겠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던 오르카에게 다나가 불쑥 대답을 던졌다.


"구하러 가야 해."
"누구를요?"
"나가 녀석. 납치당했어."
"납치요? 나가 씨가요?"
"그래."
"대체 누가…."


오르카의 질문에 옷걸이서 외투를 집어들던 다나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금방 감정을 털어내고 말을 던졌다.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귀능이 녀석이 돌아왔다."
"예?!"


외투를 집어들어 몸 위에 걸치는 다나의 뒷모습을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던 오르카의 손에서 서류 한 장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보일세라 황급히 다시금 서류를 집어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오르카가 물었다.


"그 팬더새…, 흠흠. 그 녀석이 돌아왔다구요? 근데 왜 나가 씨를 납치하죠?"
"나이프에 들어간 모양이더군."


이번에는 오르카가 움찔거렸다. 뒤를 돌아보고 있어 다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담담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다나는 매우 골치가 아팠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런 사건까지 일으킨 이상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녀석을 숨겨주려고 했던 건가? 나는? 어이가 없어진 다나의 입가에서 피식,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참내, 키운 정도 정이라 이건가. 말없이 사라졌다가 돌아와서는 속만 징글맞게도 긁어대는 팬더새끼가 뭐 그리 예쁘다고.

갔다 온다. 무슨 일 생기면 즉시 보고하고. 그 말만을 남기고, 터벅터벅 걸어 서장실 밖으로 나가는 다나의 모습을 조용히 배웅하던 오르카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2년 간 무슨 짓을 하고 다녔나 싶었는데 나이프에 들어가다니. 하긴 하는 짓이 악당 뺨치는데다 성격도 참 지랄맞긴 하지만, 서장님 말은 잘 듣지 않았나. 그렇게 계속 생각하던 중,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오르카는 눈가를 찡그렸다. 내가 왜 그런 팬더새끼에 대해 신경쓰고 있는 거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마 그 사람이 돌아온 것에 신경이 쓰이는 탓이라고,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오르카는 다시금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하지만 통 집중이 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차, 휴대폰이 울렸다. 서장님인가? 아무 생각없이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을 뿐인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르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안녕?]
"…어떻게 이 번호를."
[에이,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 그나저나 너 지금 혼자인가?]
"아니요, 사람들이랑 같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 못하는 건 여전하네.]


네 성격상 그랬으면 목소리를 더 낮췄겠지.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웃음소리에 오르카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였는지 메두사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묻는 메두사에게 맞춰줄 생각같은 건 전혀 없었기에 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대화를 했다간 휘말릴지도 모르니까. 저번처럼.

오르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침착해라, 긴장하지 마. 방심하면 언제고 당할지 모른다.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이며, 오르카는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긴장했는지 바짝 굳어버린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그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사람을 불러야 할까 고민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막연히 짐작하는 자신에 오르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눈 앞에 나타난다면 이번에야말로 체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저번과 같은 그런 막연한 감정이 자신의 발을 묶는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8.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둘 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오독오독 사과를 씹어먹는 나가를 내버려두고 귀능은 손에 들린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커다랗고 휑한 방 안에 남자 둘이서만 남아 있으려니 참으로 썰렁했다. 태클을 걸까 싶었지만 굳이 쓸데없는 모험을 하기엔 귀찮았기에 나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안경도 돌려받고 간식으로 사과까지 얻어먹고 있자니 풀어지려는 기분에, 나가는 나름 고민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먹이로 길들이는 건가?

에잇, 아니야.

도리도리 고개를 젓던 나가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하다, 제 옆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남자를 힐끔힐끔 관찰했다. 자신을 귀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나가가 그러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가만히 있어도 입꼬리가 쭉 올라가 있는 걸 보니 평소에도 잘 웃는 사람이 아닐까. 자신을 납치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가가 툭 말을 걸었다.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네?"
"아니, 뭐랄까, 그…."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나가를 멀뚱히 쳐다보던 귀능은, 이내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하 웃어대던 귀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나가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가 간신히 웃음을 삼키고 대답했다.


"나가 군은 정말로 사람이 좋네요~."
"에?"
"아니, 아까 제가 말해놓고도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보통 자기를 납치한 사람한테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잖아요?"


조목조목 짚어주는 귀능에게 나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지금 동조할 때가 아니잖아! 표정이 이랬다저랬다 바뀌는 나가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던 귀능이 조용히 물었다.


"나가 군은, 스푼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죠?"
"에? 네. 이제 한 3주 정도?"
"어쩌다가 거기 들어가게 된 거예요?"
"서장님한테 스카웃 당해서요."


그 한 마디에, 서류를 들고 있던 귀능의 손가락이 살짝 꿈틀거렸다. 나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귀능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동요하다니 나도 아직은 멀었네.


"…서장님은, 잘 지내나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질문하며, 귀능은 평상시와 같이 미소지었다.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나가는 무척 놀랐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서장님을 알아요?"
"알죠. 원래 저도 스푼에서 일했었으니까요."
"네? 진짜요?"
"그럼요. 고로 선배라는 말은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구요?"
"지금은 아니면서."
"뭐, 그건 그렇죠."


지금쯤 배신자 새끼라고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상상만으로도 편치 못한 기분에 귀능은 가만히 들고 있던 서류를 제 무릎 위에 내려두었다.


"나가 군. 잘 들어요."
"네?"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저-."


그 말과 함께 귀능은 손가락으로 바로 자신의 앞, 그러니까 나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붙어 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도망가세요."
"에?"
"제가 이 방에 주문을 걸어놨거든요. 초능력을 쓸 수 없는 마법의 주문을."


저건 또 뭔 소리야.

당최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가는 그의 말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잠깐만, 근데 저 말은….


"위험할 거라는 뜻이에요?"
"어차피 초능력이 없으면 나가 군 성격에 어딜 가든 위험하지 않나요? 맹하다는 소리 많이 듣죠?"
"아, 그렇죠."


고개를 끄덕거리던 나가는 다음 순간 팟 정신을 차렸다. 으악, 또 말려들었잖아! 다시 질문하려던 나가는 중얼거리는 귀능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변덕스러운 인간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참 힘든 일이죠. 어째 만나는 상사마다 다 이 모양인지 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귀능이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진심으로 질린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리는 귀능의 모습에, 나가는 뻘하게 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근데 대체 상사가 어떤 사람이기에 저렇게 얼굴이 우거지상일까. 서장님보다 더한 사람인가?


"아무튼, 나가 군."
"네?"
"방심하지 말아요."


싱긋 웃고는 있지만 새까맣게 탁해지는 귀능의 눈빛에 나가는 순간 움찔했다. 분명 웃는 얼굴임에도 이상하게 밀려드는 공포감에 살짝 몸을 떠는 나가를 쳐다보며, 귀능은 만족스럽게 웃더니 옆에 있던 접시를 다시 무릎에 올려놓고 남은 사과 하나를 마저 깎기 시작했다.


"예전엔 스푼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저는 배신자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런 실실거리는 태도로 너무 무방비하게 굴었다간-."


죽을 지도, 모른다구요? 


사각사각 껍질을 깎는 소리만이 방 안을 배회했다. 그 한 마디에,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굳어 있는 나가와는 달리 귀능은 이제 콧노래까지 부르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나가의 침묵에 귀능은 좀 도가 지나쳤나 싶어 속으로 난감한 듯이 웃었다.

너무 겁을 줬나? 능력으론 최강이긴 하지만 만나보니 아직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하지만 아직 원석에 지나지 않으니까. 갈고 닦으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거다. 그래서 그가 이 소년을 노리는 거겠지.

진짜 넘어올 리는 없겠지만.

소년은 능력과는 달리 성격 자체는 정말로 평범했다. 막 정의를 외치며 적극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본적인 도덕 관념이 없는 것도 아닌. 굳이 커다란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기보단 조용한 것을 가장 선호하는 타입이랄까. 별로 꿈이나 야망같은 것도 없어 보이고, 적당히 실리에 맞춰 살아간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상처입히기엔 너무 무른, 소위 '양심' 을 가진 상대인 것이다.

이미 그 양심을 버린 자신과는 다르게.


"스푼에서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도 않겠지만."


특히 그 사람이.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에 귀능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처음 자신을 봤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표정은 덤덤했지만 붉은 눈동자는 착잡하게 일그러졌었다. 자신을 기억하고 동요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기뻤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 한 구석에 착잡함을 남겼다. 그런 쓰레기 같은 곳에 들어갔냐고 고함을 치던 모습에 심장 한 구석이 따끔거렸다. 곧 다시 무뎌졌지만.

역시 이번에야말로 미움 받으려나.

미움받는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감정이란 제 뜻대로 되는 존재가 아닌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스푼을 나온 것도 아니고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사람을 대면하고 있자니 정말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죽어도 그럴 수는 없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 목적 하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배수진을 쳤다. 스푼을 버리고 나이프에 들어간 것도 그래서였다. 돌아갈 곳은 없으니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익숙해지니 아주 못할 짓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남아 있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 당신의 존재 때문인지도 몰라요.
서장님.


"뭐, 사실 배신자든 뭐든 상관없어요.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걸 위해 다 버린 거니까.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귀능은 다시금 침묵했고, 나가는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 눈 앞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사실 이쯤되니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는 말이 진심인가도 헷갈린다. 도망치라고 방법을 알려주면서도 지금은 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모순적이지 않나.

그 때였다.


"아, 오셨네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귀능에, 나가는 깜짝 놀라 귀능의 등 뒤를 쳐다보았다. 열려있는 문 앞에 하얀 옷차림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금세 그가 누군지를 알아본 나가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나이프. 다시 한 번 귀능을 돌아보았다. 룰루 콧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마저 다 깎아 올려놓는 귀능의 표정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사과 더 먹을래요? 그렇게 묻는 귀능에게 나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 먹었다간 체할 거 같다. 그런 나가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귀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해맑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오오, 진짜 데려왔잖아? 대단하네~!!"
"뭐 이 정도쯤이야."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나는 귀능의 모습에 나가는 심히 불안해졌다. 남아 있는 동앗줄을 붙잡듯 간절히 바라보는 시선에 귀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작게 입모양을 그렸다. 미안하다고. 그러더니 몰래 저를 향해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올리는 귀능을 보고 나가는 절로 고개를 갸웃했다. 비밀로 해달라는 건가? 지금 이야기를? 하지만 왜?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나가는 제 앞으로 뛰듯이 걸어오는 백모래에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헤실헤실 웃고 있지만 저쪽보다도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다. 저쪽도 좀 미친 사람같지만.

백모래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본론이었다.


"나이프에 들어오지 않을래?"


나가의 대답도 간결했다.


"싫어요."




-TO BE COUNTINUE


===


나가한테 쓴 건 듄이 쓴 거랑 마찬가지로 특기를 무효화하는 향입니다. 물론 빼돌린 건 송하겠죠 하하
오랜만에 쓰니 재밌네요 ㅌㅌ

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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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마리] 특별한 순간





짧은 낮이 지나가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남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이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차분히 가라앉았다. 점점 짙어져가는 푸른빛 사이로 새까만 어둠이 스며나와 번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두워진 하늘 아래에는 도시가 있었고, 수많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닥쳐올 차가운 밤을 준비했다. 무법자처럼 길거리를 누비는 싸늘한 바람들의 공격에 사람들은 황급히 거리를 떠나 따뜻하게 빛나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래, 보통이라면 분명 그러했겠지.


똑똑,


숙제를 하고 있던 중, 마리네뜨는 난데없이 들리는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창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겨울이라 그런지, 차가워진 밤공기가 하이얀 서리를 그려넣은 유리창 너머로 히죽 웃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검은 타이즈를 빼입은 소년의 모습에 마리네뜨는 놀라서 재빨리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블랙캣!"

"여어, 공주님."



안녕?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는 눈가가 작게 일그러져 있었다. 유달리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나, 웃고는 있지만 유달리 경직되어 보이는 입매는 아무래도 추위 때문인 것 같았다. 봉에 매달린 채, 블랙캣은 정중한 말씨로 마리네뜨에게 요청했다.



"아니, 음. 일단 좀 들여보내 주지 않을래? 생각보다 추워서."

"아니, 어, 빨리 들어와요!"



허락이 떨어지는 것이 무섭게 그는 잇챠, 소리를 내며 매달려 있던 봉을 창문 쪽으로 턱 기울였다. 봉이 창문에 걸리고 블랙캣은 스르륵 소리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곳으로 들어오니 살겠는지 부르르 몸을 떠는 블랙캣의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태평했다.



"열어줘서 고마워."



추워 죽는 줄 알았네.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블랙캣의 모습이 어이없다는 듯이, 마리네뜨의 눈초리가 가늘게 접혀졌다. 당연한 거 아냐? 미쳤다고 이 날씨에 저런 차림으로 돌아다녀?



"이 날씨에 그렇게만 입고 있으니 당연히 춥죠!"

"오우, 아니. 뭐 그 정도는 아니었다구?"



퍽이나 그러겠다.


허세를 부리는 것도 참 여전했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마리네뜨는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너무 많이 말하다보면 제 정체를 눈치챌지도 모른다. 적당히 맞춰주다 보면 가겠지. 아니, 그것보다.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어, 아. 그게…."



말끝을 흐리는 블랙캣에 온갖 부정적인 상상들이 마리네뜨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악당이 또 설치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 그럼 얘가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 헉, 설마 저번 나타니엘 때처럼 날 노리기라도 하는 거야? 하여튼 이놈의 인기란. 아아니 이게 아닌데!!


저 모든 생각들이 폭풍처럼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뇌하고 있는 마리네뜨와 달리 그의 대답은 꽤나 싱거웠다.



"으음, 글쎄~!! 그냥 와야겠다 싶어서?"

"…그건 또 뭐예요."

"아, 혹시 숙제하고 있었어? 어디 좀 보자."

"악, 저저리 가요!!"



깜짝 놀라 말을 더듬던 마리네뜨가 블랙캣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마리네뜨의 공책을 집어든 뒤였다. 흐음, 작게 탄성을 흘리며 공책 위를 대강 눈으로 훑던 블랙캣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기, 이거 틀렸어."

"에?"

"이건 x가 아니라 y를 대입해야지. 그리고 이건 아예 공식을 다른 걸 써야 하잖아."



책상에 있던 볼펜을 집어들고, 그는 슥슥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내렸다. 한참 뒤 자, 라고 말하며 블랙캣은 마리네뜨에게 공책을 내밀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블랙캣의 얼굴에 마리네뜨는 반신반의하며 공책을 펴서 안을 확인했다.



"…진짜 맞았잖아."

"그치?"



식도 자신이 쓴 거에 비해 훨씬 간결하고 깔끔했다. 얘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나? 의심하는 눈초리로 블랙캣을 요모조모 살펴보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머리에 달린 귀를 쫑긋거리며 칭찬을 기다리는 듯 밝게 웃는 얼굴에 마리네뜨는 결국 픽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네요."

"그럼, 난 대단하다고."

"네, 네. 근데 보시다시피, 저 지금 숙제해야 하거든요?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주시지 않겠어요?"



뭣보다 여자애 방에 함부로 쳐들어오는 것부터가 좀 그렇지 않냐 이거다. 열어준 건 자신이라지만. 살짝 노려보는 마리네뜨의 시선에도 블랙캣은 여전히 꿋꿋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 곧 눈을 반짝거렸다.



"아, 그래. 이왕 이렇게 온 김에 그 숙제, 도와줄까?"

"됐거든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아까 문제 거의 다 틀렸던데, 정말 괜찮겠어?"

"윽."



확실히 수학은 자신없는 과목이긴 했다. 그러나 마냥 고맙다고 하면서 도움을 받기엔 여러모로 찜찜한 기분이 들었는지라, 마리네뜨는 그저 눈동자를 데굴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마리네뜨를 지나 블랙캣은 바닥에 있는 작은 책상쪽에 앉았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깜빡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여서, 결국 마리네뜨는 백기를 들었다. 이 날씨에 곧바로 쫓아내기도 좀 그랬고.


그의 맞은편에 주저앉으며 공책을 펴자 시선이 따라붙었다. 싱글거리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워진 마리네뜨는 일단 쐐기를 박았다.



"이거 다 풀면 진짜 돌아가요."

"응? 너무 매정한 거 아냐?"

"…설마 저희 집에서 자고 가기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죠?"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고."



지금 본인이 상당히 뻔뻔하다는 건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절로 골이 땡기는 걸 느꼈지만, 마리네뜨는 한숨을 쉬며 다시 문제를 푸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런 마리네뜨를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던 블랙캣의 시선이 그녀의 방 안을 훑었다. 10대 소녀답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 안은 확실히 여러 가지 물건들로 가득했다. 침대나 컴퓨터, 책상, 서랍은 물론 구석에는 온갖 물건들이 담긴 박스들도 널려 있었다. 개중에는 그가 처음 보는 물건들도 수두룩했다. 여자들은 이런 방에서 사는구나,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블랙캣의 눈동자가 벽에 붙은 사진들을 보고 몇 번을 깜빡거렸다.


햇살같은 금발과 밝게 웃는 미소를 가진 소년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여러 장이 붙어있는 걸 봐서는 우연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저게 뭔지 물어보려고 하다가, 블랙캣은 곧 살짝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거둬들였다. 여전히 문제에 집중하고 있던 마리네뜨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마리네뜨를 지켜보는 블랙캣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당연스럽게도, 마리네뜨는 그런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막힌 문제가 있는지 한참을 끙끙대던 마리네뜨가 고개를 들어 블랙캣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들고 있던 펜으로 이것저것 적어주는 블랙캣의 모습이 새삼스러워, 마리네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한테 이런 면도 있었나. 뭐, 좀 멋있긴 하네. 생각하고도 놀라서 마리네뜨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무슨 멋있다야! 나한텐 아드리앙밖에 없다구!


그렇게 몇 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계속 숙제를 하다가,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블랙캣은 평소랑 달리 이상하게 말이 없었는데다, 의자가 아닌 따뜻한 바닥에 앉아서 못하는 과목숙제를 하고 있자니 졸음이 오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몇 번 고개를 까딱거리다, 언제 잠들었나 모를 정도로 마리네뜨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뭔가가 제 머리카락 위에 닿았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베시시 웃었을 뿐인데, 이마에 살짝 부드럽고 따뜻한 게 닿았….



"…헉!"



차가운 책상의 감촉에 마리네뜨의 눈이 퍼뜩 떠졌다. 푸른빛 눈동자가 당황으로 얼룩져 급하게 깜빡거렸다. 뭐지, 방금 뭐였지?! 이마에 뭔가 부드러운 게 닿았던 것 같은데? 그런 그녀의 모습에 블랙캣이 이상하다는 듯이 갸웃거렸다.



"깜짝이야. 잘 잤어?"



공주님. 웃고 있는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었다. 가볍게 던져진 그 한 마디에 괜히 창피해져서, 마리네뜨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가 요즘 외롭나? 이런 착각이나 하고. 그럴 리가 없지.


이 녀석이 나한테 키스따위를 할 리가 없잖아.


내가 이렇게 가벼웠었나? 아니, 나름 일편단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블랙캣이 날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레이디버그일 때의 일이고. 지금은 마리네뜨잖아! 아니, 마리네뜨. 생각해봐. 착각이야. 너한텐 아드리앙이 있잖아. 블랙캣은 그냥 파트너일 뿐이고, 그 이상의 감정은…. 뭐야 이거 뭔가 이상하잖아?! 으아아!!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온갖 자학을 하고 있는 마리네뜨를 말없이 쳐다보던 블랙캣의 눈매가 작게 일그러졌다. 감추지 못한 동요를 마저 지워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던 블랙캣의 시선이 문득 창가를 향했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살짝 멍하게 일렁였다.



"…눈이다."

"어?"



그의 말이 맞았다. 블랙캣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곧바로 보이는 창 밖으로 하얀 눈송이들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마리네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내린 눈이니까, 첫눈인가? 내리는 기세를 보니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엄청 쌓일 것 같았다. 아마 바닥도 얼겠다. 내일 조심히 걸어다녀야지. 눈은 쌓이면 보기는 좋지만 막상 나다닐 때는 불편한 게 문제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마리네뜨는 힐끗 블랙캣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아무런 말도 없이, 두 사람은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새하얗게 흩날리는 눈꽃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중 몇은 나풀나풀 떨어지며 창가에 소복히 쌓여 점점 부피를 늘려나갔다. 매섭게 불어닥치는 바람도 지금은 좀 잠잠해졌는지 창문이 덜컹거리던 소리도 멎어 있었다. 정말 고요했다. 


그 침묵을 깨버린 건 블랙캣의 한 마디였다.



"아, 난 이만 가볼게."

"…가요? 이 날씨에?"

"뭐야, 걱정해주는 거야?"

"아니, 뭐. 솔직히 추울 거 같고…."



집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 날씨에 눈까지 맞고 들어가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눈이 그치고 나서 가는 게 좋지 않냐는 마리네뜨의 제안에도, 블랙캣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괜찮아. 문제도 거의 다 풀었고, 나머지는 공주님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을거야."

"아, 어, 그, 그럼…."



장난스레 미소짓는 얼굴로 블랙캣은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붙잡고 일어나라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오늘의 그는 왠지 이상했다. 막연한 예감에 마리네뜨는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어떻게 자신의 숙제 내용을 알고 있는지, 왜 마리네뜨인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구는 건지, 결국 그가 뭐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지,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그 어떤 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마리네뜨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시리게 얼어붙은 창문을 툭 건드려 열자, 베일 듯이 차가운 공기가 훅 얼굴에 번졌다. 그에 얼굴을 찌푸리는 마리네뜨와 달리 블랙캣은 개운하다는 얼굴로 짧게 기지개를 켰다. 마치 고양이처럼. 아니, 고양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첫눈이라.



"맞다. 블랙캣!"

"…?"

"첫눈이 올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던데. 뭐, 빌고 싶은 소원 있어요?"

"소원이라면 있지. 근데 됐어."

"왜요?"

"이미 이루어졌거든."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하는 블랙캣에게 마리네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딘지 즐거워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니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캐묻는 것도 아니다 싶었으니까. 창틀에 발을 올리고 봉을 꺼내들던 블랙캣이 아, 탄성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맞다. 역시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아까 대답."

"?"

"보고 싶어서.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네."



고마워.


그 한 마디와 함께 블랙캣은 눈이 펑펑 내리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고,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 그의 대답에 살짝 멍해있다가, 다음 순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하앗?! 비명을 지르며 말을 더듬거렸다. 어색해진 기분을 달래려는 듯 막 중얼거리던 그녀가 제 옆으로 다가온 티키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창문 밖으로 드러났다. 떠드는 목소리들은 다시금 불기 시작하는 바람 소리에 잊혀지고, 지워진다. 창문 곁에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이유는 살갗을 에일 듯 차가운 겨울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새하얀 눈의 장막 안에서,

찰나의 기억은 무언가의 감정을 품고, 그렇게 스치듯 지나갔다.


마치 둘만의 비밀처럼.







===


그리고 블랙캣은 감기에 걸렸습니다~ㅇㅁㅇ~ 메데타시 메데타시!


<렐님의 캣마리 100제 24번. 맨디님 의견도 참고했습니다!>


후후 살며시 숟가락을 얹었습니다^_^)>

오랜만에(?) 캣마리가 쓰고 싶길래 간단히 써보았어요. 여기서 블랙캣은 마리네뜨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블랙캣에게 소원은 꽤 많지만, 그 중 하나라면 그녀와 같이 첫눈을 보는 거였던 걸로. 첫눈을 같이 본 연인들은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이미 사귄다는 설정으로 넣을까 했는데 글의 절반을 쓰고 나서야 저게 떠올라서...OTL...


참고로 도둑키스 한 거 맞아요 ㅇㅇ 이마에 했습니다 ㅎㅎ 이번 글은 좀 아련하고 어딘지 모르게 잔잔한? 느낌으로 적어보고 싶었는데 되었을까요 ㄷㄷㄷ 마무리에 10분을 넘게 고민했는데ㅠㅠㅠㅠㅠㅠ


끄읕>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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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

※ 스크롤 주의. 대략 10000자.





본편 전제하에 조금 설정을 바꿔서 아드마리가 정략결혼했음 어땠을까를 생각해봤는데 얘네 삽질 쩔게 할 거 같다 ㄷㄷ;


정략결혼은 일단 성인 되고 나서. 가브리엘 씨가 마리네뜨 재능이나 성격 보고 자기 아내랑 닮았다 생각하고 이런 애를 며느리로 삼으면 괜찮겠다 싶어서 아들의 의사따윈 싸그리 무시하고 어느 날 갑자기 아드리앙을 불러서 말함.


"아드리앙."

"? 네. 아버지."

"너도 이제 슬슬 결혼할 나이가 된 거 같구나."

"무슨 말씀하세요 아버지?! 전 아직 스물 두살이라고요?!"

"? 사귀는 여자라도 있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우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아드리앙에게 가브리엘이 단호하게 말함.


"그럼 뭐가 문제지? 한 달 뒤에 이 예식장에서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어라."

"아니, 잠깐!! 아버지!!"


라고 말하고 재빨리 나가버리는 가브리엘. 아드리앙이 어떻게든 연락하려고 해도 다 씹고 작업실까지 찾아가도 늘 부재중.


아니 이게 웬 날벼락이야?! 하고 아드리앙은 플랙한테 아버지가 제멋대로인 건 알았지만 대체 이걸 어쩌면 좋냐고 한탄하는데, 플랙은 니네 아버지가 니 말 안 들어준게 어디 한두번이냐고 낄낄거리겠지. 아드리앙도 동의. 그건 그렇지만... 이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결혼까지 간섭하는 건 아니지 않냐고 막 신경질부리면서 머리 쥐뜯을 거 같다. 그래서 결국 그냥 예식장에서 직접 결혼을 파토내기로 마음먹음. 상대가 개쪽이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자기가 부담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게다가 얘는 아직 레벅을 좋아했기 때문에 ㅇㅇ


이 모든 건 설마 아버지가 자기 결혼식장에도 안 올까? 라는 전제하에 결정한 일이었지만 아드리앙은 자기 아버지의 철저함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음(...) 결혼식 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 아드리앙은 속이 터지고 딱 지인들만 모았는지 하객도 몇 없고 신부 이름도 없음. 이게 서프라이즈라고 준비한 거면 참 재미있다고 비웃던 아드리앙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신부 대기실에 들어가야만 했음. 대기실 앞에서도 신랑이 신부 얼굴 미리 보면 그건 그것대로 재수없다던 말을 아드리앙은 뻘하게 떠올렸지만, 애초에 결혼도 안 할 건데 뭐 어때?! 라는 생각으로 손잡이에 손을 댐.


딸깍-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괜히 긴장이 되는 건 어째서였을까. 눈부시도록 새하얀 신부 대기실의 문 때문이었는지도. 천천히 문을 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우뚝 몸이 굳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커다란 의자에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앉아 있었다. 살짝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올린 여인의 모습은 꽤 예뻤다. 시선이 마주하자, 푸른 눈동자가 동그랗게 열렸다. 아드리앙은 이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무척이나.


"아드리앙?!"


마리네뜨 뒤팽 챙.



[아드마리] 재회: http://eclilps.tistory.com/entry/RD14



여기서 마리네뜨 시점. 사실 마리네뜨는 학교 졸업하자마자 가브리엘 씨네 디자인 공방에 들어가 일하고 있었음. 큰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그런 그녀를 눈여겨본 가브리엘이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인 거지. 물론 열심히 일하면서도 마리네뜨는 틈틈히 레이디버그로 일함.


그래서 밤새 디자인 공부를 하고 틀을 떠야 하긴 하지만 나름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틈틈히 아드리앙을 떠올림. 결국 고백하지 못한 첫사랑을 아직도 접지 못해서 아드리앙이 나온 잡지는 꼭 사보고 가끔 촬영장에 가서 몰래 훔쳐보기도 하고. 하지만 학생 때처럼 말을 걸지는 못 하는게 이제 같은 반 친구라는 접점도 없어서 용기가 안 나는 거야. 그래서 일단 열심히 일해서 꼭 아드리앙에게 자신이 만든 옷을 입힐 정도로는 성공하자고 마음먹고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있었음.


그런데 어느 날 가브리엘이 마리네뜨를 불러서 말하는 거야. 그녀에게 가브리엘은 선생이기도 하지만 아드리앙의 아버지기도 해서, 무슨 일인가 하고 긴장했는데 이것저것 하고 있는 일이나 디자인들에 관해 물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물음.


"자네, 사귀는 사람 있나?"


가브리엘이 묻는 질문치고는 꽤 이상했지만 마리네뜨는 솔직하게 답함.


"아뇨,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만.


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꾹 입을 다물었는데 가브리엘이 말함. 한 달 뒤쯤에 특별한 스케줄이 있으니 그 때는 한 3일쯤 시간을 비우라고. 3일이라고 한 건 신혼여행 포함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마리네뜨는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 무슨 스케줄이냐고 물어도 그건 그때 가보면 안다고 말함. 참고로 가브리엘은 마리네뜨가 아드리앙을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음.


그래서 한 달 뒤쯤에 예정대로 스케줄 싹 비우고 온 마리네뜨는 난데없는 검은 옷의 사나이들에게(ㅋㅋㅋ) 끌려가 어떤 고급 샵으로 보내지고 이것저것 꾸며진 다음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을 가게 된 거지. 저기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물어봐도 경호원들은 묵묵부답이고 가브리엘에게 전화 걸어보려는 순간 문자가 와.


결혼식장은 마음에 드나? 가 첫 마딘데 순간 벙찜.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는데 다음 줄이 시선을 끌어.


[자네에게도 해가 될 일은 아닐 것이니, 잘 부탁하네.]


여기서 이제 의문이 듬. 아무리 봐도 이건 신부놀이가 아니라 진짜 결혼식장이고 자기는 신부라는 건데 그럼 신랑은 누구야? 근데 가브리엘이니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는데 설마라고 생각함.


말도 안 돼. 아드리앙이라면 결혼하고 싶다는 여자가 넘칠텐데 왜 자기를 굳이 이런 방법까지 써서 보내려고 하겠어? 설마 내가 아드리앙을 좋아하는 거 알고 걸리적거려서 이러는 거 아냐?! 하고 별 망상을 다 하는데 신부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정말 아드리앙이 들어오는거 보고 깜짝 놀람. 심지어 정장 차림에 머리는 뒤로 넘김. 겁나 멋있어서 막 황홀해하는데 상황이 그게 아니잖아.


아드리앙이 엄청나게 놀란 얼굴을 하는데 마리네뜨는 마리네뜨대로 당황함. 그쪽도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온 거 같아서. 아드리앙이 근데 한참을 지나도 말이 없어. 멍하게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아드리앙의 시선에 괜히 쑥스러워진 마리네뜨가 안녕? 하고 한 손을 들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넴. 너도 끌려왔어..? 하고 물으니까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드리앙이 말함. 어, 응.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이 모든 게 가브리엘의 주도 하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고 둘다 속으로 고민함. 지금 이 아저씨한테 연락이 안 되는데 찾아온 손님들이 죄다 생각 이상으로 고급이야. 파토 못 내게 하려고 수를 썼다는 걸 알고 곤란해하는 아드리앙이 마리네뜨에게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함. 마리네뜨는 아니아니아니 하고 고개를 젓는데 한편으로는 이게 진짜 아드리앙과의 결혼식이었음 얼마나 좋을까 하고 씁쓸해함. 잠깐 뭔가 고민하던 아드리앙이 마리네뜨를 쳐다보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도와주지 않을래?"


라고 말하고, 결혼식을 속행하자는 이야기였음. 일단 결혼은 하지만 아버지와 연락이 될 때까지만 같이 있어주면 된다고 함. 마리네뜨는 깜짝 놀라지만 결국 수락함. 그녀도 오면서 온 초대객들 보고 기겁했거든. 무엇보다 아드리앙이 곤란해지는 거 진짜 싫어서. 예상보다 순순히 허락해준 마리네뜨 덕분에 일단 결혼식을 올리긴 하는데 둘다 심란하지. 


막 맹세의 말을 읊조릴 때도 그렇고 반지 교환도(반지까지 철저히 준비한 아저씨) 그렇고 마지막에 맹세의 키스까지. 미안하다고 말한 아드리앙이 살짝 면사포를 걷어서 눈을 감은 마리네뜨한테 입을 살짝 맞췄는데, 그 때 아드리앙은 마리네뜨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챔.


떨어? 어째서.


의아해하는 마음을 마지막으로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 가는 리무진 안에서도 둘은 말이 없음. 마리네뜨는 면사포로 얼굴 가린 채 살짝 고개 숙여서 아드리앙을 보고 있고 아드리앙은 전화를 걸고 있음. 근데 여전히 안 받아. 심지어는 모르는 번호로


[즐거운 신혼여행 보내라.]


하는 겁나 무뚝뚝한 문자 하나 와 있어서 진심으로 빡침. 솔직히 안 빡치는 게 이상하짘ㅋㅋㅋㅋ 그리고 진짜 말려들게 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마리네뜨를 흘끗 살피는데 웨딩드레스 입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마리네뜨의 옆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당황함.


사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마리네뜨를 봤을 때도 그 생각 했거든.


자기는 레이디버그 일편단심인 줄 알았는데 그건 다 거짓이었냐고 아드리앙은 속으로 막 자학하는데 마리네뜨는 마리네뜨대로 지금 상황이 너무 꿈같애. 위장이라지만 아드리앙과 같이 결혼식을 올린뒤 웨딩카에 타고 있잖아. 그런데 문득 닿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까 아드리앙이 멀뚱히 또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거야.


의아해진 마리네뜨는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하고 차분하게 물음. 이제 나이를 좀 먹었다보니 자기 감정에 좀 성숙해졌거든. 아드리앙은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려. 매우 익숙한 누군가의 실루엣. 하지만 그녀와 마리네뜨가 동일인물이라는 생각보다는 내 취향이 그런 쪽인가(...) 라고 생각하고 넘김 아 쓰면서도 답답하다 이새키....


괜히 미안해진 아드리앙은,


"말려들게 해서 미안해. 마리네뜨. 이왕 이렇게 된 거 휴가 왔다고 생각하고 즐겨주면 안 될까? 뒷수습은 확실히 해줄 테니까."


잠깐 생각하던 마리네뜨가 말함.


"내 이름."

"어?"

"기억하고 있었네..?"

"뭐야, 잊을 리가 없잖아."

하는데 마리네뜨는 그거에 또 두근하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넴.


"난 괜찮아."

"뭐?"

"네 말대로 휴가 나왔다고 생각할 테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


따지고 보면 이건 너네 아버님 책임이고.


그러면서 두근두근 뜀박질하는 가슴과 달리 꽤 부드럽게 웃는 마리네뜨의 얼굴이 너무 예쁜 거야. 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조용하고 멍한 타입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눈길이 가는 애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앞에서 쳐다보고 있으니 새삼 느껴짐.


물론 신혼여행지에선 아무 일 없었습니다(...) 호텔은 스위트룸이고 방이 하나였지만 아드리앙은 꼭 마리네뜨가 잠든 뒤에 들어와서 자고 그 와중에도 아버지랑 연락을 시도했지만 먹통(...) 심지어 또 다른 문자로 반년간 출장간다고 말함 이쯤되면 독하지.


사실 신혼여행 끝나고는 집에 돌려보내 주려고 했지만, 문제는 아드리앙이랑 마리네뜨가 결혼한 거 거의 공표급으로 이미 시내에 알려져 있음. 당장 클로이가 전화해서 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는 거에서 알게 되지만.


결국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데 이 와중에도 마리네뜨는 업무를 나가고 아드리앙도 모델 일을 나가고 그 와중에도 히어로 일은 꼬박꼬박 함. 레벅이나 블캣이나 둘다 힘이 없음.


레벅은 레벅대로 심란하고 블캣은 차마 레벅 얼굴을 못 쳐다보겠어. 좋아한다고 막 들이대던 녀석이 힘이 없으니까 그건 그것대로 이상했는지 레벅이 무슨 일 있냐고 묻는데 블캣은 차마, '아버지한테 속아서 다른 여자랑 결혼했어' 라고 말할 수가 없는거야ㅋㅋㅋ 자기는 레이디 뿐이라고 말하기엔 이미 뭔가 순결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물론 아무 일 없는데, 레이디? 하면서 막 허세를 부리는 블랙캣을 보던 레이디버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가자고 말하는데 블랙캣은 그 미소를 보고 순간 우뚝 굳음. 웨딩카 안에서 자신을 향해 웃던 마리네뜨랑 느낌이 아주 똑같았거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 내가 결혼한 사람이 너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진심으로 레이디버그의 정체가 궁금해졌음. 그래서 툭 내뱉어.


"정말 넌 누굴까?"

"어?"

"우리, 파트너로 지낸지도 거의 6년 다 되어가잖아."

"그, 그랬나?"

"그런데 서로 정체도 모르다니, 이건 좀 불공평하지 않아?"

"서로 모르는 게.."

"..좋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알고 싶어."


고민하던 레벅이 말함.


"...말하고 싶지 않아."

"왜?!"

"알면, 넌 분명 실망할 테니까."


그렇게 웃으며 레벅은 휙 몸을 감춰. 그에 답답해진 블캣은 마구 화내면서도 자기가 초조했다는 걸 인정해. 진짜 고백도 못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생각하니까 새삼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운 거야. 왜 남의 연애전선에 초를 쳐 치긴.(사실 정반대였음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집에 돌아오던 아드리앙은 저택에 불이 켜져 있다는 거에 놀라. 저택에 들어오니까 뭔가 냄새가 나는데 식당 쪽이야. 이것저것 만들어놓고 스튜 냄비를 들고 있던 마리네뜨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던 아드리앙에 깜짝 놀라서 냄비를 떨어뜨릴 뻔하는데, 놀란 아드리앙이 다가가서 마리네뜨 손을 잡아줘. 막 시선이 닿는데 괜찮아? 라고 물으니까 마리네뜨가 얼굴 살짝 빨개져서 괘, 괜찮아. 하고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음. 뭐하고 있었냐고 물으니까,


"그냥 신세지긴 뭐해서. 뭐라도 만들어봤어."


라고 말하는 마리네뜨였는데, 아드리앙은 그 말에 순간 심장이 쿵, 두근거려. 이게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무시하고 마리네뜨랑 같이 밥을 먹음. 진짜 불이 켜져 있는 집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해준 요리를 먹는 건 처음이야.


그거에 괜히 울컥하다가 그는 자기가 다시 한 번 마리네뜨를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지만 그래도 이건 사랑이 아닐 거라 생각해. 자기 사랑은 이미 한 여자한테 전부 다 줘버려서.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이 자신을 보면서도 왠지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 거 같은 느낌에 아, 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듬. 역시 나는 불청객인 건가, 싶어서 괜히 시무룩해진 마리네뜨한테 아드리앙이 장난스럽게 이름을 불러.


"마리네뜨."

"어?"

"안 먹으면 내가 다 먹는다?"

"아, 아니. 지금 먹을게!"


이렇게 얘들의 기묘한 동거생활이 시작됨.


마리네뜨는 진짜, 아드리앙이랑 결혼한 거 소문난 이후로 여자들한테 굉장한 눈총을 받을 거 같다. 특히 클로이는 매일 마리네뜨 공방에 찾아와서 얘를 들들 볶을 거 같음. 약점 잡아서 아드리앙한테 보내려고 하고.


물건이 막 없어지기도 하고, 누가 자기 발 걸려고도 하고, 하여간 은근한 괴롭힘을 받는거야. 아드리앙은 진짜 만인의 연인 수준일 정도로 완벽한데다 아직 젋었으니까. 그리고 아드리앙은 아드리앙대로 좀 따가운 눈총을 받는데 막 티나지는 않았지만 마리네뜨가 꽤 인기가 많았거든. 예쁘장한 얼굴이기도 한데 당당하고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고 그래서. 자기랑 마리네뜨의 결혼에 대해 수군거림을 들은 아드리앙은 괜히 기분이 나쁘고. 자기나 마리네뜨나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닌데. 왜 저런 소리를 듣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은근히 마리네뜨가 상처입을까 걱정함.


아 근데 마리네뜨는 여자들 괴롭힘도 괴롭힘인데 클로이; 클로이랑 사브리나 너무 성가심 무엇보다 빌런이 나타나서 나가봐야 하는데 변신할 틈도 안 줘. 어떻게든 떼어내고 문을 잠그고 변신한 뒤에 밖으로 나가는데 그새 열쇠를 가져온 클로이가 문을 열어.


근데 아무도 없음.


가뜩이나 여긴 꽤 고층이었거든. 그를 이상하게 여긴 클로이가 나중에 마리네뜨한테 심문하듯이 물어봐. 너 대체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하고. 마리네뜨는 레벅으로 변해서 나갔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을 얼버무리는데 커다란 팔이 마리네뜨의 목을 껴안고 뒤로 살짝 끌어당겨. 클로이가 놀라서 소리지름.


"아드리앙!"


마리네뜨에 대한 이야기를 얼핏 듣고 걱정된 아드리앙이 얘를 찾아왔다가 상황을 발견한 거지. 반가워서 덤벼들려는 클로이에게 아드리앙이 웃으면서,


"미안, 난 이제 유부남이라서."


라고 단호박으로 말하는데 마리네뜨는 진짜 깜짝 놀라서 말이 안 나오고 클로이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옴. 클로이가 진짜 얘랑 결혼한 거냐, 약점 잡혀서 억지로 결혼생활 하는 거 아니었냐, 하고 따지니까 아드리앙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그런 일 없어. 우리 완전 잘 살고 있다구?"


하고 웃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 마리네뜨 허리 껴안고 관자놀이에 입맞춤. 그것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근데 마리네뜨는 놀라기도 놀랐는데, 이 뻔뻔함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아. 그것도 자신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녀석.


사실 아드리앙이 이렇게 대놓고 일을 벌인 이유는 반쯤 충동임(..) 뭔가 마리네뜨가 싫은 소리 듣고 있는 것도 싫은데 그 와중에 마리네뜨를 힐끔거리던 남자들이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보란 듯이 막 애정행각 벌이면서 마리네뜨 데리고 사라졌는데,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가서야 이거 좀 아니었나? 아버지를 찾으면 돌려보내줘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는데 말이 없던 마리네뜨가 자기 어깨 감싼 아드리앙 팔을 두 손으로 꼭 잡는 거야. 그리고 살며시 중얼거린다.


"꿈이면 제발 깨지 마라.."

"응?"

"그냥, 그냥 좋아서."


하고 마리네뜨가 작게 속삭이는데 아드리앙은 그제서야, 고개를 푹 숙인 마리네뜨 얼굴이 완전 새빨갛다는 걸 깨달음. 바보가 아닌 이상 슬슬 눈치를 채야지. 괜히 긴장한 아드리앙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데 마리네뜨가 용기를 내서 말함.


"이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어..?"


아드리앙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음. 알고는 있었지만 마리네뜨 입으로 사살받으니 기분이 되게 묘해.


"아마, 돌아가면 다시는 말하지 못할 테니까. 지금 말할게."

"..."

"좋아해. 사실 학생 때부터 좋아했었어."


얼굴을 보지 않아서 자연스레 말이 나와주는 게 다행이었음.(아직도 백허그 중) 대답이 두려워서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은,


"…미안해."


라는 말밖에 못하고 마리네뜨는 애써 태연하게 말함.


"여, 역시 그렇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그렇게 묻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그렇게 티가 나?"

"그냥, 날 보면서도 다른 사람 보고 있는 거 같아서."


어쩔 수 없지 뭐. 라고 말하는 마리네뜨를 보는데 아드리앙은 왠지 화가 나. 나를 좋아한다면서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야? 라는 생각도 들고. 마리네뜨는 미안하다고 말함.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었을 텐데, 상대가 하필 나라서."


막 말하면서도 왠지 목소리에 울음기가 있는 거 같아서, 싸한 느낌에 아드리앙은 팔을 풀고 마리네뜨 몸을 돌려.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리네뜨 턱을 억지로 들어올리니까 울고 있지는 않았음. 근데 너무 슬퍼 보여서 아드리앙은 가슴이 철렁해.


내가 왜 이러지? 이러고 혼란스러워하는데 마리네뜨는 나, 나 먼저 나갈게! 하고 밖으로 나가고 아드리앙은 멍하니 자리에 서서 방금 전 자기가 느꼈던 충동을 돌이켜봐...는 그럴 시간 없겠지 빌런 한 번 더 나타납니다 ㅇㅇ


아주 정말 기막힌 타이밍에 나타난 빌런 덕택에 변신하긴 했지만 블캣은 몰라도 레벅은 정말 싸움에 집중을 못함. 티키의 영향에도 진짜 몇 번이고 실수하고 그래서 블랙캣이 너 오늘따라 왜 이러냐고 타박할 정도로 정신이 없음.


어쨌든 결국 다 쓰러뜨리고 임무 완수, 로 가볍게 주먹을 맞댄 뒤에 가려는 레벅 팔을 블랙캣이 꽉 붙잡아. 무슨 일이야? 하고 평소와는 달리 돌아보지 않는 레벅을 잡아당긴 블랙캣이 그녀를 돌려세움. 표정은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침잠되어 있는 눈동자에 블랙캣은 방금 전 봤던 누군가를 떠올려. 하지만 이내 생각을 털어내고 말하지.


"할 말이 있어, 레이디."

"뭔데?"

"난 말이야…."


고백을 하려니까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목이 타는 느낌이야. 몇 번이고 말을 망설이다가 간신히 말함.


"나, 너를 좋아해."


말했다.


말했는데 왠지 너무 슬퍼지는 감정에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일그림 왜인지 모르겠어. 이런 감정을 너도 느꼈을까. 또 마리네뜨를 떠올리는 자신이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에 집중함.


그런 그를 보던 레이디버그가 조용히 중얼거려.


"…너도 이런 감정이었을까."


작게 중얼거려서 잘 안 들림.


"응? 뭐라고?"

"블랙캣. 나도 네가 좋아. 좋은 동료이자 파트너라고 생각해. 하지만..."

"…."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힘없지만,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블랙캣은 다시 물어봐.


"그게 누군데?"

"…어?"

"누구냐고. 내가 알 만한 사람이야?"

"그걸 내가 너한테 대답해줄 이유는 없잖아."

"매정하긴."


쳇, 하고 투덜거리는 블랙캣의 표정은 평소와 같아. 그에 레벅은 웃으면서 손을 뿌리치려고 하지만 블캣 팔은 꿈쩍않음.


"그럼 질문을 바꿀게."

"또 뭔데."

"너 누구야?"


블캣의 목소리가 단박에 낮게 가라앉음. 깜짝 놀라서 레벅이 블캣 표정을 보는데 표정은 싱글싱글 웃고 있는데 목소리는 장난이 아니고 잡은 손에 힘이 더욱 세짐. 기필코 알아야겠다는 느낌.


레벅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쳐.

"싫다고 말했잖아. 알면.."

"실망할 거라고?"

"…."

"나야말로 두려운데."

네가 실망할까봐.

그 와중에 변신 해제소리는 제대로 들리기 시작하고 레벅은 진짜 놓으라는 듯이 팔을 세게 흔드는데 역시 꿈쩍 않지롱.


띠-

띠-

띠---


고대의 재앙이랑 행운의 부적 쓴 시간이 거의 겹치긴 하지만 먼저 변신이 풀린 건 블캣이야. 블캣 변신 풀리자마자 도망가려고 했는데, 촤라락 소리와 함께 변신이 풀리고 드러난 얼굴에 레벅은 놀라서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음.


그리고 잠시 뒤에 그녀도 변신이 풀림.


아드리앙은 붙잡은 마리네뜨 팔만 멀뚱히 쳐다본다. 마리네뜨는 너무 놀라서 딸꾹질까지 나옴. 아니, 대체. 이게 어떻게-. 낄낄거리는 플랙을 티키가 붙잡아 끌고 가고, 남아 있던 두 사람은 되게 뻘쭘해짐. 진짜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리네뜨 얼굴을 보고 아드리앙이 쓰게 웃음.


"역시, 실망했나?"

"어, 어?!"

"아, 혹시 이러면 좋겠다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 이럴 줄이야.


사실 아드리앙도 마리네뜨 못지 않게 당황스러워. 아니 이게 뭔 일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사실 마리네뜨였고 하지만 자기는 마리네뜨를 아까 전에 거절했는데 또 고백했고... 하여간 되게 어질어질한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으며, 마리네뜨가 신음을 흘리니까 그제서야 아드리앙은 마리네뜨 팔을 놓아줌.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자국이 남았어. 그거에 좀 미안해지면서도 아드리앙은 일단 원하는 걸 얻어내야겠다 싶어서 마리네뜨한테 다시 뻘쭘하게 말을 걸어.


"우리, 좀 상황이 이상해진 거 같은데?"


그러면서 아드리앙은 손을 뻗어서 마리네뜨 손을 덥석 잡아(아까는 팔이었지만 이제는 손) 그거에 흠칫하며 뒤로 물러서려는 마리네뜨를 부드럽게 끌어당겨서 품에 안음. 블캣으로 거절당했어도 마리네뜨는 자길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이 모습에선 자기가 강자니까.


막 얼굴 빨개져서 도망가려는 마리네뜨한테 아드리앙이 짓궃게 물음.


"왜 도망가?"

"어, 어, 그게…."


으아악 내가 아드리앙한테 안겨 있다니!! 게다가 백허그도 아니라 정면으로!


하고 막 속으로 패닉하는 마리네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드리앙은 진짜 그제서야 왜 자기가 마리네뜨를 보면서 자꾸 레벅을 떠올렸는지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야. 마리네뜨는 와 진짜 블랙캣이 아드리앙인건 둘째치고 방금 전에 고백했다 차였던 상대하고 이러고 있자니 정말 머리가 팽글팽글 돈다.


근데 생각해보면 자기가 레벅이기 때문에 이러는 건가 싶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괜히 슬퍼져서 아드리앙을 확 밀쳐내고 올려다보는데 그 와중에도 아드리앙이 너무 잘생겨서 순간 홀릴뻔한 자신을 타박함. 그리고 물어. 이건 중요한 문제니까.


"내가 레이디버그라서?"

"어?"

"내가 레이디버그라서, 이러는 거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자기가 질문하면서도 자기가 상처받지만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라.. 잠시 벙쪄있던 아드리앙은 잠깐의 고민 끝에 말해.


"아, 이거 말하기 좀 창피한데."

"?"

"그게…"


머리를 긁적거리던 아드리앙이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전부 털어놔. 레벅인 너를 언제부터 좋아했으며, 결혼식장에서 마리네뜨로서의 너를 봤을 때 황당했던 감정이랑, 묘하게 레벅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것도. 들으면서 괜히 참담해지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덧붙임.


"그런데, 네 대답을 거절할 땐 되게 괴롭더라."

"어…?"

"내가 좋아하는 건 레이디버그인데, 라고 생각했는데도. 사실 레벅인 너한테 고백한 건 그 이유도 있었던 것 같아."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상태보다는, 확실히 결판을 내고 싶었다고나 할까.


라고 말하며 웃는 아드리앙의 표정이 되게 후련해 보여. 그래서 마리네뜨는 더 이상 말을 못 함.


사실 마리네뜨도 아드리앙이랑 지내면서 그가 평소에 보여주던 완벽한 모습만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닫고는 있었거든. 의외로 아침에 약하고, 풀죽어 쓰러질 때도 많고, 막 어쩌다 회식해서 술에 취해 들어올 때는 애교를 부리는데 그게 퍽 귀엽기도 하고, 마냥 상냥한 성격만이 아니라는 것도.


아드리앙이 가진 모든 것들이 단순한 천재성에서 온 게 아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야. 그런 면을 알아서 더 좋아졌다고 생각했었지만 역시 아드리앙=블랙캣 공식은 좀 혼란이 오기 다분했음. 시간이 지나서인지 행동이 좀 순화되긴 했지만.


"마리네뜨."


부름과 동시에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의 손을 붙잡고 손등 위에 입맞춰. 그리고 눈을 찡긋하며 말함.


"마이 레이디."

"아드리앙…"

"네가 레이디버그라 다행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

"너를 마이 레이디라고 부를 수 있어서, 기뻐."


하고 웃는데 그 얼굴이 꽤 장난스러워. 정작 눈빛은 그리 태연하지 못했는데도. 그걸 보면서 마리네뜨는 자기는 결국 아드리앙이 이렇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 그가 블랙캣이든 어쨌든.


"당신을 사랑해요. 레이디."


손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말하는 아드리앙의 미소가 너무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눈부셔서 마리네뜨는 더 이상 말을 못해. 그리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감정을 깨달아.


행복.


아무 말도 못하고 감격해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마리네뜨에게 아드리앙이 살짝 불만스러운 얼굴로 묻습니다.


"그래서, 대답은?"

"아, 아까 들었잖아!"

"좋은 말은 많이 듣는 게 좋다잖아."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글쎄?"


어깨를 으쓱하는 아드리앙의 모습이 뭔가 얄밉지만, 마리네뜨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반한 쪽이 진다는 공식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


"…좋아해!"


두 번은 못 말하겠다, 역시.


막 말하자마자 얼굴 빨개진 마리네뜨를 다시금 끌어안고 입맞추는 아드리앙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The End




+



그리고 아드리앙은 나중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한테 처음으로 몇시간을 바락바락 따졌다고 합니다. 가브리엘은 아드리앙이 이렇게 말이 많은 줄 처음 알았다고 하더군요.




++



결혼생활은 유지하되, 아드리앙은 나중에 마리네뜨한테 다시금 청혼해요. 워낙 급하게 이루어진 결혼이니까 이번에는 정식으로. 반지 새로 맞춰서 프로포즈 거하게 준비합니다. 이 녀석도 부자라 비행선에 I LOVE YOU를 달아서 반짝반짝 띄웁니다.


파리의 모든 여자들은 아주 부러워서 죽죠. 마리네뜨는 블랙캣때 성격은 제발 좀 자중해줬으면 좋겠다고 한숨쉬고, 그래도 좋다고 헤실거리고. 뭐, 그래도 히어로 일은 여전히 계속합니다.


이젠 정말 끝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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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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